<부록 1> 국경國警(국방경비대)이 4.3주동자 측에게 지원한 내용
(문창송씨의「한라산은 알고 있다」에 의하면 김익렬 9연대장이 유격대에 실탄을 제공한 사실이
특이하다)
1.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카빙 총 2정 동 실탄 2,400발 M1총 2정 동 실탄 1,443발
2.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카빙총 실탄 15발
3. 문(문상길)소위 지시에 의하여 9연대 병졸 최(崔)상사 이하 43명이 각각 99식 총 1정(挺)식을 가지고 탄환 14,000발을 트럭에 실어 탈출 (이중 22명이 검거되는 과정에서 많은 총기와 실탄이 압수 또는 분실된 듯)
4. 집계
3. - 탈출병수 = 52명(피검된 22명과 도주한 1명을 포함하면 총 75명이 탈영함)
3. - 무기 총 = 67정(99식 56정, 카빙 3정, M1 8정)
- 탄환 = 3,858발(M1 1,443발, 카빙 2,415발)
<부록 2> 제주 4₩3 관련 주요 인물
1. 김달삼(金達三, 1924~1950)
본명은 이승진(李承晉,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출생,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 대구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였다가 아버지를 따라 도일,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교토 성봉(聖峰)중학교를 거쳐 토요쿄 중앙(中央)대학 1년을 수료했다. 남제주군 대정면 안성리 출신인 남로당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이 사용하던 가명 김달삼을 이어받고(이상길이란 가명도 사용) 그의 딸 강영애와 결혼하였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 때 대구대학교 시체사건(의과 대학생들이 자연사한 시체를 메고 경찰이 쏴 죽인 시체라고 선전하면서 가두 시위한 사건)에 주모자로 깊숙이 개입했고, 조선공산당경북도당대구시당 서부지역의 당세포조직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연말경 귀향하여 대정읍 하모리에 거주하였다. 남로당대정면 조직부장과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임하면서 면 활동과 이념교육에 열중하였다.
그 후 남로당제주도당책과 군사부 책임자로서 4.3을 주도하다가 1948년 8월 2일 제주를 탈출한 후 목포를 경유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소위‘김달삼 해주연설’을 했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피선되었으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1948년 8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헌법위원회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9년 8월 제3병단 단장으로 강동정치학원 졸업생 300명을 이끌고 남파되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제1병단 이호제 오대산지구, 제2병단 이현상 지리산지구, 제3병단 김달삼 태백산지구)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또 그가 일본복지산예비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설 이 있는가 하면 이를 부정하는 설 도 있다. 그러나 9연대장 김익렬이「육사졸업생」저자 장창국에게 전했고, 복지산예비사관학교 동기생인 문학동 전 참전경찰유공자회장에게도 같은 말을 한 사실, 그외「제주민중항쟁Ⅰ」468쪽,「 이제사말햄수다Ⅰ」135쪽 등 여러 곳에서 유사한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혀 허무맹랑한 설도 아닌 것 같다.
문학동의 증언에 의하면 복지산예비사관학교는 1년 과정으로 동기생은 모두 800명이었으며 김익렬과 같이 다녔다. 수용능력 부족으로 전반기 6개월은 소속부대에서 특별 훈련을 받았으며, 2주간 휴가기간이 주어진 다음 학교에 집결하여 후반기 집체교육을 받았다면서 김달삼이가 귀향하였다면 전반기를 마친 후 주어진 휴가 기간일 것이라고 하였다. 김익렬이가 장창국이나 문학동에게 말한 것이 허풍
이라면 유고문 역시 허풍으로 보인다. 북한 평양 신미동 혁명열사 묘역에 있는 김달삼 묘비에는 그의 사진 밑에 ‘김달삼 동지 남조선 혁명가 1926년 5월 10일생 1950년 9월 30일 전사’라고 새겨져 있다.
2. 강문석(姜文錫, 1906~1953)
강문석은 김달삼, 강문도, 아라이(황정荒井), 야마시다(산하山下) 등의 가명을 사용했으며 사위 이승진에게 자신이 중국에서 사용했던 가명 김달삼을 사용토록 물려주었다. 경기고보(현 경기고)를 졸업했으며 1928년 도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및 일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1931년 상해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에 입당, 강소성 법남구(江蘇省 法南區)한인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9년 국내에서 박헌영과 경성 콤그룹의 멤버로 활약, 1941년 두 번째 투옥되었다가 해방 뒷날 청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 산업노동조사소 소장, 10월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및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50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사회부장, 1953년 8월 노동당 중앙위 제3기 제6차 전원회의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북한 상업성 부상을 역임했다는 설도 있으나 6.25휴전 후 박헌영 제거 당시 숙청되었다.
3. 이덕구(李德九, 1920~1949)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 출신, 오사카 일신(日新)상업학교를 거쳐 입명관(立命館)대학에 재학 중 학병으로 입대 일본군 소위로 복무, 해방 후 귀향 조천면 민청 책임자와 조천중학원 역사.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4.3발발 후 3.1지대장으로 입산 활약하다가 김달삼 김성규의 뒤를 이어 제3대 인민유격대사령관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지리산 빨치산과 합류를 기도하던 중 1949년 6월 7일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북한은 그에게 국기훈장 3급을 서훈하였고 1990년 제정된 조국통일상을 추서하였으며 평양 애국열사묘역에 묘비를 세웠다. 조국통일상 추서 자리에는 북송한 그의 조카(친형 이좌구 李佐九의 아들) 등 9명이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4. 김봉현(金奉鉉, 1919~1996)
북제주군 한림면 금악리 출신, 오사카 간사이(關西)대학 법학과를 졸업, 해방 후 귀향하여 로고스(Logos)회 창설지도, 제주제일중학원(오현중 전신) 역사교사, 1947년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민전) 문화부장으로 3.1절 기념투쟁과 3.10총파업 투쟁에 전위적 역할을 하였다. 후에 일본으로 도피, 조총련 오사카지부 서열 4위, 저서로「제주도 역사지」1960,「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김민주와 공편 1963,「 제주도혈(血)의역사」1977 등이 있다.
5. 김민주(金民柱)
북제주군 구좌면 덕천리 출신, 본명은 김태봉이며 김태형(金泰衡), 김용남(金龍南)으로도 부른다. 김민주는 필명이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김봉현과 공편하였다.
하기와라 료(추원료-萩原遼) (하기와라 료(추원료=萩原遼), 1969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赤旗’(적기)기자로 입사하여 1972~1973년간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했고 1988년 퇴임)의 저서「북조선에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1998년 일본 문예춘추사 발행)에는 김민주가 김용남으로 소개되었다. 김용남은 4.3당시 15세 로 조천중학원 스승 이덕구를 따라 입산하여 소년게릴라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우리들의 공화국이고 조국이라고 믿고 공화국의 영광을 위하여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국가보안법과 내란죄 위반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1948년 8월 중순경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 중 6.25 때 남침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면서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하였고 15일간의 형무관 교육을 받아 목포형무소 형무관이 되었다.
한미연합군이 인천상륙 후 지리산으로 피신 빨치산 활동하다가 단양에서 미군에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영천포로수용소에서 4개월간 수용되었는데 1952년 7월 반공포로석방 때 자유의 몸이 되었다. 부산 항만노동자로 종사하다가 1957년 말경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1996년 소송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재류허가를 받고 도오쿄에 거주하면서 재일조선청년동맹에 가입 활동하였으며, 탐라연구회 회장을 역임할 때인 1991년 12월 김태형이란 이름으로 제주도문화상을 받았
다(「제민일보」1991.12.24. 자신의 전력(前歷)이나 사상전향에 대한 해명이 전무했는데 어떻게 제주도문화상을 주고, 받았는지 의문이다)
김민주는 하기와라 료가 평양특파원으로 부임할 때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송선을 탄 동생 김태원(金泰元=김일성대 졸)의 생사 확인을 부탁 받고, 또 하기와라료의 오사카 덴노지(天王寺)고교 야간부 동창이며 친구인 제주 출신 윤원일(尹元一=청진의대 졸)이 북송 후 행적이 끊겨 이들을 수소문하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꼈던 사실이 소개돼 있다. 그 후 김용남은 아사히 신문에 ‘김일성 부자에게 내 아우를 돌려달라’는 글을 실어 북한을 비난한 바 있고 일본인 소천청구(小川晴久), 하기와라 료(추원료=萩原遼)와 함께 ‘북송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한다. 김민주는 2008년 4월 3일 제60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위령제에 참석, 위패 봉안실을 방문하였을 때 자신의 위패(김태봉)가 진열된 것을 발견하고 이의(?)를 제기하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제주도실무위와 중앙4.3특위에서 희생자 심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6. 문상길(文相吉, 1925~1948)
충남(경북 안동?) 태생,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하사로 제주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육사 3기, 국경 제9연대 남로당중앙당 직속 세포책으로 활동하면서 소위로 부임하였다가 중위로 진급하였다. 하수인 손선호 하사를 사주 연대장 이치업 소령의 음식에 독극물을 투입 독살을 시도했으나 1개월 정도 입원치료로 미수에 그쳤다.
4.3당시 유격대장 김달삼, 이덕구와 내통하면서 정보제공, 무기탄약 공급, 탈영병 조장 등은 물론 하수인 손선호 하사, 신상우 일등중사, 배경용 하사 등을 사주하여 1948년 6월 18일 03:15 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사실이 적발되어 동년 9월 23일 위 3인과 함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박진경 대령의 시체를 닦으면서 눈물 흘리며 슬피 울었던 위생담당 하사가 박 대령을 직접 쏜 손선호였다니 그 연극 솜씨가 지나치고 수법이 교활하다.
7. 안세훈(安世勳, 가명 안요겸=要謙, 안요검=安堯儉1893~1953)
북제주군 조천면 조천리 안태환의 차남으로 출생, 한학을 공부하고 조천리 개량 서당 신명사숙 숙장(塾長)으로 재직하며 반(反)일본 반외세 반봉건 교육방침으로 후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6년 간도로 가서 간도간민교육연구회 상무서기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치안유지법위반으로 2년형의 옥고를 치르고 광복 후 조천면 인민위원장, 민전제주도위원장 남로당제주도위원회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4.3발발 후 월북, 8월 해주대회에 참석하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으나 김일성 체제에 불만을 느꼈는지 6.25후 남하,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던 전남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에 내려와 은신하다가 병사하였다. 안세훈은 4.3의 핵심세력으로서 목숨을 걸고 북한을 찾아가 북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내는 영광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월남한 이유는 무엇일까? 꿈에도 그리던 김일성과 북한 공산사회를 직접 체험해보니 기대했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 실망과 자책의 결과인가? 아니면 남로당 숙청을 미리 예견한 행동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선을 넘어 월북했는데, 김일성이 6.25를 저질러놓고 너도 월남하여 빨치산 활동하라고 등 떠민데 대한 분노에서인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8. 오일균(吳一均, 1925~1949)
충북 청원 태생, 1945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61기생으로 입교하였으나 4개월 만에 해방되자 귀국하여 같은 해 12월 미군정청이 개설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찬탁 쪽에 기울어졌으며 육사 생도대장으로 있을 때는 좌경사상에 몰입하였다. 전북 이리에서 국방경비대 제3연대 창설 시 연대 정보과장이 되고 소령 승진 후 진해 제5연대 소속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8년 4월 20일 제주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 소속으로 파견명령을 받고 대대병력과 함께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상적으로 문상길 소위와 연계하면서 암암리에 유격대에 많은 무기와 실탄 등을 지원하였다. 9연대장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 조사과정에서 그의 정체가 탄로나 처형되었다.
<부록 3> 남로당제주도(島)당부 투쟁위원회
위원장 = 안세훈(일명 안요겸,안요검), 조몽구, 김류환, 강규찬, 김용관 순(順)
군사부장(군사위원회위원장, 군책, 유격대총사령관) = 김달삼, 김성규, 이덕구 순
조직부장 = 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순
선전부장 = 김윤환, 김석환 순
보급부장(병참부장) = 김귀환
총무부장 = 이좌구, 김두봉 순
정보부장 = 김태진
청년부장 = 강대석
여성부장 = 고진희(주:강규찬의 처)
농민부장 = 김완배
회계부장 = 현유복(玄有福=경리부장이라 칭하기도 했음. 수형인 명부와 출생지인 조천면 신흥리에서는 현보규=玄寶奎로, 일부는 현복유=玄福裕로 기록됨)
※ 위 주모자 중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고진희는 월북하였고, 김용관, 김성규, 이덕구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조몽구는 고향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서 병사하였다. 나머지 고딕체 14명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주:이좌구는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1980년대말경 고향을 다녀갔다는 설이 있고, 김용관=金龍寬은 김영관=金榮寬이가 맞다함)
〈부록 4〉‘제주4.3사건’ 교과서 수록방안 공청회 토론문
(주최 : 제주도, 2011.6.29.14:00 설문대여성문화센터 4층 공연장)
대한민국재향경우회제주도지부 측 토론자 김 영 중
새뮤얼 스마일스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자신이 우수한 민족의 후손이며 고국의 위대함을 물려받았고 그러한 영광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자각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4.3을 지역사적(地域史的), 민중운동사적(民衆運動史的), 자학사관(自虐史觀)에서 탈피하고, 건국과정에서 발생한 과오를 미화할 필요는 없으나, 세계 13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등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나라이므로 그 건국사도 긍정의 역사로 기록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 없는 자식 없듯이 대한민국 건국 없이 오늘의 우리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및 교육 보조자료에 꼭 포함되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4.3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정부보고서에는 4.3성격이 유보되었기 때문에 정부보고서를 옮겨 써서는 안 됩니다.
박효종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자들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부정적으로 보는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자유와 번영을 가져온 작은 날개 짓으로 보는가 아예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또는 시작부터 잘못된 나라로 보는가, 결국 이들 문제들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좋은 질서로 보는가 나쁜 질서로 보는가에 관한 문제이다”라고 했습니다.
4.3도 이런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위상, 남.북한의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할 문제라고 보면서, 4.3의 성격을,
첫째 남로당 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아 남로당제주도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여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폭동 반란이고,
둘째 진압과정에서 선량하고 무고한 도민들이 너무나 많이 피해를 당한 사건이다 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CNN방송을 통하여 “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이라고 4.3성격을 세계에 천명했습니다. DJ는 절대 보수나 극우가 아닙니다.
당시 남로당대정면당위원장 이운방도 4.3에 대해 “주도자의 사상은 공산주의요, 최종목적은 공산통일조국 건설”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인민군사령관 이덕구의 ‘선전포고’, 읍.면별로 조직한 ‘인민군지원환영회’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4.3의 역사는 당시 살았던 이운방, 김달삼, 이덕구 같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 그때와 한참 거리를 둔 요즘 젊은이들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보다도 4.3이 일어나기 1년 1개월 전, 남로당제주도당이 3.1투쟁을 위하여 2월 16일부터 모두 6차례 야체이카 등에 하달한 지령문과 3.1사건 주동자 김완배로부터 압수한 남로당 강령에는 명백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목적이고, 강력한 공산주의 정부수립이 목적이며, 사회노동당 등 회색분자 소탕, 우익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자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령문에는 1946년 8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선언,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2일째 김일성이 행한 연설문 내용과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가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이는 4.3발발 1년 1개월 전이며, 3.1발포사건 보름 전부터 남로당제주도당의 지향점과 심상치 않은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과 동조세력의 폭발적 확산 동향 및 3.1투쟁 때 전도적으로 51,000~56,000여 명의 군중동원은 당국을 긴장시켰으며 330명의 도내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치안을 감당할 수 없어서 부득이 육지부에서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좋지 않았습니다.
둘째,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을 밝혀야 합니다.
4.3주동자가 직접 작성한「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전남도당 올구 (李)동무는 재차 3월 중순에 내도함과 동시에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와 아울러〔......〕”라고 지령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으며,
3.1투쟁과 4.3주동자인 김봉현이 일본문예지「민도」에 ‘천검산’이란 중앙당 조직지도책이 내려와 제주도당을 직접 지도하고 결정하였다고 썼습니다.
박헌영이 북한에서 지령한 지하선거는 제주도에서도 충실하게 실시되어 김달삼이 52,350명 명부를 가지고 해주에 가서 국기훈장 2급 받고, 우리나라로 치면 초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남로당은 경찰관서 습격, 통신시설 파괴, 정부 및 우익인사 암살 등을 내용으로 하는 2.7구국투쟁지령이 있었고 그 후 이를 취소하라는 지령이 없었으니 2.7투쟁 연장선상에서 4.3이 발발한 것이므로 중앙당이나 전남도당 지령이 없었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셋째, 남로당 세력과 4.3주동세력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1945년 10월 공산당제주도당은 당원 100명 미만으로 출발하여 3.1투쟁 당시 1천~3천 명, 4.3 당시 5천~6천 명, 그 3개월 후인 초여름 경에는 “족히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는 것이 ‘제민일보4.3취재반’이 조사 결과이니 맞다고봅니다. 「( 4.3은말한다」1권537쪽, 1994.3.10. 전예원)
그들 스스로는 5만 당원확보를 선전했고, 그 외로 산하에 민주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농민위원회 회원 수도 막강하였으며 미군정은 이를 합쳐 6만~7만 명으로 본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는 선동과 기망과 강요에 의한 숫자로 보여 신빙성에 의문이 갑니다. 이들 중 4.3에 주도적 가담 세력은 김봉현이 주장대로 3,000명이 맞다고 봅니다.
넷째, 인명 피해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정부보고서는 25,000~30,000명, 심지어 제주도교육청 교육 자료에는 65,000명으로 과장되었으나 15,000명이라는 제 주장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중 무고하게 희생된 선량한 사람은 12,000명이라고 보며 이들에게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픔을 같이하고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다섯째, 북한의 선(先)단정(單政)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흔히들, 우리가 먼저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이 뒤늦게 정부를 수립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는 이면사를 모르는 소이입니다. 조지 맥큔과 아더 그레이는 “미국은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코리아정부를 세우려고 결심했고, 소련은 똑같이 소비에트지향적인 코리아국가를 마련하려고 결심했다”고 했고, 김학준 박사는 “북한이 그 길을 남한보다 훨씬 앞서나갔다”고 지적했습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 비밀지령, 그해 연말 쉬킨 보고서, 스티코프와 레베데프 비망록을 참고하고, 1945년 10월 8~10일 북조선5도인민위원회와 북조선제행정국을 두었습니다. 이를 스칼라피노 교수는 태아적 정부라 했습니다만, 1946년 2월 8일 결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정부로서 정부가 아니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토지개혁 등 소위 민주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1947년 2월 17~20일 북조선 최고기관이며 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명실상부한 북한 단정(單政)으로서 남한보다 1년 6개월 앞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은 먼저 출범한 북한 단정을 찬양만 하고, 남한 단정은 물고 늘어졌습니다. 유엔승인 하에 하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소련식 공산통일만 통일이라는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오늘과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게 아니라 남한은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북한은 자유민주주의를 배척하여 남.북 공히 자신의 이념을 선택하려는 격렬한 체제선택, 생사를 건 정치투쟁의 혼란기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4.3주도자는 남한에 있으면서 70년 만에 끝장 난 공산주의와 북한노선을 따랐다는데서 불행은 시작되었으며, 그 준비는 우익보다 한참 앞섰고, 그 세력은 한참 우위에 있다는 자만에서 국내외 정세를 오판하고 저지른 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은, 185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이 기습 남침한 참혹한 6.25전쟁을 극복하였으며, 경제는 많은 어려움도 있지만 2만$를 넘어섰고, 최근 K-POP은 파리에서 유럽의 젊은이들을 뒤흔들어 놓았듯 대단한 긍지를 가져도 좋은 나라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체제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건국한 것은 백번 옳은 선택입니다. 반면 지금 북한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거나 왜곡 폄하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고 국민 된 도리도 아닙니다.
4.3주체인 남로당의 강령 구호 전단 노래 깃발 행위는 북조선노동당 노선과 완전 일치한 바, 엄중한 역사적 질책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 뒤에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는 그것대로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이 증명하듯, 북한의 체제와 위상에 대한 국제적 신뢰와 북한 주민의 인권과 삶의 질이 대한민국보다 좋지 않은 한, 4.3의 정당성 주장은 공허한 것입니다. 인민항쟁이나 봉기논리는 북한의 4.3시각과 동일하여 이를 주장하는 것은 무비판적으로 북한을 추종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끝으로 화해와 상생입니다.
4.3발발 63년이 지났고 이제 할 일이 산적한 우리는 화해하고 상생하라는 시대적 소명이 있다하겠습니다. 남북통일을 생각하고 독일통일을 참고하며, 관용과 이해로 너의 잘못도 있지만 나의 탓도 있다는 자세로 마주앉아 쉬운 것부터 해결하고 새로운 쟁점을 만들지 않으면서 추진하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가장 경계할 일은 업적주의, 조급성, 억지, 편향, 개인적 감정에 매몰되거나 선명성 경쟁 또는 정치적, 사법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너만 잘못했다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화해와 상생은 요원할 것이며 갈등은 증폭되거나 잠복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던 잘못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과오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손잡고 출발해야 화해와 상생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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