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이란? 해석학은 해석하고 text 뒤에 있는 의미를 시대의 의미로 유추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해석되기 위해 태어났다 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처음 받아 보았던 때부터 또는 성서를 처음 썼던 때부터 해석이 되어졌기 때문이다. 성서자체가 해석학의 과정을 거쳐 말들어 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을 해보면, 성서 해석은 그때 거기의 상황을 오늘 여기로 소급을 시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situation in life 즉 오늘의 상황이 없이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법, 인간의 삶과 무관한 말씀을 있을 수도, 되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상황 등의 반영 없이 계시되어지지 않았다. 이 말을 종합하여 보면 성경 해석은 독자로 하여금 본문의 의도를 확인하고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은 성경 저자와 현대의 독자와의 간격을 좁혀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해석의 방법에 따라서 그 본문의 의미 파악과 현재의 독자에게 다가오는 감동이 다를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의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의 얼굴모양이 다르듯 가치관이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석의 방향과 관점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달라지며, 현실 적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의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본문이 현재의 삶에 의미 있는 해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성경 본문 해석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종합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통하여 본문의 의미를 찾고 현재의 삶에 적용하여야 한다. 삶에 적용을 위한 의미 있는 해석을 하기 위해서 해석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행해야한다. 즉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하거나 너무 현실성이 없는 추상인 것을 배제하여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우리의 일상의 삶과 관계가 없는 복음은 무의미 한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성서해석을 해야하는 당위를 갖는 것일까?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New Being)를 발견할 수가 있다. "새로운 존재란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을 극복한, 실존의 조건들 아래 있는 본질적 존재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들'이라 부르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은 똑같은 생각을 나타낸다. '안'은 참여의 전치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의 새로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본질이란 어떤 사물을 그 사물 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로부터 벗어나(ex) 있다. 본질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존적 조건들 아래에 있으면서도 본질과 실존 사이의 균열을 극복한 존재, 이것이 새로운 존재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에 따르면, 이 새로운 존재를 분명히 보여 준 이는 나사렛 예수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로 불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분명해진 새로운 존재를 바로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상황은 실존의 창조적 해석, 즉 여러 종류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조건들 아래서 모든 역사적 시기 안에서 수행되는 해석이다. 확실히 이 상황은 이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신학이 응답해야 할 상황은 어느 특정한 시기 안에서 인간이 내리는 창조적 자기 해석의 총체이다." 상황이란 "어떤 해석을 내리게 되는 심리적, 사회적 요인을 넘어 그 해석을 표현하게 해 주는 과학적, 예술적, 정치·경제적, 윤리적 형식들"을 말한다. 신학은 이런 형식들로만 표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은 신학 성립의 필요 조건이며, 신학의 구성 요소 그 자체가 된다. 그런데 그가 지적하듯이, 특별히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이 상황을 보지 못하고 특정 교리, 성서 자체가 불변의 진리이며, 그리스도교가 시대를 초월하여 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역사의 산물을 영원한 진리와 단순 동일시해 버리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신학이라면 영원한 진리를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해석해 내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상황을 배제한, 진리의 일방적인 선포란 불가능하다. 그 어떤 신학도 그 시대에서 통용되는 개념적 도구, 즉 언어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산출된 것이고, 모든 상황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인간 상황을 구성하고 또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요소, 다시 말해 인간의 '창조적 자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지반이면서, 동시에 이를 위한 매개체이다. 성서 역시 이런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의 상황과 계시적 사실들이 만나 이루어진 언어적 계시 사건이다. 계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면 계시란 있을 수 없으므로, 계시의 수용 행위는 사건 그 자체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아무리 성서의 말을 문자 그대로 되풀이한다고 해도, 성서가 처한 당시의 개념적 상황을 피할 수 없고, 되풀이하는 현 상황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은 언제나 그리스도교적 진리와 상황을 서로 오가며 관련시켜야 하는 것이다. 둘 중의 어느 하나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상황 자체가 인간의 존재론적인 물음에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는 상황 속에서 알려지고 상황은 영원한 진리를 담는다. 유한하고 무상하고 상대적인 관심들이 궁극적인 관심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성서는 계시적 사건에 대한 원초적 증언이며 교리, 신학 역시 영원한 진리, 즉 새로운 존재를 가리키는 체계적 증언들이다. 무슨 해석방법이 있을까?
1. 역사 비평적 해석 성서 기자들은 역사에 매우 민감했으며, 성서 자체를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광범위한 역사로 간주했다. 물론 성서는 역사를 위해 기록된 역사가 아니며, 오늘날의 역사서에서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역사도 아니다. 혹자는 성서 저자들이 역사라기 보다는 당대의 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저자들이 전달하고자 하던 신학적인 메시지들은 역사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철저히 얽혀 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역사와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말하자면 성서는 역사로서 우리와 대면하고 있으며, 무시하기 어려운 역사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햇수를 더해 갈수록 성서학이 역사적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역사비평이란 어떤 설화(narrative)에 대한 연구로서, 문제가 되는 구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언급되고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역사적 연구는 어떤 사화가 증언하고있는 사건들의 본질을 좀더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명료하지 않은 사화를 조명해 주기 위해 행해진다. 이 문제에 관한 유용한 연구에서 래드(R.E.Ladd)는 성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진술들의 의미가 당시의 역사적 문맥 안에 놓여질 때 비로소 현대의 독자들에게 잘 이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요한 복음4,6에서 예수는 '6시'에 수가성 근처의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만약 이 시간 표기가 "역사적"(즉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면, 틀림없이 그것이 처음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되었고, 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어떤 설명이 없다면,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단지 공허한 시간 표기일 뿐이다. 유대인의 연대기를 알게 되면, 현대의 시간으로 그때가 아마 정오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간 표기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예수가 여행 중에 피곤을 느끼고, 갈증이 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역사비평의 두 번째 목적은 역사적 사화가 의미하는 바의 역사적 정확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확실히 역사학을 성서에 적용시키는 문제들이다. 이 방법은 주어진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사화와 그것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을 조명할 수 있는 다른 정보자료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신약성서의 역사적 문제들 (병행 사화들 간의 모순들, 성서 외의 자료와의 비교, 역사적 불개연성, 초자연적인 사건들, 초대교회의 자료 창작과 수정 등)
2. 자료비평 누가복음 1장1절을 보면 저자가 다른 자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약성서는 자료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자료를 가지고 저자들이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각각의 저자들이 일치하는 부분을 보게 돈다. 이러한 일치는 저자들 간에 서로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공통자료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 비평은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어떠한 편집 경향들을 가지고 기술했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3. 양식비평 양식비평은 '통합적 패턴에 대한 분석'으로 설명될 수 있다. '통합적'이라는 말은 양식비평이 본문의 언어와 내용 그리고 그 문맥의 기능을 포함한 본문의 모든 측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또한 "패턴"이라는 말은 양식비평이 단순히 한 번 나타난 현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혹은 현재의 다른 본문들과 공유하거나 그것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특징들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주는 말이다. 즉, 공통의 특징을 갖는 본문들은 어떤 유형이나 장르로 규칙적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양식비평이란 일상생활에서 또는 문서적인 진술들에서 서술방식의 확고한 양식들을 발견하고 정의하며 끝으로 그 언어적 경향과 생의 자리를 규정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양식들(범례, 이야기, 전설, 신화, 권면 등) 4. 편집비평 편집비평은 신약성경 연구역사에 갑자기 등장한 독립된 연구방법이 아니다. 편집비평의 뿌리는 양식비평과 자료비평에서 찾을 수 있다. 양식비평은 성서가 제시하는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그 배후로 관심을 돌려 그것이 성서로 편집되기 이전에 자료 형태로 있을 때 지니고 있던 본래의 사실을 밝혀 내려고 시도했다. 반면에 편집비평은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 그 자체를 그대로 해석해 내려는 노력이다. 그러기 위해서 편집비평은 성서 기자가 어떤 자료를 사용하여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지를 추적한다. 그래서 편집비평은 먼저 양식사 연구의 도움을 받아 성서 본문 중에서 자료에 속하는 것과 저자에게 속하는 것을 분류해 낸다. 그런 다음 저자의 편집 동기, 그의 신학이나 신앙, 그가 속해있는 교회의 교리 등을 연구하게 된다. 그들은 각각의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초대교회 안에서 구전으로 회람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또한 그들은 초대교회가 예배와 교리교육과 기독교 신앙의 변호를 위해서 생겨난 그런 필요들을 충족 시켜주는 이야기들만을 받아들였다고 가정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신앙이 이러한 복음서 단위들(gospel units)로 표현된 것으로 보게 되어진 것이다. 양식비평연구의 결과로 편집비평은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1950년대에 편집비평은 양식비평의 하부분과(subdiscipline)로 태어난 것이다. 이렇듯 편집비평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개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편집비평이 하나의 역사적 분과로서 자료비평과 양식비평으로부터 서로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편집비평이 그것의 기초로서 이전의 비평들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또 편집비평은 성서의 고대 자료들이 현재의 완성된 본문 형태로 수집되고, 교정되고, 편집되는 과정에 대한 단계적인 연구와 아울러 각 시대마다 편집에 관여한 자들과 특히 최종 편집자의 의도와 특별한 관심사를 연구하는 성서 해석방법이다.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의 차이점은 첫째는 복음서 기자들에 대한 이해의 차이다. 양식비평은 기자들을 단순한 수집가를 평가 절하한다. 그러나 편집비평은 기자들을 그들 나름대로 신학을 가지고 복음서를 편집한 저자로 평가한다. 둘째는 관심의 대상이다. 양식비평은 복음서를 형성하고 있는 전승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분류한 다음 그 작은 이야기가 발생한 과정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에 편집비평은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서 된 큰 이야기 즉 복음서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것은 작은 이야기(단위)들을 모아서 큰 이야기를 만든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다. 셋째는 기자들의 노력에 대한 평가다. 양식비평은 기자들이 전승자료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형시킨 노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편집비평은 기자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들의 편집 활동 속에 들어 있는 신학적 목적을 파악하려고 한다 ★편집비평의 대표(귄터보른캄의 「폭풍을 잠잠케 한 마태복음 기사」, 한스 콘첼만은 「시간의 중심」이라는 책에서 누가의 신학사상을 발표(세개의 시간으로 봄),) 5. 전승비평 전승비평은 직접적인 문학적 의존성이 없는 자료의 발전과정에도 관심을 둔다. 편집비평과 전승비평의 관계가 밀접하고, 양식비평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이후의 교회들이 복음서 전승들 안에서 창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그러한 초대교회 간의 관점상의 차이들이 탐지되자마자 여러 가지 자료들과 상황들이 각각 독특한 개념들과 독특한 전승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종교사적 비교연구가 이런 목적을 위해 적용되자마자, 실제로 양식비평은 전승비평이 되었다. ★전승의 형태(유대전승, 원시공동체의 전승 케리그마적 전승, 교회전승, 윤리적 전승, 목회 서신 안에서의 전승, 예수의 관한 전승, 수난설화, 예수의 연설 전승, 설화전승 등) 6. 정경비평 정경비평은 성서해석 방법론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자료비평과 양식비평 그리고 편집비평이 성서 본문의 최종 형태 이전의 발전 단계들에 초점을 모으고 있지만 정경비평은 본문의 최종 양식을 받아들인 그 본문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약과 구약을 따로 구분치 않고 하나로 놓고 비평을 한다. 7. 문학비평 문학비평이란 가장 넓은 의미는 문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한 문학 작품을 이해하려면 보다 큰 틀 안에 놓여져야 되고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문학연구는 비교 연구법, 그리고 문학 작품에 대한 직관과 반성적 연구를 구별하는 등 연구 방법을 사용했으며 성서 연구도 이 연구 방법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한 작품의 시대나 저자의 생애에 관련시켜 해석하며 사회적인 환경과 시대를 관찰하며 성서의 보다 나은 이해를 얻기 위함이다. 8. 설화 비평 역사적 비평에 한계를 느낀 학자들은 성서의 마지막 텍스트의 의미와 뜻을 문학적인 분석에 의해 이해하려 하였기에 그들의 관심은 텍스트가 어떻게 마지막까지 전승해 왔는지 또는 마지막 완성된 텍스트의 뜻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중점을 두었다. 설화비평은 마지막 확정된 경전만을 다룬다. 즉 설화비평은 역사비평이 중시하던 전승이나 역사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확정된 성서 자체에서 시작한다. 두 번째로 설화비평은 설화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통합적이고 전체적으로 보며 접근한다. 마지막으로 설화비평은 문학이론에 근거하여 분석한다. 설화비평은 현재의 본문 즉 최종적인 형태의 본문을 그 자체의 이야기 세계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본문의 자료와 편집역사, 본문의 배경과 청중 그리고 저자나 편집자의 의도를 재구성함으로써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설화비평은 온전히 복음서 전체를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읽음으로, 복음서를 예수에 관한 다양한 자료집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 읽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설화비평은 현재의 본문을 있는 그대로 연구함으로 본문을 분해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9. 그 밖의 비평은 수사학을 통한 해석과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 있다. 참고문헌 ◎하워드 마샬/이승호, 박영호 공역 「신약 해석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루이 벌코프(L. Berkhof)/윤종호, 송종섭 공역 「성경해석학」, (개혁주의 신행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