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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 -Q&A

아우슈비츠

by 이덕휴-dhleepaul 2020. 1. 5.

아우슈비츠

최근 수정 시각:

파일:attachment/Selection_Birkenau_ramp.jpg
비르케나우(제2 아우슈비츠) 역에 도착한 유대인들.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
한국어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1]
영어
Auschwitz Birkenau[2]
프랑스어
Auschwitz Birkenau[3]
국가·위치
폴란드 마워폴스카 주 오시비엥침
등재유형
등재연도
등재기준
(vi)[4]
지정번호
파일:Auschwitz_Resistance_280.jpg
화장장에서 시신을 불태워 처리하는 모습.[5]
폴란드어: Auschwitz-Birkenau,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KL Auschwitz(Stammlager), KL Birkenau (Auschwitz II) i KL Mniwitz(Auschwitz III))
독일어: Das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KZ Auschwitz, Auschwitz), K.L. Auschwitz
1. 개요2. 건설과 확장3. 구조
3.1. 기차역3.2. 정문3.3. 가스실3.4. 수용시설
4. 수용대상
4.1. 존더코만도4.2. 식사와 보급품4.3. 앞잡이
5. 폐쇄와 해방
5.1. 희생자 수
6. 잊혀진 영웅7. 탈출8. 운영 당시 촬영된 사진들
8.1. 아우슈비츠 앨범8.2. 존더코만도 사진 (Sonderkommando photographs)8.3. 카를 회커 앨범 (Höcker Album)
9. 관람팁10. 기타11. 관련 항목
11.1.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목록11.2. 나치 독일의 주요 강제수용소 목록11.3. 그 외

1. 개요[편집]

나치 독일의 노동수용소이자 절멸수용소. 헤움노 수용소 및 라인하르트 작전 절멸수용소들과 함께 유대인 대학살을 수행했던 핵심 시설 중 하나이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인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위치해 있다.[6][7]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네스코가 등재한 정식 명칭은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 즉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브제진카(Oświęcim-Brzezinka)) 나치 독일 강제 말살 수용소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이트 참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는 주요 사건,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및 문학 작품 등과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한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다.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세운 수많은 절멸수용소 중 하나이지만[8], 규모가 큰 데다 무엇보다 증거가 되는 구조물이 상당부분 남았기 때문에 독보적으로 유명하여 절멸수용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보단 '나치의 절멸수용소'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인다. 아우슈비츠가 아닌 다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거나 작품 속 배경이 아우슈비츠인지 확실하지 않은 작품들도 종종 아우슈비츠가 배경이라고 설명되는 이유다. 90만명이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60만명이 학살당한 베우제츠[9] 아우슈비츠에서의 희생자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이 절멸수용소들은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인 1943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 수용소들에 관한 증거를 완전히 인멸했고, 따라서 구조물이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 수용소는 그 악명이 아우슈비츠보단 덜 알려져 있다.

절멸수용소는 노동수용소나 강제수용소와는 달라서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절멸수용소 역시 넓게는 강제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또는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며 행정적으로도 이들 절멸수용소와 기타 강제수용소를 구분했다. 또한 다른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필사적으로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절멸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 기밀로 다뤘고 적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절멸수용소에선 '분류작업'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하더라도 소수만 노동가능인원으로 선발하던 곳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률이 85%에 이르렀기 때문에 절멸수용소에 훨씬 가깝다. 분류작업이 아예 없던 소비보르의 사망률은 99.98%, 베우제츠의 경우 99.989%, 트레블링카의 경우 99.993%, 헤움노의 경우 99.996%였다. 절멸수용소가 아닌 노동/강제수용소의 사망률은 수용소마다 크게 달라서 15%(작센하우젠) ~ 59%(슈투트호프)였고, '노동을 통한 절멸'을 시행하던 곳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정치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자', 피지배 지역의 엘리트들, 전쟁포로 등도 주요 수감자였다.

참고로 말라 비틀어진 유대인의 시체가 가득 쌓인 수용소의 전경을 촬영한 비디오[10]는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보여줄 때 많이 활용되는 시각자료다. 하지만 이 비디오들은 거의 전부 절멸수용소가 아닌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 시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기아와 질병으로 결국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시체가 쌓인 이유는 전쟁 막바지까지 운영되던 노동수용소가 미처 시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용소보다 희생자 수가 월등히 많았던 절멸수용소들은 홀로코스트의 뼈대를 이루었음에도 나치가 증거를 집중적으로 파기한 탓에 남아있는 시각 자료가 거의 없다. 절멸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는 단 한 가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존더코만도가 극비리에 촬영한 나체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찍은 4장의 사진이 유일하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은 노동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보다는, 잡힌 직후 집단 총살을 당하거나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직후 가스로 살해되고 시신은 불태워져 그 재가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끔찍함을 시각자료 없이 상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2. 건설과 확장[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Auschwitz_and_environs%2C_1944.jpg
아우슈비츠 지도 노란색 부분이 수용소 부지, 보라색이 IG 파르벤 공장과 SS기지다.
아우슈비츠는 처음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워지진 않았다. 1939년 폴란드 침공 후, 나치의 첫 목표는 폴란드 지식인의 제거였고 이에 따라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1940년 5월 세워졌다. 초기 이 수용소는 노동수용소의 성격을 띠었고 다른 노동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무작위 처형이 자주 일어났지만 아직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뒤 엄청난 수의 소련군 포로를 잡은 나치는 아우슈비츠에도 소련군 포로를 이송했고 밀려드는 소련군 포로를 위해 '자리를 만들 목적으로' 1941년 9월 첫 대량학살이 저질러졌다. 이때 수용소는 '실험'으로 소련군 포로 650명과 250명의 폴란드인을 수용소 지하의 블록 11[11]에 모아 놓은 뒤, 치클론 B를 투입했는데,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치클론 B를 이용해 제소자들을 학살했다. 나치는 1941년 10월 소련군 포로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1 수용소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제 2수용소인 거대한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세웠는데, 공사에 동원된 소련군 포로들은 식량이고 보급품이고 모두 모자라서 굶어죽는 건 다반사고 인육으로 생존해야 할 정도로 처절한 상황이었다. 결국 41년부터 42년까지 비르케나우를 짓는 동안 1만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는 겨우 수백명이 살아남았다.

파일:odilo globocnik.jpg
↑(폴란드 총독부 루블린의 SS경찰 사령관이었던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 친위중장(Gruppenführer. 집단지도자).[12] 보통 힘러가 지어준 지구라는 뜻의 '글로부스'(Glob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1941년 10월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소장(Brigadeführer. 여단지도자)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수장으로 있는 폴란드 총독령 루블린의 SS경찰 본부에 폴란드 유대인의 절멸을 구두로 지시했다. 이에 따라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이 시행되어 폴란드 각지에 5개의 절멸수용소가 새로 생겼다. 1942년 1월, 체코 총독이자 전 국가보안본부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 "절멸(Vernichtung)''로 결정되면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도 절멸수용소로 개조되었고 1942년 초반부터 1945년 1월 소련군에 해방되기 불과 며칠 전까지 학살이 자행되었다. 다른 절멸수용소들이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인 1943년 말, 라인하르트 작전이 취소되자마자 폐쇄된 것과는 달랐다.

전쟁이 지속되자 이게파르벤사는 이곳에 화학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가 건설된다. 이게파르벤은 독일의 전쟁수행을 적극 도왔던 전범기업이다. 아스피린의 제조사로 유명한 바이엘과 BASF, 아그파, 구 훽스트[13]가 이게파르벤을 구성했던 회사들인데 2차대전 이후로도 크게 단죄받지 않고 그대로 전후복구의 주역이 되었다. 다만 강제노역 배상기금에 참여하여 간접적으로 어두운 과거를 인정한 바 있다.

3. 구조[편집]

수용소마다 수감인원과 구조가 조금씩 달랐다. 우리가 잘 아는 살인공장은 제2수용소(비르케나우)로, 이곳은 여성과 노인 등 노동능력이 떨어져 곧 제거될 인원으로 충당되었고, 후술할 모든 희생자의 절반 이상을 기차역이 있는 여기서 죽였기 때문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시체처리실이 가장 컸다. 상대적으로 노동능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1, 3수용소에서 수용 후 강제노역을 통해서 서서히 말려 죽여갔다. 물론 제1수용소에도 가스실은 있었다.

화학공장이라 유독 화학품에 대한 위험이 높았으나 여기에 대한 안전장치는 전무해서, 노출된 많은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럭저럭 생산이 돌아가던 소련의 굴라그와는 달리, 노동 의욕이 매우 낮아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수용소 건립 초기에는 친위대의 각 사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직접 교도관 등의 역할을 위해 근무했으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젊은 장병들의 숫자가 부족해지자 이들은 대부분 일선으로 보내지고 독일 국방군 육군공군에서 주로 3~50대의 중장년층 예비역들이나 국민척탄병들을 받아와 투입했다.

3.1. 기차역[편집]

나치 독일 점령지와 추축국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들은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차역으로 모두 모여서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곧이어 군의관이 약식으로 성인 남녀 중 노동 가능/불가능자를 나눈다.

<운명>에서 서술된 부분을 보면,
"수감자들이 몰려들어 나이를 묻자, 우리는 각자 나이에 따라 14살, 13살 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안 된다는 손짓을 하며 저마다 "15살" 이라고 토를 달았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될 대로 돼라…' 하며 "좋아요, 그럼 난 이제 15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의사 앞에 나갔을 때, 몇 살이냐고 묻자 "15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말에 의사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모스코비치에 이르렀을 때, 그는 "15살입니다. 일할 겁니다." 하고 계속 반복했으나 큼직한 손이 그를 다른 줄로 끌어냈다. (중략) 이후 쾨베시와 동료들은 다시는 모스코비치를 보지 못했다. 가스실로 끌려간 것이다.

자전 소설 <나이트(night)>로 아우슈비츠 학살을 고발,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 위젤은 이렇게 증언했다.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자 수감자가 다가와서 몇살이냐고 물었다. 내가 열다섯이라고 하자 '멍청아, 너는 열여덟 살이야'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십이라고 하자 '당신 나이는 사십이야'라고 했다"고 고백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으면 입소 단계에서 곧장 '선별'돼 '굴뚝'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나눌 때 구분 기준은 지멋대로라 수용소의 남은 자리에 따라, 가끔은 정리하는 놈의 기분에 따라서 제멋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분류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수용소에 남는 자리가 없으니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분류 작업은 SS 군의관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분류 작업은 Sonderkommando(존더코만도. 특수직무반이라는 뜻)라 불리는 남성 유대인 수감자들이 담당했다.

이렇게 노동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 임산부, 그리고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이 불가능한 성인들은 정리 후 즉시 가스실로 직행하게 된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등록되지 않은 희생자수를 집계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차역에서 어린이 몇 명을 데려가 특별대우해주는 SS가 1명 있었는데, 다른 수용인들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SS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던 요제프 멩겔레 박사로, 이렇게 선별된 '멩겔레의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체실험으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wagner.wpengine.netdna-cdn.com/Auschwitz-tattoo.jpg
이 분류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등록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수감자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나마 찍던 사진도 초반에만 찍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면 얼굴이 변형되어 사진으로 신분 확인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개인 수감번호를 부여하는데, 대부분의 유대인 수용소를 포함한 수용소는 수감번호는 옷에 새겨넣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수감자의 왼팔뚝에 숫자 문신을 새기게끔 했다.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새 수감자와 아픈 자, 죽은 자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1942년에 시범 도입되었다.그리고 다음해인 1943년에는 도입 이전 수감된 인원과 여성 수감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일련번호 문신을 부여했다. 유대인의 경우 일련번호 아래 역삼각 도형이 추가로 새겨졌다. 다만 수용자들은 이 번호를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 카포나 SS 대원들에게 번호를 불리면 곧 죽는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3.2. 정문[편집]

파일:attachment/aus-6.jpg
Arbeit macht Frei - 제1아우슈비츠 정문의 표어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Works sets You Free 뜻 출처[14])

제1수용소 입구의 유명한 표어인 '노동이 자유를 가져온다(Arbeit macht Frei)', 직역하면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또는 '노동을 자유롭게 하리라' 는 수용소장 회스 중령의 좌우명이었다. 수감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기는커녕 강제노동을 하다가 허약해지면 가스실에서 학살당하고 시신은 화장터에서 소각처리되었지만 말이다. 정문을 자세히 보면 ARBEIT(노동) 중 유독 B가 이상하게 거꾸로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이 표어를 만들었던 포로 노동자들의 최대한의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http://70.auschwitz.org/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212&Itemid=179&lang=en.

원래 이 말 자체는 근대 독일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평범한 격언이였다. 1840년대에 독일 기독교계에서 조금씩 쓰이기 시작했다가 1873년에 로렌츠 디펜바흐라는 학자가 노름꾼이 노동의 참된 가치를 안다는 내용의 소설의 제목으로 쓰면서 독일 전역에서 유행, 1차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공사업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대중화된 격언이였다. 하지만 골수 나치인 회스 중령의 아이디어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나치 강제수용소의 정문에 이 문구가 붙여지면서, 이 문구는 독일에서는 금기시된다. 실제로, 2008년에 독일에서 방송 도중 한 여성 아나운서가 시청자에게 이 말을 했다가 # 방송이 바로 중지되고 아나운서는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

2009년에는 저 문을 고물상에 팔겠다고 한밤중에 전부 떼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로 표어 부분은 레플리카로 교체했다고 한다.

3.3. 가스실[편집]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 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 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 치클론 B를 이용한 처형 실험 직후 회스 중령의 고백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uschwitz_I_death_block_11_04.jpg
아우슈비츠 11번 구역 사진

최초의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 살해도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는데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치클론 B를 투약했다.(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었고 나치 친위대(슈츠슈타펠)은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값에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15] 이후 실험을 했던 11번 구역은 몇 가지 개조를 거친 뒤 가스실로 사용했지만, 규모가 작아서 대량학살을 원했던 슈츠슈타펠은 1942년부터 비르케나우에 빨간 집이라 불리는 벙커 1과 하얀 집으로 불리던 벙커 2에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에 슈츠슈타펠은 기존에 있던 2번 화장장(Crematorium 2)를 개조해서 가스실로 활용했고 단 반 년만에 비슷한 구조의 가스실을 3개 더 만들어 이곳에서 대량학살을 벌였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고 지하에는 샤워실처럼 꾸며진 가스실이 있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치와 SS는 철저할 정도로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했는데 수감자들의 죄수복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죄수복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신규 입소자에게 지급되었다. 배기가스로 죽이던 처음에는 일일히 수용소 기간병들이나 카포들이 옷을 벗겼지만, 알다시피 이건 대단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그래서 나치들은 다음번에는 강제로 옷을 벗긴 뒤 가스실에 집어 넣어버렸는데, 나중에는 피해자들이 스스로 죄수복을 벗고 잘 개켜서 한 곳에 모아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일사천리로 학살작업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주 악마적인 창의력을 동원해 위와 같은 탈의실로 위장된 학살준비실를 건설한다. 가끔 눈치빠른 희생자가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시 입을 수 없는 옷을 벗어둔 옷장을 잘 기억해 두라는 나치의 거짓말에 속아넘어 갔다. 그야말로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의 결합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물인 셈이다. 다만 이때도 반발은 있어서 한 수감자가 막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알려주는 일도 있었고 (이 수감자는 사람은 산 채로 소각장에 던져졌다고 한다) 회스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학살 준비실에서 탈의를 하던 희생자들이 학살 사실을 눈치채고 SS에게 저항하여 무기를 빼앗고 총격전을 벌였던 사건도 있었다.[16]
  • 나치는 유대인을 게토에서 수용소로 보낼 때 모든 짐을 싸들고 나오게 만들어 수거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을 동시에 실천했다. 이렇게 하면 굳이 남은 물건 수집하러 게토를 뒤질 필요가 없다. 게토 소개시 짐을 싸게 한 다음 가방에 이름을 쓰게 했고, 그 짐들은 별도의 열차로 옮길 테니 두고 가라고 한 다음, 유대인 경찰들을 시켜 분류해 털어갔다. 의류의 경우 전시 경제 체제로 인해 의류 공급에 제약을 받던 민간인들을 위한 중고 의류 수요를 채우거나, 개조 등을 통해 군용 피복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B를 굴뚝을 통해 주입해서 살해했는데, 농도와 인원에 따라 3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쥐'에 수록된 존더코만도의 증언[17]에 따르면 시체는 주로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팔이 탈구되어 자기 키만큼 팔이 늘어난 시체도 있었다.

학살이 끝난 후 당연하게도 유대인들의 시체를 독일인이 만지기는 싫었으므로 뒤처리는 유대인 특수직무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 후 처리했는데, 처음에는 매장했으나 후에는 홀로코스트를 은폐하기 위해 소각로에 넣어 화장했다. 일부 매장된 시신도 결국 다시 파내어 소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이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감독하던 한 무장친위대 하사반쯤 미쳐서 비명을 질러대고 권총을 소각로에 난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1분 30초 무렵) 자신들이 죽여 놓고도 맨정신으로는 못 버틸 정도로 끔찍했던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죽이자는 발상을 한 것부터가 총살로 처리했더니 처형에 동원된 장병들이 막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대인을 혐오하던 친나치적 성향의 군인들이라도 무력한 민간인 아이, 노인들까지 총살하는 건 일부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일 수 밖에 없었다. 독가스로 대체된 후로도 너무나 비인도적인 수용소 현실에 처음 배치된 인력들은 경악하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았지만 대개는 다른 장병들의 폭력, 협박에 손쉽게 굴복했다. 이후 존더 코만도들을 동원하면서 자신들이 직접 무언가를 하는 일은 줄어들었고, 감독 역할 정도만 했다.

그나마 화덕으로 화장을 하는 방법은 덜 죽일 때 이야기이고, 전쟁 말에 이탈리아헝가리에서 끌고 온 유대인까지 대량학살할 때는 화덕이 모자라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넣어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독일의 동맹국들인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 대량의 유대인들이 잡혀왔다. 특히 헝가리는 1944년까지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고, 같은 추축국이라 전쟁중인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는 탈출하기 쉬워서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탈출했다. 그러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쫓겨나고 파시스트인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한 44년부터는 헝가리도 유대인을 잡아 들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18] 그 결과 아우슈비츠의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인원이 실려 들어왔고, 시시각각 악화되는 동부전선의 상황 속에서 수용소를 운영할 물적,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나치는 거의 대부분의 입소자를 가스실에서 바로바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거대한 규모의 샤워실을 빙자한 가스실들이 증축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전쟁 초반에는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탈리아 본국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유대인들도 보호되었다. 무솔리니는 독일과 다르게 다문화 제국 정책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독일 말에 고분고분 따르진 않겠다는 일종의 자존적인 표현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고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립되어 독일군이 진주한 이후로는 이탈리아 유대인들도 학살당했다.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우선 집결수용소인 볼차노 수용소에 수용된 후 다하우, 라벤스베르크, 아우슈비츠같은 노동 또는 절멸수용소들로 보내졌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바로 이 일을 소재로 한 영화다. 그리고 발칸 반도 점령지들의 유대인들은 우스타샤나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야세노바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학살 당했다.

3.4. 수용시설[편집]

노동 겸 절멸수용소였기 때문에, 일단은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당연히 열악함 그 자체였다. 침대들이 닭장마냥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간신히 누울 정도로 좁았다. 그리고 침대들이 늘어서 있으면 그 가운데 통로에 구멍 뚫린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것도 아침과 저녁 한 번씩만 이용할 수 있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처형하는 SS 대원들의 심리적인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그리고 유대인들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상당히 머리를 썼는데, 이도 그의 일환으로 화장실 수와 사용 횟수를 극히 제한하여 유대인들이 배설물 속에서 고통받게 하고, 비위생적인 모습이 되도록 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병으로도 죽어갔고, 점점 짐승처럼 모습이 변해가 SS 대원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심리적인 고통을 덜 겪게 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 또한 자신의 인간의 존엄성이 천천히 훼손되가는 과정을 보고 실감하면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리고 죽음에 보다 쉽게 순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역이용하여 빅토르 프랑클같은 일부 사람들은 하루에 한 잔씩 배급되는 가짜 커피 중 반 잔은 마시고, 반 잔은 옷 조각을 적셔 고양이 세수 및 목욕을 하고,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 SS 대원들도 그 자들은 잘 건드리지 않고 커피 한 잔을 다 마셔버리고 몰골이 점점 짐승처럼 변해가는 유대인부터 학살했다.

4. 수용대상[편집]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프랑스인, 체코인, 네덜란드인 등 나치 독일의 핍박을 받던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중범죄자, 나치당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장애인, 혼혈[19],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등이었다.
남자1: "난 이 유대 놈들 속에 있을 수 없소! 나도 독일인이란 말요! 난 황제한테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고요!" /
아티: "정말 그 사람이 독일인이었나요?"
블라덱: "낸들 알겠니. 실제로 독일인도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군한테는 이 친구도 유대인이었지!" -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中. [20]

심지어 본인은 전혀 숙청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가족을 위해 자진해서 이 지옥행을 자처한 위대한 가족애도 있었다. 어느 독일인 여성은 집시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남편과 자녀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자 자진해서 함께 떠났다고 한다. SS들이 몇 번이나 그녀를 꺼내 주려고 하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부해서 소용이 없었고 결국 그녀는 가스실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파일:오시비엥침 수감자 뱃지.png
특별 감시가 필요한 사람들의 경우 위 표와 같은 삼각형 패치를 죄수복에 달고 다니게끔 했다. 현재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분홍색 역삼각형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위 표의 반사회분자의 경우 집시노숙자 같은 이들을 의미한다.

물론 인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독일인들은 피수용자 중에서는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인 같은 경우에는 적십자에서 소포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비교적 좋은 처우' 의 예를 들자면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다하우 노동수용소의 일이긴 하지만) 독일인 수용자의 주검에서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른 인종들 중 깨끗한 등과 가슴을 가진 자, 특히 문신을 한 자는 독극물로 죽여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 친위대원들이 자기 장갑이나 실내화, 말 안장을 만들어 쓰거나 핸드백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했다는 설도 있다.(출처 존 캐리의《역사의 원전》146. 다카우 수용소의 의학 실험(1941~45)/ 프란츠 블라하 )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친위대원은 가죽을 벗겨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다만 사람가죽으로 만든 제품에 대한 내용은 설화 비슷하게 퍼져나간 경향이 있다. 특히 전등갓이나 유대인 비누같이 나치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는 이야기들은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많다.

소련군이 접근하자 독일 측은 6만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수용자들은 한밤중에 소집돼 서쪽으로 죽음의 행진을 했다[21]. 초반에는 낙오하는 자들을 친위대가 사살했으나 눈 오는 추운 밤 등 악천후가 계속되자 친위대가 굳이 사살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쓰러져서 죽었다. 아니면 걷다가 넘어지면 밟혀죽었다. 그렇게 걷다가 가축수송용 열차에 한 량당 100명씩 실어서 옮기기도 했는데, 엘리 위젤의 증언으로는 '내리지 못하면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열차가 멈췄을 때 겨우 내릴 수 있는 건 100명 중 열댓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빵과 물 같은 기본적인 식량 배급이 끊기자 곧잘 다툼이 벌어졌고, 아들이 아버지의 음식을 빼앗아 먹고 죽게 내버려두는 아수라장도 흔하게 벌어졌으나 누구도 그것을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끝내 이동시키지 못한 수용자들도 있었으며 6,0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 그리고 이 소련군이 해방하러 오기 전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무기와 폭탄을 준비해 최후의 저항을 일으켜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후술할 비톨트 필레츠키처럼 자진해서 아우슈비츠에 들어가 3년을 버티고 수용자들에게 식량과 외부 정보를 전달한 인물도 있었다.

소련 측은 이 수용 시설을 접수 후 한동안 감옥으로 사용했다. 아주 운이 나쁜 사람들은 나치에게 수용당한 건물에서 스메르쉬(소련 방첩대)에게 심문 받은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4.1. 존더코만도[편집]

아우슈비츠가 학살공장으로 확장되자 시신처리같은 슈츠슈타펠 자신들이 하기 싫은 업무들도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는 유대인 수용자들을 모아 자기들 학살업무의 보조를 맡겼는데 있었는데, 수용자들을 특수직무반이라는 의미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라고 불렀고[22] 시체처리와 희생자 분류작업, 기타 학살 보조업무들을 떠넘겼다.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존더 코만도들 덕분에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의 저항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존다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이 처음 입소할 때 즉시 살해대상과 노동대상을 분류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설마 같은 유대인들이 우리를 죽이겠냐며 안심했다고...(출처 루돌프 회스: 고백록)

존더코만도의 주요업무는 학살 피해자의 시신 처리였는데 업무 특성상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고, 이들이 저항을 했다가는 아우슈비츠 업무자체가 마비되는지라 슈츠슈타펠은 약간의 혜택를 해주는데 그 혜택라는게 톱밥이 덜 섞인 빵을 준다던가, 담배를 좀 더 많이준다든가, 혹은 의료품을 좀 더 주는 등이었다. 하지만 혜택과는 별개로 나치는 '최종 해결책'[23]의 증거인멸을 위해 존더코만도들을 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학살했다. 때문에 900여명이나 편성되었던(출처 Concentration Camps in Nazi Germany: The New Histories, p.73) 존더코만도는 오히려 생존자가 매우 적어서 해방될때는 겨우 14명만 남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존더코만도가 되어서 처음하는 일은 가스실에서 전임자의 시신을 치우는 일이었다.(출처 Auschwitz: A Doctor's Eyewitness Account)

회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머잖아 자신들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을 알면서도[24] 매우 능숙하게 학살작업을 처리했으며, 연고자의 시체를 발견하거나 진짜 재수없으면 탈의실에서 아직 살아있는 모습으로 상봉할수도 있었는데, 동요할지언정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시체를 보고서도 아무 일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도 있었다.

분명 존더코만도들도 학살의 피해자인데 슈츠슈타펠의 일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피해자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대표적으로, 수용자였던 니슬리 미클로쉬(Nyiszli Miklós)는 자신의 저서에 존더코만도를 두고 같은 유대인들이 희생당할때 자신들은 슈츠슈타펠에게 빌붙어 혜택을 누리는 일종의 배신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존다코만도들은 만약 조금이라도 연민을 보였다가는 자신들의 위치가 정리하는 쪽에서 정리당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시체를 처리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존다코만도들도 이런 수용자들의 시선과 학살을 도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25]

독일이 패망해가던 1944년, 거의 마지막 기수였던 존더코만도들은 자신들의 숙청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봉기를 일으킨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존더코만도와 해당 봉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으면 영화 사울의 아들을 참고하면 된다.

4.2. 식사와 보급품[편집]

다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단다... 아침이라고 해봐야 기껏 뿌리에서 짜낸 씁쓸한 차 뿐이었어. 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는 아직 남아 있는 차를 마셨지. 하루 한 번 무우잎 수프를 배식했었어. 줄 맨 앞 가까이 서면 좋지 않았단다. 물 뿐이었거든. 줄 끝 근처가 좋았지. 바닥의 건더기가 떠올랐거든. 하지만 너무 뒷쪽도 좋지 않았단다. ...국물도 없을 때가 많았거든. 그리고 하루 한 번 모래처럼 까실까실한 빵 조각을 줬지. 밀가루에 톱밥을 섞은 거야. 그 조그만 조각으로 종일을 버텨야 했어. 대부분 바로 해치워 버렸지만 난 늘 나중을 위해 반을 남겨뒀어. 그리고 저녁엔 상한 치즈나 잼을 먹었지. 재수 좋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내 손가락만한 소시지를 먹곤 했지. 우리가 먹은건 겨우 이게 전부였어. 그들이 주는 대로 먹었다간, 서서히 죽어가기에 딱 알맞았단다.
- 블라덱 슈피겔만, 2권 中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것은 노동의 혹독함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영양공급의 부재였다. 보통 하루 800~1,200칼로리가 공급되었는데, 아우슈비츠에서의 노동강도를 생각하면 살아남기조차 힘든 수준이다. 이 정도 칼로리는 책상에 앉아 데스크 워크만 하는 사람이라야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는 칼로리다. 이것도 그저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지 원활한 체력을 가질 칼로리가 아니라서 체력이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이 정도의 칼로리만 섭취하다 보면 계단으로 10층도 한번에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된다.

식사 메뉴는 이러했다.
  • 톱밥을 섞어 구운 돌덩이 같은 빵. 케르테스 임레는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운명>에서 '지푸라기가 씹히는 묘한 빵'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당시 독일의 열악한 군수사정 탓에 군납 빵에도 톱밥이 들어가는 판이었으니 수용소의 빵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수용소 근무자들의 식사를 만들고 남은 상한 야채로 끓인 묽은 국. <운명>에 서술된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 을 가졌다고 한다.[26]
(전략)... 가죽장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야릇한 표정이었다. 수저를 받아 입에 넣는 순간.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구 토해 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중략) "이게 바로 그 말린 야채 수프라는 거지." 그는 이전의 전쟁과 지금 진행중인 전쟁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것도 장교로써 말이다. "거기서 이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 볼 기회가 있었지. 우린 독일군과 함께 전선에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이런 걸 먹더라고." ...(후략) (운명 - 임레 케르테스 중에서 발췌)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선 무와 채소를 넣은 수프를 배급하였다고 한다.[27] 이마저도 매일 지급되진 않았다고 한다. 책에서 서술하길 묽은 국이 배급되었는데, 앞줄에 서면 건더기 없이 국물만 있었다고 하며 너무 뒤에 줄을 서면 아예 남지 않은적도 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몇개 언급된다. 그중 한 이야기에 따르면, 묽은 국을 배급받을 때는 배급하는 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국자를 밑바닥까지 내려서 퍼온 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저 상한 야채국의 건더기조차 제대로 못 먹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이런 식사를 해서는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운명>에서 서술된 또다른 부분을 보자면,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사흘 째 되던 날에는 수프를 먹었고, 그 이튿날에는 심지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중략) "점심 식사는 수프였는데, 놀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나왔다. 이어, 해거름까지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다가 점호 전에 빵과 마가린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배고픔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형편없는 식사조차도 간격을 매우 띄워서 굶주림의 고통을 극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는 곧 같이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부헨발트로 옮겨갔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런 생활을 겪었을 것이다. 부헨발트도 강제 수용소라는 건 변함없지만, 이쪽은 주 목적이 학살보다는 강제 노동이었던지라, 곤궁하지만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은 수준의 식사가 배급되었다고 적고 있다.
  • 커피. 그런데 말이 커피지 아우슈비츠의 커피는 썩은 양배추 뿌리와 완전히 버려지는 야채 부산물을 불태운 잿가루로 만든 '가짜 커피'였다. 당연하게도 칼로리는 거의 제로이다. 독일 및 점령지 거주자들도 저거보단 양질의 재료(볶은 치거리 등)를 쓰긴 했지만 한약맛에 가까운 대용 커피를 마시던 시절이니 제대로 된 커피를 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이런 식사를 하며 몇 주만 지내도 건강에 치명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달도 버티지 못 했다. 죽기 전에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지만, 너무나도 약해진 건강 때문에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이동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매주 3개비의 담배를 지급했다.[28] 그리고 이 담배는 화폐처럼 사용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이를 모아 빵으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 담배 3개비면 하루분의 빵과 같았고, 숟가락도 하루치 빵의 절반에 바꾸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혹은 아우슈비츠에는 주변에서 징용되어 일하러 온 폴란드 주민들이 있었고 주민들에게 담배를 주고 과일이나 계란같은 고급식품을 구매했다. 정말 성격이 독한 수용자는 이걸 150개까지 모아서 보드카 1병과 바꾸기도 했는데 보드카는 주로 카포나 군인들에게 줄 뇌물로 이용되었다. (출처: 아트 슈피겔만, '쥐')

또한 카포와 군인들의 신발은 가죽제였지만 수감자들의 신발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막신이었다.

4.3. 앞잡이[편집]

하지만 일부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나치의 앞잡이 카포였다. 이들은 수용된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5. 폐쇄와 해방[편집]

해방 직후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 내부의 참상.

1943년 11월 라인하르트 작전이 중지됨에 따라 이 작전의 일부로서 세워졌던 절멸수용소들은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를 제외하곤 모두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나치 최대의 절멸수용소로서 학살을 자행했고, 다른 지역의 학살 시설이 줄어들어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자 이들을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학살했다. 1944년 말 소련군의 당도가 너무나 확실해졌을 때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와 다시 문을 열었던 헤움노 절멸수용소도 폐쇄되었지만, 오로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선 학살이 계속되었고 1945년 초 비스와-오데르 공세로 이미 바르샤바까지 함락되었던 1월 17일에야 힘러는 이 수용소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제소자들은 그 추운 겨울에 도보로 이동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미 극도로 쇠약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사망했다. 제소자들을 모두 이동시킨 뒤 SS는 조직적으로 수용소의 시설을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소련군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기에 제 3수용소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건물만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고 비르케나우의 터, 그리고 제 1수용소는 그대로 남아 학살의 물증이 되었다. 수용소가 폐쇄된 지 불과 9일 뒤인 1월 26일 소련군은 이 지옥을 해방했다.

5.1. 희생자 수[편집]

희생자 수는 학자마다 논란이 가장 큰 부분으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기록말살과 시신소각을 지시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6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건 아니다. 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는 아우슈비츠 포함 6군데[29]로 알려져 있고 이들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310만에서 350만 정도로 집계된다. 600만의 유대인 사망자 중 나머지는 절멸수용소가 아닌 기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거나[30] 게토에서의 기아 사망과 학살, 아인자츠그루펜 등이 저지른 집단학살[31]로 희생당한 것으로 본다.

처음 가스실 희생자는 매장했으나 이후 다시 화장했는데 이때 집계된 시신이 17만 구였다. 그나마 남은 나치의 기록상 아우슈비츠 수용자는 20만이지만 그보단 더 많은 수용자가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희생자 수는 불확실한데,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처음엔 200만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100만명으로 수정 집계 했으며, 전쟁 후 소련은 300만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이것은 과장이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2005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은 최대 130만 명 정도가 수용되어 그중 11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이것은 현재 희생자 수로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수치이다.

이렇게 인원에 대해 지금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한 것은 이 수용소의 수용 구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자 등록 이전에 분류하는 과정에서 수십 %는 반드시 죽었고, 가끔은 기차역에 도착한 인원 전부를 학살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학살당한 인원은 애초에 집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치가 부여한 식별번호의 숫자로 수용인원이나 희생자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울 듯하며, 모든 인원이 번호를 받았을거라는 보장도 없기에 수용한 인원 파악은 더더욱 어렵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극단적인 편차가 나오는 실정인데, 공식적인 사망자 수치인 110만명을 넘어 희생자가 15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6. 잊혀진 영웅[편집]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에 자진해서 들어간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장교였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라는 사람으로, 수용소 내부에서 저항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보다 참혹한 현실과 조건에 저항 조직으로 수용소를 탈환할 수는 없었지만 수용소 내부의 상황을 외부로 전하고 기밀 서류를 훔쳐내는 등 첩보 활동을 훌륭히 수행했다.

하지만 화물 열차 정권으로 위세를 떨쳤던 폴란드 공산당은 여기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다. 폴란드 해방 후 그를 서쪽, 즉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으로 망명해 연합국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와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해버린 것이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 SS는 상당수의 입소자를 서쪽으로 이송시켰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탈환한 뒤 공산 폴란드 정권과 소련군은 서쪽으로 이송된 폴란드인의 명단을 그에게 요구했는데, 그는 그들이 겪을 고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명단 제공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견뎌내었고 결국 바르샤바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뒤늦게 1963년 폴란드의 백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비해 지명도는 낮다.

7. 탈출[편집]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지만 어디에나 능력자는 있는 법.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몇몇 있다.#. 이사람은 2011년 9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철저한 계획, 기발한 발상(예를 들면 결혼식 작전이라든가), 불굴의 정신력, 그리고 귀신 같은 체력이다. 3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뛰었단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살아남은 그들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그들 모두가 다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그뿐 아니라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탈출하기만 해도 영웅인데 싸워서 또 영웅이 되었다. 사실 저기서 탈출할 정도의 육체능력이면 싸웠을 때 무시무시할 것이다. 보통 그런 지옥을 경험하면 공포증이 생겨 나치 군복만 봐도 두려움에 떨 텐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었다.

1944년 10월 7일 가스실의 존더코만도 소속 수용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게슈타포 3명과 나치군들을 사살하고 소각장 하나를 폭파시켰다고 한다, 이후 일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 외의 인원들은 진압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이 봉기를 위해 군수공장에서 탄약을 빼돌린 4명의 여성 수용자들은 구타와 성고문 끝에 여성 수용소 앞에서 교수형을 당해 매달려있었다고 한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아들 아트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블라덱 슈피겔만은 그 4명의 여성 수용자 얘기를 하며 ''다 소스노비에츠에서 온 아냐의 친구들이었는데, 오래오래 매달려 있었어. 휴우."라고 언급한다.

8. 운영 당시 촬영된 사진들[편집]

전무후무한 학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우슈비츠 1수용소의 건물들과 비르케나우의 폐허 뿐, 당시 아우슈비츠 내에서 벌어지던 학살과 강제 노동을 기록한 영상은 존재하지 않고 사진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사진들이라도 당시의 참상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여주며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고 있는데, 그 사진들은 다음 3가지로 나누어진다.

8.1. 아우슈비츠 앨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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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을 알 수 없는 수용소의 SS간부가 1944년 5월 27일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출발해 아우슈비츠에 막 도착한 헝가리 유대인들을 찍은 193장의 사진이다.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대부분 사진들의 출처가 이 앨범이며, 아우슈비츠를 기록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집으로 꼽힌다. 이 앨범의 충격적인 점은, 사진속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 여성, 노인들이 촬영된 지 얼마 안 되어 가스실에서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사진 속에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담담하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일이 일어날 지 모르고 수풀에 편안히 앉아 웃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나치는 이 사진 말고도 더 많은 사진들을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용소 폐쇄과정에서 대부분 파기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파기되지 않았고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발견되었는데, 아우슈비츠 수감자였던 18세의 헝가리 유대인 릴리 야코브(Lili Jacob)는 수용소에 함께 왔던 가족들을 모두 가스실로 떠나보냈고 자신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폐쇄됨에 따라 640km나 떨어진 도라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녀는 끝까지 살아남아 도라 수용소에서 소련군에게 해방되었고 수용소의 SS 병영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침대 바로 옆의 찻장에서 이 앨범을 발견했고, 앨범 속에서 자신과 죽은 가족들도 발견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극소수라는 점, 두 수용소 간의 거리가 엄청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엄청난 우연이었다. 전후 그녀는 이 앨범을 공개했고 1980년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기증했다.

8.2. 존더코만도 사진 (Sonderkommando photograph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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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32]가 찍은 4장의 사진으로, 당시 아우슈비츠 가스실 주변에서(나아가 모든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이다. 이곳에서 실제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하고 귀중한 물증으로, 촬영자 또는 내부 조력자들이 필름을 치약 튜브에 넣고 폴란드 레지스탕스에게 반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극도로 은밀하게 찍은 사진이라 구도와 노출이 좋지 못하고 초점마저 맞지 않은데, 당시의 현장이 어떤 곳인지 고려하면 공포감을 들게 하는 사진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이 사진 촬영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온다. 나체로 가스실에 끌려가는 여성 희생자들의 모습, 학살당한 뒤 구덩이 옆에 쌓여 화장되기를 기다리는 시체들, 은밀하게 찍느라 각도를 너무 올린 나머지 나무만 찍은 사진으로 구성되며, 흐릿하고 선명하지 않지만 대단히 무서운 사진들이다.

8.3. 카를 회커 앨범 (Höcker Album)[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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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사진들 중 가장 무서운 사진들로, 아우슈비츠의 간부였던 카를 회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SS간부, 경비병들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들을 담은 앨범이다. 116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기 게양을 시작하는 모습부터 애견을 돌보는 모습, 수용소 근처에 휴가를 나와 웃고 즐기는 이들의 모습까지 담겨 있다. 학살당할 유대인의 모습, 수용소의 참상이 완전히 배제된 이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전혀 살인공장의 간부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 부대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부대라는 인상을 준다. 젊은 남녀간부들이 휴가지에서 모여 웃고 있는 사진은 마치 부대 추억사진 같은 느낌도 준다. 이 사진집에선 요제프 멩겔레도, 루돌프 회스도 그저 좋은 아저씨일 뿐이다. 하지만 이젠 모두가 알고 있듯, 같은 시각 가스실에선 이들의 명령에 의해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있었다. 인간의 끔찍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홀로코스트를 아는 사람에겐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사진집이다.

9. 관람팁[편집]

현재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다. 오전 10시부터는 유료로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으나 한국어 가이드는 한국 여행사를 통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

한국 관광객 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입장 시간은 일반적으로 점심시간 이후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관람 후에 식욕을 상실한다는 이유다.

참고로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는 가이드를 해 주지 않는다. 한국 패키지의 빡빡한 시간관계상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비수기에 운이 좋다면 비르케나우까지 설명을 해준다.

이곳의 첨탑에 걸려 있는 시계는 시간이 멈춰져 있는데 관리 소홀로 멈춰진 것이 아닌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한 바로 그 시각에 멈춰져 있다.

원하는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 둘러볼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걸린다. 여기 가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으로 나온,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나오는 철로를 볼 수 있다. 안쪽으로 쭉 걸어서 들어가면, 사망한 수감자들의 시체를 화장한 다음 그 재를 뿌린 연못이 있다. 1945년 1월 26일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가 해방되고 나치 독일이 멸망한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못의 물빛은 여전히 잿빛이다.

참고로 비르케나우에서 아우슈비츠로 돌아오는 버스는 5시까지만 운행한다. (동절기 기준.) 주위에 숙박시설은 커녕 아무것도 없으므로[33] 꼭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두 수용소 간의 거리는 약 2km 정도 된다.

대개 동유럽쪽에서 넘어온다면 크라쿠프를 거쳐오는 경우가 많고 서유럽쪽에서 넘어온다면 카토비체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크라쿠프에서 넘어오는 사람들 중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레일 패스가 있다면 굳이 버스타지 말자. 오슈비엥침 까지 가는 열차가 대략 1시간에 한번꼴로는 있어서 이쪽이 훨씬 이득이다.

10. 기타[편집]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잘 그린 작품으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유대인)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트 슈피겔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유대인)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인《》도 추천한다. 또한 아우슈비츠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 중령이 연합군에 체포된 뒤 감옥에서 쓴 자서전 성격의 진술서인 《헤스의 고백록》#(정확히는 '회'스가 옳은 표기. 루돌프 헤스와 혼동하지 말것.)도 있다. 참고로 그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학창시절 홀로코스트 피해자로부터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폴란드인)의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도 읽어볼 만한 책으로, 아우슈비츠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회스 중령의 최후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서 이루어졌는데,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샤워실에 보내는 대신 교수형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화장터 옆, 수용소와 회스 중령 자신의 사무실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회스 중령만을 위한 특설 교수대가 설치된다. 그는 그렇게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처형 당시 과거 수용수들도 몇몇 참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언급으로는 회스 중령은 최후에 매우 담담하게,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출처 - BBC 다큐: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 회스의 교수대 근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당연하게도, 해방 당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독소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던 소련군들조차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기겁하였다. 일단 소련도 굴라그라 불리는 수용소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재소자들은 열악한 환경과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곳은 그래도 '수용소'라는 본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반면 나치의 수용소들은 말 그대로 나치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거나, 극한의 강제 노동을 통해 소모해버리는 방식이었다. 즉 소련의 수용소와 스탈린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나치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그것들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악랄했다.



가장 엄숙해야 할 이 공간에서 춤을 춘 사람도 있다. 실제 수감되었던 부부가 가족들을 데리고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34]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논란이 되었는데, 당사자인 아담 콘 씨는 "나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닙니다!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이겼어요!"라며 자신의 행동이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일종의 승리 선언임을 밝혔다.

11. 관련 항목[편집]

11.1.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목록[편집]

11.2. 나치 독일의 주요 강제수용소 목록[편집]

11.3. 그 외[편집]

[1]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2]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 (1940-1945)[3] Camp allemand nazi de concentration et d'extermination (1940-1945)[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정식 화장장이 아니며 그냥 대충 땅을 파고 그자리에 사람을 집어넣은다음 그냥 불태우는 방식으로 화장을 진행했다.[6]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오슈벵찜'이라고 부른다.[7]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국경 도시였지만, 1919년 이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로 읽은 이름이다.[8] 주요 절멸수용소는 6개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외에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데네크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도 말리트로스테네츠, 야세노바츠 등이 존재했다.[9]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는 완전한 절멸수용소로서 분류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어 잠시라도 살아남을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수용소에선 1943년까지 학살 속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빨랐다. 마이다네크는 아우슈비츠처럼 절멸-노동수용소인데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희생자 수가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보단 적었다. 1943년 말 앞서 열거한 수용소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의 종료로 마이다네크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되었는데 이 때문에 아직 살아남아있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이때부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학살 속도는 본격적으로 빨라져서 점차 '순수' 절멸수용소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한편, 폐쇄된 수용소들 중 헤움노 수용소는 1943년 말 폐쇄된 뒤 우치 게토에 남아있던 약 3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1944년 6개월간 다시 가동되었다.[10] 대표적인 것이 다하우와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영상들이다.[11] 수용소의 규칙을 어긴 제소자들을 처벌하고 고문하는 곳이었다. 또한 독방들이 있었는데, 작은 창문이 나 있는 90cm x 90cm의 공간에 4명이나 집어넣고 학대했다.[12] 친위대령(Standartenführer. 연대지도자)이던 당시 찍힌 사진이다.[13] 현재 프랑스 기업인 사노피-아방티스에 흡수되어 사라졌다.[14] 독일어 동사 'machen'(여기서는 3인칭 단수형인 'macht')은 영어에서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make'에 대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예를 들어 'Hausaufgabe machen'은 '숙제를 만들다'가 아니라 '숙제를 하다'라는 뜻이다. 같은 의미로 아우슈비츠 정문의 표어 또한 문맥상 '자유롭게 하다'가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15] 대부분의 절멸수용소들은 자동차 또는 전차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해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치클론 B가 사용된 것은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가 유이하다.[16]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9장 6편 학살[17] 출처는 쥐 합본 233~236페이지로 작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가 존더코만도에게 들은 증언을 넣었다.[18]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이렇게 잡혀온 헝가리 유대인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19] 딴 사람들은 다 순혈 독일인인데 외할머니가 유대인이라서 잡혀온다든지 이렇게 혈통도 별로 안섞였어도 조금이라도 있으면 수용되었다.[20] 이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폭행당해 사망한다. 물론 그 사람이 유대인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혈통'만 유대인이지 본인의 정체성은 완전히 독일인으로 자리잡은 사례가 정말 많기 대문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본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21] 생존자 블라덱 슈피겔만은 당시 수용자들에게 담요 하나와 소시지 하나가 공급되었다고 증언한다. 참고로 이때 그는 매우 운이 없었다. 그에게는 나치 관리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독일군 측의 분위기를 읽어 소련군의 진격과 아우슈비츠의 소개를 예측하였고, 슈피겔만을 포함한 몇몇 유대인들과 모의해 철수가 시작되면 안 쓰는 방에 숨기로 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제복을 빼돌렸고, 식료품(배급받던 빵의 반이라고 언급됨)과 관련 서류까지 다 모았으나 최후의 날 그 친구가 뛰어오며 '나치가 이 수용소를 불지른다고 한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죽음의 행진 최후반 대열에 끼여 수용소를 떠났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소련군의 진격 때문에 정신이 없던 관리들은 수용소를 불태우지 않았다.(다만 슈피겔만이 수용되어있던 아우슈비츠 1 수용소 이야기로 비르케나우라 불리던 2수용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1 수용소도 30%는 파괴되었다.) 슈피겔만 일행은 며칠간의 행진 끝에 바이에른의 다하우 노동수용소에 도착했다고 한다.[22] SS가 학살을 위해 따로 편성한 학살부대도 존더 코만도라고 불렀다.[23]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나치가 학살을 공식적으로 부른 명칭.[24] 열심히 일하면 자기들은 봐줄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학살을 위한 학살상황에서는 어쨌든 다 죽이고 나면 자신들 차례임은 인지했을 것이다.[25] 다만 예외는 있었다. 니슬리 미클로쉬는 유대인이었지만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제법 대우를 받아 본인도 멩겔레의 인체실험을 보조했고, 나중에는 SS장교에게 뇌물을 바쳐 아내와 딸을 처형 수형소에서 노동 수형소로 이송시켜 살리는 등, 다른 희생자가 봤을 때는 존다코만도보다 더 배신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26] 애초에 근무자들의 식사를 만드는 원본부터가 군용으로 보급되는 건조 야채이니, 그 남은 찌꺼기라면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이 야채가 일반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는 '철조망'이라는 은어로 불리는 데서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27] '운명'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대목을 보면 '사료용 무와 알줄기 양배추'로 만든 수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수용소의 식사는 대체로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8] 교도소에서 담배가 금지된 것은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 심지어 현대 독일에서도 주마다 다르지만 상당수의 교도소에서 흡연을 허용하고 있다. 출처 [29] 트레블링카(Treblinka), 베우제츠(Bełżec), 헤움노(Chełmno), 소비보르(Sobibór), 마이다네크(Majdanek). 이 중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악명높던 곳으로 70만 ~ 90만명이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를 제외한 이들 다섯 수용소에서 약 200만명이 학살당했다. 이 수용소들은 모두 폴란드에 있었고, 이들 6군데 외에 벨라루스에 트로스테네츠(Trostenets)라는 소규모 절멸수용소가 있었다.[30] 다하우, 작센하우젠 수용소 등.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프와쇼프 수용소도 노동 수용소로 두 수용소와 성격이 비슷하다. 강제/노동수용소는 수만명의 제소자들을 수용하고 있어야 했기에 건물이 많았고 부지의 규모가 컸다. 참고로 강제수용소나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의 사망률은 수용소에 따라 15%(작센하우젠)~59%(슈투트호프) 정도였다. 다른 악명높은 강제수용소들을 살펴보면 다하우는 약 20%, 부헨발트 24%, 그로스-로젠 32%, 베르겐-벨젠 42%였다. 이것은 해당 수용소에서 사망한 희생자 수만 집계한 것으로, 수감자들 중 유대인은 수시로 강제수용소에서 절멸수용소로(주로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된 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31] 소련, 리투아니아 등 폴란드 동쪽의 유대인 희생자 상당수는 SS나 국방군에게 총살당한 사람들이었다.[32] 그리스 유대인이자 해군장교였던 알베르토 에레라(Alberto Errera)로 추정[33] 식당 비슷한 것도 없어서 슈퍼마켓에서 산 크래커로 식사를 떼워야 한 경우도 있다. 이 근처는 영어도 거의 통하지 않는다.[34] 한국에서 '난 괜찮아'로 번안된 그 노래이다. 2018년 개봉한 한국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고준모(이서진)의 벨소리로 나오는 바로 그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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