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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교육론

by 이덕휴-dhleepaul 2018. 3. 31.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교육론




DE DOCTRINA CHRISTIANA                            만나교회담임목사 이덕휴


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

St. Augustinus(354-430)는 당시 로마의 영지였던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주의 농림업 지대의 중심지인 Tagaste(오늘날의 Algerie 또는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가까운 스크 알라스) 에서 아버지 Patricius와 어머니 St. Monica 어머니 모니카는, 성모 마리아와 孟母와 함께 세계 3대 어머니로 추앙받는다.
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그만 포도원과 농지를 소유한 중산 계층으로서 지방 공무원으로도 근무하였다. 그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 교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나위기우스라는 남동생과 여동생도 한 명 있었다.
타게스트에서 라틴어 등 기초 공부를 한 다음 Madaura에서 라틴문학과 문법을 공부하였다. 아버지가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난 370년에 항구도시인 Carthgo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주의환경 때문에 점차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공부는 계속 열심히 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Cicero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침 유행하던 Manicaei(Manes, 마니교) 이단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비록 마니교에 입문했을지라도 기독교와 아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가 마니교의 열렬한 신자였지만, 열 아홉의 젊은 청년이 9년간의 이교도 생활은 회심 후의 그를, “기독교 신앙의 제 2 의 창설자(Jerom)”가 될 정도로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믿음은 깊어 졌다. 김평옥 역, 『참회록』, 범우사, 1987, ‘해설’.
마니교 이단은 善(빛의 원리)과 惡(어둠의 원리)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였는데 인간의 영원은 빛의 원리로 이루어진 것이고 육체는 어둠의 원리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이 어둠의 원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빠져들어 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74년부터 10년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학교를 운영하다가 로마에 왔다. 로마에서의 수사학 학교는 별로 운영이 되지 않아서 Milano 의 공립학교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마니교에서는 인간사고의 확실성 근거나 선악이 충돌하는 이유를 밝혀주지 못하였으므로 회의를 느끼던 차에 St. Ambrosius주교를 만나 감화를 받음과 동시에 Neo-Platonism의 영향을 받아 마니교를 떠난다. 마니교에서는 그가 갈망하는 진리에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때가 32살이 되는 386년 여름이었다. 정신적으로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마침 아이들이 “tolle lege, tolle lege(성경을 읽으라, 성경을 읽으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로마서 13:12-14(방탕과 술취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을 단숨에 읽고 회심한다. 회심 후 그의 첫 번째 논쟁의 대상은 당연히 마니교와의 대결이었다. 다음에 그가 주교 서임 후에는 도나투스파와의 대결, 이후 펠라기우스와의 대결이다. 도나투스파와의 분쟁은 주로 아프리카 교회 내의 문제였으나 마니교와 펠라기우스는 카톨릭 교회와의 소위 신학논쟁이다(참회록, pp. 335 ff). 두 이단, 즉 마니교(Machaeanism)와 펠라기안(Pelagianism)의 논점은 간략히 말하여 전자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하는 운명론적 교리임에 반하여 후자는, 인간의 전적인 자유의지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교리이다. 더욱 자세히는, Alister McGrath, Justification by Faith, 이재덕 역, 『칭의이론의 현대적 의미』, 한국로고스 연구원, 1992, 제3장(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참조.
그의 생활을 바꾸기 위한 어머니 산타 모니카의 노력은 유명하다. 드디어 386년에는 카톨릭 신앙에로 전환하였으며 387년 성 금요일에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388년 아프리카에 돌아온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396년에 Hippo(지금의 알제리)의 주교가 되었다. Vandal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430년 St. Augustinus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철학자, 신학자, 교회 정치가, 그리스도교 변론자로서의 그는 천주교는 물론, 종교개혁의 아버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서는, 『신국론』(413-26),『고백록』(397-401),『삼위 일체론』(400-16) 및 『자유 의지론』(388-95) 등 다수의 논문과 편지가 있다. 『기독교 명저 60선』, 편집부 編 , 종로서적, 1985, p. 12.


Ⅱ. 기독교 교육론 해제

이 저작의 제 1권과 제 2권은 성경을 적절하게 읽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예비적인 연구가 필요한 성속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현대의 교육이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양과목들의 연구에 지나치게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성경을 연구하려는 사람에게는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어서 제 3권은 오늘날 해석학이라고 불리는 주제들, 즉 성경의 해석을 다루고 있는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 라틴어 저작이다. 제 4권에서는 기독교 교사가 경건의 진리들을 해설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제 4권은 실질적 강해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수사학 교사는 세속의 학파에서 가르쳐진 수사학적 규칙들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였던 반면에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성경학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도 이 저작은 결코 무익하지가 않을 것이다. 기독교 도덕적 실천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들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확대된 높은 교의학적 가르침들이 풍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DE DOCTRINA CHRISTIANA, 김종흡 옮김, 『기독교 교육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pp. 17-8. 이하의 본고의 논의는 본서의 요약이다.


Ⅲ. 기독교 교육론

- 서 문 -
성경을 연구하는 데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에 대한 무용론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원칙보다는 성경의 모호한 점을 발견하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사람인 선생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글을 읽을 수 없는 자가 다른 사람이 읽어 주는 것을 듣고 깨닫거나, 기도에 의해서 글을 읽어내려 가는 어떤 능력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릇된 자만심을 버리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의 입이 아닌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직접 그의 입으로부터 복음을 듣기를 바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얘기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동료인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는 것이 없게 된다면 그것 자체도 사랑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의 해석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광영을 받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성경을 해석할 이유가 없다.
청중에게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말씀을 보면서 그것을 높이 알려 주는 것이다. 또한 글 읽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는 단지 자기가 이해한 것을 설명한다거나 읽어줄 뿐이다. 그러나
해석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읽을 수 있고, 그 내용을 알고, 그리하여 해석해 주는 사람이 그 비밀을 알려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 원칙을 지키며 지시를 따름으로써, 성경에 숨어있는 뜻을 알 수 있으며, 적어도 심한 과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나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 글을 썼으며 이러한 목적에 반대를 제기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먼저 이 글을 서두에 쓰게 된 것이다. 저자는 본서의 편별을, Parts. 1, 2 로 나누고 Part. 1 에는, Bd. 1,2,3 에 37 chap, 56 sec, 그리고 Part. 2에서 나머지 Bd. 4, 에 31 chap, 64 sec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따라서 본 논고도 가능한 한, 이러한 편별을 따라서 서술한다.


제 1 부 - 성경의 올바른 의미의 발견 -

제 1 권 : 사물에 관하여
(개요)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표현을 하는 데는 사물과 부호를 명백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사물에 대한 지식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가가 확실해졌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판별한 수 있는 것이다. 제 1 부에서 이러한 사물(엄밀히 말해서 가르칠 교육의 대상, 즉 목적물을 말하는 것이다 본고의 필자의 의견이다. 이후 필자의 의견은 곳곳에서 괄호 처리를 할 것이다.
)을 논의하되 세 가지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상은 三位一體 하나님, 곧 우리의 最高善이시며 진정한 우리의 하나님이 제1부의 主題가 된다.

Ⅰ.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뜻을 확인하는 일과 그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符號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은 부호이다. 사물 자체가 부호는 아니지만, 누구든지 말을 쓸 때에는 어떤 부호를 사용하므로 부호는 동시에 사물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을 부호라고 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즐긴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즐긴다는 것은 우리를 安住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며 그리하여 전진을 가로막는다. 만일 저급한 일에 빠졌을 때는, 진정으로 즐겨야 할 일을 놓치는 수가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합당하게 이용하는 것은 사용이라 하고 그것을 즐기는 일이 합당하지 않을 때 악용이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려면 세상을 이용하되 즐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즐김의 진정한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는 모든 즐거움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원인이라고 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하나님이시며, 이는 개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실체이시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이시다. 삼위는 각각 영원성, 불변성, 존엄성 그리고 동시에 권능이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찬양하는 것은 합당한가 라는 말을 원해서 라고 했다면 그것은 내가 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형언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언어모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해서 알맞는 말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분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라틴어의 “데우스(DEUS)" 라고 하는 말에서, 영원한 최고성을 생각하게 한다.
지성의 노력으로 신 개념을 얻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든 물체의 위에 두며 지성적이며 영적인 존재들이라고 할지라도 변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그 위에 두려고 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존재하고 하면서 생명 자체라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 할지라도 어리석거나 현명할 때가 있지만,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현명하지 않을 때가 없다. 사람은 그 자신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그들 자신의 본성을 초월하지 아니하고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을 청결히 해야 한다. 청결한 소원과 착한 습관만이 우리를 진리케 한다.

Ⅱ. 말씀의 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
하나님께서 오신 방법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요 1:14) 것 뿐이었다. 우리의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큰 소망과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약으로 교회를 청결히 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롬 12:5). 그는 그의 교회에 열쇠를 주셨고 믿고 회개하고 종래의 습관을 버리면 완전히 청결하고 행복한 영혼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악한 자는 부활할 때에 자기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선한 자가 부활하면 영생을 받는 것은 사실임을 믿어야 한다. 이 모든 사물 가운데 영원불변하는 것만이 즐거움의 진정한 대상이 된다. 다른 사물을 즐기는 우리도 사물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지만 즐김의 진정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몸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39; 레 19:18; 신 6:5)고 하셨다. 이는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있는 것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할 것은 네 가지다.
첫째, 우리보다 높은 것.
둘째, 우리 자신.
셋째, 우리와 동등한 것.
넷째, 우리보다 낮은 것 등이다.
여기서 둘째와 넷째에 대해서는 교훈 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진리와 멀어진 사람일지라도 자기와 자기 몸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사랑은 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밑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면서 자기 위에 있는 것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도착된 생각으로 자기 몸을 미워하는 것도 있는 데 이것은 아직 극복되지 않은 육적인 습관, 성령에 대항하는 습관에 대한 말씀이다. 성령은 육체의 정욕을 근절하려는 것이다.

Ⅲ.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40). 자기와 자기 몸을 사랑하라는 말은 자연법칙이다. 이는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 곁에 있는 이웃에 대한 명령뿐이다. 이와 같은 계명의 목적은 사랑,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의 사랑이다. 여기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 무시되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정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물을 평가할 때 사랑해야 할 것과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 하며, 또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사람을 기뻐할 때 우리가 즐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즐기며 그 앞에 기쁨이 있다고 기대하는 하나님께로 온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기쁨을 얻는다” 즉 “즐긴다는 것”은 “기쁘게 사용한다”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을 거기서 얻으며 영원한 거처로 삼는다면, 그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는 말이 옳다. 그리고 우리는 불변하는 최고의 선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때가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가 왜 육신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유를 지으신 진리와 말씀이 우리 사이에 居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셨지만, “주께서 나를 그의 길의 처음으로 만드셨다”(잠 8:22, 70인역) (여기서 말하는 ‘나’는 지혜를 뜻한다) 본서, p. 51. 한글 개역 성서에는 “여호와께서는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잠 8:22)이 때의 나란 , “지혜”를 가리킨다(잠 8:! 참조)”.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로 가려는 자들은 그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의 길을 완전히 마친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려는 것 뿐 아니라, 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 길이 되고자 하셔서 육신을 입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하셨기 때문이다.

Ⅳ. 맺음 -성경의 성취와 목표는 사랑이다-
사물을 논하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한다면, 율법과 모든 성경의
성취와 목적은 즐김의 대상을 우리와 함께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필요치 않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현재의 일들은 우리가 이 진리를 알고 그대로 행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소산이다. 성경을 이해하노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의 사랑을 육성하여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는 아직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대로 사랑을 육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원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석을 하였다면, 그의 해석은 해로운 것은 아니며, 기만 행위라는 비난은 면한다. 원저자의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해석하여 사랑을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계명의 목적과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의 올바른 뜻을 경솔하게 채택하는 것도 그것 때문에 그는 완전히 파멸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고후 5:7), 聖經의 權威가 흔들릴 때에는 믿음도 비틀거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지식과 모든 예언은 이 세 가지, 즉 믿음, 소망,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제 2 권 : 부호에 관하여
(개요) 부호의 정의를 내린다면, 우선 자연적 부호와 관습적 부호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관습적인 부호에만 논의한다. 관습적인 부호에는 말(언어)이 보편적으로 대두된다. 성경 해석가는 주로 말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알기 어려운 것과 모호한 것은 주로 모를 부호와 모호한 부호 때문이다, 이 권에서는 모를 부호만을 논하고, 모호한 말들에 대한 논의는 다음 권으로 미룬다.
부호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곤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여러 가지 번역을 비교하고 문맥을 주시해야 한다. 비유적 표현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말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사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Ⅰ. 부호의 본성과 종류
본 장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그 자체로서 무엇이냐에 유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符號라는 사실, 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유념하여야 한다(符號란 事物을 定義하는 道具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소위 事物의 本性을 말하는 것 같다. 즉 사물(Sache)이라 함은, 素材, 資料, 實際 등 原著者가 發見하고, 그의 規定에 服從시키는 自然的 狀態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물의 본성(Natur der Sache)이란, 그것의 本質, 意味, 즉 그 狀態의 特性으로부터 客觀的 意味로 理解되는 特定한 價値思想의 實現으로서 얼마나 重要하게 考慮 될 수 있는가 하는 問題에 대한 解答이다. 이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설명으로서, Gustav Radburch, Rechtsphilosophie(8 Aufl, 1973), 최종고 역, 『法哲學』, 삼영사, 1975 ; 沈憲燮, 法哲學(Ⅰ), 法文社, 1982.

부호에는 자연적인 것, 예를 들면 煙氣 하면 불이 있던 없던 불이 연상되는 것과 같이 어떤 의욕(wollen)하는 바가 없이 어떤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관습적인 것에는 의사 소통의 매체로 이용되는 수단이다. 대표적인 것은 말이며 여기에서는 말을 오래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말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우두머리가 되려고 불화 된 죄 때문이다. 성경도 이러한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모든 민족사이에 널리 전파되어 알려졌다.

Ⅱ. 성경의 해석

1. 지혜를 얻는 단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죽음과 연관되며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달 듯이 우리의 교만을 십자가에 달아 억제한다.
다음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복종시켜서 성경에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자신이 성경보다 더 현명하며 우리에 더 훌륭한 충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태도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에서 명령하는 사랑,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비의 실천이다. 희망과 영력이 충만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면, 지혜의 단계까지 올라선다.

2. 정경
무엇이 정경인가에 대해서는 정통 교회들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 중에서도 사도가 있었던 곳과 사도의 서간을 받았던 곳을 중시해야 한다. 정경을 판단하는 표준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많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책이 소수의 교회와 권위가 떨어지는 교회가 인정하는 책보다 더 존중을 받는다.

3. 성경연구의 방법론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는 데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즉, 잘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읽고 기억해야 하며 전혀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에 생활과 믿음에 관한 규범들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른 것 보다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이 방면에서 얻은 바가 많을수록 그의 이해력이 커진다. 다음으로 모호한 구절들을 본받아서 그 뜻을 밝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을 근거로 삼아서 의심스런 구절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

Ⅲ. 부호의 애매성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서는, 모르는 부호와 모호한 부호가 있다. 이러한 부호에는 고유한 것과 비유적인 것이 있다.
고유한 부호들에 대한 무지를 없애기 위한 최상책은 언어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의문이 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의 원문, 즉 헬라어 또는 히브리어를 익혀야 한다. 그 중에서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이 거룩한 권위를 지니는 말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또한 외국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라가”는 노한 사람이 지르는 소리요, “호산나”는 기쁜 사람이 내는 소리이다.
해석이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원어가 모호할 때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속으며, 원저자가 생각한 것과 다른 뜻으로 번역하는 때가 많다. 예컨데 “그 발은 피 흘리기에 날카로운지라”(롬 3:15)고 했다. 그러나 옥쉬스(ὁζὐς)에는 날카롭다는 뜻과 빠르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발은 피 흘리기에 빠른지라”라고 번역한 사람이 뜻을 바르게 이해했다.(우리의 개역성서도 후자를 택하였다) 헬라원전에는, “ὀξείϚ οὶ πὀδες αὐτώ ἐκχὲαι αἵμα,”라고 되어 있다.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it, N. Y, American Bible Society.
사실 전자와 같은 번역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오역을 본문으로 삼아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정할 줄 알아야 한다. 유능한 번역가가 아니면 원저자의 뜻을 벗어나는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원어를 공부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비교적 원어에 逐字的으로 더 가까운 번역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번역자들이 자유로이(자의적으로) 본서의 역자는 p. 68의 20 행의 ‘자유로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히려 ‘恣意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의역하는 동안에 범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모르는 말이 외국어에서 온 것이라면 그 나라 말을 배우는 것이 좋다.
번역성경 중에는 원문에 충실하고 표현이 분명한 이탈리아 역이 좋다. 라틴어 번역을 바로 잡을 때에는 헬라어 성경을 써야 하며, 그 중에서 70인 역이 구약성경에서는 권위가 있다. 흔히 70명의 번역가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일치된 번역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독방에서 번역 작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고는 사용한 단어들과 단어들의 순서가 일치해서, 한 사람도 달리 번역한 예가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요약)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찾는다. 온유하고 경건하여 언쟁을 싫어하며 언어에 대한 지식이 확실하므로 모르는 숙어 때문에 곤란을 느끼는 일이 없으며 필요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으므로 모호한 점을 검토하며 또 해결을 한다.


제 3 권 : 모호한 부호에 관하여
(개요) 模糊한 符號는 直接的이거나 比喩的이다.
직접적인 부호인 경우에는 모호한 원인이 구두점이나 발음이나 명확하지 않은 단어에 있으며, 해결방법은 문맥에 주목하거나 번역들을 비교하거나 원문을 참조한다. 비유적인 부호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주의하여야 한다. 첫째, 문자적인 표현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 둘째,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판단하는 원칙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순결한 생활이나 올바른 교리와 부합한지 않게 될 때에는 그표현은 비유적으로 본다. 다음 비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원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하지 않는 해석은 올바를 수 없다. 그리고 도나투스파(Donatus )의 티코니우스(Tichonius) 이에 대한 것은 후술함
의 원칙을 차례로 살펴본다.

Ⅰ. 모호한 점의 제거

1. 구두점의 원칙
문자적인 말이 성경의 뜻을 모호하게 만들 때에는, 구두점이 어떻게 찍히는가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것이 확실치 않으면 다른 분명한 구절들과 교회의 권위에서 얻은 신앙규범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읽는 법이 두 가지 이상이며 신앙과 조화되는 때는 전후 문맥을 참고한다. 예를 들어 이단자들의 구두법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이 계시니라”(요 1:1),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규범은 이런 구두법을 배척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지시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등성을 가르키고 있다. 그러나 신앙규범이나 문맥으로 해결되지 않는 모호한 점에 대해서는, 어느 해석을 따라서 구두점을 찍어도 좋다.

2. 발음의 원칙
확실치 않은 구두점의 원칙은 발음의 원칙에도 적용된다. 이 경우에도 전후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원칙은 중요하다. 간혹 세련된 문어체보다, 구어체가 뜻을 전하는 데 더 유용하다.

Ⅱ. 해석의 기법

1. 비유적 표현의 해석
비유적인 말들 때문에 뜻이 모호해지는 일이 많다. 중요한 것은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자.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고하는 비유에서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육적인 해석이 된다. 영혼의 속성으로서의 인간의 지성을 얘기한 것인데, 문자적인 해석을 하면 그 지성을 육으로 범으로써 영혼의 으미를 상실 시키는 해석이 된다(롬 8:5-6).
문자를 따라 해석을 하면 비유적인 말이 가리키는 제2차적인 의미를 놓쳐버리고 만다. 부호를 이용하거나 숭배하면서 그 부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부호의 노예가 되며,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부호의 효력과 뜻을 알고 이용하며 존중하는 사람은 그 눈에 보이는 무상한 부호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부호들이 가리키는 실재를 경배한다. 이런 사람은 영적이며, 이들은 족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의 일부였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지금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증거가 분명히 나타났으므로 우리의 무거운 짐이나 노고가 되지 않는다.

2. 비유적인 표현의 식별방법
앞에서는 비유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문자적인 표현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어떤 표현이 문자적이냐 또는 비유적이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이는 제 1 권에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있는 것으로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생활의 순수성이나 교리의 건전성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의 순수성이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교리의 건전성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지식을 지닌 것을 깨닫게 되면 양심에 소망이 있다. 이 때의 사랑이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즐지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와 이웃을 즐기려고 하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3. 비유적 표현을 해석하는 원칙
어떤 문장이 명령적인 때에는, 즉 범죄나 죄과를 금지하거나 조심스러운, 또는 친절한 행동을 명령할 때에는 그 문장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범죄나 죄과를 명령하는 것 같은 때, 또는 조심스럽거나 친절한 행동을 금지하는 것 같을 때에는 비유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범죄나 죄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비유적 표현이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때의 사정을 고려할 때에는 범죄나 죄과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생활관을 오늘에 재현시키는 것은 고려되어야 한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행동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은 문자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주님 강령 후의 사람의 행동은 그 시대의 해석과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하려는 표현이 문자적인가 또는 비유적인가를 규명하는 일은 중요하다.
비유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그 표현에 사용된 단어들은 항상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즉 의미하는 바가 서로 반대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일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 눅 12:1)에서 누룩의 의미와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마 13:33; 눅 13:20-21)에서 누룩의 의미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모호한 구절에 대한 뜻은 더 분명한 구절에서 그 뜻을 취해야 한다.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2)라는 구절은, “주여 주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엡 6:16)라는 구절을 참고하여 해석하면 좋다. 그렇다고 모든 방패가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의심스런 구절이라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다른 성경 구절을 대조하면서 논쟁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 좋다.

4. 비유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
성경에는 헬라어의 트로포스(tropos) 본서 p. 119 하단의 트로포스(tropos)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비유라는 뜻이라고 하는 바, 이 단어를 헬라 원어로 보면, τρὀπος(way, manner)를 뜻한다. A Concise Greek-Korea Dictionary of the N T, United Bible Societies. op. cit., p. 184.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비유란, “하늘의 뜻을 가진 지상의 이야기”라는 의미(비유연구와 해설, 이훈구 지음, 도서출판 연합, 1992, p. 17 참조)의 “파라볼레(παραβολἠ, parable, proverb; figure, symbol., 우화, 비유)” 등으로 해 할 수 있다. ibid., p.131.
즉 비유라고 부르는 표현이 많다. 비유에 대해서는 성경 이외에서 배워두는 것이 좋다.

Ⅳ. 티코니우스의 원칙

도나투스파인 티코니우스라는 사람은 도나투스파에 반대해서 아주 설득력있는 글을 썼으면서도 그 파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원칙론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의 원칙을 제시 하였다. 도나투스파에 대해서는 앞의 주 3)에서도 잠시 언급이 되었지만, 이단으로 판명된 북아프리카의 미개지역에서 활동한 기독교의 일파이다. 티코니우스는 평범한 신학자로서 380년 경에『원칙론』을 저술했다.
이 원칙이란 열쇠와도 같이 성경의 무호한 점을 밝혀 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대로 이 원칙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 성경의 숨은 뜻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렵게 된 성경 말씀들을 이 원칙들로부터 전부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은 그의 일곱 원칙을 간단히 나열한다.
첫째; 주님과 그의 몸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와 몸, 즉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 어느 것이 머리이고 어느 것이 몸이라는 것을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둘째; 주님의 몸의 이분법이다. 이것은 주님의 참 몸과 가짜 몸 등으로 표현했어야 한다. 이는 섞인 교회에 관한 것으로서, 좋은 부분에 섞여 있는 나쁜 부분을 말한다.
셋째; 약속들과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영과 문자에 관한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은혜와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이 문제는 중요하다. 그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논하면서 행위는 믿음에 대한 상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믿음 자체는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거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넷째; 種과 類에 관한 것이다. 논리학자들은 이 구별을 세세히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자세한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시간에 관한 것이다. 이 원칙에 의하여 성경의 시간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적용한다. 즉 제유(提喩, synecdoche )라는 어법과 올바른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제유는 부분을 전체로 또는 전체를 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올바른 숫자라 함은 성경이 존중하는 숫자를 뜻한다. 예를 들어 일곱, 열, 열둘, 그밖에 성경을 숙독하는 사람이면 곧 알게되는 숫자이다. 즉 이 숫자들은 ‘항상’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섯째; 遡及反復의 原則이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서 발견된다. 성경 기록이 사건이 발생한 순서를 따른 것 같거나, 사건이 계속된 것 같을 때, 실은 이야기가 무언중에 이전으로 돌아가서, 빠뜨린 것을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일곱째; 마귀와 그 몸에 관한 것이다. 마귀는 악인들의 머리며 악인들은 이를 테면 그의 몸으로서, 그와 함께 벌을 받게 된다. 이는 첫 번째 원칙에서와 같이 어느 때는 머리로, 어떤 때는 몸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이상에서 여러 원칙을 살펴보았지만, ‘약속과 율법’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표현된 것과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이는 비유적 어법의 특색이다. 이 어법은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 범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 같다. 언급되는 말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이 비유적 표현인데, 트로포스(비유)라는 말도 修辭學에는 없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말은 보통 성경에서 표현되는 형식을 알며, 자세히 관찰하고, 정확히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신다”(잠 2:6).


제 2 부 - 성경의 올바른 의미의 표현 -

제 4 권 : 뜻을 알리는 방법

(개요) 저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서 수사학을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사에게 필요한 웅변술에 대해서 얘기한다.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이란, 고대 희랍철학의 한 부분으로서, 초기 철학자 집단의 아류라 할 수 있는 소피스트(sophist; Protagoras, Thrasymachos, Kallikles 등)들이 기원전 5 세기 초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민주적 정치제도하에서 직업적 변호사가 없던 시절 원고와 피고간에 서로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정기술을 연마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항상 反動 無産者로부터 도전을 받아오던 부유층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보수를 받고 그들에게 辯論技術(rhtorike)을 가르쳐 주던 사람을 소피스트라고 한다. 최초의 소피스트는 프로타고라스이며, 수사학을 집대성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이며, 그의 『修辭學』(Τἐχνη ῥητορικἠ, Ars rhetorica)은 전 3 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의 대부분은 法廷辯論으로 되어 있다. 소피스트들은 당대의 현실적인 정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던 나머지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보다는 修辭, 辯論 등의 皮相的인 분야에 열중하여 相對主義와 회의주의에 흐르는 경향을 띄웠다. 그리하여 원래 知者 또는 賢者로 불리워지던 소피스트라는 말은, 訥辯을 일삼는 자라는 경멸적인 칭호로 전락되었다. 한편 수사학이란, 고대의 변증술과는 다르고 또한 웅변술과 비슷하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 도시국가에서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재판에 이기기 위한 하나의 목적달성을 수단이었다. “Rhetoric is the counterpart of Dialect. It is a subject that can be treated systermatically. The argumentative modes of persuasion are the essence of the art of rhetoric: appeals to the emotions warp the jugement"(Aristotele's Rhetoric BookⅠ, chapter 1., http://paul.spu.edu/~hawk/aristotleh.html에서 인용); 류병화,『法哲學』, 서울: 박영사, 1984, 제2장(고대 그리스 법철학); 황산덕,『法哲學 講義』(第4全訂版), 서울: 방문사, 1984, 제2장(그리스․로마의 法思想); 이병주(외 4인공저), 『世界文化史』, 서울: 일조각, 1977, pp. 56-59 ; Joha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 강성위 옮김,『서양 철학사』(상권, 고대와 중세), 대구: 이문출판사, p. 206.

그러나 수사학은 다른 데에서라도 배워야 하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기독교 교사는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수사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웅변가의 특성을 신중하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웅변술의 모범으로서 성경의 저자들을 추천한다. 그들은 웅변과 지혜를 겸비한 점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한다.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설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특성들도 있지만, 우선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문체나 말씨가 명석해야 한다. 말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부드러운 것, 기품이 있는 것, 위엄이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데는 부드러움이, 칭찬을 할 때는 기품이 있게, 그리고 권고(勸告)하는 데에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끝으로 교사 자신은 그 직책의 존엄성과 책임을 다하고, 자기가 가르치는 것과 생활이 일치하여 모든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한다.

Ⅰ. 修辭와 雄辯

수사의 기술은 진리나 거짓을 주장하는데 효과가 있다. 진리의 언변과 거짖의 언변에는 차이가 있다. 거짓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힘찬 언변으로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진리를 증언하는 데는 무뚝뚝하고 졸리게 해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웅변술의 이론과 원칙들을 알고 겸해서 연습과 습관으로 어휘와 장식이 풍부한 구변이 능하게 되면 그것이 곧 웅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나이와 적당한 시간이 들어야 한다. 총명하고 열성이 있는 사람들은 웅변술의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웅변가들의 연설을 읽거나 듣는 편이 더 쉽게 웅변술을 배운다는 것을 익히게 된다.
학고한 권위가 인정된 성경과 교회 지도자들이 쓴 글도 많아서, 소질이 있는 삶이 그 글을 읽으면 부지불식간에 웅변술을 터득하게 된다. 또한 웅변가들의 연설을 읽거나 배우고, 모방함으로써 웅변술을 익히게된다. 웅변가들의 연설이나 토론을 보고 듣는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 웅변술을 터득하게 된다.

Ⅱ. 기독교 교사의 의무

성경을 해석하며 가르치는 사람, 진정한 믿음을 옹호하며 오류에 반대하는 사람은 바른 것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른 것을 논박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의무이다. 그리고 이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적대적인 사람의 마음을 慰撫하며, 무관심한 사람의 열성을 일으키며, 무식한 사람들에게 현재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을 알려줘야 한다. 그러나 청중이 배우는 것보다 격려(激勵)를 받을 필요가 있으면, 이미 아는 일을 실천하며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말에 힘을 더 주어야 한다. 호소(呼訴)와 비난(非難), 권고(勸告)와 책망(責望), 그밖에 감정(感情)을 격동(激動)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토론하며 주장할 때, 언변보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언변도 좋으면 청중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줄 수 있겠지만, 유창한 언변으로 무의미한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웅변이 없는 지혜는 국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지혜가 없는 웅변은 전적으로 해를 주며 도움을 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웅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약 1:17) 참 진리, 즉 하늘 지혜를 알지 못했으면서도 사실을 관찰하고 웅변술에 관한 그 저서에서 이와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며 뜻을 주의 깊게 탐구하라는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웅변과 지혜를 겸비한 자들이었다. 그 들이 쓴 것은 정경이 되었고 그들은 더할 수 없는 지혜와 언변을 겸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쓴들이 사람의 기술과 정성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웅변이요 지혜라는 것이다.

Ⅲ. 기독교 교사의 화법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청중의 태도를 살피는 것은 그들이 변사의 말을 알아들었는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판단하는 자료가 된다. 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점에 대해서 빛을 던져 주면 청중은 즐거워하지만, 이미 알고있는 문제를 지리부진 하게 얘기할 때 그들은 지루해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듣는 사람이 확실히 진리를 들으며, 듣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점에 도달하면 설명이 더 필요하듯이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더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리를 깊이 인상지어 주기 위해서 다소간 더 역설할 필요가 있다. 전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표현하려고 세련된 말을 등한시하며 듣기 좋게 말하는 것도 경시하는 때가 있다. 이런 화법을 “주의 깊은 무관심이라고 한다. 훌륭한 교사들은 이해하도록 가르치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뜻이 모호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유식한 사람을 따라서 모호하게 되기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을 따라 모호한 점이 없는 통속적 화법이 낫다. 가르치려는 사람의 웅변은 어찌되었든 모호한 것을 밝히는 데 있다.
웅변가의 목적은 가르치며, 즐겁게 하며,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키케로는 말했다. 이어서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은 필요한 일이요, 즐겁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요, 설득하는 것은 승리라고 했다. 이 중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승리이다. 가르치는 진리는 실천하는 일이요 그 목적도 실천하는 일이라면,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면, 담화 내용이 진리인 것을 믿게 되어도 무익하며, 말하는 방식을 기뻐해도 소용이 없다.

Ⅳ. 기독교 교사는 설교를 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의 교사는 언제든지 공정하고 거룩하고 선한 일만을 말해야 하는 동시에, 듣는 사람이 이해하며, 즐기며 순종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목적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웅변적인 재능이 아니라 경건한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않된다. 성령께서 사람을 교사로 만드시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시할 필요가 없다고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가 하나님에게서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바르게 배우지 못한다. 즉 사람이 도구가 되고 가르칠 때에,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그 도움을 유익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그것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유익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복음을 사람에게 주실 수 있었다(갈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