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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한니발Hannibal Barca) 원정

by 이덕휴-dhleepaul 2019. 3. 31.


제2차 포에니 전쟁(라틴어:Secundum Bellum Punicum) 또는 한니발 전쟁(라틴어:Bellum Hannibalcum)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한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로마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니발 전쟁으로도 부른다. 이 전쟁에서 로마 공화정은 초기에는 명장 한니발에 밀려 이탈리아 본토까지 침략당하였으나 끝내 역전에 성공하여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차지한다.

한니발의 이동 루트.https://www.youtube.com/watch?v=uRt89kaA7tw

한니발 원정’ 개요

· 장정의 주인공들 : 한니발과 그를 따르는 카르타고인 및 에스파냐, 누미디아, 골 등의 용병들
· 장정 시기 : BC 218~BC 203
· 장정 경로 : 에스파냐-프랑스 남부-이탈리아-카르타고
· 장정 거리 : 약 4천Km·

 

한니발 바르카스(Hannibal Barcas, BC 247~BC 183). 그 이름은 “불멸의 명장”이라는 찬사로, 또 한편으로는 “비운의 영웅”이라는 애사로 수천 년의 서양 역사에서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다. 그 스스로가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에 이은 역사상 세 번째의 명장이며, 자마에서 지지만 않았던들 당당히 첫 번째가 되었으리라”고 평가했듯, 그는 당대 최강의 로마군을 상대로 눈이 부시도록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런 초인적인 역량과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쟁에서 지고, 멸망해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쓸쓸히 숨을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이미지가 역사에 그토록 강렬하게 새겨진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전장에 나아가 적과 맞부딪쳐 싸운 게 아니라는 점,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론 강이라는 천연의 장애물을 극복하며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남유럽의 절반을 행군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정 끝에 로마인들 앞에 날벼락처럼 나타났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그와 그의 군대가 이뤄낸 장정은 아나바시스,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에 뒤이은 고대 서양의 세 번째 대장정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
 

4세기 말경 카르타고 중장보병(重裝步兵)의 모습. 카르타고는 시민군이 병력의 주축이 되었던 로마와 달리, 해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업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출처: (cc) Aldo Ferruggia at en.wikipedia.org>


로마와 카르타고는 왜 싸웠는가.

 기원전 4세기 중엽, 알렉산드로스가 거침없이 아시아를 정복해나가던 시절만 해도 두 나라가 나라의 존망을 걸고 격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로마는 삼니움 전쟁(BC 343 ∼ BC 341)과 라티움 전쟁(BC 340 ~ BC 338)을 치르며 이탈리아 중부를 장악해 나가던 육지의 강소국이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출발했지만 완전히 독립된 제국으로 성장하여(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발상지인 티레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카르타고인들은 “고향 사람들”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묵살했다), 두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을 거쳐 시칠리아까지 장악한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우호 관계를 이어왔다. 기원전 509년에 카르타고는 로마와 상호불가침과 우호 관계를 약속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로마는 시칠리아를 카르타고령으로 인정하는 한편 카르타고 근해는 로마 배들이 “진입하지 않는다”, 시칠리아 주변의 바다는 “긴급 시에는 진입한다”라고 하면서 로마 근해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에서 카르타고의 선박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도록 하여, 자국이 카르타고보다 약소국임을 드러냈다. 기원전 348년에 이 우호 조약은 갱신되었으며, 다시 기원전 306년과 기원전 279년에 보완되었다. 특히 279년의 조약에서는 동방의 신흥 강자, 에피루스(Epirus: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지방)의 피로스(Phyrhos, BC 319 ~ BC 272)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명시했으며, 이에 따라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로마를 공격했을 때 카르타고는 로마 편에 서서 싸움으로써 피로스를 물리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피로스를 물리친 로마가 기원전 266년까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완전히 장악, 시칠리아를 바로 코앞에 두면서 서부 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르자, 하나의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는 형세가 되어갔다. 결국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에 머물던 라틴 계열 용병대가 약탈을 벌이자 시라쿠사(siracusa: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국가)의 히에론 2세가 무력 진압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용병대는 같은 라틴인이라는 이유로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로마는 고민 끝에 요청을 받아들여 시라쿠사에 파병하였는데, 이는 기존에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었던 조약을 위반하는 일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히에론도 구원 요청을 해왔기에 카르타고에서도 시칠리아에 파병,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로마의 병사들. 제국 시대에 트라야누스 황제 승전 기념비에 새겨진 부조의 모습이다. 로마의 주력군은 용병에 의존한 카르타고와 달리 시민군이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훨씬 일찍 수립되어 일찍 대국이 된 나라였지만, 군사 제도 면에서 로마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군신(軍神) 마르스의 후예(로물루스)를 건국자로 받들던 로마는 그야말로 “전쟁의 나라”로, 민회에서 선출되는 집정관은 행정권과 군사 지휘권을 동시에 행사했으며 로마 시민은 누구나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반면 해신(海神)이자 상업의 신인 멜카르트를 중시하는 카르타고는 전쟁의 나라라기보다는 상업의 나라였으며, 행정은 원로원이 맡고 군사는 직업군인인 장군이 지휘하는 이원 체제인데다 해군의 일부를 제외하면 시민이 직접 병력의 주축이 되지 않았다. 대신 상업으로 쌓은 부를 이용해 지중해 세계에서 널리 용병을 고용했으며, 그것도 모자라면 지배 지역에 병력 차출을 요구했으나, 기본적으로 로마에 비해 지배 지역을 엄격히 통제하거나 제국의 일부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카르타고의 식민지들은 영토라기보다 상업 거점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대조적인 면은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포에니 전쟁의 추이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로마군은 코르부스를 이용해 적함의 기동을 차단하고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사기나 지휘 체계의 정연함 면에서 로마군에 미치지 못하던 카르타고 육군이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을 제압하지 못한 한편, 질적ㆍ양적으로 우수했던 카르타고 해군을 신출내기 로마 해군이 쉽게 무찌를 수도 없었다.

로마 쪽에서 새로운 발상을 함으로써 이런 묘한 교착 상태가 깨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해군을 육군처럼 운용하는 것이었다. 코르부스(corvus)라 불리는 적교(吊橋)를 군함에 설치, 카르타고 배에 접근하면 이를 내려서 적함의 기동을 차단한 다음, 로마 군단이 적함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도록 했던 것이다. 그 효과는 결정적이어서, 기원전 256년의 엔코무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1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여세를 몰아 레굴루스가 이끄는 군단을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에 상륙시켰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수비대를 가볍게 짓밟고 수도를 유린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항복 조건을 논의하던 중에 스파르타에서 온 용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갖은 노력 끝에 해군을 재정비했으나 기원전 241년의 아에가테스 해전에서 다시 한번 대패했고, 강화를 요청한다. 마침 남프랑스의 골 족이 북이탈리아를 침입해온 참이어서 로마는 이를 받아들였다.

강화 조건은 시칠리아를 로마령으로 하고, 카르타고 배는 로마 근해에 접근할 수 없으며(이는 종전의 조약에서 주어졌던 조건을 뒤집은 것이었다. 단, 이제는 로마령이 된 시칠리아 등까지 거기에 해당되었으므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에서 사실상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3천 2백 탈렌트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등이었다.

로마에 대한 설욕을 맹세하는 어린 한니발.

이렇게 굴욕적인 강화는 당연히 많은 카르타고인의 울분을 자아냈으며, 특히 전쟁으로 먹고사는 무인 계급에서 분노와 원한이 두드러졌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 Barcas, BC 270? ~ BC 228)였다. 대대로 장군을 역임한 가문의 후계자인 그는 총사령관으로 시칠리아에 파견되어 로마군을 몇 차례나 대패시켰지만, 조국의 패배와 굴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전 후 1년 뒤에는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카르타고 용병대가 사르디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의 요청에 응한다는 명분으로 파병한 로마가 사르디니아까지 삼켜버리는 걸 보아야만 했다. 이러다 보니 카르타고의 상권은 축소되고, 지중해 연안국들이 너도 나도 카르타고보다 로마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다시 전력을 보강해서 설욕할 전망도 불투명했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땅으로 넘어가 스스로 복수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바로 카르타고가 세력을 뻗은 지 오래지 않았던 에스파냐였다. 기원전 237년에 에스파냐로 넘어가기 전에, 하밀카르는 자신의 아들을 신전으로 데려가 맹세를 시켰다고 한다. “일생 동안 로마의 적이 되어, 로마와 싸우겠나이다!” 아홉 살배기 소년은 엄숙하게 맹세를 했다. 그가 한니발이었다.

헤라클레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꿈을 따라서

하밀카르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 가장자리에 약간 존재했을 뿐이던 카르타고의 세력을 몇 년 만에 몇 십 배로 키워냈다. 그가 새로 건설한 항구는 ‘카르타고 노바(Cartago Nova, 새로운 카르타고)’라 불렸으며, 단시간 만에 지중해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에스파냐의 풍부한 은광과 인구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위축된 카르타고의 전력을 보강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군사 지휘권과 함께 행정권까지 행사하며 사실상 ‘에스파냐의 왕’처럼 군림하는 모습에 본국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때의 에스파냐를 카르타고와는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 그의 이름을 딴 ‘바르카스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눈치챈 로마는 하밀카르를 억제하기보다 회유하려 들어, 로마-카르타고-바르카스 사이의 미묘한 외교 관계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 외교 관계가 매듭지어진 것은 기원전 228년에 하밀카르가 전사하고, 뒤를 이은 그의 매부, 하스드루발에 의해서였다.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26년에 로마와 에브로 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의 북동부를 흐르는 에브로 강을 두 나라의 사실상 경계선으로 삼고, 다만 그 아래쪽에 있는 사군툼은 로마의 세력권으로 인정해 침범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를 정리했다.

 

하밀카르가 건설한 카르타고 노바. 지중해 연안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한 이곳은 오늘날 스페인의 카르타헤나(Cartagena)이며, 로마인들이 남긴 원형극장이 보인다. <출처: (cc) Alejandra Diego Eguren at en.wikipedia.org>

그동안 한니발은 10대의 나이로 전장에 나가 전투와 전술을 익히는 한편, 스파르타 출신의 가정교사 소실로스에게서 호메로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알렉산드로스에 이르는 문학, 철학, 역사, 지리를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이야기는 그의 피를 들끓게 했다. 에스파냐에서 소 떼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고 하는 헤라클레스의 전설도 흥미진진했다. 그는 몇 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익혔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장차 알렉산드로스의 미처 가지 못한 길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온 종족들이 뒤섞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나가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기원전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을 당하자 군대는 만장일치로 26세의 한니발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 ~ AD 17)의 기록대로 “먹고 입고 자는 것은 그 어떤 병사와도 차이가 없고, 맹렬하게 싸우고 통쾌하게 무찌르며, 가장 앞에서 돌격했다가 가장 뒤에서 퇴각하는 용기에는 그 어떤 병사도 따라갈 수가 없었던” 한니발에게 자연스럽게 모여진 존경과 신뢰의 결과였달까.

어린 시절의 맹세가 여전히 가슴에 사무쳤던 한니발은 집권하자마자 로마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로마 사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군툼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에브로 조약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이 행위에 대해 로마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골 족과의 전쟁 끝에 가까스로 진압한 북이탈리아가 아직 불안정했기 때문에 곧바로 원정군을 보내지는 않고, 카르타고 본국에 사절을 보내 “한니발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그를 카르타고로 소환하여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독립국이던 바르카스에 그런 조치가 통할 리도 없었으나, 카르타고 원로원은 “에브로 조약은 하스드루발이 마음대로 맺은 것으로,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사절은 성이 나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으며, 이로써 전쟁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이 시작하고, 한니발이 주도했으며, 마무리 역시 한니발이 담당했기에 리비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 기록했다.

 

 

 

 

한니발, 게으르게 출정하다?

사군툼은 로마의 원군이 오지 않는 상태로 분전하다가 8개월 만에 함락되었고, 이때 한니발은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곧바로 행동에 들어갈 줄 알았던 그는 ‘바르카스(번개)’라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굼뜬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원전 218년 초에 전쟁 결정을 들었으면서 석 달이 지난 뒤에야 사군툼에서 출발해 에브로 강을 넘었고, 그 뒤에도 또 석 달 이상을 지체하다가 218년 9월에야 본격적으로 출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그는 가데스의 멜카르트 신전을 방문해 어린 시절의 맹세를 되풀이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무찌르라”는 바알 신의 신탁을 꿈속에서 받았다고도 하고, 사군툼을 약탈해서 얻은 재화를 용병대에게 나누고 일부는 카르타고 본국으로 보내 전쟁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에스파냐 본거지를 위해 동생인 하스두르발에게 4만의 병력을 주어 지키도록 하고, 아내 이밀케와 갓 태어난 아들을 카르타고 본국으로 피신시키는 등의 조치들을 두루 취했다. 그리고 마침내 약 6만의 병력(보병대 5만, 기병대 1만)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로 진출했다.

이탈리아 카푸아에서 발견된 한니발의 흉상. 하지만 후대에 상상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의 실제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고인, 에스파냐인, 골 족 등이 섞여 있는 ‘다국적군’이었으며, 여기에는 당대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누미디아(Numidia: 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 기병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7마리의 코끼리도 있었다. 한니발은 이 코끼리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써서, 역사가 중에는 “그는 병사보다 코끼리에 더 연연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코끼리는 고대의 탱크라고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동물이므로 훈련된 코끼리라도 전장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일이 많았고, 도리어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로마군의 경우 이전의 전쟁에서 코끼리를 많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 거대한 몸집이 주는 위압 효과도 적었다. 카르타고의 전투 코끼리는 아시아 코끼리와는 달리 등에 일종의 포탑을 올려놓고 그곳에서 화살이나 투창을 발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전투력은 더더욱 신통치 않았다.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가 될 칸나에 전투에서는 한 마리의 코끼리도 등장하지 않은 반면, 가장 뼈아픈 패배인 자마 전투에서는 아군 코끼리들의 난동이 패배의 원인을 상당수 제공했다. 그래도 한니발은 코끼리를 어떻게든 전쟁터로 끌고가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했다.

그 까닭은, 아마도 골 족을 겨냥한 전시 효과가 크게 계산되었을 것이다. 한니발은 남프랑스에서 알프스 일대에 걸친 골 족의 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데다(또 다른 로마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당시 로마가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을 77만이라고 기록했다. 그것은 다소 과장이더라도, 최소 십만 대의 병력이 동원 가능했음은 확실하다) 전투력도 강한 로마군을 상대로, 게다가 적지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최근까지 로마와 싸웠던 골 족을 같은 편으로 만들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거꾸로 그들이 로마 편에 붙어 한니발의 뒤통수를 치거나, 에스파냐를 공격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일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군이야 코끼리를 많이 봤지만 골 족으로서는 거의 처음 보는 이 동물에게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동물들을 이끄는 한니발에 대한 외경심을 품고 그 군세를 실제 이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기 전뿐 아니라 넘은 후에도 한동안 “미적거린” 까닭도 같은 선에서 설명이 된다. 당시 그는 한때 하루 평균 4킬로(40킬로가 아니다)라는, 행군이라기보다 유람 수준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 까닭을 두고 [한니발 왕조]를 쓴 덱스터 호요스는 “로마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고 읽었다. 당시 로마가 두 집정관이 이끄는 군대를 모두 에스파냐 쪽으로 보내느냐, 둘로 나누어 한쪽은 에스파냐로, 다른 한 쪽은 카르타고로 보내느냐를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중간에 가로막아 전멸시킨다. 후자라면 에스파냐 방면의 적을 우회하여 곧바로 이탈리아로 쳐들어간다. 어느 쪽이든 로마는 일시적인 병력 공백 상태를 겪게 되어, 무릎을 꿇게 되리라!

그런 분석도 그럴듯하지만, 역시 골 족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로마나 카르타고처럼 단일 정치체가 아니었던 골 족은 여러 부족들과 일일이 협상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도 고려해서 신중한 행보를 택해야 했다. 게다가 빠른 행군을 하려면 휴대 식량을 적게 가져가야 하고, 그러면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랬다가는 골 족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론 강 도하 작전


기원전 218년 가을, 한니발은 원정 이후 처음으로 중대한 문제에 부딪쳤다. 바로 남프랑스를 관통하는 론 강이었다. 피레네 산맥은 비교적 수월하게 넘었으나(그래도 일부 산악 주민들의 습격 등으로 피해를 보았으며, 에스파냐와의 통로를 확보해두기 위해 상당수의 병력을 남겨둬야 했다), 너비가 넓게는 약 1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강을, 무엇보다도 코끼리들을 데리고 건너는 일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적대적이라고 알려진 볼카에 족이 강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지체할 수도 없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BC ? ~ BC 211)가 이끄는 로마군(다른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는 시칠리아로 갔다)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강을 건너는 중에 공격을 받는다면, 한니발의 야망은 이탈리아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스러질 판이었다.


한니발은 강을 따라 하루를 꼬박 걸어, 비교적 너비가 좁은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강을 건너기로 했다. 보병은 목제(木製) 방패를 강에 띄우고 그 위에 엎드려 손으로 물살을 헤치며 건넜고, 기병은 근처에서 쓸어온 나룻배와 새로 만든 뗏목을 이용해 건널 수 있었다. 문제는 코끼리였다. 물을 무서워하는 이 짐승을 위해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큰 강을 가로지를 만한 다리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뗏목에 코끼리를 태우고 론 강을 건너는 한니발 군의 상상도. 그러나 카르타고의 전투 코끼리는 그림과 달리 등 위에 포탑을 설치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아시아 코끼리와 달리 전투력이 신통치 않았다.

이참에 급보가 들어왔다. 로마군이 이제 그야말로 지척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끼리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도하를 포기하고 다른 도하 지점을 찾아 떠날 것인가? 그는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만들다 만 다리의 옆에 목책을 높이 세우고, 남은 목재로 큰 뗏목(길이 60미터, 너비 15미터)을 만들도록 했다. 다리를 건너가는 동안 코끼리가 강물을 보지 못하게 해서 두려움을 없애고, 다리에 덧댄 뗏목에 올라서면 천천히 출발시켜서 강 저편으로 코끼리를 옮기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게 한 것이다. 한니발은 또 암컷 코끼리들을 먼저 보내라고 했다. 코끼리도 수컷은 유달리 야단스러웠던 모양인데, 그래도 암컷의 뒤꽁무니를 따라 불만과 공포를 억누르고 뗏목에 올라타리라고 본 것이다. 수컷이란 그런 존재니까.

이런 조치로 상당수의 코끼리가 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몇 마리는 뗏목 위에서 놀라 요동쳤으며, 끝내 타고 있던 병사들과 함께 물속으로 빠졌다. 한니발의 병사들은 살려달라는 동료들의 비명과 코끼리의 귀를 찢는 울음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떨구며 도하 임무를 완수했다.

알프스를 넘어라!

겨우겨우 강을 건넌 한니발 군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볼카에 족과의 일전을 대비했지만, 의외로 그들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고생 끝의 다행을 각자의 신들에게 감사하며, 한니발 군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도착한 것은 사흘 뒤였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한니발을 놓쳤음을 알고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뒤를 돌아 한니발을 쫓고, 나머지는 에스파냐를 공략하도록 했다.

한편 한니발 군은 한 달 가량의 행군을 계속, 마침내 알프스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내다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막상 알프스를 눈앞에 보자 동요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는데, 한니발은 그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놀라운 일을 해냈다. 피레네를 넘고, 론 강을 건너지 않았는가? 저 알프스가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고 있다. 일찍이 로마인의 조상들은 아이를 업고, 양과 염소를 끌고, 저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 우리 용사들이 똑같은 일을 해내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사실 그랬다. 알프스를 넘는 일 자체가 누구도 꿈꿀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규모의 군대가”, “코끼리와 말, 소 등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한겨울에” 넘지 않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때는 이미 11월, 아직 산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도 서리가 내리고 눈발이 날리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뒤에서는 스키피오가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고, 앞에서는 알프스 고산 부족들과의 협력의 약속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형편에서, 전력이라기보다 애물단지에 가까웠던 아프리카 코끼리들을 끌고 밀며 눈과 얼음으로 덮인 가파른 능선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살을 에는 칼바람과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 속에서!

 

알프스의 산봉우리들 사이로 빙하가 흐르는 모습. 한니발이 정확히 어떤 루트로 이 산맥을 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출처: (cc) Robiand at en.wikipedia.org>

그들이 택한 경로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역사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지만(어떤 학자는 부대가 둘로 나뉘어 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그들은 알프스에 발을 디디고 처음 9일 동안은 계속 올라가기만 했다. 거의 첫날부터 산악 부족의 공격이 쏟아졌고, 간신히 한 줄로 서서 건너갈 수 있는 협로에서 습격을 받다 보니 패닉에 빠져 서로 먼저 가려고 밀다가 낭떠러지로 말과 사람이 함께 우르르 떨어져내리는 참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으며, “멈추지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소리쳤다. 허둥지둥하다보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말을 달려 산악 부족의 진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고, 그들을 내쫓아버림으로써 동요하던 군심을 단숨에 잠재웠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측근 병사들과 함께 산악 부족 마을을 공격,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빼앗아 돌아왔다. 원정 초기에 그가 취했던, 전투보다는 외교에, 과감함보다는 신중함에 치중하던 자세는 새로운 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았기에 단숨에 벗어던지고, 용맹무쌍한 지도자의 모습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가장 단련된 병사들과 함께 대열의 후위를 맡아 산을 올랐다. 그곳이 가장 위험한 위치였던 것이다.

산악 부족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카르타고 군이 봉우리를 대략 올라갔다 싶으면 일제히 뛰어나와 대열의 마지막을 집중 공격해오곤 했다. 한 번은 그런 공격을 막던 한니발의 부대가 본대와 떨어져서 고립된 적도 있었다. 그들은 불도 식량도 없이 하룻밤을 알프스의 산기슭에서 지새웠고, 다음 날 가까스로 본대에 합류해보니 이미 상당수의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거나 산악 부족에게 살해, 또는 물자를 약탈당한 뒤임을 알게 되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군을 그린 상상도. 위험의 순간마다 한니발은 용맹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과시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전진했다. 사실 살기 위해서는 전진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9일이 지나고 나자 길은 대체로 내리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길은 이전의 길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위험했다. 오래 전에 내린 눈이 딱딱하게 굳어진 위로 새로 내린 눈이 살짝 덮인 부분, 그곳을 디디면 사정없이 미끄러졌다. 병사들은 우당탕 하고 미끄러지는 소리와 돌 구르는 소리, 그리고 사람이나 말의 구슬픈 비명 소리를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다음 걸음이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잔혹한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코끼리들은 공포와 추위로 몸이 오그라붙은 듯했고, 여러 병사들이 사방에서 붙잡고 조심조심, 거의 들고 나르듯이 몰고가야 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산악 부족들이 굴려내리는 바위들이 뒤에서 덮쳐왔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편이 나을 것을,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저마다의 고향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후미에 있던 한니발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능선의 저 멀리를 가리켰다. “봐라! 포 강이 흐른다! 저기가 이탈리아다! 마침내 우리는 로마를 발밑에 두고 있다!” 다 죽게 생긴 마당에 이탈리아는 무슨 얼어죽을, 이 말이 병사들의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찰나 그는 나무를 베고, 바위를 조각내 던져서 죽죽 미끄러지는 능선에 발 디딜 곳을 만들라고 했다.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큰 바위를 불에 달군 다음, 병사들의 보급품인 산도가 높은 포도주를 그 위에 쏟아부어 쪼개지게 했다고 한다(사실 포도주가 얼마나 시고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지만, 바위를 쪼갤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고, 주로 열의 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생명수와 같은 포도주를 아낌없이 써서 한 줄기 생존의 길을 연다는, 실로 숭고한 체험으로써 병사들의 영혼을 흔들었으리라). 그 바위 조각들과 나뭇가지의 잡동사니를 켜켜이 쌓고 다짐으로써 가파른 설원에 대충 길이 생겼고, 그 길로 코끼리들도 내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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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마터호른. 최근 한니발 군이 이 봉우리 옆을 지나갔을지 모른다는 근거가 발굴되었다. <출처: (cc) Sunna at en.wikipedia.org>

알프스를 넘는 동안 한니발 군의 희생은 엄청났다. 출발할 때의 병력은 6만이었으나 알프스를 내려왔을 때의 병력은 2만 6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시 희생은 컸다. 한니발 군이 알프스를 내려왔을 때 병력은 당초의 6만에서 2만 6천(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 있었다. 물론 알프스에 닿기 전에 이미 상당수가 이탈하거나 사망했지만(에스파냐의 어느 부족은 피레네를 넘을 때까지 군단의 최종 목표를 몰랐다가, 알프스를 넘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보따리를 싸버렸다), 알프스에서의 병력 손실은 아마 한니발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수준이었다. 그토록 고생하며 끌고온 코끼리들도 결국 단 한 마리만이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강에 빠지거나 벼랑에 떨어진 수도 많았겠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굶주림(코끼리의 엄청난 식사량을 생각할 때,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제대로 배를 채웠을 리 만무하기에)으로 숨져간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15일 동안의 알프스 횡단, 어쨌든 그 고난은 이제 끝났다.

기원전 218년 12월, 마침내 로마는 건국 이래 최대의 공포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적의 한니발, 그 이유는?

한니발이 도달한 이탈리아 북부는 로마가 평정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골 족의 땅이다시피 했다. 그의 기대대로, 그곳의 골 족들은 손을 잡고 로마를 치자는 한니발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사실 막 출발하려던 스키피오의 발목을 뜻밖의 골 족 반란이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으며, 덕분에 한니발 군이 론 강 도하 지점에서 최악의 위기를 만나지 않을 수 있었기도 했다). 마침내 골 족의 합류로 세를 불린 한니발 군과 로마군 사이의 첫 전투가 티키누스 강변에서 벌어졌다.

로마군을 이끈 것은 남프랑스에서 한니발과 숨바꼭질을 했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한니발은 로마 기병대를 압도하는 기병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스키피오 군을 격파했으며, 스키피오는 중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이때 그의 생명을 구한 10대 소년이 바로 그의 아들이자, 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리게 될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진격했고, 계속해서 이겼다. 트레비아 강변 전투에서 또 다른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의 군대를 유인해 매복으로 궤멸시키고, 기원전 217년 초에는 트레시메네 호숫가에서 새로 집정관이 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몰아붙여 호수에 빠트려 죽이거나 창과 칼로 도륙해버렸다.

이때쯤 비로소,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영웅 심리에 들뜬 애송이가 아니라 저 피로스를 뛰어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간을 보던 나머지 골 족들도 앞다투어 한니발의 진영에 합류해나갔다.

 

한니발과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전투 장면을 새긴 부조.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아들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 아들은 훗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출처: (cc) BurgererSF at en.wikipedia.org>

천하의 로마군을 한니발은 어떻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한니발의 천재적인 전술, 누미디아 기병대를 비롯한 기병대 전력의 우위, 골 족의 협력으로 로마군보다 우위에 서게 된 현지 지형 정보, ‘알프스를 넘어오느라 지쳐빠진, 겨우 2, 3만의 오합지졸’이라고 본 로마군의 방심 등등.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병사들의 사기와 군기였다. 이제껏 용병 위주의 카르타고 군은 병사 개인의 전투력으로 보면 농기구를 집어던지고 무기를 잡은 로마 시민군보다 한결 우수한 전사였으나, 충성심이나 감투 정신은 로마군에 훨씬 못 미쳤다. 돈이나 받으면 끝인 그들이 ‘내 가족과 내 고향’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불타는 시민군만큼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탈영하거나, 심지어 칼을 거꾸로 잡고 본국에 대적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하밀카르 이래 이런 문제점을 숙지했으며, 그것이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주요 원인이라고 여겼던 한니발은 ‘어떻게 뛰어난 전사이면서 용감한 투사일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 스스로 병사들과 먹고 자면서 그런 모범적인 군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인성을 바꾸기에 충분치 않을 터였다.

그러면 해답은 무엇인가? 한니발이 과연 거기까지 의도했던 것인지 확증은 없으나, 결과적으로, ‘장정’이었다. 에스파냐에서 피레네를 넘고 론을 건너고, 그리고 한겨울에 코끼리들을 끌고 알프스를 넘는 말도 안 되는 대장정. 그 과정에서 로마에 비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은 반 이상이나 줄어버렸지만, 살아남은 병사들은 지구상의 어떤 군대보다도 혹독하게 단련되었다. 그 장정을 통해 용병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사무치게 배웠으며,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를 가진 채로 오직 돈 때문에 함께했던 진영에서 가족 이상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침착하게 머리를 쓰면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도, 사람이 마음만 굳게 먹으면 넓은 강이고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도 뼈에 새기듯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한니발이라는 사나이, 자신들의 상당수보다 젊으며 알프스 산중에서 눈 한쪽까지 잃어버린 사나이야말로 세상 끝까지 따라갈 가치가 있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도.

여기에 한니발은 로마 역사가들이 한목소리로 비난한 또 하나의 성향, 즉 ‘잔인함’으로 군기를 엄정하게 잡았다. 그는 불합리한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잘못을 용서하는 법이 없고, 아군이나 적이나 극단적인 처벌로 마무리짓곤 했다. 물론 그가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없이 엄격하기만 했다면 거친 용병들의 신망을 받기는커녕 즉각적인 반란에 직면했을 것이다. 반대로 유능하고 유덕하지만 한편 인자한 덕장의 모습을 보였다면, 일단 알프스라는 극한상황을 벗어난 뒤까지 용병들의 개별 행동을 통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함으로써 믿을 수 없는 대장정에서 살아남고, 다시 로마군을 사정없이 깨트리는 무적의 전쟁 기계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나바시스의 크세노폰과 동방 원정을 이끈 알렉산드로스도 탁월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크세노폰은 말로 병사들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사정없이 군기를 잡는 스타일이었고, 따라서 위기를 벗어난 한참 뒤까지 병사들의 인망을 얻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솔선수범의 미덕도 얼마간 보였으나 기본적으로 자신을 신이 내린 존재로 치장했으며, 왕으로서의 권위와 신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반대 의견을 가진 부하들을 억누르다가, 안 되면 가혹한 처형으로 본보기를 보였다(클레이토스와 칼리스테네스의 예처럼).

그들에 비해 한니발은 “우리의 형제이자 아버지”로 자신을 이미지화함으로써 다국적 용병이라는 좀처럼 화합하기 힘든 부대원들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고, 일사불란하게 자신을 따르도록 만드는 데 한 수 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가 승승장구하던 때는 물론이고, 이후 십여 년 동안 남부 이탈리아를 정처 없이 떠돌며 답답한 세월을 보내던 때조차도 단 한 차례의 반란이나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니발은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는가?

한니발의 전성시대는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중 포위 전술’의 교과서로 알려지게 된 이 전투의 결과 로마군은 약 이천 년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야 비로소 깨지게 될 기록적인 대살육(단 하루 동안 약 5만 명 전사)을 겪었고, 이후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BC 184)가 나타날 때까지 기본적으로 파비우스의 전술에만 의존, 한니발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거점 방어에만 주력하는 소극적인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 한니발과 카르타고 군의 세력이 정점에 달했던 이 전투에서 5만여 명의 로마군이 전사했고, 집정관 파울루스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영광의 뒤로, 정작 한니발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전쟁 목표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전쟁사가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듯, 한니발은 로마를 초토화시키고 로마인을 절멸시키기 위해 알프스를 넘은 것은 아니었다(설사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의 병력으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에스파냐인들과 골 족을 회유하여 카르타고의 편으로 만들었듯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라틴 동맹’을 깨트리고, 로마 시가 지배하고 있는 속주와 식민지, 동맹시들이 자신에게 붙거나 최소한 로마에서 독립하는 상황을 목표로 삼았다. 또는, 덱스터 호요스, 조반니 브리치 등의 분석처럼, 로마에 큰 타격을 줌으로써 로마 쪽에서 강화를 요청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앞서 에피로스의 피로스가 로마를 몇 차례 대패시켰을 때 실제로 로마 원로원은 그런 움직임을 보였으며, 또 다른 강대국(다름 아닌 카르타고)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로마가 피로스에게 항복하는 일이 실현되었을지도 몰랐다. 한니발은 칸나에에서 이긴 뒤 로마 원로원에 정중한 태도로 항복을 권유했는데, 따라서 그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로스 때에 비해 로마는 더 강해졌고, 이탈리아에 더 굳게 뿌리내린 상태였다. 따라서 한니발이 여기저기 들이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점령지를 얻지도, 전력을 무섭게 강화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항복까지 고려할 일은 아니었다. ‘라틴 동맹의 붕괴’ 역시 칸나에 전투 직후에 브루티움, 삼니움, 캄파니아 등 수십 년 전 삼니움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저변에 남아 있던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펜트리, 아브루조 등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그런 반란들도 전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자 수그러들고 말았다.

삼니움 인들.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이들은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로마에 복속되었으나 한니발 당시에는 로마에 완전히 동화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니발은 누구보다 그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기를 기대했으나, 그 일부만이 일시적인 봉기를 하는 데 그쳤다.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한니발 군이 원조가 필요했던 중요한 순간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한니발의 실낱 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이제 믿을 것은 외부에서의 원조, 즉 카르타고 본국과 에스파냐에서의 병력과 물자 지원밖에 없었는데, 로마 해군은 전쟁 초기에 이미 카르타고 해군을 박살내며 제해권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의 원군 시도는 기원전 207년에 하스드루발이 메타우로스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허사로 돌아갔다.

이에 한니발의 행보는 기원전 211년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떠도는 것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한니발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대장이던 마르하발, 리비우스, 그리고 현대의 몽고메리 같은 사람은 “한니발은 승리를 이용할 줄 몰랐다. 칸나에에서 이긴 다음 곧바로 로마 시로 쳐들어갔어야 했다.”고 했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공격 앞에 로마 시민들이 피신한다면,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를 불태운 크세르크세스가 절치부심한 그리스인들의 저항에 마주치게 되었던 일을 재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농성하며 저항한다면, 그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공성전은 한니발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리 튼튼한 요새도 아니었던 사군툼을 함락시키는 데 8개월이나 잡아먹었던 그가 아닌가. 그가 로마 시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이탈리아 각지에 산재해 있던 로마군이 달려와 그의 뒤통수를 친다면,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장정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스키피오. 그는 한니발의 방식을 본받아 한니발에게 이김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로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출처: (cc) shakko at en.wikipedia.org>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라틴 동맹국들을, 카르타고를, 에스파냐를, 그리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끝내 그의 고독을 깨트리며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자신이 티키누스와 칸나에에서 살려보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는 발이 묶여 있는 한니발을 직접 상대하기 전에 그의 본거지인 에스파냐를 들이쳤으며, 기원전 203년까지 그곳을 철저히 유린하고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든든한 전력 공급처이던 누미디아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스키피오의 공세 앞에 카르타고 원로원은 무릎을 꿇었고, 에스파냐 전역과 카르타고 함대 전부를 넘겨줄 뿐 아니라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소환한다는 내용의 항복 문서를 바쳤다.

이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러나 사방의 길이 모두 막힌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기원전 203년이 기울어갈 무렵, 그는 그토록 고생하며 다다르고 악착같이 싸웠던 이탈리아를 떠나 뱃길로 카르타고에 이르렀다. 그의 장정은 끝난 것이다.

한니발은 왜 실패했을까? 그가 대장정을 감행하며 조련한 병력 외의 아군,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군은 여전히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한니발을 상대하면서(정확하게는 회피하면서) 이들과 싸울 수 있었던 로마가 한니발의 길을 모두 막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한 가지 요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참으로 씁쓸하게도, 평화보다는 전쟁을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에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궤멸시키는 대신 일찍이 로마와 에트루리아, 삼니움, 마그나 그레시아 등이 할거하던 시대로 이탈리아를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땅을 카르타고가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카르타고의 조정 아래 국가 간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카르타고적 지중해 질서’의 한 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수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로마에 항거해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카르타고라면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부담도 거의 주지 않는 자유와 평화를 보장할 텐데?

그것은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이 시작된 이래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다보니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계층이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평민들은 싸움에 나가 재물과 노예와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귀족들은 명예와 권위와 영유지를 더할 수 있었다. 심지어 평화 지향적인 상인들조차 안보상의 불안 요소가 잠재해 있는 카르타고적 질서보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뒷받침되는 로마적 질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보다 컸던 것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힘이 상업의 신 멜카르트의 힘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니발이 실패한 이유였고, 크게 보아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배한 이유였다.

36년 만에 카르타고로 돌아간 한니발은 이제 로마를 공격하는 싸움이 아니라 카르타고를 지키는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누미디아 기병대를 비롯한 그의 정예 병력 다수가 그의 곁에 없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 끌어모은 약 5만의 병력은 그를 무찌르려 다가오는 스키피오의 병력에 수적으로는 뒤지지 않았으나 사기와 군기에 있어서는 형편없었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에 맞선 스키피오는 왕년에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펼쳐보인 전술을 그대로 본받아서 “스승”을 상대했다. 그러나 칸나에에서처럼 기병을 활용할 수 없었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의 돌파력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코끼리의 습성을 숙지하고 있던 스키피오는 코끼리들을 놀래켜서 오히려 카르타고 진영으로 뒤돌아 짓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니발은 몇 차례나 승기를 잡을 뻔 했으나, 결국 간발의 차이로 승리는 스키피오의 것이 되었다.

자마 전투. 사실상 한니발 최후의 이 싸움에서 그가 희망을 걸었던 코끼리 부대는 오히려 카르타고 군의 패배를 재촉했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고, 한니발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망명길에 나선다. 그는 몇 년 뒤에 카르타고로 돌아와 이번에는 정치인으로서 조국의 부흥에 앞장서려 했으나, 반대파들의 덫에 걸려 로마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이후 한니발은 다시는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동지중해 세계를 떠돌다가, 그를 써주던 지도자들을 위해 몇 차례 전장에 나가 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고독한 망명자로서 하릴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기원전 181년(182년, 183년 등으로 여러 설이 있다), 이제 60대의 노인이 된 그가 은거하던 곳에 로마의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음을 보고, 그는 독약을 삼켰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마지막 말을 “오,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 다오!”라고 기록했다. 반면 폴리비오스는 “이제 로마인들을 공포에서 해방시켜줄 때도 되었지”라고 했다. 어찌됐든, 카르타고의 희망도 로마의 불안도 모두 끝이 났다. 그로부터 약 30여 년 뒤, 로마는 속 빈 강정과 다름없던 카르타고를 공격하여 끝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사람과 도시와 짐승들을, 심지어 그 땅까지도(소금을 대량으로 뿌려 몹쓸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절멸시켜 버렸다.

 

오늘날 옛 카르타고의 땅에 남아 있는 폐허. <출처: (cc) Calips at en.wikipedia.org>

한니발이 자마에서 패배하고 슬픈 유랑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와 알프스를 함께 넘었던 용병 동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역시 용병으로서 헬레니즘 세계의 어디쯤을 떠돌며 싸우고 있었을까? 최후까지 한니발의 병사로 싸우다가 죽어갔을까? 아니면 전쟁도 영웅도 다 신물이 나서, 은퇴해서는 지중해 어디쯤에서 옛 무용담이나 늘어놓으며 여생을 보냈을까?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한니발과 보낸 시간이야말로, 그들의 인생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 그래서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그들은 그 장정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멸망한 나라의 패배한 장군이면서도, 어느 영웅 못지 않은 명성과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로마가 장악한 지중해 세계에서 이어져 갔으리라. 그리하여 그의 장정을 직접 보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로마의 역사가들도, 많은 윤색과 착오가 있을지언정, 그의 장정을 오늘날 전해지는 대로 드라마틱하고 극히 세세하게 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텍스트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구스타프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노먼 슈워츠코프에 이르는 명장들이 감명을 받고, 한니발을 본받아 전술과 리더십을 개발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오늘날 비즈니스와 정치계의 지도자들에게도 한니발을 연구하고 본받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리라. 그렇게 보면, 그토록 처절했던 이탈리아로의 장정, 그리고 짧은 영광에 뒤이은 오랜 방황과 유랑의 장정도, 끝내 실패로 끝난 무의미한 장정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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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 그리스어: Ἀννίβας Βάρκας 한니발라스 바르카스[*],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니발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카르타고 제국, 마케돈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이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네 호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플루타크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1]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2]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3] 이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181년?

한니발의 대리석 조각상.
태어난 곳카르타고
죽은 곳리빗사
별명전략의 아버지
복무카르타고 제국
최종 계급카르타고 군의 총사령관
주요 참전제2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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