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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구분과 분별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31.

No '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

 

글을 씀에 있어서

학문의 깊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분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종교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들의 패닉현상에서 읽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적인 용어로서 '패닉발작'(panic attacks)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인식의 사실을 말함에 분별없는 강조의 개념으로써의 사실을 기정화하려는 어떤 종교학자의 모습의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에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지만, 바른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의 현대인의 한 치료방법으로써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당대의 필요충분적 조건이 성립되어지고 있고 기독교인의 합당한 사역적 증거로서도 당위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 본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티적 패닉 현상'('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라고 함의 규정적 입장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의 분별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는데, 그 분별이 없다고 함은 인식의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강요하는 기만적 모습의 병리현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분별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철학과 신학의 기본 인식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운데서 철학적 신학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거품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본론적 본문

이성의 분별로서, 구분구별이라고 할 때에 그 앞선 인식으로써 시간개념이 대두되어지고 그것은 역사관으로 이어지는데, 역사적 비평을 하면서 시간의 개념으로 대두되어지는 구분과 구별의 개념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역사적 연속성과 단절성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한 글들에 대하여서 답변함이 식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각주1)

1, 구성적 신학

'구성적 신학'(reconstructive thoelogy)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의 신학계에서 하나의 정설처럼 받아들이는 잘못된 경우(각주2)가 있기에 어떻게 해석해서 사실화 시킬 것이냐는 개념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사실화라는 것의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분별없다는 비판적 판단의 사실을 기정사실화임을 말하도록 함의 당위성의 본래성을 주장하게 한다.

조직신학교수인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박사의 상상의 보편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 형식에서 그의 합리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지만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초월의 개념 형성도 규정의 임의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상대적인 보편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절대의 개념을 판단하는 또는 임의적으로 옹호가능하다고 하면서 계시를 믿지도 않는 가운데서의 합리성 전개라고 하는 것은 규정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적인 측면의 개별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개별성이 갖게 되어지는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의 재가가 있는 것임을 수행적 모순에서라도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계시신학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자존적 정당함을 인정해주어야하는 상식보편의 합리적 당위성도 같이 세워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임의적 구성적 신학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야 하는 것으로써의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동의적 정당함까지도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구성신학의 개념의 보편이라는 측면과 범주에서는 여러가지 합리적 작업과 그에 따른 파생적 규정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임의적인 소리로서 개념없는 기독교에 대한 패닉발작 '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임의적 언어놀이들이 있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자들의 개념없음이 기본이 되어지는데 분석이라는 형식적 이성적 도구를 가지고 분별없이 행하고 있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쌍한 '판의 슬픔'(각주3)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다.


2. 구분과 구별

분별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적 구성근거를 지을 수 있는데, 구분이라는 것은 실재의 불연속이라는 개념에서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구별이라는것은 실재의 연속이라는 개념에서도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해에 앞선 사태이해에 있어서도 특히 역사라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역시 이 두가지 개념적 구성근거를 의식함이 요구되어지는데, 상황 논리에 따른다는 정황적 상대적 정당함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철학적 입장과 신학적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그 개념을 달리하는 것은 인정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또한 범주를 달리한다고 할 때에 유사비교에 따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그러한 모순적이라는 상대적 입장의 판단을 넘어서 사실규정을 할 수 있는 실제론의 규범적 실재라는 것을 재고할 때에는 사실을 위한 새롭게 사태인식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다.(각주4)

역사 비평과 그것에 따른 비평적 사실규정에 앞서, 역사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도 철학적인 입장에서는 그 역사 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해석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구분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종교학자들은 문헌적 전승의 성격을 취한 성경의 신구약의 구분과 선택적 취사로써 특히 역사적 후대의 개념이 실제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구약패기론이 대두되어질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느냐는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종교학자들의 생각하기 싫은 중심이 되어지는 것이다.

특히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납득 당위성을 부여하여서 합리성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하자는 측면을 마음에 두고 임의적으로 전제하고 그러한 것의 강변을 말하고 있는 모자람의 현학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가지론과 분석철학의 중요성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두와 함께 언급되어질 수 있는 철학적 경향이지만 상식이 절대를 비로소 말한다는 개념의 부적절함은 비트겐슈타인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각주5)

이처럼 사실이해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실재론에 입각한 합리성의 합당한 사실이해의 굴절적 이해가 실상 정당한 사실로서의 규정적 정당성시비에 따라 판단분별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속성의 두 가지 양태로서의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규정의 정당함은 그 실재론이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정당하게 말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한 철학과 신학의 실재론의 차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간과하려는 기만적 입장에서는 그 연속성의 양태 규정과 그러한 합리성으로 성경의 판단과 이해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분별없는 이성의 죄악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진다.

즉 신약과 구약의 불연속성을 말하는 역사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관은 실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중심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임의적 강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설인 것과 같이 이성적인 것과 같이 강요한다면 그것은 기만적 의도의 사실화로 거짓말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비단 신구약 성경의 형태적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만이 아니라 문서설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개념없는 계시적 근거없는 병열적 나열과 분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인데 그러한 불연속성 중에서 본문의 연대를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 없거나, 정당한 시간의 계시적 인식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임의적 문학적 접근이라는 특수성과 그 안에 담겨진 재가되어진 자존적 절대 보편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비이성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그러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같이 역사적 문헌을 언급하고 있지만 역사적 문헌인식에 앞에 그것을 해석하는 자로서의 인식이 이미 당위성을 잃었기에 니체주의자가 말하는 '잘됨'이라는 사실도 또한 '헤체적 사실'로서의 그것도 말하지 못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출 3:16절 해석을 함에 있어서, 이미 언급했지만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그러한 상대적 시간관에서 자신의 실존적 계시를 나타내시기를 스스로 합당하게 기뻐하실 때에 상대적인 역사관에서도 그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도 구별이라는 점에서 사실되어질 수 있는 두 양태들이다. 즉 구분되어짐으로써 말해야 할 것이 있고 구분되어지면서도 실존의 연속성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함의 성별(sanctify)은 하나님의 실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례에 따른 행위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의 실제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말씀하신 것이 항상 예만 되어짐에 있어서 그 말씀의 재가를 진정으로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태인식과 구분과 구별이 진정한 사실의 실존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인식계기로서의 시간과 그 시간의 표상으로서의 해와 달의 일상적인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표상의 기본적인 실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시간인식의 주관적 계기에 따른 시간관과 그에 따른 시간에서 역사적 실존의 연속성 특히 계시의로서의 성경의 실존적 구분과 부분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의 전개로서의 전승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해와 달이라는 시간인식계기로서(창 1:14)의 일상적인 시간 속에 주예수님의 역사성을 사실로 받게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체의 정당함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예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실존을 찾는 것이 그 근본적 기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일반 역사성의 실존도 해석되어진 가운데서 진정한 역사성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형식적인 실존으로서 일상적 역사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참되게 구별하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한방법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에 따른 사실규정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 실존의 규정적 사실도 재가하는 가운데서 구별하게 된다.

계시의 실존으로서의 성경은 일반 문헌으로서의 형식적 존재와 형성이라는 개념을 취득했지만 그러나 그 앞서 그 성경의 실존은 이미 태초라는 시간적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형식적인 실존의 선재라는 철학적 개연적 이해라는 것을 받지 않으면서도 존재했고 시간의 창조자로서 말씀은 시간 아래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잘됨'의 판단을 비로소 실제적으로 받지 않는 실존인 것이다.

즉 역사적 사태라는 사실인식의 정황적 판단하에 있으면서도 실재론적 범주의 다름을 인해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실존이기 때문에 그 사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때라는 시간적 모순의 표현 속에서도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시간 자체의 표현적 실존적 부족함이 말씀의 실존의 부족함으로 이입되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론에 즈음해서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어떤 실존을 비평함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분별력은 먼저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개념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실존개념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한 가운데서 역사비평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분별의 형식은 갖추려고 노력했으나 분별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분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 함의 당위성이 사실화되어진다.

한 가지 언급해두는 것은 구성적신학(reconstructive theology)이라고 하는 것의 형태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을 비로소 다루는 범주에서 이 글이 논의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형식적으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 판단의 실제를 받지 않는 실재론적 범주를 달리하고 그 하나님의 실재론적 규정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이기 때문에 소위 어떻게 말을 잘할까하는 것에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당한 신실함을 증거할 것인가에 대한 재가적 차원의 사실규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태적 패닉발작''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웃으심이며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핑계치 못함에 대한 당위성이 없는 병리적 이성의 활동에 대한 연민과 판단과 심판이 있게 될 것을 지적해두면서 글을 맺도록 한다.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칸트에게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간인식의 계기로서 해와 달에 따른 시간인식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해와 달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다는 것(창 37:6~9)은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에서 진정한 해와 달의 질서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과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속의 시간과 그것의 해석자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존하게 된다는 것 성도의 시간인식에서 비롯되어진 사실규정의 합당함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인쳐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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