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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기독교인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by 이덕휴-dhleepaul 2017. 10. 8.

기독교인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강원돈 (한신대교수/사회윤리)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어 충만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부여된 소질과 역량을 남김없이 구현하여 자기실현의 만족을 누리는 경지를 행복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덕성을 함양하고 발휘하면서 지극한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일러 최고선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최고선은 덕과 행복의 통일일 것이다.

종교인도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서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불교는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하게 하는 욕망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해탈(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고, 노장 철학은 억지와 폭력으로 점철되는 인위적인 것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사물이 제 이치대로 움직이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무위이위(無爲而爲)의 경지를 삶의 이상으로 여긴다.

기독교는 행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교회에 가면 행복을 누리라는 말을 자주 듣고, 축복은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주제들이나 설교 내용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도 사실 따지고 보면 죄로 인하여 일그러지고 파괴된 삶을 온전한 상태로 갱신하고 완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만큼 행복이라는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 글에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추구하여야 할 행복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 그런 행복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를 말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기독교가 말하는 행복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웰빙의 물결

요새는 조금 덜 하지만 한 두 해 전만해도 웰빙(well-being)은 일상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욕망과 그 충족을 규정하는 코드였고, 광고시장을 지배하는 언어였다. 농약을 치지 않은 곡물과 채소와 과일, 성장 호르몬이나 항생제를 투입하지 않고 길러낸 동물들의 고기, 자연산 회, 풍부한 단백질이 함유된 음식, 첨가물을 치지 않은 음료수 등을 위시해서 자연섬유나 기능성 섬유로 만든 옷, 인체공학을 염두에 두고 만든 가구와 가사 제품들, 알레르기나 특히 아토피를 유발하지 않는 마감재로 치장한 주택, 깨끗한 공기, 쾌적한 산책로, 건강, 양질의 치료와 휴양, 실버타운 등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건강과 안락을 추구하고 그것을 누리는 상태를 웰빙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경제성장을 위해 오늘의 복지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저축과 투자, 장시간 노동을 마다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 형편이 조금 나아지니까 삶의 질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지, 정부가 정한 기초생활 수급권자들이나 차상위 계층 사람들, 우리나라 노동인구의 55%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아예 일거리를 찾는 것마저 포기해서 노동인구에조차 포함되지 않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할 것이다. 웰빙이라는 코드가 갖는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서울 강남구의 양재천 남쪽 구룡산 기슭의 퇴락한 비닐하우스 촌이 화면 아래를 장식하고 그 위에 도곡동 타워팰리스 마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멀리 찍힌 사진일 것이다. 비닐하우스 촌의 좁은 골목에서 굴뚝 뒤에 서 있는 헐벗은 소년의 눈에 타워팰리스의 원경은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킬까? 우리 사회에서 웰빙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웰빙의 정치경제학은 많은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뿐만 아니라 요즈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웰빙이 개인 차원의 소비에 국한된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이러한 웰빙을 즐기는 사람들은 웰빙의 생태학적, 공동체적, 문화적 차원들을 시야에서 놓치기 십상이다. 예컨대, 건설업자들과 토건업자들, 부동산 소유자들, 금융자본가들, 중앙과 지방 권력이 커넥션을 이루어 전 국토를 개발 명목으로 파헤치고 바둑판처럼 분해하여 한반도의 생태학적 연관을 파괴하고 있는 판에 나 홀로 쾌적한 생태학적 공간을 구축하며 살아갈 길은 없다. 개인과 그 가족이 깨끗한 공기를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을 웰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통과할 때, 도시에서 업무나 쇼핑을 볼 때, 혹은 지하철을 이용할 때 오염된 공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서울 강남처럼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의 고층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구 밀집 지역의 교통체증과 도시소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동물용 사료를 먹고 자라는 초식동물의 살코기와 부산물이 대대적으로 수입되고 가공되는 상황에서 안전한 먹거리를 섭취하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발상이다. 신자유주의적으로 재조직되고 있는 사회에서 각자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직면한 사람들이 어떻게 공동체 문화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수용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편안한 삶을 꿈꿀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치열한 성적 경쟁에 내몰리고 사교육에 내맡겨져 인성 함양이나 자기 계발, 공동체 훈련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개인 중심의 경쟁 논리 때문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은 끝이 없이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우리가 추구해 온 웰빙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면, 과연 어떤 웰빙을 모색해야 하는 것일까? 웰빙은 말 그대로 좋은 삶,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뜻한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복지와 통한다. 다만 웰빙이 개인적 차원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면, 복지(welfare)는 공동체적이고 공적인 차원의 삶에 연결된다.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모색되기 시작한 공동체 복지는 본래 행복의 추구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비교적 명료하게 정리한 첫 사상가들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 한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가급적 누락자 없이 가능한 한 가장 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상태를 상상한다. 그 때문에 벤담의 말은 마치 공동체주의적 강령이나 심지어 사회적 강령을 담은 것처럼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벤담의 명제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벤담은 행복을 양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재화를 소비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을 행복으로 규정하면, 재화 한 단위를 소비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양은 한 단위의 행복일 것이고, 재화의 소비량을 늘리면 행복의 양도 비례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의 양은 그 사회가 생산하는 재화를 남김없이 소비할 때 얻어진다. 한 사회가 일 년 동안 생산한 재화의 총량이 재화 1백 단위라고 하면, 아무런 저축 없이 1백 단위의 재화를 소비할 때 1백 단위의 행복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A와 B, 두 사람만 있다고 가정하고, 그 두 사람이 생산하는 사회의 총 생산량이 재화 1백 단위라고 한다면, 그 사회가 도달하는 최대의 행복량은, 그 재화가 A와 B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든지, A와 B가 분배된 재화를 남김없이 소비할 때, 획득될 것이다. A가 재화 100 단위를 갖고 B가 어떤 재화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재화가 남김없이 소비되는 한, 그 사회의 행복량은 100 단위가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A와 B가 각각 재화 50 단위를 분배받을 경우에도, 그 재화들의 100% 소비는 그 사회의 행복량을 최대치로 기록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벤담의 공리주의적 행복론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시장에 참여해서 노동소득을 획득하고 그 소득을 지출하여 그 사회가 생산하는 재화를 소비하도록 짜인 시장사회에서 개인 중심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중세의 공동체 질서와 규율로부터 벗어난 개인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한다는 시장사회에서 과연 “행복”을 운위할 수 있었을까? 벤담의 공리주의에는 빈익빈 부익부의 상황에서 분배의 정의를 논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고,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 아래서 공정성을 주장할 바탕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벤담은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가 시장사회에서 어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행복론은 멘더빌의 “꿀벌의 우화”로부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부의 증가를 설명하는 논리를 이끌어내었던 아담 스미드의 주장을 공공정책의 버전으로 탈바꿈하고, 이를 윤리학적 용어로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개개인의 경쟁이 한도를 넘어서고 있는 듯이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별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 같다.

욕망과 행복의 비례관계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만과 불행은 어찌 보면 욕망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병폐일 수도 있다. 따라서 불만을 품지 않고 불행을 겪지 않으려면 욕망을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든지 욕망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찍이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의 능력으로 파악한 우주 만물의 이법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고, 그 이법에 거스르는 욕망 자체를 아예 갖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 평정심을 누리는 것을 좋고 바른 삶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법이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인 삶의 핵심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서양 윤리학의 한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그러나 우주의 법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법에 대한 해석이 분분할 경우에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합의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스토아 철학은 별로 신통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또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성의 지시를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 입장은, 욕망과 그 충족의 자연사에서 이성이 맡았던 역할을 회고해 보면, 비현실적이다.

스토아 철학자들보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훨씬 더 현실주의적인 생각을 하였던 에피쿠로스와 그 제자들은 욕망의 계보학을 작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욕망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아무 이유 없이 출몰하는 비자연적 욕망 등으로 나뉜다. 욕망이 이처럼 분화되는 까닭은 자연적인 것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인위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문명의 발전 때문이다. 그렇게 분화된 욕망들은 사람들을 혼미에 빠뜨리고 헤어 나올 길 없는 그물에 사로잡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자들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것을 주문한다. 오직 신중한 판단력에 힘입어 사람들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욕망을 조절하면서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그 제자들은 욕망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절제에서 비롯되는 지극한 쾌락의 경지(ataraksia)를 향유하는 법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어쩌면 욕망과 그 충족에 관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지혜를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최고선

사람들이 덕을 쌓고 선을 구현하기 위해 애쓸 때, 힘은 힘대로 들고 좀처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덕과 행복이 일치하면 좋으련만 둘은 서로 분열하여 상극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눈앞의 복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덕을 쌓는 일을 고행이라 여기고 이를 회피하기 쉽다. 그러나 좋고 바른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곧 지극한 기쁨이 되는 경지를 향한 인류의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크다.

최고선에 대한 고전적인 명제를 제시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최고선의 법열(法悅)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에 따르면, 신의 요구를 실행하여 신과 하나가 되는 경지가 최고선인데, 신과 하나가 되면서 느끼는 황홀경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크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최고선의 법열을 보증하는 것은 신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다른 관점과 방법을 갖고서 도덕이론을 전개한 임마누엘 칸트에게서도 나타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이율배반에 빠져들고 마는 신의 존재나 영혼불멸과 같은 관념을 실천이성의 이름으로 불러내어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도록 도덕철학의 얼개를 짰다. 그는 도덕법의 요구가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무조건적인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이성적인 인간은 덕의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칸트가 주목한 것은 도덕법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가 당사자에게 큰 손실이나 위험을 가져온다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처럼 덕과 행복의 분열에 직면한 칸트는 덕행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행복이 될 수 있도록 보증하는 존재, 곧 신을 요청하고, 그 신이 언젠가 구현하는 최고선에 영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영혼의 불멸을 요청한다.

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경지로서의 최고선은 윤리적인 삶의 목표이지만, 그것은 역사의 한계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갖고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또한 최고선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은 형이상학의 종언을 말하는 우리 시대에는 조금 궁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성서가 말하는 복된 삶

기독교인이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짓고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성서의 증언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느님은 첫 사람들을 불러 그들을 축복하며 인간생활의 대강령을 선포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발로 밟고 공중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종족의 유지와 인구의 증가, 늘어나는 인구의 부양을 위한 노동,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 공동체에서 상생과 공생의 질서를 유지하는 활동 등을 위임받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삶의 기본 얼개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축복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땅 위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기본조건들을 갖추고, 그 조건들 아래서 삶을 창조적으로 책임적으로 수행하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 아래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에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이 압제와 수탈로부터 벗어나 광야에서 자유를 얻었을 때, 그들에게 가능한 것은 삶을 보호하기 위해 주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일이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의 히브리인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축복이다. 그 축복 아래 있는 삶은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는 삶이다. 만나는 하루에 사람들이 먹을 만큼만 모아야 했다. 그보다 더 많이 모아서 보관을 하면 썩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끓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만나의 속성은 파라오로써 상징되는 물질의 축적과 권력의 독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삶만이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는 삶임을 암시한다. 바로 이 자유가 하느님의 축복 아래서 구현되는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삶은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삶이요, 복된 삶이라 할 만하다.

성서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복되다고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다. 의인은 의를 수행하는 덕을 쌓은 사람도 아니고, 의로움을 그 속성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의인은 하느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아니, 그는 하느님이 손을 뻗쳐서 그분과 바른 관계에 서도록 하는 은혜를 허락받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의는 이처럼 인간과 바른 관계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하느님의 활동에서 빛난다. 하느님은 바른 관계의 창시자이고, 정의는 바른 관계를 가리킨다.

하느님이 바른 관계의 창시자라는 사상은 성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평화가 정의의 열매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성서가 말하는 샬롬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여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졌을 때 그 관계들 속에서 생명체가 누리는 삶의 충만한 상태이다. 바로 이러한 샬롬에 참여하는 사람의 삶은 복된 삶, 행복한 삶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바른 관계들이 쉽게 깨어진다는 데 있다. 창세기 3장은 하느님과 똑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허물어뜨리고, 급기야 땅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인간과 여타 피조물의 관계가 비우호적인 관계로 반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와 똑같은 모티프는 호세아 4장 1-3절에도 나타난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니 저주, 사기, 살인, 도둑질, 간음, 살육, 학살 등의 폭력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지배하고, 이렇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뜨려진 결과, 인간과 여타 피조물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고 만다.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지고, 들질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은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은 씨가 마른다는 호세아의 예언은 관계들의 파괴가 가져오는 파국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복된 사람의 삶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파괴된 이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그 선포에 호응해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에 추종하는 삶을 버리고 180도 방향을 전환하여 동터오는 하느님의 통치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여타 피조물의 관계가 온전하게 되고, 바르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 도래에 관한 예수의 선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의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그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읽는 요즈음 교인들은 마음의 번뇌나 양심의 짐을 주 앞에 내려놓으면 마음과 영혼이 편해 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심적인 상태를 행복으로 부를는지 모르지만, 예수가 이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뜻은 매우 다르다. 그는 당대의 가난한 사람들이 강제노동으로 찌들고 세금과 지대의 부담으로 등이 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강제노동과 세금과 지대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강제노동과 세금과 지대는 예수 당대의 지배체제와 그 배후의 로마 제국을 뒷받침하는 제도였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기존체제를 거부하고 이를 허물겠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그런 선언을 하였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지칭함으로써 그 자신과 세상의 군왕들을 구별했다. 세상의 군왕들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고 그들에게 속한 것을 빼앗지만, 예수는 그러한 지배의 논리를 넘어서서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는 새로운 공동체 관계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예수는 사람들을 그러한 친교의 공동체로 부르면서 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삶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개인의 안빈낙도를 노래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 뒤에 영원불멸의 영혼이 신에 의해 보증되는 최고선의 법열을 누리기 위해 덕과 행복이 분열된 세상을 인내하는 것일 수도 없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세상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투명해지도록 분투하는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삼라만상의 바른 관계들 속에서 생명체가 누리는 충만함을 오늘 여기서 미리 맛보는 삶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권을 아버지께 바쳐서 아버지 하느님이 만유의 주로서 그 영광을 빛내시리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 비전을 갖고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오늘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산상수훈의 팔복 선언(八福宣言)이 말하는 복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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