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지기칼럼

신과 함께 - 사랑

이덕휴-dhleepaul 2023. 5. 12. 22:0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신의 사랑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게 될 것이며, 내 안에서 살며 나를 믿고 있는 자는 아무도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신은 사랑이며 사랑은 신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겨우 그것이 그러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아마 너희는 그동안 이를 개념화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하지 마라! 너희는

진리가 바깥으로부터 주입된 암시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펼쳐가도록 내맡겨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전체 우주의 중심이다. 이 중심으로부터 사랑의 끊임없는 물줄기가 모든 영혼들을 통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흐르고 있다. 꽃들을 통해서 동물들을 통해서 사람들과 천사들을 통하여 흐르는 것도 이와 똑같은 사랑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참된 본성 안에서 스스로를 영원히 표현하면서 자신의 중심 원천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랑은 광물들 속에 있는 결합력이며 사랑은 꽃들 속에 있는 본질이며 사랑은 동물의 본성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애정 속에서 표현되고 있으며 사랑이 완전하게 깨달아질 때, 온 존재는 그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몸속의 모든 세포는 활기를 얻게 된다.

사랑 말고는 세상 안에 다른 어떤 힘도 있지 않다. 그것은 하늘 안 그리고 땅 위에 있는 유일한 참된 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며 모든 곳에 항상 현존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것들은 사라져 버릴 것이나, 사랑은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무소부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개념화하는 것은 그것의 정신적인 한 측면에 불과하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개념화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힘을 놓치는 것이다. 너희는 무한한 생명의 창조물이며, 무한한 생명이란 곧 사랑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이 이해되고 깨달아졌을 때, 사랑은 자신의 참된 본성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위대한 영혼들은 이 사랑을 세계의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1. 사랑의 위치

 

사랑은 매혹이 아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사랑은 애착이 아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외모에 반하거나, 개성의 어떤 면에 사로잡히는 로맨스가 아니다. 사랑은 당신이 누군가를 우상시하고 누군가를 숭배하는, 심지어 신이나 메신저까지도 숭배하는, 그런 우상숭배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것은 진정한 관계, 일하는 관계, 단합된 의지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동이나 태도가 아니며, 습관적으로 행하는 예의가 아니다. 사랑은 예절이 아니며, 관습이 아니다.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부드럽게도 강하게도, 표현될 수 있다. 사랑은 온순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고, 당신을 비판할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의 환상이나 착각, 당신의 자기기만 등을 드러낼 수 있다. 사람들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랑을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의무감과는 다른 일을 하도록 그들을 움직이는 더 깊은 힘이다.

사랑이란 당신이 대화에서 듣는 사랑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사실 사랑은 말로 하기보다는 시범으로 보이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시범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여 그들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그들 내면에 있는 더 깊고 심오한 어떤 것과 어울리게 한다. 사랑은 인간의 야망과 이기심과 불만, 모든 당파적 믿음과 태도와 종교 이념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다만 이런 것들에 의해 억제되거나 가리어질 뿐이다. 사랑은 신이 개개인 안에 심어놓은 더 깊은 앎과 함께하며 저절로 움직인다.

 

당신은 생각하는 마음과 아는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생각하는 마음은 모든 사회적 조건화에서 생긴 것이며, 세상에 있음으로써 생긴 것이다. 생각하는 마음은 당신이 태어난 이래로 알게 된 사상과 연상, 사고 패턴이 축적된 것이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유용하고, 일부는 당신에게 해롭고 위험하다.

물론 당신은 세상에서 생존하는 법, 즉 육체적으로 생존하는 법, 사회적으로 생존하는 법, 가족 환경 안에서나 문화 안에서, 때로는 종교체제 안에서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사회가 당신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을 배워야 했다. 우리가 말했듯이, 이 중 일부는 유용하고 중요하며, 이 중 일부는 위험하며, 당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더 깊은 마음, 앎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마음은 이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마음은 보고 안다. 이 마음은 사람들이 잠재의식을 이야기할 때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잠재의식은 세상 마음, 즉 이성과 관련이 더 깊다. 이 깊은 마음은 세상에서 조건화되는 대상이 아니며, 세상에 의해 정형화되거나 조건화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 의해 위협받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이 깊은 마음은 새 메시지에서 앎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직접 아는 것, 친밀감, 참된 인식, 참된 관계와 같은 체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 우주적 사랑 - 공동체 사랑

 

진정한 사랑은 앎에서 나오며, 본질적으로 앎의 표현이다. 앎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할 때ㅡ그것이 어쩌면 당신이 전혀 계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계획이나 목표나 야망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ㅡ이것은 당신이 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사랑을 표현한다. 신의 뜻은 신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은 신의 뜻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이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는 행복하고, 그다음 날은 슬프고, 이것에는 즐거워하고, 저것에는 화내고, 잔인하고, 실수를 저지르거나 오류 속에 사는 사람들을 벌하는 이성과는 다르다. 이리하는 것은 신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신에 투영하고, 인간의 감정과 불만을 신에 투영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투영한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며, 신의 사랑과 의지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표면 마음이라 불리는 개인적 마음에서 산다면, 신에 대한 당신의 모든 개념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 당신은 신이 그저 초인간이고 아주 거대한 이성이지만, 두려움과 불안, 증오와 폄하, 판단과 처벌, 고정관념, 공정과 이단 등에 지배받는 이성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마치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리라 생각하는 신이다.

하지만 신, 즉 큰 공동체의 신, 우주의 모든 지적 생명체의 신이 진정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당연히 우주의 신, 큰 공동체의 신은 인간의 믿음이나 태도, 인간의 정서나 사회적 관습에 좌우될 수 없으며, 인류를 원시적이고 미개한 상태로 있게 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 좌우될 수 없다.

 

신이 큰 공동체의 신이라면, 신은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진 지적 생명체와 그 지적 생명체가 진화한 수많은 세계의 창작자이다. 신은 진화의 창작자이고, 우주 팽창의 창작자이자 근원이며, 모든 과학적 진리의 창작자이다. 신은 수많은 종족, 즉 당신과 닮지도 않고, 당신처럼 생각하지도, 당신의 가치 체계를 가지지도 않은 수많은 종족의 창조주이다. 신은 지구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 또 지구를 넘어 이 우주와 이 우주 밖 모든 세계, 모든 수준에서 발현된 것 속에서 움직이는 자연의 창작자이다. 이것이 모든 신학 사상, 종교의 믿음 체계, 종교 조직을 초월하는 위대한 신이다.

신에 대한 당신의 관념을 제쳐두고, 당신이 따르고 보고 듣도록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을 따르고 보고 듣는 것이 더 낫다. 오직 여기서만 당신은 신을 체험하고 신과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만약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따르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이 삶, 이 세상, 이 시기에 당신을 위한 신의 뜻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말은 당신이 신의 의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며, 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은 신의 의지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당신에게 앎의 마음이라는 더 깊고 큰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추측할 수도 있고, 이론을 세울 수도 있고, 정교한 사고 체계, 정교한 정신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당신 삶에서 앎의 움직임과 앎의 지혜를 체험할 수 없다면, 즉, 당신에게 계속해서 주는 조언을 당신이 들을 수 없고, 또 당신의 주의가 표면에, 당신의 이성에,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에 고정되어 있어 그 조언에 응답할 수 없다면, 신은 당신에게 이질적인 존재이다. 신은 그저 당신이 받아들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는 관념일 뿐이다.

 

신은 당신 내면 깊은 곳, 이성 아래 깊은 곳에, 신의 뜻과 사랑, 즉 당신이 통제할 수도, 지배할 수도 없는 뜻과 사랑의 표현을 심어놓았다. 당신은 부나 권력, 영향력을 얻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당신은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 즉, 당신은 이 표현을 따르고, 이 표현에서 배울 수만 있으며, 당신 삶을 재정립하고, 당신 마음을 재구축하고, 당신 건강을 재구축하고, 당신 삶의 방향을 다시 맞추고, 당신 자신을 위한 큰 우선순위, 또 그 우선순위와 함께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더 큰 기회를 만들기 위한 큰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도록, 이 표현이 당신에게 하라고 준 것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큰 사랑은 당신이 일상대화에서 듣는 사랑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뚜렷이 구별된다. 사람들은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이 음식을 사랑한다.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나는 당신 옷을 사랑한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 나는 숲을 사랑한다.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선다. 진정한 사랑은 당신 삶을 주기 위해 당신을 움직이게 하고, 당신 삶의 방향을 다시 맞추고, 당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당신 삶이 낭비되고 있고 당신이 삶을 진정한 방향이 아닌 방향으로 가져가려고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계획과 목표와 상관없이 당신이 세상에 온 큰 목적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하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당신의 바람에 순응하지 않는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때로는 사랑은 맞서게 하고 도전하게 하며, 당신은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낀다. 또 때로는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되며, 당신은 그 사랑을 환영하고 사랑이 존재하고 진실이라는 것에 대단히 기뻐한다.

이것이 큰 사랑, 신의 사랑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앎, 당신 내면 깊은 마음속에 심어져 있다. 이 깊은 마음은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으며,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 당신은 특정 사람들과 함께 특정 일을 하는 목적을 위해 사명을 띠고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을 그곳으로 안내하려 할 것이고, 당신이 특정 개인들과 만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며, 당신의 큰 목적이 드러나 활성화될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공을 들여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하는 일과 믿는 바를 굳건히 하겠지만, 내면에 있는 앎은 그들을 다른 어떤 곳으로 데려가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항상 올바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변명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상황을 좋게 하고, 모든 것을 괜찮게 하려고 하는 말이지만, 사실 그들 삶은 잘못된 곳에 있다. 그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이곳에 온 그들의 큰 목적을 반영하지 않는 수준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니면 가난이나 정치적 억압으로 지금 있는 곳에 갇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여전히 그들 안에 내재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사랑은 이성과는 다르다. 이성이 지닌, 변하는 욕망, 달라지는 믿음, 혼란, 급진적인 사상과 근본주의와 같은 속성과는 다르다. 앎은 당신 안에서 유일하게 영구적이므로, 당신 안에서 정말 본질적인 유일한 것은 앎이다. 앎은 종교 이념이나 민족주의 열정으로 제한받지 않는다. 앎은 무기로 이용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데 이용될 수 없으며, 분열과 정복에도 이용될 수 없다. 당신은 앎을 따르기만 할 수 있지, 이용할 수는 없다.

 

3. 신에 의한 사랑의 목표

 

마음은 영을 섬겨야 한다. 그 반대는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마치 신이 그들의 종이나 되는 것처럼, 신이 그들을 위해 일해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신이 위험이나 재앙에서 그들을 보호하기를 원하며, 마치 신이 종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이 가져다주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마음은 영이 마음을 섬기기를 원하며, 이성은 신이 이성을 섬기고 강화해주기를 원한다.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것이며, 위아래가 바뀐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몸은 마음을 섬기기로 되어 있고, 마음은 영, 다시 말해 앎을 섬기기로 되어 있으며, 앎은 신을 섬기기 위해 여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 존재의 진정한 위계질서이다. 이것이 당신의 온전함이 체험되고 자리잡으며, 당신이 내면에서 결합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배열이다.

이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신을 섬긴다. 왜냐하면 몸이 마음을 섬기고 마음이 영을 섬기고 영이 신을 섬기면, 모든 것이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온전함을 얻으려면, 또 당신의 모든 측면이 이런 내적 조화와 결합을 얻으려면, 대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즉, 혼자서 고안할 수 없는 준비, 당신 선호에 기반하여 이 종교에서는 이것, 저 종교에서는 저것을 가져다가 모두 하나로 묶는, 일종의 절충식 접근법과는 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절충식 접근은 단지 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영을 이용하는 것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된 것이다.

앎은 당신이 스스로 갈 수 없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앎은 두려움과 선호 너머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호는 두려움, 다시 말해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틀릴 것에 대한 두려움,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종교와 영성에서 이룬 것이 많다. 만약 다른 세계의 삶에서 일어나는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류가 많은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구 종교가 실제로 매우 멀리까지 나아갔다는 것을 알 것이며, 기술적으로 더 진보한 우주 다른 종족들이 그들의 모든 종교를 잃었고 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은 관념이나 과학, 정치적 명령이나 사회 구조에 기초하여, 훨씬 더 기계적이 되었고 경직되었다.

 

이 세상 종교가 아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 종교는 사실 인류가 이 시점에서 큰 공동체에 권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우주 전체에서 인류의 위치를 볼 때, 개인의 자유와 영적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성취한 것은 실제로 매우 훌륭하다. 인류의 미래가 큰 공동체에 있고, 인류가 자유와 자결권을 가진 종족으로 남을 것인지는 큰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될 것이므로, 이것은 중요한 이해이다.

 

4. 사랑은 신의 뜻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앎의 움직임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은 당신을 통해 표현되는 신의 뜻이다. 이때 사랑은 영감과 관련이 있으며, 이 영감으로 마음에 영이 스며들고, 마음이 영에 내주며 영의 지시를 받는다. 때로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극도로 실망하는 순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절망감을 느끼는 이때, 당신은 내면에서 희망을 주는 어떤 것을 듣는다.

하지만 앎에 접속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려면, 매우 집중된 접근이 필요하다. 오직 신만이 생각하는 마음과 내면에 있는 깊은 앎의 마음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으므로, 이 접근법은 신이 제공해야 한다.

이성이 해야 할 것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으며, 또 사람들 안에서 이성의 큰 기량이 실제로 충분히 길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는 신의 사랑인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당신 삶은 혼란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마침내 실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것이 실제로 당신 상태이고 줄곧 당신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신은 당신에게 앎으로 가는 계단을 보내준다. 당신은 신이 당신에게 새로운 직업이나 새로운 관계, 더 멋진 몸을 주거나, 당신의 어려움을 없애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신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을 보낸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상태와 분리를 영속하게 할 뿐이며, 그들이 앎에 다가

갈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할 뿐이다. 신과 신의 사랑은 복원에 필요한 것을 준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는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당신은 앎에 눈을 돌릴 것이다. 개인적 성취를 위한 당신의 계획이 약하고, 틀릴 수 있고, 성취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날 때, 비로소 당신은 앎에 눈을 돌릴 것이다. 이때 깊은 실망은 지극히 중요하며, 당신을 위한 큰 기회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극도의 실망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삶의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들의 곤경은 더 깊어질 뿐이다. 앎은 줄곧 그들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들을 수 없다. 그들은 앎이 말하는 것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두려움과 선호에 이끌린다. 그래서 사랑은 그들에게 미지의 것이다.

사랑이란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좋아 보이는 것이고, 그 순간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중독의 근원이 된다. 사랑은 일종의 중독이 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곳에서 살아야 하며, 이 음식을 먹어야 하고, 이런 기쁨을 누려야 하며, 이 약을 먹어야 한다.

 

신의 사랑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이 움직임은 당신을 세상에서 복원과 성취를 향해 가는 방향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이 복원과 성취를 찾으려면, 당신은 삶에서 당신을 계속 가두어 두는 그러한 관계와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복원은 단순히 당신 삶에 덧붙이는 어떤 것이나, 단지 당신이 삶에서 관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원은 단순히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삶이다.

어떤 것을 피하라고 재촉하는 것이든, 어떤 것을 향해 가도록 부추기는 것이든, 앎이 당신에게 하도록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복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복원은 생각하는 마음과 앎을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복원이다. 이 복원이 당신에게 진정한 가능성의 시작이다.

 

당신은 신에게 복원되지 않는다. 당신은 신에게서 분리된 적이 없다. 신은 당신을 향해 분노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타향에 있다. 당신은 신을 알지 못하는 곳, 신이 잊혀진 곳, 신이 우상숭배나 믿음이나 의식과 관련된 곳인 현실에 들어갔다. 당신을 복원하는 것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며, 마음을 영과 연결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내면에 있는 앎의 참된 힘과 연결하는 것이다. 영이나 영성, 종교에 관한 믿음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연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믿음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내가 믿는 것은 진실이다.” “내가 믿는 것은 신의 뜻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 믿음이 확고할수록, 그것은 그들이 아직 앎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더 확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이성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에 복종해야 한다.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것은 당신 삶을 위한 신의 뜻과 계획이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또 이 세상을 넘어 당신이 사는 우주 다세계 큰 공동체 전역에 걸쳐 모든 삶을 위한 신의 뜻과 계획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대단히 크다. 그것이 얼마나 큰지 알면,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 결코 그것을 담거나 규정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완전히 한결같으며, 다른 모든 이의 내면에 있는 앎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앎이 세상에서 큰 평화 중재자이다. 육성되고 정착된 진정한 평화는 앎에서 비롯되었다. 앎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평화 협정은 사실 전쟁과 갈등을 억제하기 위한 경제적·정치적 합의일 것이다. 실제로 아무런 평화도 정착되지 않았다. 평화는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고 연결한 결과이며, 단순히 경계를 넘어 거래하거나,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아보고 소통하고 연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계 인구가 지금처럼 증가하고 있으니, 인류는 통합을 구축할 큰 가능성과 큰 필요성이 생겼다. 자원이 감소하고 인구가 증가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인류는 생존을 위해 통합해야 할 것이다. 인류가 만들고 있는 바로 그 결핍 상태가 인류 통합을 위한 더 큰 자극을 만든다. 이것은 모두 앎이 하는 일이다.

 

신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세상, 자원이 감소하는 세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되었더라도, 앎은 상황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계속해서 복원을 향해 움직이게 할 것이다. 당신이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도, 당신과 다른 이들 내면에 있는 앎은 복원을 향해 당신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러니 신은 당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만든 이가 아니다. 신은 당신의 복원을 만든 이이다. 신은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세상으로 오게 한 큰 목적의 원천이다. 태곳적 기억을 되찾은 이는 누구나 신의 권능과 권위를 체험할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 의식 속으로 앎을 가져갈 수 있는 이는 누구나 신의 사랑을 체험할 것이다.

 

사랑은 숨쉬는 공기와 같다.

당신은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매 순간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느낄 수 있는가? 앎은 당신 안에 있으며, 조용하다. 또한, 당신에게 조언한다. 당신은 앎을 느낄 수 있는가? 앎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가? 두 손을 벌리고, 아무 요구도 믿음도 없이 기꺼이 그냥 앎에 다가가겠는가? “나는 신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당신은 신에게 다가간다. “신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가? 예, 아니요? 내가 이곳에 가야 하는가? 예, 아니요? 내가 이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가? 예, 아니요?”

모든 것은 간단하다. 거래는 없다. 타협도 없다. “만약 신이 저것을 조금 주면 나는 이것을 조금 하겠다. 나는 신과 거래해보겠다.” 거래는 없다. 당신은 안내에 마음을 열거나, 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의심해 보거나, 의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신에게 모든 것을 내준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훨씬 나중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약간 마음을 여는 것, 약간의 자발성이며, 시작일 뿐이다. 당신은 초보자로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신과의 관계에서 단숨에 성숙한 상태로 도약할 수는 없다. 당신은 계단을 밟아야 하며, 신이 그 계단을 제공한다.

 

사랑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의 움직임이다. 앎은 신이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이 시기에 이 세상에서 당신의 큰 목적을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해, 당신 안에 심어놓은 큰 지성이다. 그 밖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과시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헌신이 없고, 지혜가 없으며, 본질이 없다. 삶은 그 사랑을 떠받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고, 관계를 시작한 다음, 보통은 그 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사랑은 무엇인가? 첫눈에 반한 것에 불과한가? 당신이 생각하는 무언가에 대한 애착이 당신을 구원하거나, 당신이 되고 싶은 것을 되게 해줄 것인가?

사람은 늙는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잃고, 매력을 잃는다. 삶은 당신에게 어려움과 필요한 것들을 내놓는다. 당신은 생산해야 하고, 일해야 하며,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처음에 그렇게 황홀하고 멋있었던 그때의 사랑은 어떻게 됐는가? 그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은 생존을 위한 합의나 편의와 같은 것이 된다.

 

더 큰 사랑이 있다. 신이 당신 내면과 모든 사람 내면에 심어놓은 사랑,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표현되고 체험되기를 기다리는 큰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한 모습만 띠는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행동이나 예의와 결부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사회적 관습이 아니다. 이 사랑은 당신을 위험에서 끌어낼 것이고, 당신의 생각이나 태도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당신 삶이 어디로도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 사랑은 당신이 저 길로 가고 싶을 때 이 길로 가게 할 것이고, 당신을 억제할 것이며, 당신의 방향을 바꿀 것이다. 이것이 큰 사랑이다. 이것이 진짜이다.

당신이 비록 삶에서 완전히 외톨이라 하더라도, 앎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신의 사랑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랑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을 따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랑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점차, 신의 사랑은 당신 삶을 다른 위치로 옮길 것이고, 당신에게 더 큰 기회를 열어 줄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인내와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 당신은 신에게서 받아야 하므로, 판단을 보류하고, 결론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미루어야 한다. 신이 주라고 당신에게 준 것을 주려면, 먼저 신에게서 받아야 하며, 신이 당신 삶을 복원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복원이 단지 믿음 체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제 믿으니, 복원된다!” 하지만 이것은 복원이 아니다. 믿음은 약하고, 틀리기 쉬우며, 지속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믿음에는 앎의 힘이 없다. 믿음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을 신뢰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도 당신은 앎이 당신의 이해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앎이 당신을 데려가는 곳은 당신의 현재 인식을 넘어선다. 당신이 따를 수 있으면,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있으면, 이행할 수 있으며, 이행할 수 있으면,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큰 사랑이다. 그리고 이 큰 사랑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주변 세상을 둘러보라. 대단히 많은 사람이 있고, 대단히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금방이라도 닥쳐올 듯한 큰 위험까지 포함하여 대단히 많은 위험이 있다. 큰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 삶에서, 바쁘게 하는 일이나 활동, 몰두하고 있는 것이나 걱정, 불만, 집착, 큰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을 자극하고 움직이고 연결시키는 큰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당신이 받아야 할 것이며, 앎의 움직임인 신의 사랑이다. 신은 당신을 이렇게 복원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복원하려고 애써 왔지만, 신은 당신을 이렇게 복원할 것이다.

삶에서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본질적으로, 이것이 내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인가?”라고 자문해보라. 관계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이 관계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또 지금 내게 중요한가?”라고 자문해보라. 모든 것을 이렇게 해보라. 그러면 당신 내면 아주 깊은 곳, 앎에서 오는 것으로, 당신이 묻는 것에 관해 더 깊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느낌이 될 수도 있고,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일주일 후에 답이 올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계속 묻고 귀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큰 사랑이 당신을 복원하고 재결합하여, 당신이 큰 선물을 알아보고 세상에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려면, 당신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사람과 관련된 특정 환경에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적절한 사람들과 함께 적절한 환경에 있지 않다면, 그 선물을 발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신이 물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당신의 깨달음이 그곳의 특정 사람들과 관련하여 특정 도시에서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데, 당신이 그 도시에 있지 않다면, 그 발견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설령 적절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적절한 사람을 찾아낼 것인가? 당신은 이것을 생각해낼 수 없다. 이것은 이성이 하기에는 너무 크다. 오직 앎만이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앎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을 큰 목적을 위해 한 곳으로 데려올 수 있다. 그것이 큰 사랑의 힘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큰 사랑이다.

 

결론 - dhleepaul

 

참으로 길고 긴  소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글은

서로 사랑하라 깊히 사랑하라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라 

이것이 신과 함께 살아 가는 우리가 사랑하는 길이요 그리고 생명이 되는 줄 믿는다

 

사랑은 살아 숨쉬는 생명이다.

 

가져온 곳 : https://www.newmessage.org/ko/%EB%A9%94%EC%8B%9C%EC%A7%80/%EB%8B%A4%EB%A5%B8-%EA%B3%84%EC%8B%9C%EB%93%A4/%ED%81%B0-%EC%82%AC%EB%9E%91

 

Teaching 큰 사랑 - 신의 새 메시지 사랑은 행동이나 태도가 아니다.

영어로 된 계시의 원음 듣기: Update RequiredTo play the media you will need to either update your browser to a recent version or update your Flash plugin. 다운로드 (오른쪽 버튼 클릭) 2007년 11월 23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

www.newmessag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