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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斷頭臺 / Guillotine

by 이덕휴-dhleepaul 2023. 2. 15.


 / Guillotine

1. 개요2. 왜 발명되었는가?3. 각 국가에서의 사용 4.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5. 단두대에 처형당한 인물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기구. 참수형의 발전형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언제부턴가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두대(斷頭臺)라는 것은 그 용도를 보고 의역(意譯)하여 붙인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1738~1814)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이라 부른다.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고, 혁명 초기 '같은 죄에는 같은 벌을' 이라는 주장을 하며 신분차이 없이 사형 방법을 같게 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주장은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당시엔 참수형을 집행할 때 뇌물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위력을 달리하는 관행이 있었는데[1] 단두대는 그런 관행이 거의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평등하다면 평등하다 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자동 참수 기계. 보통 참수형은 그냥 목만 싹둑 하고 자르는 게 아니라 자르는 도부수의 검술 실력이 일정 이상 필요한 고도의 전문직 업무이다. 도부수의 검술 솜씨가 형편없을 경우, 사형수는 목이 떨어지기는커녕 엄한 곳만 애매하게 베여서 뒷통수에서 등에 이르기까지 자상만 여러차례 박힌 채 여기저기 피를 마구 뿌리며 엄청나게 울부짖게 된다.[2] 참수형이 이따위로 집행되면 거의 능지형급 잔인한 형벌이 되며, 말이 '참수'지 목 부위를 패죽이는 형벌로 변하게 된다. 참수용 무기는 매우 무겁기 때문에 단칼에 썰리지 않아도 매우 무거운 둔기로 후려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 이쯤되면 차라리 장살형이 신사적인 수준인 극형이 된다. 단두대는 이렇게 생각보다 힘든 참수형을 쉽게 집행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이다.

우선 칼날 밑 둥근 구멍이 난 틀에 목을 넣고 고정한 다음, 낙하하는 무거운 칼날[3]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으며,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는 데 드는 약간의 노동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하는 정도의 수고뿐, 나머지는 간단한 물리법칙으로 끝난다. 작동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하나, 목이 잘린 후에도 머리는 잠시 더 살아있다는 정황이 있어서 이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다만 덜 잘린 목을 두번 세번 내려치는 것보단 덜 아프겠구나 할 뿐.

또한 칼날도 평면이 아니라 사선이기 때문에 목을 단순히 칼날로 찍는게 아니라 사선으로 베어내게 되어 더 깔끔하게 잘리게 된다. 고기를 썰어낼때 위에서 치기만 하는게 아니라 앞뒤로 칼날을 같이 움직여 썰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 사실 목에는 뼈가 있기 때문에 직선 날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무거운 칼날과 큰 운동에너지를 줘도 한번에 목이 잘리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여러번 사용해서 무뎌진 칼날이라면.

현대에는 일부 동물실험을 위해 이용된다. 윤리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동물실험은 마취제를 이용해 안락사를 시키지만, 마취제를 이용해 안락사를 시키면 뇌에 손상이 가기때문에 이에 치명적인 해마등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피치못하게 이용된다. 척수를 바로 지나가기때문에 일종의 안락사 내지는 경추탈골이랑 다를바없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는 반면 하술한 이유로 안락사라고 보기 애매해 비판받기도 한다.

2. 왜 발명되었는가?[편집]


단두대에 얽힌 여러 가지를 나타낸 카람볼라지(Karambolage)[4] 영상.

분명 단두대라 하면 사람을 더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서 발명되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단두대는 역설적으로 사형수의 인권 평등을 위해서 발명되었다.

'검으로 참수되는 건 고귀하고 평화롭지만 다른 처형은 천박하고 잔학하다'라는 관념은 냉병기가 도태된 18세기 시점에는 이미 수 백 년 전 옛날 이야기라서 별로 상관은 없고,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가 봉건 시대의 잔재로 인해 지방마다 사법 제도가 달랐던 점에 문제가 있었다. 유럽에선 기독교의 영향[5]과 18세기에 퍼진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사형을 현실적으로 폐지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인도적인 방식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었고, 그런 사고의 영향으로 '죄수를 한번에 고통없이 죽일 수 있는' 처형인 참수가 선호받았다.

하지만 봉건 시대에는 각 지역마다 법 체계가 달라서 참수 외에 화형, 능지형 등 별별 처형법이 집행되고 있거나 집행될 수 있었다. 귀족이 처형될 때 참수가 더 많았던 이유는 그것이 딱히 더 고귀하다고 믿어서는 아니고 '상식적으로 더 인도적인' 형을 집행한 것 뿐이다. 프랑스 혁명기는 그런 계몽주의적 이상을 품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던 때였고, 지방의 분권적이고 봉건적인 관행을 파리의 의회에서 분쇄하던 시대였다. 당대 지식인들이 보기에 야만스럽고 구시대적인 다른 처형 방식을 밀어낼 기회였던 것이다.

기요틴 도입을 두고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형 수요가 많다거나 참수가 어렵기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이 논리는 도입목적이 아니라 단두대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논리였다. 위 논쟁이 "전부 참수"로 결정난 후에도 기요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도입 당시에 시민들은 '기요틴으로 처형하면 기존의 일반적인 참수형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점에 반대가 심했다. 그 이유는 유럽을 비롯한 많은 전근대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참수형이든 교수형이든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오락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형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나 참수형이 진행되면 사람들은 사형수의 시신에서 피와 기름 등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참수형이 처형 방법이 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수형을 기요틴으로 바꾼다니까 불만이 심했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마치 현대로 치면 연극이나 영화, 혹은 프로 스포츠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를 설득하는 데 동원된 것이 당시 파리의 사형집행인들로, 이들은 소수의 사형집행인들로는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했고, 실제로도 참수형은 고도의 전문 기술, 처형검과 같은 전문 도구, 집행 시간이 필요하고, 집행인이 직접 목숨을 빼앗아야 하기에[6] 사형집행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처형법이며, 당연히 집행비용과 실패할 확률이 높은 비효율적인 처형수단이었다.[7]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시민들도 납득하여 단두대의 도입이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단두대의 도입은 당시 시민들의 의식과 사형도구의 도입 명분의 합의가 이뤄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기요틴의 용도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로 보이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차륜형, 능지형, 기타 고문을 동반한 처형이 단두대 참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급진적인 진보였다.

3. 각 국가에서의 사용[편집]

단두대 도입은 나름대로 인권과 관련되어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당대의 사회 변화와 함께 급증하던 범죄와 엄벌 분위기가 결합해 사형을 최대한 신속하게, 대량으로 집행할 목적으로 프랑스 및 해외에 널리 보급되었다. 전근대에서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권 의식이 발달하자, 사형을 찬성하더라도 신속하고 고통이 적은 사형집행을 원하는 지식인들의 요구와 여전히 사형을 요구하는 대중과 남발되던 사형의 현실이 합쳐진 결과였다. 살인죄 아동 성범죄 같은 중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에 사형이 적용되지 않게 된 건 유럽에서도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기도 하고[8] 또 애초에 참수형이라는 게 사형 집행 방식 중에서도 전근대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단두대가 근대의 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인데, 생각보다 이게 공식 사형도구로서 역할을 다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공식 사형 집행 도구로서 이용되기도 했을 정도.[9]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사형제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로 느껴질 수도 있을 듯.

3.1. 프랑스[편집]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단두대가 사용되었는데, 특히 자코뱅 집권기에 적극 이용되어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이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여론이 늘게 되자 단두대를 이용한 공개처형은 독일 출신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에게 집행한 1939년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10] 단두대형은 이후 교도소 내의 처형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는데, 이것도 1977년에 강도와 강간, 살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튀니지 출신 사형수 아미다 잔두비(Hamida Djandoubi)의 사형 집행을 끝으로 1981년에 사형 폐지론자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주도 아래 프랑스에서 사형제가 폐지되며 단두대도 해체되거나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2. 독일[편집]


뮌헨에서 쓰던 독일식 단두대 팔바일(모형)

독일에도 도입되었고, 독일은 프랑스 이후로 단두대 사용을 가장 자주 한 국가가 되었다. 독일어로는 팔바일(Fallbeil-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원래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집행하였고, 단두대형은 일반 흉악범에게 집행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범의 처형에도 엄청나게 자주 사용되었다. 유명한 반나치 비밀결사였던 하얀 장미의 단원들도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고, 패전 후에도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중범죄자 처형에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치의 경우 공포를 극대화하도록 피형자를 엎드리게 하는 게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보도록 눕혀서 형을 집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교도소로 사형수를 이송해 처형하는 것도 촉박하고 위험해지자, 아예 처형 시간을 단축하고자 단두대를 탑재한 밀폐 트럭에 사형수를 태워서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물론 나치는 전쟁 초반에 국민들에게 '배신자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는 의미로 조성하고자 총살형이나 교수형 등으로 진행하는 공개처형도 자주 실시했고, 홀로코스트도 초반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주도로 벌어진 바비야르 학살처럼 총살형 형식으로 자주 집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대에 공급할 탄약도 모자란 판에 왜 사형수에게 아까운 총알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고, 교수형의 경우에도 처형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기념품 삼아 병사들이 몰래 찍어간다든가 빨치산이나 레지스탕스 비밀 요원들이 몰래 촬영해가 전쟁 범죄 폭로의 증거물로 사용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렇게 비공개적인 형 집행 위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이것과 비슷한 사형집행장치로는 현재 중국의 이동형 사형집행버스가 있다. 물론 독일의 사형집행 트럭은 단두대고, 중국의 사형집행 버스는 약물 주사형을 집행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단두대 처형을 전문으로 도맡아 집행했던 처형 전문가로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1893~1972)가 있었다. 라이히하르트는 자신이 처형한 3,165명의 이름과 처형 시기를 기록해 놓았는데, 처형된 죄수들 중 대부분(2,876명)은 1939~1945년 동안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막장으로 치달을 때 집행되었다. 이들 중에는 연쇄 살인범 등 흉악범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정치범이나 저항 세력 구성원들이었다. 하얀 장미 단원들의 처형도 라이히하르트가 집행하였고, 나치가 전쟁을 벌이며 유럽 각지를 점령하자 점령지역에서도 단두대를 트럭으로 싣고 다니면서 (주로 나치에 반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의)처형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종전 직후에 나치 부역 혐의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신분이 나치 당국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교도관이 아니라 일종의 특수 면허를 갖고 아웃소싱된 외주업자였기 때문에 엄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얼마 후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Entnazifizierung) 재판을 받고 석방되었다. 다만 라이히하르트는 1933년부터 나치당 산하 자동차 군단, 보훈처, 공공 복지회, 노동 전선 등에 가입해 활동했고, 1937년에는 나치 당원으로 입당한 전력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 무죄 방면은 아니었고 비나치화 심사 기준에 따라 4단계인 단순 가담자(Mitläufer)로 분류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라이히하르트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상주하며 연합군 측 사형 집행관들을 도와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 156명의 교수형 집행 시의 결박이나 발판 레버 조작 등을 담당했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연속 재판인 뉘른베르크 계속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에도 협력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사형 집행 때마다 반드시 연미복, 흰 셔츠, 나비넥타이, 실크햇 세트로 갖춰진 전통적인 집행인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후인 1946년에 만들어져 1949년까지 9번 쓰인 라슈타트(Rastatt) 단두대. 동독에서는 칼날이 무거운 철제 단두대를 사용하였다.

종전 후 몇 년 동안에도 동서독 양측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서독에서는 군정기 프랑스 점령지에서 빌리 파울 헤롤트를 비롯한 흉악범만 처형 전용으로 쓰였고 1949년 살인범 리하르트 슈흐(Richard Schuh)의 처형을 마지막으로 사형제 폐지와 함께 사라졌다. 동독에서는 정치범[11]이나 흉악살인범[12] 한정으로 단두대형이 집행되었으며, 그마저도 사용 횟수가 매우 적었다.[13]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생체 실험 등 반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슈츠슈타펠 단원 호르스트 피셔(Horst Fischer)였다. 호르스트 피셔 처형 이후 단두대가 폐지되었으며 사형 집행 방식은 총살형으로 통일되었다.

3.3. 교황령[편집]


1868년 11월 24일 이탈리아 통일주의자였던 주세페 몬티와 가에타노 토녜티의 처형.[14]

교황령에서도 1816년부터 이걸 도입해서 썼다. 특히 '마스트로 티타'라고도 불렸던 사형 집행인 조반니 부가티(Giovanni Bugatti)가 이것의 대가로 명이 높았다. 훗날 마차텔로(Mazzatello)라는 형법과 병행되는데, 이 마차텔로라는 게 '긴 나무망치로 죄수의 머리를 세게 쳐서 죽이는', 19세기에 존재하기엔 매우 야만적이고 효용도 안 좋은 정신 나간 형벌이었다. 심지어는 잘 죽지도 않아서, 나이프로 쓱싹쓱싹(…)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했다고.[15] 그래서 이 단두대가 훨씬 더 널리 쓰였다. 마지막 처형은 1870년 7월 9일 아가티노 벨로모(Agatino Bellomo)의 처형으로, 교황령에 이탈리아군이 입성하기 꼭 2일 전이었다.

3.4. 벨기에[편집]


겐트 흐라번스테인(Gravensteen) 박물관의 단두대

겐트 안트베르펜 등지에서 도입하여 쓰였다. 1798년 수입(?)한 이후로 1856년까지 단두대 처형이 19차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안트베르펜의 살인범 프란시스 콜(Francis Kol)이었다. 벨기에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에밀 페르파유(Emile Ferfaille)로, 1918년 뵈르네(Furnes)에서 처형당했다. 룩셈부르크에도 도입되어 1821년까지 쓰였다.

3.5. 그리스[편집]


아테네 범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식 단두대

그리스에도 도입되어 1834년부터 1913년까지 쓰였던 적이 있었다. 본토와 달리 날의 모양새가 커터칼의 날같이 생긴 날로 바뀌어 있다.

3.6. 스위스[편집]


1924년 루체른 알트도르프(Altdorf)의 단두대

스위스에서도 도입하였다. 참수검이 너무 잔혹하다고 폐지한 뒤 단두대를 들여온 것인데, 마지막 처형은 1940년에 살인범 한스 폴렌바이더(Hans Vollenweider)가 옵발덴에서 처형된 것이다. 참고로 스위스는 참수검을 마지막으로 처형에 사용했던 곳이다.

3.7. 스웨덴[편집]


스톡홀름 롱홀멘(Långholmen) 교도소의 단두대

스웨덴에서는 딱 한번 사용되었다. 1910년, 살인죄로 사형된 요한 알프레드 안데르손 안데르(Johan Alfred Andersson Ander)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스웨덴은 1866년부터 도끼 참수형을 주로 집행하였다. 이때 사용된 도끼는 매우 커다랬다고 한다. 근대화되는 유럽 속에서 도끼 참수형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도입한다. 마침 딱 한번 사용하고 그해 스웨덴에서 사형제가 없어졌다. 참고로 이 안데르라는 사람이 참 비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인데 사형 날 아침이 되자마자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마치 기쁘다는 듯이 "굿 모닝 에브리바디!"하고 외쳤다고 한다.

3.8. 베트남[편집]

아시아에서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사형 집행에 쓰였는데, 이후 베트남이 독립하게 되면서 북베트남에서는 단두대형 대신 총살형이 도입되었고, 현재의 베트남에서는 약물주사형(군인은 주사형과 총살형 중에서 선택)을 집행하고 있다. 다만, 남베트남에서는 1975년 패망 당시까지 단두대형으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 때 쓰였던 단두대가 아직까지 박물관에 남아있다. 레꽝빈을 비롯한 남베트남 초기 군벌 지도자나 정적들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 처형은 1960년 호앙 레 카(Hoàng Lê Kha)가 처형된 것이었다. 이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아직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할 때 주요 빌미가 되었다. 이 문서의 맨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옛 남베트남 교도소에서 쓰였던 단두대이다.

3.9. 알제리[편집]

알제리 전쟁 때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군을 처형하는 데 썼지만, 베트남과 달리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바로 사라졌다.

3.10. 기타[편집]

중국에서는 판관 포청천을 보듯이, 단두대 대신 커다란 작두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것 같지만, 이는 드라마상에서 처형 장면을 얼버무려 생긴 착각이며, 작두는 실제로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문서 참조. 역시 흔히 쓰인 편은 아니다.

의외로 북아메리카에서도 사용되었다. 1889년 생피에르 미클롱에서 마르티니크에서 대여한 길로틴으로 살인범 조제프 니엘(Joseph Néel)이 사형당했고 그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를 다룬 영화로 2000년도에 개봉한 '길로틴 트래지디(La Veuve de Saint-Pierre[16])'가 있다. 단, 프랑스 교도소가 있었던 마르티니크 과들루프에서는 1965년까지 사용되었다. 누벨칼레도니에서도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적어도 74명이 처형당했다. 푸두체리에서도 사용되었고 타히티에서도 최소 2번 사용되었으며 영화 빠삐용에도 나온 악마의 섬 등 프랑스의 해외 교도소가 있었던 프랑스령 기아나에서도 185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되어 150여명이 처형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령 식민지에 있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빠삐용에도 등장하는데, 이제 막 수감된 죄수들 앞에서 시연 목적으로 과일이 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처음 나오고, 나중에 실제 탈주범이 단두대로 처형되는 장면애서 다시 나온다. 물론 목이 잘리는 것은 비명이 뚝 끊기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미국에서도 1996년 더그 테퍼(Doug Teper) 조지아 주지사가 전기의자를 이 물건으로 바꾸자는 계획을 제안했는데,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4.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편집]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며 단두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임에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는데, 혁명의 시작인 '테니스 코트의 맹세' 당시에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는 등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도 고위직으로 잘 살다가 당시 기준에서 상당히, 그리고 현재 기준으로도 나름 장수한 76살까지 살다 갔다. 기요탱이 이 법안을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그가 인권과 평등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17]

1861년에 쓰인 영국 소설 《필립의 모험》(윌리엄 M. 새커리 지음)에도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보아, 오래 전부터 이런 설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나 유럽에선 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이 워낙에 정설로 전해져서 불쾌해 하던 기요탱 집안은 기요틴이라는 이름을 바꿔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하면서 성을 아예 갈아 버렸다고 한다.

사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외과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51~1825)이다. 처음에 불리던 단두대의 이름인 루이제트(louisette)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루이는 아이디어를 고안했고, 다른 6명의 기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만들고 개량하여 완성한 것이다. 물론 루이를 비롯하여 7명 어느 누구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다들 제 명대로 살다 갔다.

또한 발명자가 쳄발로 피아노를 만들던 악기장인인 토비아스 슈미트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슈미트는 발명자는 아니고 기요탱의 제안과 루이의 설계를 받아서 맨 처음 단두대의 원형 1호를 만든 제작자이다. 즉, 전술한 기술자 6명 중 한 사람이며, 최종적으로 루이가 슈미트의 도면을 채택하여 단두대의 원형 1호를 선보인 것이다.


단두대의 칼날 부분의 문제를 지적하는 루이 16세(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이다)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 말고도 있다. 처음 개발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앙이었는데, 기요탱 박사는 이것을 국왕의 측근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 힘 안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시찰하게 되었는데, 반월형 칼날을 본 루이 16세는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 죽을 뿐더러 처형했을 때 죄수가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칼날로 교체하도록 하여라."라고 명령했다. 이는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에 취미를 두던 루이 16세의 전문가적 조언이었다. 쉽게 말해서 단두대의 최종 디자인 감수자는 루이 16세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은 어쩌면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물론 이는 왕실 일화 또는 야사일 뿐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는 아니라는 말도 있다. 참 공교로운 일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나마 적은 고통 속에 죽었을 것이니 루이 16세 본인에게는 결과적으로 반월형 칼날에 처형당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족으로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바 없지만, 공포정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던 이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던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조르주 당통의 예를 들 수가 있다. 혁명 당시에 자코뱅 당을 이끌던 수장격인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정치하는 자리에서는 극단적이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으며, 귀족들은 물론이고 동료 정치인들까지도 반혁명분자로 의심된다면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처형시켰다. 결국은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재판에 회부되고 권총자살도 실패로 돌아가[18] 최종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이자 공포정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생 쥐스트는 '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을 정도로 냉혹했는데, 처음엔 국민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찬 발언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혁명에 방해만 된다면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며[19] 극단적인 흑백논리까지 펴는 선동자로 흑화하였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더러 우유부단하다면서 더욱 열심히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도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테르미도르 반동 때 자신이 그토록 애용했던 단두대로 끌려가 공개처형 당했다. 국민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이끌던 조르주 당통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와 같이 활동했는데, 그 역시 극단적인 공포정치 지지자이며 사람들을 잡아다 처형하는 데 앞섰다. 그러나 당통은 뇌물수수 혐의와 반역 혐의로 인해 이들보다 먼저 단두대로 올랐고, 처형날 로베스피에르에게 "다음은 귀하의 차례다."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기고 단두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론은 단두대를 개발한 자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낭설이지만, 단두대를 앞장세운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당통 같은 권력자들이 결국 자신들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는 것은 후대에 남겨준 중요한 교훈이다.

여담으로 사형기구의 창시자 본인이 그 사형기구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의 원조는 팔라리스의 황소다.

5. 단두대에 처형당한 인물[편집]

6. 기타[편집]

  • 프랑스 혁명 아이콘(?)이다 보니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의 100% 등장한다. 길로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걸 소재로 한 보드 게임도 있을 정도.
    • "Heads will roll"라는 어떤 실수로 여러 명이 잘리는 걸 뜻하는 영어 표현은 단두대 밑에 있는 바구니가 꽉 차서, 말 그대로 머리가 굴러다니는 장기자랑스러운 상황에서 나왔다.
    • 단두대에 사용되는 날은 그 무게가 수십kg에 달하며 100kg가 넘는 것도 존재한다. 날을 이렇게 무겁게 하는 이유는 이게 사람이 내리쳐서 참수하는 게 아니라 중력의 힘을 빌어서 날이 낙하하면서 참수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날이 너무 가벼우면 사형수의 경추뼈가 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두대의 날은 상당히 무겁다.
    • 단두대는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목만 집어넣는 단두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목과 손을 같이 넣는 단두대가 있다. 목만 잡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하나만 있고 손도 같이 집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3개 있다. 후자로 참수당하면 목만 아니라 손도 같이 잘린다. 아마 후자가 나온 이유는 사형수가 살고 싶어서 자꾸 단두대를 열고 단두대에서 목을 꺼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그러던 와중에 프랑스 왕과 왕비가 이걸로 목이 베어진 게 소문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장난감까지 나왔는데, 그것도 어이없게도 진짜 칼날을 넣은 작은 단두대 미니어처였다! 이 정신 나간 물건은 인기리에 팔렸는데, 당시 아이들이 벌레를 잡아 이걸로 베어 죽이는 장난을 치는 데 쓰기도 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넣고 놀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반발을 일으켜 결국 허겁지겁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아들에게 선물할 단두대 장난감을 사주려고 했더니 제조가 금지되어서 찾기 어렵게 되자, 어머니에게 어찌 구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가 호되게 꾸짖는 편지를 받아 사과하는 편지로 답장했다는 일화가 있다.
  • “(너는) 누워서 죽지는 못할 거다”라는 악담은 대부분의 사형이 사람을 세우거나 앉힌 상태에서 집행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런 식으로 악행을 저지르다가는 반드시 사형당할 거다”라는 의미이다. 단두대는 이에 대한 단 둘 뿐인 예외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약물주사형). 사실 단두대을 이용한 사형 집행도 거의 대부분 사형수를 엎드리게 한 채로 집행한다...
  • 한국에서는 절박한 경기를 두고 단두대 매치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기동전사 V건담 잔스칼 제국이 집행하는 형벌이다. 다만 자주 집행되지는 않는다. 작중 단두형을 집행한 집행인은 상부의 허가 없이 단두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좋지 못한 꼴을 당해야 했다. 자세한 것은 파라 그리폰 문서 참조. 애초에 광기에 미쳐 날뛰는 작품이긴 하지만 우주세기에...
  • 캐리비안의 해적 5에는 잭 스패로우 사형 집행 도구로 등장한다. 집행관이 '넌 뭘로 죽을래? 교수형? 총살형? 아니면 신형 기요틴?'라고 선택지를 주자 잭이 '기요틴? 불어인가? 난 프랑스가 좋아, 마요네즈도 만들었잖아.' 라고 대답한 것. 그 직후에 집행관이 단두대를 보여주자 기겁하며 말을 바꾼다(...) 결국 잭을 구하러 온 부하들이 발포한 대포알에 집행대가 무너지면서 잭은 단두대 자이로스윙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 대영제국 정부는 단두대를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전술한 카람볼라지 영상에도 영국은 교수형 밧줄로 그들의 뚝심을 지켰다고 나온다. 고작해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치기 한참 전 잉글랜드의 기벳(Gibbet)이나 스코틀랜드의 메이든(Maiden) 같은 원시적인 기구들이 몇 번 쓰이고 만 것이 전부이다. 물론 이 원시적인 기구들이 기요틴을 발명하는 데 참고용 토대가 되긴 했다.
  • 한국의 PLAYERUNKNOWN'S BATTLEGROUNDS 아마추어 팀 이름이기도 하다. APL 파일럿, PSS 베타, PWM 파일럿 본선에 진출했었고, 팀 리빌딩 이후 ASUS의 네이밍 스폰싱을 받아 ASUS ROG Centurion으로 팀명 변경. 에란겔의 벙커 서쪽 ㅛ자 도로 가운데 푹 파인 지형을 프로들은 단두대 존이라고 부른다. 본래 방어에 적합한 지형으로 유명했는데 스크림에서 단두대가 자주 이용해서 단두대존이라는 명칭을 얻은 듯.
  • 공포게임 Granny에도 단두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목을 자르는 용도뿐만 아니라 과일을 자르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신살자 제5석 리베르테의 신살기가 기요틴인데 단두대를 소환하여 공격한다.
  • 마지막으로 단두대를 사용한 년도에 스타워즈가 개봉했다
  •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다리우스의 궁극기 명칭이 녹서스의 단두대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을 내려치듯이 위로 높게 점프해서 도끼로 상대 머리를 내려찍는다.

7. 관련 문서[편집]

 
 
장흥공원묘지 다하다
 
 
www.dahada.net
경기북부지역
 
경기남부지역
 
경기서부지역
 
경기동부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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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은 두꺼운 뼈인 척추가 지나가기 때문에 쉽게 잘리지 않는다. 한 번에 잘리면 깔끔하게 죽겠지만 한 번에 못 자르면 두 번, 세 번, ⋯ 하다가 매우 지저분해지며, 당연히 이렇게 되면 사형수는 훨씬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이 때문에 실력있는 사형 집행인을 뇌물을 주면서까지 고용하기도 했다.[2] 당장 앞다리 같은 덩어리 돼지고기도 일반인은 칼질 한번에 두동강 내기 매우 어렵다. 근데 살덩이도 아니고 두꺼운 척추뼈가 지나는 부위가 목이다. 즉, '단칼'에 두동강 내는건 매우 어렵다. 게다가 참수검이나 참수도끼는 특정 물질을 절삭하는 것에만 특화된 무기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겁다. 그래서 휘두르기도 일반적인 도검보다 훨씬 어렵다.[3] 약 4킬로그램짜리 칼날에 30킬로그램짜리 무게추(칼날 위의 쇳덩어리 부분)를 달았고, 약 4미터 높이에서 낙하시킨다.[4] 간혹 그림체 때문에 쿠르트게작트인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르다. 물론 카람볼라지는 쿠르트게작트와 비슷한 형태의 지식영상이긴 하다. 프랑스-독일 합작이며 공영방송에서도 가끔 나간다고 한다.[5] 가톨릭이 교수형으로 죽으면 지옥가고 참수되는건 고귀한 죽음이란 식의 교리가 있었다는 뜬소문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6] 집행인도 엄연히 인간이므로 인간을 죽인다는 사실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현대에는 사형 집행인들의 죄책감을 줄이는 방법을 여럿 이용하고 있다. 총살형에 참석하는 집행 병사의 소총 중 실탄을 무작위로 지급하거나, 한국의 사형법도 교수형을 집행할 때 집행자 3명이 하나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인 무작위 버튼을 동시에 눌러야 바닥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실탄/진짜 버튼은 공포탄/가짜 버튼과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서 진짜를 집행하는 사람은 그게 자신인 줄 안다'라는 말도 있다.[7] 프랑스, 특히 파리의 사형집행인(대표적으로 샤를앙리 상송)들은 고도의 의학 지식을 배우고 일격사를 위해 검술훈련까지 받는 전문직이지만 그 이전에 단승도 아닌 세습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특히 사형집행이 없는 때에는 의학 지식을 이용하여 부업으로 의사를 하였고 자체 징세권도 있었기 때문에 단두대가 본인들의 직장을 위협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더욱이 당시 사형집행인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었기 때문에 단두대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사형을 받아야 할 죄수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단두대를 사용하더라도 칼날을 내리는 집행 자체는 사형집행인이 했다.[8]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사형 집행은 모두 교수형 총살형으로만 이루어졌다.[9] 원산지 격인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 말(한국으로 치면 박정희 정부 말기)까지도 단두대가 현역이었다.[10] 처형 당시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2015년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마침 파리에 와 있어서 마지막 단두대를 사용한 공개처형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전쟁이 벌어지자 핀란드군에 자원입대했다.[11] 주로 나치의 일원이거나 협조했던 자들, 반정부 인사[12] 주로 연쇄살인범[13] 그밖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은 총살형이나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14] 주세페 가리발디의 입성에 맞추어 무기고를 폭파하려 했으나, 운이 없게도 가리발디가 멘타나 전투(Battle of Mentana) 때문에 제때 교황령에 입성하지 못했는지라 결국 둘 다 잡혀서 사형.[15]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 알베르 드 모르세르, 프란츠 데피네가 사형 장면을 구경하는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국어판에서는 '박살형'으로 번역.[16] 직역하면 생피에르의 과부가 되는데, 위 영상에 나왔듯이 단두대의 별명 중 하나가 '과부(La Veuve)'였다.[17] 본래 기요탱은 예수회 신자로,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혁명으로 인해 전보다 유례없이 사형이 늘어나자 그나마 타협하는 방안으로 돌아선 셈이다.[18] 자신의 턱 밑에 대고 머리 방아쇠를 당겼지만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면서 턱뼈가 박살나는 부상에 그쳤고, 결국 붕대로 턱을 고정한 채로 단두대까지 끌려갔다.[19] 실제로 생 쥐스트는 혁명 초엔 '빵은 인민의 권리'라고 발언하며 혁명에 앞장섰으나, 이후에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혁명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독설까지 할 만큼 극단적인 정치인이 되었다.[20] 미국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던 프랑스의 해군 제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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