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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칼 슈미트 Carl Schmit (1885∼1985)의 사상

by 이덕휴-dhleepaul 2021. 11. 24.

칼 슈미트라면, 법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가 있다. 그가 나치 정부에 자진해서 부역한 경력은 듣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다. 그는 악명 높은 헤르만 괴링의 후원 아래 있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믿을 만한 인사가 못되는 자의 정치철학이나 법사상에 관심 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를 20세기의 중요한 정치이론가 리스트에서 이탈시키지도 않고 오늘날의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학도들에게 필히 다루어야 하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폐해에 대해서 유일하게 지적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마치 신의 작품인양 여기면 안도하는 사람들의 환상을 칼 슈미트는 깨어버린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도덕은 선악의 구분에서 기준을 얻고, 미학은 미추의 구분에서 기준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정치에 적합한 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 행위와 정치적 동기가 환원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치적 기준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

 

슈미트는 고전 정치사상의 중심 주제인 우정freindship의 본질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우정이란 오로지 공유된 증오에서 나온다는 인상을 가질 뿐이다.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공공의 적이며 사적인 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갖고 있는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슈미트에게 있어 한 집단은 적을 갖는 수준이 되어야만 하나의 정치체인 것이다.

 

이처럼 적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내적 자아를 정의하는 첫 단계라고 그는 믿고 있다. "네 적이 누구인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며 또한 더 간결한 표현으로는 "구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적과 구별하는 행위가 정치의 핵심이라면 정치는 잠재적 갈등의 위협을 늘 수반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전쟁 가능성을 내재한다. 비단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치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도덕, 종교, 경제, 예술 각 분야에서도 이런 정치성을 지닌다고 본다. 소박하게 말해서 적대감은 모든 인간이 모든 생활에서 갖는 본질적 요소다. "인간의 전()생애는 일종이 투쟁이며, 모든 인간은 상징적인 의미로 보면 모두 전사(戰士)"라고 슈미트는 말한다. 따라서 전쟁이 없는 세계는 정치가 부재 하는 세계다. 정치가 없는 세계는 적의(敵意)가 부재 하는 세계이며, 적의가 없는 세계는 인간이 부재 하는 세계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정치적 적은 누구인가? 공격 목표는 근대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국가를, 법의 지배 아래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타협을 촉진하고 차이를 해소하는 중립 기관으로 본다. 슈미트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이상인 도덕적으로 보편적이고 평화로운 세계질서는 최고권자의 자의적 의사결정과 인간 집단 사이의 자연스런 적의(敵意)에 뚜렷이 대립하면서 발전했다고 본다.

 

슈미트는 '끊임없는 토론'을 자유주의의 전형이라고 본다. 의회중심의 정치제도란 끝없는 토론만 조장하고 결국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문제점은, 적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결단을 두려워한 데 있다.

 

정치에 있어 최고권자의 결단은 비록 민주주의 원칙 위에 세워졌다고 할지라도 늘 최고의 권한을 주어야 국가가 수호된다고 본다. 슈미트는 그의 '독재론'에서, 온건하고 한시적인 독재를 수용하지 않는 태도가 곧 절대주의 독재를 낳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독재 개념의 정당성을 복원하려는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시적인 독재가 도리어 절차와 엘리트를 통한 간접 통치하는 자유주의적 의회주의보다 민주주의 지배원칙에 훨씬 더 잘 합치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헌법조차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칼 슈미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그 배후에는 가톨릭적 기초가 있었다. 즉 인간의 원죄에 의해 단절한 영원한 신의 법이 신께서 내리신 성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매개자로서 선정하심으로서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신의 나라와 현세를 매개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의 단절의 화해는 신의 은총을 통해서 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이룩한 매개를 통해서 주어진다. 이것은 아래에서가 아닌, 위로부터 오신 신적 성품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간직하고 있는 인간적인 성품이라는 두 개의 성품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매개의 주체인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가시적 가톨릭 교회는 그 정치가 바로 '대표'의 원리로 틀이 잡혀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은총이,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별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만 다만 간접적으로 전달된다고 슈미트는 보고 있는 것이다.

 

신의 은총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구체화 되고 가톨릭 교회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부여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대표'의 원리란, 교황이 그리스도의 몸의 대표자로서 초월적인 세계를 대표해서 지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인 교황이 개인 인격이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교황'이라는 관직과 교황의 인격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 위엄, 명예는 관직과 관련 있는 것이지 결코 개인의 인격성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졌던 것처럼 교회도 육체를 가져야만 한다. 신이 인간으로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가시적 교회도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성한 것이 세속에 구현되는 과정은 오직 '대표 원리' 뿐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이 최고 대표자가 내리는 '결단'이 곧 실제적으로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최고 권위를 나타내는 법의 집행이라고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표'란 결코 '대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대리'에 머문다면 최종 주권은 여전히 대리권을 넘겨진 다수에게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부여한 권위와 위엄과 영광을 획득할 수 없다고 슈미트는 보고 있다.

 

형상은 질료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상이란 질료가 미처 발현하지 못한 이상적인 품격을 고유하게 홀로 지니고 있어야 된다고 보고 있다. 진정한 법은 윤리가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와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톨릭의 정치형태를 그는 그대로 정치형태에다 기입한다. 국가의 교회화이다. 신학에서의 신의 탐구가 세속 정치에서의 주권자의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에게 부여해야 되는 '비상대권 非常大權' 이론이다.

 

비상대권의 정당성은 국민적 호응도에 근거해서 정당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적 정당성에 근거한다. 비상대권 앞에서는 헌법도 정지된다. 국가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의 권위 있는 법이 도리어 국가를 만든다고 보고 있다. 법은 국가의 형상이자 목적이다.

 

개인의 자유가 국가 권력의 한계를 줄 수 없다. 개인은 국가를 통한 이상적인 법에 복종해야 한다. 이는 곧 최고통수권자의 결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타락한 개인은 그 자체로는 원죄만을 발산하는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슈미트가 민주주의 자체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국민적 동일성' 때문이다. 즉 통치자와 통치 받는 자는 '국민적 일반의지에 의한 국민적 동일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국민적 동일성을 거부하는 자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자격이 박탈당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결국 칼 슈미트의 정치형태는, 국민적 동일성을 표방하는 대표자의 결단에 의해 실시되어야 하고 이런 '주권적 독재'가 허용되는 민주주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자가 없는 동일성은 현실적 동일성이 아니라고 그는 보고 있다.

 

 

평 가

 

1789년 평등박애자유를 부르짖고 일으킨 프랑스 혁명 이후, 사람들은 당연히 개인의 권리가 천부적 권리인양 여기고 있다. 개인적 가치가 하늘을 찌르는 듯 옹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현실적으로 개인적 자유가 처절하게 소유의 힘 앞에서 밟힌다는 이 암담한 현실을 변명해 보려는 조치에 불과하다.

 

돈 앞에서 개인적인 양심이나 신앙적 결단은 무용지물이다. 술 문화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이나 공무원 채용 면접시험에서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자결 행위에 해당된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강단에서 복음을 마음껏 전하고 싶어도 같은 노회에 속한 다른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를 눈치 봐야 하는 그런 처지에 목사들이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부단히 개인적인 신앙적 자유를 정치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비신앙인의 태도를 타락한 세상 탓으로 돌리고 싶은 비겁한 본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의 그리고 있는 이상(理想)과 현실의 괴리는 자연적으로 교회 안에서 위대한 '신의 사자'를 찾게 마련이다. "당신의 결단에 저의 운명을 맡겼으니 제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소서"라고 말이다.

 

교회가 이럴 때 영업이 되고 유지가 된다. 목사는 교인들로부터 '교주'되기를 강요받는다. 목사가 철저하게 교주다운 면모를 보일 때만 교인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다. 이로서 개신교는 없고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되어간다. 교회 분위기는 한 사람의 명령자와 다수의 복종자의 관계로 거미줄처럼 장식된다.

 

만약에 여기에 불만을 품게 되면, 적으로 분류라는 기준에 걸려 조직 내에서 거절된다. 학교, 병원, 조직폭력배, 정당, 교회, 노회, 군대, 중소 기업, 대기업, 상점 등등 그 어느 조직 안에서 똑같은 일들이 지금도 벌어진다.

 

신 개념 자체가 오늘날에는 부풀어진 풍선 같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덩그러니 그냥 공중을 떠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남는 것은 여전히 몸뚱아리 하나뿐이다.

 

'내 몸을 위한 정치력 발휘',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실다운 현실이 아닐까? 가짜 십자가를 신봉하고 있다면 말이다.

2005212일 이 근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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