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제1절. 연구의 목적
바울의 구원교리에 대한 해명은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가 죄 아래 떨어져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의 필요성을 요청하고 있는 그 방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바울의 구원교리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세상과 이 세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악과 비참과 그리고 죽음의 세력들을 언급함으로써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비(非) 중생자들의 삶의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의 전망에 있어서 이 세상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죄 그 자체의 권세 아래로 떨어진 실존의 양식으로서의 죄이다. 세상은 주로 감염된 인간의 상황이나 혹은 인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세상은 곧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있는 세계로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적의를 품고 있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하여 있는 타락한 인류이다. 이 같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세상이 일종의 자아 충족적인 삶의 정황으로서 얼마나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대립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바울의 교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일종의 인격적 의미로서 인간의 죄와 타락한 한 주도자(主導者)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해 준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이요,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죄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에 있어서 죄란 따로따로 떼어서 고려되어질 수 있는 개별적 행위나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초개인적인 실존 양식으로서 한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삶의 정황을 공유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의 사실 때문에 여기에 동참하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새로운 삶의 정황으로 옮겨짐으로써만이 이 실존에서 구속(救贖)받을 수 있는 것이다(골 2:13).
본 논문이 목적하는 바는, 세상 안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이러한 죄의 개념과 더불어 자연히 인간 죄의 보편성이 제기된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러한 근본적인 개념은 바울 서신의 여러 면에 걸쳐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인 방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자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는 로마서 1:18-3:30절로부터 언급하고 있는 사도의 철저한 고발을 기본으로 하여 인간의 타락과 죄성,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덧입어 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제2절. 연구의 범위
논제와 관련하여 1:18절 이하는 로마서의 구체적인 본론에 해당된다. 그 본론 중에서 1:18-3:20절까지가 하나의 큰 단락을 이룬다. 이 단락의 주제는 온 인류가 죄 아래서 사망 아래 갇혀 있음을 말한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세상에 대해서 바울이 논증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기 이전의 구약의 역사와 이방인의 역사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졌음을 바울이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에 새롭게 개입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대해서 증거 한다. 이전에 나타냈던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도래해야만 되는 형편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3장 21절 이하에서 드디어 이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도래했음을 극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본문의 범위는 이 큰 단락(롬1:18-3:20)중에서 1:18-25절까지의 내용이다. 이 부분은 온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음을 논증하는 부분이다. 온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는지를 바울이 구원사적인 맥락을 따라서 증거하고 있다. 그 중에서 본 논문의 범위는 죄의 인식부분인 1:18-25절까지이다. 그러나 본문의 선행구절인 1: 16-17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와 관련지어 논의되어야 한다.
죄의 보편성에 대한 입증을 위해서 바울은 체험과 그리고 그에 의하여 책망 받고 있는 유대교 자체의 실상에 두루 호소하고 있다.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사도는,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도 없도다"(롬 3:10-21; cf. 2:24)라고 하였지만, 더욱 자세한 설명은 여기에 주어져 있지 않다.
인간 실존의 보편적 양식으로서의 죄에 대한 개념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바로 바울의 전형적이며 두드러진 용법인 "육"의 개념에서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육"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자체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그 인간성을 뜻하고 있다. 다른 편으로 "육"은 죄 아래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죄인으로서의 존재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바울에 나타나는 "육"의 개념이 철저하게 취급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는 어렵게 된다. 이상과 같은 문제를 논증하기 위하여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본 논문의 제Ⅱ장에서는 타락한 인간의 참상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성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의 의인론을 먼저 살펴본다. 사도는 로마서의 서론에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런데 바울은 바로 뒤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듯이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음을 선언하는 대구적(對句的)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보다 철저히 피력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가 철저한 인간론에서 시작하였듯이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찰의 입구에 그의 인간학적인 진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은 본 논문의 진행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므로 인간의 죄성을 육과의 관련 하에 논증한다.
제Ⅲ장에서는 본문의 주석적 해석을 헬라어 원문을 바탕으로 진술하고 다음에 본문의 내용을 심화·발전시키는 방법으로서 본문을 논증적으로 검토한다.
결론으로서 우리는 죄의 결과가 사망임을 각성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현대교회와 교회의 역할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신학사상과 그의 인간론에 의하여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중생 될 수 있는가를 모색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성
제1절. 하나님의 의
바울의 의인론(義人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 )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다는 교설은 바울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들은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신앙조항'으로 여기고 있다. 바울의 의인론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15-21절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이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인권에 대한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로 구성된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명제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양쪽의 핵심어를 각각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론의 핵심은 달라진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내용을 분설 하면 다름과 같다.
1. 칭의
바울의 칭의교리(稱義敎理)는 '하나님의 의'( )를 전제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法廷的)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救世主, Saviour)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칭의는 사법적(司法的)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죽음, 즉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또한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이다. 비록 부활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통하여 도달하는 길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으며,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죽음이란 인간이 실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두 번째 사건이며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유한성과 필멸의 인간 실존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롬 8:3)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사하여 줄 수는 없다. 율법은 우리의 더럽혀진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너나없이 죄인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죽여왔다. 칭의는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둠'을 뜻하는 데 율법은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둘째, 율법은 전혀 자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격한 규범이다.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만 한다. 결국 율법은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초래하였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셋째 이유는, 율법이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오염시킨 내적인 죄성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고 율법을 흠 없이 지켜나간다고 하여 지나간 삶의 여정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한 이후의 한 부분의 삶이 아닌 그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교정이어야 한다. 설령 그의 전 생애동안에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본성의 내재적인 근본적인 죄성은 제거하지 못한다. 다윗이 그 안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창조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의 내부적인 결핍 때문이었다(시 51:10).
사실상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고 주어졌다(롬 7:13).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cf 롬 7:12). 악함은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에게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칭의가 불가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율법으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cf. 롬 3:20),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개인교사로 표현하였다.
기독교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상황에 침투하여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상황은 인간의 외적 행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무능력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복음은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선물로서 진정한 존재가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진정한 존재란 우리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현존재를 판단함에 있어서 진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하고, 우리 인간의 진정한 존재 방법으로부터의 우리 소외됨을 없이해 주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기 만족적 추구를 포기하고 일시적인 세상 물질에 의존함을 버리게 하며 대신에 우리의 존재를 영원무궁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에 기초를 두도록 초대받는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 즉 노력에 의한 칭의(稱義)나 자기 칭의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에 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2.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율법이 없이 하나님의 의가 가장 밀접한 관계 하에 놓여지게 된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나타나게 하나니"(롬 1:17)라고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의와 그 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가 갖는 현재적 종말론적 성격만큼이나 특징적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cf.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義의 완성이다. 이신칭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의 신분이나 시대나 또는 어느 곳에 살든 막론하고 칭의를 필요로 한다.
2) 크리스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로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희망이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전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놓여 있다.
3)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사역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우리 칭의의 근거나 토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조차도 신적 선물이며 우리 속에서의 신적 역사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4)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며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 칭의에서 우리가 복음에 인격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만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5)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뒤따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지며,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또한 가능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선행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이는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칭의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어 파괴하며,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온당치 못한 산물들임을 폭로해 준다. 칭의라는 말은 그것이 죽음, 곧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마지막 사건에 이르렀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과 경계는 이제 사망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다.
3. 칭의에 의한 은택
칭의란 그리스도의 은택(恩澤)이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간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 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 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여기서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중요하기는 하나 철저하지 못한 기술이다. 즉 죄가 없이는 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 없이는 칭의의 가능성도 없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 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문제에의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초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교리의 중요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슬로건이요 암호이며 속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 인간의 죄와 그 참상
1. 인간의 참상
절대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서 상호간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Righteously) 통치하시며 법칙과 질서의 올바른 원칙에 따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왕직(Kingship), 즉 그의 의(Righteousness)를 반영해야 한다. 그는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나는 새, 그리고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려야만 한다.
즉 그는 땅에 충만하고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 위에 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휘하에 있는 왕으로서 인간은 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통치하고, 땅 위의 동식물을 지배하여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제사장직과 그의 거룩을 반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그의 마음과 영혼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무를 다루는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해야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동료 이웃에 대한 의무를 통한, 하나님께의 간접적인 의무를 다루는 마지막 여섯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만유에 대한 사람의 지배란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의 하나님 형상 됨의 결과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사람의 몸에 대해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도 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름 받았음을 말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참 인간이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비인간적인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다'라고 칼 마르스는 말한다.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극구 부인하고 나아가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사람이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참된 현실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은 비인간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세계 제1차 대전은 많은 공상적인 현대 신학자들을 종교적인 자유주의로부터 너무 비판적이라 할지라도 보다 실제적인 죄론(罪論)에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데이비스(D.R. Davies)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며 죄가 인간 본성 그 자체를 이루고 있다고 믿는다. 그 원래의 내재적인 죄 때문에 완전한 사회는 고사하고, 사회라는 것조차 만들 수 없으며 인간이 문명화하려는 힘을 무력케 하고 따라서 그의 진보를 막는 치명적인 상태의 저주 아래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상태를 그대로 놓아두면 사람은 파멸할 것이며 역사는 분열될 운명에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한 때, 자유주의자였던 라인홀트 니이버(Reinhold Niebuhr)도『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이라는 제하의 1940년의 기포드 강연에서 역시, 원죄의 실재를 강조하는 신정통주의적, 실존주의적 입장에 이르렀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제한된 자아에서 나오는 행동이나 사상은 모두 죄로 물들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참상(慘狀)의 만연(蔓延)과 죄의 본질,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본다.
2. 죄의 만연
죄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둠이 없으시기 때문이다(요일 1:5).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옵 34:10),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다"(신 32:4).
성경에 의하면 죄는 창조의 형성 주간의 6일이 지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매우 좋게 만든 후(창 1:31), 인간 타락 이전의 어느 시점에 천사들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창조된 루시퍼(lucifer)는 교만의 죄를 범했고(cf. 딤전 3:6) 모든 천사들 중에 많은 수가 하나님께 반역하고서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 난 것이다(계 12:7-9).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을 의도적으로 창조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악의 발생이 하나님을 놀라게끔 발생한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지혜에 따라서 그의 큰 영광이 되게끔 이미 정하신 것을 뜻한다.
사람도 본시 매우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엄청난 시기심 때문에 사단은 자신이 쫓겨 난 땅의 아담을 유혹하기로 한 것이다. 사단은 여자에게 나타나 그녀를 미혹케 하고(고후 11:3),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에 빠지게 했다(딤전 2:14). 인간의 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첫 조상은 전 인류의 계약적 대표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고전 15:22). 이런 원죄의 교리와 전체 인류에 대한 아담 죄책의 언약적 전가(federal imputation)의 교의는 이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삶의 정확한 사실과 일치하는 성경교리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우리는, 날 때부터의 자기 중심성과 악한 성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죄의 만연은 개인적인 면과 우주적인 면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죄는 사람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져 있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자마자 사람의 몸 전체와 그 모든 부분과 모든 면에 나타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도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마 15:18-20)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죄는 또한 우주적인 문제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번질 뿐 아니라 사람의 우주 전체에 모든 그 흔적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고 하였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지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하면서 한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창조의 영광인 사람이 타락했을 때 자신과 함께 온 피조물들을 파멸에로 몰고 간 것이다.
3. 참상의 본질
인간의 죄가 가진 그 본질에 대해서 말할 때, 죄의 유혹 자체가 비록 밖에서 사단으로 말미암아 왔을지라도 죄 자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왔음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만이 이 죄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나 바울은 이 첫 번째 죄를 '불순종'이라고 부른다(롬 5:19). 이것은 먼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 말씀을 믿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교만과 욕망이 이에 따라 오게 되었다. 이 죄는 언약적으로 구체화된 십계명의 각 조항을 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사람은 우상숭배로 떨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망령되이 한 것이고 나아가서 에덴의 안식을 파괴하였고 자신과 함께 후손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 죄가 세목적으로 나뉘어져서 범한 것이 아닐지라도 죄의 본질은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죄의 본질과 다를 바가 없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란 하나님의 의로부터 벗어나 어그러져 가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ajdikiva, adikia)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죄에 속한다(롬 14:23).
죄의 적극적인 측면은 실제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죄란 물리적 재난이나 병리학적인 화도 아니다. 또한 존재론적인 유한성의 범주도 아니고 무지와 같은 인식론적 대상도 아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일 뿐이다. 죄는 도덕적인 악이다. 이는 죄가 본질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회적 규범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비윤리적으로 오용하면 잘못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죄가 단지 사회적 무분별이나 국가에 대한 범법행위를 일컫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한 거만한 쿠테타의 시도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하여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죄의 여러 형태를 일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죄(original sin)가 있다. 이는 에데 동산에서의 우리 조상들이 지은 첫 번째 죄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 후손인 우리에게 전가된 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 )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바울에게 있어서 죄란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 죄는 아담, 즉 인간의 자유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 왔으나(롬 5장), 우리를 죄에게 속박 시켰으며 그 대가로 죽음을 가져왔다(롬 6:23). 그런즉, 바울은 죄를 전 인류의 운명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죄를 창조의 필수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아담의 행위와 사망과 죄의 일반적인 상태는 상호 연관성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심판은 우리 존재 자체에 근거한다. 죄라는 상태는 아담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오직 율법으로 인하여 분명하게 되었은 즉, 이 율법은 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그 특성을 드러나게 한다. 우리의 육체적인 실재는 죄 된 것이다. 이것은 죄가 육체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인 존재로 인하여 죄로 말미암아 결정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에 반대되는 욕구들을 자극시킴으로써 개개인이 죄를 짓도록 이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의 권세를 더하는 데에 사용하는 죄는 악마적인 속성을 지니며(롬 7:13) 우리를 속박하고(롬 7:14) 사망에로 넘겨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폭로함으로써 그것의 거룩한 기능을 여전히 이행한다.
둘째, 자범죄(actual sin)가 있다. 이것은 죄의 법에 따라 발전되는 죄의 원칙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직접적인 죄들을 의미한다.
셋째, 특정한 범죄(special sin)가 있다. 예를 들어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또는 죄의 경중에 따라 구별된다.
여기서 원죄는 언약적 유대의 전가(by federal imputation) 아담에게서 그 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이며, 자범죄는 노예 된 인간의지의 연약한 성향에 의해 때때로 행해진 매우 구체적인 죄이다. 아담에 의해 전가된 우리의 원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심으로 용서받는다. 이때 우리자신들이 아담의 첫 번째 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죄를 범하시는 것도 아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암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 5:14).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4. 참상의 결과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이 예고된 죽음이 인간의 타락 후 즉시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사람에게 찾아왔다. 그 첫 증상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이웃과 이웃과의 분리의식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죄책은 죄의 첫째 결과이다. 이에 수반되는 것은 부패와 고통, 노예 됨, 사망, 그리고 부패한 행동이다. 또한 죄의 부패는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은 타락 후에도 행위언약을 계속하여 수행하려고 노력한 사람의 고통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라고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이미 타락 전에 계시하셨다. 그러나 문화명령을 수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른다. 어려움은 죄의 슬픈 결과에 그치지 않고 결국 죽음이 죄의 최후를 맞이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라고 하였다. 비록 이 죽음은 영적 사망을 말하지만, 종국에는 신체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그 끝을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는 영원히 남는다. 이러한 본성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사람 안에서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남아있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되고 억제되고 있다 해도, 부패한 본성과 그것으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이 완전한 범죄이다. 모든 죄는 그것이 원죄이든 자범죄이든 간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이 죄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리고 죄 때문에 사람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이다(롬 6:23).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류의 우주적인 희망이요 생명이다.
제3절. 바울에 있어서 인간과 죄의 관계
1. 바울의 인간학적 용어의 배경
바울의 선교는 시종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사건이었으며 다른 말로 하면, 그 사건이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업이다. 따라서 바울은 인간을 말할 때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범주 안에서 말하였다. 바울이 사용한 인간학적인 용어에서 죄라는 개념이 육의 개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육과 혼, 그리고 몸이라는 용법자체를 언어 분석적이거나 문법적 맥락을 따라 검토하는 것으로서는 인간과 죄의 관계를 다룰 수 없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고는 그의 신학적 이해를 본원적으로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용어의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1) 육체
바울에 있어서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육( , flesh)이라는 말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말을 주의 깊게 검토하여야 한다. 바울적 용법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구약의 용례를 자기 나름대로의 노선에 따라 확장한 것이다.
구약에서의 육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물질이다. 먼저 몸을 이루는 소재로서(고전 15:39) 생의 표현 형식인(갈 2:20) 인간의 물질적인 "육체"( )를 의미하는 것이지 짐승의 고기(meat, 롬 14:21)는 아니다. 육은 몸의 소재(素材)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여서 몸( , body)을 이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육체에 가시"(고후 12:7)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단순히 몸의 근육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몸의 일부가 아니라 밖으로 드러난 인간의 체용(體容), 즉 전인격을 가리켰다(갈 4:13). 그러므로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육체"( )는 몸의 근육부분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육체에 대한 바울의 여러 언급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은 육체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육체란 인간의 연약함, 즉 인식의 약함을 나타낸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바울의 독특한 용법은 "너희의 육신" 즉, 사람의 자연적인 이해력이 약하므로 사람의 예를 들어 일상생활의 유비(類比)를 사용하여 설명한다고 한다. 로마서 8:3에서도 바울이 "육신" 즉 율법이 작용하는 연약한 인간 본성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기" 때문에 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바울은 때때로 아담 안에서 자기가 물려받은 것에 속하는 죄 있는 성향을 "나의 육신"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의 육신에는 선한 것들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에 대한 대표적 언급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8,25)라고 하였다. 이것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거듭난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의 표준에 따라 서로 시기하고 싸우고 판단하기 때문이다(고전 3:1-4).
바울이 신자들의 종말론적인 삶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표현 중에 '성령의 첫 열매'( , 롬 8:23)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에게 드려진 첫 열매를 뜻하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직 이 피조계에 만연되어 있는 죄악과 부패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패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세의 생명의 첫 열매인 성령을 갖고 있다. 첫 열매는 추수 자체와는 다르지만, 추수할 열매들의 첫 수확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성령 안에서의 삶은 내세의 삶이며, 충만한 추수의 삶은 아니지만 종말론적인 추수의 최초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갈라디아 5:19-21에서 "성령의 열매"와 대조하여 열거하고 잇는 "육체의 일"에는 음행과 술 취함과 같은 감각적인 죄악들만이 아니라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cf. 롬 6:6). 그러나 육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순의 한 측면이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골 3:9f)고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바로 그와 같은 것, 즉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엡 4:22,24). 옛 사람은 이전에 아담 안에 있었을 때의 그들의 모습으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 본성의 화신이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모습으로서의 새로운 인간 본성의 화신이다.
(2) 몸
몸( , body)이란 사람의 현 상태, 즉 바깥모습을 의미한다(갈 6:17; 롬 7:24). 그것은 사람의 피조성을 지시하며 육의 경우와 같이 인간 전체를 지시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그 몸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전 6:13-20). 사람은 구체적 존재로서는 몸과 거리를 가지고 대립하녀, '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자로서는 행실의 객체인데, 객체로 언제까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나' 안에 끌어넣어야 할 것이며 그때에도 그것은 나와 이질적인 것이어서 자기의 의지에 굴복시켜야 한다(cf. 갈 5:16: 육체의 정욕). 사람이 몸이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와의 긴장을 지속하면 그것이 윤리적인 노력이 된다.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지만, 몸이 가지는 남과의 연대성 속에서 의무로 변하며 그 의무를 자기의 것으로 찾을 때 그것은 주체성이 즐겨 행하는 윤리적 노력이 된다(cf. 롬 8:13).
바울 용법에 있어서 몸은 때로는 육체를 대신하기도 한다. 갈라디아 5:19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로마서 8:13에서는 "몸의 행실"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죄의 몸"(롬 6:6)은 로마서 8:3의 "죄 있는 육신"(죄의 육체)과 동일한 뜻이다. 우리는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 로마서 7:24의 "이 사망의 몸"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반면에 로마서 8:10의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은 부활 때에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바뀔 형과 육으로 된 죽을 몸을 가리킬 뿐이다. 바울에 있어서 몸은 육체와 달리 고상한 의미를 띤 단어이다. "몸은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부르고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 할 때(고전 6:13,19,20), 그는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구속(롬 8:23)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육체'로 바꾼다면 그의 용법과 불일치하게 된다. 바울에게 있어 육체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나 몸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다.
(3) 영
영( )이 헬라 사상에서는 육에 대립한 정신적인 원리였던 것과는 달리 바울에게서는 세례로써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생의 원리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성결케 하는 힘이다. 성령은 육체와 끊임없이 싸우지만 육체보다 더 강하여서 육체의 지배 하에 굴복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육체가 점차로 활동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바울에 있어서 영은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에 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라고 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준다. 바로 이 점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럼으로써 성령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일으키심을 받으리라는 확신, 즉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는 것을 전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몸이 신령하여 살리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시 살아난 몸이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과는 구별된 살리는 영이라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 전서 15:45에 근거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곧 성령이라는 말은 아니다. 살리는 영은 여전히 몸을 가지신 부활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장 독특한 통찰 가운데 하나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성령을 부활생명의 "처음 익은 열매"(롬 8:23), 신자들이 장래 받을 영광의 유업의 보증 또는 할부금의 첫 불입금으로 묘사하고 있다.
"새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라고 하는 이 구절은 바울 신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바울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영광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새 계약의 영광스런 일꾼임을 내세운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고후 3:9) 라고 하면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본문 후단). 그리하여 그 자신을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의 이행자라고 주장하였다(본문 전단). 모든 계약 참가자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알게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약관계의 핵심 사상을 표현한다. 이러한 계약의 요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일체감에 있는 것이지 어떤 문건이나 표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권능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준다. 주가와 요한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가지신 예수께서 이 땅을 다음에 오는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며, 성령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유다인의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인의 속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유다인이 되며 할례도 법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롬 2:28-29).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였지만. 그 얼굴에는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고후 3:7-8). 하나님의 영성을 인정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성서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에서도 하나를 이루게 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사상은 그의 성령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cf. 12: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한 몸에 속한 같은 지체로서 공동운명체로서 그 존재와 통합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원천이자 원리인 성령으로 인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직임을 전체의 선을 위하여 수행한다는 사상이 바울의 성령관이다.
Ⅲ. 본문의 해석
제1절. 본문개관
로마서 1장 18-25절은 자연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하늘로부터 계시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진노는 불의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불의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앞의 17절과 18절은 반 명제적인 병행을 이룬다.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 )는 16절과 17절에서 세 번 반복된 가르와 상응하며,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문장 이행을 위한 접속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의 필연성은 그것의 실현과 더불어 동시에 드러난다.
바울은 기독교를 인간 구원의 종교라고 표명한다. 더불어 복음은 죄로 손상된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함과 동시에 죄 된 모든 인간은 구원 받아야할 대상임을 밝힌다. 본문 18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된 죄 된 인간상을 드러내면서 이것이 불경건의 이유이며, 불의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상태가 역시 죄인임과 더불어 이방인과 같은 상태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리에 있음을 밝힌다.
본문의 위치는 죄의 권세 아래서 상실되고 폐기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 속에서 복음의 긴급한 필요성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우주적 성격에서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본문은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동시에 그 이해는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이 진노 아래 있음을 알게 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함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다.
본문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게 되는데 불의한 가운데 거짓 진리를 가진 모든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사람들 속에 뚜렷이 있으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이시지는 않으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창세로부터 만드신 만물을 통해 나타내 보이셔서 확실히 알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명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허망한 생각만을 하게 되고 미련한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썩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 즉 사람, 금수, 벌레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롬 1:18-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더러움 속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심으로 그들 스스로 무가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물주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찬송드릴 분입니다. 아멘"(롬 1:23-25).
사도는 이제 18절 이하에서부터 1장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얼마나 죄악가운데 있는지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한지를 말하고 있다. 17절에 나오는 "아포칼륍테타이"(' )가 18절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불경건한 자에게는 진노로 '나타나는'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오르게"( )를 번역한 '진노'는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질이다. 따라서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타락한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키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천재지변을 통한 심판이다. 그러면 여기서 진노를 받게되는 불경건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는 사도가 특별히 이방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보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믿음의 도가 이방인에게 전해지기 전까지의 모든 이방인을 말한다.
19절과 20절에서는 거짓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도 사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신학적 묘사이다. 자연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계시인 성경이나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인류에게 개입하시지 않고 자연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피조 세계에 드러내시는 일반계시를 말한다.
21절 이하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우상숭배와 거짓진리로써 하나님을 거짓되게 섬겼다고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은 실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하며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허무하여 질뿐만 아니라 미련한 마음이 더 어두워지게 되므로 스스로를 지혜 있는 자로 여기게 된다고 하였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갖가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24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억지로 보이는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어떻게 임하였는지가 묘사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러한 자들을 방치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에 멸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속 죄를 지음으로써 결국 멸망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인간의 생이 마감할 때까지 참으신다.
이는 최종 결과를 보기 전에는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지 않는다. 저희를 마음에 정욕대로 내버려두시지만 25절 하반부에서 사도의 선언한 바와 같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제2절. 본문주석
1. 로마서 1:18
1) ' ' ,
2) The wrath of God is being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the godlessness and wickedness of men who suppress the truth by their wickedness,
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
4)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모든 불 경건함과 불의 위에 다스리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가르"( )는 본문에 앞서 16절과 17절의 의미와 함께 17절 18절과 의식적으로 반명제적인 병행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8절에 나타나는 가르는 앞 절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가르와 상관되며 따라서 가르는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단순한 접속어가 아닌 16절과 17절에서의 이유를 18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법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는 지금까지 설명해 왔던 것들과 연결하여 전제된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가르는 17절과 18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의' 개념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들에게 가르를 통하여 배경으로 나타내면서 본문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이 소사를 사용하여 교리적 진술을 시작하고 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태초부터 인간에게 임한 이후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나 다른 방법으로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가르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이 믿음으로 믿음에 외에는 다른 어느 방법으로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확실한 의분이다. 진노가 복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 경험 속에 나타난 것이다. 이 진노는 비인격적인 복수나 혹은 심지어 인간적인 품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로 인간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보복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그가 분노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하나님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당하는 죄인의 느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의는 죄인을 궤멸시키지만, 하나님의 의는 죄를 궤멸시키고 죄인을 살린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스바냐 1장 18절, 다니엘 8장 19절에서 이미 나타난 최후의 심판을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기술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내용은 다음의 죄를 진술에 대한 결론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그리스도 이전에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떠나서 진노아래 있음을 알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의를 그 우주적 성격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이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이며, 단순한 분노가 아닌 합리적이며 합법적인 진노이다.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 의 계시는 필수적인 것으로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공정하게 머물러 있어서 그 의 없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나타나는 것인가? 여기에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에, 그리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고 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함의하고, 불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부당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합당한 존귀를 박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경건 하고 불의를 행함으로 진리를 막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그러면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 진노와 상이한 계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계시에서 나오는 것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나타난다는 의미인가? 그것은 불신앙의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공경이 부족한 자와 사람들을 향한 의로운 행위가 결핍된 사람, 불공정한 사람들을 향해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거처할 수 없는 거처나, 혹은 천상적인 진노를 나타낸 것이 아니요, 오히려 중재될 수 없고 불가피하게 인간에게 닥치는 운명을 나타낸다. 이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은 무엇이나 복음아래 있지 않으면 진노를 당한다는 것이다(시편 14:2). 비록 죄 된 인간이 세속에 빠져 있을지라도 세계 전체가 창조자에게 속해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다. 19절에서 보다시피 세상의 현실과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 속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으며 그 현실과 더불어 설정된 법에 대하여 반항함으로써 그 현실을 억압하는데 있다.
2. 로마서 1:19
1) .
2) since what may be known about God is plain to them, because God has made it plain to them.
3)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4)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에 대하여 알 만한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단순히 내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일반계시의 방편인 자연 즉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창조의 영역 안에서라면 무엇이나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충분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리시는 모든 선포를 그가 위의 제한된 능력에 적응시키는 것처럼, 인간들도 자신들을 한정시켜야 하는 어떤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희 속에서- 이는 하나님의 현현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현현은 강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을 말만한 것이 저희 속에 즉 인간들 가운데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실존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사도는 인간이 창조된 세계의 구경꾼이 되도록 창조되었으며, 장엄한 세계를 봄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저희에게 보이다'의 '밝히 보이다'는 전문적인 계시언어로 소개하면서 계시한다는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자연신학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3. 로마서 1:20
1)
2)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men are without excuse.
3)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4)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창조물을 통하여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로부터"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창세 이래'로 라고 할 수 있다. 즉 아주 오랫동안 창세로부터 인간에게 보이시고 그들 마음속에 부정할 수 없는 인상을 남기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다. 바울은 세상보다 선행하며 우월한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한 창조를 의미하고 있다.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는 헬라어로 "노우메나 카도라타이"( )인데 "노우메나"란 동사는 엄밀히 말해서 지능을 가리키며, "카도라타이"는 물리적인 시력을 가리킨다. 이 동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들을 명상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음을 묘사해 준다. 인간은 피조물 중 어느 하나와 창조주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날 만큼 신 개념을 가질 수 있다. 분명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비록 저희들은 하나님의 존재하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찬양 드리기에 합당한 성하심과, 비교할 수 없는 지혜 등을 드러내는 증거들에 끊임없이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저희들은 하나님을 저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그에게 경배 드리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 때문에 핑계치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반항은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 현실의 숙명적인 낙인으로 간주된다. 부정사 "핑계하다"( )는 목적용법으로 볼 수 없으며, 최후의 심판에 결부시킬 수 없다. 이 고발의 의미는 오직 결과적으로 이해할 때에만 확실히 알 수 있다.
4. 로마서 1:21
1) , .
2) For although they knew God, they neither glorified him as God nor gave thanks to him, but their thinking became futile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4)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설명이다. 바울이 아덴에서 말했던 것처럼(행 17:27) 비록 타락했지만 어떤 신을 열망함이 없는 자, 즉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 일을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감사함으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벵겔은 어떤 이성적 존재가 설령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지 아니한 까닭에 하나님밖에 존재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의 무지함이 이러한 것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경배와 감사의 의미인 바 하나님의 위임을 만족시키는 일은 이방인의 종교로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데, 또한 제4에스라서 8장 60절에서도 간사와 경배를 포기하는 것을 죄로 간주한다. 이런 경배와 감사가 실제로 행해진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즉 창조자, 주, 심판자로서 숭배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고, 변호하시고, 무한히 인내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원성, 지혜, 선하심, 공의에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분을 향해서 감사해야 하는데 빚진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여기는 동사가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바뀐 것인데, 이런 말들은 확증된 죄의 결과를 지시하며, 하나님의 보응에 관한 다음의 훨씬 긴 진술로 넘어가기 위한 이행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예레미야 2장 5절: "그들은 나를 멀리 떠났으며, 헛된 우상들을 쫓았고 허황하게 되었다." 시편 93편 11절: "모르는 자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어서"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런 전승에서부터 빌려온 70인 역의 이 핵심적인 말을 받아들여서 허황 됨은 그 자체의 피조성을 부정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야기된 세상의 특징이라고 확정짓는다. '허망하다'는 우상이나 우상숭배에 대한 예배 및 우상숭배자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상에 대한 경배로 생각이 각인되었음을 나타낸다. '미련한 마음'은 인간의 인격성에 손상을 입어 미련하게 되어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5. 로마서 1:22
1) ,
2) Although they claimed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4) 인간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어서
"파스콘테스"( )는 자기주장을 말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다. "오모란데산"( )은 "모라이오"( )의 과거 수동형이므로 '어리석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사도가 21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우상숭배와 거짓진리로서 하나님을 거짓되게 섬겼다고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인간들이란,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자신이 허무하여 질뿐만 아니라 미련한 마음이 더 어두워지게 되므로 스스로를 지혜 있는 자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6. 로마서 1:23
1) .
2) and exchanged the glory of the immortal God for images made to look like mortal man and birds and animals and reptiles.
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4)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영원히 썩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106편 20절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을 가리키며 예레미야 2장 11절의 이스라엘이 주를 다른 신들과 바꾼 것을 말한다. 바울의 사상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우상의 형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함을 말한다. 바울은 역사맥락에 대한 통찰력을 보인다. 따라서 이 교도의 현실은 광야세대에 의한 황금 송아지 숭배와 관계를 갖게 되며, 창조와 출애굽, 타락과 이스라엘의 죄의 전통들을 상호 결합시켰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여기서부터 상실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울은 이런 전승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시편전승과는 달리, 그러나 랍비적 해석 및 70인 역의 독립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한다. 이 '영광'은 원인간에게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광에 대한 몫으로서 부여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아담처럼 죄의 타락을 반복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바꾸어 버렸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미련함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자 소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모양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혔다. 왜냐하면 바울은 죽을 인생을 불멸하시는 하나님과 대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썩지 않는 영광을 인간의 바로 그 비참한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처럼 큰 과오로도 만족하지 않고서 가장 비열한 야수의 수준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우준 함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잃어버린 신성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이러한 괴상한 노력들에 분개하며 경멸감을 나타내고 있다.
7. 로마서 1:24
1) ,
2) Therefore God gave them over in the sinful desires of their hearts to sexual impurity for the degrading of their bodies with one another.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4)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24절 이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억지로 보이는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하였는지가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러한 자들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죄짓도록 방치하여 두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장에 멸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속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결국 멸망당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인 징벌권을 행사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생애가 끝날 때가지 참으신다.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가라지의 비유"(마 13:29-30)를 예로 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최종결과를 보기 전에는 의인과 악인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악인이라도 그의 생애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니다(cf. 딤전 2:4).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신다"( )는 표현은 24절과 26절에 이어서 28절에 걸쳐 세 차례 나온다. 이는 '넘겨주다'라는 뜻과 함께 '포기하다'라는 표현이다. 이는 마태복음 4장 12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의 권세에 넘겨주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고의로 저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그들 자신의 자기 결정과 인간의 도덕적 자유에 대한 대가의 일부분인 자멸에 그대로 두셨다. 하나님께서 사양하시고 물러나신 것이 사람들을 더 깊은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는 언제나 새로이 전 우주적으로 행하여지는바 창조자에 대한 반항의 원죄에 의하여,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으니, 곧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피조물을 내버려두고 세상에 내맡긴다. 이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고의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끝없는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의 지켜보는 하나님의 심성은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인간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는 의미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때문에 뉘우치지 않는 죄인들이 죄 때문에 야기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정욕의 구덩이로 던져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단호한 사역으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버림을 당한다. '더러움'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는 음탕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써 이방인의 본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죄인은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죄인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며 구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을 말해 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다.
골로새서 3장 5,6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온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이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포기하시어 그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적 부정으로 탐닉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대 문명이 성적개방으로 인한 자유분방한 생활의 현상이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하게 하는 구절이다.
8. 로마서 1:25
1) , -
, .
2)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created things rather than the Creator--who is forever praised. Amen.
3)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4)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고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더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5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추가된 자세한 설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려 두심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재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렇다. 그들은 조물주보다 오히려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다. 그러므로 24절의 징계를 받을 만하였다. 25절 하반절의 "카이"( )는 설명적이다. 다시금 "진리"( )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혹은 그의 참된 본성이 아니라, 열려진 하나님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거짓'은 인간의 기만행위 혹은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거짓 신'이 아니라, 특별히 이방인의 종교에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가리우는 사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하나님의 진리의 본질을 사기를 쳐서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물주와 피조물을 나란히 두고서 그들은 피조물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 " 는 원래 비교급의 문장에서 '...보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 ...대신'을 의미한다. 이교도들의 피조물을 신격화한다는 사실에 바울은 놀라 유다의 관습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기릴 뿐 아니라 꺼림직 하여 그러한 가증스러운 사실을 멀리하고, 아멘으로 그의 진술을 맺는다.
25절 하반부에서 사도가 진술한 바와 같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으며(사 43:21), 찬송을 결코 우상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다. 조물주 하나님은 선부 하나님만을 일컫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단일한 분은 아니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다.
제3절. 본문의 논증적 검토
1. 본문의 상황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롬 1:8-17)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 즉 바울이 로마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그처럼 방문하려고 애쓰는 이유와 로마서의 주제에 대한 대 선언의 말씀이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롬1:1-15). 이어서 바울의 복음의 주제인 복음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롬 1:16-17)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 후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한다(1:16-1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義)의 선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이 바로 그 주제였다. 로마서의 서두와 서론에 이미 바울이 로마 교회에 증거 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이 잘 반영되어 있었음을 상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감추어졌다가 이제 드디어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즉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벌써부터 로마서 서두와 서론에서 언급되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롬 1:16)이다. 로마서 서두의 이 구절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소식을 오직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소식으로 해석하고 전개했다는데 있다. 이 가르침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통의 유산이 아니라 사도의 독특한 창작물이다. 바울이 모든 원시 그리스도교와 결부시킨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 가르침의 방향에서 앞세우고 반성하면 개작하고 그 의미에서 다진 곳은 이 외에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이 가르침은 사도를 유대교 측의 원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그리스도교 역시 그를 비난하는, 그리고 이방인으로 만든 원인 되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것을 통하여 만민의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성에 처음으로 본연의 신학적 근거를 주었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는 신의 '의'의 계시가 복음에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우선 그리고 동시에 신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 상실을 거론하고 전개하는 방식으로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이 계시는 생명에로의 진의 부름, 즉 신의 율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핑게'하지 못하고 그의 분노가 그들 위에 임한다는 데서 분명해진다(롬 1:18:21). 복음의 휘황한 빛에서 율법 아래의 인간의 존재는 신 앞에서의 자기 상실로 드러난다.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언제나 복음의 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지금껏 어떤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에 의해서도 그렇게 심오하게 철저히 거론된 적이 없던 인식, 바로 이 성스럽고 선한 율법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부각된 것이다. 이미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작용임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2. 인간의 파멸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 1장18절 이하에서 이 물음에 대하여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 1:18) 데 있다. "이는 신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나타나 있음이라. 이는 신이 이를 그들에게 나타냈음이라. 불가시한 본질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창조이래 그 만든 것들에서 이성의 눈에 보인다"(롬 1:19-20). 이것은 그리스적 유대적 지혜의 언어이다. 그러나 바울은 반성들로 비로소 그 길을 열어야 한다는 가능성에 관례 호교적으로 교육적으로 말하지 않고 즉석에서 고발하면서 인간들을 향하는 현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신을 알되 신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그들의 무식한 마음이 어두워져 있다"(롬 1:21). 그러므로 신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은 인간은 신에 의해 밝혀진 피조물 한 가운데 서있는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하는데 그의 실존은 지금 무서운 역용(逆用)에 "내맡겨져 있다"(롬 1:24f).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할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역용은 인간이 종교라고 부르는 것 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서 제1장에서 이방인과의 관련 하에 포괄적으로 진술되었는데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적중되는 만큼 경건한 유대인들도 함께 포함된 것이다. 그 화살은 역시 유대인들에게 향해졌고 유대인 자신을 적중시킨다.
이렇게 하여 사도는 유대인의 바리새적 특권을 압살하여 버린다. 왜냐하면 신의 율법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방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롬 2:14; 빌 3:6). 그러나 열심 있는 실천도 유혹적인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언제나 신에 대해 자신을 막고 자기 자신에 매여 있다. 바로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야말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율법에 매여 있는 자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의해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열 수 있다고 오해한다.
3.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에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선언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런데 바울은 바로 뒤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듯이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 나타난다. 바울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로마서 1:19절 이하와 32절의 빛 아래서 마땅히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의 산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에 의하여 죄의 보편성의 무서운 성격이 확정되고 드러났을 때 이 죄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죄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거스려 참여하는 일종의 본성적 힘이니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인간이 희생되는 일종의 운명이나 혹은 인간이 포함되는 자연적인 파멸의 과정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정하신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죄의 결과가 뜻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 그 자신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단순한 심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느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철두철미 하나님 자신의 의와 거룩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심판하는 분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한, 우리 위에 내려진 심판이다. 우리가 불신(不信)의 비신(非神)(롬 1:18)에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이기를 꺼려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분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조짐이다. 그러나 신적 진노의 마지막 결과는 부활의 믿음 없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과 모순되게 이 세계의 현존과 상존을 긍정하는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다. 자신의 진노 가운데서의 하나님, 우리를 참담하게 여기시는 분, 우리를 외면만 하시는 분, 우리에게 '아니다' 만을 말씀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 모두에 의해서 다만 유보 아래서만 불러질 수 있는 그러한 분- 곧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마지막 말일 수 없다. 그 진노가 그 분의 참된 계시일 수 없다. 비신은 결코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마주치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비신이다. 불신앙 역시 하나님과 부딪힌다. 우리가 믿음 대신에 화근만을 택하는 한, 그 세계는 자체의 절대적 불가의성 가운데서 하나님 진노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앙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망령되게 일컬음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밖에, 그리고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선언은 그것이 믿음에 대한 의의 계시와 함께 이미 지금 종말론적 실재로 말해지고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의 중요한 첫 단락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 즉 사도는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 대한 주제의 정의를 내린 다음, 다음과 같이 강한 논조로 둘 가운데 하나를 택일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나니."
로마서의 한 단원의 출발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 선언은 마땅히 17절에서 결정적으로 선포된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의 계시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비로소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함께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 안에서 죄에 대하여 내려지게 되어 있던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고 실행되어지고 있다.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진노의 실제작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구원시간에 묶여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의 대조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계시를 서로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의 특색을 보다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적인 시위(示威)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의와 죄의 사면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노와 심판의 실행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후자는 또한 구속과 영생은 복음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그 의의 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의 증명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에( ; 18절) 하나님은 의를 주신다"라는 식으로 로마서 1:17절과 1:18절 사이의 밀접한 간계를 도출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는(롬 1:18) 믿음에 의한 의를 주시려는데 대한 동기가 아니고 오히려 이 주어진 의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의 증명이다.
4. 맺음
죄가 가져다준 인간의 모든 부패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망이다. 이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삯이다(롬 6:23). 둘째는 죄에 대한 속박과 도덕적 무능력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적인 혼돈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이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라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사망은 완전히 만개 된 죄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선고이며(롬 5:12ff, 18)동시에 죄의 자연적인 그리고 내적인 귀결이다. 말하자면 죄는 사망을 지향하며, 그 사망 안에서 죄는 왕 노릇 한다(롬 5:21). 사망은 곧 자기의 육체(죄)를 위하여 심는 자가 거두는 열매이다(갈 6:8; cf. 롬 7:5). 그러므로 사망은 죄의 마지막이다(롬 6:21). 따라서 사망은 단순히 생의 종지부를 찍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부터 전도(顚倒)되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죄의 부패에 대한 두 번째 일반적인 서술은 인간이 되에 의해, 그리고 죄 아래서 자신을 발견하는 노예감, 무능력, 죄의 포로감이다. 죄 아래 있게 되는 것, 죄 아래 포로되는 것 혹은 죄 아래 예속되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 가져오는 운명이다(롬 3:9; 갈 3:22). 죄는 거듭하여 일종의 인격적 세력으로, 곧 인간이 노예로 팔려서 그리하여 그의 요구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의 주관자로 나타나고 있다(롬 7:14).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바울의 죄의 교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Ⅳ. 결론
로마서 1:18-25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방 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아 버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은 핑계를 삼을 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곧 철저히 나타나게 된 저 이탈은 즉시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의 혼동, 그리고 얼마간은 유희적인 혼동일 수 있을 것이며 한층 더 피상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진리의 그득함 속으로 해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가능성이 주어지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꿔 치게되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드리워진 안개는 먹장구름이 되어 양극 자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우리가 신이라고 칭하는 저편에서 종종 불리워지는 마지막 비밀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고의 구체적인 그 비신은 승리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밤의 지혜"(롬 1:22)이다. 밤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의하여 계속 잇달아 부정되는 관찰, 곧 인간 제반사의 평면적 관찰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밤의 지혜는 인간의 가로막혀진 길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보고 있으며, 그러한 길의 방향과 목표의 의미에 대해서 불분명한 상태에 있지 않다. 밤의 지혜는 그 원인을 알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보고 있다. 그러나 밤의 지혜는 '정지'라고 하는 명령을 자기에게 떨어지도록 감행하지 않는다. 곧 인간적 죄성에 대한 고발은 자신의 창조자를 망각하는 인간의 행로를 항상 동반한다. 이러한 망각의 결과와 우리의 밤의 유랑의 마지막,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토록 분명히 주지되는 곳에 어찌하여 그 망각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죽음은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정이요,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의 극복과 갱신을 지시하는 것, 아니 지시하는 그 모든 것은 다름이 아닌 다만 하나의 죽음으로서 밖에는 나타날 수 없다. 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인간은 죄의 인간이다. 죄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인간에 대한 원칙적인 규정성이요 입장이다. 죄는 권력(롬 5:21)이니 곧 다름 아닌 그에 의하여 세상의 인간이 지배받고 있는 그러한 권력이다. 개개인간의 죄는 많든 적든 이러한 정황의 분명한 명시화로서 바로 인간이 처해 있는 정황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그 무게에 대하여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칙적인 규정성과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 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죽음이 죄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근원적인 죄, 비명시적인 죄로서 이것을 통하여 죽음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생명으로서 특징지어진 하나님에 대한 인간관계의 훼손이다. 이것은 하나의 죄과로서의 죄요, 운명으로서 죽음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진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죄라고 말하는 사도는 이어서 참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예배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질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와 교회사람들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