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데카르트 그리고 믿음의 근원적 방법
내가 왜 데카르트의 철학방법을 중시하는가? 하는 것은 신학의 방법의 궁극이 데카르트의 방법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신앙의 방법이기도 하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대한 근원적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즉,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또는 데카르트식 회의(Cartesian skepticism)는 르네 데카르트의 저술 및 인식론과 관련된 회의론의 일종이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믿음들 중 무엇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여 거기에 대한 구조적 과정으로서 방법론적 회의를 고안해냈다.
방법론적 회의는 근원적(근본적) 회의와 다르다.
근원적 회의는 순수한 지식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의문시하지만, 방법론적 회의는 의문 여지가 없는 참된 지식의 존재를 상정하며 그것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능한다. 과학혁명으로 인해 기존의 천주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무너지는 아노미 시대 모든 게 결국 의심의 대상이고 인간은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비관적 회의(피론주의)가 만연했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고안한 배경에는 이러한 비관적 회의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믿음, 사상, 사고, 물질을 회의와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기 앞에 사물이 있다 하더라도 감각은 불완전하므로 그게 진짜 거기에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 자신의 육신이 존재하는지도 내가 꿈을 꾸거나 환각에 빠졌을 수 있으므로(장자의 호접몽처럼) 의심할 수 있다. 수학 명제 같은 보편적 진리도 마귀의 꾀임에 빠진 결과일 수 있으므로 의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이것이 그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 명제이다.
"나"는 의심하는 존재이므로 불완전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라면 참과 거짓의 여부에 대해 전지할 테니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완전의 개념은 "완전"이 먼저 존재해야 그것의 하자로서 존재할 수 있기에 불완전한 "나"와는 구분되는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 "완전한 외부 존재"가 신이라고 했으며 이것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므로 선한 존재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다면 신은 기만하는 자이며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 정신이 명확하고 명징하게 인식한 것에 대해 신이 우리를 속이거나 기만할 리 없다.” 참된 지식의 존재 가능성은 필연적인 신의 존재에 의해 뒷받침되고, 비관적 회의는 반박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데카르트 처럼,"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내 자신이 불안전한 존재가 된다."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심을 받아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고 존재하는 나 자신은 결코 의심의 대상이 아니고 필연 중의 필연적 존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 필연의 확신이다. 신은 그러므로 선하시고 선하신 존재는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낙원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신다고 하는 말씀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믿는 믿음과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참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참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신앙심) 실천하는 것은 진리이다.
만일 신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니라면, 신은 불완전하시고 따라서 우리도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누가 나를 불완전하고 비진리적이고 비지식인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아노미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완전한 인간이기를 바라고 또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은 참이고 나는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동네방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외쳐보라 나는 비진리의 속성이고 나는 불완전한 몸뚱이를 가진 헛것이라고 외칠 자 누가 있는가?????
그래서 신이 존재증명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계심을 찾고 거기서 참된 진리가 나오는 것임을 굳게 믿는 바이다.
그렇게 믿는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고 거기서 확신을 찾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찾아가는 것이 오늘 내가 모든 신앙인에게 널리 구하고자 하는 신존재의 완전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더욱 굳게 믿는 바이다.
- 이덕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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