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바울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히브리족)이 최초로 분명히 모습을 나타낸 것은 기원전 19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서북 지역이었다. 이후 그들은 점차 서쪽으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게 됐고, 기원전 1600년이 되기 전 어느 시기에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했다. 성서는 그들이 점차 이집트로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1300-1250년경쯤에 그들은 지도자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들은 시나이산에서 야훼신과 신성한 계약을 맺고 광야를 가로질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다. 여러 세대에 걸친 간헐적인 공격 끝에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아시아로부터 이주해온 필리스티아인들(=성서에서는 블레셋 사람들,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이들의 이름에서 유래함)이 강력한 적으로 등장했다. 청동제 무기를 쓰던 히브리인/가나안인들보다 철제 무기를 쓰던 그들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당시까지 히브리인들은 12개의 부족 단위들의 비체계적 동맹체로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제 통일된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기원전 1025년경 히브리인들은 사울을 왕으로 삼아 군주정을 형성한다. 그러나 사울왕은 아직 군사적 지도자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인 통치자로 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종교 지도자였던 사무엘과, 새롭게 부상한 장군 다윗 사이에서 점차 권위를 잃어갔고 마침내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만다.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은 다윗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하고 12부족을 절대 군주권 아래 통합하여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강력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나라를 통솔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치세 40년간 이스라엘의 힘을 과시했다.
다윗이 죽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다. 솔로몬은 외교와 무역에 큰 힘을 가울였는데 다른 한편 억압적 정치를 행했다. 그는 700명의 부인과 300명을 첩을 두었고, 외채와 강제 노역을 통해 호화로운 궁전과 성전을 건축했다. 이미 다윗 때부터 이스라엘의 영광 뒤에는 백성들의 고초가 가려져 있었는데, 솔로몬 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마침내 기원전 922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공공연한 반란이 일어났다. 북부의 10개 부족은 르호보암에게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고, 르호보암은 2개 부족만을 다스리게 되었다(오래 전부터 남북간의 지역감정이 있었음). 사마리아에 수도를 세운 북왕국 "이스라엘"은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며 도시를 발달시켰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왕국 "유다"는 대체로 목축과 농업과 종사하며 조상들의 종교에 보다 충실했다.
200년이 넘도록 두 왕국은 분단 상태로 존속했다. 그러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백성들은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다른 민족들에게 흡수되고 만다. 남왕국 유다는 백년 이상을 더 존속했으나 그들도 기원전 586년, 새롭게 일어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성지 예루살렘은 약탈·방화되었고 지도층에 속한 유다인들은 바빌로이나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후 페르시아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잡고, 페르시아왕 키루스(=성서의 고레스)는 유대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지만,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꽤 오래 걸렸다. 기원전 539년에서 332년까지 팔레스타인은 페르시아의 속국이었다.
기원전 322년에는 또 새롭게 등장한 알렉산드로스가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그가 죽은 후에는 이집트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63년에는 새로운 패자 로마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서기 70년,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하여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였다.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흩어짐을 "디아스포라"라 한다.
사실 많은 유대인들은 이미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그리스-로마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일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일본, 미국 등에 흩어져 있었듯이. 이들은 새로운 외래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그리스적 세계와 오리엔트적 세계의 사상적 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융합을 이룬 이들 중에 대표적인 이가 바울 같은 사람이다.
2. 히브리 종교의 발전
(1) 모세 이전 단계: 히브리 역사 출발기-기원전 1250년경
이 시기 초의 히브리 종교는 애니미즘(=정령 숭배)의 형태를 띠었으며, 이는 점차 의인화된 신들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이런 신들은 특정 부족/장소의 수호신이었으며 특별한 호칭없이 그저 "엘"(god)이라고 불렸다.
(2) 민족적 단일신 숭배의 단계: 기원전 13-9세기경
여기서 단일신 숭배란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오직 하나의 신만을 숭배하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영향으로 야훼를 자신들의 신으로 택했다. 야훼는 유목민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데, 자비로운 면이 있는가 하면 다소 변덕스럽고 사납기도 했다. 야훼는 율법의 제공자로 알려졌으며,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토지, 재산, 자손 등의 현세적 보상을 약속했다. 이러한 단일신 신앙은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점차 물신주의, 마술, 난잡한 풍요의식에 의해 더럽혀지게 되었다.
(3) 예언 혁명의 단계: 기원전 8-7세기경
히브리 종교의 중요한 개혁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초보적 형태의 유일신교가 등장했다. 야훼가 전 우주의 지배자이며 다른 신들은 거짓 신이라 여겨졌다. 둘째 야훼는 정의로운 신이다. 셋째 종교의 핵심은 온갖 제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다.
이러한 개혁이 일어난 것은 당시 남/북왕국이 나름대로 번영을 이루게 되면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의가 심각하게 야기된 상황과 관계가 깊다. 이에 따라 예언자들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종교적/도덕적 혁신을 부르짖은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의 종교가 여전히 현세적 종교였으며, 내세에 대한 신비한 믿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4)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 이후의 단계: 기원전 539년-300년경
이 시기의 히브리 종교는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교는 이원론적 내세 종교였다. 그 영향으로 유대교는 악의 근원이며 대반역자인 사탄의 개념, 종말론, 최후 심판의 믿음 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사후 세계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 참고도서: E.M.번즈 외,『서양문명의 역사 1』(박상익 역, 소나무 1999) 85-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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