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러므로,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게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신의 공정한 통치(로마서 2:1-16)
앞장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이 보는대로 이방 세계가 암담하고 죄악투성이라는 것을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본장에서는 유대인 세계 역시 암담하고 죄악뿐이요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더 악화되어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동일한 조건에 두고 공의를 행사하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편을 더 추켜 주는 편협한 처사를 하지 않으신다.
Ⅰ. 그는 유대인들의 자가당착을 꼬집고 있다(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훈계는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에게 적용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이 일반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21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들은 불쌍한 이방인들을 아주 멸시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는 자기 가축 중에 개보다도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그들도 부도덕하고 사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우상 숭배자들은 아니었다 해도 신성 모독죄를 범하기는 다를 바 없었다(22절). "그러므로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다." 자연의 빛밖에 없던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다면(1:20 절) 하물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은 유대인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Ⅱ.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의 공의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있다(2, 3절).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이요 그의 처사가 얼마나 공정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도바울의 필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어떤 주제가 있으면 그걸 두고 여러 가지 부대설명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두고 말하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2절).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로 된다"는 사실 곧 영원한 공의와 평형의 원칙대로,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삼상 16:7),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처리된다는 건 우리 모두 익히 확신하고 있는 교리이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 가 없다. 그러나 자기들도 똑같이 죄가 있는 일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자들 곧 그런 죄를 밥먹듯이 하는 자들이 죄악에 대한 기치를 들고 죄짓는 자들에게 큰 소리 뻥뻥 지르기만 하면 그걸로 속죄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가라앉힐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것이 천 번 만 번 당연한 일이다. 죄인의 양심을 파고드는 그의 솜씨를 보시라. 그는 묻고 있다. "……사람아……네가……줄로 생각하느냐?"(3절)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 그 아래 복종하며 그분에게 책임을 다해야 할 피조물이요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이여! 하는 식이다. "이런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 하챦은 핑계가 통하겠으며 만유의 의로운 심판장께서 쉽사리 속아 넘어가 떨어지겠느냐?" 사람들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신임을 받아 사면을 받을 수 있는, 제 아무리 그럴싸한 정치범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는 없는 법이니 곧 심판과 정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얘기다.
Ⅲ. 그는 두 가지면에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4, 5절).
1. 그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 "인자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데 있다(4절). 이것은 신의 특유한 은총을 받은 유대인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이다. 그 은총을 주신 수단은 바로 자비요 우리가 빛에 대해 죄를 범하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 더욱 더 사랑에 대해 죄를 범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죄악 밑바닥에는 신의 선하심에 대한 얕고 천박한 생각이 깔려 있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분의 중심에 대한 모멸이니 이들은 이것을 기회로 더욱 더 죄악에 대해 담대하게 되고 만다(전 8:11).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곧 그 의도하는 바가 "회개케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을 취하고 잇는가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람을 짐승처럼 모는게 아니라 이들을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인도하고 달래고 있으니(호 2:14) 곧 사랑의 줄로서 인도하고 있다(호 11:4; 렘 31:3 비교). 하나님의 선하심(그의 섭리, 인내, 그리고 모든 은사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회개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머무는 이유는 이들이 이점을 알지 못하며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 둘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데 있다(5절). 이 진노를 사는 이유는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때문이요, 죄인들이 파멸에 이르는 이유는 이러한 마음에 이끌려 따라가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마음의 행로대로 행한다는 것인데 그 마음이 고집불통이요 회개를 모르는 마음일 때 그 행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죄악의 길로 치닫는 자는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는"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쌓는다는 말에는 풍성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죄악의 보물은 영원토록 사용해도 다함이 없을 것인데도 죄인들은 여기에 또 죄악을 보물처럼 쌓아 놓는 것이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은 수십가지 새끼를 치기 마련이요 청산할 날을 재촉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는 말을 "그들의 진노에 가지를" 치다는 식으로 번역한 그대로다(겔 8:17). 보물을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진노의 보고, 아니 진노의 탄약고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은 비밀 장소에 봉인된 보물과 마찬가지로 깊숙히 보관되어 있다(신 32:34; 욥 14:17). 그러나 여기에는 탄약고의 실탄이 전쟁에 대비해서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장기적인 목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욥 38:22, 23). 이 보물들은 마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짐" 같이 활짝 열어 제쳐질 것이다(창 7:11). 도매금으로 몽땅 처분되고 말 "진노의 날"에 대비해서 보물처럼 쌓여질 뿐이다. 지금은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와 용납의 날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진노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실 죄인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진노의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매일 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7:11). 그러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아직 남아있다(계 6:17). 그리고 이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격정과 같은 분냄이 아니니 그분에게는 노함이 없기 때문이다(사 27:4). 그것은 의로운 심판이니 곧 그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려는 의지이다. 이 의로운 심판은 죄인들의 번영과 성공 속에 겹겹이 감취어 있지만 오래쟎아 만천하에 곧 들어날 것이요 피상적인 무질서는 자리를 물러나고 하늘은 그의 의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시 1:6).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Ⅳ. 그는 하나님의 심판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5절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언급하고 여기서는 그 심판의 의로움을 풀어 설명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게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척도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 하는 걸 보여 주고 있다. 이 분배적인 공의의 형평성은 인간 외모가 아니라 그 공과에 따라 찬, 반이 주어진다는 데 있으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다.
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이다(6절). 이것이 성경에 종종 언급되는 이유는 만유의 심판장께서 올바르게 행사하신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뜻에서이다.
(1) 은혜를 베푸시는 면을 보면 7, 10절에 두 번 언급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즐거이 베푸시기 때문이다.
[1] 은총의 대상. "참고……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의 은총에 대한 관심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그걸 획득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갚아 주실 자들은
첫째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 곧 스스로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는 자들이다. 바꿔 말하면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존귀와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니, 즉 현재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다. 모든 실제적인 종교에는 거룩한 야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마련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을 우리의 하늘같이 높은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 것이요 그보다 못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구한다는 말에는 잃어 버렸다는 뜻, 그걸 되찾겠다는 욕망, 이 욕망에 비등하는 추구와 노력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였으면 올바른 방법을 택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자들이다. "참고 선을 행하며" ① 선행이 있어야 한다(10절). 많이 알고 말 잘하고 약속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 그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② 지속적인 선행이어야 한다. 기분내키는 대로의 용두사미가 아니라 끝까지 믿고 나가는 선행이어야 한다.
③ 참을성 있는 선행이어야 한다. 이 인내라는 말에는 선행의 장기적인 면과 이것을 행하는 데 있어 따라오는 여러 가지 난관이 내포되어 있다.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려는 사람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2] 이 은총의 결과. 그는 이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천국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요 그것은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자들이 받는 보상이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절)이다. 영광과 존귀를 자기 것으로 추구하는 자들이 이것을 차지한다는 말이다(7절). 이 세상의 헛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은 대개 이걸 찾지 못하고 실망하지만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주어질 것이니 그 "영광과 존귀"뿐 아니라 거기에 "평강"도 따를 것이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는 보통 어려움이 따르지만 하늘의 영광과 존귀는 결코 성가심이 없는 영원한 평화가 다르고 있다.
(2) 다음으로 화를 주시는 면을 보자(8, 9절).
[1] 화의 대상. 일반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모든 고의적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툼"이요(사 45:9) 더없이 절망적인 분쟁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인들과 더불어 싸우며(창 6:3)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은 이 영과 싸우며 빛을 거역하는 자들로서(욥 24:13) 속임꾼이요 성령께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죄가 좋다고 그걸 가까이하려고 고전분투하는 자들이다. 곧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않는 자들"이다. 종교의 진리는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단계로 옮겨져야 하는 것으로 우리를 지도하고 다스리며 명령하는 것이다. "곧 실제와 연관된 진리"라는 말이다. "불의를 쫓는 자들" 곧 불의의 손가락질에 놀아나는 자들이다. 진리의 종괴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불의의 종으로 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없다.
[2] 이 화의 결과 내지는 그 사례 "노와 분, 환난과 곤고" 이것이 죄의 삯이다. "노와 분"이 "환난과 곤고"를 유발하는 것은 필연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도 "영혼"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영혼이 진노의 그릇이요 환난과 곤고의 주체인 것이다. 영혼이 이 진노를 받는 것은 죄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노와 분'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곤고의 영향을 유일하게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지옥이란 노와 분의 결과인 영원한 환난과 곤고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데서, 곧 타오르는 불섶에 가시덤불을 내던지는 데서 오는 결과다(사 27:4). 그분의 황금 홀에 엎드리지 않는 자는 그분의 쇠창살에 맞아 부서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 품행에 따라 처분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절). 영적인 상태를 두고는 사람 차별이 잇지만 겉모양을 두고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있다. 이것이 바로 유대와 이방의 벽을 처음으로 무너뜨리며 외치던 베드로의 말이다(행 10:34). 곧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겉모양이 없다는 얘기다. 곧 이어 다음 절에 이 말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지니는 외적인 특권이나 진리에 대한 알맹이 없는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참된 상태와 성향에 따라 인간을 구원하신다. 은총과 화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첫째가" 더 없는 특권을 가지고 더없이 뽑내며 자랑하던 "유대인"에게라면, "또한" 이 특권이 없다 해서 악행에 대한 처벌을 면제받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선행을 보상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이방인에게도 마찬가지다(골 3:11). 만민의 심판장께서 의롭게 처리하지 않겠는가?
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들을 심판하시게 될 때 그의 처사가 공평하다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12-16절). 그것은 인간의 순종의 법칙이 하나님의 심판의 법칙이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빛이 인간에게 들어나 보여지고 있다.
1. 자연의 빛. 이방인들에게는 이 빛이 있었으며 그들은 여기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타고난 양심 외에 별다른 지침이 없던 이방인들 곧 일반 은총 외에 다른 동기가 없던 그들, 모세의 율법이나 어떤 초월적 계시도 없던 이들은 그들에게 있지도 않던 율법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유대인들처럼 기록된 율법을 거역했다고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은 오직 그들이 거역했던 자연의 빛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니 이 빛은 타락하고 이그러져 불의에 감금된 마음에 있는 빛이 아니라 타락치 않고 본래부터 주어진 마음밭의 빛이다. 그는 이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괄호안에서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자연의 빛이 이방인에게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14, 15절). 12절에서 이들이 "율법없이 범죄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건 자가당착같아 보이기도 한다. 곧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이들에게는 기록된 율법(시 147:20)은 없더라도, 의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에 대등한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이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이 명하는 일이 아니라 율법이 행하는 일을 의미한다. 율법의 일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방향 제시해 주고 우리의 행한 일을 검토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1) 이들에게는 율법의 빛에 비춰 뭘 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켜 보여 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생각과 성향에 비춰 선악에 대한 명확하고 방대한 차잇점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들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 자들"이다. 이들도 공의와 공평, 존귀와 순결, 사랑과 애정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곧 자연의 빛에 따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불쌍한 자를 측은히 여기며 사회 질서와 평화를 보존하며 살인, 도둑질, 거짓말, 위증 등을 금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었다.
(2)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행위에 비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있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 속에 이미 잘한 일은 칭찬해주고 못한 일은 벌해 주는 기준이 들어서 있었다는 얘기다. 양심이 곧 그 증거다. 일시적으로는 매수되고 두들겨 맞는 수가 있어도 시종일관 증거하는 것은 바로 이 양심이다. 그것은 가장 은밀한 것을 증거해 보여 주는 것이니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는 가운데 양심의 증거에 따라 율법을 사실에 적용하여 심판을 내린다. 양심은 이방 세계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촛불이다. 이방인들의 양심에 대한 증거를 들어 보자.
선한 양심의 위로에 대해서 :
그대 양심의 순결을 지키는 일,
이걸 그대의 철통같은 방어의 보루로 삼으시라-Hom
악한 양심의 겁내는 면에 대해서:
아무런 채찍소리 들리지 않건만,
스스로 가한 아픔에 시달리는
그대 죄악한 마음이여-Juv. Sat. 13
그들의 "생각들이"(metaxu. a,llh,lwn,그들 사이에) "서로" 그들 속에서 죄에 대해 불리하게 증거했거나 남들에게 있어서 불리하게 증거했던 동일한 자연의 빛이 상호간에 변호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비시심"(vicissim) 곧 어떤 이들이 번역하는 대로[교대로]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곧 그들이 이 타고난 율법과 명령에 순종했거나 거스렸거나에 따라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저주하기도 사면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도 율법 대신에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그 무엇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걸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 주고 있다. 따라서 죄악한 이방인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저주하시는 것은 정당하다. 몰랐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이 무지 이외의 다른 것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 한 멸망할 수밖에 없다.
2. 율법의 빛.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이요 이것에 따라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2절).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들은 율법을 가진채 범죄할 뿐 아니라 "율법 안에서"(evn no,mw) 곧 그렇게 수다한 율법 속에서 그렇게 명확하고 순수한 율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침이 그렇게도 자세하고 충분한데도, 그 경계하는 바가 그렇게 함축적이고 강력한데도 죄를 범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의 처벌은, 그들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소유했던 만큼 더욱 더 막중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9절). 두로와 시돈에게는 그 심판이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고발(요 5:45)을 받아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로서 더 많은 매를 맞게 된다(눅 12:47).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가지고 자랑했지만 사도의 말을 빌리면 이들의 율법 소유와 율법에 대한 지식이 이들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해야 할 뿐이다. 유대 율법학자들은 유대인은 누구고간에, 그들이 제 아무리 타락한 상태에 처해 있어도, 오는 세상에서 설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유대인들을 추켜 올렸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반대를 사는 점이다. 율법을 소유했다는 거기에 위대한 특권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그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이 구원의 특권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입고 설 또 다른 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에 적용하고저 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게 아니라 실천이다(요 13:17; 약 1:22).
3. 복음의 빛. 복음의 혜택을 누리고 산 자들은 이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6절).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이 말은 어떤 궤변가들 얘기처럼 바울이 쓴 또 하나의 제 5복음서라는 뜻도 바울의 필기자인 "누가"의 복음서란 뜻도(Eused. Hist. lib iii cap. 8) 아니요 복음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 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울이 그 복음의 전파자였기 때문이다. 이 복음 세대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 이 복음 세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어떤이들은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이 그가 말한 심판의 날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날에 대해 계시된 바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1) 최후 심판의 날은 정해졌다. 이 큰 날은 장차 다가 올 것이다(시 37:13).
(2) 이 날의 심판은 예수님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다(행 17:31). 이것이 그의 비하의 보상에 대한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심판장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만큼 죄인을 떨게 하고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도 없다.
(3) 인간들의 비밀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숨은 봉사가 그때가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숨은 죄악이 처벌을 받으며 숨겨진 일들이 들어나게 될 것이다. 그 날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의 날이 될 것이니 지금은 한쪽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그때 가서는 온 천하에 밝히 알려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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