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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박윤선의 교훈

by 이덕휴-dhleepaul 2021. 9. 21.

한국교회의 현실과 박윤선 박사의 목회적 교훈

실천신학/목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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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현실과 박윤선 박사의 목회적 교훈
허순길 교수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1. 내가 아는 박윤선
박윤선 박사는 그의 생애의 황금기를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1905년 생으로 41세이던 때인 1946년 9월 신설된 고려신학교 첫 번 째 교수로 봉사를 시작하여 55세 때인 1960년 10월까지 14년간 봉사했으니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때를 고려신학교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신학교 개교 후 박형룡 박사가 만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약 1년간 교장서리로 겸허하게 봉사하였다. 1947년 10월 박형룡 박사가 도착한 후 평교수로 봉사하다 1958년 5월 그가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로 떠나게 되었을 때 교장직을 계승하여 1960년 10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기까지 12년간 교장으로 봉사했다. 박윤선 박사는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와 함께 1946년 5월 신학교설립을 의논하고 추진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고려신학교 설립자 중의 한분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봉사는 하는 동안 미국적인 장로교 신학과 유럽 네델란드의 개혁신학 양자를 소화함으로 고신신학을 주조하고 가르쳤다. 결과 그의 신학은 큰 틀에서는 평양 장로회신학의 전통을 이었지만, 실제 그보다는 넓고 깊은 개혁신학이었다. 이는 해방이 되기 전 일제시대에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 제일차 유학 시(1934-6) 는 미국장로교회 대표적 신약 신학자 그레샴 메췐 박사를 시사하고, 두 번째 유학 시(1938-9)는 네델란드 개혁신학계의 변증신학자 코르넬리우스 밴틸 박사를 시사하고 연구할 기회를 가짐으로 가능했다. 그는 유학 시 그가 평양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개혁주의적이라기보다 근본주의적이었다는 것을 까달았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결과 유학중에 새로운 신학의 시야를 발견하고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바로 이해해야 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제 개혁신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 두 분인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의 책을 직접 접하고 스킬더, 흐레이다너스, 리데르보스 같은 신학자들의 신학의 접근을 위해 네델란드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독습하여 곧 네델란드어 책을 해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어학의 천재였다. 이미 어릴 때 사서삼경을 통독 암송함으로 한문을 익혔고, 다음으로 일어, 영어, 독일어를 익혔으며, 신학교에서 성경원어를 정복했고, 미국에서 네델란드어를 자습하여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자로서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정복한 것은 세계 여러 신학자들 중에서도 흔하지 않는 일이었다. 결과 1950년대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한 개혁신학은 한국 신학계에서 매우 독창적이었고 신선한 것이었다.
1950년대까지 한국에서 네델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신학자는 오직 박윤선 한 분 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박윤선 박사의 네델란드 개혁 신학에 관한 관심 때문에 1950년대 고려신학교의 도서관에는 비록 적은 도서관이었지만 네델란드의 교의학자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클라스 스킬더, 주경학자 흐로샤이데, 흐레이다너스, 리데르보스 등의 네델란드어 신학도서가 상당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신학교의 학생들 가운데는 네델란드어와 네델란드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었다. 박윤선 박사는 고려신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의 장로교신학과 네델란드 개혁신학을 동시에 내다 볼 수 있는 넓은 눈을 열어 주었다.
나는 1954년 고려신학교가 부산 용두산 중턱 적산가옥에 있을 때 예과에 입학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그를 4년 동안 특별히 가까이 모시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57년 대학부 4학년 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휴학을 할 형편에 있었다. 이 때 마침 박윤선 박사 가정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가정에는 1954년 초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첫 부인에게서 난 헤란, 은란, 다니엘 세 자녀가 있었고, 둘 째 부인인 이화주 사모에게서 난 어린 성은, 성혜가 있었다. 나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 은란의 가정교사로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은란을 가르쳤다. 식사는 박 교장 집에서 하고 밤에는 학교 교장실에 박 교장께서 강의하다 피곤하면 쉬는 침대가 놓여 있어 그 침대에서 잤다. 이듬해 봄에 은란이가 부산 남산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은란이가 입학을 하자 나는 대학부 4년을 마치고 1958년 신학교 본과에 입학을 했다. 이 때 박윤선 박사는 계속 교장실에서 조교로 일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이것은 나에게는 크게 감사할 일이었고 특권이었다. 당시 일반적으로 신학생들은 주말에 다 전도사로 나가 교회를 봉사했지만 나는 교회봉사를 하지 않고 교장실에서 밤낮 그를 도우며 생활 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생활비는 그의 주석을 출판하는 영음사로부터 나왔다. 박교장이 낮이면 종종 쉬는 침대가 밤이면 나의 차지가 되었다. 교장실에 책상을 두고 그를 도와 드리면서 지났다. 나의 일은 주로 그의 주석원고를 정리하고 그의 논문과 외국에 보내는 영문 편지를 타이핑해 드리는 일이었다. 내가 조교로 돕는 기간에 정리하여 낸 주석이 요한복음 이었고 사도행전 주석도 대부분 정리를 했다. 당시에는 책을 출판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오늘처럼 컴퓨터가 없었으니 원고는 꼭 200자 원고지에 정리하였고, 인쇄소에서 식자를 하여 찍어 오면 교정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적어도 4교 이상을 보아야 인쇄에 넘겨졌다. 이 때에는 이재만 목사님이 영음사의 총 책임을 맡아 주석을 출판했다.
나는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있으면서 그가 겪고 있는 남이 알지 못하는 가정적 슬픔과 어려움을 알았다. 1958년 여름 방학 중에 고향에 두어 주간 갔다 오니 내가 가르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은란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혈액이상이 생겨(백혈병?) 죽었다는 것이었다. 박 윤선 교장은 일찍 어머니를 잃은 그 딸을 잘 기루기 위해 가정교사까지 청하여 공부를 시켜 왔는데 갑자기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쓰리겠지만 그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때에 그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장자가 결혼을 해서 부산 대신동에 따로 사는데 한동안 방탕아로 지났었다. 종종 술을 마시고 집에 찾아와 가정 집기를 부스고 돈을 요구하며 어려움을 주었다. 한번은 사택에 가니 출입문이 부서져 있었다. 그가 와서 행패를 부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종종 일에 골몰하느라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는 특별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끊임없는 기도는 결실을 거두어 결국 그 아들은 회개하고 미국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박윤선 박사를 돕는 기간은 1959년 화란의 자유대학에 다시 가기 위해 논문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해 봄에 그는 나의 결혼을 위해 주례를 서 주셨다. 결혼 설교를 거의 50분 해주셨다. 그는 주석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고 써 갔다. 나는 이것을 타이핑했다. 그가 1953년 10월에 네델란드 자유대학에서 유학을 하던 중 이듬해 봄 3월에 부인이 자동차사고로 별세하게 됨으로 급히 귀국하게 되어 유학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당시 그의 지도교수인 스킾퍼스 교수(Schippers)로부터 박사학위 논문제목을 받아 가지고 왔었다. 그 논문 제목은 “신약과 이교사상”(The New Testamnent and Paganism"이었다. 그는 1958, 9년에 주석 작업을 하면서 이 논문 작성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그런 논문제목을 받은 것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의 고대종교사상과 신약의 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기대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교 사상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지난날 암기했던 사서삼경을 다시 구해 살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을 정리하기 위해 금강경을 위시한 핵심적 불경도 살폈다. 한국 종교로는 천도교를 살폈다. 그래서 그는 신약의 신관과 동양이교들의 신관을 비교하면서 신약에 계시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동양 이방종교들의 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언약과 구속의 하나님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는 논문의 대요를 작성하고 네델란드로 가기 전에 그의 모교라 할 수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더 보충하고 완성하여 네델란드로 갈 생각을 가졌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그가 준비한 논문 내용으로 특강도 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그의 스승이었던 밴틸 박사가 고려신학교에 와서 일주 이상 강의를 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1959년 12월 26일에 미국으로 떠났다. 이 때 나도 박 교장님의 온 가족과 함께 서울에 와서 어느 집사님 댁에서 같이 성탄절을 보내고 26일 김포공항에서 환송을 하고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박 교장은 이듬 해 1960년 5월 갑자기 미국으로부터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가 미국에서 그의 논문의 대요를 그의 지도 교수에게 보냈더니 그의 논문의 내용의 방향이 기대한 것과 다름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주임교수는 신약사상과 그 시대의 이교사상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이 때 그는 크게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곧 그는 학위를 얻기 위해 이상 새 작업을 함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직시 네델란드에 가는 일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누구나 이런 좌절을 겪게 될 때 극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박윤선 박사가라고 해서 천사일 수 없었다. 그가 돌아와 신학교에서 첫 번째 경건회를 인도할 때 그의 좌절감이 그 대로 들어났었다. 그가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학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무디처럼 성경만을 연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모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대한 비판도 겻 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강당에는 지금 담배연기가 자욱합니다”라고도 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주초문제를 아디아포라 문제로 돌리고 이 문제에 자유로웠던 것을 누구다 다 알고 있다. 그는 네델란드에서 학위를 마치려던 일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특강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되어 남이 알지 못하는 실망과 좌절감이 컸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비교적 그의 형편을 잘 아는 처지에서 절대 남을 원망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시는 어른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아픈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안타까이 여겼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인 7월 어느 주일 날 그는 선교사 전송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 못한 일로 다른 시험에 부닥치게 되어 이사회와의 의견 충돌을 가져오게 되었다. 결과 그 해 10월, 14년 동안 그의 생애의 황금기에 그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쏟아온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 때는 내가 졸업반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을 때로 나 자신도 큰 실의에 빠졌었다. 나는 그가 고려신학교를 떠나실 때까지 도와드렸다. 1960년은 박윤선 박사의 일생에 가장 어려운 해였다고 생각된다.
박윤선 박사는 모든 분들이 잘 아는 대로 아주 단순한 어른이었다. 교장실에서 조교인 나에게 솔직하게 “허선생, 내가 논문 방향을 잘 못 잡았어. 나는 논문 제목이 신약과 이교사상이기에 나에게 동양고대 종교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비교 연구 비판해 보라는 것으로 잘 못 이해했지” 하셨다. 혹 어떤 분들이 그의 논문에 독창성이 결여되었었다니 문헌인용에 치밀성과 정확성이 없었다느니 말들을 하는 것 같으나 이는 모두 추측이 낳은 말들뿐인 것으로 안다. 그는 단순하게 지도교수가 요구하는 논문 제목의 내용을 오해하고 지도 교수의 자문 없이 논문을 쓴 것이 실수였던 것뿐이다. 어느 학교든 학위 논문을 쓸 때에는 지도 교수와 자주 접촉하고 자문을 받아 가면서 쓰는 것이 관례이지만 단순한 성격을 가진 그는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학위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일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그가 돌아와 다시 교단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을 크게 기쁘고 감사하게만 생각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박윤선 박사가 없는 신학교는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인정을 받아온 탁월한 개혁신학자이기에 학생들은 그가 하는 강의에 관심을 가졌지 학위문제를 귀중하게 여기기 않았다.
박윤선 박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로 개혁신학이란 학문과 영력을 겸비한 분이었다. 그가 소천한지 벌서 4반세기가 가까워 오지만 그가 교회의 목사와 교사로 남긴 영향은 한국의 다른 어떤 신학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히13:)고 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류에 귀를 기울이고 선진들의 교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제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박윤선 박사가 목사와 교사로서 남긴 목회적 교훈을 세 가지로 간단하게 살피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한 박윤선
우리는 오늘 많은 목회자들이 대 교회(Mega Church)를 지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0세기 말 이전에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해 개종자, 혹은 결신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대 집회를 열고 부흥사들을 초청하여 설교하게 하고 결신자들을 불러 세우며 앞좌석으로 초창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는 다수의 목회자들이 결신자를 얻기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대교회를 이루는데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변 세계에 커져가는 월드 마트나 코카콜라 회사의 본을 따라 큰 회사를 닮은 대교회를 세우고 확장해 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시장전략가들의 전략을 따르는 교회성장전략가들의 자문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교회를 복음이라는 가치 있는 물건을 파는 회사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고객으로 생각하여 접근하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오늘의 고객을 끌려고 하면 현대인들이 어떤 시대에 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서 그들의 취향을 맞추어주라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현대는 번영의 시대이니 많은 고객을 유치하려면 번영의 길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또한 오락의 시대이니 오늘의 고객을 유치하려면 설교를 통해 즐거움을 주고 부담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 죄, 죄 값, 회개란 말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란 말을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즐겁게 들을 수 있고 시사하는 점이 많은 멧세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즐겁게 지나다 스트레스를 풀고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성장전략의 결과가 오늘의 대부분의 강단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한 선포가 차츰 살아지게 했다. 이런 시류에 휩쓸린 목회자들은 번영과 즐거움만을 전함으로 청중들에게 죄에 무관하고 죄에 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하게 되었다. 결과 오늘의 많은 신자들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회개를 모르게 되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은 성경의 지극히 적은 일 부분만을 전함으로 교회를 속화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본을 보여준 박윤선 박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믿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계시)”으로 받으며, 모든 “성경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고백했다. 그럼으로 그는 성경 해석하는 일을 꿀을 짜내는 작업처럼 알고 스스로 즐기고 이 작업에 평생 몰두 했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할 때는 온 정열을 다해 온 몸으로 전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 속의 어떤 부분이 혹 윤리적으로 부끄럽게 여겨지거나, 별의미가 없어 보이는 듯한 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기쁘게 전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우찌무라 간조는 창세기 19장 30-38절의 말씀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여 그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 말씀에서 성경저자의 진실성을 보게 되고, 그 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렇게 주장한다....자유주의자들의 주장 중 하나는 디모데 후서 4장 13절에 ‘내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가져오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일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씀도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연구하던 중 그 문구에서 은혜로운 설교까지 발견하였다. 즉, 바울은 주님처럼 집 없이 살았다는 내용의 설교이다.” 그러니 박윤선 박사는 모든 성경의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모든 말씀을 기쁨으로 전했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 번영과 오락의 시대를 맞아 설교자들이 번영의 길만을 전하고 사람들을 즐겁게만 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타락, 죄, 하나님의 진노, 회개 등에 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하는 설교라 할 수 없다.
특히 박윤선 박사는 죄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심각했다. 그러니 그는 설교에서 죄와 회개문제에 대하여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가 일제 시 만주에서 봉사할 당시 신사참배 강요에 부닥쳐 한번 신사참배를 함으로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때문에 마음이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그는 이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었다.
1950년 6.25 북한의 남침으로 남한 국토의 대부분이 공산군들의 점령 하에 들어갔을 때 부산으로 피난 온 교역자들을 위해 당시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초량교회에서 집회가 열렸었다. 이때 상당수 피난민 목사들은 고려신학파 사람들이 자기들을 억지로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해 집회를 연다고 생각하고 참여하기를 꺼려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참석했다. 이 때가 9.28 수복직전이었다. 당시 강사들은 박형룡, 김치선, 박윤선등이었다.
박윤선 박사가 강사 중 한분으로 집회를 인도했을 때 목사들이 크게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그가 스스로 신사참배한 죄를 공적으로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집회를 인도함으로 그 집회가 죄를 회개하는 집회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 대청동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던 김인서 목사(신앙생활 잡지의 주필)는 “많은 목사들이 고래 배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말까지 했다.
박윤선 박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이 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하는 나 자신부터 내 죄를 회개하면서 증거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즉,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 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그는 교회의 참된 목사와 교사로서 솔직하고 고상한 신앙인격을 보여주었다.
이 때는 해방 후 1946년 6월 기구적으로 회복된 한국장로교회 총회(남부총회)가 모였었지만 1938년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한 신사참배 죄를 공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행정적인 오류처럼 취급하여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결의는 이를 취소한다"고 만 결정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의 한 큰 집단의 지도자로 오래 군임하고 장로교회 목회자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분으로 꼽히는 분이 신사참배를 한지 반세기가 넘고, 목회에서 은퇴를 한 후 템플턴 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내가 지금껏 신사참배 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할 때 신학자 박윤선 박사의 솔직한 고백은 참으로 교회의 지도자다운 것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언제나 회개하고 통회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이 내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고 이를 전했다. 그는 9.28 수복을 당시 집회에서 있었던 목사들의 회개의 결실로 믿고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이다“라고 했다.
박윤선 박사는 언제나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잘 알고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경건하고 겸손한 생활을 보였다. 그는 한부선 선교사가 말한 것처럼 ”유별하게도 겸손한 분“이었다. 그는 성역 50주년 기념예배에서 답사를 하는 중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한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신학교 여름 방학 때 어느 날 교장실에 나와서 새벽에 기도하던 그의 기도소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나는 교장실 침대에서 자고 그가 새벽기도를 위해 나올 시간이 되면 자리를 비우고 교장실 옆방에 있는 도서실에 가서 기도를 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소리를 내어 크게 기도한다. 그 새벽에 일부러 그의 기도 소리를 들으려한 것이 아니라 다른 때와는 너무 달리 슬픈 음성으로 기도를 하게 되어 자연히 듣게 되었다. 그는 한 시간 이상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하는 말만 반복하며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사는 분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거나 죄를 벌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등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설교에서 균형을 잃지 않았다. 성경이 계시하는 언약의 하나님을 언제나 그대로 바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1950년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히11장을 본문으로 읽고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는 중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아니치 못 하신다”고 하며 바빙크의 말을 인용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동일 시 하심이요 자신을 거역하심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죄를 벌함이 필연적이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성경 모두(Scriptura Tota)를 전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공통적인 것이 번영을 위한 설교요 즐거움을 주기 위한 설교이다. 저들은 죄에 대하여 전혀 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이는 반쪽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참된 개혁교회를 건설하려면 성경 모두를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이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했다.(행20:27) 박윤선 박사는 성경 모두를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기 위한 본을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보여주었다.
3. 물질생활에서 소박함을 보여준 박윤선
오늘 우리는 물질이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물량주의로 기울고 있다. 수 백 억원을 드려 크고 화려한 교회당을 세우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대형교회 어떤 목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 교회 목사들도 상상할 수 없는 대우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억대에 이르는 고급차를 굴리며 생활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오늘의 물량주의 중심의 생활은 교회를 속화의 길로 이끌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고, 물질을 초월하고 산분이었다 말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은 그의 기도가 뒷받침이 되었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기도로 모든 물질에 대한 근심을 떨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했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다니면서 평양 모란봉 너머에 있는 가현교회 전도사로 봉사를 했었다. 이 때 충분한 생활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기도로 이를 극복했다고 했다. 그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나의 생활형편은 역시 어려웠지만 그 때도 기도 생활에 열중했기 때문에 생활문제를 염려하지 않고 기쁨으로 지날 수 있었습니다.”라고 썼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다닐 때나 미국유학을 하게 될 때나 가난한 그에게 물질 문제는 항상 극복해야할 난제였다. 그러나 그는 기도로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해 갔다.
특별히 해방 후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교장으로 봉사했을 때 그가 당한 물질적 어려움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고려신학교가 경남노회의 인준을 받고 도움을 약속받았었다. 이 학교가 독립신학교였지만 경남지방 교회들은 고려신학교의 회개운동과 교회정화 정신을 귀하게 여기고 신학교를 위해 성심으로 헌금을 해 보내주었다. 정통장로교회 선교사인 한부선 목사는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사하면서 주말에 시골에 나가 주일 집회를 인도하거나 사경회를 인도하고 사례를 받으면 받은 사례와 차비까지 학교를 위해 다 드려 놓았다. 자기는 선교사로 미국 본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생들 중에는 집에서 여러 날 먹을 보리 주먹밥을 싸 가지고 와서 한 주간 공부를 하고 돌아가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상항 속에서 교수들은 매월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를 참고 견디면서 생활했다.
내가 박윤선 교장의 조교로 도울 때는 아주 초창기에 비해서는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교수들의 물질적인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 신학교는 매월 생활비를 일시에 지불하지 못하고 돈이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서 지불할 때가 가끔 있었다. 이때에 나는 몇 번 이화주 사모님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하게 되어 그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사모님이 신학교의 서무를 담당한 장로님에게 가서 돈을 좀 타오라는 부탁을 받아 가서 돈을 요청하여 갔다드린 적이 있었다.
또 몇 번은 사모님의 부탁을 받고 다른 곳에 가서 돈을 빌려 갔다 드린 일도 있다. 박윤선 교장의 형 박윤석씨가 월남하여 부산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도 매우 가난했다. 그는 부산 남포동 거리에서 점포도 없이 목조판위에 일본잡지와 미군들에게서 나온 영어잡지, 한국잡지 신문등을 펴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사모님이 어떤 때는 이 박윤석씨에게 가서 돈을 좀 빌려 오라는 것이었다.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가난한 형에게까지 가서 돈을 빌려오게 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도 박윤선 박사는 물질생활에 있어서 매우 낙천적이었다. 나는 4년 동안 그를 모시고 있으면서 사모님이 끼니를 염려하며 남에게 돈을 빌려 써야 하게 되는 형편에서도 한 번도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해 말하거나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일을 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하면서도 제 데로 된 집에 살지도 못했다. 광복동에서 송도에 건축한 새 학교교사로 옮긴 후 그는 교사 끝머리에 있는 교실을 주거용으로 리모델링한 허술한 집에서 살았다. 마지막 1,2 년간만 학교건물 가까운 곳에 조금 나은 독채 집으로 옮겨 살았다. 그는 참으로 물질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박윤선 박사는 1984년도 합동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주는 훈사에서 “교역자는 종교업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1985년도 졸업생들에게 주는 훈사에서도 ”삯군(요10:12)이란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시지요? 순전히 생계를 위하여 다니는 교역자를 가리킨 말씀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다 자신이 실천해 온 물질을 초월하는 목회자의 생활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의 경건에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의 종은 물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그에게서 받고 그의 본을 따르려 노력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는 참으로 그의 비문에 새겨있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열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한 말씀을 따라 산분이었다. 물량주의 시대에 살며 물질에 시험을 받기 쉬운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박윤선 박사는 귀한 본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4. 명예를 멀리하고 교권을 경계한 박윤선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한국의 명예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직분 명칭이 호칭으로 사용되어 “장로님” “집사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목사, 장로, 집사를 상하의 계급적 차원에서 보게 되고, 집사로 있다 장로가 되면 승진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런 직분에 있어서 상하의 개념이 한국교회에 정착이 되어버렸다.
목사세계에서도 목사라는 호칭보다 당회장이라 불리어지는 것을 좋게 여기기도하고, 노회장이나 총회장을 높은 자리로 보게도 되어 이를 호칭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목사들이 이렇게 불리어지기를 원하게도 되었다. 이런 잘못되게 정착된 교회의 명예문화는 교회의 속화를 크게 촉진하게 되었다.
박윤선 박사가 고려신학교에 봉사했을 때에는 교회당확보를 위한 소송문제와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충돌한 일은 있었으나, 교권문제로 들어나게 충돌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총신에 봉사하면서 1980년에 철벽과 같은 교권에 부닥쳐 큰 충격을 받고 학장서리로 임명을 받았으나 곧 사면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박윤선 박사는 교권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것으로 여겨진다.
교권은 근본적으로 명예를 탐하는데서 오게 된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이 명예를 탐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크게 경계했다. 그는 “세상이 씌워 주는 면류관을 좋아하는 마음은 신앙을 죽이는 것”이라 하고 “인기나 명예의 두루마기는 신앙의 생명을 탈취하는 거머리와 같은 흉물”이라고 했다. 이는 곧 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목사들이 명예의 두루마기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교권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이해한 “만인제사장”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만인제사장(벧전 2:9) 교리란 교역자나 일반 신자나 차별 없이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한 계단 더 높은 제사장도 아니며, 대제사장도 아니다.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히4:14).“
따라서 그는 많은 교회들에서 목사들이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것을 지적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여 ”장로교헌법의 ‘교회의 모든 권리는 교인에게 있다’란 성경적 헌장은 유야무야로 돌아가고, 오늘날 목사의 권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짙어간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 방면 개혁은 너무도 절실하다“고 했다.
박윤선 박사는 목사가 지역교회에서 행사하는 교권욕이 곧 노회나 총회 등 전체 교회생활에 옮겨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지역 교회 목사의 교권에 대하여 이렇게 강한 개혁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총신대학을 위요하고 나타난 교권의 횡포와 교회분열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과 교회정치체제에 대한 개혁주의적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총신대학교를 사면하고 나온 몇분 교수들과 함께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를 세워 개교할 때 내외에 천명한 “설립취지”에서 “교권의 횡포”를 언급하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리스도만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언급한데서 이를 잘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합동신학교 설립 후 바로 장로교 교회정치를 연구하여 1983년에 “헌법주석”을 간행하였다. 이 주석에서 그는 직분의 개념과 치리적 구조에 관하여 주로 네델란드 개혁교회의 교회법학자들인 Voetius, Bouman, Janssen 같은 분들의 교회법해설과 북미 개혁교회의 van Dellen, Monsma의 교회법 해설서를 인용하고 있다.
결과 그는 장로교 정치에 나타난 직분관이나 치리구조에 대한 기존 장로교회에서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을 소개했다. 그는 직분자들인 목사, 장로, 집사의 동등권에 대하여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사는 교직의 대표자이고 장로는 교회의 대표자이다. 양자의 사역은 동등이다.(헌법5:2)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목사는 장로보다 우위한 것처럼 자처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목사나 장로는 집사에 대해서 역시 그 직분(집사직)이 하급인 것처럼 잘 못 생각한다...교회에 수종 드는 문제에 있어서는 목사도 그리스도에게 수종 드는 자 이고 장로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 사이에는 형제애가 확실히 있어야 된다고 할 뿐이다.(마23:8 참조) 사역 상 평등의 원리는 성경에서 나온 개혁주의 교리이다.” 그는 이런 직분의 평등에 관한 해설을 위해서 van Dellen과 Monsma의 개혁교회 교회질서의 해설을 참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당회,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 구조에 관하여는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치리회들은 수직적으로 생각될 존재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생각될 존재요, 서로 연합전선을 구축한 셈이다.(행15:1-21). 그러므로 우리가 치리회에 대하여 ”상회“,”하회“란 명칭을 즐겨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어 그는 앞서 언급한 저자들로부터 ”개혁교회의 정치는 일반적 의미에서 상회와 하회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한다.
이상 직분자들의 사역상의 평등권과 치리회들의 수평적 관계는 개혁교회의 정치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가 장로교회 정치도 이와 꼭 같은 원리를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개혁교회의 정치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장로교 정치해설에 인용하고 적용한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정치가 직분과 치리회 문제에 있어서 같은 칼빈에게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성경적인 이해와 적용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네델란드에서 6년 이상 유학하면서도 잘 알지 못했으나, 10여년 동안 네델란드계 개혁교회의 목사로 봉사하면서야 바로 깨닫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직분문제에 있어서 사역상의 평등문제를 사실상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국장로교회는 정치면에서 주로 미 남북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북장로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19세기 이 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장로교회는 교구감독체제(parochial episcopacy)라고 주장하여, 지역교회의 목사를 실상 감독으로 봄으로 목사의 위상을 높이고 다스리는 장로들의 위상을 낮게 보았다. 당시 북 장로교회에서 그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한국 장로교회 초기에 그의 직분관이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영향을 주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장로교회에서는 원래 치리회 구조가 피라빗 체제로 이해되고 당회, 노회, 총회에 대하여 상회, 하회로 평범하게 불려왔다. 그럼으로 박윤선 박사가 현재의 한국 장로교회의 당회, 노회, 총회 체제를 수평적인 적고, 큰 회의(minor, major)로 이해하고 개혁교회의 정치원리를 따라 해설한 것은 장로교회의 피라밋식 체제 생활에 익숙해진 교회지도자들에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개혁교회의 교회질서(Church Order)와 그 해설서를 참고하고 직분과 치리회체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교회를 개혁해 보려 노력했던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가 먼저 유럽계 개혁교회 정치의 지배적 원리를 바로 파악하고 장로교회 원리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어느 것이 더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참 교회를 건설하는데 유익할 것인가를 들어내었더라면 한국 장로교회 정치개혁을 위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박윤선 박사가 직분자들을 상하의 관계로 보지 않고 사역 상 평등권을 가진 것으로 보려는 것은 한국장로교회 세계에서는 신선한 새 접근이었다. 개혁교회에서는 직분자들 간에 직임상의 구별만을 인정하고 직분간의 상하의 차별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당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는 직임을 달리하고 함께 교회를 봉사하는 동역자들로 간주 된다. 개혁교회의 정치는 1571년 엠던애서 모인 개혁교회 창립총회 때 받은 교회정치의 지배적인 원리가 교회질서 제 1조에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지배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목사나 장로나 집사도 다른 직분자를 지배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개혁교회에서는 오늘까지도 이 반교권적 원리가 교회직분, 치리회 관계에서 그대로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 결과 개혁교회에서는 당회로부터, 노회, 총회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교권을 추구하는 분이 없게 되고, 교회 직분자들의 교권 행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박윤선 박사는 교회교권이 교회에 자리를 잡을 때 교회가 입게 되는 피해를 의식하고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의 명칭을 당회의장, 노회의장, 총회의장으로 하자는 제의를 하여 합신총회가 한 때 이를 받아드렸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총회는 이는 회중교회 체제를 닮은 것이라고 하여 다시 옛 명칭으로 환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윤선 박사가 회장이란 말 대신 의장이란 말을 제의한 것은 교권을 경계하는 개혁신앙과 정치에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은 어떤 교회적 직임의 호칭이 아니고 당회, 노회, 총회가 모였을 때 회의를 질서 있게 사회하는 책임을 진 분(Chairman)임을 가리킬 뿐이고, 치리회의 공식 문서에 대표로 서명하게 될 때 사용되어질 뿐이다. 이것이 직함이 아니니 호칭으로 삼아 회의 밖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명예문화가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회의 밖에서도 이것이 호칭으로 사용되는 일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이 목회자들에게 교권욕을 유발하게 하고, 그 자리를 쟁취하기 위한 가진 불법과 부조리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지역 교회와 교파에서 자리 잡힌 목사들의 교권욕이 교회연합체에도 그대로 미처 지난해에 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문제로 세상 앞에 한국교회가 큰 부끄러움을 들어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합신 총회가 어떤 면에서 바른 개혁을 추구해 오다 옛날로 화원하게 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긴다. 개혁교회는 성경의 가르치는 원리를 재발견하고 이에 따라 항상 개혁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장로교회의 목사로 목회를 했고, 그 후 교수로 봉직하다 서구 네델란드계 개혁교회의 청빙을 받아 10여 년간 목회를 하는 중에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이 개혁교회에서는 지역교회 당회에서나 노회, 대회, 총회에서 교권이 전혀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과 어느 누구도 교권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1980년대에 들어 갈기갈기 찢겨 분열되어 온 것은 진리 수호를 위한 투쟁 때문이 아니었고, 교권과 지역패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는 지역교회, 교파, 교회연합체에서 교권을 추구하는 분들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이 크게 훼손되고 교회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별 다름 없음이 들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교회가 세상을 닮을 때 교회의 존재가치는 살아지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에 뿌리 깊이 내려있는 교권주의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박윤선 박사 같은 분의 개혁적 의지가 우리 교회 안에 다시 되살아나고, 한국 장로교회가 교권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모색함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주와 왕으로 섬기고 사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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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lewisnoh.tistory.com/entry/한국교회의-현실과-박윤선-박사의-목회적-교훈 [Post Tenebras Lu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