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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 죤 스토트

by 이덕휴-dhleepaul 2021. 1. 5.

그리스도의 십자가 - 죤 스토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한다.특히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에 대해서....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이제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부활절의 관습적이 설교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것 역시 매우 감성적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묵상하면 할수록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게 해 주며 세상적일 수밖에 없는 나의 내면의 한계를 뚫고 들어온다.

초라하고 처절한 십자가의 말씀이 각박하고 메마른 이 시대에 우리의 영을 뒤흔드는 능력이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십자가의 의미에 전율을 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십자가의 복음은 아직도 능력있게 우리의 내면에 역사를 하고 있다.

내가 사역을 하면서 붙잡아야 할 것은 뛰어난 설교의 기술도 아니요, 많은 세상적 상식도 아니며,

좋은 인간관계도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복음임을 느낀다.

 

사역을 하면서 말씀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는 그 때.....

사역에 지쳐서 그 분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려 한다.지루하지만 한 장, 한 장.....

내 영혼을 깨우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을...

 

1장 십자가의 중심성

 

기독교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가지고 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여기는 기독교에서의 십자가의 의미가 고대 세계에서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이방인을 위해 고안해 낸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극도로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들에게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십자가의 형벌을 행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당했다는 것은 그 분이 로마인들에게 멸시받는 이방인이었으며 그의 사역이 극악무도한 범죄로 비쳐졌다는 의미이다.

 

유대에서 역시 범죄자를 나무에 달려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죽음이었다.(신21:3)

 

결국 로마의 관점에서나 유대의 관점에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십자가를 통한 복음은 냉소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단순히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가 전적으로 십자자의 사역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사도들 역시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일부러 작정했다고 말하고 있다.(고전2:1-2)

 

과연 십자가가 어떤 의미가 있기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그 십자가를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질문에 대한 답을 이책의 줄거리로 삼고있다.

십자가를 배척한 것은 고대인뿐만 아니었다. 이슬람교는 중요한 선지자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십자가의 교리를 거부한다. 또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연약함을 악으로 보고 십자가의 연약함 때문에 기독교를 거부했다. 저자는 이 장을 마치면서 그들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소홀히 여기지나 배척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것을 기억하노라면, 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의식이 납덩이처럼 나를 누른다. 나는 그 십자가를 내 심장 위에 입고 다녔어야 했다. 그 귀한 상징, 그것을 지니고 다니면서 결코 손아귀에서 빼앗기지 말아야 했다. 내가 넘어지더라도, 그것만은 높이 쳐들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숭배자, 나의 제복, 나의 언어, 나의 생명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했다.(P63)"

 

2장 그리스도는 왜 죽었는가?

 

저자는 2장에서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는지를 성경을 통해 자세히 말하고 있다. 첫째는 빌라도의 비겁함에 의해서, 둘째는 제사장의 시기에 의해서, 셋째는 가룟 유다의 탐욕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그 분의 단순히 외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가셨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중에 바로 내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빌라도와 같은 비겁함이, 제사장과 같은 시기가, 가룟 유다와 같은 탐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말한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며 책임을 부인해도, 가룟 유다처럼 은을 성전에 던지면서 자신의 과오를 부정하려해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부인할 수도 부인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기' 때문이다(히6:6). 우리 역시 유다처럼 우리의 탐욕을 인하여, 제사장들처럼 우리의 시기를 인하여, 빌라도처럼 우리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십자가에 목 박힐 때"라고 오래된 흑인 영가는 묻고 있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고 대답해야 한다. 단순히 구경꾼으로 거기에 있던 것이 아니라 음모를 품고, 계획을 세우고, 배반하고, 흥정하고, 넘겨주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그 모든 일에 참여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빌라도의 시도가 헛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도도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행해진 어떤 것으로(우리를 신앙과 경배로 이끄는) 볼 수 있기에 앞서서 십자가를 우리에 의하여 행해진 어떤 것으로(우리를 인도하는)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의 죄책이 자기 몫을 담담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은혜의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있다"고 캐논 피터 그린은 섰다.(P82)

 

3장 심층적 진리

 

3장에서 저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한다. 앞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대속적인 의미를 정의한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련된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한다.

 

1.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저자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것을 세 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중심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통하여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묵상할 것을 당부하셨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새 언약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구약에서는 언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피는 대부분 짐승, 특히 어린양의 피로 대신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어린양이 되어 피를 흘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 계약을 갱신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의미보다 저자가 더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 번째의 의미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각자가 개인적으로 전유해야 할 필요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저자는 당시의 예수님의 심경을 성경에 나와 있는 단어를 통해 묵상한다.(중요한 내용이기에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이 신성한 장면에 접근하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격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강한 단어들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앞에서 사용하신 두 번의 진술에 의하여 조금은 준비된 셈이다.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그 첫 번째 진술은 예수님께는 ‘받을 세례’가 있으며, 또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답답함’(압박감 혹은 고통당함 이라는 의미의 쉬네코)이 있다는 진술이다.(눅12:50)

 

두 번째 진술은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은 ‘민망하여서’(혹은 동요되어서의 의미 타라소), 심지어 이때에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는 진술이다. 그것은 다가오고 있는 겟세마네를 의미했다.(요12:27)

 

워필드는 “우리 주님의 정서 생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세심한 연구를 글로 남겼는데, 거리서 겟세마네와 관련해서 공관 복음 기자들이 사용한 용어들에 관하여 언급했다. 그는 누가가 사용한 아고니아라는 단어를 ‘소스라침’, ‘섬뜩해서 움츠림’이라고 정의한다.

 

마태와 마가는 똑같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고민하여’(아데모네오)의 일차적인 의미는 ‘낙담이 조금은 섞여 있을 수도 있는, 혐오스러운 반감’이며, 한편 예수님이 자신을 슬픔에 사로잡힌(퍼릴포스)것으로 묘사한 것은, 슬픔 혹은 더 잘 표현한다면, 사방에서 그분을 에워싸고 있어서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나 고민을 표현한 것이다.

 

마가는 심히 고민하여(에크담베오마이)라는 자신만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라고 번역되었다. 워필드는 여기에 덧붙여 ‘이것은 고민을 더욱 좁은 의미의 소스라침으로 규정하는 용어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두려움은 아니지만, 위험을 느끼고 당황한다는 정도의 의미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종합해 보면, 이 강한 어조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불안한 마음으로 혹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으로 자신이 겪을 바 앞으로의 시련을 내다보셨을 때, 그 분은 매우 극심한 고통을 느끼셨으며 땀을 뻘뻘 흘리셨다는 것이다.(P 100-101)”

 

저자는 예수님의 이러한 심정이 단순히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심정은 그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분이 피하셨던 잔은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 잔은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통을 상징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백성에 의해서까지 멸시와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정신적 고통을 상징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다는 영적인 고뇌, 달리 말하자면 그 죄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야 한다는 영적인 고통이다.(P103)”

 

“예수님은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잔이, 악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술로 채워졌다는 사실과, 따라서 그 잔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빗나가게 해서 술 취한 상태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시편 75편과 연관)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자기의 심판을 담당하는 죄인과 같이 되였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무죄한 영혼은 이렇게 인간의 죄에 접촉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멈칫 거렸던 것이다.(P 105)”

 

3. 십자가에서 유기의 외침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하늘을 뒤덮고 있는 흑암 속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자는 예수님의 이 외침이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감당하신 예수님은 그 순간 자신의 영혼조차도 하나님에게 철저히 버림을 당하신 것이었다.

 

“칼빈이 말했듯이,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만 죽으셨다면, 그 죽음은 유효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분의 영혼이 그 형벌을 함께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육신의 구속자밖에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정죄 받고 버림받은 인간의 무서운 고통을 그의 영혼으로까지 담당하심으로써 더 크고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적이고도 무서운 분리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어났다. 이 분리는 성부와 성자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 분리는 우리의 죄와 거기에 해당되는 공평한 보응으로 말미암았다.

 

이런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유기의 외침은 우리의 죄가 지극히 무서운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이 값없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임을 보여 준다.

 

4장 사죄의 문제

 

3장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심각함에 대해 반론 역시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도 단순히 우리를 용서하면 되지 왜 예수님을 그렇게 심한 형벌로 죄를 감당하게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질문은 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책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을 자비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영화로운 존재로 창조하였다는 의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그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자유롭게 생각할 수도 없고 그의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의 사악한 자기중심성이다. 모든 죄는 예수님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부르신 그것을 어기는 것인데, 이는 단지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요 주님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P 123)”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와 함께 병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두려워 떠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내 안의 죄를 발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너무나 빨리 속죄로 나아간다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속죄를 강조하는 것은 도리어 위험한 일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해주신 사랑에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것은, 먼저 ‘화로다. 나는 버린 바 되었도다’라고 외친 후이다. 데일의 말은 이를 보여 준다.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킨다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죄가 우리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P 149)

 

5장 죄에 대해서 만족시킴

 

5장에서 저자가 중점점으로 다루는 단어는 만족시킴이라는 satisfaction과 대속이라는 substitution의 개념이다. 이 만족과 대속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가지게 된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희생의 댓가(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것도 자인한 댓가를 요구하시는 분으로 왜곡될 수가 있다.

 

따라서 교부시대 이후부터 이 만족과 대속의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해 왔었다.

 

그 첫째가 십자가 사건이 마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부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개념으로 하나님은 마귀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도덕적인 하나님이라고 보고 이 도덕적인 법을 준수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해석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11세기의 켄터베리의 안셀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몫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빚을 갚아야 하는데 죄된 존재인 인간은 스스로 빚을 갚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스스로 인간의 빚을 갚은 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해석들이 자칫 하나님을 마귀나 도덕적인 법 아래 예속시키는 오해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올바른 십자가의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네 번째 해석을 제시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을 스스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가까이 오지 못하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지만 인간에게 그 분노를 다 쏟으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분노 속에서도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과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서, 즉 하나님 스스로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의 사건을 감당하신 것이다.

 

6장 하나님의 자기희생

 

이제 저자는 5장에서 십자가를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만족시키기 위한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정의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공의와 사랑이 있는데 그 두 속성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중에서는 둘 중 하나만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항상 공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희생 제사를 예로 든다. 즉 구약에서는 짐승, 특히 어린양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 하게 했다.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피 흘림을 통해서이다. 즉 구약에서는 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그 피흘림을 속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인간이 직접 피를 흘릴 수 없기에 어린양의 피로 그 죄를 대신했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 역시 그 중에 하나이다.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죄의 저주가 넘어 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어린양 대신 피를 흘리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피를 흘려주셨다.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속죄하여 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해 줄 수 있는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만이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는가? 왜 계속해서 어린양으로만은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피를 흘리셔야 했단 말인가?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독론이 필요하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기독론의 논쟁이 있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셨다.

 

인간은 죄의 댓가는 바로 스스로 치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죄의 댓가를 스스로 룰 능력이 없다. 그 죄의 댓가를 치룰 능력이 있으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 분은 인간의 몸으로 친히 고난을 당하시고 아픔을 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하나님의 변형된 다른 모습이라는 양태론적인 해석이 아니다. (양태론이란 삼신론을 배격하기 위한 해석으로 한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태초부터 존재 하셨고 그 하나님 중 성자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리는 이성적인 인간들의 반발을 사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의 댓가를 치룰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만 곧 진리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심판을 우리에게 내리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대신 그것을 당하셨다. 이것 외에 유일한 대안은 지옥이다. 이 사실이 바로 십자가에 있는 치욕, 스캔들, 십자가의 거침돌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만한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반항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죄책의 심각성, 우리가 전적으로 십자가의 덕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 최소한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담당하시는 것을 보는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그 고통을 당하고 말겠다는 인상을 보인다.(P 220)

 

이 장은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으로 해석하는 기독론적인 이론까지 포함하고 있는 장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특히한 것은 그가 먼저 신론이나 기독론에서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의 추론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7장 죄인의 구원

 

이 책의 7장부터 9장까지는 '3부 십자가의 성취'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다. 저자는 십자가의 성취의 사건을 구원과 계시와 정복으로 요약한다. 이 장에서는 십자가의 사건을 구원의 측면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7장 전체에서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화목(propitiation), 구속(redemption), 칭의(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의 이미지로 해석한다.

 

구원의 첫번째 이미지는 화목이다(롬3:24-25, 요일2:1-2, 요일4:10).

 

화목에 대한 히브어는 '키페르'이고 헬라어는 '힐라스코마이'이다. 이것은 인간의 분노를 돌이키거나(야곱이 에서에게 선물을 드린 때나 지혜로운 자가 왕의 분노를 돌이킨다는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다는 의미로 쓰였다.(비느하스가 모압사람과 간음하는 자를 죽여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켰을 때 쓰임) 그러나 구원을 화목으로 해석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분노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분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재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순간적으로 분노하시고 재물로 인해 다시금 분노를 푸는 변덕스러운 분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처럼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일관적인 성품으로 죄에 대해 분노하신다. 죄는 그 분의 분노를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단순한 재물인 양과 같은 짐승으로 누그러지는 분노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서 그 분노를 친히 감당하여야만 사라지는 분노였던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끈 사건이었다.

 

구원의 두번째 이미지는 구속이다.

 

구속 또는 속전(ransom)의 의미의 헬라어는 '뤼트로오'와 '아포뤼트로시스'이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노예를 해방시킬 때 쓰는 단어였다. 따라서 이 구속이라는 단어에는 ‘댓가를 치르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건진 것이 아니라 속전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이다.

 

이 피의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고 있다.(레위기17:11-14, 신12:23) 피는 육체의 생명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의 의미는 그 분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우리를 구원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분의 십자가의 구원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의 의미는 또한 구속한 주체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즉 속전을 지불한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구원의 세 번째 이미지는 칭의이다.

 

칭의란 인간이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고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의로 인해 인간이 전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칭의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다. 따라서 칭의로 인한 그리스도인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것이다. 이 부분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 저자는 칭의와 성화을 구별한다. 이 두 부분은 같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같지는 않다. 즉 칭의란 성화의 시작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일순간에 일어나지만 성화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일평생 점진적으로 일어난다.(칼빈에 의하면 이 성화의 과정으로도 인간이 전적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단지 일평생을 한 발자국씩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나아가는 것 뿐이다. 그리고 칼빈은 그 삶의 과정에 은혜가 있다고 말한다.)

 

구원의 네 번째 이미지는 화해이다.

 

저자는 이 화해의 이미지를 가정 내에서의 관계로 해석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적극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자녀만이 누리는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는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자는 구원의 네 가지 이미지인 화목-구속-칭의-화해를 성전-시장-법정-가정의 네 가지 장소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8장 하나님의 계시

 

저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원뿐만 아니라 계시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영광, 공의, 사랑, 지혜와 능력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영광

 

저자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영광(헬라어로 독사)가 신성한 광채를 가리키고 그 광채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 분이 행하신 기적과 표적 속에서도 나타났지만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그 분의 낮아지심, 즉 그 분의 성육신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낮은 말구유에서 태어나 끔찍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본체가 이 땅에서 인간과 함께 거했다는 것이 영광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설명에서 충격적인 것은, 비록 그 분의 영광이 그 분의 이적, 혹은 표적 속에서 능력 있게 드러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분의 영광은 그 분의 현재의 연약함, 즉 성육신에 나타난 그 분의 낮아지심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동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P 280)

 

“성육신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지심은 그 분의 죽으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자신의 바로 그 낮아지심 속에서 그 분은 들림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그 분은 영광을 입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치였던 그 십자가가 실은 영광이었던 것이다.” (P 281)

 

하나님의 공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였다. 그 분은 때로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침묵하셨다. 이것은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위배된 것 이였다. 저자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도덕적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것을 처리할 때까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참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를 인간에게 붙는 대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 요한은 어떠한 숨은 동기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단 하나의 순수한 사랑의 행동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격 없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라고 말한다.(요일4:10)

 

저자는 만약 우리가 십자가를 하나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비극에 빛을 비춰 주는 비극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에서 확증했다는 의미를 세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는 자기 아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며 그 분이 철저히 버려졌다는 의미이다. 셋째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란 의미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캐논 반스톤의 말을 인용하며 거짓된 사랑과 참된 사랑을 구별한다. 거짓 사랑은 제한, 지배, 분리를 의미하는 반면 참된 사랑은 무한이 자신을 주는 것, 성공의 확실성이 없이 모험을 거는 것 그리고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취약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겨 두는 것이나 감춰 도는 것이 없이 자기를 내줌으로써 완전히 소진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줌으로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저자는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2장 5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세상의 지혜와 능력과 구별한다. 즉 십자가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비록 외관상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 분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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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 닿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부분이다. 저자는 진정한 사랑이란 부분적으로 내어 주는 것이거나(제한) 사랑을 주는 대가로 상대방을 조종하려 하는 것이거나(지배)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분리)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한히 자신을 주는 것이고 성공의 확실성 없이 모험을 거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내가 맡은 양들을 사랑할 때 내 완벽주의 성격은 항상 선을 긋는다. 그리고 모험적인 것은 철저히 거부한다. 불확실한 것에 사랑을 베풀기 보다는 가능한 것에 사랑을 베푼다. 올해 고등학생들을 맡으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그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

 

어차피 인간이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분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연약함으로 인해 너무나 적은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는 없지만 내 이기적이고 계획적인 인간적인 사랑을 깨고 하나님의 사랑을 닮기 위한 몸부림이 올 한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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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 악의 정복

 

존 스토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의 의미는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비록 그 분은 백성에게 버림을 받고, 제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로마 총독에게 재판을 받아,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아무 힘도 없이 못 박힌 채로 사지를 벌리고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가고 말한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정복당함으로서 오히려 악을 정복했던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뒷부분에 나온다.)

 

역사상 구속론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 되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성부의 노를 진정시킨다는 안셀름이 주장한 객관적, 법적 견해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권고하며 변화시킨다는 아벨라르가 주장한 주관적 도덕적 견해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고전적인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악의 세력을 정복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신약 성경의 지배적인 견해이며 2세기 후반 이레니우스로부터 8세기 초반 다마스커스 요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에서 지지된 견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견해를 모두 지지하며 이런 세 가지 방향의 구속 사건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세 번째의 구속의 주제인 악에 대한 정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가 십자가의 구속을 악에 대한 정복으로 볼 때 주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골로새서 2:13-15이다.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기서 ‘의문에 쓴 증서’라는 케이로그라폰이란 증서는 스스로 서명한 채무의 고백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명패의 이미지와 연관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에 대한 문서를 스스로 십자가에서 도말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악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을 갑아 주심으로서 우리를 악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 비록 십자가가 초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승리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부활로 확증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강조 되어야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십자가에서 악에 대해 승리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그런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증하는 사건이다. 로마서 4장25절은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승리된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삶은 아직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비록 패배하였지만 아직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타도되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패해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하나미의 아들딸이며 따라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가지는 못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이 긴장관계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과 함께 악에 대한 경계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gam-sa

글쓴이 : kjkjgong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