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韓 崇 弘
철학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신학계에서 신학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야기될 때마다 신학의 철학적 사유와 인식을 요청하면서 던져지곤 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한번쯤 스쳐가며 제기되고는 신학 자체의 계시성과 정통성, 그리고 신앙과 경건의 차원에 압도되어 더이상 논쟁의 불씨로 점화 되지 못하곤 하였다. 철학적 신학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은 교권적 지배하에서는 결코 논의 밖에 던져질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에 관하여 보다 정확하게 이해ㅗ진술하므로서 좀더 깊은 신앙의 경건성을 추구하려 한다면, 신학도 철학성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신은 불가시적 존재, 신학적으로는 존재의 근원으로 서술 되어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시간적 차원의 가시적 현실 세계내에 처한 사유자 인간은 영원적 차원의 불가시적 실재 자체를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신에 관해 철학하는 기초적 행위인 것이다. 철학적 신학 자체는 신학의 가장 원초적 원리로 취급되야 한다. 신(Theos)에 관한 말씀(logos) 자체가 철학이기 때문이다. 신에 관한 말씀이 신학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닌한, 철학자들도 신의 존재성과 그 실재성에 관해서 언급하고 규정해 줄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런 의식에서 철학적 신학의 소리는 들려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철학적 신학을 20세기 중기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파울 틸리히(Paul Tillich)가 1940년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개설된 '철학적 신학'이란 새로운 강좌의 주임교수로 탐구와 강의를 하면서 부터 그 개념의 확대가 시작됐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에서 보면 매우 타당하며, 또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현대신학의 석학들은 그 누구도 신학을 철학과 철저히 구별되는 학문으로 취급했을 뿐만아니라, 신학의 원동력인 신앙이 철학의 추진력인 이성에 의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철저히 배척했다. 이들은 신이해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차단하며, 자연신학적 접근이라고 비판하며 부정하기도 했고, 이신론이라고도 몰아부치며 교회권위와 전통의 조명하에서 이단시하거나 추방하려까지 했다. 이렇듯 신학자들은 자기들만이 신에 관해 언급할 수 있다고 역설했고, 이로인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심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열렬한 신앙가요 위대한 사상가인 파스칼(Pascal)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옷안에 새겨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들과 교양인들의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글을 읽으며 놀랬다. 신에 관한 철학적 언급이 이처럼 신앙에 대한 적대 행위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곧 신학이 철학의 신학적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초대 교회사에로까지 소급해서 그 근원을 찾아 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고, 라틴 변증가들 중의 한 사람인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철학은 "마귀의 작품"(Werk der Daemonen)이라고 비판했으며, 루터(M.Luther)는 철학을 "이성의 학설이며 악마의 학설"(Lehre der Vernunft und - des Teufels)이다 라고 비판했다. 그의 이런 철학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과 칼 바르트(Karl Barth)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불트만은 "신앙 밖에서 신에 관해 언급하는 모든 인간적 언급은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악마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르트 역시 신앙만이 신에게로 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역설했다. 철학은 신의 문제에 관해서가 아니고, 헛된 속임수, 마귀, 악마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 해답을 주는것으로 끝을 내고 있다는 공통된 비판이 철학을 부정하는 대다수의 신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혹평은 드물기는 하지만 철학 자체 내에서도 종종 제기되곤 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철학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이며, 또 당연히 신앙의 학문이 아닌한 무신론적인 학문이 여야하기 때문에 철학적 신학이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홀바하 (Baron Holbach)는 신이란 인간이 꾸며낸 환상, 곧 키메라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19세기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는 신을 인간이 꾸며낸 환상(Illusion)으로, 그리고 니체(F.Nietzsche)는 신이란 시인들의 표상이며, 전유물이므로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unsere langste Luge)이다 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20세기의 실존주의 철인 싸르트르(J.P. Sartre)는 "신은 존재하지 안는다"(Gott existiert nicht.)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철학 자체 내에서도 철학이 신에 관해 탐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철학적 신학의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철학적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여기에서 두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철학이 신앙에 대한 극단적인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철학은 신에 관한 언급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상반되는 주장 사이에서의 긴장인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곧 현대 허무주의의 출현을 선포한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명제였다. 만일 철학이 실제로 신의 문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여 탐구영역에서 배재해야만 한다면, 철학은 무신론으로 종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과 이성의 극단적 양자택일 만이 선택할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인가? 이 두가지를 조화ㅗ절충하여 신인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노력은 무가치한 것인가? 신학자들도 철학자들도 극단적 편견 때문에 이 심각한 문제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 답을 회피하려는 것이 올바른 학문의 연구태도 인가? 철학이 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인가?
고대 희랍 철학의 최고 과제는 존재의 근원인 신적 존재에 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였다. 희랍 세계에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 되었다. 중세 철학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신학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중세 시대에서 철학의 기능은 기독교의 신에 관한 존재증명과 인식, 그리고 그 속성을 설명하는 것과 신의 실재를 변론하는 것이었다. 근세 철학에서도 비록 신학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합리주의 사고가 대두 하기 시작했지만, 신에 관한 질문을 근원적으로 밀어낼 수 있을 만큼 무신론적 입장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회의주의자 볼테르(F.M. Voltaire) 자신도 신존재 증명을 시도 했었다. 헤겔(G.F.W. Hegel)은 신이 "철학의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철학에서도 이 문제는 묵살되지 않았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과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끝까지 신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하여 신학과 철학의 울타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처럼 철학은 항상 다시 신에 대한 결정적 입장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것이 철학적 신학을 설정토록 자극했던 것 이다.
철학적 신관념의 역사를 깊이 고찰해보면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신에 관해 언급할 때는 철학적 관점에서 언급했고, 그리고 이런 후에 신을 이해하였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Sokrates) 이전의 철학자들이 이해하였듯이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창조적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일자는 섭리하는 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신에 관해서 일관된 개념 이해를 갖지는 못했다. 한번도 철학은 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 아니 할수 없다. 칸트(I.Kant)는 수백년동안 시도되어 왔던 신존재 증명의 불확고성을 예리하게 증명했다.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에 관한 진술이 다양한 전제를 갖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를 인정하는 한에서 신의 본질과 존재가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 철학자는 다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신학의 논쟁점은 전제의 논쟁점에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철학은 그 역사에서 볼 때 늘 신에 관해서 언급해 왔다. 비록 철학자에 따라 신이란 단어대신 "존재","존재 자체","존재 근원","궁극적 실재","영원자","무한자","일자","세계의 근원" 등등 무수한 용어로 명명 되어졌지만, 어쨌든 철학은 신 혹은 신적 존재에 관해 항상 관심을 갖고 진술해 왔다. 철학적 진술이 진정 올바로 철학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라면 궁극적 실재에 관한 극단적 질문들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철학과 철학적 신학은 같은 토양에 뿌리 박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신학은 외부로 부터, 곧 철학으로부터와 신학으로부터 동시에 공격 받고 있다. 그것은 신학 만이 신에 관한 진술을 할 수 있고, 철학은 신에 관한 어떤 진술도 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신학이 공격하는 이유이다. 이 경우 전통적 신학은 철학적 신학을 철학으로 간주한 것이다. 순수 신학은 철학적 신학이 철학이기 때문에 그 학문성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순수 철학은 철학적 신학을 신학으로 간주하여 철학이 아님을 선언하고 결별하려 한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며 오늘날도 행위하고 있다. '철학한다는 것'(zu philosophieren), 다시말해서 '철학함'(Philosophieren)은 바로 철학의 이러한 존재론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존재(Sein)를 설명함에 았어 다른 차원의 존재, 즉 무(Nichts)를 설명해야하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다시말해서 철학한다는 것은 존재와 무의 사이를 오가며 그 근원을 설명해야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야 말로 근원적 경험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철학한다는 것은 경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철학함은 인간이 종종 그의 본질을 들여다 보고 그 개념을 정의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함은 오히려 인간이 경험한 것을 사유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철학의 근원은 결코 경험과 다른 것이 아니다. 철학함은 참된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투명하게 제시해 줌으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시작한다. 존재하지 안는 무는 스스로 존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이 문제의 심원에 달려있다. 요컨대, 철학적 근원적 경험은 전적으로 세계의 문제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철학적 근원적 경험이란 우리를 기습하는 세계문제에 대한 경험이다.
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에 관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를 설명하는 존재론은 정확이 말해서 인간의 구체적 현실을 초월한 불가시적 실재에 관한 진술이며, 그것에 대한 철학자들의 확신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 각자는 그들 나름 대로 존재론을 갖고 절대적 존재, 곧 완전한 존재를 확신하고 설명하며 믿고 있다. 이런 철학자들의 철학함은 거의 신앙적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이론이며, 철학이고, 양심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신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존재에 관한 지식으로 그 학문성을 출발한다. 다만 우리는 철학자들간에 존재를 설명할 때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점, 곧 너무 극단적이므로 거의 반대적인 진술로 양극단화되는 것을 보면서 존재의 참된 진술에서 존재는 결국 비존재, 즉 무여야한다는 존재론을 읽을 수도 있다.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 존재성을 상실한 것이므로 '참된 있음'이란 없음, 즉 무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도 존재론의 한 표현이다.
신학이 존재를 인격적 본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구속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믿음의 대상으로 신앙화했다면, 철학은 존재를 실체적 본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인식론적으로 설명하므로써 사변의 대상으로 존재화했다.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며, 철학은 사변(이성)의 학문이란 구별점은 존재구명의 방법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신학은 어떤 입장인가? 철학적 신학은 인격적 신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여 그 실재성을 제시하는데 그 학문의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적 신학은 엄밀히 말해서 철학이며 동시에 신학인 것이다.
철학적 신학의 학문성을 명제적으로 진술하면:
1)철학적 신학은 철저히 신학이다. 철학적 신학의 학문성은 신을 학문의 대상으로 갖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만 신에 대하여 신학과 철학적 신학의 접근방법에는 차이가 있는데, 신학이 신앙적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는데 반해서, 철학적 신학은 존재론적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신의 존재를 설명하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적 신학은 신학이다. 이런 입장의 대표자들: 플로티누스, 조르다노 부르노,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쉘링, 헤겔, 슐라이에르마허, 포이에르바하, 니체, 게오르그 레온하드 라부스, 트뢸치, 틸리히, 브른너, 바이쉐델, 코플스톤, 맥쿼리, 크뢰거.
2)철학적 신학은 철저히 철학이다. 이런 입장은 철학과 신학은 완전히 다른데서 출발한다는 전제 하에 철학적 신학의 기능을 신학적으로 전혀 인정하려 하지않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의 신학자들은 철학은 절대적 존재이며 창조주인 신의 본질과 속성을 이성을 통해 설명하려는 오류의 학문이므로 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것은 철학은 오히려 신학의 보조적 역활을 하는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에 처한 신학자들은 신학은 거룩한 학문이며, 철학은 비천한 학문 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들은 신학은 신에 관해서 언급할 수 있으나, 철학은 결코 신에 관해서 언급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입장의 대표자들: 아우구스티누스, 터툴리안, 파스칼, 루터, 바르트, 불트만, 일군의 근본주의 신학자들.
3)철학적 신학은 신학을 철학적으로 방법론화 하는것이며 신을 철학적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신학의 일종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철학적 신학은 일종의 기독교 종교철학으로 취급될 수도 있고, 신지학(Theosophie)으로 취급될 수도 있는 새로운 학문이다. 따라서 철학적 신학을 이런 입장에서 탐구하려 할 때 모든 신학은 결국 철학적 신학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4)철학적 신학은 신학의 이론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모든 신학의 신학적 방법론이 될수 있다. 틸리히가 역설하는 그의 신학 방법론인 질문과 대답의 상관관계 방법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철학적 신학을 그의 방법론으로 적용하여 자기화한 것이다. 철학적 신학은 신학의 모든 대상을 철학화할 수 있는 신학이란 점에서 광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반면에, 순수 신학은 그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을 철학에서 도입할 때 비로서 신학의 학문성이 보장되므로, 본질적으로 철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학문이다. 오늘날 신학을 철학의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대로 철학은 신학을 포함해서 모든 학문의 학문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신학도 철학적 원리를 수용할 때 학문계에서 참된 학문으로서 인정될 수 있다는 과학이론(Wissenschaftstheorie)을 역설한 선언인 것이다. 철학이 배제된 신학, 그 자체는 결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철학적 신학은 그 대상, 곧 신에 관한 진술에 순수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 철학적 신학은 신을 구명하기 어려운 비밀로서, 근원적으로 이미 있는 존재로서, 질문에 대한 응답자로서, 그리고 질문하는 존재자들의 역동적 존재로서 규정한다. 그러므로 철학적 신학자의 신과 교의적 신학자의 신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문제에 대한 근원적 경험의 차이가 아니고, 신과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이 어떻게 인정되느냐에 따라 드러난 차이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철학적인 신이해와 신학적인 신이해의 차이는 서로 다른 신을 대상으로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고, 신은 같은 신이지만 서로 다른 관찰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경험된 것에서 그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상의 진술에서 철학적 신학은 신학이며, 동시에 철학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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