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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3-17)

by 이덕휴-dhleepaul 2023. 2. 17.



영적 대각성 설교집 -옥한음목사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3-17)

오늘 본문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을 마태복음 9:9에서는 마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무 공무원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권에 빌붙어 먹고 사는 매국노로 취급되었습니다.

보통 죄인을 지칭할 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직업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그만큼 세리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리 마태를 예수님은 세관까지 찾아와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태는 구원받은 사실이 감사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입니다. 마태의 집에 마태와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는 세리와 죄인이라는 이들 그룹과는 별도로 이들을 멸시하며 자칭 의인이라고 그룹들이 나타는데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비판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 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즉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입니까? 스스로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배하러 나오면서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주님을 사랑했던 사도 바울이 죽기 직전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우리야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자이면서도 날마다 죄를 짓는 죄인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미화하고 보호함으로 남에게 죄인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죄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죄 자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지적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교회 안에서도 죄를 말하면 싫어합니다. 죄를 말하지 않는 교회, 죄를 말하지 않는 설교자를 찾아 다닙니다.

 

미국의 설교자 가운데 노만 빈센트 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가리켜 100만인의 설교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설교집이 불티나게 팔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집을 읽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죄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의 설교를 듣고 설교집을 읽고 감동받은 100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낀 사람은 자신을 개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니까 죄인된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그와 같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였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빈센트 필의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 신앙을 통해 교양이나 얻으려는 사람들. 영적인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 십자가 밑에서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나의 것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도 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하여 교회가 각성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위기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듣기 싫어해도 죄는 죄라고 말하는 교회. 죄인보고 아첨하지 않는 교역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자라고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죄라는 말을 싫어하고 죄인으로 지적받기를 싫어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 헤몬드에 젝 카일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곳은 블루 칼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사람들이 윤리적 개념이 부족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목사님 강대상 앞에 방탄 유리를 설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젝 카일 목사님은 매주일 설교 때마다 날카롭게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어느날 이 설교를 듣기 싫어하던 한 청년이 권총을 발사해 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고 목사님은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가서 “목사님 이제는 죄를 그만 말씀하시지요?” 권면을 했더니 젝 카일 목사님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대상 앞에 방탄 보호막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다시 한 번 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권총으로 저격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젝 카일 목사님은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젝 카일 목사님이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자 그것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교회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120대의 버스가 운행을 할 만큼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현지에 가서 그 교회를 둘러 본 목사님들은 이런 지역에 이렇게 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택가도 아닌 철도 주변에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올 때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죄를 죄라고 가르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그 길로 들어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새 능력을 입게 하고 주님을 위하여 뛰게 할 때에 그토록 엄청난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싫어합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신앙적으로 여러분을 살펴보면 잘잘못이 보입니다. 제가 만일 그 잘못 하나 하나를 다 말해 버린다면 이 교회를 떠나버릴 분도 있을 것입니다.

 

강단에서 목사가 죄를 말할 때에 직접 권총을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열 번 이상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죄인은 죄에 대하여 말할 때 자기 위선, 죄 등으로 인하여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므로 그렇게 좋지 않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내어놓고 반응합니다. 자기 노출을 꺼리는 것입니다.

어떤 흑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난히 흰색을 좋아했습니다. 닦고 바르고 흰색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는 흑인을 주제로 말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검둥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죄인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척 위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만 다루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숨기며 문제삼지 않는 것이 옳은 태도로 취급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병드는 증상입니다. 교인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죄 문제의 심각성을 간단하게 취급해 버립니다. 죄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죄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또 죄마다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법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국가에서 정한 법을 어긴 것입니다. 만일 신호등을 어겼다면 벌금만 내면 그만입니다. 사회적인 죄가 있습니다. 무례한 행동을 통해 비난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사죄하고, 배상을 하면 그만입니다. 개인적인 죄가 또 있습니다. 자기가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표준 미달이 되면 다시 실천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그토록 심각하게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 때문입니까? 다음의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인간의 죄는 신학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죄는 하나님과 그의 법을 어기는 죄를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죄목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절대적인 가치표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절대적인 가치표준을 정한 자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가치 기준을 어기든지 미치지 못하면 절대자를 반항하든지,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 가치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상황적으로, 상대적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다룰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그의 법을 어기든지 무시하든지 하는 게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왜 죄입니까? 여러분! 이 시간 죄를 말하고 있지만 여러분 개개인이 얼마나 ‘나는 정말 죄인이구나’ 느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지 못하고 지은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주셨는데 지식이 없으니 모릅니다. 무지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르니까 죄인이 아니라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불신앙의 죄가 하나님께는 가장 큰 죄입니다. 죄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 죄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죄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고 심각합니다. 아버지께는 사과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는 용서를 빌면 되지만 죄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죄인끼리 죄를 지었으면 나도 죄를 지을 수 있으니까 저 사람을 용서해야지 하면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죄까지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으로 범하는 죄까지도 보십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살피신다고 했습니다. 행동 이전에 하나님은 마음을 문제 삼으십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아셨습니다(창 6:5). 노아 홍수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셨습니다(창 8:21).

사람들은 마음의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의 죄까지를 심판하신다고 했을 때 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3.양심으로만 죄를 깨닫게 하던 시대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성경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 죄, 숨겨진 죄, 마음의 죄를 철저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율법 때문에 죄를 아는 지식이 부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여되어 죄에 대한 지식이 온 이상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을 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0-24)”

예수를 눈으로 보고 듣고 체험하고도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로 고대 사람들보다 현대 사람들은 더 악합니다. 고대는 복음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예수 소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얼마든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서도 죄인임을 깨닫고도 돌이키지 않을 때 책임은 더욱 막중한 것입니다.

 

헬라인보다 유대인들은 죄가 더 컸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풍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았을 때 더 형벌은 컸던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은 더 큰 죄인으로 지옥에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은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적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0.2-0.5%입니다. 1억이 넘는 인구 중 기독교인은 50-60만 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그만큼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인구는 일 천만이 넘습니다.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전도자, 설교자가 있습니다. 알면서 범하는 죄는 사할 길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있는 만큼 우리는 죄를 단순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4.막대한 심리적 피해를 죄는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죄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 국가를 파괴합니다.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은 죄 때문에 와집니다. 불안, 불면, 무력증, 우울증, 열등감, 고독, 증오, 복수심에는 어떤 형태로든 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모글러라는 현대 심리학자는 인간이 고백하지 않고 속죄받지 않은 죄로 인하여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병들어 있는 존재가 현대인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가정 불화의 원인도 대부분 죄 때문입니다. 서구 선진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신과 의사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바로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잠이 안 오고 불안합니다. 죄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 국가를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가 이 죄의 문제를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죄에 대하여 자기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5.최후의 심판 때문에 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1974년 12월 24일에 서울 대연각 호텔에 불이 났습니다. 성탄절 이브의 밤에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호텔은 불구덩이가 되고 아비규환의 지옥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나도 내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그리로 갈 것입니다. 전도서 2:2에 솔로몬은 웃음을 미친 짓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일에 사뭇 바쁘다면 이것은 미친 짓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죄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관계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여야 합니다. 무슨 방법으로든 이 문제는 해결해야만 합니다.

 

17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주일에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잡힌 죄인들-신명기32:35’이라는 설교를 촛불 옆에서 원고지를 들고 읽기만 했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했다고 했습니다. 1600년, 1700년대 그날의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 죄를 그 밤에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그런 갈등, 그런 고통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도 죄사함을 받았으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확신은 열매와 연결되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았다 하면서도 마음대로 죄를 밥먹듯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보아도 모순입니다.

 

죽어 지옥갈 사람의 죄 문제나 구원받은 성도의 죄 문제를 다같이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무 죄없이 나의 죄를 지고 피를 뚝뚝 흘리며 그는 돌아가셨습니다. 짐승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여러 다양한 구원의 방법이 있을텐데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걸까요.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으면 죄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레위기 17:11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죄를 사하는데는 반드시 피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영원한 사망이 왕노릇했습니다. 사망을 쫓고 생명이 오기 위해서는 생명과 같은 댓가인 피가 그것도 죄가 없는 피가 희생되어야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마귀가 죄의 항목을 하나님 앞에 열거하며 낭독해도 “내가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했다”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나의 모든 죄를 씻고도 남음이 있는 보혈의 피입니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근거없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면 하나님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있게 나의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연후에도 경건의 진통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 옆에, 내 위에, 내 아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큰 은혜와 감격 속에 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래야 십자가를 새롭게 바라보게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새롭게 체험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책을 느낄 때마다 ‘너 십자가를 다시 쳐다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날마다 체험하는 감격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일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대통령이 특사로 풀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용서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깊은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불안, 초조, 불평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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