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Dönitz, 1891년 9월 16일 ~ 1980년 12월 24일 (향년 만 89세)
독일의 제독(최종 계급 해군 원수).
제3제국의 마지막 국가원수.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 카를 되니츠
목차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 뜻밖에도 2대 대통령으로 히틀러에게 지목되었다. 그후 독일의 항복과정을 마무리한 인물. 2차 대전동안 자신의 체험담 등등을 《10년 20일》이라는 책으로 써서 출판했는데, 2차대전 동안 잠수함전과 독일 해군의 실체 등에 대해서 잘 알리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목인 《10년 20일》은 히틀러 밑에서의 10년, 그리고 히틀러 사후 2대 대통령(Reichspräsident. 총통인 Führer가 아니다.)으로서 보낸 20일.
2 10년전
1917년 U-39 당직사관 근무중인 되니츠 중위
제1차 세계대전 때 잠수함의 함장[2]까지 진급, 독일 해군 사상 최초의 잠수함간 연합작전을 수행하다가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종전후에는 순양함 함장도 역임하다가 재군비 선언 이후로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의 재건에 힘을 썼다.
되니츠가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출소하여 귀향하였을 때 해군본부에서는 그의 재복무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때 그는 인사처장에게 "우리가 다시 잠수함을 보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는데, 이는 바이마르 독일의 잠수함 보유를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장차 자유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인사처장은 "상황이 항상 이렇지는 않을 것이며, 몇 년 내에 잠수함대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고, 이는 되니츠가 다시 해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되니츠는 수상함 관리 보직을 전전하며 경력을 쌓았는데, 훗날 저술한 회고록에서도 이야기하듯 '해군 장교는 잠수함과 수상함 양면에 걸쳐 정통해야 한다'는 그의 보직 이념은 바로 이 때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수함 부대장으로 임명될 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되니츠가 지휘하는 순양함 엠덴에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동료 장교인 군터 뤼첸스 대령이 방문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훗날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기함 비스마르크와 함께 전몰하게 되는 뤼첸스 또한 당시 순양함 카를스루헤의 지휘관으로서 2차 함장 보직을 수행중이었는데, 뤼첸스는 본래 엠덴이 취항하기로 되어 있던 동방 항로를 자신이 맡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항해는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카를 폰 뮐러 대령 지휘하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하다 격침된 수훈함인 순양함 엠덴의 자취를 따르는 것으로서 되니츠에게 있어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임무였다. 이 탓에 오랜 지기였던 두 사람이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는 와중에 훗날 되니츠의 감상대로 '놀랍게도' 총사령관이 끼어들어 말을 멈추게 했고, 되니츠와 뤼첸스는 졸지에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보직을 맡았다. 뤼첸스는 빌헬름스하펜의 북부 전단 사령부 참모로 전출되었다가 베를린의 해군본부 인사처장을 맡았고, 되니츠는 5일간의 대기발령 기간을 가진 후 베디겐 전단장에 취임하여 다시 잠수함 요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보직이동은 바로 독일의 U보트 보유를 재허용한 영국-독일 해군조약 타결에 의한 것으로, 전간기 초입부터 되니츠가 바라 마지않던 잠수함대 재건이 바야흐로 목전에 박도하였음을 알리는, 작지만 큰 사건이었다.
3 10년
3.1 잠수함대 사령관
독일이 재무장을 하고 해군을 재건하던 시기는 타국의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의 수상함 전력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고, 영국 해군이 잠수함은 한물 간 무기라고 얕보는 통에 당시 독일 해군의 전력중 영국에 대항해볼 만한 수단은 유보트였다. 전쟁 발발후에는 대형함들을 건설하는게 더욱 힘들어지는 까닭에, 전쟁 발발후 되니츠의 예언대로 유보트가 실제로 주전력이 된다. 그는 유보트가 300척만 있으면 전쟁을 이길수 있다고 단언하고, 유보트 생산에 박차를 가할것을 요구했는데, 경험과 연구에 의해 유보트가 세 척이 있다면 한 척은 실전에 투입되고, 다른 한 척은 훈련, 다른 한 척은 수리와 보급을 해야하기 때문에 300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100척의 유보트가 실전에 투입가능한 상황을 이야기 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다. 그 때문에 그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은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유보트의 생산과 배치를 관리 감독하는 지위에 가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서구 군사학계에 퍼져있던 잠수함 무용론, 독일 해군 지휘부가 생각하는 전함 위주의 해군 구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인데다, 히틀러조차 영국과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 마당에 조만간 영국과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 독일 해군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으므로 해군 총사령부는 그를 유보트 함대 지휘관에 유임시켰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보트는 꽤나 고급장비였다. 척당 300만달러정도였는데, 이것은 60대의 4호전차와 맞먹는가격이다. 유보트 300척이면 약 18000대의 4호전차 가격이다... 독일이 만약 개전전까지 300척의 유보트를 마련했다면.... 폴란드 육군에게 베를린이 점령당했을지도...
때문에 유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은 실제로는 북대서양에서 가용 유보트가 평균 7척, 심지어는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몇 척 안되는 유보트가 하마터면 영국을 거의 거덜낼 뻔했으니, 되니츠가 원했던대로 그 시기에 대서양을 100척의 유보트가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면 영국은 전면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유보트의 종횡무진한 활약에 세간에서는 윈스턴 처칠과 되니츠의 싸움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숫자만큼의 유보트가 실제로 배치된 것은 이미 전황이 기울어 어떻게 해볼수도 없게된 1943년 근처로, 그나마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히틀러와 직접 담판을 벌여서 얻어낸 성과이다. 독일 해군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알베르트 슈페어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이는 슈페어의 자서전에서 엄밀히 말해 되니츠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의 자서전에서는 제3제국의 헌법상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기록했기 때문.
문제는 이때는 이미 영국 해군은 당할 대로 당한 나머지 유보트 탐지, 격침 전술의 달인이 되어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로는 역시 미국의 참전으로, 가장 급한때에 적절한 구축함 50척 지원부터 시작해서 열흘에 한 척씩 뽑혀나오는 수송선, 선단호위에 필요한 구축함과 항공기, 대잠수함 소형항모등 질과 양에서 모두 무지막지한 지원이 영국에게 가는 바람에(…) 1943년 5월이후 유보트는 변변찮은 전과도 만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유보트를 약화시키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과 미국이 대잠수함 소형항공모함을 100척이나 양산해서 바다를 도배했으며, 상당한 양의 항공전력이 대서양에 발이 묶인것을 생각한다면 1943년 이후에도 유보트는 밥값을 어떻게든 한 셈. 실제로 되니츠도 전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출격은 지속해야 한다. 유보트가 출격을 안하면 대서양에 깔린 해군 전력과 항공 전력이 몽땅 독일로 몰려들 것이다란 언급을 한 바 있다.
3.2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비스마르크 격침 등 해군 운용에 대해 히틀러와 갈등을 빚어 해군 총사령관에서 스스로 사임을 한 후 그의 뒤를 이어서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레더 제독은 총사령관 후보로 수상전 전문가인 롤프 칼스 제독[3]과 되니츠 제독 두 사람을 추천했고 히틀러의 선택은 되니츠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해군 대장(Admiral) 계급이었던 되니츠는 상급대장(Generaladmiral)을 건너뛰어 곧바로 원수(Großadmiral)로 진급하였다.
히틀러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인 그의 입김으로 대양함대를 기어이 해체하려 했지만, 정작 신임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는 면밀히 검토 후, 자료를 들이대며 대형함들을 전부 해체해봤자 나오는 자원도 거의 없고, 그래봤자 돈과 인력만 낭비한다. 그러느니 그냥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연합군은 이들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결국 대형함들을 지켜낸다. 실제로 이 말이 맞아서 대전당시 노르웨이에 배치된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인 티르피츠는 출항한다는 소문만으로 영국-소련간의 북극항로의 수송함대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4]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과 별개로 되니츠 제독이 그 이후에도 제일 관심을 쏟은 함선은 계속 그래왔듯이 그 이후에도 유보트였다.
레더를 위시한 보수적인, 나치즘과는 거리가 먼 해군에서 나치즘에 대해 이해를 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인지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히틀러는 자살하기 전 정치적 유언으로 자신의 직위인 총통을 다시 나누어서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킨 후 되니츠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총리로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지명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뒤따라 자살하여 사실상 되니츠의 단독정부였다.
4 20일
4.1 대통령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업무 종결 후 영국 육군에게 체포되는 되니츠. 뒤따르는 두 사람은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장군,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그의 자서전 《10년 20일》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당시 사실상 권력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를 불러 히틀러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되니츠에게는 수도 베를린에서 힘러의 무력인 SS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힘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이기 전에 책상위에 권총을 꺼내두고 서류로 가려둘 정도로 담판을 앞두고 매우 긴장했으나, 유언장을 읽은 힘러는 나치식 경례와 함께 "각하 밑에서 차석이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라 외치며 그냥 버로우했다고 한다. 되니츠는 "그건 상관없다."며 허락했지만, 힘러는 곧바로 신분을 위장하고 도망치다 영국 육군에 체포당해 연행되다 자살한다.[5]
자서전에 따르면, 되니츠 스스로가 히틀러가 그를 특출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야 히틀러는 자신이 죽은 후 최후까지 독일군을 싸우게 할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영화 《몰락》에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듯 마지막에 이르러 권력의 최측근들 및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 수뇌부에 극도의 불신을 갖고 있던 히틀러이고 보면,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임무에 충실했던 되니츠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만 하다. 육군은 일단 예전부터 히틀러와 그닥 좋은 관계라고 하기 힘들었고, 공군은 헤르만 괴링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신뢰를 잃었으나, 해군은 일단 되니츠 등 몇몇 제독들이 나치 당에 입당하기는 했으나 육공군에 비해 정치적인 힘이 미약했고 해군 수뇌부 사이에서 군이 정치에 크게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점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국방군 세력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기존의 수뇌부들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인이었던 되니츠는 자멸적인 최후의 항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므로,[6] 총통의 권한을 이어받은 후 동부 전선에서 민간인과 병력을 철수시키고 소련군이 아닌 영미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대전중 독일이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한 소련군의 보복으로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 장군 대신 사석에서 대화 중 자신과 전략적 견해가 비슷한 것을 알게 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을 불러들여 역할을 맡기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육군원수 페도르 폰 보크 장군은 되니츠와 연락이 닿았지만, 가족과 함께 전용차 편으로 이동 중 연합군 항공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협상 초기에, 그는 협상가들로 주 전장을 이끈 육군 장군들이 아닌 해군 제독들을 뽑아 연합군에 내보냈는데, 이는 일치감치 해상에서의 승패가 결론이 난 데다가 협상의 주역이 될 연합군 장군들이 주로 지상군 및 항공 세력과 싸우느라 해군에 대해 적대감이 덜해져 있어 제독들이 찾아가면 보다 협상 분위기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제독들 중 대표 격인 인물로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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