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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설교이론과 실제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by 이덕휴-dhleepaul 2020. 4. 27.

(說敎理論과 實際)

 

主 題 : 그리스도의 法을 成就하라 -갈라디아서 6장 2절-5

                                                        指導敎授:

題 出 者: 이 덕 휴

   發表日字: ‘98. 11. 16

  

발표장소: 그리스도 神學大學校 神學大學院 대강당

 

 

                       

 

차 례

Ⅰ. 本 文 ......................................... 3

Ⅱ. 本文註解 ...................................... 4

 

1. 序 論 ..................................................... 4

 

(1) 著者 ..................................................... 4

(2) 受信者 ................................................... 5

(3) 年代 ..................................................... 5

(4) 背景 ..................................................... 5

(5) 目的 ..................................................... 5

(6) 特徵 ..................................................... 6

2. 本文註釋 .................................................. 6

 

(1) 本文의 語意的 分析 ....................................... 6

(2) 짐과 법의 관계 ........................................... 8

 

Ⅲ. 說 敎 ......................................... 9

※ 參考文獻 ....................................... 15

 

Ⅰ. 本文

  * 聖經 말씀: 갈 6: 2-5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 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

 

   

* 要 節 : 갈 6: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Bear one another‘s burdens, and in this way you will fulfill the law of Christ.

Άλλἠλων τὰ βἀρη βαστἀξετε, καὶ οὕτω? ἀναπληρὠσετε τὸν νὀμον τού Χριστύ.

* 參 照 : 롬 13: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 무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 主 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짐을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여기서 짐

이란 그리스도께서 지신 우리의 죄와 허물의 짐이 아니다. 이 짐은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만 지실 수 있는 짐이다. 우리의 짐이란 그리 스도의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의 문제를 위해 함께 심려하고 그 어려움 을 직접 간접으로 돕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짐은 우리가 각각 처한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이 짐을 져야 한다. 이 짐을 지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 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새 계명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 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성취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끊임 없이 짐을 지는 일로 간주했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열매(갈 5:22)로 인하여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자유하게 된 바로 그 성령의 열매 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제는 짐을 서로 지어 주라는 실천 적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Ⅱ. 本文 註解

 

1. 序 論

이 서신서의 전형적인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이 서신을 썼는가? 를 먼저 물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가르치고, 증명하고, 책망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얻었는데,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 할례를 받으므로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스스로 지녀 절기를 지키고, 이런 규례를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전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강요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였다.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도 아니다.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친 바울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을 다 준수하여 성취하여 하나님께 의를 획득하였고, 믿음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이제는 율법을 다시 지킬 필요가 없고 다만 본문의 내용이 적시하는 데로 서로가 남의 짐을 져 주고 그리하여 나의 의무를 다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1) 著者

 

저자는 본문에서 “사도 된 바울”(갈 1:1, 6:11)이라고 밝혀져 있다. ‘작은 자’를 뜻하는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자’라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이미 그가 태생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제 바울의 자화상을 그가 스스로 밝힌 성경말씀에서 찾아보자. “나는 유대인입니다. 소읍이 아닌 길기기아 다소성의 시민으로서 이 성에서 유대인의 철저한 생활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나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다져진 우리 조상들의 엄한 율법의 교훈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내 동족 중 여러 年甲者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거의 흠 없이 순종 하였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행 21:39,22:3, 22:28; 갈 1:13-14; 빌 3:5-6).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B.C. 4년: 바울의 탄생(그리스도의 탄생 연도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A.D. 33년: 구원받음(행 9장)

47년: 1 차 전도여행 시작(행 13:1)

49년: 제 2 차 전도여행 시작(행 15:36)

52년: 제 3 차: 전도여행 시작(행 18:23)

56년: 바울 예루살렘에서 체포됨(행 21:18)

61년: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행 28장)

62년: 감옥에서 석방

62-66: 자유의 기간

67년: 두 번째 투옥

67년: Nero 에 의해서 순교 당함

(2) 受信者

 

성경 본문에는 최초의 독자들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갈 1:2, 3:1)이라고 되어 있다. 이 서신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진 바울의 유일한 서신다. 이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본서의 수신처가 북쪽 갈라디아 설과 남쪽 갈라디아 설로 나누어진다. 일반적 견해로는 로마령 남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 즉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年代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영감을 받아서 쓴 저술이다. 바울은 그의 제1차 전도 여행(행13장-14장) 이후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예루살렘 총회가 A.D. 49년에 열렸으니까 A.D. 48년이 이 서신의 기록 연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背景

 

갈라디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개종 이후 처음으로 겪었던 반대는 그들 사이에 살고 있던 유대인 불신자로부터 받았던 박해였다(행 13:45-50, 14:21-23). 바울은 제1차 여행에서 갈라디아를 떠난 후 곧 유대인들이 와서 새 개종자들에게 그들은 아직 완전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했다(갈 1:6-7).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인 율법의 신봉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은 받아들이기에 난관을 겪은 것이다.

(5) 目的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중요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새 개종자들이 신앙을 해치고 있던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2) 이 유대인들 때문에 의심받았던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 함.

3) 구원은 믿음에 율법을 더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온다(以信稱義)는 것을 강조함

4)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자유(갈 5:1) 안에서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갈 5:22-23) 권하기 위한 것임.

(6) 特徵

 

이 서신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많은 대조: 바울 사도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 더 많은 대조를 하고 있다.

2) 강력한 어조: 바울 사도는 선동자들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하여 정당한 격론을 펼쳤다. 제1장에서 그는 두 번이나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 9)라고 쓰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靈的인 다이나마이트여서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서는 다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서신의 저자는 일찍이 날카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 통렬한 논쟁가, 두려움을 모르는 靈的使徒, 그의 생애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사람 등으로 묘사되었다.

3)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과 행위 사이의 분명한 구별: 이 서신은 하나님께서 루터와 웨슬리 같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일깨우는 데 쓰여졌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와 약혼했다고 하였으며, 이 갈라디아서는 나의 아내라고 하였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전형적인 논법: 이 서신은 일찍이 영적 해방의 대헌장이라고 하였다.

5) 인사말이 없다: 위급한 상황에서 쓰여진 서신이라 축하나 칭찬이 없다.

2. 本文註釋

(1) 本文의 語意的 分析

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갈 6: 2; 6: 5).

여기서는 2절과 5절을 서로 대조하기 위하여 중간의 말씀을 생략하였다. 2절은 자신이 마땅히 지어야 할 짐 외에도 형제의 짐을 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보다 우세하며(요 7:23), “하나님의 법”(롬 7:22-25)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며(요 15:12), 다른 사람이 진 짐을 도와주는 것도 그 일부이다. 지금까지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죄의 짐을 진 분이며(사 53:3-10), 그분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고 말씀하셨다.

2절에서의 짐(τὰ βἀρη)을 지는 용법으로서의 “바스타제테”(βαστἀξετε, ‘지다’, ‘짊어지다’)와 갈라디아 5장 10절에서의 용법은 다르다. 5:10에서는 그 단어가 首位의 유대주의자에게 사용되었다. 이 때는 무거운 심판을 받는(bear, 의무적 부담) 용법임에 반하여, 2절에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데 사용된다. 본문의 전후를 살펴서 판단할 때, 2절의 짐은 범죄자의 죄와 거기에 따르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 그것을 포함하여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저어야 한다. 따라서 이 때의 짐은 좋은 짐, 책임과 배려의 짐을 지을 때의 바스타제테(βαστἀξετε)의 용법이다. 또한 바스테제의 용법이 5절에서 “포르티온”(φορτἰον, burden)과 함께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가볍고 짐꾼이나 행상인들처럼 ‘짐 꾸러미를 짊어지다’는 것과 좀더 비슷해진다.

2) 그리스도의 법(τὸν νὀμον τού Χριστύ)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法”(νὀμος, Law)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노모스(νὀμος, Law, 律法)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이다. 히브리어의 토라와 희랍어의 노모스는 영어의 Law 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라는 하나의 교훈(instuction)을 의미하고 노모스는 관습적인 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사용한 법이라는 말은 명령어로서의 성격이 다분하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의 독특한 문제의 상황에 있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것을 그렇게 무뚝뚝하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요한복음서 13: 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것 이상은 없다.

3)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δοκεί τίς εἶναι τι μηδὲν ὤν)

"아무 것도 아니면서(nothing) 무엇이라(something) 생각하면" 이라는 의미이다. 참으로 된 사람은 자신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되지 못한 사람은 된 줄로 생각하는 법이다. 자신을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고 범죄한 자를 억압하고(짐 진자를 억압하고) 그 고통을 더해 주는 사람은 되지 못한 사람이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도케이(δοκεί, 보이다)는 온(ὤν, 실제로 이다)과 그리고 티스(τίς, 어떤 사람)는 메덴(μηδὲν, 아무 것도 아닌)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별것 아닌 사람일지라도 바울 사도께서는 그 사람의 영적 빈곤을 채워주기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속임이니라”(φρεναπατᾷ) 이 말은 신약성서에는 유일하게 사용된 말이다. 뿐만 아니라 70인역이나 고전어에서도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바울 사도가 만들어 낸 말로 추측된다. 다만 같은 어원의 명사형으로서 프레나파테스(φρενἀπἀτης, 속이는자)가 디도서 1:10에 나온다. 마음을(φρὴν), 속이다(ἀπατἀω), 생각하면(δοκεί, 보이다)이라는 말을 연관시키면, 주관적인 속임을 뜻하는 말이 된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이 말을 택한 것은 그런 자는 소위 너무 똑똑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은 속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4) 자기 일을 살피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만 있고(...δοκιμαζἐτω...καὐχημα...)

본절과 다음절에는 앞선 절들과 모순되는 말들이 있다. 남의 짐을 지는 것과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 되지 못하면서 된 줄로 생각지 말라는 말과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 짐을 서로 지라는 것과 각각의 짐을 지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는 대립이 되고 모순되는 듯이 보이면서도 신앙생활의 체험에서는 조화가 되고 일치되는 일들이다. 逆說을 피하면 眞理를 구하지 못한다. 바울이 각 사람이 그 자신의 에르곤(ἔργον, 업적)을 살펴보도록(δοκιμαζω)한 것은 製鍊所에서 純金을 골라내는 것을 뜻한다(벧전 1:7). 거기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후반부의 카우케마(καὐχημα, 자랑하다)는 바울의 용어로서 그의 서신에 35회나 사용되고(바울 이외에 야고보에서 단 2회 사용됨), 기쁨을 동반하는 자랑이고 큰 말로 승리적인 자랑인 것이다. 남을 평하고 남과 비교하여 얕은 교만에 잠기는 상대적 자랑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중에 얻어지는 내심의 자랑이며, 절대적인 자랑이다(고후 12:9-19 참조).

바울이 의미하는 카우케마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날(V-DAY)에 각자는 스스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자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이와 같이 주님 앞에서 개인의 책임의 이러한 선언과 본문의 제2절에서 짐(βἀρη, 무거운 짐)을 지라는 권면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2) 짐과 법의 관계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堅忍의 禮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基督敎 倫理가 아니라 차라리 禁慾主義的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부담자(burden bearer)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論斷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시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구절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짐’과 ‘법’의 연관을 음미해 보면, 바울 사도가 암시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약성서 안에서 몇 가지 율법의 요구들은 분명히 짐으로 비유되었다(눅 11:46, 행 15:10, 28).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서 준행해야 하는 율법이라는 짐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려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짐을 서로 져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요 13:34, 15:12)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 5:14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Ⅲ. 설교

* 때 : 1998. 11. 16. 저녁

* 장 소: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강당

* 대 상: 그리스도신학대학 대학원생 및 교수님

* 제 목: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는 이웃 사랑이다

* 기 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이렇게 좋은 시간 마련해 주신 은혜 감사드 리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존경하는 교수님의 지도아래 그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파하는 훈련을 받고 실제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선포 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바라옵기는 부족한 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씀일지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한마디라도 틀림이 없는 말씀 만을 선포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 니다. ------ 아 멘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귀한 시간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즈음 사회면을 보면 너무나 암울한 기사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비참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황은 우리네 사회상을 너무나 비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경제적 야합은 급기야 IMF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을 부르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경제적 속국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하면 된다는 논리에서 무조건 먹고 보자 라는 식의 비인간적이고 초경제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이웃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경제불황에 따른 윤리의 실종은 우리의 가정생활 마저 파탄의 도가니에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게 때문에 이토록 엄청난 윤리의 부재 현상이 일어났고 따라서 인간도처에 난무하는 악의 그림자가 사라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웃사랑의 실천은 곧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흔히 가정생활을 우리는 무조건적 사랑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 갈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에 안 좋았기 때문에 하와를 만들고, 둘이 있는 모습에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둘 이상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고 그 가족들은 사회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공동체라고 합니다. 가족끼리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소위 아가페 사랑의 공동체를 퇴니스(Ferdinand Tönnis)는 공동사회(Gemeinscaft, 인격적이고 신념에 의한 결합)라고 하였으며, 이익을 추구하고자 모인 사회를 이익사회(Gesellschaft, 합목적적 조직)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독교 사회론에서는 양자의 표현을 동의적인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라는 호혜평등의 원칙이 우선하는 개념으로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산업사회는 분명히 이익사회의 절정을 이룬다고 하겠으며, 그러한 결과로 우리는 이기적인 사회상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믿음과 행함의 신앙 생활을 온전히 다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하더라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사랑의 의무라고 하면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하였습니다(롬 13:8-10).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며, 인간 사회의 구성요소는 바로 ‘나와 너’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롬 13:8) 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의 가르침 때문에 갈라디아 서신을 기독교의 大憲章(Magna Chartar)이라고 하며, 그에 대한 구체적 설명으로서의 로마서는 그 헌장에 대한 各 條文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롬 13: 9 하단; 마 22:39-40)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고 하였으며, 이 계명에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 주어라”(마 7:12)라는 이른바 黃金律의 命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평등의 규범이자 평등으로서의 정의의 문제이며, 우리의 이웃이 고통받는 모든 일을 참을 수 없는 불의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위에 인간의 심령적 완성이 주는 또 하나의 의무가 구원 사역의 시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義가 완성되었을 때 율법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완성되었지만 우리에게 아직 율법의 효력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은 없게 된다”(롬 4:15)고 바울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율법이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딤전 1:9), 하나님의 의에 반대되는 행위에 대한 징벌의 수단으로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롬 7:7).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인지를 몰랐던 때에 율법은 그 지침서의 역할을 했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롬 7:15 참조).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본문의 말씀에서 네 이웃의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먼저 네 이웃이 누구인가를 살펴봅시다

 

  

- 네 이웃은 누구인가? -

 

성서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도 그 이웃을 정확히 명시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가난한 자, 불우한 자, 과부 등 생활이 어려운 자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서에서 암시하는 ‘네 이웃’이 아닌 자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부와 능력의 척도로 가지지 못한 자를 비평하고 가진 것을 자랑할 때 우리는 그 들의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 가치관을 가지고 가난한자의 무기력을 탓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 웃이 아닙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학대받고 가출하는 자들을 보면서 무관심 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이웃이 아 닙니다.

-가난한 가정의 자녀가 비행을 저지른다고 하여 우리의 자녀와 분리시킬 때 이미 우리는 저 들의 이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있어서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가 진정 그의 이웃이었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삭개오가, 문둥이, 돌팔매 맞는 여인이, 모두 예수님의 이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아무도 거들어 주는 자 없이 죽어 가는 자, 고통받고 있어도 관심하지 아니하는 자, 이들 모두가 성서의 이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자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돌아 올 때, 율법은 완성되는 것이며, 그러나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몽학선생은 그 존재로서의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그러나 있는 자의 횡포보다 없는 자의 비굴함에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행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증여(거저 줌)의 행위는 은혜이며, 이 증여는 사랑의 표시지만 동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평화롭게 하는 행위이며,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선포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은혜가 동냥이 되어서는 받는 사람을 얽어 메고 그를 모욕하여 전 보다 더 나쁜 상태로 만듭니다. 동냥이란 물질의 관계이지 사랑의 관계는 아니며, 동냥은 자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채우는 행위이고 자기의 의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구약 성경적인 의미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있고 없고는 육신의 문제이지, 심령의 문제는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사도는 ‘그냥’ 가난한 자, 즉 물질이 없는 자는 복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꽃동네의 “최귀동” 할아버지는 말하였습니다. 얻어먹을 수 없을 정도의 불구의 몸을 가진 거지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자기의 다리도 불편한데 지팡이를 짚고 날마다 깡통에 밥을 얻어다 먹이는 최 할아버지가 과연 자기보다 못한 거지들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얻어다 먹였겠습니까? 그것은 의무도 아니고, 빚진 바도 아니고, 자기가 헌신하여 무엇을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살아있는 성자의 모습이요 예수 사랑 실천의 모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최귀동 할아버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될 때, 온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작은 정성, 갸날픈 온정이라도 진정 사랑이 없이 남의 짐을 져준다면, 그것은 내 몸을 불사르게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더라도 유익하지 못하다고 하는 가르침(고전 13:3 참조)은 오직 사랑은 헌신이라는 것 이외에 더한 설명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야말로 내 몸을 다 바친다는 뜻입니다. 남을 위하여 남에게 향하는 사랑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권리 주장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군왕적 자유 속에 있는 기독교적 사랑이며, 바로 이웃 사랑의 본질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네 이웃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예수께서 관심 하신 것도 가난한 이웃, 버림받은 병든 자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에 대해서는 냉담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이 말씀은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행복했던 사람들을 벌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안이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돈이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고 돈의 위안이 그에게 충분한 소망을 주기 때문에, 부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변명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성령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가난한 자는 돈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이 말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보다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眞理를 선포하시려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 매달리게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본 말, “진리란 무엇인가, What is Justic?“(요 18:38)라는 말은, 빌라도 라는 사람에게 대답조차 필요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正義를 말하였으며 이 물음은 인간 세상에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예수는 죄인에게도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敵에게도 善을 가지고 보답하라는 사랑의 正義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의 관계에서 사랑(charity)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사랑을 받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존중심으로 사랑은 사랑이 되고, 굴욕감을 주는 溫情主義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적 박탈이 사랑과 혼동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오늘날처럼 정의의 종교, 평등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성을 강조한 때는 그리 있어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基督敎 社會正義의 秩序를 배우게 됩니다. 일반사회에서 정의의 실천적 동력은 명시적이고 강제적인 실정법에 의하여 보장되는 데 대하여, 기독교 사회정의의 동력인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랑의 구체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며, 전도의 주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었습니다(고전 2:2).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진정한 의미를 오늘에 되새긴다는 것은 우리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돕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숨은 이익을 위한다던가, 선심 공작성 도움이라든가 체면치레를 위한 도움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위배되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짐을 져주는 것‘은 기독교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실질적인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적인 욕정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시오“(갈 5:13). 이제 자유를 얻은 그들은 어떤 일이나 해도 되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행할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그의 과거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요구하신다는 사실로써 요약되며, 격식화 된 조문, 즉 율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 하며, 자랑하지 아니 하고, 교만하지 아니 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고집을 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말 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인 계명은 일정한 상황, 즉 그의 이웃과의 만남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법 -

 

바울 사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法은 사랑의 誡命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법이란, 성령 안에 살고 행하는 것(롬 5:25)이라고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으며 이는 곧 사랑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가르친 내용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이 사랑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의 실체로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니 이런 것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갈 5:22-23). 라고 바울 사도는 사랑의 실천적 지도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法인 사랑의 構造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에서도 가르치고 있거니와 설령 남의 짐을 져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 이 없다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다.

- 비록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롬 8:2 참조)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 안에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법이라고 야고보는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最高의 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입니다“(약 2:8).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규범원리는 바로 사랑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그런데 그 사랑은 선심을 쓰는 체 하는 것이 아니며, 생색내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한 첫 단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의 본질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랑을 그 요소로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 중, “사랑의 계명“(고전 13:3-7 참고)에 나타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인 실천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 들어있습니다“(갈 5:14)라고 하는 가르침이며, 그리스도의 최고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의무를 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에게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롬 13:8 참고), 바울 사도의 사랑의 법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계명‘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사도에게는 하나님께 향하는 사랑은 하나도 없고 오직 이웃 사랑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의 법은,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하나님의 動力的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의 법을 실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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