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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하나님과의 연대하는 사람

by 이덕휴-dhleepaul 2021. 6. 6.

살전3:1-5

1. 하나님과의 연대하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형성해온 인생관과 가치관이 무너질 때 파멸과도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부끄러움과 회오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을 매도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도 지키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겸손히 엎드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만드셨습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파트너란 바로 나와너의 관계 즉 연대입니다. 연대감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연대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천입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3대 요소는

물질 즉 돈입니다. 다음으로 건강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연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돈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누가 보면 모든 것을 갖춘 것같지만 그사람은 늘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일까요???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연대라는 말은 얼토당토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시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임의로 들어와 사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강제로 우리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맞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유의 선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교묘한 동물이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믿습니다.

마음문을 열지 않으면 결코 성령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라고 칸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구원받는 상태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합니다. 걍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나는 나로 여긴다면 그는 영혼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없는 자를 우리는 정신 넋나간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여 자유로운 영혼이란 자기의사결정을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오직 누구누구 때문에 그렇다. 또는 나는 그렇지 않는데 다른 결정요소가 나를 힘들게 한다. 라고 모든 것을 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핑계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나는 밖에 있고 타자가 나를 지배하는데 이 타자를 하나님으로 모시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녀로서의 출발이자 마지막 결승점이 되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뭐라구요??? 아니 무슨 뚱딴지 같은소리라구요? 그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은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늘 경고 하십니다. 가인이 아벨에 대해 분심을 품고 낯빛이 변한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에게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b)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고는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회수하지는 않으십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코 침해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의지이기 때문이지요. 죄는 언제나 우리 문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라 해도 한 순간 죄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젊은 날에는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른 그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서 지향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선교 활동은 마치 지중해 세계에 어떤 생명의 회로를 까는 행위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들은 서로 든든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저만치 어딘가에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피차 확인하며 그들은 위안과 더불어 깊은 동지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2.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이 서신은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입니다. 복음서보다 서신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서 고발을 당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로 옮겨가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스의 대도시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에 능숙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은 지역 사회와 유대 공동체를 연결해주는 통로 구실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도시에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사도들을 붙잡기 위해 바울 일행을 맞아들였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을 끌어다가 군종 앞에 세우고 일종의 인민재판을 하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미 몸을 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애꿎은 야손을 붙잡아 관원들 앞에 세우고 사도 일행을 고발했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행17:6). 사도들은 기존 질서의 토대를 뒤흔든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닌 또 다른 왕이 있다면서 황제의 명을 거슬러서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입니다. 힘이 정의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래서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의 인권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도 일행은 전혀 다른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신분고하, 남녀, 주인과 종, 피부색, 인종, 시민과 나그네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는 세상,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경계와 담이 무너진 채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세상 말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말썽거리였습니다. 자기들의 안온한 삶의 토대를 흔들어대니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힘없는 이들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안겨주고, 그들의 설 땅을 빼앗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힌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환난과 박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요한은 심판에 대해 설명하면서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3:19)고 말했습니다.

3. 환난과 핍박 중에도 굽히지 않는 믿음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에 이르렀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못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습니다. 아직 확고하게 서기도 전에 박해라는 태풍을 만났으니 신도들이 좌절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를 향해 최초의 서신을 썼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자기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잇대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바울은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살전2:19-20)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바울의 존재 이유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환난 속에 있는 신도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환난(患難)은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근심, 걱정, 고통, 병을 뜻하는 ‘患’을 파자해 보면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통전성이 뒤흔들린 상태라는 말입니다. 환난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환난이 속히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당연한 본능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과거로 되돌리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출애굽공동체도 광야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옛 질서가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사회가 혼란 가운데 있을 때면 사람들은 습관처럼 ‘옛날이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옛 질서 속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이들에게 수모를 안겨주고, 고통을 가함으로 지레 지치게 만듭니다. 디모데의 소명은 그들에게서 환난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을 능동적으로 견디면서 복음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회피하는 버릇이 들면 결국 옛 삶의 인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립니다.

결론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유혹하는 자들이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은 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달콤함이 없다면 이미 유혹이 아닙니다. 달콤한 것은 우리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성경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의 숨바꼭질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자꾸 하나님을 멀리하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좋을 대로 살지 말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상들 앞에 절한 것은 우상들은 그들에게 도덕적인 삶,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유혹과 맞서 싸우며 참 사람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빛이 어두워져 우울감이 안개처럼 우리를 감쌀 때일수록, 그리스도로 옷 입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비틀거려도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조심조심, 신중하지만 즐겁게 사십시오. 모든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길이 보이지 않거든 하나님께 길을 여쭈십시오. 나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할 때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뜻 안에서 생명과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며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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