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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신학과 청교도 신앙

by 이덕휴-dhleepaul 2018. 2. 26.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과 청교도 신앙


이상현 교수(美프린스턴대학)



청교도 신앙과 신학을 여러 가지로 학자들이 분석하였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체험적 신앙과 성도의 실천이 가장 기본적인 청교도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체험과 실천이 구원의 필수적 증거이고 결과이기 때문에 청교도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예정론과 연결된다. 그리고 실천은 역사 종말에 확실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지금 현실화한다는 각도에서 종말론과 연결된다. 성서의 권위는 바로 성도들의 권위였던 "신앙과 실천의 지침"(Rules of Faith and Life)이라는 데 있다는 것으로 청교도는 이해한다.


에드워즈는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이며, 동시에 청교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기독교 서구 신학의 중심적 흐름에 창조적 공헌을 한 신학자다. 여기서는 에드워즈가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라는 관점에서 그의 신학의 중요성을 지적하려고 한다.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에드워즈는 신앙 경험을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에 대한 심미적 감각"(A Sense of the Heart)이라고 규정하고, 그 감각은 다른 심미적 감각과 연관성이 있으면서도 그 감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으로 분석하면서 자연과 은혜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 새로운 인식은 사람의 감정과 의지의 인식을 포함하는 사람 전체의 경험이다. 그는 이렇게 봄으로써 신앙에 대하여 포괄성 있는 이해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신앙의 감각은 성령의 임재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하여 개혁주의 전통의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원칙을 준수하였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청교도운동이 중요시하는 '구원의 체험'의 본질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에드워즈의 이 신앙 경험 분석에서 이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은 하나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감정이 신앙 체험에서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Passion과 Affection을 구별한다.


즉 Passion은 마음의 이성,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립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감정인 반면, Affection은 마음의 모든 이성적 활동을 동반하고 포함한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기독교 신앙 체험에서 Affection으로서의 감정은 필수적인 데 반해, Passion으로서의 감정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2. 신앙 체험과 실천의 진실성 문제

청교도 운동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신앙 경험의 신빙성, 즉 진실된 신앙 체험과 참된 토대가 없는 신앙 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신앙 체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청교도들에게는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신앙 체험의 징표(sign)를 열거하면서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과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새로운 심리적 감각'과 기독교인의 실천을 포함한 12개의 믿을 만한 징표들을 논하고 있다. 그는 균형된 그리고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하시는 신앙 체험을 강조하여 청교도 신앙의 신앙 체험을 분석하고 이를 개혁주의 신학 테두리 안에서 재정리하였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의 회심의 징표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회심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점들)


. 회심했다는 사람들이 아주 강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몸에 육체적으로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 것

.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열심히 하는 것

. 회심 체험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 회심체험이 어떤 성서구절이 생각나는 것과 동반하였다는 것

. 회심했다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보이는 것

. 여러 가지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

. 회심 체험이 어떤 특정한 단계를 거쳤다는 것

. 교회에 시간을 많이 드리고,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

.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 자기 회심의 진실성에 대하여 깊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

. 그들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

.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에 근거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새로운 마음의 각각

. 신앙 체험의 객관적 토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 자신(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우리의 유익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

. 모든 신앙의 감정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토대를 두었을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참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앎이 믿음의 감정과 동반할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가 참된 진리라고 마음이 신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

. 믿음의 감정들이 복음에서 오는 겸손을 동반할 때

. 회심한 사람의 성격, 인격 자체에 변화가 있을 때

. 회심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태도를 닮았을 때

. 믿음의 감정이 부드럽고 관용성 있는 마음과 동반할 때

. 믿음의 감정에 아름다운 균형이 있을 때

.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영적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때

. 신앙 감정이 실천의 열매를 맺을 때


3. 신앙 실천의 궁극적 의미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관과 기독교인의 실천

에드워즈는 청교도가 강조하는 실천을 신관과 창조의 목적의 큰 궤도 안에서 보았다. 기독교인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이 추구하시는 작업에 참여한다는 실천의 궁극적 의미를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에드워즈는 로크의 경험주의와 뉴턴의 자연과학의 영향력이 막대한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두 사상 조류가 모두 전통적인 '실체'에 관한 이해에 도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실재는 '실체'라는 관념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그 '실체'는 경험의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고, 자연과학은 '실체'보다 '에너지' 그리고 '움직임'의 관념으로 실재를 생각하려고 하였다. 실체라는 전통적 관념의 정당성이 치명적인 비판을 받는 것을 에드워즈는 잘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새로운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실재의 본질을 '경향성'이라는 동적인 관념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의 '경향성'들의 조직이며 한 개의 물체의 본질도 '경향성'들의 밀접이라는 것이다. 실체의 존재론을 에드워즈는 '경향성'의 존재론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동적인 존재론을 신에 대한 관념에도 유용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실재를 다 가지신 분이다. 완전히 현실화되신 분이란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관계를 통하여 무한하게 완전히 현실화되신, 더 이상 그 무엇이 더 필요 없으신 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즉 실제와 경향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영원히 경향성이신 하나님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동적이고 창조적인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되었으나 하나님의 본질인 경향성은 하나님 밖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A Dissertation on the End of Which God Created the World)이라는 그의 중요한 논문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그 하나님의 경향성의 발휘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경향성의 발휘는 하나님 자신이 내적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완전하신 그 사랑과 아름다움을 재현(Repetition)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완전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된 아름다우심을 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재현시키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과 자연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는데,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할 때 바로 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 사랑과 아름다우심이 시간과 공간에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재현의 작업은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 재현이 다 끝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에서 말하는 종말은 무엇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종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행하신 구원의 작업이 끝나는 날이라고 한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그렇게 빗나가 버린 인류를 옳은 궤도에 다시 올려놓고 하나님의 작업에 동조할 수 있도록 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나는 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완성된 교회, 즉 신부와 만나 연합하게 되는데 그 날을 '끝이 없는 결혼의 날'이라고 그는 표현한다. 그 이유는 종말에 구원의 작업을 끝나고, 죄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는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변화되어 새 하늘 새 땅에서 연속되어 계속된다는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은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것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역사는 계속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영원히 전진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우심이 재현되는 것이 무한한 시간 동안 진전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창조의 목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성도들의 실천 행동을 참으로 거대한 신학적 틀 안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즉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때마다 그 실천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실현된다는 말이다.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한다. 그 이상 더 깊은 의미는 주어질 수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여 청교도의 실천 강조의 참된 기반과 궁극적 의미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2002년 10월 28일에 한국 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열린 '청교도 신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의 공개 세미나와 2003년 3월 15일 한국교회갱신연구원 주최로 서울교회에서 열린 '청교도 신앙' 세미나에서 시행한 강연의 개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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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이상현 교수님의  뛰어난 연구서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을 읽기 전에 보아야 할 예비 해설서 역할을 한다. 이 교수님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경향성’개념을 발견하여, 이 개념으로 에드워즈를 해석했다. 참 탁월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향성’개념을 요해하기란 그리 녹록치 않다. <서양 철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가가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경향성’ 개념은 고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철학사의 주류를 이루는 철학의 대마(大馬)와 같은 개념으로, 물질의 원자와 같이 서양철학의 ‘철학소’ 역할을 한다.

 

서양 철학은 ‘실체 (άρχή)’의 규명에 관한 학문이다. ‘실체’란 쉽게 말해서 최초의 존재원인이다. 즉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최초의 원인이 실체이다. 철학자들은 이 존재원인인 ‘실체’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양 철학은 지리적인 환경과 역사적인 배경의 차이로 인해 그 ‘실체’가 변해왔다.

이오니아 철학에서는 불, 물, 공기 등이 실체였다. 이것들이 세계를 만든 존재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끌어와서 이성, 숫자(기하학) 등이 실체가 되었다. 고대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는 ‘이성’의 기능을 중시하여 이성이 '실체'라고 규명했다. 이들이 주장한 이성은 인간 차원의 이성이라기 보다는 신적인 이성이다. 즉, 진리를 보장해 주는 이성이다.

 

플라톤은 그 이성이 이데아계에 있으며, 현상계는 그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형상(이데아계)과 질료(현상계)로 나누고, 그 두 곳 모두 실체가 나뉘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이데아도 중요하지만 현상계에 보이는 것들도 중시했다. 하지만 현실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기 보다는 그 안에 있는 ‘형상’적 특징 즉 이데아의 바람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따라서 형상과 질료의 실체는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형상과 질료의 최고 단계에 부동(不動)의 동자(動子)가 ‘실체’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중세에 오면 기독교가 주류 사상이 된다. 대제국 로마를 운영한다는 것은 녹록치 않다. 따라서 종교적인 통일된 교리가 없으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어렵다. 그 결과 중세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가 종교(중세 기독교는 일종의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로 격상시켰다. 한편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로마 정치를 본떠서 교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순수한 기독교는 교권주의와 결탁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교회사에 자세히 나온다.

중세 전기에는 어거스틴이 기독교를 주도한다. 후기에는 아퀴나스가 주도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실체’는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이 존재원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여기에서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은 하나로 통일되어 발전된다. 다만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어거스틴은 플라톤을 닮아있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닮아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완전하고 불변적인 실체였다. 이것은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인 이원론이 실체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체는 하나님이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했으며, 아퀴나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점차 고려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중세 후기에는 아퀴나스의 신학을 토대로 신학을 연구하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형식적인 종교주의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짭봉된 신학을 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칼빈이 지적했듯이 아주 사변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즉 이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합쳐 놓은 위선자들이었다.

 

그러니, 근대철학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당연하다(종교개혁자도 들고 일어났으나 ‘실체’의 개념을 상고하는 글이므로 그들의 주장은 생략한다). 근대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었다. 관찰과 그에 따른 결과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믿었다. 누구나 이성을 사용하면 알 수 있는 것만 진리라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였다. 그는 실체는 ‘사유’와 ‘연장’이라고 했다.  ‘이성’과 ‘연장(물체 그 자체)’가 실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체가 이 되 버려 문제가 발생했다(따라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원론이다). 이성이 사유하는 것은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은 이성 자체이기도 하지만 주로 이성에 다가오는 ‘연장’이다. 즉 물체이다. 여기서 물체는 유물론적 물체도 포함하지만 모든 현상도 포함한다. 그런데 이성이든 연장이든 둘 다 존재원인인 실체(아르케)이다. 즉 그 둘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다. 따라서 '이성'이 ‘연장’에 대해서 사유를 하지만, '이성'과 '연장'은 독립체이므로(상호 의존적이도 않고 주체와 객체 사이도 아니다) 이성이 사유하는 것이 연장의 올바른 속성을 사유한 것인지 그 누구도 보증할 수 없다. 연장도 마찬가지로, 연장이 발생시키는 현상들이 이성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즉 이성과 연장은 ‘진리의 보증’ 문제에 대해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중세 때는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성이든 연장이든 하나님이 진리라면 진리고 거짓이라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수학적으로 사유하여 정확하게 답이 도출되었다고 해도, 수학은 엄연히 ‘연장’이다. 즉 이성과 다른 실체이다. 1+1=2라고 인간은 믿지만, 숫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 숫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수학을 잘해도 숫자 자체 보다는 부정확 것은 사실이다.

이 간단한 것이 사실이 근대철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근대철학은 진리의 보증 문제가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결국 이때문에 근대철학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세계를 경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발생한 철학이다. 즉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이성만으로 진리를 알 수 있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런 문제를 최초로 깨달은 사람이 스피노자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부정하고, 일원론으로 회귀했다. 세계의 실체는 ‘자연’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그 자연의 일원으로, 자연이 이루어가는 진리의 세상의 참여자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은 진리를 모른다. 거대한 자연이 이루어 가는 것을 단지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는 못 본다. 수명, 환경 등이 제한되었기에 무한한 자연이 이루어 가는 것의 일부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겸손히 자연에 몸을 맡기면 자연의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는 있다고 했다(데카르트 주장한 이성과 연장은 인간이 자연의 실상을 볼 수 있는  두개의 속성이다). 왜냐하면 자연을 경험함으로 자연의 법칙을 어느 정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는 중세의 하나님의 역할을 자연에 맡겨버린 것이다. 그는 범신론자였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대에 무시됐지만 헤겔에게 큰 영감(스피노자의 자연은 헤겔의 아르케인 '시대정신(zeitgeist)'으로 계승된다)을 주었다.

 

한편 라이프니쯔도 자연을 실체라고 했는데, 그의 실체는 모든 것이 개별적인 실체의 속성을 있다. 이것이 모나드다. 모나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룬다. 쉽게 말하면 쿼크와 같은 존재로서, 물, 흙, 쇠, 나무, 인간, 자동차 등등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는 입자이나, 또한 목적론적 존재의지가 있어 자기의 자아를 표현한다. 그러나 서로 충돌하지는 않는데 신이 조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도 스피노자와 비슷한 계열의 범신론자로서, 스피노자가 자연 전체를 중시했다면, 그는 자연의 개별적 사물 자체도 중시했다는 차이가 있다. 어쨌든 근대철학에서 인간의 이성은 이렇게 자연(神)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는 과제는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은 대륙의 합리주의적(관념주의적)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귀납적 세계관을 중시하여 인간의 경험에 입각한 사고로 사유하기를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대륙의 관념주의가 좀 더 철학적인 품위가 있기는 하다.

이제 로크를 다루어야 한다. 이글을 쓴 것은 어쩌면 로크 때문이다. 로크는 에드워즈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즉 그는 경험주의 철학을 통해서 근대철학에서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이성’을 구해내려 했다. 그는 경험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경험을 바탕으로 증명된다고 했다. 그리고 경험이 인과적 관계를 통해 정립되어 이성의 토대를 쌓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발전하는 과학적 성과 때문이었다.

 

갈릴레이와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은 망원경과 수학, 물리학 등을 발전시켜서 실제로 경험을 통한 인관관계를 증명하여 실생활에 적용했다. 그 결과 신 없이도 점점 세계가 발전되어 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나 관념적 이성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이다(로크는 실체는 ‘경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뉴턴은 과학적인 성과를 통해 실체가 에너지 또는 힘과 같은 동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만유인력과 중력의 발견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힘은 만유인력과 중력에 의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인 실험의 결과와 이론에 의해 경험되어졌다.

 

로크와 뉴턴의 경험과 과학은 곧 그 당시까지 '실체'라고 규정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즉, 서양 철학의 거대한 흐름인 정적인 '실체'개념 대신 경험되어지고 에너지로 작용하는 동적인 '실체'개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로크의 경험주의는 곧 위기에 부딪힌다.

이성은 대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을 하려면, 어쨌든 최소한 그 경험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도 직감적이지만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최소한의 무엇인가가 있다. 즉 경험하기 이전에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최소한의 '생각'이 있다. 그것은 어째든 '생각'이므로 이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즉 최초의 경험을 할 때 어떤 것의 속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원천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것을 경험할 때, 누구나 다 '어머니'라는 개념을 경험하기 전에 느끼게 되는 어머니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의 개념은 무엇인가? 즉 그것을 최초로 인식하게 이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런데 어머니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아기도 어머니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안다. 사랑과 좋음도 어느 정도 구별한다. 문화와 시간을 초월해도, 즉 경험한 것이 다를 데도 사람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어떤 관념이 비슷하다. 경험이 다를 텐데도 말이다!

 

그렇다. ‘경험’하기 전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그것을 ‘단순 관념’이라고 했다. 단순 관념! 그렇다면 그의 실체는 경험 이전에 ‘단순관념’이 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로크의 경험주의는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실체는 ‘경험’인 줄 알았는데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단순관념’이었던 것이다. 이 단순관념은 결국 ‘이성’이며, 이 ‘이성’은 대륙의 합리주의자에 의하면 믿을 것이 못 되었다.

 

로크는 대륙의 이성주의자들을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세계의 실체는 '이성'이전에 '경험'이 먼저 있다고 했으나 결국 그도, 최소한의 이성이 경험 전에 존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성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이 모두에게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에게까지 진리일 수 있는가?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보장해 줄 수 없다면 내가 생각한 것은 언제나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진리를 위해 노력해도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그의 노력은 허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크는 "‘단순관념’으로 대상을 파악할 때, 그 파악한 것이 진리라고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을 규명하는 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즉 이성으로 대상을 파악할 때 그렇게 파악한 것을 누구나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로크의 경험은 데카르트의 이성과 사유의 변형된 개념일 뿐이었다. 즉 그들의 주장하는 ‘실체’는 근본적인 존재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규명한 사람이 에드워즈다(에드워즈는 로크의 경험주의를 받아들였으나, 그 경험주의를 이용하여 세계의 실체가 하나님임을 입증했다). 에드워즈는 로크의 단순관념에 대해서 고찰했다. 인간의 이성이 단순관념을 통해 세계를 경험할 때, 그 개별적인 지식을 알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이 어떻게 인과관계가 형성되는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그러나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없는가? 에드워즈는 개별적인 지식의 인과관계는 경험이전에 하나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유명론이 아니라 실재론으로 단순관념을 정립했다. 로크에 의하면 단순과념은 고립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라기는 보다는 선천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로크는 경험적 실체의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로크의 성과를 통해 단순관념의 인과관계가 하나의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성향은 보편적이며 선천적이라고 규정했다. 보편적이고 선천적의 토대에는 진리가 존재하며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실체의 토대이며, 이 실체는 그래서 보편적이고 선천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신앙의 경험에 응용하였다. 즉 에드워즈는 로크의 단순관념을 성향으로 대체해 놓고, 여기에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로크에 의해 기존의 선험적 실체는 경험되져야 하는 실체로 전환되었다. 게다가 뉴턴에 의해 실체는 힘과 같은 능동적인 실체였다. 고대나 중세의 실체는 신적인 이성, 또는 신 그자체가 실체여서, 절대적이고 존재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철학과 과학의 성과에 의해 실체는 그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이성’이 실체였기 때문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었다. 즉 실체의 속성이 바뀐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성이 기독교를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은 과학과 철학에 밀려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에드워즈는 구시대적인 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변호할 수도 없었다. 그가 청교도신학을 계승했지만, 그대로 코네티켓 적용하는 데는 시대적 분위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에드워즈는 로크와 뉴턴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요체에서 맞는 부분을 차용하여, 신학적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개념이, 즉 로크의 경험주의와 뉴턴의 과학주의를 하나님의 실체개념으로 재해석한 실체의 속성이 ‘경향성(habitus)’ 이었다. 그에게 실체는 당연히 ‘하나님’이다. 따라서 진리의 보증 문제에 부딪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안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된 진리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시대 분위기 상 그리고 에드워즈의 개인적인 경험상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경험되는 하나님이어야 했다.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세계관(학문적)으로도 납득이 되어야 했다.

에드워즈는 그들의 학문을 차용해서 특별히 경험주의를 차용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밝혀 놓았다. 물론 경험주의와 뉴턴의 과학주의(이신론)에 에드워즈가 눌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서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했다. 반복하지만, 그것이 바로 경향성 개념이다.

 

한편 경향성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시면서, 또한 전적으로 세상에(우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완전하시었고, 영원히 완전하시지만, 그 속성에는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왜 아름다운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즉 사랑, 아름다움은 발산하는 능동적인 실체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인격적이다. 즉, 대상성이 있다. 사랑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대상이 있어야 하며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을 주는 대상과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늘 발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어 보았는가? 그 사랑이 절절히 느껴질 것이다. 그 사랑이 가만 있는 데도 말이다. 아름다운 대상도 마찬가지다. 다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신것도 아름다움과 사랑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 무한히 사랑하시고, 그 아름다움에 무한히 감동을 받는다(이에 관해서는 이상현 교수님은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사람은 미약한지라 그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당시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경험시키게 했다. 하나님의 경향성으로!

 

로크는 단순관념으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의 진실성 여부와 인과관계의 원인은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즉 에드워즈는 인간의 단순관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즉  단순관념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세상도 그는 판단하여 세상의 내적관계(인과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에드워즈 목사님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과학 에세이 '원자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원자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이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그 이유는 원자가 쪼개는 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세상의 한 것으로도 부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힘은 무한하며, 부수기 위해 가해지는 힘은 유한한다. 모든 원자에 보편적이고 선천적이다. 따라서 이 힘은 진리이며, 이 진리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되었다. 즉, 원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행위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힘처럼 동적이신 분이다. 자연계에도 영원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사에 특히 구원의 사역에 정적이겠는가? 더욱더 적극적이셨을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예정론과 섭리론에 따르면 이신론자는 설자리가 없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단순관념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허용된 것이고 특별계시는 택자에게만 허락한 것이다. 그것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경향성인 존재이고, 그 속성은 사랑과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그 속성은 사랑을 주려고 하며,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도 경향성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하나님처럼 살아가게 된다. 즉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이런 경향성을 체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도 하며, 'sense of heart'라고도 한다. 이렇게 해서 에드워즈는 로크의 단순관념과 뉴턴의 과학주의에 따른 동적인 실체론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택자)에게 경향성(단순관념, 믿음, sense of heart)을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대로 살게 하신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교수님의 글을 설명하다 보니 너무나 글이 길어졌다. 그리고 너무 거칠게 다루어서 아쉽다. 기회가 되면 에드워즈의 '경향성'과 'sense of heart'의 주제로 좀더 심화된 글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