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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

by 이덕휴-dhleepaul 2020. 4. 3.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 인정투쟁 생사투쟁 자기의식 대립자 교육  

2015. 9. 28. 16:32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

www.academia.edu/.../Hegels_Master_Slave_Dialecti.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 우리는 2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다:주인과 노예. 실제 개인들이 아니라 2 종류의 자기-의식에 관해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다. ‘주인-자아-의식노예-자아-의식이 서로 대치해 있다.

헤겔은 주인-자아-의식노예-자아-의식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한다. 그는 그것들 사이의 변증법 즉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두 머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하자. 한 머리는 주인이고 다른 머리는 노예를 나타낸다. 그 두 머리 A,B 안에는 자아-의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헤겔은 나의 정체성에 관한 나의 이해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해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B의 머리 속의 자아-의식은 자기 바깥에서 보는 것 즉 머리 A의 거울이다. 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헤겔 현상학의 첫 구절에서 자아-의식은 그것이 또 다른 자아의식과 대면할 때에만 그리고 그 사실에 의해서 자기 자체로 즉자적으로 존재한다;즉 그것은 인정될 때에만 존재한다. ”

자아-의식은 또 다른 자아-의식과 대면한다. ;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2중의 의미가 있다:첫째, 그것은 자신을 잃었다 또는 자신을 또 다른 존재로 발견한다. ;두번째로 ,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다른 자아를 대체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자아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자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자아-의식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즉 다른 존재의 바깥에서 이식되었다. 머리 A 속의 자아-의식은 B의 상이며 , 머리 B 속의 자아-의식은 A 이다. 모든 개인은 다른 개인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의 자아의식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 다른 사람들로 우리 자신을 볼 때에만 자란다. 예를 들어, 가족 안에서, 어린 아이는 순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자아-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타자 아마도 아버지 속에서 그 자신을 비추어본다. 그의 자아-이해는 그러므로 전적으로 그의 아버지에게 또는 그가 아버지라고 보는 것 또는 이해하는 것에 의존한다. 이 예에서 그 아이는 물론 노예 또는 예속인이고 그 아버지는 주인 또는 군주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아버지가 그 아이로부터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로부터 인정recognition을 더 많이 필요 한다.

 

 

생사 투쟁으로서의 인정 투쟁

서로 대치 하는 2 인간은 오직 변증법적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 자기의식을 비추는 타자가 없다면 그 어떠한 자기의식도 진화하지 못한다. 아이가 자신을 그 안에서 비추어 볼 아버지 또는 권위 있는 인물이 없다면, 그는 그 어떠한 명백한 자기-정체성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는 동물적 단계에 남아 있든지 아니면 루기에 정신분열증 비슷한 어떤 것이 된다. 한 사람의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랄 수가 업듯이, 혼자만 있어서는 자기의식을 키울 수가 없다. 사람은 자신을 비추어 줄 또 다른 권위자가 필요하다. 변증법적 관계에서 두 명의 존재는 서로 위에서 그리고 대치하여 선다. “그들은 서로를 상호적으로 인식하는 자들로서 자신들을 인식한다.”

 

변증법적 관계에서 평등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명백히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 관계는 언제나 주인-노예 또는 군주-신하 관계이다. 누군가는 윗자리에 누군가는 아랫자리에 있다. “극으로서 그들은 서로 대립한다, 한 사람은 인정만 되고 한사람은 인정만 한다.”

 

우선적으로 자기의식은 두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에만 발전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나 인정 투쟁(a struggle for recognition)이다. “생사투쟁이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 , 각자는 타자의 사망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두 번째 종류의 행위 , 자력의 행위action on its own part가 개입된다. 전자는 생명을 건다. 그러므로 두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투쟁을 통해서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증명한다. ”

 

인정받기 위해 목숨을 건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의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 사망또는 패배에 관해 말하고 있다. 라이벌로서의 타자의 제거나 중화 [中和, neutralization, Neutralisation]를 의미한다.

개인들 간의 경쟁 , 다소간 동등한 개인들 간의 경쟁을 말한다. 각자는 윗사람 superior, 이 되고 싶어 하고 타자를 패퇴시키고 싶어 한다. 이것이 헤겔의 생사 투쟁life and death struggle의 본질이다.

 

그러한 경쟁적 관계에 들어가면, 너는 헤겔이 말하듯이-“너의 목숨을 건다.” 만일 목숨을 걸지않으면 , 너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의식적인 존재로서 너는 진로로서 자신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헤겔의 생사투쟁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단지 생명을 부지하려는 사람에 불과하다. 강한 야심도, 포부도 욕망도 없는 자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위험하지 않다, 그는 아므에게도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우리는 사람으로서 인식할지 모르지만, 인정 투쟁에서 그는 너에게 아무도 아니다. “자기 목숨을 걸지 않은 개인은 사람으로서 인정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독립적인 자기의식으로서 이 인정을 얻지 못하였다. 비슷하게, 각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 듯이, 각자는 타자의 사망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보다 타자를 더 가치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AB가 대치하면서, AB를 패퇴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B도 마찬가지이다. AB에게는 타자이듯이 BA에게 타자이다.

 

사랑은 인정을 받기 위한 생사투쟁의 한 예이다

 

사랑은 인정 투쟁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은 또한 주인-노예관계로도 볼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독립성, 그의 자기의식을 패퇴시키고 싶어한다, 그 여자는 완전한 인정(인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영화 시나리오에서.: 관계의 시작에서, 남자는 그의 친구, 그의 술집, 그의 스포츠, 그의 초라한 독신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 ; 그 다음에 그는 관계와 가족 생활은 이것들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자는 인정투쟁에서 승리했다. 남자가 패퇴했다.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사망을 추구했다. 그는 항복했다. 여자가 주인이고 남자는 노예이다.

 

 

주인-노예의 역전

 

그러한 변증법적 관계 안에서만 자기 의식이 있다면, 주체는 대립될 때에만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 대립자를 제거하기를 원하지만 그 대립자가 실제로 패퇴되면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생긴다. 정체성은 대립되는 타자에 대비하여 생기기 때문에 만일 이 타자가 패퇴하면 , 더 이상 대립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승리에는 실망이 따른다. 인정 투쟁은 뒤에는 즉각적으로 인정 상실이 따른다.

 

주인은 패퇴한 자, 아무 것도 아닌 자, 의존적인 자에 대립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 노예는 승리한 자, 모든 것인 자, 독립적인 자에 대립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주인과 노예는 의식의 두 대립자로서 존재한다; 하나는 그 본질이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독립적인 의식이고 , 다른 한 명은 그 본질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살거나 존재하는 의존적인 의식이다. 전자는 군주이고 후자는 신하이다.”

자기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신의 바깥으로 보는 것에 따라서만 신을 정의하기 때문에, 주인의 자기의식은 노예에 따라 자신을 정의한다.

주인은 노예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자로부터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은 인정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필요도 없고 대립자에 대항하여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 대립자는 완전히 패퇴되었다. 그 결과, 주인은 느긋해지고 게을러진다. 그는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노예는 주인을 올려다본다. 그는 주인처럼 되고 싶어 한다. 따라서 그는 그 모습이 이상적인 자기의식 즉 이상적인 자기의식을 육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주인의 자기의식으로서 바깥 자신을 본다. 그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한다. ; 그는 근면 성실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좁은 자아 바깥으로 나간다. 그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부정absolute negativity으로 오른다.

 

노예는 일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고 결국에는 주인이 된다.

 

 

주인과는 대조적으로, 노예는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일을 한다. 그는 한 사물 또는 객체에 대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만일 그가 화가라면 그는 그림을 그리고 한 대상을 생산한다. 그가 산업가라면 , 그는 공장에서 일하여 공장을 세운다. 반대로 주인은 아무런 대상을 실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향유하거나 대상을 소비할 뿐이다. 그는 음악 홀에 가서 작곡가의 음악을 들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 그는 그림을 살지 모르지만 그 자신은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예는 주인보다 더 철저하게 사물의 타자성을 극복한다. 노예는 그의 일을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지만 주인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여기서 헤겔은 19세기 위족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또 다른 계급은 초기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근면했다. 그들은 공장을 세우고 ; 재화들을 수출입했다; 은행을 설립하고 산업화의 편익을 이해했고 아주 성공적이 되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 성공의 심리학적 전제를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낡은 귀족은 아무 것도 아닌 평민에 대립되었다. 그러므로 옛 주인은 자기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게으르고 느긋하고 사치스런 삶에 의탁했다.

 

반면에 옛 노예. 제조업자, 초기 산업가는 주인인 귀족에 대립되었다. 주인은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 수월성을 추구해야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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