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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조선 예술은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미국 《뉴욕타임스》) “그의 조각 같은 육체의 선(線)과 손놀림, 몸놀림의 익살스러움, 위협적인 가면으로 다양한 감정을 나타낸다. 환상적이다.”(프랑스 《르 피가로》) “모든 무용을 넘어서는 기품과 사상을 보여준다.”(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 디노데시아스》)
한국인이 낳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향해 세계적인 작가들은 일제히 경의를 표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꿈과 이상을 창조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조선의 그가 그런 예술가이다. 놀랍다.”(피카소) “그때 우리는 그녀의 몸에서 요염한 원초적 누드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마티스) “그녀는 육체의 해방자다.”(로맹 롤랑) “차원 높은 전율의 즐거운 시간이었다.”(존 스타인벡) “그의 춤은 옛것은 새롭게 약한 것은 강하게 없어진 것은 되살리는 예술이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세계의 언론과 작가가 격찬한 예술가 최승희(崔承喜·1911~1967). 이제 그의 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출발지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 최승희의 본관은 해주(海州)다. 윗대가 정승 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최준현은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사시험에 합격해 ‘해주 최참봉’으로 불렸다.
최승희는 일곱 살 때 서울로 이사 왔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근처, 지금의 ‘한뫼촌’이라는 한정식집이 그곳이다. 음식점 앞에 ‘이곳은 무용가 최승희의 집터입니다’라는 안내문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옛 사진 몇 장이 있다. 옛 양반가 한옥다운 기품이 있다.
최승희의 아버지는 한학자지만 자식 교육에는 개방적이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보통과와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소학교 시절에는 내내 전교 1등을 해 두 차례 월반(越班)했다. 동기보다 2년 먼저 졸업했다. 최승희 집안은 숙명여학교 시절 기울어 빚에 몰리다 이 집을 팔고 체부동 언덕배기 초가집으로 옮겼다.
그곳이 지금은 외국 관광객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된 삼계탕집 ‘토속촌’ 바로 위 주차장 자리 근처라고 고정일 동서문화사 사장은 회고했다. 당시 최승희 집안에서 돈을 번 사람은 경성방송국에 다니며 《개벽》에 작품을 발표하던 큰오빠 최승일이 유일했다. 그 돈에 기대 여덟 명의 가족이 입에 풀칠을 했다. 공부를 잘했던 최승희는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쳤다. 전남 강진구청 옆에 있는 영랑 생가와 ‘시문학’ 동호인들을 설명하는 탑이다. 여고 졸업 후 최승희는 일본 동경(東京)음악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나이가 어려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봤는데, 860명이 응시해 7등으로 합격했지만 역시 연령 미달로 합격이 취소됐다. 재능이 넘친 게 화(禍)가 된 것이다. 이때 최승희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최승일의 문학 친구 김영랑(金永郞·1903~1950)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청 바로 옆에 ‘영랑 생가’가 있다. 1906년 지었다는 이 집 장독대 뒤편에 동백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그중 한 그루가 몸을 배배 꼬고 있다. 최승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영랑이 자살하려고 목을 매달았다는 그 나무다. 다음은 영랑과 최승희의 사랑에 대한 정설(定說), 즉 팩트다.
영랑 생가 앞에 있는 ‘시문학’ 동호인들의 동상이다. 왼쪽이 영랑이다. 영랑은 첫 부인과 사별한 뒤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강진보통학교 교사를 하며 혼자 하숙을 하던 마재경과 두 번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결실을 보지 못한다. 그 뒤 귀국한 영랑은 22세 되던 해 정지용 등과 만나며 최승일의 누이동생 최승희와 약 1년 동안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그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에 불과했다.
영랑은 최승희를 바라보며 1년 중 6개월을 서울에 머물렀지만 최승희를 향한 연정(戀情)도 양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영랑 집안에서는 “경성(京城)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고 했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거론했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영랑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다른 사람이 목격해 목숨을 건졌다.
그 다음 해 영랑은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해 슬하에 7남 3녀를 뒀다. 영랑 연구자들에 따르면 “영랑은 원래 일본 유학 때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닥쳐 영문학을 전공했다”며 “그의 시 곳곳에 음악성이 깔린 것은 음악에 대한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평한다.
영랑 생가의 고즈넉한 모습이다. 영랑은 이후 고향에서 금릉중학교를 설립하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했다. 이후 1950년 9월 29일 포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는 모두 80여 편이다. 이 중 60여 편이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것인데, 그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해 해방 후 ‘친일’이라는 오욕(汚辱)에서 초연했다.
원하던 진학은 못 하고 때아닌 사랑 열풍에 휩싸였던 최승희의 삶에 서광이 비친 것은 1926년 3월 20일의 오후였다. 큰오빠 최승희는 동생을 경성 공회당, 지금의 서울시의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이시이 바쿠(石井漠)라는 일본의 무용가가 내한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직접 눈으로 본 순간의 감격을 최승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무용의 매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빛나는 예술세계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마치 물 흐르듯 그려지는 아름다운 육체의 선, 그 율동 속에 꿈결같이 울리는 음악 소리,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것에 매혹되었다기보다는 무용 밑바닥에 흐르는 강력한 메시지가 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혼을 불러일으켰다. 발레 예술로 내 모든 것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최승희의 회고)
이후 최승희는 곡절 끝에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돼 부산에서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 도쿄 근처 무사시사카이라는 한적한 시골마을 이시이 바쿠의 무용연구소에서 일취월장하던 최승희는 1926년 6월 22일 도쿄 호가쿠 좌(座)에서 대망의 데뷔 무대에 올랐다. 한 달 뒤인 7월 30일 《야마토 신문》에 최승희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이시이 바쿠가 오늘과 내일 히비야에서 무용발표회를 연다. 그의 연구원들 가운데 조선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소녀 무용가가 있다. 둥근 눈, 뽀얗고 요염한 얼굴, 흰 장미 같은 모습, 영특한 두뇌, 그리고 날카로운 예술적 감각까지 지녀 스승인 이시이가 매우 아끼는 제자다. 그녀의 실력은 다른 연구생들을 단번에 앞질러 이시이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야마토 신문》 1926년 7월30일자)
1929년 8월 25일 최승희는 귀국했다. 이시이 바쿠의 악화된 시력과 독립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그해 11월 ‘최승희 무용연구소’ 개설로 이어졌으나 “병든 스승을 배신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구속되고 급성 가슴막염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자 결국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곁으로 돌아갔다.
대체 최승희의 매력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빛을 발했을까.
“최승희는 눈이 그렇게 아름다워. 일본 사람들의 소설을 보면 여자의 아름다운 눈을 가리켜 ‘흑요석 같은’ 그러거든. 요석이란 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흑요석. 약을 쳤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몸매가 날씬한 게 보통 우리 한국 여성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었어요.”(극작가 차범석의 구술)
“최승희 최후의 리사이틀이 제국극장에서 있었을 때에 최승희의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와서 보니까 반나체 불상춤 사진이 있었다. 나는 최승희의 몸이 무엇인가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불상춤의 환상은 그 얼굴이 불상과 비슷해서 어디엔가 불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더 요염한 맛을 낸 것이 아닌가 본다.”(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나의 사춘기》 중에서)
생전에 최승희가 춤추는 모습이다. 1930년대 최승희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 미국~유럽~남미로 이어지는 세계 순회 공연을 한 것이다.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그녀를 보러 몰렸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해주며 최승희의 할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국위선양이라 할 수 있는 화려한 이력과 반대로 광복 이후 최승희에 대한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최승희가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문 등 친일행위를 했다는 지적이 따랐다. 정작 최승희는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었고 옌안(延安) 독립 동맹에도 가담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반된 시각으로, 광복 후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당황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최승희는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를 만나 “나를 선처해달라,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했으나 하지는 “내가 무슨 힘이 있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월북했던 남편 안막이 몰래 남한에 내려왔다. 그는 최승희에게 “북으로 가면 여왕 대접을 받는다”며 월북을 종용했다. 결국 최승희는 월북을 감행한다.
최승희는 한국인 최초의 세계적 韓流 스타였다. 일설에 최승희는 월북 전 무당을 찾아가 서울과 평양, 어디서 사는 것이 좋은지 점을 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무당의 대답은 이랬다. “당신은 젊었을 때는 세계를 누비며 명성을 올렸지만 말년에는 비참하다. 특히 북으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의 팔자, 결코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 최승희는 결국 북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막의 형인 안보승은 최승희의 월북을 끝까지 말렸고, 안막이 최승희에게 계속 월북을 종용하자 “너는 가도 되지만 제수씨는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며 동생을 혼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최승희의 월북을 회고하면서 ‘최승희 이름 석 자’라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대륙을 누비시고 환국하신 제수님 북쪽에는 안 가겠다 무당집도 찾으셨지 아~ 기어코 넘으신지 반세기가 되옵는데 무지한 손아귀에 지고야 마시다니.’
최승희가 안막과 결혼한 것은 1931년 최승일의 소개 때문이었다. 본명이 안필승으로, 문학평론가이자 좌익활동가였다. 결혼 후 안막은 최승희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오늘날의 매니저처럼 공연 기획, 선전, 자금 마련 등 업무를 도맡았고, 제법 수완이 좋았다. 안막은 단발머리가 최승희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다고 믿어 헤어스타일을 단발로 고정시켰다.
일제 말, 안막과 친분이 있던 가토 구니오의 안막에 대한 증언이 있다.
“1940년대 들어 일본의 극장 예술공연은 허가제로 바뀌었고 내용이 ‘황국 신민’ 운동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최승희의 공연에는 이러한 춤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는지의 비결은 일본 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들을 모두 안막이 짜낸 것이다.”
이랬던 안막이 194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옌안 독립 동맹 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부는 비극의 길로 접어든다. 옌안은 마오쩌둥이 장제스에게 패해 대장정을 감행하면서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지역이다. 월북 후 최승희는 그간의 명성으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김일성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평양에서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을 맡았다.
김일성은 최승희를 아껴 3층짜리 무용연구소를 세워줬다.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한 번이라도 맛보고 싶어 침을 줄줄 흘리는 냉면으로 유명한 평양 ‘옥류관’이 바로 그곳이다.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옥류관으로 변한 이 자리는 일제 때 요정(料亭) ‘동일관’ 터였는데 김일성 지시로 개조했다. 최승희는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인민배우’가 됐다. 고산 고정일 선생이 쓴 최승희 소설 《매혹된 혼》이다. 1951년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중국 베이징 중앙 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최승희의 지도는 중국 전통 무용과 경극(京劇)의 현대화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시절 최승희는 중국의 유명 경극배우 메이란팡과 친분을 다졌다. 그러나 그사이 남편 안막을 향해 숙청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을 부부는 눈치채지 못했다.
월남한 이철주가 쓴 《북의 예술인》이라는 책에는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숙청 배경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1958년 무렵, 김일성 일파는 안막을 ‘김일성을 위해 충실히 일했고 한설야와 함께 행보를 걸어온 것은 인정하나 그 경향성이 부르주아적 영웅주의로부터 출발한 공명심이 좌우했다’고 단정하고 그를 숙청했다. 그 결과 김일성은 안막을 이승화·임화 사건과 동일하게 미국 고정간첩으로 내몰았으며, 비공개리에 재판을 하고 투옥, 형기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일성 비서실장 고봉기의 유서》라는 책에는 시바다 사노루라는 일본인이 쓴 ‘춤을 출 수 없게 된 여류무용가 최승희’라는 글의 내용을 인용한, 안막의 숙청과 관련된 비화가 나와 있다.
“비밀경찰은 1958년 들어 안막에게 반당 종파 분자의 용의를 품고 평안도 출신의 작가로 《최승희 평전》을 쓴 서만일과 함께 체포했다. 비밀경찰은 안막이 일제 강점기에 도쿄에 있었던 사실에 착안했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의 숙청에 나선 수사관들은 안막 체포 후 자택에서 많은 귀금속 제품을 발견하고 이것이 적의 스파이인 증거라고 단정했다.”
처음에 최승희는 김일성을 직접 찾아가 항의하는 등 대찬 행동을 보였으나 오히려 말로(末路)를 앞당길 뿐이었다. 더구나 그해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기본》이라는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서 ‘김일성’을 언급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화가 난 김일성은 최승희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최승희에 대해 무조건 호의적이던 김일성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서 일을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많이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으면 불평을 했다.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 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결국 ‘유일신’ 김일성의 태도가 바뀌면서 최승희의 몰락이 시작됐다. 1967년까지는 ‘문예총 중앙위원’ ‘조소(朝蘇) 친선협회 중앙위원’ ‘무용가 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같은 직함을 유지하긴 했지만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그 후 최승희에게는 반당,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위기에 몰린 최승희를 주목한 중국인이 있었다.
그녀를 아꼈던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구하려 했으나 무위(無爲)에 그치고 말았다. 일설에는 최승희가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피신하려 했으나 중국대사관이 이를 거절했으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 당국이 그녀를 대동강의 작은 섬에 유폐시켰다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한 이는 옌볜 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이다.
조득현은 “최승희가 중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중국대사관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이것이 탄로 나 대동강에 있는 쑥섬에 감금되었다”고 했는데, 북한에 납치됐다가 다시 망명한 고 신상옥 감독의 수기(手記)에도 비슷한 증언이 나온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 정확한 물증이나 확인해줄 사람이 없기에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1967년 이후 최승희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그녀를 둘러싼 온갖 소문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있다. 그해 한국과 일본의 언론에 ‘최승희 숙청설’이 보도되고 최승희의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숙청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뿐이다.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는 최승희 무덤이다. 평양에 있는 북한 애국열사릉의 최승희 묘비에는 최승희의 사망일이 1969년 8월 8일로 새겨져 있다. 황장엽 선생은 이에 대해 “1969년 8월 8일은 최승희가 숙청된 날이고 실제 사망 날짜가 아니다”고 했다. 어떤 탈북자는 1979년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제자인 김해춘은 최승희가 1969년 지방으로 추방된 후 1975년 양강도 풍산군에서 간암으로 투병 중 사망하였다고 증언했지만 이 역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북한에 납치됐던 고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남편 안막이 간첩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몰락했기에 그 가족에게도 비슷한 죄를 적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중국으로 망명한 전 인민군 군의관 이복순은 “최승희는 국제 스파이였음이 탄로 나서 숙청되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일본과의 연루설도 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최승희 도일(渡日) 초청 공연을 추진했고, 최승희 역시 일본에 가고 싶어 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일본 사회당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 허가 없이 만나 자기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북한은 이 면담을 문제 삼아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고도 한다.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은 안막과 최승희의 숙청을 미리 예언한 적이 있다. 6·25 때 안제승은 형 안막에게 “우리의 출신 성분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다간 언젠가 숙청당할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냐”며 형을 설득했다. 이에 안막은 화를 내며 동생의 말을 무시했다.
동생 안제승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아내인 김백봉만을 데리고 월남했다. 안제승과 김백봉은 처음에는 남한 정부의 감시를 받았으나 머잖아 대학교수를 하고 문화훈장을 여럿 받을 정도로 한국 무용계의 중요 인물로 대접받았다. 그 자손들도 대를 이어 무용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무용으로 손꼽히는 부채춤과 화관무가 바로 김백봉의 창작이다.
최승희 사후 잊혔던 최승희를 되살린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처 고용희였다. 김일성은 늦게나마 최승희를 숙청한 것이 후회됐는지 1980년대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지”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최승희는 복권(復權)의 기회를 잡게 됐는데, 1994년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을 호평했다.
최승희의 생사가 북한 당국의 입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03년이다. 북한 국영 중앙통신의 보도를 전하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북한 중앙통신이 “조국의 광복과 부강과 번영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온몸을 바친 22명 열사의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새롭게 안치했다. 그중 마지막에 최승희의 이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마이니치》는 최승희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김정일의 처 고용희의 조언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고용희는 일본에서 태어나 청춘기에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의 만수대 가무단에서 무용수로 인기를 얻었는데, 최승희의 제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용희의 아들인 김정은도 최승희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었을 수 있다.⊙ [출처] : 문갑식 조선일보선임기자 : <문갑식의 주유천하 -한국 최초의 세계적 韓流 스타 최승희, 공산당에 무너지다> / 조선일보, 2019. 5. ` 12 공감 12 이 글에 공감한 블로거 열고 닫기 댓글 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
[출처] 한국 최초의 세계적 韓流 스타 최승희, 공산당에 무너지다|작성자 ohyh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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