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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歷史神學

역사신학과 판넨베르그의 신학적 轉機

by 이덕휴-dhleepaul 2019. 11. 26.
역사신학과 판넨베르그의 신학적 轉機
실존주의 신학과 구원사학파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일원적 구원사를 주장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구원사로 보고,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적 轉機
판넨베르그는 당시의 신학사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전기를 형성하였다. 그는 헤겔의 사고를 폰 라트의 구약성서신학과 결부시켰다. 그의 신학은 역사를 중요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내용을 역사와의 관련 하에서,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 관심은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한 실존신학과 구원사 신학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실존신학은 객관적인 역사의 과정을 떠나서 개인의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로 도피하여 역사를 "실존의 엿사성으로" 폐기하였고, 구속사 신학은 역사적-비판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초역사" 혹은 "원역사"에로 도피하였다. 또한 그는 "변증법적 신학"을 "케류그마 신학"이라 하면서 그 문제성을 비판하는데, 케류그마 신학은 역사적 예수 자체와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사실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역사의 상실"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판넨베르그는 형성된 "역사신학"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회복하며 역사에 대한 기독교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
세계사의 사건들과 하느님의 계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의 지평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와 역사의 이러한 대립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가 이 세계 속에서 자기를 증명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신의 현현의 방법에 있어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일어났다.
 
" 구약성서에서 야웨는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증명하였고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가능하였다(출애급과 가나안 점령, 예언서와 묵시사상). 신약성서에서 저자의 강조점은 약간씩 다르지만, 공통된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이 단순히 "Da "가 아니라 "Was"로서 확보되고 있으면서 한계를 그리스도의 사건과 구원의 미래로부터 종말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뜻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시는 "계시하는 역사의 처음에 발생하지 않고 종말에 궁극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느님은 모든 사건의 전체를 통하여서만이 그의 신성을-모든 것에 대하여 주가 되심을-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가 일어날 "모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운명 속에서 先取로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의 운명 속에서, 그의 부활과 함께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계시된다.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의 삶의 전체와 본질이 예수로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JX의 계시는 궁극적 계시이며, 모든 역사의 사건을 하느님의 계시로 밝혀주는 근원이다.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JX의 계시로부터 계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약속과 성취의 역사 구조 -보편사로서의 역사
약속과 성취의 구조가 역사를 구성한다(신 7:8)는 것은,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약속의 성취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약속과 성취의 구조에 의하여 파악되는 역사의 폭은 구약성서의 역사기록에 있어서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묵시사상에 있어서 역사의 폭이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역사의 과정 전체에로 확대되는 것은 다음을 전제로 한다. 약속의 성취는 역사 내에서 이루어질 목표로서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전체의 종말로서 기대되고 있다는 것과, 신명기 사가에 있어서와 같이 약속은 율법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묵시사상가들은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였고, 이 구원의 역사를 보편사로 확대하였다. 이 보편사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JX는 약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뜻한다. "예수의 운명 속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였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부활"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자기증명"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 선취된 성취, 역사의 완성은 "단지 잠정적인 성격을 가지며"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자기증명 속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무도 조감하거나 구명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당시 거기에서 예수 안에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대하여 구명될 수 없는 미래이다." 그러므로 "JX의 사건, 특히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의 부활, 옛 계약의 약속의 성취는 우리에게 다시금 예수의 부활에 나타난 삶에 우리 자신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되었다." 하느님은 JX의 운명 속에서 자기를 궁극적으로 계시하면서도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도 개방되어 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는 여전히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성과 통일성, 새로움과 연속성의 문제
역사는 질적인 새로움과 새로운 미래가 인정될 때만이 가능하다. 즉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인정될 경우 우리는 예기치 못한 것, 새로운 것, 우연적인 것의 발생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역사는 부인될 것이다. 우연적인 것이 일어난다고 인정할 경우, 우리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의 내적 통일성 내지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의 딜레마는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지키고자 할 때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고(딜타이, 슈펭글러, 토인비, 헤겔),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지키고자 할 경우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케엘케고르, 고가르텐, 야스퍼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서 이 딜레마의 해결은 하느님의 개념에 있다. 즉 하느님의 개념은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 역사적 사건의 개체성을 보장하면서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능케 한다. "그의 자유의 초월을 통하여 세계 속에 있는 우연적인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우연한 것의 통일성을 역사로서 확립한다.  그리하여 그 속에 있는 사건들의 우연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통일성 내지 연관성은 모든 우연한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있다. 즉 "그들의 초월적 근원에" 있다. 그러나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발전의 방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롭고 우연적인 것이 이미 있는 것에 결합됨으로써, 즉 "소급적 결합"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형성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어떻게 그때 그때마다 형성하는 가는 역사 자체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 근대의 역사철학들은 하느님 대신에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게하였고, 역사의 통일성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발전하는 인류의 통일성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 대신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될 때 역사는 그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다. 현실을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적인 하느님 개념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성서의 역사이해, 성서의 약속의 신앙에서만이 현실의 역사적 경헙이 보존된다. 오늘날 이 근원이 상실됨으로 인하여 역사로서의 현실의 경험이 인간에게서 다시 사라질 위험이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성으로부터 역사를 근절시키려는 딜타이, 하이데거, 불트만의 시도는 하느님 대신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근대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보편사를 불가능하게 할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지향적 역사 이해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혹은 반복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과정, 그리하여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못한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단순히 이 세계의 근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창조자로서 예기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의 창조 세계 속에 개입하여 새로운 것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신관으로 이스라엘은 현실을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선적인 과정, 곧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역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세계의 영원한 질서나 구조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기치 못한 새로움과 함께 불러 일으키는 미래를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고대근동의 순환적인 시간이해와 희랍의 주기적인 원형운동으로서의 역사이해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적인 질서나 구조를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에 있었다.
 
또한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역사의 미래는 완전히 실혐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존속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의 사건이 지니고 있는 미래의 차원을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오기 위한 개인의 신앙적 결단으로 폐기시킨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의 종말론을 구약성서에 있어서 이질적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종말론의 미래적 차원을 신앙적 결단의 현재에로 폐기시켜 버린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구약성서의 역사의식과 모순되지 않는다. 예수의 인격에 대한 결단을 통해 종말의 결단이 선취된다고 하여 종말론의 미래성, 역사의 미래적 차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로서의 역사와 역사적-비판적 연구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역사는
⑴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완성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를 뜻하며,
⑵약속과 성취의 구조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⑶우연성과 개방성을 보유하는 동시에 전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보편사로 이해되고 있으며,
⑷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신성의 특별한 현현과는 달리 역사의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사건들은 그 자체 속에 하느님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시를 깨닫도록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사건들은 자연적인 눈, 곧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기계시로 인식될 수 있다. 즉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 신앙이라고 하는 특별한 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역사를 신앙이라고 하는 전제 없이 자유롭게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신앙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계시의 인식으로 "이끌어 가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연구를 통하여 그가 지닌 계시의 성격이 검증될 수 있다.
 
계시로서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⑴이 동기는 계시와 기독교 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득하자는 데에 있다. 현실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계시는 이러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계시와 그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계시, 곧 신앙의 근거가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할 때, 계시와 이 계기에 근거한 신앙의 진리는 보편타당성을 얻게 된다.
 
⑵이 동기는 신앙의 근거가 그 자체 속에 있지 않고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확실한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임을 주장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확실성을 확보하며 나아가서 신앙과 인식,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극복하자는 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지식은 이성의 일이다." 이 전제의 확실성은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며 초대 공동체의 케류그마는 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신앙을 위하여 이성이 희생될 필요가 없다. 사실에 대한 이성의 인식이 "신앙으로 대체되어서는 아된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전제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계시의 성격은 신앙을 통하여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사건 그 자체에 있으며 그것은 "원칙상" 역사적-비판적 사건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사건 속에 "사실상" 계시의 사건을 발견하는가, 발견하지 못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판넨베르그의 역사 이해의 문제점
⑴역사로서 나타나는 계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판넨베르그는 신앙이란 전제를 배제한다. 역사에서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이성에 의하여 얻는 다고하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신앙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신앙이 근거하고 있는 사건 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사건의 사실성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검증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이해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⑵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의 역사,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 검증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역사적 검증이란 이성 자신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만일 역사가 가진 계시의 성격이 이성의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된다면 계시로서의 역사는 결국 이성의 지배 하래 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구원의 사건을 뜻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신앙이 "나의 밖애 있는" 진리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이 신앙 이전에 주어진 지식을 통하여 근거되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인정될 수 없다. "신앙만이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으며, 신앙만이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신앙을 일으킨다."(윙엘)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 없이는 신앙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 없이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이 신앙의 근거를 인식할 수 없다. 이 인식은 신앙의 내용으로부터만 근거될 수 있고, 그럼에도 신앙의 내용은 신앙을 근거시키는 나의 밖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은 그의 '내용' 또는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중단될 수 없다.
 
⑶판넨베르그 자신이 말하듯이 역사적-비판적 연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유사성 내지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의 원리로 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JX의 역사와 일반 세계사는 상호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은 JX 안에만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느님이 누군지는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느님의 본질은 오히려 JX 없이도 생각될 수 있지 않은다 ?
 
⑷판넨베르그의 이론 전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논리적 모순을 발견한다. 그는 역사가 지닌 계시의 성격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한다. JX의 사건이 절대적 계시라는 확실성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신앙하는 자의 "신뢰"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식은 보편타당성을 얻기 위하여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간이 자기의 이성과 능력을 가지고 얻을 수 없는 인식이 있다고, 즉 하느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자명하며" "자명한 것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개연성"을 말한다.
 
⑸그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이며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 그렇다면 악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 그리고 역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요, 간접적 자기계시라고 말할 경우 역사의 모든 것은 신적인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⑹그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역사의 새로운과 미래성 그리고 역사의 참된 개방성이 읹정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몰트만) 역사 전체의 완성이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났다면, 그리고 JX의 계시가 역사 전체가 지닌 계시의성격의 선취를 뜻한다면, 역사는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것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과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방된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폐쇄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미래는 현존하는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미래가 아니라 현실 속에 내재하고 있는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종말론적인 새로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을 약속할 뿐이다. 따라서 약속을 뜻하는 하느님의 계시는 바로 이 세계의 역사 자체를 뜻하며 이 역사 자체를 정당화 내지 신격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그의 역사이해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에 불과하며 JX의 계시로부터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 그의 역사신학은 희랍철학의 우주론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몰트만)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부인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희랍철학의 로고스적인 구조로 해명하는 것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과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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