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레즐리 스티븐스
차례
머리말
제1장 대립적인 이론
제2장 이론에 대한비판
제3장 플라토:철인의 통치
제4장 기독교:하나님의 구윈
제5장 마르크스:공산주의 혁명
제6장 프로이트:정신분석
제7장 사르트르:무신론적 실존주의
제8장 스키너:행동의 조건화
제9장 로렌쯔:타고난 공격성
제10장 철학과 그 외
옮긴이의 말
머리말
이 책은 하나의 입문서로서, 매혹적인 지적 풍경을 빠른 속도로 관광할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에서 자극을 받아 독자들이 보다 자세한 답사를 하고 싶은
열의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으로써 필자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 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다루어진 주제들에 대하여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서관들은 이 책을 도서의 어느 항목에 포함시킬지 분류하여 넣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자에 의해서 집필되었지만, 학문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저자들과 주제들을 이 책은 다루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이 책은 심리학에
관계되는 몇 가지 이론들을 고찰하고 있긴 하지만, 심리학 개론으로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생물학, 사회학, 정치학, 신학에 관계되는 문제들까지도
언급하고 있기에, 네 개의 기존 분과 학문인 예술, 과학, 사회 과학, 그리고 신학간의
학문적인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유행하는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학문 상호간의 엇물림(interdisciplinary)"에 해당되는 것인데, 필자가
학술지 '메타 철학(Metaphilosophy)'(1970년 7월 1권 3호 pp. 258__67)에서 명명한
"응용 철학"의 의미를 확장__활용한 것으로 보면, 아마도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가장 적절한 설명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응용 철학이란,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믿음이나, 이데올로기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다 개념적인 분석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책에서 순수 철학에 관계되는 물음들이 제기되었으나 그
해답은 제시되지 않았다. 필자로서는 이 책으로 인해 독자들 가운데 이런 물음들을
좀더 깊이 캐어 볼 수 있는 이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필자의 원고의 각 부분에 비판적 일언을 해준 동료 케이드 워드, 보브 그리브,
그리고 로저 스카이어즈에게 감사를 표한다. 또 문체에 관한 제언을 해준 필자의 부친
패트리크 스티븐슨, 필자의 사상과 그 개진을 점검한 성 앤드루 대학의 제자들,
능률적인 타이핑을 해준 에나 로버트슨과 아이어린 프리만, 그리고 제반사를 도와 준
필자의 아내 패트에게 감사를 표한다.
성 앤드루 대학__1973년
레즐리 스티븐슨
@ff
제1장 대립적인 이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물음은 모든 물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그 밖의 많은 문제들은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해결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 우리의 의무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희망__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거짓 없는" 혹은 진정한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 실제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대립적인 견해들이 있다.
구약성서 시편 8장의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우리의 삶에 대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1845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논문에서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 관계의 총체성이다"라고 말하였다. 마르크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각 개인은 그가 살고있는 인간 사회의 소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1940년대에 프랑스에서 쓴 글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라고 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것도 부정하였다. 사르트르는 개개인 모두가 그가 원하는 존재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견해들이 서로 상치되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상치되는 결론들이 나오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그의 뜻이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이 어쩐지
불만족스럽다고 느껴진다면, 그 사회가 변혁될 때까지는 진정한 구제책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서 개인적인 선택의
필요성을 피할 수 없다면, 현실주의적인 단 하나의 태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취하는 행동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선택하는 길뿐이다.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상치되는 신념들은 흔히 다양한 생활 방식, 정치__경제
체제, 교육론 및 그 교육 실천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공식적인 해석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직장이나 자유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그 해석에 공개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가 없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생활하는 어린아이들은 그
해석을 귀가 아프도록 되풀이하여 들음으로써 그 진실성을 굳게 믿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이 명백한 진실인양 여기게 된다. 이른바 "자유 국가" 혹은
"민주주의 국가"로 불리어지는 곳에서, 기독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
지가 3세기도 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사리 잊고 있다. 공개적으로
기독교의 정통파의 교리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차별과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도
맛보았다. 몇몇 국가에서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학교에서 배우도록
하고 있고, 이혼이나 피임과 같은 사회 문제들을 법령으로 규제해 달라는 가톨릭교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영국과 같은 이른바 "세속적"인
사회에서조차도 기독교는 교육 제도에 영향을 행사하는 공식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영국 성공회는 국교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사상은 성직 기관에서는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부과된 것이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 자유의 진정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기독교의 논리에서 보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사상은 분명히
이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같은 사상은, 우리가 가능한 한
최대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이단이라고 규정될 수 없을 만큼 사회와 교육에 관한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되는 이론으로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내용 면에서 보면 이 두 이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이 두 이론의 각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생활 방식의 근원이 되고 있는 그
구조적인 방식에 있어서는 몇 가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첫째로 이 두 이론은 우주 전체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물론 모든 존재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전지__전능__전선하신 인격체 곧 하나님을
믿지만, 마르크스는 이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종교란 현실적인 사회 문제로부터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죄했다. 우주의 그 어느 곳에서도
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주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모든 것이 물질의 과학적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우주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다같이 우주 개념의 일부로서, 역사의 본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의 뜻을 나타내신
것처럼, 자신의 뜻을 역사하기 위해 역사상의 사건들을 이용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에는 이 역사 자체에 발전적인 진보의 패턴이 전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경제적 단계에서 다른 경제적 단계로 이어지는 발전이
불가피하므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에로 발전했듯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은 그 본질과 방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역사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일치하고 있다.
두 번째로, 우주에 대한 상반된 주장으로 인해 개개의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기술도 응당 상치되고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고, 그의 운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된다. 개개인은 자유롭게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각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판은 이승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개개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의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는 사후의 부활과 심판을 부정하며, 기독교의 핵심이 되고 있는
개인의 도덕적 자유의 중요성도 부정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우리의 도덕 관념과
그 태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유형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이 두 이론은 인간의 잘못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와 부합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오용하고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죄에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죄의 개념을
"소외"의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기독교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삶이 요구하는 어떤 기준이 현실 생활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이상적인 삶의 조건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 조건으로 인해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처방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어떻게 진단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이 두 이론을 비교하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생활의
잘못에 대해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만이 우리 인간을 죄의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구원하고, 자신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각 개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죄의 사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새로 거듭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인간 사회는 각 개인이 이처럼 거듭나도록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와 반대로, 각각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진정한 변화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을 때만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__경제 체제는 공산주의 체제로 대치되어야 하며, 역사 발전의 법칙에 의해서
이러한 혁명적 변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혁명에 불타는 정당에 가담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진통을 감소시키는 데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처방에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비젼도 서로가 상치되고 있음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적 비젼은 창조자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뜻하시는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자마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삶의 완성은, 인간과
사회, 이 모두가 여전히 불완전하고 세속적인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속적인
삶을 초월함으로써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비젼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고, 더 이상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소외됨이 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로이 서로 협조할 수 있는 미래의 완벽한 사회를 이 현실 세계에서
이룩하는 데 있다.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고차원적인 단계가 도래하기 전에
과도기적인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록 혁명 후 곧바로 그와 같은 완벽한 사회가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이러한 사회가 바로 역사의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믿음의 체계(belief__system)가 그 범위에 있어서 전반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 양쪽 모두가 인간의 삶 전체를 밝혀
주는 본질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이론은
시__공을 초월하여 정당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그들 각각의 세계관은 그
세계관에 동의할 것뿐만 아니라 그에 부합되는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론 중 어느 한쪽의 이론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그 이론이 우리의 삶의
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해 보면, 그들은 각각 인간 조직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조직체는 신봉자들의 충성을 요구하고, 교리뿐만 아니라, 교리의
실천에 대해서도 일정한 권위를 주장한다. 기독교에는 교회가 있고, 마르크스주의에는
공산당이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그들 교회들끼리, 그리고
공산당들은 그들 공산당끼리, 자기들만이 창시자의 진정한 교리(혹은 사상)를 따르고
있다고 다투어 주장하고, 교리(혹은 사상)의 해석은 자기들의 것만이 정통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서로 다른 실천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종파 형성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양쪽 다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이와 같은 구조상의 유사성을 주목해
왔으며, 마르크스주의도 기독교 못지 않게 하나의 종교라고 시사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이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같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 이 두 이론이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해 이와
같이 아주 상반된 설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구조를 띠게 되는 것인가?
기독교적 공산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은 어느 정도까지
그 차이가 조정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해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 사이에는 신의 존재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사르트르의 말을 등장시킴으로써 암시하였듯이, 인간에 관한
이론들은 더 많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플라토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더우기
근래에 들어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계속 바꾸어 놓고 있는가 하면, 또한 현대의 철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한층 나아간 이론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서양의 지적 전통
밖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많은 이론들 가운데 고대 중국과 인도의 인간론이 관심을
끌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론들 가운데 어떤 것은 기독교나 공산주의에서처럼, 사회 집단과
제도, 그리고 생활 방식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론들은
단순히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변화, 발전,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신념의 체계가 어떤 집단에
의하여 생활 방식의 근원으로 여겨질 때, 그 체계는 보통 "이데올로기"라고
불리워진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실존주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생활 방식을 규정해 줄
대상으로서의 뚜렷한 사회적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이론 그 이상이기는 하지만, 아뭏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 의거해서 행동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바는, 신념을 표방할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지시하고 있는 특정한 영향력 있는 여러
이론들을 검토하는 데 있다. 그 이론들 모두가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이 그것을 생활 방식의 근원으로 삼는 대응 집단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논의하고자 선택한 이론들은 모두가 다 우리가 기독교와
공산주의에서 보아 왔던 그 공통적인 구조의 주요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
구조의 주요 요소들은 (1) 우주의 본질에 관한 배경적 이론 (2)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본 이론 (3)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 그리고 (4)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처방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는 이론들만이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이다라는
주장은, 비록 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개의 진단일 뿐, 우리가 왜 이기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그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암시를 전혀 주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처방도, 또 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려운가에 대한 설명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 또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의 위치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떠한 진단이나 처방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하고자 하는 이론들에는 기독교, 마르크스, 그리고 사르트르의 이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이론들에다, 필자는 '국가론'(이 책은 고금을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 철학서 중 가장 읽기 쉬운 책 중의 하나다)에 나타나 있는
플라토의 이론, 프로이트의 이론(그의 정신 분석 이론은 금세기의 많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B.F.스키너의 이론(인간 행위의 문제에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심리학 교수), 그리고 콘라드 로렌쯔의 이론(동물의 행위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원숭이와 기타 동물과의 유추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최신 유행을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노벨상 수상자)을 첨가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들을 각각 검토할 때 필자는 이 이론들이 나오게 된 본질적인 배경은 간단하게
설명하겠지만, 그들의 이론적인 관점에 부합되는 많은 선례들을 찾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그리고 정신 분석 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많은 다양한 문제들을 조망하기보다는, 단지 위에서 약술한 네 부분의 구조를
통해 각 이론을 설명함으로써 그 이론의 핵심적인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각 이론을
설명할 때마다, 필자는 독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책 하나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독자들이 필자의 주장을 점검하고, 독자 스스로 더 많은 것을 헤아려 볼 수
있게끔 그 텍스트에 참고 페이지를 밝히겠다. 그리고, 각 이론에 관계되는 보충
참고서들도 제시해 줄 것이다. 독자들 가운데는 필자가 동양의 관점을 논의하지 않는
데에 실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런 독자들에게 필자는 필자 자신의
무지와 시간의 부족을 변명으로 내세우면서, 아래 적은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사상들을 해설하는 것 이외에 이 기본적인 사상들이 마주치게
되는 몇 가지 주요한 반론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각 이론마다 비판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겠는데, 필자는 이러한 논의에 고무되어서 독자들이 스스로 더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본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들을
비판할 때, 어떤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 예비적인 고찰로서 다시
한 번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거론해 보자.
보충 참고 문헌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이 책에서 나중에 더 상세히 논의될 것이고 각각에 대한 참고 문헌이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체계로서의 양자 사이의 비교를 위해서는 다음의 책들이 추천될 수 있다. Robert C. Tucker의 '칼 마르크스에 있어서의 철학과 신화(Philosophy and Myth in Karl Marx)'(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st den. 1961, 2nd edn. 1973), 특히 서문을 볼 것. Alasdair MacIntyre의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Marzism and Christianity)'(Penguin Books, Harmondsworth, 1971;Schocken Books, New York, 1969).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더 알기 위해서는 John Plamenatz의 '이데올로기(Ideology)'(Macmillan, London, 1971;Praeger, New York, 1970)를 볼 것.
인간의 본질에 관한 유대교와 중국, 인도, 그리고 이슬람교적인 이론들에 대한
입문으로서는 S.Radhakrishnan과 P.T.Raju가 편집한 '인간의 개념(The Concept of
Nan)'(George Allen & Unwin, London, 2nd edn. 1966;Johnsen Publishing Co.
Lincoln, Nebr, 1966)을 볼 것.
@ff
제2장 이론에 대한 비판
우주에 대한 기독교적 근본 주장, 즉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물론 많은 회의적인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일례를 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지하시다면, 그 분께서는
악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만 할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그 분께서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비를 지닌 분이라면,
왜 그렇게 행해 주시지 않는가, 특히 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고통을 덜어 주십사 하는 신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기본 주장, 즉 경제적 발전의 단계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한다는 주장 역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진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말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 이 진보는 미리 결정되어
지지 않는 많은 비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닌가? 특히 공산주의 혁명은
서 유럽의 산업 국가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사실은 마르크스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기독교인이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곧바로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개개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 존재인가? 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인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유전과 교육과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인가? 육체는 사후에도 계속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들이 제기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보편적이고 명백한
사실 앞에, 사후의 부활을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빈약하고 매우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물질로서만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의 견해가 정말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제각기 다른 처방을 대할 때도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는 신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라는
기독교적 주장은 인간의 모든 이성적인 사고에 도전하는 것이다. 반면 공산주의
혁명이야말로 인간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보편적인 큰
문제를 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 속에 소속시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 두 주장
가운데 어느 하나도 보편적인 진실을 띠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시작된
이래, 개인과 제도에 그리고 국가의 후속 역사에는 그들이 이야기했던 새로운 삶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 이래 교회의 역사나 1917년 이후 러시아의
역사는, 다른 모든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으로 점철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적 생활이나 공산주의 생활을 실천해도 혼란과 논쟁과 이기심과
박해와 폭정과 고문, 그리고 살인 등은 제거되지 않고 있다.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적인 반론들은 지금까지 계속 많이 이야기되어
지고 있다. 그런,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중 어느 사상도 그 반론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기독교는 최근 수세기에 걸쳐 점차 그 영향력이
침식당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의 인구 중 극소수만이 마르크스주의의 철저한
신봉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 모두가 여전히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철의 장막 양편에는 각각 수많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이론은 일요판 신문의 지면 한 구석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산업 국가 사회에서 사라져 버린 마술이나 점성술처럼 사라지지는 않고
있다.
수많은 온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계속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것일까? 첫째로, 그 신봉자들은 보통 정당한 반론을 맞이할 때 교묘한 변명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려는 방법을 찾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곧 악을 제거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가장 이로운 것을 위해 잠시 존재하는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서방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 계급이 높은
생활 수준의 임금을 양도받음으로써 "돈으로 무마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이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정론이나 자유 의지 혹은 유물론이나 인간의 부활 같은 커다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방향으로 그 문제의 초점을 바꾸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두
이론의 신봉자들은 그래도 미래에는 인간의 완전한 새로운 삶이 도래할 것이며,
기독교나 공산주의 역사에 나타나는 무서운 일들은 기독교나 공산주의가 성취하고자
하는 세계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각기의
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난점들을 교묘한 변명으로 합리화하고, 그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이상적인 미래에 호소함으로써 그 신봉자들은 각기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믿음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나 공산당의 이론가들은 하나님의
길이나, 당의 길을 이처럼 정당화시키는 일에 잘 훈련되어 있다.
둘째로, 그 신봉자들은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공격함으로써, 그 비판에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에 대해 지적 반론을 끈질기게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죄에 눈이 멀었고, 그들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으며, 기꺼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공박할 수 있다. 이와 흡사하게 마르크스주의자도 역사와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
분석의 진실을 깨달을 수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허위 의식"__사회에서 그들의 경제적
지위로 인해 생겨난 사고 방식과 태도__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히 그 사회에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 가운데서 "부르즈와 계급
의식"을 낳게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올바른 진실을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이든 마르크스주의이든 간에, 그 신봉자들은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바로 자신들의 이론에 입각해서 분석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
비판이 환상에 기초를 둔 것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지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주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지속되어 진다고 할 때, 필자는 그 이론을 "폐쇄된 체계(closed system)"라 부르겠다.
그 두 가지 방법은 (1) 자신들의 이론을 반박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라면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방법 (2)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자기 이론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비판을 묵살해 버리는 방법이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은 면에서 보면 이 두 이론은 폐쇄된 체계로서 여겨질 수 있겠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에 집착하는가?
여기에는 자신의 믿음이 그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타성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가령 어떤 삶이 한 가지 특정한 신앙과 생활 방식에
의해서 교육받았거나 혹은 그 신앙에 귀의하여 그것에 따라 생활해 왔다고 하면,
자신의 과거를 포기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 어떤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한 사회 집단의 생활 방식의 근원이 된다고 할 때,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믿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통상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신봉자들은 그 믿음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게끔 심한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 믿음을 폐쇄된 체계 내에서 자연스럽게 지탱해 나갈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의 체계가 설령 반론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인 진리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어떤 통찰력, 즉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 신념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그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논의한다는 게
가능할 것인가 라는 의혹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런 이론들이 (일반의) 생활 방식 속에
실현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 이론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닌 자들에겐
어떤 논리적인 반론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위에서
언급했던 폐쇄된 체계에 의해서,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난공 불락의 성을 스스로
쌓을 수 있는 것 같고, 궁극적인 호소의 대상은 믿음이나 권위일 수밖에 없으며, 이미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 마음에 드는 물음, "왜 나는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 또는 "왜
나는 이 권위를 받아들여야만 하나?"에는 어떠한 대답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가 가능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책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장이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포 자기는 시기 상조라고 믿는다. 이는 필자가 논의하고자 하는
이론들 모두가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며, 그 중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우에는 그것이
폐쇄된 체계로서 여겨질 가능성은 훨씬 희박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떤 믿음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몇몇 신봉자들에 의해 폐쇄된 체계로 간주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논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면 합리적인 논의가
아직은 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사람이
하는 말과 그 말의 동기를 따로따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 그 말의 동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될 것이나, 만일 우리가 말의 진위에만, 그리고
그 말을 믿게 할 만한 타당한 이유에만 신경을 쓴다면, 말의 동기와는 무관해 진다.
또, 말하는 사람이 제시할 수 있는 이유들이 반드시 최선의 이유가 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순전히 그 사람이 한 말의 진가만을 토대로 논의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위에서 지적한 폐쇄된 체계의 두 번째 특징, 즉 비판가의 비판의
동기를 공박함으로써 그 비판에 대항하는 수법은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의의 주제는 이론의 진위나 근거에 관한 것인데, 그 진위나 근거에 반박하는
사람의 반론에서는 그 숨은 동기를 문제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반론 그 자체의
진가에만 반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사람의 동기는 어떻게 보면
괴팍하고 부당하나 그가 실제로 한 말은 옳을 수도 있고, 그럴 만한 이유로 해서
정당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령 반박의 동기가 꼭 고려되어져야 하는 경우에라도, 그
동기를 자기 이론에 입각해서 분석한다면, 그 이론이 옳다는 것은 이미 가정하는 것이
되므로, 논점을 교묘히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어떤 이론에 대한 반론이 있을
때 그런 식으로 그 이론을 거듭 주장한다고 해서 그 반론이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폐쇄된 체계의 첫 번째 특징, 즉, 이론에 반박하는 온갖 증거에 대해서 묘한 변명을
하는 수법 역시 다소 의구심을 가지고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종종 "묘한 변명을 하는"
이러한 방법이, 그 이론을 믿기로 이미 작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별로 미덥지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이나, 서구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답변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묘한 변명이 어느 때 이치에 맞게 정당화되며, 또 어느 때는 그렇지 못한지를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은 한 진술의
찬반에 대한 증거가 어느 정도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보다도 어떤 종류의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로, 진술은 어떤 사실의 진술보다, 다시 말해서 사실이 어떠한가에 대한
진술보다 오히려 사실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말해 주는 하나의 가치
판단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에, 거의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는 상당한 정도의 동성애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다시 그 사람이 "각 사회에서 동성애는 소수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그 반론은 자기의 진술을 논박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아마도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사회의 대다수가 이성과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빠질 수도 있다(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현상이 성행했던 것 같다)고 넌지시 비칠
것이다. 그 사람은 "나는 그래도 그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이야기하겠다"라고
응답할 것이다. 이때 이러한 응답은 결국 사람들이 실제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해야먄 하는가(혹은 하지 않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자기의 의견 표명이다. 그러한 인상은 그 말하는 사람이 동성애를 하고 있다는 어떤
사람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못마땅한 반응을 할 때 더 확실해 질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진술이 실상 사실적(factual)인 것이 아니고 평가적(evaluative)인 것이라 해도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가지고 논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진술이 정당하게 증거와 무관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가치 판단으로
인식시켜야 하고 사실을 말하려는 것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진술은
물론 증거를 가지고 뒷받침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것(사실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평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진술은 이런 유의 애매성에 빠지기 쉽다. 사실 "본성"이나
"본성적"이라는 말들은 혼란의 잠재적 징조를 보이는 위험 천만의 언어 기호로 여겨질
만하다. 만일 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X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에게 "당신은
모든 인간이, 혹은 대부분의 인간이 실제로 X라는 의미냐?" 또는 "우리 모두가
X이어야만 하는가를 의미하느냐?"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 판단의
진술과 사실의 진술을 구별할 때에, 가치 판단의 진술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의
표현이라든가, 객관적으로 그 진술에는 (그 진술에 찬성__반대 여부를 막론하고)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든가 하는 의미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가치 판단의
본질은 그것이 "객관적"이 될 수 있건 없건 혹은 궁극적으로 사실적 진술과 다르건
간에, 도덕 철학의 중심적인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가치
판단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 배제하려 한다. 다만 그 두 종류의 진술을 확연히
분류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론들을 논의할 때, 이따금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반증에 흔들리지 않고 진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두 번째 다른 방법이
있다(이는 정의에 관계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면서 그에게 반론을 제기해야 할지 분명치
않다. 진화론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서 결국 우리 인간은 다른 종(species)과
같은 공통의 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가정하자. 우리 인간이
특수한 종류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먹고,
생식하고 죽기 때문에, 역시 동물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사람처럼 먹고,
자식을 낳지는 않지만, 사람들처럼 걷고 말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을 생각해 보자. 그
로봇을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마치 동물로
불려질 수 없는 한 어떤 것도 인간으로 일컬어질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진술은 인간에 관계되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상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의 일부분을 드러내 줄 뿐이다. 그
진술은 정의상으로는 옳다. 철학자들의 전문 용어를 빌리면, 그 진술은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진술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용어들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옳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분석에 의해서 한 진술이 사실이라고
나타난다면, 이 진술은 어떤 증거에 의해서도 논박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지만, 또 한편 그 진술이 어떠한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물론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그 진술은 인간 일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예의 진술은 인간 본질과 관계 있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정의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이 하찮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만일 어떤 단어가 이미 한 언어 체계 내에서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 때, 미리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그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면
극단적인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종종 여러 이론들이 새로운 용어를 소개하거나, 혹은
기존의 단어들을 새롭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겠는데,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정의를
주어서 그 정의가 단지 정의일 뿐 어떤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의란 금방은 환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 결론을 내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사람은 동물이며 모든 동물들은 먹이를 먹는다는
진술이 분석적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먹이를 먹는다는 것도 분석적이랄 수 있다.
따라서 분석적 진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진술하는 종합적 진술과
뚜렷하게 구별될 때만이 그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게 된다.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두
진술 사이에 처음에 보이듯 그렇게 명확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아가 그 차이가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런 이론적인
난제에 뛰어들 생각은 없고 몇 가지 사실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은 X다"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는 X가 아닐 수 있다"는 제안을 검토치 않고
무시해 버린다고 치자. 그럴 때, 우리는 그에게 다음의 질문을 해야 마땅하다. "인간이
X임에 틀림없다라는 진술이 인간에 대한 당신의 정의 중 일부분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X가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인가?"라고.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진술이 정의상의 문제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더 이상 검토할 것도 없이
그는 자기가 증거를 무시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치 판단과 분석적 진술은 이제껏 본 바와 같이 단지 증거의 검토에 의해서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그런 중류의 진술이 아니다. 만일 진술이 증거__여기서
증거란 궁극적으로 사람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사용해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__에 의해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을 경우, 철학자들은
이러한 진술을 "경험적 진술"이라고 일컫는다. 진술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위와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밝혀 두면, 어떤 진술이 경험적인 것인지 아니면 평가적인 것인지
혹은 분석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보통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상
어려운 때는 어떤 진술이 이 세 가지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을 때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적 주장과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고려해 보자. 그들은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고
우주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주장하고자 하여, 자기들의 주장이 대부분 가치
판단이라거나 단순한 정의의 문제일 따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순전히 경험적인 것인지의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상대방의 이론을 서로 반박할 만한 신빙성 있는 증거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각각 그 증거들을 반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묘한
변명으로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론의 신봉자가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온갖 증거로부터 묘한 변명으로 (필요한 경우 자신의 이론을
보충하면서까지), 빠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면, 우리는 그 신봉자를
경기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쉽게 승리를 갈취하는 사람인 양 여기게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진술이 어떤 종류의 관찰에 의해서 검증이 될 수 없는 한, 실제로 그
진술은 사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른바 "검증 원칙(the verification principle)"에 매력을
느껴 왔는데, 이 원칙에서는 비분석적 진술이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한,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가치 판단은 사실상 전혀 진술이라고 할 수 없는 한갓
감정의 표현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혹은 경험적인 것도 아닌, 이른바 "형이상학적 진술"을 거짓된
것으로서라기 보다도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문제, 그리고 많은 다른 문제들이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인간의 본질에 보다 더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들을 포함해서) 검증 원칙의
주창자로 일컬어졌던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서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검증 원칙은 이러한 큰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20세기의 중요한 철학 논쟁 중의 하나로
등장해 왔던 것이 바로 이 검증 원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논쟁에서 모종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진술이 분석적인 것인가,
혹은 경험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구별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진술들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진술들은 마치
뒤죽박죽이 된 가방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진술들의 다수는 개별적인 관심을 쏟을
만하다. 관찰에 의한 검증 가능성(testability)은 어떤 진술이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진술이 과학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리하여 검증보다 반증(falsification)에 더 강조를 두어
오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의 본질은 가설들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반증을 들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도 과학적인 것으로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어떤 관찰이라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나, 역사의 진보나 혹은 불멸의 영혼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그럴싸한 어떤 증거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의 이론은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론이 비과학적이다라고 해서 반드시 그 이론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비과학적 이론은 잘 체계화된 과학적 이론만큼 명쾌한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과학적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우리의
감각은 느끼도록 하는 것도 사실이나, 과학적이라고 주장되어 온 인간의 본질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반증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인 것이다. 이 경우 그 이론들에 대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이론이 비과학적인
것일 수 있음은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기본이 되는 이유 중 하나를 제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혹시 비과학적인 이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이유들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한다. 평가적 진술, 분석적 진술,
그리고 경험적(즉 과학적) 진술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우리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개별적인 이론들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 보겠다.
보충 참고 문헌
"폐쇄된 체계"에 관한 나의 개념 사용은 Arthur Koestler의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London, 1967; Pan 문고 1970; Regnery 문고, Gateway,
Chicago, I11.)의 p.300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 책은 이 책의 제 8장 및 9장에서
논의된 주제에 관해 많은, 흥미롭지만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주장들을 지니고 있다).
검증 이론에 관한, 그리고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진술들의 무의미성에 관한 영어로
쓰인 고전적인 저서로는, 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초판 1936년, 현재는 Penguin, Dover 문고, New York)가 있다.
한 이론이 과학적인가에 대한 반증 가능성의 기준은 Karl Popper에 의거한다. 그의
책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초판 1934, 현재는
Hutchinson 문고 london, 1959, 개정판 1968; Harper & Row Torchbook 문고, New
York)의 특히 1__4장을 보라. (후반부는 고도로 기술적이다.)
도덕 철학에 대한 평이한 입문서로서는, J.D. Mabbott의 '윤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Ethics)'(Hutchinson, London, 1966)을 볼 것.
분석__종합의 구별에 대한 철학적 의심에 대해서는, W. V. O Quine의 '논리적
관점으로부터(From a Logical Point of View)'(Harper & Row Torchbook 문고, New
York, 2nd edn. 1961)에 실린 에세이 '경험론의 두 독단론(Two Dognas of
Empiricism)'을 볼 것. 그러나, 독자는 이것이 철학자들의 철학으로서 과거의 철학적
논의들과 기초적인 현대 논리학에 대한 소양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언급은 위에 추천한 Ayer와 Popper를 읽는 데도 적용된다. Popper에 대한 Bryan
Nagee의 책(Modern Masters Series, Fontana, London, 1973; Viking, New York,
1973)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쉬운 소개가 될 것이다.
@ff
제3장 플라토:철인의 통치
사상 체계에서 필자가 지적했던 구조상의 공통된 네 가지 구성 요소__우주론과
인간론,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__의 일례인 플라토(427__347,
BC)의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들의 고찰을 시작해 보기로
하겠다. 플라토의 이론은 아주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과도 여전히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통치할 때만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는 오늘날 여러 삶들의 주장은 바로
플라토 이론의 정수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면, 플라토의 심상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는 그리스 도시 국가인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이 때의 아테네는 무역을
통해서 한동안 경제적 부를 누렸고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주주의 통치를 누렸는가
하면, 학문적으로는 위대한 도덕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에서 그 전성의 극에 달하는
전례 없는 번성을 했던 때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테네를 패망시키고 잠시 동안의
폭정의 시대를 초래했던 전쟁 기간 중에 플라토 자신은 성장했다. 민주 정치가
회복되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신에 대한 불경과 젊은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소피스트들과 유사했으며, 그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 특히 쓸모가 있었던 일종의 학예인 수사학
또는 화술을 가르치기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의견 가운데는 도덕적__정치적
규범들이라는 것이, 다른 국가의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딴 관습들(무역을 통해
아테네에 알려진)을 고려해 볼 때, 독자적인 관습을 벗어나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겠느냐에 대한 회의론이 공통적으로 표명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옳게 사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관심은
플라토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플라토는 사람들이 익혀 온 인습적인 견해를
의문시하여 그것을 타파하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자기 스승을 처형한 데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정치와 철학에 환멸을 느낀 플라토는 우주에 대한 진리뿐만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쓴 많은 철학적 대화 속에 스스로 도달한 결론들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하면서, 사실상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창설한 아카데미에서
그것들을 가르쳤다.
플라토의 대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국가론'으로, 이 책 속에서는
이상적인 인간 사회에 대한 플라토의 개념이 개략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철학과 도덕과 정치와 교육, 그리고 예술을 포함한 많은 주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 대화를 중심으로 플라토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하며, 텍스트 참조를 위해서 전통적인 수자 표기 방법(이 방법은 거의 모든 편집 또는
번역물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우선 주요한 이론들을 설명하고
나서 차례로 그것들을 비판해 보기로 하자.
우주론
비록 플라토가 여러 곳에서 유일신(God)이나 여러 신들(the gods)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만, 단일신이든 다신이든지 간에 그가 신들의 존재를 얼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유일신에 대해 얘기할 때도,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은 비교적 뚜렷하다. 그리고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개념조차도 '국가론'의 요지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플라토의 우주의 개념에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형상(Forms)론이다. 이 이론은
논리적인 측면, 형이상학적 측면(구극적 실재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 인식론적
측면(인식의 대상을 다루는 것), 그리고 도덕적 측면하에 요약될 수 있다. 한 낱말이,
예를 들어 "고양이"라는 낱말이 사실상 많은 다른 개별적인 것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플라토의 대답은 이러한 일반적 낱말이 각각 대응하는 하나의
형상, 예컨대 고양이라는 형상(the Form Cat)이 있으며, 이 형상은 모든 개별적인
고양이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596). 이 개별적인 동물들이 고양이들로 되는 것은
그들이 고양이라는 형상과 닮고 있다든가, 그 형상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상론의 논리적 측면__일반적인 낱말의 의미의 문제, 즉 이른바 "일반 개념의
문제(problem of universals)"에 대한 해답__이다.
이 형상들은 변하거나 썩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질료)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측면이다. 형상들은 시__공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어느 감각에 의해서도 지각될 수 없다(485, 507, 526__7). 플라토는
변할 수 있고 파괴될 수 있는 물질 세계를 초월해서 또 다른 영구 불변의 형상의
세계가 있다고 통찰하고 있다. 플라토가 그의 유명한 비유에서, 즉 인간의 조건을,
사슬에 묶인 채 동굴의 안쪽 벽을 마주하고 앉아 있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동굴 벽에 비친 사물들의 그림자만을 실체로서 알고 있는 죄수들의
조건으로 비유한 데에서 암시되고 있듯이(515),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들은 이
구극적인 실체들과는 아주 먼 거리에서 연관을 맺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플라토는 교육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구극적인 실체인 형상들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존재하는 것만이 완전히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형상에 대한 이와 같은 지적인 인식만이 참 지식이라는 것이 형상론의
인식론적 측면이다. 영원하지 못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은 지식이 아닌 한갓
믿음이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476__80).
형상론의 이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예증은 플라토가 정통해 있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어떤 물리적 대상도 완전히 곧거나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고 항상 어떤 불규칙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하학이 선과 원
혹은 사각형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상적인
대상들__두께가 없는 곧은 선이라든지 완벽하게 둥근 원 등__에 관한 정리가 논리적인
이론에 의해서 아주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에서, 우리는
물질적인 대상들이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초시간적 대상, 곧 형상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플라토의 인간의 본질과 사회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형상론의 도덕적 측면이다. 가령 "용기"와 "정의" 같은 도덕적인 낱말들을 생각해
보라. 일반적인 모든 용어에서 그랬듯이 플라토는, 용감한 행동, 의로운 행동, 용감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 되어 있는 여러 개별적인 행동과 삶들을, 그 형상인 용기,
정의와는 구별하였다. 일반적인 낱말은 어느 면으로 그 대응되는 형상을 귀감으로
모방하는 그 행동들과 사람들에게도 바로 적용된다. 그러나 오히려 유클리드 기하학의
예들에서처럼, 어떠한 행동이나 사람도 절대적으로 용기나 정의의 완전한 모델이
못된다. 왜냐하면 누구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명한 이치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 형상들은 객관적인 도덕 기준들을 설정하여 그 기준들에 의하여 인간 행위와
성격을 판단한다. "선"이라는 낱말은 도덕에 관계되는 낱말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낱말이기 때문에, 선이라는 형상은 형상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며, 거의 신과 같은
역할을 하여 모든 실재와 진리와 선함의 근원이 된다(505__9). 형상이 우리에게 설정해
준 절대적 기준들은 단지 개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__정치 생활의 전반을 위한
것이므로, 그들은 이상적 형태의 인간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규정해 준다(472__3).
따라서 형상론은 플라토 시대에 만연되었던 지적__도덕적 회의주의에 대해 이
철학자가 제시한 하나의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론은 우주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삶의 목표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목표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지성의 힘을 발휘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또 그것은 지성에 대한,
그리고 윤리학에 대한 소크라테스적인 관심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신뢰의 정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
플라토는 인간을 이원적으로 보는 견해를 마련해 준 주요 원천 중의 하나다. 이
이원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은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실체다. 플라토는 인간의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 즉, 영혼은 인간이 탄생하기 전에도
계속 존재해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들이
'국가론'에서 언급되고 있지만(608__11), 이들에 대한 그의 주요한 논의는 다른 대화들,
특히 '메노'와 '파에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혼의 비물질론과 불멸론은 '국가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로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형상의 세계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라는 플라토의 대비와 자연히 관련되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형상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도덕의 관심이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국가론'에서 보다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
이론이다(435__41). 가령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나, 물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갈등을 생각해 보라. 플라토는 그 사람의 마음에 그 물을 마시도록
유혹하는 첫 번째 요소와 그것을 금하는 두 번째 요소가 있다고 논한다. 그 첫 번째
요소를 욕망 혹은 정욕(배고픔, 갈증 혹은 성욕 같은 모든 육체적 욕망을 뜻함)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요소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플라토는 인간의 마음에는 이 외에도 세
번째 요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바, 즉 시체 더미를 보고자 하는
불같은 욕망을 느끼나, 그것을 보고자 하는 자신에게 증오를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예를 들고 있듯이, 스스로에 대한 화나 분개의 감정이 느껴질 때 생기는
정신적 갈등의 경유가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분개나 화 또는 혈기(Spirit)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세 번째
요소라고 주장한다. 플라토는 어린아이들이 이성을 갖추기 훨씬 전에 혈기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혈기는 일종의 자기 주장 혹은 이기심 같은 것으로서
내면적 갈등이 생길 때는 보통 이성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이성, 혈기, 욕망은 어느
인간에게서나 나타나지만, 어떤 요소가 우세한가에 따라 각각 지식욕, 성공욕, 소유욕
등의 주된 욕망을 가진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이 나타나는 것이다(581).
플라토는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데 분명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형상들을 지적인 사유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구극적인
실재로 보는 그의 관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플라토는 이성이 혈기와 욕망의 두
요소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세 요소는 각기 따로따로 적당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상적인 조건은 이 영혼의 세 요소가 이성에 의해
통제되면서 서로 조화로운 화합을 이루는 데에 있다(441__2). 플라토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조건을 그리스 말로 디카이오시네(dikaiosune)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말은
"정의"라는 말로 보통 번역되고 있으나 정확한 영어 번역은 있을 수가 없다. 이 말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볼 때, 개인의 "행복" 혹은 "정신 건강"이라는 뜻이 플라토가
사용한 개념을 좀더 잘 전달해 줄 것이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그 이후의 많은
그리스 철학과 마찬가지로, 플라토는 지적인 사유 곧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강조는 동시에 바로 도덕에 대한 강조가 된다. 왜냐하면 이는 철학자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덕의 문제가, 지식과 도덕이 각기 달리 의견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곧바로 인간 지식에 대한 문제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진리는 우리의 지적
사유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비물질적인 형상들을 알게 될 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토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마지막 주요 특징은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지적이다. 각 개인은 자급 자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혼자 힘으로는 마련할 수 없는 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의__식__주와
같은 물질적인 필수품의 경우만 보더라도, 인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이러한 모든 것을 마련할 수는 거의 없다. 이러한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생존하기 위한 싸움에 소비해 버리고 만다면 친교나 놀이나 학문과 같은
특수한 인간적인 활동을 할 여지는 거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개개인은 각각 다른 적성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농부와 기능공과
군인과 행정가들이 있게 되는데, 그들은 각각 한 종류의 일에 전문가가 되게끔 천성과
교육과 경험에 의해서 적합한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업은 직업을 택하는
데 있어서 다소 비현실주의적인 양자 택일보다 더욱더 효과적이다(369__70). 플라토에
의하면__물론 전형적인 그리스 인의 관점이기도 하다__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인간 이외 어떤 것도 인간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진단
형상(들)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위한 플라토의 이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철학자가
실제의 일들을 직시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은 이상과는 너무 유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정의"로서 일컫고 있는 영혼의 세 요소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인간 사회도 그가 역시 "정의"로서
일컫고 있는 조화와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플라토는
'국가론'의 한 부분(543__76)을 여러 형태의 불완전한 사회와 이 불완전한 사회에
대응되는 여러 형의 불완전한 개인들에 대한 진단에 할애하고 있다. 스파르타 사회와
같은 "금권 정치(timarchic)"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야심 만만하고, 경쟁심이
강하고, 군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며, 지성을 가진 사람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과두
정치"에 있어서, 정치적 힘은 재력가의 손에 달려 있고, 이 재력가를 움켜쥐는 자가
성공적인 사람이 된다. 플라토는 틀림없이 아테네 정치에서 얻은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대단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개인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 무엇인가를 다 똑같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플라토는 생각했다. 그는 민주
사회의 전형적 개인은 훈련이 부족하며, 오직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라고 비난했다. 또 전제 정치로 말한다면, 민주주의 자유 방임이 낳는 바로 그
무정부 상태와 무질서를 초래하는 전형적인 정치 체제라고 플라토는 생각하고 있다.
한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얻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파렴치한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게 되므로, 그렇게 되면 인간의 본성에 있는 가장 범죄적인 요소들이
사회에 나타나 그 사회를 폭력 사회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플라토는 각각 이런
유형의 개인과 사회는 이상으로부터 한층 유리되어 더욱더 불행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576__87).
플라토가 진단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나타나는 결합들은 그가 인간 사회에서
발견하고 있는 결함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누구도 이 철학자에게 인간의
잘못이 개인의 책임이냐 혹은 사회의 책임이냐 하는 단순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이 두 요소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사회는 불완전한 개인을 낳고, 이 불완전한 개인은 불완전한 사회를 낳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각 개인에게 정의가 없는 한, 국가에도 정의가 있을 수 없고,
국가에 정의가 없는 한, 각 개인에게도 정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는 이 양
경우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각자가 각자의 직분을 행하는 자연적인 구성 요소
사이의 조화이며(435), 그 반대인 불의는 부조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확립시키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처방
"철학자들이 이 세상의 왕이 되거나 혹은 왕과 통치자들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실제로 철학자들이 되어, 정치 권력과 철학이 똑 같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국가나 인간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은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473)." 이것이
플라토가 내리고 있는 처방의 본질이다. 그 스스로도 이 처방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의 형상론과 인간의 본질론을 고려해 본다면 그 속에
이론적인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가를 밝혀 줄 수 있는 진리가 있고, 이 진리가 배울 능력과 뜻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당연히 인간 사회의 발전의 방향을 잡아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철학자들은 형상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식을 얻게 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만일 사회가 철학자들에 의해서 통치된다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국가는 완전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로서, 여기서
완전이라는 개념은 지적__정치적__도덕적인 것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가론'은 완전한 국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철학의 본질, 즉 플라토가 인간을 완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그 도덕적__지적인
인식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완전한 개인을 내놓기 위해서는 정밀한 교육 제도가 필수적이다(376__412,
521__41). 이런 주장에서 플라토는 교육을,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주요한 요소로서 인식한 최초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교육의 여러 단계를 구상하고 고등 교육은 이 고등 교육을 떠맡을
자격 있는 사람들, 즉 장차 사회의 통치자가 될 엘리트에게만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 교육에서는 수학과 철학, 말하자면 형상에 대한 지식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는 학문이 강조되고 있다. 이리하여
엘리트는 그 어느 무엇보다도 철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나, 항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자기가 배운 지식을 사회의 발전에 적용할 것이다. 하위직에서 경험을 얻은
후 그들은 최고의 권력을 지닐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이와 같은
자들만이 사리 사욕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오용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적인 부보다는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더
귀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521).
그렇다면 사회의 나머지 계층, 즉 비엘리트는 어떤가? 인간 사회에는 인간들이
이행할 다양한 기능들이 있기 마련인데, 분업은 이 기능을 자연스럽고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는 방법이다. 플라토는 그의 이상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세 계급으로 나누고
있다(412__27). 철인 통치자들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보조자라 일컬어지는 계급이
있는데, 그들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공무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통치자들이 지시한 것을 실행하는 계급이다. 세 번째 계급은 특정한 이름을 갖지 않은,
모든 종류의 일꾼을 총망라한 기능공과 상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세 계급간의 구분은
엄격히 지켜진다. 플라토는 사실상 "정의", 즉 사회 복지는 각 계급이 서로 대립됨이
없이 자신의 본연의 직분을 수행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432__4). 그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바로 다음에 다루고 있는 개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건강도 역시 이 세 구성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데 있다. 플라토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자신의 목적은 한 계급에 한정된 행복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전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420).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계급의
구분이 엄격히 지켜져야만 국가가 화평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각 계급은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일이며, 사회에서
자신의 직분에 알맞는 정도 만큼의 행복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421).
플라토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
'국가론'은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간략한 내용들은 이 책이 지닌 풍부하고도 다양한 사상 중 일례에
불과할 뿐 이 책 자체를 읽는 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필자는 독자가
비평적 안목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도록 플라토의 이론과 진단, 그리고 처방에
관계되는 몇 가지 의문점을 대충이나마 계속 검토하고자 한다.
형상론의 많은 논리적, 인식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여전히 전문
철학가들에게 특별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문제들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형상의 도덕적 측면은 이 글의 중점적인 목표가 된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가를 밝혀 주는 진리가 있다는 그의 이론은 그가 인간의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근본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거의 말할 필요조차 없다. 여러
세대를 걸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타나 있는
문제들의 다수가__비록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__보편적인 "진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무엇이 옳은가는 각 사회마다 그 답이 다르고, 일정한 한 사회
안에서까지도 단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두 사람이
도덕적 문제에 대해 서로 상반된 해답을 제시한다면, 그 대답은 진__위의
문제라기보다 마치 어떤 이는 맥주를, 어떤 이는 과일주를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는 도덕
철학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끊임없는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플라토가 도덕과 정치에 객관적 기준들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할 만한 정확한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이 철학자는 이러한 결론적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의 이론에
관계되는 의문점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남고 있음에 틀림없다.
객관적인 기준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플라토의 이론에는 그 객관적인 기준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합당한 방법 역시 없다(철인 통치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만일 교육받은 사람들이 무엇이
도덕과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들인가에 대해 진정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어떤 것이 옳은 관점인가를 보여 줄 만한 합당한 방법이 있는가? 플라토는 대립되는
의견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거의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플라토가
철학자들은 마치 태양의 현란한 빛처럼 그들을 비추고 있는 선 그 자체인 형상에 대한
비젼을 사실상 얻을 수 있다고 주장을 펼 때(508__9), 그 자신도 몇몇 군데에서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거의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508__9). 그런데 만일
그러한 "비젼"에서 철학가들마다 제각기 다른 것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대립적인 주장의 갈등만이 존재할 것인가? 누군가가 자기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쉽게
생각을 한다(종교의 논쟁사가 입증하고 있듯이). 플라토는 철학가들이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밝혀 주는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있으니까, 그들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토의 이와 같은 관점은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그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오로지 자신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플라토의 이론에는 많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인가?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며 파괴될 수 없는 것인가? 영혼이
존재한다 손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각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가? 또한 이성, 혈기, 그리고 욕망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이 마지막
문제에 대해서만 좀더 언급하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구분은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여러 학설에서도 보편화되어 왔지만, 아마도 플라토의 이론은 인간 본성에서 서로
갈등을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최초로 그럴 듯하게 구분한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의 각 부분에 현대적 용어로, 지성이니, 개성이니, 그리고 육체니
하는 명칭을 다시 붙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정밀하게 혹은 속속들이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예를 들어, 감정이란 것도 이 세 부분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토가 그의 이상 국가를 위해 제시한 청사진에 대해 두 가지 주요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완전 무결한 사람들__철인 통치자들__이 절대
정치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플라토의 요구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
과정이 잘 계획되고, 잘 실행된다 할지라도 아주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어떤 보장이 사실상 있을 수 있나? 철학자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플라토의 견해는 고지식한 낙관론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권력의 남용의 가능성에 대비할 어떤 정치 제도를 세울 필요가 없겠는가?
모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완전한 인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생각에다 청사진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비현실적인 태도가 아닌가?
현실에 입각한 정치 제도라면 이상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게 관심을 두어야 마땅하다. 플라토는 "누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자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누구도 절대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플라토는 민주주의를 너무 성급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무시해 버린다. 아마도 그는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모든 결정 사항에 투표권을
행사하던 아테네식 민주주의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는
적정 규모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가신 제도가 될 수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 사상__정부는 일정 기간
내에 재선거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은 통치자들을 면직할 수 있는 제도적인
안전 장치를 마련해 주고 있는데, 이런 것은 플라토의 '국가론'에서는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의회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할지는 모르나, 권력의 최악의 남용을 방지할 만한 보장이 없는 절대 권력의
정치 체제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두 번째 비판은 플라토가 국가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행복보다는 국가 전체의 질서와
안전에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가 그의 '국가론'의
한 곳에서 이와 같은 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이미 주목하던 바(420), 519__20에서
플라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의 목적은 어떤 특정한 계급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다. 법은 모든 시민을 결속시키고, 그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각각 개인적으로
공동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혜택을 골고루 갖도록 하기 위해 희유책이나 강경책을
사용한다. 이러한 태도를 조장하는 그 목적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라는 통일체 속에서 서로 유대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각
개인이 사회 전체의 복지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또한 특정한 법들(가령 살인과 도둑을
금하는)이 모든 사람에게 시행되고 있는 이른바 "공동체 정신"에 대해 일반적으로
호의를 갖고 있다. 이런 면에서 플라토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플라토의 청사진은 그의 세 계급의 엄격한 구분과,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묵묵히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공동체 정신이 의미하는 것 이상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상 원치
않더라도 통치자는 통치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보조 계급은 보조해야 하고, 일꾼들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__이것이 플라토가 일컫는 국가의 "정의"라는 것인데, 이 정의라는
말은 우리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분배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일꾼이 일꾼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하등 정치에 공헌도 하지 못한다면 플라토는 아마 그를 일꾼으로 남아 있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통치자나 보조 계급 그 어느 쪽에도 유리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사유 재산(416)이나 가정 생활(457) 중 그 어느 것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토는 자신의 이상에 합당한 안정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널리 생각되어 온 많은 것들을 기꺼이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가 그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이익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안정된 사회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안정과 효율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분명코 사회 복지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 아니요 더우기 가장
중요한 기준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현명한 엘리트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플라토의 정치 강령은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마땅하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형상론은 많은 철학적 반론에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교육을 통해서 지식을 달성할 수 있고, 이
지식은 그 자체에 있어서도 가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정부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플라토의 일반적인 사상은 오늘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사상에 한해서는 다른 어떤 철학가들보다
플라토에게 은혜 입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국가론(Republic)'(많은 번역과 편집이 있다). 펭귄 고전 시리즈에 있는
H.D.P.Lee의 번역(Penguin, London, 1955)은 주제에 의해서 텍스트를 구분해서 도움을
주고 있다. 같은 시리즈에 있는 다른 플라토의 대화편들도 유용하다. 미국 내에서는
F.M.Cornford의 해설과 주석이 붙은 번역(Oxford University Press 문고, New
York)을 볼 것.
플라토의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안내로서는, G.C.Field의 '플라토의 철학(The
Philosophy of Plato)'(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2nd edn. 1969)을 볼 것. 이
책은 또한 참조 목록을 싣고 있다.
플라토의 정치학적인 설계에 대한 적대적인 공격으로서는, K.R.Popper의 '열린
사회와 그의 적(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ume 1)'(Routledge & Paul,
London, 4th revd. edn. 1962; Princeton University Press 문고, Princeton, N.J.)을 볼
것.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나의 플라토에 대한 비판 중 많은 근거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기독교:하나님의 구원
필자는 제1장 및 제2장에서 기독교에는 우주론과 인간론과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이 있다는 것을 제시했고, 그리고 이미 이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 몇 가지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기독교의 교리는 물론 그 천 년이라는 긴
역사를 통해 변화__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현 시대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가 바로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의 불일치가 심한 특별히 혼돈 된 시대다. 세 개의 주 종파(로마
가톨릭, 희랍 정교, 그리고 개신교) 내에도 여러 가지 많은 교파로 다시 나뉘어져 있고,
심지어 같은 교파 내에서조차도 교리 때문에 불화를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교파는 그들의 교리가 신약 및 구약성서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초기 교회의
신경과 신앙서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중 어떤 출처가 권위 있고
결정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
필자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지도하지 않을 것이다.(교리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성서와 여러 교파의 신앙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대신 필자는
해석의 잘못을 피하기 위해 필자에게 "기독교적"이라고 부를 만한 믿음에 부응된다고
생각되어지는 몇 가지 주장들을 택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주장들이 대면하게 되는 몇 가지 반론들을 지적함으로써, 이 장에서 해설과 비판이
함께 곁들여지게 될 것이다.
우주론
먼저 우주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주장,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근본
주장부터 검토해 보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일까? 물론 시__공의 어딘가에 있는, 문자 그대로 "저 위"에 있는 하나님을 일컬음은
아닐 것이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여행 때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보고했다고
해서, 이 사실이 확실히 기독교를 부정하는 진정한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분명히 우주의 다른 대상들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는 공간의 어떤 위치를 차지하거나 혹은 일정 기간 동안 계속 머물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일부 저자들(가령, 스피노자)이 말하였듯이 전 우주와,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와 동일시되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게 동일시된다면, 범신론이지
기독교가 아닐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내재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때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시간적__공간적으로 사물의 세계 밖에 있든가 혹은 그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다(시편 90:2, 로마서 1:20).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거리낌없이 이와
같은 교리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는 구극적 실체로서 혹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는 존재다라고 정의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는 전통적으로 무신론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사상과 아주 흡사한 것 같지 않은가.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자칭 "기독교적 무신론자들"이라고 하는 자들까지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그와 같은 사상은 기독교를 현대인의 마음에 적응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본의 아니게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하나님이 초월적 존재라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다. 이 교리에는 순수한
철학적 이론들이 따르고 있다. 한때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타당한 논증들이
있다고 널리 생각되어 졌으나, 18세기에 와서 그러한 논증들은 흄과 칸트에 의해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주로 로마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들이 논증의 타당성은
비신도들에 의해 물론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하나님의 존재란 단지 이성에 의해서 입증될 수도 또한 반등될 수도 없으며, 그에
대한 믿음은 논증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이다. 여기서 진술의 진__위와 검증 가능성에 관한 현대적
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초월적 존재라면, 그는 물론 어떠한 과학적
방법으로도 보일 수 없고 만져 볼 수 없으며, 혹은 관찰될 수 없는 존재이면서 그러나
또한 수자나 그리고 수학의 다른 대상들처럼 단순한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인격적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일 경험적
관찰로도, 순수한 논리적 추론으로도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밝힐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대체 무엇이라 주장하겠는가? 제 2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악의
존재가 어떻게, 전지__전능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처럼
보이는가에 대해서 주목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자신의 믿음을 부정할
수 있는 증거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에서부터 종래에는 더 큰 행복이
온다든가, 만일 인간 스스로가 자유롭게 도덕적 선택을 하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인간이 선택한 행동에서 악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비신도들은 여전히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유일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인간이
자유롭게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왜 창조할 수 없었겠는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인들은 마치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 세계가 보여
주는 고통과 악이라는 증거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 교리 중 또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창세기 1:1, 욥기 38:4). (이 교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부분이든 혹은 심지어 전체이든 간에 저절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그 창조를 시간 속의 한 사건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는 셈이 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우주에는 시간의
시작이 없다는 일부 우주론에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심원한 종교적 진리를
상징하는)로서 지금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이 문제가 격론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진화론과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여전히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성서(말씀)의 지나친 직역을 고집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의 창조자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말은 만일,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이 세상은
어찌되었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되었다든가, 혹은 하나님의 의도나
적어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이 세계 특히 생물계는 마치 전지 전능한 창조자가
의도했던 바로 그대로의 세계라는 논의가 흔했다. 그러나 흄과 칸트는 이
"의도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Design)"을 효과적으로 논파하였으며, 현대
생물학은 모든 물체가 그들의 환경에 불가사의 할이 만큼 잘 적응한다는 믿을 만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는 이 세계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관찰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교리가 얼마만큼 옳은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다시금 창조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가 어떤 종류의 진술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케 한다.
제 2장에서 언급했던 검증 원칙에 따르면, 만일 어떤 진술이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도 없고, 논리에 의해서까지도 증명되어질 수도 없다면, 그 진술은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사실이라는 주장도 펼 수 없으며, 기껏 해서 언어의 시적
사용, 즉 태도나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할 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단지 신자로서 어떤
태도를 천명하는 것__가령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든가 마치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양 우리들도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 것__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견을 달리하는 무신론자도 기꺼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교인이라는 이름에 진실로 합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자세와
행동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자로서, 어떤 태도를 단순히 표방하는
이상의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한편 일부의 다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기준에서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비기독교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인간들이 겪는 특정한
경험들__도덕적__종교적__신비주의적__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론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 도전에 응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는 피할 수 없이 많은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비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인간의 경험도 초월적인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데 자연히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우리의 사후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일종의
관찰에 의해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또 다른 검증
가능성의 문제__어떻게 우리가 지금 이 현실에서 사후의 삶의 실재를 검증할 수 있고
그 증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__를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는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호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최근의 철학 연구의 방법을 알고 있는 신학자들은 검증 원칙 그 자체가 진술의
진__위의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어떠한
사실적 혹은 과학적 진술도 반드시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검증 원칙__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 한층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이 원칙__을
고려해야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 어떤 증거로서도 반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우주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주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인 것에 입각한 믿음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반된 측면에서 동일한 구극적 실체를
기술하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우주에 대해 서로가 대립적인 설명이 아니라 보완적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도, 종교적
진술들이 원칙상 반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진술들이 실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사실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는가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한다. 이 문제가
종교에 관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 중의 하나로 남게 되며, 이 때문에 종교
철학을 이야기할 때 오늘날 논의의 초점이 종교적 언어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단 이와 같은 문제를 하나의 문제로서
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겠으며,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인간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첫째로 인간을 우주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끔
이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되었다(창세기 1:26). 인간은, 일종의 자의식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특성인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존재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친교를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창조자를 사랑하고 섬길 때 오직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다른 창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
창조물과 계속 함께 하는 존재이며,(이것이 모순이 아니라면!) 흙으로, 즉 물질적인
재료로 창조된 존재이다(창세기 2:7). 이로 인해 기독교 교리에 대해 흔히 그리고
일정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오해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 교리가 물질적 육체와
비물질적 영혼의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은 그리스
사상이며(우리는 이 이원론을 제 3장의 플라토 사상에서 주목했다), 구약이나
신약성서에서는 발견되어질 수가 없다. 교회의 초기 몇백 년은 기독교 신학이 그
교리를 공식화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철학 사상을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비물질적
영혼에 대한 이론이 결국 기독교적 사상으로 고착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적
사상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사후의 삶에 관한 사상이 있기는
하나, 이 사상을 물질적 육체가 죽은 후에 비물질적 영혼이 부활한다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이단이다. 사도신경은 명백히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은 물질적 육체로 죽으나 영적 육체로 부활한다고
이야기한 고린도 전서 15장 35절 이하는 이에 대한 성서적인 증거다. 물론 영적
육체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도 바울은 "육체"를 뜻하는 소마(soma)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육체의 부활에 의한 사후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을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 중 또 다른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교리를 "자기가 행한 죄값은 자기가 받기
마련"이라는 인과 응보로서 꼭 해석한다거나, 혹은 영생 약속(요한복음 4:14)을 오직
이 현세에서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형식의 삶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교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 중의 하나를 텅 비게 하는 셈이 된다. 휴머니스트들도
"이기와 자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휴머니스트들은, 분명히 기독교의 특징이 되는 영원한 세계 속에서
각 개인이 살아 남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기독교의 본질적인 주장이 되는
초월적 요소는 철학적인 요소는 철학적인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살과 뼈로 간주되는
인간의 육체가 만일 부활된다면, 이 육체는 공간과 시간을 차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육체가 부활한다는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어느 곳에 그 육체가
다시 존재하게 된다는 뜻은 필경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 누구도, 사도 바울이나
나폴레옹, 혹은 안더 아가타의 부활된 육체를 우주 비행사가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부활된
육체가 존재하는 공간은 있으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시간의 문제도 공간의 문제에서처럼 반론이 제기된다.
추측컨대, 부활이 일어날 미래의 어떤 때가 있다는 뜻은 분명 아니다(비록 사도
바울이 "우리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린토 전서
15:51__2'라고 말할 때 그런 뜻으로 들리기는 한다마는).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어떤 시간 체계가 있다는 것인가, 혹은 부활된 육체는
초시간적이라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초시간적이라는 경우라면, 부활된 삶이란 개념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처럼, 삶이란
시간상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선과 악의 구별을 영혼과 육체 혹은 정신과 물질의 구별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또 한번 잘못 해석하는 셈이 된다. 물질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이와 같은 관점은, 이 관점이 비록 초기 기독교 사상에
영향은 끼쳤지만, 기독교적 관점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영혼과 육체의 구별(로마서
8장)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거듭남에 대한 사상을 잠시 살펴보자.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자유의 개념과, 바로
하나님의 실체인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플라토(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스
철학)는 지적 능력, 즉 철학적__도덕적 진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달성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는 도덕이나 고결한 삶을
강조하지 않고 이러한 삶의 토대가 되는 성격과 인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진정한 목적__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__을 달성하는 길은 지적
능력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고린도 전서 1:20). 사도 바울의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을지라도...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린도 전서 13:2) 라는 주장을 보라. 이 사랑(그리스 어로는
아가폐'agape'인데, 전에는 "자비"로 번역되었다)은 단순히 어떤 종류의 인간적인
애정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진단
기독교 교리는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로서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잘못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독교의 진단은 근본적으로 자명한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선보다 악을 선택하였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것이다(이사야 59:2).
그러나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 교리는 또다시 몇 가지 바로 잡아야 할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즉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아담과 이브, 뱀과 사과의 이야기는 역사적 서술이기보다는
신화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기 쉽다는, 즉 우리의 본성에는 숙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원죄"에 관한 교리는 우리
인간이 아주 완전히 타락한 존재, 즉 선한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완벽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기독교 사상에는 죄를 육체적인 욕망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으나, 죄는 그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성적인 것은 아니다. 섹스는 기독교
교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정당한 것으로 성서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다. 따라서 죄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육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인간 자신의 뜻을 주장한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가 그 죄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을 죄악에 연루시킨다(로마서 8:22). 그리하여 모든
것이 어떻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우주적
타락에 대한 이와 같은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인격적인 악마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악을 대표하면서 선과 한 쌍을 이루며 그 선과 똑같은 힘을 가진 인격적
악마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다. 기독교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궁극적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존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믿음은 우리가 앞에서
주목했던 바와 같이 악의 문제와 곧바로 부딪히게 된다.
처방
인간을 위한 기독교적 처방은, 이론과 진단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친교를 맺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이 얼굴을 돌리고 그 관계를 끊어 버렸다면, 그럴 경우에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용서하고 그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과 인간의 재생이 가능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기독교 사상이 나오게 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선민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출애굽기 19:5)이 있는데,
이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만일 그 백성이 그가 명한 모든 말씀을 지킨다면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노예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율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때, 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웃 나라들에 의해 패배 당하게 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이용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된다.(이 징벌의 주제는 역사적
사건들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구약성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그리고 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 인간의 허물을 감춰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전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온다(이사야 43__66장).
그러나 신약성서, 즉 예수의 일생과 역사 속에서 우리는 뚜렷한
기독교적인(유대교적이라기보다) 구원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신약의 핵심적 주장은,
하나님께서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예수라는 특별한 인간 안에
나타나셨고,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자신과 인간간에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본질적인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믿음도 진정 기독교적이라고 일컬어질 수가 없다. 예수는 위인이라든가 천재라든가
혹은 전무후무한 지상 최대의 종교적 천재였다라든가 하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인 동시에 신이며, 육신이 된 영원한 말씀(요한 복음
1:1__18)이라는 교리 속에 전통적 기독교적 주장으로 표명되고 있다. 이 교리의 초기
철학적 해석__한 실체 속에 두 본성 등__은 아마도 본질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본질적인 사상은 성육화(incarnation)의 기본 사상은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이 본질적인 사상이 있다면, 속죄
사상, 즉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그리고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그 사건이 계속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을 화해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한 본보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자연 법칙과
엄청난 모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고린도 전서 15:17).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의 수태설은 예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있을 법하지는 않으나,
이보다 덜 중요하다.)
성육화와 속죄에 대한 이와 같은 교리는 인간의 이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사실
이러한 공식적인 주장은 기독교 내에서도 많은 반론을 야기시키고 있다. 한 특정한
인간이 어떻게 초월적인 하나님과 한 몸체가 될 수 있는가? 한 분의 하나님 안에 세
몸체(성부와 성자와 성신)가 있다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개념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들을 불어나게 한다. 기독교인들의 통념적인 주장은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모순이라기보다는 신비에 속하는 것,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것을 오직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진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이 진술은 이미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력을 가질 뿐,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순수한
개념적인 이견에는 전혀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죄에 대한 교리에도 같은
이견이 제기된다. 별로 많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 교리를,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흘릴 피(어떠한 피든, 심지어 죄없는 자의 피까지도)를 요구하시는
것처럼, 구약의 보상적인 희생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서기 30년 경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유대 율법 교사의
희생이 어떻게 전세계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엄청난 신비로 남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처방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된
것으로써 끝난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 의한 구원이 개인 각자에게 받아들여져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전세계에 퍼져야만 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그들을 위해 역사 하신 구원을 받아들여 교회, 즉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한 편에서는 개인이
제각기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더 강조해 왔다. 그러나 둘 다 필요 불가분한 것임을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진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린도 후서 5:17)"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번에 새로운 삶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생을 걸치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현세를
초월해서 사후의 부활로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빌립보서 3:12).
마지막 개념적 문제(혹은 신비라고 해야 더 옳을까)는 구원이라는 연극에서 인간과
하나님께서 행하는 역할이 어떠한가이다. 근본적인 기독교 개념에서 확실히 구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 주시므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낌없는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에베소서 2:8). 그러나 이 사실과
못지 않게 분명한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첫째로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인간은 죄를 지었고, 틀림없이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고(사도 행전 3:19)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갈라디아서 5:16) 권고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다는 주장과 구원은 인간의 반응
여하에 달려 있다는 권고 사이에는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일종의 긴장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를, 펠라기우스는 후자를 강조했는데, 이 논쟁에서
자유 의지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내부의 한 중요한 문제로서 제기될 것이다. 비록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가 하나님의 만물의
완전한 지배 이론과 절충되기가 어렵지만,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서
남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려 깊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그 본질적인 교리들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개념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는 한낱 이론 그 이상의 것으로서, 삶의 한 방식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일컬어질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니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들은 교리를 실천하는 기독교인으로
만족하고 여러 반론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이론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에서의 생활과 예배 속에서, 그들이 교회 밖에서는 찾지 못하는 내적 혹은
"영적"인 삶에로의 확실한 성장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
한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기대될 수 없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성서(The Bibel) (많은 판과 번역이 있다):나는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 인용하였다. Peake의 '성서 주해(Commentary on the Bible)' 같은 것은
많은 어려움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경외 성서를 포함한 새 옥스퍼드 주해
성서(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Revised Standard
Version)도 좋다. 또한 Herbert G. May와 Bruce M. Metzger가 편집한 '에큐메니칼
연구 성서(An Ecumenical Study Bible)'(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74)도
좋다.
John Hick이 편집한 '신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Collier__Macmillan,
London, 1964; Macmillan 문고, New York)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전통적 논의들에
관하여 고전적 작가들의 저술들을 모은 것으로, 그 검증 문제에 관한 근대 저술가들의
글을 함께 하고 있다.
John Hick의 '종교 철학(Philosophy of Religion)'(Prentice__Hall, Englewood Cliffs,
N. J. 2nd edn. 1973, 문고판. 우리말 번역판:황 필호 역편 '종교 철학 개론', 종로서적
출판부, 1980)은 유대__기독교적 신 개념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에 관한 현대의 철학적
논의들을 탁월하게 개관하고 있다.
이들 두 책은 참조 목록을 싣고 있다.
@ff
제5장 마르크스:공산주의 혁명
제1장 및 제2장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가운데, 필자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사상들과 그 사상들에 대한 몇 가지 반론들을 대충 검토하였다.
이 장에서 필자는 마르크스의 생애와 저서를 소개한 뒤, 그의 역사 이론, 인간론,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행함으로써 좀더
깊이 들어가려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와 관련되어 뒤따르게 되는 다양한 여러
이론들을 규정한다든가, 논의한다든가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필자는 칼
마르크스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몇몇 저서를 공동으로 집필하였지만, 엥겔스의 공헌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생애와 저서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린네란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로 교육받았지만 곧 종교를 포기하였다. 그는 일찍 지적
능력을 나타냈고, 1836년에는 법학부의 학생으로서 베를린 대학에 입학했다. 그 당시
독일의 지적 흐름의 주류는 헤겔 철학으로, 마르크스는 곧 헤겔의 사상을 읽고
검토하는 데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그는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학에만
몰두하였다. 헤겔의 저서에서 주된 사상은 역사 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헤겔은 각
문화나 국가의 역사에 있어서 개개의 시대는 그 전 시대에서 그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발전의 한 단계로서 그 자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발전은 근본적으로 지적 혹은 정신적인 법칙에 의해서 진행된다. 한 문화 혹은
국가는 그 자체가 일종의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발전은 그 자체의 성격에 의하여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인격화를 더한층 확대시켜 전세계에
대하여 그것을 적용시켰다. 그는 전세계를 그가 말하는 바 "절대자" 혹은 세계 자아
혹은 신(이것은 물론 신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범신론적이다)과
동일시했고, 전체 인간 역사를 이 절대 정신의 "자기__실현"의 과정으로써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자기__실현은 전역사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정신적 발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식의 주체가 자신과 다른, 혹은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는 객체와 맞서야 하는
상태인, 이른바 헤겔이 일컬었던 "소의"의 극복이, 자기__실현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와 같은 대립은 절대 정신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가운데 지양되어 지게 된다.
헤겔의 추종자들은 그의 이론이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에 따라서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우파" 헤겔주의자들은 역사의 발전 과정은 자동적으로 가능한 한 최선의
결과에로 이끌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프러시아 국가를,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이상적인 국가의 최고봉으로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보수적인 정치
견해를 주장했고, 헤겔의 사상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들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좌파"
혹은 "진보파" 헤겔주의자들은,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아니하였다든가, 당시의
국가들은 이상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져 있다든가, 구질서를 바꾸어 역사의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도우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급진적인
정치 견해를 표명하였고, 신을 인간과 동일시하려 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실론적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지적인 방향을 가진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하나가
포이에르바하로서 그의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은 1841년에 출판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은 모든 것을 전도시켰으며, 신은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실현시키기는커녕 사실상 종교의 이념은 유일한 현실인 이 세계의 창백한
반영으로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들은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불만족하거나 혹은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환각적인 상상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이란 단지 "비교적인 심리학"으로서, 진리라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적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란 소외의 표현이라는
것인데 그 소외로부터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그들의 순수한 인간적 운명을
실현함으로써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포이에르바하는 휴머니스트
사상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인 셈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형성기에 있어서의 지적 분위기였다. 포이에르바하의 글을 읽고
나서 마르크스는 그를 사로잡았던 헤겔의 마력을 깨뜨려 버렸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서는, 헤겔의 저서 속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본질과 사회에 대한 진리가 일종의
도치된 형식으로 감추어져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역사적 발전과
소외에 대한 개념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1842__3년에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비판을 썼고, 동시에 '라인 신문'이라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진보적인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이 신문은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서 탄압을 받게 되어, 마르크스는 1843년에 파리로 이주했다. 다음 두 해 동안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또 다른 커다란 지적 영향을 받았고, 그 자신의
독특한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광범위한 독서는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드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생 시몽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프루동, 바쿠닌, 그리고 엥겔스(이것이 엥겔스와 그의 일생에 걸치는 우정과 협력의
시작이었다)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사상가들을 만났다. 1845년에 그는
파리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로 옮겨갔다.
파리와 브뤼셀에 있을 동안, 마르크스는 그의 이른바 "유물 사관"을 확립했다.
포이에르바하가 제시한 대로 헤겔의 관점을 뒤바꿈으로써, 마르크스는 역사 변화의
추진력을, 그 성격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인간의 관념 속이 아니라 그리고 분명히 어떤 종류의 국가적 혹은 우주적 인격 속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경제적 조건 속에 모든 역사에 대한 해답의 열쇠가 놓여 있음을
보았다. 소외는 형이상학적인 것도 종교적인 것도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은 노동자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외적인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즉
생산품을 사유 재산으로서 소유하는 자본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소외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1844년
파리에서 쓰여졌으나 영어로 번역된 것은 1950년대에 와서야 일반에게 읽힐 수가 있게
되었다. 그의 유물 사관은 이 기간의 다른 저서들__1845년의 '신성 가족', 1846년의
'도이치 이데올로기'(엥겔스와의 공저), 그리고 1847년의 '철학의 빈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실제 조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행하는 일의
주요 목적을 (1845년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논문'에서 말했듯이)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자본주의로
하여금 공산주의에로 발전하게 하는 혁명을 향해서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__마르크스는 이 노동자 계급이, 곧 닥칠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__를 교육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목표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문을 쓰도록 위임받고, 엥겔스와 함께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하였으며, 1848년 초반에 그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해 곧바로 뒤('선언'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몇몇 주요 유럽 국가에서 실패로 끝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의 실패 후 마르크스는 벨기에와 프랑스와 독일에서 추방당하게
되었고, 1849년 런던에 망명한 뒤 여생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가끔 있는 간행물에의 기고나 엥겔스의 도움으로 살면서
가난을 견디어 나갔다.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매일 연구하기 시작했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 조직을 계속했다. 1857__8년에 그는 '강요:Grundrisse'라고 불리우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그의 전체 이론의 계획을 스케치하는 또 하나의 시리즈를 썼다. (그런데
1973년에 되어서야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의 완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859년에는
'경제학 비판'을 출판했고, 1867년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자본론'의 첫째 권이
나왔다. 이 마지막 두 책은 마르크스가 대영 박물관에서 연구한 노고의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훨씬 더 자세한 경제적__사회적 역사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거기에는 소외와 같은 헤겔적인 철학 사상의 흔적은 눈에 덜 뛴다 해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자본주의 몰락의 필연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 이후,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은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의 바탕을 형성한
것은 이 후기의 저서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 끼쳐진 주요한 세 영향, 즉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의 경제학이, 역사와 경제와 그리고 정치 이
모두를 포괄하는 이론으로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합된 이론이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로 칭하게 된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역사 연구를 위한 정확한 과학적 방법을 발견했고, 그 발견을 통해서 그들 시대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발전에 관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출판된 초기의 저서들, 특히 1844년의 파리 원고는 마르크스 사상의 근원 중
많은 것이 헤겔 철학에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리고 그의 초기 사상의 보다 철학적인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는 두 가지 뚜렷한 시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즉, 휴머니스트 혹은 실존주의자로서까지 불려지게
되는 단계와 나중에 한결 엄격한 "과학적 사실주의"로 변모하는 단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이 두 단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든가, 소외의 주제는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후기의 저서에 존재하고 있다든가__1857__8년의 '강요'의 내용이
이를 확증하는 것같이 보인다__하는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고
무리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대한 필자의 논의는 그의
사상이 비연속적이 아니라는 가정을 할 것이다. 이후의 페이지 참조는 펠리칸 북 '칼
마르크스:사회학 및 사회 철학 선집'에 따를 것이다. 이 책은 아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편선한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으로, 전기와 후기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다. 아메리칸 문고본에 대한 페이지 참조는 이 장의 마지막에 있다.
우주론
이제 마르크스의 주요 이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작하자. 그는 물론
무신론자였지만 이것이 그의 사상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가 세계 전체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특유한 점이 있다면 그의 역사 해석이다. 그는 인간 사회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자연 과학과 인간 과학을 함께
포함하는 하나의 과학이 존재할 때를 기대하였다(p.85). 마르크스는 역사적 변화의
이면에는 보편적 법칙이 있으며, 앞으로의 역사의 큰 발전은 이 법칙을 앎으로써
예언될 수 있다고 (천문학이 일__월식을 예언하듯이) 주장하였다. '자본론'의 초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방법을 물리학(자)의 방법에 비유하면서 "이 저서의 궁극적
목표는 현대 사회 활동의 경제적 법칙을 밝히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 생산의 자연 법칙에 관해서, "철석같은 필연성을 안고 불가피한 결과를
향해서 작용해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각 문화에 있어서 개개의 시대는
그 자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여가에 있어서 단 하나 있을 수 있는 진정한 보편적
법칙은 반드시 한 단계에서부터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발전의 과정에 연관된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어서 헤겔에 동조하였다. 그는 역사를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부르즈와적" 혹은 자본주의적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는 여러 조건들이
성숙했을 때 그 다음 단계에로 피할 수 없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p.68).
자본주의도, 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에로 발전하는 것으로 예견되었던
것이다(pp.150__1).
그러나 역사 법칙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확실히 역사는
검증될 수 있고 또 검증되어야 하는, 하나의 경험적 연구에 속한다.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역사가 과학의 다른 주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법칙, 말하자면 무제한의
보편성을 가진 귀납적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결국 시간적으로 한정된 기간에, 한 특정한 혹성 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내용은 광범위하지만, 그것도 사건들의 한 특정한 연속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어디에서도 똑같은 사건의 연속을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 역사는
일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건들의 어떤 특수한 연속에도,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같이 겉보기에는 간단한 사건에서조차도, 거기에 어떠어떠한 과학적 법칙들이
연루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그 수효를 한정하여 밝힐 수는 없다. 중력과 역학의 법칙,
풍력과 나뭇가지의 탄성, 나무의 조락에 대한 법칙 등등. 만일에 사과가 떨어지는 데도
한 가지 법칙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 역사 전체의 이면에 있는
발전의 보편적 법칙을 가정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역사의 진행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따라서 역사 연구가 주로 하는 일이 대규모의
역사를 예언하는 것이라는 사상은 적어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 이후의
인구 성장과 같은, 확실히 장기간에 걸친, 큰 규모의 흐름들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흐름은 법칙이 아니다. 즉, 그 지속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조건에 따라
지속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구가 무한정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 그 성장이 핵전쟁이나 혹은 광범위한
기근으로 갑자기 역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역사관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이른바 유물 사관이다. 이 사관은 역사의
법칙은 그 본질에 있어 경제적이며, "물질 생활의 생산 방식이 생활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과정의 일반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p.67, pp.70, 90,111__1
등을 참조할 것). 경제적 구조가 진정한 기초로서 이 경제적 구조에 의해서 사회의
다른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경제적 요인들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과 역사 혹은
사회 과학의 진지한 연구는 이 요소들을 무시해서 안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기꺼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신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그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한층 수상쩍은 주장을 하고 만 것이다.
이 명제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를 가르는 선이
어디에 놓여 있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물질적 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p.67), 그가 말하는 이 힘은 생각컨대 토지와 광물 자원,
도구와 기계, 게다가 인간의 지식과 기술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한편 그는
경제적 구조가 "생산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생산 관계는
아마도 작업이 조직화되는 방식 (예를 들어 노동의 분업화와 어떤 직권 위계)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을 설명하는 데는 소유라든가 금전과 같은
개념들이 꼭 사용되어져야 하는데, 이 개념들은 마르크스가 상부 구조에다 집어 넣고
싶어하는 법률상의 개념인 것같이 보인다. 만일 하부 구조가 생산의 물질적 힘만을
포함한다면, 마르크스는 한층 용납하기 어려운 "기계적 결정론"에 빠지게 되는 셈이
된다. 그러나 하부 구조가 또한 생산 관계를 포함한다면,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사이의 구별은 모호해지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그의 일반적 이론으로부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그의
일반적 상세한 예언을 끌어내었다. 이제 사회는 경제적으로 더욱더 불안정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동시에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부르즈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투쟁은 증대할 것이며, 드디어 사회적 대혁명에 의해서
노동자는 권력을 얻고, 역사의 새로운 공산주의 단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pp.79__80, 147__52, 194, 207, 236__8). 그러나 정말 엄청난
사실은 이와 같은 일이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__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__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더욱 안정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생활 조건은 마르크스의 시대보다 훨씬 향상되었고, 또한 계급간의
구별도 강화되기보다는 불분명해졌다.(산업 노동자도 아니고 산업 소유자도 아닌 많은
"화이트 칼라"'정신 노동자'들__회사원, 공무원, 선생 등__을 생각해 보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곳은, 1917년의 러시아 1945년의 유고슬라비아, 1949년의 중국처럼,
그 당시 자본주의 발달이 미약했거나 혹은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이 사실이 마르크스
이론에 중요한 반증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가 높은 임금을
양도받음으로써 "돈으로 무마되었다"고 말한다 해서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그들의 운명이 더욱더 비참해 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또한
식민지가 산업 국가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그럴
듯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스칸디나비아 같은 몇몇 나라들은 식민지를 갖지 않고
있었으며, 그리고 심지어 식민지 자체에서도, 생활 조건들이, 별로 대수롭지는
않았지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증을 앞에 두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가
말한 그대로 고수한다면 그의 이론을, 그가 주장했던 바의 과학적 이론이기보다는
맹신, 즉 하나의 폐쇄적인 체제로 만드는 꼴이 된다.
인간론
마르크스는 아마도 청년 시절에 헤겔의 철학을 읽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순수한"
혹은 아카데믹한 철학의 문제에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러한
철학을, 세계를 변혁하려는 불가결한 과업에 비교해 보았을 때 단지 공론에 불과한
것으로써 무시했던 것이다(p.82). 그런데 그가 유물론자로 불리울 때, 이것은 그의 유물
사관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는 죽은 후의 삶에 대한 믿음을 종교의 환각적인 상상의 하나로서
무시하고자 했고, 개인(그 개인의 의식을 포함해서)에 대한 모든 것은 그의 생활의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pp.69, 85). 그러나 그의
이러한 관점은 의식 그 자체가 물질적이라는 엄격한 유물론적 관점이라기보다는, 의식
그 자체는 비물질적이지만 물질적인 것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하나의
"부대현상적(epiphenomenalist)" 관점인 것이다.
결정론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그의 관점도 또한 모호하다. 물론 그의 일반적
관점은, 그의 경제적 단계를 통해 진행되는 역사의 필연적 발전 이론과 모든 변화를
경제적 원인으로 귀착시키는 그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기독교 내부에서의 아우구스티누스 파와 펠라기우스 파의 논쟁에서처럼, 거기에도
역시 다른 것으로 돌릴 수 없는 자유 의지라는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그들의 독자와 청중들에게 역사가 움직여 가고 있는 방향을
인식하여 그 방향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즉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협조할 것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는 혁명을 기대하기 이전에 역사 발전의
적당한 단계를 기다릴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혁명을 일으키도록 행동할 필요를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양자간에 궁극적인
모순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혁명은 필연적으로 이르건 늦건 간에
일어날 것이지만, 개인과 단체로서는 그 혁명의 도래를 돕고, 역사의 산파역을
행함으로써 그 산고를 덜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론과
자유 의지를 더 이상 문제삼는 것은 아마도 쓸데없는 공론이라는 힐난을 받을 수
있으리라.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에서 가장 독특한 관점은, 우리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즉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p.83)이라는 관점이다. 먹어야 할
필요성 같은 뚜렷한 몇몇 생물학적인 사실 말고는, 마르크스는 개인적인 인간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즉, 한 사회 혹은 한 시대에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심지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다른 장소 혹은 다른 시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으로, 그 행동은 어떤 형식이든 간에 그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pp.91__2, 251)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자라고,
성교를 하고, 배설하는 방식조차도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보다도 모든 생산 활동에 적용되는데, 왜냐하면 생업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은
어떤 방식이든 간에 인간의 협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회적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77). 이 말은 사회가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하나의 추상적인
실체라는 것이 아니라(p.91), 그 개인이 어떤 종류의 개인이며,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하고 있는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성격의 사회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한 사회에서 본능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것__예를 들어 여자의 어떤 역할__이
다른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잠언 하나를 보자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p.67)." 현대 용어로 말하면 이 결정적인 요점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__사회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즉, 개인에 관계되는 사실만
가지고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없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성격 역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방법론적인 논점이 마르크스의 가장 뛰어난 공헌 중의
하나이며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사회학을 창시한 시조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방법은 물론 마르크스가 정치학과 경제학에 관해 도달한 특정한 결론에 우리가
동의하건 안 하건 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규정했음 직한 보편적인 개념이
적어도 하나는 있는 것 같다. 이 개념은 인간은 활동적인, 생산적 존재로서, 생업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는 사실로 해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는 것이다(p.69).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는
경험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마르크스는 또한 이 사실로부터 가치 판단을
끌어내고 있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올바른 종류의 생활이란 생산 활동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소외를 산업 노동에 있어서의 성취의 결핍으로 보는 그의 진단
속에(p.177),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계발할 수
있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처방 속에도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p.253).
마르크스가 휴머니스트로 불려져 왔던 것은 그의 초기 저서 속에 드러난 이 논점
때문임이 틀림없다.
진단
인간과 사회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소외의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 개념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헤겔과 포이에르바하가
사용한 개념을 이어받은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소외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무엇인가를 요약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외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몇 가지 병폐의
특징들에 대한 설명과 동시에 그 근본적인 병폐에 대한 가치 판단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소외 개념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개념이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주의의 어떤 특징을 마르크스가 비난하고 있는지를 거의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소외는 하나의 관계이다. 즉, 소외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일 대상이 없이는 살인할 수 없듯이
그냥 소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온다고 말한다(p.177). 그러나 이 말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포함된 자연이라는 개념은, 주체와 이 주체와의 갈등 관계에 있는 객체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헤겔적인 개념을 이어받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이 창조한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인간들이 그들이 창조한
대상과 사회적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한 인간다운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소 신비스러운 전문 용어에서 드러나는 일반적
사상은, 자본주의 사회가 몇 가지 면에 있어서 기본적인 인간의 본질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몇 가지 면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때때로 마르크스가 소외의 원인으로서 비난하고 있는 것은 사유 재산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사유 재산의 소멸이 곧 소외의 소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p.250). 그러나 그는 다른 데서는, "사유 재산이, 노동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되는 것의 기본 요인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유 재산은 오히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에서 온 결과"(p.176)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적 부분이 되지 못하며,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반대로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모멸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에서, 노동의 소외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일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그에게 강요되고, 일을 할 때면 그는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 그가 생산해 내는 물건조차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에 그에게
소외적인 것이 된다(pp.177__8)는 것이다. 때때로 마르크스는 소외를, 사회 관계를
상업적인 공통 분모에로 축소시키는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 제도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다(pp.179__81). 또 다른 데서는, 분업 때문에 노동은 노동자의 창조적 행위와
적대되는 소원한 힘이 되며, 그리고 이 분업 때문에 노동자는 마음대로 노동 행위를
바꿀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같지 않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행위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다.)(pp.110__11) 또
다른 글을 보면, 마르크스는 사회악의 원인이 되고, 그 악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국가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p.223).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소외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인가?
화폐 제도의 폐기(물물 교환 체제로 환원?)와 노동에 있어서 모든 전문화의 소멸,
그리고 모든 재산의 국유화(칫솔과 셔츠와 책까지도?)를 진지하게 옹호할 사람이 대체
있을 수 있겠는가? 필자는 없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뚜렷한 특성으로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산업__생산과 교환 수단__의 사유화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의 강령 속에 나타나 있는 주안점은 토지와 공장과, 운송 기관과 은행의
국유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변혁이 노동의 소외__윗글에서 언급한 초기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이 소외를 심리학적 용어로서 설명하고 있다__를 치료할 수
있는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만일 국가가 사회악의 근본이라면, 국유화는
국가의 권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사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초기 저서들에서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소외는 공동체(community)정신의 결여에 있으며, 국가는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이 그들이 속한 집단에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고(p.226). 이러한 진단에서, 국유화가 아닌 진정한 공동체 혹은 "코뮌"으로의 분산
(여기에서야, 화폐와 전문화와 사유 재산의 폐기가 좀더 현실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이라는 처방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이 소외의 문제가 논란이 된다면, 아마도 보편적인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좀더 일반적인 진단이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 진단은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를 경제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가 19세기 초반의 이윤 추구에 물불을 가리지 아니한
자본주의에서 실제 일어났던 것으로, 그때 어린아이들은 불결한 조건에서 장시간
일하다가 비참한 생활로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죽곤 했다. 기업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기업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__그리고 여기서
"사람"이란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와 같은 매우 일반적인 가치
판단을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기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처방
"인간이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이 환경은 인간적으로 형성되어져야
한다(p.249)." 소외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바로 그 본질에 의해서 생긴 사회
문제라면, 그 해결은 그 체제를 폐기하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생각에는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든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내부의 갈등으로 해서 산산히 폭발해
버리기 때문이고, 공산주의 혁명은 소외가 사라지고 인간은 그의 진정한 본질 속에
재생하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구원은
벌써 우리를 위해 역사 되고 있다고 주장하듯이, 마르크스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은 이미 역사의 움직임 속에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완전한 경제 체제의 혁명만이 해결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높은
임금이나 시간 단축과 같은 한정된 개혁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뜻이 없다. 왜냐하면
이 한정된 개혁들은 기본 체제의 나쁜 본질을 바꾸지 않고, 기본 체제를 타도해야
하는 진정한 과업으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할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산당의 강령과 대부분의 노동 조합과 사회 민주당의 강령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 이 "정치의 무력"이라는 논리는 마르크스 유물 사관의 전제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률 제도와 정치 제도들이 진정 그 제도들의
기초가 되는 경제 체제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제도들은 경제 체제를 바꾸는 데
이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마르크스 시대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사실에 정면으로 부닥친다. 법률 제도와 다른 제도들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상당히 수정하여 왔다. 즉, 19세기에 노동자에 대한 아주 지나친 착취를 제한한
"공장 조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국가 보험 제도와 실업 수당, 국가 보건 사업에 걸쳐,
실질 임금 상승과 조업 시간 단축을 시키는 가운데 노동 조합에 의해 점차적인 향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공산당 선언'에 제시된 특정 항목 중 많은 것이 이른바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즉, 누진 소득세, 경제 운영권의 다수의 국가
귀속에 의한 중앙 집권화, 운송 시설을 포함한 몇몇 주요 산업의 국유화, 국립
학교에서의 무차별 무료 교육 등이 그렇다. 마르크스가 19세기에 알고 있었던 이윤
추구에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였던 자본주의 체제는 어디서나 종식되었고, 또한 이것은
단 한 번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현존의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완전에서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점진적인 개혁에 대한 어떤 사상이라도 배척하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오류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혁명에 수반될
고통과 폭력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 점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기독교처럼, 마르크스는 인간의 전면적인 재생을 노리고 있지만, 그는 그 재생을 이
속세에서 기대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다"(p.250)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 재산의 폐기는 소외의 소멸과 진정으로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를 보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매우 막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과도기가
생기는 어떤 중간 시기가 있을 것이며, 이 시기는 그 완성을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요구한다고 말했다(p.261).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높은 단계에서는,
국가는 소멸하고,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비롯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때면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은 그 자신을 위해서 발전할 수 있고(p.260), 그 주도 원리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p.263)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 비젼의 얼마는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심히 비판을 당해도 마땅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진정으로 계급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든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혁명 후의 러시아 역사가 분명히 보여 주듯,
기회가 온통 주어지면 그들의 권력을 남용할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하지
않으리라든가 하는 것을 믿게 할 충분한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변혁의 어떤 기틀이 모든 이해 갈등을 영원히 제거하리라고 기대할 만한 근거도 없다.
국가는 소멸하기는커녕, 공산주의 국가에서 점차로 권력화 되어 간다.(아마도 바로
현대 산업과 기술의 본질이 이를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마르크스의 비젼의 다른 요소들에는 우리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분산된
사회에 대한 사상__그 사회에서는 인간은 공동체에서 공익을 위해 협동하며, 과학과
기술은 만인을 위해 충분히 생산하며, 노동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사람들은 여가
시간을 점차로 그들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게 된다__자연과 조화를
이룬 사회에 대한 사상, 이 모든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지 확실치 않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상인 것이다. 분명히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충성을 얻고 그 충성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젼을
제시하기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에서 생활한다는 것의 분명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국민 중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모습을 이미 바꾸어 놓고 있는 개혁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__경제 체제의 더 나은 변화의
필요성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위한 인스피레이션을 마르크스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이론 그 이상의 것이며, 그 이론적 주장이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이 상이 권위를 잃고 사멸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구원의 처방을 포함하고 있고,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회적__경제적 요소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주의를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에서 단 한 가지에로만 향하게 한다. 우리는 인간
개인의 본질과 문제점을 더 알기 위해서, 그 밖의 다른 사람, 예를 들어 프로이트를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칼 마르크스:사회학과 사회 철학 전서(Selected Writings in Socialogy
and Social Philosophy)', T. B. Bottomore역, T. B. Bottomore와 M. Rubel 편집
(Penguin, London, 1963; Mc Graw__Hill 문고, New York 1964). 이 책은 아마도
마르크스 저작의 전 시대에서 뽑은 가장 좋은 편집일 것이다. 끝에는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의 목록이 있다.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탐구는 '펠리칸 마르크스 전집'으로 계속될 수 있다. 그것은
'강요(Grundrisse)'의 완역을 처음으로 싣고 있다. David McLellan의 '칼 마르크스의
사상(The Thought of Karl Marx)', (Macmillan, London, 1971; Harper & Row, New
York, 1972)은 유용한 안내서이다.
많은 비판적 연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로는 Karl Popper의 '열린
사회와 그의 적(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ume 2)',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5th edn. 1966; Princeton University Press 문고, Princeton,
N.J.)이 있다. 독자들은 그 속에서 나의 논점들 중 많은 것의 원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읽을 만한 전기로서, 그의 사상 발전에 가장 역점을 주고 있는
것으로서는, Isaiah Berlin경의 '칼 마르크스:그의 생애와 환경(Karl Marx:His Life and
Environment)'(Oxford Uiversity Press, London, 3rd edn. 1963; Oxford University
Press Galaxy Books 문고, New York)을 볼 것. 이 책은 또한 참고 목록도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후기 형태에 대한 안내로는, C. Wright Mills의 '마르크스주의자들(The
Marxists)'(Penguin, London, 1963; Dell 문고, New York)을 볼 것.
@ff
제6장 프로이트:정신 분석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다음 이론은 프로이트의 것이다. 그가 이
세기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혁명화 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그러나
여전히 사실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질에 대해서 적절히 논의하려면 그의
사상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프로이트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그 이후의 정신 분석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의 많은 발전을 무시한다 해도,
그와 같은 작업은 하나의 장으로서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작업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그의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다듬는 데 거의 50년을 소비했고, 너무나
방대한 자료들을 저술했기 때문에 비전문가는 읽을 엄두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생애와 저술을 간단히 스케치하고 (왜냐하면 이 간단한
검토로, 그의 저술이 갖고 있는 복잡성과 중요성의 일부가 제시될 것이므로), 그의
이론, 진단, 처방의 가장 기본적인 논점들을 요약한 뒤, 주요한 비판적 물음 몇몇을
제기하는 일이다.
생애와 저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에 모라비아에서 태어났으나, 1860년에 가족이 비엔나로
이사한 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만년까지 살면서 연구했다. 소년 시절부터 그의 흥미는
인간의 생활 전반에 확장되었고, 비엔나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을 때는, 그는 의학
공부에 곧장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위대한 독일
과학자 브뤼케의 실험실에서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6년간을 보내었다. 1882년에 그는
약혼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좀더 안정된 경제적 보수가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그는
내키지 않은 채로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의사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 그는
결혼을 할 수 있었고, 또한 "신경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개인 임상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으며, 일생 동안 그 일을 고수하였다.
이 때부터의 프로이트의 연구 생활은 간단히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그는 정신 분석학이라고 알려지게 된 이론과 치료에 대한 커다란 발견을
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그의 심리학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1885__6년에 샤르꼬
밑에서 연구하기 위해 파리에 감으로 해서 불이 붙게 되었다. 샤르꼬는 프랑스의
신경학자로서, 그 당시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데 최면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에게서 비슷한 증상을 대하고, 전기 요법과 최면 암시 요법 양쪽을
실험하였으나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의 친구로서 손위의 비엔나 고문 의사
브로이어에 의해서 사용되어 왔던 또 하나의 방식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브로이어의
방식은 히스테리가, 환자가 잊어 버리고 있었던 어떤 강한 정서적 체험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치료는 그 경험을 기억해 내도록
유도하고, 그로부터 거기에 대응한 감정을 방산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나 기억 혹은 감정으로부터 고통받을 수 있으나, 그것을
의식으로 가져옴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생각이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이 출발한
토대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곧 살펴보게 될 저항이나 억압, 그리고 감정의
전이와 같은 개념을 도입하였다. 1895년에 그는 '히스테리 연구'를 브로이어와 함께
출판했으나 곧 그 친구와 결별하고 그 자신의 이론적 방식을 좇았다. 동시에 그는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연구 과제'를 쓰고 있었는데 (이 원고는 이 시기에 그에게
영향을 준 또 한 친구인 폴리스에게 헌정 되었다), 이 원고는 1950년이 되어서야
출판이 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좀 무모하게 그 당시 그가 전개하고 있던 심리학
이론을 그가 의과 대학 예과 시절에 이미 공부했던 뇌생리학의 물질적 기초에
연관시키려고 했다. 세기 말의 몇 년 동안 그는 그 자신의 정신을 분석하는 어려운
과제를 택해서, 유아 성욕과 꿈의 해석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이 두 가지는
후에 가서 완숙하게 정비된 정신 분석의 이론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 저서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 완숙하게 정비된 이론을 상술한 훌륭한
책들이 나타나는데, 편리한 대로 '꿈의 해석'__프로이트 자신이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평가한__이 나온 1900년을 이 단계의 시작으로 잡을 수가 있다. 뒤이어서 1901년에는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가 출판되었고, 이 책에서 그는 일상적 오류의 무의식적
원인을 분석하였다. 1905년에는 '성이론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이 나왔다. 이 세 저서는
정신 분석학적 이론을 병리학적 경우에만이 아니고 보통의 정신 생활 전반에
적용하였다. 정신 분석에 대한 국제적 인정과 그 전파가 시작되어, 1909년에
프로이트는 미국에 초청 받아 그의 해설서 '정신 분석 오장'의 첫 강의를 이루는
강연을 했다. 1913__4년에는 그의 이론을 인류학적 문제에 적용시킨 '토템과 터부'가
나왔고, 1915__7년에는 비엔나 대학에서 '정신 분석학 입문'을 강의하였다. 이 강의는
그 때까지 발전되어 온 이론 전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 죽을 때까지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론이 더한층
발전하고 변화하며, 이와 더불어 그 이론들을 사회 문제에 적용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고찰이 포함된다. 이 기간 동안, 결국 그의 사인이 된 암 때문에 갈수록 심한 고통을
받았다. 1920년에는 '쾌락 원리를 넘어서'가 나왔는데, 이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가
오랫동안 가정해 왔던 성적 혹은 생의 본능과는 별개인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또 하나 후기에 발전된 개념은 1923년에 '에고와 이드'에서 나타난
정신의 세 가지 구조__이드, 에고, 초자아__이다. 프로이트의 만년의 대부분은
사회학적 저술에 바쳐졌다. 1927년의 '환각의 미래'는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종교에
관한 것으로, 종교를 그 근원이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거짓된 믿음에 불과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문명과 불만'(1930)은 문명화된 사회의 요구와 모든 사람에게
뿌리박고 있는 본능 사이의 갈등을 얘기하고 있으며, '모세와 일신교'(1939)는 정신
분석학적 관점에서 유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으나, 프로이트는 런던으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를 그의 이론의 마지막 손질인 짧은 해설서 '정신 분석 개요'를
쓰면서 보내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에 대한 소개서로는 1909년에 나온 '정신 분석학 오강'보다 좋은
것은 없다. 따라서 앞으로 필자가 페이지 참조를 할 책은 펠리칸 북 '정신 분석
이제(Two Short Accounts of Psycho__Analysis)'로서, 이 강연들과 더불어 또 다른
해설서인 1926년 저술의 '비전문가의 정신 분석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후자에서
프로이트는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 정신 분석을 실시할 수 있는 것인지를 논하고, 그가
최근에 형성한 세 가지 구조론과 관련해서 그의 초기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아메리칸
북의 참조는 이 장의 끝에 있다.)
우주론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독특한 것은 이 우주론에서가 아니라 인간론에서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이론의 배경이 되는 가정들을 살피고, 그것들이 어떻게
이제까지 이야기한 이론들의 가정과 다른지를 조목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경력을 생리학자로부터 시작했으며, 내내 과학자로 머물고자 했고 모든
현상을__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도 포함해서__과학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했다(p.100).
그는 아무런 종교적 가정도(그는 사실상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또한 플라토가 형상에
대해서, 혹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운동에 대해서 한 것 같은 형이상학적인 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정했던 것은 (의심할 바 없이 19세기 과학의 훈련과 브뤼케의
생리학적 실험 연구의 영향으로) 모든 현상은 물리학과 화학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 자신조차도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법칙에 종속되는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론
필자는 프로이트의 기초 개념들을 네 개의 주요 항목 밑에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는
정신 영역에 있어서 결정론__모든 사건은 그에 앞선 충분한 원인이 있다는__의 엄격한
적용이다. 예전에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들,
즉 실언이나 잘못된 행동, 그리고 꿈과 같은 것들이 프로이트는 한 사람의 정신 속의
숨은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위장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곤 하지만 대단히 중요성을 띨 수 있는 것이다(pp.56,
60, 65__6). 한 사람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에는 정말로 돌발적인 것이나 우연한 것은
없다. 즉,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그 행동과 말을 유발케 하는 원인들이 무엇인가를
원칙적으로 추적할 수가 있다. 이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임의대로 선택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프로이트는 거기에는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제어할 수 없는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르크스와의 흥미로운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
양자가 다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자유롭다"든가 "이성적"이기는커녕,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원인들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프로이트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의 주요 논점인 무의식적인 정신 상태에 대한 가정은 따라서 첫 번째
논점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의식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의식하지 않더라도(다행스럽게도!),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불러낼 수 있는,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같은, 정신적
실체가 많이 존재한다. 이 실체들을 프로이트는 "전의식"(의식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그에 의하면, 보통 환경에서는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주장은, 정신은 의식적인 것이나 혹은
의식으로 될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전혀 알 수 없는
부분도 포함한다는 것이다(pp.107, 43, 47). 통속적이나, 쓸 만한 비유를 하자면 정신은,
표면에 나타나 있는 것은 작은 부분이지만, 거대한 숨은 부분이 있어 나머지 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빙산과도 같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존재와 행동에 대해 압력과 영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나 혹은 자신에게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정신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프로이트는 정신과 육체, 혹은 정신
상태와 물질 상태라는 이원론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의식적 정신 상태(예를 들어
사고나, 소망, 감정)를 얘기한다고 해서, 이 때문에 우리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많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생각할 것이다. 일상의 의식적 정신 상태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문제는 우리의 입에 매일 오르내리고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무의식적 정신 상태에는 이와 같은 본질에 대한 문제가 문제시 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프로이트 자신은 생리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이원론에 대한 어떤 시사도 거부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심리학 이론에 대한
생리학적 기반을 찾고자 했던 초기의 시도(1895년의 '연구 과제'에서) 이후, 그는
이러한 문제는 심리학적으로 별 중요성이 없다고 하는 관점에 도달했고(p.103), 이를
신경 생리학의 차후의 발전에 맡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정한
모든 정신적 실체가 어떤 생리학적 기반__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__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간론은 플라토와 같은 이원론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플라토와의 흥미 있는 대응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가 1920년대에
쓴 후기 해설서들에 도입된 정신의 세 가지 구조 이론이다. 이 이론은 그 때까지 그가
사용해 왔던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간의 구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혹은 인격 속에 있는 세 가지 주요한 체제를 구별한 것이다. 이드는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말하며, 에고는 외부적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 외부
세계와 이드 사이를 조정한다(pp.104__5). 그리고 초자아는 양심, 즉 어린아이 때 얻게
된 사회적 규범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에고의 한 특수 부분이다(p.137). 초자아는 또한
이드와 관계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드는 에고를 엄한 아버지와 같은
도덕률(초자아)에 맞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 그리고
외부 현실 사이에 일어나는 서로 대립적인 요구들을 조화시켜야 한다. 의식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에고 속에 있다. 에고 속에도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반면에 이드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영원히 무의식적이다(p.108).
그러므로 이드는 플라토의 정욕 혹은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나 에고와
초자아가 플라토의 이성과 혈기와 어떻게 대응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실 판단
기능에 있어서 에고는 이성과 유사한 듯하지만, 플라토의 이성은 또한 프로이트가
초자아에 부여한 도덕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플라토가 예증한 혈기도 자기
혐오의 상태에서 도덕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트의 인간 개념의 세 번째 주요한 특징은 그의 본능 혹은 "충동"에 대한
이론__혹은 이론들이다. 왜 이론 혹은 이론들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 본능론이 그의
저술에서 가장 다양성 있는 부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능은 정신적 장치에서
동인이 되는 힘들이며, 우리 정신 속의 모든 "에너지"는 이 본능에서만 나온다(p.110).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계나 전기에 관계되는 용어를 거의 그대로 썼는데, 틀림없이
그의 과학적 훈련이나 1895년의 그의 '연구 과제'의 영향일 것이다.) 그는 무한한
수자로 본능을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그는 또한 그 본능들은 모두 몇몇
기본적인 것들로부터 끌어내어질 수 있으며, 이 기본적인 본능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서로 결합하거나 혹은 대치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기본적인 본능의 하나는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p.69). 그러나
그가 모든 인간 행동을 성적 동기에로 돌렸다고 말한다면, 이는 프로이트에 대한
저속한 오해이다. 옳게 말한다면 그가 인간 생활에 있어 이전에 인식되어진 것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성에 부여했다는 것이다(p. 76). 그는 성적 본능이 어린아이들에게,
출생 이후부터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했다(pp. 71, 121). 그리고 성인의 생활에서 성적
에너지 혹은 "리비도"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p. 118). 그러나 프로이트는 항상
적어도 하나의 다른 기본 본능 혹은 본능군이 있다고 주장했다. 초기 저서에서 그는
굶주림과 같은 자기 보존적 본능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것을 성적 사랑의(erotic)
본능__이 본능들 가운데 비정상적으로 공격적이 된 것이 새디즘이다__과 대비시켰다.
그러나 약 1920년 이후의 후기 저서에서는 분류 방식을 바꾸어서, 성적 사랑의 본능과
자기 보존적 본능을 하나의 기본적인 "생의 본능(에로스)"에, 그리고 새디즘과 공격
반응, 자기__파괴 등을 기본적인 "죽음의 본능(사나토스)"에 속하는 것으로 나누었다.
네 번째의 주안점은 프로이트의 개개 인간의 성격에 대한 발생적 혹은 역사적
이론이다. 이는 성격은 꼭 유전적 기질만이 아니라 경험에도 의존한다는 자명한
공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특정한 "충격적" 경험은, 겉으로는 잊어
버린 것 같아도, 한 사람의 정신적 건강에 계속적인 해독을 미친다고 하는 브로이어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했다(p. 39).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의 원숙한 이론은 이
사실로부터 귀납적 결론을 내리고, 어른의 성격에 있어서, 유아기와 소년 시절 초기의
경험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했다(pp. 70, 115). 약 5세 전후가 개인의 성격의 기초가
세워지는 시기로 주장되었다. 그 사람의 소년 시절 초기에 그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결정적인 사실들이 무엇인가를 알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성장 단계에 대한 상세한 이론들을 내놓았다(pp.
73, 121). 이러한 특수 이론들은 물론 어린아이의 일반적인 성장 단계에 관한 연구
방식과는 다르며, 관찰에 의해서 쉽게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특히 성의
발달과 관련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성의 개념을 넓혀서 신체 부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쾌락을 포함시켰다. 그는, 유아는 맨 처음 이러한 쾌락을 입으로부터
얻으며(구순기 단계), 그 다음에는 소화관의 다른 한 쪽 끝으로부터 얻는다고
말한다(항문기 단계).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나 다 그 다음에는 남자의 성기에 흥미를
갖게 되며(남근 단계), 어린 소년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버지에
의해서 거세당할까봐 두려워한다(에디푸스 콤플레스 상태'p. 125').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나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은 둘 다 보통 억압된다. 프로이트는, 어린 소녀는 같은
단계에서 "음경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심리적 상태(penisenvy)"를 발달시킨다고
가정했지만, 그는 여자의 성은 그다지 철저하게 다루지 않았다. 5세 이후
사춘기까지("잠재"기) 성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성년 초기 "생식기"가 완전히
발달하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진단
플라토와 같이,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행복 혹은 정신적인 건강은 정신의 여러 가지
부분들 간의 조화, 그리고 개인과 그가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간의 조화의 관계에
좌우된다고 말한다. 에고는 초자아가 요구하는 규범을 범하지 않고 이드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킬 기회를 지각하고 선택하면서 이드와 초자아와 외부 세계를
조화시켜야 한다(pp. 111, 137). 만일 외부 세계가 부적당하고, 이러한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을 때에는 물론 고통이 오지만, 환경이 적당할이만큼 호조건일지라도 정신의
각 부분간의 내부적 갈등이 있을 때에는 정신적 불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 본능의 욕구 좌절로부터 오는 신경증은 외부적 장애나 내부적인 정신적 불균형
양쪽이 다 원인일 수 있다(p. 80).
신경 질환의 원인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한 특별한 정신적 기제가 있는데,
이것을 프로이트는 억압이라고 불렀다. 과도한 정신적 갈등 상황에서는, 사람은 그가
따라야 한다고 느끼는 규준에 날카롭게 모순되는 본능적인 충동을 경험하는데(pp.
48__9), 그에게서 이 충동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고 이 충동으로부터 도피하여 이
충동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p. 113). 그러므로 억압은 이른바 "방어
기제" 중의 하나로서 이것에 의해서 사람은 내부적 갈등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응은 본질적으로 도피이며 허위이며, 현실로부터 물러서는 것으로서(p.
80), 그러한 만큼 실패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억압된 것은 진정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무의식 부분에 계속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억압된 것은 모든 그
본능적 에너지를 보유하고, 의식 속에 그 자신의 위장된 대체물__신경 증상__을
내보냄으로써 영향을 행사한다(pp. 52, 114).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러나 그 원인은 모르는 채로 그
행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그의 의식 밖으로
"억압"해 버림으로 해서 그는 그것에 대한 효과적인 규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억압이 원인이 된 증상들을 없앨 수도 없고, 자발적으로 억압을 그치고 그 억압을
의식 속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에 대한 그의 발생적 연구 방식으로부터 기대하는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결정적인 억압들을 소년 시절 초기에 둔다(p. 115). 그리고 그의 성에 대한 강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억압들이 기본적으로 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p. 71).
어린아이가 성의 정상적인 발달 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친다는 것은 성인의 장래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한 그 어떤 장애라도 장래의 신경증의 원인을 남기는 것이다(pp.
75, 122). 즉, 여러 가지 형태의 성적 도착은 이러한 원인들로 추적될 수가 있다.
신경증의 전형적인 한 종류는 프로이트가 "퇴행(regression)"(p. 75)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유아적 만족이 획득되는 단계 중의 하나로 복귀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인의 성격 유형들을, 그가 그 근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유아 단계와
관련해서, 구순기적인 것과 항문기적인 것으로 분류하기까지 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에 대한 이론에는 훨씬 더 많은 세부적인 이야기거리들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들까지 다룰 수 없지만 우리가 이미 그가 신경증의 책임의 일부를
외부 세계에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기에, 그의 진단의 이와 같은 사회학적
측면을 좀더 살펴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이 그가 준수해야 한다고
느끼는 규범은 정신적 갈등의 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규범들은(프로이트의
견해로는) 개인의 사회적 환경__첫째로는 그의 양친이지만, 자라나는 어린아이에게
영향과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포함된다__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어린아이로 하여금 문명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은
이러한 규범의 주입이다. 문명은 문화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p. 86) 본능에
대한 규제와 본능적 만족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p. 81). 그러나 주입된 규범은
개인의 행복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최고의 것"이 되거나 혹은 가장 합리적이거나 가장
도움을 많이 줄 수 있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분명 부모 개개인은 각자 개성과 입장이
다양하며, 잘못 적응된 부모들은 필경 잘못 적응된 아이들을 길러 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사회와 개인간의 모든 관계가 균형을 잃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문명 생활의 전체가 신경증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거리낌없이 앞을 내다보았다.(이런
사고 줄기의 시작은 훨씬 초기 저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후기 저서'문명과
불만'에서 그런 생각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p. 119). 1909년의 '정신 분석학
오강'이 나오던 초기에도 벌써, 그는 우리의 문명이 요구하는 규범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활을 너무나 삭막하게 만들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 충동을
얼마만큼은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pp.
86__7). 이리하여 프로이트 자신은 그의 저서를 통해,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라고 진단해 온 후기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주장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처방
처방은 보통, 진단에서 나온다. 프로이트의 목표는 정신의 각 부분간의, 그리고
개인과 외부 세계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회복하는 데 있다. 후자는 아마도 사회 개혁의
강령을 포함할 것이지만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을 세부적으로 구체화시키지 않았다.
그의 매일의 업무는 정신 분석에 의한 신경증 환자의 치료였다. "정신 분석"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치료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이론들을 지칭하는 만큼 또한 프로이트의
치료 방법을 지칭한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이 방법이 되겠다.
이 방법은 브로이어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이래 점차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
발견이란, 한 특정한 히스테리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병을 치료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만일 외견상으로 자신의 병을 유발시켰던 '충격적 경험'들을 기억해 내도록 우선
유도할 수 있다면, 실지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pp. 33__9). 프로이트는 이 "대화
요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병의 원인이 되는 기억은 보통은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항상 사람의 정신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의 환자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만큼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하도록 요구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이야기의 이면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인 힘을 해석하기를 원했다(pp. 58__9).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정신 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무리 불합리한 것이라도
얘기하도록 격려하였다("자유 연상"법). 그러나 그는 연상의 흐름이 중단되면 환자가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의 질문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것을 자주
발견하였다. 이러한 "저항"이 일어날 때, 프로이트는 그 저항을, 억압된 콤플렉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자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표시로서 받아들였다. 그는 환자의
무의식적 정신이 얼마간 이것을 인식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이 의식 속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방해하려 한다고 생각했다(p. 48). 그러나 억압된 자료가 의식 속에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환자는 치료될 수 있으며, 그의 에고는 억압 과정에서 말살되었던
이드에게 힘을 되돌려 주게 되는 것이다(pp. 66__115).
그러나 이런 행복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경과가 소요되며, 아마도 몇
년 동안은 매주 치료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분석자는 환자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도달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해석을 환자가 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라든가 그러한 방법으로 표시해야 한다(p. 134). 환자의 꿈은 해석을 위한 매우
유효한 자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꿈의 "현재적" 내용은
항상 억압된 원망의 위장된 성취로서 이 억압된 원망이 꿈의 진정한 혹은 "잠재적"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pp. 60__4). 행동의 실수도 또한 그 실수의 무의식적인 원인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p. 65). 우리가 요약한 이론들로부터 예측할 수
있듯이, 그 해석들은 매우 자주 환자의 성생활과,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유아
성욕과, 양친과의 관계에 관련되고 있다. 분명 이러한 모든 것은 환자와 분석자 사이에
독특한 신뢰 관계를 필요로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실 그의 환자들은 그에 대해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감정을 표명하였다. 그는 이런 형상을, 감정은 얼마간 그 감정이 한 번 일어났던 실제
상황으로부터, 혹은 환자의 무의식적인 환상으로부터 분석자에게 전이된다고 하는
가정 위에서 "감정의 전이"라고 명칭 했다(pp. 82__3, 139__41). 이러한 감정의 전이를
다루는 것이 분석의 성공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전이 그
자체가 분석될 수 있고,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 그 원천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pp.
141__2).
정신 분석__치료의 목표는 자각(self__knowledge)으로 요약될 수 있다. 치료받은
신경증 환자가 그의 새로운 자각으로써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환자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여러 가지 결과가 가능하다. 그는 본능의 불건전한 억압을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규제로 대체할 수도 있고(억압이 아닌 억제), 혹은 그것을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으며(승화) 혹은 본능을 결국 만족시켜야 되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pp. 85__6). 그러나 비전문가들이 때때로 두려워하는 결과__원시적 본능이
고삐가 풀릴 경우 그 본능이 완전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 것이라는 결과__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의식 속으로 돌아오면 그 힘은 실제 감소되기
때문이다(pp. 84__5).
프로이트는 그의 일생을 개개인의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보냈다. 그러나 그는
정신 분석적 치료가 모든 인간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문명과
사회의 문제들을 사색하고 씨름하는 데 있어서 그는 그 극도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만병 통치약을 제시하는 일 같은 것은 삼갈 만큼 충분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 분석이 신경증에 대한 치료만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적용 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p. 168). 그는 "우리의 문명은 우리에게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압력을
부과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압력을 교정할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정신 분석이 그러한 방법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숙고하였다(pp.
169__70). '문명과 불만'의 마지막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문명과 개인간의 유사 관계를
논하면서 문명도 또한 "신경증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유추의 근거가
확실치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동료들의 면전에서 예언자로 자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비판적 논의
지적 연구의 지형도에서 정신 분석의 위치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신
분석학자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 이후의 이론들의 다양성을 가지고 실습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아카데믹한 심리학자들과 임상 정신 의학자들은 정신 분석을 거의
완전히 비과학적인 것으로, 즉 신용할 만한 과학적 의술이라기보다는 마술에 가까운
것으로 경멸하고 있다. 비판가들 중에는 여러 학파의 정신 분석학자들이 부과하고
있는 종교적 의식과 같은 관습 행위라든가 열렬한 정신 분석학자라면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행위, 즉 자신의 정신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을 자각하는 치료
행위(indoctrination)"를 공격의 목표로 눈독을 들이는 자들도 있다. 따라서 그
비판가들은 정신 분석적 이론과 치료를 사이비 종교 같은 신앙에 의한 치료라고
분류해 버린다. 한편 정신 분석학에는, 이와 같은 비판의 동기 그 자체를 경멸조로
분석하는 대책이 있다. 그것은 정신 분석 이론의 진__위를 문제삼는 그 어느 이론도,
불쾌감을 주는 정신 분석학의 함축적인 해석에 무의식적으로 반발하는 비판가들의
자세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이, 만일 정신 분석 이론이 그 이론을 반증하는 듯이 보이는 어떠한 증거도
물리치는 확고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이론은 제 2장에서 규정된 의미에서,
"페쇄된 체제"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정신 분석학 이론에 대한 신봉이 정신
분석학 기구의 회원 자격의 필요 조건이라면, 그 이론은 그러한 사회적 단체의
이데올로기라고도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리 판단을 내리기 전에
프로이트에 반대하는 비판적인 사례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독립된 물음들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즉, 프로이트의
이론의 진__위와 그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치료 방법의 효과에 대한 물음들이다.
이론의 진__위에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그 이론이 반증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의 이론들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보았고, 또한 우리는 경험적 반증 가능성(empirical falsifiability)을, 어떤 이론이
과학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데 필요 조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제 2장에서).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의 중심이 되는 명제들의 얼마간은 그것이 과연 반증될 수 있는
것인가가 확실치 않다. 이 문제를 우리가 요약했던 4개의 주요 항목들에서 예증해
보기로 하자. 정신에 대한 결정론적 가정은, 모든 꿈은 소망의 위장된 성취라고 하는
특유의 명제에 이른다. 이것은 검증될 수 있는 것인가? 꿈꾸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확립해 놓은 소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석이 꾀해 지고 그 해석이 받아들여지는 한
그것은 옳다. 그러나 여하한 해석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경우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여전히 확신에 찬 프로이트주의자들은 위장이 벗겨지지 않은 소망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로지 그렇게만 주장한다면, 꿈이 소망의 위장된 성취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 명제로부터 어떠한 참된
경험적 내용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단지 우리에게는 꿈에 의해서 성취된 소망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처방만 남을 것이다. 이 명제는 우리가 (a) 소망의 존재성과 (b)
그 위장에 대한 올바른 해석 여부에 관한 독립적 증거를 가질 수 있을 때에만
경험적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무의식적 정신 상태에 대한 가정과, 특히 이드와 에고, 초자아의 세 가지
구조를 고찰해 보자. 프로이트는 이 실체들이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심리학적으로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폐기했었다(p. 103). 그러나 그렇게 폐기한 이유는
그가 그 당시 뇌 속에서 이러한 정신적 요소에 대한 생리학적 기반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논리적으로는 심리학이 프로이트가 이드와 에고,
초자아에 부과한 역할을 담당하는 세 가지 물리적 체계를 뇌 속에서 구별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우리는 무의식적인 정신 상태의 가정이
인간 행동에 대해서 어떤 진정한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인지 어떤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상태들이 관찰될 수 없다고 해서 폐기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이론은 종종 인간의 어느 감각에도 직접으로 닿지 않는
실체__예를 들어 원자나 전자, 자장, 라디오 전파 등__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관찰할 수 없는 실체를 관찰할 수 있는 현상과 관련시켜 주는 분명한
"상응 법칙"이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우리는 콤파스 바늘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으로부터 자장의 존재 혹은 부재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프로이트적
실체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거기에는 그런 명백한 법칙이 없다는 것이다. 우표
수집은 무의식적인 "항문기의 보유성(anal retentiveness)"의 표시로써 주장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무의식적인 특질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없을 수도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본능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그 주제에 대한 그의 우왕좌왕하는 태도가 시사해
주듯이, 아마도 경험적 검증의 여지가 가장 적은 이론인 것이다.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습독되지 않은 모든 행동 양태는 본능적인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비록 그 행동
양태들이 습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종종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습득된 것이 아닌 본능적인 행동의 원인을 어떤 본능에 돌린다고 해서 해명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본능에 대응하는 습득되지 않은 행동이 일어난다는 것 이외에
본능의 존재를 밝힐 수 있는 무슨 증거가 있겠는가? 그리고 기본적인 본능들은 몇
개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어떤 것이 기본적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 또
그것들이 어떻게 구별하고 헤아릴 수 있는지는 도대체가 분명치 않다. 인간 행동에
대한 무슨 증거가, 가령 애들러의 자기 주장이라는 기본적 본능 이론이라든가 혹은
신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라는 유의 이론에 반대한 프로이트의 주요 본능 이론들 중
어느 이론을 옳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관찰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정은 반증될 수가 없다면 무용한 것이다.
개인 성격에 대한 발생적 연구 방법과 유아 성욕 발전 단계 이론은 관찰에 의해서,
보다 쉽게 검증될 수 있다. 이 분야에서는 프로이트의 가정들의 얼마간은 증거에
의해서 확실하게 뒷받침되는가 하면, 또 얼마간은 지지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것인
반면, 또 검증하기에 매우 어려운 것들도 있다(아래에 추천한 클라인의 책을 볼 것).
프로이트가 구순기적 혹은 항문기적 성격이라고 부른 것들의 존재는 성격의 어떤
특성들이 (예를 들어, 인색함, 정돈성, 그리고 완고함__항문기적 특성) 함께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확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유형들이 어떤
일정한 유아 발육 과정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은 현재의 연구 결과들에 의해서 지지
받지 못하고 있다. 비록 유아적 경험과 성인의 성격 사이에 필연적인 상호 관련을
지우는 데는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그 이론이 아직은 논박 받고 있지 않다.
프로이트의 성적 심리(psychosexual) 이론의 다른 몇 가지 부문들도 검증에 관련될 때
개념적인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유아가 빠는 것으로부터 성적 쾌락을 얻는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는가? 어떤 연구는, 먹을 때에 빨 수 있는 기회를 적게 가진
유아는 엄지손가락을 빠는 경향이 심하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빠는 행위는
정말로 성욕적 본능에 대한 증거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인가? 얼마의 예에 대한 이와
같은 간략한 고찰은, 적어도 프로이트의 중요한 이론적 주장의 얼마간이, 과학적인
사실이 되기에는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떤 것은 반증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검증될 수 있는 것들 중에도 단지 소수만이 증거에 의해서 명확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 검증 자체도 복잡한 실천적, 그리고 개념적인 어려움을 온통
겪고 있다.
정신 분석학은 본래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일련의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을 이해하고, 인간들의 행동과 실수와 농담과 꿈에서 의미를 찾아 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는 학설이 (정신 분석학자와 철학자들 양자에 의해서) 제안되었다.
인간은 물리학과 화학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는 실체와는 아주 다르므로, 정신 분석이
확립된 물리 과학에 의해 받아들여진 과학적 지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꿈에 대한 정신 분석학적 논의는 모호한
시의 해석처럼, 보다 문학 비평에 유사한 것일 것이다. 거기에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근거가(그러나 결정적인 근거는 아닌)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은 사랑이나 미움, 공포, 불안, 시기, 경쟁심 등과 같은 일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 우리가 서로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해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경험을 쌓은 노련한 정신 분석학자는, 그가 지지하는 이론적인 관점이
무엇이든 간에 그 관점에 개의치 않고, 행동의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동기가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면을 해석하는 기술을
획득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신 분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동기와 원인 사이의 뚜렷한 구별, 나아가서 인간의
행동을 원인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과학적 설명)과, 그것을 동기와 목적, 혹은
의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함으로써 철학적 지지를 받아 왔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동기보다는 원인의 관점에서 이론을 수립했을 때, 실은 그가
원인에서가 아니라 동기와 목적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몇 가지
다른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원인과 동기의 구별도 철학적인 의문의 여지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이간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와 정신 분석 학자의 인간에
대한 해석은 둘 다 논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지지를 받아야 하고, 그러한 근거는
분명히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행동에 대한 일상적인 설명과 과학적 설명 사이에는 그 성질상 어떤
궁극적인 차이점이 있는 것이 확실한가? 반증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실적(factual)이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정신 분석학의 논의는 과학적 탐구와 설명
방법이 인간에게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철학적인 논쟁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 이론에 대한 의식은 자연적으로 그 이론을 기초로 하는 치료에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그 치료가 이미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한 우리는 그 효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원칙상 그
이론을 더 한층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이 정말로 진실하다면 그
치료가 효과적이기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쉽지 않다.
가령 옳은 이론일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나쁘게 적용될 수 있으며, 또 신경
질환으로부터의 "치유"란 어떤 것인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3분의 2라는 비율이
정신 분석 요법을 마친 환자의 치유율의 근사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양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물론 그것은 다른 정신 의학적 방법에 의해서
치료받았거나 혹은 전혀 치료받지 않은 비슷한 경우의 "통제 집단(control group)"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러한 집단의 회복률도 또한 3분의 2라는 비율이며, 따라서 아직은
그 정신 분석 요법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 이론 전체를 두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명확한 판정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천재는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사상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임무를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중대한 발언들을 너무도 많이 했기 때문에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양편이 그 발언들을 음미하고 검증하는 데는 앞으로 오랜 시일들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정신 분석학 이제(Two Short Accounts of Psycho__Analysis)', James
Strachey 편역. 이 책은 전기적 스케치와 참고 목록을 싣고 있다.
"short account"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신분석학 오강(Five Lectures on
Psycho__Analysis)'은 John Rickman이 편집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총선(A General
Selection from the Work of Sigmund Freud)'(Doubleday Anchor Book 문고, New
York, 1957)에 실려 있다. Rickman의 선집은 그러나 두 번째의 '비전문가 분석의
문제(The Question of Lay Analysis)'를 싣고 있지 않다. 'short account'는 프로이트의
'심리학 전집(Complete Psychological Works)'(Hogarth Press, London; Macmillan,
New York) XI와 XX에 들어 있다.
프로이트 저술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려면 1915__17년의 '정신 분석
입문(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__Analysis)'을 볼 것 ('전집'으로는 XV와 XVI).
그와 적대적인 견해로는 H. J. Eysenck의 '심리학의 사용과 남용(Uses and Abuses
of Psychology)'(Penguin, London, 1953; New York, 1964)의 제 12장을 볼 것.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의 경험적 검증의 세부적인 것을 보려면 Paul Kline의 '프로이트 이론에
있어서의 사실과 환상(Fact and Fantasy in Freudian Theory)'(Methuen, London,
1972; Barnes & Noble, New York)을 볼 것.
프로이트적 개념의 철학적 연구를 위해서는 Alasdair MacIntyre의 '무의식(The
Unconsious)'(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58; Humanities Press, New York,
1962)을 볼 것.
전기로서는, Ernest Jones가 쓰고 Lionel Trilling과 Steven Marcus, 가 한 책으로
편리하게 편집하고 줄여 놓은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애와 작품(Life and
Work of Sigmund Freud)'(Penguin, London, 1964; Basic Books, New York, 1961)을
볼 것.
정신 분석 이론의 후기 발전에 관한 소개로서는, J. A. C. Brown의 '프로이트와
후기 프로이트주의자들(Freud and the Post__Freudians)'(Penguin, London, 1964;
Basic Books, New York)을 볼 것.
필자가 참고하고 있는 '정신 분석 이제(Two Short Accounts of
Psycho__Analysis)'는 미국에서는 문고판이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 장에 나오는
참고 페이지는 프로이트의 '심리학 전집'의 의거했다.
제7장 사르트르:무신론적 실존주의
프로이트에서 사르트르에로 옮겨감에 있어서 우리는 세기의 전환기의 비엔나로부터
1930년대와 40년대의 파리로, 그리고 의학의 심리학적 측면으로부터 학문적 논의뿐만
아니라 상상적인 문학으로 표현되고 있는 철학에로 옮겨 가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 개인의 문제에 대한, 특히 의식의 본질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었다.
사르트르도 역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네 가지 이론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를 실존주의 전체의 맥락 속에 두고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작가와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들이 "실존주의자"로 불리워져 왔다. 하나의
공통적인 핵을 가려 낼 수 있다면, 실존주의에는 세 가지 주요 관심사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그것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에 대한 것보다는, 개인적인
인간 존재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보편적 이론들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__그의 특유성__을 제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진리보다는 인간 생활의 의미 혹은 목적에 관계한다. 그러므로 내면적
혹은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진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째는, 개인의
자유가 분명히 가장 중요한 인간적 특성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스스로 자신의 태도와 목적과 가치와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진리로써 주장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와
같은 진리에 의해서 행동하도록 설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에 있어서 단
하나의 "신뢰할 만한" 그리고 참된 생활 방식은 각 개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관심사는, 그러므로, 하나의 기본적
주제__인간의 본질에 대한 실제적인 관점들인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이 공통적인 핵은 매우 다양한 맥락 가운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
그것은 희곡과 소설과 같은 특정한 성격들과 상황들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묘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인간 조건에 대한 일반적
진술을 제 나름대로 시도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실존주의 철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 진술이 다른 일반적 진술들의 가능성 혹은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그 가장 근본적인 구별은 그
사람의 사상이 종교적인가 무신론적인가에 있다.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키르케고르(813__55)는 일반적으로 최초의 현대적 실존주의자로 여겨지고 있다.
마르크스와 같이, 그는 헤겔적인 철학의 체계에 반발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다른
방향에서였다. 그는 추상적인 이론 체계를 마치 사람이 실제로 살 수 없는 거대한
저택과 같은 것이라고 거부했고, 그 대신 개인의 그리고 그 개인의 선택의 절대적
중요성을 주장했다. 삶의 세 가지 주요 방식__미학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인
것__을 구별하면서, 그는 각 개인이 그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종교적 방식이(좀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적인 방식) "신의 품으로서의
자유로운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긴 하지만, 그것이 최상의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실존주의의 또 하나의 19세기의 원천은 독일의 철학가인 니체(1884__1900)로서 그는
적극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는 "신은 죽었으므로"(즉 종교의 환상은 간파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 토대를 다시 생각해야 하며,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인간적
관련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그는 그보다도 먼저 태어난, 같은
나라 사람인 포이에르바하와 공통점이 많다. 포이에르바하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무신론은 필자가 마르크스를 소개하면서 간략하게 언급했다. 니체에게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가치 기준의 토대를 변혁시킬 수 있는 우리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것이며, 인간의 "권력 의지"에 기반을 둔 보다 진정한 가치 기준에 의거하여 종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우리 현재의 허약한 가치 기준을 거부할 미래의 "초인"에 대한
비젼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20세기에도 역시, 실존주의자에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들이 포함되어 왔다. 실존주의는
철학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의 양 신학에 있어서 주가 되는 힘이었다.
철학적 운동은 유럽 본토,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 집중되었고, 영어 사용 국가에서는
훨씬 적은 영향을 미쳤다. 그 원천은 키르케고르와 니체에게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으나, 또한 독일어를 사용했던 철학자 훗설(1859__1938)의 현상학도 그에 포함된다.
훗설의 다소 모호한 철학적 방법은, 현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가정도 하지 않고, 단지 "현상"만을 그 보이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으로부터 어떤
명확한 출발점을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 방법은 철학에 주관적인, 의사 심리학적인
색채를 부여하여 철학을 인간 의식에 대한 연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이 의식에 대한 관심이다. 독일에서 이런
경향을 띤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하이덱거(1889__1976)로서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은 1927년에 나왔다. 그러나 그의 중심 문제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며,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진정한 위치와, 특히 죽음의 불가피성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는 "진정한"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실존주의를 전반적으로 다루고자 하지 않는다. 상술한 것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중 가장 저명한 쟝 폴 사르트르(1905__80)에 대한 고찰의
배경으로서 스케치한 것이다. 훌륭한 학력을 통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유럽
철학자들, 특히 헤겔과 훗설과 하이덱거의 사상을 흡수했다. 사르트르 자신의 철학
스타일이 모호한 것은 이 세 사람의 독일인이 육중한 추상적 사유의 영향 때문이다.
훗설의 저서로부터 온 주제는 그의 최초의 저서들__1938년의 소설 '구토'와 심리학적
주제에 관한 세 편의 철학적 연구, '상상력'(1936), '감정 이론을 위한 초고'(1939),
그리고 '상상력의 심리학'(1940)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주저는, 인간 존재에 관한
그의 철학을 상세히 논술한 유명한 '존재와 무'로서 1943년에 첫 출판되었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했는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논법은 대중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낸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제2차 대전 동안 그는 나찌스의 점령에 대항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당시의 분위기의 얼마간은 그의 저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 모두가 당면해야 했던 협조와 저항, 혹은 조용한 자기__은폐 중 어느
하나의 선택은, 실존주의자가 생각하고 있는, 언제나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개인적인 선택의 불가피성을 말해 주는 분명하고 특수한 경우였다. 이러한 테마들은
사르트르의 3부작 '자유에의 길'과 그의 약간의 희곡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 보다
최근에는 개인적인 입장에 기초를 둔 그의 초기 저서들의 실존주의를 수정하고 일종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였는데, 마르크스주의를 그는 실존주의로 소독될 필요가 있는
"우리 시대의 필연적인 철학"으로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그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권, 1960)에 표명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것을
다루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존재와 무'의 실존주의 철학만을 고찰할 것이며, 페이지
참조는 하젤 반즈의 영역판을 따른다.
우주론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논의는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신을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 모순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p. 615). 그는 이
문제가 이전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충분히 논증된 것으로 생각한 듯하고, 그 자신의
저서에서는 그 결과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니체처럼, 그는 신의 부재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무신론자는 단지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기독교인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관해서 깊이 있는 다른 견해를 가져야만 한다는 데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혀용 된다(예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가치 기준이 우리 앞에 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의 계율이나, 플라토적인 형상도 없으며, 그 외 어떤 것도 없다.
인간의 삶에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의미가 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은
"부조리"하다. 우리는 이 세계 내에서 우리 자신들을 전적으로 스스로를 돌보게끔
"버림받은", "내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가치 기준의 유일한 토대는 인간의
자유이며, 그러므로 누군가가 채택하려고 결정한 가치 기준은 외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것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p. 38).
인간론
어떤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옳고 그른 이론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본질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을 전형적인 실존주의자답게 거부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인간의 존재는
그 본질에 선행한다고(pp. 439__9) 표현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목적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고, 또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며, 진화에 따라 생겨난 것도 아니고, 그
무엇에 의해서도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뿐 그 다음 우리 자신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살아 남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등의 인간 존재의 보편적
속성들이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보편적 사실들이, 수자상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더라도 존재하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추측컨대, 그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올바른"
일반 진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주목한 바, 객관적 가치 기준에 대한
어떤 개념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인간 조건에 관해 다소 일반적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 그의 핵심적 주장은 물론 인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의
견해로는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기를 그만 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p. 439). 그러나 우리는 그가
의식이라는 개념의 분석을 거쳐서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의식(L'etre__pour__soi,)과 비의식의 대상(L'etre__en__soi)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로부터 출발한다(p. xxxix). 의식은 필수적으로 대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 즉 의식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 기본적인
이원론을 보여 준다고 그는 생각했다(p. xxxvii).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논점은,
사르트르의 저서명에 나타난 무에 대한 불가사의한 개념과 의식과의 관계이다. 이
"무"라는 개념을 놓고 독일 철학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든가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고, 다만 사르트르에게서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을 뽑아 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는, 의식이 항상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의식임을 지적했다(pp. xxix,
74__5). 사르트르는,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그 자신을 의식하므로, 필연적으로 그
자신과 그의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은 그러한 대상을 판단할
우리의 능력과도 관계 있다. 판단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다. 가령
내가 카폐를 한 번 둘러보고, "피에르는 여기에 없다"고 말할 때처럼, 부정적인 경우를
인식하고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pp. 9__10).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할 때에, 그에 대한
"아니오"라는 대답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p. 5). 그러므로 의식하는
존재는 본질상 부정적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무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비존재의 객관적 실존" 같은 모순된
말이나(p. 90)(이 말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진술이 존재함을 뜻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무는 존재의 심장 속에 마치 벌레처럼 도사리고 있다"와 같은
모호한 말로 황당한 언어의 유희를 하고 있다(p. 21). 그러나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무의 결정적인 역할은 의식과 자유를 개념상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사실이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 즉
판단을 보류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pp. 24__5). 우리는 결코 가능성(아직
성취되지 않은)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상태를 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언제나
그러한 상황에 도달하고자, 의식적 존재보다 대상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삶은, "그 불행한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불행한 의식"(p. 90), "부질없는 열정"(p. 615)이라는 사르트르의 이야기가 비롯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개념은 의도적 행위의 개념과 같이 어떤 것의 결핍에 대한
인식을 내포한다(p. 87).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의도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을 때에만 결과를 얻고자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의 힘은
자유__(가능성을 상상하는) 정신의 자유와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하는)행위의
자유__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의식한다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이러한 명제는 프로이트의 두 가지 명제들과 어떻게
직접적으로 모순되는가. 분명히 그 명제는 프로이트의 엄격한 심리적 결정론의 가정과
양립할 수가 없다(p. 459). 그 명제는 또한 의식은 필연적으로 그 의식 자신에게는
투명한 것이라고 사르트르가 주장했기 때문에 무의식적 정신 상태라는 가정과도
충돌한다. 우리의 정신 생활의 모든 면은 의도적인 것이고 선택된 것이며, 또한 우리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감정은 종종 우리의 의지의 규제를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르트르는, 내가 만일 슬프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내 자신을 슬프도록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 61). 이러한 관점은, '감정 이론을 위한 초고'에서, 보다 상세히
기술되고 있는데, 감정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대상을 의식하는 다른 방식들과 구별지을 수 있다면, 그
감정이 세계를 요술에 의해서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이다. 포도 송이에 손이
닿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너무 안 익었다"하면서 포기한다. 우리는, 포도에 손이
미치고 안 미침이 그 포도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런 속성을 포도 송이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반응하려고
선택한 방식이기 때문이다(pp. 445). 우리는 마찬가지로 우리 성격의 보다 지속적인
특징들에도 책임이 있다. 가령 "나는 수줍어 한다"라는 말을 "나는 흑인이다"라는 말과
같이, 마치 개조할 수 없는 사실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줍어 하는 것은 우리 행동의 한 방식이고, 우리는 그와 달리 행동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못생겼다"라든가 "나는 어리석다"라고 하는 것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나 사회가 장래 나의 행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예상하는 것이며, 그러나 이것은 겪고 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p. 459).
그러므로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유는, 그리고 따라서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로 확장된다. 이 총체적인 자유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유혹이나 혹은 주저의 순간들에__예를 들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다시 한 번 도박판을 대했을 때__우리는
어떤 동기도 또 어떤 과거의 결심도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p. 33). 모든 순간은 새로운 혹은 다시 새로와진 선택을 요구한다.
키르케고르를 따라, 사르트르는 인간 자신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pp. 29, 464). 불안은 외부의 대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예견할 수 없음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병사는 부상당하거나 전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다가올 전투에서 "전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할 때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위태로운 벼랑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추락을 두려워하지만, 그는 자기가 추락해
버리는 것을 막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pp. 29__32).
진단
불안, 즉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우며,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p. 40). 그러나 그러한 "도피"는 환상적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사르트르의 진단이다. 그의
진단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자기__기만 혹은 "거짓 믿음(mauvaise
foi)"이다. 거짓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유롭지 않은 듯 가장함으로써 불안을
피하고자 애쓰는 것이다.(p. 44).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우리의 성격이나 상황, 생활
속에서의 역할, 혹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거짓 믿음의 두 가지 유명한 예를
든다(pp. 55__60). 그는, 자신을 유혹하고자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한 남자와 앉아
있는 소녀를 묘사한다. 그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러나 그녀는 눈치를 못 챈
듯이, 마치 자기의 손을 의식하지 못한 듯이 그의 손 안에 내버려둠으로써,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해야만 하는 결정의 불가피함에서 오는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참다운 존재, 즉 자유로운 의식적 존재라기보다는 수동적인
대상이며 사물인 듯이 가장하는 것이다. 또 한 예는 자신의 직업에 좀 지나치게
열심인 카페 종업원의 경우다. 그는 분명히 종업원의 역할이 그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듯이, 그 자신을 완전히 종업원의 역할과 동일시하려는 데 있다. 사실은 그
직업을 갖기로 그가 선택했던 것이며, 어느 때든 그것을 그만 둘 자유가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종업원이 아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거짓 믿음을, 무의식적 정신 상태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어떠한
프로이트적 설명도 거부한다. 프로이트의 추종자는 위의 경우들을 억압의 예로서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즉, 소녀의 경우 그녀는 그 남자 친구가 자기에게 성적인
접근을 하려 한다는 무의식적인 인식을 억압하고 있으며, 종업원의 경우는,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땐 한 순간이라도 더 종업원으로서의 행동을 계속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무의식적인 인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바로 그 억압이라는 관념 속에 자기__모순이 있는 듯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억압은
정신 내부의 어떤 기관("검열관")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 기관은 억압될 것과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검열관은 억압되는
관념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 그 억압되는 관념을 의식해야 하는 셈이 된다. 이처럼
검열관 자신이 거짓 믿음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 믿음을 인간
전체에가 아니라, 단지 정신의 한 기관에 속하게 함으로써 그 거짓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조금도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pp. 52__3).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거짓 믿음의 안티테제인 진실성도 마찬가지의 개념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제시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뭐라고(예를 들어, "나는 종업원이다"라고)
이야기하자마자, 바로 그 행위로 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자신과 설명되고 있는 자신
사이의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완전한 진실성이라는 이상은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p. 62).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관찰할 수 있거나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대상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여기서 이른바 "자아의 체계적
도피성(the systematic elusiveness of the self)"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사실 이상으로 문제를 더 역설적이고 당황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의 실재는 그 자신이 아닌 것이어야 하고, 또 그 자신인
것이어서는 아니된다"라고 말하는 공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기__모순이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그 글자 그대로 의미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필자는 그 공식을 인간의 실재는 꼭 그 자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 자신이 아닌
것일 수 있어야 한다(그가 p.58에서 말했듯이__아랫점은 필자)라는 말의 압축된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르트르의 기본적인 논점인,
의식한다는 것은 자유로와지는 것이라는 데로 우리의 주의를 되돌린다. 의식은 그
의식의 존재 속에 거짓 믿음의 위험을 영원히 감추고 있지만,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
거짓 믿음의 위험을 피하고 진실성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p. 70).
처방
객관적 가치 기준들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는 사르트르의 관점에서는, 그의
처방이 몹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는 특정한
행동 방침이나 생활 방식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거짓 믿음, 즉 자유롭지
않은 척 가장하려는 태도를 비난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가 권할 수 있는 것의
전부는 진실성을 가지는 것, 즉 우리 각자가 어떠한 것도 우리를 위해 결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개인적 선택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__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감정과, 우리의 성격까지도__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지식한 정신(spirit of seriousness), 즉 가치들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환상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pp.580, 626). 자유의 불안에서부터 도피처는 없다.
책임을 회피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다(pp.479, 555__6).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에서 사르트르는 처방의 불가능성을 나찌스 점령시의 한
프랑스 청년의 경우를 들어 예증한다. 그 청년은, 자유 프랑스 군대를 돕기 위해
영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오직 그만을 위해 살아 온 어머니와 함께 조국에 머물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하였다. 행동 방침의 하나는 그가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전쟁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현실적 효과는 있겠지만, 단지 한 개인의 이익을
좇는 것에 그칠 것이다. 사르트르는 어떤 윤리적 가르침도, 또한 기독교적인 혹은
칸트적인 그 밖의 어느 가르침도, 이러한 서로 엄청나게 다른 요구들을 조정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양자 택일에 직면했을 때 그때 그의 내부에 일어나는 감정이
어느 쪽에 더 강한가에 의해서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
행하고 있는 행위__이 행위 자체가 물론 바로 문제가 되고 있지만__말고는 그런
감정을 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고자를 선택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선택이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이 청년에게 상담을 요청 받았을 때, 그는 단지 "그대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선택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확실히 진정한 선택의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언급함으로써
곤경에 빠져 있다. 거짓 믿음의 특정한 사례들에 대한 그의 설명을 보면, 사르트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__기만, 즉 현실을 직시하여
자기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행위를 은연중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처방한 자각이라는
고전적 미덕에 입각해서 또 하나의 전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각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해는 프로이트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정신 분석이
사람들의 정신 생활에 원인적 효과를 미치는 무의식적 정신 상태를 가정하는 데
기초하고 있음을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원인들이 거의 기계적으로 에너지의
흐름처럼 작용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정신 분석 작업을 이 숨은 원인들을 밝혀 내는
일로 생각하였다. 사르트르는 정신적인 사건에 있어서 무의식적 원인들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정신적인 것은 모두 다 이미 열려진, 의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p. 571). 그가 "실존주의적 정신 분석"이라고 칭한 작업은 한
사람의 행위에서 원인들을 찾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pp.
568__9). 이 점에서 R. D. 랭 같은 몇몇 현대 정신 의학자들은 사르트르를 따른다. (제
6장에서 필자는, 프로이트적 정신 분석 자체는 사실, 원인이 발견이라기보다는 동기와
목적과 의도에 대한 해석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르트르는 그 사람이 행한 선택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핀다(p.
573). 그리고 그는, 각 개인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통일체(unity)이지 서로 연관이 없는
욕망 혹은 습관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그가 행한
특정한 형식의 행위 하나하나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기본적 선택__"(근원적인 기투
original project)"__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pp.561__5). 사르트르가 쓴
보들레르와 쟝 쥬네, 플로베르의 전기는 한 개인의 생활 방식의 기본적인 의미들을
해석하고 있는 독특한 연구들이다. 그리하여 실존주의 정신 분석은, 이 분석에 의해서
우리가 진정한 자각을 얻을 수 있기를 사르트르가 희망하는 방식이다. 그는 또 하나의
책을 쓰겠다는 약속으로 '존재와 무'를 끝맺고 있는데, 그가 쓰겠다고 약속한 책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인식하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 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비판적 논의
사르트르에 대한 필자의 첫 번째 불만은 내용보다는 문체에 관한 것이다. 독자를
경고하느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존재와 무'는 아마도 필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텍스트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일 것이다.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의 길이와
반복적인 표현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이 철학자가 추상 명사와 포착할 수 없는
비유, 그리고 명확치 않은 역설로 단어를 즐겨 수놓은 듯한 표현 방식에서도 오는
것이다. 이것을 헤겔, 훗설과 하이덱거의 영향으로 돌린다면, 읽기 어려운 이유의
설명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르트르가 그
철학자들보다 덜 모호하다는 데 대해서 감사를 드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명확히, 그리고 훨씬 간결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교적 명확한 문장과 요설의 집적 속에 묻혀 있는 위대한 통찰력을 발견할 때면 그는
더욱 우리를 애타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저도 모르게 이끌리는 매력을 풍기는 견해를 얻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용의 문제로 돌아가서, 첫째 어떻게 거짓 믿음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자. 우리는 사르트르가 개념적인 이유로 거짓 믿음에 대한 어떠한 프로이트적인
해명도 거부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어떻게 의식이 "그 자신이 아닌 것일 수
있고, 또 그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수가 있을까"하는 개념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가
적절한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제 2부에서 대자에 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역설적 진술에 너무 쉽게 안주하는 것 같고, 문제가
되고 있는 의식에 대한 설명은 명확하고 비역설적인 용어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힘든 철학적 과제인데도, 이것을 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의 일관성 있는 주장과 인간의 조건은 어느 면에서 필연적으로
결정지어진 것이라고 보는 그의 분석 사이에는 뚜렷한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의식함의 본질인 "무"를 채우고자 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가능성을 지닌 상태에서
영원히 머물고자 하기보다는 사물(thing)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p. 90). 그는 또한 두
개의 의식간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의식은
다른 하나를 단순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그 불가능한 이상을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pp.394, 429). 이 두 가지 관점에서, 그는 인간의 삶이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영원한 시도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
"당위"와 우리의 가정된 자유 사이에는 직접적인 모순이 분명히 있는 것인지?
누군가가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로, 혹은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하려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르트르가 그의 이론의 핵심에 있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이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사르트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권고는, 우리가 거짓 믿음을 피하고
성실하게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자각 혹은 성실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유일한 근거일 수 있는가? 만일에 다른 생활 방식을
마다하고 어떤 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대체 이유가 있을 수 없다면, 그
선택은 자의적인 것이다. 그가 끌어낸 전제들에 의할 것 같으면, 유대인을
멸종시키는데 일생을 바치고자 선택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깨닫고서 그 선택을 하기만 하면, 사르트르는 그를 칭찬해 주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영락한 사람들"을 도우는 데 허신 하지만, 그렇게 하는 데 대한
자신의 진정한 동기(가령 어버이의 배경에 대한 반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불성실한 자로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실성은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이 입증될 수 있는 것인가? 사르트르는
윤리학에 관한 그의 약속된 책을 쓰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존재와
무'에서의 개인주의에 입각한 전제들로부터는 어떠한 사회적 윤리학도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사실이 왜 그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하게 되었고, 만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할 사회적 조건들을 찾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의식의 개념이 어떻게 자유의 개념을 동반하는가 하는 사르트르의
심오한 분석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선택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도, 그리고 우리의 성격에까지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
어떻게 확장시키고자 했는지를 고찰했다. 내가 화를 낸다면, 그것은 내가 화를 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일반적인 상황에 수동적으로 체념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또한 내가 채택하기로 결정한 기질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감정과 성격에 대한 보통 개념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감정은 그
감정을 원하건 원치 않던 간에 "우리를 덮치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격은 우리의 몸무게와 같이 우리에 관한 하나의 사실(a fact)__분명
우리가 어떤 단계를 밟아서 점차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일어서거나 앉거나 하는 것같이 단번에 바꿀 수 없는 어떤 것__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르트르의 관점은 독단적인 언어 오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보통 그들의 감정이나 성격을 가지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느낄 수 있는가?" "당신은 그래야만 하겠소...?" 같은 식으로
비난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느끼거나 행동한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은 그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성을 낸다거나
오만하다는 것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정말 점차로 화를 덜 내게 되며, 잘난 체를
덜하게 되어 더욱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사르트르의
논점의 본질일 것이다. 그의 철학의 방대한 장광설은 궁극적으로, 바로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인 그리고 우리에게 밀접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보다 참되게 자신을 알게
될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행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 Hazel Barnes역. (Methuen,
London, 1957; Citadel Press 문고, Secaucus, N. J.) 이 길고 어려운 책은 보다
중요하고 비교적 명확한 문장에로 이끌어 주는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나는 앞에 쓴 나의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아래에 쓴
Manser의 책은 보다 포괄적이고 상세한 안내가 될 것이다.
Anthony Manser의 '사르트르:철학적 연구(Sartre:A Phlosophic Study)'(Athlone
Press, London, 1966; Oxford University Press Galaxy Books 문고, Now York)는
그의 문학과 정치학을 포함하되 그의 철학에 가장 중점을 두면서 사르트르의 전
사상을 개관하고 있다.
다른 실존주의자들에 대한 안내로서는, Mary Warnock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Oxford University Press OPUS 문고, Oxford, 1970; Galaxy
Books 문고, New York)가 있다.
@ff
제8장 스키너:행동의 조건화
이제 과거의 철학자들이나 순이론적 사상가들에게 그렇게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하고 독자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과학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심리학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우리가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지난 백년간 심리학은
그 최초의 철학적 원천들로부터 명확히 분리된, 하나의 경험 과학의 독립된 분과로서
자신을 확립해 왔음에 비추어 거기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하여
어떤 적절한 과학적 해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은, 심리학은
엄청나게 어렵고 복잡한 학문으로서, 특정한 주제들이 있으면, 그 주제들에만 관계되는
문제들을 매우 세심하고 정확하게 한정해서, 그 문제들에게만 명확한 해답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만일 실험 심리학자가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일반화하기 시작하면, 그의
진술은 적어도 그 학문의 현상태로 보아서는 우리가 고찰해 왔던 사상가들의 경우와
같이, 순이론적인 것으로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심리학 내에서도 여러 학파의
사상과 방법론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그렇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심리학의
한 분야가 보여 주는 하나의 보기로서, 1948년 이래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서,
행동주의적 전통에 속해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실험 심리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B.
F. 스키너의 저서를 고찰해 보자. 그도 또한 서슴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일반화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므로, 꼭 그의 실험에 입각한 연구 저서의 세부에까지__거기에
대해서는 심리학자가 아닌 사람은 논평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__들어가지 않고도 많은
것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스키너의 저서의 배경으로서는, 심리학적 행동주의의 창시자로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고, 그보다 일찍 태어난, 같은 나라 사람 J. B. 왓슨을 고찰하면 유익할 것이다.
19세기 후반 15년 간에 최초로 심리학 실험실들이 생겨났고, 심리학은 독일의 분트나
미국의 윌리엄 제임즈의 주도 아래 하나의 경험 과학으로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리학이 영혼 혹은 정신(이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내포하고 있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의식에 대한 연구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의식
내용들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__분석(introspection)에 의해서 그것들을 기록할
수 있고, 따라서 심리학을 위한 경험적 자료들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감각과 이미지와 느낌을 설명하고 분류하는 데 있어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이 곧 발견되었다. 동시에 프로이트의 저서가 정신의 중요한 측면은
의식으로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동물의 연구에 있어서는
자기__분석은 분명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다윈 이후) 동물 연구는 인간의 연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의식이라는 개념도
영혼이나 정신의 개념과 같이 많은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왓슨이, 1913년의 논문에서, 심리학의 주제는 의식이 아니라 행동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관점은 기꺼이 받아들여져 심리학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동물과 인간의 행동은 공개적으로 관찰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
행동에 대한 기록과 설명은 심리학의 객관적 자료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리고 행동의
개념은 외견상 문제가 되는 철학적 가정을 아무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__분석적 방법에 대한 이와 같은 거부가 왓슨의 새로운 프로그램의 가장 기본적인
논점이었다. 그의 논점은 물론 심리학이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순수한
방법론적인 것으로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그 의식이 단지 사람의 두 개골
속에 있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등의 형이상학적 진술과는 무관하다. 또한 정신
현상을 표현하는 우리의 말(words)도 사실은 단지 행동이나 행동의 근본 요인에
속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논제(논리적, 혹은 분석적 행동주의라 불리우는)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왓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단순한 방법론적 논점을 넘어서, 의식에
대한 믿음은 마술을 신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 시대 이전의 미신적인
과거로부터의 유물이라고 역설하곤 했던 것이다.
또한 왓슨의 요지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주요 논점이 있는데, 그 둘은 방법론적인
논점이라기보다 사실 심리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경험적인 이론들이다. 첫째는
행동의 결정에 있어서 환경이 유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이와 같은
신념은 그의 방법론에 자연히 수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유기체의 행동에 끼치는
외부적 영향들은 쉽게 관찰할 수 있고, 실험으로 조작할 수 있는 반면에, 내부적
영향들(특히 유전자)은 관찰하고 조작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
사실만으로 환경과 유전이 상호 관련되어 행동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왓슨은 행동에 있어서 유일한 유전적 특질들은 단순한 생리적 반사
능력(reflexes)뿐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그 밖의 특질들은 모두 학습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여기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이 있게 된다. "건강하고 잘난 갓난아이
12명을 내게 맡겨 보라. 그리고 내 자신이 특별히 구상한 세계에서 그들을 기르게
해보라. 그러면 나는 그들 중 아무나 하나를 택해서, 그 아이의 재능, 취미, 능력, 적성,
또 그 조상들의 종족 등에 관계없이, 내가 택하고 싶은 여하한 유의 전문가__의사,
법률가, 예술가, 대상인, 그뿐만 아니라 거지나 도둑까지__로 양성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행동주의' 1924의 개정판, 1930, p.104). 왓슨의 또 하나의, 경험론적인
가정은 학습이 반사 작용을 위한 조건화(conditioning)에 의해서 학습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와 관계 되는 개별적인 이론이었다. 이 조건화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바로
전에 규칙적으로 종을 울림으로써, 개가 종소리에 의해서 침을 흘리도록 훈련시킨
파블로프의 유명한 실험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왓슨의 요지는, 동물과 인간의 온갖
복잡한 행동이 그들의 환경에 의해 그렇게 조건화되어진 결과라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왓슨 시대 이후의 실험 심리학의 저작에서는, 그의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와
그의 특별한 학습 이론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스키너는 왓슨의 요지를
이어받아서 행동주의적 방법론을 더욱 엄격하게 고수하고, 관찰 불가능한 실체에 대한
모든 언급을 회피했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모든 행동을,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환경의 결과로, 즉 몇 개의 기본적인 조건과 과정에 의해 조정되어 나타난 결과로
설명하고자 하는 그 요지에서 왓슨과 유사한 신념을 보여 주고 있다. '유기체의
행동:하나의 실험적 분석'(1938)은 조건화에 대한 그의 기초적인 전문서이다. '과학과
인간 행동'(1953)에서 그는 그의 이론들을 인간 생활과 일반 사회에 전반적으로
적용시켰고, '언어 행위'(1957)에서는 특히 인간의 언어에 적용시켰다. 그 또한 '월든
투(Walden Two)'(1948)라는 소설을 출판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행동
조건화의 원칙에 의해서 조직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유와 존엄성을 넘어서'(1971)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다시 한 번, 만일 우리가
개인적 자유와 책임과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행동
공학(technology of behavior)이 인간 생활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에서 필자는 페이지 참조를 '과학과 인간 행동'에서 할 것인데, 이 책은
스키너 저서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읽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해설과 비판을
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키너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분석하는 일은 바로 그
비판에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론
스키너는 이 책에서 필자가 고찰하고 있는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과학적"인
사람이다. 그는 오직 과학만이 본질에 관한 진리를__인간의 본질을
포함해서__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은, 하나의 발전을 토대로 발전을
거듭해 왔음(cumulative progress)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p.11). 과학에 있어 기본적인 것은 기계도 아니고 측량도 아닌,
과학적 방법이다. 즉, 사실이 기대한 것이건 기대 밖의 것이건, 혹은 기분 좋은 것이건
불쾌한 것이건 간에 그 사실을 파악하는 태도이다. 모든 진술은 관찰 혹은 실험이라는
검증을 거쳐야 하고 증거가 불충분할 때는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과학자는
현상들 사이에서 동일성이나 혹은 어떤 법칙에 지배되는 관계들을 발견하고자 애쓰고,
또 모든 특정한 경우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들을 수립하고자
노력한다(pp.13__4). 더 나아가서 스키너는 과학과 기술 공학(technology)사이에 뚜렷한
구별을 두지 않는다. 그는, 과학의 작업은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p.14).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들이 과학과 공학간에, 그리고 예측과 통제 사이에 보다
뚜렷한 구분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의하면, 과학적 방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스키너와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휴머니스트도
있으며, 좌익도 우익도 있다. 스키너는 어떠한 종류의 물음이든 그 물음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그 근거는 과학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분명 그는 신에 대한 믿음에 있어 과학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종교를 단지 인간 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의 하나로서
다룬다(pp.350__8). 가치 판단이란 그에 따르면, 어떤 사회적 단체에 의해서 행사되고
있는 원칙을 따르라고 하는 전형적인 압력의 표현이며(pp.415__18), 은밀한 명령의
일종이다(p.429). 가치 판단들이 목적을 향한 수단에 관여할 때만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를 부여받을 수 있다. "너는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말은 대충 해석하면,
"너는 비에 젖지 않기를 원한다. 우산은 비 속에서 너를 젖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이제 비가 오려고 한다"가 될 수 있다. (스키너는 요구'wanting'라는 보통의 개념을
"강화'reinforcement'"라는, 보다 과학적인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지만(p.429).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문화적 관습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스키너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근거는 그 관습들이 문화를 위해서 잔존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their survival value for the culture)이다(pp.430__6). 그러나 여기서조차도 그는
우리가 잔존을 하나의 기본적 가치로서 실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문화의 잔존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가 우리를 그렇게 조건화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p.433). 우리가 모든 물음들을 순수하게 과학적으로 해답하려는
이러한 의도에 명칭을 붙인다면, 아마도 "과학주의"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인간론
스키너는 인간 행동에 대한 경험적 연구만이 인간 본질에 관한 진정한 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는 여하한 형이상학적
이원론도 거부하고자 한다. 더구나 그에 따라, 욕망, 의도, 그리고 결단 등의 일상적
개념의 것이건, 이드, 에고, 초자아 등의 프로이트적인 가정이건 간에, 정신적 실체라는
관점에서 인간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이면 어떤 시도도 거부하였다(pp.29__30). 이러한
실체들이 관찰 불가능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해석상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 가령, 인간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행동에 원인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행동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p.31). 그 말은, 아편은 "수면 효과"가 있기 때문에 당신을 잠들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설명적이 못 된다. 물론, 스키너는 행동의 생리학적
전체 조건들(글자 그대로 내적 상태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생리학이 발전되어 이 조건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오더라도, 우리는 그래도 그 조건들의 원인을 환경으로 되돌아 가서 찾아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생리학을 무시하고 곧바로 행동의 환경적 원인들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p.35). 그러나 그는 유전적 요소들이 행동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종(species)들은 서로 아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너는 비전문가들이 행동에 대해 순전히
허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 "유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유전적 요소들은 실험자에 의해서 조작될 수가 없기 때문에 "실험적 분석"에 있어서는
가치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p.26).
이러한 입장은 왓슨의 행동주의에서 연유된 방법론적인 교시(precept)와 경험적 이론
양자가 다소 뒤범벅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뒤범벅 속에서 다른 요소들을
가려 내도록 해야 한다. 분명 스키너는 심리학을 행동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심리학이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찰 불가능한 실체들을
가정해도 좋은지 하는 문제는 해결해 주지 않는다. 물론 충동, 기억, 감정,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정신적 실체"들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검증될 수만
있다면, 여러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정신적 실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일인데도, 스키너는 훨씬 더 엄격한 방법론을 채택하여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한 모든 언급을 거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보다
더욱 "과학적"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 과학은 종종 자장이라든가
역학적인 힘, 그리고 원자보다 작은 입자와 같은 관찰할 수 없는 이론적 실체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논리 실증 철학의 전성기에는, 그러한 가정이 진짜로 적절한
절차인지 하는 것이 의심되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불허한다는 것은 과학적 방법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관찰 불가능한 이론적 실체들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 관찰에 의해서 반증이 가능하다면, 그 실체들에 대해서는 타당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스키너가 행동의 내부적인 정신적 원인들을, 단지 관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필자는 그러한 태도를, 전혀 불필요할 정도의 제한적인
방법론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말하는 "개념적인" 내적 원인들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p.31). 말하자면 그 원인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해석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는 이러한 개념적 내적 원인들이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가 되지
못하고, 왜 단지 그 행동 내용만의 되풀이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해 주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이러한 것이 사실로서 드러난다고 생각되는 몇몇 예만 들었을
뿐이다. 행동 B와 내적 상태 S가 있을 때, 내적 상태 S가 행동 B의 진정한 설명이
되려면, 확실히 우리는 행동 B의 발생과는 별개인 내적 상태 S의 존재에 관한 어떤
증거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분명 이러한 조건은 가끔 만족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스키너 자신의 보기에서), 우리는 누군가가 실제로 먹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배가 고프다고 할 좋은 증거를 가질 수 있다. 즉 만일 우리가, 그가
24시간 동안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또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배고프다고 말할 것이다!) 이 일련의 사실들이 두 가지의 진술, 즉 "그는 먹는다"와
"그는 배고프다"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꼭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
사람은 그가 먹고 있지 않을 때에 배고플 수 있고,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배고프지
않을 때도 먹을 수 있다. 스키너는 행동의 모든 개념적 원인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어떤 타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인으로서 생리학적 상태들을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상태들을 쉽게
관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상태들이 행동의 원인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설명이 될 수 없다(왓슨의 환경주의를 논하면서 우리가
언급했듯이). 스키너가 가정한 것은, 유기체 내부의 생리학적 상태들은 단지 그
유기체의 행동에 끼치는 그 환경(유기체의 과거와 현재)의 영향을 중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심리학은 환경의 영향을 직접 행동과 연결시켜 주는 법칙에 그
관심을 한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가정이 두 가지로 분리될 수 있다.
첫째는, 인간 행동은 어떤 종류의 과학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간 생활에서 생기는 이러저러한 일에 과학의 방법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행동이, 법칙에 지배되며, 또한 결정되어 진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한다"(pp.6, 447). 두
번째는, 이러한 법칙들이 환경적 요소들과 인간 행동 사이에 인과적 관계를 밝혀
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독립적 변수들'__행동의 원인들__은 외부적 조건들로서,
행동은 그 외부적 조건들과 함수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p.35).
이 두 개의 가정들은, 순수한 방법론적인 해석으로 볼 때,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 특히 환경을 행동과 연결시키는 법칙을 찾고자 하는 계획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만큼, 그 가정들에 대해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스키너는 또한 이 가정들을 인간 행동에 관한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가정들이 옳다고 생각할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가정들은 스키너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이 기초하고 있는 중요한 가정들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들은 왓슨의
환경주의를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온갖 인간 행동이, 만일
우리가 그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면, 인과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면, 거기에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결정하는 법칙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에서처럼, 여기에도 이와
같은 것을 가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 인과 법칙의 탐구는 과학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보편적 결정론은 과학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아니다. 따라서 만일
심리학이 특정한 사건들과 통계상의 규칙성을 단지 기록만 하는 데서 더 발전할 수가
없다면 좀 실망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지배하는 인과 법칙이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심리학이 발견하도록 맡겨 둬야 할 것이다. 모든 행동이 이러한 법칙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가정은, "형이상학적 가정"으로서, 스키너와 같은 엄격한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행동은 환경적 변수들이 하나의 함수라는, 보다 독특한 가정은 더한층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 말의 자세한 뜻은, 어떤 행동에도 일련의 한정된 환경
조건들(과거 혹은 현재의)이 있으므로 그러한 모든 조건들이 적용되는 사람은 누구나
그 행동을 행하게 되는 것이 인과적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당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어떤 아이라도 임의로 선택해서 그가 만들고자 하는 어떤 인간이라도 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왓슨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여기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부인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건강한 어린아이라도
훈련을 받으면 1마일을 4초에 뛰는 주자라든가, 핵 물리학자, 혹은 그 밖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완전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각기 따로 키워진 일란성 쌍생아에 있어서 그 둘의 능력 차이는 전체
인구에서 나타난 평균 능력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은 이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환경의 엄청난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은 상당한(some)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환경에 돌리려는 것은 스키너가
경험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내세운 또 하나의 가정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조건화의 특수한 기제__스키너는 이 기제에 의해서 환경이 행동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__에 대해 잠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의 이론은 파블로프와
왓슨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스키너가 심리학적 지식의 발전에 그 자신의
주요한 공헌을 이룬 것은 이 분야에서다. 파블로프 실험에서의 "고전적인"
조건화에서는, "강화 요인(reinforcer)"(먹이)은 박복적으로 "자극"(종소리)과 동시에
주어졌고, 그리고 "반응"(타액 분비)은 그 다음에 먹이 없이 종소리를 듣고 나타났다.
스키너의 "작동적(operant)" 조건화에서 주된 차이점은, 타액 분비 같은 반사적 반응이
아닌, 동물이 특정한 자극 없이 아주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어떤 행동이
조건화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쥐가 지레를 누르거나 비둘기가 머리를 어떤 높이
이상으로 쳐들 때에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쥐는 지레를 누르도록, 그리고 비둘기는
머리를 보통 때보다 좀 높이 쳐들도록 훈련시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행동에 강화 요인이 따르도록 환경이 조성될 때에는 (동물이 이처럼 환경에 의해서
작동하므로 "작동적"이라 불린다), 그 행동은 보다 자주 수행된다(pp.62__6). (이
원칙은 물론 모든 동물 훈련 작업이 의존하고 있는 일반 원칙이다). 방대한 양의 용의
주도한 실험 작업에서, 스키너와 그 추종자들은 조건화의 과정들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해 왔다. 예를 들어, 간헐적인 강화는 보다 큰 반응률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__그러므로 만일 쥐가 지렛대를 누르는 회수를 가능한 한 많게
하려면, 우리는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매번 주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키너의 실험 작업은 인상적이며, 그리고 공격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비판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은 그가 그와 같은 실험 작업을 일반적인
인간 행동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인간 행동'에서 그는 동물
실험(주로 쥐와 비둘기)으로부터 얻은 행동에 대한 지식을 대충 설명한 다음, 이런
개념들을 인간 개인과 제도들__정부와 종교와 정신 요법과 경제학과 교육에 적용시켜
나간다. 그러나 스키너의 쥐와 비둘기에 대한 발견들은 오직 그러한 종(species)
(그리고 아마도 그 종과 친족 관계의 종)에만 적용될 뿐이고 보다 복잡한 동물, 특히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는, 우리가 인간 행동이 그
본질에 있어서 동물의 행동과 다르다고 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옳게 지적하고
있지만(pp.38__9), 그의 전체적인 연구 태도는, 실험실 동물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인간에게도 (복잡성의 차이만 있을 뿐)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마찬가지로 정당하지
못한 가정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pp.205 이하).
스키너가 그의 이론을 인간 행동에 적용시킨 것 중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영역은
언어 행위이다. '언어 행위'에서 그는 모든 인간의 말은 말하는 사람들의 환경(이
환경은 물론 그들의 사회적 환경, 주위 사람들이 내는 잡음도 포함한다)에 의한
조건화에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는 영어 회화를 실제로 접하게 되고, 그 어린아이가 자신이 들었던 것을
마땅히 다시 정확하게 말하는 반응을 하게 될 때, 그 반응들은 "강화되고", 따라서
어린아이는 영어를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스키너는 또한 어른의 말도 화경(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언어적 자극도 포함한)으로부터의 자극들에 대한 일련의 반응으로서
분석한다.
스키너의 언어에 대한 설명에서 결정적인 결함은 촘스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촘스키의 저작은 지난 10년간 언어학과 심리학의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였다.
촘스키는, 스키너가 어떻게 언어가 학습되는가를 설명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로서의 하나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설명은
가치가 없다고 논의한다. 분명, 우리는 먼저 X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X를 배우는지를 거의 물어 볼 수가 없다. 즉, 우리는 누군가가 X를 배우는 데
성공했는지에 대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쥐들이 지렛대를 누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현상인 것이다. 스키너는 이 사실을 거의 부정할 수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이 차이점들은 단지 복잡성의 정도에 관한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인간 언어의 창조적이고 구조적인 특성들__우리
모두가 단지 우리 언어의 어휘와 문법 지식만으로 이전에 전혀 듣지 못했던 문장들을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__이 인간의 언어를, 그 어떤 알려진 동물의 행동과는 그
본질상 아주 다른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를 하등
동물들의 행동으로부터 이끌어 낸 용어로써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출발에서부터
실패로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분명하게 인간적인 다른 형태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스키너가, 언어 행위가 어떻게 학습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 착상도 매우 불안정한
유추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컨대,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어린아이가
정확한 언어를 말하도록 북돋아 주는 강화 요인이 좀체로 되지 못하고, 이보다는
어린아이가 회화를 통해서 들은 말을 재생할 때, 그를 두고 잘한다고 칭찬하는
사회적인 정이 더 강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에 의하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들었던 것을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심을 받게
되거나 혹은 심지어 그 재생에서 오는 만족스러운 기분 때문에 어떤 것을 단지
말하거나 해서, 우리가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의
관점이 순이론적이라는 것이다. 동물 실험에 한해서 엄격하게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는
"강화"와 같은 용어는 앞에서 말한 유추적인 인간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과학적 객관성을 전혀 보증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스키너의 자칭 그
엄격한 경험주의적 접근 방식은 경험에 입각치 않은 사색적 요소를 크게 은폐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촘스키에 의하면, 스키너의 이론들이 인간 언어에 적용될 때 실패하게 되는 중요한
또 하나의 면이 있다. 촘스키는, 언어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환경보다도 유전적인
요소, 즉 말하는 사람의 언어 습득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분명, 영국 아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중국 아이들은 중국어를 배우며, 따라서 환경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한편, 모든 정상적인 인간의 어린아이들은 인간의 언어들 중의 하나를 배우지만,
그들이 무한히 많은 복잡한 문장들을 문법의 규칙에 따라서 형성한다는 결정적인
점에서 다른 어떠한 동물도 인간의 언어를 닮은 그 어떤 것도 배우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의 습득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스키너는, 우리의 언어
학습은 오로지 우리의 인간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일련의 복잡한 강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촘스키는, 어린아이들이 그들이 들은 언어의 매우 한정되고 불완전한
실례들로부터 문법 규칙들을 배우는 놀라운 속도는 오직 인간에게만 이러한 규칙들에
따라서 언어를 처리(PROCESS)할 수 있는 생득적인(INNATE) 능력이 있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인간 언어들이
다양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표면을 떠나 그 심층 구조에 들어가면, 그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어떤 기본적인 체계적 구조가 있음에 틀림없으며,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이 구조를 배우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언어적 자극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 자극들을 이 구조와 관련해서 처리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매혹적인 가설은 증명된 일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스키너의 극단적인 환경론보다는 이 가설에 더 호의적이다.
말은 물론 유일한 인간 활동은 아니다. 그러나 말은 "고등 동물"인 인간의 정신
능력의 한 표본으로서 특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스키너의 이론들이 언어를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이론들이 어떠한 인간 행동을 설명한다 해도,
일반적으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진정한 해명을 줄 수 없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인간 행동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도 환경으로부터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생득적인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진단
스키너의 진단은 사르트르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롭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스키너는 우리가 결정되어 있으나
여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현 사회적 실천들이
이론적인 혼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환경이
행동을 결정하고 있는가를 점차 인식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우리는 일반 사람들의
잘못을 그 사람들이 성장해 온 환경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종종 순전히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p.8).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정한 과도기적 단계에
있으며, "현재의 불행한 세계의 조건은 대부분 우리의 이러한 정신적 동요에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는 일관된 관점을 채택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임에 거의 틀림없다"(p.9). "책임이라는
개념에 대한 철저한 수정이 요구된다"(p.24). 왜냐하면 형벌을 가한다 해도 그 벌이란
것이 행동을 통제하는 데 놀라울 만큼 비효과적이기 때문이다(p.342). 우리는 인간이
그들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환상을 포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싫든 좋든 간에 우리는 모두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p.438).
"불행한 세계 조건"이라는 이 진단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명백히 책임의
범위를 결정하는 데에는 중요한 실제적인 문제들이 있으며, 이 문제들은 자유라는
개념에 관한 깊은 이론적, 그리고 철학적 물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럼에도
스키너가 이 자유의 개념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적절치 못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최근의 책인 '자유와 존엄성을
넘어서'에서 스키너는 무생물들을 마치 사람들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들에게 인간의
속성인 사고와 의도를 부여하는 것이 물활론(animism)의 오류이듯이, 단순한 인간들을
특수한 인간들(people as people)로서 다루고, 욕구와 결단을 그들의 속성으로
부여하는 것도, 또한 오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불합리한
생각이다. 이 불합리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문제다. 보편적
결정론의 명제는 모든 사건은(모든 인간의 선택을 포함해서) 그에 앞선 충분한 일련의
원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진실이라고 해도(그리고 스키너는 우리가
이와 같은 명제를 믿게 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행동할 때, 행동을 하게 되는 원인들 가운데 그 사람의 선택이
포함되고 있다고 믿기에 어떠한 행동이라도 "자유로운" 것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행동이라는 개념은, 그런 행동이 원인을 전혀 갖지 않는다(임의로 행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선택의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이 그들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 비록 그 선택 자체가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다. 스키너 자신은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조건화의 형태보다는 개인적 선택에 의존하는 사회적 통제 방식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처방
마르크스처럼, 스키너는 인간의 환경이 인간적으로 형성될 수 있고 또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이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있게 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바람에
보다 적합한 인간적인 환경(ahuman product)을 가지기 위해서 사회적 환경을 신중히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p.427). 그는 심리학이 인간의 행동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한,
그리고 이로부터 인간 사회를 좋게 혹은 나쁘게 변화시키기 위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관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p.437). 만일에 우리가 개인적인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적절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행동을
조건화함으로써 보다 행복한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벌이라는
비효과적인 실천을 포기할 수 있고, 대신에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규범에 따른 것을
원하도록 만듦으로써 합법적으로 행동하게 유도할 수 있다(p.345). 이것은 반드시 선전
방법이나 어떤 감추어진 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적극적인
유도 행위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피통치자의 복지를
진정으로 촉진하는 정부를 구상하고(p.443), 또한 아마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가치들"(스키너의 인용!)까지도 창조할 수 있게 된다(p.445).
통제가 서로 다른 개인들과 제도들 사이에서 다양화된다면, 전제주의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pp.440__6).
이 모호한 강령은 낙천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개인의 자유를 의기 양양하게
부인하고 있는 점에서는 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스키너가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소설 '월든투'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 책에서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병적으로 문화 예술에 탐닉하는 사이비 문화인으로 메워진 성인 교육 하기
강습회의 분위기와 플라토의 '국가론'의 정치 체계 (왜냐하면 처음부터 "올바른"
행동주의 원리에 의해서 모든 것을 조정해 놓은 공동체의 현명한 구상자가 있기
때문이다)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스키너의 유토피아는 플라토와 똑같은 이의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어떤 근거로 문화의 구상자들은 무엇이 만인에게 최선인
것이다라고 결정할 수 있는가? 전체주의를 막는 안전 장치에 대한 그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스키너는 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한(naive)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를
구상한다"든가 "인간다운 환경"과 같은 그의 용어 자체는, 그가 어떤 이상적인 사회와
개인을 산출하는 것이 사회 개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매우 문제시되는
가정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스키너와 대차적인 하나의 중요한 견해는, 사회
개혁의 목표는 순전히 소극적인 것__빈곤과 질병과 부정과 같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특별한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__이어야만 하고 어떤 청사진에 의해서 사람들을
조건화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이것은
칼포퍼가, 제3장에서 언급한 플라토 비판에서, "유토피아적인" 것과
"단편적인(piecemeal)" 사회 공학 사이에 지은 구별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는 신화이니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스키너의 판단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우리의 입장에 반대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곁따르게 되는데, 왜냐하면 조건화에 대한 스키너 식의 이론들에 기초하고
있는 행동 요법은 이미 어떤 곳에서는 신경학과 범죄학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혹은 "일탈된(deviant)" 행동의 경우,
어느 때(비록 가능하다 해도) 그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건화할 권리가 있게 되는 것인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 자체의 행동을
구별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원인들을 가진 어떤 사람에 대한 순수한 과학적인
연구 방식이, 통상적인 가정__이 통상적인 가정이란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그들의
의도적인 행동들에 책임이 있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__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심오한 문제들, 즉 실제적, 개념적,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있다. 스키너는 이 둘은 단순히 양립될 수 없는 것이며, 후자는 전자에 대해 굴복해야
한다고 가정한다(p.449). 그러나 이것은 한 특정한 심리학자에 의해서 취해진
독단적이고도 무비판적인 입장일 뿐이다. 이런 입장 때문에 우리가 실험
심리학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에 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찾지 못하게 된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리라.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B. F. Skinner, '과학과 인간 행동(Science and Human
Behaviour)'(Macmillan, New York, 1953; Free Press, 문고 New York, 1965)
Skinner의 유토피아 소설 'Walden Two'(Macmillan, New York, 1948)와 그의
'자유와 존엄성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Penguin, London, 1973;
Bantam Books 문고, New York, 1972)는 그의 이상적인 사회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수단들을 윤곽 짓고 있다.
Watson 이후의 실험 심리학의 발전을 개관하기 위해서는, D. E. Broadbent의
'행동(Behaviour)'(Methuen, London, 대학 문고본, 1961)을 볼 것. 이 책은 비전문가를
위해 씌어졌고, 제5장에 스키너의 저작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싣고 있다.
Chomsky의 스키너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판을 보려면, '언어(Language) 35,
1'(1959)지에 실렸고, Fodor와 Katz에 의해서 편집된 '언어의 구조(The Structure of
Language)'(Prentice__Hall__Englewood Cliffs, 1964)에 재수록된 서평을 볼 것. 그러나
이것은 좀 읽기 어렵다. 촘스키의 견해에 대한 좀더 나은 소개는 그의 '언어와
정신(Language and Mind)'(Harcourt Brace Jovanovich Inc., New York, 1972)의
증보판, 혹은 현대 거장 시리즈(Fontana, London, 1970; Viking, New York, 1970)에
들어 있는 J. Lyons가 촘스키에 대해서 쓴 책을 볼 것.
@ff
제9장 로렌쯔:타고난 공격성
우리는 인간 행동의 어떤 중요한 특성들은 경험에서 배워진 것이라기보다는
생득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했다고 스키너를 비판했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불행에 대하여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진단한 로렌쯔에게로 돌려보자.
로렌쯔는 동물 행동학(ethology)이라고 불리우는 생명 과학의 분과를 창시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동물 행동학이라는 용어는 성격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지만, 이제는 동물의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의미하는 데 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동물 행동학자가 역시 동물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를
주장하는 심리학자와 어떻게 다른지는 명확하게 구별해 주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차이가 없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두 개의 다른 접근 방식이 있어 왔고, 이 방식들은
겨우 이제 와서야 서로의 입장을 다소 이해하는 자세(rapprochment)를 갖게 되었다.
왓슨이나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자들은 의식보다는 행동을 연구한다는 방법론뿐만
아니라, 어떤 광범한 경험주의적 이론들__행동은 거의 전적으로, 조건화 메커니즘에
의해서 중재되는 환경적인 영향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__을 고수하였음을 우리는
보았다. 따라서 그들의 실험은 어떻게 환경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세부적인 것들을 연구해 왔다. 금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에 와서, 초기의 동물
행동학자들은 동물 행동 패턴들 중의 아주 다수(전통적으로 "본능적인"것이라고
불리워져 온 것들)가 행동주의적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행동들에서 특이한 것은 그 행동들이 고정되어(fixed) 있으며, 환경이
실험적으로 아무리 심하게 조작되더라도 환경에 의해서 제거되거나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 행동학자들은 이러한 고정된 "본능적" 행동 패턴들에 관심을
집중하였고, 동물의 "자연적인" 행동을, 실험을 하기 위해 간섭하기 이전에, 야생
그대로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동물 행동학의 특수한 강조점은 동물 행동의 가장 중요한 양상들 가운데
몇 가지 행동은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반 행동주의적 가정에서부터 나오게 된다.
이러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물 행동학자들은 개개의 동물의 과거의 경험에
특별히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이 그 종(that species)에까지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연구한다. 한 종에 있어서 어떤 본능적 행동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행동이 그 종을 위한 어떤 잔존 가치(survival value)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물 행동학은 일반적인 심리학보다는 직접적으로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본질에 관한 현대의 동물 행동학적 이론들은 인간의 현재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진화적 과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화론의 요점들을 간단히 검토해 볼 만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어떤
타당한 이론도 이 진화론을 여하한 경우에도 무시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한 조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갈라져 나온 종의 진화 이론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종의 기원'(1859)은 과학적이며 통속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로
하여금 이 이론의 진리를 확신하게 만든 고전이다. 그 본 제목은 '자연 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혹은 생존 경쟁에 있어서의 적자 보존'으로서, 이 책의 주요 사상을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은 교육받은 일반 대중을 위해서 씌어졌고, 그 전
20년간에 다윈이 그의 연구로부터 축적한 방대한 증거 자료를 가지고 그 요지를
논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그것이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__인간도 또한 동물
조상들로부터 내려왔다는 것__을 드러내서 진술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분명한
암시는 그 당시의 몇몇 신학자들과의 유명한 논쟁을 야기했다. 후기의 책들인 '인간의
유래'(1871)와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의 감정 표현'(1872)에서 다윈은 그의 이론들을
명백하게 인간에 적용시켰다.(후자의 제목이 어떻게 동물 행동학적 주제를
암시하는가를 주목할 것.)
다윈의 이론은 네 가지의 진정한 경험적 명제에서 논리적으로 연역해 낸 것이다.
처음 두 개는 유전학의 문제에 관계한다__즉, 부모의 특성들은 대체로 그 자손에
옮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일정한 종의 개체간에는 상당한 변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명제의 진실성은 폭 넓고 다양한 관찰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고의적으로
서로 다양한 가축을 기를 때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적인 설명은 다윈의 시대
이후 멘델의 유전자론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다.("돌연 변이" '유전자에 있어서의
우연적인 변화'와 유효 유전자의 수, 그리고 그들의 상호 작용 패턴이 두 번째 명제에
진술된 변이를 설명해 준다.) 다윈의 논의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명제는 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반면, 환경 자원은 그러한 비율을 유지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사실들로부터, 비례적으로 지극히 적은 수의 씨앗과 알과
그리고 새끼들만이 성숙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난다. 요약하면, 생존을 위한 경쟁이
우선적으로 같은 종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경쟁과 그리고 하나의 종
내부의 변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가장 오래 사는 어떤 개체들(그들의 형질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는 것이다)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연역해
낼 수 있다. 그들은 자손을 남길 가장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첫번째
유전자가 주어지면, 우성 형질들은 전해 주려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열성 형질들은
소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리하여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동물 개체군(population)의
대표적인 형질들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질 연대 같은 광대한 기간과
환경의 광범한 다양성이 주어지면, 공통 조상들에게서 서로 다른 종이 서서히 진화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를 산출하는 데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연적인
돌연 변이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이에 대한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자연 도태의
압력이다. 생물학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획득" 형질들(개체별로 습득되어진
형질들)의 유전__라마르크가 가정 했었고, 다윈 자신도 그의 저작의 어디선가
가정했던__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런 매우 일반적인 논의를 떠나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많은 증거가 있다. 비교
해부학은 인간의 신체가 다른 척추 동물과 마찬가지의 일반 모형__제각기 다섯 개의
손(발)가락이 있는 사지 등__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간의 태아는 하등 동물과
비슷한 발달 단계를 거친다. 성인의 신체에는 이러한 하등 동물의 "자취"__예를 들면,
꼬리 흔적__가 있다. 우리 신체의 기초적인 화학적 성질__예로 소화, 혈액, 유전자__은
다른 포유 동물들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원숭이와 비슷하지만 지금 있는 어떤
원숭이보다도 인간과 닮은 동물의 화석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상이
동물이라는 것은 증거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진화의 세세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진화해 왔다는 것은
확립된 사실로서, 인간 본질에 관한 어떠한 진실된 이론이라 할지라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의 사실이 정확히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론 그 자체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논쟁거리다. 어떤 19세기의 성직자는 진화론은 창조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거기에서
아무런 실제적 모순을 발견하지 않는다.(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독특한 진화적 신화를
형성하기조차 했다.) 마르크스는 이 이론을 인간 역사의 진보적 발전에 관한 그의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으로서 환영하였다. (그는 '자본론'의 영역판을 다윈에게
헌정하고자 하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다윈은 그 영예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우익 정치가들은, 진화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경제 경쟁이 적자 생존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이며, 따라서 올바른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이러한 이론은
"사회적 다윈주의"라고 불리웠다.) 우리 시대의 몇몇 인기 있는 책들이, 우리가 원숭이
같은 조상들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밝혀 주는 열쇠라는
생각을 써먹었다. 즉, 로버트 아드리가 '속지 명령'에서, 데스몬드 모리스가 '벌거벗은
원숭이'에서, 그리고 아더 쾨스틀러가 '기계 속의 유령'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들의 주요 원천 중의 하나는 로렌쯔의 저서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독자들이 이러한 최근의 인기 있는 작품들을 공감적인 그러나 회의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프로이트와 같이, 콘라드 로렌쯔는 비엔나의 과학적__문화적인 전통의 산물로서
인류를 위해 깊은 의미가 있는 새로운 과학 연구 분야를 창시하였다. 동물 행동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에서 그는 많은 종에 대한 매우 광범하고 주의 깊은 관찰 결과들을
해석했고, 그가 도입한 개념들 중 얼마간은 현대의 생태학계에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도 썼는데, '솔로몬의 반지'(1950)나 '인간이
개와 만나다'(1954), 그리고 '공격에 대해서'(1963)에서 그는 품위와 유머와 매력적인
성품을 돋보이게 하고, 또한 인식론과 사회에 관한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식견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 두 책은 동물 행동학적 주제들을 대부분 그 자신이 기르고 있는
애완 동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적 묘사들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 세 번째
책은 공격적 행동에 집중하고 인간의 조건을 진단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므로, 필자의
페이지 참조는 이 책에 의할 것이다.(아메리칸 판을 위해서 이 장의 끝을 보라.)
우주론
로렌쯔는 생태 과학자이다. 따라서 그 이론의 바탕이 되는 가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자가 앞서 요약한 진화론이다. 어떤 특정한 기관(organ)이나 혹은 행동 패턴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기관이나 행동 패턴이 종을 위해서 어떤 잔존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그는 구명하고자 한다(pp.8__9). 동물 행동학자로서, 그는 모든 행동이
환경에 의해서 조건화 된다는 것을 거부하고(p.41), 본능적인 행동 패턴들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패턴들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본능적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어서 외부적인 자극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은 자발적으로 마치
동물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동기들에 의해서 추진된 것처럼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놈을 빼앗긴 숫비둘기는 박제된 비둘기나 헝겊 조각, 혹은 새장의 비어 있는 구석을
향해서까지도 구애하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p.42). 그리고 파리를 잡아 본 적도 없고
다른 어떤 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집에서 기른 찌르레기는 파리가 없을
때에도 파리를 잡는 동작을 하는 것이다(p.43). 로렌쯔는 "유전적 조정(hereditary
co-ordinations)" 혹은 "본능적 운동"인 이러한 동물 행동 패턴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 패턴들은 학습된 것이기보다는 생득적인 것이며, 그 패턴
하나하나에는 그 행동을 자발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충동"이 있다(p.74). 그러나 그는
또한 약간 모호하게, 그리고 한 가정으로서 이러한 고정된 행동 패턴들은 네 가지
"중요한 충동들"__먹이, 생식, 탈출, 그리고 공격__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에
좌우된다고 제시한다(p.75). 그는 어떠한 행동도 보통,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충동이나
내부적 원인들에 의해 일어나며(pp.73, 84), 그리고 독립적 충동들 간의 갈등은, 마치
정치 체제 내부의 권력의 균형과 같이, 전체 유기체에 팽팽한 관계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80).
'공격에 대해서'에서, 로렌쯔는 동물의 공격적 행동을 조직적으로 기술하는 데
대부분 그의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는 이 공격적 행동이 주요 충동들 중의 하나에
의해서 추진된, 본능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먹이(짐승)에 대한 육식 동물의
공격이나, 육식 동물에 대한 먹이 짐승의 떼를 지은 습격, 혹은 궁지에 몰린 어떤
동물의 자기__방어와 같은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싸움과 위협에 관심을 갖고 있다(pp.18__22). 그리하여 종 안에서의 공격에 집중하면서
그는 그 종족__보존적 기능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고 몇 가지 해답을 내놓는다.
첫째로 공격은 그 종의 개체들을 적당한 영역에 고르게 분산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각자에게 충분한 먹이가 있도록 한다(pp.24__30). 산호초에서 각 물고기 종류는 그
자신의 독특한 먹이원이 있으며, 각 개체는 그의 "영역"을 다른 종의 고기들에게는
쉽게 용납하지만,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에게는 대항해서 지키고자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는, 한 종의 서로 경쟁자인 수컷들간의 공격은 제일 강한 개체가 자손을 남기며,
가족과 무리를 방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한다(p.31). 마지막으로, 공격은 하나의
동물 사회에서 "먹이 질서" 혹은 위계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에 이바지하는데, 이
질서는 가장 나이 먹고 가장 경험이 많은 동물들이 무리를 지도할 수 있고 그들이
배운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것이다(pp.35__7).
그러나 어떻게 같은 종의 구성원들 간의 공격이 분명히 잔존과는 모순되는 상해나
죽음에 이끄는 법 없이 이러한 잔존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놀라운 사실은,
육식 동물들간에 공격이 그렇게 널리 퍼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야생 동물들이 그들
자신의 종의 구성 개체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심하게 상처를 입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많은 공격적 행동들은 실제적인 육체적 싸움보다는 위협이나 추격의 형태를
취한다. 로렌쯔는, 진화는 싸움의 "의식화(ritualization)"를 낳았고, 따라서 실제로
상해를 일으키지 않고 위에 말한 이점들을 얻을 수 있다고 이론화하였다(pp.93__8).
특히 번식이나 사냥을 위해서 협동해야만 하는 중무장된 동물들에 있어서는 공격이
금지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p.110). 그러므로 전형적으로 약한 동물이 보다
강한 동물의 공격을 제지할 수 있는 일종의 유화적인 몸짓, 혹은 의식적(ritual)인 항목
같은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린 개들은 그들의 취약한 목덜미를 적의
이빨에 대주는 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금지 메커니즘을 작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자는 자제하여 치명적으로 물지는 않고(pp.113__14), 단지
인정받은 승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인간론
로렌쯔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된 동물의 하나로 본다. 우리의 실체와 그
생리가 현저하게 다른 동물들과의 연속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로렌쯔는 우리의
행동 양태들도 기본적으로는 동물과 유사한 것이라고 예견한다. 우리 자신을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 의지의 이름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하나의 환상이다. 우리의 행동은 모든 동물의 행동과 똑같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고 있으며(pp.190__2, 204, 214),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한 사태는
우리에게 나쁘게만 되어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타의 동물 세계와 정도에 있어서
다르며, 우리는 진화에 의해서 이만큼까지 오게 된 "지상 최고의" 성취
결과이다(p.196). 우리의 행동을 원인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존엄성(dignity)" 혹은 "가치(value)"를 폐기하는 것은 아니며, 한편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차츰
증가됨에 따라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증가되기 때문이다(pp.196__202).
로렌쯔는 이러한 철학적 물음들을 아주 깊이까지 진전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스키너보다는 그 문제들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로렌쯔의 견해에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다른 많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족을 향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생득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이 사실만이, 왜 갈등과 전쟁이 인간 역사를 통해
일어나고 있으며, 이성적인 존재들이 왜 끊임없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가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p.203__4). 그는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 이론도 인간
본질에 관한 동일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한다(p.209). 로렌쯔는 우리의
생득적 공격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유별난 집단적인 공격성(왜냐하면 대부분의
파괴적 싸움은 개인간이 아니라 집단간에 있기 때문이다)에 대해서 진화론적인 설명을
하려 한다. 그는 우리 조상들의 어떤 진화 단계에서, 그들이 인간 외적인 환경의
위험을 다소 극복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요한 위험은 다른 인간의 무리로부터 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웃한 적대적 종족들간의 경쟁은 자연 도태에 있어
주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따라서 "전사의 용맹(warrior virtue)"에 잔존 가치가 있게
되었다(p.209). '자연 도태는 종뿐만 아니라 문화의 진화도 결정할 수 있다(p.224)'. 선사
시대일 것이라고 가정되는 이 단계에서는, 다른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서 가장 잘 뭉친
무리들이 가장 오래 잔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의해서 로렌쯔는 인간
무리가 흥분하여 공격적이 되고 모든 이성과 도덕적 절제를 잃게 되는, 말하자면 그가
"호전적 열광(militant enthusiasm)"이라고 일컫는 그런 경향을 왜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pp.231__5). 이 호전적 열광은 우리의 선사 시대의 조상들의 집단적 방어
본능으로부터 진화해 온 것이다(p.232).
진단
"인간의 개념적 사고와 그것의 표출인 언어는 인간성을 위협하는 큰 위험들을
직접적으로 초래한다"(pp.204__5). 그러므로 개념적인 사고와 언어 행위가 우리의
타고난 능력 중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축복이긴 하되, 매우 착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육체적으로 매우 약한 잡식 동물인 것이다. 그는
큰 발톱, 부리, 혹은 이빨 따위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서로 무기 없이 싸워 상대방을
죽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인원(ape__men)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은 그것을 멈추게 할 만큼 센 억제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화적
요구가 없었던 것이다. 중무장된 육식 동물들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나(p.207), 다른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왜 비둘기__바로 평화의
상징인__가 같은 새장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는 다른 비둘기를 억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죽도록 쪼아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솔로몬 왕의 반지', p.184를 보라.)
그러나 문화의 발달,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우리는 손에 인위적인
무기들__선사 시대의 조상들의 막대기와 돌에서부터 역사 시대의 활과 칼을 거쳐
오늘날의 총알과 폭탄에 이르기까지__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죽일 수 있는 잠재
능력과 억제 사이의 균형은 깨어지게 된 것이다(p.207). 이리하여 로렌쯔는 어떻게
인간이 바로 자기의 종을 대량 살육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일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인간의 갈등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도덕적 책임감에 호소하는 것은 아다시피
대단히 비효과적인 것이었다. 로렌쯔는 이 사실을, 공격성은 우리들 내부에 생득적인
것이라는 그의 이론으로써 설명한다. 이 공격성은 프로이트적인 이드 안에 있는
본능과 같이 여하한 방식으로든 배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이성은 혼자서는 무력하며,
단지 어떤 결정된 목표에 이르게 하는 수단을 딴 방식으로 고안해 낼 수 있을 뿐이고,
어떤 본능적인 동기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을 때만이 우리의 행동에 대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p.213). 그러므로, 프로이트와 같이 로렌쯔는 진화에 의해서
우리에게 뿌리 박힌 본능들과 문명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억제 사이의 갈등을 본다.
그는 선사 시대 인간 집단에 있어서는 종족 내에서의 공격을 처벌하는 원시 도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pp.215__16). 왜냐하면 내부에서의 싸움이 일어난
어떠한 종족도, 다른 종족과의 경쟁에서 곧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의 압력들은 다른 종족에 대한 공격 본능을 낳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기 제작
기술은 그 무기를 서서히 사용하는 데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본능을 훨씬
앞지르게 되고,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과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자발성(willingness), 이 양자를 지닌 채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처방
만일 공격성이 정말로 우리의 내부에 있는 본유적인 것이라면, 인류에게 희망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이성과 도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음을 보아 왔고, 만일 우리가 공격을 유발시키는 모든 자극들을
근절시키고자 한다 해도, 내부의 충동은 여전히 배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의도적인 우생학적 인간 재생산 계획을 통해 그 본능을
개량해서 없애고자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로렌쯔는 우리가 공격 충동이 전체로서의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얼마만큼 본질적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권장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p.239). 만일 우리가 공격성을 근절시킨다면 우리는 동시에
인간이 성취한 많은 고도의 문명들을 멸망시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렌쯔는 마지막 장에서 낙관주의를 공언하고, "이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도태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할 것임"을 믿고 있다(p.258).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공격의 자연적 원인들을 좀더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방향을 좀더
수정하는 이성적 단계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각(자기__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이다.(이것은 프로이트와 사르트르와 소크라테스의 또 하나의 반향이다!) 그
다음은 승화, 즉 공격 방향의 대상을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교체하는 일이다(p.240).
우리는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싼 도자기를 때려 부술 수도 있고, 집단간의 경쟁을
팀 게임으로 유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간의 불신을, 서로 다른 민족과 다른
계급과 다른 문화와 다른 당파에 속하는 개인들끼리의 인격적인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불식시켜야 한다(pp.243__4). 그리고 우리는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랄 수 있는
커다란 목적들__예술과 과학과 의학__에 우리의 정열을 돌리도록 수정해야만
한다(pp.244__9). 마지막으로, 로렌쯔는 우정을 촉진하며, 기만을 부수고, 이성적 통제를
벗어나지 않고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인간의 유머 감각에 커다란 신뢰를 보야 준다.
그러므로 유머와 지식은 문명에 있어서의 두 커다란 희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미래의 세계에는 우리의 공격 충동들이 그 본질적인 가능의 훼손 없이 적정 수준까지
감소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있다.(pp.257__8).
비판적 논의
로렌쯔의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로이트의 통찰력과 스키너의
과학적 엄격성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과
인간 진단에 관해서 중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동물 행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로렌쯔의 세부적인 이론들을 논의할 만한 자격이 없다.
그의 어떤 종에 관한 사실적 주장들 중 얼마간은__예를 들어 쥐의 "참혹한 대량 전쟁"
같은 것(pp.xi, 139)__논박되었다. 여기서 물론 우리는 확증된 사실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도 논의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능
혹은 내적 충동을 가정하는 그의 방법론이다. 우리는 이것이 프로이트의 이론들 중
가장 취약한 부분임을 발견했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스키너와도 동의할 수 없었다. 로렌쯔는 이 양극단 가운데서 옳은 중도의 길을 찾아낸
것인가?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충동과 본능에 대한 개념의 적용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종에 있어서의 특수한 고정된
행동 패턴__찌르레기가 파리를 잡는 행동 같은 것__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충동을
가정했을 때는, 그 가설에 대한 명확한 검증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정한
행동 패턴이 생득적임을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에 속하는 적당한
나이와 성별의 보통 개체들 모두가 다른 개체에게서나 혹은 시행 착오에서 미리
배우지 않고도 그 일정한 행동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또한 우리가, 보통 행동을 일으키는 자극이 항상 같은 효과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짝을 짓는 행동은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을 알고 또한 행동은
때때로 보통 때보다도 작은 자극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새장 구석을 향해
구애하는 혼자된 비둘기처럼)을 알아 냈을 때, 거기에는 그 강도에 따라 변화하는 어떤
내적인 충동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고정된 행동 패턴에는 다양성 있는 충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로렌쯔의 방법론에 있어서 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이러한
"작은 세부적 충동들"은 종종 "네 개의 주요 충동(먹이, 생식, 탈출, 그리고 공격)"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들에 좌우된다는 견해이다(pp.74__6). 그는, "자기__견제
기능(self__contained function)"은 단 한 개의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p.73),
공격은 충동적인 힘 중의 하나로서 이 충동적인 힘들은, 공격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겉으로는, 공격과는 반대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 패턴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p.35). 겉으로 보아서 이런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행동을 공격에다
귀속시키도록 하여, 이러한 귀속은 검증할 수도 없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돌려 버릴 수
있게끔 한다. (이것은 정확히 프로이트의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__이 반동
형성에 의해서 내부적 성향이 그 반대되는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__과 유사하다.)
기본적인 충동들과 그 충동들의 혼합, 그리고 충동들의 서로 다른 행동으로의
전환들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를 검증하는 방식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검증
가능성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러한 이론화는 과학적이 못 된다. 그리고 그 검증이
확증을 주지 않는 한, 그것이 옳다고 뒷받침해 줄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반 이론에 관한 이러한 방법론적인 물음을 떠나서, 로렌쯔가 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논의한 방식에도 상당한 의문이 어절 수 없이 따른다. (이것은 또한
스키너의 주요 결함이다.) '공격에 대해서'에서 로렌쯔는 그의 대부분의 실패들을
물고기와 새들, 그리고 포유 동물 약간에서 얻어 왔으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족인
큰 원숭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추에 의해서, 물고기와 새들이
선천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인간 행동도 마찬가지 기본 법칙에 종속된다고 논의하고자
한다(p.204). 이 유추는 분명히 약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가
최근의 연구가인 제인 반 라윅 구달처럼 (그녀의 '인간의 그림자 속에서'를 볼 것),
침팬지와 고릴라에 대해 세밀한 연구를 했다면, 그의 이론은 좀더 튼튼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보다 가까운 친족인 침팬지와 고릴라에 대한 증거조차도,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밝혀 주기에는__모리스 같은 인기 작가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믿게 하려고 하지만__매우 부족하다. 왜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차이점도
그 유사점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X가 Y에서
진화했다는 주장은 X가 Y라든가 혹은 Y에 불과하다든가 혹은 본질적으로 Y다라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역 분쟁(가령, 울스터에서 있은)이
유인원(ape__men)종족들의 지역적 방어 메커니즘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 해도, 이것이 여전히 전자가 후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어떻든 간에, 적대적인 종족들간의 경쟁이 이러이러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로렌쯔의 가설과 같은, 선사 시대의 인간의 행동에 관한 어떠한 이론들도 매우
사변적이며, 그 이론들에 부합 혹은 반대되는 증거를 우리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로렌쯔 이론의 결정적인 면__즉, 타고난 공격성에
관한 사상__에서도 이러한 의문들이 제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로부터의 유추가
이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서 인간 행동을 직접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는, 로렌쯔는 인류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닌
여타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이다. 우리는 그의 사변적인 이론 말고 사실들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학자들은 공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뚜렷한 몇몇 사회들을
기술하여 왔다.('인간과 공격'에 있는 논문들 몇 가지를 볼 것.) 이 사실은 공격성이
선천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습득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리라.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폭력이 다소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 같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산 계급의 경제적 쟁투는 노동자 계급의 패싸움과 꼭 마찬가지로
"공격적"임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용어는 폭력이나 그
위협 이상의 것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용어의 보다 명확한 규정은 더
깊은 탐구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그 탐구는 적어도 생태학적인 것만큼은
사회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로렌쯔의 인간 이론을 그의 동물 관찰로부터의
사변적인 일반화로써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 이론은 우리에게 인간
본질의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영역을 가리켜 주고 있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공격에 대해서(On Aggression)', Marjorie Latzke역(Methuen, London,
대학 문본, 1966), Marjorie K. Wilson역(Bantam Books 문고, New York).
로렌쯔의 '동물과 인간 행동의 연구(Studies in Animal and Human
Behaviour)'(Methuen, London, 1970과 1971; Harvard 대학 출판부, Cambridge, Mass.,
1970과 1971) 두 권은 그의 동물 행동학 연구와 그 기저에 있는 과학 철학에 관해
더욱 세부적인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책보다 더 기술적이긴 하지만, 이 책들은
과학이나 동물 행동학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로렌쯔와 다른 동물 행동학 저술가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M. F. Ashley Mantagu
편집의 '인간과 공격(Man and Aggression)'(Oxford 대학 출판부, Galaxy Books 문고,
New York, 2nd edn., 1973)을 볼 것.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펠리칸 고전(Pelican Classics 1968)과 Mentor 문고로
재출판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New American Library, New York)을 볼 것.
이 장의 페이지 참조는 '공격에 대해서(Pn Aggression)'의 Methuen판에 따른다.
@ff
제10장 철학과 그 외
만일 독자가 이 책이 인간 본질에 관한 "진리"를 제시하는 것으로써 끝맺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실망할 것이다. 필자는 필자대로 내세울 만한, 스티븐슨 식의, 여덟
번째의 인간 본질에 관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전 책자는 이론과 문제와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연구의 영역들에 대한 소개였을 뿐이다.
필자가 일곱 가지의 이론들을 마치 진리에 대한 상을 타기 위한 경쟁자들인 것처럼
취급했다 해도, 그들이 모두 반드시 서로 모순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한 특정한
이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혹은 사사로운 개인적인 입장에 얽매어 있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아마도 그 이론들이 인간에 대한 총체적 진리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판적 논의들에서 주목했던 각 이론의
개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곱 가지의 이론 각각은 우리들 자신을 그리고
세계에 있어서의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각
이론은 인간 본질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영속적으로 변화시켜 왔으며 틀림없이 그
영향을 계속 미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여기서 다른 일곱 가지보다 더 많은
이론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다양한 이론들을, 서로를 상쇄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그 이론들 사이에는 미세하나 주요한
불일치가 있다. 필자가 이해한 것으로서, 풀리지 않은 다섯 개의 주요 문제들이 우리의
논의에서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인간 본질에 있어 어느 정도가 선천적이며, 또 어느
정도가 사회 환경으로부터 학습된 것인가 하는 일반적 물음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즉, 생태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유전과 환경, 자연과
교육, 개인과 사회, 본능적인 것과 조건화된 것,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바꿀 수 없는
것과, 문화 관련적이고 변화__개혁되기 쉬운 것과 같은 대조가 가능하다. 얼마간은
선천적이고 또 얼마간은 학습된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어느
것이 그리고 얼마만큼 그러한가이다. 플라토와 마르크스와 스키너는 사회적 조건화의
범위와 사회적 구조와 관행들을 변화시킴으로써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강조한다. 기독교와 프로이트, 그리고 로렌쯔는 인간의 선천적인 보편적 본질에
있어서의 그러한 변화의 한계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해답이 요구될 수 있는 문제들은
주로 경험적인 것이며, 따라서 심리학과 동물 행동학과 사회학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네 개의 큰 문제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철학적인 문제다. 그것들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사실들이 상당히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된 사실들
때문에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손치더라도, 사실들을 관찰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만으로 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은 개념의
논리적 분석을 요구하는 문제들이다. 즉, 우리는 그 문제들 자체가 명확하게 이해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해답하기 위한 증거를 찾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는 용어들 자체와 그리고 그 문제들이 의거하고 있는
가정들을 검토하고 십중팔구는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대체로 그 결과는 긍정이나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아마도 몇 개의 물음으로 나누면서 그 문제들을 고쳐
말하는 것(rephrasing)이 될 것이다. 그 물음 중 어떤 것은 잘못된 가정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 인식된 것으로 무시될 것이며, 또 어떤 것은 순전히 경험적인
물음들이기 때문에 그 검토를 위해 어떤 유의 과학에다 인계해야만 할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그 이상의 철학적 논법을 요구하는 당혹스러운 문제들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분석이 철학에 있어서의 발전의 본질이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분리된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논리적 분석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철학적
분석의 영원한 문제거리가 되는 어떤 문제들 혹은 문제의 영역들이 있으며, 다음의 네
가지는 가장 중요한 것들에 속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에 반하는 결정론의 문제는 이 책의 여러 지점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났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스키너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으며 보통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기초의 영향을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우리
자신의 정신 속에 있으나 우리로부터 감추어진 요소들의 영향을 제시하고 있다.
스키너는 우리가 모두 우리의 과거나 현재의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조건지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이론가들은 인간의 선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기껏해야 그들은 우리의 선택들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을 요소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기독교와 사르트르는 우리의 선택이
우리에게 있어서 결정되어진 것이 아니며, 그리고 이 점이 우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데에서 일치한다. 즉, 우리의 태도와 가치와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인간답게 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들 사이에는
진정한 충돌이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만일 있다면, 우리는 어느 것이 옳은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들은 자유 의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의
시작이다. 이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는 것은 행동, 선택, 자유, 인과 관계, 필연성 등의
개념들을 주의 깊게 분석하는 일을 내포한다.
다음으로 이원론에 반대하는 유물론의 문제들이 있다. 인간은 물질로만 만들어진
것인가, 혹은 의식은 결국 필연적으로 비물질적인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사후
생존이 가능한 것인가? 정신적 상태들(감정, 사상, 원망, 충동 등)과 뇌상태들(신경
생리학에 의해서 탐구된 전기적 혹은 화학적 작용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인가
혹은 단지 하나의 일련의 사태(events)의 두 가지 측면인가? 이 물음들은 이 책의
여러 단계에서 제기되었지만 논의되지는 않았었다. 플라토는 결정적으로 이원론자이고
스키너는 유물론자이지만, 다른 이론가들은 이쪽 저쪽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우리는
기독교가 사후 생존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인간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반드시
이원론적인 것은 아니며, 마르크스는 일반적인 세계관과, 그리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는 "유물론자"임에도, 육체에 대한 정신의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판단했었다. 사후의 삶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 문제는 자유
의지만큼은 즉각적인 현실과의 관계가 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순수 철학의 중심 문제들 중의 하나이며, 끊임없이 논의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철학의 또 하나의 중심 문제는 도덕적 가치들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플라토는
형상에 관한 그의 이론에서 그 가치들의 객관성을 주장했다. 스키너는 종의
잔존아라는 면을 제외하면, 그 가치들에 대한 아무런 기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도덕적 가치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로렌쯔는 그 가치들을 사회의 다양한 압력의 탓으로
돌리며, 사르트르는 우리가 그것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견들은 근본적인
것이며, 이 이견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주로 철학적인 것이다. 이들은 도덕 철학의
특수한 관심사이다.
이제 위대한 도덕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인간 이해에 주의를 돌려야 할 자리인 것
같다. 아리스트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문',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원론',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에서 그리고 현대의 그
후계자들에게서, 우리는 인간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에 기초한 윤리적 견해들을
발견한다(흄의 3권째 논문 제목이 명시하듯이). 그리고 이러한 윤리 체계의 철학적
기초들은 여러 가지 방식에 있어서 다르지만, 아마도 우리는 공통되는 몇몇 특징들을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들은 진정한 삶을 위한 처방들을,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어떤 일반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__즉, 사람은 고통을
피하고자 원하며, 음식과 주거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필요로 하며, 삶에 있어서
목적을 발견하기를 원하고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방면의 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__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술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어떤 초월적인 가설들__플라토적인 형상이건,
기독교적인 신이건__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것들은
포이에르바하나 니체나 버트란드 러셀의 공격적인 반종교적 자세와 다르게 종교적인
물음들에 대해 개방되어 있는 "휴머니즘적" 윤리학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논의에서 제기되는 네 번째 주요한 철학적 문제들의 영역은 물론 신의
존재에 관한 것이며, 종교와 종교적 신념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문제들이다. 종교적
주장의 가치 평가는 철학의 중심이 되고 기본적인 문제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__즉, 의미와 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들__과 연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인간 본질에 대한 경험 과학은 많은 것을 기여한다.
논의는 풍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이론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물리 과학이나 사회 과학에만 해당되는 주제가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과학과
전통적으로 "인문학(the humanties)"이라는 것과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할 만큼
포괄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급한 사회적 문제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더욱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전보다도 더욱더, 인류의 본연의 연구
대상은 바로 인간이라는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심리학과 사회학의 소개를 위해서는 다음을 볼 것.
G. A. Miller의 '심리학:정신 생활의 과학(Psychology: The Science of Mental
Life)'(Penguin, London, 1966; 2nd edn. by G. A. Miller and R. Buckhout, Harper &
Row, New York, 1973.)
P. Worsley외 '사회학 입문(Introducing Sociology)'(Penguin, London, 1970)
자유와 결정론, 그리고 정신__육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을 볼 것.
Bernard Berofsky(편자) '자유 의지와 결정론(Free Will and Determinism)'(Harper
and Row, New York, 1966)
Antony Flew(편자) '신체, 정신, 즉음(Body, Mind and Death)'(Macmillan, New
York, 1964)
도덕 철학에 관한 역사적 소개로서는, Alasdair MacIntyre의 '윤리학 소사(A Short
History of Ethics)'(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67; Macmillan 문고, New
York)를 볼 것.
종교(제 4장에서 추천된 책 말고도)에 관해서는 다음을 볼 것.
I. G. Barbour의 '과학과 종교의 제 문제(Issues in Science and Religion)'(S.C.M.
Press, London, 1966; Harper & Row Torchbook 문고, New York, 1971). 이 책은
물리 과학과 사회 과학들, 그리고 사실상 철학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모든 문제와
종교와의 관련을 소개하면서 개관하고 있다.
철학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소개로서는 다음을 보라.
Antony Flew의 '서양 철학 입문(An Introduction to Western Philosophy)'(Thames
& Hudson, London, 1971; Bobbs__Merrill 문고, Indianapolis, Ind., 1971). 이 책은 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함께 철학의 고전들을 발췌해 놓은 것이다.
@ff
옮긴이의 말
이 번역서는 Leslie Stevenson의 저서 Seven Theories of Human Nature (London:
Oxford Univ Press, 1974)를 옮긴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는 가운데 적잖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것은 이 책이 한 가지 특정 학문 분야에만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이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말로 아직
정착화 되지 않은 전문적인 용어들을 애써 다듬어 보고자 했지만 무리한 번역도
있으리라 본다.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옮긴 것인지 다소 불안하다. 텍스트에 가능한 한
충실하려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지만, 번역은 "창조적 반역"이라는 에스까르피의 말도
실감했다.
이 글을 옮기는 데 함께 고생했던 영문학도 정인숙__홍성주__이경덕 양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1981년 2월 9일
임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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