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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

한중일 근현대사

by 이덕휴-dhleepaul 2020. 4. 21.

쿠빌라이 칸

(중국 원 [元] 칸) [세조] Kublai는 Khubilai, Kubla라고도 씀.

 

쿠빌라이 칸 (1215~1294).
몽골의 군인·정치가.

 

쿠빌라이 칸

 

개요

쿠빌라이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중국을 정복하여 원조(元朝)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몽골족은 러시아 남부 지역의 킵차크 한국, 페르시아의 일한국, 몽골의 족장들이 전통적인 유목민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던 스텝 지역을 모두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족 출신의 쿠빌라이가 정치·문화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통치술이 요구되었다.


 

역사적 배경

몽골족은 갑자기 강성해진 유목민 세력이었다. 칭기즈 칸 이전의 시대에 그들은 반야만적인 부족집단에 불과했고 역사적으로도 별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원시적 문화유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조직적인 수렵행위와 가축무리의 관리를 빼놓고는 특별한 경제활동 경험이 없었다. 쿠빌라이가 태어나기 몇 해 전만 해도 그들은 문맹이었고 통치술에 대해서는 극히 기본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이같은 통치 미숙 때문에 몽골족의 제국은 급속히 붕괴하게 되었다. 쿠빌라이와 같은 몇몇 특출한 예를 제외하고 (이때문에 몽골족은 쿠빌라이를 현명한 군주[Setsen Khan]라고 했음) 몽골족 출신의 군주들은 권력을 개인 또는 가문의 소유물로 여겨, 그 권력으로부터 즉시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문에 몽골족은 확고한 정치적 전통이 확립되어 있던 중국과 같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늘 지속적인 국가형태를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중국에서조차도 몽골족은 통치자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곤 했다.


몽골족은 순전히 무력으로 중국을 장악했다. 이같은 무력과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전대인 송(宋)이 발전시킨 빛나는 문화적 기반에 힘입어 쿠빌라이는 잠시 동안이나마 몽골족의 통치권이 확립되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동시대인의 눈에는 그의 치세가 내실 있는 영토확장과 지속적인 업적의 시대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때문에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었고 그가 쓴 책 〈동방견문록〉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양에 대한 1차적 정보원이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치세 초기부터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 점은 한족(漢族) 출신의 한 신하가 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신(臣)이 듣기로 마상(馬上)에서 제국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경험이 없는 몽골족이 중국을 통치하려면 중국의 방식대로 운영하면서 중국적 문화양식에까지도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접변)

. 그들이 중국의 방식을 수용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중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몽골족의 정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반면 몽골족이 중국 및 기타의 문화적 요인들을 억압해 나간다면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되고 결국은 배척받게 될 것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몽골족은 문화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특권계급으로서 오랫동안 중국을 다스릴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단지 쿠빌라이 개인이 이룩한 빛나는 업적 때문에 이같은 사실이 감추어졌을 뿐이었다.


 

권력에의 부상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같은 영향 때문에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나갔다.
또 자신의 사령(私領)인 경조(京兆 :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에 탁월한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다. 야전(野戰)에서 그는 휘하의 부장(部將)들에게 측근 학자들이 가르쳐 준 교훈, 즉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칭기즈 칸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한 쿠빌라이의 동료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진보한 문화적인 태도였다. 사실 중앙 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족 지도자들은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그의 군대는 1253년 가을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겨울에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1254년 그가 북상하게 되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가 이 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게 되었다. 1257년 몽케의 지휘 아래 남송에 대한 전면작전이 개시되었으나 1259년 몽케가 중도에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를 포위공격하던 중,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보거가 스스로를 칸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했다.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 : 지금의 카이[開平])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 大會議)를 열어 5월 5일 몽케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했다. 10일 후 그는 한문으로 작성된 포고문을 통해 자신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그 당시 장자계승이 후사의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막내인 아리보거도 몇몇 강성한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되게 함으로써 쿠빌라이에게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이 몽골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제위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보거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아리보거는 2년 뒤에 죽었다. 아리보거와의 전쟁은 한 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쿠빌라이 가문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쿠빌라이가 스텝 지역의 유목민 생활을 버리고 낯선 중국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파의 지도자로 카이두가 추대되자 가문 내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칭기즈 칸은 친히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바 있었는데 이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는 당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제위는 1250년 쿠데타의 결과로 오고타이 가문에서 톨루이 가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카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고 몽골 본국과 투르키스탄의 군주로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301년에 죽었다.
카이두와 쿠빌라이의 싸움을 통해 쿠빌라이가 결정적으로 중국세계를 수용하고 유목민의 생활에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강인하고 무자비하여 언제나 불화하는 경향이 있는 몽골족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세력이 강했어도 스텝 지역의 귀족정치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중국의 통일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그는 몽골 북부에 오고타이가 세운 단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거처한 적이 없었고 그 당시 대도(大都)라고 알려진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자신의 수도를 세웠다.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부지역만을 다스리고 남부지역은 남송이 명목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유지해나갈 생각이었으나, 그가 남송에 보낸 사절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고 억류당하자 남송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1267년에 이를 개시했다. 남송의 황제는 대신들이 잘 보필하지 않아 사태의 진정한 추이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장수들이 자발적으로 몽골족에 항복하는 형편이었는데도 남송의 대신들은 이를 제대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장인 바얀이 남송의 어린 황제를 사로잡았다. 남송 지역의 남송 지지세력은 1279년까지 항쟁을 계속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중국 전지역이 몽골족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자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의 몽골 원정은 실제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국의 위신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쟁을 여러 번 벌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왕국들에게 턱없이 많은 조공을 요구했다. 미얀마, 인도차이나의 안남·참파, 자바, 일본 등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골군은 또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1274, 1281년 2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선단이 파견되었으나 모두 격파되었다. 선단이 대파된 것은 태풍의 탓도 있었고 일본의 결사항전 탓도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같은 식민전쟁의 나쁜 결과나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해 염출된 비용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 식민전쟁은 그의 후계자 대에 가서 종식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일본에 금은 보화가 많다는 보고 때문에 일본을 합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벌인 식민전쟁은 주로 정치적인 목적, 즉 중국을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사회적·행정적 정책

몽골족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급직에는 한족 출신의 관리들을 썼지만 중요한 자리는 외국인들에게 배당했는데 그 좋은 예가 바로 마르코 폴로이다. 쿠빌라이는 인종정책을 써서 중국의 인구를 네 부류로 나누었다(→ 계급). 최상위 부류는 몽골족으로 수십만 명 정도의 특권 무사계급을 말한다.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고 몽골족의 가용(家用)으로 배당된 광대한 영지를 경작했으며 중국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몽골족에 출사(出仕)한 외국용병들이 2번째 계급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했다.
이 계급에서 고위관리가 배출되었고, 전세계적인 접촉망과 특권지위를 가진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상인과 투기꾼을 배출시켰다.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면세혜택을 누렸고 공공 역참(驛站)과 복리시설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 제3·4계급을 형성했는데, 한인은 중국 북부에 사는 중국인을 가리키고 남인은 멸망한 남송 지역에 살았던 중국인들을 말한다. 국가의 재정과 특권계급의 사치는 이 두 계급이 대부분 감당해야만 했다.
쿠빌라이의 계속되는 전역(戰役)뿐 아니라 대도에서의 대규모 토목공사 또한 큰 부담이 되었다. 농민들은 농경지를 버려둔 채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이같은 신규 노동력과 생산을 하지 않는 몽골족을 모두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북부에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곡식이 해로를 통해 운반되어야 했고, 해로가 안전하지 못할 때는 대운하가 이용되었다. 또 이 운하를 개수하고 확장하는 데도 상당한 노동력을 투입해야만 했다.


쿠빌라이는 다른 몽골족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몰두했다. 그의 치세시에는 이교(異敎)도 허용되었고 정부의 비호를 받던 종교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교역자(敎役者)와 종교단체는 면세혜택을 받았고 특히 불사(佛寺)들은 대규모의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농민들을 하사받았다(→ 불교).
중국 내에서 특별지위를 누렸던 많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오만함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차별적인 사회정책은 마침내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쿠빌라이 치세시에 상업이 흥하여 중국이 경제적 강대국인 것처럼 보인 것도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무역도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특권층인 외국인 상인계급만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민중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다. 유교철학을 상당 정도 이해하는 사람만을 관리로 등용하던 옛 과거제도는 점점 문란해졌고, 권위적이고 자의적인 행정을 견제했던 통상적인 기관인 사간원(司諫院 :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는 기관)과 전문직 관리들도 근무태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중국문관제도).


중국의 지식인 계급은 공직과 책임 있는 자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자들이 고관직을 얻게 되었고 쿠빌라이와 같이 총명한 황제도 수년 동안 계속하여 외국인 출신 재정담당관의 부정부패를 모르고 지냈다. 쿠빌라이가 시행한 사치스러운 정책과 후대의 원대 황제들이 방치하여 벌어진 재정의 문란상태 때문에, 원은 14세기에 들어와 경제문제로 일어난 민중봉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몰락했다.


쿠빌라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덕분이긴 하지만 지전(紙錢)을 사용한 황제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전은 송대에도 사용되었으나 쿠빌라이 때 와서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정착되었다(→ 지폐).
이 시기에는 지전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는데, 무역이 팽창하던 시기에 구리의 공급이 너무 적어 충분한 주화를 제조할 수 없었고 또 그중 상당량이 불사로 흘러들어가 불상이나 다른 숭배물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원대 말기에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원조가 지전을 너무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평가

쿠빌라이는 중국 황제로 이름이 더 높지만 몽골족이 정치전통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쿠빌라이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이며 그의 자문이었던 팍 파('Phags-pa)는 '이원 원칙'이라고 알려진 정치이론을 발달시켰다. 즉 정치에는 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위엄이 2원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교회와 국가).
이 정치이론은 몽골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 실제로 적용되었다. 또 1911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하여 제정한 신정군주제(神政君主制) 헌법은 이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쿠빌라이의 성격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마르코 폴로는 유일하게 그의 신상에 관해 기술했는데, 이는 칭송의 경향이 강하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세계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한편으로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지적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연회와 수렵에 탐닉했고, 문란한 성생활, 적시에 부하들을 감독하는 세심한 배려의 부족, 가끔씩 나타나는 잔인한 행동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쿠빌라이의 일생은 무엇보다도 이중적 역할을 해낸 과정, 그리고 결국은 그 역할을 조화시키지 못한 점 때문에 흥미롭다. 그는 전통적인 중국 황제의 역할을 완수했으나, 중국 문제에 관심을 쏟다보니 고국 몽골의 일은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스텝 지역의 몽골 통치자들과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의 치세시에 중국과 특권계급인 몽골족은 번영의 한때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정치체제는 후대 황제들이 잘 관리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몽골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이 붕괴되자 몽골족은 스텝 지역으로 다시 퇴각했고 그때 이래로 변방민족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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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추천 0 조회 79 11.08.12 15:3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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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중국 원 [元] 칸) [세조] Kublai는 Khubilai, Kubla라고도 씀.

 

쿠빌라이 칸 (1215~1294).
몽골의 군인·정치가.

 

쿠빌라이 칸

 

개요

쿠빌라이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중국을 정복하여 원조(元朝)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몽골족은 러시아 남부 지역의 킵차크 한국, 페르시아의 일한국, 몽골의 족장들이 전통적인 유목민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던 스텝 지역을 모두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족 출신의 쿠빌라이가 정치·문화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통치술이 요구되었다.


 

역사적 배경

몽골족은 갑자기 강성해진 유목민 세력이었다. 칭기즈 칸 이전의 시대에 그들은 반야만적인 부족집단에 불과했고 역사적으로도 별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원시적 문화유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조직적인 수렵행위와 가축무리의 관리를 빼놓고는 특별한 경제활동 경험이 없었다. 쿠빌라이가 태어나기 몇 해 전만 해도 그들은 문맹이었고 통치술에 대해서는 극히 기본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이같은 통치 미숙 때문에 몽골족의 제국은 급속히 붕괴하게 되었다. 쿠빌라이와 같은 몇몇 특출한 예를 제외하고 (이때문에 몽골족은 쿠빌라이를 현명한 군주[Setsen Khan]라고 했음) 몽골족 출신의 군주들은 권력을 개인 또는 가문의 소유물로 여겨, 그 권력으로부터 즉시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문에 몽골족은 확고한 정치적 전통이 확립되어 있던 중국과 같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늘 지속적인 국가형태를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중국에서조차도 몽골족은 통치자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곤 했다.


몽골족은 순전히 무력으로 중국을 장악했다. 이같은 무력과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전대인 송(宋)이 발전시킨 빛나는 문화적 기반에 힘입어 쿠빌라이는 잠시 동안이나마 몽골족의 통치권이 확립되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동시대인의 눈에는 그의 치세가 내실 있는 영토확장과 지속적인 업적의 시대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때문에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었고 그가 쓴 책 〈동방견문록〉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양에 대한 1차적 정보원이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치세 초기부터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 점은 한족(漢族) 출신의 한 신하가 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신(臣)이 듣기로 마상(馬上)에서 제국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경험이 없는 몽골족이 중국을 통치하려면 중국의 방식대로 운영하면서 중국적 문화양식에까지도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접변)

. 그들이 중국의 방식을 수용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중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몽골족의 정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반면 몽골족이 중국 및 기타의 문화적 요인들을 억압해 나간다면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되고 결국은 배척받게 될 것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몽골족은 문화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특권계급으로서 오랫동안 중국을 다스릴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단지 쿠빌라이 개인이 이룩한 빛나는 업적 때문에 이같은 사실이 감추어졌을 뿐이었다.


 

권력에의 부상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같은 영향 때문에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나갔다.
또 자신의 사령(私領)인 경조(京兆 :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에 탁월한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다. 야전(野戰)에서 그는 휘하의 부장(部將)들에게 측근 학자들이 가르쳐 준 교훈, 즉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칭기즈 칸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한 쿠빌라이의 동료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진보한 문화적인 태도였다. 사실 중앙 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족 지도자들은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그의 군대는 1253년 가을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겨울에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1254년 그가 북상하게 되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가 이 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게 되었다. 1257년 몽케의 지휘 아래 남송에 대한 전면작전이 개시되었으나 1259년 몽케가 중도에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를 포위공격하던 중,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보거가 스스로를 칸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했다.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 : 지금의 카이[開平])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 大會議)를 열어 5월 5일 몽케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했다. 10일 후 그는 한문으로 작성된 포고문을 통해 자신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그 당시 장자계승이 후사의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막내인 아리보거도 몇몇 강성한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되게 함으로써 쿠빌라이에게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이 몽골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제위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보거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아리보거는 2년 뒤에 죽었다. 아리보거와의 전쟁은 한 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쿠빌라이 가문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쿠빌라이가 스텝 지역의 유목민 생활을 버리고 낯선 중국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파의 지도자로 카이두가 추대되자 가문 내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칭기즈 칸은 친히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바 있었는데 이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는 당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제위는 1250년 쿠데타의 결과로 오고타이 가문에서 톨루이 가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카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고 몽골 본국과 투르키스탄의 군주로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301년에 죽었다.
카이두와 쿠빌라이의 싸움을 통해 쿠빌라이가 결정적으로 중국세계를 수용하고 유목민의 생활에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강인하고 무자비하여 언제나 불화하는 경향이 있는 몽골족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세력이 강했어도 스텝 지역의 귀족정치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중국의 통일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그는 몽골 북부에 오고타이가 세운 단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거처한 적이 없었고 그 당시 대도(大都)라고 알려진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자신의 수도를 세웠다.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부지역만을 다스리고 남부지역은 남송이 명목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유지해나갈 생각이었으나, 그가 남송에 보낸 사절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고 억류당하자 남송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1267년에 이를 개시했다. 남송의 황제는 대신들이 잘 보필하지 않아 사태의 진정한 추이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장수들이 자발적으로 몽골족에 항복하는 형편이었는데도 남송의 대신들은 이를 제대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장인 바얀이 남송의 어린 황제를 사로잡았다. 남송 지역의 남송 지지세력은 1279년까지 항쟁을 계속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중국 전지역이 몽골족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자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의 몽골 원정은 실제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국의 위신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쟁을 여러 번 벌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왕국들에게 턱없이 많은 조공을 요구했다. 미얀마, 인도차이나의 안남·참파, 자바, 일본 등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골군은 또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1274, 1281년 2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선단이 파견되었으나 모두 격파되었다. 선단이 대파된 것은 태풍의 탓도 있었고 일본의 결사항전 탓도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같은 식민전쟁의 나쁜 결과나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해 염출된 비용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 식민전쟁은 그의 후계자 대에 가서 종식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일본에 금은 보화가 많다는 보고 때문에 일본을 합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벌인 식민전쟁은 주로 정치적인 목적, 즉 중국을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사회적·행정적 정책

몽골족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급직에는 한족 출신의 관리들을 썼지만 중요한 자리는 외국인들에게 배당했는데 그 좋은 예가 바로 마르코 폴로이다. 쿠빌라이는 인종정책을 써서 중국의 인구를 네 부류로 나누었다(→ 계급). 최상위 부류는 몽골족으로 수십만 명 정도의 특권 무사계급을 말한다.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고 몽골족의 가용(家用)으로 배당된 광대한 영지를 경작했으며 중국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몽골족에 출사(出仕)한 외국용병들이 2번째 계급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했다.
이 계급에서 고위관리가 배출되었고, 전세계적인 접촉망과 특권지위를 가진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상인과 투기꾼을 배출시켰다.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면세혜택을 누렸고 공공 역참(驛站)과 복리시설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 제3·4계급을 형성했는데, 한인은 중국 북부에 사는 중국인을 가리키고 남인은 멸망한 남송 지역에 살았던 중국인들을 말한다. 국가의 재정과 특권계급의 사치는 이 두 계급이 대부분 감당해야만 했다.
쿠빌라이의 계속되는 전역(戰役)뿐 아니라 대도에서의 대규모 토목공사 또한 큰 부담이 되었다. 농민들은 농경지를 버려둔 채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이같은 신규 노동력과 생산을 하지 않는 몽골족을 모두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북부에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곡식이 해로를 통해 운반되어야 했고, 해로가 안전하지 못할 때는 대운하가 이용되었다. 또 이 운하를 개수하고 확장하는 데도 상당한 노동력을 투입해야만 했다.


쿠빌라이는 다른 몽골족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몰두했다. 그의 치세시에는 이교(異敎)도 허용되었고 정부의 비호를 받던 종교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교역자(敎役者)와 종교단체는 면세혜택을 받았고 특히 불사(佛寺)들은 대규모의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농민들을 하사받았다(→ 불교).
중국 내에서 특별지위를 누렸던 많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오만함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차별적인 사회정책은 마침내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쿠빌라이 치세시에 상업이 흥하여 중국이 경제적 강대국인 것처럼 보인 것도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무역도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특권층인 외국인 상인계급만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민중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다. 유교철학을 상당 정도 이해하는 사람만을 관리로 등용하던 옛 과거제도는 점점 문란해졌고, 권위적이고 자의적인 행정을 견제했던 통상적인 기관인 사간원(司諫院 :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는 기관)과 전문직 관리들도 근무태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중국문관제도).


중국의 지식인 계급은 공직과 책임 있는 자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자들이 고관직을 얻게 되었고 쿠빌라이와 같이 총명한 황제도 수년 동안 계속하여 외국인 출신 재정담당관의 부정부패를 모르고 지냈다. 쿠빌라이가 시행한 사치스러운 정책과 후대의 원대 황제들이 방치하여 벌어진 재정의 문란상태 때문에, 원은 14세기에 들어와 경제문제로 일어난 민중봉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몰락했다.


쿠빌라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덕분이긴 하지만 지전(紙錢)을 사용한 황제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전은 송대에도 사용되었으나 쿠빌라이 때 와서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정착되었다(→ 지폐).
이 시기에는 지전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는데, 무역이 팽창하던 시기에 구리의 공급이 너무 적어 충분한 주화를 제조할 수 없었고 또 그중 상당량이 불사로 흘러들어가 불상이나 다른 숭배물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원대 말기에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원조가 지전을 너무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평가

쿠빌라이는 중국 황제로 이름이 더 높지만 몽골족이 정치전통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쿠빌라이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이며 그의 자문이었던 팍 파('Phags-pa)는 '이원 원칙'이라고 알려진 정치이론을 발달시켰다. 즉 정치에는 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위엄이 2원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교회와 국가).
이 정치이론은 몽골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 실제로 적용되었다. 또 1911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하여 제정한 신정군주제(神政君主制) 헌법은 이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쿠빌라이의 성격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마르코 폴로는 유일하게 그의 신상에 관해 기술했는데, 이는 칭송의 경향이 강하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세계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한편으로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지적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연회와 수렵에 탐닉했고, 문란한 성생활, 적시에 부하들을 감독하는 세심한 배려의 부족, 가끔씩 나타나는 잔인한 행동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쿠빌라이의 일생은 무엇보다도 이중적 역할을 해낸 과정, 그리고 결국은 그 역할을 조화시키지 못한 점 때문에 흥미롭다. 그는 전통적인 중국 황제의 역할을 완수했으나, 중국 문제에 관심을 쏟다보니 고국 몽골의 일은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스텝 지역의 몽골 통치자들과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의 치세시에 중국과 특권계급인 몽골족은 번영의 한때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정치체제는 후대 황제들이 잘 관리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몽골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이 붕괴되자 몽골족은 스텝 지역으로 다시 퇴각했고 그때 이래로 변방민족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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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댓글 17.04.12 10:48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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