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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by 이덕휴-dhleepaul 2023. 7. 12.

노무현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대전지법 판사를 지냈다.
1978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제13, 15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고
제16대 대통령을 지냈다.
2009년 5월 23일 서거했다

  • 출생-사망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 학력2007년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명예박사
    2006년 알제대학교 정치학과 명예박사
    2004년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과 명예박사
  • 수상2008년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훈장
    2007년 카타르 카타르 독립대훈장 훈장

노무현 전 대통령 다큐

노무현사료관 여보, 나좀 도와줘 (knowhow.or.kr)

 

노무현사료관

 

archives.knowhow.or.kr

19940925_58692_노무현사료관.pdf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삽니까?” 지난 20년 동안 내 가슴 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메아리치고 있는 이 한마 디……. 이제껏 그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 나는 이 한마디에 담겨 있는 부끄러운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내가 이 이야기를 숨기는 한, 내 삶의 어떠한 고백도 결국 거짓일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변호사 개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남편이 사기 혐의 로 구속되었다며 내게 변호를 의뢰해 왔다. 나는 그 사건을 60만원에 수임했는 데, 사실 당사자간에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 없는 사건이었다. 당연히 변호사 로선 사건을 맡기 전에 먼저 합의를 해보라고 권유했어야만 옳았다. 그러나 마침 변호사 사무실에 돈이 딱 떨어져 곤란을 겪고 있었던 때라 그 아주머니가 나타 나자 사건을 덜렁 맡아 버렸던 것이다. 사건을 맡자마자 사무장은 나더러 얼른 피의자인 그 아주머니의 남편을 접견 부터 하라고 재촉했다. 그건 사무장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피 의자를 접견도 하기 전에 합의를 봐 버리면, 그 아주머니가 변호사 선임을 취소 하고 해약을 요구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접견을 하면 계약 금을 반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서둘러 접견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접견한 다음 날 그 아주머니가 찾아와 합의를 봤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난 일단 사건에 착수하면 수임료의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는 변호사 수임 약정서를 보여주면서 돈을 못 돌려준다고 버텼다. 속으로는 미안하고 얼굴 도 화끈거렸지만, 당시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 버린 후였다. 그 아주머 니는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 서 먹고삽니까?” 하는 그 말 한마디를 내 가슴 속에 던져 놓고는. 한동안 나는 그 일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훨씬 뒤 내가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 면서 언제부터인지 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여의도 부시맨 5 법정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양심을 거론할 때는 어김없이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고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고 나 서부터는, 그 아주머니가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 화살처럼 더욱 큰 고통 으로 다가왔다. 돈에 탐 안 내고 인권 변호사로서 오로지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 해 온 사람이라고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가 나갈 때마다, 어디선가 그 아주머니가 그 글을 읽고 있지나 않을까, 나는 가슴을 조이곤 했다.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려 하는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도 지금쯤은 백발의 할머 니가 되었을 그 아주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의 영욕과 진실을 담보로 하여 따뜻한 용서를 받고 싶다. * * * 1992년 3월 24일.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번엔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요?” “다음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 나이도 있고…….”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었습니까?” 여기저기서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 인사가 쏟아졌다. 국회의원을 하던 사람이, 그것도 남보다 유난스럽게 하던 사람이 낙선을 했으니, 어지간히도 안돼 보였었 나 보다. 하기는 선거에 떨어지면 패가망신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나와 아내는 낙선을 비교적 담담한 심정으로 맞이했다. 개표하는 날 아침, 좀 창피스럽기는 했지만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지구당 사무실에 나갔다 가 당원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아내가 잠시 눈물을 훔치긴 했지만. 그러나 그뿐이었다. 며칠 동안 뒷마무리를 하고 서울에 올라와 보니, 아이들은 위로 인사는커녕 내 색조차 전혀 없었다. 대견스럽다 싶으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와 우리 집 식구들은 선거를 치르기 1년 전부터 미리 낙선의 홍역을 충분히 치르고 있었다. 부산 바닥에서 김대중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가는 민주당 간판 갖고는 백 번 나가도 안 되니 지역구를 서울로 옮기라는 성화에 어지간히도 시 달렸던 것이다. 여의도 부시맨 6 게다가 ‘찍어 주었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우리 동네에 해준 게 뭐 있노’ 하는 원성이 자자하고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악성 루머가 쫙 퍼져 있으니 내려올 생각조차 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구당의 열성 당원들조차도 지역구를 옮기라고 권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은 자기가 설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남자는 죽을 자리라도 가야 할 땐 가야 합니다.” 하고 큰소리를 쳤지만, 내 속은 이미 숯 덩 어리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말이 그렇지 세상에 어떤 사람이 죽을 자리에 제 발로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내 아내 양숙 씨는 도대체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었다. 하도 가슴이 답답해서 의논이라도 하려 하면, “언제 당신이 나한테 물어 보고 한 일이 있어 요?” 하고 매번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뭐라고 권하더라도 결국 내가 부산에서 출마할 것이 뻔한데 뭐하러 묻냐는 투였다. 처음에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내는 머릴 싸매고 반대를 했었다. 그럭저럭 변호사를 하면서 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험한 정치판에 끼어드 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내가 의원직 사퇴서를 던지자, 아내는 국회의원 이 됐으면 끝까지 약속을 지켜야지 하며 복귀를 주장했고 나중엔 속임수까지 써 가며 국회로 도로 밀어 넣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아무튼 그 일 말고는 아내가 내 일에 관해서 일언반구라도 간섭한 적이 없었 다. 고생문이 훤하다 싶으면서도 어차피 말릴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 지만. 어쨌든 나는 언뜻언뜻 아내의 표정에서 내가 선거에서 떨어지면 정치를 그 만두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눈치채곤 혼자 실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내가 이 모양이니 한밤중에 아이들을 깨워 놓고 의논을 해 보아도 놈들은 빙긋이 웃기만 할뿐이었다. 의논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불행한 사 태에 대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해 두려는 아비의 심정을 먼저 헤아린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막상 선거에 떨어져서도 드는 느낌은 씁쓸한 웃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밖에. 돌이켜보면, 낙선으로 끝을 맺은 13대 국회의원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 기만 할 정도로 별별 일을 다 겪으며 보냈다. 촌놈이 난데없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상경해서 여의도 바닥을 헤매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청문회 스 여의도 부시맨 7 타’라는 이름으로 연예인처럼 유명해지고, 그러다 의원직 사퇴서 파동으로 그야 말로 박살이 나기도 하고, 또 어이없는 3당 합당에다 야당 통합에 이르기까 지……. 당시 40대 초반의 정치 초년생이었던 나로서는 이 모든 일이 모두 벅차고 힘 든 일뿐이었다. 내가 왜 정치판에 끼어들어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가 국회의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더구나 당 시 나는 87년 대통령 선거의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린 양 김씨를 혐오하고 있었던 터라, 현실 정치에 대해 환멸마저 느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내 팔자에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나 보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YS가 재야 영입 케이 스로 내게 공천을 제의했을 때, 나는 마침 87년 9월의 대우조선 사건으로 변호사 업무가 정지되어 소위 인권 변호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아 니더라도 여러 가지 일에서 나는 재야 변호사로서의 한계에 절망하고 있을 때였 다.그래서 국회의원이 되어, 다른 건 몰라도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짓눌리고 이용 만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세상에 알려나 주자는 소박한 생각에 공천을 받아들 였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열심히 외치는 일에만 매달렸다. 특히 국회 첫 대정부 질문에서 우리의 참담한 노동 현실을 혼신을 다해 고발하고 나서 수 없이 걸려 오는 격려 전화를 받았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정부는 입만 열면 노사 화합을 외칩니다. 그러나 노조 한번 해 보려고 하다 가 전기도 끊기고 수돗물도 끊긴 공장 바닥에서 스티로폼 한 장 깔고 앉아서 생 라면을 씹고 있는 이 노동자가, 가족이 가져다 준 주먹밥마저 빼앗겨서 불타 버 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노동자가, 그리고 끝내는 감옥 갔다가 해고되어서 길거리에 내쫓긴 이들 노동자가 그들을 내팽개친 기업주와 이 땅 위에서 서로 화합하고 살기를 기대하십니까?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의 크기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 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 여의도 부시맨 8 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이야!” 그리고 나는 오라는 데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현장에서 현장으로 누비 고 다니며 작은 성과라도 얻을 때에는 국회의원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토록 높고 거만하게만 보였던 경찰서장이나 고위 관리들이 굽실거릴 때는 유치한 우월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국회의원인 나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권한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내게 힘보다는 무력감을 의미 하면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내 눈앞에서 노동자들이 맞고 끌려가도, 노점상들 이 단속에 걸려 쫓겨나도 나에게는 여전히 그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예전에는 같이 맞고 끌려가면서도 마음의 죄스러움은 느끼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박해 현장에 동참하는 떳떳함(?)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박해받지 않는 사람’, 그건 정말 참기 어려운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특히 ‘원진 레이온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보았던 한 장면은 언제까지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원진 레이온은 레이온 실을 제조하는 회사인데, 그 작업 공정 중에 이황화수소 라는 독가스가 새어나와 인체를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의 명령을 받 지 않고 나 혼자 사건을 접수해 당시 평민당의 박영숙 부총재와 함께 현장을 조 사했던 사건이었다. 현장을 조사하고 추궁한 끝에, 우리는 회사측으로부터 직업병임을 인정하고 일 체의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를 받아내는 등 처음에는 일이 잘 풀렸었다. 그런데 그때뿐이고, 모든 노동자들을 일제히 검진하기로 했던 약속을 회사측이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측의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몇 번에 걸쳐 회사를 찾아가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지가 마비된 어떤 환자가 어린 딸아이 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직접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 여의도 부시맨 9 다. 그 사람의 얼굴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안면 근육이 전부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형식적으로만 인사를 건넨 뒤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 다. 그 사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급히 봉고 차에 올라타 정문을 막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열 서너 살쯤 되었을까. 그 노동자의 딸이 봉고 차 유리에 매달리더니 울면서 소리를 쳤다.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나는 그때 무심코 그 딸의 아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아버지의 일그러진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리고 그 옆에는 공장의 경비원들이 윗사람의 명령을 받았는지, 잔뜩 못마땅한 표 정을 지으면서 눈을 부라린 채 서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이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 한 그 자괴감에 나는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낙선한 직후 나는 이참에 정치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변 호사 일에 매달리면 먹고살기가 훨씬 넉넉해질 테고, 아무리 정치자금이라 하지 만 멀쩡한 사람이 친구들한테 손 벌리는 짓은 안 해도 될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도 이제 그만 욕먹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말 욕먹는 일은 싫다.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있 어서 하는 욕이건, 아니면 나를 싫어하거나 헐뜯기 위해 하는 욕이건 참으로 싫 다. 멀쩡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인데, 아무리 공인이라 하지만 욕을 먹는 게 정말 속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정치하는 게 본래 열 명한테 칭찬을 들어 도 반드시 누군가 한 명한테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정치를 하면서 많은 고통을 치르기는 했지만, 반면에 많은 경험을 했고 정말로 값진 것도 배웠다. 어느 날 갑자기 문명 세계에 떨어진 부시맨처럼, 나는 그야말로 벌거벗은 몸에 국회의원 배지 하나 달고 이 여의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철없는 짓도 했었고, 무모한 일도 벌였던 것 같다. 그러나 매순간 내 나름대로는 여의도 부시맨 10 절실한 심정으로 순수한 열정을 갖고 해 온 일이라는 점에서만은 지금도 부끄러 움이 없다. 그 후로 어느 새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보게 되었고, 당의 최고위원이라는 중진의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 가슴 속에서 그 무엇이 자라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 겪을수록 단단해지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깊어지 는 그 무엇이 자라나고 있었다. 젊은 날의 혈기와는 달리, 내 전 생애를 걸고 내 자신과 내 주위에 책임져야 할 그 무엇이……. 그것을 오기라 해도 좋고, 집념이라 불러도 좋고, 부서지지 않는 꿈이라고 해 도 좋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처럼 느낀다. 나에게는 언제나 이 여의도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막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삭막한 사막을 떠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결코 지치거나 절망할 줄 모 르는 부시맨처럼 그 한가운데를 헤집고 다닐 것이다. 여우와 포수 11 여우와 포수 청문회가 그렇게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줄은 나 자신도 미처 몰랐다. 국회에 청문회 제도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 제도를 따로 연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실 청문회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그 이전까지 국회가 보여 준 모 습으로 보아 청문회 역시 실망만 안겨 주게 될 여야 간의 입씨름장만 될 것 같 아서였다. 그래서 청문회가 열리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나의 관심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쓸데없는 말장난보다는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을 돕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의 연합 철강 노조원들이 2천 명이나 집단 상경을 해 한강 고수 부 지와 광화문 옆 연합 철강 사옥에서 2개월이 넘게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인 즉, 5공 시절 동국 제강이 연합 철강을 인수할 때 전두환 정권이 불법 개 입했으므로 그 인수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들의 싸움은 내게 사뭇 신선하게 느껴졌다. 우선 투쟁의 목표가 임금이 나 직장 보장 문제 같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 노동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내 연합 철강 사옥으로 좀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엘 갔더니 나더러 농성에 동참해 달라고 했다. 일 단 그들의 노고를 위로한 뒤 생각해 보겠노라고 대답하곤 농성장을 나왔다. 불과 이틀 후로 다가온 청문회, 그리고 나의 동참을 바라는 저 노동자들, 돌아 오는 차 속에서 고민을 한 끝에 나는 노동자들의 농성에 동참하기로 결심을 했 다. 청문회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옷가지와 이불을 챙길 궁리를 했다. 그런데 사무실에 돌아와 얘기를 하니, 비서들이 다들 펄쩍 뛰었다. 국회의원이 면 국회 일을 해야지 무슨 농성이냐는 것이다. 웬만하면 내 생각을 따라 주던 비 서들이 그 일에서만은 한결같이 강경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당시 비서진들은 대부분 학생운동 출신으로 감방 경력도 화려한(?) 젊은이들이 었다. 투쟁이라면 누구보다 이골이 나 있고 앞장설 그들이 오히려 말리고 나서니 나도 무작정 고집만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우와 포수 12 결국 청문회를 첫날 한 번만 해 보고 별 볼일이 없으면 농성에 합류하기로 비 서진들과 타협했다. 그래서 청문회에 참석하기로 하긴 했으나, 여전히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날로 바로 청문회 준비에 돌입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었지만, 그래도 시작 한 일이라 열심히 준비를 했다. 비서들과 함께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청문회 첫 날은 TV 중계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자 신문들이 떠들고 나섰다. 그 래서 둘째 날은 TV로 생중계되어 전국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세상은 밤새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말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나는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세 사람이 있다. 법무장관을 지낸 이종원 씨, 안기부장 출신의 장세동 씨, 그리고 현대 그룹의 정주영 씨이 다. 그 중 이종원 씨는 5공화국에서 법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변호사로, 일해 재단 의 설립에서부터 깊숙하게 관여를 했던 인물이다. 일해 재단 청문회 첫 날 출석한 그는 그야말로 기막힌 궤변으로 의원들의 질 문을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법률적 지식과 논리력이 뛰어난 그를 국회의원들이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교묘한 논리로 빠져나가면서 그는 오히려 국회의원을 갖고 놀며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그의 이런 오만 방자함에 국회의원들은 분통만 터뜨릴 뿐 어쩔 줄을 몰라 했 고, 현장을 쳐다보는 기자들도 분개하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누군가가 그의 못된 궤변과 오만을 꺾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럴 때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변호사로서 익힌 법률 지식과 논리로 마주쳐 나갔다. 원래 일해 재단 문 제의 본질은 중학생 수준의 문답만으로도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었다. 그런데 그걸 사법 고시를 패스하고 법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그 명석한 두뇌와 법률 지식을 이용하여 이리 꼬고 저리 꼬아 놓으니, 같은 법률 지식과 논 리가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항복했 다. 전문 지식을 방패로 국회의원들을 갖고 놀다가 같은 전문가를 만나자 말장난 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지식이 잘못 쓰여질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 여우와 포수 13 았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거꾸로 서 있거나 가치 판단이 흔들릴 때, 잘못된 양 심을 가진 사람의 지식은 어떤 도둑질이나 살인보다도 위험한 범죄인 것이다. 그 와 같은 사람들이 국민을 속이는 머리를 빌려주고 이론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전두환 씨 같은 사람이 8년간이나 독재정권을 유지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장세동 씨는 청문회로 나만큼이나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 도 그만큼이나 곤란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어떤 점에서는 정직하고 솔직했고, 어 떤 점에서는 당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직하고 의리 있는 삶으로 보였다. 그래 서 그런 점은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살 만했다. 이미 백일하에 훤히 드러난 사실 조차 요리조리 거짓말을 하거나, 옛날에 모시고 은혜를 입었던 사람에게 책임을 밀어 버리거나, 새로운 실력자에게 비굴하게 아양을 떠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한편 전혀 판단력이 없는 것 같이도 보였다. 그는 증언대에 앉아서도 오히려 국회의원들을 둘러보며 ‘이상하다.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열을 낼까?’ 하고 의문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의식에는 5공식 사고만 있었을 뿐, 역사 의 흐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청문회에 나온 증인 중 가장 까다로웠던 사람은 역시 정주영 씨였다. 국회의원 들이 질문을 하면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거꾸로 질문을 던져 질문 자들을 혼란시키는 놀라운 화술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정주영 씨에게 질문할 내용의 초점이 국민들의 정서에서 벗 어나 있었다. 애당초 조사의 초점은 일해 재단이 거둔 돈의 ‘강제성’에 있었 고, 따라서 국회의원들은 ‘강제성’ 여부만을 확인하려 했었다. 다시 말해 전두 환 정권이 일해 재단의 성금을 강제로 거둬들인 것이라는 점을 정주영 씨의 입 을 통해서 확인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다. 재벌의 회장이 한번 혼쭐나는 것을 보 고 싶어하기도 했고, 과연 국회의원들이 돈 많은 사람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모금의 강제성 여부’에 의원들의 질문이 집중될 것이라는 정보를 정주영 씨가 놓칠 리 없었다. 지금은 민자당 소속인 모 의원이 정주영 씨에게 미 리 귀띔을 해 주었던 것이다. 여우와 포수 14 그래서 국회에 나가서 원하는 대답 하나만 해주면 더 따질 게 없으리라는 것 을 미리 알고 있던 정주영 씨는, 의원들이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너무 쉽게 국회 의원들이 바라는 대답을 해 버렸다.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는 것이 다. 첫 마디에 강제성을 시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첫 질문에 쉽게 핵심이 나와 버리니 의원들은 더 물어 볼 게 없었다. 강제성 여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 고 벼르던 의원들은 잔뜩 준비해 온 질문 준비서를 한 장도 써먹지 못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당시 청문회의 성격상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 초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60년대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정경 유착 구조에서 강제 적으로 거두었건 자발적으로 갖다 바쳤건 ‘오십 보 백 보’가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5공 비리, 그 중에서도 특히 일해 재단 문제의 본질은 ‘정경 유착’인 것이다. 그러니 강제성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주영 씨는 강제로 돈을 빼앗긴 피해 자가 되고, 정경유착의 시각에서 본다면 거꾸로 전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 가 되는 것이다. 나는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몰고나갔다. -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은 힘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 …(침묵) - 그것은 단순히 현상 유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더 성장하기 위해 힘있는 사람에게 접근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 힘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괴로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극 적으로 영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 혹시 그 순응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능력에 맞게 내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일해가 막후 권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이전에는 묵묵히 추종하다가, 그 권력이 퇴조하니까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 까? - …(침묵) - 왜 부정이 아니라면 진작부터 6·29 이전부터 바른말을 하지 못했습니까? - 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여우와 포수 15 - 이렇게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 하는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 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증인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 …(침묵) 정주영 씨에 대해서는 지금도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사실 그는 탁월한 사업가라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 정도의 역량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존심 또한 대단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TV로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나 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당당히 말하는가 하면, 자기가 했던 말을 금방 뒤집어 놓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데는 정말 기가 질렸다. 그 얼마 전 울산 현대 그룹의 사업장에서 피신 중이던 노조 간부를 회사의 구 사대 직원과 경비원들이 봉고 차에 태워 잡아가려고 하다가, 이를 가로막는 노동 자들과 옥신각신하던 중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차로 밀어 버려, 그 중 한 노동자 가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을 내가 캐묻자, 자기는 너무나 많은 사원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또한 ‘그 정도의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일’이라는 표현도 충격적이었고 ‘전혀 모른 다’라는 말도 내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건 마치 정보기관에 의해 사람이 한두 명쯤 죽어 나가도 대수롭지 않게 여 겼던 암흑 시절 독재 정권의 도덕적 불감증과 꼭 같은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시의 청문회는 당시 우리 나라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놓은 매우 기형적인 청문회였다. 사실 청문회란 것이 증인을 불러다 새로운 사실 을 발견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인데, 그때의 청문회는 새롭게 밝혀 내야만 할 것 이 없는, 말하자면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청문회였다. 어떤 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누구보다도 국민들이 환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 다. 단지 국민들은 법과 인륜을 짓밟고 권력을 휘두른 못된 자들, 그 권력에 야 합해 이권을 챙겨 먹은 자들, 그 못된 인간들이 혼쭐나는 장면을 구경하며 한풀 여우와 포수 16 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문회가 열리자 적반하장으로 장세동은 뻣뻣하게 나오고, 정주영도 회 장님, 증인님 소리 들어가며 오히려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국민들이 “저 바보 같은 국회의원 놈들!” 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게 당연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된 것은 바로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실을 잘 밝혀 내서가 아니라, 증인들의 기를 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다. 어찌 생각하면 국민들의 정서에 내가 편승하여 유명해진 셈이라, 지금도 쓴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미안한 생각조차 들 때가 있다. 아무튼 나는 큰 덕을 보았지만, 반면에 정주영 씨에게 문을 열어 줘 가며 친절 을 베푼 의원들은 욕을 된통 얻어먹었고, 그로 인해 청문회 국회의원들이 정주영 씨로부터 그랜저 승용차를 한 대씩 받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나도 그 당시에 는 긴가민가했으나, 한참을 지나고 보니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정주영 씨가 국회의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의원들은 출석한 증인들을 향해 고함을 치 고 “야, 임마!” 해 가며 욕설까지 내뱉곤 했었다. 그러자 당과 국회로 왜 욕을 하냐며 국민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러자 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정주영 씨는 고령인 데다가 기업인으로서 업적 을 많이 쌓은 사람이고 상당한 존경도 받고 있는 사람이니, 함부로 말하거나 지 나치게 다루지 말라고 주의가 내려졌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모금의 강제성을 너무 쉽게 시인해 버리니 자연 대우를 잘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막은 내리고 17 그렇게 막은 내리고 청문회 이후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쏟아 져 들어왔다. 그러나 난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해 야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선은 신문 인터뷰에만 응했다. 그러다 나중엔 결국 잡지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 없이 많은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내 기사가 안 실 린 잡지가 없을 정도였다. 어떻든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잡지에 실린 내용의 대부분은 불만스러웠다. 내가 절에서 불목하니 노 릇을 했다는, 사실과 다른 기사가 나온 것도 불만이었지만, 보다 마음에 걸린 것 은 잡지에 실린 기사들이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과는 항상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점이었다.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입지전적 성공담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지 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실 현하고 싶어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번번이 외면해 버렸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 출세한 사람들이 모두 다 훌륭한 것은 아 니지 않은가. 자신의 옛 처지를 생각해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옛날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있는 사 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고 출세한 사실이 모 두 칭찬받을 수만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불우한 사람들이 있도록 한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불 우함에서 탈출한 이야기만을 다룬다는 게 나로선 영 마땅치가 못했다. 인터뷰 때 마다 기자들에게 그걸 강조했지만 기사에선 번번이 잘려 나가 버렸다. 아무튼 청문회를 시작한 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의원 회관의 전화는 거의 불통이 되어 버렸다. 아내에게 신문에 난 기사를 보라며 자랑하려고 전화를 해 도, 집 역시 걸려오는 격려 전화로 이미 불통이 되어 있었다. 그때 격려 전화를 해주신 많은 분들껜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걸려 온 전화 중에는 은근히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놓는 장난 전화도 있었 다.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한 후 돈을 보내 주겠다며 온라인 예금 구좌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분은 일천오백만 원이나 되는 거액을 기탁하겠다는 전화 그렇게 막은 내리고 18 도 해왔다. 물론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혹시 하며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역시 구좌에는 단 일 원의 돈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른바 스타가 되면서 주위에서 “노 의원, 내 단골 술집에 한번 같이 갑시다. 그 집 마담이 노 의원 데려오면 그날 술값 공짜로 준답니다.” 하고 농담들도 해 왔다. 나도 “그 마담 예쁩니까? 그러면 한번 갑시다.” 하며 받아주긴 했지만, 일에 쫓겨 정작 가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얘기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언 젠가는 나 혼자 갈 때라도 그런 술집을 만날 수 있지나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그런 공술을 먹어 보지 못했다. 여자들이 전화를 해 만나자는 전화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일방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나자는 적극적인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서들이 중간에서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차마 내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은근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그런 전화가 다시는 오지 않는 걸 보면 청문회의 영광은 역시 한때의 옛이야기였나 보다. 그 럴수록 그때의 비서들이 얄밉기만 하다. 일반 국민들은 나를 아직도 ‘청문회 스타’로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다. 왜냐하면 청문회를 잘한다는 것은 재능에 불과할 뿐,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의 훌륭한 인격이나 정치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말해 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초년생으로서의 순수함과 변호사로서의 테 크닉이 만들어 낸 소품에 불과하다. 나 스스로는 3당 합당 때 안 따라가고 소신을 지킨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 각하고 있다. 또 야당 통합 때 중견 간부로서 나름대로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 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그리고 3당 합당 때 따라가지 않은 대가로 지난 선 거에서 낙선하긴 했지만, 내 힘으로 민주당의 최고 위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청문회 스타’로만 알고 있지 이런 점은 잘 기억해 주지 않는다. 사실 요즘은 그것이라도 좋으니 기억만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내가 청문회로 꼭 덕만 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되고 있을 만큼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일도 있다. 소위 ‘명패 투척 사건’이 그것이다. 청문회 에 나온 전두환 씨가 퇴장할 때 내가 명패를 집어던진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렇게 막은 내리고 19 그 사건으로 나는 당시 언론에 의해 ‘국회의원의 자질이 문제’라며 매우 무 식하고 경우 없는 깡패(?)로 비난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나에게서 그런 이미지를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그 반대로 “기왕이면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 출 일이지 그게 뭐요?” 하면서 통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 만…….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전두환 씨에게 명패를 던진 것이 아니라, 땅바닥 에 내동댕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전두환 씨에게 대한 분노보다는 당시 내가 소속하고 있던 통일민주당의 지도부에 대해 화가 치밀어 내동댕이쳤던 것 이다. 지금 와서 새삼 무슨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당시 우리가 몸담고 있던 정 치 현장의 분위기와 그에 익숙하지 못했던 우리 소장 의원들의 고뇌를 이야기하 고 싶어 그 사건의 전말을 밝혀 볼까 한다. 청문회로 온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5공 특위와 광주 특위는 89년 1월 민정당의 불참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다 그해 연말 4당 영수 회담에서 노태우·YS·DJ·JP는 정호용 씨만 희생양으로 삼는 선에서 5공 특위와 광주 특 위 건을 마무리짓기로 합의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소장 의원들은 지도부의 그런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권당의 반대 때문이라면 청문회가 공전되는 한이 있더라 도 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뒷날에라도 바른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또한 전두환 씨의 청문회 증언 문제도 전두환 씨가 서면 질문에 종합적으로 답변하고 보충 질문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되었다. 한마디로 전두환 씨를 국회로 불러내 일방적인 해명 기회를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법적으로 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문권을 봉쇄한 것이기 때 문이다. 한마디로 이건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 씨의 대국민 연설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합의에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의 소장 의원들은 반발했다. 그래서 질문권을 계속 주장하기로 하고 작전까지 미리 짜 놓았다. 1989년 12월 31일 밤, 전두환 씨의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국민들 항의 전화가 빗발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게 증언이냐? 연설이지.” “어서 끌어내서 증 그렇게 막은 내리고 20 언대로 앉히지 않고 뭐하냐?” 등등. 국회의원들도 “이렇게 국회가 모독당해도 되느냐.”며 모두 흥분했다. 각 당의 원내총무실, 대표실 등을 들락거리며 모두 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통일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이었다. ‘광주 항쟁과 관련 된 사안이니 틀림없이 평민당에서 누가 나와 판을 깰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않 아도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평민당이 온통 바가지를 뒤집어 쓸 것이다. 그 러니 우리 당은 절대 항의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이것이 지도부의 지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평민당의 지도부도 마찬가지였었다. 나는 울화를 삼키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두환 씨가 광주 학살 대목에서 “자위권 발동…” 운운하며 거짓말을 늘어놓자, 평민당의 정상용 의원 이 참지 못하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 명령자 밝혀!”라고 소리치며 앞으 로 뛰어 나왔고, 동시에 평민당의 이철용 의원이 증언대로 뛰어나가며 “살인자 전두환!” 하며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청문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민정당 의원이 들고일어나 삿대질을 해댔고, 여기에 맞서 평민당 의원들의 맞고함이 시작되었다. 이럴 때는 으레 통일민주당도 일어나 야당 편을 들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뒤쪽 지도부에서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이제 평민당이 다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식의 의사가 전달되어 오는 게 아닌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 씨가 퇴장을 했고, 나는 통일민주당의 지도 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5공 청산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제는 그 당시 내가 명패를 전두환 씨를 향해 집어 던졌건 통일민주당의 지 도부를 향해 집어던졌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사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 나 언젠가는 그때 타협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다시 밝히고, 역사적 평가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지금도 나를 보고 그때 왜 전두환씨를 정통으로 맞추지 못했냐며 농담 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어느 잔인한 봄날 21 어느 잔인한 봄날 89년 봄의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는 오전에 열린 국회 본회의를 마치고 정문을 빠져나와 의원 회관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백여 명의 의원들이 탄 검은색 고급 승용 차들의 긴 행렬 속에 섞인 채, 나는 자동차 시트에 기대어 싱그럽게 피어나는 가 로수 잎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봄의 향취를 즐기고 있었다. 그날 따라 하늘 도 무척이나 고운 빛깔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가로운 나의 계절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회 정문 앞의 버스 정류장을 통과하는 순간, 그곳에 줄을 지어 우두커니 서 있는 수많은 사람 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정부 질문이 있는 날도 아닌 만큼 방청객도 아닐 테고, 국회 관광을 온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다.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상계동에서 온 철거민이랍니다. 조금 전까지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이제 막 경찰들에게 강제 해산당한 모양입니다.” 동승했던 비서의 대답이었다. 가지고 왔던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 들고는 맥 빠진 얼굴로 서 있는 철거민들, 그 앞을 지나는 검은색 고급 승용차의 행렬, 그리고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이방인 이 되어 앉아 있는 나…….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철거민들이 혹시라도 내 얼굴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 고 개를 숙였고,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슬픔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 고 그 상태로 그 사람들 앞을 다 지나갈 때까지, 나는 나약한 나의 모습에서 한 없는 부끄러움과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과연 이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이 사람들은 문 앞에 발도 들 여놓지 못하게 하는 이놈의 국회에 과연 내가 앉아 있어야만 하는가? 내가 국회의원 노릇을 함으로써 오히려 권력자들에게 구색만 갖춰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숱한 의문과 회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그런 나 자신의 질문 어느 잔인한 봄날 22 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버텨 내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고통과 가슴을 짓누르는 양심의 가책뿐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쌓여 왔던 숱한 고통과 아픔의 조각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나의 선택을 가혹하게 압박하 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지.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어! 그로부터 며칠 후, 한때 국민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 키면서 지난날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었던 청문회가 여당의 일방적인 불참 선언 으로 파국을 맞고 말았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반쪽이 되어 버린 청문회 는 더 이상 청문회가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5공화국 시절의 피해자들이 늘어앉아 목소리도 높이 아우성을 치 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기운 빠진 야당 의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웃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울 수는 더욱 없는, 한 편의 희극이었다. 나는 이 모든 희극과 비극의 무대에서 하루라도 빨리 발을 빼 버리지 않으면, 내가 서 있는 땅 자체가 내일이라도 당장 무너져 버릴 듯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하랴. 오로지 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싶은 심 정뿐인데……. 나는 반신불수의 흉측한 모습인 청문회장의 내 자리에서 의원직 사퇴서를 써 내려갔다. “…이제 노태우와 그 일파의 눈에는 국회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 다. 회의에 불참하여 국회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증인 출석을 방해하고, 부당한 행위에 대한 시정 요구를 묵살하고, 의결된 법안을 거부합니다. 정말 막가는 행 위입니다.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데 국회가 무슨 소용이고 국회의원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사태를 국회와 국민에 대한 모욕임은 물론,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의회주의, 즉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깊 은 치욕감을 느낍니다. 물론 사려 깊은 국회의원이라면 이러한 경우라도 참을성 있게 의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주어진 의원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민주주 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느 잔인한 봄날 23 그러나 현재의 건강 상태는 이러한 수모로,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이겨 나 갈 만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대중 투쟁이야말로 의정 활동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 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국회도서관으로 가서 의원직 사퇴서를 복사한 다음 우체국으로 가 국회의장에게 부쳤다. 그리고는 여의도를 떠나 무작정 길을 떠났다. 어느 정도 예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의원직 사퇴는 엄청난 사회적 파 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도는 갈수록 커져 나에게 되돌아와 덮쳤다. 정 치 신인의 초선 의원이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무 게로……. 우선 각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을 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나의 의원직 사퇴를 따뜻하고 동정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민의의 소중한 책임을 더 큰 명분을 위 해 내던진’, ‘소영웅주의로 비아냥거려서는 안 돼’ 등등. 반면에 ‘청문회 스 타로 우월주의에 빠진’, ‘돈키호테적 한 몸부림’ 등 냉소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런데 결론은 이구동성으로 국회에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야의 각 사회단체에서도 줄줄이 성명을 내고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사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의원직 사퇴를 반 대한다는 사실은 정말 뜻밖이었다. 국민들에게 비치고 있는 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너무나 안 좋은 시절이었던 만큼, 나는 ‘훌륭한 결단’이나 ‘용기 있는 행동’ 이라는 소리까지는 못 들어도, 최소한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정도 의 소극적인 격려는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 나를 당혹스럽게 한 사실은, 나의 사퇴 파동에 대한 초점이 우리 제도권 정치와 의회주의의 한계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나의 행동이 옳 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에만 맞춰지는 것이었다. 나의 의원직 사퇴를 계기로 여당 의 청문회 불참 등 의회 경시 태도가 여론의 거센 질책을 받고 국회 정상화 문 제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나의 기대는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치를 너무 순진하게 보았던 데서 생겨난 착오였다. 나는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참담한 심정으로 충주호, 수덕사, 강릉 등 여기저 기를 떠돌아다녔다. 어느 잔인한 봄날 24 수안보로 가던 도중 국도 휴게소에 한 그룹의 낚시꾼들을 만났다. 낚시를 하러 충주호로 가던 그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악수를 청 해 왔다. “아, 노무현 의원이시군요.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 낚 시꾼은 나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잘했습니다. 맘 잘 먹었습니다. 그리 골 아픈 거 뭐하러 합니까?”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랑 같이 가서 낚시나 합시다. 이만한 고기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낚시꾼은 자신의 오른 팔뚝을 잡아 보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작정 그들 을 따라가 충주호에서 한가로운 사람처럼 낚시를 하곤 수안보에서 하룻밤을 잤 다. 아내의 추적 때문에 그곳에서 더 이상 낚시를 계속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웠지 만. 나의 행동을 찬성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만난 젊은 스 님이었다. 그 스님은 나에게 ‘사심 없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면서 추켜세 워 주었다. 나는 그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서 ‘낚시꾼하고 스님은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한 데가 있나 보다’는 생각이 들어 모처럼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잠적하고 있던 열흘이라는 기간은 오랜 갈등 끝에 결론을 지은 내 나 름대로의 소신이 하루하루 허물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데에는 정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곤혹스런 일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잠적 중에 마주친 몇몇 사람이 나를 목격했다고 당에 신고(?)를 한 것이다. 우이동 파크 호텔 앞까지 태워 준 택시의 기사가 그랬고, 또 장안동에 있는 작 은 호텔의 사우나에서 인사를 나눈 사람이 그랬다. 다행히 내가 진짜로 거기 있 는가를 확인해 보려는 당으로부터의 전화 덕분에 미리 도망을 칠 수 있었다. 태 어나서 처음으로 도망자 아닌 도망자 행세를 하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 든 곳은 장안동의 어느 작은 여관이었다. 그 여관에서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심부름하는 젊은 총각 하나가 곧바로 나를 알아보더니,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의원님 같은 분이 사표를 내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요?” 어느 잔인한 봄날 25 몹시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의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항의였다. 대답하고픈 말 은 많았지만, 그 청년의 애틋하고 진지한 표정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어젯밤 나를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던 주인 아주머니 가 정성스럽게 잣죽을 끓여 내 앞에 갖다 놓는 순간, 그나마 버티어 왔던 나의 소신은 마지막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그저 일단 내친걸음을 되돌이켜 세인 의 웃음거리는 될 수 없다는 자존심만이 초라하게 나를 버티고 있었다. 의원직을 사퇴한 거창한 명분은 사라지고 이제 어떻게 하면 사퇴를 번복하지 않고 이 모 든 것을 버텨 내느냐,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잠적을 하고 나서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웬만큼 은 진정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지구당에서 올라왔던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는 소식을 전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공격의 화 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당히 버텨야지 왜 사표를 내요? 뭐 잘났다고 여러 사람들의 속을 이렇게 썩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표를 냈으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당당하게 안 하겠다고 말할 일이지 비겁하게 도망은 왜 다녀요.” 정말 억장이 무너졌다. 며칠 전 수덕사에 갈 때까지도 가타부타 말없이 동행하 며 위로해 주더니 왜 그럴까? 나는 우선 아내부터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짐 을 챙겼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지구당의 이규도 부위원장이 와락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순간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구나 싶었다. 에라, 자고 보자.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최형우 의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최 의원은 긴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다짜고짜로 내 손목을 붙잡고는 사퇴 번의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나는 아침 일찍 첫 비행기로 상경한 문 변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보다 나 이는 적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신중한 사람이고 권세나 명예로부터 초연한 사람 이었다. 아내가 무슨 뜻으로 그를 불렀는지 모르지만 그는 내 편에 서 주리라 생 각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냥 서명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잔인한 봄날 26 참으로 고통스럽고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웠던 순간은 세상에 태어 나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날 오후, 나는 집으로 몰려온 기자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쩔쩔매어야 했다. 주위 사람들이 가르쳐 준 몇 가지의 사퇴 번복 이유는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죄인처 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가 한 말이라곤 고작 이것뿐이었다.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퇴서를 낸 행위 자체는 번듯한 명분과 논리를 갖추었고, 사퇴를 철회하기까 지의 과정에도 내 나름대로야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 나 그때까지 나는 정치인의 잘못 중에서도 자기가 한 말을 뒤집는 일을 가장 경 멸해 왔던 터이라, 이제 내가 내 스스로 한 일을 뒤집는 마당에 무슨 구구한 명 분을 생각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나의 의원직 사퇴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 로는 그 당시에 국회의원 노릇을 계속 하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인 간적인 고뇌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잔인한 봄날에 벌어졌던 나의 의원직 사퇴 파동은 이렇듯 봄바람처럼 해 프닝으로 지나가 버렸지만, 나의 자존심을 할퀸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상처 자국을 어루만지며 고뇌한다. 과연 정치인이 해야 할 진정한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