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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신여성 나혜석

by 이덕휴-dhleepaul 2022. 7. 17.

나혜석

최근 수정 시각: 2022-06-28 22: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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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羅蕙錫 | Na Hye sok
 
결혼 직후의 나혜석 (1920)
출생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現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사망
1948년 12월 10일 (향년 5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89길 24[1])
국적
본관
아호
정월 (晶月)
아명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학력
삼일소학당 (졸업)
진명여학교 (졸업)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 / 졸업)
직업
가족
배우자 김우영
장녀 김나열
장남 김선
차남 김진
삼남 김건
아버지 나기정
큰오빠 나홍석
작은오빠 나경석
조카 나영균, 나희균
조카손녀 나문희[2]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과 세계여행2.3. 불륜 그리고 이혼2.4. 최후
3. 사상적 활동
3.1. 성평등3.2. 여성의 권리3.3. 진보적이었던 사상과 주장
4. 작품적 활동5. 어록6. 오해7. 여담

1. 개요[편집]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지식인로 평가받았다.[3][4] 본관 나주(羅州), 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5]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했다.[6]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1대 페미니스트라고도 불리며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인 주장들을 하던 인물이다. 그녀는 일본 유학 당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계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글들을 투고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7]

아버지였던 나기정은 보수적인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었으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을 일으켰다.[8] 그 덕에 나혜석은 당시 여성들 중에선 특출난 편이였고 고등학교까지 나와 미술을 익혔다. 특히 둘째 오빠였던 나경석은 나혜석을 특히나 챙기고 아꼈는데, 이후 그녀에게 힘든일이 닥칠때마다 곁에서 많이 도와주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유하고 명망높은 집안, 꽤나 진보적이고 좋은 가족들 사이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딸들에게 처음부터 정식 이름 대신 아명을 썼고, 나혜석은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 그녀의 여동생은 '나간난(=나 참판댁 갓난애기)' 등으로 불렸다. 이런 과거적인 아명붙이기는 나혜석이 진명여학교 입학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서 끝났다. 때문인지 나혜석은 이름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였다.[9] 아무리 집안이 어느정도 진보적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였기에 (사대부+여성) 이라는 입장은 언제나 눌려사는 삶이었다.

이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아버지 나기정은 본처인 최시의 이외에 여러 여성들을 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까지 두기도 했었는데, 그녀가 인데다 기생출신 임에도 불구하고 나기정의 총애를 받는다는걸 방패삼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하여 본처인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해댔다. 이는 절대 용납되는 일이 아니며 본래라면 칠거지악의 4, 6번에 따라 쫓겨나야할 상황이건만 최시의는 남편에겐 하소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으며 고생을 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 첩을 여럿 두는것쯤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어머니가 직접 이러한 사회적 피해를 입자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10]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이때부터 여성운동가로서의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삼일여학교, 진명여학교, 일본유학을 거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혀가던 나혜석은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향한 비판을 담은 글들을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이게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본국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

2.2. 결혼과 세계여행[편집]

다양한 글들을 통해 당시 남성중심 사회를 비판하던 나혜석은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력을 이겨내지못해[11] 결국 일본유학 당시 연애관계였던 최승구와 약혼을 가지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최승구는 폐렴과 결핵에 시달리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낸 나혜석은 심히 슬퍼하며 집안에서 권유하는 모든 중매자리들을 거절하였다. 그러다 평소 가까웠던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교토에 있는 김우영[12]을 만나게 되었고 오빠의 강력한 추천으로 여러번 만나게 된다. 처음엔 거절했으나 집안에서 계속 보채는 통에 결국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 결혼하기로 한다.

이때 나혜석은 결혼전 4가지 조건을 들며 이를 허락해야만 결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게 뭔고 하니 아래와 같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1, 2번 항목은 그렇다해도 3, 4번 항목은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괴상한 조건이였다. 시집을 가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하는게 일반적인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또한 첫사랑이던 최승구의 묘비를 세워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옆의 남자를 두고 과거의 남자에게 집착하듯 하여 약간 맥이는듯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변인들은 김우영에게 나혜석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이러한 조건들을 김우영은 모두 받아들이고 나혜석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 여자와 그 남자인 셈. 이때문에 김우영은 주변으로부터 공처가, 애처가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이후 김우영과 나혜석은 꽤나 좋은 부부관계를 이어가며 후술할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결혼때의 약속대로 나혜석은 큰 간섭없이 자유로이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항일운동, 독립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녀의 전시회에는 첫날에만 5000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남편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이 주는 해외 위로여행 포상의 대상자가 되었다.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부부동반으로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아시아를 넘어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양의 다양한 국가들을 관광하며 그녀의 사상과 작품세계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2.3. 불륜 그리고 이혼[편집]

1928년, 해외여행을 하던 나혜석은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있던 친일파 최린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최린을 보곤 한눈에 반하여 가까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여행 기간 동안 수십번씩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은 파리의 유학생들에게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이다." 라는 소문으로 퍼지게 되어 남편인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아내가 외간남자와 바람을 비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우영은 이 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끝내 나혜석과 최린이 만나 연애를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에 분노한 김우영이 자신이 있던 베를린에서 짐을 싸고 나혜석이 있는 파리로 오면서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은 끝나게 되며, 막내아들이 그리고 이 시기게 태어나게 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나혜석의 삶은 불행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국한 김우영은 나혜석의 바람에 복수라도 하듯 새로운 여성과 교제를 하며 신접살이를 시작했고, 나혜석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한다. 나혜석은 결혼 전의 약속들을 언급하며 이혼을 피해보고자 하였으나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간통죄로 고소를 하겠다며 응수했고[13] 결국 둘은 1930년, 10년간 이어오던 부부관계에 막을 내렸다.

이혼 이후로 나혜석은 많은 것을 잃었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남편 김우영이 가져가게 되면서 자식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자식들을 보고자 노력했지만 김우영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고, 자식들도 어머니의 방문을 거절하면서 사실상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미지 또한 큰 타격을 입었는데 기존에 보이던 행보들에 바람을 피워 이혼 당했다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더더욱 욕을 먹게 되었다. 어떻게해서든 재기해보려 해도 자신이 해온 것들이 있으니 매우 힘든 삶을 보내게 된다.

2.4. 최후[편집]

비난에 시달리던 그녀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자 파킨슨병과 중풍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성계몽을 위한 강연과 운동을 계속하였고 절에 귀양까지 했지만 결국 쇠약해져 요양원에 신세를 지게 된다.

자식들을 향한 일방적인 정으로 가족과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면서도 파리로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커서 말년에는 자식을 보고싶어 많은 시도를 했지만 모든 아들딸들은 어머니의 방문을 거부하였다. 여담 항목에 후술한 아동 학대 논란이 주원인인 것으로 점쳐지는 편.

요양원[14]에서 탈출하면서까지 자식을 보려 했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져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3. 사상적 활동[편집]

3.1. 성평등[편집]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여자, 남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코올 의존증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15]

3.2. 여성의 권리[편집]

(수집 중)

3.3. 진보적이었던 사상과 주장[편집]

보통 "나혜석은 너무도 진보적이었고 당시 사회에 저항했기에 욕을 먹었다" 라고 전해진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의 시대상에 정면으로 부딪쳤었고, 본인부터가 정조관념이 강하던 사대부 출신인지라 이러한 비판이 거셀수밖에 없었다.

4. 작품적 활동[편집]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자화상(1928)
그의 작품 <자화상>.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나혜석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 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로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으며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경희>는 이러한 고백체 소설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 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임신출산으로 여성이 갖는 좌절 및 고난과 자신의 외도 사실을 상세하게 고백한 나혜석,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그랬던 자신을 글로 유린했던 남성 문학인들과 맞선 김명순 등 절절하게 자신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냈던 여성 작가들은 탕녀로 낙인찍혀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이들을 탕녀로 만드는 일을 주동했던 김동인, 김기진 등의 남성 작가들은 이전까지는 어떠한 평가나 굴곡 없이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으나, 현재의 학계에서는 해당 작가들의 행동과 관련된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이라는 큰 일을 겪은 현재 한국의 문학계가 앞으로 과거의 이러한 과오들도 청산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

5. 어록[편집]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디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인형의 가(家)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16]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경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하략)

6. 오해[편집]

• 나혜석의 이름과 여성의 이름에 대하여
나혜석과 여동생이 아기, 간난과 같은 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당시 여성은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이 있다. 실재로 아명을 가진 기간이 길긴 했지만 후에 "나명석"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이후에 "나혜석"으로 개명을 한것이지 없던 이름을 만든것이 아니다. 아명도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어서가 아닌 당시에 부적저럼 쓰던 별명이였다. 결론적으로 여성이 이름을 가진적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 김우영과 나혜석의 불륜관계
김우영이 나혜석과 동시에 또는 그 이전부터 바람을 피우던것으로 해석하여 나혜석을 감싸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1928년 나혜석이 최린과 파리에서 먼저 불륜을 시작하였고 이를 알게 된 후 김우영은 그녀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김우영은 부산으로 귀국 후 나혜석과의 사이는 소원해진 채 다른 여자와 살림살이를 차렸고, 이후 나혜석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이에 나혜석은 김우영이 결혼 전 "평생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조건을 어긴 것으로 보고 이혼을 거부하였지만, "이혼 불응 시 최린과의 간통에 대한 고소를 진행한다"고 말하며 결국 이혼하게 된다. 즉 김우영이 먼저 바람을 피우거나, 동시에 바람을 피우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7. 여담[편집]

  •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다.[17] 그리고 나혜석의 막내아들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김건이다.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나문희가 그녀와의 일화를 짧게 얘기했는데, 베이징에서 태어난 나문희가 5살 때 가족들과 함께 수원 본가로 갔을 적 본 나혜석은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온몸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 나혜석의 작은오빠인 나경석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이며, 영문학자 나영균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집안.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남매의 부친인 나기정은 친일파로 평가를 받는다. 나혜석 집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카인 나영균의 저서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에 나와 있다. 링크
  • 프랑스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시인이자 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 피아니스트 쇼팽의 연인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와 비견되기도 한다.
  • 소설가 염상섭 1924년에 펴낸 단편집 <견우화> 표지엔 소담한 나팔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혜석이 그린 것이다. 염상섭은 그녀과 친하게 지냈는데, 한때 나혜석을 흠모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해바라기(1923)를 쓰기도 했다. 내용은 신여성이 연애와 결혼을 통해 겪는 가치관의 갈등이다.
     
  • 수원시에서 홍난파 기념사업 이후 수원 출신 예술인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현재 수원시 행궁동 쪽에는 나혜석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고, 인계동에는 '나혜석거리'를 지정했다.
  • 능력있는 여자였으나 개인적, 환경적, 사회적인 편견과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 여성의 재능을 가리켜 '나혜석 콤플렉스'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나혜석의 시와 그림은 후대에 남아 감명을 주고, 선구안을 가진 조선 첫 페미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
  • 나혜석은 '모된 감상기'라는 수필에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다.”라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설명한 발언을 잡지에 기고해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었다.[18]
  •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하였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상 출장이 아니라 개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남편 김우영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되고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19] 남편과의 세계일주 여행 중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불륜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김우영과 이혼했다. 그런데 막상 이혼 후 최린은 나혜석을 떠난다. 그러자 나혜석은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죄라는 당시 돈 12,000원의 소송을 걸었고 친가에서는 그녀가 낳았던 아들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 활기차고 재능 많았던 前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고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나혜석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집안에서는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하여 일본 유학 중인 나혜석의 학비지원을 끊었는데, 그녀는 직접 학비를 벌어 복학했다. 그 뒤 자신의 변호를 맡은 김우영의 열렬한 구애에 나혜석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는데,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고 오픈메리지 형태로 상호 합의하에 관계를 이어 나간다.
  • 일각에서는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시점과 최린을 고소한 시점이 그들이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하며,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20] 사실 나혜석은 1920년대에 비밀리에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으로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 기사
  • 나혜석의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김우영은 나혜석을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는데 제3자나 후대 사람들이 더 나서서 관심을 가지는 격이라고 언급했다.[21] 이를 김진 전 교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던 마음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그는 어머니를 회고하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기사 책 제목은 <그땐 그 길이 왜 이리 좁았던고>이며, 나혜석의 글귀에서 따왔다고 한다.
  • 그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22] 역시 결혼할 때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집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나혜석의 말년 모습을 목격했으며 여기에 그 자세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기사에 따르면 아예 외면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작은오빠 나경석이 워낙 나혜석을 아꼈기 때문에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나영균 박사의 모친, 즉 나혜석의 올케는 이를 안타까워해서 나경석이 집에 없을 때 몰래 집에 들여다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파킨슨병으로 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일주와 유학 등으로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집에 미국인이 왔을 때 통역을 해 주기도 했다고.
  • 1931년 5월에 개최된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현대에는 여성 성상품화 논란으로 페미니즘 진영의 비난을 받지만[23], 초기에는 여성참정권, 여성의 사회진출을 도모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 신사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불교를 믿는 불자임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래서 나혜석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에 저항한 예술가로 평가되는 부분도 있다.[24] 일제강점기 후반에도 나혜석은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나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매우 드물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창씨개명만으로는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점이 재평가되어 수원시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객관적인 자료 및 증거가 부족해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점, 친일 논란과 관련하여 관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25]
  • 나혜석은 이혼과 자신의 불륜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출판했다. 이 때문에 전남편 김우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변호사로서 사실상 일을 하지 못하고[26] 다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27]
  • 나혜석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적인 여성임이 맞지만 너무도 진보적인 언행과 이에 반대되는 행적이 당시와 지금의 대중들에게 오히려 지탄받는 점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조선 여자 가운데 뼈대있는 부잣집 명문가 가문에서 태어나 돈 걱정없이 일본으로 유학 후 일본 명문 여자미술대학에서 개화된 서양문물을 접하였으며,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외교관+변호사 인텔리 남편을 만나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것과 불어, 독어, 영어, 일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그녀가 접한 사회는 100년 후 현재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들도 누리기 힘든 혜택인데 폐쇄된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바라본 나혜석은 신여성을 뛰어넘어 발언에 큰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남편인 김우영에게 결혼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들은 '자신을 평생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부모 봉양과 육아를 강요하지 말 것', 그리고 '자신의 약혼자였던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줄 것"이었다.이와 같은 조건과 함께,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고흥으로 신혼여행을 가 남편과 그 무덤을 참배하면서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혜석이 자신의 자식을 두고 한 공개적인 발언은 현대인의 선진적 기준으로는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아동인권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에는 더했을 것이다.[28]
  • 2020년 수원에서 나혜석의 '독립운동 미화' 논란에 대한 토론의 장이 열렸다. 장정희 수원시의원은 "이 자리에서 나혜석에 대한 논란을 끝내자는 것이 아니라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객관적인 의견을 나눠보자는 것"이라고 토론회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한동민 나혜석학회 총무이사와 김경호 전 뉴시스 기자가 발제자로 나와 나혜석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한 총무이사는 "나혜석은 수원에서 손꼽히는 가장 역사적인 인물"이라며 나혜석이 김마리아,황에스더 등과 함께 3·5 이화학당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나혜석이 옥고를 치를 당시 '혐의를 부인했다', '동료를 밀고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무죄방면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독립운동가' 말고 뭐라고 해야하나"라며 "나혜석이 5개월동안 옥고를 치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도 했다.
김 전 기자는 "나혜석이 투옥됐을 당시 검찰 신문조서에는 만세시위를 벌였냐는 질문에 '나는 안 했다'고 부인했다. 수원시는 나혜석 관련 책에서 그를 '독립운동가'로 미화하면서 이런 내용은 넣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나혜석을 명확하게 독립운동가로 볼 것이면 '팩트'가 있어야 한다. 옥고를 치른 이후 나혜석의 행보는 독립운동가라고 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남편과 러시아, 프랑스 등 해외여행을 하고, 친일파와 어울렸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혜석을 '친일파'로 명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제로부터 '호가호위'했다는 것이 중요한 대목"이라며 "인물의 양면을 다 기록하지 않고 한쪽만 보여주는 것은 왜곡이다. 수원시가 전시, 출판 등 예산을 써서 하는 활동에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팩트'를 검증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토론자로 나선 윤경선 수원시의회 의원은 "독립운동가라는 단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정부에서도 나혜석에 대한 독립운동가 평가를 보류했다"라고 설명했다. 윤 의원은 "수원시라는 공식적인 기관이 시민의 세금을 써서 인물을 기릴 때는 수원시민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나 여성운동가가 아니라 화가나 작가로 살아온 나혜석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며 "이미 나혜석은 작가로서 분명한 자기정체성이 있었다. 굳이 논란 속에서 나혜석에게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라는 호칭이 과연 영예스러운 것일지 의구심이 든다"라고 말했다.출처
  • 2021년 12월 30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그녀의 생애에 대해 다루었다. 방송에는 앞서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모(母) 된 감상기' 또한 소개되었으며, 그녀의 말년과 관련해서 두 조카인 나영균, 나희균의 증언이 공개되기도 했다. 말미에는 게스트[29]들이 앞서 언급한 그녀의 자작시 '인형의 가(家)'를 낭독하기도 했다.방송 영상 물론 사건전문프로지 조선시대관련 프로는 아닌지라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거나, 환향녀의 유래를 틀리는 등 소소한 오류들이 보여진다. 또한 그녀의 남편 김우영이 첩을 만든 것은 나혜석의 불륜이 들통난 이후인데 이 전후관계를 생략하고 마치 김우영에게 원래부터 첩이 있던 것처럼 설명하거나, 자식들이 그녀와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지 않고 시가의 반대로 자식들을 못 만났다고 말하는 등 나혜석의 흠이 될만한 부분들은 숨기는 편향된 부분들이 드문드문 존재한다.
 
  • 학계로부터 신여성으로 불리는 그녀지만, 아동 학대라는 오명의 꼬리표로 인해 현대 대중의 평가는 호불호가 있는 편이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등의 "모성애를 강요하지 마라"는 취지의 발언을 과격한 어조로 잡지에 기고하곤 했다. 당연히 이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하필 나혜석같은 유명인이 잡지같은 매체에 기고를 하여서 그 자식들은 "제 엄마한테 악마 소리 들은 애들"이라는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최린을 포함한 잦은 외도 등으로 인해 자식들은 어머니를 좋게 보기 힘들어했으며, 오죽하면 아버지가 후에 사귀기 시작한 첩을 친어머니보다 더 좋은 어머니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나혜석의 행실은 위 최후 항목에서 보이듯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고 자라 가부장제를 비판하며 유명해진 그녀가 정작 자신의 자식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줬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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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용산경찰서 소재지[2] 큰오빠인 나홍석의 손녀다.[3] 차미리사와 나혜석은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전신인 조선여자교육회 설립에 참여한 적 있다.[4] 나혜석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기독교계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시초는 바로 김활란이다. 나혜석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김활란의 회유를 거부했다.[5]  여자미술대학. 일본의 명문 미술대학 중 하나로, 약칭으로는 '조시비'라고도 부른다.[6] 당시 여자미술학교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었던) 양재나 자수를 전공하는 학생이 많았다.[7] 나계석의 남편은 당시 수원부 유지였던 경주 최씨 기환.[8] 서녀인 나계석에게는 신교육을 시키지 않았다.[9] 후술할 결혼 뒤 임신과정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으니 말이다.[10]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이화학당 등 여러 근대 여학교에서 금혼 학칙을 제정했다.[11] 여러번 결혼을 얘기했지만 나혜석이 모두 거절하고 미뤄버리자 화가난 아버지가 유학자금을 끊어버리기까지 해서 1년간 휴학하고 다시 다녀야 했다.[12] 1926년에 결혼했다. 김우영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일본 외무성 관료가 된 인물로, 나혜석의 세계일주도 사실 남편이 일본 외무성에서 포상휴가로 받은 것을 부부동반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13]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러했듯 남성의 첩 소유나 불륜은 법적으로 처벌이 없는 반면, 여성의 경우엔 이가 불가하여 유부녀와 간통남의 처벌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14] 훗날 꼬꼬무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61세 노인 심영덕'으로 입소한 탓에 그 누구도 그녀가 나혜석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후 '나고근'으로 이름을 고쳐서 생활했다고 한다. 앞서 어린시절 문단에 서술되어 있듯이 나혜석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름이었는데, 그렇게 소중한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씁쓸한 점.[15] 이 당시에도 근대적 민사법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므로 이혼은 가능했으나 경제력의 부재, 가혹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스스로 주입된 가부장적 의식 탓에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다. 친정으로 가는 것도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때는 출가외인이며 지금도 미흡하지만 그 때는 보육시설 자체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이야 아이 돌보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혼자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를 돌보면서 생계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어린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방에 감금해 두는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망사건도 흔히 일어났다. 지금만 해도 부득이하게 아기들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일하러 가는 제3세계 부모들이 흔하고, 우리나라도 80년대 화재로 방에 감금되어 있던 어린 아이들이 사망한 혜영 용철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소재로 정태춘이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16]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그 '노라'가 맞다.[17] 나혜석의 큰오빠 나홍석의 손녀. 나문희의 아버지 나홍석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에게 입양되었다. 당시에는 자손이 없으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녀 많은 친척 쪽의 아이를 양자로 호적에 올리는 게 자주 있는 일이었다.[18] 이에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남자는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최대 의무인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반박글을 냈고, 나혜석은 ”당신이 능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고 재반박을 했다.[19] 영친왕 이방자 내외의 경우는 일본 정부의 공무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다녔을 때 언론에서 "세금이 심각하게 낭비되고 있다"고 비난이 쏟아졌었다. 사실 세계여행이 말이 쉽지,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귀족이었던 걸 감안하면 여비로 사용된 금액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오늘날보다 교통비도 훨씬 비쌌을 것이고 숙소 역시 게스트하우스 같은 건 없었을 뿐더러 있었다 해도 왕공족(귀족은 커녕 화족보다도 높은 작위다.) 체면상 고급 호텔에서 묵었을 테니...[20] 나혜석은 신사참배를 거부했었지만,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한 경력이 있다는 것과 그녀의 전남편 김우영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이유 때문에 수원 박물관의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제외되고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가 아니다.[21] 본인이 이미 결혼 전 서약을 했고, 최린에게 바람을 피자 본인도 맞불로 다른 여자와 만난것이 미안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22] 훗날 꼬꼬무에 고모의 말년과 관련해서, 동생이자 서양화가인 나희균과 함께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23] 1998년 미스코리아 미 출신의 모델 이정민이 "정치인으로부터 성상납 요구를 받고 회의를 느껴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고 폭로한 적도 있다.[24] 당시 일제는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심지어 투옥이나 순교시키기까지 했던 시절이다.[25] 그녀가 독립운동가라고 얘기하기에도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고, 친일이라고 하기에도 불분명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은 판단 보류의 상태이다.[26]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사생활의 평판이 업무와 직결됐으며, 부인이 바람났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진 김우영에게 아무도 소송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불륜 피해자는 남녀를 막론하고 그냥 안타깝게 여기지만 이 당시엔 아내가 바람을 필 정도면 남편이 어지간히 남자 구실을 못하니 여자가 바람이나 핀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불륜은 그 남편의 평판에도 어마어마한 직격탄이었다.[27] 다만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기 전부터 을 두고 있었다. 이미 나혜석이 바람을 피운 이후이긴 하지만.[28] 만약 "남편은 아내와 자식을 동등한 인격체로, 사랑으로 대해 달라.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외면하거나 버리지 말고 가정의 책임감을 충실히 하는 마음가짐으로 힘써 일해달라." 수준의 주장을 펼쳤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29] 프로그램 내에서는 '이야기 친구'라고 한다. 참고로 이날의 이야기 친구는 장현성 - 이미도, 장도연 - 이현이, 장성규 - 정성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