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 (고전 11:23-26) 나를 기념하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로마서 5장 12절은 죽음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하여 아무리 죽고 싶지 않아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우겨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출생하게 되는 순간 사람으로 태어났으므로 죄 가운데 태어났기에 안타깝지만 죽는 건 필연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 말씀에서도 그러한 희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5장 17절 말씀 이후에 나오는 18절 말씀과 19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오죽하면 십자가를 져야하는 잔을 옮겨 달라고 까지 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39절 말씀을 보면 죽을 지경에 빠진 채로 기도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을 대신 겪으셨기에 죄인인 우리가 의로워지게 된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불뱀에게 물려죽을 때의 일입니다. 독이 퍼져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 9절 말씀이 그러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과 15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붙잡고 싶어도 붙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3절 말씀과 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 되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갇혀 있으려고 해도 있을 수가 없게 된 걸 볼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죽음을 피할 길을 얻게 된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이유인즉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에서 벗어난다고 해놓고서는 왜 모두가 죽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피할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두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육체의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영원한 죽음은 피할 길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되는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역사적인 그 어떤 인물보다도 더 잘 기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우리는 길이길이 기념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드려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님을 길이길이 기념하시고 감사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더 잘 기념하고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유월절 어린 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21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아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것을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에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멘.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말씀을 보면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받은 것에 대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아멘.
고린도전서 5장 7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아멘.
이처럼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아 저주에서 벗어나고 영벌과 영원한 사망에서 벗어나게 된 겁니다.
이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월절 음식을 나누어주실 때 떡과 잔을 통해 기념하게 하신 겁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 말씀과 20절 말씀입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아멘.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면서 감사드리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23-26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고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이러한 떡과 잔을 나눔에 있어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거룩하게 진행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이러한 성찬을 나눔에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난 걸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오는 11장 20-22절 말씀을 보면 성찬식을 거행할 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아멘.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거룩한 성찬의 의미는 퇴색해버리고 떡과 잔을 인간적으로 먹고 마시는 음식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빈궁한 성도들도 감안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건 함께 나누는 “주의 만찬”(20)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자기의 만찬”(21)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언급한 후에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건 죄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나오는 11장 27-2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아멘.
거룩한 떡과 잔을 육체의 배를 채우는 방편으로 삼는 건 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소외된 성도들, 즉 약한 성도와 병든 성도와 같은 성도들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다 먹지 말고 기다려주어서 배려해주라는 겁니다. 11장 30-3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아멘.
이러한 일은 현대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찬식을 거행할 때 배부르게 식사하듯이 먹고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찬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고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위로는 예수님을 향한 거룩한 성찬을 지켜야 하고 이웃을 향해서는 옆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거룩한 성찬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같으므로 성찬식을 거행할 때 일상적인 음식을 먹듯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서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가운데 기념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지체라는(고전 12:27) 의식을 가지는 가운데 예수님의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성도는 서로가 예수님의 한 지체라는(롬 12:5) 의식을 가지고 기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 때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인식을 하고 삶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기념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할 때 예수님의 살과 피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더 잘 살리는 성찬이 되고 주님께서 더욱 더 기뻐하시는 성찬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 충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한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능력을 행하는 모습입니까? 그러한 것도 있지만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모습 가운데 떡을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아멘.
이러한 비슷한 역사가 또 다시 일어난 것을 2장 말씀에 이어 4장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2-35절 말씀인데 가난한 성도들이 없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의 예로 바나바가 그렇게 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이처럼 성령님이 충만하게 되면 사사로운 이기적인 욕심이 사라지게 되고 함께 살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11장 22절 말씀을 보면 “빈궁한 자들”이란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을 배려하는 가운데 성찬을 나눌 때 진정한 의미의 성찬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차원이 다른 구별된 모습의 거룩한 성찬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면 여러 곳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과 관련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아멘.
“아멘”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육신의 본능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더 잘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 가운데 가난한 성도가 없게 되고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배려해주길 원하시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 명령은 구약성경 말씀에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리면서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우리 교회나 우리 집이나 나 같은 경우에는 가난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나누어주라고 하느냐?’ ‘우리 교회나 우리 집이나 나 같은 경우에는 먹고 살기에도 팍팍한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통해 두 가지의 유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가난한 교회와 성도들과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가난한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려해주고 계시는구나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계속 가난하리란 법은 없기에 여유가 생겼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잘 대비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혼자 잘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잘 살아가려고 하는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겁니다.
이와 같으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복이 되는 말씀인 겁니다. 가난한 자들을 대함에 있어 움켜쥐고 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나누어주면 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주는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과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신명기 15장 11, 7, 10절 말씀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인식하셔서 더욱 더 감사드리시는 가운데 더 잘 기념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성도는 예수님의 한 가족이라는 것도 더 잘 인식하셔서 성찬식 때만 아니라 삶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을 더 잘 실천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찬송: 새 229장 아무 흠도 없고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도 귀한 생명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그동안 성찬에 참여함에 있어 예수님을 향해서나 예수님의 한 피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자매를 향해서 진정한 의미의 성찬을 나누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성찬의 의미를 되살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더욱 더 감사드리는 가운데 더 잘 기념할 수 있게 해주시고,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성도들과 삶 가운데서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이러한 것을 더 잘 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믿음과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 2017 참좋은제자들교회 http://cafe.daum.net/truegooddisciples 담임목사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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