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입력2017-06-23 04:00:00 수정 2017.06.23 08:01:53 권홍우 기자
수학 문제 하나가 여기에 있다. ‘xⁿ+yⁿ=zⁿ에서 n이 3 이상의 정수인 경우, 이 관계를 만족시키는 자연수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라.’ 골치 아픈 수학이라고 미리 겁먹고 골치 아파할 이유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렵고 지독한 수학 문제라고 하니까. 누가 이렇게 고약한 문제를 냈을까. 피에르 페르마(Pierre de Fermat:1601~1665)다. 즐겨 보던 수학책의 여백에 이 문제를 낸 그는 풀이(증명)를 남기지 않았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나는 경이로운 방법으로 이 정리에 대한 증명을 발견했으나 책의 여백이 너무 좁아 적을 수가 없다.’
일반인들은 관심도 갖지 않았으나 수학자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경이로운 방법으로 증명했음에도 귀찮아서, 단지 책의 여백이 모자라 증명하지 않았다’는 페르마에게 수많은 수학자들이 자존심을 걸고 증명하겠다고 덤볐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모조리 실패했다. 300년 넘게 내로라하는 수학 천재들이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세상에 등장한 사연도 극적이다. 성실하고 유능한 법관이었던 페르마는 전문 연구자도 아니었다. 취미로 수학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다.
페르마가 수학에 몰두한 데는 이유가 있다. 프랑스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탄한 삶을 걸었던 그는 격변의 시대를 살며 특정 정파에 휘둘리기를 꺼렸다. 당대의 권력자인 리슐리외 추기경의 눈에 들어 승진을 거듭했다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일에만 매달렸다. 공정하게 일하다 보니 명성을 얻었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쌓였다. 페르마는 스트레스를 또 다른 스트레스로 풀었다. 틈이 날 때마다 수학책을 보면서 희열을 맛본 것. 수학을 즐기기만 했을 뿐 과시는 극도로 꺼렸다.
파스칼과 같은 당대의 수학자들의 찬사를 받으면서도 ‘대외 발표’는 전혀 하지 않았다. 페르마는 대신 3세기께 그리스의 디오판토스*가 지은 책 ‘산학(Arithmetica)’을 읽고 또 읽으며 책의 여백에 깨알 같은 주석을 달았다. 훗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 문제도 이 책의 여백에 적었다. 페르마가 이 문제를 찾아낸 시기는 36살 때. 사망할 때까지 유명 수학자들과 교류를 나누면서도 ‘숨은 실력자’로 만족하며 지냈다. 약 30년을 재야 고수로만 지낸 셈이다.
수학에 대한 그의 업적은 장남 클레망 사뮤엘 페르마에 의해 빛을 봤다. 5년간 아버지의 책에 달린 주석을 풀이하고 편지 등을 모은 그는 1670년 ‘페르마의 주석이 달린 디오판토스의 아리스 에티카(산학)’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아들의 손을 빌린 유작(遺作)은 수학자들의 호승지심(好勝之心)을 불러일으켰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얼마나 수학자들을 괴롭혔는지 인도 출신의 영국 물리학자 사이먼 싱의 저서 ‘Fermat‘s Last Theorem(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자세히 나온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전 세계의 위대한 수학자들을 사로잡으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어떤 이는 증명한 사람에게 주라고 거액의 상금을 내걸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이 정리 하나 때문에 결투를 벌인 극성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연들이 쌓이며 문학작품에도 등장했다.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인 아서 포기스의 1954년 작품 ‘악마와 사이먼 플래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악마가 사이먼 플래그에게 질문을 하라고 재촉했다. 만약 악마가 24시간 이내에 답할 수 있으면 사이먼의 영혼을 악마가 갖고, 실패한다면 악마가 사이먼에게 10만 달러를 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파우스트처럼 될까 봐) 고민하던 사이먼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문제로 냈다. 악마는 질문을 듣는 즉시 지구는 물론 온 우주를 날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다음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악마는 내기에서 졌다고 시인했다. 악마는 존경심에 가득 찬 눈으로 사이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처럼 빠른 시간 내에 그토록 수학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그런데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대답하기 어려워지더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어려운 질문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빌어먹을…. 토성에 가서 편미분 방정식을 암산으로 줄줄 풀어내는 버섯처럼 생긴 녀석을 만났는데, 그도 그 문제만큼은 완전히 두 손 들었다네,’
외계인까지 포기할 만큼 어려운 문제 풀이에 인간은 끈질기게 도전했다. 18세기의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749년 문제의 일부나마 처음으로 풀어냈다. 무수히 많은 수학자들이 여기에 골머리를 앓으며 수학 학문 자체도 발전했다고 한다. 철학자, 수학자, 박애주의자인 영국의 버틀란트 러셀 경은 이 문제를 풀다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논리수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컴퓨터의 선구자였으나 불운하게 자살한 앨런 튜링,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독일의 양자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등도 페르마가 던진 문제와 씨름하며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이뤘다. 더러는 이 문제를 푸는 데서 삶의 활력을 찾았지만 일본 수학자 유타카 타니야마는 증명 직전에 화병이 도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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