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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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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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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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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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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찰스 로버트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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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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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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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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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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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슈루즈버리 스쿨 (졸업) (1818-18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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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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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엠마 웨지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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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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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물학 분야가 그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그를 창설자, 개척자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다윈의 가설에 기초하거나 그 가설을 검증하려한 많은 연구가 기본적으로 그를 변함없이 정당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2.2.1. 슈루즈버리 학교2.2.2. 에든버러 대학 의학과2.2.3.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과2.2.4. 비글 함의 탐험 항로
1. 개요[편집]
진화론으로서 19세기 이후 생물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한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다윈의 이론은 유전학 관련 부분만 빼면 대부분이 현대 생물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그의 이론은 생물학을 넘어서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의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1731~1802)은 유명한 의사였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의술을 행했던 것은 아니었고, 주로 심리치료를 통한 몸의 안정을 통해 병증을 다스렸다고 한다. 물론 이 심리치료라는 것에 쓰인 약물이 병을 다스린 것이었지만... 여하튼 그는 의사로서의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었는데, 그 능력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당시 영국의 국왕은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주치의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토리당을 매우 싫어했는데, 당연히 국왕의 주치의가 되면 그들과 엮이고 한패가 되는 것이라 여겨 거절했다고 한다. 거의 반드시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손자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주장[8]을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종교적으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짓은 어리석다면서 기독교 주류를 비난하다가 파문당했으나 당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저명한 학자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존경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터라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았고 그걸 자랑하며 당당하게 지냈다.[9] 그의 혁신적인 주장들은 당대에 묻혀졌고, 손자의 엄청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자신의 아들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런 아버지의 바람대로 훌륭한 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10] 그러나 경제적인 성공보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래즈머스와 달리 로버트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11] 그는 고집이 있지만 온화한 아버지상의 인물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아이들이 움직여주기를 바랐지만, 강요하거나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는 저녁이면 찰스 다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하며 세상의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끊기면 찰스 다윈은 자신이 관찰한 새의 이야기들로 남은 부분을 채웠다.
로버트 워링 다윈의 아내이자, 찰스 다윈의 어머니인 수재나 다윈도 가문이 상당한 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의 사람이었다. 두 가문은 학문적, 사상적, 경제적 교류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찰스 다윈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매우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 다윈의 육아를 맡은 것은 그의 누나들, 형이었고 그가 부모님과 만나는 시간은 기껏해야 저녁 후 1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다윈이 어머니와 사별한 것은 7살 때였기 때문에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실제로 다윈은 후에 그의 어머니에 대해 가진 기억이 거의 없다고 회고하였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죽던 날 자신과 누나가 매우 크게 울고 있었고, 하루 종일 그랬었다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후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슈르츠베리의 한구석에 '더 마운틴'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뒤편에는 작은 개천이 둘러 흐르고, 집을 조금만 벗어나면 숲이 있었다. 찰스 다윈은 이 개천과 숲에서 여러 생물을 관찰하거나 채집하였다. 그의 집에는 작은 다용도실도 있었는데, 찰스의 형인 이래즈머스[12]와 함께 화학 실험을 하며 박물학에 기초적인 관심을 가졌다. 다용도실의 반대편에는 작은 온실이 딸려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취미였는데, 다양한 식물을 기르고 상세히 기록하는 것을 꾸준히 하였다. 아버지가 시켜서 다윈도 했다[13] 다윈의 이러한 취미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 이어졌으며,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14]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신앙을 가지게 하였다.
2.2. 학창시절[편집]
1817년-1825년 초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시절 다윈이 다녔던 곳은 슈루즈버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슈루즈버리 학교'였다.[15] 다윈은 학생들의 재능과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암기 위주의 권위적인 교육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16] 따라서 성적이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라틴어나 고전 공부와 같이 당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했던 과목들을 굉장히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교사에게서 심한 욕을 듣기도 했고, 이것을 로버트 워링 다윈에게 직접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집안에선 그런 다윈을 꾸짖지 않고 집에서 자유로운 복습과 예습을 권장하였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길 부끄러워하고 논쟁에 나서면서 무척 당황해한 버릇은 어릴 적의 교육 여파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아버지나 아우와 달리 매우 당찬 성격인 형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필요없다고 말하며 그를 아껴주었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 학교에 찰스를 계속 남겨두는 것이 그다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고, 이래즈머스와 함께 의학 공부를 하라고 찰스를 애든버러로 보냈다.
1825년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해 1827년까지 공부하다가 자퇴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의 대학교는 지금의 인강 사이트와 비슷하게 운영되었는데, 학생들은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강사에게 직접 지불했고, 강사는 그 돈으로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17] 그러나 이런 경쟁에서 자유로운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 강사의 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경우였다. 이럴 경우 어떤 강의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고,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이 나타났다. 이런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 중에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강의하던 강의록을 그대로 읽는 교수도 있었다. 그래도 수업이기 때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이내 지쳐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들었던 해부학 수업이었다. 그 수업은 강사가 실제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를 하면서 진행되었는데, 교수가 능력이 부족하여 좋은 시체어감이 이상하지만를 구해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건 시체라기보단 방부제에 절여진 덩어리에 불과했고, 공부할 만한 부분들이 이미 상당히 훼손되어 제대로 된 강의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학생들이 직접 실습할 시신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잘 보이지도 않는 시신을 멀찍이서 바라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냄새는 굉장히 멀리까지 퍼졌다 한다 그 시체를 보면서 다윈은 수술을 하는 것에 혐오감을 가졌다.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강의력까지 좋지 않아 찰스 다윈은 이 수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에는 마취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수술을 하며 엄청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서 저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공부하는 환경에도 적응하기 힘들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의사가 되어 해부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윈은 정말로 의사가 되기 싫어했다. 다윈은 점차 자신이 굳이 의사가 되어 생계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1827년 에든버러 대학을 자퇴하게 된다. 그는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를 자퇴하기 전, 찰스 다윈은 로버트 그랜트와 함께 플리니안 학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학회는 에든버러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연구한 것을 발표하고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로버트 그랜트는 찰스 다윈의 동료와 같은 존재였는데, 찰스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연구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과학자로 명성을 쌓고 있어 이내 찰스는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로버트 그랜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둘은 함께 해양의 무척추동물을 연구하였는데 찰스는 이때 현미경을 다루는 법 등의 기본적인 생물학 연구 방법을 익히게 된다. 연구를 통해 아는 지식이 크게 늘어났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이때 이미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도서 대출 목록이나,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진화론적인 사상을 가졌던 할아버지나 라마르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았음은 명확하다. 이들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진화록적 관점을 가진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많았기에[18] 다윈이 그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그와 자주 붙어다녔던 로버트 그랜트 역시 라마르크주의자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사소한 이야기지만 의대 재학 시절 유명한 연쇄살인마와 엮인 적이 있다.(…) 이 당시 연고 없는 노숙자나 극빈층을 골라 살해한 뒤 자연사로 위장해 에든버러 의대에 해부용 시체로 팔던 윌리엄 버크(William Burke)와 윌리엄 헤어(William Hare)[19]를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교수를 대동하거나 혹은 혼자 만나서 시체상태를 살핀 뒤 시체값을 두고 흥정을 벌였는데 나중에 사건이 발각되자 이 때문에 조사도 받고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했다.[20] 그래서 후일 다윈이 진화론을 두고 공방을 벌일 때 공격 측에서 이 일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에 쓰기도 했다. 공격의 요지는 당신 진짜로 그 시체들이 살해 당한 시체라는 걸 몰랐나?(…) 이 부분은 사이먼 페그 주연의 영국 영화 '버크와 헤어(Burke and Hare)'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예 다윈이 살해 당한 시체인 걸 눈치 채고도 사는 것처럼 묘사된다.
에든버러 대학을 자퇴한 후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여 1831년에 졸업했다. 하지만 다윈 본인은 에든버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배워야 하는 과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교회에서의 사목보다는 박물학에 관심이 많아서, 친척 형인 폭스와 함께 곤충을 잡으러 다니거나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식물학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들었다.[21] 다윈의 열정과 지적 능력 그리고 다윈의 가문은 찰스 다윈이 헨슬로의 총애를 받게 하는 데에 충분했기 때문에 이내 찰스는 헨슬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헨슬로는 다윈이 광물학과 지질학을 배우면 훌륭한 박물학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같은 대학의 애덤 세지윅 교수에게 그를 소개시켜주었다. 지질학은 잘 모르는 자신보다는 애덤 세지윅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찰스는 케임브릿지에서 사촌형 폭스, 교수인 헨슬로와 세지윅에게 곤충학, 식물학, 광물학, 지질학과 같은, 박물학의 여러 지식들을 흡수하게 된다.
이런 인연은, 현대 생물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낸다.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해인 1831년 12월 27일 영국 해군의 탐험선 HMS 비글 함을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질학 탐사와 과학 표본 수집을 원하는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 함장[22]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각지에 여러 탐험선들을 파견해서 측량과 과학 연구를 시키고 있었는데, 피츠로이 함장의 비글 함도 그중 하나였다. 비글 함은 과거에 연구 목적으로 출항하였다가 긴 항해 속 외로움으로 전임 함장이 자살하고 말았고, 새로 그 배의 함장이 된 피츠로이는 선배의 전철을 피하고자 젊은 의사나 과학자를 태워 교류하기를 원하여 케임브릿지 대학의 헨슬로에게 그런 사람을 찾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헨슬로는 곧바로 찰스 다윈을 추천하여, 22살의 찰스 다윈은 비글 함에 승선할 수 있게 된다. 다윈의 그 자리는 무보수였지만 항해 끝에 수집해온 진귀한 물건을 팔면 돈은 좀 될거라 꼬셨는데, 제정신인 영국의 의사, 박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던 이 자리를 멋도 모르고 다윈이 학구적인 욕심으로 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출항 →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리우데자네이루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포클랜드 섬 →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서 → 칠레 발파라이소 →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 → 태평양 횡단 → 뉴질랜드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 대서양의 어센션 섬 → 다시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영국 콘월의 팰머스 항 도착
5년간의 탐험에서 돌아왔을 때, 다윈은 이미 엄청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가 탐험하며 기록한 것들을 전보를 통해 영국에 지속적으로 보내왔기 때문인데, 지질학, 광물학, 생물학에 걸친 자세하고 다양한 새로운 지식에 사람들은 어느새 다윈이 보내오는 다음 전보를 기다리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다윈은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하였다.
3. 학술 활동[편집]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에마 웨지우드(1808~1896)와 결혼한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에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확산과 그 구조〉를 발표했으며,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 함의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다윈 부부의 초상화. 왼쪽이 부인 에마 웨지우드)사촌 간이라 그런가 생긴 게 정말 똑같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에마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23]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피츠로이 함장과 노예 제도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함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학대하는 노예제도를 싫어했으며 반대했다. 또한 자신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회진화론을 주창한 허버트 스펜서에[24] 대해 "그의 이론은 과학적 측면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다."며 신랄한 혹평을 가했다[25].
앞의 이야기와는 꽤 모순되게 보이겠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들이 살해당하고 아이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이 기독교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니 놀라울 테지만 나는 이들(원주민)이 그런 대우를 받는 데 그다지 불평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26]
이는 인종 자체를 열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원주민 사회의 환경이 다윈의 기준에서는 야만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링크
이 점이 와전되어 다윈은 원주민들이 원숭이처럼 진화가 덜 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 후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문명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는 진화론을 주장한 것을 후회했다는 낭설이 우리나라 개신교인 사이에서 퍼졌다.
하지만, 다윈은 애초에 원주민들이 문명화될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므로 개신교계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위 링크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인종보다는 문화적 이질성이 갈등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자문화 중심주의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사실 지금도, 우리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를 고집하는 지역에 대해 그들 사회 사람들은 차별받아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다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다윈이 살았던 시대는 19세기다. 현대의 시각으로 다윈을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귀국 직후 종의 기원을 저술하기 시작했지만 세상에 미칠 파장을 염려, 더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다. 이후, 훗날 다윈의 평생 친구이자 선의의 라이벌이 된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1823~1913)가 인도네시아에서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에게 보낸 논문과 편지에 담긴 학설이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27] 다윈은 1858년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1859년이 되어서야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된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다윈과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이후로도 다윈과의 교류를 통해 다윈의 학설이 더 완성도 있고 설득력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진화론을 연구하는 동반자의 길을 걸었다.[28] 그리고 월리스는 늘그막에는 심령과학적인 면에 빠져들어서 심령학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기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월리스 역시 동남아에서 여러 생물 연구 및 체계 조사 같은 면이나 다른 생물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29][30]
이런 진화론에 대하여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물론 서구권 한정 찬반이 오고갔다. 하지만 진화론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세계에서 여럿 있었으며 진화론이 나오자 공식적으로 지지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31] 무엇보다 영국을 라이벌 삼던 프랑스에선 오랫동안 묻혀졌던 용불용설을 다시 발굴해내 이 주장을 한 라마르크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 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우린 다윈보다 50년은 앞서 진화론 비슷한 주장을 한 이가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정신승리
다윈에게 진화론에 대한 주장을 보이라는 초청이 많았으나 수줍음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나가는 자리를 꺼린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다윈이 진화론을 정립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신 진화론의 열광적인 지지자인 토머스 헉슬리(1825~1895)[32]나 조지프 후커(1817~1911) 같은 후배들이 대신 나서서 이런 논쟁에서 격렬하게 맞섰다.
피츠로이 제독은 독실한 성공회 신도였는데, 그는 진화론에 대하여 비난했다. 그 뒤에 피츠로이는 1863년 해군 중장까지 진급했으나 이 당시 우울증 및 가정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다가 1865년 4월 30일 아침, 면도하는 자리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자살 5년 전에 이미 정신이 이상해져 성서를 머리위로 치켜들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성경을! 성경을!'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다윈에 대하여 그는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진화론 문제 말고도 당시 그는 정치가로서 활동을 말아 먹어서 빚도 지고 여러 모로 실패한 경력으로 경제적 고민에 시달려 아내와 이혼했었다.
하지만 다윈이 피츠로이 제독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피츠로이 제독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의무에 충실하고 실패에 관대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하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 열성적인 친구였다 ... 큰 단점으로 욱하는 성질이 있었지만 그의 성격의 일부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훌륭했다[33].
이후 인간의 진화와 성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인간의 계보(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를 출간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종의 기원에서도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암시되었고 성 선택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인간의 계보에서는 인간이 창조가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명백하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해부학자인 미바트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계보를 출판하는 것이 관습 뿐만 아니라 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 말년[편집]
진화론 하나로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으며, 2015년에 공개된 비밀편지의 내용을 보면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며 종교적 소신을 명확히 밝혔다. 편지가 공개되기 전의 관련 기록에서는 다윈이 종교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퍼뜨린 '다윈이 죽기 직전 회개하고 진화론을 부정하였다'는 루머가 버젓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공개된 편지에서 다윈은 신탁으로서의 성서를 부인하고,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밝히게 돼 유감이라고 명확히 적어놓았다. 여담으로 그 편지는 경매에 붙여졌고 197,000달러에 낙찰되었다.
다윈의 자서전을 보면 그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만은 명백한 듯하다. 자서전 86~87페이지를 보면,
"...하지만 나는 정말로 내 (기독교에 대한)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걸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몇번이고 자주 유명한 로마인들 사이의 오래된 서신들이나 폼페이 등지에서 발굴된 문서들이 복음서들의 모든 내용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확인시켜 주는 몽상들을 지어낸 것을 확실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는 여유를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설득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생각해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불신은 느리지만 완전하게 나를 집어삼켰다. 그 속도는 내가 고통을 느끼지 않을 만큼 충분히 느렸고 또한 그 뒤 단 일 초도 내 결론이 맞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누군가 기독교를 사실이라고 여길 수 있는지 참으로 알기 어렵다. 만약 경전의 문구들이 보여주듯이 내 아버지와 형제들, 거의 모든 내 절친한 친구들이 포함된 불신자들이 영원히 처벌 받는다면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지독한 교리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헉슬리나 조지프 후커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강력한 옹호를 받았으며 생전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형인 에라스무스는 편지로 진화론을 강력하게 지지했었기에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다윈의 일기를 봐도 그걸 매우 기뻐했다.) 원래 집안이 꽤 넉넉한 집안이었거니와 그가 죽을 당시에도 이미 영국 여러 왕립학회 과학자들이 그를 위대한 학자이자 영국의 자랑이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덕분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거리낌없이 활동했고 연금도 받았다.
게다가 그를 굳게 믿고 지지하던 형 에라스무스 다윈은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에라스무스는 자식이 없어서 1881년 죽을 당시 10만 파운드가 넘는 거액의 재산을 다윈과 누이동생 하나(여럿 형제가 있었는데 에라스무스가 죽을 당시 둘만 살아있었다)에게 남겨줬고 다윈 본인도 죽을 당시 전재산이 25만 파운드가 넘는 부자였기에 다윈은 적어도 아내인 에마와 자식들, 손자들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늘그막에는 여러 동식물 연구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범위는 척추 고등 동물에서부터 균류까지 매우 다양했다. 특히 식충식물 연구에는 아주 큰 업적을 남겼다. 1879년에 마지막으로 쓴 저서가 바로 식충식물 및 여러 식물 연구에 대한 책자인데 초판 8천 권이 전회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식충식물 사기꾼에게 이용당한 적도 있다.
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다윈은 1870년에도 식충식물에 대한 연구 책자도 써서 상당한 인정도 받고 책도 꽤 팔렸다. 그런데 이 책을 본 독일인 칼 리쉬라는 자가 1874년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사람도 잡아먹는 거대한 식인나무가 있는 걸 봤다고 할 때 다윈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어딘가 미지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선 지금 우리의 상상을 넘는 동식물이 있을테니까 그게 이상한 건 아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는데 이 작자가 이걸 다윈도 이걸 공식으로 인정했다는 투로 나중에 낸 책 서문에 써먹어버린 거였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것은 당연히 사기극이었다. 당시에도 다윈은 억울하게 이용당했다고 밝혀졌지만… 다윈은 이 일로 한동안 활동을 삼가고 꽤 불편하게 지냈다.
또한 따개비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서 당시까지의 통설이었던, 따개비가 조개의 일종이라는 것을 반박하고 게나 새우와 같은 갑각류의 일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업적은 지렁이의 생태와 토양과의 관련성을 연구하여 지렁이가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 다윈을 이 내용을 담은 책인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The Formation of Vegetable Mould Through the Action of Worms)을 집필했다. 이것 때문에 그 동안 지렁이를 지극히 가련하고 하찮은 생물로만 여겨 온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던 도중 자신이 내세운 공진화 개념에 따른 새로운 종을 예견하기도 했다. 다윈은 안그레쿰 세스퀴페달레(Angraecum sesquipedale)라는 마다가스카르의 난초를 관찰하다가 이 난초의 꽃은 꿀주머니의 길이가 28cm를 넘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꿀을 빠는 주둥이의 길이가 이보다 더 긴 곤충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윈이 사망한 뒤인 1903년 마다가스카르에서 다윈이 예상한 수준으로 주둥이가 긴 나방이 발견되었다. 이 나방에는 크산토판 모르가니 프레딕타(Xanthopan morgani praedicta, 크산토판박각시나방)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밖에 곤충기로 유명한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와 친하게 지냈으며, 서로 연구한 벌레에 대한 자료와 의견을 보내기도 했다. 비록 파브르는 진화론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지만[34], 둘은 절대로 이 일로 싸우지 않았으며 서로 생각을 존중하며 친하게 지냈다. 다윈은 개미들을 연구했는데 아이디어를 내서 개미들을 작은 섬을 만들게 해서 섬에서만 살아가게 하여 이걸 연구했다. 간단하게 작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흙을 가득 부어서 작은 섬을 만들고 배를 여러 사람이 개미들을 가득 넣은 상자를 흙 위에 올려둬서 개미가 물 바깥으로 못 나오게 하고 개미들이 이 섬에서 어찌 사는지 세세하게 연구하고 관찰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73살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이 밝힌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랬다.
(아내인 에마에게) "쓰러질 것 같소....."
4월 18일 오후 3시 30분쯤에 남긴 말이었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져 다음 날 숨을 거뒀다.
보통 흔히 알려진 "난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라는 말은 유언이 아니라 죽기 나흘 전인 4월 15일에 산책 도중에 아내인 에마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에마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60대 때부터 다윈은 여러 병에 시달려 자주 요양을 가고 같이 누워서 안정을 취했는데, 70대가 넘으면서 혼수상태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죽기 며칠 전에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단호하게 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또한 에마는 다윈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연구를 부정하는 건 일절 없었고 당당하게 여겼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윈이 유언으로 진화론을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인을 모독하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분노했다. 그렇게 그녀는 평온하게 살면서 14년 뒤에 남편을 따라갔다. 오랫동안 그냥 다윈의 아내로만 알려졌던 그녀도 조수이자 남편의 연구를 돕던 반려자라는 걸 부각시킨 그녀에 대한 전기가 2001년에서야 나오게 되었다.
(만년의 다윈 부부)
다윈과 에마가 낳은 아이들도 6남 4녀나 되었다. 큰딸인 안나 엘리자베스(1841~1851), 메리 리너(1842), 막내 아들 찰스 워링(1856~1858)은 일찍 죽었지만 나머지 7명은 꽤 오래 살다가 갔으며 업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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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래즈머스 다윈(1839~1914) - 큰아들. 아동심리학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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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 에마 다윈(1843~1927) - 아버지에 대한 자서전 집필에 참여했다. 열성적인 기독교도였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조작하던 자들에게 헛소리 말라면서 일갈했다. 당연하지만 다윈의 아이들은 누구도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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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하워드 다윈(1845~1912) - 천문학자, 수학자로 영국 왕실과학협회 금메달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그의 아들의 이름도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찰스 다윈이다. 단 미들네임은 골턴(Galton). 그리고, 막내딸 마가렛 엘리자베트는 후에 케인즈의 조카와 결혼. 위의 뉴턴을 예사로 할 영향력을 끼친 인물과 사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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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다윈(1847~1926) - 가정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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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다윈(1848~1925) - 식물학자, 왕실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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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다윈(1850~1943) - 군인, 경제학자, 과학자, 우생학자…
우생학 참고 -
호러스 다윈(1851~1928) - 건축가, 토목기사
다윈은 당당하게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혀져서 생전에도 대과학자로 국가적 인정을 받음을 보여주었다. 되려 다윈은 형 에라스와 부모와 할아버지가 묻혀진 가족무덤에 묻혀지길 바랐으나 되려 영국신문들과 여론이 그런 위인을 웨스트민스터가 외면하면 국가적 망신이라고 주장하여 성당에 묻힌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타임스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이젠 영국이 다윈을 위대하게 포장하는 데 안달이 났다. 물론 그는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1835년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할 당시 거북이 세 마리를 영국으로 가져왔었는데, 이 거북이 중 한 마리인 "헤리엇"[35]은 무려 2006년까지, 175년 동안 생존했다. 흠좀무. 당연히도 기네스북에 올랐던 거북이다. 사인은 노화로 인한 심장마비.한편 다윈 본인은 2012년에 미국의 총선에 출마했다.
5. 저서[편집]
6. 기타[편집]
2009년에 다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크리에이션이 개봉했다. 진화론(evolution)에 관한 영화인데 제목이 '창조'(creation)인 게 함정[36] 실제 부부이기도 한 폴 베타니,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인 다윈 부부 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창조설자들의 반발이 상당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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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 출연한다. 다윈의 지성을 알아본 템플기사단이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단칼에 거절해버리고 템플기사단에 의해 원숭이 몸과 다윈의 얼굴 삽화를 합성하는 등의 조롱을 당하여 곤혹을 치르게 되고 그 와중에 프라이 남매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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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는 거짓말까지 하며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완전 허황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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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사랑은 굉장히 말괄량이였다. 얌전하고 뚱뚱한 범생이 스타일의 남자애와 말 많고 활달한 여자애의 로맨스는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았고, 썸만 타다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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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아버지가 자신의 능력이나 정신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의 누나는 찰스의 아버지가 찰스를 굉장히 아끼고 그의 능력을 잘 이해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찰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찰스 다윈은 교사들도 자신을 평균 수준에 못 미치는 아이로 생각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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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부자집 자식임을 깨닫게 된 이후, 그는 아버지의 돈을 마음껏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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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곤충 채집이라는 취미를 굉장히 본격적으로 했다. 곤충을 들 손이 없어 입속에 폭탄먼지벌레를 넣다가 입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아예 조수를 몇명 두고 대신 곤충 채집을 시킬 정도였다. 물론 거기에 필요한 돈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참고로 그가 생전에 체집한 곤충들은 아직도 분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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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릿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애덤 세지윅과 지질 탐사를 겸하여 나갔다가 더 마운틴(다윈의 집)에 들르기로 하였다. 다윈은 크게 기대하면서 세지윅이 방문하기 전에 슈르츠베리 주변의 지질 조사를 하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다가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되어 세지윅이 방문했을 때 세지윅에게 말했는데, 그는 크게 웃으면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찰스 다윈 역시 근거가 부족함을 인정했지만 크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 더 자세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종의 기원의 출판이 20년이나 미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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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직자가 되는 것을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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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그랜트가 자신의 많은 연구 성과 중에 찰스 다윈의 연구 결과를 끼워서 자신의 연구 결과로 발표해버린 적이 있다. 찰스는 이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결국 그는 로버트 그랜트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다윈의 성격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0년이나 질질 끌던 종의 기원의 출판이 급물살을 타고 이뤄진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과 같은 결론에 거의 도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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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화란 용어를 썩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 대신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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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멸시받던 지렁이가 생태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다윈이다. 물론 연구 도중 비웃음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 진화론 발표 때문에 안 그래도 미친 영감 취급받았던 다윈을 갖고 드디어 단단히 미쳤다고, 아예 인류의 조상은 지렁이라고 하지 그러냐고 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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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개의 일종이라고 알려져 있던 따개비가 갑각류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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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상이라는 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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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동반자 엠마 웨지우드는 전술했듯이 외삼촌의 딸로 사촌관계이다. 재밌는건 다윈의 누이는 부인의 오빠와 결혼했다. 사촌끼리 결혼을 한 데다 겹사돈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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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생 육지거북[38] 해리엇[39]을 키웠었다. 해리엇은 다윈이 데려온 3마리의 거북 중 최장수했으며[40] 다윈이 죽은 지 한참 뒤인 2006년에 176세의 나이로 사망.[41][43] 관련 저서도 있다(!)
[1] 왕립학회 회원[2] 왕립지리학회 회원[3] 런던 린네학회 회원[4] 런던 동물학학회 회원[5] 재밌게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정확하게 같은 연도, 같은 날 태어났다. 아래에도 설명하겠지만 다윈의 조부 이래즈머스 다윈의 인종적 진보주의 성향을 감안하면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까? 또한 19세기의 위대한 두 인물간에는 생일말고도 공통점이 많았는데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점, 셰익스피어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취미, 자식을 일찍 여의는 비극, 노예제 폐지를 지지한 것 등이다.[6] 왕립학회가 매년 영국 연방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두 사람과 "응용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한 사람에게 주는 상[7] 과학 업적에 대해 수여되는 가장 오래된 상[8] 1794년 동물학(Zoonomia)이라는 책을 썼는데 "모든 온혈 동물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하는 힘을 갖고 있고, 이렇게 개량된 형질은 자손에게 이어진다"라고 기록하였다. 그의 이런 사상은 찰스 다윈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 책 한 권까지 썼다면 깊이 파고든 셈이고, 다만 손자만큼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못했을 뿐이다.[9] 어차피 이 시기는 교회에서 파문당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일 따위는 없었던, 종교의 힘이 엄청나게 줄어든 시기였다. 그래서 이래즈머스 다윈은 성공회 측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뒷날 그의 손자인 찰스 다윈도 진화론과 관련된 이유로 종교계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승승장구 했고, 되려 그와 대립하게 된 인물이자 진화론이 종교의 가르침에 반한다고 주장한 윌버포스 주교가 입에 게거품을 물면서 창조론을 설파했다가 세간으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비웃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대는 왜 과학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가?[10] 당시에도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길이었던 듯하다. 이래즈머스 다윈의 아들들이 모두 의사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의사 수련 도중 사망한 그의 형제의 이름을 따서 그의 아들 찰스 다윈의 이름을 지었다.[11] 슈루즈베리는 잉글랜드 슈롭셔 주의 주도인데, 그는 슈루즈베리의 3/4을 소유한 지주였다. 그는 대부업이나 부동산업 등을 통해 재산을 크게 키웠으며, 그의 집인 '더 마운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의학적인 상담을 받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금전적인 거래나 기타 상담을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전해진다.[12]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13] 식물을 기르고 관찰하는 것은 현대의 연구에서도 굉장히 많이 하는 일이다. 다윈의 노트에는 당시의 날씨나 식물의 길이, 모양 등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14] 이러한 취미들이 사실은 당대 신사 계급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널리 퍼져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15] 당시의 교육 제도는 현대와는 달라서, 이곳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내기 위한 예비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학제가 초, 중, 고등학교가 나뉘어진 것은 19세기 초중반의 일이다.[16]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이 "나는 일주일에 같은 아이를 세 번 이상 매질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한다. 매와 권위에 의존한 교육이었다.[17] 당연히 좋은 강의보다는 잘 팔리는 강의를 하게 되는 문제점들이 나타났다.[18] 라마르크는 용불용설을 주장했던 그 라마르크 맞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진보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다윈의 진화론이랑 맨날 비교당하는 신세지만.[19] 이들에게 살해되어 팔린 희생자만 16명. 버크는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지만 헤어는 사법거래로 추정되는 석연치 않은 명목으로 석방되어 1862년에 암으로 사망한다. 석방되기는 했지만 세간의 이목은 여전히 살인마 취급이라서 평생 숨어 살았다.[20] 출처 : R. Michael Gordon의 The Infamous Burke and Hare: Serial Killers and Resurrectionists of Nineteenth Century Edinburgh[21] 그가 가장 큰 열정을 쏟은 강의라고 한다. 수업만 열심히 들은 게 아니라 그의 조교 노릇을 자처했다.[22] 이 사람은 당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저명한 과학자들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다윈도 이 중 하나였다. 이 양반은 이후 다른 방면에서 유명한데, 바로 해군 중장으로 진급한 뒤 영국 최초의 기상청장으로 취임, 일기예보 시스템을 처음으로 구축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비글 함 항해 이후 항해로 인한 재산 탕진과 기독교인으로서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을 도왔다는 죄책감과 정치적 실패, 기상청을 모함하는 주위에 대한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다, 피츠로이 제독은 1865년 4월 30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23] 이는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의 영향이 컸었다.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다윈이 인종차별과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창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4] 정확히 말하자면 다윈은 스펜서가 쓴 '진화'라는 용어만 가져다 썼을 뿐이다. 그나마도 원래는 꺼리던 용어였으나 유행하면서 억지로 쓴 것에 가깝고. 하지만 스펜서는 생물학적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론에 이용했다. 생각보다 심하게 왜곡된 게 문제.[25] 특히 다윈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악용된다는 점 때문에 그의 이론을 더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윈이나 스펜서나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모두 반대하는 진보주의자였던 게 함정.[26] "The children of the Indians are saved, to be sold or given away as servants, or rather slaves as long a time as the owners can make them believe themselves slaves; but I believe in their treatment there is little to complain of".[27] 흔히 다윈이 월리스의 편지를 보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하는데, 사실 월리스의 편지를 처음 본 다윈은 엄청나게 불안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비글 함 항해로 각종 국가에 다니면서 여러 생물의 진화에 대해 연구했을 그가 한 젊은이한테 진화론 주장의 위협을 느끼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래서 라이엘에게도 갈굼당했다. 그러나 추후에는 종의 기원을 발표하였고 불안감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을 출판하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28] 다만 둘은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의견을 크게 달리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화에서 적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문제다. 다윈은 어떤 기능을 가진 기관이 발달하면서 그 기능과 관련 없는 기관이 변화하거나, 한 기관이 그것이 발달하게 된 원래의 이유와 상관없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진화는 적응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부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월리스는 모든 진화는 적응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개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진화한 것이지, '부산물'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현대 진화론은 다윈의 견해에 훨씬 가까우며, 적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위 '적응주의자'들조차도 월리스처럼 극단적인 주장은 하지 않는다. 또, 다윈은 인간의 정신도 진화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월리스는 여기서 한 발 후퇴해 인간 정신의 발생에는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29] 친구인 곤충학자 헨리 베이츠와 남미 정글을 다녀보기도 했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다니고 생물을 채집하면서 관찰하기도 했다. 다만 남미에서 돌아올 때는 병에 걸리고 배에 불이 붙어 연구물들이 다 타버리는 등 수난이 많았다. 현재 말레이제도의 생물지리적으로 구분되는 중간 지점을 월리스 선(Wallace's line)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의 동남아시아 항해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의 전신인 사라왁 왕국의 백인 왕 제임스 브룩이었다.[30] 월리스는 말년에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데, 명왕성 발견의 초석을 닦았던 미국의 천문학자인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 운하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자, 곧장 이에 반박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월리스의 이론에 따르면, 화성의 표면은 극도로 건조해서 액체 상태의 수분이 생겨도 운하를 이룰 정도로 크게 흐를 수준은 못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때 월리스의 나이는 무려 82세였다. 월리스의 예측은 뒷날 NASA에서 추진한 화성 탐사계획인 매리너 계획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31] 다윈은 진화론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학자일 뿐 진화와 연관된 생각을 처음 해 본 학자는 당연히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학계에서는 종의 다양성과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화론 비슷한 생각은 아득히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가 인류의 기원에 대해 본래 물고기같은 수생동물이었다가 땅으로 올라오면서 형태가 변화했으리라 추측한 사실이 익히 알려져있다. 이외에 호주 원주민의 전설에도 종 분화 비슷한 개념이 등장하고 다윈이 주장하기 천 년 전 아랍인 과학자도 생물의 오래전 뼈를 보면서 과연 알라가 생물을 창조할 때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낼까? 사는 곳마다 다른데 뭔가 다르게 창조한 게 아닐까 아니면 창조한 것이 기후나 여러 지역에 맞게 조금씩 달라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기록까지 남아있다.[32] 다윈을 대신해 각종 논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멋진 신세계로 유명한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더불어 아들은 레너드도 작가로 이름을 알렸고 또 다른 손자인 제프리는 영국 교육부장관에 올랐으며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 줄리언 헉슬리나 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앤드루 헉슬리도 손자다.[33] 틀린 얘기는 아니다. 비록 우울증 증세의 일환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된 것이 흑역사이긴 하나, 젊은 시절의 그는 엄연히 라이엘과 함께 지층 생성의 메커니즘을 규명하여 현대 지질학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뒷날 그 자신이 적대하게 된 다윈처럼 피츠로이도 이때 당시에 종교계의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반대로 과학자들로부터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34] 파브르가 당대의 다른 반(反)진화론자들마냥 기독교 근본주의에 빠져있어서 진화론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브르는 진화론에 대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나나니벌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다윈의 이론과 맞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정확히는 나나니벌을 포함한 사냥벌 종류의 곤충들이 애벌레의 먹이용으로 잡아온 곤충을 마비시켜서 저장하는 행동을 당시의 진화론으로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자칫 마비시킨 곤충이 마비에서 깨어나서 도망갈 위험성때문에 번식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이런 행동을 나나니벌이 학습으로 얻어낸 결과로 보긴 어려웠고, 그래서 파브르는 진화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뒷날 이 부분도 후속 연구를 통해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만일 이 사실을 파브르가 알았다면, 그는 기꺼이 진화론을 인정했을 것이다.[35] 이 거북이를 소재로 한 동화책도 있다. 제목은 거북이의 이름인 '헤리엇'[36] 오히려 이 부분은 의도된 거라고 해석하는 게 옳다. 당장 포스터만 하더라도 어디선가 많이 본 구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37] 자연사 박물관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이 된 그곳이다.[38] 정확히는 육지거북 중에서도 대형종인 갈라파고스땅거북. 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갈라파고스 출신이다.[39] 참고로 암컷. 여사님 정작 오랜 새월동안 수컷으로 오인당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남성형인 해리였는데, 성별이 제대로 밝혀지자 부랴부랴 여성형인 해리엇으로 개명.[40] 뒤에서도 나와있지만, 원주인 다윈이 죽은 이후에도 엄청 살다 갔다.[41] 사망장소는 오스트레일리아 동물원이며,[42] 사인은 심장 발작이라고 한다.[42] 다윈에게 해리엇을 인도받은 장교가 호주로 갔을 때 이 녀석을 데리고갔기 때문에 그 이후엔 호주에서 살게 되었다.[43] 기록으로 출생년도가 알려진 파충류 중 제일 오래 산 개체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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