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사회

라인 강 너머에는 단일 국가를 형성하진 않았지만 공통의 언어와 습관을 가진 수많은 부족들, 즉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색슨족, 튜튼족, 반달족, 프랑크족 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쳐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저서 《게르마니아》에 의하면, 게르만족은 부족 사회를 이루고 주로 농경과 목축,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또 그들의 사회는 왕과 귀족, 자유민,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수장)은 자유민들의 모임인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게르만 사회에는 종사제(從士制, comitatus)라고 하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종사제란 수장이 종사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제공하면 종사들은 그 대가로 전쟁에 나가 수장을 위해 싸워주는 제도였다. 이 종사제로부터 중세 봉건제의 주요 특징인 주종 제도가 비롯되었다.

게르만족이 숭상한 신 오딘과 그 아래 게르만족의 배가 새겨져있다. 오른쪽은 게르만족이 사용한 룬 문자와 사냥하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게르만족의 침략

5세기 이전 게르만족은 갈로-로마인들과 활발한 상업적·문화적 교류를 하였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 로마 군대로 들어가 로마 군이 되기도 하였다. 게르만족의 약탈 행위가 전혀 없진 않았지만 5세기 이전까지 갈로-로마인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4세기를 거쳐 5세기에 들어서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이유는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인 훈족 때문이었다. 4세기경 훈족들이 갑자기 유럽을 향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압박을 받아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동고트족이 국경을 넘어 갈로-로마 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일 뿐이었다.

서고트족 전사

골 지방으로 공격해 들어온 민족은 동고트족만이 아니었다. 훈족의 압박을 받은 다른 게르만족들도 수차례에 걸쳐 침략하였다. 대표적으로 반달족과 동고트족, 쉬에브족이 5세기 초 라인 강을 건너 골을 약탈한 후 스페인을 경유해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리고 410~420년 사이에는 부르군트족과 서고트족이 침략해 들어왔고, 이 중 부르군트족은 알프스 이북에 서고트족은 보르도와 툴루즈 지역에 정착하였다. 또 451년에는 아틸라(Attila) 왕이 이끄는 훈족이 직접 쳐들어와 골을 약탈하였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틸라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뚱뚱한 몸집, 안으로 굽은 다리, 검은 피부, 빳빳한 귀, 넓죽한 코, 위로 찢어진 눈, 곤두선 머리……."

이처럼 아틸라를 마치 고대 신화에 나오는 무서운 괴물이나 짐승처럼 묘사한 것만 보아도 당시 골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훈족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지킨 쥬느비에브

생트 쥬느비에브는 아틸라로부터 파리를 지키는 기적을 행하였고, 기근으로부터 파리를 구하기도 했다. 사후 프랑스의 첫 왕인 클로비스 곁에 묻혔다.

그러나 무서운 아틸라도 파리의 수호신 생트 쥬느비에브(Sainte Geneviéve)의 강인한 의지를 당할 순 없었다. 아틸라의 침략이 한창일 때, 그가 파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파리 사람들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신의 계시를 받은 생트 쥬느비에브가 나타나 파리를 끝까지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그녀의 열정적인 호소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피난 준비를 멈추고 파리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공격 목표를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바꾼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생트 쥬느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이후 생트 쥬느비에브 성당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성당은 헐리고 그 자리에는 판테온이 대신 들어서 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어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오를레앙을 거쳐 파죽지세로 카탈로니 평야까지 쳐들어간 훈족은 451년 그곳에서 갈로-로마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갈로-로마군은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리는 명장 아에티우스의 지휘 아래 프랑크족과 힘을 합쳐 아틸라를 물리쳤다. 그가 무서운 훈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훈족에게 볼모로 잡혀있을 때 훈족의 약점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에게 패한 아틸라는 다음해에 또다시 공격해왔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끈질긴 아틸라는 독일의 유명한 설화 문학인 《니벨룽의 노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그프리트의 아내였던 아름다운 크림힐트에 반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 인물이 바로 아틸라이다.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레오 1세는 아틸라를 설득하여 로마 침략을 저지했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갈로-로마 문명의 와해

게르만족이 갈로-로마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였지만 이것을 물리치기에 제국 말기의 로마는 너무나 무력하였다. 한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제패했던 로마는 결국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붕괴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갈로-로마 문명이 와해되자 골 지방에는 게르만족의 여러 왕국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시 게르만족들은 수천 명씩 몰려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정착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그 수천 명이라는 숫자는 토착민인 갈로-로마인의 수의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의 왕이 싸우는 모습이 그려진 사본 장식화

게르만족들은 이런 수적인 열세 때문에 갈로-로마인을 무조건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만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융화와 포용 정책을 병행하였다.

융화 정책의 일환으로 게르만족과 갈로-로마인의 통혼이 장려되었다. 게르만족들의 기독교 개종도 증가하였다. 특히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는 정통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갈로-로마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 제국의 대제는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게르만족들은 갈로-로마의 문화, 더 나아가 기독교와 로마의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