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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헤겔의 신학론집

by 이덕휴-dhleepaul 2018. 4. 29.

헤겔의 신학론집

강유원 / 2009-6-30 / 서평

헤겔(지음), 정대성(옮김),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 인간사랑, 2005. [978897418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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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으로 관념론은 정신이야말로 일체의 것의 궁극적 본질이며, 모든 생성 또한 정신적인 것이어서 물질적인 것은 독립된 근원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 현상의 수반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헤겔에서 관념론은 사물의 진리가 현상, 가상(假象)일 뿐이라고 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면 사물의 참다운 진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진리는 전체"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사태에 대해 판단을 하고 그것을 진리로 고수한다. 그러나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가상일 뿐이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진리 파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파악의 단계는 무한히 계속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 종국에 이르러 인간이 갖게 되는 진리는 최초의 것을 부정하면서 시작되어 종국에 이르기까지 가졌던 모든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전체'이다. <<정신현상학>> 최후 단계의 절대적 지(), <<철학집성(哲學集成,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최후 단계의 절대적 정신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개념이 운동하면서 스스로 형성해낸 성과물인 것이다. 진리전체론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리란 유한자의 운동의 성과이면서 동시에 무한자와 합일된 것이라는 점이다. 전체에 이른 진리, '절대적인 것', '절대적 지', '절대적 정신'은 유한자를 거쳐온 것이다. 이것은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요, 그런 까닭에 유한자의 변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 유한자의 변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 사상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항상 유한자와 대립된 것이었던 반면, 헤겔 철학의 특유성은 여기에 성립한다.

유한자를 매개로 하여 전개되는,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에 이르는 참다운 무한자[진무한(眞無限)]라는 개념1)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객관적 정신론의 마지막에 자리잡은 역사철학이다. 유한자라는 계기를 매개로 운동하는 절대적인 것, 이는 절대적인 것이 시간 속에 놓여있다는 것, 즉 절대적인 것의 역사성을 의미하게 된다. 역사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유한자들의 단순한 집적이 아니라 선행하는 것이 후행하는 것의 계기로 포속되면서 전개되어 가는 것이요, 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전 역사는 진리의 전개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가는 정신을 헤겔은 세계정신이라 부른다.

다른 방식은 이른바 헤겔 절대적 정신론의 일부인 종교철학적인 논의이다. 무한자를 신, 인간을 유한자로 본다면, 유한자와 무한자의 진정한 통일은 인간과 신, 신과 인간의 상호 통일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 통일을 이해할 때 우리는 헤겔의 객관적 정신론 이후에 전개되는 논의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헤겔의 철학 체계가 객관적 정신론에서 마치는 것이 운동을 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절대적 정신론에서 완결짓는 것이 체계를 이룰 수 있는가에 관한 논의의 실마리가 여기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객관적 정신론, 즉 역사철학에서 그친다면 실천철학은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성립하나 <<철학집성>> '정신철학'의 정신 규정 등은 미해명의 상태로 남는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명을 위해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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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튀빙겐 신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 그의 사상에 기독교 신학2)이 강하게 깔려있음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그는 튀빙겐 신학교를 마친 1792년 이후 7, 8년 동안 스위스 베른과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글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신학과 관련된 것들의 묶음이 이 책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현실적 위력 등에 관한 것으로 일종의 종교 비판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후기에 성립된 철학체계3)와는 내용상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것들에서 발견되는 사상의 단초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물이 되는 것이다.

청년 헤겔에 관한 학적인 관심은 딜타이(Dilthey)에서 시작된다. 그는 청년기 헤겔을 강의하고 1905년에 <<청년 헤겔의 역사Die Jugendgeschichte Hegels>>를 출간하였다. 그의 강의에 자극을 받은 제자 헤르만 놀(Nohl)은 헤겔의 신학적 단편들을 모아 1907년에 <<헤겔 청년기 신학논문집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을 간행하였다. 흔히 청년 헤겔의 신학논문이라 하면 이 책을 가리키며, 이 책으로 인해 청년 헤겔에 관한 연구4)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은 놀의 책에 몇 편의 논문을 더한 것인데, 핵심적인 논문들, <민중 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실정성>,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민중 종교5)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은 기독교가 공동체의 종교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하고 사적인 기복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논하고 있다. 헤겔은 이처럼 화석화된 기독교를 비판하고 기독교가 진정한 공동체 종교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I. 교설은 보편적 이성에 근거해 있어야 한다. II. 환상, 마음, 그리고 감성이 공허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III. 민중종교는 삶의 모든 욕구, 공적인 국가 행위가 이 종교와 연결되게 하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헤겔은 종교가 삶의 모든 욕구와 연관되어야 하고, 국가와도 관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얼핏 보면 계몽사상가들의 시민종교를 연상케 하지만, 그가 "감성" "욕구"를 강조한 것에 근거한다면 반드시 이성종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민중 종교는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라는 항목 아래 서술하는 것들을 보아도 분명하다: "물신신앙을 피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계몽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음으로써 이성의 요구에 부응했다고 믿는 것, 교조적인 교설에 붙들려 영원히 서로 으르렁거림으로써 자신도 타자도 개선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 많은 우리 시대에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헤겔이 공동체의 종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개인이 감성을 가지고 생생하게 참여할 수 있는 주관적 종교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제도적 장치로서의 종교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헤겔이 객관적인 제도적 장치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의 실정성> 논문의 핵심이다. 이 논문의 내용은 '실정성(Positivität)' 개념을 해명하면 이해할 수 있다. 실정성은 본래 주관이 정립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그것을 정립한 주체를 억압하는 상황이 되면 단순히 정립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정성으로서 도덕적 자율과 대립된다. 헤겔이 보기에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 제도적 장치는 본래 예수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의 종교에 대한 가르침을 자기만의 고유한 관례를 가진 종파로 고양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이 종파로 고양된 이유는 그의 동료들의 열성 때문이고, 그들이 그 가르침에 덧붙인 주장들 때문이며, 그 주장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이유들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정적 종파로 만드는 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예수의 제자들의 성격과 재능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과 그들의 선생의 관계 방식이 그것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가 질문되어야 한다." 예수에게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해도 기독교는 이미 위력을 가진 제도가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최초에 모든 참된 종교와 기독교의 정수로 간주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또한 인간의 의무와 그 동기를 순수하게 정립하고 지고의 선의 가능성을 신의 이념을 통해 제시할 수 있을 규정으로부터 점점 동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예수의 영혼은 자유로웠고, 우연적인 것에 의존해 있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하게 필연적인 것은 신과 신처럼 성스러운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그러나 우리는 그의 계승자들이유태의 정신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예수의 말에서, 예수가 보여주었던 것에서 곧바로 규칙과 의무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에 대한 자유로운 모방행각이 곧이어 그들의 주인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으로 전이되었다." 예수는 분명 참다운 사랑을 전파하였고, 제도화된 종교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의 말과 행위로부터 규칙과 의무율, 즉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이 제도가 인간의 삶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헤겔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청년 헤겔이 파악한 예수의 진면목은 무엇이었는가? 복음서를 시대순으로 배열함으로써 예수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는 예수를 실천이성의 구현자로서 기독교를 이성종교로서 제시한다. "인간의 타락한 규준들을 개선하고 참다운 도덕성과 신에 대한 진실한 존경을 알게 하는 데 있어서 예수의 공헌은 훨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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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 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실정성>은 일관성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도덕적 종교로서의 기독교, 개인의 주관에 호소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현실적인 제도로서의 기독교의 부정, 도덕 교사로서의 예수가 그것이다.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은 칸트적 도덕성에 의존했던 이전 논문들과는 달리 이제 그것만으로는 실정성을 극복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도 여전히 주제는 '실정성 극복'이요,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총체성으로서의 삶'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러한 삶에 이르지 못한채 분열되어 있다.

삶은 전체이다. '삶은 전체'라는 입장에서 보면 초월적 신은 분리의 정신이 산출한 추상일 뿐이다. 초월적 신의 내재화 또는 인간화, 인간의 신화(神化, deification)가 삶의 총체성의 완전한 복원이다. 참다운 의미의 종교는 삶의 총체성에 이른다.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에 이르는 출발점이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종교적인 내용에 대해, 그와 신과의 관계에 대해, 그의 공동체에 대해, 그의 아버지와의 통일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의 추종자들이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예수는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하나가 되는 것은 여러 단계를 거쳐간다. "[도덕적]심성은 실정성, 즉 계율의 객관성을 지양한다. 사랑은 심성의 한계를, 종교는 사랑의 한계를 지양한다." 앞의 세 논문들에서 일관성있게 강조되었던 것이 바로 도덕적 실천은 실정성을 지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실정성 극복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에 더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으로도 삶의 총체성에 이를 수 없다. 이제 참다운 종교가 요구된다. 이 종교는 실정성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아직 그러한 종교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여기서 헤겔은 기독교가 어떠한 종교가 되어야 하는지, 삶의 총체성으로서의 종교는 어떠한지를 예수의 말과 행위를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한번 당시에 기독교가 처한 운명을 재천명한다.

예수는 인간의 "충동, 욕구"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예수가 속해있던 유태민족에 대한 직접적인 반란의 형식을 띤다. "주인에 대한 단순한 복종만을 강요한 명령들, 기쁨도 즐거움도 사랑도 없는 직접적인 노예상태, 복종의 사태, 즉 신에 대한 예배만을 강요하는 무의미한 명령들, 바로 이러한 유태의 정신에 대항하여서 예수는 그것과 정확하게 대립되는 것, 즉 인간의 충동, 욕구를 내세웠다." 그런데 이 충동과 욕구는, "그러한 욕구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느껴지고 보존되기 때문" "현실에 더이상 대립되지 않은 완벽한 통일체를 이상(理想) 속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종교적 행위로까지 전개될 수 있다.

이상의 성취는 욕구를 억압하는 실정적인 것의 제거를 필요로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음으로써 유태의 율법을 공격했다." 예수는 "성스러운 시간[안식일]과 인간을 비교하여 전자가 인간 욕구의 사소한 만족보다 열등하다고 천명한다." "예수는 그들의 눈에서조차 안식일의 성스러움이 반드시 절대적일 수 없으며, 이 명령을 준수하는 것 이상으로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도록 그들에게 증명해 주었다." 예수는 빵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유태의 관습을 부인하기도 한다.(마태, 15:2) 그것에 구속되는 대신 그는 "인간의 총체적 주관성"을 내세운다. 이것으로써 충동과 욕구가 재정의된다. 그는 "유태인들의 실정성에 인간을 대립시켰다. 그는 법과 의무 대신에 도덕을 내세웠으며, 이 속에서 실정적 인간의 비도덕성이 극복된다." 그러나 도덕은 또다른 배제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총체적 국면을 드러내지 못한다.

헤겔은 도덕을 넘어선 단계를 사랑이라 본다. "사랑 속에서의 화해는 유태인들이 하듯이 복종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해방이며, 지배를 재차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동적인 유대관계, 즉 사랑의 정신과 상호적인 믿음을 재산출하는 가운데 그런 지배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과 신의 관계까지도 재규정한다. 이제 예수는 최고의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펼친다. "유태인들은 신을 그들의 주인으로, 그들에 대한 지배자로 생각했다. 이에 반해 예수는 이러한 이념 대신에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대치했다." 이 관계는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관계이자 그 자체 삶이다따라서 신의 아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다."

"예수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에서 인간과 신은 하나가 된다. 즉 예수는 '신이 된 인간'인 것이다. "신의 아들은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다. 신적인 것이 특수한 형상을 입고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신과 인간의 합치를 알지 못하는, 총체성으로의 "삶을 분열시키는 반성은 삶을 무한자와 유한자로 구별한다." 이러한 오성적 반성의 입장에 서서 "유한자를 그 자체로서만 고찰하게 되면 인간 개념은 신적인 것에 대립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태인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4)는 예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분명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느님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 된 인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는 객체로서의 신, 무한자를 자신 안에 들여온다. "신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믿는 자 안에도 신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가 발견한 것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임을 의식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재발견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빛과 삶이 있고, 그는 빛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은 스스로 빛나면서 삶과 통일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삶으로 된 사람들, 즉 신적인 것을 간직한 사람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예수와 어떠한 차이도 없어야 한다." 이제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와 마찬가지로 신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제자들은 "개별자 예수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다. 그리고나서 그들 자신의 정신, 또는 신적인 정신이 그들 속에 살게 된다." 이는 예수가 예견했던 바이기도 하다.6) 이로써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정신7)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되었다. "믿음의 완성, 즉 인간이 태어났던 신에로의 복귀와 더불어 인간 발전의 순환은 끝난다.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살며, 삶이 있는 모든 것은 신의 자녀이다." 그들은 "자기의 본질이 신적인 정신으로 가득찬 사람들, 신적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 본질이 자기 속에 충만한 신적인 것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에따라 "인간들 속에 신적인 것이 지배한다는 것"은 더이상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 신에게 복종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으로써 맺게 되는 관계는 그들이 신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고, 이는 그들이 또 한 명의 예수가 된다는 것, 무한자와 유한자의 통일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들이 모인 공동체는 바로 "신의 왕국"이다.

신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제도로써 고착시켜 신을 숭배하기만 한 현실의 기독교는 이러한 "신의 왕국"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채 "신과 세계, 신적인 것과 삶과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극단들 사이에서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못잡았다그리고 교회와 국가, 예배와 삶, 경건함과 덕, 정신적 행위와 세속적 행위가 결코 하나로 용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 기독교의 운명이다."

4
기독교의 분열적 운명을 극복하는 것, 총체성의 삶에 이르는 것, 유한자와 무한자의 진정한 통일, 인간의 신화(神化)가 바로 철학의 과제이다. 1807년에 출간된 청년 헤겔의 마지막 저작 <<정신현상학>>은 이러한 신화의 서사시이다. 그 서사시는 자신에 선행하는 또다른 신화의 서사시인 단테의 <<신곡>>의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별을 향해 여행을 시작했던 단테는 천국 편 마지막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만난다. 베르나르두스는 "베아트리체와 수많은 축복받은 자들"과 함께 단테를 위해 기도한다: "지금 우주의 가장 낮은 늪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영혼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본 이 사람이/ 당신께 은총에 의한 힘을 기원하오니,/ 마지막 구원을 향하여 더욱 높이/ 눈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저도 뵙기를 원하면서 이 사람처럼/ 열렬히 불탄 적이 없었으니, 제 모든 기도를/ 당신께 드리오니 부족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구름을 걷어 내시니, 그에게/ 최고의 기쁨이 펼쳐지도록 해주십시오."(<천국>, 33, 22-33) 단테에게 최고의 기쁨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별들로 향하던 그는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천국>, 33, 143)와 합치되었다.

신화의 서사시인 <<정신현상학>>은 물화(物化, reification)의 시대인 근대에 맞서 과거의 사상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예전에 사람들은 사상과 형상의 광대한 풍부함으로써 천계(天界)를 장식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한 의미는 [존재하는 것이] 그것을 천계에 연결시켜주는 빛의 실 가운데에 놓여있다." 이 빛의 실을 따라 가는 것이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펼쳐보이는 "노고"이다. 그 노고는 "인간을 감성적인 것, 조야한 것, 개별적인 것의 탐색으로부터 구출하고 그들의 시선을 별들로 향하게 하려는 것8)이다. 인간이 신적인 것을 전혀 잊어버리고 벌레처럼, 먼지와 [더러운]물로 순간순간을 만족하며 연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현상학>>에서 장대한 신화의 서사시를 펼쳐보인 헤겔은 <<철학집성>>에서 그것을 다시 쪼개어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의 기본적인 구도는 여전하다. 3 <정신철학>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에서 제시했던 신과 인간의 합치에 관한 논의를 재개한다. "기독교는 비로소 신의 인간됨[화육(化肉)]에 관한 교리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현존에 관한 교리를 통해 무한한 것에 관한 완전히 자유로운 연관을 인간 의식에게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서 정신을 그 절대적 무한성에 있어서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그러한 파악만이 철학적 고찰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철학의 과제는 정신의 파악, 인간과 신의 합치에 관한 개념적 고찰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신과 인간의 통일 및 그러한 인간의 공동체, "신의 왕국"에서 현전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자신의 외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말한다… [] 명제는 참으로 신의 본성이 아들을 갖는다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신은 자기를 구별하여 유한자가 되지만, 자신의 구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곁에 있으며, 아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직관하고 드러내며, 아들과의 이러한 통일로써, 즉 이러한 타자에 있어서의 대자존재로써 절대적 정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은 드러남의 한갓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드러남의 내용이다." 신은 아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자체로서 이미 신이다. 따라서 아들과 신은 하나이다. 이제 철학은 이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철학은 표상의 방식으로 주어져 있는 이러한 내용을 개념 혹은 절대적 지의 형식으로 높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 지는 그러한 내용에 대한 최고의 드러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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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한자와 대립되는 무한자를 헤겔은 '악무한(惡無限)'이라 부른다. []

  2. 이 신학은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정통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3. 헤겔 성숙기의 사상을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9)의 신비주의 사상과 비교하는 논의들은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부현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책 역자 후기에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1)창조 이전의 아버지와 아들 및 사물의 원상들의 관계(내재적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하는 신론, 2)피조물의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론, 3)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로 집약하고, 헤겔의 철학체계를 1)창조 이전의 신의 영원한 자기 운동을 서술하는 논리학, 2)신의 피조물인 자연에 대한 고찰인 자연철학, 3)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를 서술하는 정신철학으로 구획하여 비교하고 있다. 이는 일견 헤겔의 체계를 신비주의와 연관지으려는 것이기도 하나 헤겔이 의도했던 철학적 개념화가 과연 이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요구될 것이다. []

  4. 널리 알려진 청년 헤겔 연구서로는 루카치(Lukacs) <<청년 헤겔Der junge Hegel>>(1938)이 있는데, 이 책은 청년기 신학논문들이 아닌 <<정신현상학>>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

  5. 이 말은 'Volksreligion'을 번역한 것인데, '민족'이나 '민중'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Volk'가 과연 한국어와 정확한 의미대응 관계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이 술어는 희랍어 polis의 독역으로 보아 '공동체'라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6.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요한, 16:7) []

  7. 신성한 영혼, 이는 헤겔의 철학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정신'의 용례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성부와 성자를 관통하는 성령이다. []

  8. ihren Blick zu den Sternen aufzurich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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