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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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聖喜
1932년 7월 31일 [4] - ?[5]
1957년 제작된 소련과 북한의 합작 영화 <잊지 말라 파주블!>[24] 에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안성희의 장구춤을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상의 2분 22초부터 등장한다. 참고로 영상의 3분 4초부터 화면에 잡히는 노파는 주인공 형제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한 최승희다.
영화는 북한의 배우가 출연을 하고, 소련의 스태프들이 참여를 하여 북소합작으로 제작되었는데, 소련에선 이반 루킨스키 감독이, 북한에선 천상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공인 두 형제로 박학[25]과 신세민[26]이 출연하였고, 상술한 대로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최승희가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하였으며, 황철이 조연으로, 강홍식[27]이 간첩 역할로 출연한다. 평양에서는 1957년 8월 23일에 개봉하였고, 모스크바에선 1958년 4월에 개봉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자료가 누락되어 있지만, 러시아에는 그 자료가 기록되어 있고,[28] 심지어 유투브에는 어떤 이가 이 영화를 러시아어 더빙판으로 올려놓기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누락된 안성희나 최승희의 자료나 혹은 그 외 북한 영화에 대한 자료가 아마도 러시아에 있을 수도 있을 거라 추측된다. 실제로 러시아의 국립 영상, 사진 보관소의 아카이브 목록을 보면 최승희나 안성희의 무용을 찍은 기록 영화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기관에서 이런 자료들의 수집, 발굴이 절실하다.
소련 영화 <일리야 무로메츠(Илья Муромец)>의 한 장면으로 안성희가 검무를 추는 모습이다. 이 영화 역시 유투브에 비록 저화질이긴 하지만 어떤 이가 올려놨으니 감상,
안성희는 이 영화에서 몽골의 무희로 분해 검무를 추는 장면으로 약 1분 가량 짧게 나오는데[29], 이 영화가 개봉된 1956년에 안성희는 모스크바 유학 생활 도중 '집시춤'으로 모스크바 국제무용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는데, 아마도 그 영향으로 이 영화에 우정 출연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리야 무로메츠[30]는 키예프 공국시절의 고전 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저 여성이 안성희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꼭 영락 없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쪽 여성 같다.
최승희 춤 전수자인 재일교포 3세 무용가 백향주[34][35]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안성희의 춤은 어머니인 최승희에 비해 육체적인 기교가 강하며, 그녀의 춤에는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장검무를 중국 경극의 검무에 기법적으로 응용한 춤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춤보다는 러시아의 민속춤과 발레, 중국 경극의 춤을 많이 도입하여 어머니인 최승희와는 상반된 성격의 춤을 추었다는 평가가 있다.
아울러서 안성희 본인은 자신을 최승희의 예술적인 후계자라기보다는 최승희와는 다른 계파의 독자적인 무용가로 여겼다고 하며,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 무용가였다. 반면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했던 최승희는 딸을 자신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 최승희가 딸에게 내심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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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聖喜
1932년 7월 31일 [4] - ?[5]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생 및 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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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31일, 안막과 최승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안승자(安承子)였으나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다. 월북 후에 개명하였는데, 성희라는 이름은 최승희가 출연했던 영화 <반도의 무희> 에서 최승희가 연기하였었던 배역의 이름이 백성희 였는데 그 이름을 따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이며 모친 최승희를 사사했다. 김백봉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어린 안성희는 연습 도중 꾀를 부리다가 최승희에게 맞기 일쑤였다고 한다. 6살부터 모친과 함께 무대에 섰다고 한다.[7] 최승희는 안성희가 아직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아기였을 때부터 "너는 꼭 엄마보다도 더 유명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어야 한다." 라며 안성희를 세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최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무용가 김민자[8]가 이 당시 안성희의 보모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9] 안성희가 조선말을 할 줄 몰랐고, 원래 안성희를 돌보던 가정부가 중일전쟁 발발 후 만주로 간호사 활동을 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김민자가 안성희를 떠맡게 된 것이다.[10]
광복 후 최승희의 모교인 숙명여자중학교[11]에 입학하였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부는 잘했다고 한다. 동기생 중에 안영숙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는데, 안영숙은 안성희의 아버지 안막의 형인 안보승의 차녀로, 안성희에게는 사촌언니가 된다. 사실 나이가 똑같고, 학교에서도 동기생이었지만 안영숙이 안성희보다 생일이 3달 빨랐기에 언니가 되었다고 한다.
최승희는 숙명여중 재학 중에 부모를 따라 월북하였다. 안성희의 숙명여중 선배이자 최승희의 제자로 안성희와 친하게 지냈던 이경자는 안성희의 월북 당시 상황에 대해 "내가 친구 집에 며칠 있다가 오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는데 8월 22일에 편지 1장이 현관에 있어서 펴보니 안승자가 월북한다고 하면서 '다시 남은 짐을 가지러 올 테니, 그때는 외박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써있었다." 라고 회고하였고, 그 편지가 그녀가 안성희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고 한다.
1932년 7월 31일, 안막과 최승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안승자(安承子)였으나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다. 월북 후에 개명하였는데, 성희라는 이름은 최승희가 출연했던 영화 <반도의 무희> 에서 최승희가 연기하였었던 배역의 이름이 백성희 였는데 그 이름을 따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이며 모친 최승희를 사사했다. 김백봉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어린 안성희는 연습 도중 꾀를 부리다가 최승희에게 맞기 일쑤였다고 한다. 6살부터 모친과 함께 무대에 섰다고 한다.[7] 최승희는 안성희가 아직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아기였을 때부터 "너는 꼭 엄마보다도 더 유명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어야 한다." 라며 안성희를 세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최초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무용가 김민자[8]가 이 당시 안성희의 보모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9] 안성희가 조선말을 할 줄 몰랐고, 원래 안성희를 돌보던 가정부가 중일전쟁 발발 후 만주로 간호사 활동을 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김민자가 안성희를 떠맡게 된 것이다.[10]
광복 후 최승희의 모교인 숙명여자중학교[11]에 입학하였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부는 잘했다고 한다. 동기생 중에 안영숙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는데, 안영숙은 안성희의 아버지 안막의 형인 안보승의 차녀로, 안성희에게는 사촌언니가 된다. 사실 나이가 똑같고, 학교에서도 동기생이었지만 안영숙이 안성희보다 생일이 3달 빨랐기에 언니가 되었다고 한다.
최승희는 숙명여중 재학 중에 부모를 따라 월북하였다. 안성희의 숙명여중 선배이자 최승희의 제자로 안성희와 친하게 지냈던 이경자는 안성희의 월북 당시 상황에 대해 "내가 친구 집에 며칠 있다가 오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는데 8월 22일에 편지 1장이 현관에 있어서 펴보니 안승자가 월북한다고 하면서 '다시 남은 짐을 가지러 올 테니, 그때는 외박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써있었다." 라고 회고하였고, 그 편지가 그녀가 안성희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고 한다.
2.2. 활동[편집]
모친과 함께 북한, 중국, 소련에서 무용을 이어가다[12], 1953년 소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로 발레 유학을 떠났다. 1956년 모스크바 국제무용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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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귀국 공연은 김일성이 직접 관람하였고, 공연 후에는 그녀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 공연을 관람하였던 최승희의 제자 김예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 안성희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여러가지의 춤을 추었지만 관객들이 제일 열광했던 춤은 바로 '집시춤' 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훈 배우가 되어 모친과 합작하여[14]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1963년에는 국립평양무용극원[15]의 원장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16] 국립평양무용극원의 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안성희의 나이가 불과 31세였으니, 이건 북한 정부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안성희를 높이 띄워준 건, 후에 다시 서술되겠지만, 최승희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최승희가 없어도 우린 그녀의 딸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용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안막이 카프 계열 문학가들과 함께 1958년 숙청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1964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였지만... 최승희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와 연출을 맡아 1964년 공연했던 무용극 <옥련못의 이야기>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혁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함께 난도질을 당했고, 결국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최승희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무대에 다시 설 수 없게 되었다. 안성희 본인은 안무와 연출만 맡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르기만 했다는 자기비판을 하는 선에서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안성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안무한 <당의 딸>이라는 무용극은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는 어떤 여인의 삶을 그렸는데, 안성희로서는 어떻게든 북한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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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귀국 공연은 김일성이 직접 관람하였고, 공연 후에는 그녀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 공연을 관람하였던 최승희의 제자 김예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 안성희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여러가지의 춤을 추었지만 관객들이 제일 열광했던 춤은 바로 '집시춤' 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훈 배우가 되어 모친과 합작하여[14]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함과 동시에, 1963년에는 국립평양무용극원[15]의 원장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16] 국립평양무용극원의 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안성희의 나이가 불과 31세였으니, 이건 북한 정부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서 이렇듯 안성희를 높이 띄워준 건, 후에 다시 서술되겠지만, 최승희를 견제하기 위한, 혹은 최승희가 없어도 우린 그녀의 딸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용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안막이 카프 계열 문학가들과 함께 1958년 숙청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고, 어머니가 연일 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1964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였지만... 최승희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와 연출을 맡아 1964년 공연했던 무용극 <옥련못의 이야기>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혁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함께 난도질을 당했고, 결국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최승희는 자신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무대에 다시 설 수 없게 되었다. 안성희 본인은 안무와 연출만 맡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르기만 했다는 자기비판을 하는 선에서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에 안성희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안무한 <당의 딸>이라는 무용극은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는 어떤 여인의 삶을 그렸는데, 안성희로서는 어떻게든 북한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2.3. 최후[편집]
그러나 이러한 살아 남기 위한 노력도 결국 부질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모친 최승희가 1967년 숙청당한 후, 결국 그녀도 자취를 감췄다. 그 이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북한 사회의 특성상 연좌제로 같이 숙청당한 걸로 추측된다.
최승희가 숙청될 때 안성희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모친인 최승희를 고발하였고, 모친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소문일뿐,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다만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의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모스크바로 발레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는 서양 무용에 능통했고, 최승희는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조선 사람은 조선 춤을 춰야 한다."[17]고 항상 딸에게 자주 말했는데, 소련파 간부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를 내세워 모녀 간의 갈등을 민족파 VS 현대파의 대립 구도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모녀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두 모녀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고 한다.[18]
최승희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19] , 안성희는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숙청 당시 연좌되어 지방으로 쫓겨났던 최승희의 두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사면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게 1987년인데, 만약 이때까지 안성희가 생존해 있었다면 안성희 역시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질 못한 걸 보면,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안성희가 최승희의 숙청 후에도 남동생 안병건과 함께 피바다가극단에 소속되어 안성희는 무용 안무를 담당하고, 안병건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교포 음악가에 의해 바로 반박되었는데, 이 사람은 "나도 피바다가극단에 가보았지만, 안성희나 안병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10년 넘게 최승희에 대한 자료를 모아 2002년 최승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던[20] 정수웅은 1992년 러시아에서 과거 소련 시절 KGB에서 일했다는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 증언을 한 사람이 정말로 KGB에서 일했었는지도 모르고.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21]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와 안성희는 북창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2]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 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신상옥 감독은 이 수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정보였던 걸 보면[23], 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정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 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 한 예로 1950년대부터 일본에선 최승희의 초청 공연을 계속 추진했고, 최승희 역시 일본으로 공연을 가고 싶어 했으나 공연은 번번히 무산되었고, 한 번은 일본사회당의 대표단이 방북한 적이 있었는데,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의 아무런 허가 없이 만나서 자신의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승낙을 받아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그동안 해왔던 짓들을 볼 때 북한 당국에서 이 면담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한 뒤에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하여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누명을 썼다면 최승희는 '더 이상 북한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느끼고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총살당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있으니,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1979년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지만, 탈북자들의 말이 다 신뢰가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말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최승희는 1969년에 죽은게 확인되엇기 때문에 1979년에 봤다면 거짓말했거나 그냥 딴 사람 본거다. 물론 북한이 발표한 기일 따위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할말 없지만.
또한 안성희가 지방으로 추방된 후 농사를 짓다 탈곡기에 한쪽 손을 잃었다는 말이 있는데, 재일교포 2세 출신의 논픽션 작가 김찬정이 저술한 <춤꾼 최승희>라는 책에 저자와 절친한 사이인 어떤 재일 교포 무용가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하여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까지 북한 무용계에서 직접 활동하던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는 무용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농촌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다가 탈곡기에 손목이 잘려 한쪽 손이 없는 상태이지요." 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고, 또 안성희가 2001년 사망하였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최승희 모녀와 관련된 그들 모녀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들의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들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최승희가 복권되면서 안성희도 현재는 복권되어 최승희의 업적을 논할 때 같이 언급되지만, 최승희가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과 달리 안성희는 안장되지 않았으며 기일도 발표하지 않았다. 최승희에 대해서는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안성희는 최승희와 같이 활동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다.
최승희가 숙청될 때 안성희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모친인 최승희를 고발하였고, 모친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소문일뿐,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다만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의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모스크바로 발레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는 서양 무용에 능통했고, 최승희는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조선 사람은 조선 춤을 춰야 한다."[17]고 항상 딸에게 자주 말했는데, 소련파 간부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안성희를 내세워 모녀 간의 갈등을 민족파 VS 현대파의 대립 구도로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모녀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두 모녀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고 한다.[18]
최승희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19] , 안성희는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 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숙청 당시 연좌되어 지방으로 쫓겨났던 최승희의 두 조카 최호섭과 최로사가 사면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게 1987년인데, 만약 이때까지 안성희가 생존해 있었다면 안성희 역시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질 못한 걸 보면,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안성희가 최승희의 숙청 후에도 남동생 안병건과 함께 피바다가극단에 소속되어 안성희는 무용 안무를 담당하고, 안병건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어떤 교포 음악가에 의해 바로 반박되었는데, 이 사람은 "나도 피바다가극단에 가보았지만, 안성희나 안병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10년 넘게 최승희에 대한 자료를 모아 2002년 최승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던[20] 정수웅은 1992년 러시아에서 과거 소련 시절 KGB에서 일했다는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지만, 역시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 증언을 한 사람이 정말로 KGB에서 일했었는지도 모르고.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21]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와 안성희는 북창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2]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 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확실치 않은 이야기다. 신상옥 감독은 이 수기에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정보였던 걸 보면[23], 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정보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 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 한 예로 1950년대부터 일본에선 최승희의 초청 공연을 계속 추진했고, 최승희 역시 일본으로 공연을 가고 싶어 했으나 공연은 번번히 무산되었고, 한 번은 일본사회당의 대표단이 방북한 적이 있었는데,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의 아무런 허가 없이 만나서 자신의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승낙을 받아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그동안 해왔던 짓들을 볼 때 북한 당국에서 이 면담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한 뒤에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하여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누명을 썼다면 최승희는 '더 이상 북한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느끼고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총살당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있으니, 신상옥 감독의 수기의 내용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어떤 탈북자는 자신이 1979년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지만, 탈북자들의 말이 다 신뢰가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말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최승희는 1969년에 죽은게 확인되엇기 때문에 1979년에 봤다면 거짓말했거나 그냥 딴 사람 본거다. 물론 북한이 발표한 기일 따위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할말 없지만.
또한 안성희가 지방으로 추방된 후 농사를 짓다 탈곡기에 한쪽 손을 잃었다는 말이 있는데, 재일교포 2세 출신의 논픽션 작가 김찬정이 저술한 <춤꾼 최승희>라는 책에 저자와 절친한 사이인 어떤 재일 교포 무용가가 1999년 북한을 방문하여 최승희의 제자이자 당시까지 북한 무용계에서 직접 활동하던 사람으로 부터 "안성희는 무용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농촌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다가 탈곡기에 손목이 잘려 한쪽 손이 없는 상태이지요." 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고, 또 안성희가 2001년 사망하였다고 들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최승희 모녀와 관련된 그들 모녀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들의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들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최승희가 복권되면서 안성희도 현재는 복권되어 최승희의 업적을 논할 때 같이 언급되지만, 최승희가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과 달리 안성희는 안장되지 않았으며 기일도 발표하지 않았다. 최승희에 대해서는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안성희는 최승희와 같이 활동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다.
3. 감상[편집]
1957년 제작된 소련과 북한의 합작 영화 <잊지 말라 파주블!>[24] 에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안성희의 장구춤을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상의 2분 22초부터 등장한다. 참고로 영상의 3분 4초부터 화면에 잡히는 노파는 주인공 형제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한 최승희다.
영화는 북한의 배우가 출연을 하고, 소련의 스태프들이 참여를 하여 북소합작으로 제작되었는데, 소련에선 이반 루킨스키 감독이, 북한에선 천상인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공인 두 형제로 박학[25]과 신세민[26]이 출연하였고, 상술한 대로 안성희가 여주인공으로, 최승희가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하였으며, 황철이 조연으로, 강홍식[27]이 간첩 역할로 출연한다. 평양에서는 1957년 8월 23일에 개봉하였고, 모스크바에선 1958년 4월에 개봉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자료가 누락되어 있지만, 러시아에는 그 자료가 기록되어 있고,[28] 심지어 유투브에는 어떤 이가 이 영화를 러시아어 더빙판으로 올려놓기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한이나 북한에서는 누락된 안성희나 최승희의 자료나 혹은 그 외 북한 영화에 대한 자료가 아마도 러시아에 있을 수도 있을 거라 추측된다. 실제로 러시아의 국립 영상, 사진 보관소의 아카이브 목록을 보면 최승희나 안성희의 무용을 찍은 기록 영화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기관에서 이런 자료들의 수집, 발굴이 절실하다.
소련 영화 <일리야 무로메츠(Илья Муромец)>의 한 장면으로 안성희가 검무를 추는 모습이다. 이 영화 역시 유투브에 비록 저화질이긴 하지만 어떤 이가 올려놨으니 감상,
안성희는 이 영화에서 몽골의 무희로 분해 검무를 추는 장면으로 약 1분 가량 짧게 나오는데[29], 이 영화가 개봉된 1956년에 안성희는 모스크바 유학 생활 도중 '집시춤'으로 모스크바 국제무용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는데, 아마도 그 영향으로 이 영화에 우정 출연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리야 무로메츠[30]는 키예프 공국시절의 고전 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저 여성이 안성희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꼭 영락 없는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쪽 여성 같다.
4. 무용가로서의 평가[편집]
"뛰어난 무용갑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안성희는 뛰어난 무용가입니다."
전황[31]
[32] 구술, 송혜진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48: 전황』,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안성희의 인상은 개성이 강하고, 눈은 크고, 이마는 약간 둥글었으며, 양 볼은 홀쭉했다. 그리고 입술은 매우 얇았고, 표정은 엄숙한 편이었다. 뒤에 안성희 선생이 우리 학교에 나와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무용지도를 할 때에 보면 엄숙했고, 설명이 매우 정확했으며, 그 기교 또한 표현적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우리가 배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창피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역시 안성희의 춤은 절도가 있고, 예리하며,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향란[33]
증언
최승희 춤 전수자인 재일교포 3세 무용가 백향주[34][35]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안성희의 춤은 어머니인 최승희에 비해 육체적인 기교가 강하며, 그녀의 춤에는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장검무를 중국 경극의 검무에 기법적으로 응용한 춤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춤보다는 러시아의 민속춤과 발레, 중국 경극의 춤을 많이 도입하여 어머니인 최승희와는 상반된 성격의 춤을 추었다는 평가가 있다.
아울러서 안성희 본인은 자신을 최승희의 예술적인 후계자라기보다는 최승희와는 다른 계파의 독자적인 무용가로 여겼다고 하며,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 무용가였다. 반면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강했던 최승희는 딸을 자신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 최승희가 딸에게 내심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5. 미디어에서[편집]
최승희를 다룬 창작물들에서 최승희의 딸인 만큼 당연히 등장한다. 1974년 - 1975년 TBC에서 금요 드라마로 방영한 반공 드라마[36] <최승희> 에서는 안인숙이 안성희 역을 맡았다. 최승희 역은 고은아, 이 드라마는 반공 드라마니 만큼 그 내용이 1970년대 버전의 근초고왕 혹은 광개토태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개판이며 심하게 막 나간다. 심지어는 안성희가 한국전쟁 도중 조선인민군 소좌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안성희가 최현[37]의 성노리개가 되는 내용까지 나온다.
1995년 MBC에서 방영한 2부작 특집극 <최승희>에서는 이주영[38]이라는 배우가 안성희로 등장한다. 최승희 역은 당대의 인기스타였던 채시라[39], 채시라와 이주영은 이 드라마의 촬영을 위해 최승희의 수제자 김백봉에게 매일 4~5시간씩 한국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충공깽스러운 건 이 드라마가 광복절 특집극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극단 <미추>에서 2003년과 2004년 최승희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하여 공연한 적도 있다. 연출은 극단 미추의 대표 손진책이고, 최승희 역은 배우 김성녀[40]가 연기하였고, 안성희 역은 배우 최수현이 연기하였다. 이 뮤지컬은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에 대해 조금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는데, 안성희는 항상 어머니 최승희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했지만, 유명인이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런 부분에서 애증이 있었다는 뭐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지만, 물론 실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최승희로 분한 김성녀가 부르는 향수의 무희의 음원이 올려진 링크, 김성녀의 보살춤 의상[41]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인 크리스 마르케가 전후 북한을 찍은 사진 에세이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언급된다.
1995년 MBC에서 방영한 2부작 특집극 <최승희>에서는 이주영[38]이라는 배우가 안성희로 등장한다. 최승희 역은 당대의 인기스타였던 채시라[39], 채시라와 이주영은 이 드라마의 촬영을 위해 최승희의 수제자 김백봉에게 매일 4~5시간씩 한국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충공깽스러운 건 이 드라마가 광복절 특집극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극단 <미추>에서 2003년과 2004년 최승희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하여 공연한 적도 있다. 연출은 극단 미추의 대표 손진책이고, 최승희 역은 배우 김성녀[40]가 연기하였고, 안성희 역은 배우 최수현이 연기하였다. 이 뮤지컬은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에 대해 조금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는데, 안성희는 항상 어머니 최승희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갈구했지만, 유명인이었던 어머니는 딸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런 부분에서 애증이 있었다는 뭐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지만, 물론 실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최승희로 분한 김성녀가 부르는 향수의 무희의 음원이 올려진 링크, 김성녀의 보살춤 의상[41]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인 크리스 마르케가 전후 북한을 찍은 사진 에세이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언급된다.
6. 여담[편집]
이 문서의 내용은 사실 최승희 문서에 있는 내용과 모든 내용이 거의 중복되는데, 사실 그녀의 행적 자체가 남한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대문에, 나무 위키에 작성할 만한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성희에게는 14살 아래인 안병건[42][43]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안병건은 10대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누나의 무용극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엄마, 누나와 같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예술학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의 증언에 의하면 안성희는 바이올리니스트인 백고산을 좋아했으나, 백고산은 김두봉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안성희에게는 14살 아래인 안병건[42][43]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안병건은 10대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누나의 무용극의 곡을 쓰기도 했지만, 최승희가 숙청된 후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엄마, 누나와 같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예술학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의 증언에 의하면 안성희는 바이올리니스트인 백고산을 좋아했으나, 백고산은 김두봉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7. 참고 서적[편집]
- <춤추는 최승희> - 정병호 - 현대 미학사, 뿌리 깊은 나무 - 1995,2004
- <춤꾼 최승희> - 김찬정 - 한국 방송 출판 - 2003년
- <세기의 무희 최승희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 정수웅 - 눈빛 - 2004년
[1] 소련과 북한의 합작 영화 <잊지 말라 파주블!>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안성희, 참고로 최승희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 형제의 모친 역으로 출연하였다고 한다.[2] 벽화의 무희에서의 안성희, 최승희 춤의 전수자인 재일교포 3세 무용가 백향주가 공개한 영상이다. 조총련계 문화예술동맹 무용부 부부장을 지냈고, 10여년간 금강산가극단에서 무용가로 활동하였던 백향주의 부친이 여러차례 방북한 끝에 최승희 모녀의 북한에서의 공연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들을 입수할 수 있었고, 이 영상도 그 중 하나다.[3] 모친인 최승희와 찍은 사진[4] 러시아의 기록[5] 정확한 사망 날짜가 불명확한데, 그 이유는 아래 후술[6] 아기였던 시절 부친 안막, 모친 최승희와 찍은 가족 사진이다. 참고로 사진 속의 피아노는 최승희가 영화 <반도의 무희>에 출연해 받은 돈으로 산 것이라고 한다. 즉 저 사진은 1936년에 찍힌 것이다.[7] 러시아의 자료에 의하면 안성희가 1947년 무대에 데뷔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소련에서의 첫 공연이 1947년이지 않았나 싶다.[8] 제자라고 하지만 최승희보다 불과 2살 어린 1913년생.[9] 최승희가 해외 공연을 다닐 때면, 김민자는 일본에 혼자 남아 안성희를 돌보게 됐는데, 비록 최승희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무용가였던 김민자에게 이는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었고, 이런 그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그녀가 따로 일본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끔 배려해 줘서 그녀는 일본에서 따로 공연을 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최승희는 김민자를 배신자 취급하며 무용단에서 쫓아내고는 이후 그녀를 봐도 무시하며 냉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더욱 안타까운 건, 김민자의 그 공연은 흥행에도 실패하였고 비평에서도 "최승희의 결점만 모아놓은 것 같다." 라는 혹평을 받기까지 하였다는 것. 어쨌건 최승희에게 쫓겨난 김민자는 이후 무용가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꺾어야만 했다.[10] 참고로 최승희는 제자들을 평소에 자기 하녀 부리듯이 마구 부려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했을 정도였다고. 공옥진 여사는 부친에 의해 돈 천원에 최승희의 몸종으로 팔려가 최승희 밑에서 무용을 훔쳐 배웠는데, 정식 제자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몸종으로 팔려온 신세였으니 최승희 밑에서 그 고초는 상당히 심했을 것이다.[11] 지금의 숙명여자중학교 & 숙명여자고등학교. 당시의 중등교육기관은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쳐서 '중학교'라고 했다.[12] 안성희의 검무를 그린 그림엽서 1950년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13] 1950년 모스크바 공연에서 안성희와 김백봉, 참고로 한국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와 그녀의 제자들은 중국, 소련을 비롯한 해외로 공연을 다니고 있었고, 당시 북한에서도 이를 까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한다.[14] 최승희가 총 감독을 맡고 안성희가 안무 지도를 맡았다.[15] 국립평양무용극원은 국립평양예술대학의 부지 안에 있었는데, 그 부지의 3분의 1을 점유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시설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이 국립평양무용극원은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가 개편된 것으로 추측된다.[16] 조선족 출신 무용가 진향란이 북한에서 무용 유학을 하였고 안성희에게 무용을 배웠다고 한다.[17] 최승희 역시 서양 무용을 배웠고 서양 무용에 능통했지만, 최승희 본인이 추구했던 건 서양 무용과 전통 무용의 융합이었다.[18] 최승희의 조카인 최호섭의 증언이다.[19] 애국렬사릉의 최승희의 무덤의 묘비를 통한 추정, 다만 황장엽은 1969년 8월 8일은 최승희가 숙청된 날이고 실제 사망 날짜가 아니라는 다른 이견을 내놓았다.[20] 이 다큐멘터리는 2002년에 KBS에서 방영되었고, 이후 정수웅은 2004년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최승희> 라는 최승희의 화보집을 출간하였다.[21] 성혜림의 친구였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요덕 수용소에 10년 동안 수감된 적이 있다.[22] 안성희의 남편과 딸 역시 북창 수용소로 끌려 갔다고 한다. 참고로 황장엽은 자신이 안성희의 남편과 친한 사이였다고 언급하였다.[23] 예를 들자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는 증언이 있다.[24] 소련제 <Братья>(형제)[25] 1914년생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다 1948년 이후 월북, 그의 월북 이후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1948년작 <해연>이라는 영화의 필름이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참고로 <해연>은 1948년 11월 21일 개봉하였으나 박학의 월북을 이유로 개봉 도중 필름이 당국에 의해 압수 되었는데, 미군정에서 하던 검열 업무를 정부에서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상의 혼란으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이 <해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영상 자료원은 이 영화의 필름을 일본의 한 고물상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본과 국교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이 필름이 어떻게 일본까지 흘러들어 갔는지도 의문이 드는데, 한국영상자료원의 한 관계자가 추론하기로는 당시에는 국내에 영화 제작 장비나 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군 부대의 장비와 시설을 주로 이용했었고, 아마도 미군 부대를 통해 이 필름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게 아닌가 추측되지만, 정설은 아니다.[26] 이후락이 방북했을 당시 이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배우는 대부분의 출연작에서 맡은 배역이 일본제국 경찰, 변절자, 지주의 아들, 국군 장교 등의 악역이었다고 한다.[27] 최민수의 외할아버지[28] 러시아어 위키백과에도 해당 문서가 있다.[29] 영화 전체에서 보자면 1시간 4분 40초에서 1시간 5분 40초 사이[3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86839&cid=41867&categoryId=41867[31] 최승희의 제자로, 최민수의 외할머니 전옥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1.4 후퇴 당시 월남, 남한에서 최승희의 무맥을 이어 가고 있다. 참고로 전황은 안성희에게 초립동을 배웠다고 한다. 위의 발언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 근현대 예술자 구술채록 연구에서 연구자가 전황에게 "안성희는 뛰어난 무용가였나요?" 라는 질문을 하였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32] 참고로 전황은 월남 당시 조카인 강효실을 데리고 월남하였는데, 이 강효실이 바로 최민수의 어머니이다. 삼촌과 조카 사이라지만 전황과 전옥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전황과 강효실도 겨우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삼촌과 조카라기보다는 마치 오누이처럼 지냈다고 하는데, 강효실은 부모의 이혼과 함께 어머니와 헤어져 아버지 강홍식과 함께 평양에 살고 있었고,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여 삼촌을 따라 월남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황이 아니었다면 최민수는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강효실의 두 남동생은 안타깝게도 같이 월남하지 못했고, 전옥은 평생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33] 앞의 각주에 언급한 것처럼 중국 조선족 출신 무용가로 북한에서 무용 유학을 하였고, 안성희에게 무용을 사사했다. 그녀가 말하길 다른 교수들이 가르치는 춤과 안성희가 가르치는 춤에는 다른 점이 많았으며 그 수준 차이는 넘사벽이었다고 한다.[34] 참고로 전황은 백향주가 추는 초립동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백향주가 추는 초립동이 자신이 안성희에게 직접 전수받은 초립동과 전혀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북한에서 최승희와 안성희의 숙청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들의 춤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아 춤이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35] 국내에서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라 할 수 있으며 최승희의 평전 <춤추는 최승희>를 저술한 무용평론가 정병호는 백향주의 공연을 관람하고 "강렬한 시선, 맺고 푸는 동작 구사, 볼륨 큰 동작 등 백향주의 춤에는 최승희의 춤의 원리가 녹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최승희춤 원형의 복원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백향주식으로 풀어낸 최승희춤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라는 평가를 한 적이 있으며, 백향주 본인은 자신이 추는 최승희 춤은 현란한 기교를 가진 안성희의 춤체가 많이 반영되었다고 자평하였다.[36] 드라마의 기획 의도 자체가 "무용가 최승희가 북괴 사회에서 겪고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그 사회의 배리(背理)를 파해친다." 라고 되어 있다.[37] 김일성에게 끝까지 충성한 김일성의 충신으로 최룡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38] 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국무용을 전공하였다.[39] 극 중 채시라가 최승희의 보살춤을 재연한 모습으로 실제 최승희와 제법 비슷하게 싱크로율이 맞다 보니, 어떤 무지한 똘추 기레기는 최승희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 스틸 사진을 최승희의 사진이라고 올려 놓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었다.[40] 연출자 손진책의 부인이기도 하다.[41] 여담이지만 저 구슬의 원가가 무려 1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당시 50대의 나이였던 김성녀는 최승희를 연기하기 위해 무려 8kg를 감량 하였다고 한다.[42] 안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43] 참고로 안막의 형인 안보승의 아들들의 이름이 안병찬, 안병국, 안병창이고 안제승과 김백봉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이 안병철, 안병주, 안병헌인 걸 볼 때 항렬이 병자 돌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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