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Heidegger 1953:250).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가능성은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그 가능성으로 선구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은폐되어 있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하게끔 한다. 그래서 죽음의 가능성은,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에의 퇴락으로부터 현존재를 자유로워지게끔 만드는 동시에 현존재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근거짓게끔 만드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자유와 자기 정초(Begründung)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 글의 과제는 위에서 간략히 제시된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재의 실존에 갖는 의의를 『존재와 시간』에서 수행된 기초존재론의 구도 안에서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하면 죽음의 가능성을 그것의 실존론적 구조에 기초하여 해명함으로써 그것의 의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하이데거가 수행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 특히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자아)와 현존재의 존재(자기) 사이의 구분, 현존재의 자기수행적 관계성 및 현존재의 자기이해에서의 가능성의 문제, 죽음의 가능성과 본래성/비본래성의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으로의 선구와 시간성 사이의 연관이 검토된다. 그렇다면 이제 하이데거가 수행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각주:1]
2.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의 현존재의 존재: 자아와 자기의 구분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존재론적 차이로 규정하며 이를 자기 사유의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로 삼는다. 존재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사물들, 즉 책상, 연필, 칠판 그리고 우리 자신인 인간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우려(Sorge)로 규정하며(Heidegger 1953:57), 또 우리가 세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인 도구의 존재를 사용사태(Bewandtnis)로 규정한다(Heidegger 1953:84). 또 때로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구성틀(Seinsverfassung)로 규정하고 이 존재구성틀을 구체적으로는 ‘무엇으로-있음’(Was-sein)과 ‘어떻게-있음’(Wie-sein)으로 규정하기도 한다.[각주:2] 우리가 칠판을 ‘그 위에 글씨를 쓰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고 또 그것이 ‘여기에 거짓으로 있는 게 아니라 참으로 있음’을 이해할 경우에, 이러한 칠판의 ‘무엇으로-있음’과 ‘어떻게-있음’에 대한 이해는 칠판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이는 어떤 존재자의 무엇으로-있음과 어떻게-있음이 곧 존재자가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자와 존재는 구분되며, 마찬가지로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와 현존재의 존재 역시 구분된다. 현존재는 분명 존재자로서 실존하지만, 그럼에도 현존재의 존재가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로 환원될 수는 없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자로서의 현존재와 현존재의 존재의 구분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자아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를 가리키지만 자기는 현존재와 연관됨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자아와 자기의 구분을 자아의 동일성(Identität; 정체성)과 자기의 동일함(Selbigkeit)을 구분함으로써 분명하게 제시한다(Heidegger 1953:130).[각주:3] 자기는 자아와 똑같은 것이 아니며 어떤 반성적인 자아경험과 자기이해가 동일시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반성적인 자아경험은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스스로에 대해 수행하는 주체적 반성을 의미하지만, 현존재의 자기이해는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재의 자기이해가―이미 항상 세계로 초월하여 실존하는 현존재가 끊임없이 수행하는―세계이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각주:4] 그리고 이는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 곁에서 그 존재자에 반성 없이 몰두할 때의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이해 역시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한 파생적 양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세계이해를 이미 항상 함축하는 현존재의 자기이해에서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현존재의 자기가 수행하는 현존재와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맺음, 곧 현존재의 자기수행적 관계맺음임을 알 수 있다.[각주:5]
하이데거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자아와 자기의 구분 및 자기수행적 관계맺음에 대한 강조는 사실 하이데거에 미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때문이었다.[각주:6] 키에르케고르는 자기를 ‘자기 자신과 스스로 관계맺는 관계’(ein Verhaltnis, das sich zu sich selbst verhält)로 규정하는데(Kierkegaard 1995:9), 이는 자기가 어떤 정체성(동일성)을 유지하는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자아와 같은 것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을 수행하면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자기는 자기와의 관련 속에서 그 자신이 정립하는 그것, 즉 자기와 이미 항상 관련을 맺고있는 그것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이유는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를 정초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을 수행하면서 존재하는 주체만이 존재하기 위해 ‘사유’가 아닌 ‘수행’을 행하기에, 주체의 자기수행적 관계성만이 스스로를 단지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각주:7]
키에르케고르의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자기도 이와 같은 자기수행적 관계성에 기초하여 그의 실존을 구성하는데, 실제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그때마다 그 자신으로 실존하는, 단지 그때마다 수행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존재’(Selbstsein)로 보면서(Heidegger 1978b:175), 현존재가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함’(Zu-sich-selbst-sein)으로 규정한다.[각주:8]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역시 ‘자기’를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관계’로 규정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이러한 현존재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맺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함’이라는 점에서, 현존재의 자기의 이와 같은 수행적 관계맺음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맺음의 수행이 현존재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가능성’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3. 현존재의 자기이해와 가능성의 문제
현존재는 분명 현실적인 존재자이지만 또한 가능적으로도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현실적 존재자로서 현존재는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는 존재자이며, 가능적 존재자로서 현존재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에 의거하여 자기를 앞질러 장래적으로(zukünftig)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는 현존재가 가능적 존재자라는 점을 증시하고 있다.[각주:9] 우려의 규정에서 ‘자기를 앞질러’는 현존재가 가능적으로 실존한다는 것, 현존재의 실존에 가능성이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능성은 어떤 공허한 가능성이 아닌 ‘현사실적 가능성’인데(Heidegger 1953:195), 현사실적 가능성은 현존재의 실존에 결부되어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각주:10] 현존재는 단순히 현실성에 기초하여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사실적 가능성에 기초하여 자기이해를 수행하는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이와 같은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논구되어야 한다.
현존재가 가능적인 존재자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한 현존재가 언제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Heidegger 1953:233). 현존재가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의 아직 아님으로 앞질러 달려가볼 수 있는 것, 즉 선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존재만이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익어가는 과일 역시 아직 아님으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아직 아님과 과일의 아직 아님이 동일한 것인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과일의 아직 아님과 현존재의 아직 아님은 분명히 다르다(Heidegger 1953:244). 사과는 익어가면서 익을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완성하지만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그 가능성을 완성하는 것일 수 없다.
물론 현존재에게서도 어떤 가능성은 분명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곧 그 가능성을 완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을 가능성과 먹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사과를 먹을 가능성을 실현하여 사과를 먹고 그리하여 이 가능성을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가능성은 어떠할까?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의 가능성은 피할 수 없는 가능성,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줄 수 없는 가능성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이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현존재의 실존을 언제나 함께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거나 그것을 당장은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죽음의 가능성이 익어가는 사과의 가능성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사과의 익을 수 있는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의 완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죽음의 가능성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 가능성의 실현을 통해서 현존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님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가능성으로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우리가 실제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고서 그저 떠올리는 표상일 뿐이다. 사과의 익을 수 있는 가능성과 죽음의 가능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사과의 익을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은 우리가 표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죽음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표상될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의 표상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채 그저 떠올린, 그런 근거없는 표상일 뿐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의 가능성을 흡사 아무 것도 아님으로 표상할 때, 우리는 사실은 그 가능성을 더 이상 가능성으로서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미완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아직 아님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그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여 스스로를 완성한다고 생각할 때, 그러한 가능성은 표상될 수 없는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아닌 표상될 수 있는 현실적인 것에 기초하여 투사된 가능성, 단지 아직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만 현실적인 것과 구분되는 가능성일 뿐인 것이다.[각주:11]
물론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위와 같은 현실적인 가능성들에 기초하여 자기이해를 수행하면서 우리의 실존을 구성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가능성들에 기초하여 현존재가 살아갈 때, 그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자들, 즉 타인들과 사물들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현존재의 일상적 삶이며 그래서 현존재는 일상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의 존재자들을 고려하면서(besorgen) 그것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안의 존재자들에 맞춰서 살아감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따라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로부터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에만 안주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가능성은 이와 같은 현실성의 안주로부터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며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은 표상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 즉 그것이 단지 아직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현실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현실적 가능성과 다르다. 현존재의 현사실적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은 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자기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죽음의 가능성은, 불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현존재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는 불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죽음의 가능성의 성격을 검토할 때에만 분명해 질 수 있다.
4. 불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
만약 현존재가 실제로 죽는다면, 이제 죽음은 더 이상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재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 결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물론 죽음은 현존재의 실존에 속해 있으며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문제시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내렸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으며 결코 누군가에 의해서 대리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현존재는 이미 항상 일정한 태도를 내렸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저 타인의 죽음으로, 나와는 당장은 관련이 없는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이것 역시 죽음에 대한 태도인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어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실존의 가능성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한 그것이 언제가 될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이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한다. 이러한 은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은폐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가능성 그 자체로서 견지하지 못한다는 것, 단지 현실성에 비춰서 우리의 가능성을 기투한다는 것,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서 우리의 자기이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죽음의 가능성은 실제적이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현실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가능성이 아니며, 현실성과는 도달할 수 없는 격차를 갖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죽음의 가능성이 열어 밝혀질수록, 현존재 자신이 죽음의 가능성을 그것에 대한 일상적인 은폐 경향을 거슬러서 열어 밝힐수록, 현존재는 점점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닌 가능적인 것에 가까이 가며, 가능적인 것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현실성에 매몰되어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비로소 해방시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결코 죽음의 가능성이 열어 밝혀지면서 고지되는 그것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성격규정할 수는 없다. 죽음의 가능성이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죽음의 가능성이 개방하는 가능적인 것의 내용에 대해서 결코 이러저러한 규정성을 임의로 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재의 실존에 갖는 의미, 즉 현존재의 실존이 어떻게 죽음의 가능성으로서 구성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존재의 삶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에 대해 설사 형식적일지언정 규정할 수 있다.
물론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그리하여 현실적이지 않은 가능성 그 자체로서 열어 밝혀져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현실성에서 눈을 돌려서 이제는 가능성도 좀 보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가능성이 가능성으로서 열어 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의 회복(Wiederholung)이 현존재의 삶에서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의 선구인데, 이는 죽음의 가능성으로의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다가감이 현실적인 것과는 가능한 한 가장 멀어짐이라는 성격을, 나아가 가능성을 현실성에서 해방시켜서 비로소 처음으로 현실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현실성으로부터의 가능성의 해방이 바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계기이다. 왜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회복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에 대한 검토를 요구하는데, 죽음의 가능성은 바로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양태로부터 본래적 존재양태로의 변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현존재 실존의 본래성/비본래성과 죽음의 문제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되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존재양태 사이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이는 본래성이라는 속성 혹은 비본래성이라는 속성을 자기의 속성으로 가진 현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은 현존재가 어떻게 자기이해를 수행하느냐에 따른 구분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래적 자기이해가 있고 비본래적 자기이해가 있는 것이며, 오직 이러한 자기이해의 구분의 연장선상에서만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이 제시되는 것이다. 양자는 속성상의 구분이 아니다. 이는 『존재와 시간』의 문제틀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본래적인 혹은 비본래적인 현존재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이것이 특정한 시공에서 본래적인 혹은 비본래적인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현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지, 언제 어디서나 본래성 혹은 비본래성을 그 자신의 속성으로 소유하고 있는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성은 현존재가 소유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실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양태를 의미한다.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은 어떠한가.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존재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것은 호기심과 잡담 등인데(Heidegger 1953: 167-174), 호기심과 잡담은 현존재가 자기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해서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현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 즉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들이나 현존재 자신이 아닌 다른 현존재들, 즉 타인들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가능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즉 사물들과 타인들에 기초하여 존재이해를 수행하며, 그리하여 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verfallen) 있다.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인 비본래성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 퇴락해 있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락은 곧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에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 ‘곁에 있음’은 현실적인 존재자 곁에 있음을 의미하며, 현존재가 오직 현실적인 존재자의 현실성에 기초한 가능성만을 자기이해의 가능성으로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는 현존재를 세인(das Man)이라고 부른다(Heidegger 1953:167).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세인으로만, 그리하여 오직 비본래성의 존재양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비본래성의 존재양태에서 은폐되는 것은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죽음의 가능성인데, 이는 곧 비본래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고려되고 있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 퇴락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일상적인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을 특징짓는 것이다. 그러나 비본래성이 현존재의 일상성을 특징짓더라도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만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비본래적인 존재양태에서 실존하며,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더라도,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는 한, 자기 자신을 문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을 회피하지 않을 가능성, 즉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항상 존재해오고 있는 것, 즉 기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현존재 실존에 속해있는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의 가능성 그 자체가 곧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아니지만, 죽음의 가능성이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피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으로 선구하는 것이 현존재의 본래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2]
그렇다면 본래적 존재실존의 가능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죽음으로의 선구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서 그것들에 퇴락해 있는 비본래적 현존재가 어떻게 죽음으로 선구하여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의 변양이 가능한 이유는 불안(Angst)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이미 항상 세계로 초월하여 실존하는 현존재, 그래서 그의 실존에 세계가 속해있는 현존재의 ‘거기에’(da)를, 근원적으로 심정성(Befindlichkeit)과 이해(Verstehen)가 구성한다고 말하는데(Heidegger 1953:133), 하이데거에게서 이해는 보다 근원적으로 기분(Stimmung)에 근거하고 있다. 기분이 세계를 현존재에게 그러한 세계로 열어 밝히는 것이며, 그래서 현존재가 수행하는 모든 존재이해는 기분잡힌 이해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을 ‘정신의 구축물’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정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러한 이해에 앞서 정독을 할 수 있을 만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한다. 만약 괴한이 침입하여 우리가 책을 ‘괴한에게 던질 무기’로 이해할 때, 우리는 괴한에게 책을 집어던질 수 있기 위해서 그러한 기분에 먼저 사로잡혀야 한다. ‘정신의 구축물’로서의 책과 ‘괴한에게 던질 무기’로서의 책은 현존재와 책의 관계맺음에서 결코 똑같은 기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심정성은 바로 이 기분을 하이데거가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한 것이다. 그리고『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이 현존재의 근본 심정성으로 규정된다.
물론 하이데거는 불안이 세인들에게서는 일상적으로 회피된다고 말한다. 일상적으로 세인은 불안을 표상가능한 그 무엇에 대한 공포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장래(Zukunft)의 표상가능한 결과에 공포를 느낄 때,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내일 있을 시험을 걱정스러워하면서 현재를 시험 결과라는 가능한 장래의 표상에 기초하여 살아갈 때, 그 학생은 표상가능한 그 무엇에 대한 공포에 의하여 세계내부적 존재자인 교재에 몰두해 있는 것, 그 교재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대상은 표상가능한 그 무엇이 아니다. 현존재는 표상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의 이유는 어떤 객체적인 것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존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현존재 자신이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며, 현존재 자신의 실존에 죽음의 가능성이 속해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불안이, 현존재에게 그가 존재하는 한 그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결코 대리될 수 없으며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가능성을 열어 밝히는 것이다. 결국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은 현존재의 실존에 죽음의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 죽음의 가능성은 불안에 의해서 일깨워지는 것이다.
불안이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한 채 실존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존재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 사이의 관계맺음을 우선적으로 절단하는 것, 즉 현존재의 개별화(Vereinzelung)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각주:13] 물론 그렇다고 불안으로부터 가능해지는 현존재의 본래성이 현존재를 무세계적인 주체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의 개별화는 일상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한 채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현존재,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채로 실존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문제시하도록 하며, 이로부터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로부터 다시금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 즉 사물들과 타인들에 대한 이해 역시 비본래적 실존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적 현존재는 어떤 무세계적인 주체로서 자기 자신 안으로 함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가 불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별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불안이 일으키는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현존재 자신의 존재근거를 스스로 정초하는 것을 증시하기 위함이지, 현존재 자신이 어떤 무세계적인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현존재가 원자화된 개인, 유아론적인 주체가 되는 것을 증시하기 위함이 아니다.[각주:14]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한 해명에 거의 도달하였다. 그러나 아직 검토해야 되는 것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현존재의 삶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를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비춰 규명하는 것이다.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본래성이라는 존재양태의 시간성, 즉 본래적 시간성과 죽음으로의 선구가 갖는 연관이 증시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증시는 현존재의 삶에서 죽음과 시간의 연관을 증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6. 현존재의 죽음으로의 선구와 시간성의 문제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는 그 자체 시간적 규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우려의 규정에서 특히 ‘자기를 앞질러’와 ‘이미’에서 표현되고 있다. ‘자기를 앞질러’는 장래를 함축하며 ‘이미’는 기재[각주:15]를 함축한다. 결국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에서는 장래와 기재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려의 규정에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이 시간상으로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우려에서는 장래, 기재, 현재의 세 시간 계기가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존재 분석론으로서의 기초존재론의 성과로 드러난 현존재의 존재구조, 즉 우려에서 존재와 시간의 연관이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로, 즉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의 의미로 규정한다(Heidegger 1953:323). 하이데거가 시간성을 우려의 의미로 규정하는 이유는, 시간성의 세 계기인 장래, 기재, 현재가 우려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장래(die gewesend-gegewärtigende Zukunft)로 규정하는데(Heidegger 1953:326), 여기서 기재는 현존재가 존재해오고 있는 존재자로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과 이미 항상 맺고있는 관계를 ‘간직함’(Behalten)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래는 자기를 앞질러 존재하는 현존재가 가능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존재는 이렇게 자기를 앞질러 실존하며 이로부터 특정한 가능성을 ‘기대함’(Gewärtigen)으로써, 이에 기초하여 현재에 세계내부적인 존재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시간성에서 ‘현재화’(Gegenwärtigen)는 현존재가 특정한 이해를 현재화함으로써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을 그러한 존재자들로서 해석하도록 하는 것, 즉 각각의 현재에서 특정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현재화가 현존재의 장래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것이긴 하지만, 앞서 확인하였듯이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능성에 기초하여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런 까닭에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이러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 곁에서 이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현재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대함’, ‘간직함’, ‘현재화’는 시간성이 비본래적으로 시간화(Zeitigung)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 실존의 양태에 비본래적인 양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양태도 있듯이, ‘기재하면서 현재화하는 미래’인 현존재의 시간성도 비본래적으로만 시간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이 본래적으로 시간화하는 방식을 ‘회복’, ‘(죽음으로의) 선구’, ‘순간’이라고 말한다(Heidegger 1953:336-340).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회복하는 순간’(der vorlaufend(in den Tod)-wiederholende Augenblick)이 본래적 시간성이 시간화하는 방식인 것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의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장래를 의미한다. 현존재의 본래적 시간성은 현존재가 죽음으로 선구함을 통해 은폐된 채로 존재해오고 있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하는 순간으로서 시간화된다. 그리고 이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은 현존재가 그가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으로 선구하고자 하는 결단(Entschlossenheit)을 통해서만 시간화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시간이 마치 과거 지금에서 현재 지금을 지나 미래 지금으로 진행하는 지금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존재의 존재인 우려가 이미 현존재의 실존이 이러한 지금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을 넘어서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려 규정에서 ‘자기를 앞질러’는 아직 아닌 지금을 함축하며, ‘이미’는 더 이상 아닌 지금을 함축하고, ‘곁에 있음’은 지금을 함축한다. 따라서 우려 규정에는 아직 아닌 지금, 더 이상 아닌 지금, 그리고 지금이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존재의 존재가 지금의 연속을 의미하는 시간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인)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이 지금의 연속의 한 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이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현존재가 그의 장래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기재하고 있는 가장 고유한 자기이해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바로 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에서 현존재는 그의 장래로부터 죽음의 가능성이라는 탁월한 가능성을 견지한 채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 도래하는 것이다. 순간은 이렇게 죽음으로 선구하는 결단의 시간이기에 비본래적 시간성의 비본래적 현재인 현재화처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의 현실성에 더 이상 퇴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것이다.[각주:16] 그리고 순간이 이와 같이 결단의 시간이기에 하이데거는 순간을 ‘결단의 눈길’(der Blick der Entschlossenheit)이라고도 부른다(Heidegger 1983:224).
이로써 현존재의 죽음으로의 선구와 시간의 연관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하이데거가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말하고자 한 것, 혹은 현존재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논구를 마치기로 하자.
7.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의의: 정초와 자유
앞서 확인하였듯이 현존재는 가능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자, 그의 가능성에 따라서 (설사 그것이 일상적으로는 현실성에 기초해 있을지라도) 자기이해를 수행하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존재는 이미 그가 그 안에서 존재하는 세계에 내던져진(geworfen) 존재자이다. 현존재가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현존재의 가능성이 그가 이미 항상 존재해온 세계 안에 주어진 가능성이라는 사실,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 그가 놓여 있는 역사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또 현존재가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분명 그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현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 그가 놓여 있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함께 그 자신이 그의 존재함에 대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어떤 역설적인 과제를 현존재에게 부과하는 것이 된다.
현존재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근거를 자기 스스로 놓아야 한다는, 자신의 존재함의 의미를 그 스스로 정초해야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죽음으로의 선구로부터 고지되는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기 자신의 근거지움에 다름아니다. 물론 이러한 근거지움은 결단을 통해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에 퇴락해 있는 채 스스로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자기이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들과의 잡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무엇보다도 세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으로의 선구에서 고지되는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세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스스로를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근거지우는 가능성, 자기 실존의 근거를 스스로 정초하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이 바로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의미를 자기 스스로 정초하는 가능성임과 동시에, 이 가능성은 현존재가 역사적 세계 안에 내던져진 채 실존하는 존재자인 한에서 그가 놓여 있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가능성, 즉 단순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아닌 (굳이 현실적인 가능성과의 대비를 통해서 규정한다면) 어떤 역사적인 가능성이다. 그래서 현존재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은 곧 그를 세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적 존재자로 스스로를 건립하는 가능성, 세인의 삶에서 은폐되어 있는 역사성을 구현하도록 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역사성은 현존재에게 이미 항상 주어져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이유를 스스로 정초함으로써 구현해야 될 과제인 것이다. 이것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로 실존하는 현존재에게 주어진 역설적인 삶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 역설적 과제는 현존재에게 어떤 짐스러운 무엇이 아니다. 이 과제는 현존재가 세인의 삶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래서 현존재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다. 현존재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함, 존재의 근거를 정초하라는 과제, 즉 현존재에게 그의 역사성을 구현하라는 과제와 현존재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의 자유는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라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그에게 부과된 과제를 현존재 자신이 떠맡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유는 오직 현존재가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스스로를 세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킬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은 현존재가 죽음으로 선구하기를 결단하는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기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회복하는’ ‘순간’에 현존재는 주어져 있는 역사, 즉 어떤 연대기적 역사(Historie)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역사, 그가 만들어가야 할 역사, 즉 어떤 사건적 역사(Geschichte)의 과제를 떠맡는 것이다.[각주:17] 그래서 하이데거가 순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의 근거를 떠맡아서 자신의 역사성을 구현하는 과제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 그리하여 그가 (천편일률적인 지금들의 시간에서 그것들 곁에로 퇴락하게 되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된다는 점이다.[각주:18]
이로부터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본래적 시간성의 본래적 현재인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들로의 퇴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초하도록 한다. 죽음으로의 선구가 가능하게 하는 자기 정초는 곧 현존재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기 되기는 동시에 역사적 존재자로서의 현존재 자신의 자기 건립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 어느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자기의 죽음으로 선구하는 순간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현존재가 자기 자신이 되라는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가장 준엄한 과제이기도 하며, 현존재의 자유는 오직 이 과제를 자기 스스로 떠맡는 역설적인 자기 해방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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