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1장-10장)
<차례>
1917년 첫 2개월 동안 러시아는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였다. 그러나 8개월 후 볼셰비키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자들이 권좌에 올랐을 때 이들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에 있었다. 역사상 이렇게 모든 일이 순식간에 바뀐 경우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1억5천만 인구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1917년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건 이것들을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른 모든 역사서술과 마찬가지로 혁명역사의 서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서술을 제대로 하자면 어떤 일이 왜 일어났으며 왜 이렇게만 일이 일어났는지 즉 그 이유와 필연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 사건들을 일련의 모험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또 어떤 미리 정해진 도덕률에 따라 꿰어 맞추어서도 안된다. 이것들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 역사서술자의 임무이다.
역사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 평상시에는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국가가 인민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역사는 정치 전문가들 즉 왕, 각료, 관료, 의원, 기자 등에 의해 창조된다. 그러나 대중이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들은 정치의 각축장에 자신들의 접근을 막는 장벽들을 부순다. 그리고 이것들을 뛰어 넘어 기존의 대표기구들을 쓸어 없애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개입하여 새로운 체제의 기초공사를 시작한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도덕가들의 판단에 맡겨두자. 다만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과정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혁명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힘있게 들어서는 역사이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회에서 계급들은 서로 대항하며 투쟁한다. 그러나 혁명의 시작과 끝 사이에 도입되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계급적 기반의 변화들은 혁명의 전개과정 자체를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혁명은 짧은 시차를 두고 오래된 제도들을 뒤집고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을 뒤집는다. 혁명 이전에 이미 형성된 계급들의 빠르고 강렬하고 격렬한 심리변화에 의해 혁명 사건들의 원동력이 직접 결정된다.
사회는 자신의 제도들을 기계공이 연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사회는 자기에게 매달리는 제도들을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되는 반체제 세력의 비판은 대중의 불만을 배출시키는 안전밸브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다. 예를 들어 짜르체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비판이 원칙적으로 이와 같았다. 대중의 불만에 덮어 씌워진 보수주의의 멍에를 벗기고 대중을 봉기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정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외적인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한다.
혁명 시기에는 대중의 견해와 정서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는 인간 심리의 융통성과 기동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깊이 뿌리 박힌 보수주의 심리로부터 나온다. 새로운 객관적 상황들이 재앙이 되어 인민의 머리 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인간의 사상과 관계들은 고질적으로 객관적 상황에 뒤쳐져 있다. 바로 이 상황이 혁명 시기에 볼 수 있는 사상과 열정의 폭발적 운동을 창조한다. 이것은 경찰관의 눈에는 "선동가들"의 활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한 것을 배후에 깔고 있다.
대중은 사회 재건의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 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 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한다. 혁명의 근본적 정치과정은 대중이 사회위기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 즉 연속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대중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데에 있다. 혁명의 각 단계들은 지도적 정당들의 변화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정당 내의 더 과격한 분파가 항상 덜 과격한 분파를 밀치고 등장한다. 이것은 혁명운동의 파도가 객관적인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는 한 대중이 왼쪽으로 운동을 더욱더 압박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객관적 장애물이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을 때 반동이 시작된다. 즉 혁명 대중의 다양한 부위들이 상황 전개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하고 혁명에 대한 환멸을 증대시킨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의 입지가 강화된다. 최소한 이것이 과거 혁명들의 일반적 경향이다.
대중 자신의 정치적 과정들을 연구한 기초 위에서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당들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혁명과정의 독립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지도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혁명 시대에 나타나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연구하는 데 이런 저런 어려움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억압받는 계급들은 공장, 군대의 막사, 농촌의 마을, 도시의 거리 등 관심이 안가는 장소에서 역사를 만든다. 더욱이 이들은 사물들을 글로 적는 일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사회적 갈등이 높은 시기에는 명상에 잠기고 반성할 여지가 거의 없다. 모든 뮤즈 여신들 특히 언론을 관장하는 인민 성향의 뮤즈 여신은 엉덩이가 튼튼하기는 해도 혁명이라는 썰매의 요동과 충격을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격동의 시기에는 글들이 남아나기 힘들다. 그러나 역사가의 상황이 가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 기록들은 불완전하고 흩어져 있으며 우연히 여기저기에 발견된다. 그러나 벌어지는 사건들의 조명을 받아 이 단편적인 기록들은 숨겨진 역사과정의 방향과 리듬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좋든 나쁘든 혁명정당은 대중 의식의 변화를 계산하여 전술을 수립한다. 볼셰비키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계산이 거칠게나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계산이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혁명 지도자에게 가능하다면 혁명이 지난 후 역사가가 이 계산을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주의자들과 절충주의자들이 아무리 소동을 벌인들 의식은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러시아라는 나라, 그 경제와 계급들 그리고 그 국가기구를 형성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에 가한 작용 속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전제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주인으로 올려놓은 첫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이 후진국의 특이성 즉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점들 속에서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해명해야 한다.
본 저서의 첫 몇 장들은 러시아 사회와 그 내부 세력들의 발전과정을 짧게나마 훑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역사적 특이성과 이 특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다루어질 것이다. 이 첫 장들의 불가피한 도식적 서술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멀리하지 않기를 감히 희망한다. 본 저서를 계속 읽다 보면 러시아 내부 세력들을 살아 움직이는 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저서는 필자 개인의 회상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과정에 필자가 참여했다 하더라도 엄격히 고증된 문서들에 기초하여 서술해야할 의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술에 꼭 필요하다면 혁명 참가자인 필자는 제 3인칭으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주관적 목소리는 역사 저서에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혁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세력들의 심리 뿐 아니라 사건들의 내적 관련들을 필자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혜택은 하나의 조건이 지켜질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소한 사항이건 중요한 문제이건, 사실과 관련된 문제이건 행위의 동기와 정서의 문제이건, 필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하나의 조건이다. 필자가 역사서술자라는 임무를 유념하는 한 이 조건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또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필자는 혁명에 참여했을 때나 역사서술자로 있는 지금이나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독자는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할 의무가 없다. 이 점을 필자는 전혀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역사서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서는 안되며 내적 기초가 탄탄한 혁명의 실제과정에 대한 묘사가 되어야 한다고 독자가 요구할 권리는 없다. 역사서의 지면을 통해 역사 사건들이 완벽한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될 때, 이 때만 역사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소위 역사가의 "중립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중립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본 적이 없다. 혁명을 하나의 "덩어리" 즉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자주 인용되는 끌레망쏘(역자 주: Georges Clemenceau,1841~1929,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수상.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수상직에 있었음. 제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기초함)의 말은 기껏해야 이 문제를 재치 있게 회피할 뿐이다. 각 세력들의 분리와 상호투쟁이 핵심인 혁명이라는 사물을 어떻게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의 경구는 부분적으로는 너무 주관이 강해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역사서를 저술했던 자기 선조들이 부끄러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선조들의 그늘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반동적 경향의 따라서 인기 있는 역사가 중의 하나가 마들렝(Madelin)이다. 그는 사교계 응접실에서 하는 것처럼 조국의 근대적 탄생을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을 비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가는 적에게 포위 당한 도시의 성벽 위에 서서 포위 당한 쪽과 포위한 쪽을 동시에 조망해야한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화해적인 중립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자기가 성벽에 올라서서 두 적대 진영을 바라볼 때 반동세력의 정찰병으로서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가 과거 전쟁 중인 적대 진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혁명 시기에는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 더욱이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갈 경우 "화해적인 중립성"을 주창하는 자들은 보통 방안에 앉아서 어느 쪽이 이기는 지를 기다렸다가 이긴 쪽에 붙는 것이 보통이다.
진지하며 안목이 있는 독자는 이 위험천만한 중립성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이 중립성이라는 놈은 컵 밑바닥에는 반동적 성향의 증오심을 가득 가라앉힌 채 컵의 위쪽 부분에만 화해의 단맛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놈이다. 현명한 독자는 차라리 과학적 양심을 원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과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사실들을 정직하게 연구하고 사실들 사이의 진정한 관련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사실들의 움직임을 통해 인과법칙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의 지지를 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적 객관주의이며 그 자체로 충분한 역사서술 방식이다. 왜냐하면 역사서술자 자신의 좋은 의도는 자기만이 보증할 수 있는 반면 그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과정 자체의 필연법칙은 모두에게 이 서술방식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본 저서를 위해 동원한 자료는 여러 정기간행물, 신문, 잡지, 회고록, 보고서 등이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원고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대다수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혁명역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것들이다. 본문에서 특정 출판물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을 귀찮게 할뿐이므로 생략했다. 필자가 특별히 자주 사용한 자료 가운데에는 집단적 역사서의 성격을 띤 저서가 있다. 두 권으로 구성된 [10월 혁명사에 대한 시론집](1927년, 모스크바-레닌그라드)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저자들이 참여한 이 책의 각 부분들은 특별히 귀중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사실관계 자료들을 풍부히 포함하고 있다.
본 저서에 언급된 날짜들은 모두 구력에 의한 것이므로 국제적으로 그리고 현재 소련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력보다 13일이 늦다. 혁명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력을 사용해야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 물론 구력을 신력으로 바꾸는 수고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수고를 없애는 것 말고도 다른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한 혁명은 2월 혁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 바꿀 경우 3월 혁명이 된다.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저항한 무장 시위는 "4월 시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는 5월이 된다. 다른 사건들과 날짜를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은 신력으로 11월에 일어났다. 다 알고 있듯이 달력이란 역사 사건들로 채색되어있다. 따라서 역사가는 단순한 산수 계산으로 혁명 연표를 다룰 수는 없다. 구력을 타도하기 전에 혁명은 먼저 구력에 집착해 있던 구제도들을 타도해야 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선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
프린키포에서,
1930년 11월 14일.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 이 결과가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수준의 낙후성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광활하고도 거친 대평원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 민족들의 이동에 자신을 열어주었다. 이 대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민족들은 불리한 자연조건에 의한 오랜 후진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17세기 끝까지 계속되었다. 겨울 추위와 여름 가뭄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해 이들은 아직도 힘겹게 싸우고 있다. 사회 발전의 기초인 농업은 집약농업이 아니라 조방농업으로 발전했다. 북쪽에서 이들은 숲을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남쪽에서는 태초 그대로의 광활한 초원지역을 침입했다. 자연 정복은 깊고 철저히 진행되기보다는 느슨하게 산지사방으로 전개되었다.
서쪽의 야만 민족들은 로마문화의 폐허 위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오래된 수많은 돌이 건축재료로 즉시 이용될 수 있도록 널려있었다. 반면 동쪽의 슬라브족은 황량한 평원에서 문화 유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이 만든 문화가 선조의 문화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서유럽 민족들은 자연이 만든 국경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 결절점인 상업도시들을 건설했다. 반면에 동쪽 대평원의 민족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징조가 나타나는 순간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광활한 초원 위로 퍼져나갔다. 서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부위는 도시민, 수공업자, 상인이 되었다. 동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부위는 더러는 상인이 되었으나 대부분은 카자흐(역자 주: 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의 혼혈 종족. 유목생활을 하며 러시아 제국 시절 반동적 군대를 제공하는 대신 독립적 특권을 일부 누렸다.)와 변방 개척민이 되었다. 서쪽에서는 치열한 사회분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이 과정이 지연되거나 국경의 확장에 의해 묽어졌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비코(Vico)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인 모스크바의 짜르는 머리가 느려터진 민족을 통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느려터진” 머리는 경제발전의 느린 속도, 사회 발전의 낙후성에 따른 계급 관계의 미분화, 내부 역사발전의 일천함을 반영하였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문명들은 생산력이 낮았다. 그러나 공예품의 정교함과 맞먹는 수준으로 사회 관계들을 발전시킬 자족적 특성과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리, 사회, 역사에 있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했다. 따라서 서유럽 뿐 아니라 동방의 아시아와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 한때는 전자에 또 한때는 후자에 접근했다. 동방은 러시아에게 타타르족(역자 주: 칭기즈칸을 따라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침략한 몽고계, 터어키계 유목민족)의 야만성을 멍에로 씌웠다. 이 멍에는 러시아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방은 동방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동방의 사회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방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러시아에 봉건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후의 연구를 통해 봉건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인정된 것 같다. 더욱이 러시아 봉건제도의 근본 요소들은 서방의 것들과 같았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존재는 더 많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확립되어야 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봉건제도의 불충분한 발달, 미분화, 문화적 업적의 빈곤 등이 충분히 입증된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물질적 지적 성과를 흡수한다. 그러나 이 성과를 노예처럼 비굴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선진국의 모든 발전 단계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는다. 비코와 최근 그의 추종자들은 순환적 반복적 역사관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 역사관은 오래된 전(前)자본주의 문화권들의 반복적 순환현상들을 관찰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첫 실험들을 관찰한 결과이다. 계속 새로 존재하는 유럽인의 식민지들은 문화적 단계들을 일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현상은 문화발전 자체의 지방적이며 일회적인 특성과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조건들을 극복한다. 자본주의는 인간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준비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한다. 이로써 후진국은 선진국의 발전 형태를 반복하지 않는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뒤따르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순서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후진성의 특권은 진짜 존재한다. 특정 시점에서 최신 성과들을 바로 받아들이면서 후진국은 발전의 중간단계들을 건너뛴다. 야만인은 활을 내던지고 즉시 소총을 무기로 사용한다.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무기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했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자본주의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영국 석탄산업 그리고 맥도널드(역자 주: 영국 노동당 당수로 최초로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부관으로 기능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표하는 서구 개량주의의 시조.)일당의 두뇌는 보수적 무질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선구자였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보복인 셈이다. 후진국의 발전 과정은 역사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특이하게 결합한다. 이 결과 무계획성, 복잡성, 결합성 등이 일반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물론 중간단계들을 건너뛸 가능성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에 달려있다. 더욱이 후진국은 자신의 토착 원시문화에 외국문화를 도입하면서 아주 빈번하게 외국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품질을 떨어뜨린다. 이렇게 흡수과정 자체는 자기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기술과 훈련의 일부 요소들 특히 군사적 공업적 요소들을 러시아에 도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생산조직의 기본 형태인 농노제는 더 강화되었다. 선진문화의 산물이 틀림없는 유럽의 군비와 신용대부는 봉건적 짜르 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 강화된 체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 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혼합된다. 이 법칙의 유물론적 내용 전체를 받아들인다면 러시아 또는 이류, 삼류 아니 십류 문화국의 어떤 역사도 이 법칙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부강한 유럽 제국의 압력을 받았다. 이 결과 서방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인민의 부를 국가적 목적을 위해 집어삼켰다. 러시아 인민은 이중의 빈곤을 강요당했고 유산 지배계급의 경제 기반은 약화되었다. 러시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동시에 이 계급의 성장을 강제하고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켰다. 이 결과 관료적 특권계급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아시아 전제군주제와 근접하였다. 16세기 초 짜르가 공식 채택한 비잔틴 전제체제는 신 귀족계급의 도움을 받아 봉건 보이야르(역자 주: Boyars,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 존재했던 러시아 구 귀족계급)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농민을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 신 귀족계급을 제압했다. 그리고 이 기초 위에 뻬쩨르부르그를 수도로 절대주의 제국을 건설했다. 16세기 말에 수립된 농노제는 17세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으며 19세기에 꽃을 피운 후 1861년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폐기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국가발전의 후진성이 전부 드러난다.
귀족계급 다음으로 성직자계급도 짜르 전제체제를 수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역할은 비굴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교회는 서방 카톨릭교회처럼 거대한 절정을 결코 맞지 못했다. 전제체제의 정신적 시녀 역할에 만족한 후 이것을 자신의 겸손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세속 권력의 부관이 되어야 그나마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교회의 수장인 대주교는 짜르가 바뀌면서 함께 바뀌었다. 뻬쩨르부르그 시기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성은 더 심화되었다. 20만 명에 달하는 신부와 수도승은 실제로는 국가관료집단의 일부가 되어 일종의 복음경찰이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회는 신앙, 토지, 수입 등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진짜 경찰의 보호를 받아 이것을 방어했다.
슬라브족 애호주의(Slavophilism)는 후진국의 구세주 사상이다. 이 사상은 러시아 인민과 교회는 철저히 민주적인데 러시아 국가기구는 표트르 대제가 강요한 독일 관료주의에 불과하다는 사고에 기초하였다. 이 사상을 맑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독일의 멍청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감화를 받은 프레드릭 2세의 압제에 대해 프랑스 사람들을 비난했다. 후진국 노예들은 선진국 노예들이 자기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짧은 논평은 슬라브족 애호주의자들의 낡아빠진 철학 뿐 아니라 최근 “인종주의자들”의 언행도 완벽하게 논박한다.
상업과 수공예의 중심지인 진정한 중세 도시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러시아 봉건시대 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빈곤을 가장 우울하게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수공업은 농업과 분리되지 못한 채 가내공업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었다. 러시아의 구 도시들은 상업, 행정, 군사, 장원의 필요에 따라 건설되었다. 따라서 생산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 중심지였다. 노브고로트는 한자동맹의 도시와 성격이 같았으며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조차 상업도시였을 뿐 공업도시는 아니었다. 넓은 지역에 걸쳐 농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규모의 중개무역업이 정말 필요했다. 그러나 유목민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이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 서방에서는 농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수공업 길드, 상공업 중소 자본가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러시아의 주요 무역로는 국경을 넘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주도권은 외국 상업자본에게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일종의 반(半)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 무역인들은 서방 도시와 러시아 농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개인에 불과했다. 이런 종류의 경제 관계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러시아 도시의 낮은 비중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식 국가기구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봉건관료적 정교회를 부르주아 사회의 요구에 걸맞는 현대화된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가기구에 저항하는 투쟁은 농민 종파들의 선을 넘지 못했는데 구신도(Old Believers) 종파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5년 앞서서 러시아 우랄지역에는 카자흐, 농민, 노동자-농노 등의 운동인 푸가초프 반란이 터졌다. 이 위협적인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전환되려면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해야 했다. 도시 산업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지도하지 않는 농민전쟁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이것은 농민 종파가 종교개혁의 절정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았다. 푸가초프 반란으로 귀족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관료적 절대주의는 강화되었다. 즉 원래 운동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위협받는 순간에 구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입증시켰을 뿐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러시아의 유럽화는 그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지배계급 귀족들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귀족계급의 지식층은 이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짜르의 권한을 제한하는 군사적 음모를 꾸몄다. 유럽 자본주의가 압력을 가하자 존재하지 않는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적 귀족층이 대신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려 했다. 따라서 농민을 자극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다. 이 결과 군사적 음모는 대중운동으로 확대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되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군대 장교들의 시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 시도를 포기했다. 제까브리스트(12월당) 봉기의 의의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공장을 소유했던 지주들은 농노제를 임금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을 찬성한 최초의 지주 분파였다. 러시아산 곡물 수출이 점점 늘어나자 농노제 해체의 흐름이 추진력을 얻었다. 1861년 자유주의 지주층의 지지를 업고 귀족 관료층은 농업개혁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이 겸허하게 들러리를 섰다. 짜르 체제는 러시아의 근본문제인 농업문제를 아주 인색하게 도둑놈처럼 해결했다. 다음 10년간 프로이센 왕정이 독일의 근본문제인 국가통일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보다 더 짜게 굴었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어느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는 후진국에 늘 있는 결합발전의 한 방식이다.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성격에서 결합발전의 법칙은 가장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늦게 시작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반복하지 않고 이 발전과정 자체에 스스로를 투여하여 자신의 후진성에 선진국의 최신 성과들을 접목시켰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수공업 길드와 공장제 수공업의 시기를 건너뛰었다. 이와 똑같이 공업의 각 부문들은 서방에서 수십 년이 걸린 기술단계들을 일련의 예외적인 도약들을 통해 건너뛰었다. 이 덕분에 러시아의 공업은 한순간에 예외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05년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공업생산은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이 현상 때문에 러시아 역사가들 일부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느린 발전속도라는 통념을 버려야 한다(저자 주: 포크로프스키 교수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결론 내릴 충분한 근거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 급속한 성장의 잠재력은 후진성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이 후진성은 구체제의 청산 직전 뿐 아니라 지금도 유감스럽게 유산으로 남아있다.
일국 차원에서 경제수준의 기본조건은 노동생산성이다. 그런데 이 노동생산성은 나라의 경제 일반에서 차지하는 개별 공업부문들의 상대적 비중에 달려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짜르의 러시아는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일인당 국민소득은 미국보다 8배에서 10배까지 적었다. 이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러시아에서 경제 인구의 5분의 4는 농업에 종사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농업인구 1인당 공업인구는 2.5인이었다. 그리고 덧붙일 필요가 있는 사실이 더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러시아는 1백 평방킬로미터의 땅에 철도의 길이가 0.4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독일은 11.7 킬로미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 킬로미터였다. 다른 비교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경제분야에서 결합발전 법칙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혁명 직전까지 러시아 농민의 토지경작은 일반적으로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공업은 기술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측면에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국들을 추월했다.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기업은 1914년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35%를 차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비율은 17.8%에 불과했다.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노동자를 둔 기업들의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가 동일했다. 그러나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둔 거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17.8%를, 러시아의 경우 41.4%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공업지구의 경우 이 비율은 더 높았다. 뻬쩨르부르그 지구에서 이 수치는 44.4%이었으며 모스크바 지구의 경우 심지어 57.3%까지 되었다. 러시아를 영국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필자가 1908년 최초로 확인한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부인하기보다 변증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공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 수준도 역시 러시아가 가장 높았다. 그리고 은행자본이 공업자본을 지배하듯이 서유럽 자본시장은 러시아 공업자본을 지배했다. 금속, 석탄, 석유 등 중공업은 거의 전부 외국 금융자본의 손안에 있었다. 한편 외국 금융자본은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종속적인 중간단계 은행들을 탄생시켰다. 경공업도 같은 처지였다. 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주식의 약 40%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업의 주요부문들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았다. 과장이 전혀 없이 러시아의 은행, 공장, 생산설비의 지배적인 주식은 해외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독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러시아 주식을 손에 넣고 있었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사회 성격과 정치적 모습은 러시아 공업의 유래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 공업의 극단적인 집중도(集重度) 하나만 보아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이 때문에 자본가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는 중간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주요 공업, 은행, 수송 관련 기업들의 소유주는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투자 이윤을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러시아 의회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그래서 러시아 의회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저해했다. 프랑스 정부의 부끄러운 짓거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고립과 반(反)인민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 역사의 여명기에 자본가 계급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너무 늙어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발전 과정에 조응하여 러시아 노동계급이 배출된 수원지는 공예-길드가 아니라 농업이었으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 형성된 영국의 노동계급은 전통의 짐을 그대로 지고 다녔다. 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환경, 끈, 관계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날카롭게 단절하여 도약했다. 짜르 국가의 집중된 억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 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마치 후진국이 자본주의 생산조직의 최신 발명품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일천한 역사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었다. 금속산업 특히 뻬쩨르부르그의 경우 세습 노동계급의 한 부위가 형성되면서 농촌과 완전히 단절했다. 그러나 우랄지역에서는 반(半)노동자 반(半)농민이 지배적이었다. 농촌으로부터 모든 공업지구들로 신선한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노동계급의 기본 수원지인 농민층은 노동계급과 연대를 계속 새롭게 했다.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무능력은 노동계급 및 농민과의 관계에서 직접 발생했다. 노동계급은 일상생활에서 자본가 계급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자기 문제를 아주 일찍 일반화하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은 농민도 지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지주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어떤 종류든 소유관계의 혁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 혁명이 늦게 터진 이유는 사회발전의 느린 속도 뿐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존재했다.
영국은 인구가 5백5십만이 넘지 않았을 때 부르주아 청교도 혁명을 완수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경우 2천5백만 인구 가운데 빠리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20세기초 러시아 인구는 1억5천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3백만 이상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이 비교 수치에 엄청난 사회적 차이가 숨어있다. 17세기 영국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에는 현대적 의미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의 농촌과 도시의 모든 공업 분야에서 노동계급은 1천만을 넘었다. 여기에 부양가족을 포함시키면 2천5백만이 넘는다. 즉 부르주아 대혁명 시기 프랑스의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크롬웰 군대의 주축이었던 억센 수공업자와 자영농민, 빠리의 평민, 뻬쩨르부르그의 공업노동자로 이어지면서 혁명은 사회체제, 투쟁 방식, 정치 목표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1905년 혁명은 1917년의 두 혁명이었던 2월 및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 서막에는 극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습을 보였을 뿐 실제 연극 과정에 모두 동원되지는 않았다. 러일전쟁은 짜르 체제를 뒤흔들었다.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짜르 왕정에 반대하여 구체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토지 점거를 목표로 농민봉기가 광활한 러시아 전국에서 일어났다. 농민 뿐 아니라 군대의 혁명적 부위 역시 소비에트를 지지했다. 투쟁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소비에트는 공공연히 짜르와 국가권력을 다투었다. 그러나 이때 모든 혁명세력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뿐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했다. 체제를 뒤흔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혁명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혁명으로부터 후퇴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운동 내에 민주적 지식인들을 상당수 끌고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 계급이 이제 인민과 자신 사이에 확실한 분리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짜르는 군대 내에 왕당파 부대들을 혁명파와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손쉽게 자행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기는 했어도 짜르 체제는 1905년 혁명을 겪으면서 생기 있고 튼튼하게 살아남았다.
이 서막과 본격적인 드라마를 가르는 11년의 역사는 계급 역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기간동안 짜르 체제는 역사발전의 요구와 더욱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계급의 권력은 공업의 상대적 집중도와 외국 자본의 더욱 강화된 지배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1905년을 교훈 삼아 부르주아 계급은 보수성과 의심증을 더욱 키워갔다. 과거에도 미미했던 중소 부르주아 계급의 상대적 비중은 더 낮아졌다. 일반적으로 말해 민주적 지식층은 사회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 계층의 종속성은 이미 크게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젊은 노동계급만이 농민에게 강령, 깃발, 지도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노동계급에게는 한가지 요소가 시급히 필요했다. 인민대중을 혁명으로 금방 나서게 지도할 특별한 혁명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거대하게 성장했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낳은 자식일 뿐 아니라 결합발전의 산물이다. 공업이 가장 발전한 독일에서 노동계급이 1918-1919년의 혁명 절정기에 소비에트 이외의 다른 조직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
1917년 혁명의 시급한 임무는 관료적 짜르 체제의 타도였다. 그러나 과거 부르주아 혁명들과는 달리 이제 혁명의 결정적인 원동력은 집중된 공업의 기초 하에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계급이었다. 여기서 결합발전 법칙은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부패한 봉건 국가기구의 타도를 시작으로 하여 몇 달만에 혁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을 국가권력의 정점으로 상승시켰다.
애초의 임무를 보았을 때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정치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제기했다. 노동자들이 병사와 농민을 일부 포함시킨 채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계속해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즉 제헌의회 소집 문제를 따지고 있었다. 본 저서를 통해 이 문제는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지금은 혁명 사상과 투쟁형태의 역사적 연속과정 속에 소비에트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겠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은 종교개혁의 외양을 띠고 일어났다. 자기 나름의 기도서에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한 투쟁은 왕, 귀족, 교회의 수장, 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신의 섭리가 흔들림 없이 보호하고 있다고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급들의 투쟁 목표들은 이들의 의식 속에 성경 구절 그리고 교회에서의 예배방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신대륙의 이주자들은 피로 봉해진 이 전통을 대서양 건너까지 가지고 갔다.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해석할 때 뿜어내는 엄청난 박력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이라는 마술 책으로 17세기 사람들은 자기 용기를 정당화시켰다. 그런데 똑같은 이 마술 책으로 영국의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물결을 건너뛰었다. 카톨릭교회는 부르주아 혁명 때까지 국가제도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혁명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추상어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건설의 임무를 표현하고 정당화시켰다. 현재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자코벵주의를 대단히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삐에르의 금욕적인 근엄한 노력 덕분에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보수적 통치를 구체제를 폭발시켰던 구호인 민주주의로 은폐할 수 있다.
거대한 혁명들 하나 하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를 확정했다. 그리고 사회 계급들의 새로운 의식형태도 탄생시켰다.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건너 뛴 것과 똑같이 러시아 역시 형식적 민주주의를 건너뛰었다. 자신의 성격을 혁명 시대 전체에 뚜렷이 남기게 될 러시아의 혁명정당은 혁명의 임무를 성경책 또는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아니라 사회계급의 물질적 관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 관계를 가장 단순하게 거짓 없이 투명하게 표현했다. 근로인민의 통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 체제가 가까운 장래에 겪을 역사적 풍파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당시 대중의 의식에 깊이 새겨진 것처럼 소비에트 체제도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졌다.
러시아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동기와 목적은 전부 자기 모순적이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근본적으로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범위는 러시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터어키 해협, 갈리시아,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가 벌인 전쟁들은 국지전이었으며 그 목적은 주요 교전국들의 이해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하나의 강대국으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싸움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바로 전까지 상점, 공장, 철도, 자동화기, 비행기 등 서방의 문물을 국내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파가 최근에 성립했다. 그런데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사이에 빈번하게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의 쟁점은 러시아가 추진했던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시기적절성 여부이다. 그러나 이 논쟁들은 스콜라주의 식으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논쟁들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를 고립된 독립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는 세계체제의 고리에 불과했다.
인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이 전쟁에 참여했다. 중국의 참전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주인들끼리의 싸움에 노예 하나가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참전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의 참전 이유 사이에 위치했다. 참전을 통해 러시아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 동맹하여 이들의 자본을 수입하고 이자를 지불할 권리를 샀다. 즉 동맹국들로부터 특혜를 받는 자본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터어키, 페르시아, 갈리시아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더 허약하고 후진적인 국가들을 억압하고 강탈할 권리도 함께 샀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이중적 제국주의는 자신보다 더 강한 국가들의 하수인이라는 근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매판자본가는 민족자본가 계급의 고전적인 유형으로 외국 금융자본과 중국 경제 사이의 중개인이다. 세계 강대국의 순위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전에 러시아는 중국보다 한참 높았다. 전쟁 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의 순위가 어떠했을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부르주아 계급은 모두 매판자본주의의 특징들을 더욱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즉 외국 제국주의 세력과 연줄을 맺어 이들에게 봉사했으며 이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혁명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들의 지원을 받고도 살아남지 못했다. 반(半)매판자본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세계제국주의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몇 퍼센트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과 똑같았다.
전쟁의 도구는 군대이다. 민족 신화에서 군대는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절대로 정복될 수 없다. 당연히 러시아 지배계급도 짜르 군대를 신화로 포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군대는 반(半)야만 민족, 이웃 약소국, 붕괴 와중의 나라에 대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연합 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군대는 광대한 영토, 산산이 흩어져 있는 인구, 다니기 힘든 도로의 도움을 통해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농노들로 구성된 이 군대의 거장은 수보로프였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군사기술의 시대를 연 프랑스 대혁명은 수보로프 식 군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농노제의 절반이 폐지되고 국민 징병제가 도입되어 러시아 군대는 현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식 현대화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아직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온갖 모순들을 군대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짜르 군대가 서구의 모델에 따라 창설되고 무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그랬다. 낙후된 농촌문화의 산물인 병사는 현대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은 지배계급의 무식, 경박성, 거짓 등의 악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의 요구들이 집중적으로 제기되기도 전에 이들의 무능력은 공업과 수송 분야에서 계속 드러났다. 전쟁 첫날에 군대는 무장을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기도 신발도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러일전쟁은 짜르 군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905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도래한 반혁명 시기에 짜르 왕정은 의회의 도움으로 군대의 창고에 군수품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특히 천하무적이라는 신화에 누더기 깁듯이 여기 저기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이 군대는 새롭고 훨씬 무거운 시험에 직면했다.
군수물자와 자금 면에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전쟁과 함께 갑자기 드러났다. 이것은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지원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않는다. 탄약의 부족, 적은 수의 탄약생산 공장, 탄약수송용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철도망 등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은 곧바로 패배라는 익숙한 단어로 번역되었다. 전쟁 패배로 러시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선배들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후배들인 자기들이 역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쟁의 첫날은 수모의 첫날이었다. 일련의 부분적인 군사적 재앙 후 1915년 봄에 대규모적인 후퇴가 불가피했다. 장군들은 자신들의 범죄적 무능력을 민간인들에게 전가시켰다. 광활한 토지가 무참하게 황무지로 변했다. 인간 메뚜기 떼가 채찍질을 당해 떼거지로 후방으로 밀려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대대적인 패배와 후퇴는 곧 심리적인 대규모 패배와 후퇴가 되었다.
동료 장관들이 전선의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게 질문하자 전쟁 장관 폴리바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광활해서 건널 수 없는 대평원, 지나다닐 수 없는 진흙탕 도로, 성스러운 러시아의 수호자 성 니콜라스 미를리키스키의 은총을 신뢰할 뿐입니다.”(1915년 8월 4일 회의) 이로부터 일주일 후 루즈키 장군은 같은 장관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 지금 요구되는 군사 기술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독일군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군대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었다. 스탄케비치 장교는 공병대 엔지니어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과의 대적은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군대는 어떻게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술조차 패배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러시아 장군들이 멋을 내며 신나게 했던 유일한 일은 나라의 인적 자원을 시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도 병사의 시체보다는 훨씬 더 경제적으로 처리된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직속의 야누슈케비치, 짜르 직속의 알렉세이예프 등 무능한 지휘관들은 새로 동원령을 내려 병사들로 전선의 모든 틈을 메웠다. 그리고 실제 전투력이 있는 병사들이 필요한 경우에는 숫자상의 대단한 병력을 제시하며 자신들과 동맹국들을 위로했다. 약 1천5백만 병사들이 동원되어 신병훈련소, 부대 막사, 병력이동소 등을 꽉 채웠다. 이들은 한 군데에 몰려 있으면서 몸에 도장이 찍히고 옆에 있는 병사들의 발을 밟았다. 그리고 서로 거칠게 굴면서 욕을 퍼부었다. 이 인간의 무리가 전선에서 가상의 규모였다면 후방에서는 진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약 5백5십만 병사들이 전사자, 부상자, 포로로 집계되었다. 탈영병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이미 1915년 7월 장관들은 이렇게 되풀이 외쳤다: “불쌍한 러시아여! 과거에 승리의 포효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의 군대조차 ... 겁쟁이와 탈영병의 무리임이 드러났다.”
장관들조차 장군들의 “후퇴할 때의 용감성”에 대해 음흉한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키에프에 안치된 성인들의 유골을 이전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하찮은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골 이전 문제에 대해 짜르는 이전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독일군은 유골들을 건드릴 생각을 감히 못할 것이다. 건드리면 자기들만 손해볼 것이다.” 그러나 정교회의 종교회의는 이미 유골 이전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버릴 경우, 가장 소중한 것은 가지고 간다.” 이 일화는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 아니다. 러시아군의 패배 소식이 무선 전신으로 전해지던 20세기의 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대의 승리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해체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장의사를 구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었다. 장의사의 자격요건은 요구하지도 않았다. 과거에 러시아는 자체 붕괴를 겪고 있던 터어키, 폴란드, 페르시아 등을 패배시켰었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군의 남서 전선은 대단한 승리들을 기록하여 다른 전선들과는 매우 달랐다. 이 전선에서 등장한 몇몇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당연히 증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패배를 거듭한 지휘관의 숙명주의에 찌들어있었다. 10월 혁명의 승리 후 이어진 내전 시기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백군의 “영웅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을 인물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들 전부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으며 독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사령부는 헌병 대령 미야소예도프를 독일 스파이로 몰아 사형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는 독일 스파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속이 빈 칠칠맞은 전쟁 장관 수호믈리노프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물론 반역죄에 대한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외무장관 그레이는 러시아 의회대표단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 전쟁 장관을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귀하의 정부는 정말 대담합니다.” 총사령부와 의회는 짜르의 내각을 친독파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모두 동맹국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증오했다. 프랑스 사령부는 자기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했다. 영국군은 천천히 전투에 참여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응접실과 전선의 사령부에서는 부드럽게 이런 농담이 나돌았다: “영국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며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 그런데 이 피는 러시아 병사의 피이다.” 이런 농담들은 군 조직 체계의 아래로 스며들어 전선의 참호에 도달했다. 장관, 의원, 장군, 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자!” 그러자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후의 피 한 방울은 나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전쟁 기간 통틀어 러시아군은 국지전에 참여했던 어떤 군대보다 병력 손실이 컸다. 약 2백5십만 명의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동맹국 전체 병력 손실의 40%에 해당되었다. 전쟁 첫 몇 달 동안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거의 생각 없이 포화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경험은 늘어났다. 이것들은 무식한 지휘관 밑의 하급병사들이 겪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이들은 밑창도 없는 신발을 신고 목적도 없는 작전에 투입되거나 저녁 식사를 먹지 못한 횟수를 모두 확인하면서 장군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측정했다. 사람과 사물의 피범벅 속에서 이 상황을 일반화시킨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병사들의 더 생생한 은어로 대체되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은 해체 속도가 가장 빨랐다. 일반적으로 공업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포병은 혁명 사상을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받아들인다. 1905 혁명은 이 점을 입증시켰다. 이와 반대로 1917년에는 포병이 보병보다 혁명사상을 수용하는데 더 보수적이었다. 보병 사단을 통해 마치 채에 걸러지는 모래처럼 경험이 더 미숙하고 덜 훈련된 대중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이 때문에 보병은 혁명 사상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포병은 보병보다 전투에서 사상자가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애초의 간부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전문화 부대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포병도 혁명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시아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총사령관의 비밀명령이 떨어졌다: 탈영과 기타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가해라. 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놈들은 가장 하찮은 위반사항에 대해서도 채찍질을 가했다. 허락 없이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이들은 병사들의 오기를 키우기 위해 채찍질을 가했다.” 1915년 9월 17일에 이미 쿠로파트킨은 그의 글에서 구츠코프의 말을 인용했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지쳐있으며 계속되는 후퇴 속에서 승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이 내무장관은 부상에서 회복중인 3만의 병사가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규율이라고는 전혀 없는 난폭한 군중이다. 소동을 일으키고 경찰과 싸우고(최근에 경찰 한 명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고 있다. 소요가 발생하면 이들 모두는 당연히 군중과 한패가 될 것이다.” 피레이코 병사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누가 승리할 것이며 어떤 평화조약이 체결될 지는 관심 밖이다. 군대는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자원 간호원으로 일하던 관찰력이 예민한 여성 페오도르첸코는 병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마음까지 읽었다. 그리고 흩어진 종이쪽지에 꼼꼼하게 그 내용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소책자 [전시의 인민]이 출판되었다. 폭탄, 엉킨 철조망, 질식시키는 독가스, 권력자들의 치사스러움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백만 농민의 의식을 형성했다. 또한 인민의 뼈와 함께 낡아빠진 편견들도 삐걱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 소책자는 잘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이 직접 생각해낸 수많은 표어들 속에 임박한 혁명의 구호들이 이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16년 12월 루즈키 장군은 리가(Riga)지구는 북부전선의 불행이라고 불평했다. 이곳은 “드빈스크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선전활동이 벌집처럼 활발한 곳이다.” 브루쉴로프 장군은 이 점을 확인시켰다: “리가 지구로부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도착하고 있다; 병사들은 공격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한 중대장을 총검 끝으로 들어올렸다. 여러 병사들을 총살시킬 필요가 있었다, 등등.” 장교들과 가까이 접촉했으며 전선을 방문했던 로지안코도 이렇게 인정했다: “혁명 발발 오래 전에 이미 군대의 최종적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혁명 분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흔적도 없이 군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대 내의 불만이 일반화되자 이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체포된 파업노동자들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선동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전투의 패배와 전선에서의 후퇴로 인해 병사 대중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느 비밀경찰 요원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후방의 군대 그리고 특히 전방의 군대에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분자들이 가득하다. 이들 외에 다른 병사들도 형벌을 거부할 지도 모른다.” 뻬쩨르부르그주(州)의 헌병 사령부는 토지협회의 대표가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1916년 10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군대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교와 병사의 관계는 대단히 긴장되어 있으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도처에 탈영병이 수천 명씩 존재한다. 군대를 밀착하여 관찰한 사람은 누구든지 병사들이 전의를 완벽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통신문들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역 복무 후 귀환하고 있는 의사들 다수가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후방의 정서는 전방의 정서에 호응했다. 1916년 10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대의원 다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계층 그리고 특히 농촌의 마을과 도시빈민들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관심과 신념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16년 10월 30일 보고서 요약문에서 경찰청장은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으며 무조건적인 조속한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의원, 경찰관, 장군, 토지협회 대표, 의사, 전직 헌병 등은 모두 혁명 때문에 군대가 애국심을 상실했다, 볼셰비키들이 확실한 전쟁의 승리를 도둑질해갔다고 주장한다.
입헌민주당은 전쟁 승리를 노래하는 합창단의 의심의 여지없는 주역이었다. 1905년에 혁명과의 의심스러운 유대관계를 재빨리 청산한 자유주의는 이후 반혁명 시기 초기에 제국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매사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확실히 넘겨받으려면 봉건적 쓰레기가 일소되어야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세계시장의 최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왕정 및 귀족계급과 동맹해야한다. 세계적 차원의 재앙은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따라서 막상 재앙이 닥치자 가장 책임이 큰 당사자들조차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짜르의 대외정책에 영감을 제공한 자유주의는 이 재앙을 준비하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14년에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의 부르주아 지도자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전쟁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이들로서는 이 반응은 당연했다. 1914년 7월 26일 의회의 엄숙한 회기 중 입헌민주당의 의원단 대표는 이렇게 발표했다: “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사항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을 정복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제창할 뿐이다.” 다른 참전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온 국민의 일치단결은 공식 입장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애국심 고취 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사회자 벤켄도르프 백작은 외교관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보라! 베를린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그대들의 혁명이 여기에서 터지고 있다!” 프랑스 공사 빨레올로그는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환상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것 같은 전쟁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환상을 키우고 전파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때 변호사이자 지주이면서 포용력이 있는 로디초프가 이렇게 외쳤다: “저런 바보들을 데리고 승리할 수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이후 사건들은 바보들과 함께 해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승리에 대한 신념을 절반 이상 상실했다. 이들은 전쟁 패배의 대세를 이용하여 짜르의 측근파를 숙청하고 짜르와 협상을 강제하려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도구는 짜르 내각을 친독파로 몰고 이들이 독일과 단독평화조약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1915년 봄 무기도 지급 받지 못한 러시아 병사들이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동맹국들의 압력을 받아 정부는 군대의 개선을 위해 개인기업의 창의성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목적을 위해 소집된 특별회의에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이 참석했다. 전쟁 초에 등장한 토지 및 자치도시 협회들, 1915년 봄에 설립된 군사-산업 위원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버팀목이었다. 이런 조직들의 지지를 받은 러시아 의회(두마)는 부르주아 계급과 짜르를 좀더 자신감 있게 중재하도록 부추겨졌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정치적 전망은 당시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키지 못하였다. 중앙저수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특별회의로부터 수억 그리고 수 십억 루블에 이르는 돈이 산업에 물을 대주고 수없이 많은 욕구들을 채워주었다. 의회와 언론은 1914년과 1915년의 전쟁 이윤을 일부 공개했다. 리아부쉰스키 가문의 모스크바 직물회사는 75%, 트베르 회사는 111%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콜추긴 구리회사는 1천만 루블의 기초자본금에서 1천2백만 루블이 넘는 이윤을 챙겼다. 이 분야에서 애국심을 가진 자들은 후한 보상을 즉시에 누렸다.
시장에 대한 모든 종류의 투기와 도박은 광란의 수준에 육박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이윤이 생성되었다. 수도에서는 빵과 연료가 부족했다. 그런데도 궁정 보석상 파베르제는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이 없다고 뻐겼다. 그리고 궁정의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1915-1916년 겨울에 가장 훌륭한 가운들이 귀부인들을 장식했으며 가장 많은 다이아몬드가 구입되었다고 말한다. 후방의 영웅들, 합법적 도망병들, 전선에 있기에는 너무 늙었으나 삶의 쾌락을 누리기에는 충분히 젊은 품위 있는 인간들로 나이트클럽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재앙이 닥쳤지만 대공들도 이들과 함께 노는 일에는 뒤지지 않았다.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늘에서 금이 소낙비처럼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상류사회”는 손과 주머니를 내밀었다. 귀족부인들은 치마를 높이 펼쳤다. 모두 핏빛 진흙탕 속에서 철썩거리고 돌아다녔다. 은행가, 장관, 실업가, 짜르와 대공이 총애하는 발레리나, 정교회의 주교와 대주교, 궁정 시종부인, 자유주의 의원, 전선과 후방의 장군, 급진파 변호사, 저명한 관리, 수많은 조카와 특히 조카딸 등 모두가 한통속으로 돈과 향락을 움켜쥐고 집어삼켰다. 축복 받은 황금 소나기가 멈출 것을 두려워하듯 모두들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때도 되지 않은 평화조약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이들은 모두 열을 냈다.
공통의 이익, 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패배, 국내 정치의 불안정이 내포하는 위험성 등이 지배계급의 파벌들을 단결시켰다. 전쟁 전야에 분열되었던 의회는 1915년 애국심으로 단결한 후 야당을 결성하여 “진보 동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동맹의 공식 목적은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당연히 선언되었다. 좌익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트루도비키(역자 주: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의 이익을 옹호한 정당. 그러나 소심한 인민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정당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주창하지는 않았다. 케렌스키가 의회 의원으로 있을 때 소속된 정당이었다.), 우익에서는 흑백인조가 이 동맹에 불참했다. 이들을 제외한 의회 내 모든 정파들 즉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의 세 그룹, 중앙파, 민족당의 일부 등이 이 동맹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회교도인, 유태인 등 민족주의 정파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을 수립하라는 요구로 짜르를 경악시키지 않기 위해 이 동맹은 “국민의 신뢰를 누리는 정치인으로 구성된 단합된 정부”를 요구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쉐르바토프공은 진보 동맹을 “사회혁명의 위험에 직면하여 결성된 일시적 정치연합”이라고 묘사했다. 이 점을 인식하는 데에는 대단한 통찰력이 요구되지 않았다. 입헌민주당 따라서 야당연합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를 걸어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긴장은 극단적인 수위에 도달했다.... 무심코 던진 성냥이 끔찍한 대형 화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부가 좋든 나쁘든 어느 때보다도 지금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
전쟁 패배의 부담을 안은 짜르가 양보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희망은 너무 컸다. 따라서 8월에 자유주의 신문에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내각”의 예상 명단이 실렸다. 이 명단에 따르면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다른 신문에는 토지협회 회장 르보프공이 수상이었다), 구츠코프는 내무장관, 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었다.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들은 짜르와 정치연합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각에 입각시켰다. 이들 대부분 1년 후 “혁명정부”의 각료로 등장한다. 역사는 두 번 이상 이렇게 기이한 짓을 해왔다. 다만 이번의 경우 역사의 기이한 행위는 너무나 수명이 짧았다.
짜르가 임명한 고레미킨 내각의 장관들 대다수는 입헌민주당 만큼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진보 동맹과의 합의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최고통치자, 군대, 자치도시, 도의회(젬스트보), 귀족, 상인, 노동자 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런 정부는 명백히 언어도단이다.” 쉐르바토프공은 1915년 8월 자신이 내무장관으로 있던 내각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무대장치를 제대로 하더라도 한군데 빈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면 입헌민주당이 맨 먼저 타협안을 들고나올 것이다. 밀류코프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마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사회혁명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외에도 입헌민주당원 대다수는 혁명으로 자기 자본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밀류코프 자신은 진보 동맹이 “어느 정도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며 모든 것이 철저히 기름칠이 된 것처럼 보였다. 고레미킨 수상은 오랜 세월과 훈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하는 관료였다. 그는 대단한 참을성을 제 1 책략으로 하고 전쟁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불평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제 2 책략을 가진 늙은 냉소주의자였다. 그는 8월 29일 전쟁 사령부로 짜르를 알현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 위치를 찾아야 하며 시끄러운 의회는 9월 3일 해산될 것이라는 내용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짜르의 의회 해산 포고령이 낭독되자 누구 하나 항의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짜르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짜르 정부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의회를 해산시킨 후 1년 반을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러시아 군대의 일시적인 승리가 당연히 정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리한 정세는 황금 소나기로 강화되었다. 물론 전선의 승리는 곧 패배로 바뀌었지만 후방의 이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짜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스크바 비밀경찰국장은 “전쟁이 끝난 후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우경화 했다고 보고했다. 전쟁 중에는 혁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군사산업위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던진 추파”에 대해 자본가들은 무엇보다도 놀랐다. 헌병 대령 마르티노프는 맑스주의 문헌들을 전문적으로 읽어서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정세가 유리하게 일부 개선된 이유가 “사회계급들의 꾸준한 분화 때문이다. 이것이 계급간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의 모순을 은폐했다. 이 모순은 특히 지금 강하게 느껴진다.”라고 일반적인 결론을 내렸다.
1915년 9월 짜르의 의회 해산 조치는 노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게 던져진 단도직입적인 도전장이었다. 이때 자유주의 의원들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짜르 만세”를 외치며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스스로 해산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이 조치에 항의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이것은 썰렁한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짜르의 가족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제 3자가 끼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면 짜르에게 만세를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좌익으로부터 약한 불평을 들은 후 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합법적 영역에만 머물고 애국적 의무만 달성하여 짜르 관료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어쨌든 새로운 내각 명단은 당분간 한쪽에 조용히 모셔놓아야 했다.
당시 정세는 자동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1916년 5월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그러나 소집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의회는 혁명을 촉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회기를 통해 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 로지안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회기는 힘없이 진행되었다. 의원들은 등원하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 계속적인 투쟁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아무 것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부패는 증대하고 있었다. 나라는 붕괴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혁명 외에 이 계급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916년 짜르는 자기가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전쟁이 전혀 가망이 없음이 모두에게 명백해졌다. 대중의 분노는 어느 순간에든 터져 올라올 것 같았다. 지난번과 같이 짜르 정부를 친독파라고 공격한 후 독자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안을 모색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진보 동맹의 지도자 프로토포포프 의원은 1916년 가을 스톡홀름에서 독일 외교관 바부르크와 협상에 들어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유주의자들의 의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의회 의원단은 프랑스와 영국을 친선 방문했다. 동맹국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후진국 러시아를 주요한 경제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맹국들은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진을 전부 짜내려 했다. 동맹국들의 의중을 자유주의 의원들은 너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연합국들이 승리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러시아는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유산 지배계급은 연합국들과의 너무 가까운 관계를 피하고 독일과의 독자 평화조약 체결을 모색하여 구국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관계를 이용해야했다. 프로토포포프와 바부르크의 회담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회담은 연합국들에게 위협을 가해 양보조치들을 끌어내려는 포석과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포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짜르의 외교관들과 합의하여 행동에 나섰다. 이 회담은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 의원단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부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찰 행위를 통해 꽤 중요한 국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들은 짜르에게 암시를 보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슈튀르머(역자 주: 1916년 1월부터 11월까지 짜르 내각의 수상)보다 더 조건도 좋고 믿을만한 단독 평화조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프로토포포프 즉 그를 밀고 있는 세력의 구상은 단순했다: 러시아 정부는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으며 만약 동맹국들이 평화협상을 거부한다면 러시아 자신이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몇 달 전에 미리” 통보한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스스로 작성한 자백서에서 프로토포포프는 당연히 이렇게 밝혔다: “러시아의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들 중 ‘인민자유’당(입헌민주당)의 모든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협상을 끝내고 귀국한 후 자초지종을 짜르에게 보고했다. 짜르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에 완전히 공감했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프로토포포프는 진보 동맹과 결별한 후 짜르 친위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이 멋쟁이 양반은 짜르와 왕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행보를 취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아마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유주의 진영을 배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토포포프의 배신적 행위는 탐욕, 비겁함, 배신을 특징으로 한 자유주의 대외정책의 일반적 성격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11월 1일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국내 정세는 참을 수 없는 긴장상태에 도달했다. 의회가 중대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뭔가 행동이 필요했다. 아니면 최소한 뭔가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진보 동맹은 의회에서 짜르의 실정을 폭로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의사당 의석에서 정부의 주요 조치들을 평가한 후 밀류코프는 조치 하나 하나가 발표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정부의 조치들은 어리석음의 소산인가 아니면 일부러 나라를 망치려는 국가반역 행위인가?” 다른 의원들도 정부의 정책에 거세게 항의했다. 정부의 조치를 옹호하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늘 그렇듯이 이렇게 응답했다: 의원들의 연설은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연설문들은 백만 부 규모로 복사되어 널리 읽혀졌다. 후방 전방 할 것 없이 모든 정부 부서에는 금지된 연설문 복사판이 나돌았다. 그리고 연설문을 복사한 사람에 따라 빈번하게 내용이 덧붙여졌다. 11월 1일 의회의 토론 내용은 전국적으로 그 반향이 너무 커서 연설 당사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두르노보의 영감을 받은 강인한 극우 관료 일개 그룹이 이 순간을 이용하여 짜르에게 특별조치를 청원했다. 이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은 진지한 경찰학교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정세를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알았다. 그리고 이들이 청원한 조치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면 그것은 구체제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청원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야당에게 추호도 양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흑백인조 극우분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직에 있는 이 반동들은 흑백인조들의 저속한 생각을 경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솔직히 말해 너무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다. 이들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불안한 것”이 문제였다. 이 반동들의 지적에 의하면 주요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허약함은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 즉 이 정당의 정치 핵심은 부르주아적인데 이름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상당한 정도 자유주의 지주들의 정당이기도 하지만 이 정당은 짜르 정부의 의무적 토지보상제(역자 주: 1861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토지가 유상으로 분배되었다.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에 서명했다. 짜르의 친위부대인 이들 비밀 고문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상징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카드 한 벌에서 빼낸 트럼프 카드가 아니었다면(즉 짜르의 권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면) 입헌민주당은 자유주의 변호사, 교수, 정부의 관리들로 구성된 다수 회원의 협회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가는 이와 다르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이들은 혁명정당들의 의의를 인정하되 분노로 이를 갈면서 인정한다: “혁명 정당들의 위험성과 힘은 이들이 사상, 돈(!), 잘 준비된 조직 대중을 보유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혁명정당들은 “농민의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기대할 수 있다. 농민은 혁명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 노동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은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우익 정당들이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다. 처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중간 정당들(중앙당, 자유보수당, 10월당, 입헌민주당의 진보분파)은 서서히 영향력을 잠식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운명이 입헌민주당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 군중, 꼬뮌, 짜르 왕조의 멸망, 대대적으로 학살되는 유산계급에 뒤이어 마지막으로 농민 산적대가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경찰의 분노는 일종의 역사적 비전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정책의 적극적인 부분은 과거부터 일관되게 존재해왔던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다: 짜르 전제를 가차없이 옹호하는 정부의 수립, 의회의 철폐, 두 수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 반란 진압군의 편성. 이 정책의 핵심들은 혁명 직전 마지막 몇 달간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두르노보가 1905년 겨울에 휘두른 권력을 전제로 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권력은 1917년 가을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현실을 인식하여 짜르 체제는 몰래 그리고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민의 목을 졸라 죽이려했다. 무조건 짜르와 왕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우리 사람들”로 장관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특히 배신자 프로토포포프의 경우 하찮은 인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는 철폐되지 않았으나 다시 해산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계엄령은 유보되어 결국 혁명은 승리했다. 그리고 반란 진압군 자체가 반란에 가담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2개월 또는 3개월 후에 명백해졌다.
이때 자유주의 진영은 상황을 구출하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참정권을 누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조직들은 야당의 11월 의회 연설들을 일련의 새로운 선언문을 통해 지지했다. 이 선언문 가운데 가장 무례한 것은 12월 9일자 자치도시연합의 결의문이었다: “무책임한 범죄자들과 광신도들이 러시아의 패배, 치욕, 그리고 노예화를 준비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 것”이 촉구되었다. 심지어는 관료집단과 엄청난 재산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무회의조차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사들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연합조차 이와 비슷한 내용을 촉구했다. 즉 이끼가 잔뜩 낀 돌들도 정부 정책을 반대하며 아우성을 부린 셈이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짜르는 권력의 마지막 남은 쪼가리들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저와 지연 끝에 마지막 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1917년 2월 14일에 소집되었다. 혁명 발발 2주일 전이었다. 시위가 예상되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역자 주: 연설이라는 의미이다)는 시위를 금지하는 뻬쩨르부르그 군단장 하발로프 장군의 담화문과 “암흑 세력”의 “위험하고 나쁜 충고”를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밀류코프의 편지를 실었다. 파업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개원했다. 권력의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체하면서 의회는 중요한 그러나 여전히 실무적인 식량 공급 문제에 몰두했다. 로지안코가 나중에 회상했듯이 분위기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의회의 무력감과 아무 소득 없는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동시에 느꼈다.” 진보 동맹이 “말로 그리고 오직 말로만 행동할 것”이라고 밀류코프는 계속 반복했다. 2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의회는 이런 상태였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제국가의 정치환경 속에서 정치투쟁의 걸음마를 배웠다. 불법파업, 지하 서클, 불법성명서, 거리 시위, 경찰 및 군대와의 대치 등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켰다. 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천천히 진지들을 내주고 있는 절대주의가 합동으로 노동자 정치학교를 세워주었다. 거대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집중, 격심한 국가탄압, 젊고 패기 넘치는 노동계급의 추진력 등으로 서구에서 대단히 희귀한 정치파업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기본 메뉴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파업 통계는 러시아 정치사의 매우 인상적인 지표이다. 책의 내용을 통계수치로 도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에서 발생한 정치파업 통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단순하게 상황을 드러내는 이 통계는 공장감독 대상기업만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다. 농업은 물론이고 철도, 광산, 기계 및 일반 영세기업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통계 대상에서 빠져있다. 그러나 이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기별 파업빈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변화가 뚜렷하다.
러시아는 자궁 속에 거대한 혁명이 들어앉아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정치 체온을 잴 수 있는 유일한 그래프가 눈앞에 드러난다. 공장감독 대상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905년에는 1백5십만, 1917년에는 2백만이었다. 노동계급의 비중이 이렇게 적은 후진국에서 파업운동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발력을 보인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약성, 농민운동의 분산성 및 맹목성 때문에 노동계급의 혁명파업은 막 깨어나고 있는 인민이 절대주의 갑옷에 내려치는 철퇴가 된다. 여러 번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두 번 파업에 참가한 것으로 계산하면 1905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백84만3천명이다. 러시아의 정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수치를 통해 혁명이 발발한 해를 알 수 있다.
연도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 수(단위: 1천명)
1903 ..... 87
1904 ..... 25
1905 ..... 1,843
1906 ..... 651
1907 ..... 540
1908 ..... 93
1909 ..... 8
1910 ..... 4
1911 ..... 8
1912 ..... 550
1913 ..... 502
1914(첫6개월) ..... 1,059
1915 ..... 156
1916 ..... 310
1917(1월과 2월) ..... 575
(저자 주: 1903년과 1904년의 경우는 모든 파업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파업이 지배적이었다.)
공장감독 기록에 의하면 러일전쟁의 첫해인 1904년에는 전부 합해 겨우 2만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905년에는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합쳐 2백86만3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나 많은 수치이다. 이 놀라운 사실 자체는 이렇게 제안한다: 노동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리고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할 동력을 가진 계급이다; 이 계급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대오 내에서 투쟁과 거대한 임무의 차원에 적합한 조직을 만들어낸다. 이 조직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1905년 첫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탄생하여 총파업과 국가권력 장악의 기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봉기에서 패배한 후 노동계급은 다음 2년간 투쟁의 성과를 방어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다. 이 2년은 파업통계가 말해 주듯이 혁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간이지만 혁명의 퇴조기였다. 파업통계에 의하면 1908년부터 1911년까지는 반혁명이 승리한 시기이다. 반혁명의 승리와 함께 들이닥친 경제위기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노동계급을 탈진상태에 빠뜨린다. 추락의 깊이는 상승의 높이와 대칭을 이룬다. 러시아 사회의 격동은 이 단순한 수치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0년에 시작된 경기호황은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의 통계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통계를 거의 되풀이하고 있으나 흐름은 정반대이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곡선이 움직이고 있다. 이제 노동자의 수도 늘어나고 투쟁경험도 쌓였다. 이 새로운 그리고 더 높은 역사의 기초 위에 새로운 혁명공세가 시작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정치파업 수치는 1905년 혁명 절정기에 기록된 수치에 접근한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이 과정은 급격히 교란된다. 전쟁 첫 몇 개월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 선동에 이렇다할 정치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1915년 봄이 되면 이 증상은 과거지사가 된다. 정치파업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고 이 순환은 1917년 2월 병사와 노동자의 봉기로 절정에 이른다.
대중투쟁의 급격한 하강과 상승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서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2, 3년 전 만해도 단 한 건의 자의적인 경찰 공격에 대해서도 만장일치로 파업에 돌입하던 공장들이 지금은 완전히 혁명의 색깔을 상실하고 저항 한번 없이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도 참아 넘긴다. 거대한 패배는 상당한 기간 무기력을 초래한다. 의식적인 혁명분자들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아직도 전부 없어지지 않은 편견과 미신이 다시 살아난다. 이 시기에 농촌 마을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회색 빛 인구가 노동계급의 대오를 희석시킨다. 이때 회의주의자들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확신하며 고개를 젓는다. 회의가 확신으로 변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시기가 바로 이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은 패배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한다. 새로운 정세 또는 새로운 경기의 흐름이 새로운 정치투쟁의 순환을 개시한다. 혁명분자들은 다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중을 만난다. 이제 투쟁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멘셰비키주의는 혁명의 퇴조기와 반동기에 그 모습을 완성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두 으뜸가는 정치경향을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이 경향은 혁명과 결별한 노동자의 얇은 부위를 주요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볼셰비키주의는 반동기에 잔인하게 분쇄된 후 전쟁이 터지기 전 몇 해 동안 새로운 혁명의 파도 위로 급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는 투쟁, 저항, 계속적인 조직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된 가장 열성적이며 대담한 분자는 바로 레닌 주위로 결집된 분자, 조직, 인물들이다.” 러시아 경찰청은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 전 몇 년간의 볼셰비키 혁명 활동을 개략적으로 묘사했다.
1914년 7월 외교관들이 유럽을 십자가에 매달고 마지막 못을 박아 전쟁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뻬쩨르부르그는 혁명의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통령 뿌엥까레는 가두투쟁의 마지막 메아리와 애국주의 시위의 첫 웅성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알렉산드르 3세의 무덤에 화환을 증정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1912년에서 1914년까지의 대중적 정치공세가 곧바로 짜르 체제의 전복을 가져왔을까?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피하게 혁명은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단계들을 거치면서 혁명이 진행되었을까? 혁명이 또 패배하지는 않았을까? 농민을 투쟁으로 인도하고 군대의 공감을 획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런 방향들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전쟁은 처음에 투쟁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다음 시기에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추진시켜 압도적인 승리를 가능케 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북소리에 혁명운동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투쟁에 좀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다. 혁명분자들은 공장에서 전선으로 내몰렸다. 파업에 대해 가혹한 벌이 내려졌다. 노동자 신문들은 전부 강제 폐간되었으며 노동조합은 목이 졸렸다. 수십만의 여성, 소년, 농민 등이 공장으로 밀려들어왔다. 제 2 인터내셔널의 정치적 파산과 함께 발발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을 대단히 혼란시켰다. 그리고 막 등장한 공장통제위원회(factory administration)가 공장의 이름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상당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좀더 대담하고 결의에 찬 혁명 성향의 노동자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을 강요당한 소규모 혁명서클에서 혁명사상은 아주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당시 “볼셰비키”라고 자기를 감히 소개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 체포당할 수도 있었으며 후진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회의 볼셰비키 의원단에는 믿을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전쟁 발발의 순간에 당의 노선을 선전할 임무를 완수할 수준도 아니었다. 멘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인민의 문화 복지를 공격하는 세력이 어디서 나타나든 대적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이 저자세를 의회는 박수로 환영했다. 레닌은 해외에서 러시아군의 패배와 이로 인한 국내의 혁명을 주창했다(혁명적 패배주의). 그러나 그의 선언을 공개적으로 대변한 당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가운데 애국주의자의 비율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주창한 인민주의자나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1914년 볼셰비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 선동을 연설과 유인물로 전개했다. 의회 의원단은 곧 평정을 되찾아 혁명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짜르 정권은 고도로 발달된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다. 당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위원 7인 가운데 3인은 전쟁 전야에 비밀경찰에 고용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짜르 체제는 혁명운동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11월에 볼셰비키 의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당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볼셰비키 의원단은 국가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기소된 볼셰비키 의원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의원단의 이론적 지도자 카메네프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중앙위원회 의장 페트로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원들에 대한 중형 선고에 노동자들이 전혀 항의하지 못했다고 경찰청은 만족스럽게 보고했다.
마치 전쟁이 노동계급을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상당한 정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노동계급의 인적 구성은 거의 40%나 바뀌어 있었다. 혁명활동의 연속성이 갑자기 단절되었다. 볼셰비키 의원단을 포함하여 전쟁 전의 모든 당 조직들은 갑자기 후위로 물러나고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혁명세력의 침묵, 애국주의 함성 그리고 어느 정도 왕당파의 함성 밑에서는 새로운 폭발의 분위기가 서서히 대중 사이에 축적되고 있었다.
1915년 8월 짜르의 장관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독일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국가반역 행위, 배신행위, 태업 등을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이 이 잡듯이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선의 패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찾아내는데 아주 열성적이다.” 당시 대중은 정치현실에 각성하고 있었으며 비판적 시각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진심으로 그리고 일부는 자기보호를 위한 의도로 “조국 방위” 입장을 채택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의 불만은 더욱 골이 깊어졌으며 작업반장, 흑백인조 노동자, 정부의 하수인 등을 침묵시켰다. 그리고 노동자 볼셰비키들이 머리를 들고 대담하게 나서게 했다.
대중은 비판에서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분노는 맨 처음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로 표출되면서 때로는 지역차원의 봉기로까지 상승한다. 공장에서 군복무의 짐을 지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여성, 노인, 소년들이 시장이나 광장에서 더 대담하고 독자적인 투쟁으로 나선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대중운동이 독일인에 대한 학살로 변질된다. 이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경찰이 보호하는 도시의 인간쓰레기들이다. 그러나 공업도시 모스크바에서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노동자들이 불만에 찬 소읍의 인민에게 자신의 구호와 규율을 강제할 정도로 충분히 각성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투쟁은 전쟁의 최면을 깨고 파업투쟁의 길을 열었다.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 유입과 전쟁 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가져오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 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다. 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특히 이 투쟁이 전쟁의 개시로 유보되어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 같이 거세었다. 파업은 집회, 정치선언문의 채택, 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빈번하게 발포와 희생자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투쟁은 주로 도시중심부의 섬유공업지구에서 일어났다. 6월 5일 경찰은 코스트로마의 방직공들에게 연속해서 발포했다. 4명의 사망자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8월 10일 군대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에게 발포했다. 16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섬유노동자의 투쟁에 동조하여 지역 대대의 일부 병사들이 참여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항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와 병행하여 경제투쟁이 진행된다. 섬유노동자들이 종종 맨 앞에서 행진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투쟁에 비교하면 이 운동은 위력과 구호의 명확함에 있어서 큰 후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경험 없는 대중이 투쟁에 나선 반면 지도적 노동자들이 완벽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발생한 이 첫 파업투쟁에서 뒤이어질 거대한 투쟁의 메아리를 느낄 수 있다. 법무장관 흐보스토프는 8월 16일 이렇게 말했다: “지금 노동자들이 무장시위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아직 이들이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레미킨은 더욱 집약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자 지도부에게는 조직이 없다. 이것이 이들의 문제이다. 볼셰비키 의원 5명의 체포로 조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내무장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볼셰비키 의원들을 사면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운동의 중심이므로 가장 위험하다.” 이 인간들은 최소한 누가 진짜 적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짜르 내각은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있었으며 자유주의적 양보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들은 노동자 혁명의 두뇌 즉 볼셰비키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것이 과거 어느 때만큼이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대부르주아 계급은 멘셰비키와 협조하려 했다. 파업운동의 범위에 놀란 자유주의 기업가들은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을 군사산업위원회에 포함시켜 노동자들에게 애국주의 규율을 강제하려했다. 내무장관은 구츠코프가 입안한 이 계획을 반대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애국의 깃발 아래 그리고 국방의 이익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경찰 역시 사회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체포를 회피했다.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파업과 혁명투쟁의 “과도함”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반동의 동조자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어떠한 봉기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밀경찰은 확신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영향력에 너무 커다란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군사산업위원회 선거에서 정열적인 금속노동자 구보즈데프가 주도한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소수파로 판명이 났다. 그는 혁명 후 수립된 연립정권에서 노동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자유부르주아와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볼셰비키들이 군사산업위원회 선거 보이코트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패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산업애국주의 기관들의 노동자 대표들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데 성공했다. 멘셰비키의 입장은 이 위원회의 기업가들에게 행한 멘셰비키 대표의 연설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관료주의 권력이 물러나도록 요구하고 대신 여러분들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물려받아야 한다.” 이 새로운 정치적 유대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혁명 후에 이 관계는 잘 익은 과실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전쟁은 지하혁명운동을 무섭게 황폐화시켰다. 의원단이 체포된 후 볼셰비키당에게는 중앙 집중화된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위원회는 간간이 존재했으나 노동자지구들과의 관계가 종종 끊어졌다. 분산된 그룹, 서클, 고립된 개인들만이 활동했다. 그러나 소생하는 파업운동은 공장에서 이들에게 어느 정도 투쟁의지와 힘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서서히 서로를 찾아내어 노동자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하운동도 소생했다. 경찰청 문서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사회민주주의 지하조직의 압도적 다수파였던 레닌주의자들은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하리코프, 키에프, 툴라, 코스트로마, 블라디미르주(州), 사마라 등 중심부에서 전쟁 중지, 정권 타도, 공화국 수립 등을 요구하는 혁명 유인물을 상당 분량 발행해왔다. 그리고 이 혁명 작업은 노동자 파업과 소요사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었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동궁 학살 기념행진은 전년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기념식이 1916년 1월 9일에는 광범위한 파업을 촉발시켰다. 이 해에 파업운동의 규모는 배로 늘었다. 경찰과의 대치는 대규모 장기화 파업에서 일상사가 되었다. 군대와 대치했을 때 노동자들은 눈에 띄게 이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밀경찰은 이 우려할만한 현상을 두 번 이상 목격했다.
전쟁 산업은 규모가 팽창하면서 주위의 모든 자원들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기초까지 무너뜨렸다. 평화시의 산업들은 소멸하기 시작했다. 모든 계획에도 불구하고 산업에 대한 통제시책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강력한 군사산업위원회의 반대에 맞설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책임을 자본가에게 넘겨주기도 거부했다. 혼란이 증대했다. 숙련 노동자들은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폴란드의 광산과 공장은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 전쟁 첫해에 러시아 산업능력의 5분의 1이 사라졌다. 섬유생산의 약 75%를 포함해 무려 국내총생산의 50%가 군대와 전쟁의 필요에 투입되었다. 과부하가 걸린 수송수단은 공장에 필요한 연료와 원자재를 공급할 수 없었다. 전쟁은 경상국민소득 전체를 집어삼켰을 뿐 아니라 나라의 기본 자본재를 심각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이 성향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정부는 늘 그렇듯이 모든 파업에 대해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의 사고를 특수에서 일반으로 그리고 경제에서 정치로 인도했다: “동시에 파업해야한다.” 이렇게 총파업 사상이 탄생했다. 대중의 급진화 과정은 파업 통계에 가장 설득력 있게 반영되어있다. 1915년에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2.5배가 적었다. 1916년에는 2배가 적었다. 1917년 첫 몇 달에는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6배나 많았다. 뻬쩨르부르그의 역할은 단 하나의 수치에 잘 드러나 있다: 전쟁 기간에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72%가 이 도시 출신이다!
이 투쟁의 불길 속에서 낡아빠진 수많은 관념들이 불에 타버린다. “짜르 폐하에 대한 무례함과 공공연한 모욕의 모든 경우를” 법에 따라 처리할 경우 “칙령 103조에 따라 진행될 재판의 수는 유례없이 상승할 것이다”라고 “고통스럽게” 비밀경찰은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자신의 행동보다 한참 뒤쳐진다. 전쟁의 끔찍한 압력과 나라의 파괴는 투쟁을 극도로 가속화시킨다. 이 결과 농촌 마을이나 도시의 소부르주아 가족 내에서 갖게 된 수많은 견해와 편견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은 혁명과 함께 이것들을 뿌리친다. 2월 혁명의 첫 단계에 이 사실은 강하게 그 진실성을 입증한다.
1916년 말이 되면 물가는 급격히 올라간다. 인플레와 수송의 마비에 실제 물건의 품귀현상이 추가되었다. 생필품에 대한 인민의 수요는 이때쯤이면 반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운동의 투쟁 곡선은 급격히 상승한다. 10월에는 투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고 모든 형태의 불만이 하나로 모인다. 뻬쩨르부르그는 2월 혁명의 도약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공장에서는 집회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집회의 주제는 식량 공급, 높은 생활비, 전쟁, 정부이다. 볼셰비키 유인물이 배포된다. 정치파업이 시작된다. 즉흥적으로 준비된 시위가 공장 정문에서 시작된다. 일부 공장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서로 동지가 된다. 발트 함대의 혁명적 수병들에 대한 재판이 정치파업의 폭풍을 몰고 온다. 일부 병사들이 경찰에 발포한 사실을 프랑스 대사가 슈튀르머 수상에게 상기시킨다. 슈튀르머는 대사를 진정시킨다: “그런 놈들은 가차없이 없앨 겁니다.” 군사적 임무를 띠고 뻬쩨르부르그 공장에 배치된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보내진다. 한 해가 폭풍과 천둥으로 끝난다.
지금과 1905년 상황을 비교하면서 경찰청장 바실리예프는 아주 불안한 결론을 내린다: “반정부 정서는 아주 멀리까지 나아갔다. 위에서 언급한 소요기간 중에 광범위한 대중에게 목격된 어떤 정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바실리예프는 주둔군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심지어는 경찰관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정보부는 총파업 구호가 소생하고 테러가 소생할 위험성을 보고한다. 전선에서 온 병사와 장교들은 현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이런 저런 놈들을 왜 없애지 못하는가? 우리가 여기 있다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텐데,” 등등. 금속노동자 출신이자 볼셰비키 중앙위원인 슐리아프니코프는 당시 노동자들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운 상태에 있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때때로 휘파람 또는 어떤 소음이든 충분했다. 노동자들은 이것을 공장을 멈추는 신호로 받아들이곤 했다.” 이 사실은 정치적 증상의 측면에서나 심리적 사실로서나 대단히 중요하다: 혁명은 거리로 나서기 전에 이미 대중의 신경 속에 존재한다.
지방의 주(州)들도 같은 단계를 경과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더딜 뿐이다. 운동의 규모가 커지고 투쟁 의지가 높아감에 따라 투쟁의 중심은 섬유노동자로부터 금속노동자로 경제파업에서 정치파업으로 지방의 주들에서 뻬쩨르부르그로 이동된다. 1917년 첫 몇 달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는 57만5천명으로 이중 대다수는 수도에서 나왔다. 1월 9일 저녁 경찰이 새로 공격에 나섰으나 15만 명의 노동자들은 수도에서 피의 일요일 기념 파업에 돌입했다. 대중의 정서는 긴장되어 있었다. 금속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노동자들은 모두 후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모든 공장에서 주로 볼셰비키 주위로 적극적인 중핵이 형성되고 있었다. 2월 첫 2주일간 내내 파업과 집회가 계속되었다. 2월 8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경찰은 “광석 찌꺼기와 낡은 쇠 덩어리의 우박 세례”를 받았다. 의회가 개원하는 14일에는 약 9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여러 공장들이 조업을 중지했다. 16일 당국은 뻬쩨르부르그에 빵 배급 카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새로운 조치는 대중의 신경을 거슬렸다. 19일 대부분 여성인 군중이 식료품 상점에 모여서 빵을 요구했다. 하루 후 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빵집들이 털렸다. 이런 사건들이 바로 며칠 후에 터질 혁명의 소리 없는 번갯불이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대담성은 이들에게만 그 원인이 있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전체 인민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의 막강한 지지가 없었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투쟁에 충분한 넓이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인민의 선두에 설 정도의 충분한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지지는 농업문제로 인해 노동계급에게 보장되었다.
1861년 농노제의 폐지로 농민은 늦게나마 반 정도의 해방을 누렸다. 이 당시 농업의 생산력 수준은 200년 전과 똑같았다. 농업개혁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도난 당하기는 했지만 오랜 전통의 공유지는 보존되었으며 옛날의 경작방식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상황은 자동적으로 농촌의 과잉인구와 격심한 위기를 초래했다. 동시에 이것은 삼포제 농업방식의 위기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17세기가 아니라 19세기에 발생했다. 즉 발전한 화폐경제가 트랙터만이 부응할 수 있는 요구를 나무쟁기에게 요구한 셈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은 더욱 답답하게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고 느꼈다. 여기서도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역사의 과정들이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이 결과 극단적으로 첨예한 모순을 낳았다. 학식을 갖춘 농학자와 경제학자는 오랜 토지에 합리적인 경작방식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설교해왔다. 즉 이들은 지주, 토지관리인, 짜르를 그대로 둔 채 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문화로 도약할 수 있다고 농민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떤 경제체제도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경제체제 가운데 가장 발전속도가 느린 농업경제체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은 좀더 집약적인 재배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 나아가기 전에 농민은 삼포제 농경지를 넓히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당연히 지주 소유의 토지를 농민 소유로 전환시켜야 성공할 수 있었다. 화폐와 시장의 따가운 채찍질을 받으면서 농토의 협소함에 질식하고 있던 농민은 지주를 이번 기회에 아주 확실히 없애려 했다.
1905년 혁명 직전에 유럽 러시아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총면적은 2억8천만 데시아틴(역자 주: 1 데시아틴은 2.702 영국식 에이커이다.)으로 추산되었다. 이 가운데 공유지는 약 1억4천만 데시아틴이었고 짜르 소유지가 5백만 데시아틴, 교회 소유지가 2백5십만 데시아틴이었다. 개인소유지 가운데 7천만 데시아틴이 3만 명의 대지주 소유였는데 대지주 한 명이 500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7천만 데시아틴이 대체로 1천만 농민 가족들의 것이 되었어야 할 농지였다. 이 농지 통계야말로 최종적으로 완벽한 농민전쟁 강령이었다.
1905년 혁명은 지주를 없애지 못했다. 모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농촌운동은 도시운동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농민 병사들은 동요했으며 마침내 봉기 노동자들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제공했다. 세메노프스키 방위군 연대가 모스크바 봉기를 진압하자마자 짜르는 자신의 전제적 권리와 지주 소유지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러나 패배한 혁명이 농촌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오래된 농지에 대한 국가 보상제도를 철폐하고 넓은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지주들은 소작료에 대해 상당히 양보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토지를 대규모로 팔기 시작했다. 혁명의 이러한 과실들은 부유한 농민의 것이 되었는데 이들은 지주의 농토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한 반혁명이 도입한 가장 주요한 개혁인 1906년 11월 9일의 법은 농민으로부터 자본주의적 농민이 등장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대다수 농민의 의지에 반하여 소수의 농민에게 공유지의 일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도록 허용한 이 법은 공유지에 떨어진 자본주의 포탄이었다. 스톨리핀 수상은 정부 농민정책의 핵심을 “강한 농민을 지지하는 정책”이라고 묘사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민의 상층부가 공유지를 소유하게 만들어 이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농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농민문제를 부농 육성문제로 바꿔치기 하려는 시도를 통해 반혁명은 결국 자신의 목을 분질렀다.
1916년 1월 1일까지 250만 자영 농민이 1천7백만 데시아틴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2백만 자영 농민이 1천4백만 데시아틴의 농지를 자기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로서 개혁이 대대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영 농민 대다수는 자활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자연도태의 대상에 불과했다. 후진적 지주가 자신의 넓은 토지를 그리고 소농이 조그만 땅뙈기를 파는 상황이 되자 이 토지들을 주로 구입하는 새로운 농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다. 농업은 의심의 여지없는 자본주의 호황을 맞았다. 러시아의 농산물 수출액은 1908년 10억 루블에서 1912년 15억 루블로 증가했다. 이것은 농민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고 상층부 농민들이 더욱더 많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농민의 전통적 공동체 관계를 대체하기 위해 아주 빠르게 자발적 협동체제가 발전했다. 이 새로운 관계는 몇 년 동안 농민대중 속에 아주 깊이 침투했다. 그리고 즉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향이 되었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진정한 권력은 부농에게만 있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협동체제는 이들의 이익에 봉사했을 뿐이었다. 나로드니크(인민주의) 지식인들은 농민의 협동체제에 자신들의 주요한 역량을 집중시켜 마침내 인민에 대한 사랑을 확고한 부르주아적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반(反)자본주의적” 사회혁명당과 최상의 부르주아 정당인 입헌민주당의 정치연합이 준비되었다.
겉으로는 짜르의 농업정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자유주의 세력은 농촌공동체를 자본주의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을 커다란 희망으로 지켜보았다. 자유주의자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이렇게 적었다: “농촌에는 아주 강력한 소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고 있다. 이 계급의 전체적 모습과 핵심 성격은 단결된 귀족사회 또는 사회주의 몽상이라는 두 이상향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멋진 메달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파괴된 농촌공동체로부터 “아주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 뿐 아니라 대항 세력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생활 유지가 불가능한 토지를 내다 파는 농민의 숫자는 전쟁이 시작될 즈음 1백만에 달했다. 이것은 5백만 이상의 인구가 노동계급으로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절대빈곤의 좁은 농토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수백만의 농민거지들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이 되었다. 이 결과 일찍부터 러시아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저지했던 농민들 사이에 이 모순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었다. 구(舊)지주의 지지자로 설정된 이 새로운 농촌부르주아 계급은 기본 대중과 대립했다. 구지주들이 인민 전체에 대립한 것과 똑같았다. 이 계급은 짜르 체제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기 전에 우선 자신들이 정복한 진지를 지킬 자기만의 질서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농업문제가 계속해서 의회에서 날카로운 이슈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의회 내 모든 세력은 농업문제가 아직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농민 출신 의원 페트리첸코는 의회 연단에서 이렇게 선언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오래 논의를 하더라도 새로운 지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토지를 양도해야한다.” 이 농민은 볼셰비키도 사회혁명당도 아닌 우익 왕당파 의원이었다.
노동자의 파업운동과 함께 1907년 말에 가라앉았던 농민운동은 1908년 부분적으로 소생했으며 다음 몇 년간 강력하게 성장했다. 물론 투쟁은 상당한 정도 농촌공동체 안으로 이전되었다. 이것이 바로 반동 세력이 정치적으로 바라던 바였다. 공유지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농민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지주에 대항하는 투쟁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빈번하게 지주의 장원, 수확물, 건초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공동체 농민의 의지에 반해 잘려나간 개인소유 토지도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다. 정부는 농촌으로부터 약 1천만명의 일꾼과 약 2백만 마리의 말을 가지고 가버렸다. 허약한 자영농민은 더 허약해졌다. 토지에 씨를 뿌릴 수 없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 전쟁 발발 2년째가 되자 중농들 역시 파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개월이 지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16년 10월 뻬쩨르부르그 헌병국은 이렇게 보고했다: 농촌은 전쟁의 승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보고서는 보험설계사, 교사, 상인 등의 말에 기초하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면서 이렇게 안달이 나서 묻는다: 언제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나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곳에서 정치문제들이 토론되고 있으며 지주와 상인에 대항하는 결의문들이 채택되고 있다. 여러 조직들의 중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불만을 통일적으로 수렴하는 구심은 없다.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 매일 매일 늘어나는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이 단결할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있다.” 이 말에는 과장이 섞여있다. 어떤 경우 헌병은 약간 앞서나갔다. 그러나 기본 사항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로 보고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자기에게 계산서를 들이밀 것이라고 유산계급은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끔찍한 생각을 몰아냈다. 어쨌든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였다. 이 주제에 대해 캐묻기 좋아하는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전쟁 기간 중에 전농업장관 크리보쉰, 전수상 코코프셰프, 대지주 보브린스키 백작, 의회 의장 로지안코, 대기업가 푸틸로프 그리고 여타 저명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가운데에서 그에게 드러난 사실은 이것이었다: 근본적인 토지개혁을 시행하려면 최소한 15년에 걸쳐 30만 명의 측량사가 동원되어야한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자영농민의 수는 3천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사전 계산들은 의미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주, 관리, 은행가의 눈에는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마치 원을 동일 면적의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학적 엄밀성은 농민과는 완전히 무관했다. 농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선 지주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지를 보자.
그러나 전쟁 중에 농촌은 비교적 평온했다. 적극적 분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마다 병사들은 토지문제를 잊지 않았다. 참호 속에서 농민 병사의 미래 계획은 화약냄새로 찌들어있었다. 그러나 총기를 다룰 줄 알고 난 후에도 이 농민 병사들은 혼자 힘으로 자신들만의 농업민주혁명을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도부가 필요했다.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은 노동자에게서 자신의 지도자를 찾게될 운명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이전의 모든 혁명들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완벽히 차이가 난다.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14세기말에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러시아에 농노제가 수립되기 2백년 전 그리고 농노제가 폐지되기 450년 전의 일이다. 한번의 종교개혁과 두 번의 혁명을 통해 농민소유 토지의 몰수과정은 19세기까지 질질 끌었다.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투쟁에 눈을 뜨기 훨씬 전에 자영농민을 청산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 귀족계급, 교회 수장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부르주아 계급이 여러 번에 걸쳐 18세기초까지 급진적인 농업혁명을 완료했다. 이 격변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영농민은 부르주아 체제의 버팀목이 되었으며 1871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빠리 꼬뮌을 진압하도록 도와주었다.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농업문제를 혁명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그래서 이 계급은 1848년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지주에게 넘겨주었다. 마치 약 300년 전에 루터가 농민전쟁 중에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영주들에게 넘겨준 것과 같았다. 반면 19세기 중반에 독일 노동계급은 너무나 허약하여 농민의 지도부가 될 수 없었다. 이 결과 성장할 시간이 영국보다는 짧았지만 독일 자본주의는 미완성 부르주아 혁명을 시발로 발전하면서 농업을 자신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업개혁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한 부르주아 계급의 요구에 따라 귀족과 관료 왕정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농노해방 조치는 러시아의 강요된 자본주의적 변모와 결합하여 농업문제를 불가피하게 혁명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프랑스 모델, 아니면 덴마크 모델, 아니면 미국식 모델에 따라 농업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다. 어쨌든 러시아 식만 아니면 되었다. 그러나 이 계급은 프랑스 역사나 미국의 사회구조를 제때에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 과거 혁명투쟁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지식인층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쪽에 붙었다. 이 상황에서 노동계급만이 농민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후진국의 결합발전 법칙에 의하면 후진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대적인 요인들과 기이하게 결합한다. 이 법칙은 농업문제에 봉착한 러시아에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 수수께끼에 열쇠를 제공했다. 오랜 러시아 역사의 야만적 유산인 농업문제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수 있었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아마 1917년에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별개인 두 역사 과정 즉 (1) 부르주아 사회발전의 여명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인 농민전쟁과 (2) 부르주아 발전의 쇠퇴를 알리는 노동자 봉기, 이 두 역사 과정이 서로 합쳐지고 침투해야했다. 이것이 바로 1917년 혁명의 핵심내용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사회 및 역사 분석 대신 전혀 무관한 심리연구가 빈번히 애용되기도 한다. 본 저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경향을 무조건 멀리할 것이다. 대신 역사의 거대한 살아 움직이는 힘이 가장 크게 부각될 것이다. 이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짜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 역사 발전의 과정 중에 짜르는 혁명과 마주쳤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짜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짜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진행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종종 이 개인의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좁다. 개인의 “특성”은 역사발전의 더 높은 법칙이 개인에게 남긴 흔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 장에서 이 진실을 조명하려고 한다.
니콜라스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 혁명까지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도나 군을 통치할 자질을 단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역사의 저 거대한 파도에 대해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이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짜르 측근들은 10월 혁명의 승리 후 종종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비극적 순간은 만주 여순항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했을 때, 발트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을 때, 이로부터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 그리고 다시 2년 후 그가 왕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함, 경악, 충격을 느낀 때였다; 그러나 짜르는 자기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 주위에 천둥이 울리고 번갯불이 번쩍거릴 때 그는 평소와 똑같이 자신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한 전체 길이를 물었다. 그리고 사냥이나 공식 회의 때에 있었던 일화들을 회상하였고 하루 일과의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수행한 어느 장군은 이렇게 물었다: “거의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절제력, 황태자 시절의 교육,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한다는 믿음, 불충분한 상황인식, 이 가운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평온하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 속에 이미 반 이상 들어있다. 소위 “황태자 시절의 교육” 즉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단순히 외부에서 강제된 훈련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의 핵심은 기질적인 무관심, 정신력의 빈곤, 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 훈련의 결과라고 일부가 인정했던 짜르의 무관심은 실제로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짜르의 일기는 이 점을 가장 잘 입증하고 있다. 정신적 공허함의 우울한 기록이 매해 매일 일기장을 지겹게 채우고 있다. “산보를 오래 했으며 까마귀 두 마리를 사냥했다. 낮의 햇빛 속에 차를 마셨다.” 산책과 보트 타기. 그리고 다시 까마귀 사냥. 그리고 다시 차 마시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적 행위라기보다는 생리 작용의 수준에 가깝다. 교회 예식에 대한 회상은 음주 파티와 같은 격조로 기록되고 있다.
의회가 개원을 앞두고 나라 전체가 격동에 휩싸여 있을 때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14일. 얇은 셔츠를 입고 산보를 나갔고 노젓기도 다시 했다. 발코니에서 차를 마셨다. 스타냐는 우리와 함께 식사와 승마를 즐겼다. 책을 읽었다.” 독서의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영국의 감상적 애정소설? 아니면 경찰청의 보고서? “4월 15일. 위테 수상의 사직서를 받다. 마리, 드미트리와 식사를 했다. 이들을 궁전까지 태워주었다.”
의회 해산을 결정하는 날, 자유주의자 클럽은 물론이고 내각도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7일. 금요일. 아주 바쁜 아침이었다. 관리들과 30분 늦게 아침을 먹었다... 폭풍 때문에 푹푹 찌는 날이었다. 우리는 함께 산보했다. 고레미킨 수상을 영접했다. 의회 해산 포고령에 서명했다! 올가, 페티아와 식사를 했다. 저녁 내내 책을 읽었다.” 의회 해산을 언급한 문장 끝의 감탄부호가 그나마 가장 강렬한 감정 표현이었다. 해산된 의회의 의원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일련의 군대 봉기가 스베아보르그, 크론슈타트, 군함 선상, 육군 부대 등에서 일어났다. 고위 관료들에 대한 혁명 테러는 유례없는 규모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9일. 일요일. 결국 일이 터졌다! 의회가 오늘 폐쇄되었다. 미사 후 아침식사에 동석한 사람들은 뚜렷하게 침울한 표정이었다.... 날씨는 좋았다. 산보 중에 어제 가치나에서 오신 미샤 숙부를 만났다. 저녁 식사 때까지 그리고 저녁시간 내내 조용히 바빴다. 카누를 타고 노를 저었다.” 그는 카누 위에서 노를 저었다. 이 사항은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저녁시간 내내 무슨 일로 바빴는지는 적혀있지 않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주 중요한 시기를 그가 어떻게 기술했는지 좀더 살펴보자: “7월 14일. 옷을 입고 해수욕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즐겁게 해수욕을 했다.” “7월 15일. 두 번 목욕했다. 날씨가 아주 더웠다. 우리 두 명만 저녁식사를 했다. 폭풍우가 지나갔다.” “7월 19일. 아침에 목욕을 했다. 농장에 갔다. 블라디미르 숙부, 차긴이 우리와 점심을 먹었다.” 봉기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잘하는 짓이다!”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평정을 잃지 않는 무관심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의식적인 냉소로까지는 결코 나아가지 못했다.
“오전 9시 30분 카스피 연대 막사로 말을 타고 갔다... 산보를 오래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해수욕을 했다. 차를 마신 후 르보프공과 구츠코프를 영접했다.” 두 자유주의자들을 예상치 않게 영접한 것은 스톨리핀이 야당 지도자들을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미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될 르보프공은 이 알현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슬픔에 잠긴 국왕이 우리를 맞이할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는 짙은 자주색 셔츠를 입은 채 즐겁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짜르의 시각은 하급 경찰관의 시각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현실감이 더 뛰어났으며 미신에 덜 짓눌렸을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몇 년간 니콜라스가 구독하여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유일한 신문은 국가예산으로 메슈체르스키공이 발행한 주간지였다. 그는 비열하고 뇌물을 받는 언론인으로 반동 관료 파벌에 속했다. 그는 자기 집단에서도 경멸의 대상이었다.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짜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숙명론자로 인식되었는데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숙명주의는 자기 “별자리”에 대한 적극적 신념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진정 자신을 운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숙명주의는 역사발전에 저항하여 수동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자의적 성격과 함께 했다. 그런데 그의 자의적 성격은 심리적 동기로는 하찮으나 그 결과는 엄청났다. 위테 백작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해야한다.-- 이 표어는 이 허약한 통치자의 모든 활동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치세의 특징은 죄 없는 피가 목적 없이 대단히 많이 흘려진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오직 그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때때로 그의 반미치광이 고조부 바울과 비교된다. “축복받은” 아들 알렉산드르와 내통한 친위 세력에 의해 바울은 목 졸려 살해되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를 불신하는 경향, 전능한 권력을 쥐고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의 특징인 예민한 감성, 자포자기, 소위 천민 취급을 당하는 왕이라는 자의식 등에서 이 두 로마노프는 똑같았다. 그러나 바울은 니콜라스와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무책임해도 그의 호언장담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스에게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날카로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불안감 뿐 아니라 배신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아첨꾼들은 그가 신하들을 부드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를 주술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짜르는 해고하기로 결심한 관리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베풀었다. 총애를 받은 장관은 귀가하여 자신의 사직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는 했다. 자신의 무능과 미미한 영향력에 대해 짜르는 이런 식으로 복수했다.
재능 있는 인물과 출중한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차가운 적대감으로 대했다. 완전히 평범하고 머리가 빈 사람, 성자 같은 탁발승, 성자 등 자기처럼 무능한 인물들과 같이 있을 때만 그는 안심이 되었다. 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종류의 자부심이었다. 다만 이것은 조금의 자발성도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시기심과 자기방어의 성격이 강했다. 그는 계속해서 전임자보다 무능한 신임장관으로 내각을 교체했다. 두뇌와 패기를 가진 인물은 사면초가의 위기와 같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불렀다. 마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외과의사를 부르는 것과 똑같았다. 위테 그리고 나중에 스톨리핀을 임명했을 때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짜르는 어설프게 감춘 적대감으로 이 두 인물을 대했다. 그리고 위기가 사라지면 곧바로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두 수상들을 서둘러 해임했다. 그가 신임 장관을 선택하는 과정은 너무도 체계적이었다. 짜르 치하 마지막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혁명이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던 1917년 1월 7일 짜르에게 감히 이렇게 말했다: “폐하, 폐하 주위에 믿을만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었거나 은퇴했습니다. 이제 평판이 좋지 않은 자들만 남았습니다.”
짜르 내각과 공통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치지 않고 항상 시끄러운 로지안코는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짜르를 뒤흔들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짜르는 주장이나 무례함에 대해서는 응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의회를 해산할 준비를 했다. 한때 짜르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라스푸틴 살해사건의 공범이었던 드미트리 대공은 자기 동료인 유수포프공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총사령부에 있으면서 짜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 사람들에게 더 무관심했다. 누군가가 짜르에게 정신능력을 마비시키는 마약을 먹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주의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시는 술의 양을 계속 늘리면서 짜르는 정신적 도덕적 냉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모두 상상이나 과장에 지나지 않았다. 짜르에게는 마약이 필요 없었다. 그의 피에는 치명적인 “마약”이 이미 녹아 있었다. 그의 증상은 혁명 직전의 전쟁과 내치의 위기 등 거대한 사건들 때문에 특히 두드러지게 보일 뿐이었다. 일종의 심리치료사였던 라스푸틴은 짜르가 “속이 텅 비었다”고 짤막하게 말한 바 있었다.
더욱이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인 짜르는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2세는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의 잔인성은 역사의 무대에서 한참 늦게 태어나 자신이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짜르가 되자마자 니콜라스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파나고리치 연대를 “멋진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단발 여학생을 채찍질하는 방법과 유태인 학살 때 자기방어력이 없는 유태인의 머리를 깨는 방법이 실린 책을 그는 항상 “만족스럽게 읽었다.”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영혼을 다 바쳐 인간 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 국가 예산으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 들었다. 이들 중 누가 야당 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면 사면조치를 내렸다. 1905년 혁명 때 정부를 대표해 앞장서서 혁명을 진압했던 위테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흑백인조 우두머리들의 쓸데없는 잔인한 기행의 소식을 듣자 짜르는 이들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옹호했다.” 발트해 연안국의 어느 총독은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마음대로 처형하는” 리히터라는 이름의 중위가 저지른 만행을 자신이 중지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짜르는 그가 올린 보고서 여백에 “참으로 멋진 인물이군!”이라고 적었다. 잔악 행위에 대한 이런 식의 격려사를 그는 수없이 남발했다. 의지, 목적, 상상력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이 “주술사”는 고대와 현대의 어떤 폭군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한편 왕후는 짜르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어려움이 많아질수록 이 영향력은 도를 더했다. 짜르와 왕후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부의 결속도는 상황의 압박을 받을 경우 개인이 집단에 의해 어느 정도 보완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면 먼저 왕후에 대해서 살펴보자.
전쟁 기간 중 프랑스의 러시아 대사 모리스 빨레올로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학자들과 시종부인들에게 세련된 심리치료를 베풀었다. 그는 러시아의 마지막 왕후를 이렇게 치밀하게 묘사했다: “도덕적 불안감, 고질적인 우수, 무한한 동경, 간간이 드러나는 기복이 심한 활력, 저승에 대한 고뇌의 상념, 미신에 대한 집착 등은 왕후에게 명확히 드러나는 특성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러시아인의 특징이 아닌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 사카린같이 달콤한 거짓말 속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발트해 연안국의 호족 출신으로 러시아의 장관과 주지사가 된 인물들에 대해 러시아의 풍자가 살티코프는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독일인”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러시아 인민과 조금의 유대감도 없는 외국인들이 “진정한 러시아” 행정관의 가장 순수한 교양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빨레올로그의 말대로 러시아의 정신을 그렇게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왕후를 왜 러시아 인민은 그렇게 공공연히 증오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새로운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독일 여성은 일종의 냉정한 분노로 러시아 봉건시대의 모든 전통과 뉘앙스를 흡수했다. 그런데 러시아 봉건시대는 모든 봉건체제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빈약하고 조야했으며 러시아 인민은 이 봉건체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었다. 따라서 독일 헤센주(州) 출신의 이 공주는 문자 그대로 전제의 악마에게 혼을 빼앗긴 셈이었다. 독일의 벽촌에서 살다가 비잔틴 전제의 정점에 올라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정점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에 적합한 신비주의와 마술을 찾아냈다. 구체제의 해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더욱 고지식하게 믿었다. 그녀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감정을 격앙시켰다. 이 결과 그녀는 의지가 박약한 짜르를 보완하고 지배했다.
혁명이 터지기 1년 전인 1916년 3월 17일, 고문을 당한 것처럼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러시아가 패배와 파멸의 구렁텅이 속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때 황후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용, 책임 내각 등 ... 또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의회가 아니라 폐하의 전쟁, 폐하의 평화조약, 폐하의 명예 그리고 조국의 명예가 되어야 합니다. 의회는 이 문제들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대단히 철저한 정치 강령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계속 동요하는 짜르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니콜라스가 허수아비 총사령관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총사령부로 출발한 후 왕비는 공공연히 내정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마치 그녀가 섭정인 것처럼 그녀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녀는 의회, 장관들, 총사령부 장군들, 전세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짜르에게까지 맞서서 짜르의 소수 친위 세력과 음모를 꾸몄다. 1916년 12월 6일 왕후는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 폐하는 프로토포포프를 유임시키고 싶다고 언젠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트레포프 수상이 어떻게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탁자를 주먹으로 치세요. 굴복하면 안됩니다. 보스가 되어야 합니다. 폐하의 굳건하고 귀여운 왕후와 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말에 복종하세요. 우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폐하가 옳다는 것을 폐하는 아십니다. 머리를 높이 쳐드세요. 트레포프와 함께 일하려면 그에게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세요.” 이런 말들은 지어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진본으로 증명된 편지들의 내용이다. 더욱이 이런 말들을 누가 지어내기는 힘들다.
12월 13일 왕후는 짜르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책임 내각에 대해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매사가 조용해지고 개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백성들은 폐하의 손길을 원합니다. 여러 해 동안 백성들은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해왔습니다: ‘러시아는 채찍의 맛을 느끼고 싶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입니다!” 영국의왕조인 윈저(Windsor)가문의 교육을 받았으며 비잔틴 왕후의 관을 머리에 쓴 이 정통 헤센 여자는 러시아 정신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천성적으로 이것을 경멸하고 있다. 왕정이 붕괴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꼭 2개월 15일 전에 이 여자는 짜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시아 인민의 본성은 채찍질을 원합니다.
성격의 강인함과는 대조적으로 왕후의 지적 능력은 남편보다 더 낮았다. 그녀는 멍청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짜르보다 더 좋아했다. 짜르 부부는 그들의 시종부인인 비루보바와 가까우면서도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이것은 짜르 부부의 정신적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비루보바는 자신을 바보라고 묘사했다. 이것은 겸손함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사물을 정확한 보는 눈을 가진 위테는 “대단히 평범한, 어리석은, 뻬쩨르부르그의 젊은 여자이다. 비스킷 반죽의 거품만큼이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고 그녀를 묘사했다. 나이 많은 관료들과 대사들과 은행가들은 아양떨면서 그녀와 놀아났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올 돈은 잊지 않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여자와 짜르 부부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그녀의 의견을 묻고,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녀를 언급하는 편지를 썼다. 비루보바는 의회 심지어는 내각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짜르 부부에게 행사했다.
그러나 비루보바 자신도 “친구”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의 권위는 그녀와 짜르 부부를 모두 능가했다. 왕비는 짜르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견해일 뿐입니다. 우리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친구”의 견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몇 주 후 왕비는 이렇게 애써 주장했다: “...저는 확고합니다. 그러나 저의 말 즉 우리 친구의 말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를 믿어주세요.... 폐하는 나쁜 신하들의 말을 따르고 있어서 지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여린 어린아이와 같은 폐하, 폐하 때문에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신이 보낸 사람이 폐하께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이 보낸 친구는 바로 그레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우리 친구의 기도와 도움이면 ...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모든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났을 겁니다. 저는 이 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짜르 니콜라스와 왕후 알렉산드라의 치세 내내 점쟁이들과 미치광이들이 러시아 전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 궁정으로 수입되었다. 일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쟁이 주위로 짜르 직속 관리들이 모여 강력한 상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작부인 직함을 가진 편협한 할머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료한 관리, 장관 전부를 매수한 은행가들이 조정에 들끓었다. 최면술사와 마술사의 공인되지 않은 경쟁을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음모를 꾸미는 성자 가운데 성자인 라스푸틴에게 서둘러 접근했다. 위테는 이 지배집단을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의 친위 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들 때문에 그는 두 번이나 발가락을 채였다.
왕조가 인민으로부터 고립되고 자신이 불안감을 느낄수록 짜르는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했다. 좋은 날씨를 부르기 위해 어떤 야만인들은 지붕의 기와를 끈에 매달아 공중에 대고 흔든다. 짜르 부부는 아주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 기와를 사용했다. 짜르의 전용기차에는 크고 작은 성상과 온갖 종류의 부적이 가득한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짜르는 먼저 일본군에게 그리고는 독일 포병에게 흔들어 대었다.
조정에 모이는 인간들의 수준은 세대가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방자”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르 2세 때 대공들은 진심으로 가문의 귀신과 마녀들의 존재를 믿었다. 알렉산드르 3세 때에도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좀더 조용하게 미신 행위들이 유행했을 뿐이었다.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의 친위 세력”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다만 인적 구성과 방식만이 짜르가 바뀔 때마다 달랐다. 니콜라스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한편 지난 몇십 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 따라서 짜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뒤 처져 있었다.
짜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1905년 11월 첫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볼스키도(道)에서 우리는 신이 보낸 사람 그레고리를 알게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라스푸틴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말을 훔친 벌로 구타를 당한 흉터가 그대로 있었다. 적당한 순간에 나타난 이 “신이 보낸 사람”은 곧 보조역할을 해줄 관리들을 찾아냈다. 아니 그들이 그를 찾아낸 셈이었다. 이렇게 왕후를 꽉 잡는 그리고 그녀를 통해 짜르를 꽉 잡는 새로운 친위 파벌이 형성되었다.
고위 관직의 임명과 계약의 체결을 모두 라스푸틴 파벌이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1913년과 1914년 사이의 겨울부터 뻬쩨르부르그에 공공연히 나돌았다. “장로” 자신은 서서히 국가기관이 되었다. 그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되었으며 서로 경쟁하는 장관들에 의해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되었다. 경찰청의 스파이들은 시간마다 그의 동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고향 마을 포크로프스키를 방문하면서 거리에서 술에 취해 자기 아버지와 피 터지게 싸운 내용도 전부 기록되었다. 이 일이 벌어진 1915년 9월9일 그는 친근한 내용의 전보 두통을 하나는 짜르스코에 셀로 궁전의 왕비에게 또 하나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보냈다. 서사시 같은 언어로 경찰 스파이들은 매일 이 친구의 향락을 기록했다. “오늘 새벽 5시에 그는 만취된 채 돌아왔다.” “25일과 26일 밤 어느 여배우는 라스푸틴과 밤을 보냈다.” “아스토리아 호텔에 짜르의 침실시종의 부인인 어느 여배우와 그가 도착했다.” ... 그리고 바로 옆에 이렇게 적었다: “밤 11시 경 짜르스코에 셀로에서 자택으로 돌아왔다.” “쉬___ 공주와 만취한 채 집에 왔다가 함께 금방 나갔다.” 다음날 아침이나 저녁에 짜르스코에 셀로로 가다. 이 장로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이유를 묻는 스파이의 동정적인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의회를 소집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선뜻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크게 취하여 아침 5시에 자택에 도착했다.” 이렇게 수년 수개월간 멜로디의 조성은 세 가지뿐이었다: “많이 취한,” “무지무지 취한,” “완전히 취한.” 현병감 고르바초프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보고서들을 전부 정리하여 서명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짜르의 마지막 6년 동안 지속되었다. 라스푸틴과 뻬쩨르부르그 생활을 조금 같이 했으며 후에 그를 죽인 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에서 그의 생활은 계속되는 향락 그 자체였다. 노예선의 노예가 풀려나 갑자기 출세한 후 술에 취해 부리는 온갖 추태였다.”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뢰한에게 당한 딸들의 엄마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대주교 피티림 그리고 거의 문맹인 대주교 바르나바는 라스푸틴 때문에 높은 성직에 올랐다. 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 사블러는 라스푸틴 덕분에 직책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코코프세프 수상은 “장로”를 영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해임되었다. 라스푸틴은 슈튀르머를 수상으로, 프로토포포프를 내무장관으로, 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으로 라에프 등 많은 인물들을 임명했다.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라스푸틴을 만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그를 포옹하고 이렇게 외쳤다: “진짜 현인이 여기 계셨군요!”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왕후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장로”의 재정 대리인을 맡은 유태인 시마노비치도 나이트클럽의 도박꾼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라스푸틴을 통해 완전한 사기꾼 도브로볼스키를 법무부 관료로 만들었다.
새로운 공직 임명과 관련하여 왕후가 짜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옆에 공직 예정자들의 명단을 조그맣게 만들어 두세요. 우리 친구가 폐하께서 이 일을 프로토포포프와 상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다시 편지를 썼다: “슈튀르머가 수상으로 며칠 더 있어도 좋다고 우리 친구가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프로토포포프는 우리 친구를 아주 경애합니다. 그는 축복받을 겁니다.”
경찰 스파이들이 라스푸틴이 소비한 술병과 여자의 수를 계산하고 있던 날에 왕후는 짜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슬픔을 토로한다: “라스푸틴이 여자들에게 키스하는 등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읽어보십시오. 사도들도 인사로 모든 사람들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 대한 언급도 경찰 스파이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편지에서 왕후는 한술 더 뜬다: “저녁기도를 하면서 우리 친구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유대교 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스스로 완벽한 체하면서 얼마나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맞아요, 정말이지 자기 나라에서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친위 파벌은 언제나 라스푸틴을 예수와 비교했다.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의 위협적 힘 앞에 너무 놀란 짜르 부부에게 비인격 신과 쓸모 없는 예수의 그림자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신의 아들”이 재림해야했다.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짜르 부부는 자기들 모습을 한 예수를 라스푸틴에게서 찾아냈다.
구체제의 상원의원 타간세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세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다.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反)사회적 기생 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패거리 행위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횡포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패거리 행위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혁명을 막아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짜르와 측근 파벌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의지가 박약했으며 정치 목표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 친위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혁명이 이들을 집어삼켰다. 혁명 직전까지 조성되었던 귀족, 관료집단, 부르주아 계급들 간의 상호관계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할애하자.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 관습, 비겁함의 측면에서 짜르 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짜르를 원했다. 그러자 짜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 품위 있는 책임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왕후는 라스푸틴이 건넨 사과 하나를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보냈다. 그리고 짜르가 강한 의지를 갖도록 이 사과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이렇게 간청했다: “기억하세요, 무슈 필립(프랑스의 돌팔이 약장수이자 최면술사)도 폐하께서 헌법을 허용하지 말 것을 진언했습니다. 헌법을 허용하면 폐하와 러시아는 끝장입니다.... 표트르 대제, 이반 뇌제, 바울 황제가 되세요. 놈들을 폐하의 발 밑에 짓이겨야 합니다!”
두려움, 미신, 인민에 대한 악의적인 소외감 등이 참으로 역겹게 혼합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짜르 일가가 외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 라스푸틴은 귀족 부인들을 정말이지 끌고 다녔다. 그리고 주술행위가 귀족 사회 전체에 창궐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시작된 신비주의는 이들을 단결시키기는커녕 분열시키기만 했다. 각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귀족가문들은 자기가 섬기는 성인이 영험하다고 강변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뻬쩨르부르그 사회의 정점에 서있는 짜르 일가는 마치 페스트에 걸린 것처럼 불신과 적대감의 검역선에 둘러 처져 있었다.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에 대한 악감정이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깊이 느껴왔다. 그리고 이 감정이 대단한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느꼈다.”
전쟁의 자줏빛 배경과 발 밑에서 똑똑히 들리는 사회 격동의 굉음 속에서도 특권층은 삶의 쾌락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탐욕스럽게 환락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더욱더 자주 이들의 연회에 해골이 나타나 손가락의 조그만 뼈를 흔들었다. 왕후 “알릭스”의 혐오스러운 성격, 짜르의 배신적인 나약함, 탐욕스러운 바보 비루보바, 머리에 흉터가 그대로 드러난 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등 때문에 자신들이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 주변에서 중심까지 공포의 전율이 몰아쳐 지배계급을 오그라들게 만들었으며 짜르스코에 셀로의 증오스러운 짜르의 측근 파벌을 고립시켰다. 대체로 아주 기만적인 회상을 통해 비루보바는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다: “...100번이나 뻬쩨르부르그 사회가 왜 이런가? 하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들은 모두 정신병이나 전시에 맹렬하게 퍼지는 유행병에 걸리기라도 했는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머리가 돈 사람들 속에는 로마노프 왕가 전체, 탐욕스럽고 거만하고 모두가 증오하는 대공들과 대공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을 것같은 공포에 질려 이들은 자기 주위를 포위하며 좁혀 들어오는 포위망 바깥으로 몸을 비틀고 나오려 했다. 이들은 비판적인 귀족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짜르 부부에 대해서는 가십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들과 주위 사람들을 충동질했다. 존엄스러운 짜르의 삼촌들이 짜르에게 보내는 충고의 편지는 예절을 갖추었다. 그러나 행간에는 분노의 으르렁거림과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10월 혁명 직후 프로토포포프는 자신이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자못 화려하게 표현했다: “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 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 짜르 일가의 관계들은 분석되고 토론되었다. 국가 수반에 대한 사소한 일화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가 지어졌다. 많은 대공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일반인들은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
짜르의 조정이 친독파이며 심지어 독일과 직접 내통한다는 비난 때문에 짜르의 측근 파벌에 대한 소문들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시끄러울 뿐 깊이가 없는 로지안코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라스푸틴의 야망이 내포하는 연관과 유추는 논리적으로 너무 명백하다. 따라서 독일군 사령부와 라스푸틴 파벌 사이의 협력관계에 대해서 최소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논리적” 명백성을 단순히 말하기만 했으므로 이 증언의 단정적 목소리는 그 효과가 크게 약화된다. 혁명이 끝난 후에도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군 사령부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친독일 성향”은 달랐다. 물론 이것은 독일인 왕비, 슈튀르머 수상, 클라인미헬 백작부인, 궁내 장관 프레데릭스 백작 그리고 독일이름의 다른 신사들의 민족적 공감이나 러시아 인민에 대한 냉담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늙은 여자 모사꾼 클라인미헬의 냉소적인 회고록은 대단히 명쾌하게 다음의 사실들을 증명하고 있다: 유럽 모든 나라의 귀족계급들은 자기 민족을 초월하는 국제적 성향을 지녔다; 이들은 가문의 유대관계, 상속재산, 인민에 대한 경멸, 오랜 성채와 최신 유행의 온천장과 해수욕장 그리고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범유럽적 간음행위 등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의 아첨꾼 변호사들에 대한 유럽 왕족들의 천성적인 반감, 독일 정권의 진정한 (봉건적) 러시아 정신에 대해 독일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반동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공감 등은 클라인미헬이 열거한 내용보다 훨씬 더 실재했다. 독일 정권의 왁스칠한 콧수염, 주임상사 식의 군대식 언동, 자신감에 찬 어리석음 등에 대해 유럽반동세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들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내통의 위험은 상황의 논리 자체로부터 나왔다. 왜냐하면 짜르에게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위험해질수록 그는 이 탈출구를 더 줄기차게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곧 드러나겠지만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짜르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직접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기회를 독점적으로 누리고자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맹렬하게 국수주의를 선동하면서 인민을 속이고 짜르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짜르의 측근 파벌은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감히 성급하게 입장을 정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애국주의 목소리를 흉내내도록 이들은 강요당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조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라스푸틴 파벌에 속한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라스푸틴이 독일과 연계가 있었다거나 독일에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렇게 덧붙인다: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로서는 가장 큰 불행이며 정치적으로도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슈튀르머의 견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흥미로운 견해를 가진 슈튀르머가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적대국 러시아의 수상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짜르의 마지막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는 장관 임명 직전 스톡홀름에서 독일의 외교관 와부르크와 협상을 벌이고 그 결과를 짜르에게 보고했다. 쿠를로프에 따르면 라스푸틴 자신은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에게는 거대한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후는 1916년 4월 5일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친구 라스푸틴이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을 그들은 감히 꺼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처럼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며 관대합니다. 어떤 종파에 속하든 훌륭한 기독교인은 그렇게 행동해야합니다.” 물론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던 이 좋은 기독교인은 사기꾼, 고리대금업자, 귀족의 뚜쟁이 뿐 아니라 적의 진짜 스파이들로부터도 아첨을 받았다. 이런 종류의 “내통”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당 애국지사들은 문제를 좀더 직접적이고 폭넓게 제기했다. 즉 이들은 왕후에게 직접 국가반역죄를 물었다. 한참 뒤에 쓴 회고록에서 데니킨 장군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군대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왕후가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느니 영국 원수 키츠너의 여행을 왕후가 독일에게 일러바쳤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다. 짜르와 혁명에 대한 군대의 태도 형성에 이 소문들은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혁명 후 알렉세예프 장군이 왕비의 국가반역죄에 대한 심문에서 “애매하게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한 것을 데니킨은 언급하고 있다: 문서들을 검토하던 중 왕후가 모든 전선의 군대 배치상황을 담은 지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 사실은 알렉세예프 장군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데니킨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이에 대해 말 한마디하지 않은 채 화제를 바꾸었다.” 왕후가 그 신비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운이 나쁜 장군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왕후에게 떠넘기려했다. 조정의 반역죄에 대한 비난은 무능한 총사령부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퍼지면서 군대 내로 잠입했다.
사실 짜르는 왕후에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만약 왕후 자신이 독일 황제 빌헬름에게 군사비밀과 심지어는 연합국 사령관들의 머리까지 갖다주었다면 짜르 부부를 타도하는 것 외에 무슨 일이 더 남아있었겠는가? 그리고 군대의 통수권자이며 독일을 반대하는 정당의 우두머리인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이 친위 쿠데타의 수장으로 선택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임무로 보았을 때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라스푸틴과 왕후의 주장을 받아들인 짜르가 대공의 군대 통수권을 박탈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의 직책을 장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후는 군대 통수권을 위임받는 조카와 삼촌의 만남 자체를 두려워했다. 왕후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니콜라샤가 폐하로부터 어떤 약속이나 다른 어떤 양보를 받아내도록 허용하면 안됩니다. 그레고리가 그와 그의 패거리로부터 폐하를 구한 사실을 기억하세요...러시아를 위한다는 미명으로 그들이 무엇을 모의했는 지를 기억하세요. 그들은 폐하를 물러나게 만들고 저를 수도원에 집어넣을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 오를로프는 필요한 문서들을 전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짜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가 얼마나 해로운 지를 왕가 전체는 알고 있다. 그녀와 나의 형 주위에는 반역자들만이 모여있다.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 곁을 떠났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로지안코가 “왕후 제거 작업”을 주동할 것을 대공부인 마리아 파블로브나는 주장했다. 그것도 자기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주장했다. 로지안코는 이 대화를 없었던 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 않으면 짜르에 대한 충성 선서에 따라 대공부인이 의회 의장에게 왕후를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고 자신이 직접 짜르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치가 빠른 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왕후 살해 문제를 응접실의 한담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끔은 내각도 짜르와 심하게 충돌하였다. 혁명 발발 1년 6개월 전이었던 1915년에 이미 지금도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이 내각 회의에서 오갔다. 전쟁장관 폴리바노프: “인민에 대한 유화정책만이 상황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있는 불안한 제방은 대홍수라는 대재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해양장관 그리고로비치: “군대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으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 “짜르의 인기와 권위는 상당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무장관 쉐르바토프공: “지금 상황에서 내각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습니다....독재 아니면 유화정책 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1915년 8월 21일 회의록).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어떤 조치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어느 정책도 달성이 불가능했다. 짜르는 독재를 결행할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유화정책도 거부했다. 그리고 통치능력이 없는 내각의 사직서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기록 책임을 맡은 고위관리는 장관들의 연설 내용에다 짤막한 논평을 달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가로등 기둥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
이런 정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임박한 혁명을 막는 유일한 수단으로 친위 쿠데타의 필요성이 관료집단 내에서도 논의되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대화들에 참여한 어떤 인물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고 대화를 나누었을 경우 필사적인 혁명가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 남부에서 군대에 대해 특별 사찰 중인 어느 헌병 대령은 자신의 보고서에 어두운 전망을 제시했다: 짜르와 왕후가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선전 때문에 군대는 친위 쿠데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내용의 대화들이 공공연히 장교회의에서 나오고 있는데 총사령부는 전혀 제지도 하지 않고 있다.” 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총사령부의 상당수가 쿠데타에 공감하고 있었다: 일부 개인들은 소위 진보연합의 주요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혁명 이후 악명을 떨친 콜착 제독은 그의 군대가 적군에 의해 패퇴한 후 소비에트조사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야당의원 다수와 나는 접촉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연설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짜르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위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그는 제공받지 못했다.
라스푸틴이 살해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된 이후 상류사회는 더 큰 목소리로 친위 쿠데타의 필요성을 떠들었다. 라스푸틴 살해와 관련하여 드미트리 대공이 궁중에서 체포되었을 때 여러 연대의 장교들이 그에게 다가와 결정적인 행동 계획들을 제안했다. “그러나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유스포프공이 전하고 있다.
연합국의 외교관들 그리고 어쨌든 영국 대사는 이 음모의 부속물로 간주되었다.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음모가 일자 영국 대사는 1917년 1월 짜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다. 그는 이미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을 얻은 후였다. 니콜라이는 주의 깊고 정중하게 영국 대사의 말을 경청하고는 감사의 말을 표현했다. 그리고 곧 다른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 프로토포포프는 니콜라이에게 영국 대사 부캐넌과 진보연합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보고했다. 그리고 영국 대사가 감시 대상자에 포함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이 제안을 승인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사를 감시하는 일이 “국제적 관례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거리낌없이 “정보부가 입헌민주당 지도자 밀류코프와 영국 대사의 관계를 매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국제적 관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례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친위 쿠데타 음모는 전혀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가? 이것을 증명할 물증은 하나도 없다. “음모”라는 말 자체가 너무 범위가 넓었다. 음모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집단이 포함되었다. 친위 쿠데타에 대한 생각은 혼란스러운 해결책 또는 절망의 구호로 뻬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정서가 되어 공중에 나돌아 다녔을 뿐이었다. 결국 이 음모는 실제 계획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18세기 러시아의 상류 귀족들은 두 번 이상 왕위 계승에 실제 개입하여 불편한 황제들을 독살시키거나 목 졸라 죽였다. 1801년 바울 황제는 음모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따라서 친위 쿠데타가 러시아 왕조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와 반대로 전통의 일관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족들은 강력한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들은 짜르와 왕후를 목 졸라 죽이는 영광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후자의 지도자들 역시 의지가 더 강하지는 못했다.
혁명 이후 음모의 핵심으로 자유부르주아 구츠코프와 테레쉬첸코 그리고 이들과 가까웠던 크리모프 장군이 두 번 이상 언급되었다. 구츠코프와 테레쉬첸코는 자신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불명확하게 확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한 보어군에 자원 입대했으며 결투를 자주 했던 구츠코프는 박차를 단 자유주의자로 “사회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음모를 꾸미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부각되었음에 틀림없었다. 말많은 밀류코프 교수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구츠코프는 어느 방위군 연대가 사회혁명을 저지하는 짧고도 날카로운 일격을 가할 것이라고 두 번 이상 상상했다. 위테는 회고록에서 자기가 혐오한 구츠코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불편한 술탄을 타도한 터키 소장 장교들의 방법들을 숭상했다. 그러나 구츠코프는 터키 소장 장교들의 대담함을 과시할 기회를 젊었을 때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훨씬 나이를 먹어버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스톨리핀의 하수인이었던 이 인물은 러시아와 터키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친위 쿠데타가 진짜 혁명을 막는 수단이 아니라 혁명의 눈사태를 가져오는 마지막 움직임이 되지 않을까? 치료약이 병 자체보다 더 파멸적이지 않을까?
2월 혁명과 관련된 문헌들은 친위 쿠데타에 대한 준비가 확고히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2월에 쿠데타는 실행되고 있었다.” 데니킨은 3월에 쿠데타가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이 두 인물은 모두 “계획”을 말한다. 이동 중에 있는 짜르의 전용기차를 멈춘 후 그의 하야를 요구한다. 그가 거부할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경우 짜르를 “신체적으로 제거”한다, 등등. 밀류코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혁명의 발발을 예상하면서 짜르 제거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정확히’ 그 준비상황을 알고 있지 못했다. 이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상황을 가장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소수의 모임에서 논의했다.” 최근 몇 년간 일부 맑스주의적 역사 연구도 쿠데타가 실제로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이 예를 보더라도 신화가 역사과학에서 얼마나 쉽고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음모의 가장 주요한 증거로 로지안코의 화려한 이야기가 빈번히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음모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이다. 1917년 1월 크리모프 장군이 전선에서 돌아와 지금 상태로는 전쟁이 계속될 수 없다고 의회 의원들 앞에서 불평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짜르 제거라는 극단 조치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여러분들을 지지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결정한다면! 그러자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가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짜르가 러시아를 파멸시키고 있는데 그를 동정하거나 살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시끄러운 논쟁 중에 브루쉴로프의 진짜 또는 상상의 말들이 보도되고 있다: “짜르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면 나는 러시아를 선택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젊은 백만장자 테레쉬첸코는 짜르를 살해하자는 확고한 입장을 들고 나왔다. 입헌민주당의 슁가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말이 맞다. 타도가 필요하다...그러나 누가 타도를 결행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누가 결행할 것인가? 이것이 로지안코가 증언한 내용의 핵심이었다. 그 자신은 짜르 타도에 반대했다. 이 논쟁이 있은 후 몇 주 동안 이 계획은 확실히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했다. 이들은 짜르의 전용기차를 멈추는 것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러나 누가 이 작전을 실행할 것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이가 어렸을 때 러시아 자유주의는 돈과 공감으로 혁명 테러주의자들을 지원했다. 폭탄을 터뜨려 짜르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일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존경받는 신사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을 거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인적 두려움이 아니라 계급적 두려움이 역사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금 상황은 나쁘다. 그러나 더 나빠질 수 있다. 이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어쨌든 구츠코프, 테레쉬첸코, 크리모프가 쿠데타 쪽으로 진지하게 움직였다면 즉 그것을 실제적으로 준비하고 필요한 인력과 수단을 동원하였다면 이 사실은 혁명 후에 명확히 그리고 정확하게 입증되었을 것이다.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 특히 거사를 실현시키는데 필요했을 많은 수의 적극적인 청년들은 “거의” 성사된 행위에 대해 이후 침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이 거사에 가담한 행위는 그들에게 확실히 좋은 직장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크리모프와 구츠코프가 애국심에 충만한 한숨을 쉬면서 포도주와 궐련을 즐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의 단계로 일이 진전되지 않았음이 아주 명백하다. 귀족계급의 경박한 야당 인사들이나 대부르주아 계급의 거물급 야당 인사들이나 신의 뜻이 예정한 불길한 역사과정을 행동으로 수정할 의지가 없었다.
혁명은 짜르와 함께 의회도 쓸어 없앴다. 의회의 개인적인 회의에서 1917년 5월 웅변을 가장 잘하면서도 가장 텅빈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후세가 이 혁명을 저주한다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제때에 이 혁명을 막을 수 없었던 우리도 저주할 것이다!” 이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국외로 망명하게 될 케렌스키는 마클라코프처럼 이렇게 한탄했다: “그렇다, 참정권이 부여된 러시아가 그렇게도 많이 말하고 그렇게도 많이 준비했던(?)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제때에 성사시키기에는 너무도 행동이 굼떴다. 러시아는 자생적인 폭발 즉 혁명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행동이 느렸다.”
혁명이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폭발시킨 후에도, 왕조의 얼굴마담만이라도 “제때에” 바뀌었다면 혁명이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식자층의 바보들은 계속 생각했다. 따라서 케렌스키와 마클라코프의 외침은 당시의 전체적인 상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기에는 의지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조그마한 혁명을 수행하자는 계획이 나왔다. 자유주의 음모가들은 왕정의 주연배우는 감히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주연배우인 짜르에게 외우지 못한 대사를 속삭여주는 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라스푸틴 제거가 왕정을 구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여자와 결혼한 유스포프공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왕당파 의원 푸리슈케비치를 이 일에 끌어들였다. 이들은 또한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살해사건에 “전 러시아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유명한 변호사는 이 제안을 지혜롭게 거절했지만 음모가들에게 독특한 방식의 독약을 제공했다! 음모가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자동차가 라스푸틴의 시체를 옮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대공들도 쓸모가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악취미 인간들을 위해 짜여진 영화 시나리오처럼 수행되었다. 12월 16일과 17일 밤 라스푸틴은 조그만 파티에 참여하도록 유인되었다. 그리고 유스포프공의 소규모 가옥에서 그는 살해되었다.
극소수로 구성된 짜르 친위 파벌과 신비주의 숭배자들을 제외하고 지배계급들은 모두 라스푸틴의 살해를 구원의 행위로 환영했다. 대공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짜르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손은 농민(비록 예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민!)의 피로 묻혀졌다. 대공은 당시 뻬쩨르부르그에 있던 모든 왕족들의 공감 어린 방문을 받았다. 왕후의 유일한 자매인 세르게이 대공 미망인은 살해자들을 위해 기도 드리며 이들의 애국적 행위에 축복을 보낸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을 언급하는 것도 금지되었던 신문들은 환희에 찬 기사를 실었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살해자들을 기리는 데모를 시도했다. 행인들은 거리에서 서로 축하했다. 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가정에서, 장교 회의에서, 식당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우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노동자들이 라스푸틴 살해의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만세는 왕조 재생의 희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라스푸틴 파벌은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상황을 주시했다. 이들은 짜르, 왕후, 짜르의 딸들과 비루보바 등이 모르게 라스푸틴의 시체를 매장했다. 대공들에 의해 살해된 말 도둑 출신의 성스러운 친구의 시체 위에 서 있었을 경우 짜르 일가는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일개 농민의 죽음에 짜르 일가가 애도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매장된 후에도 라스푸틴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나중에 혁명과 함께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로마노프가 가택 연금에 처해졌을 때 짜르스코에 셀로의 병사들이 라스푸틴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었다. 시체의 머리에는 알렉산드라,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아니아의 서명이 있는 성상이 놓여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임시정부는 사신을 보내 시체를 뻬쩨르부르그로 이송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군중이 이 시도에 저항하자 사신은 그 자리에서 시체를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살해 후 왕정은 전부 합쳐 10주일 밖에 지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도 짜르의 시간임에는 틀림없었다. 라스푸틴은 가고 없었으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짜르를 지배했다. 음모가들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짜르 부부는 살해사건 후에도 특별한 의지를 가지고 라스푸틴 파벌의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들을 승진시키기 시작했다. 라스푸틴 살해에 대한 복수인 마냥 악명 높은 악당이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여러 명의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당했다. 프로토포포프가 심령술을 배워 라스푸틴의 귀신을 부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절망의 올가미가 구체제의 목을 더 옭아매었다.
라스푸틴의 살해는 거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살인범들과 이들을 부추긴 자들이 계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역할을 했다. 즉 위기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궁중, 총사령부, 공장, 농민의 오두막집 등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살해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스스로 나 있었다: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 친위 세력에 대해 대공들조차 독과 권총에 의존해야했다. 시인 블로크는 라스푸틴 살해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를 죽인 총알은 왕조 지배층의 심장부를 가격했다.”
로베스삐에르는 입법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대는 왕정을 약화시키면서 부르주아 계급을 분기시키고 이후 인민대중을 분기시켰다. 동시에 로베스삐에르는 이렇게 경고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혁명은 프랑스만큼 빨리 진행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특권계급들이 프랑스 귀족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혁명을 주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탄할만한 분석을 내리면서도 로베스삐에르는 다음과 같은 인식의 오류를 범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계급의 무분별한 반대는 다른 나라들에게 확실한 교훈을 남겼다. 1905년에 그리고 특히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로베스삐에르와는 달리 이렇게 증언했다: 전제 그리고 반봉건 체제 즉 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첫 단계에서 비록 일관되지는 못하나마 귀족, 왕족 등 특권 최상층의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 이 놀라운 역사 현상은 사회계급 이론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이론의 조잡한 해석에 모순을 일으킬 뿐이다.
사회의 모든 적대관계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혁명은 터진다. 그러나 이 상황은 구체제의 계급들 즉 해체될 수밖에 없는 계급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생물에 대한 유추를 그 가치보다 더 높이 사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자연에서 탄생의 행위는 어느 순간이 되면 어미와 새끼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이 점은 말할 가치가 있다. 특권계급들이 기존 체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들이 누렸던 기존의 사회적 지위가 사회의 생존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지배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귀족계급은 자신이 모든 적대감의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료집단을 비난한다. 그러면 관료집단은 귀족계급을 비난하고 이 양자가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불만을 자기 권력의 원천인 왕정의 정점에 퍼붓는다.
귀족의 세습기관들에 봉직하다가 잠시 내각에 입각한 쉐르바토프공은 이렇게 말했다: “사마린과 나는 둘 다 우리 도에서 귀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우리가 좌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짜르와 내각이 모든 합리적인 사회(우리는 혁명적 음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귀족, 상인, 자치도시, 도의회, 심지어는 군대 등과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의견을 원치 않는다면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자신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이유는 왕정의 맹목이나 이성 상실에 있다고 귀족계급은 생각한다. 구 사회를 새로운 사회와 화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특권층은 믿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귀족계급은 자신의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구체제의 가장 성스러운 권력인 왕정에 대한 반대로 전환시킨다. 역사는 귀족계급의 상층부를 버릇없는 자식으로 키웠으며 이들은 혁명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참을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이 귀족들의 반대는 격렬하면서도 무책임하다. 귀족의 불만은 비체계적이고 일관되지 못한다. 미래가 없는 계급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등불은 꺼지기 전에 환하면서도 그을음이 많은 빛으로 확 타오르다 꺼진다. 귀족도 이런 식으로 체제 저항의 빛을 내고 사라진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의 철천지 원수인 인민에게 커다란 봉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체제 붕괴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은 사회계급 이론과 일치한다. 이 뿐이 아니다. 이 이론으로만 이 변증법이 설명될 수 있다.
혁명의 첫 번째 문제는 짜르 왕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짜르 체제는 나무에 매달린 썩은 과일처럼 건드리자마자 붕괴했다. 이 붕괴의 순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구 지배계급에 대한 지금까지의 상세한 묘사는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짜르는 모길레프의 총사령부에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뻬쩨르부르그의 혼란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부에서 짜르와 함께 있던 궁중 사관(史官) 두벤스키 장군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에는 조용한 삶이 시작된다. 모든 것은 과거 그대로이다. 짜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우연적이고 외적인 원인들만이 어떤 변화를 야기할 뿐이다...” 2월 24일 왕후는 항상 그랬듯이 영어로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케드린스키(케렌스키를 의미했다) 의원은 끔찍한 내용의 연설을 했으므로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전시의 법이 그렇습니다. 하나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폐하의 확고한 의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2월 25일 전쟁장관이 보낸 전보가 도착했다. 수도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 사이에 혼란이 조성되고 있으나 적절한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는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일은 늘 있던 일입니다!”
짜르에게 양보하지 말 것을 언제나 주문했던 왕후는 여기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26일 니콜라스의 흔들리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전보를 쳤다: “도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녁때 보낸 전보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일이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파업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파업할 경우 벌로 전선에 보내질 것이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발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질서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 큰 것이 필요 없다. 질서만 있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자들이 교외에서 분노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 된다.
27일 아침 이바노프 장군은 독재적 권한을 위임받아 성조오지 대대와 함께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한다. 그러나 짜르스코에 셀로를 점령한 직후에 자신의 임무를 발표할 예정이다. 차례가 돌아와 자신도 나중에 군사독재를 시행한 데니킨 장군이 이렇게 회상한다: “그보다 더 부적합한 인물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살이 축 늘어진 노인에 불과한 그는 정세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위력, 활력, 의지, 근엄함 등 어느 것도 없는 인물이다.” 이바노프 장군이 선택된 이유는 그가 1905년 혁명 당시 노동자들을 진압했으며 이보다 11년 전에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 진압군을 지휘했던 그는 이제 힘없는 노인이었으며 진압되었던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북부와 서부 전선의 병력은 뻬쩨르부르그로 진군할 것을 명령받았다. 시간이 충분하다고 모두들 생각했음이 명백했다. 이바노프 자신도 사태가 곧 정상화될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뻬쩨르부르그의 친구들에게 줄 식료품을 모길레프에서 구입하라고 부관에게 명령해야겠다고 한가하게 생각했다.
2월 27일 오전 로지안코는 짜르에게 이렇게 끝맺는 새 전보를 보냈다: “조국과 왕조의 운명이 결정될 최후의 시간이 왔습니다.” 짜르는 조정(朝廷) 장관 프레데릭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불뚝이 로지안코 놈이 또다시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잔뜩 써서 나에게 보냈어. 수고스럽게 답장을 보낼 필요가 없어.”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정오쯤 총사령부는 파블로프스키, 볼린스키,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믿을만한 군대를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하발로프 장군으로부터 받았다. 한 시간 후 전쟁부에서 대단히 안심되는 전보가 날아왔다: “일부 부대에서 오늘 아침 시작된 소요사태는 군무에 충실한 중대와 대대들에 의해 확고하고 열정적으로 진압되고 있다...곧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저녁 7시 직후 전쟁장관 벨라예프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군무에 여전히 충실한 몇몇 부대만으로는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 여러 지구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진짜 믿을만한 부대들을 충분한 규모로 빨리 보낼 것을 요청했다.
한편 내각의 장관들은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반미치광이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를 해임할 적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하발로프 장군은 비밀리에 정부가 준비한 포고령을 발동했다: 폐하의 명령에 따라 뻬쩨르부르그에 계엄령을 실시한다. 여기서도 뜨거운 것을 차가운 것과 섞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의도적인 것은 거의 아니었고 실제로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시장 발카는 풀과 솔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계엄령 포고문을 도시 전역에 붙일 수가 없었다. 이 관료들에게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이미 저승에 있었다.
짜르의 마지막 내각의 대표 그림자는 70세가 된 골리친공이었다. 그는 전에 왕후가 관할하는 자선단체들을 운영하다가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그녀에 의해 수상으로 승진되었다. 자유주의자 놀데 남작의 묘사에 의하면 이 “성격 좋은 러시아의 신사, 이 늙은 약골” 골리친은 왜 이 골치 아픈 직책을 맡았느냐고 친구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즐거운 추억거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어쨌든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최후의 짜르 내각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로지안코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각이 회의를 하고 있던 마린스키 궁전으로 군중이 몰려오고 있다는 첫 소식을 접하자 모든 건물에 소등 조치가 취해졌다. 혁명 군중이 내각을 그냥 지나치기를 정부는 원했다. 그러나 소문은 거짓이었다; 군중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서 건물의 모든 등불이 다시 켜지자 어느 장관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탁자 밑에 숨어 있었다. 골리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추억을 만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로지안코의 감정 역시 최고로 상승해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전화로 내각과 교신하려고 그는 한참 애썼으나 허사였다. 결국 이 의회 의장님은 다시 골리친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자 후자가 이렇게 응답한다: “나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미 사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로지안코는 그의 충실한 비서의 말에 따르면 힘없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 “하느님, 이렇게 끔찍할 수가!...정부가 없이...무정부 상태...피...”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소리를 죽여 부드럽게 흐느꼈다. 짜르 정권의 노쇠한 그림자가 목숨을 다하자 로지안코는 불행, 삭막함, 부모를 여윈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이 혁명을 “대표”해야 한다는 다음 날의 생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골리친의 전화 응답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된다: 27일 저녁 내각은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명확히 인정했다; 따라서 짜르에게 인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짜르는 골리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수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짜르는 내각이 반란 진압을 위한 “가장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쉬울 뿐이었다.
다음날 28일에는 기가 드센 왕후조차 낙담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니콜라스에게 전보를 보낸다: “파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부대들이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알릭스.”
방위군과 주둔군 모두가 봉기를 일으키자 왕정에 대한 미련에 미쳐있는 이 헤센주 출신의 여인은 “양보조치가 필요하다.”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짜르도 “배불뚝이 로지안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전보로 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가족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짜르를 불편하게 느낀 총사령부 참모들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짜르의 전용기차는 처음에는 별 탈없이 여행했다. 도의 유지들과 도지사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역에 나왔다. 짜르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진 채 습관이 된 왕실 전용 객차의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28일 오후 3시 혁명이 이미 그의 운명을 결정한 뒤에도 그는 비야즈마에서 왕후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주 좋은 날씨. 당신이 건강하고 평온하기를 비오. 전선에서 많은 부대들이 이리로 보내지고 있소. 부드러운 사랑을 당신에게. 니키” 왕후조차 주장하는 양보조치 대신 부드러운 사랑을 보낸 짜르는 전선에서 군대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아주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후 짜르는 혁명의 폭풍과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차가 비셔 역에 도착하자 철도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기차의 진행을 중지시켰다: “교량이 손상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변명은 상황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이 발명한다. 니콜라스는 볼로고에를 경유하여 니콜라예프스키 철도로 계속 여행하려고 했다. 아니면 수행원들이 그렇게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노동자들이 기차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날라온 전보들보다 이 일은 사태의 심각성을 훨씬 강하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짜르는 총사령부를 떠난 후 수도로 갈 수가 없었다. 철도의 하찮은 “졸들”을 가지고 혁명은 왕에게 “장군받아라”하고 외쳤다!
기차에서 짜르를 수행한 궁정 사관 두벤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셔 역 사건이 일어난 그 한밤중은 역사적인 밤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헌법 인정 문제가 결론이 났음이 완전히 명백해진 것처럼 보인다; 헌법은 확실히 제정될 것이다....임시정부 각료들과의 협상만 남았다고 모두 말하고 있다.” 열차의 통행을 막기 위해 아래로 내려진 신호기 저편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증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호기를 대면하면서 프레데릭스 백작, 돌고루키공, 로이히텐베르크 백작 등 고위 귀족들 모두가 헌법 제정을 찬성한다. 이들은 더 이상 투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1905년처럼 적들을 속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짜르의 전용기차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왕후는 하루바삐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전보를 계속 짜르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낸 전보들은 모두 파란 연필로 “수취인 행방불명”이라고 쓰여진 채 우체국에서 반송되었다. 전보 담당 사무원은 짜르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방위군 및 주둔군 연대들은 음악과 깃발을 앞세우고 타우리데 궁전으로 행진했다. 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의 말에 의하면 아주 갑자기 혁명적 성향을 보인 시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지휘 아래 방위군 일개 중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보초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황을 잘 아는 병사들이 궁전을 포기하고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고 비루보바는 말한다. 혁명 병사들의 무리가 궁전 주위를 배회하면서 대단한 호기심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소위 혁명 지도부가 이 궁전의 용도를 결정하기도 전에 하급 병사들은 이 곳을 관람용 박물관으로 바꾸고 있었다.
위치가 확인이 안된 짜르는 푸스코프로 방향을 돌려 루지키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전선의 사령부로 향했다. 수행원들은 이런 저런 제안을 했다. 짜르는 어쩌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혁명이 분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 짜르는 하루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폐위되기 전 마지막 몇 달의 짜르를 시인 블로크는 이렇게 묘사했다: “완고하면서도 의지가 박약하였고 초조하면서도 매사에 느린 인간이었다. 사람을 믿지 못해 긴장된 말을 조심스럽게 내뱉는 모양을 보아 그는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단 하나의 명확히 의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하여 권력을 쥔 부하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2월의 마지막 며칠과 3월의 첫 며칠간 그의 긴장, 의지 박약, 조심성, 불신감 등은 얼마나 더 컸겠는가!
마침내 니콜라스는 증오스러운 로지안코에게 전보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국 전보는 수취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이 전보에서 짜르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외무, 전쟁, 해양 장관직을 겸임하고 로지안코가 수상이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짜르는 여전히 “그들과” 협상하기를 원했다. “상당수의 부대들”이 뻬쩨르부르그로 향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이바노프 장군은 아무 어려움 없이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성조오지 대대와 충돌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장군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하급 병사들에게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되냐고 여러 번 핀잔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병사들이 무릎 꿇도록 만들었다. 이 “독재자”가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하자마자 지구 행정당국은 그에게 이렇게 통보했다: 성조오지 대대와 군대의 충돌은 짜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들은 자기 목숨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바노프가 기차에 내리지 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이바노프 장군은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다른 “독재자” 하발로프 장군에게 10개의 질문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간략한 답장을 받았다. 가치가 있는 내용이므로 모두 인용하겠다.
1.군대의 규율을 따르고 있는 병력과 반란 병력의 수는 각각 얼마인가? 해군부 건물에 방위군 4개 중대, 기병과 카자흐병 5개 대대, 포병 2개 중대 등이 나의 지휘를 따르고 있다. 나머지 병력은 혁명 편으로 넘어갔거나 동조하고 있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 병사들은 혼자 또는 무리를 지어 배회하면서 장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2.어느 철도역들이 방어되고 있는가? 모든 역들은 혁명 세력에 점령당했고 이들의 엄중한 방어 하에 있다.
3.도시의 어느 지구에 질서가 회복되었는가? 도시 전체가 혁명으로 넘어갔다. 전화는 불통이다. 도시 각 지구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4.도시 각 지구를 누가 통치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5.모든 정부 부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장관들은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6.현재 귀하의 지휘를 받는 경찰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전혀 없다.
7.전쟁부의 어느 기술 보급 부처가 귀하의 통제를 받고 있는가? 전혀 없다.
8.식료품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가? 전혀 없다. 2월 5일 도시 안에는 5백6십만 파운드의 밀가루가 창고에 있었다.
9.반란군에게 넘어간 무기, 대포, 군수품은 어느 정도인가? 포병의 모든 시설을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다.
10.귀하의 지휘를 받고 있는 병력과 참모는 누구인가? 지구 참모부장은 나의 지휘를 받고 있으나 다른 지구 행정기구들과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상황을 명확히 확인한 이바노프 장군은 “드노(역자 주: 바닥이란 뜻의 러시아어)”역에서 하차하지 않고 참모들과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합의했다”. 참모부의 주요 인물 루콤스키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독재 권한을 가진 이바노프 장군의 원정은 공개적인 모욕 만 당했다.”
그러나 이 모욕은 매우 조용하게 가해졌기 때문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혁명의 파도에 가라앉았다. 아마 독재자 이바노프 장군은 식료품을 뻬쩨르부르그의 친구들에게 배달했을 것이며 왕후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왕후는 병원에서의 자기 희생적 봉사활동을 언급했다. 그리고 군인들과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때 모길레프를 경유해서 프스코프에 소식이 전달되었다. 갈수록 암울한 내용들이었다. 짜르의 경호대원들은 왕실 가족들에 의해 이름이 모두 기억되고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의회에 출석하여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장교들을 체포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제독 쿠로프스키는 크론슈타트의 반란을 진압할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충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부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독 네페닌은 발트 함대가 의회의 임시위원회를 인정했다고 전보를 쳤다. 모스크바 총사령관 므로조프스키는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병력의 대다수는 포병과 함께 혁명 편으로 넘어갔다. 도시 전체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시장과 그의 보좌관들은 시청을 떠났다.” 떠났다는 것은 도망쳤다는 의미였다.
이 모든 사항은 3월 1일 저녁 짜르에게 전달되었다. 밤늦게까지 짜르 주위의 인물들은 책임 내각이 필요하다고 그를 어르기도 하고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침내 새벽 2시 짜르는 이를 허가했고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혁명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명령이 떨어졌다: 뻬쩨르부르그로 이송되고 있는 병력들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라. 루즈키는 동이 트자 이 희소식을 로지안코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짜르의 시간은 사태의 전개보다 한참 늦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이미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병사, 노동자 대표들에 파묻힌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하의 제안은 불충분합니다. 이제는 왕조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모든 곳에서 군대는 의회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인민은 폐하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군대는 세자의 왕위 계승이나 섭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혁명을 저지하려고 로지안코가 둘러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짜르의 양보조치는 너무 늦게 내려졌다: “혼란상태는 너무 극에 달해서 나(로지안코)는 오늘밤 임시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짜르의 폐위 포고령은 너무 늦었다....” 이렇게 장엄하게 선언한 의회 의장은 골리친 앞에서 흘린 눈물을 이제 확실히 거두었다. 짜르는 로지안코와 루즈키의 대화 내용을 파악한 후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읽은 후 상황을 주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제 장군들이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그들에게도 약간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그날 밤 전선의 사령관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투표를 실시했다. 현대의 혁명이 전보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첫 충동과 반응이 기록을 통해 역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3월 1일과 2일 밤 전선의 사령관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문서이다. 짜르가 폐위되어야 하는가? 서부 전선 사령관 에버트 장군은 루즈키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 다음으로 견해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사하로프 장군은 자기가 견해를 밝히기 전에 다른 전선 총사령관들이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오랜 지연 후 이 용감한 사령관은 짜르에 대한 자신의 따뜻한 마음이 “비열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흐느끼면서” 그는 “더 비열한 요구들”을 피하기 위해 짜르가 하야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에버트 군무국장은 항복의 필요성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수도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군대 내로 퍼졌다. 이에 따른 의문의 여지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 수도의 혁명을 진압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코카서스 전선의 니콜라스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무릎을 구부리고 짜르에게 “최상의 조치”로 하야를 간청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 그리고 네페닌 제독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청원하였다. 루즈키도 비슷한 내용의 견해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장군들은 존경하는 짜르의 정수리에 7개의 총구를 예의를 갖추어 들이댔다. 새로운 권력과 화해할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이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기 휘하의 군대도 그만큼 두려워했다. 이들은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는 일에 익숙했지만 군 최고 통수권자 짜르에게는 아주 단호하게 만장일치의 조언을 했다: 저항하지 말고 왕위에서 내려와라. 이들이 있는 곳은 멀리 떨어진 뻬쩨르부르그가 아니라 군대가 있는 전선이었다.
상황을 참작한 이 보고사항들을 들은 후 짜르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왕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로지안코에게 보내는 적절한 내용의 전보가 작성되었다: “나의 모국 러시아의 진정한 안녕과 구원을 위해 내가 치를 수 없는 희생은 없다. 따라서 나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나의 아들이 뒤를 잇게 할 용의가 있다.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이다. 니콜라스.” 그러나 이 전보는 전달되지 못했다. 수도에서 구츠코프 의원과 슐긴 의원이 짜르가 있는 프스코프로 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짜르는 전보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낼 것을 명령했다. 당연히 그는 너무 값싼 항복을 두려워했으며 위안의 소식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3월 2일과 3일 밤 12시에 두 의원을 맞이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더 오래 상황을 끌 수가 없었다. 의외로 짜르는 아들과 떨어질 수가 없다고 선언하며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는 하야문에 서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모호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가? 이와 동시에 상원에 보내는 포고령에도 그는 서명했다. 이를 통해 그는 르보프공을 수상으로, 니콜라스 니콜라이예비치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왕실 가족에 대한 왕후의 의심은 올바른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증오스러운 “니콜라샤”가 음모꾼들과 함께 권력에 복귀했다. 구츠코프는 혁명 세력이 최고사령관을 인준할 것으로 진지하게 믿었다. 그리고 니콜라이예비치도 자신의 임명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는 며칠동안 애국적 의무를 완수하자는 일종의 명령과 호소를 공포할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제거했다.
자유의사라는 외양을 보존하기 위해 퇴위는 오후 3시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짜르의 원래 결정이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동생이 아니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오후의 “결정”은 좀더 상황이 좋아질 것을 기대해서 철회되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짜르는 증오스러운 의원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의원들은 역사적인 행위가 조작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을 속였다. 왕정은 평소 모습을 간직한 채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짜르에 이어 권력을 계승한 자들도 원래 모습에 충실했다. 이들은 아마도 이 묵인 행위를 정복당한 자에 대한 정복자의 아량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무뚝뚝한 기존의 문체에서 약간 벗어나 니콜라스는 3월 2일 이렇게 일기를 썼다: “아침에 루즈키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전신을 통해 그가 로지안코와 나누었던 긴 대화문을 읽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뻬쩨르부르그의 상황은 너무나 악화되어 의원들로 구성된 내각도 속수무책이다. 노동자 위원회를 통해 사회민주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퇴위할 필요가 있다. 루즈키는 이 대화 내용을 총사령부의 알렉세이예프 장군 그리고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전달했다. 12시 30분에 응답이 도착했다. 러시아를 구하고 군대를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나는 이 조치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총사령부에서 퇴위 성명서의 원문을 보냈다. 저녁때 뻬쩨르부르그에서 구츠코프와 슐긴이 도착했다. 이들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들에게 수정하고 서명된 문서를 건네주었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반역, 비겁함, 속임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니콜라이의 쓰라린 마음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2월 28일까지만 해도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선의 사령관들 앞으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충성 서약을 이행하고 현역 군인들의 의무를 다해야한다. 이것은 짜르와 조국에 대한 우리의 신성한 의무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틀 후 알렉세이예프는 사령관들에게 자신들의 “서약과 의무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도록 호소했다. 총사령부의 참모들 가운데 짜르를 위해 행동한 장군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모두 서둘러 혁명의 배를 탔다. 그리고 이 배에서 편안한 방을 찾기를 기대했다. 장군들과 제독들은 모두 짜르의 리본을 제거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리본을 착용했다. 곧이어 혁명에 대한 새로운 충성선서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어느 부대 지휘관에 대한 소식이 돌았다. 유일하게 올바른 영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마비가 상처받은 왕당파적 감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들이 군인들보다 더 많은 용기를 보여줄 의무는 당연히 없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정의 시계는 혁명의 시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정적이었다. 3월 3일 동틀 녘에 루즈키는 수도에서 온 직접 전보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로지안코와 르보프공은 그가 짜르의 퇴위를 지연시킬 것을 요구했다. 퇴위 결정은 이번에도 너무 늦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새 정부는 알렉세이를 왕으로 인정할 수 있으나 미하일은 절대 인정될 수가 없다고 은근히 말했다. 그러나 누가 알렉세이를 인정한다는 것일까? 전날 밤에 도착한 의원들이 여행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루즈키는 약간의 악의와 함께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의원들은 정당했다. 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예상도 못한 가운데 한번도 본적 없는 병사들의 반란이 터졌다.” 마치 평생 병사들의 반란만 관찰해온 것처럼 그는 말했다. “미하일을 새 황제로 선언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제거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차없이 제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휘몰고 흔들고 구부리고 비틀고 있다!
장군들은 말없이 이 새로운 혁명의 “비열한 허세”를 꾹 참았다. 알렉세이예프 만이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전보문에서 자신의 기분을 약간 안심시켰다: “좌익 정당들과 노동자 대의원들이 의회 의장에게 강력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로지안코의 말에는 솔직함이나 진실성이 조금도 없다.” 당시 장군들에게 제공되지 못한 것은 진실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짜르는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프스코프에서 모길레프에 도착하여 그는 전 최고사령관 알렉세이예프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고 이것을 뻬쩨르부르그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명백히 그는 이것이 장기적으로 더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데니킨의 일기에 따르면 알렉세이예프는 이 전보를 가지고 갔으나 ... 보내지는 않았다. 군대와 나라에 이미 공개된 두 성명서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불협화음은 짜르, 그의 측근, 의회 자유주의자 등 모두가 혁명의 진전보다 늦게 사고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3월 8일 모길레프를 마지막으로 떠날 때 짜르는 이미 공식적으로 체포상태에 있었다. 이때 그는 군대에 호소하는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지금 평화를 생각하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조국의 반역자요 배신자이다.” 짜르와 주위 인물들이 친독일 성향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없애려는 자극 받은 시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 호소문을 공포할 용기가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 치세가 끝났다. 이 치세는 악운, 실패, 불행, 사악한 행위 등의 연속이었다. 대관식 중에 발생한 호징카의 재앙(역자 주: 짜르의 대관식에 모인 군중 가운데 다수가 밟혀 죽은 사건.), 파업노동자와 반란 농민들에 대한 발포, 러일전쟁, 1905년 혁명의 잔인한 진압, 수많은 처형, 형벌 목적의 원정, 대대적인 소수민족 학살과 박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미친 그리고 경멸할만한 정책 등이 그의 치세에 꼬리를 물었다.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하자 짜르와 그의 가족은 궁전에 가두어졌다. 비루보바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짜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정의가 없다.” 그러나 비록 늦게 나타날지언정 역사의 정의는 존재한다. 이 사실을 그의 말이 논란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최후의 로마노프 부부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부부 사이의 유사성은 아주 명백하다. 이 점은 문학에서 언급된 바 있었으나 지나가는 투로 그랬을 뿐 그로부터 어떤 법칙이 유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처음 볼 때 느껴지는 것처럼 우연적인 것은 결코 아니며 유추의 소중한 재료가 된다.
비록 125년의 시차를 두었으나 짜르와 프랑스 왕은 어떤 순간에는 같은 배역을 맡은 두 배우인 것 같았다. 수동성, 참을성, 복수심에 불타는 배신적 성격은 두 지배자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의심이 스민 친절함으로 니콜라스는 상냥함으로 이것을 감추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 두 왕은 모두 직무로 과부하가 걸린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쓸모 없는 권력의 일부분이라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들이 쓴 일기는 문체 또는 문체의 결여에 있어서 유사하면서 똑같이 음울한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여자 마리 앙뜨와네뜨도 독일 헤센의 여자 알렉산드라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 뿐 아니라 도덕에서도 두 여왕은 모두 두 국왕 위에 서있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에 비해 덜 경건했으며 후자와는 달리 쾌락을 열정적으로 쫓았다. 그러나 두 여자 모두 인민을 경멸했으며 양보조치를 허용한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으며 자기 남편을 깔보고 그의 용기를 불신했다. 다만 앙뜨와네뜨는 경멸을 알렉산드라는 연민을 드러내며 그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회고록의 저자들은 뻬쩨르부르그 혁명 시기를 회상하면서 니콜라스 2세가 일개 시민이었다면 좋은 기억을 남겼을 것이라고 필자에게 확신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에 나돌았던 루이 16세에 대한 판에 박힌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말은 역사나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다.
첫 혁명이 낳은 비극적 사건들의 절정기에 짜르는 우울해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즐거운, 활기찬 조그마한 인간인 짜르가 자줏빛 셔츠를 입고” 르보프공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그는 분노했다. 인식은 못한 채 르보프공은 1790년 구베르뇌르 모리스가 루이 16세에 대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상황에서 잘먹고 잘마시고 잘자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귀뚜라미처럼 명랑하게 지내는 그런 인간에게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왕정이 무너지기 3개월 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는 이렇게 예언했다: “모든 일이 가장 잘 풀리고 있다. 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꿈은 너무 의미가 깊어!” 그녀의 이 말은 왕정이 무너지기 1개월 전에 마리 앙뜨와네뜨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정신의 생기를 느껴. 우리는 곧 행복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뭔가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어.” 이들은 모두 익사하면서 무지개 꿈을 꾸었다.
이러한 유사성의 일부 요소들은 물론 우연적이며 역사의 일화로서만 흥미롭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힘에 의해 인물에게 접합되고 직접 강요되는 특성들은 이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중요하다. 이 특성들은 개인의 특성과 역사의 객관적 요인 사이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의 어느 반동 역사가는 루이 16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망하는 법을 몰랐다. 이것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이었다.” 이 말은 니콜라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이들은 소망하는 법을 몰랐으며 다만 소망하지 않는 법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망이 없이 패배한 역사적 대의의 마지막 대표들이 “소망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대개 그는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미소짓고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첫 말은 보통 ‘아닙니다’ 정도였다.” 이것은 까뻬 왕조의 루이 16세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니콜라스의 방식은 완전히 루이 16세를 표절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왕관을 눈을 가릴 정도로 눌러쓰고” 몰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어쨌든 탈출할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눈을 뜬 채 걸어가는 것은 더 쉬운 일이었을까? 이들이 왕관을 머리 뒤통수로 재낀 채 상황을 맞이했다면 무슨 뾰쪽한 수가 있었을까?
전문 심리연구가는 니콜라스와 루이, 알렉산드라와 앙뜨와네뜨 그리고 이들의 궁정 대신들이 표현한 서로 유사한 말들을 모아서 선집을 만들어야 한다. 선집을 구성할 재료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유물론적 심리학을 지지하는 매우 유익한 역사적 증언이 될 것이다. 물론 동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낸 유사한 짜증들은 유사한 반사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짜증이 강력할수록 이 짜증은 개인적 특이성을 극복하고 보편성을 획득한다. 간지러움을 태우면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갖다대면 동일하게 반응한다. 증기망치는 구체와 육면체를 똑같이 납작한 금속판으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너무 거대하고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의 충격은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개인”의 경계를 없앤다.
루이와 니콜라스는 격동의 세월을 견딘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잘 알려진 이들의 온화함,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정과 “유쾌함”은 이들의 내적 동력의 빈약성, 신경 표출의 허약성, 정신적 재능의 빈곤 등이 잘 길들여져 표현된 것이었다. 도덕적 고자인 이들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완전히 결여했다. 이들은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능과 의미를 갖춘 모든 것에 대해 시기심이 결합된 적대감을 보였다. 이 두 인물은 심오한 국내 위기와 인민의 혁명적 각성에 대면할 운명을 타고났다. 이 두 인물은 새로운 사상의 침투와 적대 세력들의 조류에 저항했다. 우유부단, 위선, 거짓 등은 두 인물의 개인적 약점이기보다는 세습적 지위를 확고히 부여잡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인들은 어떠했는가? 헤센이라는 시골 출신의 공주 알렉산드라는 강력한 나라의 무한 권력을 누리는 전제 군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앙뜨와네뜨보다 더 높이 꿈의 정점으로 들어올려졌다. 앙뜨와네뜨는 좀더 경박했다. 알렉산드라의 개신교적 편협함은 러시아 교회의 슬라브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두 여성은 나름의 고매한 임무에 대한 생각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 통치와 점점 높아 가는 인민의 불만은 진취적이지만 동시에 닭대가리를 가진 이 두 여성의 환상 세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자기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국 인민에 대해 이들이 심장을 갉아먹는 적대감과 원한을 더욱 크게 가졌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적대 국가에 약간의 배려를 베풀기를 원했던 장관들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도 여기서 나왔다. 또한 조정 대신들로부터의 소외감과 충족되지 않는 기대감을 자극했던 남편에 대한 계속된 짜증 역시 이 때문에 발생했다.
심리학 경향을 지닌 역사가와 전기작가들은 거대한 역사의 힘이 개인을 통해 굴절된 곳에서 뭔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빈번히 찾는다. 이것은 최후의 짜르를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 신하들의 잘못된 견해와 동일하다. 짜르도 자기가 불행한 별 밑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목표들과 그의 시대가 조성한 새로운 역사적 조건 사이의 모순에서 나왔을 뿐이다. 제우스는 자신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을 먼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대인들은 말했다. 이들은 미신의 형태로 심오한 역사적 통찰을 요약한 셈이었다. 괴테는 이성이 비(非)이성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역사 변증법의 비인격체 제우스에 대해서도 표현되었다. 역사 변증법은 시효를 넘긴 제도들의 “이성”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이 제도들을 옹호하는 자들을 실패의 운명으로 몰아넣는다. 로마노프 왕조와 까뻬 왕조의 역할에 대한 대본은 역사 드라마의 일반적 발전법칙에 의해 쓰여졌다. 오직 해석상의 미묘한 차이만이 배우들의 몫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루이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스의 불행은 개인적 사주팔자가 아니라 관료적 왕정의 사주팔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절대주의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허약한 왕조에서 배출된 이들의 도덕적 빈곤은 니콜라스에게 특히 극악한 성격을 부여했다.
독자들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르 3세가 술을 좀 덜 마셨다면 상당히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혁명은 아주 성격이 다른 짜르와 마주쳤을 것이며 그와 루이 16세와의 유사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의견은 위에서 말한 것을 조금도 반박하지 않는다. 역사 과정은 개인의 의의를 부인하거나 개인에게서 우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만약 부인한다면 그것은 허세가 될 것이다. 필자는 허세를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모든 특이성을 보유한 역사상의 개인이 심리적 특성만 줄줄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뿐이다. 개인은 정해진 사회조건 속에서 배출되어 이것에 반작용하는 살아있는 실체이다. 자연과학자는 장미꽃을 피운 토양의 요소들과 공기의 특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장미가 그 향기를 잃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사회적 뿌리를 드러내더라도 개인이 풍기는 향기나 악취는 제거되지 못한다.
알렉산드르 3세가 장수했을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알렉산드르 3세가 1904년 일본과의 전쟁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1905년에 일어났던 첫 번째 혁명은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지연시킬 수 있었을까? “1905년 혁명” 즉 노동대중의 최초의 힘 자랑이자 절대주의에 대한 최초의 타격이 두 번째 공화국 혁명과 세 번째 노동계급 혁명의 단순한 도입부가 될 수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흥미로운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 니콜라스 2세의 성격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님은 어떤 경우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도 어떤 경우든 의심할 수 없다. 봉건체제에서 부르주아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사회혼란이 없었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점을 바로 어제에 중국에서 목격했고 오늘 이것을 다시 인도에서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말한 수 있는 것 전부는 이것이다: 왕정의 이러한 저러한 정책, 왕의 이러한 저러한 개성 등은 혁명을 재촉하거나 지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혁명의 외적 과정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다. 혁명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몇 달, 몇 주, 며칠간 가망 없이 패배하는 상황에서 엄청난 분노와 무기력한 완고함으로 짜르 체제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애를 썼다! 니콜라스가 의지가 박약했다면 왕후가 이것을 보완했다. 라스푸틴은 자기보존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운 지배파벌의 도구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좁은 공간 속에서도 과거와 과거의 마지막 발악이 라스푸틴 파벌과 짜르의 개성은 하나로 결합시켰다. 혁명과 마주친 짜르스코에 셀로 상층 그룹의 “정책”은 독약을 먹고 허약해진 맹수의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대평원에서 자동차로 늑대를 뒤쫓으면 늑대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버린다. 그러나 이놈의 목에 줄을 매달려고 하면 늑대는 사람을 찢어발길 태세로 덤벼든다. 아니면 최소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늑대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짜르에게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최후의 짜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참정권을 부여받은 부르주아 계급과 제 때에 합의했다면 혁명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짜르는 양보조치에 대해 완고하게 움츠러들었다. 운명이 칼날 위에 서 있어서 일분 일분이 계산되고 있을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는 계속 질질 끌면서 운명과 흥정을 하며 마지막 가능성들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모든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왕정을 구하는 방법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를 구하는 방법은 알고있지 못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던가!
짜르 체제가 양보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자기보존에 필요할 때는 양보조치가 허용되었다. 크림 전쟁의 패배 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민의 반쪽 해방 그리고 토지행정, 법원, 언론, 교육기관 등의 분야에서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다. 짜르 자신은 이 개혁의 지도사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농민들이 아래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기 전에 위에서 이들을 해방시킨다. 첫 혁명의 물결에 떠밀려 니콜라스 2세는 반쪽 헌법을 허용했다. 자본주의 발전의 장을 넓히기 위해 스톨리핀은 농촌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짜르 체제는 계급사회와 왕정의 토대를 보존할 수 있을 경우에만 부분적 개혁조치를 허용했다. 그러나 개혁의 결과들이 한도를 넘어 체제 자체를 위협하자 왕정은 개혁 정책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통치 후반기에 전반기의 개혁조치들을 전부 철회시켰다. 알렉산드르 3세는 반(反)개혁의 길로 더 멀리 나아갔다. 1905년 10월 니콜라스 2세는 혁명 앞에서 후퇴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산물인 의회를 나중에 해산시켰다. 그리고 혁명의 힘이 약화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이 시작된 후 75년 동안 어떨 때는 지하에서 어떨 때는 지상에서 역사적 세력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이 결과 짜르의 개인적 특성을 훨씬 초월하여 왕정은 전복되었다. 이 과정의 역사적 틀 내에서만 짜르 개인, 그의 성격, 그의 “생애”는 의미가 있다.
가장 전제적 군주조차도 자신의 자의적인 자취를 역사 사건에 남기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가 없다. 언제나 자기 모습대로 사회를 만드는 특권 계급들의 왕관을 쓴 대리인일 뿐이다. 이 계급들이 아직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왕정은 강력하고 자신감을 발휘한다. 이때에는 자신의 손에 믿음직한 권력기구를 쥐고 행정기구의 권력을 무제한으로 즐긴다. 왜냐하면 좀더 재 능있는 인물들이 아직 적대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군주는 개인적으로든 강력한 총신의 중재를 통해서든 거대하고 진보적인 역사적 임무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사회의 태양이 마침내 서쪽으로 기울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특권 계급들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기생적인 혹의 위치로 격하된다. 자신들의 지도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임무에 대한 의식과 권력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상실한다. 이로써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비화하고 왕정은 고립된다. 사멸하는 왕조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줄어든다. 이들의 수준도 하락한다. 한편 위험은 증대한다. 새로운 세력들이 밀고 올라온다. 왕정은 창조적인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하고 후퇴한다. 이제 왕정의 활동은 단순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로마노프 왕조의 반(半)아시아적 전제 체제도 이 운명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소위 수직 단면도를 통해 짜르 체제의 고통을 바라보자. 니콜라스는 과거에 뿌리를 둔 가망 없이 죽을 운명에 처한 파벌의 중심 축이다. 역사적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왕정을 수평 단면도로 바라보자. 니콜라스는 왕조 사슬의 마지막 고리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선조들 역시 가족, 계층 그리고 관료적 집단 속에 통합되어 있었다. 다만 니콜라스보다 더 넓은 범위의 집단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다가오고 있는 운명에 거역하여 구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통치 방식과 조치들을 구사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니콜라스에게 성숙한 혁명을 배태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주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멸망으로 가는 각기 다른 길 이외에 그가 선택할 길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템즈강 위의 의회체제는 평화적인 진화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는가? 아니면 한 명의 왕이 발휘한 “자유로운” 선견지명의 열매였는가? 어느 것도 아니었다. 영국식 의회체제는 여러 시대를 통해 진행된 투쟁의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의 왕은 목이 잘려 네거리에 버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로마노프 왕조와 까뻬 왕조 사이의 역사적-심리적 대조는 영국의 첫 혁명 시대에 영국의 국왕 부부에 대해서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회고록 작가들과 역사가들이 루이 16세와 니콜라스 2세에게 부여했던 특성들의 조합은 기본적으로 찰스 1세에게도 해당되었다. 몬테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찰스는 수동적이 되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복했다. 그리고 이 항복을 대단히 꺼려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는 조금의 인기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찰스 스튜어트를 연구한 또 다른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리석지는 않았으나 성격이 확고하지 못했다....그의 사악한 운명은 그의 왕비인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따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녀는 찰스보다 절대주의 사상에 더 열렬했다.” 일국 혁명에 의해 압살된 최초의 국왕 부부의 특징들을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영국 인민의 증오심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여성이자 카톨릭 교도인 왕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로마와 음모를 꾸미고 아일랜드 반란자들과 비밀 접촉을 하고 있으며 프랑스 조정과 술수를 꾸민다고 비난받았다. 이 점만은 특이한 사항으로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어쨌든 여러 시대에 걸쳐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영국은 부르주아 문명의 선구자였다. 다른 나라의 압박에 시달리기는커녕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멍에 아래 더욱더 강하게 종속시켰다. 이 나라는 전세계를 착취했다. 이 때문에 국내의 모순은 완화될 수 있었으며 보수주의는 토대를 확고히 축적할 수 있었고 기생 지배계층, 신사계급, 왕정, 상원, 국가교회 등의 형태로 풍요와 안정의 두터운 완충장치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르주아 영국이 누린 독점적인 역사발전의 특권 덕분에 신축성과 결합된 보수주의는 이 나라 제도의 도덕적 근간이 되었다. 러시아의 교수 밀류코프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 오토 바우어 등 유럽대륙의 다양한 속물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영국은 전세계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리고 과거 누렸던 특권적 지위의 마지막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다. 이 나라의 보수주의는 신축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심지어 노동당 지도자들의 매개를 통해 노골적 반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도 혁명에 대면하여 노동당의 최초 수상인 “사회주의자” 맥도널드는 니콜라스 2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항하여 동원한 조치들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영국은 혁명이라는 거대한 지진의 충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 나라 보수주의의 마지막 잔재, 이 나라의 세계 지배, 이 나라의 현재 국가기구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맹인만이 이 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맥도널드는 니콜라스 2세만큼이나 이 충격에 대해 갈팡질팡하면서 맹목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역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개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풍부하게 예시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선진국들의 꽁무니를 쫓아 늦게 발전을 시작했으며 경제적 기초가 허약하기 그지없다. 이 나라가 어떻게 “신축성을 보유한 보수주의”를 특히 교수양반들의 자유주의와 이것의 좌익적 그림자인 개량적 사회주의를 위해 발전시킬 수 있는가? 러시아는 너무나 뒤져 있었다. 그래서 세계 제국주의가 이 나라를 손에 넣었을 때 러시아는 정치 및 역사 과정을 너무 짧은 기간에 통과해야 했다. 만약 니콜라스가 자유주의자들과 합의해 슈튀르머를 밀류코프로 교체시켰다면 사건은 약간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루이 16세가 혁명의 제 2 단계에서 정신을 차리고 지롱드파를 권좌 위로 밀어 올린 것이 바로 이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루이 16세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지롱드파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쌓이고 있던 사회모순들은 표면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화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인민은 공개의 장에서 그 동안 참아냈던 모든 불행, 고통, 분노, 열정, 희망, 환상과 목표 등을 쏟아내었다. 인민 대중의 압력 앞에서 왕정과 자유주의자들의 상층 야합은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사건들의 전개 순서에 영향을 미치고 행동의 횟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혁명의 드라마 그리고 이것의 중요한 절정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1917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2월 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운동권은 늘 그랬듯이 이 날을 집회, 연설, 유인물 배포 등으로 기념할 생각이었다. 이날이 혁명을 시작하는 첫날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날 파업을 촉구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대단히 전투적인 볼세비키당 비보르그 지구위원회 노동자들은 모두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 지구위원회의 지도자 카유로프는 대중의 정서가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어떤 파업도 공공연한 전투로 급격히 상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투적 투쟁으로 돌입하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당은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들은 파업을 촉구하기보다 미래의 혁명 투쟁을 준비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2월 23일 전야에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의 방침이었으며 모두들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3일 아침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러 공장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이들은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들을 보냈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마지못해 지원에 동의했으며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이들의 선두에 서야한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비보르그 위원회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서자는 생각이 오랫동안 노동자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의 증언을 유념해야한다. 왜냐하면 혁명 사건들의 역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일어날 경우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진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지금은 전시였다. 공안당국은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면 전시의 “예비역” 병사는 정규군의 고참 병사와는 다르다. 예비역 병사들이 정말 막강할까? 혁명운동권에서 이 문제는 추상적으로 많이 논의되었다. 왜냐하면 2월 23일에 절대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모든 자료에 기초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한된 전망을 가진 시위에 대한 논의가 기껏해야 전부였다.
이렇게 2월 혁명은 혁명조직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은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스스로 합의하여 선두에 나섰다. 물론 이들 중에는 병사의 부인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 길게 늘어선 빵 배급 줄이 혁명을 촉발시킨 마지막 자극이 되었다. 이날 남녀 모두 합쳐 약 9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데모, 집회,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전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는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쪽으로 옮아갔다.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없었다. 이날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대치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아닌 경우를 포함한 여성의 무리는 빵을 요구하며 시의회 건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수컷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깃발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왕정이나 전쟁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국제 여성의 날은 열정적으로 그러나 사상자 없이 성공적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이 날이 배태하고 있던 것을 밤이 되도록 추측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이 운동은 없어지기는커녕 두 배나 커진다. 2월 24일 뻬쩨르부르그 공업노동자의 약 반수가 파업에 참가한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공장에 출근한다. 이들은 조업에 나서는 대신 집회를 연다. 그리고 도시 중심지로 행진한다. 이 운동에 다른 노동자 지구들과 인민의 다른 부위들이 합류한다. “전제 타도!”, “전쟁 타도!”의 커다란 구호 소리에 묻혀 “빵을 달라!”는 구호는 들리지 않는다. 네프스키 가도로 시위는 계속된다. 혁명가를 부르는 밀집된 노동자 대중이 먼저 나타나고 학생의 푸른 모자가 간간이 섞인 잡다한 도시민들이 등장한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했으며 전쟁병원의 병사들이 손에 아무 것이나 들고 흔들며 우리를 환영했다.” 시위 노동자들에 대한 환자 병사들의 공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를 명확히 인식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카자흐 기병들이 시위 군중에게 가볍지만 줄기찬 공격을 가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말의 입은 게거품으로 뒤덮여 있었다. 시위대는 이들이 통과하도록 대오를 열어 길을 비켜주다가 다시 닫았다. 시위 군중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카자흐 병사들이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이 퍼졌다. 노동자들의 일부는 카자흐 병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했다. 그러나 욕을 퍼부으며 반정도 술에 취한 채 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병사들이 곧 이어 나타났다. 이들은 군중 속으로 헤집고 들어와 총검으로 시위 군중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굳게 대오를 닫았다. “이들은 발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이들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느 자유주의 상원의원은 서있는 전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이것이 그 다음날 벌어진 일이었던가? 어쩌면 그는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전차 일부는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일부는 선로에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 전야인 1914년 7월을 회상하고 있었다. “과거에 시도되었던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원의원의 눈은 그를 속이지 못했다. 혁명의 연속성은 명확했다. 역사는 전쟁으로 끊어진 혁명의 실타래를 다시 들어 올려 묶고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군중의 무리들이 도시 여기 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이들을 끈질기게 뒤쫓았다. 그리고 경기병과 가끔은 보병이 이들을 저지하자 이들은 한군데로 몰렸다. “경찰 타도!”의 함성과 함께 카자흐 부대에 대한 “만세!”의 함성이 점점 더 자주 들렸다. 이것은 의미심장했다. 경찰에게 군중은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이들은 휘파람, 돌, 얼음 조각 등으로 기마 경찰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병사들의 막사, 초소, 순찰로, 대오 주위에 남녀 노동자 무리들이 병사들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파업의 확산과 병사에 대한 노동자의 개인적 접촉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했다. 이것은 모든 혁명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매번 새로워 보일 뿐 아니라 다른 모습을 띤다. 이 단계에 대해 글을 읽고 쓴 적이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날 의회에는 의원들이 모였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즈나멘스키 광장과 네프스키 가도 전부 그리고 이웃한 도로들을 메웠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유례가 없는 사건 즉 혁명적이지만 결코 애국주의적이지 않은 군중이 “만세!”의 함성으로 카자흐 부대와 밴드를 앞세운 연대들을 환영한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이오?”라는 어느 의원의 질문에 누가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이 한 여성을 가죽채찍으로 때리자 카자흐 병사들이 개입하여 경찰을 몰아냈습니다.”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군중은 이렇게 일이 실제 벌어졌으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따라서 승리의 보증수표가 될 것이었다.
에릭슨 공장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공장의 노동자 2천5백여 명은 아침 집회를 끝내고 삼프슨니에프스키 가도로 진출했다. 그리고 좁은 장소에서 카자흐 부대와 마주쳤다. 카자흐 장교들은 처음에는 말의 가슴을 들이밀어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이들 뒤에서는 가도 전체를 덮으며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말을 타고 돌진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길게 대열을 형성하며 장교들이 뚫은 좁은 공간으로 말을 몰았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들 중 일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명은 노동자들에게 선의의 윙크를 보냈다.” 이 윙크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이 호의적인 신호를 받자 노동자들은 대담해졌다. 그리고 이 대담성은 카자흐 병사들을 전염시켰다. 그러자 더 많은 병사들이 윙크를 보냈다. 장교들은 규율을 엄히 세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병사들은 공공연히 규율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군중을 해산시킬 이들의 임무는 이렇게 방기되었다. 이 상황은 세 번 또는 네 번 반복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병사들과 군중의 관계는 더 가까워 졌다. 카자흐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노동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규율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깨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자 카자흐 장교들은 서둘러 순찰 병사들을 노동자들과 분리시켰다. 시위대 해산 작전은 포기되었다. 대신 시위대가 가도 중앙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도 가장자리에 병사들을 일렬로 세운 방패막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규율을 겉으로 지키면서 병사들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들이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대오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혁명은 나아갈 길을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카자흐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승리를 향한 첫 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묘사한 사람의 눈 역시 대단했다. 그는 혁명 과정의 모든 굴곡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당연했다. 그는 지도자였다. 그는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 있었다. 적군의 채찍과 총탄을 주시하는 지휘관의 눈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혁명으로 맨 먼저 넘어간 부대는 카자흐 부대였던 것 같다. 이들은 봉기를 진압하고 징벌을 강제하는 오래된 부대였다. 그러나 카자흐 부대가 다른 부대보다 더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 토지소유주들은 자기들이 기른 말을 타면서 카자흐 문화의 특이성을 매우 자랑하면서 평원의 농민들을 경멸했으며 노동자들을 불신하는 등 보수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전쟁이 가져온 변화는 이들에게 더 날카롭게 반영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이리저리 호출되었고 파견되었으며 인민과 대치하는 등 언제나 긴장했다. 따라서 이들은 제일 먼저 시험에 처해졌다. 이들은 지금 모든 일에 염증이 났으며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들은 윙크를 보낸 것이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열심히 해봐! 방해는 놓지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징후에 불과했다. 군대는 여전히 군대였다. 규율의 오랏줄로 묶여있었으며 오랏줄은 짜르의 손에 있었다. 노동대중은 무장되지 않았다. 대중 지도자들은 결정적인 위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짜르 내각은 무엇보다도 이 날을 수도에서 소요가 일어난 날로 기록했다. 파업? 시위?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모든 대책은 세워져 있다. 지시사항들은 전부 하달되었다. 평상시의 업무로 복귀하라.
그렇다면 지시사항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23일과 24일 28명의 경찰관이 시위대에 의해 폭행 당했다. 이 수치는 정확해서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지구 지휘관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하발로프 장군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시위대에 친절을 베풀어서가 아니었다.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들은 혁명이 터질 정확한 순간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 진영과 짜르 정부 모두 혁명의 순간에 대비해 몇 년간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에게 1905년 혁명 이후 모든 활동은 두 번째 혁명에 대한 준비작업이었다. 그리고 정부 활동의 대단히 많은 부분도 새로운 혁명을 저지하는데 바쳐졌다. 1916년 가을 특히 정부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혁명을 대비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중반까지 하발로프의 지휘 아래 정부 위원회는 새로운 봉기를 진압할 아주 정교한 계획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는 6개의 경찰지구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경찰지구는 다시 하위 단위인 라욘(rayon)으로 나누어졌다. 예비역 방위군 사령관 체비킨 장군은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연대는 각 라욘에 배치되었다. 6개 경찰지구에는 특별지휘부에 의해 경찰, 헌병, 군대가 통합 배치되었다. 카자흐 기병대는 대규모 작전을 위해 체비킨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작전 순서는 다음과 같이 계획되었다: 경찰의 단독 작전이 먼저 진행되고 다음으로 채찍을 든 카자흐 기병대가 나선다; 진짜 필요할 때만 군대가 소총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하여 작전에 투입된다. 1905년 경험에 의해 입안된 바로 이 계획이 2월 혁명 내내 시행되었다. 문제는 예측의 부족이나 계획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고 인적 자원에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계획 전체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공식적으로 이 계획은 15만 병력의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 1만 명만이 진짜 동원 가능한 병력으로 계산되었다. 3천5백의 경찰 병력 외에도 사관학교 생도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거는 희망은 확고했다. 왜냐하면 당시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거의 예비역 부대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전선에 배치된 방위군 연대들에 부속된 14개 예비역 대대가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주력이었다. 이와 함께 주둔군은 예비역 보병 1개 연대, 예비역 자전거 1개 대대, 예비역 장갑차 1개 사단, 공병과 포병 소규모 부대 그리고 돈 카자흐 2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대단한 병력이었다. 아니 너무 많은 병력이었다. 불어난 예비역 부대들은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거나 훈련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군대 전체가 이런 상태에 있었다.
하발로프는 자신이 입안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실행에 옮겼다. 혁명 첫날인 23일에는 경찰력만이 동원되었다. 그 다음날에는 대부분의 경우 기병 부대만 거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채찍과 총검만 사용하도록 명령받았다. 보병과 총포는 상황에 따라 사용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25일이 되자 파업은 확산되었다. 정부의 수치에 따르면 2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의 가장 후진적 부위들이 선진 부위를 따르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소규모 사업장들이 파업 중이다. 거리의 전차는 멈추었고 기업들은 문을 닫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들도 파업에 동참한다. 정오가 되면 수만의 군중이 카잔 대성당과 주변 거리들로 쏟아져 나온다. 가두 집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무장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한다.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주위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이 행해진다. 기마 경찰이 발포한다. 연설자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군중 가운데에서 누가 총에 쏘아 경감이 살해되고 경찰청장을 비롯한 여러 경찰관들이 부상을 당한다. 헌병들에게 병, 폭약, 수류탄이 던져진다. 전쟁은 군중에게 이 기술을 가르쳤다. 병사들은 경찰에 대해 무관심 그리고 때때로는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 감정이 흥분과 함께 재빨리 군중 사이에 퍼진다.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옆에서 경찰이 발포하자 카자흐 기병대가 기마 “파라오”라는 별명이 붙은 기마 경찰에 연속으로 발포했다. 그러나 후자는 급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혁명군중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낸 소문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사항들은 전달자들에 따라 달랐지만 이 사건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진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진정한 지도자였던 볼세비키 노동자 카유로프는 당시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이렇게 전한다. 카자흐 부대가 보이는 쪽에서 시위대가 기마 경찰의 채찍질에 흩어진다. 그러나 카유로프 자신과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도망가는 군중 틈에 끼이는 대신 모자를 벗고 카자흐 병사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카자흐 형제들, 평화롭게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도와주시오. 파라오들이 우리 굶주린 노동자들을 취급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소. 우리를 도와주시오!” 손에 모자를 들고 의식적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한 것은 얼마나 정확한 심리 계산인가! 모방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닌가! 가두전과 혁명이 승리한 역사에는 이러한 즉흥적 투쟁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대한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사건들의 껍데기 즉 일반화는 역사가들의 손에 넘겨진다. 카유로프는 계속 이렇게 전한다: “카자흐 병사들은 특이하게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길을 비켜서기도 전에 경찰을 향해 돌진한다.” 이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 기차역 정문 근처에서 군중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기병도로 경감을 살해한 카자흐 병사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곧 경찰은 완전히 군중의 눈에서 사라진다. 이제 이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칼을 꽂은 소총을 아래로 향한 채 병사들이 나타난다.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동지들, 경찰을 도우려고 온 것은 아니지요?” 그러자 거칠게 “옆으로 물러서!”라는 대답이 나온다. 다른 노동자의 똑같은 질문도 똑같은 대답을 얻을 뿐이다. 병사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 신경이 날카로운데 자신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리는 질문을 참아낼 수가 없다.
한편 기마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자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찰은 잔인하여 제압할 수 없다. 이들은 증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증오심을 가득 간직하고 있다. 이들을 혁명의 편으로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죽여라. 그러나 병사들은 다르다. 군중은 이들과 적대를 피하고 우호적 관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을 설득시키고 동지로 만들어 이들과 단결할 이런 저런 방법들을 찾는다. 카자흐 부대에 대한 좋은 소문들은 아마 약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군중의 태도는 조심스럽기만 하다. 기병은 군중의 머리 높이 앉아있다. 그의 영혼은 말의 네 다리 위로 솟아있어 시위 군중의 영혼과 거리가 있다. 위로 올려보아야 할 사람은 항상 더 높은 것처럼 그리고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 보병은 보도에서 군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가깝고 대하기가 쉽다. 대중은 보병들 가까이 접근하여 이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자신의 뜨거운 입김으로 이들을 감싸려 한다. 노동자와 병사의 관계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들은 병사의 대열에 남자보다 더 대담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들의 소총을 잡고 호소하고 거의 명령한다: “총검을 내려놓고 우리와 합류하세요.” 병사들은 흥분되고 부끄러워서 서로 근심 어린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동요한다. 어느 병사가 먼저 결심을 하고 죄책감 속에 다가오는 군중 어깨 위로 총검을 들어올린다. 시위의 장애물이 걷혀진다. 기쁨에 찬 감사하는 마음의 “만세”가 공기를 뒤흔든다. 병사들은 군중에 의해 둘러싸인다. 모든 곳에서 주장하는 소리, 야단치는 소리, 호소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 혁명은 이렇게 한 발짝 또 전진한다.
총사령부에서 니콜라스 2세는 하발로프에게 전보로 명령을 내린다: “내일 당장” 소요사태를 진압해라. 짜르의 의지는 하발로프가 세운 “계획”의 제 2 단계와 일치했다. 짜르의 전보는 자극제에 불과했다. 내일은 군대가 자기 할 말을 할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혁명의 문제는 제기되었을 뿐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카자흐 부대의 관대함, 일부 보병 대오의 동요 등은 혁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민한 혁명의 거리에서 1천의 메아리로 반복될 것이다. 이것들은 혁명 군중에게 영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하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정반대의 사건들도 있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보병대가 오후에 나타나 군중 일부의 권총 사격에 응답하여 고스키니 드보르 근처에서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했다. 총사령부에 보낸 하발로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3명이 살해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하발로프는 징병대장에 등록된 노동자들이 28일 전까지 공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는 위협적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3일의 여유를 준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자기와 왕정이 타도되고 이 결과 협상이 진행되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혁명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혁명이 승리한 후에야 밝혀진다. 25일 저녁 시점에서 그 다음날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혁명운동의 내적 논리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해보자. 2월 23일 “여성의 날” 깃발 아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오래 성숙되고 저지되었던 봉기가 시작되었다. 봉기의 첫 걸음은 파업이었다. 3일에 걸쳐 파업은 확대되어 실제적으로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이것만이 대중에게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은 전진을 계속했다. 더욱 공격적이 되면서 파업은 시위와 하나가 되었다. 시위를 통해 혁명 대중은 군대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혁명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승하면서 무장을 준비할 단계로 나아갔다. 혁명의 첫 며칠동안 상당수의 개별적인 승리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혁명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단지 승리의 징후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며칠에 걸쳐 확산된 봉기는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면서 계속해서 성공할 때만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상승을 멈추면 상황은 위험해진다. 그리고 시간을 오래 끌수록 혁명은 치명타를 입는다. 더욱이 개별적인 승리로는 불충분하다. 대중이 제 때에 승리의 사실을 알고 이것의 가치를 이해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승리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패배로 변할 수 있다.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투쟁의 범위와 강도로 보면 첫 3일은 중단 없는 상승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혁명운동은 승리의 징후에 불과한 것으로는 불충분한 단계에 도달했다. 적극적인 대중 전체가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경찰에 대항해 쉽게 승리했다. 마지막 2일 동안 군대가 사건에 끌려 들어왔다. 두 번째 날에 기병이 세 번 째 날에는 보병이 투입되었다. 군대는 길을 막고 대중을 밀치고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때때로 군중에게 아량을 베풀 뿐 결코 발포하지 않았다. 군대 지휘관들은 기존의 계획을 잘 바꾸지 않았다. 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 이유의 일부였다. 반동세력의 잘못된 현실인식은 혁명지도자들의 잘못된 현실인식을 부추겼다. 군대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도 이유의 일부였다. 그러나 바로 3일째 되는 날에 터져 나온 투쟁의 위력과 짜르의 명령은 정부가 군대를 진지하게 지휘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자들 특히 그 선진 부위는 이 점을 이해했다. 기마 보병은 이미 전날에 발포했었다. 이제 혁명 진영과 반동 진영은 명확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26일 밤 약 100명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여러 혁명조직에 속했는데 이들 중에는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5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정부가 공세로 나섰다.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제의 발포 사건 후 어떤 느낌으로 노동자들은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였다. 이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불확실성과 격심한 우려의 안개 속에서 2월 26일의 해가 떴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체포 때문에 이 도시의 활동 전체는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의 지도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정당한 지도 몰랐다. 당의 상층 지도부는 가망 없이 반응이 느렸다. 25일 아침이 되어서야 볼세비키 중앙위원회 집행부는 전국 총파업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유인물은 발행되지 못했다. 만약 발행되었다면 그 순간에 이미 뻬쩨르부르그 총파업은 무장봉기에 돌입한 상태였을 것이다. 지도부는 이 운동을 위에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주저했으며 사태를 주도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투쟁은 공장에 가까울수록 더 단호하다. 그러나 26일 노동자 지구들에도 우려의 빛이 역력하다. 배고프고 지치고 추위에 노출된 채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 이들은 도시 경계 밖에 있는 채소밭에서 회의를 갖는다. 보고 들은 정보를 교환하고 투쟁 과정을 계획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슨 계획이 나올 것인가? 시위를 재개한다? 군대가 발포하고 있는데 비무장 시위로 충분할까? 이 문제는 이들 마음 속 깊이 박힌다. “한가지는 명백한 것 같다. 봉기는 붕괴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에게 친근한 카유로프의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전혀 아닌 것 같다. 폭풍이 닥치기 전에 기압계는 크게 떨어진다.
대중과 가장 가까이 있는 혁명가들조차 주저하고 있던 시간에 혁명운동은 참여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이미 한참 앞서 나가 있었다. 전날인 25일 저녁에 비보르그 지구는 벌써 완전한 봉기 상태에 들어갔다. 경찰서는 파괴되었다. 경찰관 일부는 살해되었다. 이들의 다수는 줄행랑을 놓았다. 도시 군사령부는 도시 다수 지역과의 교신이 차단 당했다. 26일 아침 비보르그 지구 뿐 아니라 리트에이니 가도에 이르기까지 페스키 지구도 봉기에 돌입했다. 최소한 경찰보고서는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경찰의 판단은 옳았다. 노동자들의 위협이 있기 전에 경찰관 대부분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구 경찰관들의 도망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대가 최후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대담한 혁명가들조차 봉기가 “붕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봉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2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공장이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의 정도로 대중의 힘을 측정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난 며칠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집회를 열 수 없었다. 아침에 네프스키 가도는 한산했다. 이 시간에 왕후는 짜르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도시는 평온합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서서히 결집하여 교외지구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은 다리에서 저지 당한다. 그러자 무리를 지어 강 위를 건넌다. 아직 2월이므로 네바강은 탄탄한 얼음 다리이다. 얼음 위의 군중에게 발포해보았자 이들을 저지할 수 없다. 시위 대중은 도시가 변모되어 있음을 목격한다. 치안 민병대, 저지선, 기마 순찰대 등이 온 곳에 깔려 있었다. 특히 네프스키 가도로 가는 길목은 경계가 철통같았다. 이따금 매복 병사의 발포가 귀를 울린다. 사상자의 수가 늘어간다. 여기 저기서 구급마차가 쏜살같이 달린다. 누가 발포하고 있으며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 지를 언제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잔인하게 교훈을 체득한 후 경찰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창문, 발코니 문, 건물기둥 뒤, 다락방 등에서 총을 쏜다. 추측이 쉽게 난무하고 전설이 된다. 시위자들을 협박하기 위해 다수 병사들이 경찰복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프로토포포프가 수많은 건물의 다락방에 기관총 초소들을 배치해 놓았다고 한다. 혁명이 승리한 후 구성된 위원회는 이런 초소들을 찾지 못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날 경찰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군대가 결정적으로 싸움에 투입된다. 이들은 엄격한 발포 명령을 하달 받는다. 그리고 하사관연대 학교의 훈련분대들은 진짜 발포한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이날 40명이 살해되고 같은 수가 부상당했다. 군중이 싣고 가거나 인도해간 숫자는 물론 이 수치에서 제외된다. 투쟁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도달한다. 납 총탄 앞에 대중이 굴복하여 다시 교외지구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굴복하지 않는다. 자체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관료들, 자본가들, 자유주의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날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전선에 배치된 믿을만한 군대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생각한 후” 전쟁장관 벨라예프에게 총탄이 아니라 소방호스의 찬물로 봉기 대중을 해산시킬 것을 권유했다. 하발로프 장군과 협의한 후 벨라예프는 그럴 경우 군중이 “흥분할 것이므로” 결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렇게 자유주의자와 관료 상층부는 시위대에 더운 물을 퍼부을지 아니면 차가운 물을 퍼부을 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 날 작성된 경찰보고서는 소방호스가 부적절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찰대에 대한 대중의 엄청난 저항이 소요의 일반적 현상이다. 해산을 종용하자 군중은 순찰대에게 도로에서 파헤친 돌과 얼음 덩어리를 던졌다. 경고 사격이 허공을 갈라도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너털웃음으로 응답했다. 군중 한가운데로 총을 쏘자 시위대는 흩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근처 집 마당으로 몸을 피한 후 총격이 멈추자마자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 경찰 보고서는 대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군대나 훈련병들에 대해 군중이 자발적으로 돌과 얼음 덩어리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봉기 대중의 심리나 군대에 대한 이들의 전술과 너무 모순되었을 것이다. 살육을 보충적으로 정당화시킨 글이기 때문에 경찰 보고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개개 사실들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올바로 특히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보고되고 있다: 대중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낙관적인 밝은 표정으로 저항하고 있다, 연속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자기 목숨이 아니라 보도, 돌, 얼음 덩어리에 집착하고 있다. 군중은 격렬히 분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감하다. 왜냐하면 발포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 대중은 승리를 기대하고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원하고 있다.
군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은 증대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이 압력에 대항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사태의 방향을 결정한다. 봉기에 대해 병사 대중이 우호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3일의 기간은 끝났다. 왕정은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들에게 발포하라!” 그러자 노동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의 형제 자매에게 발포할 수 없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봉기에 나서자!” 거리, 광장, 다리, 막사 정문 등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평범하게 그러나 언제나 필사적인 투쟁이 계속된다. 이 투쟁, 남성 여성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의 날카로운 대치, 지속적으로 울리는 소총과 기관총 소리. 이 가운데에서 정권, 전쟁,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군대의 발포는 대중 지도자들에게 불안감을 증대시켰다. 운동의 균형추가 위험하게 기우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혁명이 승리하기 12시간 전인 26일 저녁, 비보르그 위원회 회의는 파업을 끝내자는 토론을 했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승리하기 전날보다 승리한 다음날에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운 법이다. 그리고 대중의 정서는 사건들의 영향과 소식에 의해 빈번히 변한다. 침체의 분위기는 금방 열광의 분위기로 변한다.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진짜 대중 지도자들은 대단한 개인적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끔 대중에 대한 책임감이 이들을 짓누른다. 이와 반대로 투쟁 중인 노동자들은 훨씬 적게 동요한다. 정보가 빠삭한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볼세비키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시위대의 정서를 당국에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군대는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았고 병사 개개인은 경찰의 공격을 마비시키는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군중은 면책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이틀동안 이들은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혁명 진영은 ‘전쟁 타도!’, ‘짜르 타도!’의 구호를 내걸었다. 이제 대중은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군대가 자기들 편이기 때문에 당국이 운동을 진압할 수 없다. 군대가 곧 혁명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 승리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동이 걸린 혁명운동은 가라앉기는커녕 끊임없이 전진하여 완벽한 승리와 국가에 대한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압축성과 명확성의 측면에서 대단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이 보고서는 대단히 가치 있는 역사적 문서이다. 물론 승리한 노동자들은 이 작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슈르카노프와 같은 경찰 첩자들은 대단히 많았다. 이들은 특히 뻬쩨르부르그에서 많이 활동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혁명의 승리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회의 때마다 슈르카노프는 가장 극단적인 투쟁방식을 옹호했다. 비밀경찰 보고서에서 그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크게 강화하여 사태를 과감히 결정지을 것을 제안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노동자들의 높은 자신감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옳았다. 이후의 사건들이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혁명과 반동 두 진영의 지도자들은 추측하고 동요했다. 왜냐하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역관계를 선험적으로 미리 추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들은 역관계를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되지 못했다. 대중의 현재 의식과 사회관계의 낡은 형태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모순이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혁명적 위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새로 조성되는 역관계가 신기하게 노동자와 병사들의 의식에 각인 되고 있었다. 새로운 역관계를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시킨 것은 혁명 대중의 공세에 대한 정부의 공세였다. 노동자는 목이 말라 병사의 눈을 명령하듯 응시했다. 이것을 병사들은 걱정과 무기력으로 외면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표정은 병사가 더 이상 자기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암시였다. 노동자는 병사에게 더 대담하게 다가갔다. 적대감보다는 죄책감으로 병사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거부했다. 또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뻣뻣한 체했다. 이렇게 해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병사는 본래의 모습을 확실히 벗어 던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변한 모습을 즉시 알아보지는 못했다. 혁명이 병사들을 취하게 했다고 당국은 말했다. 그러나 반대로 병사들은 군대 막사의 아편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결전의 날 2월 27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밤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일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26일의 사건 전부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하고 있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제국 방위군에 소속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제 4 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느 경감의 보고서에는 반란의 원인이 딱 잘라 제시되고 있다: “네프스키 가도 근무 중 같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분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 이에 대한 분노가 반란의 원인이었다.” 누가 이 사실을 제 4 중대에 알렸는가? 우연히 그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오후 2시쯤 노동자 몇 명이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막사에 뛰어갔다. 네프스키 가도의 발포에 대해 이들은 서로 다투어서 병사들에게 알렸다. “네프스키 가도에서 당신들과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이 우리에게 발포하고 있다고 동료들에게 알리시오.” 이것은 뜨끔한 문책이었으며 열렬한 호소였다. “모든 병사들은 이 말을 듣자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혁명의 씨앗이 뿌리 내릴 곳을 제대로 찾은 셈이었다. 6시쯤에 제 4 중대는 상관의 허락도 없이 어느 하사관의 인솔로 막사를 떠났다. 그 하사관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그와 똑같이 영웅적인 수십만의 전사들과 함께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제 4 중대는 네프스키 가도로 행진하여 훈련병 분대를 귀대시켰다. 이 행위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기 덩어리 식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고귀한 혁명적 자발성이었다.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 중대는 기마 경찰의 일개 부대와 마주쳤다. 병사들은 이들에게 발포했다. 경찰 한 명과 말 한 마리가 살해되었다. 경찰 또 한 명과 말 또 한 마리는 부상을 당했다. 거리에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 속에서 반란 병사들의 이후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이 중대는 막사로 돌아가 연대 전체를 선동했다. 그러나 연대의 무기를 누가 이미 숨긴 후였다. 일부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들은 소총 30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는 이들을 곧 포위했다.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 19명은 체포되어 요새 감옥에 갇혔다. 나머지는 항복했다. 다른 정보에 따르면 이날 저녁 장교들은 병사 21명이 소총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주 위험한 누출사고였다! 이 21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옹호할 병사들을 밤새 찾아 다녔다. 혁명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 병사들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내일의 전투를 위해서는 썩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나보코프는 유명한 자유주의 지도자였다. 그의 솔직한 회고록은 가끔 그가 속한 당과 계급 자체의 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어둡고 경계가 삼엄한 거리를 따라 어떤 곳을 방문한 후 새벽 1시에 귀가하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예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 지극히 불안했다”. 어느 건널목에서 그는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도망병을 한 명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서둘러 서로를 지나쳤다. 이들은 서로 할 말이 없었다. 노동자 지구와 병사의 막사에서 일부는 보초를 서거나 대화를 나누었고 일부는 야영 할 때와 같이 선잠을 잤거나 다음 날에 대해 열병에 걸린 듯한 지독한 꿈을 꾸었다. 이곳에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도망병은 쉴 곳을 찾았다.
2월 혁명에서 대중투쟁의 기록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다. 10월 혁명의 빈약한 투쟁 기록보다 더욱 그렇다. 10월에 당은 봉기를 매일매일 지도했다. 신문 기사, 선언문, 보고서 등 투쟁의 외적인 연속성은 최소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2월의 경우는 달랐다. 대중 지도부는 거의 없었다. 신문들은 파업 때문에 발간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중은 스스로 역사를 창조했다. 거리의 투쟁들을 재구성하여 생생하게 복원시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최소한 사건들의 일반적 연속성과 내적 순서를 재구성 해내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도 권력기구를 쥐고 있었던 정부는 좌익 정당들보다 더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자도 별로 나을 것은 없었다. 26일의 “성공적인” 군대의 발포 이후 정부의 장관들은 잠시 용기를 가졌다. 접수된 정보에 따르면 27일 아침 일찍 프로토포포프는 “노동자들 일부가 업무에 복귀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제의 발포와 시련은 대중의 기를 전혀 꺽지 못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손실에 비해 성과가 더 컸다. 시위대는 거리로 몰려나와 적들과 충돌했다. 병사들의 팔을 잡아당겼다. 말의 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공격하다 흩어졌다. 건널목에 시체를 남기고 몇몇 총기를 집어들었다. 소식을 전하고 소문을 들었다. 이 경험을 통해 봉기 대중은 수없이 많은 눈, 귀, 안테나를 가진 집단이 된다. 밤에 노동자 지구로 돌아온 후 이들은 하루의 인상을 정리하고 사소하고 우연한 일은 솎아버린다. 그리고 나름대로 깊이 계산한다. 27일 밤 이 계산은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가 당국에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그리고 공개 집회에서 투쟁의 재개를 결의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강한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지구들 역시 아침 집회가 열기로 가득했다.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총파업으로 대규모 노동자들이 혁명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대는 군대와 충돌했다. 오늘의 계속된 투쟁은 무장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무장봉기는 사태의 전개 속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다. 혁명정당이 무장봉기를 촉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 지도력의 10분의 9는 대중의 정서를 감지하는 데에 있다. 규모가 훨씬 클 뿐 카유로프가 카자흐 병사의 눈썹 움직임을 감지한 것과 같다. 대중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감지한 것이 레닌의 위대함이었다. 그러나 이때 레닌은 뻬쩨르부르그에 없었다. 합법 반합법 “사회주의” 지도부인 케렌스키, 체이드제, 스코벨레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 모두 경고를 보내며 대중의 공세에 반대했다. 슐리아프니코프, 잘루츠키, 몰로토프 등 볼세비키당 중앙 지도부는 놀랄 정도로 무기력했으며 주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사실 노동자 지구들과 병사의 막사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볼세비키당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어느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26일 군대에 대해 최초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의 내용은 조직의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이 선언문은 인민의 편에 설 것을 군대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이 글은 27일 아침 도시의 모든 지구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조직의 지도자 유레네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혁명은 너무 빨리 전개되어 우리가 제출한 구호들은 사태에 이미 훨씬 처져 있었다. 유인물이 군대에 침투했을 때 군대는 이미 혁명의 편으로 넘어온 후였다.” 2월 혁명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 지도자의 하나인 추구린의 요구에 따라 볼세비키당 중앙의 슐리아프니코프는 27일 아침 병사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작성했다. 이 글이 공개되고 배포되었는가? 기껏해야 혁명이 끝난 후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글은 2월 27일의 사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지도부는 사태에 더욱 처져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봉기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 이 봉기는 스스로를 일정에 올렸다. 노동자들의 생각은 전부 군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병사들을 우리편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날 두서없는 선동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연대의 막사 근처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장교나 상사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힘든 일이었겠는가? 노동자들은 잔인한 총격을 받고 흩어졌다. 예비군 연대의 막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도 장교의 기관총 총격으로 노동자와 병사들은 만날 수 없었다. 노동자 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총을 찾았다. 그리고 당에게 총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병사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 가서 가지고 와라.” 이것은 노동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총을 입수하는 방법이었다. 오늘 한꺼번에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기관총이 봉기를 싹 쓸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봉기가 기관총을 손에 넣을 것인가? 혁명은 기로에 놓여 있었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중앙의 우두머리였던 슐리아프니코프는 자신이 총포나 권총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들을 병사 막사로 보냈던 사실을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노동자와 병사 사이의 유혈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리고 선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즉 근면과 모범을 통해 병사들을 정복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출중한 지도자가 했던 당시의 말을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다른 증언은 아직 없다. 그런데 그의 말은 지도자의 선견지명이 아니라 책임 회피를 드러냈다. 봉기를 지도할 수 없다면 무기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지도자들에게는 더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일정 시점에서 모든 혁명의 운명은 군대의 보수적 성향이 깨지는 것에 달려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대는 수가 많으며 규율과 무장력이 뛰어나며 올바른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군사력에 대항하여 비무장이거나 거의 비무장인 대중이 승리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격심한 사회 위기는 군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승리할 가능성이 진정한 인민혁명의 조건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군대는 저절로 또는 단순한 선동으로 봉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군대는 이질적인 분자들의 조합으로 적대 세력들이 징벌의 공포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결정적인 순간 직전에 혁명 병사들은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근로 대중도 이질적인 분자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이들은 반동의 무장력과 결정적으로 대치하기 전에 자기 역량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군대와는 달리 수없이 많이 갖는다. 파업, 집회, 시위 등은 투쟁 행위일 뿐 아니라 역량의 잣대이기도 하다. 파업에 대중 전체가 참여하지는 않는다. 모든 파업 노동자들이 투쟁 의지가 충천한 것도 아니다. 투쟁이 가장 첨예한 순간에는 가장 대담한 분자들만 거리로 나선다. 주저하고 피곤하고 보수적인 분자들은 집에서 쉰다. 여기서 혁명투사들은 저절로 걸러진다. 대중은 사건들의 채로 걸러지면서 최상의 분자들을 결집시킨다. 군대는 그렇지 않다. 혁명에 공감하든 동요하든 적대적이든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장교가 휘두르는 강제적 규율에 모두 구속된다. 병사들은 매일 매일 제 1열과 제 2열로 명령에 따라 구분된다. 이들이 어떻게 반항적인 병사와 복종하는 병사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병사들은 혁명의 편이 되기 전에 심리가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점진적 변화에는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그러면 이 순간은 언제 오는가? 어느 부대는 부대 전체 차원에서 인민의 편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담하는데 필요한 자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혁명 지도부는 군대가 자기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끝에 이들을 획득할 기회를 놓칠 수가 있다. 조건이 성숙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반란 직후 반동세력이 군대를 장악할지도 모른다. 병사들은 가슴속에 불타던 희망을 상실한다. 이들은 규율의 멍에에 다시 복종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새로 대치할 경우 이들과 거리를 두고 봉기 반대세력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생각할 수 없거나 측량하기 어려운 많은 분자들, 많은 경향들, 집단적 암시와 자기 암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복잡한 물질적 심리적 힘들의 엉클어짐 가운데에서 하나의 결론이 명쾌하게 도출된다: 봉기 세력이 진짜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막사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목숨을 건 투쟁이다; 우리들이 합류하면 인민이 승리할 수 있고 이 승리는 우리의 면책권을 보장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시킨다. 이 결론을 병사 집단이 확신하고 실감하면 할수록 이들은 총검을 내려놓고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총검을 들고 혁명 인민의 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달리 표현하면 혁명 세력은 유혈사태를 포함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잡아챌 준비가 확실히 되어있어야 한다. 이 때에만 병사들의 수동적 보수적 정서가 무너진다. 그리고 최고의 투쟁의지는 병사들의 총칼을 반드시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시위대는 길을 막는 병사들을 밀치며 계속 행진한다. 병사들은 대오를 이루어 시위대의 길을 막는다. 이때 양자는 서로 대면한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시간 중에도 더욱 결정적인 일분 일초가 있다. 병사들은 회색 장벽을 이루며 어깨와 어깨를 서로 붙인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동요하고 있다. 장교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의지력을 동원하여 “발사!”의 명령을 내릴 때가 결정적인 순간 중의 순간이다. 군중의 아우성, 공포와 위협의 고함소리 등이 장교의 명령 소리를 덮어 버리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다. 병사의 소총이 동요한다. 군중은 밀친다. 이때 장교는 가장 의심이 가는 병사에게 권총을 겨눈다. 결정적인 일분은 이제 결정적인 일초에 의해 좌우된다. 병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가장 대담한 병사가 살해당하고 이 죽은 병사의 소총으로 상병이 군중에 발포하는 순간 병사들의 장벽은 굳세게 유지되며 소총 대열에서 저절로 불이 뿜어져 나온다. 이 순간 시위대는 골목과 뒤뜰로 흩어진다. 그러나 1905년부터 지금까지 이와 정반대로 상황이 전개된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장교가 지도적 병사를 살해하기 위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지도자를 가진 군중 가운데 누가 총을 쏘아 장교가 쓰러진다. 바로 이 순간이 시가전의 운명 뿐 아니라 하루 전체 또는 봉기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봉기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주지 않으면 군대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의 생명은 보호받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실행될 수 없었다. 대중은 군대와 충돌하기 전에 이미 경찰과 무수히 충돌했다. 증오의 대상인 파라오들의 무장 해제와 함께 시가전은 시작되었다. 증오스러운 경찰의 권총은 봉기 대중의 수중에 들어갔다. 군대의 소총, 기관총, 대포 등에 비해 권총은 거의 장난감 같은 무기이다. 그러나 이 위력적인 무기들이 진짜 적의 수중에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무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봉기에서도 심리적 과정은 물리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병사들의 소총을 손에 넣기 전에 먼저 파라오들의 권총을 빼앗아야 한다.
이 당시 병사들의 정서는 노동자들에 비해 더 수동적이었으나 그 깊이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주력은 수천 명으로 구성된 예비군 대대들이었다. 이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대부분 가장인 이들은 전투가 패배하여 국토가 유린되면 전선의 참호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전쟁보다는 고향의 농장에 있고 싶어했다. 이들은 짜르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추잡한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왕정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었다. 이들은 독일군과 전투하기를 원치 않았다. 당연히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과도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수도의 지배계급을 증오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전쟁 중에도 사치와 쾌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둔군 가운데에는 혁명을 경험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이 경험 있는 노동자 출신 병사들은 모든 정서를 일반화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이 숨어있지만 아직 표출되지 못한 혁명적 불만을 공개적인 반란 또는 최소한 항명과 반란 행위로 유도하는 것이 당면 임무였다. 투쟁 3일째에 병사들은 봉기에 대한 우호적 중립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충돌은 그 우연적인 파편들만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어제 노동자들은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소속 훈련병 분대의 행동을 열렬하게 불평했다. 이 내용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장면, 대화, 질책, 호소 등은 도시의 모든 구석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병사들은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이들은 어제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 노동자들은 항복하거나 후퇴할 생각이 없다. 총탄 세례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여성들 즉 부인, 모친, 여동생, 애인 등도 같이 투쟁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이들이 그렇게 자주 속삭였던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 모두 함께 투쟁할 수만 있다면...” 다가오는 또 다른 하루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두려움, 느껴지는 극도의 고통, 자신들을 살인자로 만든 놈들에 대한 숨막히는 증오심, 이 정서들이 병사들을 지배하는 순간 군대 막사에서 공공연한 분노의 첫 목소리들이 울려나온다. 그리고 영원히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분노의 목소리들에 의해 군대 전체는 안도와 환희 속에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인식한다. 로마노프 왕조가 멸망할 그날이 이렇게 러시아 대륙에 밝아왔다.
불굴의 지도자 카유로프의 집에서 아침 회의가 열렸다. 40명이 넘는 공장대표자 가운데 다수는 계속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다수였을 뿐 전부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다수였는지 알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기록을 남길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병사들이 봉기했으며 감옥 문이 열렸다는 황홀한 소식에 회의가 중단되었다.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입맞춤을 했다. 이 입맞춤은 배신자 유다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참석자들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다.
군대들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막사 밖으로 불려 나오기 전 아침 일찍부터 예비역 방위군 대대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전날 파블로프스키 연대 제 4 중대의 행동이 계승되었다. 문서, 기록, 회고록 등은 인류 역사의 이 거대한 사건을 희미하게 조명하고 있을 뿐이다. 억압받는 대중은 창조적 행동의 절정으로 상승할 때조차 자기 얘기가 거의 없다. 그리고 글도 제대로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터지는 압도적인 승리의 환희와 열광이 그나마 남아있던 기억도 지워버린다. 그러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들이라도 확인해보자.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침 7시 어느 대대장이 전화를 통해 하발로프 장군에게 이 위협적인 소식을 전했다: 훈련병 분대 즉 봉기 진압의 신뢰받는 선봉 부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하기를 거부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살해되었거나 병사들 앞에서 총으로 자결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 부대는 막사 뒤편의 다리들을 불태웠다. 이를 통해 서둘러서 봉기를 확대시키려했다. 봉기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웃한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의 막사로 달려가 병사들을 “불러냈다”. 마치 파업노동자들이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을 불러내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하발로프는 이렇게 보고를 받았다: 볼린스키 연대가 소총을 반납하라는 장군의 명령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노동자들과 합류한 후” 리토프스키 및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과 함께 정치경찰의 막사를 파괴했다. 이로써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의 어제 실험이 헛되지 않았다. 봉기는 마침내 지도자들을 찾아냈으며 동시에 행동 계획도 찾아냈다.
27일 이른 아침까지 노동자들은 봉기가 승리할 가망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훨씬 뭔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실제로 승리는 이미 10분의 9 정도 성취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병사들의 막사에 가한 혁명적 압력은 이미 거리로 진출한 병사들의 혁명 운동과 맞아 떨어졌다. 낮 시간에 이 두 막강한 물결은 하나로 합류하여 구체제의 벽, 지붕 그리고 기초 전체를 깨끗이 쓸어가 버렸다.
추구린은 볼세비키 중앙 본부에 제일 먼저 나타난 노동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손에 소총을 들고 어깨에 탄띠를 매고 “몰골은 형편없었으나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띤 채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소총을 든 병사들이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막사에 들어가 소총과 탄창을 받았다. 비보르그 노동자들은 가장 대담한 병사들과 함께 대강의 행동 계획을 짰다: 무장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경찰서를 점령한다; 경찰 전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 경찰서에 잡혀 있는 노동자들과 감옥의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시킨다; 도시 안에 주둔하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를 모두 격퇴시킨다; 소극적인 군대 및 다른 지구의 노동자들과 결합한다.
모스크바 연대는 내부 분란을 겪은 후 봉기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부에 충성하는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들과 무기력하게 분리되었다. 그리고 몸을 숨기거나 서둘러 부대 깃발을 바꾸었다. “병기” 공장의 노동자 코롤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2시에 모스크바 연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할 때 우리는 이미 무장을 마친 후였다...우리는 소총과 권총을 각각 한 자루씩 들었다. 그리고 나타난 병사들을 하나로 모았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가 지휘를 맡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경찰서를 공격하기 위해 티흐빈스카야 거리로 출발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당면 임무”를 지시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승리했다는 즐거운 보고들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장갑차들이 나타났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장갑차들이 지구들을 질주하며 항복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 이제 카자흐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혁명은 이제 위풍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다.
정오 경에 뻬쩨르부르그는 다시 전투의 격전장이 되었다. 소총과 기관총들이 모든 곳에서 소리내어 불을 토했다. 누가 어디서 총을 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지는 확실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에게 총질하고 있었다. 목표물도 없이 쏘는 총들이 많았다. 어린 소년들이 생각지도 않은 권총을 손에 넣어 여기 저기서 쏘고 있었다. 병기고는 파괴되었다. “브라우닝 권총 수만 자루가 반출되었다고 한다.” 지방법원과 경찰서의 불타는 건물에서 연기 기둥이 올라갔다. 일부에서는 충돌과 작은 전투가 진짜 전투로 변하고 있었다. 삼프소니에프스키 대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전거 부대 막사에 도착했다. 자전거 부대 병사 일부는 정문에 몰려 있었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에게 “동지들, 물러나시지.”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어느 시위 참가자의 증언에 의하면, “선한 미소는 아니었다.” 한편 장교들은 노동자들에게 물러나라고 거칠게 명령했다. 10월 혁명 때와 같이 2월에도 기병과 함께 자전거 부대는 군대의 가장 보수적인 부위였다. 노동자와 혁명 병사 무리가 곧 울타리 주위로 모였다. “의심스러운 대대를 우리가 직접 끌어내야 한다!” 장갑차를 부르러 보냈다고 누가 보고했다. 기관총을 보유한 자전거 부대를 제압할 방법이 장갑차 이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갑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 이들은 대단히 성미가 급했는데 이것은 옳았다. 양측에서 총을 쏘았다. 그대로 서있는 판자 울타리가 병사들과 혁명군중을 갈라놓고 있었다. 군중이 공격에 나서서 울타리를 무너뜨릴 결심이었다. 이들은 울타리 일부를 무너뜨렸고 나머지는 불을 질렀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약 20동의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부대 병사들은 이 가운데 두세 동에 모여있었다. 빈 막사들에 즉시 불이 질러졌다. 이로부터 6년 후 카유로프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불타오르는 막사들, 이들 주위 울타리의 붕괴, 기관총과 소총의 사격, 포위 군중의 흥분된 얼굴, 돌진하고 있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린 무장 혁명가들 그리고 마침내 번쩍이는 포구를 뽐내는 장갑차의 도착 등은 기억에 남을만한 대단한 장면이었다.” 낡은 짜르 체제, 봉건제, 교회 체제, 경찰국가 러시아 등이 불타 무너지고 있었다. 막사와 울타리는 불길, 연기, 기관총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카유로프들이 환호했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전거 부대 병사들과 장교들의 바리케이드에 장갑차가 도착하여 포탄을 몇 발 갈겼다. 부대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견장과 다른 장식들을 떼어내면서 장교들은 막사 옆의 채소밭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나머지는 항복했다. 이것은 아마 27일의 가장 커다란 승리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군대의 반란은 이제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소문을 듣지 못한 부대만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자 1905년 모스크바 봉기를 무참히 진압한 악명이 높은 세메노프스키 연대도 봉기에 합류했다. 11년은 헛되지 않았다. 경기병(輕騎兵) 부대와 함께 이 연대의 병사들은 밤늦게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봉기에 참여하라고 “소리쳐 불렀다.”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자물쇠로 잠근 막사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 연대는 1905년 12월 3일 역사상 최초의 소비에트를 포위하고 대의원들을 체포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후진적인 연대였다.
15만 병력의 수도 주둔군은 수가 줄어들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이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아침 소식을 전달받은 후 하발로프는 계속 저항했다. 천 명의 합동연대에게 가장 극단적인 명령을 내려 내보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운명은 대단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혁명이 승리한 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하발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뭔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용감하고 결의에 찬 장교(쿠티에포프 대령을 의미했다)의 지휘 아래 연대는 출동한다. 그러나 ...결과가 없다.” 이 연대 다음으로 출동한 중대들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발로프 장군은 궁전 광장에 예비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창이 없었고 이것을 구할 데도 없었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서 하발로프가 직접 증언한 말이다. 반란군을 징벌하기 위해 보낸 연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부대 밖으로 행진하자마자 봉기에 흡수되었다. 이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노동자, 여성, 청년, 반란군 등이 하발로프 군대를 사면에서 포위해 모여들었다. 이 연대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중과 함께 움직이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모든 것에 침투하는 대중은 이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군중과 싸우는 것은 밀가루 반죽으로 울타리를 세우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었다.
더욱더 많은 수의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전화국, 리토프스키 성곽, 마린스키 궁전, 기타 성스러운 장소들을 지킬 믿을만한 부대를 보내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하발로프는 크론슈타트 요새에 있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에게 수도로 진군할 것을 전화로 명령했다. 그러나 요새 사령관은 요새 병사들의 반란이 우려된다고 대답했다. 봉기가 이웃 주둔군으로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발로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장군은 겨울궁전을 요새로 전환시키려 했거나 하는 체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기 때문에 금방 폐기되었다. 마지막 남은 몇 줌의 “충성스러운” 부대는 해군본부로 보내졌다. 마침내 여기서 이 독재자는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임무에 몰두했다: 그는 두 건의 정부 포고령을 공표하기 위해 인쇄작업을 명령했다. “신병으로 인한” 프로토포포프의 은퇴와 뻬쩨르부르그의 포위를 명령하는 포고령이었다. 후자의 포고령은 정말 서둘러 인쇄해야 했다. 왜냐하면 몇 시간 후 하발로프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해군본부를 떠나 귀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그러나 전혀 막강하지 않은 장군은 27일 저녁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조금의 문제도 없이 체포되었다.
멸망의 위험 앞에서 난공불락 러시아 제국이 동원한 저항이 이것뿐이었는가? 그렇다. 인민을 압살한 그간의 경험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혁명에 대비한 계획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가 전부였다. 나중에 모든 일이 종결되고 정신을 차리자 짜르 주위의 인물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특이한 성격 때문에 2월 인민혁명이 쉽게 승리했다. 그러나 이후 혁명이 계속 전개되면서 이 주장은 반박되었다. 물론 1917년이 시작될 때 짜르의 친위 파벌은 수도 주둔군을 개선하는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짜르는 이 제안에 쉽게 동의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간의 노고로 보아 기병 방위군은 뻬쩨르부르그 부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온 대표들이 공손하게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기병 방위군 4개 연대 대신 해군 방위군 3개 함대를 수도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말했다: “주둔군 교체는 짜르의 동의도 없이 명령에 따라 배신적으로 이루어졌다...수병들은 노동자들로부터 징집되었기 때문에 군대 내에서 가장 혁명적인 분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방위군 특히 기병의 최고위 장교들은 전선에서 너무 만족스럽게 경력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 복귀를 원치 않았다. 이외에도 이들은 징벌 작전에 투입될 가능성을 두려워했음에 틀림없다. 이 부대는 수도에서 행진이나 하다가 전선에서 쓰디쓴 경험을 했다. 이 결과 이 부대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 부대를 지휘하여 징벌 작전에 투입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선의 사건들이 곧 증명했듯이 이때 기병 방위군은 나머지 기병들과 다른 점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수도로 전근된 해군 방위군은 2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이미 구체제는 완전히 썩어 제대로 남아있는 기둥은 하나도 없었다.
2월 27일 군중은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의 여러 감옥에서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이들 가운데에는 1월 26일 체포된 군사산업위원회의 애국적 그룹, 40시간 전 하발로프에 의해 체포된 볼세비키 뻬쩨르부르그위원회 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감옥 정문에서 곧바로 정치 분열이 일어났다. 멘세비키-애국주의 인물들은 의회로 향했다. 거기에서 이들의 역할과 지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구로 향했다. 이들과 함께 수도 장악의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서였다. 적에게 숨쉴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혁명 사업은 끝을 봐야한다.
반란군을 타우리데 궁전으로 인도할 생각을 누가 했는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란군의 이 정치적 행진은 전체 상황에 의해 규정되었다. 대중기반이 없는 모든 과격분자들은 자연스럽게 반체제 정보의 구심점인 타우리데 궁전으로 향했다. 아마 이들은 27일 갑자기 활력을 주입 받아서 반란군의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예로운 역할이었으며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은 역할이었다. 위치로 보아 포템킨 궁전은 혁명의 중심부가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 타우리데 공원은 방위군의 막사들과 일련의 군사기관들이 포함된 군사지구와 거리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은 정부와 혁명가들에 의해 왕정의 군사적 중심부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병사들의 반란이 방위군 막사 구역에서 시작된 후였다. 반란군은 거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타우리데 궁전의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우리데 궁전에서 한 블록 지나면 네바강이었다. 네바강을 건너면 혁명의 용광로 비보르그 노동자지구였다. 노동자들은 알렉산드르 다리를 건너거나 교각 상판이 올라가 있어서 건널 수 없으면 강의 얼음 위를 걸어가 방위군 막사나 타우리데 궁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북동 삼각지는 방위군 막사, 포템킨 궁전, 거대한 공장 등 서로 기원이 다른 시설들이 가까이 몰려 있는 이질적 지점으로 혁명의 각축장이 되었다.
타우리데 궁전에는 이미 여러 쎈터가 수립되었거나 엉성하게나마 수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중에는 봉기 지휘부도 있었다. 이것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실수로 혁명과 연계를 가졌거나 봉기가 일어날 동안 잠만 자고 있던 혁명 장교들은 혁명이 승리한 후 서둘러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의 부탁으로 “혁명에 봉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다. 이들은 심오한 생각으로 상황을 파악한 후 비관적으로 고개를 흔든다. 무기도 없는 시끄러운 병사 대중은 전투태세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대포, 기관총, 통신장비, 지휘관 등 어느 것도 변변히 없다. 적이 강력한 일개 연대만 동원하면 이 오합지졸들은 싹쓸이 될 것이다! 물론 당장은 혁명 군중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계획된 전술을 운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밤이 되면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주민들은 조용해질 것이고 도시 중심부는 텅 비어버릴 것이다. 막사에 남아있는 강력한 일개 연대를 동원하여 하발로프가 공격을 가한다면 상황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고는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두 번 이상 용감한 대령들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에게 강력한 일개 연대만 준다면 단 2초만에 모든 것을 정리할텐데!” 그리고 곧 보게 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발로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용감한 장교의 지휘를 받아 출동한다. 그러나...결과는 전혀 없다.”
그렇다.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가장 믿을만한 무력은 경찰, 헌병, 일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부대뿐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8개월 후인 10월에 성조오지 대대와 사관학교 생도들이 증명한 바와 똑같이 이 부대들도 진짜 대중의 공격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2백만 도시 대중과 장기 필사항전을 벌일 충성파 연대를 왕정은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말만 거창하게 떠버리는 대령들에게 혁명은 자기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대단히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보아도 목표가 없는 인간들의 움직임, 서로 충돌하는 경향들, 인간의 소용돌이, 갑자기 귀가 먹은 것처럼 놀란 표정의 사람들, 단추도 없는 참호 외투를 걸친 군인들, 과격한 동작의 학생들, 소총이 없는 병사들, 병사가 없는 소총들, 허공에 총을 쏘는 소년들, 천 개의 목소리를 가진 야단법석, 황당한 소문의 폭풍, 잘못 작동된 경고음, 거짓 축제소동 등등. 이 모든 혼란 위에 칼 한 자루만 휘두르면 모든 것이 흩어지고 흔적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조야한 착각에 불과하다. 혼란은 피상적일 뿐이다. 혼란의 표면 밑에서 대중은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결집한다. 수많은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직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한 쓰디쓴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끔찍했던 역사의 눈사태로 기억에 남아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명 대중을 지금 해산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 시간 후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홍수는 첫 번째 홍수보다 훨씬 더 맹렬하고 파괴적일 것이다. 2월 이후 뻬쩨르부르그의 분위기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따라서 옆에 있거나 근처에 접근하는 적대적 군대는 이 용광로의 불길에 그슬려 비틀리고, 자신감을 상실하고, 마비되고, 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승리한 군중의 자비를 구한다. 내일 성조오지 기사 대대와 함께 짜르의 명령으로 전선에서 도착한 이바노프 장군은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5개월 후와 8개월 후 똑같은 운명이 코르닐로프 장군과 케렌스키에게 닥칠 것이다.
봉기 직전 첫 며칠간 카자흐 병사들은 혁명 대중의 설득에 귀를 가장 열심히 기울인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가장 학대받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봉기가 진행되자 기병은 다시 한번 자신의 보수적 평판을 입증하여 보병보다 보수적이었다. 27일까지 기병은 사태를 관망한 채 중립을 표방했다. 하발로프는 기병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은 여전히 기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공들의 궁전과 겨울궁전 반대편 네바강 섬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수수께끼였다. 성벽 안에 숨어있는 요새 주둔군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이 요새에는 뻬쩨르부르그 시민에게 정오을 알리기 위해 발사되는 오래된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제외하면 포대에 확고히 설치된 대포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야전 대포가 성벽에 설치되어 알렉산드르 다리를 겨누고 있다. 이 무기들은 무엇을 과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는 이 요새에 대해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요새는 혁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 수수께끼는 풀렸다: “장교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요새는 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에게 항복할 것이다. 요새의 장교들은 상황을 분석했다. 항복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장교들은 불가피한 상황을 서둘러 차단했다.
27일 저녁이 되자 병사, 노동자, 학생 그리고 여타 다양한 대중의 물결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지시를 내리고 정보를 제공할 사람들을 대중은 이 궁전에서 찾을 생각이었다. 모든 방향에서 탄약이 한아름 궁전 안으로 운반되어 탄약고로 용도가 바뀐 방에 저장된다. 밤이 되자 혁명 지도부가 일을 시작한다. 기차역을 지킬 부대를 보낸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든지 정찰대를 보낸다. 병사들은 열성적으로 말 한마디 없이 비록 대단히 비체계적으로나마 새로운 정부의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다. 군대 사령부의 일부 또는 군대의 민간인 직원들이 새 정부의 지도부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옳았다. 혼란 속에 즉시 질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 태어난 소비에트와 혁명 지도부에게는 아직 인장이 없었다. 혁명은 아직도 관료 행정기구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마련될 것이다. 이것이 너무 잘 마련되는 것이 슬플 뿐이다.
혁명은 반동분자를 색출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나중에 질책하듯이 말한다: “자의적으로” 도시 전역에서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혁명 전체가 자의적이다. 체포된 사람들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물결처럼 흘러 들어간다. 수상, 장관, 경찰관, 비밀정보원, “친독일파” 백작부인, 헌병 장교의 무리들이다. 프로토포포프와 같은 정치인들은 자수한다. 더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이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를 칭송하는 노래로 가득했던 방은 이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와 한숨만이 가득하다. 체포된 장군이 대단히 지친 듯 가까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의원 여러 명이 친절하게 차를 대접한다. 영혼이 심하게 흔들린 장군은 흥분되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작부인, 위대한 나라의 멸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편 멸망할 의사가 전혀 없는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행진한다. 장화로 쿵쿵 땅을 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을 쩔렁쩔렁 부딪친다. 함성으로 공기를 가르고 발을 구르며 전진한다. 혁명은 언제나 무례하다. 지배계급이 제때에 좋은 예절을 인민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얼굴에서 피와 땀을 씻어 내지 못했다. 타우리데 궁전은 혁명의 임시 야전사령부, 정부청사, 탄약고, 감옥, 요새가 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 대담한 적들이 잠입했다. 변장한 헌병 대위가 구석에서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우연히 적발되었다. 물론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군들을 군사법정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그를 당장 처치하려했다. 그러나 “참모부”의 누가 개입해서 손쉽게 이 헌병을 군중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 이때 혁명은 아직도 성격이 좋았다. 신뢰하며 친절했다. 일련의 긴 배신, 사기, 피비린내 나는 시련을 겪은 후에야 혁명은 무자비해진다.
승리한 혁명의 첫 날 밤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기차역과 다른 장소들의 급조된 책임자들은 개인적 연줄의 지식인, 혁명 출세가, 서로 아는 사람들로 두서없이 선정되었다. 노동자 출신의 하사관들이 이런 일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감투를 쓴 책임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웠다. 사방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병사들을 귀찮게 굴고 타우리데 궁전에 계속 전화를 걸어 증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타우리데 궁전의 혁명 참모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전화를 걸고 증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 궁전의 밤 근무 참모부의 일인이 이렇게 말했다: “명령을 받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명령도 없이 행동한다.”
노동자 지구들은 명령 없이 행동한다. 혁명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공장 밖으로 노동자들을 인도하고 경찰서를 접수하고 병사들을 “큰소리로 부르고” 반혁명 아성들을 파괴했다. 이들은 타우리데 궁전, 혁명 참모부, 행정본부로 서둘러 가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빈정거림과 불신감으로 그쪽에 대고 고개를 흔든다: “자기들이 잡지도 않은 사냥감을 죽기도 전에 나누려고 용감한 놈들이 빨리도 모여드는군.” 다른 좌익 정당들의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자 볼세비키들은 거리에서 낮을 보내고 밤은 지구본부에서 보내면서 병사들의 막사와 연락을 유지하고 내일의 일을 준비한다. 승리의 첫 날 밤 이들은 5일 동안의 낮과 밤을 꼬박 세워 했던 같은 일들을 계속하고 확대시킨다. 모든 혁명의 초창기가 그렇듯이 이들은 혁명의 아직 굳지 않은 어린 뼈들이다.
나보코프는 이미 입헌민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합법적 탈영병으로 총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27일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후 오후 3시까지 일했다. 그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저녁에 모르스카야 가도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는 이 총성을 자기 아파트에서 들었다. 장갑차가 거리를 질주했으며 병사들과 수병들이 옆 걸음으로 벽에 기대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존엄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집 현관 옆 창문으로 이들을 관찰했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 내 기억으로는 친구들이 낮에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인물은 곧 혁명(!)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총무청장 감투를 쓸 것이다. 내일은 알지도 못하는 노인이 거리에서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 노인은 회계사나 교사일 것이다. 그는 몸을 숙이고 모자를 벗어들고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민을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는 적당한 자부심으로 이 때의 일을 훗날 얘기할 것이다.
혁명으로 타격을 입은 계급들의 변호사들과 언론인들은 상당한 양의 잉크를 낭비하면서 이후 이렇게 주장했다: 2월 사건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반란이었으며 이어서 병사들의 반란으로 지지를 받아 혁명으로 치장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도 바스띠유 감옥의 함락이 반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 사건이 혁명이라고 공손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혁명으로 잃는 것이 있는 자들은 혁명을 진짜 이름으로 불러줄 기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의에 찬 반동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단어는 모든 족쇄와 편견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류의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특권계급들과 이들의 하수인들은 자기들을 타도한 혁명을 과거의 혁명들과 대비하여 군대의 반란이나 소동 또는 군중 폭동으로 격하시키려고 애써왔다.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아직도 버젓이 주역 행세를 하고 있는 계급들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
2월 27일 혁명 직후 이 혁명을 터키 청년장교들의 군사쿠데타에 비유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 상층부는 이런 성격의 쿠데타를 적지 않게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규정은 너무도 가망이 없다. 심지어 어느 부르주아 신문조차 이 규정을 진지하게 반대했다. 젊은 시절에 맑스를 연구했던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는 러시아의 좀바르트(역자 주:Werner Sombart, 1863~1941, 독일의 경제사학자. 초기에는 맑스주의자였으나 이후 극우 진영으로 전향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3월 10일자 일간 증권거래소 신문(Birzhevoe Vedomosti)에 이렇게 적었다:
“청년 장교들의 터키 혁명은 군대의 승리한 봉기였으며 군대 지도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수행되었다. 병사들은 장교들의 계획을 공손히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2월 27일 왕정을 타도한 러시아의 방위군 연대들은 장교들의 지도가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봉기를 시작했다; 장군들이 아니라 병사들이 의회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장교들의 명령을 공손히 이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근로인민 계급인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피를 나눈 형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수행한 두 사회계급이다.”
그의 말은 고치거나 보완할 필요가 전혀 없다. 혁명 이후 전개된 사건들은 이 말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강화시켰을 뿐이다. 뻬쩨르부르그에서 2월의 마지막 날은 혁명 승리의 첫날이었다. 황홀, 포옹, 환희의 눈물, 감정의 복받침이 터져 나온 날이었다. 동시에 적들에 대한 마지막 타격의 날이기도 했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들렸다. 프로토포포프의 반동 경찰인 파라오들이 인민의 승리를 알지 못하고 건물 지붕 위에서 여전히 총을 쏘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밑에서 혁명 대중은 다락방, 가짜 창문, 교회 첨탑 등 짜르의 무장 귀신들이 아직도 숨어있을 곳에 총을 쏘고 있었다. 오후 4시쯤 이들은 과거 국가기구의 마지막 잔당들이 피신해 있던 해군성을 점령했다. 혁명 조직들 그리고 즉흥적으로 조직된 그룹들이 도시 전역에서 반동분자들을 체포하고 있었다. 슐뤼쎌부르크 중노동 감옥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접수되었다. 더욱더 많은 수의 연대들이 수도와 주변 지역들에서 혁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함락은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는 똑같았다. 다만 이 도시에서는 이 정서가 좀더 불명확하게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약간 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보다 이곳에서 혁명조직들은 힘이 더 약했다. 네바강의 뻬쩨르부르그에서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모스크바의 급진 지식인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2월 27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의 공장과 작업장들이 파업을 시작했고 시위가 이어졌다. 장교들은 막사의 병사들에게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쉬쉴린 병사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쯤 병사들은 군중 시위의 의미를 정반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여러 연대의 병사들이 시의회 건물에 도착하여 혁명에 동참하는 방법을 물었다. 다음날 파업은 확대되었다. 군중은 깃발을 들고 시의회로 몰려들었다. 무랄로프는 자동차 중대의 병사였다. 그는 거대한 덩치에 성격 좋고 용감한 고참 볼세비키였으며 정원을 가꾸는 원예가였다. 그는 시의회에 처음으로 완벽하고 규율이 잡힌 부대를 데리고 왔다. 이 부대는 전신국을 비롯한 중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8개월 후 무랄로프는 모스크바 군사지구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감옥의 문도 열렸다. 무랄로프는 석방된 정치범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있었다. 어느 경찰이 그에게 경례를 한 후 유태인들도 석방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다. 중노동 감옥에서 바로 석방된 후 죄수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제르진스키(역자 주: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혁명가. 소비에트 정부에서 혁명수호위원회 체카의 초대 위원장이었다. 이후 스탈린을 지지하였으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비에트가 이미 수립된 시의회 건물에서 연설했다. 3월 1일 사탕공장 노동자들이 깃발을 들고 포병 여단의 막사에 찾아와 병사들과 어울렸다. 포병 병사 도로페브에 의하면 이때 많은 노동자와 병사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도시 중심부에서 저격병이 몇 번 사격을 가했으나 대체로 무장 충돌이나 사상자는 없었다. 뻬쩨르부르그가 모스크바를 대신해 미리 희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미 혁명이 완수된 3월 1일에 지방 도시들에서도 혁명이 시작되었다. 트베르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병사들의 막사까지 행진한 후 병사들과 함께 도시 거리를 행진했다. 이때 그들은 아직도 “인터내셔날”이 아닌 “라 마르세이에즈”(역자 주: 프랑스 혁명 당시의 대표적 혁명가요. 지금은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를 부르고 있었다. 니즈니-노브고로트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시의회 건물 주위에 모였다. 이 건물은 대다수 도시에서 뻬쩨르부르그의 타우리데 궁전과 같이 혁명의 구심이 되었다. 시장이 연설한 후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였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저녁이 되자 주둔군의 21개 부대 가운데 18개 부대가 자발적으로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다. 사마라와 사라토프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하리코프에서는 경찰청장이 기차역에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후 자기의 객차에 올라서서 흥분된 군중에게 모자를 들어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혁명 만세, 만세!” 하리코프에서 에카테리노슬라프로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 시위대 맨 앞에는 경찰부청장이 큰 걸음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마치 성인들의 기일에 있는 대규모 행진 때처럼 기병들의 기다란 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왕정이 소생할 기미가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명확해지자 이들은 조심스럽게 정부 건물에 걸려 있는 짜르의 초상화를 내리고 다락방에 이것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일화들은 진짜이기도 하고 상상의 소산이기도 했는데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들은 아직도 혁명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프스코프, 오렐, 리빈스크, 펜자, 카잔, 짜리친 그리고 다른 지방 도시들에 대해서는 [연대기]지가 3월 2일자로 이렇게 보도했다: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혁명에 가담했다.” 이 묘사는 간략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올바로 말하고 있다.
혁명 소식은 근처 도시로부터 농촌 마을로 부분적으로는 행정당국에 의해 그러나 대개는 장터, 노동자, 휴가를 맡아 고향에 온 병사 등을 통해 조금씩 전해졌다. 농촌 마을들은 도시들보다 혁명을 더 천천히 그리고 덜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도시에 못지 않게 깊게 혁명의 정서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에게 혁명의 문제는 전쟁과 토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가 혁명을 성취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의 나머지 도시들과 시골들은 혁명을 추종했다. 뻬쩨르부르그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반동세력과의 충돌은 없었다. 구체제를 위해 싸움을 벌일 계층, 정당, 기관, 부대 등은 어디에도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이 기병 방위군으로 대체되었거나 이바노프가 전선에서 믿을만한 여단을 이 도시로 이동시켰다면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반동들은 때늦게 항변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대단히 미약하다. 니콜라스 2세를 위해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된 여단이나 연대는 전선이고 후방이고 전혀 없었다.
혁명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75분의 1을 보유한 뻬쩨르부르그의 주도성과 역량으로 수행되었다. 이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행위가 대단히 비민주적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라 전체는 이미 성취된 결과를 받아들였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전망이 있었다고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국 차원의 대의기구인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날짜와 방식은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승리가 탄생시킨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혁명 시대에 민주적 조직들의 기능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 혁명은 언제나 민주주의적 법치에 대한 물신 숭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혁명이 더 깊고, 더 대담하고, 더 민주적일수록 이 타격은 더욱 가차없이 가해졌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왕정의 극단적인 권력집중화 현상이 이후 혁명의 수도 빠리가 나라 전체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피상적이다. 혁명이 중앙집중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타도된 왕정을 모방하기 때문이 아니다. 혁명이 수립한 새로운 사회는 억누를 수 없는 요구들을 내세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편협한 지역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 결국 새로운 사회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적 경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수도는 나라 전체의 의지를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처럼 혁명에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수도가 가장 명확하고 철저하게 새로운 사회의 기본적인 경향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방은 자신의 요구가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에 수도가 택한 조치들을 받아들일 뿐이다. 도시가 떠맡는 혁명 초기의 주도적 역할은 민주주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를 역동적으로 실현시킬 따름이다. 거대한 혁명에서 이 역동적 사건의 리듬은 형식적 대의민주주의와 리듬을 같이 탄 적이 한번도 없다. 지방은 중심 도시의 활동을 뒤늦게 따라갈 뿐이다. 혁명은 번갯불과 같이 빨리 진행된다. 이 빠른 속도는 혁명적 의회주의를 크게 위협한다. 이 위기는 민주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모든 진정한 혁명에서 전국적 대의 기구는 혁명의 역동성과 언제나 충돌했다. 혁명의 주요한 현장은 나라의 수도이다. 17세기 영국, 18세기 프랑스, 20세기 러시아 혁명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수도의 역할은 관료적 중앙집중주의의 전통이 아니라 주도적 혁명 계급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이 계급의 전위는 당연히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집중한다. 이 점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노동자 혁명이나 차이가 없다.
2월 혁명의 승리가 완전히 확인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사상자는 1443명이었다. 이 가운데 869명은 군인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60명은 장교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어느 전투와 비교해보아도 사상자의 숫자는 정말로 적다. 자유주의 언론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선언했다. 애국주의 정당들이 기분 좋게 서로를 용서할 때에는 아무도 이 선언의 진위를 가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승리한 모든 것 심지어는 승리한 봉기조차 옹호하는 앨버트 토머스는 “가장 밝고 휴일 같은 가장 피를 적게 흘린 러시아 혁명”에 대해 글을 썼다. 물론 그는 이 혁명이 프랑스 증권시장의 손아귀에 계속 놀아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예외가 아니었다. 1789년 6월 27일 미라보는 이렇게 외쳤다: “이 위대한 혁명은 사악한 짓거리와 눈물이 없이 성공할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역사는 너무 오랫동안 포식동물의 행동을 모방했다....이제 우리가 진정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국민의회에서 삼부회가 열렸을 때 앨버트 토머스의 선배들은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끝났다.” 그러나 그때는 혁명의 초기였다. 당연히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2월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2월 무혈혁명의 신화는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그래서 권력이 저절로 조화에 의해 자기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치장하려는 자유부르주아의 필요에 부응했다.
2월 혁명은 무혈혁명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 당시 뿐 아니라 혁명 후 첫 시기까지 희생자가 아주 적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대중이 수세기에 걸쳐 당해왔던 억압, 박해, 경멸, 사악한 공격에 대한 앙갚음이 혁명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어떤 곳에서는 수병과 병사들이 가장 사악한 장교들에게 즉시 복수를 했다. 그러나 이런 행위의 발생 건수는 과거의 온갖 피비린내 나는 모욕들에 비하면 처음에는 아주 적었다. 지배계급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좋은 것들을 항상 독차지해왔다. 이와 똑같이 이제 이들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자기들이 성취하지 않은 혁명의 과실을 전부 차지하기를 원했다. 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 확신한 후에야 대중은 지배계급에 대한 아량을 거두었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월 혁명은 노동자들과 병사로 둔갑한 농민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여전히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누가 이 혁명을 지도했는가? 누가 노동자들을 일어서게 만들었는가? 누가 병사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 혁명 승리 후 이 문제는 정당들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편적 정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었다: 지도세력이 없이 혁명은 저절로 일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체제 속에서 평화롭게 통치하고, 판결을 내리고, 유죄 선고하고, 변호하고, 교역하고, 군대를 지휘하다가 오늘 신체제에서는 서둘러서 혁명과 화해한 신사양반들이 많다. 이들은 수많은 전문 정치인들 및 과거 혁명가들과 함께 이 “자연발생적 혁명” 사상을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특히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잠자고 있었던 과거의 혁명가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했다.
혁명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백군 사령관 데니킨 장군은 자기의 신기한 저서 [러시아 소요들의 역사]에서 2월 27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결정적인 날에 지도자는 없었고 오직 혁명분자들만 있었다. 이들의 위협적인 경향은 혁명의 목표, 계획, 구호 등 어느 것도 표방하지 않았다.” 이 장군은 문필에 대한 열정이라도 있다. 그러나 박식하다는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혁명에 대한 탐구의 깊이가 이 장군에 비해 조금도 깊지 않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들은 독일 총사령부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자유주의자들을 권력에 앉히자 상황이 좀더 복잡해졌다. 이제 밀류코프의 임무는 독일 호엔쫄런 왕가가 혁명을 사주했다는 식으로 혁명을 비하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반대로 혁명가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여 이들의 명예를 박탈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며 비인격적인 혁명 이론을 자유주의자들은 심혈을 기울여 짜내었다. 반(半)자유주의자요 반(半)사회주의자인 대학강사 스탄케비치는 나중에 최고사령부의 인민위원이 되었다. 그의 생각을 밀류코프는 인정하고 공감하면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대중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부름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어떤 구호를 가지고 병사들이 거리로 나섰는가? 이들이 뻬쩨르부르그를 정복하고 지방법원을 불태웠을 때 누가 이들을 지도했는가? 정치사상, 혁명 구호, 음모, 반란 등 어느 것도 이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혁명은 구체제의 모든 것을 갑자기 태워버린 자연발생적인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발생성은 여기서 거의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스탄케비치는 동시에 가장 값어치 나가는 증언을 하고 있다: “1월말 나는 아주 은밀한 서클에서 케렌스키를 우연히 만났다....인민봉기의 가능성을 서클의 성원들은 모두 명확히 부정했다. 그리고 일단 불이 붙은 대중운동이 극좌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전쟁 수행에 대단한 난관을 조성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케렌스키 서클의 입장은 입헌민주당의 노선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사회혁명당 대표 젠지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천둥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자. 오랜 세월 혁명을 위해 일했으며 언제나 이것을 기다렸던 혁명가들에게도 혁명은 예상 밖으로 즐겁게 도래했다.”
멘세비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부르주아 망명 언론은 2월 21일 전차에서 혁명정부의 장관이 될 스코벨레프를 만난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이 사회민주주의자는 혼란이 약탈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에 군중을 진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후 그의 패거리는 한달 후에 자기들이 혁명을 지도했다고 떠들었다.” 이 말에는 약간 진한 감정이 배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합법적 사회민주주의자인 멘세비키들의 혁명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중에 볼세비키가 된 사회혁명당 좌파의 최근 지도자 스티슬라프스키는 2월 봉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당 사람들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졸고 있을 때 혁명은 갑자기 찾아왔다.” 이들이 처녀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모두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볼세비키들은 어떠했는가? 이들의 상황은 앞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지하 볼세비키 조직의 주요 지도자는 노동자 출신 쉴리아프니코프와 잘루츠키 그리고 학생 출신 몰로토프였다. 해외에 당분간 체류했고 레닌과 긴밀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쉴리아프니코프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3인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활발했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은 혁명이 3인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음을 무엇보다 잘 증명한다. 혁명이 터질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혁명의 징후이며 수많은 징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지도자인 우리의 친구 카유로프는 딱 잘라 이렇게 주장한다: “당 중앙의 지도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이미 체포되었고 중앙위원회 의장 쉴리아프니코프 동지는 다음 날에 대해 어떤 지침도 제시할 수 없었다.”
지하조직들의 허약함은 경찰 습격의 직접적 결과였다. 전쟁 초에 만연했던 애국주의적 호전 분위기 속에 경찰의 공격은 파괴력이 컸다. 이 때문에 혁명조직을 포함하여 모든 조직들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인 대중보다 사태에 뒤떨어졌다. 1917년 초 볼세비키 지하조직은 탄압과 고립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반면 대중은 애국주의 히스테리에서 벗어나 혁명적 분노로 정서가 급격히 바뀌었다.
혁명 지도부의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가장 권위 있는 혁명가들인 좌익 정당 지도자들은 해외에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감옥과 유형지에 있었다. 정당이 구체제에 위험한 존재일수록 혁명 발발의 순간에 그 지도부는 더욱 잔인하게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의 의원단 대표는 당원이 아닌 과격파 케렌스키였다. 사회혁명당의 공식 대표 체르노프는 해외에 있었다. 체이드제와 스코벨레프는 멘세비키 의원단의 대표였다. 멘세비키 지도자 가운데 마르토프는 해외에 있었으며 단과 쩨레텔리는 유형지에 있었다. 혁명의 이력을 가진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인민주의와 멘세비키 주위에 결집했다. 이들은 일종의 정치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혁명의 승리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볼세비키는 의원단이 없었다. 짜르 당국에 의해 혁명의 조직중심으로 인정된 5명의 노동자 출신 의원들은 전쟁 첫 몇 달 사이에 체포되었다. 레닌은 지노비에프와 함께 해외에 있었다. 카메네프와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실제적인 지도자 스베르들로프, 라이코프, 스탈린 역시 유형지에 있었다.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 제르진스키는 나중에 볼세비키가 되었는데 중노동형을 받고 있었다. 당시 우연히 남아있던 지도자들은 권위적인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혁명 상황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볼세비키당이 봉기 당시 권위 있는 지도부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다면 다른 조직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2월 혁명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확신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심대한 오류이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견해이다.
수도의 투쟁은 한두 시간이 아니라 무려 5일간 지속되었다.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막으려고 애썼다. 대중은 이에 대해 더 거센 압력을 가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들은 낡은 국가기구와 대항하고 있었다. 이 국가기구의 전통적 위용 뒤에는 막강한 권력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의회의 자유부르주아, 토지 및 도시 협회, 군산복합조직, 학계, 대학, 고도로 발전한 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공격에 애국주의적 저항을 감행한 두 개의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 대중은 저항했다. 봉기 대중에 가장 가까이 있던 조직은 볼세비키당이었다. 그러나 지도부가 없었고 당원들은 흩어져 있었던 허약한 비합법 중핵 조직에 불과했다. 이 상황에서 전혀 예상 밖으로 혁명이 터졌다. 그런데 소위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 운동은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다시 살아나 막강하게 위력을 발휘하면서 승리를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유례없는 공격력과 통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구체제에 대한 대중의 원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원한 하나만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쟁 기간 내내 혁명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지만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과거에 위대한 혁명을 경험했다. 지도부가 없었으며 상층부의 저항에 직면하였지만 노동자들은 공격력과 통제력으로 역관계를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계산하고 있었으며 전략적 시야를 견지하고 있었다.
전쟁 전야에 노동 계급의 혁명적 부위는 볼세비키들을 따르고 있었으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대중을 지도하고 있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노동자의 보수적 부위가 머리를 쳐들고 상당수의 대중을 애국주의 물결 속에 끌고 들어갔다. 혁명 분자들은 고립되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억눌렸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처음에는 서서히 그러나 전선의 패배 이후 더 빨리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불만이 대중 전체를 사로잡았다. 물론 애국주의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잔머리 굴리고 겁먹은 그런 애국주의는 아니었다. 지배계급은 국내의 모든 문제들을 전쟁 승리 이후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와 그 희생자, 그 공포, 그 치욕 등은 대중의 장년층 뿐 아니라 청년층도 구체제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새로운 예리함으로 대항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은 보편적이었으며 대중을 하나로 단결시켜 막강한 동력을 창조했다.
군대의 수는 불어나 수백만의 노동자와 농민을 대오로 끌어들였다. 누구든 자기 주변 사람들을 군대에서 볼 수 있었다: 아들, 남편, 형제, 친척 등. 전쟁 전처럼 군대가 인민과 단절된 상황은 끝났다. 사람들은 훨씬 더 자주 병사들을 만났다. 전선으로 배웅하고 휴가 나왔을 때는 함께 지냈다. 거리와 전차에서 전선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병원을 방문했다. 노동자 지구, 군대 막사, 전선 그리고 어느 정도 농촌 마을 역시 대화의 통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았다. 이들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쟁, 전쟁으로 떼돈 번 사람들, 장군들, 정부, 짜르와 왕후 등이 대화의 소재였다. 병사들은 빌어먹을 전쟁을 되뇌었다. 노동자들은 빌어먹을 정부를 되뇌었다. 병사는 노동자에게 왜 수도에서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노동자는 맨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1905년에는 군대 때문에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그렇지, 모두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자고 외쳤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전쟁 전에는 두 명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경우에 그리고 최소한 노동자 지구에서는 거의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짜르의 정보부는 가끔 상황을 아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혁명이 발발하기 2주일 전 크레스티아니노프라는 이름의 어느 정보원은 교외의 노동자 지구를 가로지르는 전차에서 엿들은 대화를 보고했다. 대화를 나누는 병사가 소속된 연대는 작년 가을 노엘 공장의 노동자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경찰에게 발포한 후 8명이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이 대화는 아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노동자 지구에서는 경찰과 첩자들이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병사가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계속된다: “어느 숙련 노동자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려면 모두가 단결되도록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병사는 응답했다:‘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조직을 시작했다....우리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피를 마셨다. 병사들이 참호에서 고통 당하는 동안 후방인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배를 불리고 있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17년 2월 10일. 크레스티아니노프.” 비교할 바 없이 우수한 첩자의 서사시이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요는 그것도 곧 일어나게 된다. 이 전차 속의 대화는 소요사태가 제지될 수 없을 정도로 임박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봉기의 자연발생성에 대해 스티슬라프스키가 신기한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2월 27일 장교연합”이 혁명 직후 결성되어 볼린스키 연대를 거리로 나오도록 누가 먼저 유도했는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 조사를 했다. 이때 결정적인 행동을 유도한 7명의 이름을 적은 7장의 답장을 접수했다. 주도력의 일부는 정말이지 병사들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 시가전에서 사망하여 그의 이름이 영원히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없는 주도성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막사 담벼락 바깥에서 벌어졌다. 방위군 대대들의 봉기는 자유주의자들과 합법적 사회주의자들이 완전히 놀랄 정도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봉기가 없었다면 볼린스키 연대는 거리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카자흐 부대와 대치한 사건을 어느 변호사가 자기 사무실 창문에서 목격하여 의원에게 전화로 전했다. 그런데 이 일화는 노동자와 카자흐 병사에게는 개인과 무관한 일회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즉 공장의 메뚜기가 막사에서 나온 메뚜기와 부딪친 것과 같았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윙크를 한 카자흐 병사와 카자흐 병사가 “우호적으로 윙크를 보냈다”고 즉시 판단한 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군대와 인민이 상호 침투하는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다. 노동자들은 군대의 체온이 결정적인 수위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 차렸다. 바로 이 인식이 승리를 확신한 대중의 공격력에 정복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여기서 2월의 사건들을 관찰한 후 그 결과를 요약한 어느 자유주의 관료의 날카로운 시각을 소개해야한다: “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섰다.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결국 ‘자연발생적으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연발생성 이론은 자연과학의 경우보다 사회과학에서 더 우스꽝스럽다. 어느 혁명지도자의 이름이 운동에 붙어있지 않다고 해서 이 운동이 개인들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이 시각은 밀류코프가 독일의 첩자니 러시아 인민의 자연발생성이니 하고 떠드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이 관료는 전직 검사 자바스키인데 그는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혁명을 맞이했다. 법정의 경험을 통해 그는 외국 첩자들의 명령이나 자연발생적 과정으로는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인식한 것 같다.
자바스키는 혁명 과정을 실험실의 열쇠구멍을 통해 보는 것처럼 통찰하게 만드는 두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2월 24일에 금요일 지배계급 상층부의 어느 누구도 혁명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상원의원이 타고 있던 전차가 리테이니 가도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는 지점에서 갑자기 돌면서 차체가 심히 요동쳤다. 이 결과 창문들이 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흔들거렸고 창문 하나는 깨져버렸다. 전차는 멈추어 섰다. 차장은 승객 전부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승객들이 차장을 욕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나는 아직도 승객의 욕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한 그 차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화가 났지만 말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근엄한 표정이 꼭 늑대와 같았다.” 보이는 모든 곳에서 전차는 운행을 중지 당하고 있었다. 이 근엄한 차장은 이 자유주의 관료에게 “늑대와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인 제국의 수도 뻬쩨르부르그에서 관료들을 싣고 가는 전차를 혼자서 정지시켜야 한다는 높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왕정의 전차를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정지시킨 것은 바로 이 차장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관료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 헌병 장군과 자유주의 상원의원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리테이니 가도의 차장은 역사의 의식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미리 혁명의식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지방법원이 불타고 있었다. 이때 자바스키와 같은 부류의 어느 자유주의 법률가가 한방 가득히 보관되어 있던 판결문과 공증 문서들이 불길로 사라지고 있다고 거리에서 말하면서 유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동자 옷을 입은 근엄한 모습의 노인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들의 보관 문서가 없어도 우리는 집과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있어.” 아마 이 일화는 문필의 방식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졌을 것이다. 군중 속에는 이렇게 필요한 내용으로 반박할 수 있는 노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지방법원의 화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왜 이 건물을 불태우지?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과격행위들”을 자행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짜르 경찰 뿐 아니라 혁명의 화재 속에 재산 공증문서들이 불타는 것을 두려워한 자유주의 법률가들에 이들은 대항했다. 이 행위를 통해 이들은 대중을 필요한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있었다. 이름도 없으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공장과 거리의 이 정치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혁명사상으로 교육되어야 했다.
2월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면서 비밀경찰도 이 운동이 상층의 계획된 지도부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즉시 이렇게 덧붙였다: “노동계급은 일반적으로 혁명의식으로 선전된 상태에 있었다.” 이 평가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 혁명 대중에 의해 체포되어 혁명가들이 비운 감옥을 다시 채울 때까지 혁명을 방해했던 이 반동 전문가들은 자유주의 지도자들보다 상황을 훨씬 더 면밀하게 관찰했다.
신비로운 자연발생성 이론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봉기를 일으키려면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고 적을 공격할 순간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대중이나 이들의 지도부가 역사적 사건들을 검토하고 이것들을 평가할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추상적 대중이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일반적으로 러시아 노동자라는 구체적 대중이 봉기를 위해서 필요했다. 이들은 방위군의 세메노프스키 연대에 의해 압살된 1905년 혁명, 1905년 12월 모스크바 봉기를 경험했다. 1905년의 경험을 곱씹어보고, 자유주의자들과 멘세비키들의 입헌주의 환상을 비판하고, 혁명의 전망을 소화하고, 수백 번 군대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군대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면밀하게 주시하는 노동자들 즉 자신의 관찰로부터 혁명적 결론들을 추론해 내고 이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봉기 대중 사이에 흩어져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혁명 선전에 의해 획득되었거나 최소한 영향을 입은 진보적 병사들이 주둔군 내부에 있어야 했다.
모든 공장, 모든 길드, 모든 중대, 모든 술집, 모든 군대 병원, 모든 이동 중인 부대, 심지어는 모든 인구가 빠져나간 농촌 마을에도 혁명 사상의 점진적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곳에서 특히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사건들을 해석해내는 분자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질문한다: “무슨 소식이 있소?” 그리고 이들에게 필요한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이 지도자들은 종종 혼자 남겨졌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된 혁명적 일반화의 파편들로 이들은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자유주의 신문의 행간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이들은 혼자서 연구했다. 이들의 계급적 본능은 정치 상황에 의해 잘 다듬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비록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 필요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끊임없이 끈질기게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험, 비판, 주도성, 자기희생의 요소들이 대중에게 흘러 들어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의식적 과정이 되어 혁명운동의 내적 동력을 결정적으로 창조했다. 자유주의와 구체제에 의해 길들여진 거들먹거리는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개미집이나 벌집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노동계급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던 사고는 교육받은 계급의 조그마한 사상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훨씬 투시력이 강하며 훨씬 의식적이었다. 더욱이 이 사상은 더 과학적이었다: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상당히 비옥해졌다; 이뿐 아니라 혁명의 각축장에 자신의 모습을 곧 드러낼 대중의 살아있는 경험을 자양분으로 공급받아 더욱 비옥해졌다. 사상은 객관적 과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을 지도할 수 있을 때 과학성을 획득한다. 성경의 묵시록에서 영감을 얻어 라스푸틴의 환상을 믿은 정부 상층부의 사상에 과학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 아니면 후진국 러시아가 자본주의 강대국의 쟁탈전에 끼어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시에 의회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희망한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과학성에 입각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이미 노쇠한 자유주의에 굴종하고 적응하면서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은유법들을 가지고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독립성을 유지한 지식인들의 지적인 삶이 과학성에 입각하고 있었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이 반동 세력의 사상에 정신적 무기력, 유령, 미신과 허구의 왕국 아니면 “자연발생성”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2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철학을 완전히 뒤집을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공적 사회 즉 지배계급, 지배층, 지배집단, 지배정당, 지배파벌 등의 다층 상부구조물은 하루하루 무기력과 관성으로 연명하면서 낡아빠진 유물로 자기 배를 채우고 진화의 저항할 수 없는 요구를 듣지 못하고 환상으로 자신들에게 아양떨고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노동계급 내부에서는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심 뿐 아니라 이들의 무기력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독자적으로 깊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 봉기와 그 승리가 완성시킨 경험과 창조적 의식이 축적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2월 혁명을 지도했는가?” 라는 이 질문에 아주 명확히 대답할 수 있다: 대부분 레닌의 볼세비키당이 교육시킨 의식적이며 훈련된 노동자들이 혁명을 지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실을 즉시 덧붙여야 한다: 이 지도력은 봉기의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전위에게 혁명의 지도력을 즉시 부여하기에는 불충분했다.
봉기는 승리했다. 그러나 왕정으로부터 빼앗은 권력을 봉기는 누구 손에 넘겨주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2월 혁명의 핵심 문제에 마주친다: 왜 그리고 어떻게 권력이 자유부르주아의 손에 넘어갔는가?
의회와 부르주아 “사회”는 2월 23일에 시작된 선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유주의 의원들과 애국주의 언론인들은 과거처럼 응접실에 모여 트리에스테와 피우메의 영토 분쟁 문제(역자 주:Trieste and Fiume,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역.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전승국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지금은 각각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다다넬스 해협을 러시아가 차지해야할 필요성을 확인했다. 짜르가 의회 해산 포고령에 이미 서명한 후에도 의회의 위원회는 식량문제를 시 당국에 넘기는 문제를 아직도 서둘러 고려하고 있었다. 방위군 대대들의 봉기가 있기 12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 슬라브족 상호원조회는 모임에서 연례보고서를 평화롭게 듣고 있었다. 어느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모임이 끝난 후 걸어서 귀가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생기가 넘치던 거리가 무서운 침묵과 공허감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무서운 침묵과 공허감은 구 지배계급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력을 계승할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마음도 함께 짓누르고 있었다.
26일이 되자 혁명운동의 심각성은 정부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명백해졌다. 이날 내각의 장관들과 의원들은 혁명운동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유주의자들은 이 논의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프로토포포프의 증언에 의하면 의회 동맹의 지도자들은 인민의 신뢰를 누리고 있는 인물들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전과 마찬가지로 요구했다: “이 조치는 아마 인민을 진정시킬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26일에 혁명의 전진은 일시 정지되었고 잠시 정부는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느꼈다.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 골리친을 방문하여 그의 사임을 설득했다. 그러자 수상은 니콜라스 2세의 서명은 있으나 날짜는 적혀져 있지 않은 의회해산 포고령 문서 서류철을 가리켰다. 이 문서에 그는 날짜를 적어 넣어 포고령을 발효시켰다. 혁명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지배 관료들은 오래 전에 이미 확고한 답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동맹을 형성하고 말고는 노동자 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이 운동을 다른 수단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내무부가 이 운동을 통제해왔다.” 이것은 1915년 고레미킨이 한 말이었다. 의회해산 조치에 대해 의원들이 조금이라도 대담하게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정부 관료들은 믿고 있었다. 다시 1915년 8월로 돌아가자. 불만을 품은 의회를 해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내무장관 쉐르바토프공(公)은 이렇게 말했었다: “의회는 의회해산 조치를 즉각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의원들 절대다수는 겁쟁이들이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벌벌 떠는 놈들에 불과하다.” 이것은 내무장관의 점잔하지 못한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어쨌든 올바른 말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진영의 반대에 대해 관료들은 자기들의 입지가 대단히 확고하다고 느꼈다.
27일 아침이 되자 운동이 다시 상승했다. 의회는 놀란 가운데 정기 회기를 열고 있었다. 의원들 다수는 이때서야 의회가 이미 해산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전날에 장관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더욱 놀랍게 받아들여졌다. 로지안코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의회는 법에 복종했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돌파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산하지 않거나 불법적인 회기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의원들은 개인적인 회합에서 서로의 무기력을 고백했다. 온건파 자유주의자 쉬들로프스키는 이후 악의에 찬 즐거움으로 이렇게 기억했다: 케렌스키의 동료가 될 극좌파 입헌민주당 당원 네크라소프는 “군사독재를 수립하여 전권을 인민 일반에게 양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의회의 개인적 회합에 불참한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상황을 타개할 실제적 방안을 시도했다. 이들은 뻬쩨르부르그에 미하일 대공을 불러 이렇게 제안했다: 대공이 직접 독재체제를 수립하여 정부의 개인용 직원들의 사임을 “강제하고” 전보를 보내 짜르에게 책임 내각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라. 방위군 연대들의 봉기가 처음 시작되고 있을 시간에 자유부르주아들은 왕조 독재자의 도움으로 봉기를 진압하려는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시에 혁명을 희생시키면서 왕정과 합의하려고 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불평하고 있다: “대공의 주저 때문에 유리한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
급진 지식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대단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속성이 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정치적 역할을 맡기 시작한 비당원 사회주의자 수하노프의 증언이 이 속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상당한 분량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그 잊을 수 없는 날 아침에 발생한 정치 소식의 기본 내용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의회해산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의회는 해산을 거부하고 임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이것이 타우리데 궁전을 거의 떠나지 않고 의원 친구들과 계속 길게 대화를 나눈 수하노프의 증언이다. 밀류코프도 자신이 저술한 혁명사에서 로지안코에 뒤이어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의원들은 연설을 통해 차례로 의회 해산을 열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의회가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국가기구로서 ‘해산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은 전해진 얘기와는 달리 채택되지 않았다.”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늦었어도 의회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일에 대해 손을 털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수하노프가 전해진 말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믿은 것은 정상을 참작하면 이해가 된다. 짜르의 포고령에 굴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혁명적 결의문을 의회가 채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의회 출입 기자들에 의해 급히 소식지에 실렸다. 이 소식지는 당시 총파업 때문에 유일하게 인쇄되어 유포된 신문이었다. 봉기가 그날 승리했기 때문에 의원들은 오류를 서둘러 정정할 이유가 없었다. “좌익”친구들의 환상을 유지시킬 의향이 의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실 국외로 추방될 때까지 이 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화는 부차적이지만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2월 27일 의회의 혁명적 역할은 진짜 신화에 불과했다. 급진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해 환희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사태를 끝까지 해결할 능력이 대중에게 있다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에게 될 수 있으면 재빨리 기대려는 열성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 일화는 무엇이든지 쉽게 믿어버리는 급진 지식인의 정치적 속성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의회 다수파 의원들의 회고록에는 의회가 혁명을 맞이한 방식이 보존되어 있다. 입헌민주당 우파에 속하는 만시레프공의 이야기에 의하면 27일 아침 의회에 모인 많은 의원들 가운데 최고회의 의원, 정당 지도자,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소위 의회 지도자들은 의회 해산과 봉기의 승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가능하면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들은 미하일 대공과 함께 독재체제 수립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만시레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탄식과 당혹감이 의회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생기 있는 대화도 사라졌다. 의원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쉬고 ‘올 것이 왔군’ 등의 짤막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진짜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이 의원들 가운데 한숨 소리가 가장 컸던 이 대단히 온건한 의원의 고백이다. 오후 2시에 지도자들이 의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최고회의의 서기가 즐거운 그러나 근거가 없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소요는 곧 진압될 것입니다. 조치들이 이미 취해졌기 때문입니다.” “조치들”이란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협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회는 의기소침했으며 진보연합 지도자의 말을 기다렸다. 밀류코프는 선언했다: “지금은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소요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군대, 노동자, 사회조직들이 어느 편에 가담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상황 판단을 위한 시간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이릅니다.” 2월 27일 오후 2시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은 손을 털고 투쟁의 결과를 기다리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연설을 아직 끝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끝낼 생각이 없이 무슨 일이든지 시작했다. 이때 케렌스키가 아주 흥분해서 의사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엄청난 수의 인민과 병사들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몰려오고 있으며 이들은 의회의 정권 장악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정권을 장악하라니! 이 급진파 의원은 엄청난 수의 인민이 바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사실 봉기가 진압되었으면 하고 내심 희망하고 있는 의회에게 정권 장악을 맨 처음 요구한 사람은 바로 케렌스키 자신이었다. 케렌스키의 말에 “의원들 모두 당혹감과 실망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놀란 표정의 의회 직원이 뛰어들어와 그의 말을 가로챈다: 병사의 선발대가 이미 궁전에 도착했으며 이들을 입구에서 보초들이 막았으나 보초 대장은 크게 부상을 당한 것 같다. 이로부터 일분 후 병사들이 궁전에 들어섰다. 병사들이 의회에 인사하기 위해 그리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왔다고 나중에 연설과 기사들이 선언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모든 의원들은 극도의 공포심에 가득하다. 이들은 곧 익사할 것 같다. 지도자들은 서로 귓속말을 나눈다. 우리는 숨쉴 틈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그에게 제안한 그대로 로지안코는 서둘러서 임시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이에 동조하는 고함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의사당을 될 수 있으면 빨리 빠져나가기를 원한다. 표결에 부칠 시간이 없다. 다른 의원들만큼 놀란 의장 로지안코는 위원회 구성 문제를 원로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제안한다. 아직도 의사당에 남아 있는 의원들 몇몇이 한번 더 고함을 질러 동의를 표한다. 대다수 의원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짜르에 의해 해산 당한 의회가 봉기의 승리에 대해 보인 첫 번째 반응이 이것이었다.
이때 혁명은 같은 건물의 덜 화려한 곳에서 또 다른 기관을 수립하고 있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이 기관을 발명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 소비에트의 경험은 영원히 노동자의 의식 속에 새겨져 있었다. 전시에조차 운동이 상승하면 언제나 소비에트 사상은 자동적으로 부활했다.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달랐고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에 대해 일관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 형태는 모두에게 논란의 여지없이 명확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멘세비키들은 군사산업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서 우파를 포함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 멘세비키 의원단의 지도자 체이드제와 스코벨레프 등을 만났다. 그리고 곧바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임시집행위원회는 이날 하루동안 주로 과거 혁명가들로 위원들이 채워졌다. 이들은 대중적 기반이 없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볼세비키들도 포함된 집행위원회는 노동자들에게 즉시 대표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저녁 타우리데 궁전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밤 9시에 소집되어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승인했다.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의 공식 대표들로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보강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승리한 노동계급의 대표들이 개최한 첫 회의의 의의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서 반란을 일으킨 연대의 대표들이 인사차 연설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완전한 백발의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봉기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듯 혓바닥을 제대로 놀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웅변가도 찾아낼 수 없는 말을 찾아냈다. 이들의 연설은 혁명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에 속했다. 혁명은 이제 처음으로 자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자기가 불러일으킨 수많은 대중을 느꼈으며 앞으로 성취해야할 장엄한 임무와 성공의 자부심을 자각했다. 오늘보다 더 아름다울 내일에 대한 생각으로 혁명은 심장이 멈출 정도로 즐거워했다. 혁명은 아직 자기에게 맞는 의례를 갖추지 못했다. 거리는 연기로 덮여 있었으며 대중은 새 혁명가요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회의는 마치 홍수를 만난 강처럼 질서 없이 계속되었다. 소비에트는 자신에 대한 열정 속에 목이 막혔다. 혁명은 막강했으나 아직은 어린애처럼 순진했다.
첫 회의는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주둔군 병사들과 노동자들을 통합시키기로 결정했다. 누가 먼저 이 결의안을 제안했는가?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노동자와 병사의 형제애가 메아리로 울려 여러 곳 또는 모든 곳에서 이 결의안이 나왔을 것이다. 수립된 순간부터 소비에트는 집행위원회를 통해 주권기관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임시식량위원회를 선출하여 반란군 병사들과 일반 주둔군의 식량을 책임을 지도록 한다. 그리고 함께 활동할 임시혁명지도부를 조직한다. 당시에는 모든 것에 임시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구 권력기관의 관료들로부터 재정을 분리시키기 위해 소비에트는 중앙은행, 재무부, 조폐공사, 인쇄청 등을 혁명 방위군을 통해 접수하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의 임무와 기능은 대중의 압력을 받아 끊임없이 증대한다. 이제 소비에트는 의심의 여지없는 혁명의 중심부이다. 지금부터 노동자, 병사 그리고 곧이어 농민들도 오직 소비에트에만 의존한다. 이들의 눈에 소비에트는 모든 희망과 권위의 초점이 되어 혁명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유산 지배계급들은 분해서 이를 갈면서도 분쟁 해결을 위해 보호와 조언을 소비에트에서 구할 것이다.
승리의 첫 기간에 새로운 혁명 권력은 대단한 속도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스스로를 수립시킨다. 그러나 이때 소비에트의 정점에 선 사회주의자들은 진짜 자기들의 “상전”을 찾기 위해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본다. 이들은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체제의 정치적 난관이 존재했다: 권력의 끈 하나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방으로 또 하나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본부로 연결되어 있었다.
승리가 수도에서 완전히 확보된 오후 3시에 의회의 원로위원회는 진보연합 소속 정당들, 체이드제, 케렌스키 등으로 구성된 “의원 임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체이드제는 사양했고 케렌스키는 몸을 꼬았다. 이 인선은 이 위원회가 의회 공식기구가 아니라 사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신중하게 표현했다.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마지막까지 한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책임을 회피하고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이 위원회의 임무는 모호한 내용으로 아주 면밀히 규정되었다: “질서를 회복시키고 기관 및 인사들과 협상을 진행한다.” 이들이 회복시키려는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기관들과 협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곰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곰이 죽지 않고 크게 부상만 입고 있다가 우리를 갑자기 물어뜯으면 어쩐다? 밀류코프가 인정했듯이 27일 밤 11시가 되어서야 “혁명운동의 범위 전체가 명확해졌다. 임시위원회는 이후 취할 조치들을 결정했다. 그리고 짜르 정부의 손에서 떨어진 권력을 자기 손으로 잡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도 의원 위원회에서 의회 위원회로 바뀌었다. 공문서 위조야말로 나라의 합법적 승계를 가장 잘 보장한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한가지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이날 수립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의회 임시위원회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의회임시위원회 회의에 나타나 의회가 권력을 접수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 우정어린 압력은 효과를 발휘했다. 곧 밀류코프는 의회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설명했다: 정부(즉 의회위원회)는 짜르에 충성하는 군대를 봉기 부대들에게 보내 “수도의 거리에서 실제 전투에 돌입하겠다고 위협했다.” 실제로 정부에게는 군대가 없었으며 혁명은 이미 완료된 후였다. 나중에 로지안코는 자기들이 권력을 사양했을 경우 “의원들은 체포되어 반란군에 의해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살해되었을 것이며 권력은 즉시 볼세비키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물론 이 말은 궁내장관이자 의회 의장님의 존엄한 인품에 전적으로 어울리는 부적절한 과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의회의 정서를 오차 없이 반영하고 있다. 강권으로 권력을 장악할 경우 의회는 자기가 정치적 강간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결정은 쉽게 나지 않았다. 특히 로지안코는 호통을 치면서도 동요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시했다: “이것은 반란인가 아닌가?” 왕당파 의원 슐긴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반란은 전혀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권력을 접수하십시요...짜르의 장관들이 도망쳤다면 누군가가 이들을 대신해야합니다...두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진정된다 --- 짜르가 새로운 내각을 임명한다, 우리는 그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아니면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가 권력을 잡지 않으면 이미 공장에서 후레자식들을 선출한 다른 놈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다....” 반동 신사가 노동자들에게 퍼붓는 저질 비방에 대해 화를 낼 필요는 없다: 혁명은 이미 이 신사들 전부의 꼬리를 발로 꽉 밟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만약 왕정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왕정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에 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혁명을 약탈할 것이다.
회의는 오래 지속되었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결정을 근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밀류코프가 로지안코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비에트 대표들에게 접근한 후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결정이 났다, 우리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수하노프는 열광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듯이 나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연의 변덕에 완전히 몸을 맡긴 채 혁명의 소나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혁명의 배가 무시무시한 폭풍과 배의 심한 요동 가운데에서도 돛을 올리고 안정과 정상을 되찾았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노예처럼 의존하는 현상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치고는 대단히 화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말은 치명적인 정치적 전망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권력 장악이 국가라는 배에 안정성을 부여할 리가 없다. 반대로 그 순간부터 혁명 지도부의 부재, 엄청난 혼란, 대중의 배신감, 전선의 붕괴, 이후 내전의 극단적인 원한 등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의 원천이 될 것이었다.
과거를 살펴보면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긴 현상은 아주 규칙적으로 반복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모든 혁명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쪽은 노동자, 도제 그리고 부분적으로 학생들이었으며 병사들은 이들 편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혁명 직후 탄탄한 부르주아 계급은 창문을 통해 아래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조심스럽게 주시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은 과거 혁명들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비교할 수 없이 수준이 높은 혁명의 사회적 성격과 혁명 계급의 정치수준, 봉기 대중의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대적인 불신, 승리의 순간에 곧이어 대중의 무력에 기초해 수립된 새로운 혁명 권력기관인 소비에트 등은 이 혁명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이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무력도 갖추지 못한 자유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간 현상은 설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혁명에 의해 조성된 계급 역관계를 좀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자기가 무너뜨린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대부르주아 계급에게 이 권력을 넘기도록 객관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계급은 혁명이 자기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혁명으로 자기에게 넘어온 권력이 자기의 사회적 존재를 치명적으로 위협할 것으로 예상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온건 정당들은 혁명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워했다. 특히 인민의 자유당 즉 ‘입헌민주당’은 온건 정치그룹의 좌파이며 따라서 어느 정당보다 혁명정당들과 접촉면을 많이 유지했다. 그런데도 입헌민주당은 다가올 혁명의 재앙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다.” 1905년의 경험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게 너무도 인상 깊게 이렇게 암시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승리는 왕정과 부르주아 계급에게 똑같이 위험하다. 2월 봉기의 과정은 이 예상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당시 혁명 대중의 정치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로대중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경계선은 이 봉기를 통해 화해할 수 없이 그어졌다.
대학강사 스탄케비치는 진보연합의 우군이었으므로 자유주의 진영과 가까웠다. 자신들이 저지하는데 실패한 혁명 이튿날 자유주의자들의 정서를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축하하고 혁명에 찬사를 보냈으며 자유 투사들에게 ‘만세’를 불렀으며 자기들도 붉은 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붉은 깃발 아래 행진했다....그러나 이들의 영혼 속에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대화에서 이들은 공포심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미지의 길을 가는 적대 분자들의 포로가 된 것처럼 느꼈다. 뚱뚱하고 풍채가 좋은 로지안코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웅장한 품위를 보존했으나 그는 창백한 얼굴에 굳어진 표정으로 깊은 고통을 담은 절망감을 드러냈다. 이 표정으로 그는 단정치 못한 병사들 사이로 타우리데 궁전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짜르 정부와의 투쟁에서 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이 궁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제로 의회는 혁명 첫날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의회 임시위원회의 모든 의원들과 그 주위의 인물들도 로지안코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진보연합의 대표들이 자기 집에 틀어박혀 무기력한 절망감에 소리내어 울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살아있는 증언은 계급 역관계에 대한 어떤 사회과학적 연구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이름 없는 병사들이 “누구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구체제의 관료들을 체포하여 의회로 데리고 오자 로지안코 자신은 무기력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고 자백했다. 이 궁내장관이자 의회 의장은 자신과 견해는 당연히 다르지만 어쨌든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감시하는 감옥의 간수와 같았다. 이 “자의적인” 체포 행위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체포된 장관 쉐글로비토프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러나 병사들은 증오의 대상인 이 관료를 그에게 넘기는 것을 거칠게 거부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권위를 보이려 하자 병사들은 이 포로를 둘러싼 후 대단히 도전적이며 무례한 표정으로 자기들이 손에 든 소총을 가리켰다. 그리고 곧 이들은 쉐글로비토프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의회를 지지한다고 궁전에 온 연대들이 실제로는 의회를 폐지시켰다고 스탄케비치는 주장한 바 있었다. 로지안코의 증언은 그의 주장을 가장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이 점은 누구보다 의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진보연합의 지도자이자 10월당 의원인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체국, 전신국, 무선국, 뻬쩨르부르그의 모든 기차역, 모든 인쇄소 등을 소비에트가 장악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허가 없이는 전보를 보내고 뻬쩨르부르그를 떠나고 호소문을 인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계급 역관계에 대한 이 의문의 여지없는 묘사에 하나의 사소한 교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가 전신국, 기차역, 인쇄소 등을 “장악”한 것은 이곳의 노동자와 직원들이 소비에트의 지시만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와 의회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이 절정에 다다랐다. 이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은 쉬들로프스키의 탄식을 아주 잘 설명한다. 짜르의 전용기차가 여기 저기를 방황한 후 프스코프에 정지했다. 이에 대한 통지문이 도착하여 이들의 합동회의는 중단되었다. 이 통지문은 로지안코에게 전보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전능한 의회 의장은 혼자서 전신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기 있는 병사와 노동자 대표들이 호위대를 붙여주거나 나와 함께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신국에서 나는 체포될 것이다. 당신들이 권력과 주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당신들은 나를 체포할 수 있다...어쩌면 당신들이 우리 모두를 체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로지안코가 대표로 있는 의회 임시위원회가 권력을 “접수”한지 24시간도 채 안된 3월 1일에 이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의 주인이 되었을까? 이들은 혁명을 두려워했고 혁명에 저항했으며 혁명을 진압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들에게 완벽히 적대적인 대중이 대단한 과감성과 단호함으로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봉기의 승리로 탄생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의문의 여지없이 인정하는 정세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어떻게 정부를 구성했는가?
이제 권력을 넘겨준 쪽의 얘기를 들어보자. 2월 정세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았다. 이들은 의회를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운동의 중심으로 삼는데 관심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수하노프 자신은 모든 힘을 쏟아 의회 위원회가 권력을 접수하도록 애를 썼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이 증언은 놀라울 따름이다. 3월 1일의 협상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부르주아 정부에 넘기거나 넘기지 않을 재량을 완벽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밀류코프는 확실히 이해했다.” 이 말보다 더 단도직입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말보다 정세를 더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그런데도 수하노프는 당시 객관적인 상황과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로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부르주아 권력만이 짜르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우리는 이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봉기는 실패하고 혁명은 붕괴할 것이다.” 로지안코 없이는 혁명이 붕괴한다!
사회세력의 살아있는 관계는 여기서 선험적인 도식과 판에 박힌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이 구사하는 교조주의의 정수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교조주의는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이것은 눈가리개를 한 채 아주 현실적인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
지금까지 수하노프의 말을 인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수립된 직후 이 기관에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은 집행위원회 의장 체이드제가 아니라 바로 이 수하노프였기 때문이다. 체이드제는 정직하고 시야가 편협한 시골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일반적으로 혁명 지도자의 자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半)인민주의자, 반(半)맑스주의자, 정치인이기보다는 진솔한 관찰자, 혁명가이기보다는 기자, 기자이기보다는 합리화를 좋아하는 그는 혁명사상을 지지할 능력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혁명사상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만 지지했다. 그는 전시에는 수동적인 국제주의자였다. 그리고 혁명 바로 첫날에 가능하면 빨리 권력과 전쟁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길 필요가 있다고 결심했다. 최소한 논리적으로 정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점에서 그는 이론가였다. 이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이 그에게는 물론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론가로서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최고의 능력은 대단히 다채롭지만 동질적인 우애조합의 본성들(자기 능력에 대한 불신, 대중에 대한 두려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을 교조주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 있었다. 레닌은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부르주아 계급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 수하노프이다. 이 묘사는 그에 대해 베풀 수 있는 최상의 찬사였다.
여기서 소부르주아의 새로운 유형이 문제로 제기된다. 공업, 상업, 은행의 직원들처럼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기능인들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 조직의 관료들을 또 한편으로 하는 신중간 계층이 등장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민주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지난 세기말에 이 계층의 이름으로 맑스의 혁명사상을 수정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어떻게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었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정치 고리에 중간 고리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즉 수하노프 유형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신중간 계층의 기자와 정치인들이 바로 이 중간고리이다. 이들은 대중에게 부르주아 계급이 적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중을 이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이들은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이 혁명의 성격(노동자 혁명)과 이 혁명이 탄생시킨 권력의 성격(부르주아 권력) 사이의 모순은 혁명 대중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 장벽을 형성하는 이 신중간 소부르주아 계층의 모순적 성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세가 계속 전개되면서 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유형이 담당하는 정치적 역할이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은 이 유형에 대해 몇 마디만 말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혁명 계급의 소수만이 봉기에 참여한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 또는 최소한 공감을 통해 이 소수의 힘이 나온다. 적의 공격에 맞서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소수는 좀더 혁명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들을 배출한다. 따라서 2월 투쟁에서 노동자 출신 볼세비키들이 선두에 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승리가 확보되고 승리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하는 순간 상황이 바뀐다. 승리한 혁명의 조직과 기관을 운영할 지도부의 선거는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운 소수보다 훨씬 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이고 이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제시한다. 시의회나 도의회 또는 나중에 제헌의회와 같은 일반 민주주의 기관 뿐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계급 기관에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절대다수의 노동자, 멘세비키, 사회혁명당, 무당파 대중 등은 볼세비키가 짜르 체제와 직접 투쟁할 당시 이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 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동시에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의 선을 그었다. 이 사실은 혁명이 승리한 후의 정치상황을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짜르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대표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3개 사회주의 정당들의 차이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모든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지식인들 때문에 볼세비키당보다 지식인을 훨씬 더 많이 보유했다. 따라서 이 두 정당은 즉시 엄청난 수의 선동가 집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정당들은 심지어 작업장과 공장 선거에서조차 절대 다수당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정치적으로 막 각성하고 있던 군대에 의해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동력이 제공되었다. 봉기 5일째에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노동자들을 따랐다. 혁명이 승리한 후 군대는 소비에트 선거를 실시했다. 병사들은 짜르를 지지하는 장교들에 반대하여 혁명을 지지하고 이 입장을 크게 외칠 수 있는 인물들을 신뢰하고 대표로 선출했다. 이들은 자원 입대 병사, 서기, 외과의사 조수, 지식인 출신의 젊은 장교, 군대의 하급 관료 등으로 신중간 계층의 최하층 부위였다. 이들 거의 전부는 3월에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 이들의 중간적인 사회적 위치와 제한된 정치적 시야는 사회혁명당의 지적 무정형성에 의해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주둔군의 소비에트 대표들은 병사 대중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온건하고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러나 병사 대중은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앞으로 전개될 혁명의 몇 개월 동안 이 차이점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한편 노동자들은 피로 결성한 노동조합을 강화하고 좀더 영구적으로 혁명을 무장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병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반정도 밖에 성숙하지 않은 사회혁명당원들이 병사 소비에트 대표들의 압도적 다수였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혁명당과 이 정당의 동맹인 멘세비키당의 권위를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상승시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두 화해주의 정당들은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심지어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 소비에트에서도 초기의 주도권은 노동자 멘세비키 당원들에게 있었다. 이 당시 볼세비키당은 혁명의 심연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도 볼세비키 당원들은 영향력이 없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명확히 설정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2월 혁명의 역설이 초래되었다. 권력은 (부르주아)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들은 블랑끼 식의 소수 정예 쿠데타로 우연히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으며 승리한 혁명 대중이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권력을 넘겨주었다.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 귀족, 관료들을 구별하지도 못했다. 대중은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소비에트에만 맡겼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너무 쉽게 소비에트를 장악했기 때문에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대중의 증오를 받고 있으며 혁명에 철저히 적대적인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넘겨받을 것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강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강령을 포기해야만 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이라는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왕정, 전쟁, 토지 등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계속 부르주아 계급을 자기 계급의 적이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의 예배에 순전히 불경(不敬)스러운 행위가 도입되었다. 계급투쟁은 결론적으로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이다. 혁명의 기본 성격은 계급투쟁을 결론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혁명은 권력 장악을 위한 직접적 투쟁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이 없으며 자기 힘으로 권력을 잡을 능력이 없는 적대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반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권력을 이 적대 계급이 갖도록 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정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상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1918년 독일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류는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주도한 “신중간 계층”의 거대하고 좀더 성공적인 배신 행위를 아직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화해주의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교조적으로 설명했다: 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스스로 타락해서는 안된다 --- 부르주아 계급이 책임을 지고 권력을 갖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아주 단호한 논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실제로 소부르주아 계급은 재산, 교육, 참정권을 획득한 시민 권력에 대한 자신의 아부를 위장하기 위해 이 거짓 단호함을 사용했다. 대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에 대한 권리를 소부르주아 계급은 계급 역관계와는 무관한 장자상속권으로 인정했다. 소상인이나 교사는 기차역이나 극장에서 대부르주아 로쓰차일드 가문의 사람이 지나가면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길옆으로 물러선다. 이 본능적인 동작과 기본적으로 거의 같은 경우가 러시아에서도 연출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 교조적인 주장은 소부르주아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식을 보상해 주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기에게 배달된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두 달 후에 명백해졌다. 그러자 화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주의적) “사회주의적” 편견을 던져버리고 부르주아와 함께 하는 연립내각에 손쉽게 참여했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구해주기 위한 행위였다. 이 행위는 부르주아 계급의 의지에 반해서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요구에 응해서 이루어졌다. 부르주아 계급은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권력을 손에서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했다.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거부하는 두 번째 주장 역시 첫 번째 주장만큼이나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다만 좀더 실제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다. 우리의 친구 수하노프는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의 “분산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안정적인 또는 영향력이 있는 직종별 또는 자치도시 조직이나 정당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농담처럼 들린다!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회주의자 수하노프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1905년의 경험 덕분에 소비에트는 마치 땅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갑자기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기관과 경쟁하기 위해 나중에 등장한 조직들(시 자치정부, 협동조합 그리고 부분적으로 노동조합)보다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속성상 분산적인 농민은 과거 어떤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전쟁은 농민을 군대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혁명은 군대에게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다! 자그마치 8백만 농민이 중대와 대대로 단합되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즉시 혁명 정신으로 대표들을 선출하고 전화 한 통화로 투쟁에 동원될 수 있었다. 이것이 “분산성”이란 말인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군대의 태도를 민주주의자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전선의 병사들이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권력을 준비하기 위해 무대 뒤쪽에서 보낸 혁명 승리 후 이틀 또는 삼일 동안 이 문제는 완전히 결정되었다. 즉 군대 전체가 소비에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수하노프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3월 3일경에 혁명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모든 힘을 다해 권력을 자유주의자들 쪽으로 밀어보냈다. 이들은 권력이 자신들의 손에 집중되면 될수록 그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왜 그랬는가? 어떻게 이 민주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두려워할 수 있었는가? 이들은 역사상 어떤 민주주의도 누리지 못한 대중의 직접적 지지를 누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더욱이 이 대중은 상당한 경험, 규율, 무기 등을 보유했고 소비에트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이 전능하고 겉으로 보기에 정복될 수 없는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두려워할 수 있었는가? 이 겉으로 보기에 복잡한 수수께끼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중을 신뢰하기는커녕 두려워했다; 자신에게 보인 대중의 정치적 신뢰가 안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소위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다; 즉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세의 허수아비에 불과함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민주주의자들은 자기의 촉수가 대중에게 향해있었기 때문에 인민 봉기의 순간에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질서의 좌파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 이 민주주의자들은 자기의 진짜 역할을 대중 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숨기려 했다. 그래서 자칭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이 진짜 사회주의자인 것처럼 생각했다. 이 자기도취가 없었다면 이들은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3월 1일 저녁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대표들인 체이드제, 스테클로프, 수하노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은 새 정부를 지지할 조건들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 임시위원회 회의에 모습을 나타냈다. 민주주의자들은 전쟁, 공화제, 토지, 8시간 노동일 등의 강령적 문제들을 간단히 무시하고 단 하나만 요구했다: 좌익 정당들에게 선동의 자유를 부여하라. 이 요구는 모든 인민과 시대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자기 손에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선동의 자유를 누구에게든 부여할 수 있는 힘을 자기만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적대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주면서...선동의 자유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로지안코는 전신국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체이드제와 수하노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를 체포할 수 있다.” 그러자 체이드제와 수하노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권력을 가지세요. 다만 선동행위를 했다고 우리를 체포하지는 마세요.” 화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협상들과 일반적으로 당시 타우리데 궁전에서 벌어졌던 좌익과 우익의 상호관계의 일화들을 연구하면 이런 인상을 받는다: 인민의 역사극이 전개되는 거대한 무대에서 지방의 배우들이 무대 한쪽의 빈 구석을 이용하여 쉬는 시간을 틈타 주연 배우들의 옷을 재빨리 갈아입은 후 음악이 곁들여진 가벼운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정확히 평가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들은 사태가 이렇게 전개될 것을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혁명 지도자들의 노선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들은 혁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그런 경우에도 판단 착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혁명 지도자들과 같이 판단 착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권력을 거부할까 두려워 수하노프는 위협조의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우리 아니면 아무도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해결책은 한가지 밖에 없다 ---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라.”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당신들의 강령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약속한다; 우리에게 권력을 준 대중을 막아주겠다. 대세를 잘도 막는 인물들이다!
밀류코프는 깜짝 놀랐다. 수하노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만족감과 즐거운 놀라움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대표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것이 “최후”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밀류코프는 마음이 넓어져서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 1905년이래 이 나라 노동운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도 이 운동의 발전에 대해 생각을 해왔다...” 나중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때에도 독일 외교관은 밀류코프와 같은 성격 좋은 악어의 위선적 어조로 우크라이나 의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후자의 정치인다운 성숙함을 칭찬했다. 그리고 곧 이들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 이것은 밀류코프나 수하노프의 잘못이 아니다. 근로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한 부르주아 계급이 이들의 등뒤에서 권력을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함께 껍데기 뿐인 지지를 그나마 간접적으로 받았으니 어떻게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잡아먹을 수 있었겠는가. 대중에 의해 높이 떠받들어진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신임장을 전달했다. 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작동을 해부하면 이중의 선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중간 고리 즉 입헌민주당을 선출하는 기술적인 역할을 한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의 신임을 배신하여 대중의 적대 계급에게 권력 접수를 촉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더 깊이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하면 이 문제는 이렇게 설명된다: 일상적 상황에서 대단한 허세와 자기만족감을 과시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은 혁명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자 곧 자신들의 무능력을 무서워하여 서둘러서 권력을 자본의 대표들에게 넘겼다. 신중간 계층의 무한한 나약성 그리고 대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들의 모욕적 종속성이 이 굴종 행위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민주주의자들은 자기 손에 든 권력은 어쨌든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거나 막연히 느꼈다. 동시에 좌익이나 우익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거나 막연히 느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과격한 대표들에게 내일 권력을 넘겨주느니 지금 확고한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 객관적 사회적 조건의 관점에서 보면 화해주의자들의 심리와 행동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배신자라는 딱지를 결코 뗄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보낸 신뢰를 통해 노동자와 병사들은 예상치도 않게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거세시켰다. 이들은 당혹감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으나 당장 해결책이 나올 리 없었다. 배신자들은 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이들이 즉시 반박할 수 없으나 이들의 정서나 의도와 모순되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배신자들의 거짓주장으로 대중의 귀는 멍멍해졌다. 2월 혁명의 순간에도 대중의 혁명적 경향은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화해주의 경향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다. 노동계급과 농민은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을 화해주의자가 아니라 짜르, 자본가, 지주에 대한 반대자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표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 투표 행위를 통해 대중은 자신과 자신의 정치적 목표 사이에 분리의 장벽을 세웠다. 이제 이들은 스스로가 세워 올린 이 장벽을 붕괴시키지 않고는 한발도 전진할 수 없었다. 2월 혁명이 들춰낸 계급관계 속에는 바로 이 놀라운 가짜가 숨어 있었다.
이 근본적인 역설에 보충적인 역설이 즉시 부가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손에서 권력을 넘겨받겠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자기들 손에서 짜르가 권력을 되가져가겠다고 동의해야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당파 의원 슐긴은 구츠코프와 함께 짜르의 전용기차가 정지한 프스코프로 가서 로마노프 왕조를 구하는 입헌군주제를 협상한 적이 있었다. 이제 이 문제는 타우리데 궁전의 두 위원회 사이에서 중심 의제가 되었다.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그에게 온 민주주의자들에게 밀류코프는 로마노프 왕조가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조언했다: 물론 니콜라스 2세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황태자 알렉세이는 미하일 대공의 섭정을 거치면 나라의 복지를 충분히 보장할 군주가 될 수 있다. 이 주장을 민주주의자들에게 확신시키려고 밀류코프는 열심히 노력했다: “황태자는 병약한 아이이고 대공은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여기서 자유주의 왕당파 쉬들로프스키가 섭정이 될 미하일 대공을 묘사한 내용을 보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국사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경마에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다.” 이 권유의 말이 대중에게 반복된다면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바렌느로 도망했다. 그러자 혁명가 당통은 자코벵 클럽에서 마음이 여리면 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마음이 여리면 입헌군주제의 최적격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좌익” 얼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계산된 마구잡이 주장이었다. 또한 이 얼간이들에게 걸맞지 않는 약간 조야한 주장이었다. 자유주의 속물들의 넓은 바닥에서 미하일 대공이 “골수 친영국파”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가 경마에 대해서 그런지 아니면 의회체제에 대해서 그런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의 주요 논지는 “권력의 관습적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없다면 인민은 무정부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자 민주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경청하더니 정중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공화국 선포를 요구한다고? 아니다. 이 문제를 미리 결정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이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내세운 조건의 제 3항은 이렇다: “임시정부는 미래 정부의 형태를 규정할 어떤 조치도 미리 취하지 말아야 한다.” 밀류코프는 왕정을 최후통첩으로 제시했다. 이제 민주주의자들은 절망에 빠졌다. 이때 대중이 이들을 도와주었다. 타우리데 궁전의 회의에서 노동자 뿐 아니라 병사들 가운데 짜르의 존속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짜르를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 수단도 없었다. 그런데도 밀류코프는 대세를 거슬러 좌익 동맹세력의 머리 위에서 왕좌와 왕조를 구하려고 애썼다. 자신의 혁명사에서 그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3월 2일이 저물 무렵 미하일 대공의 섭정에 대한 나의 선언은 “상당히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자유주의자들의 군주제 유지 술수가 대중에게 미친 영향을 로지안코는 밀류코프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채색하고 있다. 구츠코프는 미하일 대공의 섭정을 위해 니콜라스 2세의 양위 포고령을 가지고 프스코프에 도착했다. 이 순간 그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기차역에서 철도 상점으로 걸어가서 그 동안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짜르의 양위 포고령을 낭독한 후 “미하일 황제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로지안코에 따르면 이 웅변가는 즉시 노동자들에 의해 체포된 후 처형 위협을 당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한 연대 소속 보초 중대의 도움으로 그는 아주 어렵게 구출되었다.” 로지안코는 언제나 약간 과장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은 제대로 묘사했다. 러시아는 너무도 과격하게 왕정을 토해내었기 때문에 이것이 인민의 목구멍 아래로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혁명 대중은 새로운 짜르를 생각도 못하게 막았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임시위원회 위원들은 하나 하나 미하일 대공의 섭정 제안을 피해갔다. 그리고 “제헌의회가 수립될 때까지”만 이 제안을 유보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후의 사태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밀류코프와 구츠코프만 끝까지 왕정을 고집하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입각 조건으로 계속 제시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밀류코프가 없는 부르주아 정부는 불가능하며 부르주아 정부가 없으면 혁명 권력은 다시 대중의 손아귀로 들어갈 것이라고 민주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말다툼과 설득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3월 3일 아침 회의에서 “대공이 하야하도록 설득”시키려는 확신이 임시위원회에서 완전히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대공을 벌써부터 짜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입헌민주당 좌파 네크라소프는 하야 문안을 작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밀류코프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자 열렬한 논쟁이 더 진행된 후 마침내 이렇게 결정되었다: “양측은 대공 앞에 각자의 견해를 제출한다. 다만 더 이상의 논쟁 없이 최종 결정은 대공에게 맡긴다.” 이렇게 해서 왕조의 법도에도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봉기에 의해 타도된 형에 뒤이어 왕좌에 오를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 예상치도 않게 혁명 국가의 형태 문제를 해결하는 초(超)심판관이 되었다.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사실은 어쩔 수 없다. 이제 국가의 운명을 놓고 도박판이 벌어졌다. 왕좌를 위해 마구간을 차고 나오도록 대공을 유인하려고 밀류코프는 그에게 이렇게 확신시켰다: 뻬쩨르부르그 외부에서 군대를 집결시키면 새로운 왕권을 방어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자마자 밀류코프는 왕당파 쿠데타를 계획으로 제시한 셈이었다. 자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적지 않은 찬반 의견들을 들은 후 대공은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로지안코를 다른 방으로 부른 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그의 왕관 뿐 아니라 목숨도 보장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이 궁내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과 함께 죽을 필요가 있을 때에만 약속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대공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로지안코와 포옹한 후 방을 나와 의원들을 만나자 미하일 로마노프는 “대단히 확고하게” 그에게 제시된 고상하지만 위험한 직위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때 협상 과정에서 민주주의 양심의 화신이었던 케렌스키는 의자에서 귀신에 홀린 것처럼 뛰어 올라 이렇게 말했다: “폐하, 폐하는 고상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맹세했다. 밀류코프는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논평한다: “케렌스키의 호언장담은 대공이 내린 결정의 무미건조한 산문과는 영 조화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이 막간극은 진정으로 어떤 정감을 느낄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고대 원형극장의 구석에서 공연된 가벼운 연극(vaudeville)을 앞에서 비유한 바 있다. 여기에 이렇게 덧붙일 필요가 있다: 무대가 헝겊 막으로 양분되었다; 한쪽에서는 혁명가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혁명을 구해달라고 구걸하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왕정에게 자유주의를 구해달라고 구걸하고 있다.
이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대표들은 진짜 당혹스러웠다: 교양이 있고 시야가 넓은 밀류코프가 낡아빠진 군주제를 완고하게 고집하다니; 더욱이 로마노프 가문의 누구를 왕으로 앉히지 않는다면 권력을 포기하겠다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밀류코프의 군주제 사상은 교조주의도 낭만도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공포에 떠는 유산계급의 노골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이 계산의 노골성에는 이 계산의 가망 없는 허약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 미라보의 예를 정말이지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라보 역시 혁명을 왕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미라보 역시 유산계급의 일원이었다. 그의 정치적 계산 역시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사유 재산을 상실할 두려움에 직면하여 그는 상황을 구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좀더 신중한 정책은 재산 소유를 군주제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마치 군주제가 자신을 교회로 위장한 것과 똑같았다. 1789년에 프랑스의 군주제 전통은 여전히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주위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왕정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왕정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과 공통의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인민의 편견을 인민의 이익에 대항시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여러 나라에서 왕정이 이미 폐지되었으며 러시아 왕정은 1905년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 후 가폰 신부는 짜르 그리고 그의 “뱀과 같은 자손들”을 저주했다. 1905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공개적으로 공화제를 위해 투쟁했다. 왕정은 오랫동안 농민의 왕당파적 정서에 의존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군주제 유지 사상을 농민의 왕당파적 정서로 위장했다. 그런데 이 정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코르닐로프를 필두로 등장한 반혁명 군부쿠데타는 비록 위선적이지만 그만큼 더 강력하게 짜르 권력을 부정했다. 인민 가운데에 왕당파의 뿌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은 왕정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 반면 또 한편으로 “선진” 부르주아 계급의 불안한 공화국 경향도 영원히 침몰시켰다. 서로 충돌한 이 두 과정은 서로를 보완했다. 2월 혁명의 첫 순간에 자신이 침몰하고 있다고 느낀 부르주아 계급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했다. 이 계급에게 군주제가 필요했던 것은 자신과 인민이 군주제에 대해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왕관을 쓴 허깨비 이외에 인민의 신념에 대항시킬 것이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교육받은” 계급들은 합리적 국가를 선언하는 세력이 아니라 봉건제도를 방어하는 세력으로 혁명의 각축장에 들어섰다. 인민이나 자기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자 이들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군주제를 버팀대로 삼았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받침대를 제공한다면 막대기를 가지고 지구를 움직이겠다. 밀류코프는 지주에 대한 토지몰수를 막기 위해 받침대를 찾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느꼈다: 자유주의자들의 승인을 구하는 데에 급급한 길들여진 민주주의자들보다 굳은살이 박힌 러시아의 장군들 그리고 정교회의 위계질서가 나에게 훨씬 더 가깝다. 혁명을 붕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재치 있게 혁명을 속이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그는 많은 것을 허용할 용의가 있었다: 병사들의 시민적 자유, 민주적 자치도시, 제헌의회.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들이 군주제라는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를 그에게 주어야만 한다. 장군들, 누더기를 기운 관료집단, 교회의 수장들, 재산 소유주들 그리고 혁명에 불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왕정이 서서히 수립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군주제의 상징”을 시작으로 삼은 후 대중이 혁명에 싫증을 내는 순간 왕당파의 재갈로 대중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만을 원했다. 입헌민주당의 다른 지도자 나보코프는 미하일 대공이 왕위을 받아들였다면 아주 유리한 고지가 점령되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설명했다: “전쟁 동안에나마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치명적인 의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2월과 10월 사이에 제헌의회 소집 날짜는 대단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입헌민주당은 제헌의회 소집을 지연시키고자 했다. 다만 겉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단호히 부인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제헌의회 소집 연기를 위한 정책을 끈질기고 완고하게 밀고 나갔다. 슬프게도 이들은 이 정책의 동맹세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의지할 것은 자기들뿐이었다. 왕정이라는 위장술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하일 대공이 왕정 유지 기도에 동참하지 않자 밀류코프는 지푸라기 하나도 잡을 수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뒤늦게 역사 무대에 등장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근로 인민과 단절되어 이들보다 외국 금융자본과 훨씬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승리한 혁명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혁명의 결과 성립한 권력을 차지할 정당성을 자기 이름으로는 조금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혁명은 기존의 상속권 뿐 아니라 새로운 권리 주장에 대해서도 철저히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시위원회 의장 로지안코는 대중에게 이 정당성을 강변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대중 봉기 며칠만에 벌써 혁명을 성취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어 대중 앞에 등장했다.
알렉산드로 2세의 시종, 기병 근위대 장교, 자기 고장 귀족들의 우두머리, 니콜라이 2세의 시종장 등을 지낸 그는 골수 왕당파, 부유한 지주, 농업 관료, 10월당(Octobrist Party) 당원, 의회(듀마) 의원이었다. 그리고 지배파벌에 의해 “청년터키당원”으로 낙인 찍혀 미운 살이 배긴 구츠코프가 의회 의장직을 사임하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로지안코 시종장을 통해 의회는 좀더 쉽게 짜르의 환심을 얻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사실 로지안코는 자기 역할을 해냈다. 그는 왕정에 대한 충성심이 모두에게 충만하다는 점을 짜르에게 확신시켰다. 그리고 왕위 계승자에게 알현할 명예를 구걸한 후 그에게 “러시아에서 체구가 가장 크고 뚱뚱한 인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권모술수에 가득한 온갖 광대 짓에도 불구하고 짜르가 헌법을 허용하게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황후는 자신의 편지에 로지안코를 불한당이라고 규정했다. 전쟁 중에 그는 당연히 짜르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보고를 할 때 짜르를 곤경에 몰아넣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지루한 권고, 애국 충정에 어린 비판, 비관적인 예언 등으로 그의 귀를 따갑게 한 적도 있었다. 라스푸틴은 로지안코를 적으로 간주했다. 조정의 패거리들과 가까웠던 쿠를로프는 로지안코의 “명백한 개인적 한계와 결합된 거만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테는 생색을 내듯이 그에 대해 좋게 말했다: “어리석기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재능은 그의 지성이 아니라 목소리에 있다 --- 그는 빼어난 저음을 지니고 있다.” 맨 처음 로지안코는 소방호스로 혁명의 불을 끄려했다. 골리친 백작의 정부가 도망하자 눈물을 짰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그에게 정부를 이끌 것을 제의하자 처음에는 공포에 질려 사양했으나 나중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것도 짜르의 충성스런 신하로서 군주의 잃어버린 개인 재산을 될 수 있으면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서 뿐이었다. 물론 이 기회가 결코 오지 않은 것은 로지안코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반란군 앞에서 천둥 같은 자신의 저음을 발휘할 큰 기회가 그에게 제공되었다. 이미 2월 27일 근위대 대위 출신인 로지안코는 타우리데궁에 도착한 기병 연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전사들이여 나의 충고를 듣거라. 나는 노인이므로 여러분들을 속이지 않는다. 여러분 장교들의 지시에 따라라.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의회와 완전히 합의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성스러운 러시아 만세!” 이것은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불쾌하지 않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런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지안코는 병사들과 노동자들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체이제와 기타 소비에트 대의원들을 독일의 첩자로 간주했다. 그리고 혁명의 선두에 서있는 동안 몇 분에 한번씩 소비에트가 자기를 체포하지 않을까 계속 두리번거렸다.
로지안코는 약간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우연한 현상은 결코 아니었다. 빼어난 저음을 가진 이 시종장은 러시아의 두 지배계급인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진보적 사제 집단이 하나로 결합된 인물이었다. 그는 아주 독실한 신자였으며 찬송가를 부르는 데에는 전문가였다. 그리고 자유 부르주아 계급은 그리스정교회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든 교회와의 연합이 왕정과의 연합만큼 법과 질서 유지에 똑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음모자, 반란군, 폭군 살해자 등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존경스러운 왕당파 로지안코는 당시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임시위원회의 다른 인물들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타우리데궁에 모습을 한번도 나타내지 않았다. 상황이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 아주 지혜로운 자들은 혁명의 불길 주위를 발끝으로 조용히 걸어다녔다. 연기에 목이 맨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불길이 타 타서 가라앉으면 뭔가를 시도해 보아야지. 권력 접수에 동의하면서도 임시위원회는 내각을 금방 구성하지는 않았다. 밀류코프의 말대로 “정부 구성의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위원회는 주요 정부 부처를 책임질 장관직에 의원들을 임명하는 것으로 활동을 제한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후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내무장관에 카롤로프를 임명했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나마 용기가 좀더 있었기 때문에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3월 1일 그는 공개경찰, 비밀경찰, 정치경찰에 속한 모든 경찰 간부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나운 혁명적 몸짓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경찰관들은 혁명 대중에 의해 이미 체포되고 있었으며 감옥이 학살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기 때문이었다. 이 과시하는 듯한 내무장관의 조치를 반동 세력이 자신들의 고난의 첫걸음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 사령관에는 엥겔하트 대령이 임명되었다. 그는 기병 근위대 장교 출신으로 경주마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짜르의 지시에 따라 전선에서 군대를 끌고 수도를 평정하기 위해 도착한 “독재자” 이바노프를 엥겔하트는 체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참모장으로 반동 장교를 앉혔다. 이것은 모두 친구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법무장관는 모스크바 자유주의 법조계의 스타 마클라코프가 임명되었다. 웅변 능력이 있으나 속이 텅 빈 그는 반동 관료들에게 자신이 혁명 덕분에 장관직에 임명된 것이 아님을 맨 먼저 주지시켰다. 그리고 “집무실에 바로 도착한 심부름꾼 소년을 흘끗 보며” 그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위험은 왼쪽에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노동자와 병사들이 구태여 프랑스어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임시위원회 수반으로 로지안코가 저음을 발휘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 정부의 수반이 될 후보 자격은 그로부터 저절로 소멸되었다. 왕정과 유산계급 사이의 중재를 맡은 사람은 유산자와 혁명 사이의 중재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대항 구심으로 의회를 살리려고 그는 끈질기게 애를 썼다. 그리고 자본가-지주의 반혁명 동맹을 결집시키려는 모든 시도의 중심에 그는 언제나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들은 그의 이름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3월 1일 임시위원회는 내각 구성을 착수했다. 내각은 의회가 1915년 이후 나라의 신임을 누리는 인물들이라고 짜르에게 천거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지주, 실업가, 의회의 야당 의원, 진보 블록의 지도자 등이었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와 병사들이 성취한 혁명은 혁명정부의 내각 구성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는 케렌스키였다. 로지안코와 케렌스키는 공식적으로는 2월 혁명의 정치 스펙트럼 전부를 양극에서 포괄한 것처럼 보였다.
케렌스키는 어느 정도 혁명 전권 대사의 성격을 띠고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지방 출신 변호사로서 정치 사건들을 변호했다는 것이 그가 혁명과 맺고 있던 관련의 전부였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혁명 주위를 어슬렁거렸을 뿐이었다. 법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4차 의회에 진입한 케렌스키는 트루도비키(Trudoviks)라는 흐릿한 특징 없는 의회 분파의 수장이 되었다. 이 분파는 자유주의와 인민주의의 잡종 교배로 결실을 맺은 영양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는 이론적 준비나 정치훈련을 거치지 못했다. 사고 능력과 정치적 의지도 없었다. 이것 대신 예민한 감성, 불같은 성질, 지성이나 의지보다 신경을 자극하는 웅변술 등이 있었다. 의회에서 그의 연설은 급진적 장광설이었으며 이것이 발휘될 기회는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인기는 없었으나 최소한 악명은 누릴 수 있었다. 전쟁 중에 애국주의를 표방했던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이 혁명을 나라의 파멸로 간주했다. 혁명이 터진 후 그는 거짓 인기를 누려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자 겨우 혁명을 사실로 인정했다. 그에게 혁명은 당연히 새로운 권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가 입각할 기회가 철저히 봉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부르주아 혁명 역시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회주의에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확신은 대단히 옳았다. 의회 임시위원회는 이 급진적 의원을 소비에트에서 떼어 내야겠다고 결정했다. 이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마클라코프가 고사한 법무장관 자리를 그에게 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케렌스키는 의회 의사당 복도에서 친구들을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장관직을 수락할까 말까? 그러나 그가 장관직을 수락하리라는 것을 그의 친구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케렌스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수하노프는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가 설정한 어떤 임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인식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무지하게 화를 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하노프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장관직을 수락할 것을 권고했다: 그가 장관이 되면 우리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 약아 빠진 자유주의자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 지를 말해줄 사람이 우리에게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이 열망하고 있는 일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기면서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그의 장관직을 임명을 거부했다. 수하노프가 케렌스키에게 상기시켰듯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자기 구성원의 입각을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은 “위험성이 다분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단순히 이렇게 응답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권력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차지해야 한다.” 이것은 수하노프 자신이 한 말이다. 그는 단순성과 냉소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된 인간이었다. 권력 문제를 미스테리로 몰고 가는데 명수였던 이 인물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이미 3월 2일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권력을 공식적으로 접수할 분위기였다; 사실 2월 27일 저녁 이후 권력은 사실상 이 기관의 것이었다; 다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등뒤에서 이들이 모르게 그리고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권력을 혁명 대중의 손에서 빼앗아 버렸다. 수하노프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이 거래는 혁명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법적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것은 인민의 주권과 권리에 대항한 진짜 비밀 음모이기 때문이다.
입각하고 싶어하는 케렌스키의 조급함에 대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권력을 의회 의원들에게 넘긴 상태에서 이것의 작은 부분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창피스럽다. 케렌스키가 의원의 신분으로 입각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신사 양반들은 모든 상황에서 가장 거짓된 그리고 가장 엉클어진 해결책을 찾아내는 아주 확실한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급진적 의원이 아니라 승리한 혁명의 대표로 정부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자기 소망을 달성하는 길에 버티고 있는 장애물을 우회하기 위해 그는 자기가 속하고 있다고 말했던 당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부의장직을 맡고 있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지도자들에게 미리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불쑥 소비에트 전체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전체회의는 아주 혼란스러운 회의였다. 케렌스키는 특별 발표를 위해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일부는 조리가 없다고 또 일부는 격앙되었다고 평가한 연설을 했다. 물론 두 평가는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연설에서 그는 대의원들이 개인적으로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며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법무장관직을 수락할 용의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정치범이 완전히 사면되고 짜르 관료들이 기소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당연히 경험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전체회의에서 커다란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였다. 슐리아프니코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 코메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케렌스키에게 대단한 분노와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반대하지 않았다.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준 이상 사회주의자들은 대중 앞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각 문제는 표결에 붙여지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박수갈채를 자신의 입각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판단은 옳았다. 소비에트는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에 당연히 호의적이었다.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는 부르주아 정부가 청산되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케렌스키는 인민 주권이라는 공식 입장을 업신여기며 3월 2일 법무장관직을 수락했다.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입각을 매우 기뻐했다. 임시 위원회 집무실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누워 그는 러시아에서 사법 정의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몇 달 후에 볼세비키들을 기소하면서 케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너무 단순한 계산과 국제 전례에 의거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이 어려운 때에 멘세비키 체이제를 노동장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케렌스키보다 우둔했으나 좀더 진지한 인간이었다.
입헌민주당의 의심의 여지없는 지도자 밀류코프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의 수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부의 핵심이었다. 같은 당에서 일했으나 나중에 그와 결별한 나보코프는 자신의 글에 이렇게 적었다: “거의 무한한 지식과 폭넓은 지성으로 밀류코프는 내각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수하노프 역시 그를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자유주의를 붕괴시킨 장본인으로 비난했으나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밀류코프는 부르주아 정치계의 영혼이자 두뇌였다....그가 아니었다면 혁명의 첫 단계에 부르주아 정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약간 찬양하는 투이기는 해도 이런 평가들은 밀류코프가 어떤 부르주아 정치인 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강점과 약점은 단순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풍부하고 우아하게 정치 언어를 사용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운명을 표현했다. 밀류코프가 자유주의를 파멸시켰기 때문에 멘세비키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밀류코프를 파멸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제국주의적 목적을 위해 신(新)슬라브주의를 드러내었지만 밀류코프는 언제나 부르주아 “서구인”이었다. 그의 정당의 목표는 언제나 러시아에서 유럽 문명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는 전진하면 할수록 서구 민족들이 걸었던 혁명 경로들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의 “서구주의”는 서구에 대한 무기력한 부러움으로 귀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새로운 사회를 창조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뒤를 이었으나 오랜 기간 철학이라는 멀건 죽을 먹으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인들은 “사변의 세계”라는 말을 고안했는데 이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을 때 독일은 이 세계를 머리 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러나 비록 정치활동에는 빈약했지만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고전철학을 창조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성취가 아니었다. 그런데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물론 러시아는 독일어 “사변철학”을 자기 말로 그것도 여러 변종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정치적 무기력과 치명적인 철학적 빈곤을 더 명확히 드러낼 뿐이었다. 러시아는 기계 뿐 아니라 사상도 수입했다. 전자에 대해서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이라는 검역선을 둘러쳤다. 밀류코프는 자기 계급의 이 특성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으며 상당한 학구적 저서들의 저자였다. 또한 자유주의 지주들과 좌익 지식인들의 연합체인 입헌민주당의 창립자였다. 따라서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 대다수의 참을 수 없는 특징인 반(半)귀족적 반(半)지적 정치 아마추어 행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밀류코프는 자기 소임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이것만이 그를 다른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구별시켰다.
1905년 이전에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당혹스럽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인민주의 색채로 나중에는 맑스주의 색채로 이들은 자기 성향에 보호색을 뒤집어 씌웠다. 상당수의 청년 실업가들을 포함한 부르주아 계급의 광범위한 층은 사회주의에 대해 꽤나 천박하고 부끄럽게 굴종했다. 이 현상은 휘하에 수백만 노동자를 집중시킬 정도로 일찍 등장했으나 인민 전체의 지도세력이 되기에는 너무 늦게 등장한 계급의 자신감 결여에서 비롯되었다. 턱수염을 기른 아버지, 부유한 농민과 상점주인 등은 돈이나 벌 줄 알았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 이들의 아들들은 혁명 직전의 지적 격동기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 진출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자유주의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이 깃발은 선진국에서는 빛이 바랬고 누더기가 되어 반은 색이 지워져 있었다. 당분간 이들은 자기 영혼 일부와 심지어는 수입 일부를 혁명가들에게 헌납했다.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대표들은 특히 더 그랬다. 이들의 상당수는 청년기에 사회주의에 공감했다. 그러나 밀류코프 교수는 이 시기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고 유기적으로 부르주아였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05년 혁명 당시 밀류코프는 잘 길들여지고 훈련된 사회주의 정당들의 도움으로 혁명 대중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기각하지는 않았다. 위테는 이렇게 말한다: “1905년 10월 입헌 내각을 구성할 때 나는 입헌민주당에게 ‘혁명의 꼬리를 자를 것’을 호소했다. 이들의 대답은 내가 군대 없이 일할 수 없듯이 자기들도 혁명 군대 없이는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핵심을 말하자면 이 대답에는 속임수가 들어있다: 자기 주가를 높이기 위해 입헌민주당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혁명 대중으로 위테를 겁주었다. 1905년 혁명은 밀류코프에게 이렇게 확신시켰다: 지식인 사회주의 그룹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강한 공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진짜 동력인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기 무기를 결코 헌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무장을 잘할수록 그만큼 더 위험하다. 밀류코프는 붉은 깃발은 사실 붉은 누더기라고 선언하면서 혁명 대중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안도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시작하지 않은 사회주의에 대한 로맨스를 끝냈다. 소위 지식인들이 인민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주장은 러시아 언론의 전통적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지식인”이라고 말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모든 “교육받은 자들” 즉 유산계급을 의미한다. 1905년 혁명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인민으로부터의 고립은 곧 재앙이라고 가르쳤다. 이때 이후 “교육받은” 계급의 이념적 나팔수들은 심판의 날 즉 멸망의 날을 항상 예상해왔다. 정치의 시급함에 구애받지 않는 어느 자유주의 작가이자 철학자는 대중에 대한 이 두려움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증과 같은 무아경의 힘으로 표현했다: “무엇을 표방하든 인민과 결합할 생각을 하면 안된다 --- 정부의 모든 탄압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감옥과 총칼을 사용하여 인민의 잔인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유일한 존재인 정부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감성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으로 들고 일어선 나라의 인민을 지도할 꿈을 꿀 수 있겠는가? 밀류코프의 모든 정책에는 절망의 도장이 찍혀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순간 그의 당은 위기를 대적하기보다는 피할 생각을 하고 있다.
밀류코프의 저술은 무겁고 장황하고 지루하다. 그는 웅변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장식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만약 그의 구두쇠 정책이 위장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객관적 위장술을 보유했다면 그의 웅변가 기질은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전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기만술과 이기주의의 정수인 프랑스의 공식 정책은 전통과 수사(修詞)라는 막강한 동맹군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서로를 보완하여 어떤 부르주아 정치인도 감싸 보호한다. 심지어 대소유 계급의 따분한 서기에 불과한 프웽까레(Poincaré)도 이것들의 도움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선조가 없는 것은 밀류코프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이기주의 정책을 시행하도록 그가 강요받은 것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사회혁명당의 소콜로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케렌스키에게 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밀류코프에게는 가식이 없으면서도 기이한 큰 반감을 느꼈다. 이 존경할만한 사회개혁가가 왜 그렇게 인기가 없었는지 전에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케렌스키에 대한 경탄과 밀류코프에 대한 혐오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속물들이 알았다면 이들은 더 이상 속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 자본가들은 밀류코프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핵심을 너무 가식 없이 따분하게 그리고 환상을 유포하지 않은 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밀류코프라는 거울을 통해 자본가는 자신이 무미건조하며 이기심 밖에 없으며 더욱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흔히 그렇듯이 자기의 못난 얼굴은 탓하지 않고 거울을 탓했다.
한편 자유 부르주아 계급의 불쾌한 우거지상을 보고 밀류코프는 조용히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그는 이 말을 전혀 짜증을 내지 않고 담담히 그리고 애무하듯이 표현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은 나를 이해 못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니까.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상황의 논리에 복종하여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그의 생각이 올바름을 입증했다. 2월 혁명 이후 우파를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은 밀류코프를 비방하고 욕하면서도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수하노프 같이 사회주의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이들은 평범한 속물이 아니었다. 자기의 소규모 직종에 대해 전문적 능력을 구비한 정치꾼 이었다. 이들은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들이 원하는 바와 실제 도달한 목표가 너무 차이가 나서 사람들 눈에 금방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류를 범했으나 개의치 않고 머리를 계속 굴리면서 목표한 바를 밀고 나갔다. 이런 자들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이들이 진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속이는 것이 필요했다. 심지어는 이들이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하고 명령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면 이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기꺼이 조수의 역할에 만족한다. 밀류코프가 “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라는 말한 것도 자칭 사회주의자들과 대화를 하면서였다. 이 말은 이들을 은근하게 추켜 올려주었다: “나와 당신들만이 똑똑한 인간들이다.” 사실 바로 이 순간에 밀류코프는 이 민주주의자들이 낚시 바늘을 물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이 낚시 바늘에 이들은 곧 줄줄이 매달려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밀류코프는 개인적 인기가 없어서 정부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의회에서 전문적으로 맡았던 분야를 그대로 활용하여 외무장관이 되었다.
혁명 정부의 전쟁장관은 모스크바의 대기업가 구츠코프였다. 젊었을 때 모험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1905년 혁명의 패배기에 스톨리핀 휘하에서 대자본가들의 신뢰를 누리는 대변인이 되었다. 입헌민주당이 장악했던 제 1차 및 제 2차 의회가 해산되면서 1907년 6월 3일 내각이 바뀌었다. 새 내각의 선거법 개정으로 구츠코프의 10월당은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이 정당은 이후 두 차례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으며 1917년 2월 혁명까지 계속 이 지위를 유지했다. 테러범에 의해 암살된 스톨리핀의 기념비 제막식이 1911년 키에프에서 있었다. 이때 구츠코프는 화환을 비석에 놓으면서 땅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자기 계급의 이름으로 하는 제스처였다. 의회에서 그는 러시아가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는 문제에 주력하면서 밀류코프와 보조를 맞추어 전쟁을 준비했다. 군산(軍産)중앙위원회 의장의 지위로 구츠코프는 기업가들을 짜르에 대한 애국적 반대파로 규합했다. 그러나 로지안코를 비롯한 진보블럭의 지도자들이 군수물자 계약을 통해 전쟁 특수의 몫을 챙기는 것은 허용했다. 혁명 추천장에는 무혈혁명의 기도에 대한 전설 비슷한 것이 그의 이름을 빛내 주었다. 더욱이 전직 경찰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짜르에 대한 개인적인 대화에서 최고 수준의 모욕적 수식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츠코프는 예외가 아니었다. 경건한 황후도 구츠코프를 증오해서 편지에다 그에 대한 거친 욕을 마구 해대었다. 그리고 그가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황후는 이 똑같은 높은 지위에 다른 사람들도 매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1905년 혁명을 압살한 스톨리핀을 기리며 땅에 머리를 굽힌 이 작자는 1817년 2월 혁명과 함께 전쟁장관이 되었다.
농업장관에는 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의회 의원이 되었는데 지방에서 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당내에서 그와 가까웠던 인물들은 그를 정직한 범인이라고 평했다. 나보코프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전국 차원의 정치계보다는 소도시나 시골에나 어울리는 지방의 지식인”이었다. 청년기의 끝없는 급진주의는 그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것이었다: 정치인에 합당한 성숙성을 유산계급들에게 보여야 한다. 과거 입헌민주당의 강령은 “정당한 배상을 통한 토지의 몰수”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어느 누구도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전쟁으로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싱가레프는 농업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것을 그의 주요 임무로 간주했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이 소집을 원치 않고 있는 제헌의회 신기루로 농민들을 혹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토지 문제와 전쟁 문제 때문에 2월 혁명은 파멸할 운명이었다. 싱가레프는 이 운명을 자기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실현시켰다.
재무장관직은 테레쉬첸코라는 젊은이에게 주어졌다. 타우리데궁에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 물었다: “어디서 그 친구를 데리고 왔소?”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설탕공장, 장원, 삼림 등 금화 8천만 루블에 상당하는 재산을 보유한 부자였다. 그는 키에프의 군산위원회 의장으로 프랑스어 발음이 좋고 무엇보다도 발레 애호가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니콜라이 2세를 타도했을 그 위대한 음모에 그가 거의 참가할 뻔했으며 구츠코프가 총애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음모가 성사되는 것을 막은 혁명이야말로 테레쉬첸코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수도의 거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2월의 5일 동안 여러 번 우리 앞에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자가 있었다. 짜르 치하에서 장관을 지낸 부친을 둔 나보코프는 자족적인 올바름과 무미건조한 이기심의 상징에 가까웠다. 봉기의 결정적인 며칠간 그는 법원 안에서 또는 자기 집안에서 “따분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소일했다. 그는 이제 임시정부의 총무청장 그리고 실제로는 무임소 장관이 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베를린에 망명한 그는 백군의 유탄에 맞아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 시절에 대한 꽤 흥미로운 회고록을 남겼다. 이것이 그나마 그가 이룩한 공적이라고 인정하자.
그런데 우리는 수상을 언급하는 것을 까먹었다. 임시정부의 수상은 짧은 임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거의 멀어져 있었다. 3월 2일 타우리데궁의 회의에서 새로 수립된 정부를 추천하면서 밀류코프는 르보프공(公)을 “짜르 정권에 의해 그렇게도 핍박을 받은 러시아 사회의식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자신의 혁명사에서 밀류코프는 르보프공을 “임시위원회 다수에게 개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의 수반이라고 묘사한다. 역사가 밀류코프는 이 저술을 통해 수상을 선택한 정치인 밀류코프의 책임을 면제시키려 애쓰고 있다. 사실 르보프공은 오랫동안 입헌민주당의 우파였다. 제 1차 의회가 해산된 후 비보르그 지구 의원들이 잘 알려진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이들은 분노한 자유주의자들의 예식으로 인민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납세를 거부합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했던 르보프공은 이들이 작성한 호소문에 서명은 하지 않았다. 나보코프에 의하면 비보르그 지구에 도착한 즉시 르보프공은 병이 났다. 그의 병은 “감정 상태 때문이었다.” 그는 혁명적 흥분에는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건강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마음이 넓은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이 온건한 인물은 자기 조직 내에서 많은 수의 좌익 지식인, 혁명가 출신 인사, 사회주의적 애국자, 징용회피자 등을 전부 받아들였다. 이들은 관료들처럼 서로 화합해서 일은 잘했으나 뇌물은 받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르보프공이 인기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만들었다. 보통 자본가들에게 공작에다 부자에다 자유주의자라면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짜르도 르보프공을 수상으로 점찍어 놓았다. 한마디로 2월 혁명정부의 수상 자리는 빛나는 자리이면서도 대단히 속이 빈 자리였다. 로지안코가 이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이 자리를 좀더 화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국가의 전설적인 역사는 [연대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슬라브 부족들의 대표단이 스칸디나비아의 군주들에게 가서 이렇게 요청했다: “우리 땅에 와서 우리의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사회민주주의의 불쌍한 대표들은 이 역사적 전설을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일은 9세기가 아니라 20세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의 군주들이 아니라 자기 나라 공작들에게 간청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봉기가 승리하여 혁명정부가 등장했으나 이 정부를 채운 자들은 아주 부유한 지주들과 기업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정치 아마추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강령이 없었으며 더욱이 수상은 약간의 자극도 아주 싫어하는 공작이 맡았다.
한편 연합국 대사관, 부르주아 및 관료들의 살롱, 광범위한 중부르주아 그리고 소부르주아 일부는 새 정부의 구성에 만족해했다. 르보프공, 10월당의 구츠코프,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 등 이름만 들어도 안심이 되었다. 케렌스키의 입각은 연합국 대표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좀더 시야가 넓은 자들은 왜 그가 끼었는지 이해했다. 러시아어의 은유법을 아주 좋아했던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어차피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 밀류코프 같은 믿을만한 자들이 있으면 성깔 있는 놈 한둘은 차라리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 대오에서는 정부의 구성이 즉시 적대감 또는 기껏해야 말문이 막힐 정도의 황당함을 가져왔다. 밀류코프나 구츠코프라는 이름은 공장이나 병영에서 환영의 목소리를 단 하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에 대한 증언은 수없이 많다. 권력이 짜르로부터 공작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한 병사들의 부루퉁한 경계심을 므티슬라비스키 장교가 보고하고 있다: 겨우 이것 때문에 우리가 피를 흘렸나? 케렌스키의 내부 그룹에 속한 스탄케비치는 자신이 지휘하는 공병대대의 모든 중대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최상의 선택이라고 쓰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열광하여 새 정부를 선전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병사들은 냉담했다.” 그가 케렌스키의 이름을 말하자 그제서야 병사들은 “진정한 만족감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이때쯤 수도의 부르주아 여론은 케렌스키를 혁명의 중심 영웅으로 이미 만들어 놓은 뒤였다. 노동자들보다는 병사들이 케렌스키를 부르주아 정부의 대항 중심으로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왜 그만 정부에 참여했는지 궁금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대항 중심이 아니라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그는 밀류코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마그네슘 섬광과 같이 번쩍 하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 밀류코프와 달랐을 뿐이었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나라의 진짜 정치지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왕당파 반동들은 숨어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혁명의 물결이 가라앉는 첫 순간에 온갖 종류와 성향의 유산계급들은 입헌민주당으로 모여들었다. 이 정당은 공개 정치의 무대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유일한 정당으로 갑자기 부상했으며 동시에 극우 정당이 되었다.
대중은 떼를 지어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 정당들을 소비에트와 동일시했다. 후방의 대규모 주둔군 병사들과 노동자들 뿐 아니라 잡다한 도시의 소시민들 즉 기술공, 잡상인, 하급관료, 마차꾼, 수위, 모든 종류의 하인 등이 임시정부와 그 기구들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더 친근하고 더 가까이 하기 쉬운 권위 있는 정치집단을 찾고 있었다. 농민 대표들이 갈수록 타우리데궁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비에트가 마치 혁명의 개선문인양 대중은 소비에트로 몰려들었다. 소비에트의 경계를 넘어선 모든 것은 혁명으로부터 멀어져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현실이 그러했다. 소비에트의 경계 밖에는 유산계급들의 세계가 존재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정치적 색깔들이 회색이 도는 분홍색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로 대중 전부가 소비에트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정치적으로 깨어난 모든 근로 대중이 한꺼번에 소비에트를 찾지도 않았다. 혁명이 자기를 돌볼 것이라고 모든 피억압 대중이 즉시 믿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수의 의식 속에 막연한 희망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열성 분자들은 모두 소비에트로 모여들었다. 혁명기에는 활동이 모든 것을 제압한다. 더욱이 대중의 활동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기반은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만이 혁명의 진정한 기반이었다.
타우리데궁에는 의회와 소비에트의 두 조직이 존재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처음에는 좁은 비서실들에 몰려있었다. 이곳을 통해 인간의 물결이 멈추지 않고 흘러 들어왔다. 의회 의원들은 호화스러운 집무실에서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조직을 갈라놓은 장벽은 곧 혁명의 홍수로 무너져 내렸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우유부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저항할 수 없이 퍼져나갔다. 한편 의회는 궁전의 뒤뜰로 밀려났다. 새로운 계급 역관계는 모든 곳에 길을 내고 있었다.
타우리데궁의 의원나리들, 연대 장교들, 참모부 지휘관들, 공장 철도 전신전화국의 책임자들과 관리자들, 지주들, 장원의 관리인들은 모두 혁명의 첫 며칠간 대중의 의심스럽고 지치지 않는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중의 눈에 소비에트는 자신들을 억압해왔던 모든 자들에 대한 불신의 조직된 표현이었다. 식자공들은 자신들이 식자를 했던 논문의 글들을 시기심을 가지고 살폈다. 철도노동자들은 군사용 기차들을 근심스럽고 감시하는 눈초리로 주시했다. 전신전화국의 노동자들은 전보의 내용들을 다시 읽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장교가 움직일 때마다 의심스럽게 눈을 주었다. 노동자들은 흑백인조에 소속된 관리자들을 공장에서 쫓아내고 자유주의 관리자를 불러 감시했다. 의회는 혁명 첫 시간부터 그리고 임시정부는 출범 첫날부터 상층 계급의 불만과 반대의견, “지나친 조치들”에 대한 항의, 걱정스러운 논평, 우울한 예감 등의 물살이 계속 밀려드는 저수지가 되었다.
구(舊)정부의 해골이 퀭한 눈을 한 관공서 건물들을 소심하게 바라보며 사회주의를 자칭하는 소부르주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없이는 국가기구를 우리 혼자 운영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혁명이 목을 잘라버린 체제에 일종의 자유주의 머리를 다시 올려놓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새 정부의 장관들은 짜르 체제가 소유했던 집무실에 들어가 타자기, 전화, 심부름 꾼, 속기사, 서기 등의 기구를 소유하였다. 그러나 이 기구는 전혀 작동이 되지 않고 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곧이어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전역에 정부의 권력은 물론 문자 그대로 경찰관 하나 남아있지 않은 무정부 상태 3일째에 임시정부는 권력을 잡았다.” 수백만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자 병사 대의원들의 소비에트들은 구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 쓸모 없었다. 물론 이것은 무정부 상태의 한 요소에 불과했다. 케렌스키는 경찰관이 사라졌다는 말을 하면서 나라의 권력 공백 상태를 요약했다. 장관 가운데 가장 좌익적인 이 인물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는 정부 정책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주 정부 총독 자리는 르보프공의 명령에 따라 주 의회 의장이 대신했다. 물론 이들은 전임자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총독조차 자코벵파라고 간주한 중세 지주들이었다. 군의 우두머리도 역시 군 의회 의장이 맡았다. “인민위원(commissar)”이란 새 이름을 가졌지만 인민은 옛날의 적들이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밀튼이 장로교파의 소심한 종교개혁에 대해 얘기한 것과 유사하다: “새로운 장로들은 옛날 사제의 확대판에 불과하다.” 주와 지구 정부의 인민위원들은 타자기, 통신 수단, 총독과 경찰청장의 비서 등을 접수했으나 곧 자신들이 진짜 권력을 상속받지 못했음을 알았다. 주와 군 단위의 진짜 생활은 소비에트를 주위로 몰려 있었다. 이렇게 이중권력 체제가 위에서 아래로 지배했다. 그러나 중앙과 달리 지방의 주에서는 소비에트 지도자인 사회혁명당원과 멘세비키들이 약간 단순했으며 따라서 상황이 이들에게 강요한 권력을 중앙처럼 전부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 결과 주 인민위원의 활동은 주로 직무 수행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불평을 문서로 제출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내각으로 구성된 정부가 수립된 지 이틀이 지났으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기는커녕 상실했다고 느꼈다. 혁명 이전에 라스푸틴 일당의 황당한 전횡이 있었지만 이들이 휘두른 진정한 권력은 한계가 있었다. 정부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왕정보다는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짜르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공장, 토지, 은행, 주택, 언론 등의 소유를 보장해주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서 짜르 정부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였다. 2월 혁명은 상황을 양극단의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국가권력의 외적 소지품들은 엄숙하게 부르주아 계급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동시에 이들이 혁명 이전에 누렸던 실제 지배력의 몫은 줄어들었다. 르보프공이 의장이었던 지방 의회의 종업원들과 구츠코프가 의장으로 있었던 군산위원회의 종업원들은 혁명이 진행되면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의 이름으로 농촌, 전선, 도시, 소읍 등을 지배했다. 이들은 로브포와 구츠코프를 내각에 임명시켰으며 이들이 일할 조건을 규정했다. 이제 내각은 이들이 고용한 관리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정부를 수립시켰으면서도 성경의 이야기처럼 신이 자신의 창조 결과들을 좋다고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급히 서둘러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 사이에 거리를 더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새 정부는 민주주의 혁명에 진정 복무할 경우에만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물론 임시정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공식 민주주의 세력의 지지 없이는 자신은 한시간도 버틸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지는 좋은 행실에 대한 보상으로만 약속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좋은 행실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세력은 좋은 행실을 보일 생각을 바로 전에 거부하고 임시정부에게 이 소임을 떠맡겼다. 문제는 복잡했다. 임시정부는 어느 한계 내에서 반쪽 짜리 권력을 행사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항상 조언을 해줄 수도 없었다. 대중의 불만을 표현하는 저항이 소비에트 대오 내부의 어디서 터져 나올지 추측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자들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가장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때가 성숙하지 않은 요구들을 제출하여 대중을 분노케 하고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경우에만”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10월 혁명이 승리하기 전까지 계속 등장했다. 이 표현은 2월 혁명으로 탄생한 잡종 정권에 내재된 거짓을 법적으로 상징하는 말이었다.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선출했다. 예절을 차리기는 했으나 우스꽝스럽게도 이 위원회의 명칭은 “접촉위원회”였다. 이렇게 해서 혁명 권력은 상호 설득의 원칙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신비주의 작가 메레주코프스키는 이러한 정권의 전례를 구약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왕들은 예언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예언자들처럼 성서의 예언자들은 최소한 계시를 직접 하늘로부터 받았다. 따라서 왕들은 이 계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단일 주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예언자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예언할 뿐이었다. 더욱이 자유주의 장관들은 소비에트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체이제, 스코벨레프, 수하노프 등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정부가 양보를 하라고 수다스럽게 제안을 늘어놓았다. 장관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그러면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다시 돌아가 정부 장관들의 권위로 소비에트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다시 장관들을 만나 다시 처음부터 설득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과정은 이렇다할 결실을 전혀 맺지 못했다.
접촉위원회는 불평으로 가득했다. 소비에트의 묵인 하에 군대가 소요를 일으키자 특히 구츠코프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끔 이 혁명정부의 전쟁장관은 “말 그대로... 눈물을 쏟거나 최소한 가식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는 아주 올바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신의 계시로 왕이 된 자(장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예언자(소비에트)의 임무이다.
3월 9일 참모총장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장관에서 전보를 보냈다: “소비에트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면 독일이 곧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구츠코프는 눈물을 흘리며 이 전보에 응답했다: “슬프게도 정부에게는 진짜 권력이 없다; 군대, 철도, 우편, 전신 등은 소비에트의 수중에 있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가 허용할 때까지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현실이다.”
몇 주일이 이렇게 지나갔으나 개선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4월 초 의회 시찰단이 소비에트 대표들과 같이 전선으로 향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이빨을 갈면서 의원들에게 소비에트 대표들과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시찰 여행 내내 의원들은 자신들이 호송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안 그래도 이들은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호송을 받지 않으면 병사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기차에서 좌석도 구할 수 없다. 만시레프공의 회고록에 실린 따분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구츠코프가 참모들과 나눈 편지들과 함께 2월 정세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어느 반동이 재치 있게 이렇게 표현했다: “구 정부는 감옥에 있고 신 정부는 가택연금 중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애매한 지지 이외에 임시정부는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인가? 유산계급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이다. 과거 짜르 왕정과 연합했던 유산계급들은 혁명 직후 서둘러 새로운 축으로 결집했다. 전국 자본가들의 연합체인 직종산업위원회는 3월 2일 의회 임시위원회의 임시정부 수립을 환영했다. 그리고 자신이 의회 위원회의 “뜻을 전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방의 각급 의회들도 같은 노선을 채택했다. 왕정의 주축이었던 귀족연합회도 3월 10일 웅변적인 비겁함이 담긴 언어로 러시아 인민 전체가 “러시아의 유일한 합법적 권력인 임시정부 주위로 단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유산계급들의 모든 단체들과 기관들은 이중권력을 비난하고 사회 혼란의 책임을 소비에트에 전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대담하게 소비에트를 비난했다. 고용주들에 이어 서기들, 전문직업 단체들, 공무원들까지 이 비난에 가세했다. 참모부가 조작한 비난 전보, 호소, 결의문 등이 군대에서 나왔다. 자유주의 언론은 “단일권력 수립”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이 움직임은 소비에트의 머리에 불어닥친 불 폭풍이 되었다. 이 모든 저항의 움직임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수의 기관, 저명한 이름, 결의문, 언론의 기사, 단호한 어조 등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압력에 약한 머리들에게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산계급들의 이 위협적인 힘의 과시 뒤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 어느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재산 소유권의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재산 소유권은 인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법과 국가라는 강제력의 체계를 통해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지지를 받을 경우는 이것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현재 정세의 핵심은 구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 그리고 이에 따른 재산 소유권 제도 전체에 대한 대중의 의구심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공장소유주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사장들은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일 뿐이었다. 지방의 지주들은 도시의 사장들보다 더 불안했다. 이들은 뚱한 표정에 복수심을 가득 담은 농민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했다. 또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존재를 잠시 인정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날아가 버렸다. 재산 소유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거나 보호할 가능성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재산 소유주가 아니었다. 따라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정부를 조금도 지지할 수 없는 겁에 질린 속물들에 불과했다. 이들은 곧 정부의 허약함에 욕을 해대었으나 이것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욕일 뿐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의 공동활동의 목적은 이것인 듯했다: 혁명기에 국가운영의 기예는 수다 떨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데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의식적 계획으로 채택한 듯했다. 연합국에 대한 충성 서약 이외에 모든 조치들은 연기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밀류코프는 동료들에게 비밀조약들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케렌스키는 이것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오직 그리스정교회의 주교장만이 분노의 폭풍을 일으키며 이 조약들을 “약탈과 사기”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언행을 잘했는데 이름은 임시정부 수상과 같은 르보프였다. 그의 반응에 대해 밀류코프는 생색을 내듯 미소를 지었다(“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그리고 집무를 계속하자고 조용히 제안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제헌의회가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소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확한 일자는 의도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나온 것이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왕정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정부 선언의 진짜 내용은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며 “연합국들과의 합의들을 흔들리지 않고 수행하겠다”는 약속에 있었다. 인민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위협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혁명은 선언을 하기 위해서만 성취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은 과거와 똑같다. 민주주의자들은 연합국들이 임시정부를 인정한 것에 거의 신비로움에 가까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소규모 상인의 신용을 은행이 인정할 때까지 그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연합국들이 임시정부를 인정했으니 이제 임시정부는 진정한 실체가 되었다는 투였다. 그러자 집행위원회도 침묵을 지키며 3월 6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언을 인정했다.
이로부터 일년이 지난 후 수하노프는 이렇게 슬퍼한다: “민주주의의 공식 기구 어느 하나도 임시정부의 선언에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유럽국가들은 우리의 혁명을 탄생 때부터 우습게 보았다.”
마침내 3월 8일 임시정부의 실험실에서 사면 포고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미 감옥의 문은 전국에서 혁명 인민에 의해 열리고 난 후였다. 그리고 정치 망명자들은 집회, 만세, 군대의 연설, 화환 등과 함께 꾸준히 귀국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면 포고령은 정부 청사에서 늦게 울려 퍼진 메아리 같았다. 그리고 12일에는 사형제도의 철폐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4개월 후 사형제도는 다시 군대에서 부활했다. 케렌스키는 정의를 유례없이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열정을 발휘하는 순간에 노동자 병사 대표들을 법정의 일원으로 도입하는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을 실천에 옮겼다. 이 조치는 혁명의 박동이 느껴지는 유일한 가시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 조치는 사법부 내시들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케렌스키 산하 법무부의 중요한 관료이자 “사회주의자”인 데미아노프 변호사는 구 정부의 관료들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원칙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정부의 정책은 어느 누구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임시정부 전체의 지도지침이었다. 유산계급들과 심지어는 짜르의 관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을 임시정부는 가장 두려워했다. 짜르 체제의 판사와 검사는 모두 유임되었다. 물론 대중은 열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에트의 소관이었다. 대중은 임시정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운 바람은 위에서 언급한 흥분 잘하는 르보프 주교장만이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주교회에 앉아있는 “백치들과 악당들”에 대해 공식 보고서를 제출했다. 임시정부 장관들은 그의 톡 쏘는 보고를 약간의 경악감 속에 청취했다. 그러나 주교회는 계속 국가기관으로 그리고 그리스정교회는 계속 국가종교로 남았다. 주교회의 구성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혁명은 어느 누구하고도 말다툼하면 안된다!
두 명 내지 세 명의 짜르들을 충실하게 보좌한 하인들로 구성된 국무위원회의 위원들은 계속 존재하거나 최소한 봉급을 계속 타먹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상징적인 의의를 획득했다. 공장과 병영에서 요란한 항의가 일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에 대해 걱정했다. 국무위원회의 운명과 봉급 문제를 놓고 임시정부는 2번의 회의를 가졌으나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왜 이 존경해야할 분들을 불편하게 하는가? 그리고 이중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지 않은가?
라스푸틴이 임명한 장관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서둘러 이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조롱이거나 저승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정부는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을망정 자기 전임자들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원의원들은 계속해서 장식이 화려한 의원 복장을 하고 의사당에서 졸았다. 그리고 케렌스키가 새로 임명한 좌익 상원의원 소콜로프가 프록 코트를 입고 감히 입장하자 그를 조용히 의사당에서 몰아냈다. 짜르 시절의 이 의원님들은 2월 혁명을 화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혁명정부가 이빨 빠진 개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카알 맑스는 독일 3월 혁명의 실패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계 최상층만 개혁했을 뿐 이 밑에 있는 모든 부위들 즉 구 관료집단, 구 군대, 구 사법부 등 절대주의에 봉사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이가 먹은 부위들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실패의 원인으로 꼽은 바로 이 요인을 케렌스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구원의 요인으로 만들고자했다. 그리고 멘세비키 맑스주의자들은 맑스가 아니라 케렌스키의 편을 들었다.
정부가 주도성과 혁명적 템포를 보여준 유일한 영역은 주식 보유에 관한 입법이었다. 이 개혁 포고령은 3월 17일 선언되었다. 주식 보유에 관한 민족적 종교적 제한은 이로부터 3일만에 폐기되었다. 구 정부에서 주식 거래를 금지 당해 고통을 당했던 자들이 새 정부기구에는 적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일을 요구하며 참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양쪽 귀가 다 먹은 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전시이므로 조국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 더욱이 이것은 소비에트의 소관이다. 이들이 노동자들을 진정시키라고 내버려두자.
더 위협적인 것은 토지문제였다. 정말 뭔가 조치를 취해야했다. 예언자들의 말에 자극을 받아 농업장관 싱가레프는 지역 토지위원회 수립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기구의 임무와 기능은 분별력 있게도 규정하지 않았다. 이 위원회가 자기들에게 토지를 주어야 한다고 농민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들은 이 위원회가 자기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농민의 올가미는 다른 어떤 올가미보다 더 잔인하게 2월 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 편리를 볼 수 있도록 혁명을 야기한 모든 문제들은 제헌의회로 이월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인민 전체의 의지에 부응하여 미하일 대공을 국가수반으로 앉히는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 흠잡을 것 하나 없는 민주주의자들이 인민 전체의 의지를 예측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전국 차원에서 진행된 대의제도 정착을 위한 준비는 엄청난 관료적 강압과 의도적인 지연으로 방해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제헌의회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봉기로 혁명이 승리한지 한 달이 거의 다된 3월 25일이 되어서야 정부는 선거법 제정을 위한 굼뜬 특별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으로 일관한 자신의 [혁명사]에서 밀류코프는 혼동된 듯이 이렇게 말한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특별회의의 작업은 첫 정부에서 진행되지 못했다.” 회의의 구성과 기능에서 어려움은 내재해 있었다. 더 좋은 때 즉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가 정착된 후 또는 코르닐로프 쿠데타 때까지 제헌의회 소집을 연기하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속셈이었다.
세상에 너무 늦게 등장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죽도록 증오했다. 그러나 이 증오에는 힘이 없었다. 결국 자신의 시간을 기다려 술수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타도하거나 목조를 수가 없게 되자 부르주아 계급은 이것이 굶어 죽기를 기대했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
<차례>
무엇이 이중권력의 핵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술에서 이 문제는 한번도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사회위기의 뚜렷한 특징이며 러시아의 1917년 혁명에서 가장 뚜렷하게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혁명에만 특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적대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이 없는 계급은 권력을 가진 계급의 지배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개 이상의 권력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들 사이의 관계는 정치구조의 성격을 직접 규정한다. 단일권력은 정치 안정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사회 전체의 유일한 선택으로 강요하는데 성공할 경우 단일권력은 유지된다.
호엔쫄런 왕조의 형태로든 공화국 형태로든 독일의 융커(대지주 계급)와 자본가 계급은 동시에 독일 사회를 지배했다. 이 두 지배계급은 서로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킨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권력이 아니다. 이들의 사회기반이 같아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국가기구를 분열시킬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계급갈등이 화해할 수 없을 때에만 등장한다. 따라서 혁명기에만 등장할 수 있으며 혁명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하나가 된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혁명은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무력을 동반한 권력의 타도는 보통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는 하룻밤 혁명으로 피지배 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격상되지 않는다. 이 계급은 혁명 이전부터 구 지배계급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태도를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중간 계급 계층들의 희망을 자기에서 집중시켜야 한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혁명 직전의 시기에 사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준비된다. 물론 이때 공식 국가기구는 여전히 구 지배계급의 손에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에서 이중권력의 초기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중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혁명으로 권력에 올라선 새로운 계급은 실제로는 이미 낡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효가 지난 계급이다. 이 결과 이 계급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계급이 된다. 그런데 이 계급이 권력으로 밀려 올라간 순간 충분히 성숙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 계급과 마주칠 때가 있다. 이 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보다 더 불안한 권력이 정치혁명으로 수립된다. 어쨌든 이중권력의 “무정부 상태”를 새로운 단계 단계마다 극복하는 것이 혁명 또는 반혁명의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이중권력은 두 적대 계급에 의해 권력이 균형 있게 양분될 가능성을 전제하기는커녕 배제한다. 이것은 헌법으로 인정되는 권력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조성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균형이 파괴되어 상부구조인 국가가 이미 쪼개진 상황이 이중권력이다. 이때가 되면 두 적대 계급은 시효가 지난 정부기구와 막 형성되고 있는 정부기구 즉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정부기구를 하나씩 꿰어찬다. 그리고 이 정부기구들은 시시때때로 서로를 밀치며 경쟁한다.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는 계급의 상호관계에 따라 각 계급이 휘두르는 권력의 양이 결정된다.
본성 상 이 상태는 안정적일 수 없다. 사회는 한 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안정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또는 두 반(半)지배계급들을 통해 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쓴다. 권력의 양분 상태는 내전의 전조이다. 그러나 두 적대계급이 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특히 제 3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할 때 이들은 상당 기간 이중권력을 감내하고 심지어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체제는 폭발을 피할 수 없다. 내전은 영토를 놓고 싸우기 때문에 이중권력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자신의 아성을 구축한 두 세력은 나라의 영토를 전부 차지하려고 애쓴다. 이 결과 두 적대 세력은 서로를 계속해서 침략하는 형태로 이중권력을 감내하다가 이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으로 세를 굳힌다.
17세기의 영국 혁명은 나라를 완전히 파괴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따라서 내전 형태로 이중권력이 급격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왕정은 귀족과 주교 등 특권 계급 또는 이 계급 상층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이 계급과 밀착한 대지주들이 연합하여 왕정에 도전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인 런던이 지지하는 장로의회(Presbyterian Parliament)가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였다. 이 두 권력 사이의 장기화된 투쟁은 마침내 공개적인 내전으로 해결된다. 두 권력의 중심부인 런던과 옥스퍼드는 각각 자신의 군대를 조직한다. 이로써 이중권력은 영토를 차지한 내전의 형태를 띤다. 물론 내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영토 경계선은 수시로 변한다. 마침내 의회군이 승리하고 왕은 체포되어 운명을 기다린다.
이제 장로 부르주아 계급의 단일권력이 수립될 조건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의 권력이 깨지기 전에 의회군은 스스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변모한다. 이 군대는 자기 대오에 독립파(Independents) 즉 수공업자와 농민 등 신앙심이 투철하고 결의에 찬 소부르주아 계급을 결집시킨다. 그리고 단순한 무장집단으로서 뿐 아니라 치안방위군(Praetorian Guard) 그리고 부유한 대부르주아 계급에 반대하는 새로운 계급의 정치적 대표가 되어 사회에 강력히 개입한다.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군대는 총사령부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국가기관 즉 병사 장교 대의원(“선동가들”) 위원회를 수립한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한다. 한쪽에는 장로의회 또 한쪽에는 독립파 군대가 서로 대항하면서 이중권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공개적인 투쟁이 계속된다. 부르주아 계급의 군대는 크롬웰의 평민 “모범군”을 무찌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투쟁은 독립파의 칼에 장로의회가 난도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장로의회는 잔당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크롬웰의 독재가 수립된다. 그러나 다시 혁명의 극좌파인 수평파(Levellers)가 군대의 하부를 지휘하여 군대 귀족에 대항, 평민 정권을 수립하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중권력은 계속 발전하지 못한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최하층인 수평파가 권력을 잡기에는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 크롬웰이 수평파를 제거하면서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치적 균형을 수립한다. 이 균형은 수년을 지속한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제 3 신분의 상층부는 제헌의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의기구는 왕의 특권을 전부 폐지하지 않은 채 권력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이중권력의 쌍방은 명확히 구분된다. 루이 16세가 바렌느로 도망하는 것으로 이중권력 상황은 끝난다. 그리고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 상황은 공식적으로 청산된다.
1791년에 제정된 제 1차 프랑스 헌법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허구에 기초하였다. 이것은 혁명 인민으로부터 이중권력 상황을 은폐했거나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이중권력의 한 축은 혁명 인민의 바스띠유 감옥 점령 이후 국민의회를 확고히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성직자, 관료, 군대의 상층부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반동 외국들의 혁명 개입을 희망한 낡은 왕정이었다. 이 자기 모순적 체제는 내부에 파괴의 싹을 불가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모순은 유럽의 반동 강대국들이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왕과 왕정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결국 혁명 빠리와 반동 코블렌츠가 힘을 겨루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과 단두대 이전에 꼬뮌(인민자치위원회)이 빠리의 혁명 무대에 등장한다. 제 3 신분 가운데 도시 최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던 꼬뮌은 점점 대담해지면서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공식 대표들과 권력을 다투었다. 이렇게 새로운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이중권력의 징후는 대부르주아와 중부르주아가 행정부와 자치도시들에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1790년에 이미 나타났다. 가발과 비단 승마바지의 유산계급들이 나라의 운명을 독단하고 있던 정치무대에 사회의 밑바닥 평민들이 등장하여 정치에 개입했다. 이들의 노력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또 얼마나 지독하게 비방을 받았는가! 교양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짓밟혀온 사회의 밑바닥이 꿈틀거리며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머리가 딱딱한 땅을 비집고 올라와 노동으로 딱딱하게 거칠어진 손을 뻗치며 목은 쉬었으나 용감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혁명의 사생아인 빠리의 구(區)들은 자기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즉시 지배계급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는 소(小)구로 다시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법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아래로부터 신선한 피를 계속 수혈 받았다. 그리고 법을 무시하고 무권리와 빈곤에 찌든 빈민들에게 정치 활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봉건소유제를 방어하는 부르주아 법에 대항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지방의 자치도시들은 이들을 옹호했다. 이렇게 하여 이등 국민 밑에서 삼등 국민이 들고 일어선다.
빠리의 소구들은 처음에는 꼬뮌과 대치했다. 당시 꼬뮌은 여전히 품위 있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1792년 8월 10일 대담한 공격으로 소구민들은 꼬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혁명 꼬뮌은 입법의회 그리고 이후 국민공회에 저항했다. 입법의회와 국민공회는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과 속도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다만 사건을 기록할 뿐이었다. 빠리의 구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가장 후진적인 농촌마을의 지지를 받은 새로운 계급의 활기, 대담성, 의견의 완전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구민들이 꼬뮌을 장악하자 꼬뮌은 새로운 봉기를 통해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혁명의 단계마다 대항권력이 극명하게 구분된 이중권력이 등장하여 우익 권력은 방어투쟁을 좌익 권력은 공세투쟁을 통해 강력한 단일권력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혁명과 반혁명에서 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요구는 이중권력의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 나온다. 이중권력은 내전을 통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한다. 권력이 새로운 계급 계층에게 넘어가는 혁명의 거대한 단계들은 각 단계에 조응하는 대의기관을 동반하지 않는다. 대의기관은 마치 뒤늦은 그림자처럼 혁명의 폭풍 뒤에 천천히 따라올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하층민의 혁명 독재는 국민공회의 독재와 연합한다. 그러나 어떤 국민공회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테러로 이 대의기구를 장악했던 지롱드파는 제거되었다. 대신 새로운 사회 세력의 지배를 위해 국민공회는 축소되고 개조되었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은 4년을 경과하면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 이후 다시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승 단계 때와 똑같이 하강 단계마다 먼저 내전이 벌어진다. 이 방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력 균형을 찾는다.
라스푸틴의 관료들과 싸우기도 하고 협동하기도 하면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전쟁 중에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짜르 체제의 패배를 활용하고 도시와 농촌의 단체들 그리고 군산위원회 등을 통해 이들은 거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엄청난 국가의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들은 짜르에 버금가는 정부였다. 전쟁 중에 짜르의 장관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르보프공이 군대에 보급품, 식량, 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병사 이발소까지 차리고 있다. 1915년 크리보쉐인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상태를 중지시키거나 그에게 권력을 전부 넘기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다.” 이로부터 1년 반이 지나 르보프가 “권력 전부”를 접수할 것이라고 그는 상상도 못했다. 다만 권력은 짜르가 아니라 케렌스키, 체이제, 수하노프에 의해 제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접수받은 지 이틀만에 새로운 이중권력이 성립했다. 어제는 자유주의자들의 반(半)정부였다가 오늘은 공식적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은 임시정부가 한 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공인 받지는 않았으나 훨씬 더 실세인 근로대중의 정부 소비에트가 또 한 축을 이루었다. 이 순간부터 러시아 혁명은 세계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이중권력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7세기와 18세기의 혁명에서 이중권력은 적대 세력들에게 일시적으로 강요된 투쟁의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여기서 각 세력은 자신의 단일권력으로 이중권력을 대체하려했다. 그런데 1917년 혁명에서는 공식 민주주의 세력이 의식적으로 이중권력을 수립해 놓고 모든 힘을 다해 권력 장악을 회피했다. 언뜻 보면 적대 계급들의 권력장악 투쟁이 아니라 한 계급의 자발적인 “양보”로 이중권력이 성립한 것 같다.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을 통해 이중권력의 모순을 청산하려했다. 우리가 표현한 바 2월 혁명의 역설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1848년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왕정에 대해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합의를 통해 왕정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진지하게 노력했다. 이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왕정에 넘겨주지도 않았다. “프로이센 부르주아 계급은 명목상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구 정부 세력이 아무 조건 없이 복종하여 자신의 전능을 충성스럽게 따를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
1917년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봉기의 순간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을 부르주아 계급과 나누려고 했을 뿐 아니라 국가기구 전부를 통째로 넘기려했다. 20세기의 첫 25년에 러시아의 공식 민주주의 세력은 19세기 독일의 자유부르주아 계급보다 훨씬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해체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역사의 법칙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같은 시기 노동계급의 급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크롬웰의 지지기반인 수공업자들 그리고 로베스삐에르의 지지기반인 하층민과 똑같이 이제 러시아 노동계급은 혁명을 철저히 수행할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좀더 깊이 관찰하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이중권력은 권력 실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계급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을 불신하면서 이들에게 의존했던 화해주의자들은 왕과 예언자의 이중 장부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진짜 이중권력을 숨기면서 동시에 반영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뒤 볼세비키들이 화해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소비에트의 선두에 설 때 이 숨겨진 진짜 이중권력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10월 혁명의 전조가 된다. 이때까지는 혁명은 정치적 반사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변명으로 굴절된 이중권력은 계급투쟁의 단계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원칙이 되었다. 이중권력이 모든 이론적 논의의 중심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소용이 있다: 2월 이중권력의 반사경 같은 성격 때문에 두 체제의 투쟁을 통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중권력의 시기가 더 잘 이해된다. 햇빛이 반사되어 흐릿하게 비치는 달빛이 햇빛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을 이끌게 해주는 것과 같다.
17세기와 18세기 혁명의 주역이었던 도시 대중과 비교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비교할 수없이 더 성숙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 특수성이다. 이 결과 반정도 허깨비 같은 이중권력의 역설이 나왔다. 그리고 이 결과 나중에 성립한 진짜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구 국가기구를 실제로 장악하여 자기 목적에 맞게 약간 개조하면서 소비에트를 무용지물로 만들던가 소비에트가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형성하여 구 국가기구 뿐 아니라 이것이 봉사했던 계급들의 지배를 청산하던가 둘 중의 하나였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첫 번째 해결책을 찾았고 볼세비키는 두 번째 해결책을 찾았다.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피억압 계급은 자신이 시작했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지식, 기술, 지도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러시아 혁명에서 피억압 계급인 노동계급은 이 세 가지 모두로 무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는 승리했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한지 일년만에 같은 상황이 독일에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계급 역관계는 러시아와 달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대신 소비에트를 청산하는 쪽으로 혁명을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와 리이프크네히트는 소비에트 독재로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승리했다. 독일의 힐퍼딩과 카우츠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막스 아들러 등은 소비에트 체제를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노동자 소비에트를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실현되었다면 잠재적 또는 실제적 내전이 국가 정치체제의 구성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신기한 유토피아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독일의 전통에서 유일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1848년 혁명에서 위르템베르크 민주주의자들은 공작이 국가를 대표하는 공화국을 원했다.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정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활발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중권력 현상은 맑스주의 이론과 모순되는가?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런 질문이 된다: 공급과 수요에 의한 가격 등락은 노동가치론과 모순이 되는가?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자기희생 행위는 생존투쟁 이론을 반박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현상들을 통해 같은 법칙들이 좀더 복잡하게 결합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는 계급지배의 조직이다. 혁명은 지배계급의 타도이다. 그렇다면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 이동은 반드시 자기 모순적인 국가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중권력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다. 계급 역관계는 선험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양이 아니다. 구 체제가 타도되어 균형을 잃어버리면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역관계가 확립될 수 있다. 이것이 혁명이다.
이중권력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1917년 사건들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탐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건들의 핵심에 도달한다. 정당들과 계급들의 극적인 투쟁은 바로 이중권력의 문제를 축으로 전개되었다. 오직 이론적 고지에서만 이 현상을 완전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2월 27일 타우리데 궁전에서 “노동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실체는 그 이름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소비에트의 원조는 1905년 혁명의 노동자 소비에트였다. 이 조직은 총파업 과정에서 수립되었으며 대중투쟁을 직접 대표했다. 파업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다. 따라서 대의원들은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 하는 투쟁에 의해 걸러지고 단련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집행위원회는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 소비에트에 의해 선출되었다. 무장봉기를 일정에 올린 조직이 바로 이 집행위원회였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에서는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수립하기도 전에 군대의 봉기가 먼저 승리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후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보다 먼저 그리고 공장이나 병영과는 독자적으로 결성되고 선언되었다.
이 현상은 급진주의자들의 주도력이 모범적으로 성공한 고전적인 예이다. 이들은 혁명 투쟁에서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혁명의 성과는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 했다. 이때 노동자들의 진짜 지도자들은 아직 가두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동기구의 무장을 해제하고 혁명을 무장시키면서 혁명의 확실한 승리를 확보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일종의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가운데 시야가 넓은 일부는 놀라면서 우려를 표시했다. 1916년 가을 친위 쿠데타를 예상하면서 자유 부르주아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새로 즉위하는 짜르에게 제시할 예비 정부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급진 지식인들은 2월 혁명이 승리할 순간에 이미 예비 정부를 구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한때 노동자 운동에 접근하면서 이 전통으로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애썼었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성공하자 자기들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모든 역사 특히 인민혁명의 역사를 가득 장식하는 반(半)의도적인 속임수의 한 예였다.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는 혁명이 터지면 구 지배계급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을 터득해야할 “교육받은” 계층은 대중의 영웅적 투쟁과 관련된 이름이나 상징은 어떤 것이든지 즐겁게 잡아채어 자기 것으로 위조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 따라서 이름은 진짜를 사칭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영향력 있는 집단들의 이해에 부합할 경우는 더 그렇다. 처음 생길 때부터 집행위원회는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이것은 1905년 소비에트가 계속되고 있다는 착각에 근거했다. 진짜 소비에트가 막 생겨나 혼란스러운 첫 회의를 열었을 때 집행위원회는 엉겁결에 인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소비에트 대의원들과 그 정책에 대단히 보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의 진정한 대표들을 걸러내는 삶과 죽음의 투쟁은 끝났으며 봉기는 과거지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승리에 취해 혁명의 성과를 누리며 좀더 편하게 살 궁리를 하고 긴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 같아야할 이성도 느슨해져 있었다. 소비에트는 혁명의 승리를 재단에 모셔놓는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봉기를 위한 투쟁과 준비의 기관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지도부도 물갈이되어야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새로운 갈등과 투쟁이 필요했다. 이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당시의 상황 때문에만 집행위원회와 소비에트가 온건 화해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 상황보다 더 깊고 더 끈질긴 원인들이 작용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에는 15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최소한 4배나 많은 노동자들이 이 도시에 거주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는 노동자 대의원 두 명마다 병사 대의원은 다섯 명이 있었다. 대의원 규정은 매우 가변적이었으며 언제나 병사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천 명당 한 명의 대의원을 소비에트에 보냈으나 아주 작은 군대 단위도 두 명의 대의원을 보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병사의 회색 군복이 소비에트의 분위기를 규정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선출한 민간인 외에 적지 않은 수가 개인적인 초대를 받거나 연줄에 의해 또는 단순히 침투능력 때문에 소비에트에 출석했다. 급진 성향의 변호사, 의사, 학생, 기자 등이 의심스러운 집단들을 대표하거나 단순히 개인적 야망으로 소비에트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히 왜곡된 소비에트를 지도자들은 차라리 환영했다. 이들은 공장과 병영의 뻑뻑한 진국을 교양 있는 속물들의 미적지근한 물로 희석시키는 것을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주의자들, 모험가들, 자칭 구세주들, 전문 허풍선들은 말이 없는 노동자들과 결심이 서지 않은 병사들을 상당한 기간 동안 권위로 눌렀다.
뻬쩨르부르그의 상황이 이러했다면 전혀 투쟁이 없이 혁명이 성공한 지방은 어떨지 상상이 간다. 나라 전체는 병사들로 우글거렸다. 키에프, 헬싱키, 티플리스 등의 주둔군은 뻬쩨르부르그만큼 규모가 컸다. 사라토프, 사마라, 탐보프, 옴스크 등에는 7만에서 8만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야로슬라프, 에카테리노슬라프, 에카테린부르그 등에는 6만 명이 기타 도시들에는 5만, 4만, 3만 명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각 지역마다 소비에트 대표 방식이 달랐지만 모든 곳에서 병사들은 특권을 누렸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초한 결과였다. 이들은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병사들에 의해 처음 대의원으로 선출된 하급장교들 외에도 특히 지방에서는 사령부 참모진도 특별한 대표권을 누렸다. 이 결과 군대는 다수의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렸다. 나름대로 정치노선을 갖기 전에 병사 대중은 자기 대의원들을 통해 소비에트의 성격을 먼저 규정했다.
대의기구는 자기를 선출한 대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혁명이 터진지 이틀 째 되는 날에는 특히 더했다. 정치성이 허약한 병사들이 대의원들을 선출했으나 이들은 종종 병사나 혁명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모든 종류의 지식인들과 반(半)지식인들이 병영 뒤에 숨어 있다가 병사들의 대의원이 되어 극단적 애국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병영의 정서와 병사 대의원들로 채워진 소비에트의 정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혁명이 승리한 후 스탄케비치 장교가 소속된 대대의 병사들은 그를 불신과 퉁명스러움으로 대했다. 그러나 그가 군대의 규율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병사 소비에트에서 연설했을 때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소비에트의 정서는 대대의 정서보다 왜 이렇게 부드럽고 친근할까? 이 생각이 없는 놀라움은 하층의 정서가 상층으로 전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리고 이미 3월 3일 병사와 노동자들의 집회는 이렇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자유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즉시 타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라! 이번에도 이 움직임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중의 마음에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가까운 요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선동은 곧 중단되었다. 조국방어주의자들이 날카롭게 반발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부 다수가 이미 3월초 이중권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볼세비키들 외에는 아무도 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단 한순간도 새 정부를 자신들의 정부로 인정하고 신뢰를 보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들은 병사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이들을 너무 날카롭게 반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계산이 빠른 농민은 새 지주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인 농민은 이제 막 정치 경험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뽑은 대표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병사 대표들은 집행위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후자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박동을 경청하였다. 이렇게 하부가 상부를 경청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층의 정서는 결국 표면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으로 무시되었던 권력의 문제는 비록 위장된 형태로나마 계속 제기되었다. 도시와 지방은 이중권력에 대한 불만을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병사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3월 16일 발트해와 흑해 함대의 대표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임시정부가 집행위원회와 보조를 맞출 경우 임시정부를 인정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임시정부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생각은 더욱더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 172 예비연대는 이렇게 결의한다: “군대와 인민은 소비에트의 지시만 따른다. 소비에트의 결정에 반대되는 임시정부의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만족감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집행위원회는 현실을 인정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빨을 갈면서 참았다. 이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3월초 모든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에서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다음 한두 주에 걸쳐 전국 소비에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4월과 5월이 되어야 마을 단위로 소비에트가 모습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군대만 농민의 이름으로 발언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실제적으로 국가기구로 격상되었다. 다른 도시와 지방의 소비에트들은 수도 소비에트의 지도를 받아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첫 몇 개월 동안 수도 소비에트와 지방 소비에트의 관계는 원만했다. 그러나 정세로 보아 국가기구가 명백히 필요했다. 짜르가 타도된 지 한달 만에 구성원이 불완전하고 일방적이었지만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185개 출석 소비에트 가운데 3분의 2는 지방 소비에트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병사 소비에트였다. 전선의 군대 대표들과 함께 군대 대의원들은 대개 장교였으며 소비에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연설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볼세비키들이 온건한 정도를 넘어서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토가 있었다. 이 협의회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16명의 보수적인 지방 대표들을 첨가시켰다. 이제 집행위원회는 국가기구의 성격을 적법하게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우익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부터 이들은 지방 소비에트들의 보수적 노선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분자들을 겁주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의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결의문이 3월 14일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이제는 지역 소비에트 대신 전국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집행위원회 공식 지도자들은 거의 부동의 지위를 차지했다. 임시정부 핵심들과 사전 합의를 거친 후 집행위원회 핵심들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이제 소비에트는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지도자들은 소비에트를 하나의 회의 정도로 치부했다: “총회에서 정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전원 회의’들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수하노프) 만족한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곧 틀렸음이 증명된다. 대중은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찰흙이 아니다. 더욱이 혁명의 시대에 이들은 빨리 배운다. 여기에 혁명의 원동력이 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려면 두 정당의 성격을 잠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당들은 처음부터 긴밀하게 정치적으로 연합했고 소비에트, 민주적 자치도시, 소위 혁명적 민주주의 대회 등을 장악했다. 심지어 압도적 다수의 쪽수가 꾸준하게 줄어들었으나 이들은 제헌의회 때까지 다수를 유지했다.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비추는 언덕 꼭대기의 저녁놀처럼 제헌의회는 이 정당들이 누렸던 과거의 권력을 마지막으로 반영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너무 늦게 세상에 나왔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수호할 세력이 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에 민주주의 이념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때문에 20세기를 앞둔 시기에 급진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을 사회주의로 치장해야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정당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나름의 뿌리와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멘세비키의 세계관은 맑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 때문에 러시아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기보다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곰팡내 나는 “인민주의” 지식인들을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서구화시키기 위해 역사의 신은 알맹이가 빠진 노동계급 혁명이론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멘세비키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부르주아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였던 이들은 의회와 노동조합에서 합법활동에 열중하고 있던 노동계급의 온건파 상층부와 부르주아 계급을 연결시켜 주었다.
반면 사회혁명당은 이론적으로 맑스주의에 가끔 투항하면서도 이것에 대항했다. 이들은 비판이성의 인도 하에 지식인, 노동자, 농민을 연합시킨 정당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 정당의 경제 이론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성과들이 소화되기 힘들게 뒤섞인 잡탕이었다. 이것은 급격히 자본주의 발전을 겪고 있는 나라의 농민들이 처한 모순을 반영했다. 사회혁명당에게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 내용(토대)을 정치적 개념(상부구조)으로 대체했다. 즉 토대의 진정한 변화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중간 지점에 자기 노선을 확정하고 두 양대 계급의 중재자로 나섰다. 2월 혁명 후 사회혁명당은 이 목적에 대단히 가까이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1905년 혁명 당시부터 이들은 농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17년의 첫 몇 달간 농촌의 지식인들은 모두 인민주의의 전통 노선인 “토지와 자유”를 자기 노선으로 채택했다. 언제나 도시의 정당이었던 멘세비키들에 비해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지지기반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들은 도시까지 장악했다. 소비에트에서 이들은 병사 부문을 통해 그리고 첫 민주적 자치도시들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 정당의 역량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정당은 정치적 변태에 불과했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투표하는 지를 아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정확한 의미에서 정당이 아니다. 이것은 전세계 아기들이 공통으로 내뱉는 옹알이가 진정한 언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2월 혁명의 설익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사회혁명당은 전부 엄숙히 표현했다. 혁명 이전에 이미 입헌민주당이나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던져야할 이유를 상속받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는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 입헌민주당은 유산계급들의 폐쇄된 공간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은 여전히 극소수였으며 대중에 의해 오해되고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혁명 일반에 표를 던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표를 던지는 것 이상의 의무를 이 정당은 강요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은 도시에서 병사들이 농민을 대표하는 정당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 노동자 후진층이 병사들과 좀더 가까이 하려는 욕구, 소도시 사람들이 병사와 농민들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 등을 표현했다. 당시 사회혁명당 당원증은 혁명 기관들에 입장할 수 있는 임시 극장표였다. 이 표는 좀더 진지한 성격의 표로 대체될 때까지만 유효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이 거대한 정당을 누군가가 거대한 허깨비 정당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1905년 혁명부터 멘세비키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과제로부터 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추론했다. 그리고 이 동맹을 농민과의 동맹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이들은 농민을 불안한 동맹 세력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볼세비키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 동맹을 혁명이론의 토대로 삼았다. 그런데 2월 혁명에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밀접한 정치동맹을 체결한 후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했다. 따라서 현실은 볼세비키들의 구도와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다. 이 결과 공식 정치무대에서 볼세비키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정치현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사물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회혁명당의 구호는 농촌에서 완벽한 지지를 누렸다. 그러나 이 정당은 농민 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이 정당의 정책을 규정하고 장관과 관료들을 배출한 핵심들은 봉기를 일으킨 농민 대중보다는 도시의 자유주의 및 급진 정치권과 훨씬 더 밀접했다. 3월부터 쏟아져 들어온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이 정당의 핵심 부위는 공룡처럼 덩치가 커졌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정당의 구호를 내세운 농민 봉기가 확산되자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신판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들이 잘되기를 바랬으나 공산주의 사상이 농민들을 사로잡는 것은 원치 않았다. 농민 봉기를 보고 사회혁명당 지도부가 공포에 떤 것은 노동자들의 공세에 멘세비키들이 공포에 떤 것과 정확히 맥을 같이했다. 피억압 인민 운동이 유산계급들을 크게 위협하는 것을 이 민주주의자들은 대단히 무서워했다. 이제 이 위협이 현실적인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자 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주의 반동 진영에 합류했다. 사회혁명당은 대지주 르보프공의 임시정부와 연합하고 대신 농민혁명과 관계를 끊었다. 이것은 멘세비키들이 구츠코프, 테레쉬첸코, 코노발로프 등 자본가 및 은행가들과 동맹을 맺은 후 노동계급 운동과 관계를 끊은 것과 똑같았다. 이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서로 동맹을 맺고 유산계급과 연합하기 위해 노동계급 및 농민과 각각 단절했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두 민주주의 정당의 사회주의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의 민주주의 신조가 진정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신조의 정체는 사회주의의 가면으로 위장된 무혈 민주주의였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당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합한 후 노동계급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민주적 화해주의자들과 볼세비키당 사이에 벌어지게 될 잔인한 투쟁의 사회적 뿌리였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설명한 과정들을 적나라한 계급 분석으로 환원하면 대체로 이런 역사적 결론이 나온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이 모순 때문에 참정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은 자식들과 어린 동생들을 두게 되었다. 전자는 노동자에게 후자는 농민에게 향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자기에게 밀착시키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들이며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적이라고 진심으로 뜨겁게 증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영향력은 원래의 의도를 한참 초월해버렸다. 그러자 부르주아 계급은 즉시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를 발했다. 그러자 이 계급의 자식들이자 어린 동생들인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가장의 소환에 적극 응답했다. 그리고 서로간의 이견을 서둘러 봉합하고 단결한 후 대중을 버리고 부르주아 체제를 구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 결과 이 정당들이 누렸던 대중적 영향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멘세비키당보다 사회혁명당은 더 그랬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이들이 모두 삼류 입헌민주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볼세비키당은 인식했다. 그런데 입헌민주당에게 사회혁명당은 삼류 볼세비키당처럼 보였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이류는 멘세비키당이었다.) 이 정당들의 불안정한 대중적 영향력과 사상의 무정형성은 이 정당들의 지도자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들 모두의 특징은 미완결성, 피상성, 감상적 불안정성이었다. 정치적 예리함과 계급 관계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으로 보면 가장 유명한 사회혁명당 지도자들보다 볼세비키 평당원들이 더 나았다.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안정된 정치적 자질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혁명당은 도덕적 의무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 허세를 부리면서도 이들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나 사안에서는 치사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중의 안정된 지지, 명확한 이론, 진정한 도덕적 뿌리가 없는 중간계급 정당의 특징이다.
멘세비키당-사회혁명당의 동맹에서 쪽수는 후자가 월등했지만 주도권은 전자에게 있었다. 이것은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도시 소부르주아가 농촌 소부르주아를 지배하고, “맑스주의” 지식인이 러시아 역사의 빈곤함에 자부심을 가진 러시아 토종 지식인을 지배하는 현상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난 후 첫 몇 주일간 수도에 실제 본부를 둔 좌익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그리고 제 2선 지도자들은 극동의 유형지에서 수도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 때문에 혁명 현장에 있던 임시 지도자들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면서 기다려야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단합했다. 그 당시 몇 주일동안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밀고간 주요 그룹들의 지도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내부에서 정당들은 아주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다. 똑같은 “혁명적 민주주의”가 뉘앙스만 약간씩 달리하고 있었다. 3월 19일 유형지에서 체레텔리가 도착하자 소비에트 지도부는 급격히 우경화 하여 임시정부와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역시 유형지에서 돌아온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영향으로 볼세비키당도 3월 중반에 급격히 우경화 했다. 소비에트 다수파와 소수파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4월초가 되면 3월초보다 더 적었다. 본격적인 정치적 분화는 약간 나중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시작된 날짜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난 4월 4일이 바로 이날이었다.
멘세비키당 내부에는 각기 다른 경향들을 주도하는 출중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도이치 등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선생들이 주도한 극우파는 짜르 체제하에 이미 애국주의 노선을 취했었다. 맑스주의자에 합당한 정치 생명력을 상실한지 너무 오래된 플레하노프는 어느 미국 신문에 이렇게 썼다: “전쟁 중인 지금 러시아에서 파업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범죄행위이다.” 당내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고참 멘세비키인 마르토프, 단, 체레텔리 등은 짐머발트 반전회의 진영에 가담하여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와 마찬가지로 멘세비키 좌파의 국제주의는 대개 짜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단순한 민주주의적 반대에 불과했다. 짐머발트 반전주의자 대다수는 2월 혁명이 터지자 전쟁을 혁명 방어 투쟁으로 인식하여 전쟁을 지지했다. 이 노선을 가장 당당하게 들고 나온 자가 체레텔리였다. 그는 단을 비롯한 다른 멘세비키들을 이 노선으로 결집시켰다. 전쟁이 터질 당시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마르토프는 5월 9일에야 러시아로 귀국했다. 1914년 초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절대주의에 반대한 프랑스의 좌익 가운데 게드, 쌍바 등은 조국의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방어를 주창했다. 마르토프는 2월 혁명 후 멘세비키들이 이들과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혁명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멘세비키 좌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체레텔리와 단의 조국방어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멘세비키 좌파와 볼세비키의 화해도 반대했다. 당내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체레텔리의 정책은 멘세비키당의 공식노선이 되었다. 혁명 전의 애국주의자들이 혁명 후의 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한술 더떠서 완전한 국수주의 노선을 주창하면서 멘세비키당과 소비에트 바깥에서 자기 그룹을 이끌었다. 멘세비키당을 떠나지 않은 마르토프의 분파는 자체 신문이나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역사적 행동이 필요한 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르토프는 가망 없이 허우적대다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혁명에서도 이 대단히 능력 있는 인물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멘세비키당 의원단의 의장 체이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직무에 자기 양심을 모두 바치려고 노력하면서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자신감 부족을 천진난만한 익살로 위장했다. 그는 고향의 영향을 그대로 성격에 반영했다. 산이 많은 그루지아는 노동자의 수는 대단히 적었으나 햇빛, 포도원, 농민, 군소 군주들은 많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아주 광범위한 성향의 좌익 지식인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융통성이 있었으며 흥분을 잘하는 기질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소부르주아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지역은 4차까지 열린 의회에 언제나 멘세비키 의원들을 보냈다. 이들은 멘세비키 의원단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루지아는 러시아 혁명의 지롱드파였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지롱드파가 연방주의를 표방한 반면 20세기 러시아의 지롱드파는 처음에는 통일 러시아를 나중에는 분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루지아 지롱드파가 배출한 가장 저명한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체레텔리였다. 그는 제 2차 의회 의원이었는데 유형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멘세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론가는 물론이고 신문기자도 아니었던 그는 훌륭한 웅변가였다. 따라서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배출되는 급진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일상적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의회라는 물 속의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시대에 태어나서 청년기에 맑스주의의 물맛을 약간 보았다. 그는 멘세비키들 가운데 유일하게 혁명의 와중에서 넓은 시야를 견지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2월의 이중권력 체제를 파괴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체이제는 체레텔리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다만 그의 교조적 솔직함에 가끔 크게 놀라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형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혁명가 체레텔리는 이 교조적 솔직함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마지막 의회에서 멘세비키 의원이었다는 이유로 스코벨레프는 새롭게 인기를 누렸다. 그는 젊은 외모 때문에 부유층 가정의 연극 무대에서 정치인 배역을 맡은 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과도함”을 억제하고 지역 갈등을 조용하게 해결하면서 이중권력의 새는 틈을 메우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했다. 그리고 5월의 연립정부에서는 불행하게 노동장관이 되었다.
단은 멘세비키 사이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내의 고참 활동가였으며 언제나 마르토프의 오른팔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멘세비키당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쇠퇴기에 드러냈던 피와 살, 전통, 정신 등을 먹고 성장했다. 따라서 단은 독일사민당의 행정가였던 에버트의 축소판이었다. 독일의 단인 에버트는 개량주의자로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후 러시아의 에버트인 단은 그렇지 못했다. 단이 에버트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반적 정치상황이 독일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주역인 제 1 바이올린 주자가 체레텔리였다면 귀를 찢는 날카로운 클라리넷 주자는 대단한 폐활량과 충혈된 눈을 가진 리이버였다. 그는 유태인 노동자연합(분트) 출신의 멘세비키로 오랜 혁명 경력을 자랑했다.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대단히 쉽게 흥분했던 그는 웅변술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타협적 애국자요 강철같은 정치인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열성이었다. 한편 그는 볼세비키들을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증오했다.
초좌익 볼세비키였던 보이틴스키도 멘세비키 지도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중노동 징역형에 처해졌다. 3월에 애국주의를 표방하면서 볼세비키당과 단절하고 멘세비키 대오에 합류한 그는 예상대로 볼세비키 전문 킬러가 되었다. 다만 과거 동료었던 볼세비키들을 리이버만큼 잘 괴롭히지는 못했다. 후자처럼 쉽게 흥분하는 기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부 역시 집다한 분자들의 집합체였다. 다만 이들의 수준은 멘세비키들보다 훨씬 낮았다. 사회혁명당의 극우파는 소위 인민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고참 망명가 차이코프스키가 지도자였다. 그는 플레하노프와 똑같이 군사적 국수주의를 표방했으나 재능과 경력에 있어서는 그보다 한참 모자랐다. 그와 함께 브레쉬코-브레쉬코프스카야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원들은 그녀를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러시아 반혁명의 할머니가 되려고 열성적으로 자신을 강제했다. 이미 정년을 넘긴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은 젊은 시절부터 인민주의자들에게 약점을 잡혔다. 테러 분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했던 그는 전쟁을 변명 삼아 거의 50년간 자기가 가르친 사상을 전부 부인하고 연합국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중권력도 비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라서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단일권력이 아니라서 비난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인물들은 주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내전이 터지자 차이코프스키는 처칠의 돈을 받은 백군 정부 하나를 주도하여 볼세비키들과 대항했다.
사회혁명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인물은 케렌스키였다. 그는 사회혁명당 내부가 아니라 위에서 존재했는데 정당 경력이 전혀 없었다. 이 행운아를 우리는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중권력 시기에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약점들을 결합시키는 장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식으로 사회혁명당에 입당했으나 정당 일반에 대한 그의 경멸감은 여전했다. 그는 자신을 나라에 의해 직접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사회혁명당은 거대한 그리고 전국적인 허깨비 정당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집단에서 케렌스키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적절했다.
이후 농업장관과 제헌의회 의장이 될 체르노프는 구 사회혁명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 정당에 영감, 이론, 지도를 제공했다. 교육을 잘 받았다기보다는 많은 것을 읽은 이 인물은 상당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인용문들을 무한정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러시아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로부터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잡학 지도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누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가? 도덕론과 시로 장식된 체르노프의 절충적 표현들은 잠시 동안 대단히 잡다한 대중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자신의 정당 건설 방법을 레닌의 “종파주의”와 대비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딱 맞는 행위였다.
체르노프는 레닌보다 5일 늦게 해외에서 귀국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다가 그를 억류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소비에트가 베푼 온갖 환영 행사들에서 소비에트의 최대 정당을 대표한 그는 연설도 가장 길게 했다. 반정도 사회혁명당원이었던 수하노프는 그의 연설을 이렇게 논평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수의 사회혁명당원 애국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너무 재미없게 말을 줄줄 이어갔다. 눈을 반쯤 감았다 눈알을 굴렸다 하면서 목적이나 계획이 전혀 없이 말을 무한정 이어갔다.” 혁명 과정에서 체르노프가 수행했던 모든 활동들은 그의 첫 귀국 연설과 똑같았다. 좌파의 입장에 서서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반대하려고 그는 여러 번 애를 썼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격을 받자 싸움 한번 없이 항복했다. 그리고 망명 시절 주창했던 반전주의를 청산한 후 접촉위원회 그리고 나중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부적절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안들을 회피했다. 표결 때마다 기권하는 것이 그의 정치활동 방식이었다. 4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사회혁명당보다 그의 권위가 더 빨리 와해되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서로 다른 점도 많았고 서로를 증오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뿌리는 똑같이 혁명 이전 시기에 있었다. 러시아 사회는 축 늘어진 채 기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대중을 교도하고 보호하는 은인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면서도 이들로부터 깨닫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다만 무기력과 허세가 가득했을 뿐이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이 구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대중의 정서와 욕구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면 혁명 정치인이 될 수 없다.
한편 아브센티에프는 사회혁명당에 의해 농민소비에트 집행위원장, 내무장관, 예비의회 의장 등 최고의 혁명 직책으로 상승되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 지도자의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변종에 불과했다. 오렐 여자신학교의 매력 있는 언어선생 --- 이것이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의 정치활동은 그의 개인적 매력보다 훨씬 지독한 해악을 끼쳤다.
고츠는 주로 배후에서 소비에트의 지배 파벌과 사회혁명당 분파를 크게 조종했다. 유명한 혁명 가문 출신의 테러 분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주 가까운 정치 동료들보다는 허세가 덜했고 좀더 진지했다. 그러나 소위 “실제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큰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 그는 웅변가나 문필가가 아니었다. 그의 최대의 자산은 수년간 중노동 징역형을 살면서 얻은 개인적 권위였다.
이제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급 인물들은 전부 언급되었다. 이들 밑에는 전혀 우연하게 이 당과 인연을 맺은 필리포프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가 2월 혁명의 와중에서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해군 장교였던 그가 입고 있었던 제복이 근사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집행위원회를 주도한 두 정당들의 공식 지도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수의 “재야인사들”, 독불장군들, 과거 이런 저런 단계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들, 봉기가 있기 오래 전에 운동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승리한 혁명의 깃발 아래 서둘러 운동에 복귀하여 천천히 아무 당이나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근본 문제들에서 “재야인사들”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노선을 따랐다. 첫 며칠간 이들은 심지어 지도적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유형지와 해외에서 돌아오는 지도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당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제 2선으로 물러났다. 이제 정치가 모습을 갖추어갔고 당원들은 나름의 권리를 누리기 시작했다.
집행위원회를 공격한 적들은 반동 진영에 몰려 있었다. 이들은 집행위원회 내부에 비(非)러시아인들이 “너무 많다”고 과장되게 지적했다. 유태인, 그루지아인, 레트인, 폴란드인 등등. 사실 집행위원회 위원들 전체에서 비러시아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최고회의, 각급 위원회, 연설가 집단 등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피억압 민족들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혁명 대오에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구세대 혁명가들 가운데 비러시아인의 수가 특히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은 언제나 수준이 높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대체할 수 없이 귀중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혁명과정 전체의 정책을 “너무 많은” 비러시아인들의 탓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민족주의는 진짜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인민을 또다시 경멸한다. 민족주의는 거대한 민족적 각성으로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는 시기에 이들을 외부 세력의 우연한 손에 쥐어진 나무토막으로 정도로만 간주한다. 그렇다면 비러시아인들은 혁명기에 어떻게 수백만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기적적인 능력을 가졌는가? 심대한 역사적 변화의 순간 한 나라의 다수 민족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장 억압받았던 소수민족들을 압박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 소수민족들은 새로운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동안 억눌린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꺼이 다수 민족의 압박에 호응한다. 소수민족들이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이들을 활용할 뿐이다. 지배층이 시작한 모든 거대한 개혁들은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표트르 1세(대제)는 기존의 관례에서 크게 이탈하여 비러시아인들과 외국인들을 등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섰다. 당시 독일 변두리의 영주나 네덜란드의 선장은 러시아인 사제나 모스크바 귀족보다 러시아의 발전에 필요한 요구에 훨씬 더 잘 부응했다. 사실 러시아인 사제는 오래 전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다녔으며 모스크바 귀족은 러시아를 창립한 외국 부족들을 조상으로 두었으면서도 외국인들이 나라를 너무 쥐고 휘두른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1917년의 비러시아인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들 내에서 소속 민족의 인구비례에 걸맞게 존재했다. 이것은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비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방어와 단결에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이로써 민주주의 세력의 최고 권력기관인 집행위원회의 면모를 전부 살펴보았다. 애초의 환상들은 없앴으나 편견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두 정당들은 특히 말을 행동으로 옮길 능력이 없는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 세기의 질곡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놓을 혁명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고통스러운 모순의 길고 긴 연속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대중의 혁명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내전의 비극을 초래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은 혁명 사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수립한 소비에트가 혁명을 초래한 해악들을 즉시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소비에트로 뛰어갔다. 여기에서 이들은 고통 보따리들을 전부 풀어놓았다. 고통 보따리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필요한 결정들이 빨리 내려질 것을 요구했으며 도움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정의가 구현되기를 기다렸으며 배상을 요구했다. 의뢰인, 불평인, 청원인, 폭로인 등은 마침내 자신들이 적대 권력을 몰아내고 자기 권력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면서 소비에트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인민은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인민은 무장했다; 따라서 소비에트는 주권기관이다. 이들의 생각은 당연히 옳았다. 병사, 노동자, 병사의 부인, 소상인, 서기, 부모 등의 인간 물결이 끊이지 않고 소비에트의 문을 열고 닫았다. 그리고 찾고, 질문하고, 눈물을 흘리고, 요구하고 행동을 강제했다. 심지어는 구체적인 행동을 명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는 진정한 혁명정부로 변모되었다. 물론 인민의 혁명적 압력에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한 우리의 친구 수하노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이것은 소비에트 자체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했다. 최소한 소비에트의 계획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성공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는 곧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능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공식 정부기구를 소비에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식 정부기구에 앉아 있으면서 구 권력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던 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수하노프는 슬픈 모습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행정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마린스키 궁전(구 정부청사)이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허구를 유지해야 한다.” 전쟁과 혁명의 불길로 인해 파괴된 나라에서 이들이 바쁘게 한 일은 인민이 근본적으로 타도한 정부의 권위를 속임수로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은 죽어도 허구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들이 문밖으로 몰아낸 진짜 권력은 창문을 통해 계속 기어 들어와 이들을 기습하였다. 이때마다 이들의 모습은 비참하거나 우스꽝스러웠다.
2월 28일 밤 집행위원회는 짜르를 지지하는 언론을 폐쇄시키고 신문 발행 허가제도를 공포했다. 그러자 그동안 남의 입을 틀어막았던 반동들이 가장 크게 저항했다. 며칠 후 집행위원회는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제에 다시 부딪쳐야했다: 반동 신문들의 발행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견이 표출되었다. 수하노프같은 교조주의자들은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주창했다. 이에 대해 체이제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철천지원수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는가? 그런데 이 문제를 임시정부에 넘기자고 제안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자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의 명령만 따랐다. 3월 5일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확정했다: “우익 언론은 폐쇄되었으며 새로운 신문의 발행은 소비에트가 허가한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3월 10일 이 결의문을 철회했다. “이들이 제 정신을 차리는데는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수하노프는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허약한 기쁨이었다! 언론은 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혁명 중에 언론의 존재는 혁명의 진전 자체를 반영한다. 혁명이 내전의 성격을 띠면 경쟁 세력들은 자기 영역 내에 적대적 언론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들이 장악한 병기고, 철도, 인쇄시설 등을 적들에게 내주지 않는 것과 똑같다. 혁명 투쟁에서 언론은 일종의 무기일 뿐이다. 당연히 표현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에 종속된다. 사실 혁명은 생존의 권리마저 자기 밑에 둔다. 혁명정부는 자신의 강령이 천박할수록 그리고 과거와 긴밀히 얽혀있어서 보수적일수록 반동 세력에게 더 큰 관용과 자유를 베풀고 더 “아량을 보인다”. 그리고 이의 역도 성립한다: 혁명 권력은 수행해야할 임무가 거대할수록 그리고 파괴해야할 기득권이 많을수록 자기 손에 더욱더 많은 힘을 결집시키고 독재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좋든 나쁘든 인류는 이 혁명 법칙을 통해 지금 여기까지 전진해왔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소비에트의 결정은 옳았다. 그렇다면 왜 이 올바른 결정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가? 진지한 투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평화와 토지 문제 심지어 공화국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권력을 보수 부르주아에게 넘긴 뒤였기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우익 언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고 이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개월 후 정부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아 좌익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 신문들은 하나 하나 폐간되었다.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케렌스키는 열변을 토했다: “짜르는 내 손안에 있다. 나는 러시아 혁명의 마라(역자 주: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벵파의 지도자. 혁명 신문 [인민의 벗]을 발행하며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다가 반동의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스 2세는 나의 감독 하에 영국으로 보내질 것이다....” 유한 부인들은 이 연설에 호응하여 꽃을 던졌고 학생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혁명 인민은 술렁거렸다. 제대로 된 혁명은 폐위된 왕이 국경선을 넘어 도망가는 것을 방치해 본 적이 없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계속 요구했다: 로마노프 왕족들을 체포해라.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이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비에트가 로마노프 왕족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공개 선언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철도를 책임지는 모든 조직에게 짜르를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짜르의 기차가 철길에 그대로 정지해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집행위원회의 위원인 노동자 그보스데프는 멘세비키 우파였는데 니콜라스 2세를 체포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찌그러졌고 그와 함께 임시정부도 찌그러졌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지는 않고 말없이 가만히 복종하기만 했다. 3월 9일 체이제는 집행위원회 보고를 통해 임시정부가 짜르를 영국에 보내는 생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짜르 일가는 이제 동궁에 가택연금 되었다.
이렇게 집행위원회는 자신의 베개 밑에 있던 권력을 다시 훔쳤다. 그러나 전선에서 끈질긴 요구가 계속 올라왔다: 짜르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집어넣어라!
혁명은 입법 조치 뿐 아니라 혁명 대중 스스로의 몰수 행위를 통해 소유권을 바꾸어왔다. 역사상 어떤 농민혁명도 이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법적 개혁은 언제나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뒤진다. 그러나 농촌에 비해 도시에서는 강제 몰수가 미미했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 소유관계를 뿌리뽑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적들의 건물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대중이 전유하지 않은 혁명 역시 없었다. 2월 혁명이 승리한 직후 정당들은 지하활동을 청산하고 공개의 장에 나타났다.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집회가 계속 열렸다. 모든 지구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 모든 활동에는 본부가 필요했다. 단체들은 짜르 장관들이 소유했던 여름 별장이나 짜르의 발레리나들이 기거했던 궁전 등 사용되고 있지 않는 건물들을 몰수했다. 구 소유주들은 불평했다. 또는 정부가 스스로 이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나 공식 정부는 껍데기에 불과했고 몰수자들이 실세였다. 따라서 검사들이 집행위원회에 호소하여 발레리나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필요했다. 다만 짜르 왕족들은 발레리나의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기능에 대해 인민을 희생시키면서 너무 후하게 값을 지불해왔다. 물론 접촉위원회의 개입이 필요했다. 장관들이 회의를 열었다. 집행위원회 사무국(局, bureau)도 회의를 열었다. 대표단이 몰수자들에게 보내졌다. 이 일은 수개월을 질질 끌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좌익’이므로 소유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법적 침해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강제 몰수에는 결연히 반대한다.” 이와 같은 속임수를 동원하여 혁명에 불만을 가진 “좌익”분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을 은폐해왔다. 진정한 혁명정부라면 시기 적절한 건물 징발 포고령을 통해 혼란스러운 몰수를 당연히 최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좌익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사적 소유권의 광신도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혁명이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요지의 설교를 대낮에 대중 앞에서 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의 공기는 이런 종류의 관념주의를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빵을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은 혁명에게 최후의 자극을 가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정권에게는 가장 시급한 위험 요인이었다. 소비에트의 첫 회의에서 식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도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을 기아로 굴복시키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임무는 소비에트에게 떨어졌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 및 행정 기구에서 일을 했던 경제 및 통계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르먼이나 체레바닌과 같이 대부분 우파 멘세비키였거나 볼세비키였다가 극우로 선회한 바자로프나 아빌로프였다. 그러나 임무에 착수하자마자 투기를 제압하고 시장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소비에트는 일련의 회의들을 통해 “군사적 사회주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이제 모든 곡물상점들은 공공소유로 전환되었다. 빵 가격이 확정되었다. 공업제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가격이 책정되었다.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다. 농민과의 상품 교환도 국가가 통제했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경악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제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급진적 해결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접촉위원회는 당혹스럽게 이 내용들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정부는 이 조치들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보프공과 구츠코프와 코노발로프는 자기들과 자기 동맹자들에게 통제나 징발 등 어떤 제한 조치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모든 경제 조치들은 국가기구의 수동적 저항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따라서 지역 소비에트들이 이 조치들을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식량 공급과 관련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유일한 실제적 조치는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 종사자에게는 1.5 파운드의 빵을 나머지에게는 1 파운드의 빵을 배급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 제한 조치는 수도 주민의 식량 지출액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빵 1 파운드나 1.5 파운드나 생명을 부지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일상적인 영양실조는 여전히 계속될 전망이었다.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간 혁명은 쪼그라드는 위장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련을 견디어 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기아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었다. 32개월의 전쟁으로 불거진 경제적 난관들은 새 정부의 문과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수송의 마비, 원자재의 부족, 장비의 상당한 노후화, 위험수위에 다다른 인플레, 상업의 마비 등 모든 난관들이 대담하고 발빠른 조치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을 경제적으로 접근하면서 정치적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직면한 모든 경제 문제들은 이중권력을 부정했다. 모든 결정사항들에 서명하는 이들의 손가락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하루 8시간 노동제 투쟁은 계급 역관계를 크게 시험했다. 봉기는 성공했으나 총파업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생활이 곧바로 달라져야 한다. 이 때문에 새 정부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즉시 불안을 느꼈다. 애국주의 정당들과 신문들은 “병사는 병영으로 노동자는 작업장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라고 노동자는 묻는다. 이에 대해 멘세비키들은 “당분간만 그렇소.”라고 당혹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알고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집행위원회는 혁명이 승리하여 혁명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지위가 충분히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3월 5일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복귀하는 날로 정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가시오! 자유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교육받은 계급들의 뻔뻔한 이기주의가 명백히 드러났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터져 나와 봉기가 승리했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을 승리로 이끈 수백만 노동자 병사들이 이제 유순하게 과거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 서적을 읽은 이들은 과거의 혁명도 이렇게 결말이 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틀렸다. 과거에도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돼지우리로 다시 갇힌 경우는 패배와 기만 등의 우회로를 한참 겪은 후였다. 마라는 정치혁명이 잔인하게 왜곡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식 역사가들에 의해 엄청난 비방을 당했다. 1792년 8월 10일의 혁명이 있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은 최하층 계급들 그리고 무산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된다. 이들을 뻔뻔한 부자들은 하층민이라고 부르고 로마인들은 늘 그랬듯이 냉소하면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혁명이 무산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 “혁명운동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다가 마침내 정복된다. 지식, 기술, 수단, 무기, 지도자, 명확한 행동계획 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 기민함, 술수 등을 가진 음모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 케렌스키가 러시아 혁명의 마라가 되기를 원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러시아의 거물 자본가 아우어바하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층민들은 혁명을 부활절의 축제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하인들은 며칠 동안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빨간 리본을 단 채 산보를 하고 자동차를 타고 아침에 집에 와서 세수한 후 다시 재미를 보러 나갔다.” 혁명의 풍기 문란 행위를 비방하는 이 자본가는 하인의 행위를 부르주아 유한 마담의 일상과 비교한다. 대단히 주목할만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빨간 리본을 다는 것은 비교에서 제외된다. 그렇다. 피억압자들은 혁명을 휴일 또는 휴일 전야로 인식한다. 혁명으로 흥분한 하인은 피할 수 없는 모욕적이고 괴로운 일상의 노예 노동에서 벗어나려고 제일 먼저 시도한다. 노동계급은 승리의 상징으로 빨간 리본을 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랬다면 혁명은 남을 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뻬제르부르그 공장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술렁거렸다. 상당수의 작업장들은 소비에트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물론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조건으로 조업에 복귀할 것인가? 이들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그러자 멘세비키들은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강제로 도입하려다가 패배한 경험을 언급했다. “반동 세력과 자본가들 모두에 대항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버겁다.” 이것이 멘세비키들의 핵심 사고였다. 이들은 미래에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과 단절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순전히 이론적인 인정은 이들의 행동을 전혀 속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단절을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멘세비키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웅변가나 기자들의 열띤 말이 아니라 근로 대중의 독립된 행동에 밀려 반동 진영에 합류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투쟁을 반대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이렇게 설교했다: “사회문제들은 노동계급에게 제일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정치 자유를 획득해야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노동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근육과 신경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멘세비키들이 8시간 노동제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설명하던 3월 10일 바로 그 날에 소비에트와 공식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던 제조업 협회는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하고 공장 및 작업장 위원회의 수립을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 공업 자본가들은 소비에트의 민주주의 전략가들보다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과 얼굴을 늘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공장의 반 이상 그리고 대공장의 다수가 이미 8시간 노동을 끝내고 집단적으로 작업장을 떠나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거절한 것을 고용주들은 허용했다. 자유주의 신문은 살살 녹는 말로 1917년 3월 10일 러시아 자본가들의 제스처를 1789년 8월 4일 프랑스 귀족들의 제스처와 비교했다. 그런데 이 비교는 이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역사적 진실에 훨씬 가까웠다: 18세기말의 봉건세력과 똑같이 20세기초 러시아 자본가들도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시적으로 양보하되 미래에는 모든 것을 다시 확실히 되돌리고 싶어했다. 입헌민주당의 어느 기자는 솔직히 인정했다: “멘세비키들에게는 불행하지만 볼세비키들은 이미 테러를 통해 제조업 협회가 8시간 노동제를 즉시 도입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 거짓말이었으나 내용으로 보면 진실이었다. 이 테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노동자 볼세비키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투쟁을 주도했다. 2월의 결정적 순간과 똑같이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들을 따랐다.
멘세비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는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얻어진 노동자들의 이 거대한 승리를 착잡한 감정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망신을 당한 이 지도자들은 더 전진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되었다. 이들은 제헌의회 소집보다 먼저 러시아 전역에 8시간 노동제를 선언하자고 임시정부에 제안해야했다. 그러나 정부는 자본가들과 합의를 이미 끝낸 후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소비에트가 이렇다할 집요함이 없이 제시한 이 제의를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면서 거부했다.
모스크바에서도 똑같은 투쟁이 벌어졌으나 똑같은 결과를 쟁취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여기에서도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조업재개를 요구했다. 어느 대공장에서는 파업 종료를 반대하는 결의안이 7천 대 6의 표차로 통과되었다. 다른 공장들도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3월 10일 소비에트는 즉시 조업을 재개할 것을 다시 촉구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공장에서 조업은 재개되었으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직접 행동을 통해 지도자들을 교정시켰다. 오랜 거부 끝에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3월 21일 8시간 노동제 도입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즉시 소비에트의 선언을 이행했다. 지방에서는 4월까지 이 투쟁이 계속되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는 이 투쟁에 저항했다가 나중에야 노동자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본가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 독자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억압체제는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는 고의적으로 개입을 회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에 대한 맹렬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간질시키기로 결정되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전선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전시에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참호에서도 시간을 계산하는가?... 유산계급들은 일단 참주선동을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선동은 열을 띠면서 참호로 퍼졌다. 이 선동은 주로 얼치기 사회주의자 장교들에 의해 곧바로 수행되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병사 피레이코는 회상한다. “그러나 이들이 장교였기 때문에 선동 효과는 크게 약화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장교들이 과거에 자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비방하는 이 선동은 수도에게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주둔군 막사에서 자본가들과 입헌민주당은 선동의 기회와 수단을 무진장 찾아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3월말이 되자 횡단보도, 전차, 모든 공공장소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주먹싸움까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능숙하게 이것을 피했다. 사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전쟁으로 자본가들이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이윤을 수치로 설명하고 기계 소리가 귀를 찢는 공장을 병사들에게 보이고 용광로의 살인적인 열기를 이들이 느끼게 해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산재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노동자들의 주도하에 주둔군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공장을 찾았고 특히 병기공장을 찾았다. 병사들은 공장을 보고 노동자들의 말을 직접 들었다. 노동자들은 증명해 보이고 설명했다. 이 방문은 노동자와 병사의 연대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과의 흔들릴 수 없는 연대를 표시하는 군대의 수많은 결의문들을 사회주의 신문들이 보도했다. 4월 중순이 되면 노동자와 병사의 다툼은 신문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부르주아 신문은 침묵을 지켰다. 경제투쟁의 승리 후 노동자들은 정치적 도덕적 승리도 함께 거두었다.
8시간 노동제 투쟁과 관련된 사건들은 혁명의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노동자들은 몇 시간 자유를 얻어 신문과 책도 읽고 회의에도 참가하고 소총 사격연습도 했다. 노동자 민병대가 수립되는 순간 사격연습은 일상화되었다. 더욱이 이 투쟁으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좀더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멘세비키당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공장에서 더욱 커졌으며 병영에서도 부분적으로 확대되었다. 병사들은 좀더 꼼꼼해지고 생각이 깊어졌으며 사물을 냉철하게 주시했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밟으면서 공작을 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참주선동의 기만적 술수는 역작용을 일으켰다. 이 결과 노동자와 병사들은 서로 반목하고 거리를 두는 대신 연대를 더욱 두텁게 했다.
“접촉위원회”의 그럴듯한 간판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소비에트 지도자들, 자신에 대한 이들의 감시 행위를 증오했다. 이 증오심은 단박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순전히 정부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임시정부가 대중을 억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정부의 요청에 따라 수행했다. 따라서 집행위원회는 활동비용으로 소액의 지원금을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자 정부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반복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설 단체”에게 국가의 자원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비에트는 대항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비에트의 재정은 노동자들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모금을 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상호 친선의 예의를 지켰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는 이중권력이 허구라고 선언했다. 케렌스키는 병사 대의원들에게 정부와 소비에트는 완벽히 단결하고 있다고 확신시켰다. 체레텔리, 단 등 소비에트의 핵심 지도자들도 이중권력의 존재를 한사코 부인했다. 이 거짓말을 통해 이들은 거짓말에 바탕을 둔 권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권력은 첫 주부터 비척거렸다. 조직적 연합을 위해 지도자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들은 우연히 등장한 온갖 종류의 대의기구들을 대중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을 노동자들에 대항하게 만들고 새로운 의회, 도의회, 협동조합 등이 소비에트에 대항하게 만들고 지방이 수도에 대항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관료들이 인민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소비에트 형태라고 특별히 신비로운 영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비에트도 모든 대의기구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결점들을 최소화시키는 데에 소비에트의 강점이 있다.
소비에트 이외의 대의기구는 대중을 원자화시키기 때문에 혁명기에는 대중의 의지를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그것도 대단히 지연시키면서 반영한다. 이후 사건들은 이 주장의 진실성을 곧 증명할 것이다. 모든 혁명적 대의기구 가운데 소비에트는 가장 유연하며 가장 직접적이며 투명하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대의기구이다. 주어진 순간에 대중이 투입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소비에트는 대중이 자기 오류를 이해하고 교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기능 때문에 소비에트는 혁명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도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후 수하노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의 계획에 의하면 권력을 잠시만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고 민주주의가 강화되면 곧 확실히 다시 넘겨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어쨌든 단순하기도 하지만 사건이 지나간 다음의 회고 타령에 불과하다. 당시 이런 계획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체레텔리는 집행위원회의 동요를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이 조직에 체계를 부여했다. 그는 공공연히 이렇게 선언했다: 강력한 부르주아 권력이 없으면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세력은 자유부르주아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선에서 그쳐야한다; 부주의한 행위로 이들을 반동 진영으로 밀치지 말아야한다; 역으로 이들이 혁명의 성과를 지지하는 한 이들을 지지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체레텔리의 이 어정쩡한 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야당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성립시켰을 것이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의 곤란 중의 곤란은 전반적인 계획의 부재가 아니었다. 당면한 행동 강령의 부재가 진짜 어려움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압력”을 행사하여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민주적 정책을 유도하겠다. 인민 대중의 압력으로 지배계급이 양보를 한 경우는 역사상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압력”은 지배계급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무기가 민주주의 세력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권력을 자발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이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경우에는 민주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반납하겠다고 위협했다. 따라서 압력을 행사할 핵심 지렛대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정부가 어느 정도 진지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모든 조치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되면 완전히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핵심 지도자들에게 집행위원회는 너무 큰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사무국(bureau)”이 구성되어 조국방위주의자 우파가 이것을 장악했다. 이제 큰 틀의 정치는 이 조그만 사무국에서만 진행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잘 짜여진 것처럼 보였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에서 무한한 재량권을 누리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아래에서 대중이 최초의 경고음을 울린다. 케렌스키의 그룹과 가깝게 지냈던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썼다: “정치작업의 권한을 조국방위주의 정당들로만 선정된 사무국이 장악한 바로 이 순간에 대중 통제력은 이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대중은 이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었다. 사물의 법칙에 딱 들어맞을 뿐이었다.
혁명 몇 개월 전에 군대의 규율은 이미 크게 무너져 있었다. 이 당시 장교들이 늘어놓은 불평들의 예는 너무나 많았다: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병사들이 말(馬), 군용 물품, 심지어는 무기들도 함부로 취급한다; 군용 기차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있다 등등. 사태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곳에서 똑같이 파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혁명이라는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봉기는 장교 없이 장교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들은 모두 머리를 처박고 숨었다. 10월당 의원 쉬들로프스키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장교들과 2월 27일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의회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귀족 출신의 왕당파 장교들이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반정도 위선이 결합된 무지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들로프스키는 말한다: “바로 다음날 연대 전체가 군악대를 앞세우고 대형을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대오는 아주 질서정연했다. 그런데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물론 몇 개 중대는 장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병사들은 장교들을 끌고 다녔다. 물론 이 의기양양한 행진에서 장교들은 자기들이 포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체포된 몸으로 이 광경을 본 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장교들은 도살장으로 떠밀려 가는 양떼와 같았다.”
2월 봉기는 병사와 장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원래 있었던 분열을 표면에 드러냈을 뿐이었다. 병사들의 입장에서 왕정에 대한 봉기는 곧 군 지휘부에 대한 봉기였다. 당시 장교복을 입고 있었던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2월 28일 아침부터는 외출이 위험했다. 병사들이 장교들의 견장을 잡아뜯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권력의 첫날 병영의 모습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우선 병사들과 장교들의 화해를 촉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사들이 기존 지휘부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하노프는 말한다: 장교들이 소속 연대로 복귀하는 것은 “전면적인 혼란과 무지몽매하고 기강이 무너진 병사들의 독재”에 대항해 군대를 보호하는 행위이다. 이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이 장교가 아니라 병사를 두려워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무지몽매한” 병사들과 똑같이 똑똑한 장교들이 진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병사와 장교의 화해는 일시적일 뿐이었다.
봉기 후 부대로 복귀한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반응을 장교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은 규율을 어기고 장교의 허락 없이 그리고 대개 장교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영을 나갔다. 장교들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거대하게 자신들을 해방시켰다. 장교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장교들이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하여 이들의 봉기를 도왔는가?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고 덜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나자 장교들은 자기들도 혁명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갈까?” 그런데 스탄케비치 자신은 “좌익”성향의 장교이면서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다.
28일 아침 삼프소니에프스키 가도에서 어느 공병사단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증오하는 정부가 타도되었다. 대신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전과 같이 장교들의 명령을 따라야한다. 이제 모두 각자의 위치로 복귀하라.”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외쳤다: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저자 주: 이 말은 군대에서 병사들이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는 관습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전부야?”
이때 노동자 카유로프는 이 광경을 보고 열이 받았다. 그는 “내가 한 마디 합시다.”라고 말한 후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병사들에게 질문했다: “3일 동안 뻬쩨르부르그 거리에는 노동자들의 피가 흘렀다. 지주 한 놈을 다른 지주 한 놈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이런 희생을 했는가?” 카유로프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이 질문은 앞으로 몇 달간의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장교에 대한 병사의 적대감은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이 굴절된 형태였다.
지방의 장교들은 제때에 상부의 지시를 받아 수도의 혁명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시던 폐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정사를 돌보셨다. 그래서 정부의 짐을 동생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림 반도의 벽촌서 근무하던 어느 장교는 병사들의 반응이 “니콜라스나 미하일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얼굴에 써 있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 장교는 다음날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병사들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한다. 이들의 질문, 제스처, 눈빛 등은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무지몽매하고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 누군가가 장기간 끈질긴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장교들은 아무 노력 없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온 최근의 전보를 머리 속에 입력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투박하지만 정직하게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정하면서 못이 박힌 손바닥에다 혁명을 저울질했다. 혁명에 대한 두 집단의 태도는 이렇게 차이가 컸다!
한편 전쟁 총사령부는 혁명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 소식이 전선에 퍼지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다.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명령했다: “갱단”(그는 혁명 대표단을 이렇게 불렀다)이 관할 지역에 들어오면 이들을 즉시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다음날 그는 “전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의 이름으로 “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즉 혁명을 중지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총사령부는 최대한 늦게까지 현역군에게 혁명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짜르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러 전선에서 혁명 소식을 차단하는 혁명 검역이 실시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한 모든 편지들은 전달이 금지되었고 신병들의 부대 배치가 연기되었다. 이렇게 구 체제는 영겁의 시간에서 며칠을 도둑질했다. 3월 5일이나 6일이 되어서야 혁명 소식은 전투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소식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이 군통수권자로 임명되었다; 짜르는 조국을 위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외에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참호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다수의 참호에서 혁명 소식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에 의해 먼저 퍼졌다. 총사령부가 혁명 소식을 은폐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병사들에게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 혁명 소식이 전해진 이틀 후 장교들은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달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들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흑해 함대의 사령관은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의 혁명 소식은 처음에는 병사들에게 이렇다할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사회주의 신문이 도착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의 정서가 변했다.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범죄 선동가들이 숨은 틈에서 기어 나왔다.” 이 해군 제독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정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신문이 아니었다. 신문은 혁명의 정도에 대한 병사들의 의구심을 없애고 이들이 지휘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진짜 생각을 표현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부의 정치노선은 이 해군 제독의 말 한마디에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함대 장교들의 대다수는 짜르가 없으면 조국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자들도 자기들이 “무지몽매한” 수병들에게 이 밝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조국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군과 해군의 지휘부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 부류는 자기 직책을 고수한 채 혁명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했다. 나중에 이들의 일부는 심지어 볼세비키당에 기어들어 오려고 했다. 다른 부류는 한동안 목에 계속 힘을 주면서 새 질서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격렬한 투쟁을 일으키다가 병사들의 대세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이 분화는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혁명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정에 조금의 흔들림 없이 충성했던 장교들 가운데 한 명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혁명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이들은 병사들의 항명보다는 동료 장교들의 항복에 의해 더 크게 타격을 입었다. 크게 보았을 때 구 지휘부의 대다수는 밀려났거나 제압되었고 극히 일부분만이 재교육을 받고 혁명에 합류했다. 결국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장교들은 출신 계급의 운명을 따른 셈이었다.
군대는 언제나 자기가 모시는 사회를 그대로 닮는다. 다만 사회 관계를 응축된 형태로 표현하여 이 관계의 긍정적 부정적 특징 모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일반 사회와 다르다. 전쟁 중에 러시아는 위대한 지휘관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하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과도한 모험주의, 과도한 무식, 과도한 이기심, 음모, 출세주의, 탐욕, 무능력, 선견지명의 결여, 개인의 목숨 심지어는 안위와 건강까지 희생할 수 있는 지식과 재능과 욕구의 결여” 등이 총사령부의 특징이라고 총사령부 소속의 잘레스키 장군이 말했다. 첫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의 특징은 큰 키에 위엄 있는 무례함이 전부였다. 날카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늙은 군대 서기인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인내심 하나로만 다른 장군들을 제압했다. 코르닐로프는 대담한 소장파 지휘관이었으나 그를 존경하는 자들조차 그가 약간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케렌스키의 전쟁장관 베르호프스키는 나중에 코르닐로프를 사자의 심장과 양의 두뇌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브루쉴로프 장군과 콜착 제독은 다른 장군들에 비해 교양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데니킨은 근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책을 5권이나 6권만 읽은 대단히 평범한 장군이었다. 이들 다음에는 유데니치, 드라고미로프, 루콤스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하거나 못하거나 술을 적당히 마시거나 지나치게 마시는 것 외에 범인과 다를 바 없었다.
봉건 러시아처럼 부르주아 및 민주주의 러시아도 장교단에 대표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은 수만 명의 소부르주아 청년들을 장교, 군대 서기, 군의관, 공병장교로 합류시켰다. 이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고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광범위한 개혁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체로 반동 지휘부를 추종한 이들은 짜르가 있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혁명 후에는 확신을 가지고 반동 세력에 복종했다. 후방의 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복종한 것과 같은 식이었다. 화해주의 장교들은 이후 화해주의 정당과 같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다. 다만 전선은 후방보다 천 배나 날카롭게 매사가 진행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애매한 입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사들 앞에서 장교들이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주주의 장교들과 귀족 장교들 사이의 악감정과 갈등은 군대를 소생시키기는커녕 붕괴시키는데 일조 했다. 구 러시아에 의해 성격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완전히 봉건적이었다. 겸손하고 생각이 없는 농민 청년일 뿐 개인 의식에 아직 눈뜨지 않은 병사, 이것이 장교들이 생각하는 모범적인 병사였다. 이것이 러시아 군대의 “민족” 전통이었다. 이것을 수보로프 전통이라고 하는데 원시 농업, 농노제, 농촌 공동체에 기초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수보로프 원수는 이 군대를 지휘하며 군사적 기적들을 창조하고 있었다. 귀족의 시각으로 인민을 사랑한 톨스토이는 자기가 창조한 플라톤-카라타예프를 통해 구 러시아 병사의 전형을 이상화했다. 이 병사는 혹독한 자연, 폭정, 죽음에 불평 한마디 없이 복종했다([전쟁과 평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주의의 찬란한 승리를 가져다준 프랑스 혁명은 동시에 수보로프식 용병술을 퇴출시켰다. 프랑스 혁명 후 러시아 혁명 발발까지 즉 19세기 전부와 20세기초까지 짜르의 군대는 봉건 군대였기 때문에 계속 패배했다. “민족”전통에 기초한 러시아 군 지휘부는 병사의 개성을 경멸하고 수동적 관료주의 정신에 찌들어 있었다. 또한 군사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이었으며 군사적 영웅주의 즉 자기희생의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은 대신 치사하게 군대의 재산이나 훔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월 의식을 드러내는 외양, 특권계층의 예식, 억압 체제, 심지어 특별한 은어 즉 병사가 장교에게 사용하게 되어있는 경멸할만한 노예적 표현 등에 장교의 권위가 기초하고 있었다. 짜르의 원수들은 말로만 혁명을 인정하면서 임시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무너진 왕정 탓으로만 돌렸다. 니콜라스 2세가 역사 전체의 속죄양으로 선언되는 것을 이들은 정중하게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인민 대중을 고귀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혁명의 도덕적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억압하여 특권을 누렸던 짜르의 장군들이 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선의 사령관에 임명된 데니킨은 민스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혁명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혁명을 군대에 도입하고 참주 선동을 일삼는 것은 나라를 망칠 뿐이다.” 고위 장성들의 멍청함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예가 아닐 수 없다! 잘레스키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하위 장성들의 요구는 단 하나였다: “제발 간섭만 말아달라.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전부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들을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특권 계급이었기 때문에 얻을 것은 없어도 잃을 것은 많았다. 이들은 장교 특권 뿐 아니라 토지마저 내놓아야할 처지였다. 임시정부에 충성하여 자신들을 보호한 후 반동 장교들은 소비에트에게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혁명이 병사 대중 그리고 자기들 장원에까지 침투하자 이들은 볼세비키당은 말할 것도 없고 케렌스키, 밀류코프, 심지어 로지안코까지 지독한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해군의 일상조건은 육군의 경우보다 더욱 가혹하였다. 따라서 내전의 씨앗은 해군에서 더 크게 자랐다. 강철 벙커에 강제적으로 몇 년간 감금되는 수병들의 생활은 음식의 문제에서조차 노예선 노예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이들 옆에는 대부분 특권 계급 출신으로 해군 복무를 소명으로 여기는 장교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국, 짜르,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수병을 군함의 가장 쓸모 없는 부분으로 여겼다. 서로 이질적이며 극도로 폐쇄적인 두 세계가 가까이 접촉하면서 서로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함대의 군함들은 군함 건조와 보수를 위해 노동계급이 밀집된 공업도시들을 항구 기지로 사용했다. 더욱이 군함의 공병 및 기계 병과에는 상당수의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함대는 혁명의 어뢰였다. 모든 나라의 혁명과 군대 봉기에서 수병들은 가장 폭발성이 강했다. 이들은 거의 언제나 첫 기회가 오자마자 과감하게 장교들과 충돌했다. 러시아 수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에서는 혁명의 승리와 동시에 수병들이 장교들에게 유혈 보복을 벌였다. 장교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포에 질린 듯이 수병들에게 혁명의 소식을 숨겼었다. 당연히 수병들이 증오했던 비렌 제독은 보복의 첫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다수의 지휘부 장교들이 수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되지 않은 장교들은 무기를 압수 당했다.
헬싱키와 스베아보르그에서 네페닌 제독은 3월 4일까지도 봉기의 소식을 숨겼다. 그는 이 동안에도 병사와 수병들을 탄압하겠다고 협박했다. 따라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병사와 수병들의 봉기는 그만큼 더 격렬했다. 봉기는 하루 밤과 낮 동안 계속되었다. 다수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가장 증오스러운 장교는 얼음이 꽁꽁 언 바다 밑으로 처넣어졌다. “무지몽매한 병사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은 수하로프도 이렇게 썼다: “함대 장교들과 헬싱키 군 당국의 잔혹행위를 스코벨레프가 올바르게 묘사했다면 장교들에 대한 과격한 행동이 이렇게 드물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육군에서도 병사들은 장교들에게 여러 차례 유혈 보복을 했다. 맨 처음에는 장교들의 잔혹한 병사 구타에 대한 복수였다. 병사들은 원한에 사무친 학대를 수없이 당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에 채찍질이 규율을 유지하는 체벌로 군대에 공식 도입되었다. 가장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병사들이 장교의 재량에 의해 채찍질을 당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보복은 과거의 잔악 행위에 대한 복수만은 아니었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어느 병사 대의원은 이미 3월 15일이나 17일에 현역군에 체벌 도입 명령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어느 의회 의원의 말에 따르면 장교가 없는 틈을 타 카자흐 병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명령서가 있소.(이것은 그 유명한 명령 제 1호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어제 이것이 도착했소. 그리고 오늘 장교가 나의 턱을 후려갈겼소.” 군대의 볼세비키들은 화해주의자들만큼이나 분주하게 병사들의 보복행위를 제지했다. 그러나 유혈 보복은 발사된 총이 자동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불가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었다. 구태여 근거가 있다면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자기들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권력을 잡았다는 것뿐이었다.
일부 장교들은 붉은 리본에 대해 격렬한 갈등을 조장했다. 병사들에게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했다. 이 과정에서 숨스키 연대의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새로 도착한 지원군 병사들에게 리본을 달지 말라고 명령한 어느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위병 막사에 감금되었다. 장교 숙소에서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짜르의 초상화에 대해서도 종종 싸움이 벌어졌다. 장교들이 아직도 왕정에 충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짜르의 초상화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초상화 뒤에 구 체제의 귀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상부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병사들의 경련과 같은 운동에 의해 군대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은 폐지되지도 제한되지도 않았다. 다만 3월의 첫 몇 주일간 저절로 없어졌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관이 말했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 자체가 없어졌다.” 바로 이것이 인민혁명이 진정 승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규율을 강제할 권한이 없어진 군대 지휘부는 완전히 파산했다. 뛰어난 관찰력과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인 장교 스탄케비치는 지휘부의 파산을 의기소침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과거의 규율에 따라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훈련은 병사의 인내심과 복종심을 시험했을 뿐이었다.” 물론 장교들은 자기들의 파산상태를 혁명의 탓으로 돌리려했다.
재빨리 잔인하게 보복을 가한 병사들은 동시에 순진한 어린애처럼 쉽게 남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망각한 채 장교들에게 인간의 정을 베풀기도 했다. 신부이자 자유주의 의원인 필로멘코는 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의 기수이자 혁명의 보호자로 잠시 인식되었다. 교회의 낡은 사상은 우습게도 새로운 신념과 결합되었다. 병사들은 그를 머리에 이고 썰매 위에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는 나중에 환희에 겨워 목이 멘 채 의회에서 말했다: “작별 인사를 끝낼 수 없었다. 병사들이 나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의원은 의회가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혁명이었다. 그리고 우연하게 유명해진 인물들에게 눈부신 광선을 반사시킨 것도 혁명이었다.
전쟁장관 구츠코프는 수십 명의 장군들을 해임시켜 군 상층부를 상징적으로 정화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병사들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만 고위급 장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들은 지위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장교 대다수는 대세에 거스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혁명에 대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머니 속에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병사들과 일상적으로 대면해야했던 중간급 및 하급 장교들에게는 상황이 더 나빴다. 여기에는 정화 조치가 없었다. 법적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어느 포병 중대의 병사들은 집행위원회와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형제들, 우리 내부의 적인 중대장 반체하자를 해임할 것을 겸허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청원에 대해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중대장에 대한 항명, 축출, 심지어는 체포 등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했다. 그리고 나서야 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리고 체포되거나 구타당한 장교들을 해임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징벌하려고 했으나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장교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사들의 지위는 명확하게 개선되거나 확정되지 않았다.
군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던 다수의 장교들은 총사령부에 전반적 정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것만이 군대의 전투력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병사들도 의회 의원들에게 이에 못지 않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전에는 불만이 있을 때 장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장교들의 태도는 예전과 같을 것이다.” 어느 의원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군대 전체의 운명과 미래를 미리 말하고 있었다.
전국의 모든 병과와 연대에서 상황이 이와 비슷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차이는 상당했다. 발트해 함대의 수병들은 혁명의 소식을 듣자마자 장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들 바로 옆에 위치한 헬싱키 주둔군에서는 장교들이 4월초에 이미 병사 소비에트의 주도 그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압적인 장군이 사회혁명당의 이름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증오심과 신뢰감이 이렇게 다양하게 공존했다. 그러나 군대는 마치 통신장비와 같이 병사들과 수병들의 정치적 정서를 하나의 주파수로 수렴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급격하고 결정적인 변화를 고대하고 있는 동안만은 군대의 규율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전선에서 도착한 어느 소비에트 대의원이 말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억압, 노예상태, 무식, 모욕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병사들이 인식하는 순간 선동이 시작되었다.” 인간 대다수에게 코뿔소의 가죽을 씌우지 않은 자연은 병사들에게도 신경계통을 부여했다. 혁명은 자연이 저지른 부주의를 이따금 상기시킨다.
전선은 물론이고 후방에서도 우연한 핑계거리가 쉽게 갈등을 불렀다. 병사들은 “모든 시민들과 똑같이” 극장, 집회, 연주회 등에 참석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다수의 병사들은 이것을 공짜로 극장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했다. 그러나 전쟁부는 “자유”를 추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봉기를 수행한 인민이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의 관념론에 빠질 리가 없었다.
주둔군 부대나 연대에서 규율의 낡은 피부는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여러 방식으로 갈라졌다. 어느 지휘관은 자기 연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문이 배포되고 외부의 선동가가 도착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항할 수 없이 거대한 깊이와 규모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의원 야누쉬케비치는 전선에서 돌아온 후 이렇게 상황을 일반화했다: 농민으로 구성된 “신참” 부대에서 규율이 가장 크게 무너졌다. “좀더 혁명적인 연대에서는 병사와 장교의 사이가 아주 좋다.” 사실 규율은 부농들로 구성된 특권 기병대, 노동자와 지식인의 비율이 높은 포병 및 기계화 부대의 두 축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카자흐들은 가장 끝까지 규율을 유지했다.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은 많은 농민혁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혁명 후 두 번 이상 카자흐 사단들이 농민을 토벌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규율은 날짜와 속도의 차이를 두었을 뿐 붕괴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투쟁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었다. 장교들은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병사들은 다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 소강상태 즉 휴전이 발효중인 몇 주일 또는 며칠간 구체제 군대를 붕괴시키고 있던 사회적 증오심은 더욱 격화되었다. 빈번하게 이것은 달아오른 대기의 벼락처럼 작렬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원형극장에서 병사와 장교를 망라한 상이용사들의 집회가 열렸다. 병사 상이용사는 장교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자 장교 상이용사들은 발을 구르고 지팡이와 목발을 두드리며 항의했다. 그러자 연설 중인 병사가 말했다: “장교 여러분, 채찍과 주먹으로 병사들을 모욕한 지 얼마나 지났소?” 부상당하고 포탄에 의해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신체가 찢겨진 병사들과 장교들은 마치 마주보는 두 벽처럼 대치했다. 다수의 상이 병사들과 역시 소수의 상이 장교들이 목발을 짚은 채 마주 보았다. 원형극장의 이 끔찍한 광경은 임박한 내전의 격렬함을 예고하는 듯했다.
군대와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던 동요와 모순은 하나의 영원한 문제인 전쟁을 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흑해에서 카스피해 너머 페르시아의 깊은 곳까지 측정할 수 없이 긴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선 곳곳에 68개 보병 군단과 9개 기병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군대는 혁명 전에 보급문제를 상당히 보강해 놓았었다. 전쟁에 필요한 국내 생산은 증대되었고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를 통한 전쟁 물자의 수입 특히 연합국으로부터 대포의 수입도 증대되었다. 전쟁의 첫 몇 년간에 비해 이제 소총, 대포, 탄창 등은 비교할 수 없이 보급이 원활했다. 보병 사단들이 새로 증편되고 있었다. 공병대도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것에 근거하여 상당수의 불행한 사령관들은 전쟁 승리 직전에 혁명이 터져 모든 것을 망쳤다고 증명하려고 나중에 무진 애를 썼다. 12년 전에 쿠로파트킨과 리네비치는 이와 유사한 근거로 위테 때문에 러시아가 일본에 승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 1917년에 러시아는 승리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적었다. 탄약은 증대되었지만 1916년 말 식량은 대단히 부족했다. 티푸스와 괴혈병이 전투보다 더 많이 희생자를 앗아갔다. 수송체계의 붕괴 하나 때문에 대규모 군대 재조직 전략은 전부 취소되었다. 더욱이 짐을 끄는 말이 대단히 부족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딴 곳에 있었다. 군대의 사기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군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투의 패배, 후퇴, 지휘부의 부패 등으로 군대는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의 신경체계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의 붕괴는 행정 조치로 정지될 수 없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구역질을 느끼듯이 탄창 더미를 보고 병사들은 구역질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전부 필요 없고 가치 없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기만과 도적질처럼 보였다. 장교는 그에게 확신을 줄만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겨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장교 자신이 우선 상부에 의해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병사들 앞에서 상관에 대한 수치심을 빈번히 느꼈다. 군대는 치유불능 상태로 병들어 있었다. 군대는 혁명의 승패를 결정할 수는 있었으나 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다. 장교나 병사 어느 누구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군대도 인민도 전쟁을 원치 않았다.
물론 특별한 종류의 생활을 누리고 있던 군 고위 당국은 대규모 작전, 춘계 공세,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 등에 대해 단순히 습관상 지껄이고 있었다. 크림 반도에서는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을 위해 대규모 군대가 준비되었다. 최고 정예 부대들이 해협을 포위하기 위해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게시판에는 써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위병 연대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혁명 발발 2일전인 2월 25일 군대의 훈련을 시작한 한 장교의 말에 의하면 증원군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는 푸른색, 엷은 갈색, 회색의 눈동자들에는 전투에 대한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이들의 생각과 열망은 오직 하나 즉 평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혁명은 이미 썩어가고 있던 것을 표면으로 드러냈을 뿐이었다. “전쟁을 끝내라!”는 구호는 이 때문에 2월 혁명 중 가장 주요한 구호의 하나였다.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 친위병 연대에서 터져 나왔다. 3월초 의회 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질문했다: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 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피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품고 있었으나 표현하지 못한 것을 밝히는 목소리가 울렸다: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그리고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3월말 가까이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여기서 애국심을 자랑하는 연설들이 빈번히 울려 퍼졌다. 이때 참호의 병사들을 대표하는 대의원들 가운데 하나가 전선의 병사들이 혁명을 맞이하는 태도를 아주 진지하게 보고했다: “모든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참호의 병사들은 대의원에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동지여러분, 우리는 전쟁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현실의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다면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자들이여, 빨리 서둘러 평화를 가져다주시오.
전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있던 프랑스 전선의 러시아 군대도 같은 감정에 휩싸여 동일한 붕괴의 단계들을 밟고 있었다. 중년의 어느 문맹 농민 병사는 자기 장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짜르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짜르가 우리를 전쟁터로 내몰았는데 또다시 참호에서 썩어야 한다면 자유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외부에서 주입되지 않은 병사들의 진정한 혁명철학이었다. 어느 선동가도 이처럼 단순하고도 설득력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반(半)자유주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애국적 봉기로 치장하려했다. 3월 2일 밀류코프는 프랑스의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 말에서 위선은 자기기만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위선이 자기기만보다 더 컸다. 차라리 정직한 반동들이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했다. 비록 반동적 증오심이 가득 담긴 언어이기는 했지만 독일 범슬라브주의자이며 그리스정교회 루터파이자 맑스주의 왕당파였던 폰 스트루베는 혁명의 진짜 원천을 더 정확히 규정했다: “인민 특히 병사 대중은 애국심 때문에 혁명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폭동을 통해 징집해제를 노렸으며 전쟁 연장에 곧바로 대항했다. 즉 혁명은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이 말에는 진실과 함께 비방도 섞여있다. 봉기를 통한 징집해제는 전쟁의 직접적 결과였다. 혁명은 징집해제를 재촉하지 않았고 중지시켰을 따름이었다. 혁명 전에 아주 빈번했던 탈주는 혁명이 일어난 후 첫 몇 주일동안 아주 뜸했다. 군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병사들은 전선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전선을 버릴 경우 새 정부가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3월 23일 정예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러시아군은 방어를 할 뿐 공격은 할 수 없다고 병사들은 확실히 믿고 있다.” 고참 혁명가이자 이후 볼세비키 정권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던 크릴렌코 해군 소위는 당시 병사들의 확고한 전쟁관을 증언했다: “전선은 지키되 공격은 하지 않는다.” 좀더 엄숙하지만 전적으로 진실한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혁명으로 얻어진 자유를 방어하겠다는 노선이었다.
“총검을 땅에 박을 수는 없다!” 당시 애매하고 모순적인 정서에 사로잡혀 있던 병사들은 볼세비키들의 말도 빈번히 거부했다. 아마 볼세비키들의 솜씨 없는 연설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볼세비키들은 혁명 방어에 관심이 없어서 정부의 평화조약 체결을 막을 수도 있다. 사회애국주의 신문들과 선동가들은 이 생각을 병사들 속에 더욱더 깊이 심어놓았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연설을 때때로 막기는 했으나 병사들은 혁명 첫날부터 공세는 결단코 거부했다. 이것은 적절한 압력을 가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종의 오해라고 수도의 정치가들은 생각했다. 이 결과 전쟁 선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수백만 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관점에서 혁명을 조명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갈수록 대담하게 화해주의자들은 같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혁명이 터질 당시 군대 내에서 매우 미약했던 볼세비키들의 영향력은 파업에 대한 벌로 전선에 배치된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자 더 약화되었다. 따라서 평화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렬한 전선은 이 욕구를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을 위로하는 환상을 찾고 있던 지휘관들과 인민위원들은 실제 상황을 속일 수 있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들과 연설들은 빈번하게 주장했다: 병사들이 공세를 거부한 이유는 이들이 “병합과 배상 없는 평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해주의자들은 열심히 주장했다: 방어는 공세를 허용하며 때때로 이것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이 현학적인 문제가 주요 이슈인 것처럼 착각했다! 공세는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다리면서 전선을 지키는 것은 정전을 의미했다. 병사들이 주창한 방어 전쟁의 이론과 실천은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의미했다. 지금 이것은 공공연히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병사들은 아주 공개적으로 이것을 요구했다. “우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이것 이외에 군대가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은 공세의 주장에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세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반동 장교들이 병사들을 확고히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대화 중에 “독일군에게는 총검을, 총 개머리판은 내부의 적에게”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여기서 총검은 방어적인 의미였다. 참호의 병사들은 다다넬스 해협은 생각도 못했다. 평화에 대한 욕구는 땅 밑에 흐르는 강력한 물길이 되어 곧 표면으로 솟아오를 참이었다.
밀류코프는 군대 내에 부정적인 징후가 “관찰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혁명 후 오랫동안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군은 연합국이 자기에게 내린 과제인 공세를 개시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의 특성을 드러내며 이렇게 썼다: “볼세비키들의 선전은 곧바로 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 후 1개월 또는 1개월 반 동안 군대는 건강했다.” 그는 문제 전체를 선전의 수준에서 조망한다. 마치 이것이 역사 과정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볼세비키당이 진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정당에 대해 뒤늦게 투쟁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앞에서 이미 군대의 실상은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혁명 후 첫 몇 주일간 또는 첫 며칠간 지휘관들이 군대의 전투력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3월 6일 북부 전선의 총사령관 루즈키 장군은 집행위원회에 이렇게 보고한다: 병사들의 완벽한 항명이 시작되고 있으므로 인기 있는 인물들이 군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선에 파견되어야 한다.
흑해 함대의 총사령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혁명 첫날부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전쟁은 패배했다는 것이 명확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차크도 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병사들의 폭력으로부터 자기 참모장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전선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국 근위대 사령관 이그나티에프 백작은 3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해야한다. 머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전쟁을 고통 없이 끝내는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동시에 구츠코프는 자기가 이런 편지들을 천 통씩이나 받고 있다고 나보코프에게 말했다. 피상적으로 매우 희망에 찬 보고서들은 아주 드물었는데 대부분 자체 보완 설명에 의해 모순을 일으켰다. 제 2군 사령관 다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승리하려는 군대의 의욕은 일부 연대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기강이 해이해졌다....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1개월에서 3개월까지 공세를 연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치 않은 보완 설명이 뒤따른다: “증원군의 50%만이 도착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고 규율이 동일하게 해이해진다면 공세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용감한 제 51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 사단은 방어 능력이 확실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병사 및 노동자 대의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군대를 구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182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하루가 지날수록 사소한 일들에 대한 병사들의 오해가 증대하고 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병사들은 더욱더 신경질적이 되고 있고 장교들은 더 그렇다.”
이 산발적인 증언들은 얼마든지 있다. 3월 18일 총사령부에서는 군대의 실상을 논의하는 고위 장성들의 회의가 열렸다. 총사령부 중앙기관들의 결론은 전부 일치했다: “예비군들 사이에 소요가 있기 때문에 전선의 병력 손실을 보충할 증원군이 부족하다. 군대는 병들어 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관계를 조정하는데 아마 2개월 또는 3개월이 걸릴 것이다.” 이 질병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장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장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대가 술렁이며 탈주 충동이 상당하다는 것을 주목했다. “군대의 전투력은 하락했으며 현재 공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은 이렇다: “춘계로 예정된 공세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하다.”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서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며 유사한 증언들은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 3월말 제 5군 사령관 드라고미로프 장군은 루즈키 장군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투 기상이 떨어졌다. 공세에 대한 욕구가 병사들에게는 없다. 이뿐 아니라 방어를 단순히 고집하는 성향도 하락하여 전쟁의 성공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군대의 모든 부위들에 확산된 정치는 군대 전체에 오직 한가지 욕구만 조성했다: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자.”
반동 지휘부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루콤스키 장군은 새로운 상황에 불만을 품은 채 어느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규율은 포병 및 공병 사단에만 존재했다. 이 사단들에는 정규군 장교와 병사의 수가 많았다. “3개 보병 사단은 모두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
혁명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줄어들었던 탈주 사태는 실망이 퍼지면서 다시 증가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4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사이에 약 8천 명의 병사들이 북부 및 서부 전선에서 탈주했다. 그는 구츠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군대의 ‘뛰어난’ 규율에 대한 무책임한 보고들을 진짜 황당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독일군을 속이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자기기만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보고서들은 볼세비키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장교들의 대다수는 이 기이한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군대의 붕괴 원인이 신문, 선동가, 소비에트 등 일반적으로 “정치” 즉 2월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라고 희망한 낙관주의자 장교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는 있었다. 새 정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현실로부터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자들은 더 많았다. 반면에 특히 최고위 장성들 사이에는 상당수가 군대의 붕괴 징조를 의식적으로 과장하여 정부가 결단을 내릴 것을 유도하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림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군대가 병들어 있음을 알아챈 혁명은 군대 붕괴의 무자비한 과정을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잔인하게 명확한 정치형태로 위장했다. 평화에 대한 타오르는 갈망과 군 지휘부와 국가 지배계급들 일반에 대한 병사 대중의 적대감을 혁명은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고 갔다.
4월 중반에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군대의 정서를 정부에 보고했다. 보고 회의에서 그는 과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두려움과 절망이 나를 크게 사로잡았던 당시를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한다.” 혁명 후 첫 6주 후에 있었음에 틀림없는 이 보고 회의에 밀류코프는 참석했을 것이다. 사실 동료 장관들 그리고 이들을 매개로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겁주려는 생각으로 알렉세이예프를 소환한 것은 바로 그였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구츠코프는 보고 회의 후에 집행위원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 불평했다: “독일군과의 파멸적인 우애가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항명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명령이 이행되기 전에 군대 조직과 총회에서 먼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저런 연대들은 적극적인 작전에 대해 얘기도 듣지 않으려 한다. 평화가 내일 올 것이라고 희망하면 (여기서 구츠코프는 지혜롭게 이렇게 덧붙인다) 누가 오늘 목숨을 버리려 하겠는가.” 이로부터 전쟁장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평화에 대해 크게 떠드는 것을 중지해야한다.” 그러나 혁명은 인민에게 말도 못하고 간직했던 생각을 크게 말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혁명을 중지시키자는 것과 같았다.
물론 병사는 전쟁 바로 첫날부터 죽거나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대포를 끄는 말이 무거운 대포를 진흙탕 속에서 끌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죽음과 전쟁을 원치 않았다. 말과 같이 그는 저들이 자기에게 매어 놓은 짐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와 전쟁 사이에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러나 혁명이 그에게 이것을 보여주었다. 수백만 병사들에게 혁명은 개인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다. 총알과 포탄으로부터 자기 생명을 보호할 권리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장교의 주먹으로부터 자기 얼굴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군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 심리변화 과정은 앞에서 말했다. 이것은 병사들이 개인적 권리에 눈뜨는 것을 의미했다. 이 개인적 권리에 대한 각성은 종종 혼란스러운 형태를 띤 채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교육받은 유산 계급들은 이 현상을 나라에 대한 배신행위라고만 규정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열화와 같은 연설, 열정적인 저항, 장교들에 대한 유혈 보복은 몰개성적이며 선사(先史)적 재료인 병사 대중이 진정하게 국민이 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대중은 개인적 권리를 물밀듯이 요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이것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 현상은 2월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개인적 권리의 촉진이 부르주아 혁명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2월 혁명의 유일한 내용은 아니었다. 농민과 농민의 자식인 병사 외에 노동자들도 이 혁명에 참여했다. 노동자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한 개인임을 느꼈고 전쟁을 증오했다. 또한 전쟁에 대항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에게 혁명은 권력을 정복한다는 명백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이 부분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왕정의 타도는 그에게 첫 단계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목적을 향해 급히 나아갔다. 그에게 문제는 병사와 농민들이 자기와 함께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병사는 물었다: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토지는 무슨 소용이냐? 극장의 닫혀진 문을 보며 그는 노동자와 함께 반복해서 질문했다: 자유로 향한 열쇠가 지배자의 손에 있다면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 2월 혁명의 측량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10월 혁명의 강철과 같이 날카로운 광선이 이미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전쟁과 군대에 대한 임시정부와 집행위원회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당시 정세를 주도한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정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면 자유주의의 전쟁 정책은 조국 방어를 위한 공세, 점령지 병합, 평화조약 반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정책은 자기모순이었고 배신적이었으며 패배주의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었다.
나중에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전국들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그의 견해는 독창적인 구석이 없이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견해를 평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병 대대들의 반란과 혁명의 승리로 유산계급들은 영토를 확대할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반대로 영토를 축소시킬 전쟁의 패배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없었다. 이 위험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밀류코프는 혁명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 밖의 혁명 낙관주의는 실제로는 절망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전쟁을 계속하거나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이제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혁명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전쟁을 이용하여 혁명을 패배시키는 임무가 그만큼 더 시급했다.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채무와 새로운 신용대부, 자본시장과 판매시장 등의 문제들을 부르주아 계급은 해결해야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이들의 정책과 직접 관련이 없었다. 현재의 관심사는 자본주의 러시아를 위해 유리한 국제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더욱 쇠약해지더라도 일단 국내의 자본주의 자체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중상을 입은 이 계급은 말했다: “우선 부상에서 회복되어야한다. 그 다음에 만사를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기 위해 혁명을 진압해야했다.
소위 혁명 “심화 세력”에 대항해 대중 특히 군대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최면술을 걸어야 했다. 또한 국수주의 정서를 계속 부채질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원래의 목표와 동맹 세력들이 그대로 있는 짜르의 낡은 전쟁을 혁명의 성과와 희망을 간직한 새로운 전쟁으로 인민에게 팔아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라스푸틴 파벌에 대항해 동원했던 모든 애국주의 조직 여론을 혁명에 대항해서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유주의자들은 확고히 믿었다. 인민을 억압하는 최고의 항소법원인 왕정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이제 더욱더 연합국들을 꽉 잡고 놓지 말아야했다. 전시에는 연합국들이 왕정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항소법원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경우 기존의 군사적 관료적 국가기구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제헌의회를 연기시킬 수 있다. 또한 승리한 혁명 인민을 전선 즉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장단을 맞추고 있는 전쟁 총사령부에 종속시킬 정당한 근거가 마련될 것이다. 특히 농민문제와 사회입법 등 모든 국내 문제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결이 연기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믿고 있지 않는 전쟁 승리 때까지 종전은 계속 미루어질 것이다. 적들의 진을 뺄 전쟁은 혁명의 진을 뺄 전쟁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 전술은 공식 회의에서 미리 철저히 계산되고 논의되고 완벽하게 구상된 계획은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원래 정책과 혁명이 조성한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도출된 계획이었다. 전쟁 계속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밀류코프는 전쟁 승리 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미리 거부할 수는 물론 없었다. 연합국들은 진짜 승리할 가능성이 많았다. 더욱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여 이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물론 연합국들과 러시아는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들은 깨달았다: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허약성 때문에 독일 등 구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는 러시아에 대한 승리이기도하다.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러시아는 파괴되고 국력이 허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제국주의자들은 이 전망에 대해 눈을 감기로 아주 의식적으로 결심해버렸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츠코프는 자기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했다: 기적만이 러시아를 살릴 수 있으며 전쟁장관인 자신의 강령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국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밀류코프는 전쟁 승리에 대한 신화가 필요했다. 그가 전쟁 승리에 대해 얼마나 큰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다다넬스 해협이 점령되어 콘스탄티노플이 러시아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그의 본성과도 같은 냉소주의가 배어 있었다. 3월 20일 러시아의 외무장관인 그는 연합국 대사들을 이렇게 설득시키려했다: 불가리아가 구축국들을 배반하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세르비아를 배신하자. 그러자 프랑스 대사는 코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에 동요되지 않고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서 감상주의를 배격할 필요가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리고 1905년 혁명의 패배이후 자신이 주창했던 신(新)슬라브주의를 버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1882년 엥겔스는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가 주장하는 범슬라브주의라는 헛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겠소?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가 먹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오.”
어제는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과 내통하고 있으며 독일의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이 비난은 이제 혁명에게 가해졌다. 하루가 갈수록 더 대담하고 더 웅장하고 거만하게 주장된 이 비난은 입헌민주당의 연설과 신문을 장식했다. 터키 근해를 점령하기 전에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의 샘을 더럽히고 여기에 독약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혁명 직후 자유주의 지도자들이 전쟁에 대해 똑같이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수는 여전히 혁명 이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전국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할 전망을 그리고 있었다. 입헌민주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나중에 아주 솔직하게 이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보코프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이미 3월 7일에 독자 평화조약을 정부 장관들과 논의하고 있었다. 입헌민주당 중앙파의 일부는 전쟁 지속의 불가능성을 당 지도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증명하려했다. 놀데 자작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어야 한다고 밀류코프는 특유의 냉랭한 날카로움으로 설명했다.” 당시 입헌민주당 쪽으로 끌리고 있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밀류코프의 생각에 동의하며 “군대는 소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사적 재앙을 조직한 이 총사령관은 자신이 군대를 소생시킬 소명을 받은 것처럼 느꼈다.
약간 생각이 단순한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 상당수는 밀류코프의 노선을 오해하여 그가 연합국에 모든 충성을 다 바치는 연합국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볼세비키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밀류코프는 서슴지 않고 독일군이 점령한 키에프로 내려가 호엔쫄런 왕가의 정부에 봉사하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독일 정부는 이 봉사를 서둘러 받을 필요는 없었다. 볼세비키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밀류코프는 독일의 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그의 시급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는 혁명 세력이 독일의 돈을 받았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1918년 그가 독일에 붙은 노선은 그가 1917년 첫 몇 달간 독일을 제압하려던 노선만큼이나 자유주의자들 다수에게 이해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 두 상반된 것 같은 노선은 사실 동전의 양면에 불과했다. 그는 세르비아를 배신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 붙어 연합국을 배신할 망정 밀류코프는 자기나 자기 계급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같은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혁명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짜르가 타도되기 전에 독일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하려했다. 2월 혁명이 터지자 그는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0월 혁명을 타도하기 위해 독일과 손을 잡으려했다. 이 모든 행동에서 그는 유산계급들의 이해에 충실했다. 물론 그는 이들을 돕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매번 자기 머리를 새로운 장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손님들이 막다른 골목에 처한 계급들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혁명 봉기가 성공한 첫 며칠간 독일군이 러시아를 공격하여 혁명의 머리를 확실히 부수는 일이 밀류코프에게 필요했다. 불행한 것은 3월과 4월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독일군은 러시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던 독일군은 약간 주저하다가 러시아 혁명의 자체 논리에 러시아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리징언 장군만이 3월 20일과 21일에 스토코드에서 공세를 가했다. 그의 성공은 독일 정부를 깜짝 놀라게 만든 동시에 러시아 정부를 기쁘게 했다. 뻔뻔스러운 러시아 총사령부는 짜르 치하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군사적 승리도 크게 과장했는데 이제는 스토코드의 패배를 크게 과장했다. 자유주의 신문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들은 전에 전쟁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껏 묘사한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러시아군의 허약성, 공포, 손실 등을 과장하여 묘사했다. 혁명이 성공한 지금 이미 부르주아 계급과 총사령부는 전쟁 패배 노선으로 넘어갔다. 리징언 장군은 상관들에 의해 공세를 제지당했고 전선은 다시 봄철의 진흙탕과 희망 속에 교착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혁명에 대항시키는 방법은 한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 즉 인민대중이 따르고 있던 중간 정당들이 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해야했다. 자유주의는 전쟁 지속과 혁명을 결합시킬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혁명이 전쟁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설교했기 때문이다. 이 임무는 중간정당들을 장악한 민주주의자들에게 넘겨져야 했다. 그러나 물론 이들에게 “비밀”이 새나가면 좋지 않다. 이들은 계략을 모른 채 이용되어야만 한다. 이들의 편견, 허영, 정치가다운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자부심, 혼란에 대한 두려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미신적인 굴종 등을 이용하여 이들을 계략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첫 며칠동안 사회주의자들 및 민주주의자들(모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에 대한 약칭)은 전쟁에 대한 노선을 정할 수 없었다. 체이제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해왔다 --- 그런데 어떻게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창할 수 있는가?” 3월 10일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에 도착한 프란츠 메링(역자 주: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을 환영하기로 표결했다. 이 조그만 제스처로 집행위원회 좌파는 별로 활발하지도 않은 사회주의 양심을 진정시키려했다. 전쟁에 대해 소비에트는 계속 아무 말도 못했다. 지도자들은 이 주제로 혹시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켜 “접촉”의 밀월 몇 주를 어둡게 할까 두려웠다. 이들은 대오 내의 분열도 두려워했다. 이들은 조국방어주의자들과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의 짬뽕이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내의 이 두 그룹들은 서로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적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부르주아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공개적이든 은폐되었든 애국주의가 지식인들을 지배계급들과 단결시켜 이들을 대중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었다. 좌익이 흔들었던 짐머발트의 반전 깃발은 이렇다할 결속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 깃발은 좌익이 라스푸틴 파벌들과 애국주의로 연대한 모습을 잘 위장시켜주었다. 그런데 이제 로마노프 왕조는 타도되었다.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온갖 색깔로 춤을 추고 있는 러시아의 자유는 군사독재로 감시가 엄중한 유럽 국가들의 단색 배경과 뚜렷이 대비되었다. 집행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 옛날의 그리고 새로운 애국주의자들이 외쳤다: “독일에 대항하여 혁명을 방어해야한다.” 수하노프와 스테클로프 성향의 짐머발트주의자들은 수줍게 지적했다: 이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다; 짜르가 제국주의자들과 합의한 영토 병합 정책을 유지하자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근심에 찬 체이제는 말한다: “어떻게 전쟁을 지속하자고 주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짐머발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주창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전쟁 지속 노선에 대한 이들의 반대는 허공에 붕 뜬 허세에 불과했다. 몇 주일간 동요하고 부심한 후 체레텔리의 도움으로 밀류코프 계획의 제 1부가 만족스럽게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꺼림칙한 이 민주주의자 또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의 마차에 묶인 후 자유주의자들의 채찍질을 받으며 모든 힘을 다해 전쟁 승리로 매진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연합국의 러시아에 대한 승리이며 미국의 유럽에 대한 승리였다!
화해주의자들의 주요 기능은 대중의 혁명 에너지를 애국주의에 합선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군대의 전투력을 소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 이들은 연합국 정부들이 강도행위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이것은 정말 웃기는 짓이었다. 이 두 가지 힘든 노력을 하면서 이들은 환상에서 실망으로 오류에서 모욕감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이 노선의 첫 부분을 주목해보자.
자신의 권력을 느낄 수 있었던 짧은 시간에 로지안코는 병영 복귀와 장교들에 대한 복종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명령서는 주둔군 대오에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는 첫 회기들의 하나를 미래 병사의 지위 문제에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열띤 분위기 속에서 대중 집회와 같은 혼란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결과 결석한 지도자들이 제지할 수 없었던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그 유명한 “명령 제 1호”가 탄생했다. 이것은 2월 혁명의 단 하나 가치 있는 문서로서 혁명군대의 자유헌장이었다. 조직적 방식으로 병사들을 새로운 지위로 격상시킨 대담한 첫 문단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연대에 선거에 의한 병사위원회가 구성된다; 병사위원회 대표들은 소비에트에 출석한다; 모든 정치행위에 대해 병사들은 소비에트와 그 산하 위원회의 지도를 따른다; 무기는 연대와 대대의 병사위원회가 관리하며 “어떤 경우에도 장교에게 양도될 수 없다”; 가장 엄한 규율로 임무를 수행할 것이며 비번일 때에는 완전한 시민권을 누린다; 비번 때는 장교에게 경례하지 않는다; 장교의 계급은 따로 부르지 않는다; 병사에 대한 무례한 행위 특히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금지된다.... 이것이 바로 뻬쩨르부르그 병사들이 혁명에 참여하면서 이끈 결론이었다. 다른 결론이 가능했을까? 어느 누구도 이것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이 “명령”을 준비하는 동안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의 협상이라는 더 고상한 일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전쟁 총사령부에게 이렇게 핑계를 대었다. “명령 제 1호”와 함께 집행위원회는 전열을 서둘러 결집시킨 후 곁들여 인쇄공들에게 병사들에 대한 호소문을 보냈다. 호소문은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보복을 비난하면서 병사들이 구 지휘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식자공들은 이 문서의 식자를 거부했다. 이 호소문을 작성한 민주주의자들은 분노로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식자공들이 장교들에 대한 유혈 보복을 열망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이다. 혁명이 승리한지 이틀만에 짜르의 지휘부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반혁명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병사와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물론 식자공들은 월권행위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식자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혁명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첫 며칠동안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군대로 복귀한 장교들의 미래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볼세비키당과 가까웠던 사회민주주의 그룹인 메주라욘치(지구간 그룹)는 이 중요한 문제를 대담하게 혁명적으로 접근했다. 이들이 병사들에게 보낸 호소문은 이렇게 말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이 여러분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소대장, 중대장, 연대장들을 여러분 스스로 선출하고 인민의 친구라고 알고 있는 장교들만을 받아들이자.”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상황에 적절했던 이 호소문은 집행위원회에 의해 즉시 압수되었다. 그리고 체이제는 연설을 통해 이것을 경찰 끄나풀들의 짓이라고 규정했다. 좌익을 공격할 때 민주주의자들은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행히 이들의 자유는 충분히 제한되었다. 왜냐하면 집행위원회를 최고 기관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노동자와 병사들은 모든 중요한 순간에는 직접 개입하여 지도자들의 정책을 교정시켰기 때문이다. 이틀이 채 지나기 전에 집행위원회는 “명령 제 2호”를 발령하여 명령 제 1호를 철폐하고 전자를 뻬쩨르부르그 군관구에만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명령 제 1호”는 철폐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운 발명품이 아니라 후방과 전방의 현실을 확인하고 강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유주의 의원들조차 병사들과 마주치면 “명령 제 1호”를 언급하며 질문과 질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했다. 그러나 큰 정치무대에서는 이 대담한 명령이 소비에트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패배한 장군들은 “명령 제 1호”가 독일군에게 승리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 이 명령이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집행위원회의 화해주의자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계속 사과하면서 왼손이 놓친 것을 오른손으로 회수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병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소비에트에서 병사 및 노동자 출신 대의원들은 벌써 장교의 선출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민주주의자들은 흥분했다. 더 좋은 주장을 찾지 못하자 수하노프는 대의원들을 겁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넘겨받은 부르주아 계급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솔직히 구츠코프의 등뒤로 숨었다. 대중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핑계삼았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왕정을 핑계삼은 것과 똑같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연단에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는데 어느 병사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내 얼굴에 주먹을 흔들더니 ‘병사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신사들’에 대해 화를 내며 뭔가를 외쳤다.” 이 병사의 “과격 행위” 후에 이 민주주의자는 완전히 평정을 상실하여 케렌스키를 찾으려 뛰어갔다. 그리고 후자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 문제는 어쨌든 얼버무려졌다.” 이들은 언제나 문제를 얼버무렸다.
혁명이 승리한 후 2주일간 이들은 전쟁 문제를 모른 체했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었다. 3월 14일 집행위원회는 수하노프가 작성한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소비에트에 제출했다. 화해주의자 좌파와 우파를 단결시킨 이 문서를 자유주의 언론은 “대외 정책의 명령 제 1호”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아양떠는 평가는 이 문서만큼이나 잘못되었다. “명령 제 1호”는 혁명으로 군대에 제기된 문제를 병사들이 스스로 정직하게 답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4일의 선언문은 병사와 노동자들의 정직한 문제제기에 대한 상층부의 배신적 답변이었다.
물론 이 선언문은 평화 더욱이 병합이나 배상이 없는 평화를 표방했다. 그러나 2월 혁명 훨씬 전부터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이 내용을 자기들 이익에 맞게 활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참전 순간에 준비했던 구실이 바로 영속적인, 명예로운, “민주적” 평화였다. 신앙심이 투철했던 당시의 영국 수상 애스퀴스는 의회에서 박식하게 병합의 종류들을 분류했다. 그리고 영국의 이해에 위배되는 모든 병합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근거를 확실히 마련했다. 한편 프랑스 외교의 핵심은 상점 주인과 대금업자들의 탐욕을 가능한한 최대로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선언문은 그 동기가 단순할 정도로 진지했을 뿐 프랑스 공식 외교의 위선을 진부하게 빼어다 박았다. 선언문은 외국의 군국주의에 대항해 “우리의 자유를 확고히 방어할 것”을 약속했다. 1914년 8월 전쟁의 시작이래 프랑스의 사회애국주의자들도 바로 이렇게 행동해왔다. 선언문은 말한다: “인민 스스로 전쟁과 평화를 결정할 시간이 당도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의 작성자들은 러시아 인민의 이름으로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대부르주아 계급에게 이미 넘긴 뒤였다. 이 선언문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동자들에게 “왕, 지주, 은행가의 정복 및 약탈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의 정수였다. 왜냐하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벨기에의 국왕, 일본 황제, 러시아와 연합국의 지주와 은행가 등과 동맹을 단절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프로이센을 러시아 영토로 전환시킬 술수를 부렸던 밀류코프에게 대외정책의 지도력을 넘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혁명을 본받을 것을 촉구했다. 전쟁의 도살을 이들이 연극하듯 비난해 보았자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짓은 교황도 하고 있었다. 은행가, 지주, 왕의 그림자에게 호언장담으로 도전한 후 화해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실제 왕, 지주, 은행가의 도구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축전을 보내면서 로이드 조오지 영국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전쟁이 기본적으로 인민 정부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사실을 러시아 혁명이 입증했다. 3월 14일의 선언문은 “근본적으로” 로이드 조오지와 연합했고 미국 국내의 전쟁 선전에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입헌민주당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문은 평화주의를 전형적으로 주창하면서 서두를 장식했으나 우리와 우리 동맹국들이 공유하는 사상을 핵심적으로 표현했다.” 이 주장은 천 배나 옳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가끔 이 선언문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검열 제도는 이 문서가 프랑스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선언문을 혁명 대중이 액면 그대로 믿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비록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이 작성했지만 이 선언문은 애국주의 분파의 승리를 확연히 드러냈다. 각 지역의 소비에트들도 이것을 이해했다. 이들은 “전쟁 반대” 구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볼세비키들이 강력했던 우랄과 코스트로마 지역에서조차 이 애국주의 선언문은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그러니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들은 이 거짓 문서를 반대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 선언문이 나온 후 몇 주가 지나자 환어음을 일부 결재할 필요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물론 “자유 공채”라는 이름의 전쟁 공채를 발행했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체로”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민주주의 세력은 전쟁 공채를 지지해야 한다. 집행위원회에서 전쟁 공채에 대한 반대는 3분의 1이 넘었다. 그러나 4월 22일 열린 소비에트 총회에서 2천 표 가운데 112표만이 전쟁 공채에 반대했다. 이 사실로부터 집행위원회가 소비에트보다 더 좌였다는 결론이 가끔 제시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비에트는 집행위원회보다 좀더 정직했을 뿐이었다. 전쟁이 혁명을 방어한다면 전쟁 노력에 돈을 대주어야 하고 전쟁 공채에 찬성해야한다. 집행위원회는 더 혁명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더 술수에 능할 뿐이었다. 자신의 의도를 애매하게 치장하고 이런 저런 유보 조건으로 진짜 의도를 숨겼을 뿐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자기가 수립한 정부를 “대체로” 지지했으며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느 선에서” 떠맡았다. 대중은 이런 치졸한 속임수를 쓸 줄 모른다. 병사들은 “어느 선에서” 싸울 수도 없으며 “대체로” 죽을 수도 없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정치인다운 사고가 허풍에 대해 승리할 수 있도록 3월 5일까지만 해도 반전 선전가 “갱단”을 모두 체포하여 총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반동이 4월 1일에 군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질서를 잡았다. 짜르의 대외 정책을 입안했던 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 되었고 짜르의 군대 지도자였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혁명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따라서 구체제는 혁명 후에도 건재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상황의 논리에 따라 자기들이 엮어 놓았던 그물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 인정하고 지지했던 장교들을 대단히 무서워했다. 따라서 자기의 권위를 동원하여 이들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병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될 수 있으면 장교들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3월 6일 회의에서 집행위원회는 모든 연대와 군대 기관에 소비에트 인민위원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렇게 해서 병사와 소비에트 사이에는 삼중의 끈이 묶여졌다: 연대의 병사들은 소비에트에 대표를 보내고 집행위원회는 연대에 인민위원을 보내고 연대의 병사위원회는 연대를 지도하면서 소비에트의 하급 중핵이 되었다.
인민위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군 지휘부의 정치적 신뢰성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데니킨은 분노하며 말한다: “민주 정부는 이 측면에서는 전제 정부를 능가했다.” 그리고 자기 참모부 장교들이 뻬쩨르부르그의 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들 간의 암호 편지를 솜씨 있게 가로채어 그에게 넘긴 것을 자랑했다. 왕당파들과 봉건 영주들을 감시하다니 이것만큼 분노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집행위원회와 인민의원 사이의 편지를 가로채는 것은 물론 전혀 분노할 일이 아니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도덕의 수준에 관계없이 당시 군대 지배기구 내부의 상황은 아주 명확했다: 서로 상대방을 두려워하면서 적대심을 가지고 서로를 감시했다. 다만 병사 대중을 두려워하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단결했다. 장군들과 제독들은 각각 희망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가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로 위장하지 않으면 전혀 일이 풀리지 않는다. 콜차크는 함대의 병사 및 수병 위원회에 대한 결의안을 작성했다. 그는 나중에 이 위원회들을 목 졸라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것들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는 참모부 장교들에게 위원회들을 승인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비슷하게 백군 장수가 될 마르코프 장군도 지휘부의 충성심을 감시할 인민위원 제도에 대한 계획을 4월초 전쟁부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군대의 유구한 법칙” 즉 군사관료 체제의 전통이 혁명의 압력을 받아 지푸라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병사들은 정반대의 각도에서 병사 및 수병 위원회를 바라보았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지휘부에 대항했다. 병사들에 대항해서 위원회가 장교를 보호했으나 이것도 한도가 있었다. 위원회와 갈등을 일으킨 장교의 상황은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자신의 지휘관을 제거하는 불문(不文)의 권리가 확립되었다. 데니킨의 말에 의하면 7월까지 서부 전선에서는 군단장에서 연대장까지 60명의 고참 장교들이 해임되었다. 연대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해임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전쟁부, 집행위원회, 접촉위원회 등의 서기들은 아주 꼼꼼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것의 목표는 군대 내에 “합리적인” 대인 관계를 조성하고 장교의 권위를 높이고 병사 위원회를 부차적인 그리고 주로 경제적인 역할에 한정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대의 고위 지도자들은 빗자루의 그림자로 혁명의 그림자를 청소하고 있었다. 한편 병사 위원회는 뻬쩨르부르그 집행위원회에 버금가는 강력한 체제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군대에 대한 조직적 통제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인민위원과 병사 위원회를 통해 군대를 다시 한번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 통제체제를 주로 사용했다. 이제 더욱더 병사들은 이렇게 곰곰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선출한 위원회가 왜 우리 생각이 아니라 장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을까?
참호의 병사들은 더욱 빈번하게 수도로 대표를 보내 상황을 탐지했다. 4월이 시작되면서 전선에서 병사 대표들이 계속 수도를 방문했다. 대중의 대화가 타우리데 궁전에서 매일 들렸다. 전선에서 도착한 병사 대표들은 무거운 머리를 움직이며 단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속시원한 대답하지 않는 집행위원회의 정책을 이해하려했다. 군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비에트의 입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정치적 파산을 명확히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자유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소비에트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국수주의가 병사들을 오염시켜야했다. 입헌민주당 출신 장관인 싱가레프는 전선에서 온 병사 대표들과 회의를 했다. 그는 여기서 독일군 전쟁포로에 대한 “불필요하게 관대한 행위”를 반대하는 구츠코프의 명령을 옹호하면서 “독일군의 잔악 행위”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병사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 회의는 독일군 전쟁포로들의 조건을 개선시킬 것을 명확히 결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병사들이 일상적으로 과도한 행위와 잔악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그렇게 비난해왔다. 그러나 전선에서 온 이 회색 군복의 병사들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병사를 모욕하는 장교는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든 가상이든 독일군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자행한 잔악 행위에 대해 독일군 병사 포로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칠고 비천한 농민 병사들에게 영원한 도덕률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부르주아 계급도 군대를 장악하려고 노력하자 이들과 화해주의자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아무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4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부 전선의 병사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전선의 병사들을 대표하는 이 첫 대회는 군대에 대한 결정적인 정치적 시험대였다. 따라서 양측은 모두 대회가 열리는 민스크에 최상의 대표들을 보냈다. 소비에트를 대표해서 체레텔리, 체이제, 스코벨레프, 고즈데프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해서 로지안코, 입헌민주당의 로디체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이 참석했다. 민스크 극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으며 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이 긴장감은 파문처럼 퍼져 도시 전체를 감쌌다. 참석한 병사 대표들의 보고들을 통해 진짜 현실이 드러났다. 전선 전체에 걸쳐 독일군과의 우애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더욱더 대담하게 이 행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는 이 행위를 처벌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자유주의자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열정적인 병사 청중 앞에서 이들은 소비에트의 노선과 반대되는 결의안을 제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들은 병사 대표들을 환영하는 애국주의 연설을 한 후 모두 퇴장했다. 싸움도 하지 않고 집행위원회 민주주의자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부르주아 계급에 반대하여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지하는 것이었다. 3월 14일 선언문의 정신에 입각하여 혁명방어를 위한 전쟁으로 모호하게 치장된 평화 구호가 대회를 지배했다. 전쟁에 대한 소비에트의 결의안은 610표의 찬성, 8표의 반대, 46표의 기권으로 채택되었다. 전선의 병사들을 후방에 대항시키고 군대를 소비에트에 대항시키려던 자유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승리에 감격하기보다는 겁에 질린 채 대회에서 돌아왔다. 이들은 혁명이 불러온 귀신을 보고 이것과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느꼈다.
해외 망명 중이던 레닌은 4월 3일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바로 이때부터 볼세비키당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자신의 노선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혁명 첫 몇 개월간 볼세비키당은 어리둥절했으며 동요했다. 봉기의 승리 직후 당중앙위원회가 작성한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작업장과 공장의 노동자와 봉기 병사들은 즉시 임시혁명정부에 대표를 보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순전히 절차의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논평이나 반대 없이 공식 소비에트 기관지에 실렸다. 볼세비키당 지도자들 역시 이 구호를 순전히 과시용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동계급 정당의 대표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단지 자신의 원칙을 선언한 후 정해지지 않은 기간동안 충실한 야당이 될 민주주의 좌파처럼 행동했다.
3월 1일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는 조건에 대한 것뿐이었다고 수하노프는 주장한다. 이때 집행위원회 위원 39명 가운데 11명이 볼세비키당 당원이었거나 동조자였으나 부르주아 정부 수립에 대해 반대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볼세비키당 중앙의 잘루츠키, 슐리아프니코프, 몰로토프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슐리아프니코프의 보고에 의하면 다음날 소비에트 회의에서 출석 대의원 400명 가운데 19명만이 부르주아 권력 수립에 반대했다. 이때 볼세비키당 소속 대의원 수는 40명이었다. 표결은 순전히 의회의 형식에 따라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볼세비키당은 명확한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당 신문에도 갈등이나 웅성거림이 전혀 없었다.
3월 4일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은 임시정부의 반혁명적 성격과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는 이 결의문을 요식 행위로 치부했는데 이것은 옳았다. 왜냐하면 당면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반대의 각도에서 접근했다. 위원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소비에트의 결의문을 접한 본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다음의 사항들을 준수할 경우 반대하지 않는다.” 등등....근본적으로 이것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제 2선으로 물러선 입장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의 이 결의문은 공공연히 기회주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만 중앙위원회의 결의문과 모순되었다. 후자의 요식적 내용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의미했으며 기정사실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부에 아무 말 없이 또는 유보조항을 달고 복종하려는 분위기는 당 전체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노동자 당원들은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예상치도 않은 장애물로 간주했다. 비보르그 위원회는 수 천명이 참석한 노동자 병사 집회들을 열었는데 여기서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의문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동에 적극 참여했던 딩겔슈테트가 증언한다: “우리 이외의 누가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더라도 전부 채택되었을 것이다.” 한편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권력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노동자와 병사들 앞에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인기가 있었던 비보르그 위원회의 결의문은 플래카드에 인쇄되었고 풀로 붙여졌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가 이 결의문을 완전히 금지시키자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이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혁명의 사회적 내용과 전망에 대해서도 역시 애매 모호했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봉건적 관계들이 붕괴하고 있으며 대신 부르주아 관계들에 합당한 모든 종류의 ‘자유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우리는 경과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멘세비키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프라우다지 첫 호가 말했다: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모스크바 시당 위원회는 소속 노동자 대의원들에게 보낸 지침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자신의 궁극 목표인 사회주의를 위해 노동계급은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궁극 목표”라는 전통적 언사를 사용하여 사회주의가 상당히 먼 미래의 과제라는 점이 충분히 강조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선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혁명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화해주의자들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수용하면서 현실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 중앙이 보인 정치적 근성의 부재는 지방조직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라토프 조직의 증언만 들어보기로 하자: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대중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확실히 상실되었다. 대신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이득을 보았다. 볼세비키당의 구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것은 아주 우울한 현실이었다.”
볼세비키당 좌파 특히 노동자 당원들은 모든 힘을 다해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며 이것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이 정권을 잡으려 할 경우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것이라는 주장을 이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를 갈면서도 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바로 첫날부터 당내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경향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경향은 하나도 없었다. 프라우다지는 당의 불명확하고 불안정한 정치적 상태를 반영했을 뿐 당의 정치적 단결을 촉진하지 못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3월 중순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이들은 갑자기 당의 공식 노선을 우경화 시켰기 때문이었다.
거의 창당 때부터 당원이었던 카메네프는 언제나 당의 우파였다. 그는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본능을 어느 정도 구비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러시아에서 분파투쟁의 경험이 풍부했으며 망명 생활을 통해 서구의 정치 현상들도 풍부히 관찰했다. 그는 대다수 볼세비키들에 비해 레닌의 사상 일반을 더 잘 파악했다. 다만 실제 행동에서는 이 사상을 가능한 선까지 가장 온건하게 해석했다. 그로부터 판단의 독자성이나 행동의 주도성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선전가, 웅변가, 기자 등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이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았고 다만 생각은 깊었다. 그는 다른 정당들과 협상을 하거나 다른 사회 세력들을 정찰하는 데에는 특히 귀중했다. 다만 이런 활동이 끝난 후 그는 당내에 이질적 정서를 항상 조금씩 끌고 들어왔다. 카메네프의 이 특성들은 너무나 명백해서 그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거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그가 “날카로운 구석”이 없다고 평하면서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를 올바른 노선으로 이끄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이에 대해 그는 약간 저항을 할지는 몰라도 강하게 저항하지는 않는다.” 스탄케비치 역시 같은 평가이다: 적들에 대한 카메네프의 태도는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그 자신이 화해 불가능한 입장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집행위원회 내부에서 그는 적이 아니라 단지 반대자에 불과했다.” 이 평가는 너무 적절하여 덧붙일 말이 거의 없다.
그러나 스탈린은 심리 구조와 활동 방식이 카메네프와 완전히 다른 유형의 볼세비키였다. 그는 강인한 조직가였으나 이론과 정치적 감각이 유치했다. 카메네프는 선전가로서 당의 이론적 지주인 레닌과 함께 오래 해외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위 “실무자”로서 이론적 관점, 넓은 정치적 관심, 외국어에 대한 지식 등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만 그는 러시아의 토양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런 유형의 당 활동가들은 잠시 해외에 나가 지시사항을 하달 받고 문제들을 좀더 깊이 논의한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활동력, 끈기, 배후 음모와 관련된 기발한 생각 등에서 스탈린은 활동가들 가운데 아주 뛰어났다. 카메네프는 성격상 당의 실천적 결론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반면 스탈린은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인 실천적 결론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옹호하면서 이것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 두 인물은 성격이 정반대였으나 혁명 초기에는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서로를 보완했기 때문이다. 혁명 의지가 없는 혁명 사상은 내부 스프링 하나가 끊어진 손목시계처럼 무용지물이다. 이 때문에 카메네프는 언제나 혁명의 진전이나 당면 임무에 부응하지 못하고 뒤 처졌다. 한편 폭 넓은 정치 사상을 구비하지 못하면 대단히 강인한 의지를 가진 혁명가도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들 앞에서 우유 부단할 수밖에 없다. 경험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의지와 지성에 있어서 이질적 계급들의 영향을 쉽게 받았다. 결국 단호하지 못한 선전가와 지성의 폭과 깊이가 없는 조직가가 결합하여 1917년 3월 볼세비키당을 멘세비키주의의 경계선으로 바짝 끌고 갔다. 당의 대표로 집행위원회에 참석한 스탈린은 독자적 입장을 개진할 능력이 카메네프보다 부족했다. 집행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와 신문을 보면 자유주의의 발 밑에서 “민주주의자들”이 아양을 떨 때 스탈린이 볼세비키당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제안서, 선언서, 항의서 등을 제출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저작 [혁명 노트]에서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집행위원회에는 볼세비키당에서 카메네프 외에 스탈린이 출석했다....집행위원회 활동 가운데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는 가끔 흐릿하고 작은 빛을 내는 회색의 반점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 이외에 그에 대해 말할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대체로 수하노프는 스탈린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소굴인 집행위원회에서 스탈린이 보인 정치적 성격의 부재를 그는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다.
3월 14일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소비에트에 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언문은 2월 혁명의 승리를 연합국들의 이해에 비추어 해석했으며 프랑스식의 새로운 공화국과 사회애국주의가 승리했음을 선포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 선언문을 상당한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이렇다할 투쟁 없이 성취된 것이 확실했다. 프라우다지는 이 선언문을 “소비에트 내부의 다양한 경향들이 의식적으로 화해한 결과”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화해는 레닌의 노선이 소비에트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은 직접적 결과에 불과했다.
카메네프는 중앙기관지의 망명 편집위원이었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중앙위원이었었다. 무라노프 역시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의회 의원이었었다. 이 세 인물은 너무 “좌파적인” 프라우다지의 기존 편집부를 제거하고 약간 의심스러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3월 15일 신문의 편집권을 장악했다. 새 편집부는 강령 선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볼세비키당은 임시정부가 “반동이나 반혁명에 대항해 투쟁할 경우에 한해” 단호한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전쟁 문제에서도 이와 못지 않게 단언했다: 독일군이 독일 황제에 복종하듯 러시아 병사들도 “총탄에는 총탄 포탄에는 포탄으로 대응하면서 확고히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전쟁을 중지하라’는 의미 없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모든 교전국들이 즉각 공개 협상에 임하도록 임시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모든 병사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전투 위치를 고수해야한다!” 이것은 모두 조국방어주의 노선이었다. 평화를 위해 제국주의 정부를 “유인”해야 한다는 이 강령은 독일의 카우츠키, 프랑스의 장 롱게, 영국의 맥도널드가 표방하는 강령이었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친 레닌의 강령은 결코 아니었다. 애국주의 신문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하면서 프라우다지는 심지어 한술 더 떴다: “짜르의 검열로 보호받던 신문들은 ‘전쟁 패배’ 노선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 노선은 뻬쩨르부르그 거리에 혁명 연대가 처음 등장한 그 순간 전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프라우다지는 레닌의 노선을 즉각 폐기했다. “전쟁 패배” 노선은 짜르의 검열로 보호받던 반동 신문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패배가 그나마 낫다”는 말은 레닌이 했다. 혁명 연대의 첫 등장이나 왕정의 타도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았다. 슐리아프니코프는 말한다: “편집부가 바뀐 후 처음 발행된 프라우다지를 보자 조국방어주의자들은 기뻐했다. 의회 위원회의 사업가부터 혁명적 민주주의의 중심인 집행위원회 위원들까지 타우리데 궁전 전체는 하나의 소식을 이구동성으로 전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볼세비키들이 극단주의자들을 제압했다. 집행위원회에서 그들은 독이 서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았다....그러나 이 신문은 공장에서 볼세비키 당원들과 동조자들을 완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신 적들은 빈정거리며 만족감을 나타냈다....당 지부들은 크게 분노했다.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도착한 세 명의 구 편집자들이 프라우다지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안 노동자들은 이들의 제명을 요구했다.” 프라우다지는 비보르그 지구의 격렬한 항의문을 곧바로 실어야했다: “노동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프라우다지는 아무리 어려움에 봉착해도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여 잘난 체하는 부르주아들에게 혁명의식의 빛을 비추어야한다.” 아래로부터 이런 항의들이 올라오자 편집자들은 좀더 조심스럽게 표현을 다듬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레닌이 혁명 이후 해외에서 보낸 첫 번째 글을 신문에 싣지도 않았다. 이들의 우경화는 요지부동이었다. 볼세비키당 좌파의 대변인 딩겔슈테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이중권력의 원칙을 채택해야했다... 그리고 2주일 동안의 치열한 정치활동을 통해 자기 임무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된 노동자와 병사 대중에게 이 우회로의 불가피성을 증명해야했다.”
전국에서 당 조직들은 자연스럽게 프라우다지의 노선을 추종했다. 다수의 소비에트들은 권력 장악이라는 근본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볼세비키 당원들은 소비에트 다수파에 단순히 굴복했다. 모스크바 지역의 소비에트 협의회에서 볼세비키들은 전쟁에 대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결의문을 지지했다. 3월말과 4월초 82개 소비에트 대표들이 참석한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볼세비키들은 권력문제에 대한 공식 결의문을 지지했고 이것을 멘세비키 지도자 단이 옹호했다. 볼세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이 대단한 정치적 화해는 당 통합 움직임을 크게 확산시켰다. 지방에서는 볼세비키들과 멘세비키들이 조직을 통합했다. 카메네프-스탈린 분파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좌파로 꾸준히 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우리데 궁전의 복도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에게 의회주의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민주주의 세력에게도 유사한 압력을 가했다.
해외에 망명 중이던 당 중앙위원들과 이들의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는 당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지노비에프를 조수로 둔 레닌은 지도부의 임무를 전부 수행했다.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는 가장 책임 있는 비서였다. 실제 활동에서 이 소규모 중앙은 수십 명에 이르는 볼세비키 망명자들의 지지에 의존했다. 전쟁 중에 연합국 헌병들이 이들을 점점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국내와 단절된 이들의 고립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초조하게 기다렸던 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깜짝 놀랐다. 혁명적 국제주의 망명자들을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던 영국은 단호하게 러시아 행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레닌은 취리히의 우리 속에 갇힌 채 분노하며 탈출 방도를 모색했다. 논의가 된 백 가지의 탈출 계획 중 하나는 맹인이자 벙어리인 어느 스칸디나비아인의 여권으로 여행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레닌은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자신의 노선이 전파될 경로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3월 6일 그는 스톡홀름을 통해 뻬쩨르부르그로 전보를 쳤다: “우리의 전술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특히 케렌스키를 경계해야한다; 노동계급을 무장시키는 것이 혁명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뻬쩨르부르그 시의회의 선거를 즉시 실시할 것을 주장해야한다; 다른 정당들과 화해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소비에트 대신 시의회 선거 실시에 대한 주장은 일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없어졌다. 그러나 전보의 짤막하고 기민한 문구로 표현된 다른 정책들은 일반적 방향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프라우다지에 논문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을 보냈다. 이 글은 외국에서 얻은 정보의 파편들에 기초했지만 혁명 상황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외국 신문들을 읽은 후 레닌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케렌스키 뿐 아니라 체이제의 직접적 도움을 통해 임시정부는 노동자들을 속이고 있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조국방어 전쟁으로 위장하고 있다. 스톡홀름의 친구들을 통해 그는 경고로 가득한 편지를 3월 17일 작성했다. “임시정부의 기만에 볼세비키당이 합세하는 것은 당의 영원한 치욕과 정치적 자살이 될 것이다.... 당내의 사회애국주의자들과는 즉시 관계를 끊을 것이다....” 그는 특정 인물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간청했다: “세계 역사적 책임이 자신의 두 어깨에 있다는 사실을 카메네프는 인식해야한다.” 여기서 카메네프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정치적 원칙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레닌이 실제적인 투쟁의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스탈린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레닌이 연기가 자욱한 유럽을 관통하여 뻬쩨르부르그에 자신의 팽팽한 의지를 전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협조하여 사회애국주의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었다.
변장, 가짜 구레나룻, 외국 여권, 위조 여권 등 다양한 술수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하나 하나 폐기되었다. 한편 독일을 통해 러시아로 귀국하자는 아이디어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계획은 애국주의 노선을 품고 있던 인물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망명자들을 두렵게 했다. 마르토프 등 멘세비키들은 레닌의 대담한 계획을 따를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연합국 대사관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봉인 열차”가 적들의 악랄한 선동에 이용되자 다수의 볼세비키들도 독일을 통한 귀국을 나중에 후회했다. 레닌은 처음부터 이 계획의 어려운 점들을 알고 있었다. 취리히를 떠나기 직전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적었다: “물론 애국주의자들은 아우성을 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감수해야한다.” 문제는 간단했다: 스위스에 계속 체류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을 통해 귀국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닌은 이 문제를 놓고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레닌이 귀국한지 한달 만에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 멘세비키들도 같은 방식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적대국 영토를 통과하는 특이한 여행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지도자 레닌의 기본 특성인 발상의 대담함과 실천의 대단한 면밀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위대한 혁명가 속에는 깐깐한 공증인이 한 명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사적 소유를 증명하는 공증인이 영원히 필요 없도록 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로 귀국하는데 필요한 문서를 작성했다. 혁명 신문의 편집부와 호엔쫄런 왕가 사이에 독특한 국제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을 통과하는 조건들이 대단히 꼼꼼하게 고안되었다. 레닌은 여행 중 완전한 치외법권을 요구했다: 승객의 얼굴, 여권, 짐 등은 절대로 감시 대상이 아니다. 여행 내내 승객 외에는 단 한 명도 기차 안에 출입할 수 없다. (여기서 “봉인” 열차에 대한 전설이 나왔다.) 한편 망명자들은 같은 숫자의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민간인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하는 것에 동의했다.
동시에 여러 외국 혁명가들과 공동선언문이 작성되었다. “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 위해 귀국하는 러시아 국제주의자들은 정부에 대항해 다른 나라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을 선동하는데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프랑스의 로리오와 질보, 독일의 파울 레비, 스위스의 플라튼, 스웨덴의 좌익 의원들과 기타 인물들이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조건과 예방조치가 충족되자 3월말 30명의 러시아 망명자들은 스위스를 떠났다. 전쟁 화물 가운데에서도 대단히 폭발성이 강한 화물이 이동하고 있었다!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에서 레닌은 1915년 가을 볼세비키당의 중앙기관지가 선언한 내용을 이들에게 상기시켰다: 혁명 러시아의 공화국 정부가 전쟁 지속을 선언할 경우 볼세비키당은 이 정부를 반대할 것이다. 이제 똑같은 상황이 현실화되었다. “우리는 구츠코프-밀류코프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말과 함께 레닌은 혁명 러시아에 들어섰다.
한편 임시정부 장관들은 레닌의 귀국을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시정부의 3월 회기 가운데 정회가 선언되자 우리는 볼세비키당의 선전이 증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케렌스키는 늘 그렇듯이 히스테리컬한 낄낄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레닌이 오고 있다, 이제 진짜 일이 시작된다!’” 그의 말은 옳았다. 이때가 되어서야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보코프의 말에 의하면 장관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독일에게 간청하여 귀국했으니 레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장관들은 통찰력이 대단했다.
레닌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그의 제자들은 그를 배웅하러 핀란드에 갔다. 청년 해군장교이자 볼세비키 당원인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차에 타자마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카메네프를 공격했다: ‘프라우다지의 글들이 왜 그 모양인가? 여러 호를 읽은 후 올바로 비판했는데도 바뀐 것이 없지 않은가.’” 수년간 떨어진 후 조수와 선생 사이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비판적 어조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정어린 회합이었다.
군대의 협력을 얻어 뻬쩨르부르그 볼세비키 시당 위원회는 레닌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수천 명의 노동자와 병사들을 동원했다. 어느 우호적인 장갑차 사단이 차량을 전부 동원하여 그를 맞이했다. 시당 위원회는 장갑차로 레닌이 도착할 역에 가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거리에서 아주 유용한 이 괴물 장비를 혁명은 이미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였다.
핀란드역의 소위 “짜르 응접실”에서 열린 공식 회의는 여러 권으로 출판된 수하노프의 빛이 상당히 바랜 회고록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레닌은 거의 뛰다시피 ‘짜르 응접실’에 들어갔다. 동그란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추위로 약간 얼어있었는데 팔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로 서둘러 가다가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난 듯 체이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여기서 체이제는 이전의 우울한 표정을 버리지 않은 채 ‘환영 연설’을 했다. 도덕 설교가의 정신과 내용 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꼼꼼하게 유지한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 동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와 혁명 전체의 이름으로 귀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그러나 현재 혁명적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외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 혁명을 방어하는 것입니다....이 임무를 위해 동지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희망합니다.’ 체이제는 연설을 마쳤다. 너무 빨리 끝난 연설에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할 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체이제의 환영 연설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서서 이쪽 저쪽을 찬찬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짜르 응접실’ 천장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체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큰 꽃다발을 고쳐 잡은 후 집행위원회 대표들을 완전히 외면한 채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친애하는 동지, 병사, 수병,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 승리한 러시아 혁명을 맞게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국제 노동계급 군대의 전위대로 맞게 되어 기쁩니다....우리의 동지 카알 리이프크네히트의 외침에 호응하여 인민이 손에 든 무기를 자국의 자본주의 착취자들에게 돌릴 시간이 멀지 않았습니다....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수하노프의 묘사는 적절하다. 꽃다발은 레닌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컸고 엄중한 혁명 사건들의 배경으로 부적절했기 때문에 레닌을 당혹스럽게 했다. 일반적으로 레닌은 꽃다발의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의 응접실에서 열린 공식적이며 위선적인 교회 일요학교 같은 환영 행사는 그에게 훨씬 더 당혹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체이제는 자신의 환영 연설 내용보다는 값이 더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레닌에 대해 약간 겁을 먹었다. 물론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종파주의자”를 꾸짖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틀림없이 말해놓았을 것이다. 지도부의 형편없는 수준을 증명한 체이제의 연설을 보완하기 위해 청년 해군장교 하나가 수병들을 대표하여 환영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레닌이 임시정부의 장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이 정도면 연설의 수준이 짐작될 것이다. 2월 혁명은 말이 많고 배 가죽이 축 늘어진 꽤 어리석은 인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과 의지의 모든 면에서 사태를 올바로 고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귀국한 인물을 이 엉성한 혁명은 이렇게 환영했다. 레닌이 귀국과 함께 느낀 이 최초의 인상들은 상황에 대한 그의 애초의 경각심을 10배나 증폭시켰다. 또한 그에게 억제하기 힘든 저항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 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더 만족했을 것이다! 체이제가 아니라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조국 방어가 아니라 국제혁명에게, 임시정부가 아니라 리이프크네히트에게 레닌은 호소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이후 자신이 실현할 정책 전부를 역에서 짤막하게 리허설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엉성한 혁명은 즉시 그리고 흔쾌히 자기 지도자를 가슴에 품었다. 병사들은 레닌이 장갑차에 올라 탈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던 밤은 환영 행렬을 아주 인상깊게 만들었다. 다른 장갑차들의 전조등은 희미하게 낮추어졌다. 레닌이 타고 있는 장갑차의 날카로운 전조등 불빛으로 밤은 환하게 밝혀졌다. 이 불빛은 거리의 어둠 속에 서있는 노동자, 병사, 수병들의 흥분된 모습을 비추었다. 이들은 위대한 혁명을 성취했으나 권력을 잡지 못했다. 자신의 연설을 들으려는 청중을 위해 레닌이 연설을 반복하거나 그 내용을 바꿀 때마다 밴드는 연주를 멈추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환영 행진은 대단히 훌륭했으며 어느 정도 상징적이었다.”
볼세비키당 본부가 위치한 크쉐신스카야 궁전은 어느 궁중 무용수의 저택이었는데 윤이 나는 비단으로 내부가 장식된 화려한 건물이었다. 당 본부로 어울리지 않는 궁전의 화려함에 대해 레닌은 언제나 생기 있는 농담을 했다. 이제 여기에서 환영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에게 너무 과중했다. 초조한 행인이 문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레닌은 찬사조의 환영 연설들을 계속 참고 들어야 했다. 자신의 귀국을 사람들이 진정하게 기뻐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는 환영 연설들의 수다를 계속 듣자니 괴로웠다. 공식 환영 연설의 어조 자체가 그에게는 모방과 허세로 느껴졌다. 이것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에게서 빌려온 표현으로 한마디로 연설조에다 감상적이며 거짓이었다. 혁명은 자신의 문제와 임무를 규정하기도 전에 벌써 피곤한 의전 절차를 만들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성격 좋은 미소를 마치 꾸짖듯이 지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가끔 보면서 하품을 숨기지 않았다. 마지막 환영 연설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 특이한 손님은 답변 연설을 통해 청중에게 자신의 열정적인 생각들을 마구 퍼부었다. 이것은 거의 심한 꾸지람 같이 들렸다. 당시 속기술은 아직 당에 도입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연설을 기록하지 않았다. 모두들 일어나고 있는 일에 너무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연설의 내용은 보존되지 않은 채 청중의 기억에 일반적 인상으로만 남아있다. 그리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감되었다. 여기에 황홀감이 덧붙여지고 경악의 감정은 씻겨 없어졌다. 레닌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의 연설은 경악이었다. 한달 동안 계속 입으로 반복되면서 뒤흔들릴 수 없이 영원하다고 생각된 기존의 표현들이 레닌의 연설에 의해 하나 하나 깨어져 나갔다. 핀란드역에서 그의 짧은 연설이 체이제의 머리 위에서 터지자 그는 깜짝 놀랐다. 레닌은 이 연설의 주제를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중핵들 앞에서 두 시간 짜리 강연으로 발전시켰다.
아무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회주의자 수하노프는 손님으로 우연히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좋은 카메네프에 의해 입장이 허용되었다. 물론 레닌은 이런 행위를 참아 넘기지 않았다. 어쨌든 이 덕분에 반은 적대적이면서도 반은 매혹 당한 이 외부인은 뻬쩨르부르그 볼세비키들과 레닌의 첫 만남을 자신의 회고록에 담을 수 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나 같은 이단자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 모두에게 그의 천둥 같은 연설은 큰 놀라움이었다. 이 연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환영식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연의 힘과 귀신이 땅위로 튀어나와 장벽, 개인적 난관, 개인적 고려 등을 무시한 채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연회장과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그의 추종자들 머리 위를 휘감는 것 같았다.”
수하노프가 표현한 개인적 고려와 난관은 막심 고리키와 차를 나누면서 동요하던 [노비 지즌](역자 주: “새로운 삶”이란 의미의 이 잡지는 멘세비키 국제주의자들이 2월 혁명 후 발간했다. 이 잡지는 10월 혁명 후 볼세비키 정권에 반대하여 강제 폐간 당했다.)의 편집부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고려는 더 깊었다. 그 연회장을 휘감은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었다. 후자는 전자를 당혹스러워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것은 신경쓸 것이 없다. 당시 분위기를 수하노프는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하노프에 의하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과 여기로 오면서 나는 저들이 우리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곧바로 가둘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결국 일어날 것이며 이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예상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혁명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전망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곧장 갇히는 것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이것은 불길한 농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레닌도 혁명도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그는 농업개혁을 위한 입법을 포함해 소비에트의 정책들을 무시했다. 그는 정부를 전혀 무시한 채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토지를 점거할 것을 촉구했다.”
“‘의회 공화국은 필요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필요 없다.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 외에는 어떤 정부도 필요 없다.’”
이때 레닌은 자신을 소비에트 다수파와 확연히 단절시키면서 후자를 적으로 분류했다. “이것만해도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현기증을 느꼈다!”
수하노프는 분노하면서 레닌의 사상을 계속 전달한다: “오직 짐머발트 좌파만이 노동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을 옹호한다. 나머지는 모두 낡은 기회주의자들이며 말은 근사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와 노동자 대중의 대의를 배신하고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수하노프의 보고를 이렇게 보완한다: “당 지도그룹과 개개 동지들이 그의 귀국 이전에 표방한 전술을 그는 단호히 공격했다. 당의 중책을 맡고 있는 동지들은 모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도 일리치의 말은 계시 그 자체였다. 레닌은 어제의 전술과 오늘의 전술 사이에 루비콘강(역자 주: 루비콘강은 건널 수 없는 선을 의미한다. 케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철회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되겠지만 루비콘강이 금방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연설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 모두들 너무 놀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각자에게 필요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자신의 보고를 마친다: “나는 거리로 나왔다. 이날 밤 나는 마치 홍두깨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다. 레닌 옆에는 당원이 아닌 나 같은 사람은 있을 자리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
다음날 레닌은 자신의 견해를 짤막한 글로 정리하여 당에 제시했다. [4월 4일 테제]라는 제목을 단 이 글은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테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한 사상을 단순한 말로 표현했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우리의 공화국이 아니다; 이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볼세비키당의 임무는 이 제국주의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정당들은 인민 대중의 신뢰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소수이다. 이 상황에서 정부를 외부에서 폭력으로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중이 화해주의자들과 조국방어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도록 대중을 교육시켜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대중에게 우리의 노선을 설명해야한다.” 현 정세에 의해 요구되는 이 정책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여 부르주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우리는 자본가들과 절대적으로 단절하여 이들의 비밀조약들을 공개할 것이며 전세계 노동자들이 자본가 계급의 족쇄를 깨고 전쟁을 끝낼 것을 촉구해야한다. 우리는 국제혁명을 시작하고 있다. 국제혁명이 성공할 때에만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 것이며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이 보장될 것이다.
이 테제는 레닌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당의 중앙기구들은 이 테제를 놀라움으로만 완화된 적대감으로 대했다. 레닌과 함께 이 문서에 서명한 조직, 그룹, 개인은 하나도 없었다. 10년간 해외에서 레닌과 함께 활동하며 그의 직접적 영향을 일상적으로 받았으며 레닌과 함께 귀국한 지노비에프조차 말없이 물러섰다. 물론 이에 대해 레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수제자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네프가 대중 선전가였다면 지노비에프는 선동가였다. 레닌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선동가에 불과했다.” 우선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는 책임감이 부족했다. 더욱이 내적 규율이 없는 그의 사고는 이론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선동가의 형태 없는 직관으로 해소된다. 대단히 예민한 후각 덕분에 그는 분위기를 파악한 후 어떤 표현이 그에게 필요한 지를 금방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자이자 웅변가이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선동가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서는 자신의 약점을 연설을 통해서는 자신의 강점을 드러낸다. 선동의 순간에 그는 어느 볼세비키보다 훨씬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그러나 혁명적 주도성은 카메네프보다도 부족하다. 지노비에프는 모든 참주선동가들이 그렇듯이 우유부단하다. 분파투쟁의 단계에서 대중의 직접 투쟁의 단계로 넘어가면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스승인 레닌과 결별했다.
볼세비키당이 직면한 4월의 위기가 일시적이며 거의 우연적인 혼란에 불과했다고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양산되어왔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실제 사실과 대면하자마자 산산이 깨져나간다.(저자 주: 포크로프스키 교수가 편집한 거대한 [10월 혁명사 논문집]<1927년, 모스크바, 제 2권> 가운데 바이예프스키라는 인물은 “4월의 혼란”에 대해 변명조로 논문을 썼다. 그러나 이 논문은 사실들과 문서들을 마구잡이로 취급하여 유치하게 무기력하지 않으면 냉소적인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월 볼세비키당의 활동 내용은 이미 언급이 되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레닌과 뻬쩨르부르그 당지도부 사이의 모순은 가능한 한 가장 깊었다. 이 모순은 레닌의 귀국 순간에 가장 치열하게 드러났다. 82개 소비에트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임시정부의 주권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것을 지지했다. 이 협의회와 동시에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세비키당 전국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협의회의 말미에 레닌이 귀국했는데 이 협의회는 전쟁으로 인한 당과 당 상층부의 분위기와 견해를 파악하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한다. 협의회에 보고된 글들은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들을 읽어보면 빈번히 경악하게된다: 이 대표들로 구성된 당이 겨우 7개월만에 철권을 휘둘러 정권을 잡다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당협의회가 개최된 때는 봉기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 달의 시간은 전쟁이나 혁명에게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혁명의 가장 기본 문제들에 대해서도 당의 견해는 확정되지 않았다. 보이틴스키, 엘리아바 등 극단적 애국주의자들이 자칭 국제주의자들과 나란히 협의회에 참석했다. 물론 멘세비키당에 비해서야 훨씬 적지만 공공연히 애국주의를 주창하는 당원의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협의회는 애국주의 당원들과 결별할 것인지 또는 멘세비키당의 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할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협의회 막간에 볼세비키들과 소비에트 협의회 대표들인 멘세비키들이 전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합동회의를 열었다. 가장 열렬한 애국주의자인 멘세비키 리이버는 이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볼세비키다 멘세비키다 하는 낡은 구분은 없애고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만 논의하자.” 그러나 볼세비키인 보이틴스키는 서둘러 그의 말 하나 하나에 자신의 서명을 첨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볼세비키들, 멘세비키들, 애국주의자들, 국제주의자들 모두는 전쟁에 대한 공동 노선을 찾고 있었다.
스탈린은 임시정부와 당의 관계에 대해 보고했는데 이것은 당 협의회의 노선을 가장 적절히 표현했다. 당 협의회의 보고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출판되지 않은 그의 연설의 핵심을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현재 두 기관에 의해 분점 되어 왔다. 이 둘 사이에는 논의와 투쟁이 오고가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역할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비에트는 혁명적 변화의 주도권을 쥐어왔다. 소비에트는 봉기를 수행한 인민의 혁명 지도자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통제하는 기관이다. 사실 임시정부는 혁명 인민의 성과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해왔다. 소비에트는 세력을 동원하고 통제한다. 임시정부는 망설이고 혼란 되어 있으나 인민의 성과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맡아왔다. 인민은 이미 이 성과를 차지했다. 이 상황은 약점과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건들을 강제하여 부르주아 계층을 배척시키는 것은 지금 이익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미래에 부르주아 계급은 우리로부터 불가피하게 이탈할 것이다.”
이 보고자는 계급 구분을 초월하여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단순히 분업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혁명을 완수하고 구츠코프와 밀류코프는 이것을 “요새처럼 지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모델로 잘못 설정한 멘세비키들의 전통 노선을 목격한다. 역사를 감독하는 이 입장은 멘세비키 지도자들의 특징에 딱 들어맞는다. 여러 계급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들의 성과를 후원자처럼 비판한다. 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 계급을 이탈시키는 것이 불리하다는 사고는 언제나 멘세비키 정책의 지도원리였다. 이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 자유주의 동맹자들을 겁주지 않기 위해 대중운동을 무디게 하고 약화시켜야한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스탈린의 결론은 화해주의자들의 애매한 입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임시정부가 혁명의 단계들을 방어하는 한 우리는 임시정부를 지지해야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반혁명 정책을 취하면 우리는 지지를 철회해야한다.”
스탈린의 보고는 3월 29일에 있었다. 이 다음날 소비에트 협의회의 공식 대변인인 무당파 사민주의자 스테클로프는 임시정부에 대한 똑같은 조건적 지지 노선을 옹호했다. 그리고 그의 열정적 웅변은 혁명을 “요새처럼 방어하는 자들”의 활동 모습을 너무도 확연하게 제시했다. 사회 개혁 반대, 왕정에 대한 호의, 반혁명 세력의 보호, 병합에 대한 애착 등등. 이 결과 당협의회는 경악하며 임시정부 지지 노선에 반발했다. 볼세비키 우파인 노긴은 이렇게 선언했다: “스테클로프의 연설은 새로운 생각을 도입시켰다: 지금 우리는 지지가 아니라 저항을 얘기해야한다. 이 점은 명확하다.” 스크리프닉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스테클로프의 연설 이래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따라서 더 이상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 인민과 혁명에 대항해 임시정부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 대한 이상주의적 “분업”을 주장했던 스탈린은 이제 임시정부 지지 노선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짧고 피상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건부로”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임시정부의 혁명활동만을 지지할 것인가? 사라토프의 대표인 바실리예프는 올바르게 선언했다: “임시정부에 대해 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크레스틴스키는 상황을 더욱 명확하게 표현했다: “실천상 스탈린과 보이틴스키 사이에는 이견이 없다.” 비록 보이틴스키가 협의회 직후 멘세비키당으로 넘어갔지만 크레스틴스키의 견해는 별로 틀리지 않았다.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철회했으나 지지 노선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를 원칙에 입각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유일한 인물은 크라시코프였다. 그는 몇 년간 당을 떠나있었으나 삶의 경험에 짓눌려 당에 복귀하려는 고참 볼세비키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핵심을 부여잡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비꼬는 투로 질문했다: 이것이 막 우리가 시작하려는 노동계급 독재인가? 그러나 당협의회는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했다. 동시에 이것을 관심 밖의 문제로 치부해버렸다. 협의회가 채택한 결의문은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구 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위해 대단히 열정적으로 투쟁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하라. 즉 이 결의문으로 볼세비키당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다음날 볼세비키당 협의회는 볼세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통합에 대한 체레텔리의 제안을 심의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우리는 통합을 성사시켜야 한다. 통합의 기초로서 우리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짐머발트-키엔탈 반전주의에 기초해서 통합이 가능하다.” 논조가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카메네프와 스탈린에 의해 프라우다지 편집부에서 쫓겨난 몰로토프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체레텔리는 잡다한 분자들을 통합시키려고 한다; 그도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로 자처한다; 이를 기초로 당을 통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기 입장을 고수했다: “앞서 나가 이견을 가로막을 필요는 없다. 이견이 없다면 당 생활은 존재할 수 없다. 당내의 사소한 이견들은 때가 되면 해소될 것이다.” 전쟁 기간 내내 레닌이 사회애국주의와 이것의 평화주의 위장노선에 대항해 수행한 투쟁은 모두 손쉽게 한쪽으로 밀려났다. 1916년 9월 레닌은 슐리아프니코프를 통해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의 편지를 뻬쩨르부르그 당 중앙에 보냈다: “화해주의와의 통합은 러시아 노동자당에게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백치와 같은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당을 파멸시킬 것이다....당 통합과 관련된 속임수를 이해하고 러시아의 형제들(체이제 일당)과 분열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분자들에게만 의존해야한다.” 이 경고는 당시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도자 체레텔리와의 이견은 스탈린에게 사소한 이견으로 보였다. 이것은 같은 당 안에서 “때를 기다리면 해소”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당시 스탈린이 가지고 있던 견해를 평가하는 가장 좋은 기준이다.
4월 4일 레닌이 당 협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제”를 전개하는 그의 연설은 혼란에 빠진 학생이 흑판에 쓴 것을 선생이 축축한 스폰지로 지우는 것처럼 협의회의 기존 작업을 무로 돌렸다.
레닌은 물었다: “왜 여러분은 권력을 잡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 있었던 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스테클로프는 권력을 잡지 않은 이유를 혼란스럽게 설명했었다: 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적이다; 이것은 첫 단계이다; 그리고 전쟁 중이지 않은가 등등. 레닌은 말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노동계급이 충분히 의식이 상승하지 않았으며 충분히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물리력은 노동계급에게 있으나 부르주아 계급은 의식과 준비정도에서 앞서 있다. 이것은 끔찍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인민에게 솔직히 말해야한다: 우리가 조직과 의식에서 준비가 덜 되었으므로 권력을 잡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자들은 사이비 객관주의의 뒤로 숨는다. 그러나 레닌은 문제 전체를 주관적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노동계급은 2월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 볼세비키당이 자신의 객관적 임무를 수행할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인민 대중을 정치적으로 독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날 변호사 크라시코프는 이렇게 도전적으로 말했었다: “노동계급 독재를 실현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를 그렇게 제기해야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권력을 장악할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때 협의회 의장은 그의 발언권을 박탈했다. 실제적 문제가 논의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유일한 실제적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계급 독재를 준비하는 문제가 일정에 올랐다. 이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그는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현 정세는 노동계급의 불충분한 의식과 조직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긴 혁명의 첫 단계에서 노동계급과 빈농에게 권력을 부여해야하는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이 현 정세의 특수성이다.” 프라우다지의 인도에 따라 당 협의회는 혁명의 임무를 제헌의회를 통해 실현될 민주 개혁으로 제한시켜 놓았었다. 이에 대항해 레닌은 선언했다: “우리의 삶과 혁명은 제헌의회를 무대 뒤로 밀어버릴 것이다. 노동계급 독재는 존재하고 있으나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지 아무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협의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눈길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들은 서로 속삭였다: 일리치는 해외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기발한 분업을 선언한 스탈린의 연설은 영원히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탈린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부터 그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야만할 것이다. 카메네프 혼자서 기존 노선을 방어하게 될 것이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편지를 통해 이미 경고한 바 있었다: 전쟁 문제, 국수주의, 부르주아 계급과의 타협 등에서 양보를 하는 어떤 자와도 결별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 당의 지도 그룹과 대면한 그는 같은 선상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애매 모호함과 어정쩡함의 살아있는 실례가 필요할 때에 그는 당원이 아닌 인물들 또는 스테클로프나 체이제를 지적했다. 이것이 레닌의 관례였다: 너무 일찍 인물의 입장을 규정하지 않는다; 신중한 사람은 제때에 전투에서 퇴각할 시간을 남에게 준다; 이를 통해 미래의 공공연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2월 혁명 후 전쟁을 통해 병사와 노동자들이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병사와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징집 노예로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적들의 범위를 좁히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볼세비키들도 임시정부를 신뢰한다. 혁명이 연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의 사망을 의미한다....이것이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차라리 소수로 남겠다.” 이것은 단순히 웅변조의 위협이 아니었다. 끝까지 논리를 전개시킨 명확한 혁명노선이었다.
카메네프나 스탈린의 이름은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레닌은 신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우다지는 정부가 병합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자본가 정부에게 병합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억제된 분노가 높은 소리로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신을 통제한다: 그는 필요한 것보다 더 적게 말하지도 않지만 더 많이 말하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김에 그는 혁명 정치인의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규칙을 말한다: “대중이 영토 병합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나는 이들을 믿는다. 그러나 구츠코프와 르보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들은 사기꾼이다! 노동자가 조국 방어를 원한다고 말하면 그는 피억압 인민의 본능으로 말한다.” 사물의 이름을 올바로 말하는 원칙은 삶 자체만큼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때에 이름을 올바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소비에트의 호소문이 발표되자 자유주의 신문인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연설)는 평화주의가 연합국의 공통노선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좀더 명확하고 짤막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했다: “거친 폭력으로부터 가장 섬세한 속임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것이 요즘 러시아의 특성이다.”
이 선언문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적었다: “이 호소문이 (서구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도달하면 수십만 노동자들이 그 동안 잊혀졌던 구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기억할 것이다.”
이에 레닌은 이렇게 반대한다: “소비에트의 호소문에는 계급의식으로 충만한 말은 하나도 없다. 말만 무성할 뿐 알맹이가 없다.” 자생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의 자부심이 깃든 이 문서는 레닌이 보기에는 “가장 섬세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무기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전까지 프라우다지는 짐머발트 좌파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인터내셔널을 말할 때에도 어느 인터내셔널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레닌은 이것을 “프라우다지의 카우츠키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짐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중앙파가 대세를 장악했다....우리는 좌파를 건설하여 중앙파와 결별했다....세계 모든 나라에 짐머발트 좌파는 존재한다. 사회주의가 전세계에서 분열했다는 것을 대중은 인식해야한다....”
이 말이 있기 3일 전에 스탈린은 같은 협의회에서 짐머발트-키엔탈에 기초하여 즉 카우츠키주의에 기초하여 시간을 두고 체레텔리와 이견을 해소할 용의를 천명했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 당 통합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국방어주의자들과 당을 통합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다. 차라리 리이프크네히트의 말처럼 110대 1로 홀로 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인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기존 노선을 비난한 것은 단순히 강한 언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애국주의자들에게 손가락이라도 내밀며 연대하려는 볼세비키들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완벽히 표현했다. 멘세비키들과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에 대해 레닌은 이들과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을 공유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의 이름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을 개인적으로 제안한다.”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당 협의회의 어느 누구도 제 2 인터내셔널과 궁극적으로 단절하는 상징적 제스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레닌은 당혹감과 놀라움과 약간의 분노를 드러낸 대의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더러운 셔츠를 벗고 새로운 셔츠를 갈아입을” 때가 왔다. 다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철저히 썩어빠진 낡은 말에 연연하지 말아야한다. 새로운 당을 건설할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러면 피억압 대중 모두가 여러분의 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시작하지 않은 임무의 거대함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대오 내의 지적 혼란 앞에서 그리고 회의, 환영식, 치레에 불과한 결의문 등으로 어리석게 낭비한 귀중한 시간을 생각하며 레닌은 외친다: “환영식과 결의문은 치워버려라! 이제 진짜 우리의 임무를 시작할 시간이다. 실천적인 일을 진지하게 시작해야한다!”
이로부터 한 시간 후 레닌은 미리 약속된 볼세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합동회의에서 그의 연설을 반복해야했다. 그의 연설은 회의 참석자 다수에게 웃음거리와 정신 착란의 중간처럼 들렸다. 그의 연설을 봐주는 듯한 자들도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달나라에 갔다왔다; 10년간 해외에 있다가 핀란드역의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설교하다니 확실히 돌았군. 애국주의자들 가운데 성질이 좀더 못된 자들은 봉인 열차를 언급했다. 레닌의 연설이 그의 적들을 아주 기쁘게 했다고 스탄케비치는 증언하고 있다: “저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그가 귀국한 것은 잘된 일이다. 이제 그의 권위는 사라졌다....그는 자신의 말을 곧 철회할 것이다.”
레닌의 연설은 혁명의 전망을 대담하게 파악했으며 오랫동안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과 결별하려는 굽히지 않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혁명의 진전에 발맞추어 나가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그의 연설은 대단한 현실감각과 대중의 정서에 대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그의 연설은 전체가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균형이 잡혀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연설은 민주주의자들에게 황당한 수박 겉 핥기로 보였다.
볼세비키당은 소비에트 내에서 아주 극소수인데 레닌은 권력을 잡을 꿈을 꾸고 있다니 이것이 순전한 모험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레닌의 연설에는 모험주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광범위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직한” 조국방어 정서에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정서 속에 함몰되거나 이들의 등뒤에서 음모적으로 활동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의식에 기초하여 활동을 전개해야한다. 소수로 남아 있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당분간 지도적 위치를 포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소수로 남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그는 미래에 그를 반대하고 비난할 자들에 정면 도전을 했다. 마치 리이프크네히트의 110대 1과 같이 소수로 남아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단 한 명의 소수가 되더라도 여기서 출발해야한다. 이것이 그의 연설의 주제였다.
“진정한 정부는 노동자 소비에트이다....소비에트에서 우리 당은 소수이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다수의 전술적 오류를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소수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속임수로부터 대중을 구출하기 위해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대중이 우리의 말을 그대로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오류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영원히는 아니지만 당분간 소수로 남아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 당이 승리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 노선의 올바름은 증명될 것이다....피억압 인민 모두는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전쟁이 이들을 우리 쪽으로 밀칠 것이다. 이들에게 다른 탈출구는 없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볼세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합동회의에서 레닌은 조직 분열의 살아있는 화신이었다....멘세비키 지도자인 보그다노프는 연단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다. 그는 레닌의 연설을 가로막고 말했다: ‘저것은 미친 자의 헛소리이다....저런 주접에 박수를 보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말한 후 그는 분노와 경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청중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한때 볼세비키당 중앙위원이었던 골든베르크는 이때 당을 나가있었다. 그는 레닌의 테제를 이렇게 격하시켰다: “수년간 러시아 혁명에서 바쿠닌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이제 레닌이 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말한다: “이때 레닌의 강령은 분노라기보다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모두에게 그의 노선은 너무 황당하고 미친 것처럼 보였다.”
같은 날 저녁 접촉위원회의 복도에서 두 사회주의자가 밀류코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는 레닌에 대한 것이었다. 스코벨레프는 레닌을 “운동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명을 다한” 인물로 평가했다. 수하노프도 이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레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그는 여기 있는 나의 친구 밀류코프에게도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역할 배분은 레닌이 표현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볼세비키주의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빼앗을 마음의 평정을 사회주의자들이 지켜주고 있었다.
레닌이 형편없는 맑스주의자로 선언되었다는 소문은 주러시아 영국대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국 대사 부캐넌은 이렇게 적었다: “새로 귀국한 무정부주의자에는 레닌도 끼어있었다. 그는 봉인 열차를 타고 독일을 거쳐 귀국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당 회의에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보였는데 그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았다.”
레닌을 가장 봐주는 척 한 자는 바로 케렌스키였다. 그는 임시정부 장관들과 함께 있다가 레닌을 만나러 가보아야겠다고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주위의 놀라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그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그의 광기의 안경을 통해 보고 있다. 주위의 사태를 그가 이해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은 나보코프의 증언이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레닌을 교정할 시간을 결코 내지 못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그의 반대자들과 적들에게 놀라운 분노만을 안기지 않았다. 몇몇 고참 볼세비키들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멘세비키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고리키의 신문을 중심으로 모여있던 중간 그룹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탈당사태는 심각한 정치적 파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레닌의 노선이 볼세비키당 지도그룹에게 남긴 인상이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귀국한 후 며칠동안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의식적인 당내 동지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그의 주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심지어 그의 당 동지들조차 당혹감에 사로잡혀 그를 외면했다.” 이때 수하노프와 젠지노프는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을 매일 집행위원회에서 만나고 있었으며 이들이 했던 말을 직접 듣고 있었다.
볼세비키 당원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증언은 얼마든지 있다. 2월 혁명 당시를 우연히 회상할 때 고참 볼세비키 다수와 마찬가지로 치콘 역시 가능하면 정도를 낮추어 이렇게 적었다: “레닌의 테제가 나오자 당 대오가 약간 동요했다. 많은 동지들은 레닌이 조합주의 편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러시아의 정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고 현 정세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등등. 지방의 출중한 볼세비키였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레닌이 귀국했을 때 한 선동은 볼세비키들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는 공상주의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의 현실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렇다고들 이해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의 노선은 우리들에게 흡수되어 우리의 피와 살이 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이었으며 그의 환영식을 조직했던 동지들 가운데 하나였던 잘레쥐스키는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 “레닌의 테제는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너무도 따뜻하고 인상적인 귀국 환영식 이후 레닌이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그는 확실히 확인시키고 있다: “4월 4일 레닌 동지는 우리 대오 내에서도 공개적인 동조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프라우다지의 증거이다. 4월 테제가 발표되고 이에 대한 설명과 상호 이해가 이루어질 시간이 충분히 흐른 4월 8일 프라우다지의 편집자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레닌 동지의 전반적인 노선은 인정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났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이 혁명이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볼세비키당 중앙기관지는 공개적으로 노동계급과 그 적들에게 당의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도자 레닌과 결별을 선언했다. 그것도 볼세비키당 대오가 오랜 세월 준비해왔던 혁명의 핵심 문제에서 레닌과 결별한 것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당의 4월 위기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상과 행동의 두 노선은 이때 정면 충돌했다. 이 위기가 극복될 때까지 혁명은 전진할 수 없었다.
4월초에 레닌이 겪은 극심한 정치적 고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으며 볼세비키당은 어떻게 재무장에 성공했는가?
1905년부터 볼세비키당은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구호로 짜르 체제에 저항해왔다. 이 구호와 이 구호의 이론적 기초는 레닌에 의해 제공되었다. 반면 멘세비키 이론가 플레하노프는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지 않는 부르주아 혁명은 오류”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완강히 저항했다. 멘세비키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혁명을 지도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밀접한 동맹만이 왕정과 지주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동맹이 승리하면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될 것이다. 이것은 노동계급 독재와 다를 뿐 아니라 날카롭게 대치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독재는 사회주의 체제는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이행기 체제도 수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봉건적 관계를 무자비하게 청산하는 임무를 띠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혁명의 목표는 세 구호 속에 충분히 포괄되었다: 민주공화국 수립, 대지주의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일. 오랜 민간 우화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땅을 밑에서 떠받든 것은 고래들이었다. 그래서 이 세 구호는 일상 대화에서 볼세비키당의 세 마리 고래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과연 농민은 독자적으로 혁명을 달성하여 왕정과 지주를 청산할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이론의 맹점이었다. 물론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한 혁명 정부에는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가 전제되었다. 그러나 이 참여는 폭이 미리 제한되어 있었다. 농민 혁명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 노동계급은 좌파 동맹세력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사고는 널리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헤게모니의 실제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노동계급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농민을 도와준다; 이들에게 봉건제를 청산할 최상의 수단과 방법들을 제안한다; 이것들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농민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농민의 봉기를 이용하고 이들의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 체제로 직접 이행하는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일정에 올리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독재와 확연히 구분되었고 이론적으로는 이것과 대치되었다. 1905년 봄부터 볼세비키당이 교육받아온 것은 바로 이 사상이었다.
그런데 2월 혁명의 실제 과정은 이 익숙한 도식을 무너뜨렸다.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으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다. 주로 병사의 군복을 입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시 농민은 농민이었다. 혁명이 평화시에 터졌어도 짜르의 농민 군대는 혁명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져 3백만의 농민이 군인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봉기가 승리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은 정세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권력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된 채로 유산계급의 권력을 제한했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뒤엉켜버렸다. 혁명 독재라는 가장 집중된 권력 대신 이중권력이라는 뱃가죽이 축 늘어진 무기력한 권력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내부에서 지배계급들의 허약한 힘은 내부 갈등으로 소모되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예측은 사물의 근본 경향을 밝힐 수 있을 뿐 다양한 요인들이 우연히 결합한 예상외의 현상을 밝힐 수는 없다. 나중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난 뒤에 거대한 혁명을 성취한 자가 과연 있었던가? 이런 지식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확실히 책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이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의 경험을 통해서만 사태에 부응하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보수적이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특별히 보수적으로 사고할 때가 가끔 있다. 러시아 국내의 볼세비키당 중핵들은 과거의 도식에 계속 집착하였다. 이 결과 2월 혁명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권력을 탄생시켰는데도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의 첫 단계라고만 인식했다. 3월말 라이코프는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름으로 프라우다지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목표로 한 “국민 혁명”의 승리를 축하했다. 볼세비키 주요 인사들은 모두 민주주의 독재 정부가 조만간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한 볼세비키가 혹시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그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앞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될 것이었다. 이 전망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2월 혁명이 탄생시킨 권력은 민주주의 독재를 준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런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생히 그리고 자세히 보여주었다. 케렌스키의 경박성과 체이제의 제한된 지능을 통해 화해주의 성향의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8개월 내내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를 유지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로 이 점이 증명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탄압하면서 부르주아 정권의 우군이자 옹호자로 투쟁하다가 10월 25일 타도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거대한 임무를 앞에 놓고 대중의 지지를 무한정 받으면서도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다. 이 현상은 정치적 원칙이나 편견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이 차지하는 가망 없는 지위 때문이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나라, 인민, 계급의 근본 문제들이 결정되는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는 이 현상이 특히 부각되었다. 밀류코프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소부르주아들은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임무를 달성할 능력이 없습니다.”
농민은 화해주의 성향의 민주주의자들을 어깨에 태운 채 서있었다. 이들은 초보적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계급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전혀 못한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농민은 계급의 원형질이었다. 여기서 새로운 계급들이 분화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분화되고 있다. 농민은 항상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노동계급을 바라보고 또 하나는 자본가 계급을 바라본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같은 “농민”정당의 중간적 화해적 입장은 정치과정이 비교적 정체하고 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혁명기에는 소부르주아들이 노동계급이나 자본가 계급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한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처음부터 선택을 해버렸다. 이들은 맹아 상태로 있는 “민주주의 독재”를 파괴했다. 이것이 노동계급 독재의 가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도와는 반대로 이들은 민주주의 독재를 파괴하면서 노동계급 독재에 길을 열어주었다. 이 두 정당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하면서 노동계급 독재는 자신의 길을 열었다.
혁명이 전진하려면 낡은 도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들에 기초해야한다. 자기 대표들을 통해 대중은 일부 자기 의지에 반해 그리고 일부 의식하지 못한 채 이중권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중권력이 평화나 토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기 위해 대중은 이 단계를 거쳐야 했다. 대중이 이중권력을 배척할 경우 이것은 곧 사회혁명당/멘세비키당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신 이중권력을 전부 무너뜨리고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는 것은 곧 노동자 농민 동맹에 기초한 노동계급 독재를 의미했다. 만약 대중이 패배했을 경우 볼세비키당은 파멸되고 대신 자본가 계급의 군사독재만이 성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 독재”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이 민주주의 독재를 추구하려면 과거의 유령을 쫓아가야 했다. 레닌이 당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겠다는 불굴의 결심으로 귀국했을 때 볼세비키당은 과거의 유령을 쫓아가고 있었다.
물론 레닌 자신은 2월 혁명이 시작될 당시까지도 민주주의 독재 노선을 조건적이든 가상적이든 다른 노선으로 대체하기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옳았는가? 그렇지 않다. 2월 혁명 후 당내에 일어난 사태는 당의 재무장을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너무 놀랍게 드러내었다. 더욱이 주어진 상황에서 당의 재무장을 수행할 사람은 레닌뿐이었다. 그는 이 임무에 대한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그는 전쟁의 불길 속에 자신을 흰빛이 날 정도로 뜨겁게 달구었고 다시 망치질을 했다. 역사의 일반적 전망 자체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인식했다. 전쟁의 충격은 서구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될 시간을 급격히 앞당겼다. 레닌은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은 여전히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면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취리히를 떠날 때 가지고 있던 레닌의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미 인용된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레닌의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가장 후진적인 농업국이다. 사회주의는 이 나라에서 즉시 수립될 수 없다. 귀족의 손에 엄청나게 광대한 토지가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1905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할 경우 러시아의 농민성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거대한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세계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닌은 러시아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할 것이라고 이 편지에서 처음 표명했다.
러시아 혁명을 민주주의 목표로 한정시킨 볼세비키당의 이전 입장과 4월 4일 테제를 통해 레닌이 당에 처음 제시한 새로운 입장을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노동계급 독재로 즉시 이행해야 한다는 이 새로운 전망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으며 당의 전통에 모순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테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2월 혁명의 발발 직전까지 그리고 발발 후 당분간 트로츠키주의의 내용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1924년까지 이 “가능성”을 피력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당시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서구 노동계급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르며 이럴 경우 러시아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독재의 한계 속에 자신을 가둘 수 없으며 상황에 의해 애초부터 사회주의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의 4월 테제가 트로츠키주의라고 비난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참 볼세비키들이 레닌의 테제를 반박한 논리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가장 주요한 논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되어 종료되었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이러했다: 농업혁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으므로 전체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노동계급 독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노동계급 독재는 가능하다. 이 논리는 그 자체로는 정당하다. 이미 인용된 글에서 프라우다지의 편집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중에 4월 당 협의회에서 카메네프는 이 논리를 반복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말한 레닌은 틀렸다....봉건적 잔재의 전형인 대토지 장원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국가는 아직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되지 않았다....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소진시켰다고 말하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
톰스키는 주장했다: “민주주의 독재는 우리의 초석이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권력을 조직해야한다. 이것을 노동계급만의 권력인 꼬뮌과 구별해야한다.”
라이코프는 그의 주장을 재청한다: “거대한 혁명적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임무를 성취하더라도 부르주아 체제의 틀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물론 레닌도 이들과 같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과거지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새로운 계급의 권력만이 혁명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영향권 즉 자유 부르주아 계급의 간접적 영향권에서 대중을 분리시켜야 가능하다. 노동자 특히 병사들에 대한 이 정당들의 연결 고리는 “조국방어” 또는 “혁명 방어” 노선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모든 색조의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요구했다. 나중에 대중을 후진성에서 해방시키려면 우선 후진 대중을 볼세비키당에서 분리시켜라. 그는 계속 반복했다: “낡은 볼세비키주의를 버려야한다. 소부르주아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오랜 적들이 서로 무기를 교환한 것처럼 보인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노동자와 병사의 다수를 대표했다. 그래서 멘세비키당에 대항하여 볼세비키당이 언제나 주창했던 노동자 농민의 정치동맹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레닌은 노동계급 전위가 이 동맹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측은 모두 자신의 모습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멘세비키당은 자신의 임무를 자유 부르주아 지지에 두었다. 이들과 사회혁명당의 동맹은 이 지지를 넓히고 강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와 반대로 볼세비키당의 지도하에 노동자 농민의 동맹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계급 전위가 소부르주아 진영과 단절해야했다.
레닌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리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들고 나왔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와 문화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야한다.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만이 러시아의 노동계급 독재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4월 당 협의회에서 라이코프가 내놓은 주장이었다. 러시아의 문화와 경제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적절치 못하다는 점은 레닌에게 초보적 전제였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 이성적이 아니어서 사회주의를 위해 경제적 문화적 조건이 성숙한 바로 그 순간에 맞추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지는 않는다. 인류가 이렇게 이성적으로 진화했다면 일반적으로 독재나 혁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는 철저히 비이성적이며 이것의 정도가 심할수록 발전도 그만큼 지연된다. 러시아 같은 후진국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부르주아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기 전에 이미 쇠퇴했다. 그리고 이 계급 대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전국 지도부는 노동계급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비(非)이성의 표현이었다.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은 노동계급의 임무를 면제시키는 대신 임무 수행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회주의가 선진공업국에서 등장해야한다고 계속 반복하는 라이코프에게 레닌은 단순하면서도 충분한 해답을 내놓았다: “누가 시작하고 누가 끝낼 지를 미리 말할 수는 없다.”
1921년에는 당의 관료화가 진행되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당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를 자유롭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때 고참 볼세비키 가운데 올민스키라는 인물이 있었다. 당의 발전 단계마다 당 신문 발간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2월 혁명 때에는 기회주의를 드러낸 당은 어떻게 급선회하여 10월 혁명의 길을 걸었는가? 너무 오래 “민주주의 독재”에 고착되었기 때문에 3월에 탈선의 길을 걸었다고 그는 올바르게 대답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이것은 당원 모두가 의무적으로 인정하는 전제였으며 당의 공식 견해였으며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그리고 이후 잠시 동안 당의 변함없는 구호였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올민스키는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프라우다지의 편집부를 장악하기 이전 올민스키 자신을 포함한 “좌파” 편집부가 3월 7일 프라우다 지에 선언한 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었다: “자본의 지배를 타도하기 전에 전제와 봉건제가 먼저 타도되어야 한다.” 이 너무 짧은 목표 때문에 당은 3월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올민스키는 또 이렇게 묻는다: “거의 20년간의 당이 견지해온 철칙이 어떻게 지도자와 평 당원들에 의해 급히 기각되었는가?”
수하노프는 볼세비키당의 적으로서 문제를 다르게 제기한다. “어떻게 레닌은 볼세비키들을 제압했는가?” 레닌은 당내에서 완전히 그것도 대단히 신속하게 승리했다. 볼세비키당의 개인 독재에 대해 상당히 빈정대면서 당의 적들은 이 사실을 붙잡고 늘어졌다. 수하노프는 자기가 던질 질문을 전적으로 영웅적 정신에 입각해 대답한다: “천재 레닌은 역사상 출중한 당 지도자였다. 이것은 나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대답은 레닌 이외에 당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레닌이 없는 위대한 장군 몇 명은 태양이 없는 거대한 행성들과 같이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당시 볼세비키당에 소속되지 않은 트로츠키는 제외시킨다).” 이 흥미로운 주장은 레닌의 영향력을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잠을 오게 하는 아편의 능력을 그것의 최면 효과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설득력이 없다.
당에 대한 레닌의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단했다. 그러나 결코 무한하지는 않았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당이 세계 역사적 사건들의 기준에 의해 그 위력이 입증되자 레닌의 권위는 대단히 상승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의 노선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당의 지도 그룹 전부가 레닌과 다른 입장을 채택한 1917년 4월에 이미 그의 권위가 막강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올민스키는 수하노프의 질문에 대해 거의 정답을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표방했지만 당의 실제 정책은 권력 장악을 위해 오랫동안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또는 최소한 우리 가운데 다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노동계급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2월 혁명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10월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일반화이며 동시에 흠잡을 데가 없는 목격자의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볼세비키당을 이론적으로 교육하는 과정에는 모순이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애매한 정식으로 표현되었다. 당 협의회에서 레닌이 행한 보고 내용에 대해 어느 여성 대의원은 올민스키의 생각을 좀더 단순하게 표현했다: “볼세비키당의 예측은 틀렸으나 전술은 옳았다.”
대단히 역설적인 것처럼 보였던 4월 테제에서 레닌은 낡은 정식에 대항해 당의 살아있는 전통 즉 지배계급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 그리고 모든 미적지근한 조치들에 대한 적대감에 호소했다. 반면에 “고참 볼세비키들”은 아직 생생했지만 이미 시효가 지난 기억에 의존하여 계급투쟁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항했다. 볼세비키당은 멘세비키당에 대항한 역사적 투쟁 전체과정에서 강력하게 단련되었다. 이 때문에 당은 레닌을 강력히 지지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사실들이 있다.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는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아직도 공유하고 있었다. 문서에 의하면 민주주의 혁명의 실천적 임무는 두 정당에 공통되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볼세비키 노동자 당원들은 2월 혁명 후 즉시 8시간 노동제 투쟁을 주도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이 요구를 너무 늦게 선언했다. 볼세비키들은 짜르 관료들의 체포에 앞장섰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과격 행위”에 반대했다. 볼세비키들은 열정적으로 노동자 민병대를 수립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들과 다투기 싫어서 노동자의 무장을 지연시켰다.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았지만 볼세비키들은 지도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타협적 혁명가들처럼 행동하거나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자유주의와의 동맹을 위해 매 순간 자신의 민주주의 강령을 희생시켰다. 당내에서 민주주의 동맹 세력이 전혀 없는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 때문에 허공에 붕 뜬 존재가 되었다.
4월 당 협의회에서 드러난 레닌과 당 지도부의 갈등은 결코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볼세비키당의 역사 내내 대단히 결정적인 순간마다 당의 지도자들 모두는 레닌보다 우파였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도 근본적으로는 일반적 경향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레닌은 세계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정당의 절대적 지도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과 의지는 거대한 혁명적 가능성을 가진 러시아와 혁명 시대의 요구에 진정으로 부응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다른 지도자들은 모두 약간씩 그리고 자주 더 큰 결함을 보였다.
혁명이 있기 전 수개월간 또는 수년간 볼세비키당의 주요 인물 거의 모두는 실천활동에서 멀어져 있었다. 다수가 감옥과 유배지에서 전쟁 첫 몇 개월의 억압적 상황을 기억하면서 홀로 또는 소그룹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 시기를 보냈다. 당 대오와 함께 있을 때에 이들은 자신들을 혁명가로 만든 볼세비키 혁명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립의 상황 속에서는 주위의 여론에 저항하면서 사건들을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강인함이 없었다. 전쟁 시작 후 2년 6개월 동안 대중의 정서는 급변했다. 그러나 이것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은 이들을 고립 상태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명성 때문에 이들은 즉시 당의 지도적 위치로 급격히 부상했다. 이들은 공장의 혁명적 노동자들보다는 “찌머발트” 반전 지식인의 정서에 훨씬 더 가까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고참 볼세비키들”은 1917년 4월 이 이름을 허세를 부리며 과장했다. 그러나 역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당의 전통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예를 들어 칼리닌은 4월 14일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참 볼세비키 레닌주의자이다. 지금의 특수 상황에 오랜 레닌주의가 쓸모 없다는 것은 결코 증명되지 않았다. 고참 볼세비키들이 지금 혁명의 장애물이라고 레닌 동지가 선언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당시 레닌은 이처럼 화난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의 전통 노선과 결별했다고 해도 레닌은 “레닌주의자”였다. 그는 볼세비키 사상의 핵심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해 낡은 볼세비키 사상의 껍질을 던져 버린 것뿐이었다.
고참 볼세비키들에 대한 투쟁에서 레닌은 당의 다른 부위로부터 지지를 획득했다. 이들은 이미 투쟁을 통해 단련이 되어 있었으며 좀더 새로운 피였다. 더욱이 이들은 대중과 좀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부위였다. 이미 앞에서 확인했듯이 2월 혁명에서 볼세비키 노동자 당원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봉기에서 승리한 계급이 권력을 잡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도 당연했다. 따라서 바로 이들이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노선에 격렬히 저항했다.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심지어 “지도자들”을 당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위협했다. 지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최대강령주의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에 오염되었다고 비난받는 좌파 볼세비키들이 거의 모든 곳에 존재했다. 이 혁명 노동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이론적 내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레닌이 명확한 노선을 제창하자마자 이들은 그를 지지했다. 이들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노동자 투쟁이 상승할 때 단호히 일어선 바로 그 부위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는 볼세비키 의원단을 체포하면서 당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미 이때 레닌은 미래의 혁명활동을 언급하면서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탄생할 계급의식이 투철한 수천의 노동자들을” 당이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두 전선이 가로놓여 있었고 통신수단이 미비했으나 레닌은 이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 감옥, 시베리아, 중노동 등이 이들을 두 번 아니 열 번이나 억눌러도 이들은 파괴될 수 없다. 이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과 국수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고취되어 있는 살아있는 부위이다.”
마음속으로 레닌은 이 노동자 볼세비키들과 함께 호흡하고 이들과 함께 필요한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는 이들보다 더 넓게 더 대담하게 사고했을 뿐이었다. 당의 광범위한 상층 중핵들의 우유 부단에 대해 투쟁하면서 레닌은 노동자 볼세비키들의 정서를 더 잘 반영하고 있던 중간층 중핵들을 신뢰하며 이들의 힘을 빌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은 대중의 일시적 편견과 환상에 기초하여 일시적으로 대세를 장악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의 기회주의 경향은 이 일시적 편견과 환상에 영합하면서 자신의 허약성을 숨기고 있었다. 레닌은 운동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수립했다. 바로 이것이 레닌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는 자기 계획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대중이 스스로 계획하고 이것을 실현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레닌은 혁명의 모든 문제들을 “대중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것”으로 환원시켰다. 이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중이 정확히 의식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화해주의자들의 정책에 실망한 노동자나 병사는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절충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은 채 레닌의 입장으로 획득되어야 했다.
레닌의 노선은 일단 공포되자마자 볼세비키당의 지난 몇 개월간의 경험과 앞으로 전개될 매일 매일의 경험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 당의 광범위한 평당원들 사이에는 노선의 분화가 급격히 일어났다. 이들은 레닌의 테제를 향해 계속 좌로 이동했다. 잘레쥐스키가 말했다: “노동자 지구들이 하나 하나 레닌의 테제를 지지하였다. 4월 24일 전국 볼세비키당 협의회가 열릴 때쯤에는 뻬쩨르부르그 조직 전체가 레닌을 지지하였다.”
당 대오를 재무장시키는 투쟁은 4월 3일 저녁에 시작되었으나 이 달 말에는 이미 끝나버렸다. (저자 주: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바로 그날 대서양의 반대편에 있는 핼리팩스에서 영국의 해양경찰은 노르웨이의 기선 [크리스티아니아피요르드]를 나포하여 뉴욕에서 러시아로 돌아가는 6명의 망명자인 트로츠키, 추드노프스키, 멜니찬스키, 무힌, 피쉘레프, 로만첸코 등을 체포했다. 이들은 5월 4일에야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쯤 당의 재무장은 최소한 대충이나마 완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뉴욕의 러시아어 일간지에 표명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견해는 이 저서에서 소개될 수 없다. 그러나 이후 당의 정치적 분화와 10월 혁명 전야의 투쟁을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이 견해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견해는 본 저서 제 1권 제 2 부록에 실려있다. 10월 혁명의 이론적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이 부록을 편안한 마음으로 무시하면 될 것이다.)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뻬쩨르부르그에서 열린 전국 당 협의회는 기회주의적 동요를 보인 3월과 격렬한 위기를 보인 4월을 평가했다. 이때가 되면 당세는 규모와 정치적 의미에서 모두 크게 성장하였다. 7만9천명의 당원을 대표하여 149명의 대의원이 협의회에 참석했다. 수도의 당원 수는 1만5천 명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하조직이었으며 지금 애국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조직 치고는 대단한 규모였다. 레닌은 여러 번 이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5명의 최고회의가 선출되면서 협의회의 정치적 성격은 금방 규정되었다. 3월의 동요를 주도한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당 전체는 논의된 문제들을 이미 확고히 결정했다. 그러나 과거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던 다수의 지도자들은 이 협의회에서 레닌을 계속 반대하거나 절반정도 반대했다. 스탈린은 침묵을 지킨 채 때를 기다렸다. “4월 테제에 반대하는 다수”의 이름으로 레닌에 반대하는 보고가 “우리와 함께 실제 혁명을 경험했던 동지들”에 의해 발표되어야 한다고 제르진스키가 요구했다. 즉 레닌의 테제가 망명자의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카메네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재를 옹호하는 보고를 했다. 라이코프, 톰스키, 칼리닌은 자신들의 3월 입장을 대체로 고수하려 했다. 자유주의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멘세비키당과 연합해야 한다고 칼리닌은 계속 주장했다. 유명한 모스크바 당 활동가 스미도비치는 연설 중 맹렬히 불평했다: “연설할 때마다 레닌 동지의 테제라는 악귀가 우리를 반대한다.” 전에 모스크바 당원들이 멘세비키당의 결의문을 찬성했을 때는 상황이 좀더 평화스러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자인 제르진스키는 민족자결권을 반대하면서 레닌이 러시아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분리주의 경향을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응수하여 레닌은 그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주창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제르진스키는 다시 이렇게 반박했다: “레닌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기타 나라 국수주의자들의 관점에 서 있다.” 이 대화는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대러시아인 레닌이 폴란드인 제르진스키에게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표방한다고 비난하고 후자는 전자가 폴란드 국수주의를 표방한다고 비난했다.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올바른 정책은 10월 혁명의 대단히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레닌 반대 세력은 확실히 영향력을 상실했다. 논의된 문제들에 대해 반대파는 7표 이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의 국제관계와 관련하여 신기하고도 날카로운 예외가 있었다. 협의회 폐회 직전인 4월 29일 회의에서 지노비에프는 자기가 속한 위원회의 이름으로 결의안을 제출했다: “스톡홀름에서 5월 18일 열릴 찌머발트 반전주의 국제회의에 참석할 것을 결의한다.” 협의회 보고서는 “이 결의안이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의 지지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한 명은 레닌이었다. 찌머발드 회의에서 독일의 독립사민당과 스위스의 그림과 같은 중립 평화주의자들을 다수가 단호히 지지했으므로 이 회의와 결별해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전쟁 중에 찌머발트주의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당 협의회 대의원들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포기하거나 찌머발트와 결별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더욱이 대의원들에게 찌머발트는 제 2 인터내셔널 대중과의 연대를 상징했다.
레닌은 회의의 참가 목적이 정보 수집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수정 제안했다. 지노비에트는 그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레닌의 수정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러자 레닌은 결의안 전체에 반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제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고립”을 두려워한 “3월” 경향의 마지막 승리였다. 그러나 스톡홀름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레닌이 결별하려고 했던 찌머발트의 내적 질병의 결과였다. 그래서 모두가 반대한 레닌의 보이코트 노선이 실제로는 승리했다.
당 노선의 급격한 반전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나중에 노동 인민위원이 된 노동자 당원 슈미트는 4월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당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몇 년 후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1917년 4월에 레닌은 “당 지도자들의 의식에 10월 혁명을 불어넣었다....우리 당의 전술은 단 하나의 직선이 아니었다. 레닌의 귀국으로 전술은 급격히 좌로 움직였다.” 고참 볼세비키였던 루드밀라 슈타알은 4월 14일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서 좀더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이 변화를 평가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전까지 모든 동지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1905년의 노선 밖에 알지 못했다. 인민의 창조적인 독자적 투쟁을 보고도 우리는 이들을 지도하지 못했다....우리 동지들은 의회적 수단인 제헌의회 소집을 준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시켰을 뿐 이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레닌의 구호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현실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꼬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노동자 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빠리 꼬뮌은 노동자 정부였을 뿐 아니라 소부르주아 정부이기도 했다.” 당의 재무장은 “레닌이 5월초까지 거둔 가장 주요하면서 근본적인 승리”였다고 수하노프는 말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이 투쟁에서 레닌은 맑스주의 무기 대신 무정부주의자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수하노프는 생각했다. 이것도 옳은 생각이었다.
여기서 대답하기 어렵지만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1917년 4월 레닌이 귀국하지 않았다면 혁명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레닌은 혁명의 신이 아니었으며 단지 객관적 역사과정의 한 고리였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서술이 이 점을 제대로 증명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의 거대한 고리였다. 전체 상황을 통해 노동계급의 독재를 유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노동계급의 독재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당이 없이는 노동계급 독재의 수립은 불가능했다. 당이 우선 자신의 임무를 인식한 후에야 이 임무가 완수될 수 있었다. 당이 자신의 임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레닌이 필요했다. 그가 귀국할 때까지 혁명을 진단한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사건의 진행에 떠밀려 우로 그리고 사회애국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레닌주의와 멘세비키주의 사이에 중간 단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당의 내부 투쟁은 피할 수 없었다. 레닌의 귀국은 이 과정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가 누린 개인적 권위는 위기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그가 없이도 당이 자기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담하게 그럴 수 있었다고 답할 수는 없다. 시간의 요인은 결정적이다. 사건이 지난 뒤에 역사의 시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유물 변증법은 숙명주의와 조금도 공통점이 없다. 레닌이 없었다면 기회주의 지도부가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는 대단히 격렬하게 장기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은 당이 자신의 임무를 성취할 시간을 오래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향을 잃고 분열된 당은 수년에 걸쳐 혁명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개인의 역할은 진정 거대한 규모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여기서 한 가지 진실만 올바로 이해하면 된다: 개인은 역사 과정에서 하나의 고리이다.
오랜 망명 후 “갑작스럽게” 추진된 레닌의 귀국, 그에 대한 언론의 맹렬한 비난, 자신이 창립한 당의 지도자들 모두에 대한 그의 투쟁, 이들에 대한 그의 신속한 승리 등 상황의 겉모습은 레닌이라는 개인, 영웅, 천재를 객관적 상황인 대중 및 당과 기계적으로 아주 쉽게 비교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이 비교는 완전히 일면적이다. 레닌은 역사 발전의 우연적 요인이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산물이었다. 그는 역사에 대단히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 25년간 노동계급 전위와 함께 투쟁했다. 따라서 그가 혁명에 개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영국 수상 로이드 조오지가 그의 귀국을 막기 위해 매어 놓은 조그만 지푸라기는 진짜 우연이었다. 레닌은 당 외부에서 당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당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었다. 당을 교육시키면서 그는 자신도 교육시켰다. 당 지도부에 대한 그의 투쟁은 당의 미래가 과거에 대해 투쟁한 것이었다. 만약 레닌이 망명과 전쟁이라는 조건에 의해 당과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더라면 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훨씬 덜 분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의 내적 발전과정이 이렇게 극심하게 압도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귀국은 혁명의 진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로부터 얻어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도자들은 우연히 탄생하지 않는다; 이들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걸러지고 훈련되기 때문에 제멋대로 대체될 수 없다; 이들이 투쟁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제거되면 당은 치유될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대개의 경우 상당한 기간 마비상태에 빠진다.
3월 24일 미국이 연합국이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날 뻬쩨르부르그에서는 2월 혁명 열사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삶의 즐거움을 찬양하는 분위기 속에 진행된 장례 행렬은 5일간의 혁명 교향악이 장대한 화음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 열사들과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이들이 투쟁하지 못하도록 제지한 사람들, 이들을 실제로 죽인 사람 등 모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투쟁을 방관한 사람들 역시 참여했다. 노동자, 병사, 소시민과 함께 학생, 장관, 대사, 자본가, 기자, 연설가, 모든 정당들의 지도자들도 모였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깨 위로 떠받친 붉은 천을 두른 관은 노동자 지구들에서 군신장(軍神場)까지 줄을 지어 나아갔다. 관들이 무덤 안으로 내려지는 순간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서 첫 예포가 울려 수많은 군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포 소리는 새롭게 들렸다. 혁명 인민이 소유한 대포가 혁명 인민을 대표하여 혁명 열사들을 기렸기 때문이었다. 비보르그 지구에서만 51개의 관이 나왔는데 이 관들의 주인들은 이 혁명 지구가 자랑스럽게 배출한 열사들의 일부에 불과했다. 행렬 중에서 가장 대오가 정연한 것은 비보르그 노동자 행렬이었다. 이 행렬 속에 볼세비키당의 수많은 깃발들이 다른 행렬의 깃발들과 평화롭게 펄럭였다. 군신장에는 정부, 소비에트, 의회의 대표들이 일어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의회는 죽은지 오래되었으나 끝끝내 자신의 장례식을 거부했다. 하루 종일 80만 명 이상의 조문객들이 띠와 깃발로 뒤덮인 무덤을 한 줄로 서서 차례로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한 지점을 통과하려면 대단한 혼잡과 북새통이 초래될 것이라고 최고위 군사 당국이 예상했다. 그러나 장례 행렬과 조문은 정연한 질서 속에 전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혁명 행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었다. 위대한 업적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과 모든 것이 갈수록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정서가 질서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행사 조직은 아직도 미약했고 경험이 부족하여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무혈 혁명에 대한 신화를 충분히 깨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장례식 분위기는 무혈 혁명의 신화를 탄생시킨 혁명의 첫 며칠을 어느 정도 재생시켰다.
이로부터 25일이 지나 노동절이 다가왔다. (양력에 따르면 5월 1일이며 구력에 따르면 4월 18일이었다.) 이때에는 이미 소비에트가 경험과 자신감을 상당히 축적한 뒤였다. 이 날 러시아의 모든 도시들은 집회와 시위로 뒤덮였다. 직장 뿐 아니라 국가, 도시, 농촌 등의 모든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다. 전쟁 총사령부 본부가 있는 모길레프에서는 성 조오지 기병대가 시위 행렬의 선두에 섰다. 해임되지 않은 짜르의 장군들은 노동절의 깃발들과 함께 행진했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휴일이 혁명의 색조를 띤 애국주의 정서와 뒤섞였다. 각 계층은 고유의 특징을 이 휴일에 첨가시켰으나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되었다. 아주 느슨하게 결합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허식도 있었으나 대체로 노동절 행사는 웅장했다. 수도와 주요 공업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은 축하행사를 지배했다. 이 가운데 볼세비키당이 배너, 플래카드, 연설, 함성 등으로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마린스키 궁전의 거대한 정면 전체에 “제 3 인터내셔널 만세!”라고 적힌 붉은 배너가 길게 널렸다. 관청의 조심성을 아직 벗어 던지지 못한 행정당국은 이 불쾌하고 무서운 배너를 철거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노동절을 축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선의 군대도 힘이 닫는데 까지 노동절을 축하했다. 참호에서 집회가 열리고 깃발이 게양되었으며 연설과 혁명가요가 울려 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독일군 가운데에서도 일부 호응하는 부대가 있었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영역을 넓혔을 뿐이었다. 혁명 열사들이 땅에 묻히던 바로 그날 북미 대륙 전체가 참전하여 전쟁에 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 전역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전쟁 포로들이 같은 깃발 아래 축하 행진에 참여했다. 그리고 언어는 달랐지만 같은 혁명가요를 불렀다. 봄날에 눈 녹은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것을 씻어 버리듯이 노동절 행사는 계급, 정당, 사상 등을 모두 쓸어버리고 전부를 하나의 큰 강물로 만들었다. 모두가 엄청난 규모로 이 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러시아 병사들은 오스트리아 및 독일 군대 전쟁포로들과 함께 행진했다. 이 모든 것은 한가지 희망적 사실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고통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초석이다.
3월에 열린 혁명열사 장례식처럼 노동절 기념일도 “전국적 축제”가 되어 이렇다할 충돌이나 사상자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참을성을 이미 상실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협박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먹고살기는 갈수록 힘들었다. 물가는 놀랄 정도로 올랐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장들은 이에 저항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충돌의 횟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빵 배급량이 줄어들었다. 곡물 카드제가 도입되었다. 주둔군의 불만도 높아갔다. 병사들을 저지할 준비를 하고 있던 군 관구 사령부는 혁명적 성향이 강한 부대들을 뻬쩨르부르그에서 철수시키고 있었다. 이 적대적 조짐을 간파한 병사들은 4월 17일 주둔군 총회를 열어 병력 철수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 제기되어 혁명이 새로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좀더 단호한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의 근원은 전쟁이었는데 이것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혁명은 언제 평화를 선물할 것인가?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제 대중은 볼세비키의 주장을 더욱 경청하면서 일부는 반정도 적대감으로 일부는 이미 신뢰감을 가지고 좀더 두고 보자는 듯이 이들을 주시했다. 시위는 의기양양한 규율을 겉으로 드러냈으나 혁명 대중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나 마린스키 궁전의 배너에 글자를 그려 넣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노동절 이삼일만에 혁명의 국민적 단합이 무자비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위협적인 사건이 반드시 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임시정부의 대외정책 즉 전쟁 문제가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로 밀류코프가 심지에 성냥불을 붙인 장본인이 되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자 임시정부의 외무장관인 밀류코프는 크게 고무 받아 기자들을 불러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아르메니아 점령,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분할, 페르시아 북부지방 점령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 자결권 등이 성취되어야 한다. 역사가 밀류코프는 외무장관 밀류코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연설할 때마다 해방전쟁의 평화적 목표를 단호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을 언제나 러시아의 민족문제 및 이익과 긴밀히 연관시켰다.” 그러나 그의 기자회견은 청중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멘세비키당의 신문이 강력히 비판했다: “임시정부의 대외정책은 언제 위선을 벗어 던질 것인가? 연합국들에게 병합을 공개적이고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임시정부는 왜 요구하지 않는가?” 이들은 약탈의 솔직한 언어를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약탈의 욕구를 평화주의로 위장하면서 이들은 모든 위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고대했다. 민주주의자들의 소요에 놀란 케렌스키는 서둘러 공보국을 통해 이렇게 발표했다: “밀류코프의 강령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개인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바로 외무장관이라는 사실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투였다.
체레텔리는 모든 문제를 상투어로 해결하는 재능을 지녔다. 그는 이렇게 우겼다: 러시아에게 전쟁은 전적으로 국토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정부가 선언해야 한다. 이에 밀류코프 그리고 어느 정도 구츠코프의 저항은 꺾였다. 3월 27일 정부는 선언했다: “자유 러시아의 목표는 다른 인민들을 지배하거나 이들의 민족 유산을 박탈하거나 이들의 영토를 폭력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합국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의 왕들과 예언자들은 부친을 살해하고 간음을 행한 자들과 연합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다른 것들도 부족했지만 특히 유머감각이 부족했다. 정부의 이 선언을 화해주의 신문들 뿐 아니라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프라우다지도 환영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4일 전에 프라우다지의 주요 사설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는 것이 러시아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임시정부는 인민 전체에게 명확하고 확고하게 선언했다,” 등등. 영국 신문들은 즉시 만족감을 표시하며 러시아의 병합 포기 선언을 콘스탄티노플 점령 포기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선언을 자기 나라에 확대 적용하는 것은 결코 신경 쓰지 않았다. 런던의 러시아 대사는 경고음을 발한 후 러시아 정부에게 이렇게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병합 없는 평화의 원칙을 러시아는 무조건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핵심 이해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할뿐이다.” 물론 이것은 밀류코프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는 건드릴 필요가 없는 나라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한다.” 런던과는 반대로 빠리는 밀류코프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계속 격려했다. 그리고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를 통해 소비에트에 대항하여 좀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을 주문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엄청난 형식적 절차에 안달한 프랑스 총리 리보는 런던과 로마에 요청했다: “애매 모호함을 걷어치울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할 필요가 있다.” 런던은 이렇게 대답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에 가서 그곳의 사회주의자들을 설득시킬 시간을 주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연합국 사회주의자들의 러시아 방문은 짜르의 장군들이 장악한 러시아 총사령부가 주도했다. 앨버트 토머스에 대해 리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데 그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토머스가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너무 밀착한다고 밀류코프는 불평했다. 그러자 리보는 이렇게 대답했다: 토머스는 밀류코프를 지지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대사가 좀더 적극적으로 밀류코프를 지지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병합 포기를 밝힌 3월 27일의 임시정부 선언은 완전히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이것이 소비에트에 굴복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런던은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한 신뢰를 거둘지도 모른다고 위협했다. 빨레올로그는 이 선언의 “소심함과 불명확성”을 불평했다. 그러나 밀류코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연합국들이 자신을 지원할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밀류코프는 자기 능력에 훨씬 과분한 큰 게임에 착수했다. 그의 기본 사고는 전쟁을 이용하여 혁명을 압살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첫 단계는 민주주의자들의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4월의 첫 며칠만에 밀류코프의 대외정책에 대해 점점 초조하고 안달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에 대해 하층 계급들은 자기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신용대부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중은 조국방어를 지지했으나 전쟁 대부가 아니라 평화 대부를 지지할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평화에 대한 전망을 조금이라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상투어로 구원의 정책을 개발하는 체레텔리는 이렇게 집행위원회에 제안했다: 3월 27일의 선언과 유사한 메모를 연합국들에게 보내라고 임시정부에 요구하자. 이를 수락할 경우 보답으로 집행위원회는 “자유 대부”를 소비에트에서 통과시키겠다. 대부를 받기 위해 밀류코프는 메모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거래를 이중으로 이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정부의 선언을 해석한다고 위장하면서 그의 메모는 선언의 내용을 부정했다. 정부의 평화애호 문구는 “혁명 때문에 러시아가 연합국들과 공동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근거를 조금도 제공하지 말아야한다. 이와 반대로 세계 대전을 결정적 승리의 순간까지 철저히 수행하려는 모두의 욕구는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메모는 자신감을 더욱 강하게 나타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은 미래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필요한 보장 및 제재 조치들을 확보할 수단을 찾아낼 것이다.” 토머스의 끈질긴 주장으로 삽입된 “보장 및 제재 조치들”에 대한 문구는 강도들의 외교 은어 특히 프랑스어로는 병합과 배상을 의미했다. 노동절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날에 밀류코프는 연합국 외교관들의 구술로 작성된 이 메모를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보로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집행위원회와 언론에 동시에 이것을 보냈다. 정부가 접촉위원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일반 시민의 지위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메모에서 밀류코프로부터 이미 전해들은 내용만 보았다 하더라도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이 사전에 계획된 적대행위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 메모는 화해주의자들을 대중의 공격에 노출시켰다. 대중은 이들이 볼세비키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 확실히 한쪽 편을 들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이 밀류코프의 목적이었다. 모든 것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으며 그의 계획은 이것보다 한술 더 뜨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밀류코프는 러시아군이 다다넬스 해협을 공격, 점령하는 재수 없는 계획을 소생시키려 이미 3월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이 이 작전을 지휘할 것을 종용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산했다: 이 계획이 실현되고 난 후에 민주주의자들이 기정사실을 앞에 놓고 병합에 대해 항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노동절에 밀류코프가 작성한 이 메모는 민주주의자들이 엉성하게 방어하고 있던 해안을 그가 다다넬스 작전과 유사하게 기습 공격한 것과 같았다. 다다넬스에 대한 군사 공격과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정치 공격은 성공했을 경우 서로를 보완하여 서로를 정당화시켰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승리자는 비난받지 않는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승리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다다넬스 해협을 공격하려면 20만에서 30만의 병력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그의 계획은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 하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병사들이 공격을 거부해 버렸다. 병사들은 혁명을 방어하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공세를 취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다넬스를 점령하려던 밀류코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것 때문에 그의 이후 계획들도 전부 틀어져버렸다. 그가 승리했다면 그의 계획들은 잘 짜여진 수작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4월 17일 뻬쩨르부르그에서 상이 군인들은 소름끼치는 애국주의 시위를 벌였다.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붕대를 감은 엄청난 수의 상이 군인들이 수도의 병원들에서 빠져 나와 타우리데 궁전으로 행진했다. 보행이 불가능한 군인들은 트럭에 몸을 싣고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의 깃발에는 “끝까지 전쟁을 수행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강이 난 인간들의 절망적인 시위였다.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혁명이 인정해 달라고 이들은 요구했다. 그러나 입헌민주당 아니 밀류코프는 이 시위 뒤에 숨어서 다음날의 거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19일 밤 특별회의에서 집행위원회는 전날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달된 메모를 논의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읽자마자 이 메모는 집행위원회가 예상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메모에 대한 책임은 케렌스키를 포함한 정부 전체가 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선 정부를 구출할 필요가 있었다. 체레텔리는 암호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이 메모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더욱더 많은 장점들을 찾아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자들과 정부의 목표가 우연하게도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스코벨레프는 심오하게 생각했다. 이 지혜로운 자들은 밤을 새고 동이 틀 때까지 애를 썼으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아침에 모임을 해산한 이들은 몇 시간 후에 다시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자 모든 신문들은 메모의 내용을 보도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는 꼼꼼하게 준비된 도발의 정신으로 메모를 논평했다. 사회주의 언론은 크게 흥분하였다.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는 밤새 느낀 분노를 이때 이미 해소한 뒤였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멘세비키 기관지 라보차야 가제타는 임시정부가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문서”를 발표했다고 논평했다. 그리고 “이 메모의 재앙적 결과를 막기 위해” 소비에트가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볼세비키들의 점증된 압력이 이 논평에서 아주 명확히 드러났다.
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속개했으나 다시 한번 해결책이 없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공유를 위해” 소비에트 특별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부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한편 불만을 전부 가라앉힐 목적으로 모든 종류의 접촉위원회들을 소집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중권력이 예식을 치르는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제 3의 권력이 예상 밖에 개입했다. 대중이 손에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병사들이 치켜든 총검들 일부는 “밀류코프를 타도하라!”는 글자가 번쩍거리는 배너를 달고있었다. 다른 배너에는 구츠코프의 타도를 외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분노에 찬 시위 대중이 노동절의 화기애애했던 대중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느 정당도 이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역사가들은 이것을 “자발적” 운동이라고 부른다. 즉시 거리 시위를 호소한 린데는 이 덕분에 혁명사에 이름을 남겼다. “학자, 수학자, 철학자”인 그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혁명은 진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밀류코프의 메모와 레치지의 논평이 그를 분기시켰다. 그의 전기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핀란드 연대로 직행했다. 그리고 연대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들이 마린스키 궁전까지 연대 전체를 끌고 행진할 것을 제안했다....린데의 제안은 수용되었고 오후 3시 핀란드 연대가 도전적인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뻬쩨르부르그 거리를 볼만하게 행진했다.” 핀란드 연대 다음에는 제 180 예비군 부대, 모스크바 연대, 파블로프스키 연대, 켁스골름스키 연대, 제 2 발트 함대의 수병 등 2만5천에서 3만의 무장군인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소동이 노동자 지구로 퍼지자 노동자들은 일을 중지하고 병사들을 뒤따라 시위에 가담했다.
밀류코프는 자신이 직접 시위대들에게 물어본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 대다수는 이유도 모르고 시위에 참여했다. 군대 이외에 소년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시위 참여 대가로 10루블에서 15루블을 받았다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이 돈의 출처도 명확하다: “두 장관(밀류코프와 구츠코프)을 타도하라는 생각은 직접 독일에서 나왔다.” 그런데 밀류코프는 4월 투쟁 한가운데가 아니라 3년 후에도 이 심오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때는 그에 대한 인민의 증오심을 돈으로 구입하기 위해 누군가가 높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10월 혁명의 승리로 이미 풍부하게 증명된 뒤였다.
대단히 격렬했던 4월 시위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층의 속임수에 대해 대중의 분노가 즉시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경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열성이 아니라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상층이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대중은 가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물론 볼세비키들은 정부가 약탈행위를 위해 전쟁을 연장하려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대중은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케렌스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2월부터 알고 있었다; 이들은 병영에 있던 우리들에게 처음 다가왔다; 이들은 평화를 원한다; 더욱이 레닌은 베를린에서 곧바로 귀국했지만 체레텔리는 중노동 징역을 살고 있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평화를 성사시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한다....한편 진보적인 공장과 연대는 볼세비키당의 평화 정책을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비밀 조약들을 공개하라; 연합국의 정복 전쟁과 단절하라; 모든 교전국들에게 즉시 평화 조약을 제시하라. 4월 18일의 메모는 이 복잡하고 동요하는 분위기 사이에 떨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상층 지도자들은 결국 평화가 아니라 낡은 전쟁 목적을 지지하고 있었구나! 우리의 참을성과 기다림이 전부 소용없었단 말인가? 타도하라....그러나 누구를 타도하지? 볼세비키들의 말이 옳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메모의 내용은 어찌된 일인가? 누군가가 우리의 목숨을 짜르의 동맹국들에게 팔아먹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입헌민주당과 화해주의자들의 신문을 단순 비교하면 밀류코프는 대중의 신뢰를 배반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수상인 로이드 조오지 및 리보와 함께 정복 정책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계획이 “밀류코프의 개인 견해”라고 선언했다....이 운동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동질성이 없었다. 일부 성급한 혁명가들은 이 운동의 규모와 정치적 성숙도를 크게 과장했다. 너무 격렬하고 급속한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들은 군대와 공장에서 활기차게 활동했다. 이 운동의 최소 강령 격인 “밀류코프를 해임시켜라”는 요구를 볼세비키들은 임시정부 전체에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로 보완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 일부는 선전적 구호로 또 일부는 당면 임무로 이 구호를 받아들였다. 무장 병사와 수병들은 거리에서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그런데 이 구호는 항의성 시위에 일종의 무장봉기 사상을 어쩔 수없이 첨가시켰다. 상당수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즉시 임시정부를 타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마린스키 궁전에 진입하여 출구를 봉쇄하고 장관들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장관들을 구출할 임무를 부여받은 스코벨레프는 자신의 임무를 달성했다. 마침 마린스키 궁전이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츠코프의 질병 때문에 정부는 이날 그의 아파트에서 회의를 가졌다. 장관들이 우연으로 체포를 면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심각하게 위협 당하지 않았다. 전쟁을 질질 끄는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2만5천에서 3만 규모의 군대는 르보프공의 정부보다 훨씬 강한 정부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창문에 주먹을 갔다대면서 상층 신사들이 콘스탄티노플 점령보다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바삐 움직이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병사들은 밀류코프에 반대하여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도우려 했다.
코르닐로프 장군도 장관 회의에 참석하여 병사들의 무장 시위를 보고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관구 사령관으로서 시위를 철권으로 진압할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콜차크도 우연히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한참 뒤에 적군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처형 직전에 열린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르보프공과 케렌스키는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을 반대했다. 밀류코프는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하면서 상황을 요약했다: 존경하는 장관님들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나오더라도 시위 병사들은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당연히 입헌민주당의 핵심인 그와 생각이 같았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손쉽게 병사들을 설득하여 이들을 마린스키 궁전의 광장에서 철수시키고 심지어 병영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소동은 이것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군중들이 모이고 집회가 열리고 거리 모퉁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전차의 승객들은 밀류코프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네프스키 가도와 인접한 거리들에서 부르주아 웅변가들이 레닌에 반대하는 선동을 했다. 위대한 애국자 밀류코프를 타도하기 위해 그가 독일에서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메모와 메모의 장본인 밀류코프에 대한 분노를 정부 전체에 대한 분노로 확대시키기 위해 교외와 노동자 지구에서 볼세비키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저녁 7시에 소비에트 총회가 열렸다. 팽팽한 분노로 떨고 있던 참석자들에게 지도자들은 할말이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임시정부와 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체이제는 장황하게 설명했다. 체르노프는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위협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인 금속 노동자 페오도로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전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소비에트는 내전에 의존하여 권력을 장악해야한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말은 완전히 새로웠으며 공포를 자아냈다. 그의 발언은 지배적인 정서에 심금을 울렸다. 그래서 볼세비키들은 그 동안 결코 경험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한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스탄케비치의 예상 밖의 연설이 회의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는 케렌스키가 총애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자인데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왜 우리가 ‘행동’해야 합니까? 누구에 대항해서 우리의 힘을 결집시킬 것입니까? 유일한 권력은 여러분들이고 여러분 뒤에 버티고 있는 대중입니다....보십시오! 지금 시간은 7시 5분전입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총회 참석자 전원이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임시정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임했다고 결의합시다. 우리는 이 결의문을 전화로 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5분 후에 임시정부는 자신의 권한을 우리에게 넘길 것입니다. 폭력, 시위, 내전 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연설이 끝나자 커다란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리고 격앙된 지지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는 현 상황으로부터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면서 소비에트를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자기 연설의 결과에 놀라 스스로 겁을 먹었다. 예상 밖으로 드러난 소비에트의 위력에 대한 진실은 총회를 상승시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한심한 음모를 압도해 버렸다. 소비에트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회의를 질질 끄는 것이 지도자들의 주요 임무였다. 어느 연설자는 참석자들의 박수 갈채 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누가 정부를 대체할 것입니까? 우리가요? 그러나 우리의 손은 떨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화해주의자들의 상태를 정확히 드러냈다. 막강한 상층 지도자들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상 르보프는 마치 스탄케비치의 말을 다른 쪽에서 보완하듯이 다음날 이렇게 발표했다: “지금까지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지도기관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 2주일간 정부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 상황에서...임시정부가 사퇴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2월 혁명의 실체가 누구인지는 너무 명확히 드러났다!
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의 연석회의가 마린스키 궁전에서 열렸다. 개회 연설에서 르보프공은 정부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조직들의 캠페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반은 화난 듯이 또 반은 위협하듯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관들은 차례로 모든 힘을 다해 자신들이 자초한 직무 수행의 난관들을 말했다. 밀류코프는 “접촉”에 대한 모든 웅변에 등을 돌린 채 발코니에서 입헌민주당 시위대에 연설했다. “‘밀류코프를 타도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들을 보면서... 나는 밀류코프가 아니라 러시아를 위해 두려워했다.”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장관 밀류코프가 한 이 겸손한 말을 역사학자 밀류코프가 이렇게 보도했다. 체레텔리는 메모를 새로 작성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체르노프는 멋진 해결책을 찾은 것처럼 밀류코프가 공공교육부를 맡을 것을 제의했다. 지리 시간의 소재인 콘스탄티노플은 외교의 소재인 콘스탄티노프보다 확실히 덜 위험할 것이었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학자로 돌아가는 것과 새 메모를 작성하는 것을 모두 딱 잘라 거부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많은 힘이 들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의 메모에 대한 “설명”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언사로 치장된 몇 몇 문구만 발명해서 메모에 삽입하면 위기를 넘길 것이고 밀류코프의 장관 자리는 보존될 것 같았다.
그러나 들고 일어선 제 3의 권력은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4월 21일에는 전날보다 더 강력한 시위가 폭발했다. 이날은 볼세비키당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가 시위를 촉구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반대 선동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노동자 대중이 비보르그 지구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지구에서 도시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시위자들을 만나기 위해 집행위원회는 체이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가장 권위 있는 시위 진정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기 발언을 확고히 할 생각이었으며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느 유명한 자유주의 기자는 노동자 시위대가 네프스키 가도에서 행진하는 것을 레치지에 묘사했다: “약 100명의 무장 노동자가 선두에서 행진했다. 이들 뒤에는 1000명 정도의 무장하지 않은 남녀가 단단한 대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양쪽 모두에 살아있는 인간의 사슬이 줄지어 있었다.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의 얼굴은 놀라왔다. 수천 명의 시위대는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 수도승들의 놀란 듯한 환희의 얼굴이었다. 달랠 수 없는 무자비한 표정이 마치 살인, 종교재판,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자유주의 기자는 노동자 혁명의 눈을 쳐다본 순간 이것이 내뿜는 강렬한 결의를 몸소 느꼈다. 하루 15루블을 받고 독일군 총사령관 루덴도르프에 의해 고용된 밀류코프의 “소년 노동자들”과 이 시위대는 많이 달랐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시위자들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추측하면 이들 대다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이날 시위를 대다수의 정서가 규정한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체이제는 시위대에게 방향을 돌려 지구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위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새로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체이제는 다음 몇 주일간 이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이 시위대를 설득하고 이들의 침묵을 종용하는 동안 입헌민주당은 도전하고 분노했다. 전날 코르닐로프에게는 총포의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와 아니라 반대로 이날 아침 일찍부터 시위대에게 기병과 대포로 응수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장군들의 대담함에 단단히 의존하면서 입헌민주당은 지지자들을 거리로 부르는 특별 삐라를 뿌렸다. 사태를 결정적인 국면까지 끌고 갈 의도가 명확했다. 비록 다다넬스 해협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으나 밀류코프는 자신의 전면 공세를 계속했다. 이 공격에 코르닐로프는 선발대가 되었고 연합국들은 중무장한 예비군이 되었다. 소비에트의 등뒤에서 보낸 메모와 레치지의 사설은 2월 혁명의 자유주의 장관인 밀류코프에게 긴급 전보가 되어주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가 제출한 호소문은 이렇게 외쳤다: “러시아와 러시아의 자유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임시정부 주위로 단결하여 정부를 지지해야한다.” 그리고 즉각적 평화를 주창하는 자들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모든 선량한 시민을 거리로 초대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대동맥인 네프스키 가도는 입헌민주당의 확실한 집회장으로 변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들이 선두에 선 상당한 규모의 시위대가 마린스키 궁전으로 행진했다. 간판공의 손에서 금방 제작된 플래카드가 모든 곳에서 보였다: “임시정부에 완전한 신뢰를!” “밀류코프 만세!” 장관들은 귀빈처럼 보였다. 이들도 나름의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소비에트의 특별 사절들이 최선을 다해 이들을 도와 혁명 집회를 해산시키고 노동자와 병사의 시위를 교외로 유도하고 병영과 공장이 거리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시켰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세력은 더 눈에 두드러져 보였다. 정부 방어의 깃발 아래 반혁명 세력이 처음으로 공공연히 그리고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도시 중앙에 무장을 갖춘 장교, 사관생도, 학생들을 실은 트럭이 보였다. 성 조오지 기병대도 거리로 나왔다. 부유층 청년들이 네프스키 가도에서 모의 재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레닌 지지자들과 “독일 스파이들”이 같은 편으로 등장했다. 소규모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들로부터 임시정부 반대 구호의 깃발을 장교들이 탈취하려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처음 발생했다. 이런 충돌들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총격전이 오갔다. 오후가 가까워지면서 총격전은 계속 벌어졌다. 누가 왜 총을 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부는 악의에 차서 그리고 일부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총격이 발생했다. 벌써 희생자가 발생했다. 충돌은 뜨겁게 가열되고 있었다.
이 날 국민적 단결은 전혀 표출되지 않았다.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고 나선 입헌민주당의 애국 시위대는 장교, 관리, 지식인 등 전부 부르주아 계급 출신들이었다. 인간의 두 물결이 하나는 콘스탄티노플로 또 하나는 평화로 향하면서 도시에서 각각 모습을 나타냈다. 사회적 출신도 다를뿐더러 외모도 조금도 닮지 않은 이들은 플래카드에 적대적인 글귀를 새긴 채 주먹, 곤봉, 심지어 총포 등으로 격돌했다.
코르닐로프가 마린스키 궁전 광장에 대포를 이동시키고 있다는 예상 밖의 소식이 집행위원회에 보고되었다. 이것이 코르닐로프의 독자 행동이었을까? 그의 성품과 경력으로 보아 누군가가 이 용감한 장군의 코를 꿰어서 그를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의 짓이 확실했다. 이들이 지지세력을 거리로 소집한 것도 바로 코르닐로프의 개입을 예상하여 개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느 소장 역사학자는 올바르게 지적했다: 코르닐로프는 사관학교들을 마린스키 궁전 광장으로 이전하려 했는데 이것은 궁전을 적대 군중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진짜 또는 허구의 필요 때문이 아니었다; 입헌민주당의 시위가 최고조로 상승한 순간에 이 생각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밀류코프와 코르닐로프의 계획은 아주 치욕스럽게 산산조각이 났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의 사고는 대단히 단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네프스키 가도의 유혈 충돌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지기 전에 이미 집행위원회는 뻬쩨르부르그와 인근의 모든 군부대에 전보를 보냈었다: 소비에트의 지시 없이는 병영을 나올 수 없다; 수도의 거리에 단 하나의 분대도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자 집행위원회는 그 동안의 모든 엄숙한 선언들을 걷어치우고 코르닐로프에게 확실히 명령했다: 즉시 군대를 철수시켜라. 또한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거리에 나온 군대를 복귀시키는 임무를 스코벨레프와 필리포프스키에게 맡겼다. “지금처럼 위험한 때에 집행위원회의 명령이 없이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수 없다. 여러분을 지휘할 권한은 오직 집행위원회에게만 있다.” 이후 관례에 의한 의전행사가 아니면 군대 호출의 모든 명령은 소비에트의 공식 서류와 권한을 가진 2인 이상의 서명으로만 유효했다.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의 행동을 내전을 일으키려는 반혁명의 시도로 명확히 해석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관구 사령관의 권한을 완전히 무력화시켰으나 집행위원회는 그를 해임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이 나이 어린 임시정부는 베개를 베고 누워있으면서 압박붕대를 잔뜩 동여맨 환자처럼 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해낸 온갖 허구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군부대 뿐 아니라 사관학교들도 체이제의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 거리로 나서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역관계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용한 단서였다. 입헌민주당이 예상하지 못한 이런 종류의 불쾌한 일들이 하나 하나 터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민혁명이 터질 순간까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반(反)국민적 계급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 사실은 이중권력에 의해 잠시 은폐될 수 있었을 뿐 고쳐질 수는 없었다.
4월 위기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집행위원회는 이중권력의 문지방에 서서 대중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이에 감사하는 정부는 “보장 및 제재 조치들”이 국제 사법 재판소, 군비 제한 그리고 기타 모든 훌륭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이 용어상의 양보를 서둘러 수용하여 34 대 19의 표결로 이 사태를 정정시켰다. 이에 놀란 대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다수파는 이렇게 결의문을 채택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켜야한다; 정부는 사전에 집행위원회에 통지하지 않을 경우 어떤 중요한 정치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외무부 구성원들이 크게 물갈이되어야 한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던 이중권력은 헌법이라는 법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이 바꾼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화 자세로 나온 다수파 때문에 좌파는 밀류코프의 해임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이전 그대로 있어야 한다. 연합국 정부들은 위에 군림하여 임시정부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에 대해 집행위원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21일 저녁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정세를 결산했다. 3월 27일 발표된 메모에 대한 모든 거짓 해석들을 불식시킨 지혜로운 지도부의 신선한 승리에 대해 체레텔리가 보고했다. 카메네프는 볼세비키당 명의로 소비에트만으로 구성된 정부 수립을 제의했다. 전쟁 기간에 멘세비키당에서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온 인기 있는 혁명가 콜론타이는 뻬쩨르부르그의 모든 지구들과 인근 지구들에 걸쳐 임시정부나 기타 정부의 효용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들은 소비에트의 의식수준으로는 거의 수용될 수 없었다. 결국 권력의 문제는 소비에트의 수준에 맞게 수정된 것 같았다. 겨우 13표의 반대라는 엄청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집행위원회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때 볼세비키당 출신 대의원 다수는 물론 공장, 거리, 시위대 등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중심 대중이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2일 동안 거리 시위를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모두가 이 결정을 따를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사실 노동자, 병사, 부르주아 청년, 비보르그 지구, 네프스키 가도 등 어느 누구도 소비에트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어떠한 강제조치도 없이 도시는 평온을 되찾았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정세의 주인이라고 느끼기만 하면 되었고 사실이 그랬다.
이 당시 좌익 신문의 편집실에는 밀류코프 그리고 가끔 임시정부 전체의 사임을 요구하는 수많은 결의문들이 공장과 연대에서 도착했다. 뻬쩨르부르그 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뛰쳐나왔으며 병사들은 병영에서 튀어나와 거리들을 항의 시위의 폭풍으로 강타했다. 수많은 지역 소비에트에서 집행위원회로 전보가 날아들어 밀류코프의 정책을 반대하고 소비에트에 대한 완전한 지지를 약속했다. 같은 목소리가 전선에서도 들려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아야 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정부에 호의적인 분위기가 4월 21일 다시 거리를 장악했다.” 대다수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발코니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정부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다. 정부를 지지하는 진정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탄케비치와 르보프공의 입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반란자들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코르닐로프의 확신은 이 존경받는 장군님의 극단적인 경박함에서 나왔음이 틀림없었다. 이 경박성은 8월에 만개하여 음모자 코르닐로프는 뻬쩨르부르그에 대항하여 있지도 않은 군대를 배치하게 될 것이다. 지휘부를 군대와 동일시한 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장교 대다수는 물론 그의 편이었으며 임시정부를 방어한다는 핑계로 소비에트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소비에트 편이었으며 사실 소비에트 자체보다 훨씬 좌에 있었다. 그래서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방어할 때에는 코르닐로프도 반동 장교 휘하의 소비에트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이중권력 상황 때문에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서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병영에서 나오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하자마자 병력 동원 능력이 없는 코르닐로프 자신은 임시정부와 함께 허공에 붕 떠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정부는 붕괴하지 않고 있었다. 공세로 나선 대중은 정부를 타도할 지점까지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일 태세가 아니었다. 따라서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2월 정권을 아직도 원래 위치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구성된” 당국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군대를 장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스스로 망각했는지 아니면 남들에게 망각시키려는 것인지 소비에트 기관지 이스베스치아 지는 4월 22일 이렇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자기 손에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지자들이 치켜든 수많은 깃발에는 정부의 타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는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 노동자와 병사들이 화해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유혹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 신사들이 혁명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능력이 있다고 진지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권력을 원치 않았다. 이미 확인했듯이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하는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4월 22일 볼세비키당이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제출한 임시정부 “불신임” 결의안은 수백 표 가운데 74표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다. 물론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장악한 헬싱키 소비에트는 같은 날 당시로서는 정말 대담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제국주의 임시정부”를 제거한다면 무장 지원을 하겠다. 그러나 수병들의 직접 압력을 받고 채택된 이 결의문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소비에트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어제만 해도 임시정부에 대해 거의 무장봉기를 시도한 대중을 대표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중권력을 고수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중은 단호하게 공세에 나섰으나 이 사실은 정치적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이지만 우연한 현상은 아니다. 혁명기의 피억압 대중은 자기 대표들을 통해 자기의 욕망과 요구를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손쉽게 그리고 재빨리 직접 행동에 나선다. 대의제도는 추상적일수록 대중 행동을 결정하는 사건의 리듬에 그만큼 뒤쳐진다. 대의제도 가운데 가장 덜 추상적인 소비에트 대의제는 혁명기에 측정할 수 없는 대단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4월 17일에 자신의 규정에 따라 수립된 민주적 의회는 전혀 방해 요소가 없었으나 소비에트와 비교하면 철저히 무기력했다. 그러나 공장과 연대의 적극적 대중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는 여전히 대의기관이며 의회주의의 한계와 왜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의기관은 대중 행동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아주 쉽게 대중 행동을 저지하는 보수적 장애물이 된다. 바로 이것이 소비에트 형태를 포함한 대의제도의 모순이다. 대표들을 계속 물갈이하는 것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어느 곳에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더욱이 혁명기에는 대중의 직접 행동이 끝난 후 이것을 결산하기 위해 대표들이 교체된다. 따라서 이것도 대중 행동에 항상 뒤쳐진다. 어쨌든 4월에는 2분의 1 봉기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4분의 1 봉기가 일어났고 다음에 7월에는 2분의 1 봉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4월 봉기의 경우 봉기 다음날 소비에트에 출석한 대의원들은 이전에 선출된 대의원들이었다. 봉기의 결과 새로운 대의원을 뽑을 시간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봉기와 무관한 대의원들은 앉았던 의자에 그대로 앉아서 역시 봉기와 무관한 지도자들이 제출한 동의안들을 가결시켰다. 겉으로 보면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물론 4월의 폭풍은 소비에트, 2월 체제, 더욱이 대중 자체에 확실히 영향을 끼쳤다. 비록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했지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거대한 개입은 정세를 변화시켰고 혁명 운동 전반에 추진력을 불어넣고 불가피한 세력 재편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살롱과 밀실의 정치인들이 어제의 계획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하도록 강제했다.
화해주의자들은 내전의 섬광과 같았던 4월 봉기를 청산시킨 후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정부의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을 경우 계속 권력을 행사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이중권력의 논리에 강요되어 자유주의자들의 조건에 동의한 사회주의자들도 다다넬스 해협 점령을 확실히 포기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이 결과 어쩔 수 없이 밀류코프는 몰락했다. 5월 2일 그는 정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20일의 시위대가 내세운 구호는 12일 만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의지에 반하여 실현되었다.
그러나 화해주의 정당들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4월 사건들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힘을 대중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더욱 우경화 하여 부르주아 계급과 더욱 밀착했다. 이때부터 애국주의는 지배적인 노선으로 확고히 정착된다. 집행위원회 다수파는 더욱 단결한다. 최근에 와서야 소비에트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최소한 사회주의 전통의 일부라도 구하려고 시도한 불분명한 정치색깔의 급진주의자 수하노프, 스테클로프 등은 옆으로 밀려난다. 체레텔리는 확고한 보수 애국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노동 대중의 대의기관인 소비에트에서 밀류코프의 정책을 수용한다.
4월 시기에 볼세비키당의 행동은 일정치 않았다. 당은 터지는 사건들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당내 위기는 막 종료될 시점이었고 당 협의회 준비가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 지구들의 격렬한 임시정부 반대 운동에 감명을 받은 일부 볼세비키들은 임시정부 타도를 지지했다. 3월 5일 임시정부를 조건적으로 지지했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동요했다. 21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되었으나 그 목표는 아직도 충분히 정해지지 않았다. 위원회의 일부는 막연하게나마 임시정부를 타도할 목적으로 노동자와 병사들을 거리로 동원시켰다. 당 밖의 개별 좌익 분자들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바삐 움직이는 무정부주의 분자들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임시정부를 타도한다고 또 어떤 때에는 적과 시가전을 벌인다면서 장갑차나 일반적 증원을 요구하는 개인들이 병영에 접근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과 가까운 어느 장갑차 사단은 집행위원회의 명령이 아니면 장비를 내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입헌민주당은 유혈 충돌의 책임을 볼세비키들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특별위원회는 총격이 거리가 아니라 현관과 창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했다. 검찰의 발표를 신문이 보도했다: “항상 범죄자들에게 유용한 혼란과 소요를 부채질하기 위해 인간 쓰레기들이 총격을 시작했다.”
볼세비키들에 대한 소비에트 지배 정당들의 적대감은 이로부터 2개월이 지난 7월에 이성과 양심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상승한다. 그러나 4월에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직원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법무부는 혁명 앞에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짜르의 비밀경찰이 사용했던 방법들을 극좌 세력에게 적용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밀류코프의 공격은 어려움 없이 격퇴되었다.
한편 당 중앙위원회는 좌파 볼세비키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시위 금지는 올바르며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고 4월 21일에 선언했다. 중앙위원회 결의문은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 타도’ 구호는 지금 옳지 못하다. 확고한 즉 의식적이고 조직된 인민의 다수가 혁명적 노동계급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경우 이 구호는 공문구이거나 모험주의 시도 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면 임무는 비판과 선전이며 권력 장악의 기초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결의문은 선언했다. 이 결의문에 반대하는 자들은 이것이 공포에 질린 지도자들의 후퇴 또는 약삭빠른 술수라고 생각했다. 권력 문제에 대한 레닌의 기본 입장은 이미 말한 바 있었다. 그는 대중의 실제 경험에 입각하여 “4월 테제”를 당이 적용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점 3주일 전에 카메네프는 이렇게 선언했었다: 멘세비키당, 사회혁명당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공동 결의문을 채택하게 되어 “행복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입헌민주당과 볼세비키당의 분업 이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나 이 이론들은 지금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이 되었는가! 4월 시기의 교훈을 체득하고 나서야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적 “통제” 노선을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그러나 이 책략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4월의 위험한 며칠이 지난 직후 열린 협의회에서 레닌은 물었다: 당 정책의 어느 부분이 모험주의 노선인가? 혁명적 폭력을 행사할 여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정세에서 폭력을 동원하려는 시도가 바로 모험주의였다. “인민에게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은 타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폭군이 없다. 대포와 소총은 자본가가 아니라 병사의 손에 있다. 자본가들은 폭력이 아니라 술수로 정세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폭력을 동원하자고 말할 때가 아니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우리는 평화 시위를 외쳤다. 우리는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적의 역량을 평화적으로 정찰하기만을 원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너무 좌로 기울었다....‘소비에트 만세!’라는 올바른 구호와 함께 ‘임시정부를 타도하라!’는 잘못된 구호를 함께 제시했다. 행동의 순간은 ‘너무 좌로 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대의 범죄행위인 조직 파괴행위이다.”
계급 역관계의 변화 때문에 혁명은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계급 역관계를 변화시키는가? 대개는 중간계급, 농민, 소부르주아, 군대 등의 동요가 역관계를 변화시킨다. 입헌민주당의 제국주의와 볼세비키주의 사이에 거대한 규모의 동요가 존재한다. 이 동요는 동시에 서로 정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소부르주아, 이들의 지도자들, 화해주의 지도자 등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해 급격히 우경화 한다. 반면 피억압 대중은 매번 더욱 날카롭고 대담하게 좌경화 한다. 뻬쩨르부르그 조직 지도자들의 모험주의를 비판한 레닌은 하나의 예외를 두었다: 중간 대중이 진지하고 심오하고 꾸준하게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면 우리는 마린스키 궁전의 정부를 즉시 타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상황이 오지 않았다. 거리에서 폭발한 4월 위기는 “소부르주아 그리고 반(半)노동계급 대중의 최초나 최후의 동요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아직도 당분간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쪽으로 대중을 더 깊게 더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때를 준비해야 한다.
4월에 노동계급은 볼세비키당에게 접근했다. 이것은 4월 정세의 명확히 표현된 특징이었다. 노동자들은 멘세비키당에서 볼세비키당으로 이적하기 위해 당 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공장에서 이들은 대의원들에게 대외 정책, 전쟁, 이중권력, 식량 문제 등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소속 대의원들은 좀더 빈번하게 볼세비키당 대의원들로 대체되었다. 공장과 인접한 지구 소비에트에서 급격한 전환이 시작되었다. 비보르그 지구, 바실리예프 섬, 나르바 지구 등의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들은 4월말에 예상 밖으로 갑자기 다수파가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상층 정치에 바쁜 나머지 노동자 지구에서 볼세비키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구들은 더욱 뚜렷하게 중앙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명령 없이 시 소비에트에 나갈 노동자 대의원 재선거의 정열적이고 성공적인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하노프의 계산에 의하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의 3분의 1이 5월초에 볼세비키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3분의 1이 아니었다. 가장 활동적인 3분의 1이었다. 3월의 흐리멍덩한 정치색깔은 사라지고 정치 노선들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레닌의 “황당한” 테제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지구들에서 진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혁명의 모든 전진은 대중의 직접 개입으로 촉발되거나 강제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비에트 정당들은 대중의 직접 개입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노동자와 병사들은 2월 봉기로 왕정을 타도했다. 이후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대중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대중은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8시간 노동제 투쟁이 진행된 3월초에 이미 노동자들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소비에트는 자기의 개입 없이 그리고 자기의 의지에 반해 획득된 승리를 그저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4월 시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든 대중 행동은 그것의 당면한 목표와 관계없이 지도부에 대한 경고이다. 이 경고는 처음에는 온건하다가 더욱더 결연해진다. 7월이 되면 이것은 지도자들에 대한 위협으로 변한다. 10월에는 사태를 결정하는 최종 행동이 결행된다.
모든 결정적 순간에 대중은 “자발적으로” 개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 경험을 통해 유추한 나름의 결론 그리고 아직도 공인되지 않는 자기 지도자들만을 복종한다. 선동가들의 내용 가운데에서 이런 저런 전제를 소화시킨 대중은 스스로의 의지로 이것의 결론을 행동으로 번역한다. 정당인 볼세비키당은 8시간 노동제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4월 시위에 대중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7월초에 무장 대중을 거리로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10월이 되어야 당은 마침내 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이때는 시위가 아니라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마침내 당은 대중의 선두에 선다.
임시정부가 진짜 권력이었다는 주장이 이론, 선언, 광고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권력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했다. 혁명은 소위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을 무시하며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새로운 부위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했으며 소비에트의 대중 기반이 강화되었다. 또한 제한적으로나마 노동자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한편 지방 정부의 대표들과 이들이 부르주아 단체들을 중심으로 산하에 조직한 “사회 위원회”는 소비에트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중앙정부의 하수인들이 이에 저항할 경우에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들은 지방 소비에트들이 중앙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부르주아 언론은 크론슈타트, 슐뤼셀부르크 또는 짜리친 등의 지역이 러시아에서 탈퇴하여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방 소비에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 주장에 항거했다. 그러자 장관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은 문제의 지역에 서둘러 내려가 부르주아 계급을 설득, 위협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계급 역관계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중권력을 붕괴시키는 운명적 과정은 각기 다른 속도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중권력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금방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정부를 통제하는 기관에서 행정기관으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 분립의 이론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군대 행정, 경제적 갈등, 식량과 수송 문제 심지어는 법원에 대해서도 계속 개입했다. 노동자들의 압력을 받자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고 반동 관료들을 제거했다. 또한 봐주기 힘든 임시정부의 대표들을 축출하고 수색 및 체포의 권한을 행사했으며 혁명에 적대적인 신문들을 탄압했다. 식량 및 상품 기근이 계속되자 지방 소비에트는 물가를 정하고 타지방으로의 물자수송을 금지하고 식량을 징발했다. 그러나 전국의 소비에트를 장악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볼세비키당이 제출한 구호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분노에 차서 거부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멘세비키 지롱드파의 아성인 트빌리시 소비에트의 활동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체레텔리, 체이제 등은 이 지역 출신이었으며 나중에 뻬쩨르부르그에서 패망하자 이곳으로 몸을 숨겼다. 트빌리시 소비에트의 지도자는 이후 독립 그루지야 공화국의 수반 요르다니아였다. 이 소비에트는 매 순간 다수를 장악한 멘세비키당의 원칙을 훼손하고 단독 권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비에트가 사용하기 위해 개인 인쇄소를 몰수했으며 반동들을 체포하고 정치범을 수사하고 재판했다. 또한 빵 배급제를 시행하고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정했다. 소비에트 수립 첫날부터 이중권력에 대한 공식 선언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눈에 두드러졌으며 3월과 4월 내내 계속 증폭되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뻬쩨르부르그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예절의 일부는 최소한 지켜졌다. 그런데 4월 시위는 임시정부의 무기력을 숨기고 있던 장막을 활짝 걷어버리고 정부가 수도에서 지지세력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월의 마지막 10일동안 정부는 꺼wu가는 촛불이었다. “정부는 이미 사라졌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업무수행의 조건이나 논의하고 있다고 케렌스키가 괴롭게 말했다”(스탄케비치). 10월 무장봉기 때까지 정부는 어려운 순간마다 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위기의 사이사이에서 그저 목숨을 부지할 뿐이었다. 계속해서 “업무수행의 조건을 논의”했기 때문에 정부는 업무를 수행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4월 위기가 터졌다. 이로부터 이론적으로 세 가지 결말이 가능했다. 첫째, 권력이 완전히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어가는 경우인데 이것은 내전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밀류코프는 내전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둘째, 권력이 완전히 소비에트에게 넘어가는 경우인데 이것은 내전도 필요 없이 손가락만 까딱하거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을 원치 않았고 이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감은 많이 상실되었지만 아직 남아있었다. 이 결과 근본적인 결말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결말은 혼란, 미적지근함, 비겁함 등이 혼합된 화해뿐이었다. 이 결말의 이름은 연립정부였다.
4월의 위기가 끝난 후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연립정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4월 21일의 결의문을 통해 집행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이중권력을 실제 사실에서 헌법적 원칙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너무 늦게 날아갔다: 왕들과 예언자들의 3월 이중권력은 법으로 공식화된 순간 대중 행동을 통해 그 허구가 드러났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외면하려 했다. 밀류코프의 말에 의하면 연립정부의 문제가 제기되자 체레텔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당신들이 완고하게 나오면 우리는 문을 꽝 차버리고 정부에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체레텔리는 자기가 나중에 정부를 “꽝” 차버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을 겁주려했다. 근본정책이 항상 그렇듯이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생각하여 연립정부가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목까지 차 올랐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 케렌스키는 집행위원회를 겁주었다: “현재 정부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가 사임한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다.”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권도 집행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모스크바 시의회는 결의문을 통해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4월 26일 사전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자 임시정부는 특별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아직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적극적인 창조적 역량들을” 정부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이 문제는 집행위원회로 곧바로 넘어갔다.
그러나 연립정부에 반대하는 정서는 아주 강했다. 4월말 모스크바, 트빌리시, 오데사, 에카테린부르크,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르 그리고 기타 지역의 소비에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멘세비키 지도자는 이 정서를 아주 명확히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면 대중운동을 “명확한 방향으로” 인도할 세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이 생각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이들을 기만과 술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오지 않은 대중은 사회주의자들의 정부 참여를 확고히 지지했다. 케렌스키가 장관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그와 같은 인물 6명이 장관이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좋은 일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연립정부가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정부이며 이 계급이 사회주의자를 좌익적 외피로 이용하여 인민에 대항할 것이라는 점을 대중은 알지 못했다. 병사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임시정부와는 연립정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이용하여 부르주아들을 정부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 동상이몽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있던 두 세력은 연립정부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세비키당에 우호적인 장갑차 사단을 포함해 여러 군부대가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지방은 압도적 다수로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사회혁명당에서도 연립정부 지지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이들은 멘세비키당이 입각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군대도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6월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어느 병사 대의원이 권력 문제에 대한 전선 병사들의 태도를 적절히 대변했다: “신뢰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사회주의자들이 입각을 거부하려 했을 때 병사들은 신음소리를 냈다.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 정부에 있기 때문에 병사들은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병사들의 이 신음소리는 뻬쩨르부르그에서도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결정적인 요인은 전쟁이었다. 처음에 사회주의자들은 권력 문제와 마찬가지로 전쟁 문제에서도 그냥 팔짱이나 끼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더 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정부의 위기 도중에 전선에서 병사 대의원들이 수도에 도착하여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에게 질문했다: 계속 전쟁을 할 겁니까 말 겁니까?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당신들이 질 겁니까 말 겁니까? 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합국들 역시 반정도 위협조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들은 4월에 서유럽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여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이렇다할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과 큰 희망을 걸었던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 군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뻬뗑 원수의 말을 빌면 군대가 “우리 손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위협적인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군대의 공세가 필요했다. 그리고 실제 공세 이전에 일단 공세를 감행하겠다는 확고한 약속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도움도 필요했지만 러시아 혁명이 평화를 약속한다는 병사들의 막연한 기대감을 빨리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 병사들의 희망을 꺾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혁명을 연합국들의 범죄와 연관시켜 혁명의 대의를 시급히 훼손해야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국주의 살육의 피와 진흙탕 속에 러시아 혁명의 깃발을 될수록 빨리 더럽히고 짓밟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고상한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연합국의 애국적 사회주의자들도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은 자들이 러시아로 보내졌다. 이들은 아양떠는 양심과 줏대 없는 말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외국의 사회애국주의자들은 마린스키 궁전의 환대를 받았다. 브란팅, 까쉥, 오그래디, 드 부르케르 등은 이 궁전을 자기 집처럼 편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장관들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소비에트에 대항했다.” 화해주의자들이 장악한 소비에트조차 종종 이 작자들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전선을 순회했다. 반더벨드는 이렇게 적었다: “흑해 수병 대표단, 케렌스키, 알버트 토머스 등이 조금 일찍 펼쳤던 노력과 우리의 노력이 같은 목적에 기여하도록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 모든 노력들은 공세를 위한 도덕적 준비를 끝낼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영광스러운 이상을 실현하는 투쟁에서 제 2 인터내셔널의 의장과 니콜라스 2세의 총사령관은 이렇게 공통의 언어를 찾아냈다.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르노델은 안심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필요 없이 우리는 이제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이 작자들은 러시아의 내전에서 백군을 지지했다. 결국 인류는 이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별의별 동요를 다 겪은 후 집행위원회는 5월 1일에 41표의 찬성, 18표의 반대, 3표의 기권으로 연립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볼세비키당과 소규모의 멘세비키 국제주의자들만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데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연립정부를 통해 더 밀접하게 화해한 결과가 흥미롭다. 부르주아 계급의 공인된 지도자 밀류코프가 정부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부를 나가지 않았다. 다만 쫓겨났을 뿐이었다.” 전쟁장관 구츠코프는 “병사 권리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며 4월 30일 사임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연립정부를 살리기 위해 밀류코프의 사임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이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속이 얼마나 검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입헌민주당 우파의 이스고예프는 “당이 지도자를 배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그는 아주 올바르게 이렇게 말했다: “4월말에 입헌민주당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 도덕적 치명타 때문에 당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밀류코프의 거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세력은 연합국들이었다. 밀류코프는 러시아가 다다넬스 해협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좀더 온화한 “민주주의자”가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것을 영국은 완전히 지지했다. 헨더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부캐넌 대신 러시아 대사가 될 권한을 부여받은 후 뻬쩨르부르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캐넌이 계속 대사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부캐넌은 적임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의 정복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합국들의 영토병합을 열렬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테레쉬첸코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원치 않는다는 발표는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밀류코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토머스가 자기 역할을 했다. 그는 부캐넌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함께 밀류코프를 반대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이 증오한 밀류코프는 연합국 정부들,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창립한 당에 의해 버림받았다.
밀류코프는 이런 잔인한 벌을 받을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그를 반대한 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할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민주적 평화를 향한 모두 노력을 어둡게 만든 악령이 밀류코프라고 대중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립정부는 밀류코프의 목을 쳐서 제국주의의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단번에 정화시켰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5월 5일 연립정부의 장관들과 강령을 인준했다. 볼세비키당은 100표를 결집시켜 인준에 반대했다. 밀류코프는 비꼬는 투로 자기를 몰아낸 소비에트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연설자들과 장관들의 발언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그리고 똑같은 열광적 환호로 ‘1905년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를 환영했다. 전날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이중권력’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연립정부로 전이되었을 뿐’이며 ‘권력이 노동자 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에게 넘어가는 다음 단계에서만’ 러시아를 ‘구원’할 유일한 세력이 형성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가와 국가가 겨루는 대신 고통받고 억압받는 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새로운 유혈과 철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류코프의 표현에 의하면 트로츠키는 대중이 채택해야할 정책의 세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 “세 가지 혁명 신조: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들을 통제해야한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만 믿어야한다.” 이 연설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기 연설에 대해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틀림없이 예상했을 것이다.” 사실 트로츠키는 연단에서 내려올 때보다 올라갔을 때 훨씬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지식인들이 회의장 복도에 서서 하는 말과 행동에 대단히 민감한 수하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트로츠키는 볼세비키당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레닌보다 더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회주의자들은 15개의 장관직 가운데 6개를 차지했다. 이들은 연립정부 안에서도 소수파가 되기를 원했다. 입각을 공개적으로 결정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양보 게임을 했다. 르보프공은 수상으로 유임되었고 케렌스키는 전쟁 및 해양 장관이 되었다. 체르노프는 농업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테레쉬첸코는 밀류코프를 대신해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케렌스키, 영국 대사 부캐넌 등과 속을 터놓고 지내는 내밀한 친구였는데 발레 애호가였다. 이들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지 않고도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무장관에는 무명의 변호사 페레베르제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7월에 볼세비키당을 탄압하면서 일시적으로 영광을 누렸다. 체레텔리는 집행위원회에 계속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체신장관을 맡았다. 노동장관이 된 스코벨레프는 장관이 된 기쁨에 흥분하여 자본가들의 이윤을 100%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은 곧 날개를 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결국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대자본가 코노발로프가 상공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증권거래소의 유명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그런데 2주일 후 공공경제의 “무정부성”에 항의하여 그는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스코벨레프는 2주일도 되기 전에 이윤을 공격하겠다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경제의 무정부성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파업을 진정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자제력을 발휘해 달라는 호소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든 연립정부들이 그렇듯이 새 정부도 선언문을 상투어로 채웠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적극적 대외정책, 식량문제 해결, 토지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 완료 등이 언급되었는데 모두 말장난에 불과했다. 최소한 의도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지한 부분은 “러시아와 연합국들의 패배를 막기 위한 방어 및 공격 작전에” 군대를 준비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연립정부의 의의는 이 말 속에 핵심적으로 전부 포함되었다. 결국 연립정부는 연합국들이 러시아를 가지고 놀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부캐넌은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의 연립정부는 러시아 전선에서 군사적 구원의 마지막이자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따라서 2월 혁명의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제시한 강령, 연설, 타협, 표결 등의 뒤에는 연합국이라는 제국주의 무대 감독이 서 있었다. 연합국들은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전선을 강화시킨다는 미명하에 사회주의자들은 서둘러 연립정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이들은 정부의 3분의 1과 전쟁 전체에 대한 책임을 떠맡았다.
신임 외무장관은 3월 27일 선언문에 대한 연합국 정부들의 응답을 2주일간 공개하지 않았다. 연립정부의 선언문에 반대하는 연합국들의 주장을 위장하기 위해 응답의 문구를 일부 수정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쉬첸코는 구체제 서기들이 작성했던 외교 전보의 문구를 열심히 수정하여 “평화를 위한 적극적 대외정책”을 나름대로 표현했다. “요구” 대신 “정의의 요구”, “이해를 확보하는” 대신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분노로 이빨을 약간 갈면서 밀류코프는 신임 외무장관을 이렇게 평했다: “그가 연합국 정부에 보낸 외교 전보들의 ‘민주적’ 어구는 일시적 요구들에 마지못해 양보한 결과라는 것을 연합국 외교관들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것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토머스와 새로 도착한 반더벨드도 팔짱을 끼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열심히 “인민들의 이익”을 연합국들의 필요에 일치하도록 해석했으며 집행위원회의 바보들을 움직이는데 상당히 성공했다. 반더벨드는 이렇게 보고했다: “스코벨레프와 체르노프는 시기상조인 평화를 주창하는 자들에게 열렬히 저항했다.” 이 조수들에 의존하여 프랑스 수상 리보는 5월 9일 자신 있게 프랑스 의회에서 선언했다: “조금의 양보도 없이” 테레쉬첸코에게 만족스러운 답장을 보내겠다.
정세의 진짜 주인들은 널려있는 이익을 조금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이즈음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독립을 선언한 후 이 나라를 즉시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강도 본성을 보여준 좋은 예였다.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미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칸반도의 균형”을 파괴한 이탈리아에 대해 항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기력한 임시정부이므로 당분간 혀를 깨물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연립정부의 대외정책에서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미국과의 성급한 화해였다. 이 새로운 우호관계는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미국은 군사적 악행으로 이름이 많이 더럽혀지지는 않았다; 대서양 저편에 있는 미국은 러시아에게 신용대부와 군사물자를 대폭 제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경건함과 협잡이 결합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외교는 임시정부의 수사적 필요에 아주 적합했다. 루트를 단장으로 한 러시아 사절단을 보내면서 윌슨은 마치 교구민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임시정부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어느 나라 인민도 강제로 지배당하지 말아야한다.”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목적을 두루뭉실하게 속이듯이 규정했다: “...전쟁의 목적은 미래의 세계평화, 복지,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테레쉬첸코와 체레텔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용대부와 평화주의의 상투적 표현이었다. 전자의 도움과 후자의 외피로 이들은 전선의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세느강의 샤일록인 프랑스 금융자본가들은 당연히 약속 어음을 맹렬하게 흔들면서 이 공세를 요구하고 있었다.
5월 11일 케렌스키는 전선을 순시하면서 공세를 지지하는 선동을 했다. 신임 전쟁장관은 자기 열성에 목이 메어 이렇게 보고했다: “공세에 대한 열정이 군대 내에서 상승하고 확산되고 있다.” 5월 14일 그는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매력이 없는 잘 알려진 전망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총검 끝에 평화를 걸고 다닐 것이다.” 5월 22일 줏대 없이 조심스러웠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좀더 융통성이 있으며 진취적인 브루쉴로프가 임명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모든 힘을 다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2월 혁명에게 거대한 재앙이 될 운명이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기관이었다. 여기서 병사는 물론 농민을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이었다. 접촉위원회는 화해의 기관이었다. 임시정부를 접촉위원회로 변환시킴으로써 연립정부는 이 구조를 단순화시켰다. 그러나 이중권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체레텔리가 접촉위원회 위원이든 체신장관이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 전역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국가기구가 존재했다. 임시정부를 정점으로 한 신구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첫 번째 국가기구였고 전선의 말단 중대까지 내려간 소비에트의 선거구조가 또 하나의 국가기구였다. 이 두 국가기구는 역사적 결전을 준비만 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을 토대로 했다. 연립정부에 참여하면서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체제가 평화적으로 서서히 해체되기를 기대했다. 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소비에트 권력이 공식 정부에 포섭될 것으로 이들은 상상했다. 케렌스키는 부캐넌에게 단언했다: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이 희망은 즉시 화해주의 지도자들의 공식 노선이 되었다. 이들의 사고에 따르면 중력의 중심이 지역 소비에트에서 새로운 자치 기관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위원회는 제헌의회로 대체되어야한다. 이렇게 해서 연립정부는 부르주아 의회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가교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이 노선을 원치도 않았고 원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 소집된 시의회들의 운명은 명확한 경고였다. 시의회 선거는 참정권을 최대한 확대하면서 실시되었다. 병사들은 도시민들과 함께 여성은 남성과 함께 똑같이 투표했다. 4개 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했다. 노보예 브렘야(신 시대)지는 짜르 정부의 신문이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부정직한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만해도 이 신문의 성격이 짐작될 것이다. 이 신문은 우익, 민족주의자, 10월당 등에게 입헌민주당을 찍으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유산 계급들의 정치적 무기력이 완전히 명백해지자 대다수 부르주아 신문들은 “볼세비키당을 제외하고 원하는 모든 당에게 표를 던지자!”는 구호를 채택했다. 각급 의회에서 입헌민주당은 우익이었으며 볼세비키당은 세력이 커지고 있는 좌익 소수파였다. 다수파는 언제나 엄청난 지지를 얻고 있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었다. 새로 소집된 각급 의회들은 소비에트보다 더 광범위한 대의기구였으므로 커다란 권위를 누려야할 것 같았다. 더욱이 사회적 법적 기관인 의회는 공식 정부의 지지란 엄청난 장점을 누리고 있었다. 민병대, 식량 공급 기관, 수송 체계, 인민 교육 등은 공식적으로 의회의 소관이었다. “사적” 기관인 소비에트는 예산도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권력은 소비에트에게 있었다. 결국 의회는 소비에트의 지방자치단체 위원회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와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소비에트가 의회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깊이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공식 민주주의 기관인 의회는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놀라운 현상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자면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모든 기관들과 같이 지방 정부는 확고히 정착된 사회적 관계 즉 명확한 소유체제에 기초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근본 초석인 소유체제를 의문시하는 것이 혁명의 핵심 성격이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계급 역관계가 공개적 시험을 거친 후에야 이 의문은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지도부가 문제였지만 소비에트는 억압받는 계급들의 투쟁조직이었다. 따라서 이 계급들은 의식적이든 또는 반(半)의식적이든 단결하여 사회구조의 기초인 소유체제를 변모시켰다. 지방 정부들은 시민이라는 추상으로 환원된 모든 계급들에게 똑같은 참정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혁명 상황에서는 제한된 그리고 위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외교관계 회의와 같았다. 한편 정부 내부의 적대 진영들은 전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혁명의 일상에서 지방 정부들은 반(半)허구적으로 존재를 연명해갔다. 그러나 대중의 개입이 정치적 사건들의 방향을 규정하는 결정적 순간에 지방 정부들은 공중 분해되어 그 구성 부분들은 바리케이드의 양쪽 반대편에 떨어졌다. 5월부터 10월까지 소비에트와 지방 정부들의 역할을 비교하기만 하면 제헌의회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었다.
연립정부는 제헌의회 소집을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민주주의 산술에 의하면 정부의 다수파인 자유주의자들은 새로 소집된 각급 의회에서처럼 제헌의회에서도 허약한 우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것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혁명이 승리한 지 3개월이 지난 5월말이 되어서야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특별 협의회가 작업을 시작했다. 자유주의 법학자들은 모든 머리카락을 16 등분해서 모든 종류의 민주적 퇴적물을 증류기에 넣고 뒤흔들었다. 또한 군대의 선거권에 대해 끝없이 말다툼을 했다. 예를 들어 수백만에 달하는 도망병들에게 선거권을 줄 필요가 있는 지 그리고 수십 명에 불과한 짜르 왕족에게 선거권을 줄 필요가 있는 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그러나 제헌의회 소집 날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말을 삼갔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회의 예절을 어기는 행위였다. 이것은 볼세비키들만 할 수 있는 나쁜 짓으로 간주되었다.
여러 주일이 지났으나 화해주의자들의 희망 섞인 예언과 달리 소비에트는 소멸하지 않았다. 가끔 지도자들에 의해 침체하고 혼란을 겪었으나 소비에트는 빈사상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위험의 징조가 처음 나타나는 순간 소비에트는 벌떡 일어나 자기가 정세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인식시켰다. 소비에트를 마비시키려 애쓰면서도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중요한 일이 터질 때마다 소비에트를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두 정당의 최상 분자들이 소비에트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지방 의회와 정부에는 제 2진에 속하는 기술자들과 행정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현상은 볼세비키당에도 적용되었다. 소비에트에 접근할 수 없는 입헌민주당만 최상 분자들을 자치 정부 기관들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가망 없는 소수파로 몰린 부르주아들은 이 기관들을 진정한 지지기반으로 전환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지방 정부를 자기 기관이라고 간주할 수 없었다. 노동자와 자본가, 병사와 장교, 농민과 지주 사이의 격화되는 갈등은 지방 정부나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없었다. 이 논의는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에서 또 한편으로는 의회의 “사적” 회의와 “참정권을 누리는” 정치인들의 각급 협의회에서 끼리끼리 진행되었다. 사소한 일은 적과 논의할 수 있으나 죽고 사는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이다. 이 맑스주의 공식을 인정한다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들의 진정한 “집행위원회”는 연립정부 바깥에 존재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으로 소비에트는 정부 내에서 소수파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자체는 이중권력의 한 축이 되어 정부와 무관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정부의 다수파인 부르주아 계급도 정부 내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자유주의자들은 정부 내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보는 앞에서 진지하고 냉철하게 논의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공인된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는 지도자이며 유산자들의 지도부를 거느린 밀류코프가 정부에서 밀려난 사건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모든 의미에서 껍데기에 불과한 기이한 존재이며 이 사실은 너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일상은 두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한 축은 마린스키 궁전의 좌에서 또 한 축은 우에서 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들을 정부 내부에서 까놓고 말할 수 없게 되자 장관들은 스스로 정한 협약에 따라 논의하고 움직였다. 연립정부에 의해 은폐된 이중권력은 이율배반과 동상이몽의 학교가 되었다. 다음 6개월 동안 위기, 재건, 개각 등을 겪으면서 연명한 연립정부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근본 특징인 무기력과 위선을 계속 유지했다.
러시아 전국과 똑같이 군대에서도 정치적 재편이 계속 되어 하층 부위는 좌로 상층 부위는 우로 움직였다. 집행위원회는 연합국들을 위해 혁명을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 지휘부에 대항하여 병사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수립된 병사위원회는 병사들을 제압하려는 지휘부의 도구로 전환되고 있었다.
병사위원회의 내적 구성은 다양했다. 우선 전쟁과 혁명의 목적이 같다고 진정으로 생각한 애국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상부에서 강요한 공세에 용감하게 가담하여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대의에 목숨을 바쳤다. 이들 옆에는 케렌스키처럼 말만 앞서는 자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호에서 빠져 나와 언제나 특권을 노리는 치사한 사기꾼과 뺀질이도 적지 않았다. 모든 대중운동은 특히 초기에 온갖 성향의 인간들을 지도자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특히 화해의 시기에는 허풍선과 카멜레온이 판을 친다. 사람이 강령을 만들지만 강령 또한 사람을 만든다. “접촉” 정치의 파벌은 혁명의 와중에는 사기 및 음모의 파벌이 된다.
이중권력 상태는 군사력 양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입헌민주당원들은 대중의 증오를 샀기 때문에 군대에서 자신을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소개했다. 민주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을 수 없듯이 군대도 소생시킬 수도 없었다. 이 두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병사들의 행진을 단 한번도 조직하지 않았다. 수하노프가 호기심을 가지고 언급하는 이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잘 조명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장군들은 소비에트가 자기들이 조직한 행진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없이는 행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위 장교들은 갈수록 입헌민주당과 유착했다. 그리고 더 반동적인 정당들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층은 짜르 치하의 경우와 같이 군대의 하급 장교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모습대로 지휘부를 수립할 수 없었다. 자기 모습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혁명 과정이 보여주듯이 백군이 했듯이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지휘부를 충원하던가 볼세비키당이 했듯이 노동계급을 새로 훈련시켜 지휘부를 양성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었다. 설득하고 호소하면서 모두를 속이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전부였다. 그리고 이것이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면 이들은 절망한 채 권력을 반동 장교들에게 넘기고 이들이 인민에게 올바른 혁명 사상을 가르치게 내버려두었다.
구 사회의 궤양들은 하나씩 순서대로 퍼져나가 군대의 조직을 파괴시켰다. 민족 구성이 다양한 러시아에서 온갖 형태를 띠고 등장한 민족문제는 대러시아인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병사 대중 속으로 갈수록 깊게 파고들었다. 민족 갈등이 계급 갈등과 모든 방향에서 중첩되었다. 모든 문제에 대해 그렇듯이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정책은 동요와 혼란을 보이면서 이중으로 배신을 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장군들은 루마니아 전선에 등장한 “프랑스 군대의 규율을 가진 이슬람교도 군단” 등의 민족 단체들과 놀아났다. 이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구 군대에서 가장 강인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새로운 사상과 깃발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민족적 단합도 오래가지 못했다. 계급투쟁이 민족 단체들을 분열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의 형성 과정 자체가 군대의 절반에 영향을 미칠 태세였다. 이 결과 군대는 조직 구조가 녹아내려 새로운 부대가 생기기도 전에 옛날 부대는 붕괴했다. 이렇게 온갖 방면에서 온갖 불행이 군대를 괴롭혔다.
밀류코프는 자신이 쓴 역사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혁명’ 사상과 군대의 정상적인 규율 사이의 갈등 그리고 ‘군대의 민주화’와 ‘군대의 전투력 보존’ 사이의 갈등 때문에” 군대는 붕괴했다. 여기서 군대의 “정상적인” 규율은 물론 짜르 치하의 규율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대한 혁명은 전부 구체제의 군대를 멸망시켰다. 역사가라면 이 정도의 법칙은 알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법칙은 추상적인 규율의 원칙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다. 살아있는 계급들이 충돌하면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혁명은 군대의 엄격한 규율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창조하기도 한다. 다만 혁명으로 타도된 구 지배계급들에 의해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1851년 9월 26일 지혜로운 어느 독일인이 역시 지혜로운 어느 독일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군대의 해체와 규율의 철저한 붕괴는 승리한 모든 혁명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조건이었다. 이 사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눈에는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의 역사 전체는 이 단순하고도 의심의 여지없는 법칙을 증명한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을 경험하고도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들은 엥겔스와 맑스라는 두 지혜로운 독일인을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더욱이 이들은 군대가 혁명 후에도 구체제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또한 이 사회주의자 멘세비키들은 볼세비키들을 유토피아(공상)나 추구한다고 비난했다!
5월초 브루쉴로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의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상태를 간략하게 규정했다: 15%에서 20%의 장교들은 확신을 가지고 새 질서에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장교들은 병사들과 놀아나면서 이들이 지휘부에 저항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약 75%의 장교들은 혁명 이후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분노하면서 자기의 껍질 속에 몸을 숨기고는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고 있다. 덧붙이자면 압도적 다수의 장교들은 순전히 군사적 의미에서 쓸모가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장군들과의 회의에서 케렌스키와 스코벨레프는 슬프게도 “계속되고 있는” 혁명에 대해 변명하면서 이 사실을 고려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흑백인조 장군 구르코는 이 장관들에게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았다: “혁명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말을 들어주세요. 일단 혁명을 멈추어 주시고 우리 군대가 끝까지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케렌스키는 충심을 다해 장군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결국 용감한 코르닐로프 장군은 그를 거의 목 졸라 죽일 뻔했다.
혁명기에 화해주의 정책을 구사하려면 적대 계급들 사이를 열심히 왔다갔다 해야한다. 케렌스키는 바로 이 정책의 화신이었다. 명확하고 간결한 체계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기관이 바로 군대이다. 그런데 이 기관의 우두머리가 된 케렌스키는 곧바로 군대를 붕괴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데니킨 장군은 최고 지휘부의 인사 이동에 대해 흥미로운 목록을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사 이동은 완전히 과녁을 빗나갔으며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쟁장관 케렌스키도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사 이동의 진짜 대상자는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병사위원회에 너무 양보한다는 이유로 전선 사령관인 루즈키 장군과 육군 사령관 라드코-드미트리예프 장군을 해임시켰다. 한편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후임인 브루쉴로프 장군은 공포에 질린 유데니치를 같은 이유로 해임시켰다. 한편 케렌스키는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 전선 사령관 구르코 장군과 드라고미로프 장군을 군대의 민주화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같은 이유로 브루쉴로프 장군은 칼레닌 장군을 해임시켰고 자신 역시 병사위원회에 너무 양보한다는 이유로 이후 해임되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민주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어서 뻬쩨르부르그 관구 사령관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전선 사령관과 총사령관이 되었다. 데니킨 장군은 봉건적 행정 방식 때문에 알렉세이예프 총사령관의 참모장 직책에서 해임되었으나 곧 서부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등 타넘기 식 인사 이동은 최고 지휘부의 방향 상실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질병은 서서히 하부로 전염되어 중대에까지 내려가 군대의 붕괴를 재촉했다.
정부에서 보낸 인민위원들은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병사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들은 장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점에 모길레프의 전쟁 총사령부 본부에서 소비에트 회의가 열렸다. 이때 어느 소비에트 대의원이 케렌스키와 브루쉴로프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휘부 장교의 88%는 반혁명을 조장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병사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부터 장교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5월 내내 지휘부의 보고서는 최고위부터 최하위까지 한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공세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보병의 경우는 더 그렇다.” 때때로 이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기병의 경우는 좀 괜찮고 포병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공세 준비가 완료된 5월말 제 7군 인민위원은 케렌스키에게 전보를 보냈다: “제 12 사단 제 48 연대 병력 전체는 공세에 투입되었다. 제 45 및 46 연대는 전체 중대들의 반 정도만 공세에 투입했다. 제 47 연대는 공세를 거부하고 있다. 제 13 사단에서는 제 50 연대만 병력 전부를 공세로 투입했다. 제 51 연대는 내일 공세에 나서기로 약속했으며 제 49 연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 52 연대는 공세에 나서기를 거부한 후 장교들을 모두 체포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상황은 비슷했다. 인민위원의 보고에 대해 정부는 이렇게 응답했다: “제 45, 46, 47, 52 연대를 해체시키고 장교와 병사들의 명령 거부를 조장한 자들을 군사 법정에 회부하라.” 이 내용은 끔찍했으나 아무도 겁먹지 않았다. 전투를 원치 않았던 병사들은 부대의 해체나 군사법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사들을 배치할 때는 한 부대가 다른 부대를 감시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짜르 치하와 마찬가지로 억압의 도구로 카자흐 기병대가 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도 사회주의자들의 명령을 받았다. 혁명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세를 2주 남긴 6월 4일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북부 전선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병사들이 독일군 병사들과 우애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보병은 공세에 반대하고 있다....서부 전선의 상황은 불투명하다....남서 전선에서는 분위기가 일부 개선된 것이 눈에 보인다....루마니아 전선에서는 상황이 호전된 기미가 없다. 보병은 진격을 원치 않는다.”
6월 11일 제 61 연대장이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교들과 나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한 제 5 중대의 병사 한 명이 레닌주의자이기 때문이다....가장 뛰어난 장교들과 병사들 다수는 이미 탈영했다.” 연대에 레닌주의자 하나가 들어왔다고 장교들이 도망칠 리는 없었다. 다만 이 병사는 포화상태의 용액에서 처음 생긴 결정체였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것은 볼세비키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당시 공세에 반대하여 대담한 발언을 감행한 병사는 모두 레닌주의자로 분류되었다. 다수의 “레닌주의자”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이 레닌을 스파이로 채용하여 러시아로 보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제 61 연대장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정부가 엄벌을 내릴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구 정부를 타도했다. 우리는 케렌스키도 타도할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었다. 병사들은 볼세비키들의 선동으로 각성했으나 이들의 사고는 선동의 내용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회혁명당의 지도를 받고 있던 흑해 함대는 발트해의 크론슈타트 수병들과 달리 애국주의의 아성으로 간주되었다. 이 함대는 수병복으로 갈아입은 활발한 대학생 바트킨을 단장으로 300명의 특별파견단을 4월말 전국에 보냈다. 이 파견단은 허세도 많이 부렸으나 좀더 진지한 충동을 드러내어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자는 노선을 유포시켰다. 그러나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서 청중은 이들에게 갈수록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흑해 수병들은 전쟁 지지의 목소리를 낮추어야했다. 바로 이때 발트해 파견단이 흑해의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여 평화를 주창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발트해 파견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흑해 파견단보다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영향을 받아 세바스토폴 수병들은 6월 8일 함대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가장 증오스러운 장교들을 체포했다.
소비에트 대회의 6월 9일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질문했다: “애국주의 파견단을 전국에 보낸 모범적인 흑해 함대는 애국주의 조직의 아성이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시점에 수병들이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과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군대는 병사, 지휘관, 병사위원회 모두를 괴롭혔다. 이들 모두는 참을 수 없는 현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보였다. 지도자들은 공세가 이 엉망진창을 극복하고 명확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옳았다. 체레텔리와 체르노프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온갖 민주적 수사를 조심스럽게 구사하면서 공세를 지지했다. 전선의 병사위원회는 장교들과 단결했다. 이 결과 전쟁과는 양립할 수 없고 혁명에 필수적인 새로운 세력에 대항해 병사위원회는 투쟁해야했다. 이 변화는 곧 눈에 드러났다. 어느 해군 장교가 이렇게 말한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병사위원회는 눈에 띄게 우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병사와 수병들 사이에서 이들의 권위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런데 병사와 수병들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전쟁은 불가능했다!
케렌스키의 승인을 받아 브루쉴로프는 자원 병사들로 돌격 대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 대대에는 온갖 종류의 분자들이 즉시 모여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라비에프 대위 같은 모험주의자들이었다. 그는 10월 혁명이 승리하자 곧바로 사회혁명당 좌파가 되더니 나름대로 뛰어난 파란 만장한 경력을 쌓은 후 결국 소비에트 권력을 배신했다. 아마 그는 볼세비키의 총탄에 사망했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한편 반혁명 장교들은 돌격 대대 구성에 끈덕지게 매달리면서 이것을 자기 세력을 결집시키는 합법적 방법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움직임에 대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험을 즐기는 일부 여성들은 “흑사병 경(輕)기병” 여성 대대들을 구성했다. 이 중의 한 대대는 10월에 동궁과 케렌스키를 방어한 최후의 무장병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전쟁의 궁극 목적인 독일 군국주의 타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합국들에게 약속한 초봄 공세는 일주일씩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연합국들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기로 확고히 결정했다. 즉각적인 공세를 압박하기 위해 연합국들은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더벨드의 애처로운 간청과 더불어 이들은 군사물자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모스크바의 이탈리아 총영사는 이탈리아 언론이 아니라 러시아 언론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가 교전국들과 개별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을 경우 연합국들은 일본이 시베리아를 맘대로 점령하게 내버려둘 것이다. 로마가 아니라 모스크바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 거만한 위협에 열광하여 애국주의 논조로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단독 평화협정이 아니라 공세를 재촉하기 위해 이 협박을 이용했다. 다른 측면에서도 연합국들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들은 망가진 대포를 러시아에 보냈다. 연합국들이 제공한 무기의 35%는 2주일만 조심스럽게 사격하면 망가졌다. 영국은 신용대부를 중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로운 은인인 미국은 영국 몰래 임시정부에 7천5백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이에 대한 담보물은 물론 새로운 공세였다. 러시아 자본가들은 열화와 같이 공세를 촉구하면서 연합국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돈 즉 자유 대부는 제공하지 않았다. 공세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타도된 왕정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자기 존재를 부각시켰다. 임시정부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문에서 로마노프 왕가는 전쟁 대부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였다: “재무부가 짜르 왕가를 부양할 자금을 제공해야한다.” 군대는 이 움직임을 모두 읽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장관 대다수 뿐 아니라 고위 장교의 대다수도 왕정 복귀를 원한다는 것을 병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러시아 군대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반더벨드, 토머스, 까쉥 등의 노력에 연합국들 전부가 동의하지는 않았다. 경고의 목소리도 있었다. 프랑스의 원수 뻬뗑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군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공세를 취할 경우 금방 무너질 것이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혁명의 심장인 군대를 도려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중에 뼁르베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군과 러시아군의 우애 행위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대로 놓아둘 경우 러시아군은 급격히 해체될 위험이 있다.”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비밀로 붙인 채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는 맨 처음으로 공세에 대한 정치적 준비를 시작했다. 반정도 신성시되고 있던 지도자들이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고 여전히 떠버릴 때에도 체레텔리는 더욱더 확고하게 공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가장 오래 즉 가장 수줍게 대응한 지도자는 체르노프였다. 5월 17일의 임시정부 회의에서 자칭 이 “농촌 장관”은 매서운 질문을 받았다: 어떤 회의에서 공세에 대해 미적지근한 발언을 했다는데 사실인가? 이에 대해 체르노프는 이렇게 응답했다: “공세는 정치인인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전선의 전략가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이들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해서도 숨바꼭질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이었다.
공세에 대한 준비 때문에 볼세비키당에 대항하는 투쟁은 배가되었다. 볼세비키들이 평화협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난이 더욱 빈번해졌다. 다른 교전국들에 비해 러시아는 훨씬 허약하고 지쳐있었다. 이 전반적 상황으로 보아 개별 평화협정이 러시아의 유일한 탈출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요인이 되고 있는 혁명의 위력을 측정하지 못했다. 볼세비키당은 믿고 있었다: 혁명의 힘과 권위가 대담하게 전쟁을 반대할 때에만 개별 평화협정을 피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했다. 6월 9일 레닌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개별 평화협정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자본가들과도 개별 평화협정을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선언한다. 러시아 자본가들과는 더 그렇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러시아 자본가들과 개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개별 평화협정을 분쇄하자!” 대회 보고서는 그의 연설에 대한 반응을 “박수갈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대회의 극소수만 박수를 보냈다. 따라서 이 박수는 특히 열렬하게 터져 나왔다.
집행위원회의 일부는 이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또 다른 일부는 좀더 권위 있는 기관 뒤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결정되었다: 소비에트 대회가 이 문제에 대해 최종 방침을 내릴 때까지 케렌스키는 공세를 명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회 첫 회의에서 볼세비키당이 제출한 선언문은 이렇게 밝혔다: “공세는 군대를 더욱 파괴시켜 한 부위가 다른 부위에 대항하게 만들뿐이다. 따라서 소비에트 대회는 즉시 이 반혁명 공세를 저지하거나 솔직하게 공세에 대한 책임을 전부 져야한다.”
소비에트 대회는 공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적 절차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대포는 오랫동안 적의 진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6월 16일 군대와 함대에 내린 명령에서 케렌스키는 전쟁 총사령관을 “승리의 날개로 상승한 우리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적에 대한 즉각적이고 결정적인 타격”의 필요성을 논증한 후 “나는 여러분들에게 전진을 명령한다”로 말을 맺었다. 공세 전야에 쓴 글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대회에 볼세비키당이 제출한 선언문을 논평했다: “공세를 취하는 것을 통해 정부는 전쟁 승리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공세를 위한 물리적 조건은 대단히 불리하다. 전반적인 경제 붕괴 때문에 군대는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 정부는 단 하나의 급진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공세의 정신적 조건은 더욱더 불리하다. 정부는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책을 결정할 수 없다. 이 진실이 군대 앞에서 폭로되었다. 공세로 군대는 급속히 붕괴할 것이다. 대대적인 탈영은 이제 타락한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다. 이 현상은 정부가 내적 단결과 목적으로 혁명군대를 결집시킬 능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더욱이 이렇게 지적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대단히 후진적인 농민들에게 이 혁명이 그들 것이라고 확신시킬 단 하나의 조치는 지주제의 즉각적인 폐지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물질적 정신적 조건 속에서 공세는 모험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지휘부도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세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다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강제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맡은 전선을 순시한 후 데니킨은 브루쉴로프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공세가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또한 지휘부 자체가 백해무익한 인간들의 집합장소였기 때문에 전쟁이 승리할 가망은 더욱 없었다. 장교이자 애국주의자인 스탄케비치는 군대의 사기와는 별개로 기술적으로도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언한다: “공세는 비판할 가치조차 없이 엉터리로 준비되었다.” 장교 협회의 의장인 입헌민주당의 노보실체프는 장교 파견단을 이끌고 입헌민주당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공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최상의 부대들의 전멸만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상부의 권력 실세들은 이 경고들을 추상적 표현을 동원하면서 무시했다.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반동 장군 루콤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면 아마 대중의 심리가 바뀔 것이고 장교들은 병사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희망의 불씨는 아직 남아있다.” 이들의 주요한 목적은 병사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수립된 계획은 이렇게 설명했다: 남서 전선의 병력이 르보프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독일군은 가장 강력한 타격을 입게될 것이다. 그리고 북부 및 서부 전선은 이 작전을 지원해야했다. 결국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진격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휘부의 능력을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그래서 부차적인 전선들이 차례로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데니킨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총사령부는 계획적 전략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준비된 전선부터 작전을 개시해야했다.” 이제 모든 것은 신의 가호에 맡겨졌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짜르 왕후의 성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민주주의의 성상으로 대체하려했다. 케렌스키는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축복을 호소하고 선언했다. 공세는 시작되었다: 6월 16일 남서 전선, 7월 7일 서부 전선, 8일 북부 전선, 9일 루마니아 전선 등의 순서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세 개 전선의 공세는 허구였다. 주요 전선인 남서 전선이 붕괴하면서 동시에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오늘은 혁명의 거대한 승리의 날이다. 거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혁명 군대가 6월 18일에 공세를 시작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오래 기다려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러시아 혁명의 최상의 시기는 단번에 회복되었다.” 노인이 된 플레하노프는 19일의 애국주의 집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시민 여러분,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월요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저자 주: 러시아어에서 일요일은 ‘부활’이란 의미이다.) 조국과 전세계의 부활입니다. 짜르의 멍에를 던져버린 러시아는 적들의 멍에도 던져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같은 날 체레텔리는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혁명 군대의 승리는 러시아 민주주의 뿐 아니라...제국주의에 대항해 진실로 투쟁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애국적 민주주의는 모든 입을 열어놓고 지껄였다. 한편 신문들도 즐거운 소식을 실었다: “빠리 증권거래소는 러시아 군대의 공세를 맞이하여 러시아 주식들 전부의 가격을 상승시켰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안정을 주식시세로 측정하려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혁명이 망할수록 증권거래소는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도의 노동자들과 주둔군 병사들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애국주의 물결에 단 한순간도 감염되지 않았다. 애국주의의 유일한 무대는 네프스키 가도였다. 치네노프 병사는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네프스키 가도로 나가 공세에 반대하는 선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일부가 우산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다....우리는 이들을 병영으로 끌고 들어왔다...그리고 내일은 이들이 전선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전의 폭발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7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의 기관총 연대는 6월 21일 총회에서 이렇게 결의했다: “전쟁이 혁명을 옹호할 때에만 전선에 병력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부대를 해체하겠다는 위협에 대해 “임시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단체들을” 해체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여기서 다시 볼세비키당의 선동보다 훨씬 앞선 위협적인 태도가 표현되었다. 6월 23일자 혁명 연대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 2군 부대들이 적의 제 1선과 제 2선 참호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노동자 6천명의 바라노프스키 공장에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3명의 사회혁명당원 대신 3명의 볼세비키당원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달 말이 되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성격이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이 소비에트는 6월 20일 공세 중인 군대를 환영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느 규모의 다수가 이 결의문을 지지했는가? 찬성 472표, 반대 271표, 기권 39표였다. 이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역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은 멘세비키당 및 사회혁명당의 좌파 그룹들과 함께 이미 소비에트의 5분의 2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공장과 병영에서 공세 반대파가 의심의 여지없이 다수를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비보르그 지구 소비에트는 6월 24일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문구 하나 하나가 무거운 망치처럼 강력하다: “과거에 체결한 날강도 조약을 준수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험주의 정책에 우리는 항의한다... 그리고 이 정책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임시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멘세비키당 및 사회혁명당에 있음을 인정한다.” 2월 봉기 이후 뒤쪽으로 밀려났던 비보르그 지구는 이제 자신 있게 지도적 지위로 전진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은 비보르그 소비에트를 이미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공세의 운명 즉 참호의 병사들에게 달려있었다. 공세를 떠맡기로 되어 있던 병사 대중에게 공세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들은 억제할 수 없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최소한 병사의 일부에서 이 갈망을 공세에 대한 용의로 잠시 전환시켰다.
혁명 후 병사들은 새 권력이 즉시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전선을 지킬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볼세비키들의 선동 탓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평화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주로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과 우애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모든 쪽에서 진행되었다. 더욱이 독일 병사들이 아직도 장교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화가 오지 않자 우애 행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시 전선에는 실제로 전투가 중단되어 있었다. 이 틈을 타 독일은 군대를 대폭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러시아 병사들은 적의 참호가 텅 비고 기관총이 제거되고 대포가 수레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때 “공세를 위해 군대의 사기를 상승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병사들에게 체계적인 암시가 가해졌다: 적이 완전히 약화되어 병력이 없다; 미국이 서부전선에서 적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가 약간만 공격하면 적의 전선은 붕괴하여 평화가 올 것이다. 물론 당국은 이 주장을 단 일분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가 일단 전투를 시작하면 전쟁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임시정부의 외교도 독일군과의 우애 행위도 평화를 가져오지 않자 병사들의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 번째 계획에 매달렸다: 전쟁이 공중분해 되도록 압박을 가하자. 소비에트 대회에 출석한 전선의 어느 병사 대의원은 병사들의 정서를 정확히 이렇게 표현했다: “독일군의 전선은 엷어졌다. 대포도 없다. 우리가 전진하여 적을 타도하면 원하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독일군은 진짜 대단히 허약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 군대 역시 공세를 취할 전투력이 없었다. 그런데 붕괴되기는커녕 적은 재집결하여 병력을 집중시켰다. 몇십 킬로미터를 전진한 후 러시아 병사들은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적은 새로 강화된 진지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를 위해 공세에 동의했을 뿐 병사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이제 명백히 드러났다. 강제력, 도덕적 압박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임수 등을 결합시켜 저들은 병사들을 공세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병사들은 그만큼 더 분노하여 이에 저항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의 러시아 역사를 연구한 역사가 자욘츠코프스키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밀도와 위력에 있어서 유례없는 대포 공격을 가한 후 러시아 군대는 병력 손실이 거의 없이 적의 진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더 이상 전진을 원치 않았다. 이제 진지에서 탈주가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부대 전체가 하나씩 철수했다.” 도로쉔코는 갈리시아 지방의 임시정부 인민위원을 역임했으며 우크라이나인 지도자였다. 그는 갈리치와 칼루쉬의 두 도시를 점령한 후 일어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칼루쉬에서 주민에 대한 끔찍한 학살이 즉시 자행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과 유태인이 살해되었을 뿐 폴란드인들은 멀쩡했다. 학살 경험이 많은 어떤 자가 학살을 지도하여 이곳 우크라이나인의 문화 및 교육기관들을 겨냥했다.” “병사들 가운데 좀더 우수한 그래서 혁명에 가장 적게 오염된” 부위가 학살에 참여했다. 사실 이들은 공세를 위해 면밀히 선정된 병력이었다. 그리고 공세의 지도부인 짜르의 사령관들은 학살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바로 이들이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제 11군 소속 병사위원회들과 인민위원들은 7월 9일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7월 6일 제 11군에게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군대는 대재앙을 맞고 있다....소수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병사들은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사기는 이제 급격히 떨어져서 파멸 직전에 있다. 공세는 급격히 소진되고 있다. 군대의 대다수는 지금 점점 해체되고 있다. 지휘관의 권위나 명령에 대한 복종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설득과 주장은 힘을 잃었다. 병사들은 위협을 가하며 때때로 장교들을 살해하고 있다.”
인민위원과 병사위원회의 동의를 얻은 후 남서 전선의 사령관은 탈영병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서부 전선의 사령관 데니킨은 6월 12일 본부로 돌아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의 마음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기적에 대한 마지막 가물거리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명료히 떠올랐다.”
병사들은 전투를 원치 않았다. 적의 참호를 점령한 후 허약해진 부대를 보충하는 후방부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전진했지? 누가 전진하라고 시켰나?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라 전쟁을 끝낼 때이다.” 제 1 시베리아 군단의 사령관은 최고의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밤이 되자 병사들이 적의 공격도 받지 않은 제 1선을 무리를 지어 중대 단위로 이탈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장교들이 병사 대중의 원초적 심리를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해했다. 나는 오랫동안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어느 중대는 독일어 원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병사가 나타날 때까지 갈리치의 점령을 알리는 유인물을 적에게 던지는 것조차 거부했다. 구 지휘부와 2월의 새 지휘부를 막론하고 지휘부에 대한 병사 대중의 완전한 불신이 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병사들에 대한 1백년 동안의 모욕과 폭력이 마치 화산처럼 표면에 분출했다. 병사들은 다시 속았다고 느꼈다. 공세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가져왔다. 병사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후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애국자들은 병사들을 규율 위반자로 낙인찍은 후 이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병사들은 옳았다. 이들은 억압받고 속고 고문당한 인간의 의식으로 굴절된 채 그리고 혁명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상승했다가 다시 피투성이로 곤죽이 된 채 이제 진정한 인민의 본능을 갖게 되었다. 병사들은 옳았다. 전쟁이 연장되면 러시아 인민은 계속 희생되고 모욕당하고 재앙을 맞게 될 뿐이다. 그리고 대내외적으로 노예상태가 가중될 것이다.
입헌민주당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애국주의 언론은 러시아의 겁쟁이 및 탈영 병사들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웅적인 대대들을 지치지 않고 비교했다. 이것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이 혁명 과정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대단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제국의 놀라운 전사들은 규율을 위반하면서 군인 경력을 시작한 경우가 빈번했다. 밀류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볼세비키로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에 프랑스 육군의 원수가 된 다부는 1789년과 1790년에 중위였다. 이때 그는 에스뎅 주둔군의 “정상적인” 규율을 파괴하고 지휘부를 축출시켰다. 1790년 중반까지 프랑스 전국에는 군대 전체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었다. 벵쎄느 연대의 병사들은 장교들이 자기들과 같이 식사할 것을 강요했다. 함대는 장교들을 몰아냈다. 20개 연대들이 장교들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자행했다. 낭씨에서는 3개 연대들이 최고위 장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1790년부터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은 병사들의 잔악 행위를 지치지 않고 반복했다: “정부는 죄악을 범했다. 왜냐하면 혁명에 적대적인 장교들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라보와 로베스삐에르는 모두 구체제 장교단 전체를 해임하는데 찬성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다만 전자는 이를 통해 좀더 빨리 확고한 규율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후자는 이를 통해 반혁명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두 혁명가들은 구체제 군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프랑스 혁명과 달리 러시아 혁명은 전쟁 도중에 터졌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엥겔스가 주목한 역사적 법칙 즉 혁명이 구 군대를 해체한다는 진리가 위반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질질 끌 뿐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은 군대의 혁명적 해체를 재촉하고 격화시킬 뿐이다. 민주주의자들의 형편없는 범죄 행위인 공세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군대의 붕괴를 완성시켰을 뿐이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병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는 더 이상 흘릴 수 없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토지와 자유는 무슨 소용인가?” 계몽된 평화주의자들이 합리적 주장으로 전쟁을 철폐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무장 대중이 이성의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반대할 경우에는 전쟁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농업 문제는 혁명의 깊은 토양이었다. 러시아 사회의 가장 야만적 특징들의 뿌리는 농노제에서 유래한 낡은 토지제도, 지주의 전통 권력, 지방 행정당국/의회와 지주의 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이 야만성의 정점은 라스푸틴 일당이 전횡한 짜르 체제였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성을 지탱해온 농민은 또한 이 체제의 첫 희생자였다.
2월 혁명이 터진 후 첫 몇 주일간 농촌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의 가장 활동적인 연령층은 군대에 끌려가 전선의 참호 속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고향에 남은 노년층은 혁명이 반혁명의 보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농촌은 말이 없었으며 도시는 농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유령은 이미 3월초부터 지주의 보금자리를 떠돌고 있었다. 가장 귀족적인 즉 가장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지역들은 진짜 위험이 닥치기도 전에 도와달라고 아우성쳤다. 자유주의자는 지주의 공포를 예민하게 반영했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는 자유주의자의 정서를 반영했다. 급진주의 좌파인 수하노프는 혁명 직후 이렇게 주장한다: “앞으로 몇 주일 내에 농업문제를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나올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평화 문제나 8시간 노동제에 대한 강제적 해결 역시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어려움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간단한 방법이다. 더욱이 기존의 토지관계를 뒤흔들 경우 봄철의 파종과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지주들은 걱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지방에 전보를 보내 권고했다: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을 게을리 할 정도로 농업문제에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지역에서 지주들은 혁명에 겁을 먹고 씨뿌리기를 그만두었다. 식량위기가 이미 전국을 덮친 상황에서 텅 빈 농토는 새 주인을 찾아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농민들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주들은 새 권력에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서둘러 재산을 정리했다. 부농들은 매물로 나온 재산들을 게걸스럽게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농민이니까 강제 몰수는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계산했다. 토지 매매의 대다수는 악명 높을 정도로 자의적이었다. 일정 기준 이하의 개인 토지는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생각에 기초하여 지주들은 소유 토지를 인위적으로 작게 쪼갠 후 가짜 주인을 만들었다. 토지는 외국인, 연합국이나 중립국 시민들에게 빈번히 이전되었다. 부농의 투기와 지주의 속임수 때문에 제헌의회가 소집되면 공유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농민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정부에 요구했다: 포고령을 선포하여 토지 매매를 중단시켜라. 농민 대의원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혁명 당국에게 토지와 정의를 요구했다. 정부 장관들이 고상한 논의와 박수 끝에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복도에는 회색의 농민 대의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어느 농민 대의원은 눈물을 흘리며 토지 매매를 중단시킬 법을 선포하라고 장관에게 간청했다. 수하노프가 이 장면을 묘사한다. 흥분하고 창백한 케렌스키는 농민 대의원의 말을 짜증스럽게 가로막은 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될 것이요...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필요는 없지 않소.” 이때 옆에 있던 수하노프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한 말을 나는 그대로 옮겼다. 케렌스키의 생각은 옳았다: 그 농민은 이 유명한 인민 장관이자 지도자 양반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간청은 하면서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농민과 이 농민의 의심을 제스처로 넘기는 급진파 장관 사이의 짧은 대화는 2월 정권이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농업개혁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인 토지위원회 수립 법이 혁명 후 첫 농업장관인 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에 의해 공포되었다. 관료적인 자유주의자 교수 포스트니코프가 위원장을 맡은 중앙 토지위원회는 주로 인민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위원장보다 덜 온건하게 인식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지역 토지위원회는 도, 군, 지구 단위에서 구성되었다. 농촌에서 상당히 느리게 수립된 소비에트는 사설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나 토지위원회는 정부 기구였다. 그런데 법이 토지위원회의 기능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을수록 위원회에 가하는 농민의 압력은 더 거세었다. 또한 서열이 낮아 농민에 더 가까이 있는 토지위원회일수록 더 빨리 농민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3월말이 다가오자 혁명의 무대에 농민이 등장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처음 수도에 전해졌다. 노브고로드의 인민위원이 전보를 보내왔다: 파나시우크 상등병의 사주로 “지주들이 무조건 체포되었다.” 탐보프 도에서는 휴가 나온 병사들이 주도하여 농민들이 어느 지주의 장원을 약탈했다. 첫 소식들은 물론 과장되었다. 당연히 지주들은 이 갈등들을 과장하여 호소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앞질러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병사들이 농민운동을 지도했다. 이들은 전선과 도시 병영에서 발휘한 주도력을 농촌으로 가지고 왔다.
카르코프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4월 5일 토지소유주들의 무기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은 임박한 내전을 벌써 느끼게 했다. 리아잔 도의 스코핀스키 군에서는 소요가 발생했다. 그 이유를 인민위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접한 도의 집행위원회가 토지 임대료 납부를 강제하는 포고령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분쟁을 중지하자는 학생들의 선동은 효과가 없었다.” 1905년에 “학생들”은 농민을 동원하여 혁명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었다. 이것이 당시 사회혁명당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1917년이 된 지금 학생들은 준법과 사회평화를 설교한다. 물론 이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좀더 발전한 농민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지구 및 마을 위원회는 지주들을 체포하여 추방한 후 토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토지를 점령한 후 자의적으로 토지 임대료를 결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보낸 대의원들은 농민의 편을 들고 있다.” 동시에 개인 토지소유주들에 대항하여 공동체 농민들의 운동이 시작된다. 개인 토지소유주들은 1906년 11월 9일 스톨리핀이 제정한 법에 따라 농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의 강력한 계층이었다. “도내의 소요 때문에 씨뿌리기가 위협받고 있다.” 이미 4월에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즉시 선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제헌의회가 국가 소유의 명확한 내용을 규정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모스크바 바로 외곽의 카쉬르 군 집행위원회가 교회, 수도원, 지주의 장원들을 배상도 하지 않고 점거하도록 농민을 선동하고 있다는 불평도 들려온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을 쫓아내고 심지어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 농민총회가 끝난 후 펜자 도의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에 대한 사회혁명당의 결의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주들과 최근 체결한 계약을 어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은 새 권력기관들을 공격한다. 펜자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3월에 지구 및 군 집행위원회가 수립될 때는 지식인들이 위원회의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지식인 반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4월 중순에는 농민들이 위원회를 독점했다. 그리고 이들은 토지문제와 관련해서는 명백히 법을 무시했다.” 이웃한 카잔 도의 일부 지주들은 임시정부에 탄원한다: 농민들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거부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종자를 훔치고 많은 곳에서는 장원의 가산들을 탈취한다; 또한 우리가 소유한 숲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다; 폭력을 휘두른다 또는 죽인다는 등의 위협 때문에 도저히 못살겠다. “법원이 없다; 각자 하고싶은 대로 행동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테러를 당한다.” 카잔의 지주들은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농촌에는 임시정부의 지시 따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의 유인물은 널리 배포되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지시를 대단히 많이 내려보냈다. 3월 20일의 전보에서 르보프공은 인민위원들에게 지역의 권력기관으로 지구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이 위원회의 활동에 “지역 토지소유주들과 농촌의 모든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라고 권고했다. 국가기구 전체를 밀실에서 화해하는 방식으로 조직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인민위원들은 곧 “지식인들”이 밀려나고 있다고 울먹였다. 농민들이 군과 지구의 케렌스키들을 불신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유루소프공은 수상과 내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르보프공의 내무장관 대행이었다. 내무부는 높은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장관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무장관 대행은 4월 3일 이렇게 권고한다: 자의적인 행위는 인정될 수 없다; 특히 모든 자유 가운데에서 가장 달콤한 “토지처분권”은 옹호될 것이다. 이로부터 10일 후 르보프공도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 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법의 전권을 동원하여 모든 폭력과 강탈을 중지시켜야한다.” 이로부터 이틀 후 유루소프공은 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무법행위로부터 종마(種馬)농장을 보호할 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를 농민들에게 설명하라 등등.” 4월 18일 유루소프공은 심기가 불편하다. 지주들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이 과도한 요구들을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민위원들에게 전에 짜르의 도지사들이 누렸던 권한에 기초하여 이 무례한 놈들을 징벌하라고 지시한다. 회보, 지시, 전보 명령 등이 상부에서 소낙비처럼 계속 하부로 쏟아 내려온다. 5월 12일 르보프공은 새 전보를 보내 “전국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무법행위들을 나열한다: 자의적인 체포와 수색; 직책을 가진 관리 및 장원, 공장, 작업장 관리자 등의 해임; 재산 파괴; 약탈, 명령 불복종, 기물파괴; 관리들에 대한 폭력; 세금 강요;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 조장 등등. “이러한 행위들은 명백히 불법행위로 어떤 경우에는 무정부적 행위로 간주되어야한다....” 불법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으나 결론은 명확하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도 인민위원은 군청에 명령을 내렸으며 군청은 지구 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 국가기구들은 모두 무기력 증세를 드러냈다.
농촌 지역에 가까이 주둔한 군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농민의 저항에 동조했다. 종종 군대가 투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 운동은 지역과 투쟁의 격렬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지주가 없는 시베리아에서 농민들은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장악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성직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스몰렌스크 도의 경우 전선에서 바로 도착한 병사들의 영향으로 신부와 수도승들이 체포되었다. 농민들이 비교할 수 없이 더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것이 두려워 지역 단체들은 원하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초 사마라 도의 어느 군 집행위원회는 오를로프-다비도프 백작의 재산을 농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공 이사를 임명했다. 케렌스키의 약속과는 달리 토지 매매를 중지시키는 법이 제정되지 않자 농민들은 토지 측량을 막아 나름의 방식으로 토지 매매를 중단시켰다. 지주의 무기 심지어 사냥용 무기마저 몰수하는 행위가 더욱 확산되었다. 민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농민총회의 결의사항을 법으로 간주한다.” 그렇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농민총회는 지역에서 유일한 진짜 권력이었다. 행동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말로만 떠드는 사회혁명당 지식인들과 이렇게 너무 달랐다.
5월말이 다가오자 멀리 아시아의 대초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키르기즈 초원이 지주들에 대항해 들고 일어섰다. 과거에 짜르는 이 지역의 가장 좋은 토지만 농민에게 빼앗아 하수인들에게 주었다. 이제 농민들은 빼앗긴 토지의 반환을 요구했다. 아크몰린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 생각이 초원 지역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키르기즈 초원의 정반대 쪽에 위치한 리플란드 도에서는 어느 군 집행위원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스타알 폰 홀슈타인 자작의 재산에 대한 약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별로 대단하지 않으며 자작이 사회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조사단은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다: 자작을 자작 부인과 함께 뻬쩨르부르그에 보내 임시정부의 재량에 맡기자. 이 갈등은 지역정부와 중앙정부, 하부 사회혁명당원들과 상층 사회혁명당원들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갈등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5월 27일에 제출된 에카테리노슬라프 도의 파블로그라드 군 보고서는 법과 질서를 거의 목가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토지위원회는 농민에게 모든 오해들을 설명하여 “모든 과격 행위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목가는 몇 주일 밖에 가지 못할 것이다. 5월말 코스트로마의 어느 수도원 원장은 지독하게 불평했다: 농민들은 그가 소유한 뿔 달린 소의 3분의 1을 징발해갔다. 이 존엄한 수도승은 좀더 온유했어야 했다: 그는 곧 나머지 소들과도 작별하게 될 것이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촌 공동체로 귀환을 거부한 개인 토지소유주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토지 혁명인 “검은 분할”의 시간이 다가오자 농민들은 일치 단결하기를 원했다. 내적인 분열은 장애물이 될 지 모른다. 공동체는 한 몸으로 나서야한다. 따라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투쟁은 개별 농민 즉 토지 개인주의자에 대한 폭력을 동반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사모일로프 병사는 토지세 납부 거부를 사주했다는 죄로 페름 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다. 카르코프 군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종교 행진 도중 그리첸코 농민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보는 앞에서 성 니콜라이 성상을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항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해군 장교이자 지주인 어느 이름 없는 인물은 [백위군의 노트]라는 자신의 글에서 혁명 후 첫 몇 개월간 일어난 농촌의 변화를 흥미 있게 묘사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처음에는 부르주아들이 직책에 선출되었다. 모두들 질서 유지에만 골몰했다.” 물론 농민들은 토지를 요구했으나 첫 두 세 달 동안에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강탈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토지를 갖고 싶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해군 중위인 회고록 필자는 이 안심시키는 말에서 “숨겨진 위협”을 감지했다. 초기에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농민들은 소위 지식인들을 “곧 멸시하기 시작했다.” 이 백위군의 말에 의하면 5월이나 6월까지 농민들은 초조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급격히 태도가 달라졌다. 임시 조치에 항의하면서 농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요구를 실현시켰다.” 다른 말로 하면 농민들은 2월 혁명에게 약 3개월간의 사회혁명당 어음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당원인 치네노프 병사는 혁명 후 모스크바에서 고향 오렐을 두 번 방문했다. 5월에 사회혁명당은 지구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수 지역에서 농민들은 아직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고 있었다. 치네노프는 병사, 농업노동자, 빈농으로 구성된 볼세비키 핵심 조직을 수립했다. 이 조직은 임대료 납부 거부와 무토지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를 선동했다. 이들은 즉시 지주의 초지를 등록시켜 마을에 분배한 후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었다. “지구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은 우리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고함을 질렀으나 자기 몫의 건초는 악착같이 챙겼다.” 마을 대표들이 책임이 두려워 직책을 포기하자 농민들은 좀더 단호한 분자들을 새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볼세비키당원은 아니었다. 직접 압력을 통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을 분열시켜 혁명 분자들을 관료 및 출세주의 분자들로부터 분리시켰다. 장원의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든 후 농민들은 가을 파종을 위해 휴경지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 조직은 장원의 곡물창고를 관리하여 남는 곡물을 굶주리는 수도로 보냈다. 이 조직의 결의문은 농민의 정서와 일치했기 때문에 시행에 옮겨졌다. 치네노프는 고향에 볼세비키당의 선전물들을 가지고 왔다. 농민들은 선전물들의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역의 지식인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내가 독일의 금을 많이 가지고 와서 농민들을 매수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같은 현상은 규모에 관계없이 일어났다. 농촌 지구에도 밀류코프, 케렌스키 그리고...레닌이 있었다.
스몰렌스크 도에서는 농민 대의원 대회가 끝난 후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대로 대회는 인민에게 토지가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지도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이 결정을 진짜 전부 삼켰다. 이때부터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수는 계속 증가했다. 이 지역의 어느 당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대회에서 사회혁명당을 지지하여 분파에 가담한 자들은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거나 이와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도청 소재지에는 사회혁명당이 영향을 미치는 두개 연대가 주둔해 있었다. 지구 토지위원회는 지주의 토지를 쟁기질하고 풀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 인민위원인 사회혁명당원 에피모프는 이에 반대하는 명령을 위협하듯이 내렸다. 그러자 마을의 농민들은 깜짝 놀랐다. 농민들이 곧 정부이며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차지하여 노동의 대가를 누릴 수 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옐린 군에서만 17개 지구 토지위원회 가운데 16개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는 이유로 이후 몇 달간 재판정에 선다. 따라서 나름의 방식으로 인민주의 지식인들과 인민 사이의 사랑 행각은 파멸을 향해 다가갔다. 군 전체에서 볼세비키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어 사회혁명당원들을 몰아내거나 분열시켰다.
5월초에 뻬쩨르부르그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대의원들은 대체로 농촌의 상층 부위였으며 우연히 대의원 자격을 얻은 경우도 많았다. 이미 말했듯이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대회는 사건의 진행과 대중의 정치적 변화에 계속 뒤 처졌다. 그렇다면 사방으로 널리 흩어진 농민들을 대표하는 조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농촌의 실제 정서에 더욱 뒤 처졌다. 주로 상업적 협동조합이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농민과 연결된 극우 인민주의 지식인 대의원들이 한편에 존재했다. 또 한편에는 농촌의 유복한 상층인 부농, 상점주인, 협동조합 관리자 등이 진짜 “인민”을 대표했다. 사회혁명당은 대회를 압도했다. 더욱이 이 정당의 극우파 인물들이 모든 것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대의원들 일부의 토지에 대한 탐욕과 “극우” 정치노선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 문제에 대해서 이 대회는 대단히 급진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조금의 배상도 없이 모든 토지를 국가소유로 전환시켜 평등하게 경작한다.” 물론 부농은 평등을 지주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였지 농업노동자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허구적인 사회주의와 농민의 농업 민주주의 사이의 사소한 오해는 나중에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농민대회에 부활절 달걀을 선사하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래서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마련하느라 헛되이 부산을 떨었다.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어느 정도 자칭 사회혁명당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농민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토지 매매는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지시를 각 지역에 하달했다. 이에 대해 농민 대의원들이 잡음을 일으켰으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르보프공의 임시정부는 지주의 토지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임시정부에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대회 지도자들 역시 자기들의 반동 노선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욕구 사이의 모순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레닌은 5월 20일 농민대회에서 연설했다. 마치 레닌이 악어 구덩이에 빠진 것 같다고 수하노프는 말한다. “그러나 덩치가 조그마한 농민들은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을 가능성이 컸으나 이것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볼세비키당에 대단히 적대적인 병사 부문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처럼 수하노프도 토지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술을 무정부주의로 채색하려고 한다. 이것은 르보프공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주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언제나 무정부주의로 바라보았다. 이 논리에 의하면 혁명은 대체로 무정부주의와 같다. 그러나 레닌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은 그의 반대자들이 보기보다 훨씬 심오했다. 농업혁명 그리고 주로 지주의 토지 몰수를 수행하는 기관은 농민 대의원 소비에트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토지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직속 기관이 되어야했다. 농민 소비에트는 미래 국가권력의 기관 더욱이 대단히 집중된 권력기관인 혁명적 독재의 기관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이것은 정부를 포기하는 이론과 실천인 무정부주의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4월 28일 레닌은 이렇게 말했었다: “가능한 한 가장 조직된 모습으로 토지가 농민에게 즉각 이전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무정부적인 토지 점거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주도력이다; 법은 혁명 투쟁의 결과일 뿐이다. 법이 제정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면서 혁명 열기를 식히면 법도 토지도 얻을 수 없다.” 레닌의 이 단순한 말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혁명들의 주장이었다.
한달 간의 회의를 마친 후 농민대회는 상설기구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여기에는 농촌의 강인한 소부르주아 그리고 교수 또는 장사꾼 유형의 인민주의자들 200명이 모였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부에는 얼굴마담들인 브레쉬코프스카야, 차이코프스키, 베라 피그너, 케렌스키 등이 자리잡았다. 의장은 사회혁명당의 아브크센티에프였다. 그는 지방의 유지들이 모이는 연회에나 어울릴 인물이었지 곧 다가올 농민전쟁에 어울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이때 이후 더 중요한 문제들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와 농민 집행위원회의 합동회의에서 논의되었다. 합동회의는 우익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들은 입헌민주당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노동자들을 압박하거나 볼세비키들을 탄압하거나 크론슈타트 독립공화국을 채찍과 전갈로 위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농민 집행위원회의 2백 개 손 아니 주먹이 장벽을 이루며 치켜 올라갈 것이다. 이들은 밀류코프와 똑같이 볼세비키들을 “끝장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의 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농민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 및 임시정부와 적대하게 된다. 농민 대회가 해산하기도 전에 불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회의 결의문들이 지역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농민들이 지주들의 토지와 장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완고한 농민의 머리 속에 말과 행동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했다.
공포에 질린 사회혁명당은 후퇴의 호각을 불었다. 6월초에 열린 모스크바 당대회에서 이들은 토지의 자의적 점거를 엄중히 비난했다: 제헌의회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의문은 농민운동을 조금도 멈추거나 약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당내에는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아직 공개적으로 탈당을 결심하지 못한 사회혁명당 좌파는 농민들이 법을 우회하거나 최소한 나름대로 법을 해석하도록 도와주었다.
농민운동이 특히 격렬히 달아오른 카잔 도에서 사회혁명당 좌파는 다른 곳보다 더 빨리 결집되었다. 이들의 지도자 칼레가에프는 이후 볼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소비에트 연립정부에서 농업 인민위원이 되었다. 5월 중순부터 카잔 도에서는 토지가 체계적으로 지구 위원회로 이전되었다. 이 조치는 스파스크 군에서 가장 대담하게 취해졌는데 이곳에는 볼세비키당원 한 명이 농민 조직을 지도했다. 크론슈타트에서 온 볼세비키들이 농민들을 선동한다고 도 행정당국은 중앙에 불평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신앙심이 돈독한 수녀 타마라가 “이에 반대한 죄로” 체포되었다.
보레네쥬 도의 인민위원은 6월 2일 이렇게 보고했다: “특히 농업문제와 관련해 도내에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건수가 하루가 지날수록 늘고 있다.” 펜자 도에서도 토지 점거는 더욱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칼루가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수도원 소유 초지의 절반을 몰수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 불평하자 군 위원회는 이렇게 결의했다: 초지를 전부 몰수한다. 그런데 이렇게 상부 기관이 하부 기관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는 자주 있지 않았다. 펜자 도에서 어느 수녀원장은 수녀원 토지를 몰수한다고 울고 있다: “지역 당국은 힘이 없다.”
비아트카 도에서는 농민들이 이후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 가문이 될 스코로파드스키 가문의 재산을 폐쇄했다. 그리고 “토지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가문 소유의 숲에 들어가지 말 것과 재산에서 나온 수입은 공공기금으로 쓰일 것을 결의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토지위원회는 토지 임대료를 5배 내지 6배 인하했을 뿐 아니라 토지문제가 제헌의회에서 해결될 때까지 지주가 아니라 위원회가 임대료를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농민의 진지한 방식이었으며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토지문제를 연기하자는 변호사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사라토프 도에서는 어제만 해도 지주들의 벌채를 금지한 농민들이 스스로 벌채에 나섰다. 특히 지주가 거의 없는 곳에서 농민들은 더욱 빈번하게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했다. 리플란드에서는 레트인 농업노동자들이 레트인 대대 병사들과 함께 자작들의 토지를 조직적으로 몰수했다.
비테프스크 도의 목재 왕들은 토지위원회의 조치들이 목재산업을 고사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이 전선의 목재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막고 있다고 큰 소리로 항의한다. 이들 못지 않게 나라를 생각하는 폴타바 도의 지주들은 농민의 소요 때문에 군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고 걱정한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말 사육 협회는 농민의 토지 몰수가 조국의 종마들에게 거대한 불행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은 이 교회 주교들을 “백치들과 악당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 카잔 도의 농민들이 수도승들의 토지와 소 뿐 아니라 미사용 빵을 만들 밀가루도 가지고 간다고 정부에 불평한다. 수도에서 두발자국 떨어져 있는 뻬쩨르부르그 도에서는 농민들이 임대 농민들을 쫓아내고 토지를 스스로 관리하기 시작한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내무장관 대행 유루소프공은 6월 2일 사방에 전보를 보낸다: “내가 그렇게 여러 차례 요구했는데... 다시 지시한다.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그러나 이 공작은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것인지는 까먹고 있다.
러시아 전국에서는 봉건제와 농노제의 깊은 뿌리들이 뽑히는 거대한 과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제헌의회 관련 자료들을 집무실에 모으고 있었다. 그는 가장 정확한 농업 관계 자료와 가능한 모든 종류의 통계에 기초하여 개혁을 실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계속 촉구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도표들을 작성하기 훨씬 전에 지주들은 이 “농촌장관”을 쫓아내 버렸다.
임시정부가 보관했던 문서들에 기초하여 소장 연구자들은 이 당시 농민운동의 상황을 종합했다. 3월에는 34개 군만이 나름대로 힘있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4월에는 174개 군, 5월에는 236개 군, 6월에는 280개 군, 7월에는 325개 군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운동의 실제 성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군 내부의 운동은 더욱 완강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3월부터 7월까지의 첫 시기에 농민의 압도적 다수는 지주에 대한 직접 폭력을 여전히 자제하고 있었으며 공공연히 토지를 몰수하지도 않았다. 현재 소련의 농업 인민위원 야코블레프는 위에서 소개한 연구를 주도했었다. 그는 농민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적인 전술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틀렸다. 농민들은 도시, 행정당국, 문명 사회를 계속 의심해왔다. 더욱이 농민은 르보프공의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첫 시기에 농민들이 공개적으로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합법적 또는 반(半)합법적 압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자신의 투쟁 역량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정부를 믿지 못했다. 농민들은 상황을 파악하면서 적의 저항을 측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지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는 강탈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을 좋게 해결하고 싶다.” 이들은 초지를 몰수하지 않고 다만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뿐이다. 또한 지주가 토지를 빌려주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임대료는 스스로 정하고 있다. 아니면 토지를 “구입”하되 가격을 스스로 정할 뿐이다. 지주나 자유주의 변호사들을 갸우뚱하게 만든 이 모든 합법적 외양은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때문이었다. 농민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지주를 잘 대해도 토지를 넘겨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폭력은 위험하다. 수를 써보자.” 농민은 지주의 동의하에 토지를 넘겨받는 것을 당연히 선호할 것이다.
야코블레프는 주장한다: “몇 개월 내내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대단히 ‘평화적으로’ 투쟁했다. 이 역사상 유례없는 행위는 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정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없다고 선언된 이 평화적 투쟁은 실제로는 모든 농민전쟁의 초기 단계에 등장하는 전형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강제된 방식이다. 교회법 이든 세속법 이든 법으로 초기의 반란 행위를 위장하려는 시도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모든 혁명계급의 투쟁방식이었다. 충분한 힘과 자신감을 축적하여 구 사회와 결별하기 전까지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계급보다 특히 농민에게 더 그랬다. 왜냐하면 최상의 경우에도 농민은 반정도 몽매한 상태에서 전진하면서 도시의 친구들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농민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다. 농민운동의 첫 단계에서 도시의 농민 동맹세력은 자유주의 및 급진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들이다. 농민의 요구 일부를 주장하면서도 이 동맹세력은 부르주아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한다. 따라서 농민 봉기를 부르주아 법의 틀 안에 가두려고 최선을 다한다.
혁명이 터지기 오래 전부터 다른 요인들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귀족 계급 내부에서 화해를 주창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느 누구보다 농민의 영혼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그는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주창했는데 이 철학은 농민혁명의 첫 단계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사고이다. “강탈하지 않고 상호간의 동의를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그날을 톨스토이는 꿈꾸었다. 그는 정화된 기독교의 형태로 이 전술을 종교화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톨스토이와 똑같은 전술을 인도에서 실천하고 있다. 다만 그는 톨스토이보다 좀더 실리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의 시대 아니 이보다 더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야코블레프가 주장한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들이 온갖 종교적, 민족적, 철학적, 정치적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존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농민 봉기의 특수성은 부르주아 합법성의 하수인들이 자칭 사회주의자 또한 자칭 혁명가였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성격과 리듬을 결정한 것은 이들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사회혁명당이 자신을 위해 지주와 화해할 적절한 정치적 수단을 확보해 줄 때까지만 이 정당을 따라갔다. 동시에 이 정당은 농민의 법적 외피가 됨으로써 농민의 이익에 기여했다. 결국 이 정당은 법무장관이었다가 나중에 전쟁장관이 된 케렌스키 그리고 농업장관 체르노프의 정당이었다. 지주와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때문에 농민에게 필요한 포고령들이 지연되었다고 지구 및 군 토지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의 “우리 당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농민에게 확신시켰다. 물론 이 변명에 대해 농민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는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에게 그 소중한 “신뢰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은 채 투쟁을 통해 이들을 밑에서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열심히 투쟁하여 너무 철저히 도움을 준 나머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자기 관절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볼세비키당은 농민의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당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농민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다른 정당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실망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 정당은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문제에 있어서도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바로 여기에 이 정당의 강점이 있었다.
사회학의 일반 이론을 통해서는 농민이 지주에 대항해 투쟁할 역량이 있는 지의 여부를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사이에 농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경향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부농 계층이 농촌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또한 부농이 운영하는 농업 협동조합은 크게 성장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다음의 질문에 대해 확신 있는 대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농민과 지주/귀족 사이의 계층적 갈등과 농민 내부의 계급 갈등 가운데 어느 것이 혁명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해외에서 귀국한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4월 14일 이렇게 말했다: “농민운동은 예언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다....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한다.” 이것은 우연히 던진 생각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레닌은 수많은 경우에 이 말을 끈질기게 반복했다. 4월 24일의 당 협의회에서 그는 농민을 과소평가 한다고 자신을 비난했던 “고참 볼세비키들”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 정당이 농민과 동일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희망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농민은 어느 정도 의식면에서는 자본가 편에 서 있다.” 스탈린주의 아류들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이해가 영원히 조화를 이룬다고 레닌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인용한 레닌의 말은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계층으로서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레닌은 4월에 보다 불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그는 지주, 부르주아 계급, 광범위한 부위의 농민이 안정적인 블록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 지금 애쓰는 것은 우리를 밀류코프의 손아귀에 갖다 바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중력의 중심을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로 이전해야한다.”
그러나 그의 예상보다 더 유리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다. 농민운동은 예언에서 사실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잠시 그러나 엄청난 위력으로 자본주의적 갈등보다 농민의 계층적 유대가 월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는 오직 몇 개 지역 특히 주로 발트해의 몇 개 도에서만 의미 있는 세력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토지위원회는 농민 전체의 투쟁기구가 되었다. 이들은 묵직한 압박을 가해 토지위원회를 화해의 밀실에서 농업혁명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커다란 하나의 몸체로 보면 농민은 역사상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사실은 다시 한번 러시아 자본주의의 허약성과 강인성을 증언한다. 부르주아 경제는 아직까지 중세 농노제의 토지관계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대단히 발전했기 때문에 농촌의 모든 계층들은 토지소유의 낡은 형태들을 더 이상 참고 인정할 수 없었다. 우선 지주와 농민의 토지는 서로 엉켜있어서 대단히 의식적으로 지주의 권리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덫에 가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토지는 절개지 형태로 어지럽게 소유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들어 토지 공동체와 개별 토지소유주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적지근한 입법 조치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 결과 토지관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욱이 농민은 이것을 농업 이론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다. 수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삶의 경험은 이들 모두가 같은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토지에 대한 상속권과 기타 특권을 철폐해야한다; 토지의 모든 경계를 없애야한다; 역사적 관습을 청산하고 일하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야한다. 이것이 바로 농민의 격언 “토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신의 것이다”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 농민은 사회혁명당의 토지 사회화 강령을 해석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사회주의적 내용이 전무했다. 역사상 가장 대담한 농업혁명도 그 자체로는 부르주아 경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농민 각자에게 “토지소유권”을 보장할 사회화는 무제한적 시장관계 때문에 완전한 공상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이 공상을 자유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반면 사회혁명당 이론이 공상으로 만든 농업혁명에서 볼세비키들은 진보적 민주주의 경향을 찾아내었다. 이들은 농민이 노동계급과 동맹함으로써 농업혁명을 완수하고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을 도와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이렇게 러시아 농민운동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여에 속한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역사 발전의 연구자요 사회학자로서 (즉 고지에서 사건들의 진행을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최근 유럽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보다 푸가초프, 라진, 볼로트니코프 등 17, 18세기의 러시아 역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를 언급한 것은 일단 논외로 하자. 이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끌어다 놓은 것으로 지금의 논의와 전혀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주의 사회학자로서 주장한 바에 일말의 진실이 있더라도 이 진실은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오직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 역사무대에서 이들의 뒤늦은 등장, 이들의 정치적 무의미성에 대한 비판이 될 뿐이다. 과거의 거대한 농민운동들이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볼세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운동들을 도시가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화는 성취되지 못했다! 1861년의 소위 농민 해방이 공동체 토지의 도둑질, 국가에 대한 농민의 노예화, 신분제도의 완벽한 보존 등을 결과한 것도 볼세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한 가지는 명확하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시도조차 되지 못한 거대한 사회변화를 볼세비키당이 20세기 첫 25년에 수행해야했다. 이 거대한 부르주아 혁명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구 지배계급들과 구 시대라는 역사적 쓰레기를 우선 치워야 했다. 최소한 이 예비 임무를 볼세비키당은 대단히 성실하게 성취했다. 이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밀류코프도 지금은 이것을 감히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체제는 출범 4개월 째에 자기 모순 때문에 벌써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6월은 전국 소비에트 대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러시아군의 공세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공세의 시작과 동시에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세비키당에 반대하는 화해주의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화해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볼세비키당의 시위가 되어버렸다. 대중은 더욱 분노하면서 2주일 후 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 없이 대중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이 시위는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역사는 “7월 시기”라는 이름을 붙여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이 사건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정 중앙 시점에 발생했다. 7월의 이 반(半)봉기는 2월 혁명 체제를 마감했으며 10월 혁명을 준비하는 총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 저서의 제 1권은 7월 시기의 문턱에서 끝난다. 뻬쩨르부르그의 6월 시위를 둘러싼 사건들로 넘어가기 전에 대중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련의 과정들을 여기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자유주의자는 5월초에 이렇게 단언했다: 정부가 좌로 움직일수록 국민 즉 “유산계급들”은 우로 움직인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응수했다: “노동자, 빈농, 극빈농으로 이루어진 ‘국민’은 체르노프와 체레텔리 같은 화해주의자들보다는 1000배나 좌에 그리고 우리보다는 100배나 좌에 있다. 조금만 더 지내보면 이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볼세비키당보다 “100배”나 더 좌에 있다고 추정했다. 이 생각은 근거가 좀 빈약한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여전히 화해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볼세비키당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현실을 더 깊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대중은 자신의 이익, 증오, 희망을 표출할 적절한 방식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화해주의자들의 정책은 자기 표출 방식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대중은 체르노프와 체레텔리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좌에 있었다. 다만 자신의 급진적 지향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볼세비키당보다 좌에 있다는 레닌의 생각은 옳았다. 왜냐하면 볼세비키당의 압도적 다수는 각성하고 있는 인민의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혁명적 열정의 거대함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질질 끌고 있는 전쟁, 경제 파탄, 정부의 악의에 찬 복지부동 등이 대중의 분노를 키우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광활한 대평원은 철도 덕분에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철도체계에 가장 큰 타격을 가했다. 수송체계는 꾸준히 붕괴하고 있었다. 일부 철도노선들에서는 운행 불능 기관차가 50%에 달했다. 철도본부의 박식한 엔지니어들은 6개월 내에 철도수송이 완전히 마비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들을 읽고 있었다. 이 예상은 의식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송체계는 위협적인 수위에 다다랐다. 이 결과 철도는 묶이고 상품 교환은 극심히 교란되었으며 안 그래도 높은 생활비는 더 올라갔다.
도시의 식량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43개 도에서 농민운동이 중심을 잡으면서 군대와 도시에 대한 곡물 공급은 위험할 정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좀더 비옥한 지역에서는 수 십억 푸드(역자 주: 소련에서 사용된 무게 단위로 16.38 kg에 해당된다.)의 잉여 곡물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고정된 곡물 가격에 저항했다. 이들은 오른 물가에 맞추어 곡물 가격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곡물 구입은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수송의 붕괴로 준비된 곡물을 인구 중심부로 수송하기가 어려웠다. 1916년 가을 이후로 전선에 도착하는 식량 열차의 수는 평균해서 예상수치의 절반에 불과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그리고 기타 공업 중심지들은 필요한 식량의 10% 밖에 공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비축 식량은 거의 없었다. 도시 대중의 생활수준은 영양 실조와 기아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연립정부는 수립되자마자 하얀 빵의 제조를 금지하는 민주적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야 수도에서 “프랑스 롤빵”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버터는 충분치 못했다. 6월에는 전국에 명확한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설탕 소비가 감소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교란된 시장질서는 국가 통제로 대체되지 않았다. 이미 선진 자본주의 정부들은 국가 통제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은 이를 통해서만 4년간의 전쟁을 견딜 수 있었다.
경제 파탄의 위협적인 징후들은 모든 곳에서 나타났다. 수송체계의 붕괴 이외에도 장비의 마모, 원자재와 소모품의 부족, 인원의 교체, 열악한 금융, 만연한 불확실성 등에 의해 공장의 생산성이 하락했다. 주요 공장들은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계속 가동되고 있었다. 주문은 2년이나 3년을 앞질러 분배되었다. 한편 노동자들은 전쟁이 계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문들은 전쟁 이윤의 놀라운 수치들을 공개하고 있었다. 생활비는 오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공장의 기술 및 관리 인력들은 단체를 조직하여 자기들의 요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분야도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공장의 생산체계는 해체되고 있었다. 연결 부분들도 모두 약화되고 있었다. 전쟁이 승리할 것이며 국가경제가 튼튼해질 것이라는 전망은 흐렸다. 그리고 재산 소유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이윤은 하락하고 있었으며 투자 위험은 증대되었다. 혁명이 가져온 부정적 상황 때문에 자본가들은 생산 의욕을 상실했다. 전체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 패배주의 노선을 수용하고 있었다. 경제 마비로 인한 일시적인 손실과 적자는 “문화”의 토대를 위협하는 혁명을 저지하는데 지출할 경상비용이었다. 동시에 고마운 언론은 매일 이렇게 비방했다: 노동자들이 악의적으로 태업에 돌입했다; 이들이 원자재를 훔치고 있다; 이들이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불필요하게 연료를 태우고있다. 이 비방의 허구성은 모든 한계를 초월했다. 연립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의 신문이 이 비방을 주도했기 때문에 당연히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에 대해 분노했다.
1905년 혁명에서 정부가 적극 지지한 잘 조직된 공장폐쇄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투쟁 뿐 아니라 혁명도 패배시켰다. 이것은 왕정의 유지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역사적 경험을 자본가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상공업 총연합회라고 그럴듯하게 이름지어진 독점 자본의 투쟁기관에서 공장폐쇄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의 재계 지도자 아우어바흐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공장폐쇄 전술이 거부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전술은 군대의 후방에서 뒤통수를 치는 격이 될 것 같았다...정부의 지지 없이 이 전술이 운용되면 대다수의 국민이 이것을 음흉한 수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불행하게도 “진짜”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다; 소비에트의 합리적인 지도자들은 대중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거의 모든 공장들은 바로 옆에 우호적인 연대나 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장폐쇄는 “국가적 차원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자본가들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장폐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가 아니라 은근히 이 전술을 구사할 생각이었다. 아우어바흐의 외교적 표현에 의하면 자본가들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공장들은 하나씩 서서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 자체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시위하는 식으로 공장을 폐쇄시킬 경우 “엄청난 책임”을 져야하므로 이 자본가 연합회는 회원들에게 하나씩 문을 닫아 품위 있는 핑계를 마련하라고 권유했다.
은근한 공장폐쇄 계획은 놀랍게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과거 위테 내각의 장관이었으며 자본의 지도자인 입헌민주당의 쿠틀러는 산업의 붕괴에 대한 의미심장한 보고서들을 읽었다. 그리고 3년간의 전쟁이 아니라 3개월간의 혁명이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지는 참을성을 상실하고 이렇게 예언했다: “2, 3 주일에 걸쳐 작업장과 공장들은 하나씩 문을 닫을 것이다.” 여기서는 위협이 예언으로 위장되었다. 엔지니어, 교수, 기자들은 일반 신문과 전문지에 캠페인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 구국의 기본 조건이라고 이 캠페인은 선언했다. 자본가 장관 코노발로프는 사임하기 직전인 5월 17일에 시위하듯 이렇게 선언했다: “흐리멍덩한 머리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수천 개의 공장들이 문을 닫는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6월 중순에 어느 상공인 총회는 “혁명을 가져오는 제도와 급진적으로 결별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한다. 이미 장군들은 이렇게 요구했었다: “혁명을 중지시켜라.”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요구를 좀더 간결하게 제시한다: “볼세비키당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들이 악의 근원이다. 확고한 철권통치만이 러시아를 구할 수 있다”
정치적 준비작업을 마친 자본가들은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3, 4월에 걸쳐 9천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129개의 소규모 공장들이 문을 닫는다. 5월에는 비슷한 규모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108개의 공장, 6월에는 3만8천명을 고용하는 125개의 공장이 문을 닫았다. 7월에는 206개의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4만8천명의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제 공장폐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뻬쩨르부르그 섬유공장에 이어 모스크바 섬유공장이 문을 닫더니 이것이 각 도로 확산되었다. 연료, 원자재, 주변 기기, 신용대부가 부족해서 공장을 폐쇄한다고 제조업자들은 이유를 댔다. 그러자 이때 노동자들이 수립한 공장위원회가 개입했다. 공장위원회는 수없이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입증했다: 노동자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또 정부의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자본가들이 악의적으로 산업을 파괴하고 있다. 자국 대사관을 통해 행동하는 외국 자본가들은 특히 뻔뻔스러웠다. 이들의 공장폐쇄 기도는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공장위원회가 이것을 폭로한 후 공장은 다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모순이 하나 하나 드러났다. 혁명으로 인해 가장 주요한 모순 즉 산업의 사회적 성격과 도구와 장비의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 이제 명백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전체 인민의 생존이 걸린 공장을 마치 담배 갑을 닫듯이 제멋대로 닫았다.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유 대부를 거부한 은행들은 대자본에 대한 혁명의 재무 간섭에 대해 전투적으로 저항했다. 재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행가들은 이렇게 “예언했다”: 급진적으로 금융이 개혁될 경우 자본은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며 지폐들은 금고로 들어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은행가 애국자들은 산업의 폐쇄에 이어 금융도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정부는 서둘러 이렇게 인정했다: 목숨 밖에 남은 것이 없는 크론슈타트의 늙은 수병이 아니라 전쟁과 혁명으로 자본을 잃을 위험에 처한 존경받는 인물들이 태업을 조직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입각한 이후 국가경제에 대한 책임이 소비에트 다수파에 있다고 대중은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을 집행위원회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집행위원회 경제부는 광범위한 국가통제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경제파탄의 위협 때문에 아주 온건한 경제전문가들의 제안들이 훨씬 급진적으로 해석되었다. 집행위원회의 계획은 이러했다: “다수의 산업 분야에서는 국가의 상업독점을 시행할 때가 무르익었다(빵, 고기, 소금, 가죽). 다른 분야에서는 국가 독점체를 통제할 조직을 수립할 조건이 무르익었다(석탄, 석유, 금속, 설탕, 종이).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원자재와 완제품 유통 그리고 가격 확정 등과 관련하여 국가 통제가 요구된다....이것과 동시에 모든 신용기관들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5월 16일 집행위원회의 당황한 지도부는 거의 논의도 없이 경제전문가들의 제안들을 채택했다. 그리고 정부에 독특한 경고를 보내 이것들을 지지했다: “국가의 산업과 노동을 계획을 통해 조직할 임무”를 정부가 맡아야한다; 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제는 무너졌으며 임시정부를 연립정부로 다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자신들에게 겁을 주고 있었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집행위원회의 강령은 통제 계획, 독점기업의 국유화, 투기에 대한 투쟁, 노동에 대한 책임 등에 있어서 아주 훌륭하다....이 ‘무서운’ 볼세비키 강령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제파탄의 무시무시한 위협에 직면하여 다른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이 멋진 강령을 시행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임시정부가 이 강령을 시행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즉시 나왔다. 집행위원회가 이 경제강령을 채택한 지 하루만에 상공장관 코노발로프는 사임을 발표한 후 꽝 소리나게 문을 닫으며 정부청사를 나왔다. 엔지니어 출신의 팔친스키는 그에 못지 않게 충성심이 강했다. 이제 그가 대자본의 더욱 열정적인 대변인이 되어 코노발로프를 대신했다. 한편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유주의 동료들에게 집행위원회의 강령을 진지하게 제의할 생각도 못했다. 기억하고 있듯이 체르노프는 토지 매매 금지법을 정부에서 통과시키려 했으나 헛수고만 했었다. 정권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정부는 수도의 공장과 작업장들을 시골 한가운데로 옮기는 계획을 들고 나왔다. 이 계획은 독일이 수도를 점령할 위험이 있다는 군사적 고려와 수도가 연료와 원자재의 원산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경제적 고려에서 나왔다. 이 계획은 수개월과 수년에 걸쳐 뻬쩨르부르그의 산업을 청산시킬 것이다. 이 계획은 노동계급의 전위를 전국에 산재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제출되었다. 이 계획과 함께 군 수뇌부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수도에서 혁명적 군부대들을 옮길 계획을 들고 나왔다.
팔친스키는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에게 모든 힘을 다해 공장 이전의 장점들을 확신시키려했다. 노동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면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산업의 통제와 마찬가지로 공장 이전 계획도 전혀 진척이 없었다. 경제 파탄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물가는 올라가고 있었으며 공장은 계속 폐쇄되면서 실업을 증대시켰다. 정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정부는 물길에 따라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물길은 볼세비키당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물길은 볼세비키당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노동계급은 혁명의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혁명은 노동계급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혁명이 크게 필요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2월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가장 전투적인 진지들은 모두 볼세비키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혁명이 승리한 직후 이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대신 화해주의 정당들이 정치 무대 앞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권력을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애국주의는 이 동맹의 암호였다. 애국주의 공세는 너무 강력하여 볼세비키당 지도자 절반 이상은 여기에 굴복했다. 레닌의 귀국과 함께 당의 노선은 급변했으며 이후 새로운 노선의 영향이 급상승했다. 4월 무장시위에서 노동자와 병사의 선두 대오는 화해주의자들의 사슬에서 이미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첫 시도 후 이들은 후퇴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여전히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이 전쟁에 지친 농민군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내용의 글들이 10월 혁명 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다. 정반대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이 2월 혁명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농민군이 인민의 생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혁명이 평화시에 터졌다면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은 처음부터 훨씬 두드러졌을 것이다. 전쟁이 없었다면 혁명은 더 나중에 승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평화시 혁명의 희생자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대신 화해주의 및 애국주의 정서가 지배할 구석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것은 농민군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라 사회의 계급구조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예측은 완전히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계급 역관계는 전쟁을 통해 굴절되었으며 군대 즉 탈계급화 한 무장 농민조직의 압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변화했다. 소부르주아 화해주의 정책의 위력을 대단히 강화시키면서 8개월간의 실험을 통해 나라와 혁명을 약화시킨 것은 바로 전쟁으로 조성된 인위적인 사회 구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의 뿌리는 농민군에 대한 언급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성격, 구성, 정치적 수준에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일시적으로 대세를 장악한 보충적 원인을 찾아야한다. 전쟁은 노동계급의 구성과 정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이전 시기가 혁명적 에너지가 상승하는 시기였다면 전쟁은 이 과정을 날카롭게 단절시켰다. 군대 동원령은 군사적일 뿐 아니라 더욱더 정치적 관점에서 계획되고 시행에 옮겨졌다. 정부는 서둘러서 공업지구에서 적극적이고 저항적인 노동자 부위들을 전선으로 보내 그 영향력을 제거시켰다. 전쟁 첫 몇 개월의 동원으로 숙련노동자 대부분과 전체 노동자의 약 40%가 공업지역에서 분리되었다. 이들이 사라지면서 생산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전쟁 산업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정도가 큰 자본가들일수록 더 거세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핵심부위는 더 이상 파괴되지 않았다. 산업활동에 필수적인 노동자들은 군복무를 면제받으면서 공장에 머물렀다. 군대로 끌려간 숙련 노동자들에 의해 생긴 생산 공백은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 농민, 소도시민, 미숙련 노동자, 여성, 소년들에 의해 채워졌다. 산업에서 여성의 비율은 32%에서 40%로 증대되었다.
노동계급이 묽어지고 새로 충원되는 과정은 수도에서 극에 달했다. 1914년에서 1917년까지 5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는 뻬쩨르부르그 도에서는 거의 배로 늘었다. 폴란드 특히 발트해 국가들에서 공장이 청산되면서 러시아에 전쟁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한 결과 1917년 뻬쩨르부르그에는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 밀집된다. 이들 가운데 33만 5천명은 140개의 거대 공장에 밀집되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의 전투적 분자들은 전선에서 군대의 혁명적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농촌에서 갓 올라온 노동자들은 종종 부유한 농민이거나 상점주인으로서 전선의 참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어있던 자들이었다. 이들과 여성 그리고 소년들은 일류 노동자들보다 훨씬 순종적이었다. 또한 군복무를 공장에서 대신한 숙련노동자들은 수십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전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대단히 몸을 사려야했다. 이 상황은 애국주의 정서가 지배하게 된 사회적 배경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짜르 치하에도 노동자들의 일부가 애국주의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에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애국주의 정서에는 안정적 토대가 없었다. 무자비한 군대와 경찰의 탄압, 배가된 착취, 전선의 패배, 산업의 붕괴 등은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전쟁 중에 파업은 대부분 경제 파업이었으며 전쟁 전보다 훨씬 온건했다. 노동계급의 약화는 노동계급 정당의 약화에 의해 가중되었다. 볼세비키당 의원단이 체포되고 유형지로 추방당한 후 이전부터 존재한 밀정 조직의 도움으로 볼세비키 당조직은 전반적으로 파괴당했다. 당은 2월 혁명 때까지 이 탄압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희석된 노동계급은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초보적인 투쟁의 학교를 거쳐야했다. 이후 부분적 경제파업과 기아로 굶주린 여성들의 시위가 1917년 2월 총파업으로 결합되고 군대가 봉기에 동참하면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은 이질적으로 구성되어 계급적 단결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2월 혁명을 맞이했다. 더욱이 이때에는 계급의 선진 부위까지 정치의식이 낮은 수준에 있었다. 화해주의 정당들이 일시적으로 득세한 두 번째 조건은 전쟁으로 야기된 노동계급의 정치적 문맹 및 반(半)문맹이었다.
혁명은 대중을 교육시키는데 그것도 대단히 빠르게 교육시킨다. 바로 여기에 혁명의 위력이 있다. 혁명 일주일마다 대중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혁명 2개월은 한 시대를 창조한다. 2월말에는 봉기가 일어났고 4월말에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무장 시위를 벌였다. 7월초에는 범위가 훨씬 넓고 좀더 결연한 구호 하에 대중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된다. 8월말에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대중에 의해 격퇴 당한다. 10월말에는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다. 리듬이 대단히 격렬한 이 사건들은 대중의 정치의식에 세포 분열을 가져와 노동계급의 이질적 구성부분들을 정치적 단일체로 결집시킨다. 파업은 이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특수로 인한 엄청난 이윤으로 흥청망청하던 자본가들은 혁명의 번갯불에 깜짝 놀라 공포에 떤다. 이들은 혁명 첫 몇 주일동안 일단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한다. 뻬쩨르부르그 공장주들은 제한 및 예외 조항들을 두었으나 8시간 노동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태가 잠잠해지지 않았다. 생활수준이 계속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에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앙등하는 생활비 때문에 노동자들은 “다수가 고질적인 기아 상태에 근접했다.” 노동자 지구의 정서는 갈수록 날카롭고 팽팽해졌다. 이들을 짓누른 것은 무엇보다 전망의 부재였다. 궁핍을 감내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대중은 가장 가혹한 궁핍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새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대중이 타도한 구체제의 변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을 이들은 견딜 수 없었다.
더욱 격심한 착취에 시달리던 후진 노동자들의 파업은 특히 맹렬했다. 세탁소 노동자, 염색 노동자, 통 제조 노동자, 사무노동자, 건설 노동자, 종이 상자 제조 노동자, 소시지 제조 노동자, 가구 제조 노동자 등은 부위별로 6월 내내 파업을 계속했다. 반면에 금속노동자들은 파업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선진 노동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갈수록 명백해졌다: 전쟁, 경제 파탄, 인플레 등의 상황에서 개별적 경제파업은 사태를 제대로 개선할 수 없다; 토대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의 광범위한 공장폐쇄 전술을 알아챈 노동자들은 산업의 통제 요구에 쉽게 호응했다. 또한 이들은 공장을 국가가 통제해야할 이유를 이해했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개인 공장들은 전쟁 노력에 투입되고 있었으며 같은 유형의 국가기업들이 이들과 나란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17년 여름에 러시아의 벽지에서 노동자 및 사무직 대표단이 수도를 방문하여 재무부가 공장을 접수할 것을 호소했다. 공장의 주주들이 생산자금을 끊었기 때문에 공장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부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에 반대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화해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4만의 노동자가 고용된 푸틸로프 공장은 혁명의 첫 몇 개월간 사회혁명당의 아성이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아성은 볼세비키당의 공격에 성을 내주었다. 양복장이 출신의 볼로다르스키는 볼세비키들의 공격에서 대개 선봉에 섰다. 몇 년간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이 유태인은 대단한 대중 연설가였다. 그는 논리적이고 기발하며 대담했다. 그의 미국영어 억양은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독특한 표현력을 부여하여 수천 명의 집회에서 간결하게 울려 퍼졌다. 미니체프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르바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푸틸로프 공장의 기반은 사회혁명당 신사들의 발 밑에서 꺼지고 있었다. 2개월만에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갔다.”
파업 그리고 일반적으로 계급투쟁이 성장하면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거의 자동적으로 상승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모든 경우에 노동자들은 확신했다: 볼세비키들은 딴 마음을 품고있지 않다; 이들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은 신뢰가 간다. 투쟁의 순간에는 무당파 노동자, 사회혁명당 노동자,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모두 볼세비키당으로 이끌렸다. 관리자들과 공장주들의 태업에 맞서 공장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공장위원회는 소비에트보다 볼세비키당에 훨씬 빨리 포섭되었기 때문이었다. 6월초에 열린 뻬쩨르부르그와 인근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은 421표 가운데 335표의 지지를 받았다. 이 사실을 거대 신문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제생활의 근본 문제들에서 아직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하지 않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이 사실상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주었다.
6월에 열린 노동조합 협의회에서 뻬쩨르부르그의 50개가 넘는 노동조합들이 자그마치 25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금속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약 10만 명이었다. 조합원 수가 5월 한달 동안 배로 늘은 셈이었다. 노동조합에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더욱 빠르게 커졌다.
소비에트의 보궐선거가 있을 때마다 승리는 볼세비키당에게 돌아갔다. 6월 1일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대의원 분포는 볼세비키당 206명, 멘세비키당 176명, 사회혁명당 110명이었다. 지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으나 진행속도가 느렸을 뿐이었다. 볼세비키당의 당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4월말 뻬쩨르부르그 당 조직은 1만5천의 당원을 보유했으나 이 수치는 6월말에 3만2천명으로 증가했다.
이때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은 이미 볼세비키당이 다수였다. 그러나 노동자 병사 합동회의에서는 병사 대의원들이 볼세비키 대의원들을 앞질렀다. 프라우다지는 더욱더 끈질기게 총선거를 주장했다: “50만 수도 노동자들은 15만 수도 주둔군보다 대의원 수는 4배나 적다.”
6월에 열린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공장폐쇄, 생산시설의 약탈, 경제생활에 대한 방해공작 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자본가들의 이윤을 공개하고 최대 백만장자를 50명이나 100명 선에서 체포하라. 짜르와 같은 특별 대우를 해주면서 이들을 몇 주일 동안 감옥에 가두자. 그러면 이들은 자신들의 연줄, 속임수, 치사함, 이기심 등을 털어놓을 것이다. 이들의 수작으로 새 정부에서도 수백만 루블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레닌의 제안은 너무 황당해 보였다. “개별 자본가들에 대한 폭력 행사를 통해 경제법칙을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본가들이 인민에 대한 음모를 통해 법을 강제하는 상황은 일상적 질서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천둥과 같은 분노로 레닌을 비난한 케렌스키는 한달 뒤에 “경제 생활의 법칙”을 자본가들과 다르게 이해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전혀 주저하지 않고 체포했다.
경제와 정치 사이의 관계가 폭로되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원리에 근거한 것처럼 보였던 국가는 더욱 자주 자신의 가장 원초적 형태 즉 특정 소유관계를 방어하는 무장 군사집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양보나 심지어 협상 자체도 거부했던 고용주들을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에 강제로 출석시키거나 가택연금에 처했다. 노동자 민병대가 유산계급들에게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들의 10%를 무장시키려는 집행위원회의 원래 결정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부분적으로 무장했으며 더 적극적 분자들은 민병대에 참여했다. 노동자 민병대의 지도부는 공장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지도부는 더욱더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어느 공장의 노동자 포스타프쉬치크는 이렇게 말한다: “6월 1일 볼세비키들을 다수파로 하는 새로운 공장위원회가 수립되자마자...80명의 노동자 민병대가 나이 많은 병사 레바코프 동지의 지도 아래 구성되었다. 이들은 무기가 없을 때에는 막대기로 훈련했다.”
민병대가 폭력을 휘두르고 징발과 불법 체포를 자행한다고 언론은 비난했다. 민병대가 폭력을 행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립된 목적이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데 익숙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되기를 원치도 않았던 유산계급의 대표들을 다룰 때 민병대는 폭력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죄라면 죄였다.
임금인상 투쟁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푸틸로프 공장에서 6월 23일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위원회 중앙위원회, 노동조합 중앙사무국, 기타 73개 공장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볼세비키당의 지도하에 이 협의회는 지금의 조건 속에서 공장의 파업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조직되지 않은 정치투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합당한 분노를 억제하고” 전반적 공세를 위해 투쟁력을 준비할 것을 제의했다.
이 중요한 협의회 전날 밤에 볼세비키 분파는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경고했었다: “우리 당이 억제하지 않았다면 4만 명의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파업을 벌이고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가 이들을 계속 억제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면 대다수 노동자와 병사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이 경고들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다. 또는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했다. 이들은 공장과 병영을 방문하는 것도 거의 그만두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이들을 불쾌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권위를 획득하여 이들의 산발적인 투쟁을 억제할 수 있는 세력은 볼세비키당 뿐이었다. 그러나 가끔 볼세비키들에게도 화풀이를 할만큼 대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이때 공장과 함대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건과 거대한 대중 앞에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를 드러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기관인 소비에트의 의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가권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쉬웠다. 더욱이 혁명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들은 대개의 경우 국가권력의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이들은 대개 사소한 충돌이나 조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를 드러냈다. 경제 파탄의 막다른 골목과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점증하는 분노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약간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에서 계급 역관계를 평가할 수 없었던 이들은 아주 사소한 대중의 항거도 최후의 구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당이 단호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화해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가끔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불평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볼세비키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혁명의 열기를 가늠하는 척도로 가끔 이용했다.
핀란드역에서 레닌의 귀국을 환영했던 수병들은 이로부터 2주일 후 사방의 애국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만약에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귀국했는지를 우리가 미리 알았더라면 열광적인 만세 대신 우리는 ‘거부한다! 왔던 나라로 다시 돌아가라!’라고 분노하여 외쳤을 것이다.” 크림 반도의 병사 소비에트들은 이 애국주의 반도에 대한 레닌의 방문을 막겠다고 차례로 위협했다. 사실 레닌은 이곳을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2월 27일 봉기의 주역이었던 볼린스키 연대는 애국주의 열풍에 휩싸여 레닌을 체포하겠다고 결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나름의 조치를 취해야했다. 이 정서는 6월 공세까지 걷히지 않았다. 그리고 7월 시기 이후에도 날카롭게 다시 상승하곤 했다. 동시에 가장 멀리 떨어진 주둔지와 전선의 먼 구석에서 병사들은 더욱 대담하게 그리고 종종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볼세비키당의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연대 안에 볼세비키는 한 명뿐이었으나 당의 구호들은 더욱 깊이 침투하고 있었다. 이 구호들은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이 대중의 무지와 혼란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레치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국은 지금 정신병동으로 변하고 있다. 귀신에 홀린 자들은 행동에 나서서 명령하고 있다. 아직 이성을 상실하지 않은 자들은 공포에 질려 한발 물러나 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 모든 혁명에서 “온건파들”은 바로 이런 말로 자기 영혼을 토로한다. 화해주의 신문들은 자기 위안의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볼세비키당과 관계하기를 전혀 원치 않는다. 한편 대중의 무의식적인 볼세비키 노선은 혁명의 논리를 반영하면서 레닌의 당에게 정복될 수 없는 위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3일간의 토론 끝에 전선의 병사들은 소비에트 대회에 나갈 대의원을 선출했다. 선출된 대의원은 모두 사회혁명당원들이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에서 병사들은 볼세비키의 가장 과격한 분자보다 훨씬 왼쪽에 있었다.” 대중이 “우리보다 100배나 왼쪽에 있다”는 레닌의 말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타우리데 도의 어느 오토바이 상점에서 일하는 사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 신문을 읽은 후 병사들은 빈번하게 이름을 알 수 없는 볼세비키들을 학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토론에서 전쟁을 중지해야하며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야할 필요성 등을 말하곤 했다. 레닌이 크림 반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욕한 애국주의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후방의 거대한 주둔지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운명이 바뀌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할 일없는 인간들이 계속 밀려들어 거대한 집단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떼거지로 거리로 나가거나 전차를 탄 채 불만을 터뜨리고 해바라기 씨를 유행병처럼 씹어대었다. 참호에서 입는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해바라기 씨 껍질을 엉덩이에 붙인 병사들은 부르주아 언론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대상이었다. 전쟁 중에 이들은 조야한 아양발림으로 치켜세워졌다. 이들은 영웅으로 불리기조차 했다. 물론 이 영웅들은 여전히 전선에서 벌로 채찍질을 당했다. 그리고 2월 혁명 후에 이들은 해방투사로 칭송되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갑자기 깡패, 배신자, 총잡이, 독일의 첩자가 되었다. 애국주의 언론이 러시아 병사와 수병들에게 퍼붓지 않은 욕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무정부적 혼란상에 대항하고 대중의 과도한 행위들을 저지하고 공포에 질린 질문지와 도덕적 지시사항들을 배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짜리친은 무정부주의적 볼세비키주의의 아성으로 인식되었다. 이 도시의 소비에트 의장은 중앙에서 내려온 정세 설문지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주둔군이 좌로 나갈수록 일반인들은 우로 나간다.” 이것은 전국의 상황에 해당되는 표현이었다. 병사는 좌로 부르주아는 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보다 대담하게 솔직한 느낌을 표현하는 병사는 상부에 의해 전부 볼세비키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이 비난은 워낙 끈질기게 가해져서 시간이 좀 지나면 비난의 대상자조차 이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의 생각은 평화와 토지 문제에서 이제 권력의 문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산발적으로 들리는 볼세비키당의 구호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당에 대한 의식적인 공감으로 변했다. 4월에 레닌을 체포하기로 작정한 볼린스킨 연대는 2개월이 지나면서 볼세비키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에게르스키 연대와 리토프스키 연대도 마찬가지였다. 레트인 명사수들은 전쟁 목적을 위해 짜르에 의해 육성되었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과 농업노동자들이 발트해 귀족들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대들은 멋지게 싸웠다. 그러나 짜르가 의존하려했던 계급적 증오심은 나름의 길을 찾았다. 레트인 명사수들은 처음에는 짜르 그리고 다음에는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한 최초의 연대였다. 이미 5월 17일 레트인 8개 연대 대표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볼세비키당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를 지지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혁명의 길에서 막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전선에서 어느 이름 없는 병사가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 6월 13일에 본부에서 소규모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레닌과 케렌스키에 대해 얘기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레닌을 지지했다. 그러나 장교들은 레닌이 대단한 ‘부르주아’라고 말했다.” 공세가 붕괴한 후 케렌스키라는 이름은 군대에서 커다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6월 21일 페테르호프의 사관생도들이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스파이들을 타도하자”, “케렌스키와 브루쉴로프 만세.” 물론 사관생도들은 브루쉴로프를 지지했다. 그러자 제 4 대대의 병사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거칠게 다룬 후 해산시켰다. 케렌스키를 칭송하는 플래카드가 가장 큰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6월 시위는 군대의 정치적 변화를 크게 가속화시켰다. 공세에 대해 유일하게 미리 반대의 입장을 밝힌 볼세비키당의 인기는 엄청난 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 신문은 군대로 배포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문이나 애국주의 신문들에 비해 부수도 대단히 왜소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병사는 엉성한 필체로 이렇게 썼다: “귀하의 당이 발행하는 신문들 가운데 한 종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귀하 당의 신문들에 대한 소문만 들리고 있습니다. 공짜 부르주아 신문은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짝으로 묶여져서 전선으로 실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애국주의 신문들이 볼세비키당의 인기를 크게 상승시킨 장본인이었다. 피억압 대중의 항의, 토지 점거, 증오스러운 장교들에 대한 보복 등 모든 일이 볼세비키들의 짓이라고 이 신문들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볼세비키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병사들은 결론지었다.
제 12군의 인민위원은 7월초 케렌스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병사들의 정서를 묘사한다: “모든 고통이 부르주아 장관들과 소비에트 때문이라고 병사들은 비난한다. 이들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기들을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엄청난 수의 대중은 암흑 속에 갇혀있다. 이들은 신문조차 거의 읽지 않는다. 이들은 ‘글 솜씨 한번 좋네’, ‘허풍은 되게 떠네’ 하면서 인쇄물의 내용을 완전히 불신한다.” 혁명 직후 첫 몇 달간 애국주의 인민위원들은 혁명군대 자체는 물론이고 군대의 의식과 규율에 대해 찬사 일색이었다. 그러나 4개월간 계속 실망한 군대가 정부의 연설가와 기자들을 신뢰하지 않자 이제 인민위원들은 군대가 암흑 속에 갇혀있다고 말한다.
주둔군이 좌로 나갈수록 일반인은 더 우로 나간다. 공세에 자극 받아 반혁명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뻬쩨르부르그에 등장했다. 이들의 이름은 서로 경쟁하듯이 거창했다: 조국명예연합, 병역의무 연합, 자유대대, 영혼단 등등. 이 존경스러운 간판들은 귀족, 장교, 관료층, 부르주아 계급 등의 야망과 기도들을 그럴싸하게 위장했다. 군사동맹, 성조오지 기병연합, 지원군 사단 등은 군사적 음모의 완성된 핵심 조직들이었다. 열렬한 애국자로 등장한 “명예”와 “영혼”의 기사들은 연합국 대사관에 쉽게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가끔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대신 소비에트는 “사설 단체”이므로 정부의 지원금이 거부되었다. 신문왕 수보린 가문의 일파는 당시 [작은 신문]을 출판했다. “독자적 사회주의”의 기관지인 이 신문은 철권 독재를 주창했는데 콜착 제독이 독재자의 후보로 제안되었다. 이보다 좀더 건전한 신문은 독자성은 강조하지 않은 채 모든 방법을 통해 콜착에 대한 인기를 창조하려고 애썼다. 이미 1917년 여름에 그의 이름과 관련된 계획은 수립되어 있었다. 또한 수보린의 등뒤에는 막강한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콜착의 이후 행적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일부 개인적인 도발을 제외하면 반동 세력은 단순한 전술적 계산에 근거하여 레닌주의자들만 공격하는 체 했다. “볼세비키”라는 말은 악마의 기원과 동의어가 되었다. 혁명 전에 짜르의 사령관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포함한 모든 불행을 독일 첩자 특히 “유태인놈들” 탓으로 돌렸다. 이와 똑같이 6월 공세가 붕괴하자 실패와 패배의 책임은 끊임없이 볼세비키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 점에서 케렌스키와 체레텔리 같은 민주주의자들은 밀류코프와 같은 자유주의자는 물론 데니킨 장군 같은 공공연한 봉건주의자들과도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모순이 한계까지 도달했으나 아직 폭발하지 않은 때에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 세력의 좌표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들에서 좀더 솔직하고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크론슈타트는 정치적 열정의 번갯불을 수렴하는 피뢰침 가운데 하나였다. 제국 수도의 바다 대문에 위치한 충성스러운 초소가 되어야했을 이 오래된 요새는 여러 번 반란의 깃발을 치켜들었었다. 무자비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불길은 크론슈타트에서 결코 꺼지지 않았다. 혁명 후에도 반란의 섬광은 위협적으로 이 요새에서 번쩍였다. 곧 이 해군 요새의 이름은 애국주의 언론에 의해 혁명의 가장 흉칙스러운 측면 즉 볼세비키주의의 동의어가 되었다. 사실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아직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5월에 대의원 107명은 볼세비키, 112명은 사회혁명당원, 30명은 멘세비키, 97명은 무당파였다. 그러나 사회혁명당원들과 무당파들은 엄청난 혁명의 압력솥 속에서 살고있었다. 중요한 문제들에서 대다수는 볼세비키들을 따라갔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술수나 외교에는 흥미가 없었다. 이들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나오면 곧 행동으로 들어간다. 당연히 허깨비 정부에 대해 이들은 대단히 단순화된 행동 방법을 취했다. 5월 13일 소비에트는 이렇게 결의했다: “크론슈타트의 유일한 권력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이다.” 입헌민주당의 페펠야에프는 정부에서 보낸 크론슈타트의 인민위원이었는데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처럼 전혀 영향력이 없었으며 요새에서 그의 얼굴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요새에는 모범적인 질서가 유지되었다. 도시 안에서 카드놀이는 금지되었고 모든 매춘굴은 폐쇄되었다. 위반자는 요새에서 추방되었다. “재산을 몰수하고 전선으로 추방한다”는 위협과 함께 거리의 술 주정은 금지되었다. 이 위협은 여러 차례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곳의 수병들은 짜르 함대와 해군 요새의 무시무시한 체제에 의해 단련되어 있었다. 엄격한 작업, 희생, 격심한 분노 등이 이들의 관습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 새로운 삶의 장막이 올라갔다. 스스로 주인이 될 삶이 전개되자 이들의 힘줄은 혁명을 누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이들은 목마른 듯이 뻬쩨르부르그의 적과 아군을 모두 덮쳐 이들을 강제로 크론슈타트로 끌고 왔다. 투쟁하는 혁명 수병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도덕적 긴장은 물론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었다. 이들은 일종의 투쟁하는 혁명 십자군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혁명의 십자군인가? 체레텔리 장관과 그의 인민위원 페펠야에프로 대변되는 혁명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는 임박한 두 번째 혁명의 전령으로 우뚝 서있었다. 이 때문에 첫 번째 혁명이 충분할뿐더러 과도하다고 생각한 모든 반동들은 크론슈타트를 증오했다.
페펠야에프가 평화롭게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인민위원직에서 제거되자 지배 질서는 이것을 국가의 단합에 반대하는 무장봉기처럼 묘사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에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즉시 대표단을 크론슈타트에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이중권력은 삐걱거리면서 행동에 들어갔다.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가 참석한 가운데 소집된 5월 24일의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볼세비키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렇게 인정했다: 소비에트 권력이 전국에 수립될 때까지는 임시정부에 실제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이 굴복에 분노한 수병들의 압력을 받아 소비에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바뀔 수 없는 크론슈타트의 입장을 장관들에게 “설명”했을 뿐이다. 이것은 명백히 전술적 오류였다. 그러나 이 오류에는 혁명에 대한 포부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크론슈타트에게 교훈을 제시하고 이들의 과거 죄를 동시에 묻기로 상부는 결정했다. 물론 검사는 체레텔리였다. 가슴이 저리는 자신의 감옥생활을 언급한 후 체레텔리는 특히 요새 감옥에 갇혀있는 80명의 장교들을 풀어주라고 호통을 쳤다. 모든 선한 언론은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화해주의 장관들의 정부 신문들조차 이것이 “직접 횡령” 그리고 “공포 상황을 조성하면서까지 주먹으로 통치한 장교들”의 문제라고 인정했다. 체레텔리의 공식 기관지 이스베스티아지조차 이렇게 말했다: “수병 증인들은 체포된 장교들이 1906년의 봉기를 진압한 행위, 대대적인 총격, 바다에서 처형되고 익사 당한 수병들의 시체로 가득한 바지선, 기타 끔찍한 사건들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고 말한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체포된 장교들을 한사코 정부에 넘기려하지 않았다. 귀족 출신의 살인자들과 횡령자들은 1906년을 비롯해 여러 해에 걸쳐 고문당한 수병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에 가까웠다. “연립정부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수하노프가 온건하게 묘사하는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서 짜르의 가장 악질적인 정치경찰 하수인들을 체계적으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출세한 민주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반동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고상함을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체레텔리의 기소 내용에 대해 크론슈타트는 호소문에서 이렇게 응답했다: “혁명 와중에 우리에게 체포된 장교, 헌병, 경찰 등은 감옥에서 받은 대우에 대해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정부 대표들에게 선언했다. 크론슈타트의 감옥 건물들이 끔찍하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짜르가 우리를 가두기 위해 세운 건물들이다. 다른 건물들은 없다. 인민의 적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보복심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3월 27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재판했다.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출석한 트로츠키는 체레텔리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반혁명 장군들이 혁명의 목에 올가미를 던질 때 입헌민주당은 올가미 밧줄이 반질거리도록 비누칠을 할 것이고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싸우기 위해 달려와 우리와 함께 죽을 것이다.” 이 경고는 3개월 후에 의외로 그대로 들어맞았다: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에 대항하자 케렌스키, 체레텔리, 스코벨레프는 동궁을 방어하라고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 6월에는 민주주의자들이 무정부 상태에 대항하여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어떤 주장이나 예측도 중요하지 않았다. 찬성 580표, 반대 162표, 기권 74표로 혁명적 민주주의를 “배신”한 “무정부주의” 크론슈타트를 비난하는 결의문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통과되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정부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수도와 요새 사이의 개인 통신용 전화선을 즉시 끊어버렸다. 볼세비키당 중앙이 크론슈타트 수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훈련용 군함들에게 크론슈타트를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또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무조건 복종”이 요구되었다. 당시 회기 중이던 농민 대의원 대회는 ‘크론슈타트에 식량 공급을 거절하겠다“고 위협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등뒤에 서있던 반동 세력은 결정적인 그리고 가능한 선에서 살벌한 해결책을 찾았다.
젊은 역사학자 유고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무분별한 조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이 목적으로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를 방문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한 후 그는 나중에 소비에트에 의해 채택되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을 작성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원칙적인 입장은 그대로 지킨 채 실제적인 문제에서만 양보했다.
이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자 부르주아 언론은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요새는 무정부 상태이다; 수병들은 자기들 멋대로 돈을 찍고 있다(돈의 황당한 견본이 신문에 실렸다); 이들은 국가재산을 약탈하고 있다; 여성들은 국유화되고 있다; 강도 행각과 술 주정이 계속되고 있다. 엄격한 규율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수병들은 수백만 부가 발행되면서 전국에 자기들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고 있는 이 신문들을 읽고 굳은살이 박힌 주먹을 배가된 힘으로 불끈 쥐었다.
크론슈타트 장교들을 인도 받자 페레베르제프의 사법 기관들은 이들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수가 이후 내전에 참여했고 이들이 얼마나 많은 수의 병사와 노동자와 농민들을 총살시키고 교수형에 처했는지를 알면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유용한 조사를 수행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정부의 권위는 섰다. 그러나 수병들은 불명예를 당한 것에 비해 곧 만족감을 얻었다. 전국 각지에서 붉은 크론슈타트를 기리는 결의문들이 좌익 소비에트, 공장, 연대, 대중집회 등에서 답지하기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확고한 불신임”에 경의를 표하는 기관총 연대의 시위가 처음으로 뻬쩨르부르그 거리에서 완벽한 대형을 갖추고 일어났다.
그러나 크론슈타트는 좀더 의미 있는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언론의 비방은 크론슈타트를 전국적으로 중요하게 만들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크론슈타트에 아성을 만든 후 볼세비키들은 적절하게 훈련된 선동가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전역에 선전의 그물망을 쳤다. 크론슈타트의 사절단은 전선에도 파견되어 규율을 망치고 농촌에 파견되어 지주의 장원을 몰수하도록 농민을 부추겼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이 사절단에게 특별 권한을 위임했다: ‘어떤 자는 출신 도의 군, 지구, 마을 위원회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투표권을 가지고 파견되었다. 또한 집회에서 연설하고 집회를 자기 판단에 따라 소집하였다.’ 그리고 ‘모든 철도와 기선을 아무 거리낌없이 공짜로 이용하고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크론슈타트 시 소비에트는 앞에서 말한 선동가의 불가침권을 보장했다.’”
이렇게 밀류코프는 이 발트해 수병들의 국가 파괴활동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박식한 당국, 기관, 신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이 홀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권한을 위임받아 먹을 것과 잘 곳을 모든 곳에서 제공받고 모든 대중 집회에 입장이 허용되고 모든 곳에서 경청되고 역사의 사건들에 수병의 손자국을 남긴 이유와 방법을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자유주의 정치에 봉사하는 이 역사가는 이 단순한 질문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기적은 한 가지 이유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이들은 지성이 풍부한 교수들보다 역사 발전의 요구들을 훨씬 깊이 표현했다. 헤겔의 언어로 말하면 반(半)문명 수병들이 위임받은 권한은 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주관적으로 대단히 똑똑한 계획들은 허깨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역사의 이성은 밤에도 이것들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에 뒤 처졌다. 공장위원회는 대중에게 뒤 처졌다. 더욱이 지방의 각 도들은 수도에 뒤 처졌다. 이것이 혁명의 불가피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수천의 모순들을 만들어 내지만 동시에 이것들이 우연히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도록 한다. 또한 이 법칙은 새로운 모순들을 마치 장난치듯이 즉시 만들기도 한다. 볼세비키당 역시 혁명의 발걸음에 뒤 처졌다. 그런데 당은 특히 혁명기에는 사태에 뒤 처질 권리가 없다. 에카테린부르크, 페름, 툴라, 니즈니-노브고로드, 소르모보, 콜롬나, 유조브카 등 노동자 중심지에서 볼세비키들은 5월말이 되어야 멘세비키들과 분리되었다. 오데사, 니콜라에프, 엘리자베트그라드, 폴타바 그리고 기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서 볼세비키들은 6월 중순까지도 독자 조직을 가지지 못했다. 바쿠, 즐라투스트, 베제트스크, 코스트로마 등지에서 볼세비키들은 6월말이 되어야 멘세비키들과 분리되었다. 이로부터 4개월이 채 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정권을 장악한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전쟁 기간에 당은 대중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대단히 뒤져있었고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3월 지도부는 거대한 역사적 임무에 대단히 뒤져있었다. 역사상 유례없이 혁명적인 이 정당도 역사의 사건들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투쟁의 불길 속에서만 볼세비키당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사건들의 공세 속에서 대오를 무장시켰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대중은 이 극좌정당보다 “100배”나 좌에 있었다. 자연스러운 역사과정의 힘에 실려 확대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자세히 관찰해보면 나름의 모순, 지그재그, 밀물과 썰물을 드러낸다. 대중은 구성이 다양할 뿐더러 손을 데인 후 멀찌감치 떨어 서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한 후에만 혁명의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볼세비키당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대중의 각성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역사는 이들의 참을성에 보답을 해주었다.
볼세비키들이 작업장, 공장, 연대 등을 결연히 획득하고 있는 동안 민주 의회 선거는 화해주의자들에게 대단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점점 많은 장점을 부여했다. 이것은 혁명의 가장 날카롭고 가장 신비로운 모순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순전히 노동자들만 모여있는 비보르그 지구의 의회는 볼세비키가 다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6월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은 60% 이상을 득표했다. 이들은 자기 득표율에 놀랐다. 왜냐하면 자기 영향력이 급속히 상실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혁명의 전개와 민주주의라는 거울 속에 이것이 반영되는 현상 사이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모스크바 선거는 대단히 흥미롭다. 광범위한 부위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화해주의 환상을 서둘러 벗어 던지고 있었다. 한편 소도시의 광범위한 부위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산발적으로 흩어진 대중에게 민주적 선거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거의 최초의 그리고 대단히 드문 기회였다. 어제까지 멘세비키나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병사들과 함께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택시운전사, 배달부, 수위, 시장의 여성, 상점주인, 그의 조수, 교사 등은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주는 대단히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소부르주아 부위는 늦게나마 케렌스키에게 표를 던졌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그는 2월 혁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월 혁명은 선거일에 비로소 이들에게 침투했다. 사회혁명당이 60%를 장악한 모스크바 시의회는 꺼져 가는 등불이 마지막으로 확 타오르는 것과 같았다. 민주적 자치 기관들에게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겨우 도착한 이들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힘이 부쳤다. 이것은 혁명 과정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달려있을 뿐 발로 차올려져서 혁명의 회오리에 춤을 추는 인간 먼지들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억압 계급들이 혁명으로 각성하는 심오하면서도 간단한 변증법은 바로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기계적인 회계사는 어제, 오늘, 내일을 같은 난에 셈하고 이를 통해 공식 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의 지도부를 장악하도록 부추긴다; 바로 이럴 때에 혁명은 가장 위험하게 궤도를 벗어난다. 공식 민주주의자들이 장악한 혁명의 지도부는 실제로는 혁명의 아주 무거운 꼬리에 불과했다. 레닌은 볼세비키당에게 머리와 꼬리를 구별하도록 가르쳤다.
6월 3일 뻬쩨르부르그의 사관학교에서 개최된 제 1차 전국 소비에트 대회는 케렌스키의 공세를 승인했다. 표결권이 있는 820명의 대의원과 발언권만 있는 268명의 참관 대의원들이 참석한 이 대회는 305개 지역 소비에트, 전선의 53개 지구 및 지역 조직, 군대의 후방 조직들, 몇몇 농민 단체들을 대표했다. 표결권은 포괄 대중이 2만5천명이 넘는 소비에트에게만 주어졌다. 1만명에서 2만5천명까지 포괄하는 소비에트에게는 발언권만 주어졌다. 그리 엄격하게 준수되지 않았던 이 규약에 근거하면 전국 소비에트 대회는 2천만명을 대표했다. 소속을 밝힌 777명의 대의원 가운데 285명은 사회혁명당, 248명은 멘세비키당, 105명은 볼세비키당 그리고 몇몇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룹에 속해 있었다. 대회의 좌파를 구성한 볼세비키당 그리고 이 정당과 연합한 국제주의자들은 표결권이 있는 대의원 전체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3월에는 사회주의자로 등록했으나 6월에는 이미 혁명에 지친 자들이 대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에게 뻬쩨르부르그는 완전히 미친 도시였다.
대회는 그림의 국외 추방을 인준하면서 회기를 시작했다. 그는 독일 외교관들과 막후 협상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독일 사민당을 구하려고 노력했던 스위스의 불행한 사회주의자였다. 임박한 공세를 즉시 의제로 삼자는 좌파의 요구는 압도적 다수에 의해 거부되었다. 볼세비키당은 아주 작은 그룹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날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시간에 뻬쩨르부르그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소비에트 정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결의문을 역시 압도적 다수로 채택했다.
아무리 근시안들이었지만 화해주의자들은 매일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6월 4일 회의에서 볼세비키당을 증오하는 리이버는 지방 출신들의 영향을 받아 아무 쓸모도 없는 정부의 인민위원들을 비난했다. 각 도의 행정당국은 이들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이 결과 정부기관들의 기능은 모두 소비에트로 넘어갔다. 소비에트가 이것을 원치 않아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치더라도 누군가를 비난해야했다.
현직 교사인 어느 대의원은 대회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혁명이 승리한 지 4개월이 지났으나 교육 부문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교사, 장학관, 교장, 지구교육감 등의 다수는 흑백인조 회원이었는데 그대로 유임되었다. 또한 교육과정, 반동적인 교과서 그리고 심지어는 교육부 차관들조차 평화로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짜르의 초상화만이 다락방으로 올라갔는데 이것도 언제든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회는 구 의회나 국무회의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반동 세력에 대한 대회의 소심한 태도는 멘세비키 연설가 보그다노프의 발언에 의해 은폐되었다: 의회와 소비에트는 “어쨌든 기능을 상실한 유명무실한 조직들”이다. 이에 대해 마르토프는 위트 있게 비꼬면서 반대했다: “의회를 죽었다고 선언은 할지언정 실제로 죽이지는 말자고 보그다노프는 제안한다.”
소비에트 대회에서 다수파는 확고히 사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는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진행되었다. 애국주의는 이제 기력을 잃고 가끔 번쩍 하는 빛을 낼뿐이었다. 대중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볼세비키당은 대회에서보다 전국 특히 수도에서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볼세비키당과 화해주의자들 사이의 다툼은 언제나 이 문제로 집약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노동자 가운데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연합국의 그림자가 대회에 드리워져 있었다. 대회 이전에 공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자들은 이것을 인준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인민의 대의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사회세력도 포기하지 말고 우리편으로 끌어 들여야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이 정당화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노동계급, 군대, 농민 등이 매순간 자기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고 뻥을 치면서 대신 인민에 대한 전쟁을 개시해야했다. 체레텔리는 입헌민주당원 인민위원 페펠야에프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배반자라고 선언했었다. 연립정부는 찬성 543표, 반대 126표, 기권 52표로 인준되었다.
사관학교에 모인 이 거대하고 무기력한 대회는 선언은 거창하게 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일은 인색하게 진행시켰다. 이 때문에 대회의 결정사항들에는 절망과 위선의 도장이 찍혔다. 대회는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했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피억압 민족들 자신이 아니라 미래에 소집될 제헌의회에게 주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제헌의회에서도 다수파가 되어 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할 생각이었다.
대회는 8시간 노동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각계 각층의 이해를 조정하기가 어렵다고 체레텔리는 설명했다. 반동 세력에 대한 진보 세력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조정하는 것”을 통해 역사의 거대한 요구가 단 하나라도 성취된 것처럼 그는 말한다!
소비에트의 경제 전문가 그로만은 대회가 끝날 무렵 임박한 경제 파탄과 정부의 경제 통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요식적인 결의안은 통과되었으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6월 7일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그림을 강제 추방한 후 대회는 정상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스코벨레프와 그의 동료들에게 자본가의 이윤은 예전과 같이 성역이었다. 식량 위기는 매시간 급격히 악화되고있다. 외교 분야에서 정부는 계속 얻어맞고 있다. 광적으로 선언된 전선의 공세는 끔찍스러운 모험행각이 되어 나라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르보프, 테레쉬첸코, 체레텔리 등의 신성한 활동을 평화로이 지켜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땅 밑의 두더지는 너무 빨리 굴을 판다. 권력의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주의자’ 장관들의 도움으로 소비에트 대회에 제기될지 모른다.”
더 높은 권위로 자신들을 대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대회를 질질 끌면서 모든 갈등들을 다루었다. 이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눈에 대회의 의미는 무참하게 손상 당했다. 두르노보가 소유한 여름 별장과 관련된 사건은 아주 뚜렷한 예였다. 짜르의 늙은 관료였던 그는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내무장관으로 유명했다. 이 증오스럽고 더러운 관료의 빈 별장을 비보르그 노동자 조직이 몰수했다. 어린이들이 놀이터로 애용하는 대단히 넓은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곳을 소수민족 학살자들과 무장강도들의 소굴 즉 비보르그 지구의 크론슈타트로 묘사했다. 어느 누구도 사실관계를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부는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조심스럽게 회피하면서도 신선한 열정을 발휘하여 이 가옥을 구출하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행위원회가 이 영웅적인 노력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체레텔리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검사는 24시간 내에 이곳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군사행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안 노동자들은 경고를 발했다. 한편 무정부주의자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28개 공장들이 항의 파업을 선언했다. 집행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비보르그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든 사전 행동들이 끝나자 사법부의 대표와 민병대가 이 사자 굴에 침투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질서정연했다. 이 집은 여러 노동자 교육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정부가 보낸 병력은 치욕스럽게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될 것이다.
6월 9일 소비에트 대회장에 폭탄이 터졌다: 프라우다지의 아침 판이 그 다음날 시위를 벌일 것을 촉구했다. 쉽게 놀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놀라게 할 수 있는 체이제는 무덤에서 나오는 듯한 공포의 목소리로 이렇게 발표했다: “소비에트 대회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내일은 치명적인 날이 될 것이다.” 그러자 대의원들은 놀라서 머리를 쳐들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병사들과 소비에트 대회 사이의 결판은 정세에 의해 암시되었다. 대중은 볼세비키당의 행동을 촉구했다. 주둔군은 특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선의 공세 때문에 병사들은 연대로 분산되어 전선으로 투입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병사들은 “병사 권리 선언문”에 크게 실망했다. 이것은 “명령 제 1호”와 비교하면 크게 후퇴한 내용이었다. 또한 군대의 규율에 대해서도 병사들은 크게 불만이었다. 볼세비키당의 군사조직은 시위를 조직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당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설 것이라고 이 조직의 지도자들이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후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대단히 옳았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급격하게 좌로 기우는 것을 볼세비키당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당 대오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볼로다르스키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설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시위가 어떤 성격을 띨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병사들이 정부의 공격과 보복을 두려워하여 무기를 들것이라고 군사조직 대표들이 선언했다. “그렇다면 시위로부터 얻을 것이 무엇인가?”라고 신중한 톰스키가 질문했다. 그는 좀더 논의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병사들은 끓어오르고 있으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스탈린은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전투를 환영하기보다는 언제나 피하는 경향이 많았던 칼리닌은 결연히 시위에 반대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시위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시위는 순전히 인위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6월 8일 노동자 부문 대표 협의회가 열려 일련의 예비 표결 끝에 찬성 131표, 반대 6표, 기권 22표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반대 선동을 막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시위는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이 올바른 경계 조치는 나중에 군사적 음모의 증거라고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해석되었다. 공장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시위를 조직하는 결정에 동참했다. 유고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트로츠키의 찬성 의견과 루나차르스키의 반대 의견을 들은 후 메주라욘치 위원회는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시위는 펄펄 끓는 열정으로 준비되었다.
시위에서는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적힌 깃발이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자!”가 투쟁의 구호였다. 이것은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을 파기하라는 요구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다. 시위대는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고 있는 사관학교로 행진할 계획이었다. 시위의 목적이 정부의 타도가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자들에 대한 압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볼세비키당 예비 협의회에는 다른 의견들도 물론 제출되었다. 예를 들어 청년 중앙위원 스밀가는 “시위가 정부와의 충돌로 비화할 경우에는 우체국, 전신, 무기고를 지체없이 점거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협의회에 참석한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라트시스는 스밀가의 제안이 거부되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세마쉬코, 라히아 동지들과 함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완전히 무장할 것이다. 그리고 기관총 연대의 도움으로 철도 터미널, 무기고, 은행, 전신전화국 등을 점거할 것이다.” 세마쉬코는 기관총 연대의 장교였으며 라히아는 전투적인 볼세비키 노동자였다.
이런 정서는 쉽게 이해되었다. 당은 이미 권력 장악의 길에 들어섰으며 문제는 정세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뿐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정세는 볼세비키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같은 과정이 좀더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더욱이 전선의 병사들은 공세의 고통스러운 교훈을 깨달은 후에야 볼세비키당에 대한 불신을 불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닌은 4월에 자신이 제안한 내용을 고수했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수하노프는 자신의 [혁명 노트]에서 “상황이 유리할 경우” 6월 10일 시위로 레닌은 직접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볼세비키 당원 개개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레닌은 이에 대해 “좌로 너무 약간 기울었다”고 비꼬듯이 말했다. 수많은 연설과 글을 통해 표현된 레닌의 노선과 자신의 자의적인 추측을 수하노프는 비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자 주: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본서의 부록 제 3편을 참조하시오.)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즉시 볼세비키당에게 시위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근거가 없었다. 국가 권력만이 공식적으로 시위를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시위를 금지시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두 정당의 연합으로 주도되고 있는 “사설 단체” 소비에트가 어떻게 제 3자의 시위를 막을 수 있는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시위의 평화적 성격을 좀더 부각시키기로 결정했다. 6월 9일 노동자 지구들에 볼세비키당의 벽보가 붙었다. “우리는 자유 시민이므로 시위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 권리를 사용해야한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할 권리가 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소비에트 대회에 회부했다. 바로 이 순간에 체이제는 치명적인 결과를 예언하면서 대회의 회의가 밤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지롱드파였던 최고회의 위원 게게츠코리는 볼세비키들을 향해 이렇게 거칠게 고함지르며 연설을 마쳤다: “이 영광스러운 대의에 그대들의 더러운 손을 대지 마시오!” 볼세비키당은 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부되었다. 대회는 3일간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볼세비키당에 대한 폭력 행사였으며 정부에 대한 권한 찬탈 행위였다. 소비에트는 계속해서 정부의 권력을 훔쳐서 자기 베개 밑에 숨겨놓았다.
이때 밀류코프는 카자흐 협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볼세비키당을 “러시아 혁명의 주적(主敵)”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혁명의 최고의 우군이 자기 자신이라고 선언하며 협의회가 추측할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그는 2월 혁명 직전에 러시아 인민의 혁명을 인정하느니 독일에게 패배하겠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었다. 레닌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을 끝장낼 때가 되었다.” 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는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한편 공장과 연대들이 집회를 열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로 다음날 거리로 나갈 것을 결의했다. 한편 비보르그 지구 의회에 볼세비키당 37명, 사회혁명당-멘세비키당 22명, 입헌민주당 4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대회와 카자흐 대회의 소음 속에 이 사실은 주목받지 못한 채 무시되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은 이 문제를 재고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 대회가 시위를 금지하는 단도직입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우익이 위협적으로 시위대를 공격할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당은 봉기가 아니라 평화적인 시위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금지된 시위를 반(半)봉기로 전환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이에 반해 소비에트 대회 최고회의는 조치를 강구하기로 결정했다. 시위를 막기 위해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10명씩 짝을 지어 노동자 지구와 병영을 방문했다. 그리고 아침에 타우리데 궁전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농민 대의원 집행위원회는 70명을 이 원정에 가담시켰다.
볼세비키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나마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들은 수도의 노동자 병사들을 알고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이 예언자에게 다가갈 수 없으면 예언자가 산에 다가가야 한다. 대의원들의 방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멘세비키 통신원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이즈베스티아 지에 이렇게 묘사했다: “밤새 내내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500명이 넘는 대회의 다수파는 10명씩 짝을 지어 뻬쩨르부르그의 공장과 군부대를 방문하여 이들 모두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그러나 다수의 공장과 여러 군부대에서 소비에트 대회는 권위가 없었다. 대의원들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때때로 적대적인 반응에 접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하며 거부당한 경우도 아주 자주 있었다.” 이 소비에트 공식 기관지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밤에 만난 사건을 아주 온건하게 묘사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대중을 만난 대의원들은 앞으로 누가 시위를 소집하고 취소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았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은 프라우다지를 통해 볼세비키당의 결의문과 대회의 선언문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시위에 반대하는 대회 선언문을 벽에 붙이는데 동의했다. 푸틸로프 공장이 노동자들의 선봉인 것처럼 제 1 기관총 연대는 주둔군의 선봉이었다. 이 부대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농민 집행위원회를 각각 대표하는 체이제와 아브크센티에프의 연설을 들은 후 결의문을 채택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와 그 군사조직에 동의하여 시위를 연기한다.”
시위를 진정시키려는 대의원 여단은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완전히 기가 죽어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회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불신과 적대의 돌담에 부딪쳤다. “대중은 볼세비키들과 친하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에게 적대적이다.” “이들은 프라우다지만 믿는다.” “일부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너희들의 동지가 아니다.’” 대의원들은 차례로 보고했다: 대회는 시위를 철회시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패배했다.
대중은 볼세비키당의 결정에 복종했으나 일부는 이에 항의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일부 공장들은 당 중앙위원회를 견책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좀더 불같은 성격의 볼세비키당원들은 당원증을 꺼내 찢어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경고였다.
화해주의자들은 말했다: 3일간 시위를 금지시킨 이유는 왕당파의 음모 때문이다. 볼세비키당의 시위에 편승하여 이들이 음모를 시행에 옮기려했다는 것이었다. 이 음모에는 카자흐 대회의 일부가 참여했으며 반혁명 군대가 뻬쩨르부르그에 접근하고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볼세비키당은 시위를 취소한 후 당연히 음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기는커녕 대회 지도자들은 볼세비키당이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곤경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이들은 이 즐거운 방법을 찾아냈다.
6월 10일 밤에 화해주의자들은 음모를 발견했으나 대신 사기가 크게 뒤흔들렸다. 대중이 볼세비키당과 함께 화해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대회의 결의문에 복종하자 이들은 기가 살았다. 이들의 공포심은 광기로 변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무쇠와 같은 힘을 과시하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멘세비키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레닌주의자들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을 때가 되었다.” 집행위원회의 대표는 카자흐 대회에 참석해 대회가 볼세비키당에 대항하여 소비에트를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우랄 지역의 카자흐 추장이자 대회 의장 두토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카자흐들은 소비에트에 결코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반동들은 볼세비키당에 대항하기 위해 소비에트와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볼세비키당이 타도된 후 더욱 확실히 소비에트의 목을 조르기 위해서였다.
6월 11일에 집행위원회, 소비에트 대회 최고회의, 분파들의 지도자들 등 모두 100명 정도로 구성된 막강한 재판소가 소집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검사는 체레텔리이다. 격노로 목이 메인 채 그는 치명적인 조치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을 괴롭힐 준비는 되어 있으나 파괴할 준비는 아직 하지 않은 단을 경멸하듯이 손을 저어 물리친다. “지금 볼세비키당의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니라 음모이다....볼세비키당은 우리를 용서해야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투쟁방법들을 채택할 것이다....우리는 볼세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켜야한다. 이 당이 지금까지 가진 두가지 거대한 기술적 도구들을 빼앗아야한다. 우리는 음모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소리였다. 볼세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은 정말이지 특별히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무기들은 실제로 병사와 노동자들의 손에 있었다. 다만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볼세비키당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볼세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이것 이상을 의미한다면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반동 세력의 요구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혁명의 승리를 보장한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혁명의 고전적인 순간이 왔다. 박식한 인물들을 포함한 민주주의 신사들은 옛날 책을 읽을 때에는 무장을 해제하는 자가 아니라 해제 당한 자에게 언제나 동정심을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달랐다. 수년 동안 강제 중노동형을 당한 혁명가이며 어제는 찌머발트 반전주의자였던 체레텔리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대회장은 멍하게 놀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은 누가 자기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느꼈다. 장교 출신 대의원 중의 하나가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
체레텔리 만큼 창백해진 카메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자들이 느낄 수 있는 존엄성을 가지고 외쳤다: “체레텔리 장관님, 바람에게 얘기하고 있지 않다면 말만 하지 말고 나를 체포하시오. 그리고 혁명에 반대한 음모로 나를 재판하시오.” 볼세비키 대의원들은 항의의 표시로 대회장을 퇴장하여 자기들을 놀리는 카메네프의 행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대회장의 긴장은 거의 참을 수 없이 팽팽했다. 리이버는 서둘러 체레텔리를 지원하러 나섰다. 억제된 격노는 히스테리의 격노로 바뀌었다. 리이버는 무자비한 조치들을 촉구했다. “볼세비키당을 따르는 대중을 획득하려면 볼세비키주의와 결별해야한다.” 그러나 청중은 그의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반정도 적대감을 드러냈다.
분위기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루나차르스키는 즉시 다수파와 공통분모를 찾으려 애썼다: 볼세비키당이 자신에게 평화 시위만 생각하고 있다고 약속했지만 자신의 경험으로는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오류”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갈등을 격화시키지 말아야한다. 적들을 달래지 못한 루나차르스키는 친구들을 화나게 했다.
“우리는 좌파에 대항하지 않는다”고 단은 음흉하게 말했다. 그는 대중을 늪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들 가운데 경험은 가장 많으면서도 쓸데없는 일을 가장 많이 했다. “우리는 반혁명에 대해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의 어깨 뒤에 독일 첩자들이 서 있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논쟁을 대신하기 위해 그는 독일을 언급했을 뿐이다. 물론 이 신사들은 독일 첩자를 하나도 지목할 수 없었다.
체레텔리는 펀치를 날리고 싶었으나 단은 주먹만 흔들어 보이고 싶었다. 무기력한 집행위원회는 단의 편을 들었다. 다음날 대회에 제출된 결의안은 볼세비키당에 반대하는 예외적인 법이었으나 즉각 효력이 있는 측면은 하나도 없었다.
볼세비키당이 대회에 제출한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가 없는 것은 대의원 여러분들이 시위 금지 결의안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우리 당이 시위를 취소시키기 때문이다. 공장과 연대들을 방문한 대의원들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군사적 음모는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임시정부가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우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전부 넘어간다고 치자. 그리고 소비에트가 우리의 선동에 족쇄를 채우려 한다고 치자.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수동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와 여러분들을 구별시키는 국제사회주의 사상의 이름으로 차라리 징역이나 다른 벌을 감수할 것이다.”
소비에트의 다수파와 소수파는 마치 결전을 치르듯이 3일 동안 서로 가슴을 마주 대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은 마지막 순간에 서로 물러섰다. 볼세비키당은 시위를 포기했다. 화해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킬 생각을 포기했다.
체레텔리는 자기 세력 속에서 소수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점에서는 그가 옳았다.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대중을 마비시키고 이 연합을 유지해야할 시점이 왔다. 화해주의 정책을 성공시키고 부르주아 계급의 의회체제를 수립하려면 노동자와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켜야했다. 체레텔리는 옳았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시행에 옮길 힘이 없었다. 병사들은 물론 노동자들도 자발적으로 무기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강제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했으나 체레텔리에게는 이렇게 할 무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동 세력에게서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동 세력이 볼세비키당을 분쇄했다면 즉시 화해주의 소비에트도 분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체레텔리에게 그가 강제 중노동 죄수 출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반동 세력도 이렇게 할 정도의 충분한 무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체레텔리는 주장했다: 볼세비키당이 노동자들을 농민으로부터 이간질시키기 때문에 볼세비키당에 대항해야한다. 이에 대해 마르토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체레텔리는 농민 한가운데로부터 사상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농민이 아니라 입헌민주당 우파, 자본가, 지주, 제국주의자, 서방의 부르주아 계급 등이 노동자와 병사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옳았다: 유산계급들은 역사상 여러 번 농민의 등뒤에 숨어서 거짓 주장을 늘어놓았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발표된 순간부터 혁명을 전진이 아니라 후진시키려는 자들은 모두 노동계급이 농민으로부터 분리될 위험성을 가장 주요한 주장으로 늘어놓았다. 레닌이 체레텔리를 “고참 볼세비키들”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17년에 쓴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당이 극단적인 고립 심지어는 감옥의 독방 신세를 지면서까지 사회혁명당 및 멘세비키당으로부터 고립된다해도 노동계급은 피억압 농민 및 도시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혁명적 노동계급의 정책이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배신적 정책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되어야 수백만 농민을 구원하는 정치적 분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공격적인 사회혁명당 유형의 배신적 농민 지도부로부터 농민을 분리시킬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계급을 전국 인민혁명의 진정한 지도자로 변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체레텔리의 완전히 틀린 주장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10월 혁명 전야에 이것은 배가된 힘으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다수 “고참 볼세비키들”의 봉기 반대 주장으로 애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10월 혁명에 대한 지적인 반동이 시작되었을 때 체레텔리의 노선은 스탈린주의 아류들의 가장 주요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볼세비키들이 퇴장하고 비난받은 같은 날 멘세비키당의 어느 대표는 예상 밖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다음 일요일인 6월 18일에 뻬쩨르부르그를 비롯한 중요 도시들에서 시위를 개최하자. 적에게 민주주의의 단결과 위력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어안이 벙벙한 속에서도 이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밀류코프는 화해주의자들의 이 예상 외 움직임을 상당히 잘 설명했다: “6월 10일로 예정된 무장 시위의 취소에 대해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하면서...장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너무 우리 쪽으로 치우쳤으며 정치 기반이 자기들 발 밑에서 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들은 겁을 집어먹고 급작스럽게 볼세비키당 쪽으로 물러섰다.” 6월 18일에 시위를 개최하겠다는 결정은 볼세비키당 쪽으로 이끌린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볼세비키당에 대항해 대중을 획득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시위를 중지시키기 위해 노동자와 병사들을 설득했던 밤 활동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낙담시켰다. 이 때문에 대회 개막 당시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이들은 정부의 이름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9월 30일에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서둘러 작성했다. 시위에서 외칠 구호도 대중에게 불쾌하지 않게 선택되었다: “보편적인 평화”, “제헌의회 즉각 소집”, “민주공화국”. 전선의 공세나 연립정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레닌은 프라우다 지에서 이렇게 물었다: “신사들, ‘임시정부에 대한 완전한 신뢰’는 어디에 갔는가?..당신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는가?” 그의 비꼼은 아주 적절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참여한 정부에 대해 대중이 신뢰를 보내라고 감히 요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노동자 지구들과 병영들을 방문한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시위 전날 밤에 집행위원회에 완전히 고무적인 보고를 했다. 이 보고로 마음을 평정을 되찾고 자기 만족적 설교를 펼 기분이 난 체레텔리는 볼세비키들을 향해 몇 마디 던졌다: “이제 혁명 세력을 공개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검토할 기회가 생겼다....당신들과 우리들 중 누가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는 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의 도전이 조심성 없이 이렇게 표현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이미 이 도전을 받아들였었다. 프라우다지는 이렇게 적었다: ”10일로 예정되었으나 취소된 시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8일 시위에 참여할 것이다.“
최소한 피상적으로나마 민주주의의 거대한 단합을 과시한 3개월 전의 장례 행렬을 의식한 듯 시위 코스는 또다시 군신장과 2월 혁명 열사들의 묘지로 정해졌다. 그러나 시위 코스를 제외하고는 그때를 연상시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례식보다 훨씬 적은 4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소비에트와 연합하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 뿐 아니라 장례식의 민주주의 행렬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던 급진 지식인들도 시위에 불참했다. 노동자와 병사들 이외에 참여한 세력은 거의 없었다.
군신장에 모인 대회 대의원들은 플래카드의 문구를 읽으며 세력 분포를 가늠해보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볼세비키 구호들은 반정도 이들의 조소를 자아냈다. 전날에 체레텔리는 너무도 자신 있게 볼세비키당에 도전장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 구호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10명의 장관 자본가들을 타도하자!” “공세를 타도하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제 비꼬는 미소는 굳어지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천지에 볼세비키 깃발이었다. 대의원들은 이 불편한 집계를 그만두었다. 볼세비키당의 승리는 너무 명백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 저기에 사회혁명당이나 공식 소비에트 구호들이 볼세비키 깃발과 대오 사이에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볼세비키 물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다음날 소비에트 공식 기관지는 ‘“임시정부에 신뢰를”이라고 적힌 깃발을 시위대가 여기저기에서 얼마나 맹렬하게 찢어 내버렸는지’를 묘사했다.” 물론 그는 약간 과장했다. 3개 그룹만이 임시정부 지지 플래카드를 들었다: 플레하노프 그룹, 카자흐시위대, 분트에 소속된 몇몇의 유태인 지식인들. 정치적으로 희귀한 점이 인상적이었던 이 세 그룹은 임시정부의 무기력함을 공개적으로 보이기 위해 시위에 참여한 것처럼 보였다. 시위대의 적대적인 고함을 듣자 플레하노프 그룹과 분트는 자기 플래카드를 내려버렸다. 카자흐 시위대는 완고했기 때문에 이들의 깃발은 문자 그대로 이들의 손에서 탈취되어 찢겨졌다. 이즈베스티아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까지 조용히 흐르던 시위 물결은 갑자기 홍수 때 강물이 제방을 넘쳐흐를 것처럼 넘실대었다.” 비보르그 시위대였다. 이들은 모두 볼세비키당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10명의 장관 자본가들을 타도하라!” 어느 공장은 “생존권이 사유재산권보다 더 귀중하다”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것은 볼세비키당이 제안한 구호가 아니었다.
실망한 지방 출신들은 자기 지도자들을 찾느라 온 곳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은 눈을 내리깔거나 숨어버렸다. 볼세비키들은 지방 출신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했다. 우리가 음모를 꾸미는 일당처럼 보이는가? 대의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당신들이 권력이요.” 이들은 대회 공식 석상에서 드러냈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러나 지방과 전선에서는 상황이 다를 것이오. 뻬쩨르부르그가 나라 전체에 대항할 수는 없소.” 이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대답했다: 당신들의 차례가 곧 오겠지만 우리는 같은 구호를 제시할 것이요.
노인이 된 플레하노프는 이렇게 적었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군신장에서 체이제 옆에 서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자본주의 장관들의 타도를 요구하는 압도적인 수의 플래카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레닌주의자들 일부는 마치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에게 위압적인 명령의 말을 건넸다. 마치 체이제의 얼굴 표정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았다.” 볼세비키들이 휴일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고리키의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대의 플래카드와 구호로 판단하면 일요일 시위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세비키당이 완전히 승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진정 거대한 승리였다. 특히 적이 선택한 무기를 들고 격투장에서 승리한 셈이었다. 공세를 승인하고 연립정부를 인정하고 볼세비키당을 비난하면서 소비에트 대회는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올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대중은 선언했다: 우리는 공세나 연립정부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볼세비키당을 지지한다. 이것이 이 시위의 정치적 의미였다. 시위를 주최한 멘세비키 신문들이 다음날 슬프게 스스로 질문한 것은 당연했다: 누가 이 서글픈 아이디어를 제안했는가?
물론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 전부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시위자들이 모두 볼세비키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연립정부를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볼세비키당에 적대적인 노동자들에게는 이렇다할 대안 프로그램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적대감은 주시하는 중립으로 바뀌었다. 볼세비키 구호를 따르며 시위에 참여한 멘세비키 및 사회혁명당원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당의 구호에 대한 신념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6월 18일의 시위는 참가자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대중은 볼세비키당이 권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동요하는 분자들은 이 정당으로 이끌렸다. 모스크바, 키에프, 카르코프, 에카테리노슬라브 그리고 기타 지방 도시들의 시위들도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이 대단히 증대했음을 보여주었다. 모든 곳에서 2월 체제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같은 구호들이 제출되었다.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화해주의자들은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세가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도왔다. 6월 19일에 애국주의자들의 시위가 입헌민주당의 지도로 그리고 케렌스키의 초상화와 함께 네프스키 가도에서 개최되었다. “전날의 시위와 너무 달라서 승리의 감정과 의식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교차했다.”고 밀류코프가 말했다. 이것은 합당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의 생각은 즉시 두 시위 위로 비상하여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다고 확신했다. 이 민주주의 양반들은 환상과 모욕감을 있는 대로 전부 경험할 운명이었다.
4월에는 혁명 시위와 애국주의 시위가 동시에 개최되어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적대적인 이 시위는 6월에는 18일과 19일에 각각 개최되어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유혈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다만 2주일 후로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독자성을 과시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18일 시위에 참여하면서 비보르그 지구의 감옥들을 공격했다. 대부분이 범죄자였던 죄수들은 싸움이나 사상자 없이 해방되었다. 이것도 감옥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감옥 당국은 기습을 당해 놀라기는커녕 즐거운 마음으로 진짜와 가짜 무정부주의자들을 환영하러 나왔다. 그러나 이 신비한 에피소드는 시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애국주의 언론은 이 둘을 연관시켰다. 볼세비키당은 460명의 범죄자들이 풀려난 경위를 철저히 수사할 것을 대회에 제의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사치를 허용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감옥 당국 상층부에서 동맹자들을 만날까 두려웠다. 더욱이 이들은 자기들이 주최한 시위를 악의적인 비방으로부터 방어할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두르노보의 여름 별장과 관련하여 창피를 당했던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탈출한 죄수들을 찾는다는 핑계로 이 별장을 다시 덮쳤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이 가운데 한 명이 살해되었다. 별장은 파괴되었다. 별장을 자기 소유로 생각했던 비보르그 노동자들은 경고를 발했다. 여러 공장이 작업을 중단했다. 경고는 퍼져서 병영에까지 도달했다.
6월의 마지막 날들은 계속되는 웅성거림 속에 지나간다. 어느 기관총 연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즉각 공격을 준비한다. 파업 중인 공장의 노동자들은 연대를 순회하면서 병사들을 거리로 불러모은다. 머리가 허연 농민들이 병사 외투를 걸치고 수염을 기른 채 보도를 따라 항의 행진을 한다. 이 중년 농민들은 농토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동원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볼세비키당은 거리로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선동을 하고 있다. 18일의 시위는 할말을 다했다는 것이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시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혁명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6월 22일 볼세비키당 신문은 주둔군에게 호소한다: “거리로 나서라는 군사조직 명의의 촉구를 믿지 말아라.” 전선에서 도착한 대의원들은 병사들에 대한 폭력과 징벌을 불평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연대들은 해체시킨 뒤 다시 구성한다는 위협은 불에 기름을 붇는 격이다. “다수의 연대에서 병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잠을 잔다”고 집행위원회에 제출되는 볼세비키당의 선언문이 말한다. 무장을 갖춘 애국주의 시위는 종종 시가전을 촉발한다. 이것은 축적된 전기가 조금 방출되는 현상과 같다. 어느 쪽도 직접 공격하기를 원치 않는다. 반동 세력은 너무 허약하고 혁명 세력은 자기 권력에 대해서 아직도 완벽한 자신감이 없다. 그러나 도시의 거리들은 폭발 물질들로 널려 있는 것 같다. 곧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이다. 볼세비키 신문은 정세를 설명하면서 대중을 억제시킨다. 애국주의 신문은 볼세비키당을 마음껏 비방하면서 두려움을 해소한다. 25일 레닌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보편적인 악의와 분노의 난폭한 외침은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멘세비키당이 자기들의 무력감을 공동으로 불평하는 형태이다. 이들은 다수파이며 정부이다. 이들은 모두 연합해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볼세비키당에 대해 격노하는 것 이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본 저서의 첫 페이지들을 통해 우리는 10월 혁명이 러시아의 사회관계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의 분석은 성취된 사건들의 결론을 사후에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혁명 한참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10월 혁명의 서곡인 1905년 혁명 이전에 이미 분석은 완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페이지들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의 사회 세력들이 혁명 사건들을 통해 어떻게 모습을 보였는지를 밝히려했다. 우리는 정당들의 활동을 계급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 기록했다. 이 정당들에 대한 필자의 공감이나 반감은 논쟁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관계의 실제 전개에 토대를 두고 정확하게 확립된 사실들의 내적 연관을 재구성할 경우 역사 서술은 객관성을 보장받는다. 이렇게 해서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역사 과정의 내적 인과 관계는 그 자체가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가장 훌륭히 입증한다.
독자들 앞에서 스쳐 지나간 2월 혁명의 사건들은 최소한 반쪽이나마 우리의 이론적 예측이 옳았음을 연속적 소거의 방법을 통해 확인시켜주었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정세의 다른 변종들 전부는 현실의 시험을 거쳐 가치가 없는 것으로 소거되었다.
케렌스키를 민주주의의 인질로 잡은 자유 부르주아 정부는 완전한 실패작으로 판명 났다. “4월 시기”를 통해 10월 혁명은 2월 혁명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경고했다. 이 사건 직후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연립정부로 대체되었으나 연립정부도 존재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집행위원회가 6월 시위를 촉구했을 때 이것은 자발적인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이 시위는 2월 혁명이 10월 혁명과 힘을 겨루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사건이었다. 이 패배는 뻬쩨르부르그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패배는 2월 혁명을 성취하고 이것을 전국에 확산시킨 노동자와 병사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특히 치명적이었다. 6월 시위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이 목적이 뚜렷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새로운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명확한 징후들은 나라의 나머지 부분들도 어쩔 수 없이 뒤늦게 수도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지 4개월을 채울 즈음에 2월 혁명은 정치적으로 이미 소진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신뢰를 잃었다. 소비에트 주요 정당들과 소비에트 대중 사이의 갈등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두 혁명의 계급 역관계를 평화적으로 시험한 6월 18일 시위 후 두 혁명 사이의 모순은 공공연하고 폭력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7월 시기”가 도래했다. 상부에서 조직한 6월 시위 2주일만에 시위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게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 7월 시기에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생겼다. 그리고 2월 체제의 정치적 파산에 책임이 있다고 선언된 볼세비키당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6월 11일 체레텔리는 볼세비키당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이 정당의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표결에서 패했다. 그런데 이 결의안은 7월초에 그 내용 전부가 실행에 옮겨졌다. 볼세비키 신문들은 강제 폐간되고 그 군사 조직들은 해체되었다. 노동자들은 무장 해제를 당했으며 볼세비키당의 지도자들은 독일 총사령부의 첩자라고 선언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은 몸을 숨겼으며 나머지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에 대한 화해주의자들의 이 “승리”는 민주주의자들의 무기력을 완전히 드러냈다. 노동자와 병사들에 반대해 민주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에게도 적대적인 악명 높은 반혁명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이미 자기 부대를 상실한 후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것을 밀류코프는 대안의 형태로 표현했다: 코르닐로프인가 레닌인가? 실제로 혁명은 중용의 제국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반혁명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결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총사령관 코르닐로프는 볼세비키당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외피로 혁명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동안 혁명에 반대하는 모든 합법적 형태들은 애국주의 즉 독일에 대항할 필요성이라는 위장술을 채택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반혁명의 합법적 형태들은 모두 볼세비키당에 대항할 필요성이라는 위장술을 채택했다. 코르닐로프는 유산계급들과 이들의 정당인 입헌민주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코르닐로프가 뻬쩨르부르그에 대항해 배치한 군대는 싸움 한번 뭇하고 패배했으며 항복했다. 이들은 뜨거운 난로 뚜껑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렇게 우익은 특히 군대의 총사령관을 동원하여 혁명을 제압하려했다. 유산계급들과 인민 사이의 역관계는 행동을 통해 시험되었다. 코르닐로프와 레닌 사이의 선택에서 코르닐로프는 나무 가지에 달린 썩은 과일처럼 땅에 떨어졌으며 레닌은 그때에도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어야했다.
이 사건 이후 아직도 시도되지 않고 시험되지 않은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다름 아닌 볼세비키주의라는 대안이었다. 사실 코르닐로프 쿠데타의 비참한 패배 이후 대중은 열정적이고 단호하게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왔다. 10월 혁명은 물리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전진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으나 2월 혁명은 무혈혁명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이에 비해 10월 혁명은 진짜 유혈사태 없이 수도에서 성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권리가 있다: 10월 혁명의 심오한 자연적 불가피성에 대한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한가? 자신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이윤에 타격을 입은 자들만 이 혁명을 모험주의와 참주선동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너무 당연했다. 볼세비키당의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유혈 투쟁이 터진다. 이때 타도된 계급들은 연합국 정부들의 물질적 지원을 얻어 잃은 것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렇게 해서 내전의 몇 년이 지나간다. 적군이 창설되고 굶주린 나라는 군사적 공산주의 체제에 놓이고 스파르타식 전쟁 막사로 변모한다. 10월 혁명은 한 발 한 발 자신의 길을 다지고 모든 적들을 격퇴하고 산업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대단히 무거운 상처를 치유하고 산업 발전의 영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혁명 앞에 새로운 난관들이 닥친다. 막강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 혁명을 에워싸고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역사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것은 고립된 국가의 틀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과제들을 노동자 권력에게 제시한다. 이 노동자 국가의 운명은 이렇게 해서 이후 세계역사의 전개와 완전히 결부되어있다.
2월 혁명을 다룬 본 저서 제 1권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 혁명이 아무 성과도 가지고 올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본 저서 제 2권은 어떻게 10월 혁명이 승리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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