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연개소문(蓋蘇文)

by 이덕휴-dhleepaul 2020. 4. 9.




 


1. 개소문

개소문()[혹은 개금()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西)라고 한다.] 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그 직을 임시로 맡을 것을 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쫓겨나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잇게 되자 흉포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논의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병사를 모두 모아 마치 사열할 것처럼 하고, 아울러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대체로 보아 백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 그리고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겸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      [西]                        

이에 전국을 호령하고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리하니 위세가 대단하였다.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니니 주위에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디디는 발판으로 삼았다. 나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지어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급히 흩어져 달아나는데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 태종이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멋대로 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니, 장손무기()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지킬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짓을 더욱 방자하게 하고 난 뒤에 나라를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소문이 왕에게 아뢰었다.
“듣자옵건대 중국에는 세 가지 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도교()가 아직 빠져 있습니다.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오기를 바라나이다.”

왕이 마침내 표문을 올려 이를 청하니, 당에서 도사() 숙달() 등 8인을 보내고 아울러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불교의 절을 빼앗아 그 곳을 거처로 쓰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당에 가서 고하기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병사를 연합하여 당에 조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대를 낼 수밖에 없으니,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비옵니다.’라고 하였다.

                            使           

이에 당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명하여 새서(, 옥새찍은 문서)를 가지고 왕에게 칙명을 전하게 하였다.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각 병사를 거두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는 병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토벌할 것이다.”

처음 현장이 고구려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사람을 보내 불러서야 돌아왔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했다.

“옛날 수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갔다. 이것으로부터 원한과 틈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약 우리에게 침탈해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 없다.”
현장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거슬러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는데도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고구려는 어찌 반드시 옛 땅을 찾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소문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 대신들을 해쳤으며 백성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마저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병사로써 사신을 위협하였다. 사자(使)가 굴하지 않자 소문은 그만 그를 동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몸소 정벌하였으니, 이 일은 모두 『고구려본기()』 에 실려 있다.

            使                        使   使     

2. 개소문의 아들, 남생

소문()은 건봉() 원년(서기 666)에 죽었다.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이다.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다가 중리소형()으로 옮겼으니, 이는 당의 알자()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다시 중리대형()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는데 모든 관리의 임명을 남생이 주관하였다. 중리위두대형()으로 승진하여 오래 있다가 막리지()가 되었고 삼군대장군()을 겸하다가 대막리지()의 관직이 더하여졌다. 그가 여러 부()를 살피러 나가게 되자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이 나랏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어떤 이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였다.

“남생은 그대들이 자기 자리에 가까이 바짝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여 장차 당신들을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남건과 남산이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이가 남생에게 이르기를 ‘아우들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냈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사로잡아두고 즉시 왕명을 사칭하여 남생을 불러들였다. 남생이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에 의지하다가 그의 무리와 거란(), 말갈() 병사와 함께 당에 붙고, 아들 헌성()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당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장군()을 제수하고 수레, 말, 비단, 보검을 내려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그제서야 화를 모면하였다.

                                輿 使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행군대총관() 겸 지절안무대사(使)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바쳐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 서대사인(西) 이건역()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도포와 띠, 금그릇 등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그를 불러 조정에 들어오게 하여 요동대도독현도군공()으로 바꿔주고 서울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조서를 받고 군으로 돌아가 이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았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아들을 요수()로 보내 위로하고 상을 하사했으며 돌아오자 우위대장군변국공()으로 올려주었다. 나이 마흔여섯에 죽었다. 남생은 순수하고 도타워 예의가 있었으며, 아뢰고 대답함에 영리하게 말을 잘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 밑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으니, 세상에서 이 일을 가지고 그를 칭찬하였다.

 使  西                    

3. 개소문의 손자, 헌성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고 있었다. 무후()가 한번은 금화를 내걸고 문무관리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가려, 맞히는 이에게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검위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다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조금 있다가 헌성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려 하시오나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일찍이 뇌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응대하지 않자, 이에 헌성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목매달아 죽였다. 무후가 후에 헌성의 원통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 지냈다.

                      

4. 사관이 논평한다.

송()의 신종()이 왕개보()와 옛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개보가 대답하길 “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했으니, 그런즉 개소문도 역시 재주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는데 곧은 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온전히 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황실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반역자임을 면할 수 없다.

                    


인물한국사

연개소문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

출생 - 사망? ~ 665(?)

연개소문(, ?~665?)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의 멸망을초래한 장본인으로 기록한 반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 자주적인 혁명가로 재인식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다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 이세민, 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에게 패한 후 얻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 Yug at ko.wikipedia.com>

642년 가을,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대 사열식을 개최했다. 술과 음식이 성대히 차려지고 많은 귀족이 초대받았다. 화려한 식이 거행되던 중 연개소문의 신호를 받은 부하들은 순식간에 100여 명의 귀족을 처단했다. 그리고 그 길로 궁으로 달려가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을 시해하고는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새로운 왕으로 삼아 보장왕이라 하고,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막리지에 올랐다.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연개소문의 갈등은 연개소문이 정계에 등장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 겸 대대로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대대로는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지금의 총리에 해당된다. 대대로는 귀족회의에서 선출되는데, 부자상속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계승하고자 하자 대부분의 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성품이 포악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나라에 대한견해 차이였다.

당태종 이세민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 당나라에 대해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수나라 군사 1만 명을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건 없이 송환했고, 왕세자를 당에 보내 조공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창 성장하는 당나라와의 전쟁은 피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 그리고 30여 년 전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자부심을 가진 고구려의 무장 세력들은 이런 영류왕의 정책에 반발했다. 연개소문의 집안은 대당 강경파의 선봉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지략과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은 이십 대의 혈기왕성한 연개소문은 당시 집권층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적 소수파였던 연개소문은 대대로의 직위를 임시로라도 맡겨줄 것을 간청하며, 만일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그때 해임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머리를 굽혀 겨우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대로에 오른 뒤에도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 영류왕과 귀족들은 그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 정보를 먼저 입수한 연개소문이 선수를 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과의 대결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신라의 김춘추가 찾아와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진 신라를 도와달라고 했다. 보장왕은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겠다.”라고 대답했다. 보장왕 뒤에 선 연개소문의 의견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주겠다는 말은, 신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연개소문도 신라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대신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연개소문은 이후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했고,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 당태종은 중원을 장악하고 나서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의 고창국을 멸망시키며 천하통일의 야망을 하나씩 실현해가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고구려는 그가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개소문의 반역 사건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여기에 신라마저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당장 중지하고, 만일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통보하는 등 신라를 빌미로 고구려를 압박했다. 연개소문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644년 마침내 당태종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고구려 정벌을 선포했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살육했으며, 그 백성을 참혹하게 대하더니 지금 또 나의 명령을 위반하고 이웃 나라들을 강제로 침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중국 역사서를 살펴보면,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집권하기 전부터 몇 차례나 고구려 정벌의 뜻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중심의 천하를 꿈꾸는 이세민에게 고구려는 제압해야 할 상대였고, 여기에 반발하는 연개소문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렇게 고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하 강을 건넌 당나라 군사들은 개모성을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전쟁 초반에는 당나라의 공세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거센 반격을 통해 신성, 건안성 등을 지켜내며 당나라 군사의 발길을 묶었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차츰 승기를 잡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나라 군사들은 고립되고 굶주렸다. 그리고 마침내 5개월에 걸친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퇴각할 때 연개소문이 그 뒤를 쫓아서 만리장성을 넘어 당나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현재로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퇴각하는 길에 병을 얻은 당태종은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지 못한 채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만 내리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649년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 명령에 따라 당나라는 647년, 648년 계속 고구려를 침입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번번이 이를 물리쳤다.

그의 죽음 뒤 고구려는 멸망에 이르고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고구려 말기의 대대로인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인 천남생묘지. 당나라에 투항하여 묘가 중국에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4_002_000_0001)

분명 전쟁에서는 계속해서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쳤지만, 당시 국제 정세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설연타가 멸망했고, 거란과 신라는 당나라와 더 밀착했다. 반면 당은 서역과 북방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며 그 세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고립시키고 나서,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공격했다. 연개소문이 직접 전투에 나선 고구려는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665년 연개소문이 죽을 때까지 당나라는 더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그의 후계자가 된 큰아들 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던 강한 고구려를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비난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묻고 답하는 한국사 인물카페 1

천리장성을 쌓은 연개소문


나는 연개소문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지요. 나는 고구려 말기를 살았는데 왕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을 정도로 막강 파워를 가졌던 사람이에요. 내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리장성의 축조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에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당나라와 싸웠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연개소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당 태종 고구려를 점령하러 왔다가 된통 당하고 병들어 죽었다.
연정토 연개소문의 동생. 연개소문이 죽고 난 이후에 조카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패배하여 신라로 망명하였다.
양만춘 안시성 성주. 당나라와의 전쟁 때 60여 일 동안 성을 지켜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했다.
연남건 연개소문의 작은 아들. 막리지인 형을 쫓아내고 막리지가 되었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에 끌려가 유배되었다.
연남생 연개소문의 큰아들. 아버지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연개소문

고려시대 역사가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을 이렇게 평하고 있어요.

“수염이 길고 몸집이 크며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볼 생각을 못했다.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부하가 항상 땅에 엎드리어 노둣돌이 되어 주었다. 밖에 나갈 때에는 호위병이 줄줄이 늘어서 그를 지켰는데, 선두에서 크게 소리치며 행차를 알리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피하다가 엉겁결에 시궁창에 빠지기도 했다.”

이 사료로 살피면 연개소문은 무식할 정도로 독재를 했던 독불장군이에요.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을 했던 박은식 선생은 연개소문을 국난 극복의 대 영웅으로 평가했어요. 한편 중국 송나라의 한 황제가 역사를 잘 아는 신하에게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진 이유를 묻자, 신하는 “연개소문이 너무 뛰어난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했어요. 이처럼 연개소문은 시대에 따라, 혹은 평가자의 취향에 따라 독재자 이거나 영웅으로,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지금부터 연개소문 장군이 ‘민족의 영웅’ 혹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민족의 반역자’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이유를 자세히 알아봐요.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행동을 자주 했어요. 그는 15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 대대로가 되었어요. 동부대인은 나라의 동쪽 지역을 책임지던 관리로, 대대로는 고구려 관등 조직 중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이었어요.

15세의 어린 나이에 대대로가 되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럽긴 하지만, 연개소문이 살던 시대는 귀족제 사회로 아버지가 죽으면 그의 직책이 아들에게 그대로 승계되었기 때문에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어요. 다만 아버지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지위를 계승하려 할 때, 여러 귀족들이 그의 성품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를 심하게 해서 연개소문은 어렵사리 동부대인의 직을 이어받을 수 있었대요.

이처럼 어렵게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가 고구려 최고 실력자가 된 것은 천리장성 축조 때문이었어요. 618년에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당나라는 초기에는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626년에 왕자 이세민이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했어요. 훗날 태종으로 불리게 되는 이세민에게 고구려는 언젠가는 손을 봐줘야 할 정복의 대상이었어요. 따라서 그는 고구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무리한 요구를 자주 해 왔어요.

수의 113만 대군도 거뜬하게 물리친 고구려 장군들 입장에서, 당의 이러한 행위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아니꼬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고구려를 이끌던 영류왕은 무리를 해서 당나라와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당나라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며 당 태종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어요. 다만 혹시 몰라서 연개소문을 시켜 고구려 국경선에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사업이 연개소문을 고구려 최고의 실력자로 만들었어요.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론자였어요. 천리장성을 축성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지지 세력을 크게 늘린 그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당나라에 저자세로 일관하는 영류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이 쿠데타는 성공하였고, 이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가 되어 고구려 정부를 좌지우지했어요.

당나라와 싸움을 시작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차지한 대막리지는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로, 이제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었어요. 고구려에서 정변이 발생하여 대당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이 집권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 태종은 깜짝 놀랐어요.

“개금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랏일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 땅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못된 버릇을 길들이고자 한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개금은 연개소문의 별칭이에요. 연개소문이 부당하게 임금을 교체하였으니, 거란과 말갈의 병사를 움직여 고구려를 치겠다는 뜻이에요. 태종의 말에 처남인 장손무기가 대답했어요.

“개금이 자신의 죄가 큰 줄 알고 우리가 토벌할까 두려워서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는 우선 조금 참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개금이 방심하고 교만해져서 쉽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겁니다.”

한편 한반도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땅따먹기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642년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았으며, 백제의 장수 윤충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신라의 실력자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 부부를 포로로 잡아 죽여 버렸어요.

당시 신라는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다급해진 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함께 백제를 물리치자고 제안하게 했어요.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부하고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쳐 당과 신라에 맞섰어요.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은 645년 17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쳐들어왔어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쳐들어오면서 내세운 명분은 다음과 같아요.
첫째, 연개소문은 신하된 자로 왕을 죽였다. 나는 영류왕의 원한을 갚기 위해 연개소문을 쳐서 그 죄를 묻겠다.
둘째, 당나라의 신하인 신라를 고구려가 거듭 공격하니, 신라를 돕기 위해서라도 고구려를 치겠다.
그런데, 참 웃기지요.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이 된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왕위 쟁탈전을 문제 삼아 그 나라를 치겠다니요. 얼마나 명분이 옹색했으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억지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수성 작전으로 당나라 군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고구려 군사들

전쟁 초기에는 당나라가 우세했어요.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선발 부대는 신성과 개모성을 쉽게 점령한 뒤에 당 태종이 직접 이끌고 오는주력 부대와 연합하여 수 양제가 113만의 대군으로도 점령하지 못했던 요동성마저 무너뜨렸어요.

이제 고구려는 큰일 났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다음 전투지인 안시성을 지키는 장수가 불세출의 영웅인 양만춘 장군이니까요. 당의 군사들이 요동성을 점령하고 사기가 충천하여 안시성으로 몰려왔을 때, 양만춘은 백성들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성을 지키는 데 온힘을 쏟았어요. 당군은 매일같이 공격하며 성을 함락하려 했지만, 안시성은 난공불락이었어요.

60일 동안이나 공격해도 성이 무너지지 않자, 당군은 마지막 작전으로 안시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성을 공략하려 했어요. 하지만 거대하게 쌓아 올린 흙산은 갑자기 큰비가 내리며 허물어져 버렸고, 이 기회를 틈타 고구려군이 흙산마저 점령해 버렸어요. 당 태종의 안시성 공격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어요. 당나라 군사들은 요하 하류를 건너서 중국 땅으로 되돌아가려 했어요.

그런데 요하의 하류 지역은 늪지대였기 때문에 당 태종까지 허드렛일을 할 정도로 갖은 고생을 하며 철수를 해야 했어요. 고구려를 얕잡아 보고 섣불리 싸움을 걸었다가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톡톡히 보고 말았지요. 고구려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병이 든 당 태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649년에 죽었는데,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어요.

“나의 자식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가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우리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고구려 원정에서 얼마나 혹독하게 고생했으면, 대국의 왕이 죽으면서까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까요.

연개소문이 죽고 난 뒤 내분으로 몰락하는 고구려

당나라는 크게 패한 이후에 고구려에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어요. 그들은 신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략한 후에 고구려를 치기로 작전을 변경했어요.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어요. 그리고 661년에 계획대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번에도 당나라 군대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 냈어요.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난 이후에 문제가 터졌어요. 나랏일을 좌우하던 연개소문이 663년에 죽자, 막리지 자리를 놓고 동생과 아들들이 서로 피 터지게 싸웠어요.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한 자리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어요.

“너희 형제들은 싸우지 말고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라.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생과 아들들은 연개소문의 유언을 새겨듣지 못하고 고구려 최고의 실력자인 막리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공격하며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어요. 이 다툼에서 밀려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항복해 버렸고, 큰 아들인 연남생은 당에 투항하고 말았어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고구려가 내분으로 힘을 쓰지 못함을 눈치채고 668년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했어요. 예전의 고구려라면 나·당 연합군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내분으로 세력이 한껏 위축된 상태여서 고구려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항복해야 했어요. 주몽왕이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의 일이었지요.

교과서 속의 당나라와의 전쟁

수가 망한 뒤에 중국을 통일한 당은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꾀하였다. 수와 전쟁할 때 잡힌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기로 하여 고구려는 1만여 명의 포로를 송환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는 두 나라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당 태종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한편,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구려는 랴오허 강 주위의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며,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당의 간섭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에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 삼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당 태종은 육군과 수군으로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먼저, 랴오허 강을 건너 요충지인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한 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은 조그마한 산성이었지만 서쪽 변경의 중요한 요새였다. 안시성은 당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하루에도 6, 7회의 공격을 받았으며, 마지막 3일 동안 총공격을 받았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안시성에서는 성주를 비롯한 모두가 굳세게 저항하여 끝내 당군을 물리치고 성을 지킬 수 있었다(645).

그 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침입을 몇 차례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과 거듭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훈련된 군대와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 체제, 탁월한 전투 능력 및 요동 지방의 철광 지대 확보, 그리고 굳센 정신력에 있었다. 수·당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가 거둔 승리는 우리 역사상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수·당은 고구려를 정복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극과 극을 달릴까요?
역사라는 학문의 특징 때문이에요.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과거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또는 미래 삶의 지향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유학자로 ‘충’과 ‘사대주의’를 강조했기에 연개소문을 반역자로 평가했어요. 쿠데타를 통하여 자신이 모셨던 임금을 죽였고, 대국인 당나라에 끝까지 대항했으니까요. 반면에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역사를 했던 사람들에게 연개소문은 국난 극복의 영웅이었어요. 그래서 일제시대 때 대표적인 역사가인 박은식 선생은 “독립 자주의 정신과 대외 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로 연개소문을 치켜세웠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위대한 반역아”, 문일평 선생은 “천고의 영걸”로 연개소문을 높이 평가 했어요.

연개소문 장군은 칼을 다섯 개나 차고 다녔다는데, 무슨 칼을 그렇게 많이 차고 다녔나요?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닌 흉폭한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하지만 고구려의 남자들은 대체로 칼을 다섯 자루씩 차고 다니며 사냥도 하고 전투도 했대요. 따라서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닌 것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관행이 그러했기 때문이지, 성품이 포악해서가 아니에요.

그런데 알쏭이는 중국의 전통 연극인 경극을 아나요? 얼굴에 알록달록한 분장을 한 남자들이 큰 몸동작으로 대사를 읊으며 하는 연극인데, 잘 모르겠으면 영화 〈패왕별희〉를 한번 봐 보세요. 경극을 주제로 한 영화거든요. 그런데 경극 중에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요.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죽을 위기에 빠지자, 설인귀가 구해 준다는 내용으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은 여기서 조연에 불과해요.

중국 사람들이 만든 연극이라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죽이는 걸로 막이 내리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연개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연극이에요. 또 중국 명나라 시대에 만든 「막리지비도대전」이라는 목판화가 있는데, 이 그림에도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로 당 태종을 죽이려 하는 것을 설인귀가 활을 쏘아 막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막리지비도대전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책에 실린 목판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향해 나는 칼을 던지자 설인귀가 화살을 쏘아 이를 막고 있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연’ 씨가 아니라 ‘천’ 씨라는 소문도 있던데요?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 씨가 분명해요. 그런데 왜 천 씨라는 소문이 나돌까요? 그 이유 또한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어요.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이라 써 놓았어요. 김부식이 남의 성씨까지 바꿔 놓은 이유는 ‘연’이 당나라를 세운 이연()과 글자가 같기 때문이에요.

1923년에 중국 하남성 낙양의 남쪽에서 연개소문의 큰아들인 남생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무덤 안에 남생의 생애를 알려주는 돌판이 들어 있었어요. 이 돌판을 지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천남생()의 증조부는 자유이고 조부는 태조이다. 나란히 막리지를 역임했는데, 부친 개소문은 대대로를 역임하였다. 조부와 부친이 철을 제련하는 기술이 뛰어났고 활을 잘 다루었다. 아울러 군대를 장악하고 나라의 권세를 모두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남생은 분명 연개소문의 아들인데, 그의 무덤 안에 있는 지석에 천남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 이상하지요?

이것 역시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서였어요. 왕조시대에는 왕의 성씨나 이름자와 같은 한자를 써야 할 경우에는 그 글자를 쓰지 않고 비슷한 뜻을 가진 다른 글자로 바꾸어 썼어요. 이를 ‘이름자를 꺼리고 피한다.’고 해서 ‘꺼릴 기()’에 ‘피할 휘()’를 써서 기휘()라고 해요. 연개소문 집안이 천개소문 집안으로 둔갑한 것은 결국 기휘 때문이었죠.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풍운아 연개소문

시대고구려

대륙의 거센 모래폭풍과 대양의 거대한 파도가 연상되는 진짜 사내 연개소문.

그는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간 제일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고구려인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저 한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위대한 민족기상의 상징이란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는 그의 삶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폭풍 전야

연개소문 상상도

연개소문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 고구려의 운명이 모두 내일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을 죽이고자 안달하는 적들의 요구대로 먼 요동땅에 가서 천리장성을 감독하겠다고 순순히 말할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 강한 고구려를 만들어 보겠다고 저들을 설득했건만 공연히 전쟁만 일으켜 평화를 해치는 주범으로 따돌림당한 아픔 등이 떠오르자 적들에 대한 분노심만 커져 갔다. 부하들의 정보와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저들이 곧 자신을 해칠 것은 분명했다.

연개소문은 저들이 수나라 해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친 영웅이었던 영류왕을 나약하게 변모시켜 고구려를 잘못된 길로 몰고 가고 있다고 믿었다. 고구려의 백성들이라면 한결같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천하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영양왕 시절의 드높은 자부심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성한 땅, 하늘의 자손이 세운 신의 나라인 고구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굽힐 수 없다는 당당한 자존심으로 뭉친 고구려인의 기백, 연개소문은 이것을 믿었다. 적들과 영류왕은 이러한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외면하고 그저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당나라의 무모한 요구에도 굽신거리는 나약한 무리였다. 연개소문은 적들은 물론 영류왕까지 없앨 것을 결심했다. 내일의 혁명으로 고구려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피로 물들인 혁명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건설 감독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요동으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연개소문과 그의 군대가 떠나기에 앞서 군대 열병식이 장안성 남쪽에서 열렸다. 행사관람을 위해 초청된 100여 명의 귀족들이 단상에 모두 모였다. 연개소문은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이들을 맞이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연자유, 그리고 아버지 연태조는 고구려 동부대인으로 막리지라는 높은 관직을 대대로 지내왔다.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뒤를 이어 동부대인이 되고자 했지만, 그의 집안이 강해지는 것을 꺼려한 많은 귀족들이 반대를 했다. 연개소문이 간신히 동부대인이 되기는 했지만 여러 귀족들과 갈등이 있었다. 여러 귀족들은 연개소문이 강한 고구려를 주장하는 것은 곧 전쟁을 야기시켜 자신들이 부귀영화를 지속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연개소문을 죽이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이 때문에 100여 명의 귀족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연개소문이 자신들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하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참석해 있었다.

연개소문은 침착하게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당당하게 행동했다. 행사에 들어가자 연개소문은 여러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군사들을 행진시켰다.

막강한 고구려 군대의 위용이 펼쳐졌다. 칼과 창, 도끼, 쇠뇌(기계활)를 든 보병들, 말과 사람이 온통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대, 그리고 돌을 던지는 발석차, 성문을 부수는 충차 등을 운용하는 특수병 등이 선보였다.

행사가 절정에 이를 무렵 연개소문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부하들이 단상에 있던 귀족들에게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고구려를 나약하게 만든 썩어빠진 귀족들을 모두 죽이고 새로운 고구려를 만들자.”

“저놈이 나라를 망친 놈이다. 저놈이 도망간다. 잡아라. 단칼에 베어 버려라.”

이곳 저곳에서 요란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행사장은 100여 명의 귀족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다. 자기 꾀에 넘어간 귀족들은 어떻게 대항하지도 못했다.

연개소문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궁궐로 쳐들어가 영류왕마저 죽여 버리고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을 왕으로 모셨다. 연개소문의 신속한 행동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이제 그는 최고의 권력을 쥐고 고구려의 새로운 운명을 열어 갔다.

연개소문과 이세민

연개소문의 일생에서 최고의 라이벌은 당나라 2대 왕인 이세민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해 멸망당할 즈음, 그는 아버지 이연과 함께 수나라에 반기를 들어 618년 당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는 이연의 둘째아들이어서 아버지를 뒤이어 다음 왕이 되기 어려웠다. 야심이 많은 그는 626년 다음 왕이 될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스스로 당나라 왕이 되었다.

이세민은 너무나 커다란 야심 때문에 패륜행위조차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수양제에 비해 그가 행운아였던 것은 뛰어난 부하들을 여럿 가졌다는 점이다. 이정, 이적 등의 장군,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의 현명한 재상이 있는 덕택에 그는 토번, 고창국, 돌궐 등 주변국들을 물리치고 당나라를 강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세민은 수나라가 이루지 못했던 고구려 정복의 야심을 조금씩 드러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것이란 사실은 그의 잔혹함을 잘아는 고구려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특히 642년 마지막까지 당에 저항하던 돌궐이 무너지자, 연개소문은 마침내 당나라와 싸우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세민은 처음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우선은 고구려의 사정을 알아보고자 사신을 교환하는 등의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곧 당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어 가자 태도를 바꾸어 고구려를 공격할 대외적인 명분을 찾으려고 했다.

이세민은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첫째,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신하 된 자로 그 왕을 죽였다. 나는 영류왕의 원한을 갚기 위해 연개소문을 쳐서 그 죄를 묻겠다. 둘째, 당나라의 신하인 신라를 고구려가 거듭 공격하니 신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겠다.”

이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한마디로 코웃음을 쳤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한 천하에 잔인무도한 자가 누구에게 죄를 따지는가. 나는 오래전부터 이세민 너의 인륜을 어긴 행위를 벌 주려고 별러 왔다. 또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두 나라의 문제인데, 너희가 무슨 이유로 따지느냐. 너희는 신라마저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숨기고 있는 놈들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혼내 주겠노라.”

645년 당과의 대전쟁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올 경우 주된 방어선이 될 요동 지방을 우선 점검했다. 그리고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에서 당나라의 거점이 될 만한 곳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연개소문의 이런 공격으로 인해 이세민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북경에서 요하에 이르는 2천 리 구간에서 우리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식량보급을 철저히 관리하라.”

연개소문은 영양왕과 을지문덕이 사용했던 청야전술을 활용하여 그 작전의 범위를 요서 지역으로 확대했다.

645년 당나라는 이세적이 이끄는 요동도행군과 장량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을 먼저 고구려를 향해 출발시키고, 이세민이 주력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4월 초 고구려 서북방의 요지인 신성에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나타났다. 신성의 성주는 연개소문으로부터 특별히 당나라 군대를 잘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적의 주력군이 신성을 포위했지만, 신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신성은 넓은 평야지역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성 안에서 적의 움직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고구려군이 성을 굳게 지키자 당군은 신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당나라의 수많은 군사들은 신성싸움에서 죽어 나갔다.

고구려 서북부 방어의 핵심 기지인 신성오늘의 무순시에 있다.

무순시에 위치한 고어산성 내의 수영장고구려 동북방의 요새였던 신성의 식수원이었다.

신성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당군은 재빨리 신성보다 작은 개모성으로 이동했다. 개모성은 불과 10일 만에 함락되어 성에 보관중이던 10만석의 곡식을 당에게 빼앗겼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요동도행군은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쳤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다. 연개소문은 이에 맞서 국내성 등지에서 4만의 지원군을 보냈다. 요동성 주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고구려군은 당나라 장군예의 부대를 격파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가 다시 이도종이 이끄는 당 기병대의 기습에 타격을 입었다. 양측의 대치상태는 며칠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세민이 이끄는 당의 대군이 요하 일대의 습지대인 요택을 건너 곧장 요동성 앞에 등장했다. 이세민은 이세적의 군대와 함께 요동성을 포차와 충차 등 신무기를 동원해서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적의 포차공격으로 무너진 성벽에 나무로 임시성벽을 만들어 막는 등 사력을 다해 방어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남풍이 불어왔다. 당군은 바람을 이용해서 불화살 공격을 시도했다. 요동성은 당군의 화공을 막지 못하여 함락되고 말았다.

수나라 대군도 점령하지 못했던 요동성. 오늘날 요양시에 있었던 요동성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때 성의 높이만도 20~30미터를 넘던 요동성은 당나라의 치밀한 공격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당나라는 요동성에서 50만 석의 엄청난 곡식을 가져갔다.

연개소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다행히 요동성 남쪽의 건안성에서는 적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산동 반도에서 떠난 당나라 해군은 요동에서 당의 육군이 식량보급에 문제가 생길까 봐 진로를 바꾸어 요하 하류의 건안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고구려 군사들은 당나라 해군사령관 장량이 이끄는 대군을 기습 공격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너무나 놀란 장량은 앉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얼어붙었다고 한다. 장량은 당나라에 돌아가 전쟁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아 죽임을 당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건안성을 굳건히 지켜냈다.

645년 당과 고구려의 전쟁상황도

안시성 싸움의 승리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을 당군이 빼앗았지만, 고구려군은 신성과 건안성에서 당군을 잘 막고 있었다. 또한 천산산맥을 넘어 고구려 내지로 진격하려는 당군의 행로는 고구려군의 강력한 방어망에 막혀 버리고 있었다.

당의 해군은 고구려 수군기지인 비사성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하지는 못했다. 해군의 주력은 건안성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요하하구에서 적의 대군을 격파했던 건안성규모만도 무려 6~7킬로미터에 달한다.

비록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당군은 여전히 요동성과 개모성 일대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고구려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연개소문은 국내성, 오골성 등 후방의 큰 성으로부터 병력을 차출해 와서 당군이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다.

당군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첫째, 요동의 여러 성들을 놔두고 곧장 진격하여 고구려 서부 최대의 성인 오골성을 공격하고 이어 곧장 수도인 장안성으로 쳐들어가는 것, 둘째, 요동의 중요한 성인 안시성과 건안성들을 함락시켜 보급로를 안전하게 한 후 장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의 작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의 군량창고를 수시로 공격하여 당태종으로 하여금 고구려 내부로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고구려군이 자주 식량보급로를 끊자 당군은 안시성을 비롯한 요동의 여러 성들을 점령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구려 내부 깊숙이 진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작전에 말려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안시성은 요동성에 버금가는 중요한 성이었다. 남쪽의 건안성, 북쪽의 신성을 뚫지 못한 당나라 군대는 오직 안시성을 점령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 안시성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는 고구려군이 당나라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벌어졌다. 고연수와 고혜진의 군대가 당군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당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당나라의 주력군을 무릎꿇린 안시성멀리 보이는 산을 연결한 계곡 내부가 안시성으로 추정된다.

연개소문은 성의 방어를 안시성주에게 맡겼다.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 장군이라고 전해진다.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매일 공격을 해도 안시성은 굳건히 지켜졌다. 그러자 당태종은 병사들을 시켜 안시성 높이의 흙산을 쌓아 그 산 위에서 안시성을 향해 화살을 쏘아서 성을 함락시킬 작전을 세웠다. 흙산이 거이 다 완성될 무렵, 갑자기 큰 비가 와서 토산의 일부가 안시성 성벽을 덮쳐 성벽 또한 무너졌다.

그때였다. 안시성의 병사들이 재빨리 흙산으로 올라가 흙산을 차지해 버렸다. 당태종의 안시성 공격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 군대는 당군을 습격하여 요동성과 개모성 등지에서 빼앗긴 식량을 도로 찾아왔다. 당군은 후방에서 군량과 보급품이 전달되지 않고 식량마저 부족해지자 급격히 지쳐 갔다.

게다가 음력 9월이 다가오자 요동은 추워지기 시작했다. 속전속결을 내세웠던 당나라의 계획은 연개소문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 겨우 요동성 정도를 함락시켰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고구려 수도를 향해 직접 진격하지도 못하고, 특히 안시성 공격에서만 68일간이나 머문 것은 당나라군이 패배를 스스로 불러들인 꼴이었다. 연개소문의 작전에 말려든 당태종은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해 보았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커다란 피해만 입고서 후퇴명령을 내렸다.

도망가는 적을 물리쳐라

당나라 군사들은 식량이 그나마 남아 있는 요동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곧장 요동성 앞에 펼쳐진 요택을 건너 퇴각했다. 그들이 고구려로 올 때는 요하 중상류 쪽의 물이 적은 곳을 건넜지만, 돌아갈 때는 요하 하류의 요택을 택했다. 그것은 연개소문이 당나라 군사들이 편한 길로 가지 못하게 요하 중상류 지역에서 군사들을 시켜 막았기 때문이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고구려로 올 때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면 당군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세민의 주력군이 고구려로 올 때 요택을 건너기 위해 준비한 각종 장비만 있었어도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요택을 건널 때 쓰던 장비를 모두 잃어버렸다. 따라서 바보가 아닌 이상 굳이 통행이 불가능한 늪지인 요택을 지나 귀국할 리 없었다. 당태종이 이 길로 퇴각한 것은 고구려군의 공격이 너무나 무서워서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요택을 통해 돌아가는 것, 그것은 곧 연개소문의 치밀한 작전의 결과였다.

당군은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을 피해 도망가느라고 걸음이 급했다.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다. 당태종 자신도 장작을 매는 일을 해야 할 정도로 급했다. 당태종은 이곳에서 병을 얻었다. 수많은 당나라 군사들은 고구려군의 칼날과 화살에 맞아 죽어 갔다.

당태종은 간신히 만리장성 있는 곳까지 도망올 수 있었지만, 고구려군에게 혼쭐이 났다. 그 후에도 몇 번 고구려를 소규모 병사로 공격해 보기는 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당태종은 요택에서 얻은 병으로 649년에 죽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유언했다.

“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12세기 초 송나라 휘종 임금이 옛일을 회고하면서 신하인 구양수에게 물었다.

“당태종이 전쟁을 잘하는 왕이라 하는데, 왜 고구려에게는 진 것이오?”

구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개소문이 너무나 뛰어난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수대첩의 영웅 연개소문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 함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새로운 작전을 내놓았다. 즉 고구려 남쪽의 백제를 멸망시키고, 남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660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내친 김에 고구려를 총공격해 왔다.

소정방, 방효태, 계필하력, 임아상 등이 이끄는 백만 대군으로 총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661년 겨울에 쳐들어온 방효태는 그의 13명의 아들과 함께 수십만의 대군으로 장안성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연개소문은 꽁꽁 언 사수에서 적들을 만나 여기서 적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이겼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사수전투의 승리는 전쟁상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당은 방효태의 대군이 몰살당하자 전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압록강 주변의 계필하력 군대가 퇴각한 데 이어 평양 주변을 포위했던 소정방의 군대도 급히 도망쳤다.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 다시는 고구려를 쳐들어오지 못했다.


당군의 주력군은 연개소문에게 괴멸되어 퇴각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유언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물리친 영웅이었지만 그도 잘못한 일이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이었다. 권력세습과 독재정권.

연개소문은 혁명을 일으킨 후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권력이 더욱 강해졌다. 권력이 커질수록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들뿐이었다. 그는 남생, 남건, 남산 세 아들에게 일찍부터 벼슬을 주고 그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웠다.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도 큰 권력을 가졌다. 이렇게 연개소문과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 큰 권력을 갖게 되자, 연개소문의 가족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권력을 나눠 가지려는 자들이 늘어났다. 중요한 나라일을 결정할 때 서로 토론하고 비판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연개소문과 같이 뛰어난 인물이 계속 그 일을 한다면 다소의 문제가 있어도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정책을 결정하는 한 사람이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옛부터 고구려는 귀족회의에서 서로 비판하고 토론하면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이를 없애고 자기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제 죽을 때가 되자 연개소문은 자기가 죽은 이후가 걱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자식들을 불렀다.

“잘 듣거라. 너희들은 물과 물고기와 같다.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모두 다 죽을 수가 있다. 지금 고구려 주변에는 당나라가 여전히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이 단합하여 나라를 이끌어 간다면 적들이 고구려를 넘보지 못할 것이지만, 만약 너희들이 서로 싸운다면 고구려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이 점을 명심하거라.”

연개소문은 663년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뛰어난 영웅이기도 했지만, 독재자였고 그로 인해 고구려는 그가 죽자 혼란에 빠졌다. 그의 유언을 듣지 않은 못난 자식들 때문에 그는 죽어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못난 자식들이 서로 싸워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훌륭했다면 연개소문은 보다 위대한 인물로 우리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자료총람  (0) 2020.04.27
쉬띄꼬프  (0) 2020.04.22
삼한(三韓)의 정통후예국  (0) 2020.03.29
사회주의 국가 헌법  (0) 2020.01.08
대한민국 헌법과 그 역사  (0) 202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