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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욥바(Joppa, Tel Aviv-Yafo, 야포)

by 이덕휴-dhleepaul 2022. 7. 19.

욥바(Joppa, Tel Aviv-Yafo, 야포) 

 

욥바 항구  (출처-http://cafe.daum.net/graceojun/Qfjn/170)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지닌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이집트어와 아카드어로는 야푸 (Yapu), 아랍어로는 야파(Jaffa)로 바뀌었다. 욥바는 해변 길 (Via Maris) 의 주요 항구로 기능하였다. 투트모스 3세에게 점령 당하기도 했으며, 아마르나 문서에도 언급된다. 구약성경에는 단 지파의 땅의 경계 (수 19:46), 솔로몬 왕이 욥바 항구를 통하여 두로 왕 히람이 레바논으로부터 보내오는 백향목을 수입 (대하 2:10 ~ 16) 하였으며,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하여 욥바에서 배 (욘 1:3)를 탔고, 바벨론 귀환 후 새로이 짓는 여호와의 전 건축 자재로서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입해 들어오는 항구 (스 3:7) 의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사방으로 퍼지자 욥바는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베드로가 이곳에서 이방인 전도를 시작하였고,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행 9:36 ~ 43)  텔아비브 공원 쪽으로 가면 이를 기념하는 성 베드로 기념교회가 서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져버리고 이 항구에서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를 탔고(욘1:3) 지금은 항구로 내려가는 길에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를 상징하는 웃음을 짓는 요나의 물고기 동상이 있다. 현대식 항구도시 하이파가 성장을 하면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욥바는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어갔다. 그러나 1909년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정착하면서 욥바는 팔레스타인 시오니즘의 온상이 되었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을 하는 역사적인 현장이 되었다. 볼거리로는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머물렀던 피혁제조공 시몬의 집과 텔아비브 공원 그리고 1948년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 독립기념회관 등이 있다.

욥바 항구            (출처-http://cafe.daum.net/graceojun/Qfjn/170) 

 

야포항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대성전과 그의 왕궁을 짓기 위해 필요한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실어오면서 항구로서 유명해졌다. 야포는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점령되었다. 예루살렘 대성전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었고(기원전 587/6) 솔로몬이 대성전을 지은 지 5세기가 지난 후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즈루빠벨은 제2차 성전을 재건하면서 필요한 향백나무를 다시 야포 항구를 통하여 운반 하였다. 에즈 3,7 그래서 그들은 석수들과 목수들에게는 돈을 주어 일을 시키고, 시돈인들과 티로인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그들에게 허가한 대로, 레바논에서 향백나무를 베어 바닷길로 야포까지 가져오게 하였다. 기원전 586-332년까지는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지배의 시기로 페르시아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 재위)는 야포를 그의 동맹국인 시돈의 왕에게 양도하였다. 야포는 양대 문명권을 연결하는 국제도로의 교역로일 뿐만 아니라 샤론평야, 유다산지와 평야지대의 완충지역인 쉐펠라 그리고 유다산지와 에프라임산지로 크고 작은 도로들이 잘 연결되어 있는 국내도로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국제도로는 무역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도로로 바뀌면서 파괴의 위험이 공존하기도 했다. 야포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지중해로 이어지는 해상 관문이었다면 벤구리온 공항이 들어서 있는 오늘날의 텔 아비브는 전 세계로 열려있는 하늘의 관문이다. 올드 야포 언덕에 있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 베드로 성당 주변에서 1955-1957까지 텔아비브-야포시의 고고학자인 M.y.Kaplan에 의해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발굴작업을 통해서 5개 시대의 야포 역사를 확인했는데 비잔틴 시대, 로마-헬레니즘 시대, 페르시안 시대, 철기와 청동기의 흔적들을 발굴했다. 보다 흥미로운 발굴은 이른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현지에서 만들어진 세라믹 항아리와 외국에서 수입된 아름답게 장식된 수많은 항아리들이 발견되어 이른 시기부터 외국과의 문물교역으로 발전했던 도시였음이 확인되었다. 

(글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욥바(야포)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야포(Yāfō, יָפוֹ)는 히브리어로 ‘아름답다’는 어원을 가진 도시로,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이스라엘에서 약 4000년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고대 항구도시이다. 셈족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야펫”에 그 기원을 둔다. 이스라엘의 해안선은 중앙 산지와 거의 평행을 이루며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이런 형태의 해안은 자연적인 항구가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고대로부터 입지 조건을 갖춘 좋은 항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야포나 지중해 카이사리아 위쪽에 있는 ‘도르’ 같은 항구는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야포는 이스라엘이 건국 된 후 1950년에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 아비브’(Tel Aviv)와 합병되어 ‘텔 아비브-야포’(Tel Aviv-Yafo)라고 부르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 지중해 연안으로 약 60km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중요한 상업 도시이다. 해안길(Via Maris; Way of the Sea)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로 이집트의 고센 지방에서 시작하여 시나이 반도의 해안 지역을 따가 가자로 이어지며 블레셋 평야를 지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이어진다. 1799년 나폴레옹 군대는 야포를 점령하고 약 4000여명의 포로로 잡힌 무슬림 죄수들을 학살되게 된다. 1831년 나폴레옹 군대는 패배하여 이집트로 물러갔고, 1837년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황폐화 되었다. 1901년에 터키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에 의해 야포의 명물이 된 시계탑이 만들어졌다. 1909년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60여 가족이 야포 북쪽에 있는 모레 언덕에 이주해 오면서 야포는 유대인들의 첫 정착지가 되었다. 1917년 11월 16일 야포는 영국의 알렌비 장군에 의해 수복되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이곳에서 선언되었다. 1950년 4월 24일 야포는 텔 아비브와 합병되었다. 1960년 11월에 올드 야포는 텔아비브-야포시와 정부의 도움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욥바 유적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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