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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의 주요 지도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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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의 4대 대통령 | ||
본명 | Karl Dönitz | |
출생 | ||
사망 | ||
정당 | 무소속(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 명예당원) | |
재임기간 | 잠수정지도자 : 1936년 1월 ~ 1939년 10월 17일 | |
시민권 | ||
종교 | ||
배우자 | 잉게보르크 베버 | |
서명 |
1. 개요[편집]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독일의 제독(최종 계급 해군 원수). 제3제국의 마지막 국가원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 뜻밖에도 4대 대통령[1]으로 지명되었다. 그후 독일의 항복과정을 마무리한 인물. 2차 대전 동안 자신의 체험담 등등을 《10년 20일》이라는 책으로 써서 출판했는데, 2차대전 동안 잠수함전과 독일 해군의 실체 등에 대해서 잘 알리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목인 《10년 20일》은 히틀러 밑에서의 10년, 그리고 히틀러 사후 4대 대통령(Reichspräsident. 총통인 Führer가 아니다.)으로서 보낸 20일.
2. 10년 이전[편집]
<img class='wiki-image' src='//s3.namuwikiusercontent.com/s/4b89fa94b8f1e45bbf255a774930baeafeb0cc4741a9d8bcddfd506d8033d83e2dbe6e7c7b9691dc9fd071a720e1ce20b1ccad574df0f9254fd5e9ba7f0b7fd8922d8528984ede8f9196d8cd40db7db3bfc555f868a1a62b0f0dc049a007e118' alt='파일:external/www.lessignets.com/Donitz_WWI_U-39.jpg'>
1917년 U-39 당직사관 근무중인 되니츠 중위
제1차 세계 대전 때 지중해에 있다가 SMS 괴벤과 함께 오스만 해군으로 편입된 경순양함 브레슬라우에서 항해장교로 근무했고, 잠수함의 함장[2]까지 진급하여 독일 해군 사상 최초의 잠수함간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1918년에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종전후에는 순양함 함장도 역임하다가 재군비 선언 이후로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의 재건에 힘을 썼다.
되니츠가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출소하여 귀향하였을 때 해군본부에서는 그의 재복무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때 그는 인사처장에게 "우리가 다시 잠수함을 보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는데, 이는 바이마르 독일의 잠수함 보유를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장차 자유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인사처장은 "상황이 항상 이렇지는 않을 것이며, 몇 년 내에 잠수함대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고, 이는 되니츠가 다시 해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되니츠는 수상함 관리 보직을 전전하며 경력을 쌓았는데, 훗날 저술한 회고록에서도 이야기하듯 '해군 장교는 잠수함과 수상함 양면에 걸쳐 정통해야 한다'는 그의 보직 이념은 바로 이 때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수함 부대장으로 임명될 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되니츠가 지휘하는 순양함 엠덴에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동료 장교인 귄터 뤼톈스(Günther Lütjens) 대령이 방문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훗날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기함 비스마르크와 함께 전몰하게 되는 뤼톈스 또한 당시 순양함 카를스루헤의 지휘관으로서 2차 함장 보직을 수행중이었는데, 뤼톈스는 본래 엠덴이 취항하기로 되어 있던 동방 항로를 자신이 맡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항해는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카를 폰 뮐러 대령 지휘하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하다 격침된 수훈함인 순양함 엠덴의 자취를 따르는 것으로서, 바로 그 이름을 이어받은 배의 함장인 되니츠에게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임무였다. 이 탓에 오랜 지기였던 두 사람이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는 와중에 훗날 되니츠의 감상대로 '놀랍게도' 총사령관이 끼어들어 말을 멈추게 했고, 되니츠와 뤼톈스는 졸지에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보직을 맡았다.[3] 뤼톈스는 빌헬름스하펜(Wilhelmshafen)의 북부 전단 사령부 참모로 전출되었다가 베를린의 해군본부 인사처장을 맡았고, 되니츠는 5일간의 대기발령 기간을 가진 후 베디겐 전단장에 취임하여 다시 잠수함 요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보직이동은 바로 독일의 U보트 보유를 재허용한 영국-독일 해군조약 타결에 의한 것으로, 전간기 초입부터 되니츠가 바라 마지않던 잠수함대 재건이 바야흐로 목전에 박도하였음을 알리는, 작지만 큰 사건이었다.
3. 10년[편집]
3.1. 잠수함대 사령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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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재무장을 하고 해군을 재건하던 시기는 타국의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의 수상함 전력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고, 영국 해군이 잠수함은 한물 간 무기라고 얕보는 통에 당시 독일 해군의 전력중 영국에 대항해볼 만한 수단은 유보트였다. 전쟁 발발후에는 대형함들을 건설하는게 더욱 힘들어지는 까닭에, 전쟁 발발후 되니츠의 예언대로 유보트가 실제로 주전력이 된다. 그는 유보트가 300척만 있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단언하고, 유보트 생산에 박차를 가할 것을 요구했는데, 경험과 연구에 의해 유보트가 세 척이 있다면 한 척은 실전에 투입되고, 다른 한 척은 훈련, 다른 한 척은 수리와 보급을 해야하기 때문에 300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100척의 유보트가 실전에 투입가능한 상황을 이야기 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다. 그 때문에 그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은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유보트의 생산과 배치를 관리 감독하는 지위에 가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서구 군사학계에 퍼져있던 잠수함 무용론, 독일 해군 지휘부가 생각하는 전함 위주의 해군 구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인데다, 히틀러조차 영국과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 마당에 조만간 영국과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 독일 해군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으므로 해군 총사령부는 그를 유보트 함대 지휘관에 유임시켰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보트는 꽤나 고급장비였다. 척당 300만 달러 정도였는데, 이것은 60대의 4호전차와 맞먹는가격이다. 유보트 300척이면 약 18000대의 4호전차 가격이다. 독일이 만약 개전 전까지 300척의 유보트를 마련했다면 폴란드 육군에게 베를린이 점령당했을지도...[4]
때문에 유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은 실제로는 북대서양에서 가용 유보트가 평균 7척, 심지어는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몇 척 안되는 유보트가 하마터면 영국을 거의 거덜낼 뻔했으니, 되니츠가 원했던대로 그 시기에 대서양을 100척의 유보트가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면 영국은 전면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유보트의 종횡무진한 활약에 세간에서는 윈스턴 처칠과 되니츠의 싸움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숫자만큼의 유보트가 실제로 배치된 것은 이미 대서양의 전황이 기울어 어떻게 해볼수도 없게된 1943년 근처로, 그나마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히틀러와 직접 담판을 벌여서 얻어낸 성과이다. 독일 해군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알베르트 슈페어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이는 슈페어의 자서전에서 엄밀히 말해 되니츠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의 자서전에서는 제3제국의 헌법상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기록했기 때문.
문제는 이때는 이미 영국 해군은 당할 대로 당한 나머지 유보트 탐지, 격침 전술의 달인이 되어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로는 역시 미국의 참전으로, 가장 급한때에 적절한 구축함 50척 지원부터 시작해서 열흘에 한 척씩 뽑혀나오는 수송선, 선단호위에 필요한 구축함과 항공기, 대잠수함 소형항모등 질과 양에서 모두 무지막지한 지원이 영국에게 가는 바람에 1943년 5월이후 유보트는 변변찮은 전과도 만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유보트를 약화시키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과 미국이 대잠수함 소형항공모함을 100척이나 양산해서 바다를 도배했으며, 상당한 양의 항공전력이 대서양에 발이 묶인것을 생각한다면 1943년 이후에도 유보트는 밥값을 어떻게든 한 셈. 실제로 되니츠도 전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출격은 지속해야 한다. 유보트가 출격을 안하면 대서양에 깔린 해군 전력과 항공 전력이 몽땅 독일로 몰려들 것이다란 언급을 한 바 있다.
3.2. 해군 총사령관[편집]
에리히 레더 제독이 비스마르크 격침 등 해군 운용에 대해 히틀러와 갈등을 빚어 해군 총사령관에서 스스로 사임을 한 후 그의 뒤를 이어서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레더 제독은 총사령관 후보로 수상전 전문가인 롤프 칼스 제독[5]과 되니츠 제독 두 사람을 추천했고 히틀러의 선택은 되니츠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해군 대장(Admiral) 계급이었던 되니츠는 상급대장(Generaladmiral)을 건너뛰어 곧바로 원수(Großadmiral)로 진급하였다.
히틀러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인 그의 입김으로 대양함대를 기어이 해체하려 했지만, 정작 신임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는 면밀히 검토 후, 자료를 들이대며 대형함들을 전부 해체해봤자 나오는 자원도 거의 없고, 그래봤자 돈과 인력만 낭비한다. 그러느니 그냥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연합군은 이들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결국 대형함들을 지켜낸다. 실제로 이 말이 맞아서 대전당시 노르웨이에 배치된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인 티르피츠는 출항한다는 소문만으로 영국-소련간의 북극항로의 수송함대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6]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과 별개로 되니츠 제독이 그 이후에도 제일 관심을 쏟은 함선은 계속 그래왔듯이 그 이후에도 유보트였다.
레더를 위시한 보수적인, 나치즘과는 거리가 먼 해군에서 나치즘에 대해 이해를 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인지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히틀러는 자살하기 전 정치적 유언으로 자신의 직위인 총통을 다시 나누어서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킨 후 되니츠를 차기 대통령 겸 전쟁장관으로 지명했다. 총리로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지명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뒤따라 자살하여 사실상 되니츠의 단독정부였다.
4. 20일[편집]
4.1. 대통령[편집]
<img class='wiki-image' src='//s3.namuwikiusercontent.com/s/c77bd7379a2d873def868cad68811621e25b86409cf544c8c24bb3baf549415f0f79af1001655f0395472b20573ddfeecf7c0ac58450a9bcd39531a29cfa8fdf0685d060d4fd6765db1a78a27a49821e69d39807a68c963bf0922ae97160b1fd' alt='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Second_World_War_1939_-_1945-_Germany-_Personalities_BU6711.jpg'>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업무 종결 후 영국 육군에게 체포되는 되니츠. 뒤따르는 두 사람은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장군,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근데 이건 개그영상인데..?
그의 자서전 《10년 20일》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당시 사실상 권력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를 불러 히틀러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되니츠에게는 수도 베를린에서 힘러의 무력인 SS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힘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이기 전에 책상위에 권총을 꺼내두고 서류로 가려둘 정도로 담판을 앞두고 매우 긴장했으나, 유언장을 읽은 힘러는 나치식 경례와 함께 "각하 밑에서 차석이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라 외치며 그냥 버로우했다고 한다. 되니츠는 "그건 상관없다."며 허락했지만, 힘러는 곧바로 신분을 위장하고 도망치다 영국 육군에 체포당해 연행되다 자살한다.[7]
자서전에 따르면, 되니츠 스스로는 히틀러가 그를 특출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야 히틀러는 자신이 죽은 후 최후까지 독일군을 싸우게 할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영화 《몰락》에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듯 마지막에 이르러 권력의 최측근들 및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 수뇌부에 극도의 불신을 갖고 있던 히틀러이고 보면,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임무에 충실했던 되니츠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만 하다. 육군은 일단 예전부터 히틀러와 그닥 좋은 관계라고 하기 힘들었고, 공군은 헤르만 괴링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신뢰를 잃었으나, 해군은 일단 되니츠 등 몇몇 제독들이 나치 당에 입당하기는 했으나 육공군에 비해 정치적인 힘이 미약했고 해군 수뇌부 사이에서 군이 정치에 크게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점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국방군 세력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기존의 수뇌부들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인이었던 되니츠는 자멸적인 최후의 항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므로, 총통의 권한을 이어받은 후 동부 전선에서 민간인과 병력을 철수시키고 영미군에게는 항복하지만 소련과는 계속 싸워서 소련의 진격을 막아내는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바랬다. 이런걸 보면 결국 되니츠도 나치 지도부다. 이에 소련이 자신들도 항복협상에 참여해야한다고 당연한 주장을 했고 서방 연합군 또한 되니츠의 이런 억지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 그는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 장군 대신 사석에서 대화 중 자신과 전략적 견해가 비슷한 것을 알게 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을 불러들여 역할을 맡기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육군원수 페도르 폰 보크 장군은 되니츠와 연락이 닿았지만, 가족과 함께 전용차 편으로 이동 중 연합군 항공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협상 초기에, 그는 협상가들로 주 전장을 이끈 육군 장군들이 아닌 해군 제독들을 뽑아 연합군에 내보냈는데, 이는 일치감치 해상에서의 승패가 결론이 난 데다가 협상의 주역이 될 연합군 장군들이 주로 지상군 및 항공 세력과 싸우느라 해군에 대해 적대감이 덜해져 있어 제독들이 찾아가면 보다 협상 분위기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제독들 중 대표 격인 인물로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8]이 있다.
5. 전후[편집]
5.1. 전범 재판[편집]
재판에서 되니츠는 2가지 항목에서 유죄판결을 받게되는데 하나는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법 위반>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독일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이중 전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고, 연합군 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었던[9]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되니츠의 행동에 대한 검사단의 질의에 되니츠를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답신을 보내는 등 한 때 그의 적이었던 영미 해군에선 전반적으로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영국 제독은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라고까지 평했다.[10]
그러나 그가 결코 무죄인 것은 아니다. 알베르트 슈페어도 되니츠식의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그는 이를 확실히 인정했다. 슈페어가 20년형을 받은 것도 이의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전자를 무죄라고 하더라도 <전쟁법 위반>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행위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죄명의 경우 되니츠의 경우도 일단 확실한 죄명으로는 제네바 협약을 위배하고 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해서 강제노역을 허가한 것과[11] 무제한 잠수함 전쟁의 실행 과정에서 중립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 것, 히틀러가 선포한 연합군 특수부대 포로에 대한 무조건 총살 명령을 승인한 것이었다.[12]
이 죄목중 중립국 함선에 대한 공격 묵인으로 인해 주로 피해를 본 선박 대부분이 1941년 12월 이전의 미국 선박이었는데, 당시 미국 선박 공격은 히틀러조차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무제한 잠수함 전쟁 자체가 사실은 당시 기준으로도 국제법 위반이었는데, 되니츠는 처음부터 국제법 위반을 각오하고서라도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이런 생각은 되니츠만이 아니라 적국인 미국과 영국도 하고 있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둘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독일은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한 것인데, 국제법에 의하면 중립국 선박이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중립국 선박이 맞는 이상에는 정선 및 수색 후 근처 항구로 인도하여 판결을 받도록 해야지, 임의로 공격하거나 나포할 수 없다. 반면에 미국은 적국인 일본의 선박을 군함인지 민간선박인지 가리지 않고 공격한 것 뿐인데, 일본은 이미 진주만 공습 때 기밀 유지를 빌미로 공습기의 진로 상에 있던 미국의 민간 요트를 가리지 않고 공격한 전례가 있으며, 심지어 호주 병원선을 고의로 공격하여 격침시켰으며[13] 위조한 병원선을 병력 수송에 이용하는 등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국제법 보호 대상인 일본 병원선을 무차별 공격한 적은 없으니, 한마디로 미국이 군함인지 민간선박인지 가리지 않고 씨를 말렸다해도 독일은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한것이므로 같은 수준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히틀러가 중립국 선박의 공격을 금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14] 그와 더불어 연합군이 되니츠를 곧장 악당으로 몰아붙일 수 없었던, 그리고 되니츠가 애초부터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는 미국 자신이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1941년 12월 7일의 선전포고 전부터 엄연히 대서양 전역에 참전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939년 9월 5일 미국은 유보트들로부터 자국 선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국 동해안에서 대서양 중앙까지를 '보호 구역'으로 선언하여 자국 군함들로 하여금 연합군 상선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고, 이 때문에 수 차례 유보트와 미국 군함 간의 충돌이 일어나 양국의 관계는 급격히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6월 21에는 미국이 '즉각 사살' 지시를 내려 본격적으로 유보트를 격퇴하고자 하였고 되니츠는 이를 구실로 미국 동해안을 습격할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측에서도 약간의 꺼림칙함은 남아 있었고 태평양에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였기에 독일측에서 나중에라도 꼬투리를 잡으면 난처할 수 있기에 전후 전범재판에서 미국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자신들의 잠수함대도 독일과 같은 종류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벌였다고 증언하여 되니츠를 옹호하기도 하였고 때문에 무제한 잠수함전에 대해서는 유죄는 인정되었으나 해당 죄목으로는 처벌이 면제되어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정리하면 되니츠는 엄연한 전쟁범죄자이기는 하지만 독일 국방군 장성중에서는 그나마 정직하게 전쟁에 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5.2. 복역과 최후[편집]
어쨌든 이와 같은 죄목으로 결국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1956년에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했다. 2년 후인 1958년 자서전 《10년 20일》을 집필하며 2차 대전당시 독일 해군과 전황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이는 이후 전세계 해군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받게 된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독일 연방군(당시 서독군) 상층부의 금지 훈령에도 몇 명의 해군 장교들은 정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한 발언으로 "저보고 그 일을 다시 하라면 할 것입니다." 가 있다. 실제로 죽는 날까지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절대 뉘우치지 않았는데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군인은 적군에게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신념을 보여주는 발언으로도 유명하지만, 반성치 않고 그 행위를 다시 하겠다는 발언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15]
되니츠 본인의 입장은 황제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포로 생활을 마치고 1차 대전 후의 독일에 귀환했을때 이미 정부는 바뀌어 있었고, U보트 전력의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치에도 들어가고 히틀러한테 사탕발림도 꽤 했다는게 정설. 대표적으로 유보트 생산용으로 강제노역은 주장했어도 학살 범죄엔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되어 전범 재판 당시에는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는 기소당하지 않았었다.
이와 반대로, 히틀러의 전기로도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 경은 자신의 저서에서 '되니츠는 누구보다도 친 나치적인 제독이었으며, 최후까지 항전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도 적극 동의하였고, 히틀러의 권력을 승계한 뒤에 항복한 것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 뿐, 결코 비정치적인 군인은 아니었다.(Kershaw, The End:Germany 1944-45, p. 400.)'고 주장했다.
되니츠가 그렇게 자리를 지킨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는가는 다소 의문스럽다. 되니츠의 죄는 오히려 전범 재판 이후의 서독 사회에서, 일부 참전 군인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 자살 특공 부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비합리적인 임무를 거부하고 탈영한 장병들을 즉결 처형한 것과[16] 1944년의 해군 원수 연설에서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선동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석방 후에도 되니츠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발언만을 일관했을 뿐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유보트 승조원들과 달리 수상함 등에서 근무한 퇴역 해군 장병들이 되니츠에 비판적인 진술을 거듭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17] 결국 서독 연방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서독 연방군 장병들의 참석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의 독일 국방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되니츠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의 되니츠는 오랜 시간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던 전후 서독 사회의 새로운 물결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되니츠는 아들 클라우스와 페터가 모두 2차대전 중에 사망하고, 딸인 우르슐라만이 1990년까지 살았다.
참고로 전범 재판 당시 IQ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되니츠의 IQ는 138로, 이건 재판에 회부된 전범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후에 무죄로 풀려나게 되는 제국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143)와 네덜란드에서 공포정치를 펼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41)에 이어 세 번째. 괴링도 138로 공동 3위를 기록했다. 참고.
6. 회고록[편집]
《10년 20일》은 현재 한국에도 정식 출판되어 있다(삼신각 1995). 역자는 대한민국 해군 예비역 준장인 안병구 現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로, 안 제독은 국내 제1호 잠수함인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도 역임했다. 독일어 읽는 방법을 모르는지 만슈타인을 맨스타인 식으로 번역했다. 한국의 현역군인들이 번역한 책이 대개 그렇지만.[18]
이 회고록은 대서양의 잠수함전에 있어서는 귀중한 사료이지만,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등의 나치 고위 군인들의 회고록과 비슷한 논조로,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계에선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점을 문제시 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독일군 출신들 (육군,친위대,공군,해군 모두 포함)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적어도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부정적이지도 않다. 물론 히틀러의 각종 오판으로 인한 병신짓과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전쟁범죄에 대해선 인정하면서도[19] 히틀러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선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라도 한듯 그리 비판하지 않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선 전후 참전자들을 경멸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반발심으로 야기된 문제라는 상당히 그럴듯한 의견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구데리안의 회고록의 15쇄 서문을 아들인 독일 연방군 육군소장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 장군[20] 이 집필했는데, '그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였던 군인들의 입장을 고려하길 바란다'는 논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7. 주요 보직 내역[편집]
1910. 4. 1 ~ 1911. 3.31: 해군 입대, 방호순양함 헤르타 함상에서 수상함 기본훈련 이수
1911. 4. 1 ~ 1912. 9.30: 해군 군사학교 입교
1913. 9.27 : 정식 임관
1916. 9.12 ~ 1916.12.20: 산스테파노/다다넬즈 비행기지 근무
1916.12.21 ~ 1917. 1.16: 잠수함 교육 이수
1917. 1.17 ~ 1918. 2.28: 잠수함 U-39 견시장교
1918. 3. 1 ~ 1918. 9. 4: 잠수함 UC-27 함장
1918. 9. 5 ~ 1918.10. 4: 잠수함 UB-68 함장
1918.10. 4: 영국 해군 구축함 전대와 교전 후 이함, 항복 후 신병 인도
1918.10. 4 ~ 1919. 7.15: 포로수용소 수감
1919. 7.15: 포로수용소 출소, 해군본부 복귀
1919. 7.16 ~ 1920. 3.13: 발트해 해군기지 참모장교
1920. 3.14 ~ 1920. 4.19: 어뢰정 V-5 정장
1920. 4.20 ~ 1923. 3.14: 어뢰정 T-157 및 G-8 정장
1923. 3.15 ~ 1923. 3.19: 대기발령
1923. 3.20 ~ 1924.11. 2: 해군본부 어뢰 및 기뢰 관리 부관참모장교
1924.11. 3 ~ 1927.10. 2: 해군본부 해역방위국 부관장교
1927.10. 3 ~ 1927.12.16: 순양함 님페 발령, 승함 전 항로 및 정보교육 이수
1927.12.17 ~ 1928. 9.23: 순양함 님페 항법장교
1928. 9.24 ~ 1930. 9.29: 제4어뢰정 전단장
1930. 9.30 ~ 1934. 9. 9: 북해 해군기지 참모 겸 기지 사령관 수석 제독참모장교
1934. 9.29 ~ 1935. 9.21: 순양함 엠덴 함장
1935. 9.22 ~ 1935. 9.26: 해군 총사령관 직접 명령에 의한 대기발령
1935. 9.27 ~ 1936.10.13: 베디겐 전단장으로서 잠수함대 육성
1936. 1. 1 ~ 1939.10.16: 잠수함대 지휘관
1939.10.17 ~ 1943. 1.30: 잠수함대 사령관(소장 진급[22] 및 잠수함대 확대 개편에 따른 지위 격상)
1943. 1.30 ~ 1945. 4.30: 해군 총사령관
1945. 4.17 ~ 1945. 4.30: 북부 유럽 국방군 총사령관[23]
1945. 4. 30 ~ 1945. 5.23: 독일 제국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 사령관
1945. 5.23 : 영국군에 신병 인도
1945. 5.24 ~ 1946.10. 1: 영국군 형무소 수감
1946.10. 1 ~ 1956.10. 1: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피고 출석,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및 전쟁 범죄 항목에서 유죄 판결, 10년형 언도 후 복역
1956.10. 1: 만기출소
1958: 전쟁 회고록 《10년 20일》 완성, 출간
8. 진급 내역[편집]
1911. 4.15: 해군 사관후보생(Fähnrich zur See)
1913. 9.27: 소위(Leutnant zur See)
1916. 3.22: 중위(Oberleutnant zur See)
1921. 1. 1: 대위(Kapitänleutnant zur See)
1928.11. 1: 소령(Korvettenkapitan)
1933.10. 1: 중령(Fregattenkapitan)
1935.10. 1: 대령(Kapitän zur See)
1939. 1.28: 준장(Kommodore)
1939.10. 1: 소장(Konteradmiral)
1940. 9. 1: 중장(Vizeadmiral)
1942. 3.14: 대장(Admiral)
1943. 1.30: 원수(Großadmiral)
9. 수훈 내역[편집]
1913. 6. 7: 프로이센 명예 기장 은장
1914. 11.7: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1914. 11.7: 오스만 제국 철 초승달 전공 기장
1916. 5. 5: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1917. 7.25: 잠수함 전투 기장
1935. 1.30: 최전선 전투 명예 십자 훈장
1939. 9.18: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1939.12.20: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1940. 4.20: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 무공 훈장
1940. 4.21: 기사 철십자 훈장
1940. 6.10: 스페인 전역 해상전 참전 공로 대십자 훈장
1943. 4. 6: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23번째 수훈)
1943. 4. 7: 루마니아 미하이 용맹 전공 2급, 3급 훈장
1943. 9.11: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
1944. 1.30: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명예 기장 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