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류구조학』
에드몬드 리치, 신인철 역, 한길사.
본서는 神學者·人類學者 모두에게 매우 생소하고 난해한 책으로서 아주 특이하고 별난 책이라는 느낌이다. 더구나 이제는 폐간되어 버린 "영국 왕립 인류학 협회"의 회보에 실렸던 에드먼드 리치( Edmund Leach)의 연설문(제3장, 제4장)과 에드먼드 리치의 동료 교수의 '어정쩡한' 두 논문(제6장, 제7장)을 소개한 이색적인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적인 주장은, 성서란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神話나 說話 등이 가지는 표면적인 의미에서 추론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성서는 신비를 담고 있고, 신비는 성서에 어떻게든 코드화(code)되어 있으며, 그 코드는 解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드를 해독하는 방법은 일련의 변형과정들 속에 일관해서 존속하는 그 무엇을 보여 준다.
"20세기 성서연구의 인류학적 접근"(제2장: 성서학 대회를 위한 강연문)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적 접근에서 우리는 에드먼드 리치의 번쩍이는 학문성을 읽을 수 있고,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제3장: 문학비평가와 신학자를 위한 논문)에서 그의 탁월한 문학비평 방법론으로서의 그의 성서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성서의 신비를 푸는 "하나의 열쇠"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은 변증법적 명제에 의해서 기술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초월해서 자기에게 돌아오신다는 삶, 일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상징에 나타나고 있다. 삼위일체의 사고는 변증법적이고, 그래서 합리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인 것이다. 신학적 역설은 비합리적이 아니다. 그러나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옮김, 가능성으로부터 현실로의 옮김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옮김의 현존은 비합리적이지만, 역설은 아니다"(틸리히, 조직신학(Ⅱ), 김경재 역, 157면 이하를 참조하라).
본서에서 주장되는 人類學의 聖書硏究에의 寄與는 첫째, 인류학자들은 성서의 어떤 부분들도 실제로 발생한 그대로의 역사적 기술은 아니라는 지적으로서 부정적 측면을 보여 준다. 다음 성서 전체가 신화적 역사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점은 양자 긍정적이다. 끝으로 신화적 해석을 위하여 현재의 構造主義 人類學이 사용하는 방법론을 성서분석에 응용하도록 하는 것들이다(본문 89면).
이 책의 특징으로서는 상세한 각주의 기록을 들 수 있는 데, 본서가 옳은 기술을 하였던지 아니면, 초보적 연구단계에서 오는 오류이든지 간에 신학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성실한 각주는 그런데로 이 책의 신빙도를 어느 정도 가미해주고 있다는 인상이다.
성서는 역사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신화로서의 진리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성서가 신화로서의 진리가 될 때, 인류학자들이 개입하게 된다는 논리(본문 117면)는 아무래도 우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괴변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성서는 인류학의 텍스트가 아니라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된, 계시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方向舵를 잘못 잡고 航海를 시작하는 人類學의 聖書에의 접근 자체가 무모하지만, 저자 의 우려만큼 현재의 「신학연구방법」에서 본서의 활용도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신학발전과 성서의 非神話化 作業을 위한 우리의 학문을 위하여, 한 인류학자의 괄목할만한 본 연구에 대해서 깊은 성원을 보낸다. (1998년 12월 15일) 이덕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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