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더듬는' 야만인
서고트 족의 침입(409년)
게르만 사회
라인 강 너머에는 단일 국가를 형성하진 않았지만 공통의 언어와 습관을 가진 수많은 부족들, 즉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색슨족, 튜튼족, 반달족, 프랑크족 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쳐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저서 《게르마니아》에 의하면, 게르만족은 부족 사회를 이루고 주로 농경과 목축,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또 그들의 사회는 왕과 귀족, 자유민,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수장)은 자유민들의 모임인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게르만 사회에는 종사제(從士制, comitatus)라고 하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종사제란 수장이 종사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제공하면 종사들은 그 대가로 전쟁에 나가 수장을 위해 싸워주는 제도였다. 이 종사제로부터 중세 봉건제의 주요 특징인 주종 제도가 비롯되었다.
게르만족의 침략
5세기 이전 게르만족은 갈로-로마인들과 활발한 상업적·문화적 교류를 하였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 로마 군대로 들어가 로마 군이 되기도 하였다. 게르만족의 약탈 행위가 전혀 없진 않았지만 5세기 이전까지 갈로-로마인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5세기에 들어서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이유는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인 훈족 때문이었다. 4세기경 훈족들이 갑자기 유럽을 향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압박을 받아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동고트족이 국경을 넘어 갈로-로마 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일 뿐이었다.
골 지방으로 공격해 들어온 민족은 동고트족만이 아니었다. 훈족의 압박을 받은 다른 게르만족들도 수차례에 걸쳐 침략하였다. 대표적으로 반달족과 동고트족, 쉬에브족이 5세기 초 라인 강을 건너 골을 약탈한 후 스페인을 경유해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리고 410~420년 사이에는 부르군트족과 서고트족이 침략해 들어왔고, 이 중 부르군트족은 알프스 이북에 서고트족은 보르도와 툴루즈 지역에 정착하였다. 또 451년에는 아틸라(Attila) 왕이 이끄는 훈족이 직접 쳐들어와 골을 약탈하였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뚱뚱한 몸집, 안으로 굽은 다리, 검은 피부, 빳빳한 귀, 넓죽한 코, 위로 찢어진 눈, 곤두선 머리……."
이처럼 아틸라를 마치 고대 신화에 나오는 무서운 괴물이나 짐승처럼 묘사한 것만 보아도 당시 골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서운 아틸라도 파리의 수호신 생트 쥬느비에브(Sainte Geneviéve)의 강인한 의지를 당할 순 없었다. 아틸라의 침략이 한창일 때, 그가 파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파리 사람들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신의 계시를 받은 생트 쥬느비에브가 나타나 파리를 끝까지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녀의 열정적인 호소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피난 준비를 멈추고 파리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공격 목표를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바꾼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생트 쥬느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이후 생트 쥬느비에브 성당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성당은 헐리고 그 자리에는 판테온이 대신 들어서 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어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오를레앙을 거쳐 파죽지세로 카탈로니 평야까지 쳐들어간 훈족은 451년 그곳에서 갈로-로마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갈로-로마군은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리는 명장 아에티우스의 지휘 아래 프랑크족과 힘을 합쳐 아틸라를 물리쳤다. 그가 무서운 훈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훈족에게 볼모로 잡혀있을 때 훈족의 약점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에게 패한 아틸라는 다음해에 또다시 공격해왔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끈질긴 아틸라는 독일의 유명한 설화 문학인 《니벨룽의 노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그프리트의 아내였던 아름다운 크림힐트에 반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 인물이 바로 아틸라이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갈로-로마 문명의 와해
게르만족이 갈로-로마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였지만 이것을 물리치기에 제국 말기의 로마는 너무나 무력하였다. 한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제패했던 로마는 결국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붕괴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갈로-로마 문명이 와해되자 골 지방에는 게르만족의 여러 왕국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시 게르만족들은 수천 명씩 몰려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정착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그 수천 명이라는 숫자는 토착민인 갈로-로마인의 수의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게르만족들은 이런 수적인 열세 때문에 갈로-로마인을 무조건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만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융화와 포용 정책을 병행하였다.
융화 정책의 일환으로 게르만족과 갈로-로마인의 통혼이 장려되었다. 게르만족들의 기독교 개종도 증가하였다. 특히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는 정통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갈로-로마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 제국의 대제는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게르만족들은 갈로-로마의 문화, 더 나아가 기독교와 로마의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계승하였다.
게르만 족의 대이동
게르만 족은 인도-유럽어족 가운데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총칭이다. 게르만 족은 수많은 부족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문화적으로도 서로 달랐다. 인류학상으로는 북방 인종에 속하며, 남방 인종에 비해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 눈이 특징이다. 원래 거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지금의 북독일에 걸친 지역이었다.
게르만 족의 대이동은 372년, 훈 족이 볼가 강을 건너 동고트 족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서고트 족이 로마 제국의 허락을 얻어 376년에 로마 영토 안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 관리들의 학대로 서고트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 제국이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한 후,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은 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마음대로 이동하면서 로마의 행정 조직을 마비시켰다. 이로써 로마 시는 거대한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의 기능과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476년, 로마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 족의 오토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게르만 족은 전 유럽의 대륙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동하면서, 게르만 왕국을 유럽과 아프리카 각지에 세웠다.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415~711),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 남프랑스의 부르군트 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 왕국, 영국의 앵글로색슨 왕국 등이 바로 그것이다. 원 거주지인 발트 해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인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3왕국을 세웠다.
두 민족의 공존 - 로마 제국과 게르만 족
훈 족의 남하로 인하여 로마 제국 내로 이주한 서고트 족은 378년에 로마인들에게 무기를 들고 대항했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을 먹을 것도 없는 협소한 지역에 거주시키고, 개나 혐오 동물의 고기를 매우 비싼 값으로 팔았으며, 자기의 자식들을 노예로 삼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게르만 족에 대해 전통적으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상황에 따라 로마인들은 게르만 족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동맹시민으로서 그들의 고유한 법과 풍습을 존중해주기도 했다.
게르만 족은 장기간에 걸쳐 로마인과 접촉해왔기 때문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던 게르만 족과 로마인 상호간에는 꾸준히 교역이 행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로마인들은 특정 게르만 부족들에 맞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다른 게르만 부족과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 게다가 4세기에는 게르만 부족들이 무력해진 로마 군대의 보조 부대로 복무하기도 했고, 때로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 지대에 거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게르만 족은 대표적인 야만족으로 분류되었다.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그들은 도끼를 휘두르고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다가 로마군의 체계적인 방어와 공격에 패배하며 후퇴했다. 당시 로마인들의 눈에 게르만 족은 무자비함과 흉폭함으로 무장한 야만인 그 자체였다. 그러나 게르만 족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발탁될 만큼 힘과 전투력을 가졌다. 그로 인해 로마군에는 게르만 족 출신의 용병 수가 증가했다.
서고트 족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
406년, 반달 족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거쳐서 서고트 족에 앞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고트 족이 뒤따라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옴에 따라 반달 족은 해협을 건너, 당시 로마 제국 최대 곡창 중의 하나였던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반달 왕국을 세웠다(429~533). 그들은 아프리카를 거점으로 해서 중부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455년에는 바다로부터 서로마의 수도인 로마 시로 쳐들어와서 약탈하기도 했다[이때 반달 족이 자행한 만행으로 말미암아 반달리즘(vandalism, 야만적인 문화 파괴 행위)이란 말이 생겨났다].
한편 1,000여 년 동안이나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질서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쇠퇴해가고 있던 로마 제국은 북쪽에서 쳐들어온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붕괴 일보 직전에 있었다. 410년 서고트 족이 스페인 내륙을 약탈하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게르만 족은 유목민으로서 강한 민족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을 더듬는다(balbucear)'고 하여 바르바로(bárbaro, '야만인'이란 뜻)라 불렀다. 반면 로마 제국은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들의 정치적인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서고트 족과 이베리아 반도
서고트 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정착하게 되었으나, 제한된 숫자로 말미암아 인구·경제·정치적인 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약 400만의 주민이 거주했는데, 그중 서고트인은 약 10만 명 정도였다. 이런 현실적인 인구의 한계로 서고트 족은 현재의 세고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한정된 지역에 거주했다. 나머지 중요한 각 지방의 도시에는 군대와 관리들만 주둔시켰다.
507년과 586년 사이에 서고트인은 로마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의 영토를 그대로 통치했다. 서고트인들은 국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갈리시아에 거주하던 수에보인들, 자연 지형에 의한 국경을 고집하고 있던 바스크인들, 그리고 반도의 남서부에 자리 잡은 비잔틴인들을 소탕해야 했다. 수에비인들이 정복되고, 비잔틴인들이 추방되자, 칸타브리아인들과 바스크인들이 요새로 이루어진 국경을 구축하고 산 속에 은거하며 계속 항거했다.
701년 서고트 왕국의 위티사(재위 702~710) 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킬라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으나, 또 다른 왕위 희망자였던 로드리고가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로드리고는 왕이 되자마자 아랍인들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내부의 갈등으로 굳건한 결속을 유지하지 못했던 서고트 왕국은 711년, 마침내 이슬람교도들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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