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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말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면, 로마가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53년 만에 전세계를 장악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 없었다. 이것 이외에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가 어디 있으며, 누가 다른 주제를 연구할 수 있겠는가?
-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우스, <역사> 중
고대사는 모두 로마사로 흘러들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개울이 호수로 흘러들어 가듯이, 그리고 근대사는 다시금 로마사에서 흘러나옵니다. 로마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저는 과감히 주장합니다.
- 1854년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2세의 사학 강의 중[3]
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국 이후 지중해 세계에 존재했던 황제국이다. 주변을 빠르게 정복하며 당대에도 강대한 제국으로서 존속했지만 멸망 이후에도 라틴어를 비롯한 언어부터 기독교 등 유럽 문화와 사회 체제에 광대한 영향을 준 국가로 평가된다. 중동과 이슬람 문화권 역시 로마의 유산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려 2200여년을 존속한 보편 국가의 상징이자, 모든 유럽 문명의 기초를 놓아 현대까지 영향을 미친 당대 세계 최강국이다.
로마 왕정과 공화정 시절까지 포함하면 기원전 8세기경의 왕국으로 시작하여 기원 후의 1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최전성기 이후의 중흥기만 총 네 번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장수 국가의 끝판왕이다.) 고대 그리스와 함께 유럽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고 여겨지며, 그 영향력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대에만 존재했다는 인식이 대부분이지만 이 국가는 고대와 중세에 걸쳐 있다.
흔히 고대 로마 전체를 로마 '제국'이라 부르는데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며 기원전 6세기부터 1세기까지는 공화정 체제인 적도 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로마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존속한 국가의 정식 명칭은 아니다. 다만 보통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라고 할 때는 왕정-공화정 로마도 포함한다. 제국이라는 말이 황제의 나라라는 뜻뿐만 아니라 패권국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아직 공화정 체제였던 시기에도 카르타고를 제압한 이후부터 제국 또는 패권국이라는 표현은 존재했다. 그래서 왕정 로마, 공화정 로마까지 모두 포괄해 로마 제국이라 하기도 한다.
2. 역사[편집]
2.1. 제정의 시작[편집]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에서 원로원 세력의 군대를 연파하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면서 이때부터 사실상 로마 제국은 제정이 시작되었다. 당사자인 카이사르는 그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파에게 암살당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원로원은 물론 공화국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싸인다.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정리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세 가지 권리(로마군 전체에 대한 임페리움, 민회 거부권이 포함된 호민관 특권, 그리고 제1시민 '프린켑스' 칭호)를 회수하고 최초의 황제(Imperator)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의 치세는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의 사후 칼리굴라, 네로 같은 폭군이 등장하여 로마 제국은 잠시 내전에 휩싸이긴 하지만 이후 5현제 시대에 돌입해서는 황금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융성한 시기를 맞게 된다.
2.2. 제국의 위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군인 황제 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5현제 시대도 단순한 번영기나 황금 시대라고만 볼 수는 없는 문제점이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외부 침입에 의한 약탈과 노예 노동에 상당히 의존하던 로마는 적들이 갈수록 강해지다 보니 더 이상의 확장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이민족을 공격하여 노예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길어진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단은 계속 증설되었다. 게다가 각 군단이 한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병사들이 비밀리에 현지 여성과 결혼하게 되면서[4] 군기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5] 또한 은의 주요 공급지였던 히스파니아의 은광이 고갈되고,[6] 외부 원정을 통한 귀금속의 유입이 감소하자 3세기에 들어서면서 금화와 은화의 질이 하락했다.[7]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폭동을 두려워한 황제들은 서커스와 같은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는 공공 행사를 축소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기간 산업인 농업 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로마의 팽창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노예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BCE 1세기에 비해 CE 1~2세기의 노예 가격은 8~10배 가까이 상승했다.[8] 노예의 절대적인 수량도 문제였지만 노예 사망으로 인한 손실과 위험성이 증가했다. 노예의 출산율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농촌 노예의 성비는 남초 현상이 심각했으며, 노예의 자식을 부양하는 일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실제로 CE 1세기 무렵에는 노예 출산에 장려금을 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고된 노동으로 인한 농촌 노예의 사망률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농촌 자유민 인구 증가율이 높았냐면 그것도 아니었으며 물레방아, 말이 끄는 수확기를 비롯한 몇 가지 기술 혁신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농업 생산력 증가와 연결되지 못했다. 특히 후자는 로마가 새로이 정복한 북부 유럽에 적합한 농법이었지만 그 농법들은 매우 한정적인 지방에서만 적용되었으며 대부분은 지중해식 농법에 의존했다.[9] 즉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로마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이 있었고 로마의 팽창이 끝나고 노예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잃어갔다.
5현제 시대 이후 군단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각 지역 주둔군의 불만이 커져 갔고, 지방에 대한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여러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는 등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다가 결국 내전을 반복하면서 로마 제국은 점점 전제군주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은 3세기인 군인 황제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세수가 부족할 때마다 찍어내는 화폐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 체계가 불안해지고[10][11] 게르만인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국경 경비를 뜷고 약탈을 일삼았으며[12], 동방에서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강적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는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기동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에게 부담이었다.[13]
5현제 시대 이후 군단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각 지역 주둔군의 불만이 커져 갔고, 지방에 대한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여러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는 등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다가 결국 내전을 반복하면서 로마 제국은 점점 전제군주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은 3세기인 군인 황제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세수가 부족할 때마다 찍어내는 화폐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 체계가 불안해지고[10][11] 게르만인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국경 경비를 뜷고 약탈을 일삼았으며[12], 동방에서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강적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는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기동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에게 부담이었다.[13]
로마 제국의 기동 방어는 게르만족과의 다뉴브 강 전선에 병력을 보충해야 할 경우 일시적으로 파르티아의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다뉴브 강으로 이동해서 메우고, 그 반대로 동방 전선에서 일시적인 긴장이 흐를 경우엔 파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해 다뉴브 강의 군대를 잠시 동방 전선으로 차출시키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기동 방어니 뭐니 하기 이전에, 게르만족 집단 자체의 동원 능력, 병사 개인의 전투력, 편제 능력이 갈수록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게 상승하고 있었다. 군단을 융통성 있게 운영하는 기동 방어 체계는 리메스로 알려진 방어선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만 설령 그게 작동했더라도 이전 같은 상황이 되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에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다뉴브 강에서 게르만족과 싸워야 할 때에도 동방 전선의 군대를 차출하기가 꽤 어려워졌다. 기동 방어가 순조롭지 못하게 되면서 다뉴브 강 전선과 동방 전선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를 보충해야 되고, 군대를 보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 때문에 예산 또한 늘려야 하는데 로마 제국의 수입원을 제공하던 노예는 줄어들어[14] 제국의 재정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 등으로 화폐를 찍어내게 되고, 은화 함량이 감소해서 인플레이션이 계속 일어났다.
게르만족들이 그 이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기가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두한 시기와 대강 비슷했고,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군사력 보충과 방어선 유지에 신경써야 했기에 시기적으로 어려웠다. 이렇게 로마 제국 후기에 큰 짐이 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분단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동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는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허무하게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의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기게 된 것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원인 중 일부였다. 결국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패배하여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는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대부분을 반란 진압과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족들과의 싸움에 소진했으나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 야만족들의 침입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치하 땐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과 시리아 지역(지금의 중동)이 로마에서 독립하여 그들의 왕을 옹립하였다.
그래도 로마 제국은 갈리에누스 당시 3분된 상태에서도 분리된 부분은 서로를 암묵적인 협력자로 인식하면서 꽤 자활적으로 야만족을 막아내고 있었고, 후기 로마군의 근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책들도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갈리에누스는 뛰어난 정책입안자이자 교양인이었다고 여겨질 수는 있었지만 전술적 지휘 능력은 부하들에게 안심을 줄 정도가 아니어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는 갈리에누스가 개혁한 로마군을 가지고 고트족의 대규모 남하를 일망타진함으로써 극적으로 로마를 구한다. 그는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얻었지만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는 도나우 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도나우 라인을 재정비한다. 그 뒤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로마에서 떨어져 나간 두 세력)을 격파하여 이 두 지역을 다시 로마와 합병시킨다. 그리고 그는 화폐 개혁을 시도하고 로마 시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의 정국 안정과 재정 확장을 추진한다. 이때 그가 시도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려는 시도는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킨 것과 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런 개혁을 진행하며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어 로마 제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행군 도중 전쟁에 지친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유 권한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제 계승을 원로원에 요청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은 신임 황제를 뽑는 데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간신히 타키투스 황제를 선출하나 70세의 고령이였던 그는 재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 황제 이후 프로부스 황제가 뒤를 이었다. 그는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우-라인 국경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나 군단 시찰 도중 프로부스 황제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 의해 역시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와 같은 황제들의 연이은 암살은 당시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루스 황제가 뒤를 이으나 군용 캠프에서 벼락을 맞아 죽고 내분 끝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게르만족들이 그 이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기가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두한 시기와 대강 비슷했고,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군사력 보충과 방어선 유지에 신경써야 했기에 시기적으로 어려웠다. 이렇게 로마 제국 후기에 큰 짐이 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분단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동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는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허무하게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의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기게 된 것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원인 중 일부였다. 결국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패배하여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는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대부분을 반란 진압과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족들과의 싸움에 소진했으나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 야만족들의 침입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치하 땐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과 시리아 지역(지금의 중동)이 로마에서 독립하여 그들의 왕을 옹립하였다.
그래도 로마 제국은 갈리에누스 당시 3분된 상태에서도 분리된 부분은 서로를 암묵적인 협력자로 인식하면서 꽤 자활적으로 야만족을 막아내고 있었고, 후기 로마군의 근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책들도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갈리에누스는 뛰어난 정책입안자이자 교양인이었다고 여겨질 수는 있었지만 전술적 지휘 능력은 부하들에게 안심을 줄 정도가 아니어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는 갈리에누스가 개혁한 로마군을 가지고 고트족의 대규모 남하를 일망타진함으로써 극적으로 로마를 구한다. 그는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얻었지만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는 도나우 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도나우 라인을 재정비한다. 그 뒤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로마에서 떨어져 나간 두 세력)을 격파하여 이 두 지역을 다시 로마와 합병시킨다. 그리고 그는 화폐 개혁을 시도하고 로마 시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의 정국 안정과 재정 확장을 추진한다. 이때 그가 시도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려는 시도는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킨 것과 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런 개혁을 진행하며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어 로마 제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행군 도중 전쟁에 지친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유 권한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제 계승을 원로원에 요청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은 신임 황제를 뽑는 데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간신히 타키투스 황제를 선출하나 70세의 고령이였던 그는 재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 황제 이후 프로부스 황제가 뒤를 이었다. 그는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우-라인 국경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나 군단 시찰 도중 프로부스 황제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 의해 역시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와 같은 황제들의 연이은 암살은 당시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루스 황제가 뒤를 이으나 군용 캠프에서 벼락을 맞아 죽고 내분 끝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2.3. 4세기, 제국의 변화[편집]
로마 제국의 전제정과 동서 분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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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게르만족의 침입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두 정치를 편다. 사두 정치는 네 명의 황제를 뽑아 각 황제가 그들의 영역에서 조세권,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로마 상황에서 상당히 적절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한 명의 황제가 광활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가지 중대한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중 하나는 로마의 조세 방식을 자치에 맡기지 않고 황제가 파견한 세무원들이 직접 징수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동안 로마 제국의 징수법은 각 도시에 있던 원로원에게 조세량을 의뢰하면 이들이 알아서 징수하여 정부에 보내는 방법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것을 중단하고 로마 정부에서 예산을 짜면 그만큼의 세금을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세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행정 구역을 세분화한다.
두 번째 중대한 개혁은 군제 개혁이었다. 로마군의 인력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두 배로 늘어났고, 이를 위해 공화정 시대 때 없어졌던 징병제를 부활시켜 각 도시들에 일정량의 신병을 징병케 하고 또한 군인의 아들은 반드시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이러한 개혁은 비록 조세 관리들의 부패과 관료제의 비대함 등의 부작용을 낳았으나 거의 망해가던 로마의 정황을 크게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군사력을 두 배로 늘리는 정책과 네 명의 황제의 통치를 바탕으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에 패배하여 자기 영토로 완전히 후퇴하였고 게르만족은 라인-도나우 강의 국경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15]
이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서 물러나자 제위 계승의 문제로 네 명의 황제가 즉시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은 다시 1인 황제 체제로 바뀌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록 본인의 야심 때문에 다른 황제들을 모두 없앴으나 그 역시 로마 제국이 황제 단 한 명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죽기 전 로마 제국을 이리저리 쪼개 자신의 자식들과 친척들에게 각각 맡기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 때 이들 친척은 모두 숙청되고 그의 세 명의 자식들이 각각 로마 제국을 분할해 통치하게 되지만, 살아남은 삼 형제 중 서방을 맡은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고 나서 중간을 다스리던 막내 콘스탄스가 서방 영토를 죄다 흡수하여, 중간의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제치고 사실상의 선임 황제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상당히 쾌락을 즐겨서 이것을 명분으로 휘하 게르만족 장군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찬탈당했고,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방은 일단 갈루스에게 맡겼다가, 감시하려고 맡긴 고문관들을 죽인 갈루스를 처단하고 자신은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는 한편 서방을 맡을 부제(副帝)는 부친 쪽으론 사촌동생이고 모친 쪽으로는 오촌 조카인 율리아누스를 임명한다.
율리아누스는 서쪽에서 갈리아에 칩입해 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선전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다. 로마는 평화를 맞이했지만 군단이 다시 제멋대로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발생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병 중 일부를 동부에 보내라고 명령하였고 이것을 거부한 군단병들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그 명령에 반항한 것이었다.
율리아누스가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선포하게 되자 로마 제국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지만 내전이 일어나기 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병사하여 율리아누스가 단독 황제로 등극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미 국교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로마 고유의 다신교로 바꾸려고 하지만 격렬한 반발을 겪게 된다. 그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지만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자식이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후계자로 군단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선출되나 불과 일 년 만에 의문사하고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게르만족을 막아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발렌스를 동제로 삼고 그는 서제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서제의 자리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인 그라티아누스가 오른다. 동제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여러 실책으로 고트족에게 로마 군단이 전멸하게 만들고 본인도 전사하여 로마 제국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발렌스의 뒤를 이으라고 서제 그리타아누스에 의해 동제로 파견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 고트족과 강화를 맺고 이런 타격을 잘 수습한다. 서제 그라티아누스가 죽자 서제 자리는 발렌티아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재위한 지 9년 뒤 죽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홀로 2년 정도 다스리다 병사하자 그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들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물려준다.
여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가지 중대한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중 하나는 로마의 조세 방식을 자치에 맡기지 않고 황제가 파견한 세무원들이 직접 징수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동안 로마 제국의 징수법은 각 도시에 있던 원로원에게 조세량을 의뢰하면 이들이 알아서 징수하여 정부에 보내는 방법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것을 중단하고 로마 정부에서 예산을 짜면 그만큼의 세금을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세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행정 구역을 세분화한다.
두 번째 중대한 개혁은 군제 개혁이었다. 로마군의 인력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두 배로 늘어났고, 이를 위해 공화정 시대 때 없어졌던 징병제를 부활시켜 각 도시들에 일정량의 신병을 징병케 하고 또한 군인의 아들은 반드시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이러한 개혁은 비록 조세 관리들의 부패과 관료제의 비대함 등의 부작용을 낳았으나 거의 망해가던 로마의 정황을 크게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군사력을 두 배로 늘리는 정책과 네 명의 황제의 통치를 바탕으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에 패배하여 자기 영토로 완전히 후퇴하였고 게르만족은 라인-도나우 강의 국경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15]
이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서 물러나자 제위 계승의 문제로 네 명의 황제가 즉시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은 다시 1인 황제 체제로 바뀌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록 본인의 야심 때문에 다른 황제들을 모두 없앴으나 그 역시 로마 제국이 황제 단 한 명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죽기 전 로마 제국을 이리저리 쪼개 자신의 자식들과 친척들에게 각각 맡기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 때 이들 친척은 모두 숙청되고 그의 세 명의 자식들이 각각 로마 제국을 분할해 통치하게 되지만, 살아남은 삼 형제 중 서방을 맡은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고 나서 중간을 다스리던 막내 콘스탄스가 서방 영토를 죄다 흡수하여, 중간의 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제치고 사실상의 선임 황제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상당히 쾌락을 즐겨서 이것을 명분으로 휘하 게르만족 장군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찬탈당했고,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방은 일단 갈루스에게 맡겼다가, 감시하려고 맡긴 고문관들을 죽인 갈루스를 처단하고 자신은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는 한편 서방을 맡을 부제(副帝)는 부친 쪽으론 사촌동생이고 모친 쪽으로는 오촌 조카인 율리아누스를 임명한다.
율리아누스는 서쪽에서 갈리아에 칩입해 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선전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다. 로마는 평화를 맞이했지만 군단이 다시 제멋대로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발생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병 중 일부를 동부에 보내라고 명령하였고 이것을 거부한 군단병들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그 명령에 반항한 것이었다.
율리아누스가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선포하게 되자 로마 제국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지만 내전이 일어나기 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병사하여 율리아누스가 단독 황제로 등극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미 국교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로마 고유의 다신교로 바꾸려고 하지만 격렬한 반발을 겪게 된다. 그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지만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자식이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후계자로 군단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선출되나 불과 일 년 만에 의문사하고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게르만족을 막아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발렌스를 동제로 삼고 그는 서제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서제의 자리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인 그라티아누스가 오른다. 동제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여러 실책으로 고트족에게 로마 군단이 전멸하게 만들고 본인도 전사하여 로마 제국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발렌스의 뒤를 이으라고 서제 그리타아누스에 의해 동제로 파견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 고트족과 강화를 맺고 이런 타격을 잘 수습한다. 서제 그라티아누스가 죽자 서제 자리는 발렌티아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재위한 지 9년 뒤 죽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홀로 2년 정도 다스리다 병사하자 그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들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물려준다.
2.4. 제국의 분열[편집]
Fall of The Roman Empire...in the 15th Century: Crash Course World History #12 |
이 동영상에서 몇 가지 틀린 부분도 있는데, 정교회를 동방 혹은 그리스 정교회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황제에 의해서 선출되었다고 말한 부분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선출에 황제가 간섭할 순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총대주교 선출과 달리[16]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선출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는 평신도인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였고, 그러다 보니 황제와 교회 사이의 충돌도 상당히 잦았다.[17] |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후대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제국 서부와 제국 동부는 서로를 각기 다른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진 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자리잡힌 바 없으며, 모든 포고령은 항시 동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또 동서 로마 양대 궁정은 선임 황제인 쪽이 반대편에게 강력한 내정 간섭을 할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 이전에는 오히려 선임 황제를 배출하는 쪽이 주로 서로마 쪽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두 황제가 주체적인 의사로 정책을 결정하는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어서 국정을 무시했거나 집중할 수 없었고, 동서 양쪽의 실력자들이 스틸리코 외에는 모두 제국보다는 자기 세력과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 경우가 많아서 동서 로마 양쪽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2.4.1. 서로마 제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서로마 제국 문서 참조.
기원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이 일으킨 이른바 '동서 분할'로 인해 세워진 국가다. 395년부터 476년까지 80여년 동안 존속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에 비해 허약했고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를 가지고 비잔티움보다 더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했다. 지도자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두 제국이 다 같았지만, 국력이 건실했던 동로마 제국은 지도자가 무능해도 버틸 수 있었으나 서로마 제국은 버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는 막을 내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 동안 중세가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그 자리에는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세워져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된다.
대부분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476년 서로마 멸망 이전까지의 역사를 가리키지만 로마의 멸망을 5세기로 보는 것은 15세기까지 존속한 비잔티움을 배제한 것이고 고대 로마만을 로마 제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동서로마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실체이며 동서로마가 서로 별개의 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동서로마가 분리되었다고 하지만, 동서로마의 존재는 로마 특유의 다중황제체제 그 이상으로 보기 힘드며 실제로도 동서로마식의 분할통치가 이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원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이 일으킨 이른바 '동서 분할'로 인해 세워진 국가다. 395년부터 476년까지 80여년 동안 존속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에 비해 허약했고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를 가지고 비잔티움보다 더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했다. 지도자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두 제국이 다 같았지만, 국력이 건실했던 동로마 제국은 지도자가 무능해도 버틸 수 있었으나 서로마 제국은 버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는 막을 내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 동안 중세가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그 자리에는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세워져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된다.
대부분 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476년 서로마 멸망 이전까지의 역사를 가리키지만 로마의 멸망을 5세기로 보는 것은 15세기까지 존속한 비잔티움을 배제한 것이고 고대 로마만을 로마 제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동서로마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실체이며 동서로마가 서로 별개의 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동서로마가 분리되었다고 하지만, 동서로마의 존재는 로마 특유의 다중황제체제 그 이상으로 보기 힘드며 실제로도 동서로마식의 분할통치가 이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2.4.2. 비잔티움 제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비잔티움 제국 문서 참조.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운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를 시작으로 볼 때도 있고, 서로마 제국과 같이 395년 동서 분할을 시작으로 볼 때도 있다. 시작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와 시대 구분이 편의상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방인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정복당했으며,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1453년 오스만국과 벌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운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를 시작으로 볼 때도 있고, 서로마 제국과 같이 395년 동서 분할을 시작으로 볼 때도 있다. 시작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와 시대 구분이 편의상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방인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정복당했으며,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1453년 오스만국과 벌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멸망했다.
3. 역대 황제들[편집]
해당 문서 참고.
4. 속주들[편집]
해당 문서 참고.
5. 로마의 후계임을 주장했던 집단[편집]
6. 창작물에서[편집]
7. 관련 문서[편집]
8. 역사보기 틀[편집]
로마의 역사 Historia Romae Ἡ Ἱστορία τῶν Ῥωμαίων |
유럽의 황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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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역사 (Istoria României şi Moldovei) |
고대 | 중세 | 근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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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인 인구 변화 등의 내용은 로마/인구 참조.[2] 역사적인 인구 변화 등의 내용은 밀라노/인구 참조.[3] 다만 근대사가 로마사에서 다시 나왔다는 말은 중세를 비판하는 게 대세였던 계몽시대의 발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4] 로마 군인은 원칙적으로 복무 기간 동안 결혼할 수 없었다.[5]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원정시 일부 군단을 주둔지에서 빼내어 다키아로 이동시키자 집단 항명, 집단 탈영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좀 더 이후의 일이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갈리아의 로마군 중 일부를 동방 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도 했다.[6] 이때 로마에서 얼마나 은광을 채굴했냐하면 히스파니아에서는 은을 제련할 나무가 없어질 지경이었고, 서기 2세기의 그린란드의 빙하에서는 이전, 이후와 비교하여 비정상적으로 높은 납 수치가 검출되었다. 2세기 로마의 은 생산량은 연간 200톤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9세기 카롤링거 왕조와 압바스 왕조의 은 보유고의 5~10배에 달한다. 그러나 2세기 중반 이후로 로마의 은 산출량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한다.[7] 은화의 경우, 카이사르 시대에 90% 이상의 수치를 보였던 은 함량이 3세기 초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3세기 중반에는 30%, 말기에는 5%까지 감소했다. 크기가 함께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 기존 화폐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8] Jones, "Slavery in the Ancient World" 191~194p.[9] 오히려 위의 기술들은 중세 농업생산력 증가를 뒷받침하는 기술이 되었다.[10] 상품 인플레이션에 대한 개념이 미비했던 과거에는 화폐의 증가와 인플레이션의 관계를 정확히 몰랐거나 알고 있더라도 효과적으로 제정을 대체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재정 상태에 문제가 생겨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초래해 심하면 국가가 해체되는 원인 중 일부가 될 수도 있었다.[11] 여기에 로마도 근대 이후에 정립된 체계적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기에는 행정력이 떨어져서 세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12] 한 곳을 우르르 밀고 들어가 뚫어 버린 뒤, 약탈하고 다시 국경 너머로 돌아가는 식이었다.[13] 파르티아는 봉건제라서 로마랑 전쟁을 하려해도 영주들이 말 안 듣으면 전쟁을 못 한다. 이러다 보니 내부적으로 단합이 안 되어 로마보다 유리한 조건에서인데도 로마한테 많이 털리고 살았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는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제를 이루면서 로마를 위협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많이 동원했다.[14] 수치적으로 감소하기도 했고, 있는 노예들조차 틈만나면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노예제 경제가 어려워졌다. 노예의 가격도 엄청나게 올라 부유층이랑 귀족들도 노예 산다면 고민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유민의 수를 늘려 세수를 확보하려는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제도적으로 모든 노예가 사라진다.[15] 그렇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식 세제 개혁과 군사력의 증강은 당시로서는 적절한 방식이었을 수 있지만 예산만큼 거두는 세금의 증가와 관료체제와 군비의 확장으로 증가한 비용은 오히려 장기적인 국력의 침체를 가지고 온다고 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로마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런 조치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실제로 이러한 조치 이후 로마는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계속 줄어들게 된다. 동서 분열된 이후의 서로마가 히스파니아, 이탈리아, 갈리아,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탈리아만 가지고 있었던 포에니 전쟁 때의 로마보다 훨씬 적은 병력의 동원력을 가졌던 원인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16] 러시아의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차르가 임명했다.[17] 이것은 결국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던 동서 교회가 완벽히 분리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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