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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희망 필문로의 주인공 이선제의 정책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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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란 나라에 큰일을 하고 애쓴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표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는 이 부조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필문 이선재(1389∼1454)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원래의 터에서 50여m 정도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건물은 앞면 3칸과 옆면 1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보아 사람인(人)자 모습인 맞배지붕을 올리고 있다. 앞마루를 두고 있으며, 마루밑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열려 있다. 문은 쌍여닫이문이며, 높게 지은 3개의 대문과 기와를 얹은 담에 둘러싸여 있어 당당함을 풍긴다.
부조묘의 뒷산언덕에는 선생의 묘와 묘비가 있고, 마을 앞에는 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600여 년이 된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나무가 있어 이곳의 유래를 상상케 한다. 이는 조선 초의 문신인 필문 이선재((畢門李先齋):1389∼1454)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이다. 나라에 공훈 세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조之典)으로 건립한 사당이 부조묘이다. 필문은 광주 대촌 출신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때는 정인지(鄭麟趾)등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秀巖書院)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정면 세칸과 측면 한칸,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막돌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마루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으로 맞담위에 기와를 얹은 담을 돌렸다. 부조묘의 뒷쪽산 언덕에 필문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유서깊은 이곳의 유래를 상상케 한다.
< 차 례 >
Ⅰ. 머리말
Ⅱ. 필문 이선제의 생애
Ⅲ. 필문 이선제의 정책
Ⅳ. 맺는말필문 이선제(畢門 李先齊: 1389-1453)를 기리기 위한 거리명으로 1988년 광주광역시에 의해 지정되었다. 필문로의 지정은 충장로나 금남로를 지정하여 김덕령장군과 정충신을 기리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어 보인다. 참으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했던가...
세종12년(1430) 광주사람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나, 당시 광주는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필문은 문종 원년(1451)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하여 무진군이던 광주를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문의 5대손인 이발(李潑;1544-1589)과 이길(1547-1589)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에 관련되면서 필문가문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기축옥사로 가문이 화를 당한지 300여년 동안 필문은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30년이 넘게 주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태종실록』,『고려사』를 편찬하고 중요한 정책 상소를 올리는 등 세종·문종대에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필문의 정확한 생몰 연대마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청자에 새겨진 필문의 묘지(墓誌)』가 일본에 밀반출되기 직전 김해공항에서 문화재 감정관이던 양맹준에 의해 필사됨으로써, 극적으로 정확한 생몰연대가 알려지게 되었다.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 원년(1419) 증광시에 급제한 후 필문은 생을 마감한 1453년까지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집현전수찬, 집현전부교리, 집현전직제학,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동지춘추관사,경창부윤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필문이 조정에 나아가 남긴 주요 업적으로는 다음의 것을 들 수 있다. 예조참의 재직시의 이재소(理財疏), 예문관제학시의 군재소(軍財疏), 경창부윤으로 임명된 후에 시의소(試醫疏)와 단군신전건립소(檀君神殿建立疏)를 올려 경제, 국방, 보건 및 단군에 대한 정책을 건의하여 논의하게 하였으며,『태종실록』,『고려사』를 편찬하여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복시관(覆試官)으로 많은 인재를 발탁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필문은 조정에서만 아니라 향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미 살핀대로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켰을 뿐 아니라 지금의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喜慶樓)을 짓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광주의 젊은 선비 30인을 뽑아 강학의 학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광주 향약"이라고 불리는 광주 최초의 실질적인 향약도 그에 의해 실시되었다.
본고에서는 필문의 생애와 30여 년의 관직생활 중에 올린 이재소(理財疏), 군재소(軍財疏), 시의소(試醫疏)를 통한 필문의 정책, 4번이나 참여한『고려사』개찬, 그리고 필문이 실시했던 '광주향약'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노력이 기축옥사 이후 잊혀져 왔던 필문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Ⅱ. 필문 이선제의 생애
휘(諱)는 선제, 자(字)는 가부(家父)이며 필문(畢門)은 그의 호(號)다.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司僕卿)을 지낸 일영(日英)을 아버지로,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상호군(開城尹上護軍)을 지낸 홍길(弘吉)을 할아버지로 하여 1390년 현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양촌 권근(權近1352-140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태종 13년(14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세종 원년(1419)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세종 원년(1419)부터 필문이 돌아가신 단종 원년(1453)까지, 필문은 30년 이상 관직에 있었다. 필문의 관직 생활은 활동의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필문이 대부분 집현전에서 활동했던 시기였다.
제1기(1419-1442)가 학자로서의 활동기였다면 제2기(1442-1453)는 정치적 활동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후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들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 필문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주요 관직에 올라 있었다. 필문이 제수받았던 주요 관직으로는 첨사원동첨사,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공조참판,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동지춘추관사, 경창부윤 등이었다.
10여 년의 기간동안 필문은 6조의 고급관료인 참의(參議)나 참판(參判)으로서, 그리고 외관직인 강원도 관찰사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관직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과,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 본 옛 제도를 바탕으로 각종 정책상서(上書)를 올리는 등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당시 필문이 올렸던 상서로는 세종 29년(1447) 예조참의로서 올린 이재소(理財疏)를 비롯하여 문종 즉위년(1450) 예문관제학 때 올린 군재소(軍財疏), 단종 즉위년(1452)에 올린 단군신전건립소(檀君神殿建立疏)와 시의소(試醫疏) 등이 있다. 이 상서들은 당시 필문이 경제, 국방, 의료 및 단군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 필문의 관직 중 눈에 띄는 것이 세종24년(1442) 첨사원동첨사(詹事院同詹事)와 문종 즉위년(1450)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의 관직이었다. 첨사원동첨사는 문종이 세자 시절 섭정할 수 있도록 설치한 첨사원의 관직이며, 문종 즉위년(1450)의 세자우부빈객은 바로 다음 임금이 되는 단종을 보필하는 관직이었다. 즉 필문은 세자의 정무처결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이 설치되자마자 첨사원동첨사로 발탁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당시 필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첨사원 관직의 독점으로, 집현전 출신 학자들은 학문적 집단에서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필문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러워 보인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해까지 시의소 및 단군신전건립소를 올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반송사(伴送使 : 중국사신을 호송하는 관리)로 임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 즉위년(1452)에 올린 상소에 '천식(喘息)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천식을 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 세력화로 인한 수양대군 측과의 정치적 갈등이 그의 죽음을 앞당긴 한 요인은 아니었을까? 30여 년 동안 주요 관직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그의 졸기(卒記)마저 남아 있지 않고 있음도, 그의 정치적 박해를 짐작케 해주는 요인으로 생각된다.
필문은 단종 원년(1453) 겨울에 서울에서 돌아가신 후 이듬해 봄 상여로 광주 만산동(萬山洞)으로 옮겨 할아버지 무덤 옆에 장례를 치렀다.
필문은 판사(判事)을 지낸 선윤지(宣允祉)의 여식을 아내로 삼아 5남1녀를 두었다. 장남 이시원과 5남 이형원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 후 필문 가문은 5대손인 이발(李潑), 이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과거 급제자를 내며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필문의 저술은 매우 많았다고 전해지나 기축옥사로 모두 소실되고 남아 전하는 것은 없다. 후대에 만들어진 수암지(秀巖誌)와 왕조실록에 산견되는 자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Ⅲ. 필문 이선제의 정책
필문은 30세 때인 세종 원년(1419)에 증광시에 급제한 후 부모님의 3년 상을 제외하고는 30여 년 동안 줄곧 관직에 있었다. 필문의 관직 생활이 다른 분과 달랐던 점은 주어진 자기 관직에만 한정하지 않고, 옛 제도를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 국방, 의료, 단군 신전 등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상서(上書)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하였다는 점은 아닐까 싶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상서(上書)로는 세종 29년(1447) 예조참의로서 올린 이재소(理財疏)를 비롯하여 문종 즉위년(1450) 예문관제학 때 올린 군재소(軍財疏), 단종 즉위년(1452)에 올린 단군신전건립소(檀君神殿建立疏)와 시의소(試醫疏) 등이 있다.
이 상서들은 당시 필문이 경제, 국방, 의료 및 단군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재소를 제외하고, 군재소와 시의소 그리고 단군신전건립소 등이 모두 돌아가시기 3년 이내, 즉 관직에 나아간 지 30년이 지난 이후에 올려진 것임을 볼 때 필문이 죽을 때까지 얼마나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골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1. 이재소(理財疏)
이재소는 세종29년(1447) 필문이 예조참의로 재직시에 올린 상서로, 필문의 경제관을 잘 보여준다. 필문은 장문(長文)의 상서에서 중국 역대 제왕들의 국가 재정 확보책으로 네가지를 들고 있다.
토지세인 전조(田租)와 술, 소금과 차의 전매(專賣)가 그것이다. 그 중 술과 차의 전매는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니므로 논할 필요가 없다면서, "소금이 토지세인 전조와 함께 국가 재정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필문은 그 근거로 "토지세인 전조는 반드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믿고서 만족하게 쓸 수 없으나, 소금의 수입은 홍수나 가뭄 그리고 흉년이 들 걱정이 없기 때문에 무한정 취하여 이용할 수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더욱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 나라로서는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소금을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는 정책은 앞 시대인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왔었는데 고려 말엽에 이르러 권문세족과 토호들이 독점 탈취하면서 무너져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전쟁이나 홍수,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고기와 소금을 국가의 수입원으로 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이선제(李先齊)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역대 제왕(帝王)들의 재물(財物)다스리는 길을 살펴보옵건대 네 가지가 있사오니, 이른바 전조(田租)를 받는 길, 술을 전매(專賣)하는 길, 소금을 전매하는 길, 차(茶)를 전매하는 길입니다. 전조(田租)는 풍년과 흉년이 있으므로 세납이 많고 적음이 있어서 국가의 씀씀이가 때로는 부족하고, 백성의 살기가 이로써 넉넉하지 못하게 되므로, 이에 세 가지 전매(專賣)의 의논이 생기게 된 것으로서, 이는 모두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술을 전매하기는 한(漢)나라 무제 때에 비롯하여 당(唐)나라 말기에 더욱 구체화되고 오계(五季)에 이르러 그 법이 더욱 가혹하였습니다. 차의 전매는 당나라 덕종 때 시작하여 조금씩 시작하다가 송나라 말에 이르러 공사간에 모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군신이 술로써 서로 경계하였을 뿐 그 이익을 규제하거나 금지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왕이 홍수와 국토를 평정하고, 공물을 작성함에 차(茶)라는 글자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이 두 가지의 전매는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족히 논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소금(鹽)의 이익만은 실로 삼대(三代)의 성인들도 바르게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제(理財)의 도 가운데 소금이 으뜸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삼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 있어, 모두가 소금을 구울 수 있는 곳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 말엽에 이르러 권문과 호족들이 이를 독점 탈취하고 말하기를 '국가가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고기잡이와 소금을 굽는 일과 미역의 채취는 백성들이 하는 일이니 가히 다툴 수 없다 하니, 그 어찌 경비의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생산하는 사람이 많고 먹는 사람이 적으면, 부지런히 생산하고 더디게 사용하면, 재물이 항상 넉넉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사지내고 손님 접대하는 비용과 사대부 녹봉의 비용을 모두 전조(田租)에서 취하니, 이는 먹는 것이 적고 소비가 더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근년 이래로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는데다 귀화한 사람들의 의식과 장사하는 왜인들의 무역으로 인해 지출이 많은데, 전조만을 믿고 산택의 이익을 활용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경성의 현재 곡식이 칠, 팔만 섬에 불과한데, 이는 한 사람 부자의 재산에도 지나지 않는 수량인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전쟁이나 홍수 또는 가뭄의 재난이 있게된다면 장차 어떻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전조는 반드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믿고서 만족하게 쓸 수 없으나, 어·염의 수입은 홍수나 가뭄 그리고 흉년이 들 걱정이 없기 때문에 무한정 취하여 이용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世宗實錄 卷117, 29年 9月 3日)
이러한 필문의 국가 재정 확보방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더군다나 필문의 이재소는 중국 역대 제도 뿐만 아니라 전조인 고려의 제도까지 참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문의 이재소가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이 밑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필문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도내 곳곳에 의염색(義鹽色)을 설치하고 선군(船軍)을 시켜 실제 소금을 굽게 한 후 백성들에게 쌀과 베로 바꾸어 가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재정이 확보되고 백성들 또한 소금 구하기가 매우 편리해졌다. 소금 굽기가 어려운 강원도에서 소금과 미역 등을 세금으로 받아들여 쌀로 바꾸어 비축해놓은 재정이 상당한데, 소금 굽기
가 쉬운 다른 도에서 실시한다면 국가의 재정이 매우 튼튼해질 수 있다는 것이 필문의 생각이었다.
필문은 이처럼 중국 역대 왕조 및 고려조의 소금 정책을 참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금 뿐만 아니라 고기나 미역까지도 조세원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안을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필문이 주장한 어염세 정책의 구체적인 안은 다음과 같다. 의염색(義鹽色)을 설치하는 규칙과 호조(戶曹)에서 구황 대비하는 법령을 거듭 밝히게 하고, 군정(軍丁)의 수효로 소금 굽는 수목(數目)을 분배하여 정하며, 개인이 굽는 소금과 미역을 모두 빠짐없이 수납하고, 제주도도 육지처럼 담당자를 파견하여 관리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염세 정책이 채택되면 국가의 창고가 가득 차고, 군량이 완비될 것이며, 굶주린 백성이 구휼되고, 외방의 오랑캐들을 대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필문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필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3년 뒤에 올린 군재소에서도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염세를 징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펴고 있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2. 군재소(軍財疏)
필문의 두 번째 상서(上書)는 문종 즉위년(1450), 필문 나이 61세 되던 해에 올린 군재소였다.
필문은 군재소에서 다음 3가지가 다시 정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조선 왕조가 건국 된지 50년이 지나면서 군사는 흩어지고 읍성(邑城)·산성(山城)은 무너지고 내지(內地)의 익군(翼軍)은 모두 연변(沿邊)에 소속되고, 변방의 나머지 백성들은 초야에 흩어져 있어 고려 현종 때의 거란이나 고종 때의 몽고와 같은 침입이 있다면 어찌 대처할 것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단기적으로는 한가한 때를 당해 성을 견고히 쌓고, 성을 지키는 군졸을 뽑아 책임을 주어 지키며, 장기적으로는 제성(諸城)의 군사를 조치할 방도를 대신과 더불어 강구하여 영세의 방어책으로 삼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이 일찍이 서북 지방의 익군(翼軍)의 제도를 보고 그윽이 마음에 유감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백성들을 함양(涵養)한 지 50년에 생치(生齒)가 날로 번성하고 군려(軍旅)가 다소 떨쳤으나, 근래에는 여러 가지 연고로 인하여 유망(流亡)하여 흩어져 10명에 8, 9명을 잃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연도(沿途)에 주(州)·군(郡)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의주(義州)는 한 나라의 문호(門戶)이고 적(敵)이 오는 첫 길목인데, 군사의 수는 많지 않고 민호(民戶)는 텅 비어 있어서, 중국의 제위(諸尉)에 비하면 백 명에 한두 명 꼴이 아니 되니, 저들이 보고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또 읍성(邑城)은 견고하지 아니하며, 산성(山城)은 무너지고, 내지(內地)의 익군(翼軍)은 모두 연변(沿邊)에 소속하고, 변향(邊鄕)의 나머지 백성들은 드문드문 초야(草野)에 흩어져 있는데, 만약 현종(顯宗) 때 거란병이나 고종(高宗) 때 몽고인과 같이 대거 내침하면 부인과 어린아이들은 어디에다 두겠습니까?의주에서 경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때의 방어하던 성(城)터가 어제의 것인 양 남아 있으니, 이러한 한가한 때를 당하여 주성(州城)과 산성(山城)의 험고(險固)한 것을 골라서 미리 각각 스스로 수축하게 하고, 수성 군졸(守城軍卒)을 뽑아 그 성공(成功)을 책임 지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제성(諸城)의 군사를 조치할 방도를, 다시 대신과 더불어 중국의 제도를 상고하고 전조(前朝)의 법을 고찰하여 영세의 방어할 방책으로 정한다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文宗實錄 卷4, 卽位年 10月10日)
둘째, "북쪽 오랑캐들의 숙박지는 모두 성 밖에 짓게 하여 접대하였는데, 안주·평양의 객관(客館)만이 오로지 성안에 있어 우리의 허실을 알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옛 제도대로 성밖에 짓자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군재소에서 필문이 다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군량미 보충 문제였다. 이미 살핀대로 3년 전인 세종 29년(1447) 필문은 이재소(理財疏)에서 국가 재정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토지세인 전조 외에 어염세를 거두어 보충하자는 주장을 편 바 있었다. 당시 필문의 이재소는 중국과 고려의 옛 제도를 참조하고 강원도 관찰사 시절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매우 현실적인 방책이었다.
그러나 필문의 건의는 수용되어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에 필문은 3년 후 다시 한번 군재소를 올려 "토지세인 전조(田租)만을 믿고 산택(山澤)의 이익을 쓰지 않는 것은 과연 옳은지 반문."하면서, "취하여도 다하지 않고, 써도 끝이 없는 소금·미역을 세금으로 취하여 면포나 쌀로 바꾼다면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될 것." 이라며, 거듭 어염세를 징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국가 재정 확보책인 어염세의 징수는 필문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었다.
3. 시의소(試醫疏)
필문은 삼의사 제조로 근무하면서 의생(醫生)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의서(醫書)의 내용에 정통한 자는 매우 드물었고, 조금만 알고 있거나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의원마
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서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자의 집에 이르러서도 병세는 묻지 않고 진맥하지도 않은 채 소견만으로 약을 써 환자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필문은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아니하였다.당시 필문이 가장 고민하고 걱정하는 내용은 의원들의 실력이었다. 의원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예조(禮曹)에서 통합하여 상등·중등·하등의 세 부류로 나누어서 뽑고, 또 여러 의서(醫書)들을 가르치고 읽게 하여 의원들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몇 년만 시행하면 반드시 양의(養醫)가 나올 것이며, 질병이 있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필문의 정책은 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관료들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를 그는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60을 넘긴 나이였지만, 의원들의 실력 때문에 환자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그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유능한 의원을 선발하고 교육시켜 양의를 길러내자는 개혁 상서를 올렸던 것이다.
신이 삼의사(三醫司) 제조(提調)로서 의생(醫生)을 시재(試才)해 보니, 의생들 가운데 여러 가지 의서에 통한 사람도 있고, 약간 통한 사람도 있으며 전혀 알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사람의 재주 있고 없음과 학문의 정밀함과 조잡함을 대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제생원(濟生院)의 다만 제조(提調)만 있을 뿐 항시 앉아서 의서를 강구하는 사람이 없고, 또 항상 출사하여 교수하는 제거(提擧)나 훈도하는 자가 없이 생도들이 떼로 모아 각자 습독하기 때문에 뜻에 관통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병가에 이르러 병증도 묻지 아니하고, 진맥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견만으로 맹랑하게 약을 써 어려움에 이르게 하니 가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의원의 의원과 삼의사(三醫司)의 의원을 합쳐서 예조(禮曹)에서 여러 의서로써 시취(試取)하여 <성적이> 상등(上等)에 든 자 10여 인은 전의감에 소속시켜 어약(御藥) 만을 오로지 관장하도록 하고.......직 제조가 항상 자리에 앉아 읽은 바의 일과를 고찰하고, 나이가 젊고 청명한 선비 몇 사람과 의서에 밝은 노련한 의원을 가려 뽑아 제거별좌(提擧別坐)로 삼고 모두 겸직시켜서 여러 의서를 가르치게 하고, 매달 일강(日講)하기를 성균관 4부학당의 예처럼 하고, 나머지 중등과 하등의 의생은 혜민국과 제생원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제조별좌가 항상 출사하여 강론하게 하시옵서서.
이와 같이 몇 년만 하면 양의가 반드시 나오기 때문에 병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근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端宗實錄 卷4, 卽位年 12月25日)
4. 고려사 개찬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앞 시대인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태조 원년(1392) 10월, 태조로부터 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1396년 37권의『고려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려국사』는 그 내용과 서술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태종은 재위 14년인 1414년 하륜(河崙)·변계량(卞季良) 등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다시 명하였지만, 하륜이 죽자 고려사의 정비 작업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에도 이어졌다.
세종 원년(1419)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겨 어느 정도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재위 13년인 1431년『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세종 24년(1442) 8월에 신개·권제에게 편찬의 일을 맡기게 되었다. 이 책은 세종 30년(1448)에 양성지(梁誠之)의 검열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단되고 말았다.
세종은 다시 재위 31년(1449)에 김종서·정인지·필문 이선제·정찬손에게 명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을 불러, 『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에 대한 것을 의논하고 춘추관에 전지하기를, “『고려사』가 자못 소략(疎略)한 데 지나치니, 이제 다시 고열(考閱)하여 자세히 보태어 넣으라.”하고, 드디어 우찬성 김종서·이조 판서 정인지·호조 참판 이선제(李先齊)와 창손에게 감장(監掌)하기를 명하였다. (世宗實錄, 卷123, 31年 1月28日)
김종서· 이선제 등은 문종 원년(1451) 8월에 드디어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제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 ·지(志) ·연표 등을 작성하도록 일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김종서 ·정인지·이선제 등이 이를 산삭하고 윤색하는 일을 맡았다.
열전(列傳)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단종 즉위년(1452)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단종 2년(1454) 10월에 이르러 비로서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였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앞 왕조에 대한 역사가 정리될 수 있었다. 이미 살핀대로 이선제는 김종서, 정인지와 함께 역사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산삭(刪削 : 불필요한 글자나 글귀 따위를 지워 버림)과 윤색(潤色 : 초고를 다듬어 좋게 꾸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려사』개찬에 참여한 공으로 필문은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문종으로부터 하사 받기도 했다.
5. 光州鄕約의 실시
향약이란 중국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으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여씨 향약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살던 여씨 4형제가 일가 친척은 물론이고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든 약속이었다. 이 여씨 형제들에 의해 실시된 향약을 주희가 가감하여 발전시킨 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었다. 주자 향약은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명·청 대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조선의 향약도 '주자향약'에서 비롯되었다. '주자향약'은『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고려말 전래되었으나 곧바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향리였던 함흥에서 '향헌(鄕憲) 41조'를 친히 제정하고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반포 실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후 광주, 안동, 태인 등지에서도 향약이 실시되었다.
광주에서의 향약은 형조참판과 황해감사를 역임한 김문발(金文發 1358-1418)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문발이 행했다는 향약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 수 없지만 크게 행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종·문종대에 크게 활동했던 필문 이선제에 의해 다시 향안이 작성되어 일년에 봄·가을로 두차례 향약이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문이 언제 광주에서 향약을 실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필문이 행한 '광주향약'의 내용을 담고 있는『수암지(秀巖誌)』에는 문종 원년(1451)에 태수 안철석과 함께 실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문종 원년에 필문은 예문관제학으로 여전히 중앙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필문이 죽고 난 후 '광주향약'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5세기 말 16세기초에 만들어져 100여 동안 실시된 '양과동동약'을 분석해보면 거의 필문이 실시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문이 실시했던 '광주향약'이 '양과동동약'으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초기의 좌목(座目)에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화를 당했던 이발(李潑; 이선제의 5대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필문과의 연관성을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필문에 의해 행해진 향약의 내용이『수암지(秀巖誌)』에 실려 있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필문에 의해 작성된 '광주향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其1章과 罰則
▶其2章과 罰則
▶其3章과 罰則
▶附則과 罰則▶其1章과 罰則
▶其2章과 罰則
▶其3章과 罰則
▶附則과 罰則
제 1장은 주로 가족 및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에게 불순한자,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하는 자 등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상등(上等)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 2장은 향촌민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정부인을 박대한 자, 친구끼리 서로 싸우는 자,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 국가의 각종 세금 및 역(役)을 행하
지 않는 자 등에 대한 내용으로 중등(中等)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 3장은 회의시의 불참자나 문란자에 대한 내용으로 하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칙(附則)을 두어 하급관리들이 향촌 사회에서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국가의 공금을 탐할 경우 관에 고발하여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도 규정하고 있다.
필문이 시행했던 '광주향약'에서는 이미 살펴본 대로 가족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를 상등의 벌로, 향촌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를 중등의 벌로, 향약을 운영하기 위한 회의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하등의 벌로 규정하고 있다. 상·중·하등의 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가 가장 엄한 벌을 받고 있음을 통해 가정의 질서 유지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청의 하급관리가 민폐를 끼치는 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Ⅳ. 맺는 말
지금까지 필문의 생애와 정책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미 살핀 대로 필문은 30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래 죽는 날까지 30여 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필문의 활동은 과거 급제 후부터 문종이 세자로서 섭정하였던 세종24(1442)년까지와 그 이후의 활동으로 나눌 수 있었다. 전반기 20여 년은 주로 집현전에서 활동하던 학문의 시기였다면,
후반기 10여 년은 국가의 주요 관직에 종사하면서 이재소 등 각종 개혁 상소를 올렸던 정치적 활동기였다. 특히 문종의 섭정이 시작되면서부터 참여했던 첨사원동첨사와 문종 즉위년의 세자우부빈객은 당시 필문의 정치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
필문이 거친 주요 관직으로는 집현전부교리, 경연시독관, 집현전직제학,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세자우부빈객, 예문관제학, 경창부윤 등이었다.
필문이 다른 분과 달랐던 것은 관직 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재소를 통한 경제 정책, 군재소를 통한 국방 정책, 시의소를 통한 보건 정책은 그 실시 여부를 떠나 매우 시의 적절한 상서였다. 특히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전조만이 아닌 어염세를 추가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그의 신념이었다. 국가재정이 확보되어야 군량미도 확보될 수 있고 민생이 안정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재소를 올린 3년 후 군재소에서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필문의 업적은 정책 건의소만으로 한정될 수 없다. 태조 대부터 시작되어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수 차례 개정 논란이 있었던『고려사』편찬 작업에 4번이나 참여하여 그 마무리를 하였을 뿐 아니라, 단군 신전을 새로이 건립하자는 상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보다 자주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다.
필문은 거의 전 생애를 중앙에서 관료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은 고향에 있었다.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를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시켰으며,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광주향약'이라고 불리는 그의 향약은 이후 '양과동약'으로 계승되었다.
1592년 기축옥사로 가문이 멸문을 당하면서 필문은 수 백년 동안 생몰 연대마저 잊혀진 인물이었다. 필문이 죽은 지 360여년이 지난 순조 20년(1820)에 가서야, 강진의 수암서원(秀岩書院)에 배향될 수 있었다. 이 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의 죽산사(竹山祠)와 화순읍 앵남리의 오현당(五賢堂)에도 배향되었다.
그리고 1988년 광주광역시는 남광주 역에서 조대 앞을 지나 서방4거리까지를 '필문로'로 지정하였다.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큰공을 세운 필문에게, '필문로'는 그의 업적을 잊지 않고 기리는 소중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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