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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태평양전쟁 귀환병의 수기>라는 부제가 눈길을 끌어 당겼다. 천황이 신인 줄 알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전쟁에 나간 15세 소년. 수많은 해전에 참여하며 직접 적을 찌르거나 죽이지는 않았지만 포탄을 날렸고 죽는 것에 대해 겁 내지도 않고 망설임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교육은 천황은 전지전능하고 신위의 신, 그야말로 신 중의 신이라는 것이었으니 천황을 위해 죽는 것에 대한 맹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전쟁에 졌음을 라디오 방송으로 알리는 걸 듣고 뭔가 무너졌다. 자신의 내부에 굳게 자리잡고 있던 천황이 무너졌다. 포격을 받아 배가 가라앉을 때도 상관은 천황을 모셔라고 소리를 질렀다. 배 안에 천황 사진을 모셔두고 있었는데 그 사진이 가라앉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웬 개소리인지? 그 천황 사진을 힘겹게 들고 나오던 병사는 결국 죽고 만다. 물에 빠져도 큰 사진을(액자인듯) 들고 헤엄을 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 몸으로 헤엄을 쳐도 살아나기 힘든 판국에 그놈의 사진이 뭐라고! 지은이는 살아 남았ㅈ;만 혼자 살아 남았다는데서 죄책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고백을 하지 못한다. 혼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즐긱길 수 없다는 것이다.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천황을 위해 죽었는데. 천황은 뭐 하나? 사과의 말 하나 안 하고. 천황을 욕하며 저주하면서 아버지의 농사 일을 거들면서 지냈다. 천황은 자신도 인간이라고 말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전쟁에 대해서 자신은 잘 몰랐다는 말을 한다. 미친 놈! 천황이 실권을 쥐고 있지 않더라도 전쟁이 일어나고 돌아가는 사정을 몰랐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자신이 결국 전쟁을 인정했으니 전쟁이 일어났고 일반 국민들은 천황을 위해 죽겠다고 죽음의 불구덩이로 나갔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다니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천황에 대해서 저주를 퍼부으며 배신감이 치를 떨다가 천황을 무조건적으로 믿은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렇게 문제의 핵심을 느끼고 집을 떠나기 전까지 쓴 일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일본 국민의 무조건적인 천황 숭배사상이 이 정도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지만 이런 무조건적인 숭배는 우리나라에도 좀 있긴 하다. 내가 있는 이런 시골에서는 아직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불쌍하다는 할머니들이 많다. <"아무리 노부오가 주겅ㅆ다고들 해도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그깟 종이쪼가리 통보 한 장 받았다고 한들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배 아파 가면서 낳은 자식인데, 내 누능로 확인한 게 아닌 이산 누가 믿을 줄 알고......." 도요 아주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어머니한테 들으니 아주머니는 지금도 노부오의 밥상을 하루 세 번 배놓지 않고 차리면서, 아무리 바빠도 아들 상을 차리기 전에는 자신도 젓가락을 안 든다고 한다. 그분만이 아니다. 담배가게에서는 아직 노부오의 장례식도 안 치렀다. 함께 유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벌써 한참 전에 장례를 마쳤기 때문에 아버지인 요헤이 아저씨는 체면도 있고 하니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치르자고 타이르는 모양이지만,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것 같다. 전례를 마치면 노부오가 정말로 죽은 사람이 돼버린다. 정 그렇게 상을 치르고 싶거든 내가 죽고 나서 치러라. 이렇게 반대하다보니 유골함은 아직도 불단 귀퉁이에 그대로 놓여 있다고 한다. 그 비슷한 이야기는 전에 다른 부락 사람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다. 이웃 부락의 바구네 가게 새댁도 올봄에 이미 마을장으로 남편을 보내놓고서, 혹시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지금도 저녁만 되면 세 살배기 딸의 손을 잡고 큰길 네거리에 서서 고개 아래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전쟁이 낳은 비극이다.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담배가게 도요 아주머니도, 바구니 가게 새댁도, 아들과 남편을 저세상으로 앞서 보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전쟁에 스스로 지원해서 뛰어들었다. 미망인과 고아를 수도 ㅇ벗이 만들어낸 전쟁에.......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다. 전쟁의 진찌 괴로움은 전선이 아니라 오히려 후방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것 같다.> <우리는 결국 화롯가에 앉아 열두 시까지 탁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신타로는 술을 잘 못했지만 구니오는 여전히 시원스레 들이켰다. "난 사실 이걸 기대하고 들렀어."라며 신나게 술잔을 비울 정도였다. 나는 기왕 찾아온 김에 구니오에게 천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천황?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구니오는 그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 천황 이야기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은이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로 혹시 자신과 통하겠다 싶은 사람에게 천황에 대해서 묻곤 했다. 참 외로웠을 것이다. 집안 사람들은 농사일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삿꾼으로 일만 죽어라 할 뿐이고 자신도 일을 거드느라 짬이 없다. 그런 틈에서도 잠이 안 올 정도로 천황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울분이 일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친구인 구니오와 신타로도 전쟁에서 용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구니오는 흥, 그딴 거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고 말하지만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에는 상냥하고 집안 일도 잘 거들던 아들이었는데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로는 여자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술만 들이키고 있다. 천황을 직접적으로 욕하는 건 아니지만 구니오에게도 지탱해주던 뭔가가 무너진 것이다. 이런 젊은이들은 차고 넘치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데 천황은 발 빠르게 전국 순례(?)를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 역시 미안하다는 사과는 안 하고. <무사시에서는 처노항의 사진을 전방 주포 발사 명령소 옆의 봉안실에 보관했다. 360밀리미터 구경 포탄에 직격당해도 버틸 수 있도록 두께 300밀리미터짜리 특수 강판으로 둘러싼 방이었다. 당시 함장은 침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생존자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봉안실의 어진영을 즉시 함 외부로 "받을어 모시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래층 봉안실에 있던 어진영이 위로 옮겨졌을 때, 이미 좌현 족으로 기운 노천 갑판은 탈출로를 찾는 생존자와 부상자로 빌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함교 아래쪽 해치를 통해 용케 위로 올라왔는데, 그때 누군가가 성난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오진영이다, 비켜! 어진영이다, 비켜, 비켜!"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맨 앞의 위병 장교는 한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에 댄 채 악을 쓰고 있고, 그 뒤에 하얀 무명천으로 둘둘 싼 네모난 것을 끈으로 둘러맨 부사관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진여잉었는데, 받들어 모시던 부사관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커다란 유리 액자를 짊어지고 바다로 뛰어들었으니 제대로 헤엄을 못 쳤을 테고, 그래서 함으로부터 멀어지기 전에 그만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놈의 사진이 뭐라고! <보리 파종. 하는 김에 누에콩까지 파종해서 오늘로 논의 파종은 전부 마쳤다. 이제 벼 베기부터 쭉 이어졌던 논일도 일단 끝나서 한숨 돌리게 됐지만, 답답하고 뒤틀린 기분은 조금도 개운해지질 않는다. 하루하루 고딘 일에 쫓기면서도 일이 끝나면 늘 변한없는 공허함에 휩싸이고, 그때부터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적막함과 쓸슬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빚......나는 앞으로도 이런 기분에 사로잡힌 채 똑같은 나날을 거듭할 것이다. 그런 나날을 보낸 끝에 도착하는 곳이 어디일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예전에는 대신이라고 하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인가보다 했지만 웬걸,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우리 마을에도 촌장이나 유지, 부자 같은 사람들한테 언제나 굽실대는 탓에 사람들이 뒤에서 '알랑쇠'나 '쉬파리'니 흉을 보는 아저씨가 몇 명 있는데, 그런 아저시들을 보면 언변은 유창하지만 대부분 멍청하고 무능하다. 그런 아저씨들을 조금 뻥투기해놓은 것이 대신이라고 보면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는 뭐든 하나하나 스스로 생각할 작정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한 말이라도 먼저 내 머리로 잘 생각해보고, 확실히 납득이 가는 것 말고는 절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작정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에 도달한 점은 어쩌면 괜찮은지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바로 자기정체성일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오로지 천황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다 정리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천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믿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르고 그랬다면 몰랐던 것에 대해, 또 속아서 그랬다면 속았던 것에 대해, 결국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가. 모든 것을 고스란히 천황 탓이나 세상 탓으로 돌려버리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나 자신의 실체는 허공에 붕 떠버린다. 더는 내가 나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가 지긋지긋하도고 해도 그것을 지워버리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엇보다 스스로의 허물을 모른척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안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당면한 문제는 천황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일본도 일반 백성의 희생으로 나라를 일으켰구나 하고 조금은 동질감을 느낀다. 사람 하나하나가 느끼는 감정은 보편적인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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