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에 소개되는 글의
천주교 정양모신부님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시다. 인품이 탁월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번역본 등을 통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오늘 새벽 이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고 여기에 스크렙한다.
나는 포도원일꾼과 주인의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먼저 온 자와 나중에 온 자를 똑같이 1데나리온을 준다."
왜 하나님께서 그랬을까? 나중된 자를 먼저 쓰겠다?? 왜 그럴까???
나는 모든 시각을 노동자 또는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지만, 그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아니면 사회적 대열에 같은 조건으로 끼어들지 못하는 아니면 못할 형편에 놓여 있는 긍휼이 요구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한다.
아침일찍부터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하루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아침부터 마음에 고통을 받지 않고 오직 오늘 하루 일하고 나면 일당을 받아 가족과 함께더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오후 3시가 되는 시간까지 일꺼리를 갖지 못한 노동자의 심정으로 나는 이 귀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한다. 얼마나 안타깝고 갸륵한 사람인가? 상황을 한 번 깊이있게 관찰하기 바란다.
38년 동안이나 베다니 연못가에 앉아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앉은뱅이? 환자의 애타는 모습,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자궁암)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모습은 가히 오늘의 소외된 우리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시린다.
일당을 받는 순서에서 또 나중에 온자를 먼저 주게 하시는 하나님. 왜
행여 나주에 왔으니까 일한 시간만큼만 받게되면 내일 한 끼 식사값도 안되는데 어떻게 하나?? 답답하고 비참한 심정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
이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는 기독교사회정의와 그 희망을 보게 된다.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것이다.
공적에 따라 배분되는 배분적 정의는 인간의 정의이다. 누구에게 평등한 정의사회가 진정한 사회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사회의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나는 이 새벽에도 마음저려오는 설레임과 아쉬움과 기다림 그리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한다.
이덕휴목사
출처 연중 제25주일,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마태 20, 1-16 by kaniel3
❖ 연중 제25주일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마태 20, 1-16
https://blog.naver.com/kaniel3/222065071733
오늘 복음은 어떤 포도원 주인이 아침 6시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하였습니다. 그가 아침 9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일꾼들이 있어서 그들도 자기 포도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12시, 3시, 5시에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자기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하였습니다.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주인은 늦게 온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까지 같은 일당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관념에는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한 데나리온은 그 시대 서민가정의 하루 식비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은 일당을 받고,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 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 마지막 말씀을 어떤 번역본은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지는 거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베푸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냉혹한 우리의 분배정의에 얽매인 시선은 사납다는 말입니다. 준만큼 받아야 하고, 받은 만큼 주어야 하는 세상의 관행은 우리를 사납게 만듭니다.
대가(代價)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베푸는 것을 무상(無償)으로 베푼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셔서 시작된 우리의 생존입니다. 부모님이 무상으로 우리를 낳아 키웠고, 우리 주변의 많은 분들이 대가 없이 우리를 가르치고, 위하며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명은 무상에 감싸여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무상의 베풂이 흘러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하느님은 무상으로 베풀지 않으신다고 반론을 펼 수 있습니다. 돈에 궁했을 때, 병들었을 때, 하느님에게 기도하였지만, 하느님은 돈도, 건강도 주시지 않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느님이지 우리 삶의 해결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돈에 궁하고, 병고에 시달리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무상의 베푸심이 있었다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철이 들고 세상을 배우면서, 무상이라는 것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척도를 하느님에게도 적용하여, 하느님도 우리가 바친 만큼, 또 공로를 쌓은 만큼, 포상하신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되면, 엄청난 보속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13세기에 도입된 개인고백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고백하는 부끄러움 겪고, 보속이라는 대가를 치러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우리의 척도(尺度)에 맞춰 재단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관행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인과응보 척도에 따라 베풀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을 베푸는 선하신 분으로, 또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아버지로 알아듣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생존이 은혜롭게 베풀어졌기에, 우리도 베푸는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정의(正義)입니다.
하느님은 죄에 대해 벌을 주고, 많이 바치는 자에게 많이 주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그렇게 가르쳤고, 오늘도 그렇게 믿어야 안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지키고 바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시는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로움을 배워, 그 은혜로움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며 살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산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상쾌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고 깊은 숲에 들어가면 대자연의 포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상쾌하고, 그렇게 포근하고 또한 그렇게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욕심을 외면하지 못해서, 하느님 앞에 늘 불안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고, 그들만 예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고,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작은 마음에서 해방되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나의 자유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베풂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사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기꺼이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루가 12, 32-33). 신앙인은 두려워서 하느님에게 빌고, 자기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지 않고, 우리의 생존을 무상으로 베푸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일이 없어, 하루의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생명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같은 일당을 주어서 살도록 하는 포도원 주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가 성당을 화려하게 짓고, 전례가 아름다워도,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빙자한 높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군림한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은 보이지 않고, 높고, 많이 가지고, 강하겠다는 ‘사나운 눈길들’만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은혜로움이 실천될 때,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이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일 것입니다. ◆[서공석신부님]
❖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마태 20,1-16)
1) 명칭 및 편집소
마태 20,1-16에 나오는 비유를 일컬어 흔히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 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조나 내용을 살펴보면 보기 드물게 선한 포도원 주인의 처사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므로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라고 고쳐 불러 마땅하다. 이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보통비유가 아니고, 매우 드물게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특례비유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처럼 처신하는 선인을 만나기는 진실로 어렵기 때문이다.
비유의 적용문 “이와 같이 말째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말째가 될 것입니다”(16절)는 여기저기 자주 나오는 유행어이다(마르 10,31=마태 19,30; 20,16; 루가 13,30). 이 유행어는 본디 ‘추종 과 보상’ 단락 끝에 달려 있던 것인데(마르 10,31) 마태오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바로 앞에다 이 유행어를 곧이곧대로 베끼고(마태 19,3), 조금 고쳐서 비유 끝에다 또 실었다(20,16). 그러니 20,16은 분명히 마태오의 가필이다. 이것이 마태오의 가필임은 유행어의 시제가 미래인 점으로 다시 확인된다. 비유 이야기(1-15절)는 현시점에서의 하느님의 지선하심을 강조하는 데 비해서, 유행어(16절)에서는 장차 종말 심판 때 하느님께서 말째 사람을 너그러이 대하시리라고 한다.
비유 서두 “사실 하늘나라는 …과 비슷합니다” (1ㄱ절)도 마태오가 자주 쓰는 문구로 마태오의 가필일 것이다(13,24.31.33.44.45.47; 18,23; 22,2; 25,1). 따라서 이 비유는 본디 “집주인이 자기 포도원에 일꾼들을 고용하러 이른 새벽에 나갔습니다” (lㄴ절)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례비유는 비교하는 서두(1ㄱ절) 없이 과거시제로 시작하곤 한다(Lambrecht, 77-78).
2) 예수님으l 비유 풀이(마태 20,1ㄴ-15)
이스라엘에선 10월 말경이면 포도를 거두어들인다. 포도수확은 일일이 손으로 하는 일이라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6 9 12시, 그리고 오후 3 · 5시에 노동시장에 가서 계속하여 일꾼들을 고용한다. 주인은 오후 6시에는 일을 마감하고 관리인을 시켜 품삯을 준다. 여기까지는 별로 이상할 게 없다. 품삯을 줄 때 “맨 나중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사람들에게까지 일꾼들의 품삯을 치르시오(8절)라는 명령문은 조금 뜻밖이지만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먼저 받고 나중 받는 게 중요한가, 얼마나 많이 받는가가 중요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에게 먼저 품삯을 주라고 한 것은 맨 먼저 고용된 일꾼들의 반응을 유발하려는 것이다. “오후 다섯시쯤 고용된 사람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그러자 맨 먼저 사람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받으면서 집주인에게 투덜거리며, ‘이 맨 나중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그들을 하루의 수고와 뙤약볕을 견딘 우리와 같이 다루십니까?’ 하였습니다”(9-12절).
맨 먼저 고용된 사람들의 불평은 자연스레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불평을 연상케 한다.
마르 2,16-17 단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관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먹다니’ 하였다 ….”
루가 15, l-2 비유 도입문
“세관원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에 게 다가왔다. 그러자 바라사이들과 율사들이 투덜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구나’ 하였다”(루가 15,29-30 참조).
마태 11,19=루가 7,34 비유 적용문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까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 하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 .”
그러니까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배경을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예수께서 직업상의 죄인들 및 윤리상의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곤 하시자, 바라사이들과 율사들이 그분의 처신을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마르 2,16-17: 루가 15장; 마태 11,19 = 루가 7.34 등에 나오는데,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역시 그런 답변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예수께서 당신의 파격적 처신을 변호하시는, 그분의 신상발언이라 하겠다. 이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상대로 발설하신 비유가 아니고 일반 청중에게 말씀하신 비유라는 이설이 있으나(Schweizer, 257; Weder, 227-228) 설득력이 없다.
예수께서는 포도원 주인으로 표상된 하느님의 처신을 눈여겨 보라고 하신다. 여기에는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의 처신을 본받아 행동한다는 뜻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하느님은 선한 포도원 주인 같은 분이시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에게 당초 합의한 대로 로마 은화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준다. 놀라운 사실은 오후 늦게 단 한 시간 일한 일꾼들에게도 똑 같은 품삯을 준다는 것이다. 이 때 선한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 품삯을 쳐주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 일꾼들이 거느린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서 크게 후의를 베푼 것이다. 하느님은 이 비유의 주인공처럼 대자대비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예수 당신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빠를 깊이 깨달으신 까닭에 직업상의 죄인들 및 윤리상의 죄인들과 기꺼이 어울리신다는 것이다. 공덕에 비례하여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상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넘치는 호의를 역설하셨다. 예수께서 하느님을 본받아 밑바닥 인생들을 편애하신 사실은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장), 죄인들과 세관원들과 어울려 식사하셨다는 단화(短話, 마르 2,16-17), 예리고 세관장 자캐오 이야기(루가 19,l-10) 등에서 잘 드러난다.
성서주석가들 못지 않게 문인들도 이 비유의 핵심을 정확히 간파한다. 예로, 괴짜 신부 가스똥이라는 작중인물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리에서 한 일들을 소재로 하여 스코틀랜드 출신 브루스 마샬이 1950년에 펴낸 소설 「누구에게나 한 데나리온을」(분도출판사, 1992)을 꼽겠다. 당시 프랑스 부자들은 첫영성체 후 한 차례도 성당에 다니지 않다가 임종에 이르러서야 병자성사를 받곤 했는데 가스똥 신부는 이를 퍽 못마땅히 여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사집전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돈은 엄청나게 벌었지만 한평생 성당과 인연을 끊고 산 부자가 병자성사를 청하자 신부는 임종환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포도원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일꾼들에게도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과 마찬가지의 보수를 주도록 마련하신 것은 당신 같은 사람으로선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건 아주 굉장히 성스러운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신부인 자기로서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226 쪽).
타고난 이야기꾼 박완서 선생은 말하기를, 이 비유 전반부(1- 8절)는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데 비해서 후반부(9-15절)는 한 동안 좀체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날이 아주 저물어 품삯을 계산할 때 주인이 한 처사는 좀처럼 납득이 안된다. 품삯을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는 것도 불공평한 것인데, 새벽부터 일한 일꾼이나 저녁 때 불러들인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준다는 건 말도 안되는 처사였다. 온종일 퇴약볕 밑에서 수고한 일꾼들이 이런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항의한 일꾼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마지막 일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마고 했으니 그대로 했을 뿐이고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되레 나무라는 투다. 나도 항의한 일꾼과 마찬가지로 그 대목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하늘나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도 초월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믿는 까닭이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불공평 때문이어서 그런지, 내가 생각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인간의 수고와 선악을 다는 절대적으로 공평한 저울을 가진 분이어야 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들 수 있는 조건을 가혹하다 할 정도로 까다롭게 붙이기로 소문난 예수님께서 어쩜 이렇게 허술한 비유를 하셨을까.
이렇게 도무지 이해가 안되던 구절이 요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 자주 떠오른다. 포도원 일꾼이라면 물론 말발이나 글발로 먹고 살 수 있는 지식인은 아니었을 테고 요즈음의 기능직하고도 달라 그냥 몸힘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막노동꾼이었을 것이다.
그 일꾼의 초조하고 초라한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민의 시선과의 만남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한 데나리온을 현대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아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이 되지 않을까. 막노동 시장에 일손이 딸리는 현상도 먼저 온 일꾼, 바꾸어 말하면 더 약은 사람과의 물질적 정신적인 차별대우 때문이지 결코 일하기가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가진 자가 먼저 걱정해야 할 일은 노동을 기피하는 풍조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포도원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분의 저울은 인간의 지혜가 만든 어떤 정밀한 저울보다도 틀림이 없다”(“그분의 저울”, 「성서와함께」, 1990년 8월호, 59-61쪽).
3) 마태오의 이해
마태오의 사상을 알려면 이 비유의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앞문맥(19,16-30)을 살펴야 한다. 앞문맥을 보면 부자는 재물에 집착하여 예수 추종을 포기한 반면,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 결과 부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권한과 포기한 것의 백 배를 보상받는 복락을 누리게 되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런 현상을 서열전도(序列顚倒) 유행어로 표현하여 종말이 닥치면 “첫째(부자)가 말째가 되고 말째(제자)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19,30) 라고 한다.
마태오는 이런 문맥에 이어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20.1-15)를 배치하고 그 끝에다 종말 서열전도(序列顚倒) 유행어를 반복했다: “이와 같이 말째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말째가 될 것 입니다”(20,16). 지금 문맥에서 이 유행어의 뜻인즉, 맨 마지막에 고용된 말째(그리스도인)가 첫째가 되고 맨 먼저 고용된 첫째(유대교인)가 말째가 되는 일이 종말에 벌어진다는 것이리라. 마태오는 이른 새벽부터 고용된 일꾼들은 유대교인들을 가리키고 맨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하느님께서 종말에 유대교인들에게는 저들의 동태보상 사 상에 따라 정의대로 보상하시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넘치도록 후하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4)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 체험하고 설파하신 하느님은 지선하신 아빠시다(마르 14,36; 참조 갈라 4,6; 로마 8,15). 요한계 교회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1요한 4,8.16). 하느님과 인간을 예수처럼 가까이 맺어준 현자나 도사는 전세계 종교사상 없었다. 예수의 비유 및 특수비유는 억지가 많은 무리한 이야기인 우화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예수 비유 연구의 대가 율리허(Adolf Jülicher 1857-1938)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복음의 핵심(evangelicem in nuce)이라고 했는데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머나먼 하느님, 지엄한 하느님을 연상하곤 하는데, 예수께서 체험하고 설파하신 하느님은 실로 가까운 하느님, 정다운 아빠시다. 하느님이 아빠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빠 품에서 노니는 아가들이다. ▮[정양모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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