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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플라톤의 정치철학

by 이덕휴-dhleepaul 2021. 8. 21.

플라톤의 정치철학

 

1. 사상적 배경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정치철학이 주요 테마인 대화편은 국가, 정치가, 법률 셋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티마이오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한 서한들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철학적 이슈가 언급되곤 한다. 개중에서 국가가 가장 유명하다.[32] 플라톤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정치철학뿐만이 아니라 예술비평, 영혼론 등 수많은 테마가 얽힌 방대한 저작이다. 또한 시기적으로는 국가, 정치가, 법률 가운데 국가가 가장 먼저 쓰여졌으며 대화편들 가운데에서 분량이 두 번째로 많은 대화편인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젊은 시기에 썼다고 할 수 있다.

비단 국가뿐만이 아니라,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그가 놓여 있는 시대상황과 동시에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인터넷에 나도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란 대개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저열한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경구와 더불어, 'ㅋ 근데 이 사람 민주주의자 아니었음 ㅋ' 따위의 발언이 부록처럼 붙어나오기 일쑤다. 즉 플라톤으로 하여금 국가를 쓰게 만든 당시 아테네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며 단순히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식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들 생각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아테네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무찔렀을 뿐 아니라, 영걸 페리클레스의 통솔하에 아테네는 일개 도시국가가 아니라 거의 제국을 방불케 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아테네 주변의 영토들을 작게나마 계속 흡수하고 있었으며, 해운국가답게 바다를 장악해 무역에서 위세를 떨치며 수많은 도시국가들을 아테네 산하에 편입시키며 세금을 받아먹었고, 각 도시국가들 사이의 견제로 인해 쉽게 축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긴 성벽도 기습적으로 축조해 수비적으로 엄청난 우세를 차지하게 되어 위세가 등등해졌다.[33]

아테네는 패권국가를 꿈꿨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욕망, 더불어 현재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합쳐지면서 인해 패악질이 심해졌다. 스파르타와 테베 등의 강한 도시국가는 이를 좌시하다간 아테네가 장래에 정말로 제국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전쟁이 벌어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연설은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다. 페리클레스는 이 연설에서 아테네인들의 용기와 자율성, 임기응변과 자발적인 애국심과 협동심을 찬양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병사하고 난 이후 아테네는 더 많이 뜯어내려다 좋은 협상시기를 놓치거나, 반대파를 누르려고 선동하던 사람들이 제 논리에 제가 빠져서 불리한 원정을 강요받거나,[34] 어쨌든 인물은 인물인 알키비아데스도 정치 싸움으로 그 능력을 소진시키고 적국에 좋은 일만 시키는 등 썩 좋은 모습은 못됐다. 거기에 멜로스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인의 패권주의와 야욕은 결론적으로 멜로스 인들의 경고처럼 반 그리스 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거니와 플라톤 입장에서 볼 때 올바르지 못한데다가 경멸스럽기까지 할 내용이었다.

아테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의 민주정 폴리스들은 많은 수가 엉망이었다. 아테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우정치, 선동, 야합, 분열과 반목으로 인해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외세 결탁, 전쟁 사주, 이적 행위, 부정부패, 쓴소리 하는 엘리트가 미워서 잘난 체한다고 도편추방하기, 누명 씌우면서 공격하기, 그러다가 망하면 책임전가, 능력이 아니라 연설과 선동으로 표를 얻어내서 요직 차지하기 등의 일이 폴리스들에게 일어났다.

이와 같은 민주정치의 혼란은 소피스트들의 정치철학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멜로스의 대화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피시스와 노모스의 대립관계를 둘러싼 설전이다.[35] 공격을 당하는 약소국 멜로스인들은 퓌시스, 신이 만든 불변의 정의 및 약자를 함부로 괴롭히면 받게될 응보나 재액 등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의 경우는 노모스, 그러니까 '흥 신이 만든, 불변하고 만인에게 공유되는 정의라니 웃기고 있네. 온세상 풍속이나 법률이 다 천차만별인 거 보면 모르냐? 그런 건 다 약한 놈들이 무서워서 만든 헛소리고 어차피 세상 일은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어 정의가 어쩌고 착한 거 어쩌고 하려다가 먹을 거 못 먹으면 못 먹은 놈 손해지 지금 우리가 세니까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는 식의 얘기를 했다.[36]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진 소피스트들의 유명한 논쟁이다. 이를 통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퓌시스를 공격하고 노모스를 숭앙하는 풍조 및 무리들이 아테네 민주정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소피스트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결국 아테네의 폭망으로 끝나자, 아테네인들은 지독한 멘붕에 빠졌다. 많은 아테네인들이 이 당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그냥 빛 좋은 개살구고 사실 스파르타 식의 엄격한 규율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역시 킹왕짱인 거 아니냐?' 하는 식의 생각에 깊이 경도되거나 영향을 받았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런 배경 아래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과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민주정 폴리스들을 비판하려는 목적 또한 품고 있었다.그리고 자기 생전에 그 위대한 스파르타가 어떻게 몰락하는지 두눈으로 목도하게 된다[37]

3.2.2. 사상[편집]

유의사항: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가지의 탐구법이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었던 당시의 아테네 또는 그리스의 시대상을 파악한 뒤 플라톤의 생각 변화를 기점으로-즉 역사주의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이 첫째요,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한 비역사주의적 탐구 방법이 둘째다. 이는 현재의 학자들도 논쟁이 있는 부분으로,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는 중도를 택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국가는 주제 면에서 대단히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그렇지만 대화편 형식인 까닭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플라톤의 본심인지 아니면 역설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문학적 형식인지도 불분명한, 후세인들이 풀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를 몇 개로 나누고 다시 그 정치체제들의 등급을 나누고 하는 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차라리 그건 현실정치에 더 초점을 맞춘 훗날의 대화편인 법률이나 정치가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되는 바다. 국가가 이렇게 당대 인간생활의 수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justice)라고 할 수 있다. 대화편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노신사 케팔로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야기의 소재가 정의로 튄 것으로 불이 붙는다. 케팔로스가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난 이후, 불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를 통해 더욱 격화된다.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비교적 소박한 정의관, 정직하고 공평하고 잘 대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자주 그러하듯이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면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한다고 해도 불의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생각을 가다듬고는 정의는 친구에게는 유익함을 가져다 주고 적에게는 불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을 바꿨다. 왜냐면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받고 나서 보니 정직함, 공평함과 잘 대해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인물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트라시마코스개소리 집어치우라며 토론에 난입한다. 그는 특히 소크라테스가 나쁜 일 하지 마세요... 이유가 어찌 됐든 남한테 해를 끼치는 건 정의가 아닙니다하는 견해와 더불어 자기가 먼저 말하면서 주장을 만들기보다 남이 말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태도에 화가 났던 것 같다.[38] 트라시마코스는 벌컥 화를 내고 기세를 돋우면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왜냐면 보통 법률이나 규칙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시국가의 법률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어떤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법률을 만드는 사람(입법자)에게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란 힘이 있는 강한 사람들이며, 그 강한 사람들이 법률을 만들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움이란 개념은 허위이며, 정의의 실체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인데 법률의 실체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편다.[39] 도시국가는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생겨나면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처벌하지만 실은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든 법률을 어겼을 뿐이라는 것이다.[40]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법률을 따르는데 그게 지배자의 이익이 아니고 시민의 이익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배자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정의가 항상 강자의 이익인가?' 하면서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견습공은 실수를 하지만 장인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진정한 지배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지배자는 미숙한 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그럼 진정한 지배자는 지배의 기술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인데, 다른 모든 기술들이 그렇듯이 기술이란 것은 의술(醫術)처럼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강자만의 이익이란 것은 말이 이상하지 않냐' 하고 논의를 펼치자 트라시마코스가 '양과 양치기와 주인을 생각해 봐라. 양치기가 아무리 양을 잘 돌봐줘도 결국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하고 받아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어느 정도 기가 죽은 데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양치기의 비유 역시 단점이 많아서[41] 트라시마코스는 물러나게 된다.[42]

트라시마코스 이후의 논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폴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에 의해 진행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주제가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나머지 그 주제에서 끝장을 보길 원하며, 자신들이 소크라테스에 반론하거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반박의 논리를 펼침으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길 원하고, 더욱 선명해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극중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상대하기 버거워해 퇴장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많은 의문과 토론을 불러일으킨 논설이었다.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제기한 의문들은 대강 이렇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정의는 어렵고 불의는 쉬운가? 왜 정의를 행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불의를 행한 사람이 이득을 보는가?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정의라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하고, 어기면 처벌 등의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제약이 없고 자유롭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 불의가 판칠 것인가? 본심이 아니라 억지로 정의를 따르는 것은 좋은가 나쁜가? 사람들은 그저 수치스러운 평판을 피하기 위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선생님, 부디 저희에게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정의란 것은 단지 그것이 정의란 이유만으로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을 함께 토의하기 위해, 그 어려운 문제들을 보다 더 쉽게 살펴보기 위해 개인이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라는 큰 그림에서 정의가 어떤 것일지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올바른 행동과 법률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논의는 개인 차원의 정의, 법률, 이익, 욕망 등이 얽힌 문제에서 국가, 사회구조와 같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은 1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케팔로스의 아들이 정의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은 2권에 속한다. 이 나머지 9권의 분량 동안 정의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는 교육, 사회, 국가, 예술, 정치, 영혼, 윤리 등 많은 분야를 건드리게 된다. 국가는 그 과정에서 3가지의 주요한 입장을 등장시키는데, 첫째 입장은 노신사 케팔로스가 제시하는 헬라스 세계 종래의 소박한 도덕관이다. 그리고 피시스와 노모스를 구분하는 소피스트를 대표하여 트라시마코스가 있고, 마지막으로 플라톤 본인의 주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플라톤은 앞선 두 주장을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개인의 행복과 정의는 도시의 행복과 정의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냐면 법과 정의, 행복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법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개인은 법을 지켜도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 법을 어기면 불이익을 받아 행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도시의 법이 정의로워야만 도시에 속한 개인 역시 정의로운 법을 문제 없이 준수하면서 괜찮은 생활을 꾸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를 그리기 위해 플라톤의 상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얘기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혼자서 살기는 어렵고 사회에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3] 또, 인간은 각기 타고난 적성이나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재능이나 적성에 따라 직업이 알맞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런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좋은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화를 창조해내서,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특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를 채워준다.[44] 즉 인간이 공동으로 모여사는 이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부족하지만 필요한 부분을 협력해서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각자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단계로 1단계로 건강한 도시, 즉, 말하자면 돼지들의 도시, 2단계로 정화된 도시 즉 말하자면 군인들의 도시, 마지막 3단계로 아름다운 도시 즉 말하자면 철학자가 통치하는 도시의 3단계가 제시된다. 건강한 도시는 각자가 각자에게 필요한 적성에 맞춰 생활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알맞은 인원이 알맞게 모여서 알맞은 일을 하며 정부가 없이도 잘 돌아간다.[45] 그러나 이 도시는 말이 되지 않는데,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순진무구하게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덕(ἀρετή), 즉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제해서 얻는 기술적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고, 돈과 부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몇 개씩이나 겸직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빈부격차가 나타나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자연히 정부의 필요성이 나타나며, 영토확장의 욕구 또한 나타나게 된다. 영토확장의 욕구와 함께 전투의 기술에만 집중하는 전사계급이 나타난다. 돈 버는 기술이 최고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렇게 전투의 기술 아래 귀속되는 것처럼, 전투의 기술도 최상위의 기술 아래 포섭되게 되는데 바로 철학이다. 어쨌거나 전사가 아무리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 해도 올바른 적을 상대로 올바른 타이밍에 용맹하게 싸우는 게 중요하지, 잘못된 적을 상대로 쓰면 소용이 없으니까.

이런 전투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군인들의 강한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 수 있도록 음악과 시의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 때 제공되는 예술은 적절한 것만이 필요할 뿐, 도시가 추구하는 정의에 걸맞지 않고 사람들의 심성을 어지럽히는 나쁜 시와 음악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인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신들이 전혀 정의롭지 않고 이상한 놈팽이들로 묘사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도시는 건전한 시와 음악만을 필요로 한다.[46]

체육과 음악 교육을 받은 군인 계급만으로는 이상적인 도시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우월한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철학 교육까지 제공되어야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절제[47]의 미덕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부류가 주장하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는 무력과 욕망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력과 욕망을 함부로 남용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어쩌면 현실정치에서는 그처럼 이익을 위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결코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테네인들이 멜로스를 멋대로 침공했던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도시는 무력을 남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은 폭력 위에 우리의 현실이 기반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득에 눈이 멀은 도시가 폭력을 남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현실적 사항을 도외시하고 오직 이상과 정의만을 생각해 볼 때 폭력의 남용은 정의가 아님이 자명하다. 이상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도시 전체가 절제의 미덕 아래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만 집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도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사유재산이라던가 가족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주장이지만,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적인 공유제야말로 정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절제로 가득찬 도시, 사유재산의 폐지와 절대적인 공유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자뿐이다. 전사계급에게 시행되는 통제된 예술교육만으로는 사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절대적인 공유제를 실현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흐름 아래에서, 도시의 세 계급이 서로 다른 일을 해도 정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잘 맞는,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절제라는 기치 아래에서 잘 짜여진 공동체 도시에서는 세 계급이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제까지 도시와 개인을 쭉 유비관계로 다뤄 왔는데, 그에 따라서 도시가 세 가지 계급이 있는 것처럼 유비관계를 통해 개인의 영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욕망, 혈기, 이성이 그것이다. 가장 뛰어난 이성에 의해 개인의 영혼이 금전욕에 빠지지도 않고 무절제한 분노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그는 정의로울 것이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플라톤이 다른 대화편에서도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 정의로워 보이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통제된 상태가 아니라면 완전히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정말로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행하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48]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미 가족제도의 폐지까지[49] 주장하는 극렬 공산주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5권에서는 현대 시점에서 플라톤의 평가를 한층 더 격상시키고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부숴버린 다음, 그러면 아기와 여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도시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품고 있는 재능이나 소질은 퓌시스적으로 볼 때 차이가 없다.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으며, 남자와 여자에 구분이나 재능에 차등을 두는 것은 노모스, 인습적인 것이며 자연 즉 퓌시스에 반하는 것으로, 이상국가에서 그러한 노모스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50]

이와 같은 가상실험에 파묻히던 소크라테스 일행은, 그건 그런 거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정의입니까?하는 글라우콘의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 지긋지긋한 이데아론이다. 정치철학 바로 위의 항목이 이데아론이긴 한데 여기서 연결되는 내용은 쓰여져 있지 않은데.... 이 문서에서 대강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참나무건 전나무건 소나무건 죽은 나무건 병 걸린 나무건 딱 보면 나무를 나무라고 알 수 있게 하는 나무다운 그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 애매한 개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이데아는 수학으로 표현가기가 대단히 편리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원이나 삼각형은 없지만 우리는 삼각형이나 원의 정의를 알 수가 있고 그를 통해 삼각형이나 원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 직각사각형의 정의 = 이데아라고 친다면 사각형 중에서 직각사각형의 이데아, 즉 정의(定義)에 들어맞는 건 직각사각형일 터이다.

국가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데아를 이렇게 대충 설명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이데아의 문제가 뭐냐면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약간 국가를 벗어나서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시장바닥 돌아다니면서 썰을 풀 때 개념정의에 대해 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얘기했던 모양이지만, 플라톤의 경우는 본인이 생각을 깊게 하다 보니 아님 학교를 차리고 강의를 하다 보니 애들이 곤란한 질문을 했다던가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데아가 있다고 한다면, 빅 빅 프라블럼이 생겨버리는 데 이데아의 이데아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귀납적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뭐 혹은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이 용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모아서 필요하고 충분한 요소들만 쏙쏙 모아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용기, 용기의 이데아인 것이다! 이데아야말로 진짜다! 다른 것들은 다 허깨비, 가상, 2차적인 찌끄레기이고 오직 이데아만이 진정한 참이자 세상의 진리이자 불변하는 실체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할 때,

아니 플라톤 선생님, 그럼 이데아라는 애매한 개념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또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할 거고요, 또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 소위 철학적 전문용어로 무한퇴행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 그렇다면 그 이데아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까? 이데아와 우리 마음이나 지성 이런 것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는 아주 골아픈 형이상학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51]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위의 이데아론 항목에서도 얘기했듯이 현대까지도 해결이 된 건지 안 된건지 전문 철학자들, 철학 역사에 남았으며 현대에도 천재로 이름 높은 난다긴다 하는 영미, 대륙의 철학자들끼리도 절찬리에 치고박고 있는 노답문제라 꺼무위키는 꺼무위키다운 주제를 파악하고 대강 넘어가 버리고...이데아 단락에서는 어려워서 안 쓰고 넘어간 건데 여기서 쓸 수밖에 없게 되네...국가를 얘기하고 있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은 결국 정의를 얘기함에 있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앞서서 나온 퓌시스와 노모스 문제, 결국 정의롭게 잘 살기 위해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법의 관계에 대한 통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와 법 속에서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및 철학에 준거된 국가의 이상적 형태 및 나라에서 꾸준히 나라를 다스릴 철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형태 등등을 만드는 것에는 정의(正義, justice)의 이데아와 그것을 알고 있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또, 이 정의의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좋음(the good)의 이데아와 연결되어 있다, 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이다.

모든 이데아는 이 좋음의 이데아에서 비롯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에 결론을 낸다. 이데아 무한퇴행을 막는 이 이데아가 왜 좋음이냐면, 플라톤은 그에 대해 아름다움이나 호의와 같은 얘기를 한다. 약간 종교적이 되기도 하는데, 뭐 예를 들어서 말해 보자면 이 세상을 이루는 수학적 원리나 그에 따라 운행되는 천체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세상은 수학적이고 아름다운 원리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바로 절대자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의 신적인 조화에 가까운 세상의 여러 초월적인 현상이나 신비를 볼 때 신적인 존재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왜 호의가 아니라 악의를 내뿜겠으며, 수학이나 그에 기준을 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근원적인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왜 이성 좋은 거잖아 좋은 거.

뭐 글라우콘 패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소크라테스 밑에서 수련이나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논의를 하는 모양새를 볼 때 머리가 좋은 패거리들에 속하니 이런 이데아론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52] 이들이 이렇게 이데아에 의한 정의의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그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이데아만이 정의이므로 실재 세계에서 완전히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회, 체제, 국가 등과 정의의 결합은 철학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데아를 아는 자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으니까.[53] 플라톤은 철학이 정치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들을[54] 설득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기술이 필요하다. 철학은 옳기 때문에 수사학을 동원하면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크세노폰과는 달라서 초지일관 철학이 제일 행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철학자는 오직 철학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그 입장을 따를 때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공동체를 위해서 강제 동원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도시를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하기 싫어할 텐데, 보통 도시민들은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 패거리들이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나 보고 우끼우끼 우끼끼하면서 그것만이 진실이자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진짜 사물을 알고 있는 철학자들을 자신들의 안온함을 깨려고 헛소리하는 불한당같은 패거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철학자들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면 들수록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깨부숴서 멍청하고 되먹잖은 부모라는 인간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지 말고 10살 정도 되면 무조건 국가에서 길러서 올바른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5]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제시한 정의에 관한 어려운 물음들은 여전히 대단히 애매한 상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명확해진 상태이긴 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억지로, 혹은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것을 따라야 하는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불의에 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하면서 하나씩 알아보게 된다. 좋은 순서순으로, 최선자정체(aristokratia),[56] 명예지상정체(timokratia),[57] 과두정체(ὀλιγαρχία), 민주정체(δημοκρατία), 참주정체(τύραννος)로 구분된다.[58] 최선자정체는 지성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명예지상정체는 명예, 과두정체는 돈, 민주정체는 모든 충동, 그리고 마지막 참주정체는 사악한 탐욕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정체)와 시민과 정의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정치철학적으로 타당한 얘기인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훗날 군주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군주의 도덕성과 정치환경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에는 학문도 그렇고 인간들의 생활상 자체가 공동생활과 분리되기 어려웠다.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선택되었던 예술, 종교, 정치 모두 도시국가의 시민적인 공동생활 속에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것이며, 현대처럼 개인의 예술이나 종교 등의 개념은 상정하기 어려웠다. 이와 더불어 소크라테스가 추구했으며 플라톤이 그 유산을 이어받은, 시민의 도덕성 함양이라는 테마 역시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사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곧 한 국가의 도덕적 올바름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이자 도덕적 올바름이 될 수 있었다.[59]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를 제시한 다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자신 또한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함을 알고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하나의 본으로써 이를 제시한 것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마음속에 이성 속에 이런 본을 지니고 정치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60] 대화편 국가에서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상사회이며, 대화편 법률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법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역이 아니다.

대화편 정치가는 테아이테토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순으로 지어진 저작이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수학자가 나오고, 소피스트에서는 당연히 소피스트가 나오고, 정치가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정치가가 주요 주제이다. 또한 작중 내용도 등장인물이나 시기가 이어지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다. 즉 플라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앎에 관련된 것을 논의해보고 정치와 다시 한 번 연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 철인왕은 여러 가지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철학 즉 진리를 모르고 그저 동굴 속에서 우끼끼끼 우끼끼 우효우효 우끼이~ 하는 무리들을 위해 '이 바보들아! 저건 그림자잖아! 저건 버드나무의 잔가지가 바람에 일렁거리는 그림자고, 저건 여우가 도약하는 그림자 아냐!'하고 분별해서 가르칠 수 있는 그림자에 관한 지식, 즉 현실 정치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이상국가를 그리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 정치적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응 그건 철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하면서 넘어간 바 있다.

대화편 정치가에서 엘레아 사람은 그럼 과연 실제 정치가가 무엇인지에 관해 주장을 펼친다. 아마 당연히 엘레아 학파일 이 엘레아 사람은, 여러 가지 근본 원리나 기술로부터 정치의 기술까지 천천히 논의를 옮긴다. 그 결과 무릇 정치가니 왕이니 하는 것의 본질은 기술이나 앎으로서,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지위이건 간에 상관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기술이니까. 또한, 도시와 가정에는 차이가 없으며 정치가와 가장 사이에도 차이는 없다.

이와 같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치의 기술은, 실제 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힘, 무력 등과는 무관계하다. 힘이나 무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치를 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일지는 몰라도 실제 정치의 기술과는 무관계하다. 정치는 기술이되, 일종의 지식이나 앎에 속하는 기술로서, 그런 종류에 속하는 기술이 그러하듯이 명령을 내리는 기술이다. 다른 모든 명령을 내리는 기술처럼 정치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정치란 곧 인간을 출생시키고, 양육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61] 그런데 의술이나 성생활에 관련된 기술도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다. 정치술이 이들 기술과 차별화되는 점은, 인간과 동물의 특별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또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신화를 끌어들인다. 옛날에는 크로노스 시대였는데, 그때는 신들이 각기 동물들을 이끌고 이래라 저래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제우스 시대는 신이 그냥 인간들을 포함한 동물더러 알아서 하라고 놔둔 시대라는 것이다. 옛날 크로노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가 시행되던 시대였으나[62] 현재 제우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도 불가능하고 불의와 무질서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인간들끼리 알아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즉, 국가에서 얘기했던 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절대적 공유제 그런 거 신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알아들었냐. 이렇게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정치는 이렇게 정치가나 왕이 신일 경우와 신이 아닐 경우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정치가나 왕의 지배가 합법적인가, 올바른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과연 피지배자들이 동의했는가, 동의하지 않았는가로 구본된다. 엘레아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정치가의 기술에 대해서 검토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 진정한 정치가들의 기술과 자웅을 겨루고 있는 기술은 바로 소피스트 모리배들의 기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절찬 활용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지배는 세 가지고 나뉘는데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로 나뉜다. 이 세 가지 지배는 앞서 얘기했듯 피지배자들의 동의했는가, 아닌가 두 가지로 인해 6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과 금권정, 민주정으로 나뉜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하의 민주정에서 자유와 법의 구분에 있어서 주요 쟁점은 소수의 유산계층이 다수의 빈민계급에 의한 지배에 대해 동의하느냐 마느냐인데, 플라톤은 유산계층이 동의하나 마나 별 차이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플라톤의 정체는 1) 왕정 2) 참주정 3) 귀족정 4) 과두정 5) (강압하는) 민주정 6) (동의하는) 민주정 이렇게 6가지의 정치이다.

이 6가지 정체는 올바른 통치의 기술인 철학과 무관계하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도 큰 신빙성이나 공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큰둥하다. 플라톤은 이를 자신이 주구장창 사용하는 의술의 예시를 들면서 정당화한다. 의사가 진정한 의술의 기술을 활용하는 한 환자가 동의하건 말건 환자의 신체를 지지고 볶건 간에 의사는 옳은 일을 하게 되어 있다.[63] 마찬가지로 지배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쨌건 공동체에 최선의 선택을 통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피지배자들이 동의를 해주건 말건, 불법을 자행하건 말건, 사람들을 조지건 말건 외국인을 어떻게 쓰건 상관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키보드 워리어 영혼은 법 없는 지배를 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엘레아인의 주장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엘레아인은 침착하게 소크라테스를 상대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현대사회에서조차 법 조항의 미비로 인해 뻔히 보이는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불의에 속 끓는 일이 제법 많다. 그런데 이런 고대 희랍 사회에서 돌때기에 글자 좀 새겨넣고 '에헴! 이것이야말로 우리 도시국가가 앞으로 준수해야 할 신성한 법률이라니까!'하고 뻐기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일일까? 각 사건이나 상황은 항상 건 바이 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시대와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데 돌에 법률을 새겨놓고 뻐기는 일이란 과연? 현행 법률들이 사회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성문이건 불문이건 간에 현행 법률이란 물건들을 살펴 보면 모두가 다 조잡하기 그지없는데다가, 신성을 지닌 사람을 마치 짐승 무데기인 것마냥 취급한다.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이유이고, 법이란 것은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마저 제약하기 때문에 나쁘다. 실제로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유연하고 정확하게 각 상황과 사건에 맞춰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이 있다면, 동굴 속에서 우끼끼끽~ 우끼이후~ 하는 무리들이 법률에 비춰 진정한 지배에 계속 토를 달면서 방해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동굴 속의 무지한 무리들은 눈깔이 없기에 현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고, 고맙게도 현자가 그들을 다스려준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계속 의심할 것이다.

국가에서도 얘기되는 바지만 무지몽매한 무리들은 현행법을 떠받들면서 현자에게도 현행법의 절대성을 인정하길 바라고, 현자가 그를 무시하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스승이라고 빨아주는 거 보소... 재판정에 보내서 요단강 저 너머로 현자를 보내버릴 것이다. 현행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백치 아다다들은 어떤 변화나 개정, 토론을 원하지 않으므로, 현자는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지 굳이 대가리 터진 원숭이들을 다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법의 지배는 인정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법도 현자도 지배하지 않을 경우 욕심 많고 사악한 야심가가 국가를 다스리며 민중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도 현행법이 아무리 병신 같을지라도 존경을 표해야 한다. 아니면 모가지가 뽑힐 테니까.[64] 법의 지배는 아무리 쓰레기같은 법이라도 일단은 이성적 고찰이 조금이나마 섞여 있을 것이기에 무법천지보다는 낫다. 또한 실제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참주 같은 놈들이 그 법을 지 맘대로 바꾸면 그것은 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근거해서 각 정체들의 순위가 매겨진다. 당연히 법이 없는 정부보다 법을 따르는 정부가 나으며, 개중에서도 법을 따르는 민주정이 짱이다. 물론 제대로 된 통치의 기술을 가진 정치가나 왕은 법을 맘대로 바꿔도 상관없지만. 엘레아인은 현실적으로 자기자신은 현자가 만든 법이 존재한다면 똥멍청이들이 나라를 지배해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엘레아인은 통치의 특별한 기술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작중에 뜨개질 기술을 예시로 들기도 했고, 인간을 출생시키고 보육시키는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통치자는 균형 잡힌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각 집안과 집안을 이어줘야 한다. 어떤 한 기운이 지나친 집은 반대편 기운이 지나친 집과 맺어줘서 도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각 시민 개인의 기질을 균형잡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와 같은 마담뚜의 기술이 바로 왕의 특성이다. 즉 왕은 인간 무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물론 철학자는 이런 똥대가리 대중들과는 상관 없고.

3.2.2.1. 이상국가의 모습[편집]

플라톤이 생각하던 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계급으로 구성된다.

  • 통치자: '수호자 중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국가의 '왕'에 대응되는 존재이지만 1명은 아니다.[65] 구체적으로 몇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국가에서 가장 극소수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또한 철학자[66]이다.
  • 수호자: 일반적인 국가의 귀족, 혹은 전사 계급에 해당한다. 당시 폴리스들의 가장 일반적인 군대 모습은 '시민군'이였는데, 플라톤은 소수의 전문적인 군인들이 군대를 구성해야 한다고 봤다.
  • 생산자: 일반적인 국가의 평민 계급[67]에 해당한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인구가 너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도록 성생활이 통제되는데, 제비뽑기를 통하여 누가 누구와 성교를 할 지 결정된다. 다만 제비뽑기는 통치자가 교묘하게 조작하여, 실제로는 (아마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비판 받는 부분이겠지만) 우수한 남성과 우수한 여성이, 열등한 남성과 열등한 여성이 성교하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성교의 횟수 역시도 '우수집단'이 되도록 많이, '열등집단'이 되도록 적게 하도록 유도되며, 열등집단의 아이나 장애아는 유기되어서 죽도록 방치된다. 한편 모친에게는 '정상적으로' 탁아소에 맡겨진 것이라고 속인다. 플라톤은 이러한 우생학적 개량으로 국가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살아남은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양육되며, 기본적으로 '수호자 양성'을 전제로 한 교육을 받는다. 이들의 영혼은 시가(詩歌)로 단련되고 육체는 체육으로 단련되는데, 혹시나 타락하지 않도록 시가는 엄선한다(나쁘게 말하자면 검열한다). 그리고 양성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일부러 쾌락에 노출시키는 시험을 치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적성이 맞지 않는자는 떨어져나가고, 다시 말해 생산자 계급이 되고 마침내 엄선된 수호자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양성된 자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은 통치자가 된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상국가는 철저한 능력제 사회로, 구조상 누가 누구의 아들, 딸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68] 혈통적인 신분세습은 불가능해진다. 또한 수호자, 통치자는 사유재산이 없는 등 철저하게 사욕을 배제시켜야 하는 '국가의 봉사자'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굉장히 금욕적이고 재미없는 삶일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국가의 중대사를 맡길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여성 역시도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여성을 집안에 묵혀두는건 인력낭비라고 봤는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수컷 경비견이든 암컷 경비견이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비유한다. 흑묘백묘론과 비슷하다.

결국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보는 이상국가란 "가장 적합한 사람이 그 일을 한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 농사를 짓고, 군대에 적합한 사람이 군인이 되며, 정치에 적합한 사람이 정치를 한다.[69] 이는 당시 폴리스들의 인간관과는 반대인데, 특히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각각 비슷한 재능을 신들로부터 받았다고 봤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정치라는건 '전문적' 프로 정치인이 아니라 '전인적'인 아마추어[70] 정치인들이 했던 것이며, 능력의 차이가 부정되므로 '추첨을 통해' 국가 중대사를 맡긴 것이며, 조국을 지키는 것은 전문적 직업군인들이 아니라 전인적 시민군들이 수행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란 순수한 인간들이 아니라 반신(半神)들이라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생산자는 절제의 미덕을 지녀야 하는데, 열등한 그들에게 가장 적은 몫이 돌아가게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수호자가 절제의 미덕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들이 생산자보다 우월하니까.. 같은 방식으로 플라톤 본인을 포함하는(...) 통치자 계급도 용기의 미덕까지 지니고 있다. 즉, 절제 -> 용기 -> 지혜 순으로 갖기 어렵고 고차원적인 미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우월감에 심취했던 플라톤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자신을 가장 위에, 나머지 흔한 사람 중 그나마 용기라도 있는 사람을 그 밑에 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된다.

3.2.2.2. 철인 정치[편집]

플라톤은 '철인(哲人) 정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국가론'에 잘 나와 있다. 문제는 이 '철인'은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영역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지식의 소유'에 대한 개념도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상이한 지점들이 많다.(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다수의 저작에서(국가와 법률 등) '의사와 환자의 비유'를 종종 사용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병에 걸려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과 치료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 역시 '정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똑똑한 사람이 지배자가 되는 게 철인 정치가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의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금 달라지긴 한다. '국가(혹은 정체)'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중기 사상에서는 철인왕에 의한 일방향적인 통치 외의 다른 방식은 거의 비중이 없지만, 후기 대화편인 "정치가"에서 "법률"로 넘어가면 피통치자에 대한 설득과 소통이나 법률 등을 제법 고찰을 하는 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실 일관적으로 "철학자왕(즉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혼이 조화된 상태의 사람)"에 의한 통치를 기본바탕으로 깔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비유를 그대로 따르자면 환자를 치료하는데 환자의 설득은 본래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설득의 과정이 없었다간 의사가 맞아 죽거나 환자가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정도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가 주장한 철인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면모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철인 지배자는 신분이나 성별, 인맥, 지연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들은 다음의 절차에 따라서 선발된다.

1. 모든 사람은 평등한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2. 공정한 시험으로 뛰어난 인재를 선발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도태시킨다. 이때가 20세 무렵이다.
3. 그 뛰어난 인재는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거친다.
4. 수학, 과학, 음악 등의 집중교육을 받는다. 다시금 10년간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이 끝날 무렵이 30세.
5. 다시 공정한 방법으로 인재를 거른다.
6. 5년간 철학 교육을 받는다.
7. 5년간의 교육이 마무리 된 후 15년 동안 현실세상에서 실무적인 경험을 쌓는다.
8. 그 중 살아남고[71]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맡긴다.(이 때가 대략 50세 즈음) 이때는 따로 시험이 필요가 없는데 15년의 실무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주변 동료들과 대중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평가를 받아 자신의 우수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자 왕(Philosopher king)의 개념은 동양에서는 공자유교 사상에서 성인 지배자(Sage Emperor / ruler of Saint)라는 개념과 흔히 유사성이 지적받는다. 유럽 문명이 중국 문명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시작했을 때, 유럽의 사상가들은 중국의 통치 체계에서 이러한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호메이니가 플라톤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즉, 이란 이슬람 공화국아야톨라라는 직책이 이러한 '철학자 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기사 그 외에도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역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국가론과 유사하다.

플라톤의 철인통치를 이념적으로 계승하여 과학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레닌의 전위정당론이다. 이 때의 전위조직은 민중의 대리자가 아닌 체제의 수호자적 기구를 말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전위만이 대중의 불가피한 소부르주아지적 동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불가피한 노동조합 활동가적인 편협성이나 편견, 전이나 문제의 되풀이 논쟁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고,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활동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근로대중 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72]

3.2.3. 기타[편집]

2010년대에 들어 많이 쓰이는 인용구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 1권 347c에서, 소크라테스는 "돈이나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기를 승낙하지 않게 할 것일세. ... 따라서 그들이 지배하길 승낙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처벌이라는 것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안되네—이것이 아마 강제당함이 없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게 된 까닭인 듯하네—그러나 가장 큰 벌은, 만약 자기 자신을 지배할 생각이 없다면, 자기만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일세."라고 한다. 이 문장은 민주국가에서 투표 독려의 격언으로 쓰인다. 물론 분명히 하자면 플라톤은 민주정을 싫어했다[73]. 앞의 발언은 일반적인 대중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철학자(즉 통치자)에게 하는 말이다. 즉 철학자가 정치를 외면한다면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의 발언은 민주주의와는 오히려 정반대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철저히 검증된 소수의 엘리트들, 곧 '수호자(guardian)'를 상정하고 이들만이 정치 권력을 잡아 다른 모든 (열등한) 이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민주정이라기보다는 철저한 능력제에 가깝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언이 현대 민주국가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은, 아테네 민주정과 현대 민주정이 지닌 차이점 때문이다. 아테네 민주정은 모든 사람[74] 이 통치에 적합한 능력을 완전히 똑같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능력의 차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추첨 민주정 체제있다. 즉 정치에 특화된 전문적인 프로 정치인이 아닌,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걸쳐있는 전인적인 아마추어[75] 시민들이 이끌어야 한다는게 아테네 민주정의 대전제였다. 이는 현대 민주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통치에 특화된 전문적 '프로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해 선거를 치른다. 이는 아테네와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76]

법 개념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이 국가의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보다 상위에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법률》 편에서이다. 《법률》 편에 개진된 생각의 정도와 범위가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는 미약한 것일지라도, 이런 생각은 비교적 독립된 사법권과 이에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제도화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행정관의 신뢰성과 그들에 대한 통제는 아테네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플라톤의 제안은 행정관들의 모든 조치와 영역에 이런 통제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대로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반대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 못지 않게 《법률》 편이 제시하는 법의 지배와 혼합정체론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법률》(김남두, 강철웅, 김인곤, 김주일, 이기백, 이창우 옮김) 옮김이 해제


플라톤 철학에서 언급되는 민주정체는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아테네의 직접민주정체이다. 상술된 바 있지만 플라톤의 전성기 시절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겪은 고통, 그리고 패배가 끼친 후유증 등으로 인해 개판이었다. 이 와중에 소크라테스도 시민의 투표로 죽는 등, 플라톤 입장에서 민주정은 지배자들(참정권을 지닌 시민)의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주제에 중우정치로 흘러가는 정치 체제였다.[77]

민주주의와 귀족정을 구분짓는 것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가 아니면 일반대중에게 있는가하는 차이이다. 민주주의자란 대중이 어리석고 비열하며 천박하다 할지라도 권력을 나누어 주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현대의 '민주주의' 개념과 고대 플라톤의 직접 민주정체와 과두, 참주정체는 의미가 다르다. 플라톤은 '능력검증 없이 명문귀족 혈통이란 이유만으로 통치자격을 부여하는 형태의 귀족정'은 부정했으며, 모든 시민[78]이 평등하게 교육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플라톤 이론에서의 '철인'은 능력에 의해서 그 자리를 쟁취한 인간에 가깝다. 플라톤의 주장은 "통치에 적합한 소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능력주의(meritocracy)적이고 수호자주의(guardianship)적이다.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당 내부 경쟁으로 권력의 향방이 결정되는 중국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전체주의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은 있다.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로버트 달(『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등의 관점에 따르면, 플라톤은 열린 사회의 적, 수호자주의자이다.[79]

로버트 달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며,[80] 여기에서 "모든 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통치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뻗어나온다. 로버트 달은 현대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필요성 등에서 능력제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전문가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인 "최종적 주권자인 평등한 시민들이 중요한 사안에 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을 돕는 데 한정되며, 최종적 결정권은 평등한 시민들이 갖는 것이라고 논한다. 즉, 대의제와 선거를 플라톤적 개량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리인 선출이라는 대의제적 요소를 갖게 된 것은 근대국가의 큰 규모를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모든 시민들이 단 30초만 직접 발언한다고 해도 1억 5천만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공간적인 제약을 결코 극복할 수가 없으므로 분업의 차원에서 유일한 대안인 대의제가 등장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적인 "통치에 적합한 소수"를 결코 상정하지 않는다. (정신질환이나 연령에 따른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을 예외로 하면) 누구도 평등한 성인 시민 가운데 일부는 통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점만 보아도 그러하다. 이는 의원내각제-비례대표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특정 인물이 "통치에 적합한 소수"라고 믿기 때문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다만 고전적 민주정이 현대의 민주정으로 발전한 것이 플라톤적 개량의 의도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현대 민주정에서도 플라톤적 호소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위에서 인용하듯, 로버트 달 역시도 현대 민주정이 능력제적 요소를 어느정도는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민주정은 '자기통치능력'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지언정, '통치능력'에서의 차이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통치능력'의 차이를 부정한다면, 대의민주정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제비뽑기를 통한 대표 선출이다. 인구수의 문제로 순수한 직접민주주의가 힘들었던건 아테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으며, 그렇기에 아테네는 '제비뽑기'라는 방법으로 관료를 선발했다. 왜냐하면 통치능력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테네의 방법을 21세기 민주국가들이 과연 따라하고 있을까? 아니다. 비록 대의민주정이 직접민주정의 현실적 한계(시간, 비용 등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일지언정, 선거라는 제도는 명백히 '더 알맞은' 사람을 가려내는 제도이다. 심지어 총선에서의 비례대표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비례대표제 항목에서 보듯이, 부적합 인물의 출마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는 비례대표제가 가진 문제점으로 여전히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사람들은 비례대표에서조차 적합한 인물이 좋은 순번을 받았는지, 혹시나 부적합한 인물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지를 않았는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검토한다. 이는 '통치에 적합한 누군가'라는 관념이 민주사회에서도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현대 민주정이든 아테네 민주정이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자"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플라톤의 비판이 현대 민주정도 공격하는 것이기는 하다.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를 막으려 한 플라톤의 생각은 21세기 관점으로도 가혹하다. 그러나 21세기의 평범한 사람들은 비록 목소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다시 말해서 선거가 참정권의 유일한 발현은 절대로 아닐지언정, '적합한' 대표를 선별해야 할 상황은 인생에서 끊임없이 닥쳐온다. 바로 그 상황에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적 호소는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81]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고대에서부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시대에 이미 플라톤은 내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혹은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하는 얘기도 많았으며, 아리스토파네스나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등에서도 어느 정도 플라톤 사상의 혁신적인 부분과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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