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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論

정의란 무엇인가? -What is Justice?

by 이덕휴-dhleepaul 2021. 4. 17.

외식하는 자여..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12:56-57)

 

이덕휴 [ E-mail ]

정의란 무엇인가? -What is Justice?

아래의 내용은 이덕휴 목사님의 홈페이지blog.daum.net/dhleepaul/500 에서 발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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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의 고귀한 피를 요구한 단어도 없다. 일찌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매고 올라

갔을 때 빌라도가 묻는 말, 너는 왜 인간세상에 왔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러 이 땅위에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진리가 뭔데 라고 하였으나 예수는 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빌라도에 있어서 진리란 곧 정의의 실천이라는 인간사 가장 고귀한 명제라는 것을 가르켜 주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의란 인간의 힘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그 속성상 힘의 발란스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힘있는 자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하에서 현대 정의론의 초석을 깔았다고 여겨지는 라드부르흐와 페를만의 정의의 공식을 중심으로 법과 정의, 법과 도덕의 문제 등을 살펴봄으로써 정의에 대한 어렴풋한 맛이라도 보자.

Ⅰ.머리말

선(善)과 악(惡), 정의(正義)와 부정의(不正義)를 어떻게 구분하냐고 묻는다면 개인마다 약간씩 다른 기준을 가지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바로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선 또는 정의가 무엇인지? 부정의가 바로 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 등의 의문을 갖게 만든다. 아마도 윤리에서의 정의는 선과 유사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선에 대한 문제는 덮어두고 사회질서로서의 정의, 즉 법학에서의 정의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정의에 관해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코잉, 롤즈, 오경웅 등의 많은 학자들이 그 개념 정의(定義)에 고심해 왔다. 하지만 다른 여러 철학적 용어들이 그렇듯이 그 개념을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과학에서는 실험 등의 정밀한 방법을 통하여 개념규정에 관한 합의가 용이하지만 철학에서는 그 용어의 감정적 색채가 짙어서 때문에 합의를 얻어 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라드부르흐와 카임 페를만의 정의론을 알아보고 법 이념으로서의 정의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럼으로해서‘정의는 무엇이다’라고 일의적(一義的)으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정의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기초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Ⅱ. 법철학자들의 정의론

1. 라드부르흐(G. Radbruch, 1878∼1949 독일 법철학자)-법과 정의

(1)법의 지위

법칙에는 필연칙(必然則)과 당위칙(當爲則)의 두 종류가 있다. 필연칙은 반드시 실현될 것을 내용으로 하며 실재하는 세계의 근본을 가리키는 법칙이고 당위칙은 혹시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을 내용으로하며 보다 좋은 세계의 구상을 그리는 법칙이다. 인간의 정신활동에는 몇 개의 기본적인 터전이 있는데 그 중 인간의 의욕과 행위를 규율하는 윤리적 당위는 셋으로 나누어진다. 즉 착한 행위에는 윤리, 알맞은 행위에는 습속, 올바른 행위에 관하여는 법이 각각 그 기준을 준다. 이 역사적 순서는 이상(理想)과 현실간의 격차(隔差)의 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습속적 규율은 예로부터 일어난 것, 전통적인 것은 장래에도 지켜주어야 한다고 명하면서 현실에 강하게 좌우된다. 물론 법규도 그 최초의 형태에 있어서는 현실에 의존하는 점에 있어 습속적 규율과 다를 바 없지만 관습과 더불어 보다 새로운 법원(法源)으로 등장한 제정법은 전통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전통을 용인(容認) 또는 부인(否認)하는 자유를 가진 인간의 의사(意思)가 반영되어 있으며 당위가 현실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은 그 근본이 권력이나 승인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또는 가장 높은 당위 즉 초현실적인 가치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의 영역에서 비로소 당위가 실재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도덕은 행위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의 양심 안에는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데 대하여 도덕률(道德律)은 아무 제약 없이 자유롭게 사실의 세계를 떠도는 것이다. 도덕률은 사실계(事實界)를 등진 순수한 당위인데 대하여 습속, 도덕, 법은 사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윤리는 무조건의 당위인 데 대하여 습속, 법, 도덕은 의욕에 의한 당위이다. 이 의욕이란 사회, 국가 양심의 의욕인 것으로 적어도 당위를 근거 있게 하고자 하는 의욕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당위칙을 이상규범(理想規範), 의욕에 의한 당위칙을 문화규범(文化規範)이라 부른다.(법, 도덕, 학문, 예술등은 이상이 인간의 의욕, 지식, 감정안에서 재현된 것으로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문화가 현실의 자연계와 동경의 이상계와의 중간에 있는 인간의 노력과 창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은 이를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작품이며 현실계(現實界)의 무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높은 이상계(理想界)로 비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법과 도덕

도덕도 법과 함께 인간의 의욕과 행동의 문화규범이므로 이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도덕과 법의 차이를 한마디로 하면 법의 외면성, 도덕의 내면성이라 할 수 있지만 법도 외면적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그 심적 동기를 고려하므로 법의 외면성이라는 구별의 표준으로 법의 적용범위를 정하는 것은 알맞지 않지만 법적판단이 관심을 두는 방향에 착안한다면 구별할 수도 있다. 즉 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인 데 대하여 법은 심정의 문제를 고려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외면적 행동의 잠재적인 근원으로서만 취급한다. 한편 이러한 관심의 외면성에서 판단방법의 외면성이 나타난다. 도덕성은 행위자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도덕률에 따르게 함을 전제로 하면서 강제받을 수 없다. 합법성은 사후적인 판단으로 합법성이 확인되면 충분하며 강제가 허용된다. 여기서 법의 외면성에 목적주체(目的主體)의 외면성을 논하면 도덕적 의무는 양심, 보다 선량한 자신에 대한 의무이며 명령적이며 강제적인 권력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도덕률에 대하여만 지워지는 의무라 할 수 있다. 도덕의 세계에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으나 법의 영역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항상 대립한다. 법의 영역에서는 권리와 의무를 조절하기 위해 당사자 및 모든 법률상의 집단의 위에 서는 입법자와 그 법을 적용해야 할 법관을 필요로 하는 외면적, 타율적 입법이나 도덕은 자율성을 특성으로 하는 자기입법(自己立法)으로 초개인적인 평균 규칙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외면적 입법이나 심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법의 타율성이란 양심이 자율적으로 발전시킨 여러 규범을 후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규범복합체(規範複合體)의 구속력 내지 타당성은 그 규범을 자신의 양심 안에 받아들여 양심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그 근거가 있다. 만일 자율적으로 의무를 과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로서의 성질을 띠고 있다면 우리는 법에 의하여 의무를 과하는것도 그 궁극적 타당성이 각 개인의 윤리적 의무에 터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법과 도덕의 본질적인 차이를 생각해야 된다. 도덕률은 사실상으로나 상상적으로나 고립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타당하고 법률은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타당하다. 이러한 법의 대사회적(對社會的) 성격으로부터 외면성밖에 또 하나의 법의 특색이 나타난다. 도덕률은 개별화한다. 그것은 각 개인에 따라 또 개개의 경우에 따라 특수화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체계화할 수 없으며 직관적으로 파악될 뿐이다. 이에 대하여 법률은 다소라도 일정한 범위의 사람 및 사태를 평등하게 취급한다. 법의 특수화가 아무리 진행된다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과 법규범의 일반성이 항상 어느 정도 법의 본질적 특징을 이룬다. 인간과 사물의 개별적 특수사정에 대한 법의 고의적인 무관심을 우리는 유스티치아의 눈가리개라고 비유하는데 이것이 즉 정의(正義)인 것이다. 보통 정의란 말은 법이 좋은 법이고 옳은 법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모든 성질을 총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정의, 즉 특수한 것을 일반규칙으로 규율하고 뉘앙스가 고르지 않은 것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법의 형식적 특질을 문제삼는다. 절대적으로 고른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평등은 항상 불평등을 추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의는 부득이 가지각색의 현실생활 관계를 의곡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도 그 정당성에 관하여는 인간행위의 모든 형태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유일한 심판자인 도덕의 판단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법적 명령은 그것이 스스로 도덕적 목적에 이바지하거나 도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상의 의무로 놓여질 수 있는 것이다. 도덕은 원래 자유로운 행위이어야 하므로 법은 도덕을 직접적으로 실현할 수는 없으며 도덕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법은 도덕이 실현될 가능성이기고 하지만 부도덕이 실현될 가능성이기도 하다. 법은 내용적으로는 도덕과 구별되는 것이나 법질서의 목적이 도덕실현의 가능성에 있으므로 도덕이 법의 타당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3)법의 이념(理念)

정의에 적합한 법, 즉 정법(正法)의 이론은 수천년간에 걸쳐 자연법(自然法)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은 자연, 신 및 이성과 같이 보편타당성이 있으며 모든 민족, 모든 시대에 공통된다는 것으로 자연법과 실정법이 충돌될 때에는 자연법을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연법론자도 자연법이 불변적이며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보지 않으며 변하는 내용을 가진 자연법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법이란 인간의 본성(Natur des Menschen)과 사물의 본성(Natur der Sache)의 양자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전자가 불변의 요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연법에 대립되는 가변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성이란 법학상의 사고형식인데 이것은 법률관계에 선행하는 사회적 실재, 즉 생활관계 자체의 특질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법의 소재, 재료이며 입법(立法)의 실제이며 따라서 입법자의 지위에서 받게 될 자연적, 사회적인 모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사물의 본성은 법관계의 사회적 전(前) 형식이며 법관계를 그 본질에 있어서 또한 생활관계 자체의 성질에서 유래하는 그 객관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해하는 열쇠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이 입법자에 대하여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법적 이념의 실현가능성을 촉진하는 것이라든가 법적 이념의 형성이 역사적 제약을 받는다든가 하는데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념의 본질 자체가 사물의 본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점에 바로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즉, 모든 가치이념은 일정한 소재를 위하여 규정되는 동시에 또 이 소재에 의하여 규정된다. 예컨대 정의란 이념은 사회생활에 관련되는 것인데 한편 그것의 사명은 본질적으로 사회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은 주어진 것으로서 실재면에서 움직이는데 대하여 법의 이념은 이 사물의 본성에 대한 최후적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아니된다. 즉 사물의 본성이 주어진 법소재를 형성하도록 촉구하는데 대하여 법이념은 그 최후적 결정을 하는 것이다.

법의 이념은 세 개의 기본가치, 즉 정의(正義), 합목적성(合目的性), 법적 안정성(法的 安定性)이 집중된 관계로서 나타난다. 정의란 실정법의 가치표준이며 입법자의 목적이다. 정의는 어떤 상위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진(眞)·선(善)·미(美)와 같이 그 자체에 근거하는 절대적 가치다 .이렇듯 정의는 전(前)법률적이며 초법률적인 것인데 그 핵심은 평등사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정의는 평균적 정의(平均的 正義)와 배분적 정의(配分的 正義)의 두가지 정의로 구별되고 있으며 평등은 이 양자 안에서 서로 다른 두 형식으로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전자는 급부와 반대급부의 절대적 평등, 후자는 다수인 사이의 대우관계의 평등을 의미한다. 평균적 정의는 법적으로 서로 평등한 두 사람의 인격자를 전제로 하고 배분적 정의는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의 인격자, 즉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하위 인격자와 그에 대하여 부담을 과하거나 이익을 주는 상위인격자를 전제로 한다.

한편 정의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정의의 본질은 평등(Gleichheit)이며 보편성(普遍性)은 그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의의 본질인 평등은 개개의 경우 개개의 인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타당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니, 이 개개의 경우 개개의 인간에 대해 추구된 정의를 형평성(Billigkeit)이라고 한다. 그러나 형평성이란 요구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며 개별화된 정의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리고 정의의 형식인 보편성도 정도가 있는 것이니 특수성은 항상 일반적인 것의 한 유형인만큼 보편성은 개별화에 일치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개별성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형평적 경향은 개별화하는데서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정의는 하나의 형식적 이념이다. 방대한 여러 법규는 만인의 행위의 평등성, 법적 규제의 보편성이란 형식을 정의로부터 받아들이는 한편 그 내용은 법의 이념에 속하는 또 하나의 원리인 합목적성(合目的性)에 의해 규정받지 않으면 안된다. 법은 윤리상의 의무이행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즉 윤리적 결정은 내부적 자유에 의해 행해지는데 이 내부적 자유는 외부적 자유의 척도(尺度)인 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외부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인간법(人間法)의 본질이며 핵심인 것이다. 이것으로 법의 절대성이 법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이해하는 데서 실정법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도덕상의 의무이행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법의 목적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논리상의 모든 선(善)을 목적으로 하는 한 상대주의(相對主義)에 낙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한에서는 정법(正法)이란 확정될 수 없는 것이며, 확립된 것을 강행하는 실력으로서 정법이 확립될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실정법이 정당화되는 것인데 그것은 법적 안정성에 대한 요구가 법이 실정됨으로써 충분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법적 안정성이란 말은 법에 의한 안정의 뜻이 아니라 법 자체의 안정이란 뜻으로 이해하며 ㉠법은 실정적이고 제정적인 법이라는 것 ㉡제정법이 그 자체로서 안정적이라는 것 ㉢이 법의 기초가 되는 모든 사실이 가능한 한 오류 없이 확정되고 실제적인 것, 그 대신 그 사실의 조잡성을 어느 정도 인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실정법은 쉽사리 변경되어서는 안되며 즉흥적인 입법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네 가지 면을 요구한다. 여기서 법적 안정성은 실정법이 타당성이 있음을 요구하는데, 한편 법적 안정성의 필요는 사실적인 상태가 법적인 상태로 되며 불법이 법으로 되는 등의 모순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데 민법에 있어서의 점유(占有)는 순전히 사실적인 지배가 그것의 법적 근거의 유무(有無)를 불문하고 법적 보호를 받으며 혁명이나 대역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범죄이지만 승리한 뒤에는 그것이 법의 기초가 된다. 이 경우에는 법적안정성이 불법(不法)을 신법(新法)으로 굳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적 안정성이란 사상은 실력과 법과의 관계에서 모순의 절정을 이룬다. 실력이 법에 앞서는 것은 아니지만 승리한 실력은 새로운 법적 상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정의의 형식적 성질은 그것의 내용적 실현을 위하여 목적사상이 필요하며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은 서로 요구하는 동시에 서로 모순하는 것이다. 우리는 1933년부터 2차 대전 말까지 법이 민족에게 유용한 것이라 들어 왔고 동시에 초개인주의적 목적이념(目的理念), 즉 공공의 복리라는 타협의 여지없는 입장과 실력 및 개인적 인권의 전적인 부인이 극단으로 강조되었다. 이것은 목적사상이 정의(正義)를 넘어선 하나의 예이다. 왜냐하면 개인과 전민족 사이의 가치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정의이며, 합목적성은 그것이 보편타당하게 확립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허위의 표현상의 합목적성이란 자의(恣意)와 혼동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합목적성을 기어이 가져야 한다면 법적 안정성의 목적은 일의적이고 명확한 법을 마련하는 데 있고 그것이 법적 안정성의 본질(本質)이며 의의(意義)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법적 안정성은 실정법이 비록 불합리할지라도 그것이 적용될 것을 원하는데 다만 그 불합리한 법을 골고루 적용되도록 요구하는데에서 정의와 중대한 모순이 일어난다. 즉 실정법에 적용되는 것은 정의의 본질에서 나오는 평등에 상응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불법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섣불리 정의를 회복하여 오히려 고르지 못한 처리를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또 부정의(不正義)가 되는 것이니 법적 안정성은 정의(正義)의 형식인만큼 이러한 정의와 법적 안정성의 대립은 정의 자체의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충돌은 간단히 해결될 수 없으며 정도의 문제가 된다. 즉 실정법에 의하여 가리워진 법적 안정성이 부정의(不正義) 일반에 대하여 이미 중요하지 않을 정도에 다다랐을 때에는 불합리한 실정법은 정의, 즉 초실정적 법에 굴복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정법을 지키는 법적 안정성은 아마 불합리한 실정법도 그것이 정의의 한 형식이라는 이유로서 그 효력을 정당화할 것이다.

2. 카임 페를만(Chaim Perelman 1912∼1984 벨기에 브뤼셀 대학 법철학 교수)

(1)정의의 분석

카임 페를만의 정의론은 정의에 관해 이성적(理性的)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합리적 담화의 조건과 규칙들을 모색한‘논의 이론적(論議 理論的)’정의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의 관념에 관한 보편적인 합의가 평등 관념의 적용에 있다고 보고 그 적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해 여러 정의 관념들에 공통되는 요소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 변형의 여지를 두는 방식을 적용한다. 여기서 형식적(추상적) 정의를『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존재들은 동일하게 대우받아야만 한다는 행동의 원칙』이라고 정의하고 구체적 정의로 6개의 공식을 제시하여 분석한다.

① 각자에게‘똑같은 것’을

이 공식에서 표현된 정의 관념은 어느 정도의 비례성(proportionality)을 요구하는 다른 관념과는 달리 오로지 순수한 평등주의적 관념이다. 즉 정의가 적용되어야 할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공식은 평등주의적 정의 관념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평등주의적(平等主義的) 인도주의(人道主義)와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예로써 프랑스나 영국의 귀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최상층 귀족으로 그보다 더 상위의 계층이 없음을 알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는 우월 하지만 그들 상호간에는 평등한 존재로서 그 구성원들 모두를 똑같이 대우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등주의적인 정의 공식이 인도주의적 이상에 접근하기는커녕 그 자신을 그 나라의 다른 주민들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계급 내의 연대감을 강화시켜 주는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평등주의적 정의가 적용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를 우리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한 이 공식이 다른 어떤 공식들보다도 완전한 정의의 이상을 실제로 실현하는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공식을 바탕으로『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각 구성원들에게는 똑같은 것을』이라는 형식적 정의의 두 번째 정의를 내릴수 있다.

② 각자에게 그의‘공과(merits)’에 따라

사람들의 공과(功過)와 관련하여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과와 같이 가변적 성질의 강약의 정도에 비례하는 정의의 적용에서 헴펠(Hempel)과 오펜하임(Oppenheim)의 연구를 인용한다.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단지 일정한 동일한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며 동일한 정도로 그것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보수를 숫자상으로 비교 가능하게 하려면 각자의 공적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공적의 등급에 따라 보수의 등급을 매기기 위해서는 공적의 크기에 따라 각자를 분류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구체적 정의에 관하여 동일한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그들 둘이 모두‘각자에게 그의 공과에 따라’라는 공식의 적용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필요한 것은 여러 행위의 등급에 관하여 합의를 가져야 하고 보수 체계나 형벌 체계도 등가적인 것이어야하며 고려 대상인 사실에 대하여 동일한 진술을 해야 한다.

③ 각자에게 그 일의‘결과(works)’에 따라

이것은 판단자의 견지에서 볼 때 생산 또는 지식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한다고 간주함으로써 성립된다. 만일 임금 결정을 성취된 일에 비례시킬 것이 요구된다면 근로 시간과 생산량 그리고 품질이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어진 결과가 납득할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일정한 정도의 재능이 일의 완수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경우라면 공통의 기준은 깨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의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시간보다도 업무의 고유한 성질을 참작하여 업무 자체가 가지는 가치에 입각하여 판단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각자에게 그의 공과에 따라’의 공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공통 척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반면 ‘각자에게 그 일의 결과에 따라’공식의 적용은 흔히 보다 온건하고 보다 직접적으로 실용성 있는 주장을 한다. 일 또는 지식을 비교함에 있어서 후자의 정의 공식은 사회 생활에서 가장 일반화된 것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보편적 기준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과 또 순전히 실제적인 이유로 해서 그적용을 같은 종류의 일과 지식의 비교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④ 각자에게 그의‘필요(needs)’에 따라

이 공식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아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동등하게 처우할 것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개인의 변덕 모두를 고려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개인의 가장 본질적인 필요들 즉 이 공식이 실질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필요들만을 고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공식을 적용하려는 때는 본질적 필요(本質的 必要)와 기타의 필요를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필요의 서열(序列)을 그 중요성에 따라 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필요가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그 충족의 대가(對價)가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또한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최저 기준이란 관념의 개념 규정이 가능하게 된다. 이 때 본질적 필요한‘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정의(사회 구성원 각자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설정해 주는 정의)에 의하여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필요를 뜻한다.

⑤ 각자에게 그의‘계급(rank)’에 따라

이 공식의 적용은 우리가 정의롭게 대우하려는 사람들이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대개는 위계(位階)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동일한 본질 범주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부여되기만 한다면 여러 계급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상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하나의 체제는 상층 계급의 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반드시 느낄 때에만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권리가 그에게 지워진 의무에서 비롯된 것일 때라야만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권리들이 특수한 책임들과 연계되지 않는 곳에서는 그 체제는 자의적인 요인을 만연케 함으로써 타산적 정실주의(favouritism)조직으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출생 신분에 따라 우월한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나 민주주의와 같이 그와는 전혀 이질적인 체제에도 모두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어떠한 체제에서도 특권 계급은 존재한다. 하나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종국적으로 볼 때 그 계급에 부과되는 요구가 매우 구체적이며 동시에 각 개인에 대한 의무이행(義務履行) 요구의 엄격성이 그들에게 부과된 책임에 비례해야만 하는 것이다.

⑥ 각자에게‘법이 정한 바(legal entitlement)’에 따라

이 정의 공식은 이를 적용할 책임이 있는 법관(法官)이 자신이 원하는 정의 관념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공식들과 구별된다. 법관은 이미 확립된 규율을 준수하여야 하며 분류, 본질범주의 구분과 같은 것들이 그에게 미리 주어지게 되므로 그는 그것들을 고려할 의무를 진다. 법에 있어서 법관은 기능 수행을 함에 있어서 얼마만큼 자기 자신의 특정한 정의 관념을 적용할 수단을 가지는 것일까? 법은 윤리 관념에 의하여 얼마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법관의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법관이 사법(司法) 행사의 책임을 가진 개별적 공무원을 의미하는 경우에는 판결의 선례를 따르는 데 만족하고 혁신의 의욕을 가지지 않는 법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역할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모든 현실관이란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공정한 법관이라고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사실 판단을 통하여 법을 자기 자신의 내면적 정의감에 상호 일치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법(司法) 일반의 의미로서의 법관의 경우 판결은 법을 해석하는 것이므로 법관 자신의 정의 관념 집행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법의 착종된 모든 관념들과 애매 모호한 표현들을 개념 규정하는 것은 판결에 달려 있다. 법관의 정의관과 법률의 요구가 극심하게 저촉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관념들과 표현들을 개념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판결에 있어서는 용이한 일일 것이다. 입법자가 확정한 제 범주들이 어떻게 국민 대중이 갖는 범주와 일치하게 되는가와 같은 법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서는 선험적(先驗的)으로 말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은 국민 대중과 권력자간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자들이 국민 대다수를 진실로 반영하는가 않는가에 따라서 법률적 범주는 대중의 감정에 일치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게 될 것이다.

법은 형식적 정의(形式的 正義)에 의해서가 아니고 구체적 정의(具體的 正義), 즉 확립된 가치 척도를 상정하는 특정한 정의 관념에 의해서 판단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정의의 이름이 아니라 세계관(世界觀)의 이름으로 비난하거나 개량하려 한다. 하나의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에 의해서 비판받는데 반하여 법의 경우에는 만약 궤변가들에게만 이익이 될 뿐인 혼돈을 야기시킬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실정법은 형식적 정의와 충돌할 수 없다. 실정법 자체가 형식적 정의가 언급하는 제 범주들을 설정하며 그 설정을 통해서 비로소 정의의 집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식적 정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제 범주들을 확립할 것이 요청된다. 우리는 특정한 가치척도, 즉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가,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이 정의의 적용에 있어서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성격들인가를 말할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 정의에 대한 일정한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가치를 가지는 것과 가치를 가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방식, 즉 우리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척도(價値尺度)는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진화로 변경되게 된다.

(2)정의(正義)상호간의 모순과 형평(equity)

형식적 정의를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행위원칙이라고 정의했는데 이에 의하면 정의의 시행은 그 기초가 되는 본질적 특성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 등급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면 노동자의 일의 결과와 노동자의 필요를 모두 고려하여 보수를 결정하고자 하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두 노동자가 일의 결과에 있어서는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지만 필요의 면에서는 상이한 범주에 속하는 경우와 그 역의 경우 어느 쪽을 취하더라도 형식적으로 부정의하게 된다. 두 노동자가 동일한 업무를 하는 경우에 한 사람은 총각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가족의 가장이라하면 이들을 동일하게 다루는 것은 부정의할 것이다. 왜냐하면‘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에 의하면 자기 자신 한 사람만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보다는 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어져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부평등하게 다룬다해도 부정의는 나타난다.‘각자에게 그 일의 결과에 따라’라는 공식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두 사람에게 상이한 처우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의의 모순이 명백한 것으로 드러나고 정의의 시행의 결과 형식적 정의가 무시될 때 형평(equity)을 요구하게 된다. 형평(衡平)은 동일한 본질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평등하게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으로 상충하는 둘 이상의 본질적 특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 즉 형식적 정의를 달성하기 불가능한 경우에 생겨나는 불평등을 감소시켜 주는 경향을 갖는다.

Ⅲ. 법이념으로서의 정의

1.정의의 양면성(兩面性)

법의 이념으로서의 정의는 모든 법현상에 관한 평가의 척도로서 그 의의가 있다. 즉 법적인 정의의 입장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는 다수인구의 개개의 행위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생활 과정을 규율라고 있는 실정법 질서의 개별규정 및 그 전체를 올바른 법인가 아닌가에 대해 비판하여 옳지 않은 것은 개혁(改革)하고 옳은 것은 정립(定立)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정의는 이러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힘의 배경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정의가 힘의 행사를 필수적인 수단으로 하는데 반해 도덕은 그 힘을 절대적인 인간애로 대치(代置)한다. 이와 같이 힘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정의의 선(善)에로의 전화(轉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인간생활의 내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도덕적인 명령은 우리 인간생활을 선(善)에로 인도하는 것이지만 복잡다기(複雜多岐)한 분쟁(紛爭) 및 갈등(葛藤)을 만족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 정의만이 불법적인 침해에 대해 강제적 제재를 과(課)함으로써 이들 문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강제라는 계기(契機)에 의해서 도덕으로부터 식별되듯이 또한 정의의 이념도 강제권력으로 인해 도덕적 선(善)과 구별된다. 그러나 도덕과 구별되는 실력행사를 관철한다는 것은 정의의 객관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여기에 실질적인 요소, 즉 객관적인 내용을 부여하지 않는 한 실력은 곧 정의라는 입장이 승인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의의 객관적인 형식이 도덕적인 선(善)과는 달리 실력행사로 자기를 관철하였지만 이것을 거부하는 도덕적인 선이 만일 실력적 자기관철의 형식을 갖는다면 그것은 곧 법의 이념이 되는 것이요, 도덕적인 선은 법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념(法理念)으로서의 정의(正義)는 실력행사라는 형식을 그 특색으로 하는 반면 내용에 있어서는 도덕적 선(道德的 善)에 접근하는 양면성(兩面性)을 가진다 할 수 있다.

2. 법적 정의(法的 正義)와 이념적 정의(理念的 正義)

실정법이 법으로 정립되기 까지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 동인(動因)이 작용하는 것이나 실정법은 이러한 사회적 동인이 그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규정되더라도 반드시 이 법을 올바른 것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하는 도덕이나 정치적 이념이 작용하여야 한다. 도덕적 선이나 정치적 이념이 실력행사라는 형식적 성격을 구비하면 실정법 속에 전화(轉化)한 정의를 법적 정의(法的 正義)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정법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법적 정의도 사회변천에 따라 새로운 시대감각에 호응하는 지도이념(指導理念)이 출현하기 때문에 사회정세나 역사의 제약을 외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 있어 정의로웠던 것도 다른 사회에서는 부당한 제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있는데, 이 비난의 뒤에는 다른 근거에 의한 새로운 이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법적 정의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또한 이를 평가하는 다른 정의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법적 정의를 그 대상으로 하고 그것의 당(當), 부당(不當)을 평가하는 새로운 이념을 이념적 정의(理念的 正義)라고 볼 수 있다. 법적 정의는 그 실질에 있어서 도덕의 내용과 상통하며 강제질서의 전부를 지휘하는 순수한 법의 이념이기에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실천적 이념인 것이다. 그러나 이념적 정의는 강제권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어서 같은 정의이지만 도덕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또 이념적 정의는 실정법을 비평하고 나아가 극단에 이르면 실정법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념이 된다. 따라서 법적 정의의 입장에서는 이념적 정의와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적 안정성이 중시된다. 법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한 법적 정의는 악법도 법으로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효과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고정된 법적 안정성만을 고수한다면 유동적인 사회생활의 현실적인 요구로부터 법은 유리(遊離)되는 것이므로 이념적 정의는 법의 유동성을 중시하여 견고한 법의 조직을 유연하게 하며 때로는 실정법 또는 법적 정의를 파괴하고 나아가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새로운 자기의 이념에 입각한 질서를 창설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법적 정의(法的 正義)와 이념적 정의(理念的 正義)는 상호교체(相互交替)하면서 법의 가치평가규준(價値評價規準)이 되는 것이므로 어떤 시대의 어떤 실정법 속에 있었던 정의(법적 정의)도 한 때는 이념적 정의였던 것이며 또한 오늘의 현실사회의 새 지도이념(指導理念)도 언젠가는 숙명적으로 실정법에 내재하는 법적 정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Ⅳ.맺음말

아직도 정의라는 관념에 대해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관념이 생겨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 최초의 정착사회를 가상해보자. 그 집단에서 힘이 센 통솔자-1인이든, 다수이든-가 그 집단을 결속시키기 위해 생산물에 대한 분배를 구성원들의 욕구에 만족시켜줘야 했을 것이고 규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남과 비교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평등의식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통솔자는 구성원들의 만족시키기 위한 규칙을 만들려고 했으나 어떤 기준으로 규칙을 정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 규칙은 구성원들의 평등을 목적으로 하고 적당한 기준에 의해 정해져야 할 것이다. 이 경우 규칙을 법률에, 평등을 정의에, 적당한 기준을 형평에 대응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오늘날 사회가치로서 정의는 이상 또는 목표로 자리잡고 있다. 그 본질은 평등이지만 절대적 평등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형평으로써 개개인의 평등에 대한 격차를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법의 실천 목표가 되는 이념가치를 정의라고 하는데 때로는 힘 있는 실력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회에서는 정의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법률을 적용할 때에도 필요하지만 실정법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법적 정의와 이념적 정의의 상호교체 관계를 볼 때 소크라테스가‘악법도 법이다’라고 한 것은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여 실정법을 존중한 것과 동시에 초실정법적 확신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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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7 14: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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