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로 교회를 상정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공동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며, 신앙, 혹은 신학이 가지고 있는 행위와 존재의 일방성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장소이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사랑했던 젊은 신학자의 사상을 이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여기에서 다룰 B부분은 이 책에서 본회퍼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Ⅱ. 이 책의 배경
본 작품은 1931년, 본회퍼의 교수자격 취득을 위한 Habilitation으로 제출된 저작이다. 1930년 출판된 “성도의 교제”와 더불어 이 작품은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론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계시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공동체로서 실존하신다는 점에서 교회를 통한 계시의 실존과 연속성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성도의 교제”에 비교해볼 때, 이 책에서 본회퍼는 바르트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바르트의 초월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교회”를 통한 “계시”의 구체성과 현존성, 그리고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는 그리스도 중심성, 교회 중심성, 그와 더불어서 계시의 현실성에서 출발하는 신학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함께 본회퍼는 교회는 단순한 “성도의 공동체”, 혹은 “종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교회로서 실존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회퍼는 인간의 이성 뿐 아니라, 인간의 전인격이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만나고, 인간의 전인격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계지워진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강조한다. 이 책에서 본회퍼는 교회의 현실성 속에서 신앙안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연속성과 인간적으로 인격적인 집단적 자아의 연속성을 보면서, 개인의 실존론적 인식과 교회의 공동체적 인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Ⅱ-1. 구성
앞의 A부분에서 본회퍼는 인간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에게는 참된 진리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B부분에서 본회퍼는 인간은 “바깥으로부터”의 계시를 통해서 참된 진리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자아의 연속성을 보장하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장은 곧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교회이다. 이 장에서 본회퍼는 우선, 행위의 문제를 다룬다. 행위의 문제를 통해서 실존과 결단에 관련하여 우발성 및 불연속성 그리고 초월이 강조됨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존재의 문제를 다룬다. 존재의 문제는 소여성(Gegebenheit), 연속성, 대상성, 그리고 교리의 강조를 가능하게 해준다. 본회퍼는 이 둘의 문제점을 보완하며, 행위와 존재가 종합되는 장소로서 교회를 상정한다. 여기에서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초월주의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만남과 종합을 시도하며, 신학적으로는 “행위와 존재”의 문제를 계시의 교회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계시 개념 자체가 인격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일방적인 “행동”에 의한 해석(신중심으로는 바르트, 인간중심적으로는 불트만)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방적인 “존재”에 의한 해석(하나님의 자유를 구속시키면서)이 서로 맞서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1)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학적 측면들을 다룬 다음, 1931년 “행동과 존재”에서 본회퍼는 바르트의 초기의 계시개념이 초월일변도이며, 우연적 계시행동 일변도임을 지양하고, 계시이신 그리스도께서 초월적 행동자이실 뿐 아니라 교회 안에 계시고, 바로 이 계시가 교회 공동체로서 현존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계시의 초월적 행위와 계시의 존재의 종합을 교회론에서 찾는다. 이 책에서는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사회학적 성격 규명에 집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데 비해서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어주고 있다.
Ⅱ-2. 본문의 내용
B. 계시에 대한 해석 안에서의 행위 - 존재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해결로서의 교회
1. 행위개념에 대한 계시의 해석
a) 계시의 우발성(Kontingenz)
앞에서 본회퍼는 인간이 “나”를 중심으로 인식을 전개한다면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 장에서는 역시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자신의 자기 이해가 비진리 안에 있는 것조차 모른다는 말과 함께 서두를 열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진리에 설 수 없으며, 인간의 자기 이해를 올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계시에 의해서 가능하다.2) 일단 계시가 일어나고 이것이 신앙으로 수용될 때에만, 그리고 이 계시와 이 계시의 진리에 조명될 때에만 인간은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진리를 옳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비진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이 계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 그분에 의해서만” 이러한 일은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실존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계시를 만났든가, 그렇지 못했든가 둘 중 하나에 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계시는 인간의 이성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자유에 달려있다. 본회퍼는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둔스 스코투스나 윌리암 오캄같은, 계시의 우발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접근을 고려에 넣고 있다. “실존은 계시에 대한 관계안에서 계시에 의한 관련을 맺은 것으로 혹은 관련을 맺지 않은 것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지만, 이것은 인간의 처분에 달린 일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에 달린 일이다. 계시의 우발성에서는 이성의 초월 즉 계시의 절대적 자유가 주장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그분이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3) 이러한 시각은 이미 바르트에 의해서 주어져 있던 시각이었다. 그런데 본회퍼는 바르트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계시개념을 염두에 두면서도 동시에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본회퍼는 바르트의 계시개념은 지나치게 유명론적이며, 우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회퍼는 바르트의 행동 개념은 개념화될 수도 없고, 조직화될 수도 없으며, 시간적 범주 안에 들어올 수도 없다고 보고 있다. 즉 바르트가 “유한은 무한을 수용할 수 없다”(finix non capax infiniti)라고 하는 입장에 서 있다면, 본회퍼는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공내적 현존에 입각하여 “유한은 무한을 수용할 수 있다.”(finitum capax infiniti)라고 하는 입장에 서 있다.4) 본회퍼는 바르트의 계시관을 몇가지 이유에서 비판하고 있다. 우선 바르트의 계시관은 계시를 순전히 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받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순수한 ‘행동’으로 이해되었고, 하나님의 자유로 시작된 행동들 속에서만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속에서 듣는 것과 믿는 것을 창조하고, 동시에 그 자신이 인간 속에서 듣는 것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본회퍼는 바르트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계시개념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비대상적인 것”(Nichrgegenständliche),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것”(Unverfügbar)로 물러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는 확고부동한 신학적 진술에 의해서 고정될 수 없고, 모든 신학적인 진술은 비판적인 유보(kritische Vorbehalt)아래 놓여버리고 만다고 말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순수행동이기 때문에, 비록 바르트가 시간적 범주들을 사용해서 계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논리상 이러한 계시는 시간적 범주로 설명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 그리고 믿음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무한을 포함할 수 없는 유한에 갇힐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역사적 순간은 유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포함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주님(Herr)으로 남아있으며, 언제나 주체(Subjekt)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분은 언제나 도래하고 있는(kommend) 하나님이며, 현존하는(daseinend) 하나님이 아니다. 본회퍼는 바르트가 가지고 있던 이와같은 우발적 계시개념이 변증법적 신학으로 이끌어주는 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체계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질적 차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파악하고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계시는 신학적 체계안에 가둬둘 수 없으며, 하나님은 항상 자유한 비대상적 순수행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것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신학조차도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쓰실 수 있다.5)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도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본회퍼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초월적 계시에서 이해된 하나님의 자유란 형식적인 것으로,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행동으로 이해된 계시만으로는 신학을 위한 본래적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계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유, 즉 그의 자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로부터 나오시고, 인간에 대한 계약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어주심을 통해서, 즉 그분이 자유롭게 맺으신 그분의 계약을 통해서 주시는 자유인 것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자유로우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거기에, 즉 영원한 비대상성이 아닌, 교회안에서의 그분의 말씀 안에서 “가질 수 있게”, “잡을 수 있게”있다. 여기에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내적 현존 혹은 교회로서의 현존이 언급되어진다. 본회퍼는 이렇게 해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자유의 형식적인 이해를 보충할 수 있다고 본다.6) 본회퍼의 이러한 시각은 초기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계시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강조 속에서 교회마저 심판과 위기로 몰아넣은 데 반해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내에서, 그리고 교회의 모습으로 우리가 포착하고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본회퍼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유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계시의 순수한 행위이해로부터 나와서 존재의 개념을 향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장에서 새로운 계시개념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b) 계시의 인식
순수한 행위개념에 입각한 계시의 해석은 참된 초월적 주장(echte transzendetale Ansatz) 속에 그 상응점을 가지고 있다. 초월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우리는 인식적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인식의 대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알려진 그 인식의 대상 밖에 있는 실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진 것이 없다. 초월적인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대상은 인식으로 이끌려진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형성된다. 오로지 인식된 것, 그리고 인식하는 것의 근거만이 나로부터 자유롭게 남아있다. 대상적인 것은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고 혹은 형성되어 있다. 이제 이러한 맥락으로 계시를 집어 넣어보려고 한다면 몇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계시를 대상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비대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본회퍼는 인식론적으로 계시는 비대상성에 넣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상적인 것은 “나”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은 항상 주체여서 그를 인식론적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를 피한다”라는 것이 될 것이다. 본회퍼는 실제적으로 계시에 대해서 언급이 되려면, 그것은 인간에게 계시될만한 것, 인식될만한 것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인식될만한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본회퍼에 따르면, 계시가 우리에게 이해되는 때에도 하나님이 계시를 아는 것이 주체인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계시의 인식은 “신앙”(Glaube)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이해의 주체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이것을 본회퍼는 “하나님은 계시 안에서 자기 스스로의 이해의 행위 안에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의식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대상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오로지 신앙의 행위 안에만 있으며, 여기에서는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7)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동시에 초월적 주체로 남는다. 하나님은 신앙의 행동 안에서, 인간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만 신앙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신앙의 주체는 그분 자신이다. 따라서 신앙은 무언가 본질적으로 종교와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발효된 신앙은 오로지 행위 안에 있다. 내가 믿는다 혹은 믿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의 종교적 행위들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반성을 함으로써 얻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회퍼는 내가 신앙함을 나는 판단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본회퍼는 내가 믿는 것을 아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뿐이다. 신앙은 그 자체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만 나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안다.”8) 동시에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반성안에서 나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비대상성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나의 비대상성을 불러오고, 이는 곳 계시는 신앙의 비대상성이어야 한다고 본회퍼는 보는 것이다.
본회퍼는 만일 이것이 무시되고, 인간에 의한 앎이 가능해진다면, 또다른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앎의 행위를 통해서 알려진 것은 자아의 처분에 놓여진다. 이럴 경우 “나”는 세계의 주인이 되며, 계시는 무시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참된 체계는 종말론적 가능성이기 때문이 이러한 것은 가능할 수 없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따라오는 결론은 하나님은 오로지 행위 안에서만 실존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회퍼는 불트만을 비판한다. 불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서만”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실존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실존의 이해는 하나님의 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말대로라면 신앙이 오로지 하나님에게로만 지향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무시될 수 있다고 본회퍼는 지적한다. 본회퍼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에게 나의 실존을 처음으로 노정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나의 실존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불트만은 말할 수 없다고 본회퍼는 지적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계시가 순수한 행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계시의 존재가 나의 실존적 지식의 바깥에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바깥에 나의 사고, 나의 지식이 있을 수 있는 계시의 존재가 있지 않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본회퍼의 결론이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행동과 존재의 종합을 추구한다.
c) 결단의 인간
계시를 순전히 행동으로 해석하는 계시의 개념에 의하면 실존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만 진리 안에 있고, 진리 안에, 즉 결단안에 서 있는 실존만이 자체를 이해한다. 본회퍼는 “인간 실존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안에서만 진리 안에 서 있기 때문에 이 진리 안에 있는 인간은 어느 때든지 비진리로 떨어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진리 안에 있음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결단”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 안에 혹은 하나님의 결단 안에 있는 인간 실존이란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심판과 자비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이 실존은 “나는 죄인이다.”라든가 “나는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계속적으로 비진리로 떨어지는 결단을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결단을 하는 것도 역시 이미 결단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은 죄 속에 있든가 은혜 속에 있든가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를 통해서만이다. 본회퍼는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의 문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은혜로 말미암는 초월적 만남을 가진 이후, 즉 하나님의 결단이 있은 이후, 새 인간 실존의 계속적인 결단을 문제로 삼는다. 실존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에 대한 대답안에서 결단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의 실존이 계속적인 행동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계시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회퍼는 계시 밖에서 성취된 실존의 개념을 말하는 불트만을 비판한다. 우리는 현존(Dasein)의 역사성을 죄의 위치로부터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트만처럼 죄의 상태를 역사성으로부터 해석할 수는 없다.9) 불트만과 같은 입장을 떠나서 본회퍼는 인간의 실존은 계시를 통한 자기결단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재기된다. 만일 인간이 계속적인 결단안에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러한 “결단으로서의 존재”는 동시에 어떻게 연속성(Kontinuität)을 지닐 수 있을까? 즉 계시를 통해 계속적인 결단을 하는 새로운 자아는 어떻게 통일된 자아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본회퍼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있어서, 하이데거도, 바르트도 불트만도 모두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은 “신앙 안의 존재”의 이해에 있어서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은 존재연관(Daseinsbezogenheit)안에 있다. 그것은 연속성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것에 대해서 결단이 내려져 있는 세계에 대해서 떨어진 존재안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실존은 항상 죄가운데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미 죄 안에 있는 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신앙안에 있는 존재로서 이해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능성으로서의 존재는 그 자체의 한계안에 가리워 있는데, 신앙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두가지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한가지는 바르트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트만에 의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전체의 “나”의 연속성을 희생하고 새로운 실존의 연속성을 보호하려고 했다. 불트만은 역으로 새로운 존재의 연속성을 희생시키고, 전체 “나”의 연속성을 보존시키려고 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나”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예전의 “나”는 비존재로 규정된다. 이것은 곧 예전의 “나”를 지양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역사성을 희생시키고 얻어질 수 밖에 없다. 본회퍼는 앞에서도 지적했던, 이러한 바르트의 개념이 무시간성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지적한다. 본회퍼는 여기에 대해서 actus directus는 본질상 무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할 수 없음에 있으며,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향한 시간적인 지향성” 속에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그를 통하여 실존은 시간적 실존이 특별한 방식 속에 있는 가운데, 전체적인 역사성 안에 있게 된다. 본회퍼는 바르트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두가지를 고려한다. 하나는 우리는 새로운 “나”를 경험적인 “나”와 동일시하여 생각할건가 하는 것이다. 만일 새로운 “나”의 행동이 초시간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경험적 신학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성, 실존성은 희생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나”는 역사적 전체인 “나”로서 이해될 수 없다. 또 하나, 만일 “나”(Ich)와 “부정된 나”(Nicht-Ich)가 서로의 부정의 관계(Negationsvehältnis)에서 생각된다면, “나”의 신앙은 부정된 “나”와 그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정점으로 하는 신앙 체계에 있어서, 어떻게 신앙을 가진 것으로서 이미 부정된 “나”인 신앙하는 “나”가 어떻게 이 부정된 “나”를 믿을 수 있는지, 아니면 “나”의 것과 부정된 “나”의 것이라고 하는 두가지 상이한 신앙의 행위가 있을 수 있는지 연속성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이에 반해서 불트만의 역사성의 개념은 새로운 “나”와 전체의 “나”와의 연속성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전체적인 “나”는 하나님의 요구하에 서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결단에서 그것은 새로운 “나”이며, 죄로 돌아감에 있어서 그것은 예전의 “나”이다. 그러나 항상 그것은 전체적인 면에서 그 자체이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나를 연속성에서 관찰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결단의 모든 의식적 행동을 통해서만 구체화 되는가? 여기에서 무엇이 도대체 결단이라고 불리우는가? 즉 무엇이 “하나님께 혹은 악마에게 속한다고 말해지는가? 불트만에게 있어서 명백한 것은 하나님의 결단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결단은 나의 실존론적인(existential) 가능성도, 실존적인(existentielle)가능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죄안에서 이미 나를 발견할 때, 그러나 나는 신앙을 가진 자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여기에서 어떻게 “나”, 즉 이미 죄 속에 있는 “나”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지는 분명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회적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고 본회퍼는 밝힌다.
본회퍼는 여기에 부연해서 제베르크(Seeberg)의 예를 설명한다. 제베르크가 가지고 있던 자발주의(Voluntarismus)로부터 새로운 의지정향(Willensrichtung)의 개념이 도출된다. 새로운 자아는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방향을 가지는, 새로운 의지이다. 이를 통해서 자아의 역사성, 전체의 연속성은 해결되는 듯 보인다. 또한 일상성(Alltäglichkeit)의 문제 역시 해결되는 듯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의지의 정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의 행동의 해석, 그리고 존재의 해석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제베르크의 자발주의 역시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되고 만다고 말한다. 루터의 칭의론의 영향을 받은 제베르크에게 있어서 칭의를 받은 자는 죄인으로 남는다.10) 제베르크에게 있어서의 새로운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방향이 언제나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면, 즉 매번 옛 자아로부터 파쇄되어 나오는 새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연속은 보장받을 길이 없다. 따라서 연속적 “나”에 대한 개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것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서 교회의 개념을 상정한다.
인간의 연속, 인격의 통일은 인간의 실존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정초된 곳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러한 말씀은 인간을 “아담 안에서의 존재”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의 존재”로서 이해되도록 한다. 그래서 통일성의 정초된 존재는 말씀을 통해서, 아담안에서의 존재,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를 통한 통일에 기반을 둔 존재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경험의 데이터가 아닌, 계시로서 신앙에 존재한다. 따라서 오로지 신앙 안에서만 인간의 “존재”, 그리고 통일성은 드러나게 된다.
2. 존재개념에 대한 계시의 해석
a) 계시의 “존재”
“존재로부터 행동이 나온다.”(Agere sequitur esse)라고 하는 명제는 지금까지 언급했던 초월주의에 반립되는, 카톨릭과 17~18세기 개신교 교의학의 존재론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문장이었다. 본회퍼는 이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esse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행동하시기 전에 “존재”하신다고 하며, 인간 역시 행동 이전에 “존재”하고 이 “존재”에서 행동이 나온다고 본다. 계시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해석은 이것을 기본적으로 인식초월적인 것으로, “대상적인 것”(Gegenständliche)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행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있으며, 행동의 힘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초월주의적 계시 이해와는 달리 이 “존재”에 입각한 계시 이해는 교리, 정신적 경험, 제도라고 하는 세가지 존재자에 의존한다. 본회퍼는 계시와 동일시하는 “주어진 실체”, 즉 위와같은 세가지 계시의 형태를 비판하고, 그의 존재의 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본회퍼는 계시를 “교리”(Lehre)와 동일시하는 입장에 대해서 비판한다. 계시를 교리와 동일시한다면, 즉 하나님이 그의 본질에 대한 교리 안에 매여 있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교리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고, 인간적인 체계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은 자의로 그것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계시 개념은 인간의 실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나님은 나의 경험 안에 현재하고 인간의 경험의 체계안에 분류되어 나의 실존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은총적인 하나님의 교리,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교리는 우리의 실존을 꿰뚫고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교리로 변화되지 못하고 우리의 체계에 대한 보충으로 머물게 되고 만다. 본회퍼에 의하면 계시 이해의 문제는 이런 저런 경험을 재생하는 문제가 아니고, 계시가 나의 실존으로 침입하여 그것을 폭로하고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아는 문제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불러 일으키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계시란 교리이기 이전에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며, 이 기독교적 계시는 인간적인 것과 상통하는 존재론적 도구에 의해서 포착되는 그 무엇을 초월한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와같은 계시와 교리의 불연속에도 불구하고 계시와 교리가 과연 교회론을 통하여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모색한다.11)
다음으로 본회퍼는 계시를 종교적 경험과 동일시하려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 계시를 의식 안에 있는 경험으로 이해한다면, “존재자의 대상성”이 계시에 부여된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나의 경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들의 체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경험 체계 안에 현존하시고, 인간의 경험 체계안에 속하신다면 나의 실존은 변화될 수 없다. 계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경험을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계시가 나의 실존에 와닿음으로써 나의 실존을 노출시키고 나의 실존을 새로운 실존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즉 어떤 종류의 종교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이 예수 그리스도와 해후하여 전실존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 본회퍼는 계시와 종교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한계를 그의 교회론에서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세 번째로, 본회퍼는 계시를 제도와 동일시하는 입장에 대해서 고찰한다.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축자영감설은 계시를 하나님의 제도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양자의 경우 계시는 대상화되고,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존재한다. 카톨릭 교회의 경우, 그들의 제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라고 하는 말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전적으로 초주체 속에 자리가 주어진다. 여기에 부합하여 교회를 통하여 인간 속에 주입된 은총은 처음부터 Habitus의 형태 안에서 표현된다.12) 여기에서 모든 강조는 인간의 존재 위에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본회퍼는 여기서도 인간의 경험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도의 존재는 죄로서의 인간의 존재에 영향을 줄 수 없고, 그것은 인간에게 대결해 서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제도와 계시를 동일시하는 시각하에서 인간의 실존은 마주쳐질 수 없다. 인간의 존재는 오로지 “바깥으로부터”(von außen)만 마주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는 바깥으로부터 정초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이 “바깥으로부터”란 실제로 인간의 실존을 마주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실존으로 들어서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에서의 바깥이 아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의 존재해석 안에서 이것은 보증될 수 없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밖으로부터” 나를 대면해 서 있는 다른 “인격”과의 실제적인 만남(Begegnung)만이 우리 실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개념은 제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카톨릭과 개신교 정통주의를 극복한다고 본다. 본회퍼는 제도 대신에 “인격들의 공동체”, 축자영감된 성경 대신 “계시”를 말하고자 한다.
본회퍼는 위와 같이 계시를 존재자(Seiende)로 해석하는 계시개념은 기독교적 계시개념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계시개념은 모든 존재자는 행동과 존재에 의해서 초월된다고 하는 사실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초월적인 나(transzendalisches Ich)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것은 대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실존방식을 만나는 계시는 신학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리고 인간에게로 향하지 않는다면, 존재자는 인간의 실존을 만날 수 없다. 존재자를 “통하여” 일어난 것은 계시의 문제이다. 그러나 “통하여”(durch)의 의미로부터 모든 것이 의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계시와 존재자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을 사용하여, 계시이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이 “존재자”를 넘어선 “존재”이실 수 있는가를 추구한다.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는 순수한 계시로, 순수한 소여성으로 가져와질 수 있다. 따라서 계시를 존재자로 확정시키는 것도 잘못이며, 비존재로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잘못이다. 본회퍼는 이 두가지가 하나의 존재방식(Seinsweise)안에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보면서 교회론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본회퍼에 말을 따르면 계시란 존재자와 비존재자를 포괄하는 “존재자로 존재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에 의해서 가능하다.
b) 계시의 인식
만일 인식의 대상이 되는 계시가 “존재자”라면, 그것을 통해서 긍정적, 직접적 인식이 생겨난다. 이러한 계시 개념에 해당하는 것은 현상학적 방법이다. 현상학적 방법은 인간 자기 자신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자들”을 통한 본질 직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존재자들 배후에 있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은 인간의 실존 안에서 수행되기 때문에 현상학적 방법으로는 기독교적 계시가 이해될 수 없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거기에 있는 어떤 실체와 같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에 반해서 “계시”가 우발적 사건을 통해 와 닿는다는 것을 안다. 본회퍼는 현상학적 방법은 인간의 실존에로 이끌어가주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참된 존재론에 의해서 인간의 실존과 연관을 맺는, 그러나 전적으로 실제주의(Aktualismus)13)안에서 머무르지 않는 인식개념이 요구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나”에 대항해서 서 있어서, 나의 실존 양식에 도전해오고, 강권해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 대상은 원칙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하고, 인간의 아는 것 자체가 이미 알려진 것 위에 기초하고 있고, 또 그것 속에 닫혀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대결해 와야 한다. 이러한 대상은 이미 “나”에 반대해서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실존은 그것의 인식 앞에서 새로이 지양되어야 하며, 나의 인식은 그것을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본회퍼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설교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삼위일체적 인격이신 하나님의 계시는 이러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c) “.......안에 있는 존재”(Sein in ...)로서의 인간
그러므로 본회퍼에게 있어서 계시의 참된 존재론에 의해서 요구된 인식은 인간의 존재가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본회퍼는 계시를 “존재자들”로 인식할 경우 이 계시는 축자영감된 성령이든, 카톨릭 교회이든,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무엇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본다. 여기에서 “나”는 존재자에 대해서 앞선 위치를 차지하며, 존재자는 인간에게 종속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존재자의 보호 안에서 이미 발견된다. 그것은 언제나 이미 축자영감적인 성경의, 종교적인 경험실제 등등의 보호영역의 범위 안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들은 결코 인간의 실존을 만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계시에 대한 정확한 존재해석에 대해서 요구되는 인식은 인간의 실존이 언제나 이미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적인 인격 안에 있는데 이 신적인 인격은 “존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자로 존재하는 존재”(das seinende Sein)로서 인간이시기 때문에 인간 실존을 구축하여, 우리 실존은 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동시에 교회 안에 존재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안에 있는 존재”는 두가지 결단적인 규정들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의 실존과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 그것은 연속성 안에 있는 존재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여기에다가 “계시의 현실성(Wirklichkeit)은 인간의 존재를 만드는, 그러나 이 존재는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위격인, 존재하는 존재 자체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그림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단, 이것을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즉 “교회안에 있는 존재”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 “...안에 있음”은 인간실존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실존적 행동이 따라야 하고, 이 실존적 행동들은 저 “...안에 있음”에 의해서 구축된다.14) 이런 식으로 해서 참된 존재론은 존재자 안에서 발견되는 인식이 존재자의 존재 앞에서 계속해서 스스로 지양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이 존재자의 처분성으로 강요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그리고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인식 그리고 하나님을 통한 인간의 인식이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본회퍼는 밝힌다. 여기에서부터 참된 신학적 존재개념에 대한 시각은 열리게 된다.
이상에서 본회퍼는 행동을 위주로 하는 바르트와 불트만의 초월주의적 신학을 비판하고 존재론 위주로 나가는 카톨릭 신학과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행동일변도의 신학과 존재 일변도의 신학을 극복하는, 종합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고 있다. 그것을 본회퍼는 다음장에서 논의할 교회론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교회론을 통해서 본회퍼는 행동과 존재의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주고 있다.
3. 행동-존재 통일성으로서의 교회
이와같이 본회퍼는 인격적, 실존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동시에 만남이 그와 “연속성”안에 있을 수 있는 존재를 찾고 있다. 즉 인간을 결단으로 부르지만 그들 가운데 있는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순수행동”(dctus purus)과 “주어진 존재”의 혼합을 이미 교회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에 이어서 여기에서도 그 대답을 교회에서 주려고 한다.
본회퍼는 우선, 여기에서 4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1. 인간의 자기 존재의 이해(Daseinsverständnis), 자기 이해(Selbstverständnis)는 어디에서 얻는가. 2. 계시의 존재양태(Seinsweise)는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가? 실제적으로든, 존재론적으로든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인가?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신학적으로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가? 3. 인간의 존재방식은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가? 결단으로서이든, 혹은 “...안에 있는 존재”로서이든, 자아의 연속성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4. 계시에 대한 각각의 해석으로부터 인식개념에 대해서, 신학적 지식에 대해서 그리고 학문개념에 대해서, 체계에 대해서 무엇이 생겨나는가?
본회퍼는 위에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인간의 실존은 오로지 바깥으로부터만(von außen) 마주쳐질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마주쳐짐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참된 바깥으로부터는 오직 계시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교회라고 하는 장에서 일어난다는 뜻에서 교회는 인간의 실존 이해의 장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교회와 세상을 대면해 서 있고 심판과 용서라고 하는 초월적 행동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의 존재양태가 가능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헐적으로 피결정되거나 (바르트), 신앙적 결단들의 순간에 의해서 인간이 간헐적으로 새 실존이 된다고 하는 초월주의 (불트만)을 극복하고, 교회안에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가 가능하며, 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인식될 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르트), 실존적 지식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불트만) 신학적 지식의 문제를 취급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의 신학적 지식”의 문제를 취급한다.15)
a) 존재이해(Daseinsverständnis)의 장소로서의 교회
본회퍼는 여기에서 참된 존재이해는 교회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교회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만 참된 존재이해는 가능하게 된다. 본회퍼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 안에 참된 의미의 자기 이해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을 진리에로 옮겨놓을 수도 없다고 본다. 인간의 존재는 참된 “바깥으로부터”(von außen)가 우리를 진리로 세워넣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존재이해를 제공한다. 참되게 밖으로부터 온 계시적 사건의 우발성만이 우리를 계시에 붙들어매고 우리를 진리에로 옮겨놓음으로 우리 자신의 현존을 이해하게 한다. 이러한 계시적 우발성은 존재론적 철학 안에는 있지 않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우발성도 아니고, 계시도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죄된 인간이 화해로 들어가는 사건도 아닐 것이다. 계시 안에 인간을 포함하는 것이 하나님의 행동이라면 이것은 현실존재의 자율적 철학의 가능성 밖에 있다. 이 계시의 우발성의 내용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계시의 사건이다. 인간의 참된 자기 이해는 계시 사건으로 인간이 끌어들여져야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철학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라면 그 무엇을 통해서도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계시사건으로 이끌려진 존재를 본회퍼는 “교회 안에 있는 존재”라고 개념짓는다. 즉 신학적-사회학적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것으로부터 행위-존재-문제에 대한 연관 안에서 제기된 질문이 논의되어야 하고, 대답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16)
b) 교회안에서의 계시의 존재양식(Seinsart)
본회퍼는 “계시는 오로지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한,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현재적 선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교회개념에 대한 연관 속에서만 생각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선포는 현재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에 대한 계시사건은 성취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러할 때에만 계시의 우발성, 즉 “바깥으로부터”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발성은 오로지 현재안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현재 일어나는 선포에 의해서 “일어난 것”, 즉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다가오는 것”으로서, 즉 미래적인 것으로서 현재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에 선포함으로써 우리에게 계시의 우발성으로서 다가온다. 이러한 개념은 바르트나 불트만에게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있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선포는 “교회안에서”일어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현재화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며,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공동체를 위한 선포 안에서 그리스도는 선포(말씀과 성례전), 그리고 공동체의 모아진 주체(Subjekt)이다. 즉 그리스도는 기독교 공동체의 “총체인격”(Gesamtperson)이다.17) 여기에서 본회퍼는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개념을 인격적 공동체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인격으로 계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이다. 교회는 단순한 인간적 공동체도, 인간적 사귐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리스도 위에 근거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δευτερος ανθρωπος로서, 새로운 인간으로서, 보다 더 잘 표현하면 : 새로운 인간성 자체로서 계시된다.
본회퍼는 이것으로부터 계시에 대한 행위의 해석, 그리고 존재의 해석에 대한 질문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공동체에게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의 각 개인들에게 스스로를 주신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행위하는 주체, 선포하고 신앙하는 주체가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으로서 그러하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계시는 선포된다. 하나님의 자유는 인격적인 공동체 안으로 얽혀들어간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묶는 것(binden)18)”, 그것이 하나님의 자유이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실제로 용서의 말씀에 대한 처분권을 갖게 된다. “나는 용서받았다”(mir ist vergeben)이라는 말은 공동체 안에서 단지 실존적으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그것을 설교나 성례전에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dir ist vergeben)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그와같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한명의 그리스도”가 된다.(ein Christus werden)
본회퍼는 계시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며, 이것은 특별한 기독교적 사회학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위에서 전개한 문제들은 개인적으로 정향되어 있었다. 자아의 연속성에 대해 고찰했던 존재론적 문제들, 순수한 실제주의(Aktualismus)의 문제들은 항상 개별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 좌초되고 말았다. 본회퍼는 “현실성”(Wirklichkeit)에 대한 추구 가운데에서 간과된 것은 인간은 오로지 개별적인 자가 아니며, 또한 “너에 의해서 요구된 자”(vom Du Angesprochene)도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시도들은 인간이 언제나 공동체 안에 서 있으며, “아담”안에, 혹은 “그리스도”안에 서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하는 복음을 인간에게 제공했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범주의 도입을 통해서 신학안에서 행위와 존재의 문제, 그리고 인식의 문제는 새롭게 설정된다.
계시의 존재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안에 놓여져 있기 않다. 나의 예전의 실존, 혹은 새로운 실존과 연결되지 않은 가운데 있는, 기본적으로 나의 처분에 맡져겨 있는 존재자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동시에 계시의 존재는 단순히 어떤 시간에 개인들의 실존과 마주치는 언제나 자유롭기만 한, 순수한 비대상적 행위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본회퍼는 계시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 구성된, 그리고 형성된 인격의 공동체(Gemeinschaft)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각개인은 새로운 실존안에서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세가지가 보증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첫째, 계시의 존재가 연속성안에서 생각될 수 있다는 것, 둘째, 인간의 실존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 셋째, 계시의 존재는 “존재자”나 “대상”도 아니요, “비존재자”나 “비대상”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여기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고찰한다.
1. 계시의 연속성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현재적(“미래적인 것”의 의미 안에서)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현재하시는가? 만일 한 개인을 중심으로 고찰한다면, 즉 한 개인을 설교의 청취자라고 한다면, 연속성은 여전히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나”가 매번 설교를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설교는 교회 스스로가 듣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이 보장된다. 설교는 언제나 들려진다. “나”가 없어도 복음은 선포되고, 들려지며, 그리스도는 그분의 공동체 안에 “계신다.” 따라서 연속성은 인간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여 인격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보존된다.
2. 그러나 한 개인이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설교를 들을 때, 그 개인의 실존은 그가 공동체 안으로 이끌려들어가고, 그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새로운 실존의 진리 안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개인의 실존은 구체적인 기회를 통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공동체의 주체가 그리스도이며, 공동체는 곧 이 그리스도의 현존양식이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공동체의 인격적 특성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만 인간의 실존은 새로운 실존으로 들어설 수 있고, 진리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 계시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은 오로지 공동체를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모든 다른 인격들은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비로소 인격성의 성격을 획득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계시의 연속성이 보증된다고 보는데, 그 까닭은 인간의 실존이 공동체 안에 있는 계시를 통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이미 언급된 모든 것들이 공동체 안에 있는 계시의 존재에 대해서 초점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관여하지 않는 연속성은 기독교적 계시의 연속성이 아니며, 현재적인 존재도 아니고, 과거적인 존재자인 것이다. 즉 오직 내가 공동체 안에서 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을 통해서, 공동체는 계시의 연속성을 보존할 수 있다.
3. 계시의 존재가 존재자 안에서 굳어지면, 그것은 과거에 머무르며, 실존에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게 된다. 반면에 계시의 존재가 비대상적인 것 안으로 증발되어 버린다면, 연속성은 사라진다. 그에 따라서 계시의 존재에는 두가지 제시된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한가지 존재 방식이 주어지게 된다. 즉 계시의 존재는 양면을 다 포괄한다. 즉 그것은 “존재자로서 존재하며 존재자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야 계시의 존재의 연속성을 확보하며, 계시 행위의 실존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오직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인격적 공동체인 교회만이 이 요구를 충족시킨다. 오직 여기에서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인격들인 기독교인들이 나를 구체적으로 대면하여 있기 때문에 나의 실존에 변화가 오며, 이 인격과 인격들은 밖으로부터 나의 실존에 강권적으로 역사한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상정되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교회이며, 말씀의 설교를 듣고, 믿음을 가지는 교회이다. 계시의 존재는 이 구체성, 즉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안에 있다.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자와 비존재자 사이의 긴장은 구체성 안에서 하나의 참된 공동체,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초된 인격 공동체의 구체성 안에서 보존된다.
본회퍼는 이러한 사회학적 범주에서의 실존이해는 “존재한다”(es gibt)라고 하는 말의 범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존재한다”라는 이 말은 실존적으로 무관심하며, 개인적-실제적-인식론적 사고에 속한다. 그러나 계시의 양태는 본회퍼에게서는 다만 인격들과의 관련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존재하는”(es gibt)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은 인격관계안에 계신다. 그리고 존재는 그의 인격존재(Personsein)이다. 이것은 또한 진리 안으로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서 진정한 인간으로 되어지는 인간에 대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인격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c) 교회안에 있는 인간의 존재양식
본회퍼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불트만의 실존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본회퍼는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실존”이 밖으로부터의 차원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본래적 실존이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즉 바깥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만나진 실존이라는 것을 언급한다.19) 바깥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만나진 실존은 사회적 관계안에 있는 실존이며, 그것의 역사적 전체 안에서 얽혀 있고, 받아들여진 것을 아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안에 있는 실존이다. 실존은 따라서 오로지 죄된 것으로서 그리고 은총을 받은 것으로서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동적인 것에 의해서 규정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있는 인간적 실존이 행위-존재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개념 안에서 실존성과 연속성은 어떻게 포괄되는가. 본회퍼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교회개념에 입각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이러한 믿음안에서만 하나님을 “가진다.” 반대로 하나님은 다만 신앙안에만 계신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신앙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존적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 속죄교리등 교회내의 어떤 존재자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신앙의 행위로서의 신앙에서만 계시의 “존재”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sola fide의 교리가 가장 순수하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2. 믿음은 교회안에 있는 존재를 전제로 가진다. 믿음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믿음은 교회안에 있다. 교회는 신앙의 전제이다. 믿음이 자기가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될 때 그것은 이미 교회 안에 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그분의 은총,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언제나 이미 발견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믿음의 행위에 선행하는 존재를 먼저 만난다. 믿음은 이러한 존재에 달려있다. 믿음은 이 존재에 의존한다. 믿음은 이 존재에 의하여 조건지워지며, 창조되어진다.
3. 계시의 존재,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오로지 믿음 안에만 있다. 그런데 믿음은 계시가 공동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두 명제는 세 번째 명제 안에서 종합된다. 즉 인간이 계시의 존재, 곧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계시의 존재가 믿음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이다.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계시의 연속성, 그리고 믿음의 연속성은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은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만 지양된다. 여기에서 믿음이 순수하게 실제적으로 이해된다면, 즉 전적으로 행동으로 이해된다면, 존재의 연속성은 행동들의 불연속성으로 인해 깨어질 것이다. 그런데 행동으로서의 신앙은 자기 자신이 교회 안에 있는 존재방식인 것을 알기 때문에 연속성은 오로지 “믿고 있는 행동”안에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연속성은 교회 안에 있는 존재를 보존한다. 이 말로부터 본회퍼는 플라키우스와 찬히(Zanchi)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적인 흠결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종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자 Zanchi는 인간에 대한 신적 행위의 연속성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들의 연속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생각했을 때에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루터정통주의자 플라키우스가 perpetua iustificatio를 따르고자 했을 때, 즉 신앙의 행위가 새로운 인간의 존재와 더불어 어떻게든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을 때,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이들의 사고가 만일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측면을 볼 수 있었다면, 서로간에 흠결을 보완하면서 온전한 이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회퍼는 보고 있다.
4. 믿음과 “...안에 있는 존재”의 변증법은 인간의 개념 안에서, 사회학적 범주를 통해서 그것의 구체적인 해석을 경험한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이신칭의에 따르는 믿음의 행동 혹은 신앙하는 행동 역시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스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 있음을 안다. 이 그리스도인은 옛 인류에서 새로운 인류로 옮겨진 역사적인 인간이요, 새 인간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재창조된 인간이다. 이 인간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행위관련안에 기초지워져 있고, 그리스도의 존재 안에 있는, 공동체 안에 있는 역사적 인간이다. 그래서 존재안에서의 행위는 지양된다. 그리고 행위-존재의 종합으로서의 인격은 언제나 개인의 인격안에, 동시에 인류(menschheit)20)안에 있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개인적 인격과 보편적 인간성을 동시에 다룬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신성안에서가 아니라, 실존성안에서 사회성으로 들어간다. 기독교인은 옛 인간성에 관하여 개인인 동시에 인류 안에 서 있는데, 새인간성에 관하여는 한 기독교인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공동체 안에 서 있다. 따라서 본회퍼는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류로서의 인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행동과 존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인 것”이라고 말하고 한 개인과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를 정립한다.21)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실제로 나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한 사람의 말을 듣는다.; 그는 나에게 성례전을 제공해준다.: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 사람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복음을 듣는다. 나는 기도에 동참하며, 내가 말씀, 성례전,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기도 안에, 새로운 인간성안에 있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제 여기에서 혹은 다른 어떤 곳에서 연결되어 있고, 그들에 의해서 담겨지고 있으며(getragen), 그들을 담고 있다.(tragend) 나는 역사적으로 전인이며, 개인과 인류로서 인간을 만난다. 나는 믿는다. 즉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초월적 행동을 받으며(pati)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esse) 그러므로 내 자신이 믿는 것(agere)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원은 종결된다. 왜냐하면 agere는 여기에서 pati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역사적인 하나이며, 오로지 신앙안에서 새로운 자이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나”의 연속성은 또 다시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나”가 종교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삶으로 파쇄되어 들어간다는 사실로 인해 좌초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본회퍼는 “나”의 통일성은 결코 종교적인 행위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종교적 행위는 결국 신앙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다시금 존재자로 해석될 뿐이라고 말한다. “나”의 통일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신앙안에서만” 가능하다. “신앙안에 있는”역사적인 “나”의 통일성을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믿는 역사적 공동체 안에 있는 통일성”. 내가 서 있는 인간성, 나 자신이 또한 있는 인류(인간성)이 나로부터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죄와 설교는 성례전 가운데에서 용서된다. 그리고 내가 있는 거기에 전체 인류(인간성)은 있다. 바로 내가 그들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 나는 개별자로서 그리고 실존성과 연속성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파악된다. 본회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신앙은 계시의 초월적 행동(밖으로부터)에 근거하는 동시에 이 계시의 존재 안에 이미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신앙은 존재(공동체)22)에 대한 관련안에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초월한다. 그것은 존재자의 것이며 또한 자신의 존재근거를 가진 “나”의 것이다. 따라서 행위는 존재로부터 나오며, 행위는 존재를 향해 간다. 존재는 행위와의 연관속에 있으며, 동시에 자유로이 있다. 대상적인 것과 비대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계시의 존재는 “인격”이다. 인격공동체이다. 여기에서 사회학적 범주 안에서 초월론적 접근과 존재론적 접근이 함께 오는 까닭에, 인간의 실존은 결국 본질적으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결단안에 있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비록 신앙은 행위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존재의 양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의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불신자가 “아담안에 있는 존재”의 양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의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불신앙이 부분적인 심리적 행동이 아니고 옛 인간성 안에 있는 존재의 양식인 것과 같이, 신앙은 다만 행동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존재의 양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안에 거하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존재한다”(es gibt)가 없는 것과 같이,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죄인이든,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간적 실존도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교회 안에서 행동들의 수행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죄와 죽음 역시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해답이 주어진다. 나의 죄, 나의 죽음은 내가 공동체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더 이상 죄와 죽음으로써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공동체 안에서 용서와 생명을 보게 된다. 공동체가 나와 더불어 있음으로 인해 나의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며, 나의 죽음은 더 이상 나의 죽음이 아니다. 죄와 사망의 유혹은 오로지 신앙안에서만 제거된다.23) 공동체의 능력 안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d) 인식의 문제와 교회
계시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가 일치하는 인식의 개념을 찾음에 있어서 본회퍼는 한번 더 바르트의 인식론과 변증법을 비판하고 그의 대답인 “교회”의 개념으로 나아간다. 본회퍼는 초월적 계시의 행위가 대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남고,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그 어떤 지식도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다고 하는 초기 바르트의 입장을 비판하고 보충한다. 본회퍼에 있어서 인식의 개념은 “계시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에 상응한다.
1. 바르트의 변증법 비판 : 본회퍼는 바르트의 변증법을 비판한다. 본회퍼가 본 바로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지식(Wissen)은 비지식(Nichtwissen)이다. 즉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유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디에서 얽어 매여져 있지 않고 자유하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실존적인 신앙의 행위 안에서만 존재하고, 인간의 사고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계시의 존재에 대한 불충분한 정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지식 개념에 어떤 결핍이 생기게 된다. 본회퍼는 여기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a) 바르트에게서 전체 개념의 연결은 개인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계시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와 연관된다면, 하나님과의 연관도 나의 개인적인 행위 밖에서 주어져야 한다. b) 그가 교회에 매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구원의 사건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유를 열어놓아 두는 것은 그 사건의 우발적 가능성을 형식화하는 것이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c) 교회에 주어진 계시의 설교로부터 우리는 “지식을 얻는다.” 우리가 믿는다면, 만일 그것이 신앙 안에 있는 신앙이라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이다. 신앙안에, 즉 공동체 안에서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24) 본회퍼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 질문은 어떻게 지식이 학문으로 되는가라고 말한다. d) 창조자, 즉 주님을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서 대치시키고자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본회퍼는 밝힌다. 이렇게 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언제나 배후에(im Rücken)가지게 되고, 그 결과로 변증법적 신학의 지속적 반성은 그리스도에게로 지향하는 정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에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창조자, 그리고 주님 이라는 것으로서가 아닌, 나의 새로운 실존의, 나의 신학적 사고의 주체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귀결되는 부적절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격성은 상실된다. 행위의 이해에 있어서의 정당성의 여부는 인격존재로서 규정된 계시존재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고 본회퍼는 상기시키고 있다.
본회퍼는 그렇다고 이에 반대해서 계시의 존재가 존재자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면, 계시는 그것의 참되지 않은 대상성을 통해서 완전히 인간의 힘으로 주어지게 된다고 본다. 인간의 인식은 여기에서 계시를 통해서 어떠한 한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계시가 연관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것이라고 본다.
2. 계시의 존재로서의 교회
본회퍼는 결론적으로 교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인격의 공동체로 규정된 계시의 존재, 따라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계시의 존재에 대해서 사회학적 범주에서 관찰된 인식의 개념이 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이것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본회퍼는 세가지 인식의 길, 즉 사회학적 측면에서 본 교회의 세가지 상이한 기능들에 부합하는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크게, 1. 믿는 자의 실존적인 지식(glaubende Erkennen), 설교에 있어서의 지식(predigende Erkennen), 신학적인 지식(theologische Erkennen)이다.25)
우선 신앙인으로서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학적 인식론의 문제이다. 그것은 자신이 설교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은혜로써 극복되고 은총을 받은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배경에는 잠재성으로서 생각되어진 실존의 개념이 놓여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현실이다. 신앙의 대상은 공동체 안에서 설교된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이것은 초월된 “나” 속에 포함되는 것에 항거하고, 어떠한 비대상성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에도 항거한다. 신앙은 인격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대항해서 선다. 이것은 대상적이고, 인식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참되게 특질지워진 대상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는 자로부터 자유하고, 결코 인식하는 “나”에 속하지 않는다. 이 인격은 신앙의 행위에서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스스로를 제공한다. 신앙은 자기를 주는 인격의 자유를 인식하며, 그것이 “바깥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식한다. 개인적인 인식론 안에서 추구되는 이 “바깥”은 공동체 안에 주어진 현실성이다. 이것은 우발적인 전제로서 더 이상 질문으로 제기될 수 없다. 또한 “존재하다”(es gibt)라는 말을 통해서 고정될 수 없다. 인식을 위해서 “발견을 위해서 거기에 있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없다. “바깥”은 원칙적으로 실존을 초월하여 있으며,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격의 “바깥”으로부터 온 것으로 나의 전 인격의 존재를 죄인으로서 그리고 사죄받은 자로서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가 존재자로서 자연스럽게 계속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사물적 세계(Dingwelt)로부터 사회적 인격의 영역으로 돌이켜질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타인은 진정한 실존으로 나를 만난다.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의 이웃은 단지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26) 이와같이 해서 본회퍼에 의하면 신앙은 인식의 새로운 영역들과 대상들,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된다. 다른 인식개념의 자리로 돌이키는 사회적 관계안에 있는 실존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사회학적 범주는 초월적인 인식적 접근 그리고 존재론적 인식적 접근의 통일성의 지점으로 보여진다. 오로지 자기를 제공하는 행위 안에 인격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그것이 제공되는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러한 인격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주어진다.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그리스도는 공동체 지체에게 주어진다. 신앙에서 “나” 그리스도를 그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 대상성 안에서, 즉 나에 대해서 지배권을 갖고 있으며, 나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주님으로서 “가진다.” 신앙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증인이며 확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내 안에서 창조하는 신앙의 행동에서 믿는 성령을 나에게 줌으로써, 그는 또한 자신이 나의 존재의 자유한 주이심을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신앙안에만 계시지만, 나의 신앙의 주님으로 계신다. 그는 완전히 나의 실존의 바깥에 계시며, 바로 그로 인하여 그는 나의 인격을 만나며, 그것을 인식하도록 해주신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식이 주어지는 것, 즉 이 신앙은 시간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방향지워진 인간의 직접적 행동”27)(actus purus)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시간적 지향성이다. 이 신앙이란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말할 수는 없어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파악됨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행동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말씀과 성령으로 불러일으키는 “actus directus”는 반성적 신학지식과는 구별된다고 말한다. 반성은 “선포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 속에서 보편적인 명제와 결부시켜 반성하는” 것인데, 이것은 actus purus로서의 신앙인의 믿음과는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이다.
다음으로 설교자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본회퍼는 논한다. 설교자는 공동체의 설교자로서 그가 무엇을 설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고전 2,2)에 대하여 설교자는 알아야 한다. 이 설교자는 듣는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권한과 설교와 성례를 통한 사죄를 전하는 전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 모든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연관된 계시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신앙을 창조해내는 설교안에서 그리스도는 이야기의 “주체”(Subjekt)로서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안에서, 공동체의 능력안에서이다. 설교자의 능력안에서가 아니다. 설교에서 말해지는 “나는 용서받았다”라든가, “당신은 용서받았다”라는 실존적인 선언은 설교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설교자 스스로는 그들이 설교하는 것,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반성(Reflexion)해야 하며, 그것을 진술로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그들의 반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 그 자신인 살아있는 창조적 말씀 그 자체”는 말할 수 없고, 다만 과거에 일어난 신적인 사건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명제들”, 혹은 “단어들”을 반성할 뿐이다. 즉 설교자가 “명제들” 그리고 “단어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선포할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은 이 “명제들”과 “말들”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신다. 그런데 설교자가 이 “명제들”과 “단어들”을 말할 때 어떻게 올바르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신학적 인식의 문제가 제기된다.
본회퍼는 이것을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떻게 신학적 인식은 가능한가?” 본회퍼에 따르면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설교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설교는 기억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의 기억인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설교의 전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신학은 교리의 형성을 위해 도움을 준다.
본회퍼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신학의 주된 기능은 교회의 설교를 반성하고 준비하고 돕는데 있다고 본다. 신학적 반성을 통해서 “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신학적 지식은 실존적 지식이 아니며, 그것은 그것의 대상을 공동체의 기억 안에서 보존된 사건 안에서, 즉 성경 안에서, 설교와 성례전 안에서, 기도와 간증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말씀안에서 역사적인 교회안에 있는 존재자로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학은 지나간 설교와 미래의 설교 사이에 서 있는 학문이다. 신학은 설교가 바로 행해질 수 있는데 도움을 준다. 신학의 방법론 자체는 세속적인 방법론과 차이가 있지 않지만, 이론적인 측면이 아닌, 들려진 말씀에 대한 겸손한 고착이라는 면에 있어서 그 특징을 갖는다. 방법론 때문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순종 안에서 신학은 모든 세속적 학문과 차이를 갖게 된다. 신학적 지식은 실존적 지식이 아니라 반성적 지식으로서 “교회적 사상”이며, “교회적 지식”이다. 이것은 설교에 대해서 직접적인 관계안에 있는 것이며, 설교를 위해 봉사한다. 또한 신학은 실증적인 학문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자신의 대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교회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선포된 말씀이다. 신학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현존에 의해서 판단받고, 의미를 갖는다. 신학은 자기 스스로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말씀하실 때, 실제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을 안다. 즉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라고 말할 때,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심을 통해서이다. 본회퍼는 이것을 바울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28) 즉 신학적 지식은 실존론적 지식도, 사변적 지식도 아닌 교회적 지식이다.
본회퍼는 신학이 신앙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인격안에서 매시마다 창조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학에 의한 보편적 확신이 살아있는 사건으로 되지 않는다면 유혹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설교자는 신학자지만, 그는 실존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바로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공동체에게 말씀하시고자 한다는 것을 아는 안에서 공동체의 전권안에서 복음을 선포한다. 설교자는 신학자이어야 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신학을 통해서 신학을 초월하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매개시키는 것이다. 이 설교자의 말씀은 청중들에게 있어서 결단의 말씀이 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 설교자는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 안에 있고, 부차적인 측면에서 개인이다. 교의학자는 본질적으로 개인이며, 부차적으로 공동체 안에 있는 것에 반해서, 신앙을 가진 자는 본질적으로 개인이며, 동시에 “공동체 안에 있다.”
끝으로 본회퍼는 실존적 지식 혹은 직접적 지식인 신앙인의 지식과 반성적 지식 내지는 교회적 지식인 신학자의 지식을 구별하면서, 반성적 지식인 교의학적 지식을 사용할 것을 당부한다. 신앙의 인식 안에는 어떠한 반성도 없으며, 신앙이 신앙인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신앙은 다만 신앙을 할 뿐이다. 그러한 신앙이 직접적 의식 안에서 수행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 반성적으로 재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그와 더불어, 나는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믿었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된다. 신앙의 인식의 대상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신학적 인식의 대상은 선포된 말씀일 뿐이며, 설교적 인식의 대상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선포될 말씀이다. 설교자는 공동체의 시각에 입각해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 신학적 교리의 문제는 인간의 자기이해로부터 “진리안으로 놓여짐”을 통해서 그것의 맥락안에서 계시를 통해 연구의 일반적인 부분을 확정짓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새 존재로서 교회 안에 있음을 이해한다. 그는 이것이 자기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밖에서 온 실존적 현실임을 안다. 그는 자신의 실존이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가며, 그렇지 않다면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본회퍼는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이며, 이것만이 생의 통일성과 온전성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서 그의 옛존재는 아담안에 있는 존재를 아담안에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그리스도”안에 있든지, 혹은 “아담”안에 있든지 한다. 인간 존재는 이것을 떠난 그 어떤 형이상학적-심리학적 특성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이미 진리에 대한 관계안에 있으며, 이러한 진리는 더 이상 스스로 통찰된 “나”가 스스로 설정한 한계가 아니다. 이러한 진리는 계시된, 선물받은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그에 대한 존재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이다.(iustitia passiva!)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안에서 같지 않은 것은 같지 않은 것을 인식하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스스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인식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를 가지거나, 인간의 실존을 만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파악하에서 나의 실존에 대해서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이해는 신학에 있어서 오로지 “기억”안에서 보존되어 남는다. 신학자는 자기의 교리를 자기 이해를 통해서,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스스로의 기억 안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으로 경계짓는다. 본회퍼는 이것을 뛰어넘게 해주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교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생각되는 살아있는 교회 안에서만 이해되며, 구체적인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신학만이 그리스도의 율법에 봉사한다고 말한다. “진리로 설정되는 자기 스스로의 이해”로서의 신학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대신 “교회의 봉사를 위해 설정되는 반성적 사고”가 신학자에게 있어서 더 필요하다.29) 본회퍼는 결론적으로 “어느 신학이 올바른 신학인가에 대한 판단은 교의학(Dogma)가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러나 교의학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설교에 의해서 ‘심판받는다”라고 하며 글을 맺는다.
Ⅲ. 결론과 평가
본회퍼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이 진리로 세워지고,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인간 스스로에 의해서는 가능하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계시의 우발성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의 우발성은 사변적인 것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인간의 구체적 역사성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계시 안에서 신앙으로 결단을 하는 존재이다. 예전의 자아로부터 새로운 자아로 변화하는 결단은 매순간, 자아의 연속성을 단절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다가오지만, 그 가능성을 극복하고, 연속성을 확보하게 해 주는 것은 총체인격으로서의 교회이다.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는 그리스도와의 연속성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본회퍼의 시각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견해와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견해가 있다. 그점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회퍼가 제시한 교회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취한 그의 구원의 행동으로 해석한 교회관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신학적 암시가 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두 번째로, 본회퍼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정밀한 적용을 통해,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초월주의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 단점을 보완하면서 극복을 시도해 내는 데 있어서 본회퍼는 방법론은 동시대의 철학적 방법론을 충분히 소화하면서 치밀한 전개를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본회퍼가 강조하고 있는 교회의 중시, 예배와 성례전의 중시와 신학적 조명은 교회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재와 관련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설교와 선포가 공허한 이야기가 되지 않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해 생명을 얻게 된다는 통찰은 예배학적으로 가치가 있다. 네 번째로, 본회퍼는 설교를 위한 신학,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신학이 사변화되고 있던 자유주의 시대의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신학적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르트에게서 이미 보여지고 있는 이와같은 신학적 움직임은 본회퍼에 와서는 교회론적 측면에서 보다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본회퍼의 저작에 대해서 굳이 단점을 들고 싶지는 않지만, 단점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우선, 본회퍼의 바르트 비판은 바르트의 전기 저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각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만일 이후의 바르트의 작품을 보았더라면 그 비판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나온 연대가 본회퍼의 초기라는 점, 그리고 실제로 바르트의 저작이 본회퍼의 영향을 수용하여 달라지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본회퍼가 “행위와 존재”를 통해서 보여준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은 다소 지나치게 교회중심적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은 교회안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교회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교회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복음에 의한 개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선교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혹은 후기의 본회퍼가 말했던 세속화적 측면과 비교해본다면, 그 경계선이 어디에서 극복되는지가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본회퍼는 “행동과 존재”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신학은 대상화되거나 존재자로서 기능해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의 현존앞에 끝없이 심판받아야 하는 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적 방법론, 그리고 그의 교회론 중심성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본회퍼 스스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론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절대화되기 쉬우며, 그럴 경우 화석화되어버리는 결과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본회퍼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이론의 절대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서 끊임없이 반성하는 운동 속에 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통해서 대답할 수도 있겠다. 즉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Ⅳ. 결론
바르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저술하면서, 자신은 이 젊은 신학자가 이루어 놓은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 말 그대로 본회퍼가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통찰력은 정교하며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신학자의 모습이었다. 단지 이 한가지만해도 신학함에 있어서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회퍼가 구사했던 신학적 방법론에 탄복함을 보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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