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기독교로부터 근대 문화의 해방
어떤 이들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64년 졸)를 첫 근대 사상가라고 보았다. 또한 어떤 이들은 족히 1세기 후에 등장한 브루노(Giordano Bruno)를 그렇게 보기도 한다. 근대의 개념은 틀림 없이 15세기로 소급된다. 이미 1435년에 이미 마테오 팔미에리(Matteo Palmieri, 1475년 졸)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저술했는데, 이것은 이미 지오토(Giotto), 단테(Dante),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등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루니(1444년 졸)는 새로운 시대가 떨어져 나와야 할 중세의 개념을 파악했다. 그는 중세를 가리켜 非로마인들이 로마 세계로 흘러 들어옴으로써 고대를 종식시키기 시작한 기간이라고 규정했는데, 상징적으로는 410년 알라리히를 통한 로마의 강탈 사건을 가리킨다. 근대는 다시금 고대의 갱신으로, “르네상스”로 등장했다. 고대의 규범적 모범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서양에서 분명히 15세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컨데 여러 파고가 있었다는 말이다. 7,8세기 카톨링 왕조의 르네상스를, 또한 12세기의 르네상스를 거론할 수 있다. 14,15세기의 르네상스는 예술과 철학 분야에서 고대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이런 파고를 지속시킨 것 뿐이다. 서구의 기독교 교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정복당하여 비잔탄 제국이 몰락함으로써, 또한 이런 결과로 인한 비잔틴 학자들이나 망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파고를 강화시킨 것이다. “고대”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은 먼 후일에 자신들의 문화에 합당한 의미를 상실한 결과를 빚었다. 17세기 끝무렵 프랑스에서 일어난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고대와 근대의 논쟁)이 그 신호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근대 저작자들이 자신들의 고대 전형들을 중요하게 숙고해야한다는 명제가 관철됨으로써 당대에 자연과학과 철학과 예술의 발전에서 발생한 것들이 보편 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곧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 즉 고대의 전형들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향해서 방향을 잡는 것이었다. 근대의 개념은 이제 완전한 울림을 내게 되었다.
15세기의 르네상스에서 일어난 고대의 갱신은 결코 기독교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았다.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에 의해서 토대가 잡리고, 특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에 의해서 선전된 르네상스 해석은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기독교는 고대의 유산에 동화되었으며, 북유럽의 피선교 민족들에게 그런 영향을 끼쳤다. 고대로 복귀하고 고대를 갱신하는 일이 -철학과 예수로부터 교부들에게 이르기까지- 결국 기독교적인 것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플로렌스의 건축물들은 그리스나 로마 신전의 고전적 형식을 갱신하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의 바질리카 스타일을 갱신했다. 피사(Pisa)에서 유래하는 조각술의 갱신이나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진 플라톤주의의 갱신에서도 역시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
근대 문화가 기독교로부터 해체되는 보다 결정적인 의미는 17세기에 이르러서 발견된다. 물론 이것이 기독교 전반으로부터 발길을 돌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종파적 교리의 모순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 교리의 모순에서는 모든 측면이 초자연적 계시의 권위를 무조건 증거로 삼으려 했다. 딜타이는 근대 사회와 문화가 출현하게 된 이 시대의 획기적인 의미를 17세기 국가철학, 법, 윤리, 그리고 자연 종교를 인간 본성의 개념에 근거해서 새롭게 설정한 사실에 대한 자기의 논문에서 부각시켰으며, 또한 그는 이미 이에 대한 동기를 그 시대의 산물인 종교 분리와 종교 전쟁에 대한 경험에서 인식했다.
이런 경험의 배경에서 일반적으로 세속화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이 이해되어야만 한다. 국가와 법 개념을 인간의 본성에 근거해서 새롭게 설정하는 일 자체가 이미 이러한 세속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국법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근대 국가론의 모든 의미심장한 개념은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주권 개념에서 우리는 사실상 교황권에 관한 학설과 정치적 절대주의의 근원 사이에 놓여 있는 연관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적인 만인제사장론이나 또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조직의 특성과 근대의 민주적 법 사상의 발단 사이에 놓인 연관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밀턴(John Milton)은 크롬웰 시대에 민중의 정치적 자유와 자치가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 시대에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여되었다는 성서 이야기를 그 근거로 삼았다.(민수기 11:29). 밀턴이 살던 영국에서는 칠십 명의 장로만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이 자치 능력을 허락하는 예언의 영에 의해서 사로잡혔다. 여기서 신정(神政)주의와 민주주의가 성령론을 통해서, 즉 기독교인의 마음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표상을 통해서 의미심장하게 연결되었다. 그 다음 시대에는 영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한다는 생각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신정주의 대신에 민중의 주권에 대한 사상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속화의 한 경우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칼빈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발단에 끼친 영향을 제시함으로써 세속화 과정의 가장 유명한 한 예를 서술했다. 베버는 이렇게 생각했다. 도덕적인 면에서나 특별히 직업적인 면에서 개인적인 확신을 통해서 선택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관심은 칼빈의 예정론에 의해서 그 토대가 잡혔는데, 그 관심과 예정론은 금욕적인, 그리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삶의 태도를 만들어낸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다. 세월이 흐르자 경제생활의 합리적인 조직 원리는 당연시 되었지만 종교개혁적 직업윤리의 종교적 뿌리는 고사되었다. 베버는 여기서 물론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져온 정당한 결과를 주시했으며, 또한 그 발전에 의해 개인들에게 실행된 강요가 가져온 결과를 주시했다. 그런데 이런 발전의 정치적, 문화적 조건에 대해서 좀더 심층적인 연구가 없었다. 어쨌든지 이런 일이 벌어짐으로써 종교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전쟁 종식을 통해서 17세기의 변혁이 이루어졌다.
칼 뢰비트는 1949년 자신의 책 “역사 내의 의미”에서 세속화 과정에 대해 막스 베버와는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 뢰비트는 딜타이가 이미 주목했던 문제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것은 곧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보슈에(Bossuet)는 보편사를 신학적으로 설명했는데, 뛰르고(Turgot)의 보편사 계획은 역사 진행을 순수 합리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보슈에의 그 시도를 대체해보려고 했다. 딜타이는 이런 순수 합리적 묘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뛰르고는 이를 통해서 “역사 철학을 세속화” 했다는 것이다. 뢰비트는 뛰르고의 프로그램을 볼테르로부터 꽁도르세와 꽁트에 이르는 프랑스 역사철학의 발전에서만 정리한 게 아니라 그 뿌리를 보슈에로부터 어거스틴까지 추적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저서가 말하고자 하는 명제의 기초를 세웠다. 그 명제는 다음과 같다. 뛰르고와 볼테르에게서 시작해서 헤겔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근대의 역사 철학은, 역사 진행을 규칙화하는 신적인 섭리에 대한 표상을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인류가 진보한다는 사상으로 대체시켰다. 이제 하나님 대신 인간이나 인류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보 신앙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창조와 미래적 완성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먹고 사는 게 틀림 없다. “비록 이것이 미미한 신화로 단주되더라도 말이다.”
뢰비트의 명제는 1966년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자기의 저서 “근대의 합법성” 제 1장에서 세속화 표상을 다루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비판한 대상이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블루멘베르크는 이미 세속화 표상을 통해서 근대 문화의 근원에 놓인 비합법성을 근대 보다 하위에 두었다. 법 개념으로서의 세속화가 교회 재산의 수용을 가리킨다면 이러한 표상의 전이로 인해서 여기서 핵심적인 한 선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근대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문화사적 선례에서 다루게 되었다. 이 선례는 실제로는 틀림 없이 존재해본 적이 없었던 그것이다. 왜냐하면 근대가 자신들의 독립성에 근거해서 이 근원들로부터 떨어져나왔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기초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래도 근대는 그들 이념의 실체적 내용을 기독교적 동기와 내용의 덕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주장에 따르면 세속화 명제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블루멘베르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근대 역사 철학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것은 소위 수용된 재산도 아니고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관의 근원인) 종말론과 진보신앙은 재산과 달리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또한 근원적 소유권의 합법성은 기독교에서 역사의 테마로 주장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오히려 마지막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신약성서의 기대는 “역사의 표상과 설명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소유권에 대한 “강탈의 일방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종말론이 인간들로부터 신뢰성을 상실한 이후에 근대의 진보 이념이 기독교의 종말론을 이어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뢰비트를 반대하는 블루멘베르크의 논증은 그 당시에 널리 유포되었던, 그러는 사이에 결국 진부해진 전제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다. 요컨데 역사와 종말론의 근본적인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뢰비트도 역시 기독교의 역사신학을 종말론적 기대가 느슨해진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역사 신학과 종말론을 이렇게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종말론은 페르시아의 이원론에서 유래한다는 종교사적 가설로 소급되었다. 오늘날 이 문제는 이렇게 정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발생한 종말론적 기대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한 유대교적 역사 신학과 그 발전의 연관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종말이 선취(先取)적으로 개시되었다는 원시 기독교의 경험을 통해서 이 기대는 변경되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변화된 기독교의 구원사적 신학 형태 안에서 계속 발전되었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기독교 역사신학에서 발생한 근대 역사철학의 근원에 대한 뢰비트의 명제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블루멘베르크의 비판적 논증에 따르면 섭리사상과 진보이념이 상호간 이질적이라는 명제가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뢰비트의 입장에 대한 이의가 결코 되지 못했다. 뢰비트는 블루멘베르크에 대한 답변에서 지적하기를, 자기는 진보이념을 신학 사상의 “변경”(Metamorphose)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뢰비트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구원사는 미래 지향적 지평을 열어놓았다는 명제를 일관되게 유지했는데, 이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계몽주의에서는 이 미래 문제가 내용적으로 차이가 났다. 말하자면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를 경험함으로써 등장하게 된 보편적 진보이념을 통해서 이 미래의 지평이 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뢰비트는 “세속화”의 실태가 무엇인지를 눈여겨 보았다. 그외에 에른스트 트뢸치도 역시 이미 “일종의 보편적인, 전인류에게 해당되는 마지막 목표”라는 관점에서 그 사실을 주장한 바 있다. 이 마지막 목표라는 것은 역사철학적 진보신앙 안에 있는 “세속화”를 통해서 “기적과 초월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자연적 해명과 내재의 영역으로 전위”된 것이다.
뢰비트나 막스 베버와 달리 블루멘베르크는 세속화 명제를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나 역사철학 같은 개체적인 표상군(群)과 관계시키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 신기원인 근대가 일반적으로 그보다 앞선 기독교의 중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관계시켰다. 세속화 명제의 이러한 보편화는 블루멘베르크가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한 저자들 중에서 특별히 바이체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주장했다. “근대 세계”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세속화에 의한 결과로 이해될수 있다”고. 바이체커는 이 주장의 근거를 대기 위해서 두 개의 예를 든다. 첫째로 “엄밀하고 보편타당한 자연법칙”의 전제는 기독교적 창조신앙의 전제와 별개이며, 둘째로 신론에 대한 실제적인 무한성 표상이 세계 개념으로 전이되었다. 그렇지만 “근대 세계”는 “기독교의 세속화에 의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 명제는 이러한 개개의 예를 훨씬 벗어난다. 바이체커는 이 명제를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에게서 넘겨 받았다. 고가르텐은 명실상부 근대를 “세속화된 세계”로 언급한 인물이다. 물론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세계를 비신성화시킨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이 적극적으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기독교 신앙이 세계와 자유롭게 맞서 있는 인간의 자주성을 제고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런 언급을 한 것이다.
중세기로부터 근대로 변화해가는 그 신기원적 전환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하여 블루멘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명제를 통해서 근대의 “합법성”과 그 “이념적 소유권”을 방어했다. 즉 인간은 후기 중세기 신학의 “신학적 절대주의”를 통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대항해서 아주 힘들게 자기를 주장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명제이다. 하나님의 절대에 대한 옥캄의 학설에서 권능 사상이 상승됨으로써 예정론을 통해 인간 개개인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의 손아귀에 일임되어 인간 각자는 의미심장하게 세계연관 안에 긍정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을 항거하는 대안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 명제는 역사적 재검사를 받지 않았다. 개인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은 인간에게 은폐되어 있는데, 어거스틴의 절대 예정론 사상은 이 결정을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후기 중세기에서 주제화 된 “전제적인” 그런 모든 것과 관계가 없다. 중세기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결정을 인간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지(先知)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최소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서만은 그랬다. 이것은 둔스 스코투스에게 맞는 말인데, 블루멘베르크는 둔스 스코투스의 학설의 명확한 주장을 반대하면서 인간 실존이 “부당하게 유기되는 것”에 대한 표상을 둔스 스코투스의 탓으로 돌렸다. 하나님의 절대에 대한 교리는 한나님에 의해서 실제로 결정된 구원질서(potentia ordinata)의 은총 성격에 은박을 입히는 것 뿐이었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에서 발견되는 엄격성은 리미니(Gregor von Rimini)나 칼빈 같은 근단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추후에 갱신된 것이다. 후기 중세기의 신학적 주의주의(主意主義)는 블루멘베르크가 주의주의에 종속시킨 반인간적 경험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있었다. 아라비아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아페로에스주의(Averroismus)의 세계상을 극복하려는 둔스 스코투스나 빌헬름 옥캄 같은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도 중요했다. 또한 블루멘베르크는, 헤겔이 정당하게 판단한 바 처럼 인간의 자유를 무한하게 확증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명성 제고를 위하여 기여한 기독교 성육신 신앙과 그 여파를 완전히 간과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에 대한 기독교의 핵심적 구원론은 이런 중요성을 후기 중세기 신학에서도 올곧게 유지했기 때문에, 왜 인간은 기독교 신학을 통해서 자기의 현존에 대한 정당성과 그런 자유 안에서 압박을 당해야만 했는지가 탐구되지 않았으며, 또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항해서 인간적인 자기 주장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충격이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16세기로부터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초기 근대의 문서들도 역시 블루멘베르크의 명제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볼떼르 이전에는 중요한 사상가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기독교의 신관에 반기를 드는 것과 같은 일들을 하지 않았다. 볼테르마저도 주로 성직자주의와 반이성과 투쟁했지 복음서의 하나님과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와 평화를 이룬 채 죽었다. 스피노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데카르트로부터 로크와 라이프니쯔에 이르기가지 대개의 주도적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을 해석하는 일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즉 변화된 세계像과 하나님 신앙을 조화시키는 작업이었다. 18세기가 진행되면서부터 이제 기독교와 관계된 문화적인 기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인간像은 블루멘베르크에 의해서 비로소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독립한다는 표현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다. 19세기의 기독교 각성신학이 계몽의 합리주의에게 가한 비판은, 그리고 금세기에 칼 바르트가 새로운 신학사를 논하면서 가한 유사한 논증은 이 주제에 대해서 아주 흡사한 입장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것은 18세기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었지 17세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대립적인 평가였지만 바르트와 블루멘베르크의 주장에는 기원적 단절이라는 진단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기원적 단절은 인간이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매듭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18세기에 이러한 단절이 발생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유포된 시각이다. 칼 뢰비트도 역시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이 점에서는 블루멘베르크와 일치한다. 즉 근대에는 인간의 주체성이 “절대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표상”의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은 17세기에 대한 블루멘베르크의 경우와는 달리 18세기에 대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옳은 주장이다.
이미 언급된 그들 주장의 공동점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들어 있다. 즉 그들은 근대가 발생하게 된 그 기원적 단절을 순수하게 정신사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변혁(Umbruch)으로 묘사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세속화 모델과 마찬가지로 블루멘베르크와 바르트의 입장에도 있다. 근대의 초기에 있었던 변혁을 이렇게 진술함으로써 그들은 한결같이 공동의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이미 딜타이가 강조했던 사실을, 즉 그 어떤 순수 정신적인 동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으로 인한 파괴적인 전쟁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7세기 중반에 있었던 이런 경험은 국가, 법, 그리고 도덕에 대한 사회 체제의 기초를 종파적 대립에 상관 없는 기반 위에다 새롭게 다져가게 했다. 일종의 이러한 기반으로서 인간의 보편적 본성 개념이 제공되었으며, 이런 기반 위에 정신과학의 “자연적 체제”가 놓여지게 되었다. 이 자연적 체제라는 말은 딜타이가 붙인 이름이다. 즉 합리적인 자연법, 자연법에 기초한 국가론,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윤리, 그리고 결국 그런 것과 똑같은 기초에 기인하는 종교론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그 중심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을 반대하자는 기도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자연 종교와 도덕의 학설은 예수의 복음이 가르치는 학설과 일치한다고 믿었다. 영국의 이신론은 예수의 사신(使信, Botschaft)을 이렇게 해석했다. 즉 예수의 사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방인의 불신앙과 유대인의 율법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연종교를 회복한 것이라고 말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보듯이 기독교와의 틈이 벌어졌다는 것은 이신론적 성서비평과, 그리고 어떤 지역에는 아직 관철되지 못한 자연종교와 자연도덕의 표준성이 반성직자주의를 야기시킴으로써 이제 다른 종교 문화에 대해서, 특별히 중국 문화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 없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 이제 성공적으로 앞장을 서게 되었다는 현상과 비슷하게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비이성적이고 과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서만 이런 틈이 벌어질 수 있었다고. 17세기가 국가, 법, 도덕을 새롭게 설정하는 기반인 인간론으로 전향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점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다. 이러한 틈은 이제 종파적 교리 논쟁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두 번째 국면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만 옪은 주장이다.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사실상 교회적인(kirchlich) 기독교는 자기와 대립적인 종파의 입장에 대해서 적대적인 독단론에 빠져버림으로써 보편타당성에 대한 요청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렇게도 격렬하게 논란을 벌였던 세속화가 진쟁되었다. 이 세속화를 판단하려면 세속화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적합하게 표현될 수 있는 그 선례들이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또한 이런 선례들이나 그 전체가 근대의 출현을 역사적 기원으로서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완전히 다른 질문이 구별되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긍정되어야 하고 둘째 질문은 부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막스 베버의 명제는 초기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금욕적 노동윤리의 동기가 근원적으로 칼빈의 예정론에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이 예정론과 연결된 루터의 직업윤리의 기능변화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발생이 전반적으로 설명된 것은 물론 아니며, 또한 자본주의 발전의 후기에 종교적 동기의 중요성이 희박해진 이유가 설명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작용하는 금욕적 노동윤리는 근원적으로 종교적인 동기가 세속화 되어 끼친 여파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진보 사상은 전체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진보사상이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이 세속화 된 것이라는 판단은 옳은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이 경우에 기독교의 종말론적 기대가 진보 사상을 내용적으로 “둘러싸고”(Umbesetzung) 있기 때문이다. 진보 사상은 모든 역사 해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생했으며, 그 시작이 직접 고대로 소급된다고 볼 수도 있다. “진보사상이 종교적 역사 해석에 개입함으로써” 근대의 진보 신앙을 세속화로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블루멘베르크가 생각했듯이 “진보 사상이 역사에 내재한,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지금 여기 함께 하는 구조를 특별히 빛나게 만드는 데 반해서, 종말론은 역사를 단절시키고 돌입해오는 사건을, 즉 스스로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사건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뢰비트는 이에 덧붙여 “근원적으로 초월적인 관계 의미를 내재적으로 세속화할 수 있는, 그리고 근원적인 의미에 상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면 ‘세속화’는 도대체 무슨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는데, 이는 옳다. 공통되는 점은 단지 전반적으로 기독교 희망과 같은 진보 신앙이 역사를 완성할 목표를 갖고 살아간다는 점 뿐이다. 기독교 희망이 내용적으로 진보 사상을 “둘러싼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론이 “세속화”되는 한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계몽주의의 역사철학도 역시 기독교 역사신학의 “세속화”로 판정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화 과정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전혀 답변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는 초기 근대로부터 근대주의에 이르는(중세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대가 전혀 아니다) 사이의 기원적 전환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세속화에 대한 생각은 기원적 전환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세속화는 순수 정신사적으로 이해되면 안된다. 오히려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전쟁에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결정되지 못한 결과에서 발생된 것이다.
인간 본성을 받아들인다는 기반에서 사회를 재건하려는 과정의 틀 안에는 데카르트에 의한 철학의 갱신이라는 사정도 역시, 물론 17, 18세기에 이루어진 계속된 발전의 사정도 역시 기독교 신학에서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계시론에 맞선 철학의 자유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신학을 갱신하려는 그 노력이 말이다. 이 경우에 인간의 반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출발점이지 신관의 사실적 기초는 아니다.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문화의 근본으로 만들려는, 그리고 신관을 인간 정신의 산물로 설명하려는 경향에 맞서 하나님이 인간 주체성과 세계인식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인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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