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벨기에 출생 영국의[1] 전설적인 할리우드 배우이면서 에미상 ∙ 그래미 어워드 ∙ 아카데미상 ∙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이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이며,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여배우였다.[2]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3]
또한 말년에는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가 자선활동과 기부를 꾸준히 하며 빈곤한 이웃들을 구제하는 등 전 세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제2의 삶을 살았으며, 사망한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의 대표 미녀로 현재까지도 거론되고 있으며, 말론 브란도, 그레고리 펙,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자주 꼽힌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이며,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여배우였다.[2]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3]
또한 말년에는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가 자선활동과 기부를 꾸준히 하며 빈곤한 이웃들을 구제하는 등 전 세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제2의 삶을 살았으며, 사망한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의 대표 미녀로 현재까지도 거론되고 있으며, 말론 브란도, 그레고리 펙,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자주 꼽힌다.
2. 상세
(뉴욕 유니세프 본사 앞에는 헵번의 업적과 봉사, 희생 정신을 기린 "The Spirit of Audrey"라는 이름의 동상이 서 있다.)
오드리 헵번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으며,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은퇴 이후에는 유니세프에서 난민 구호활동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 인해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다. 캐서린 헵번과 베티 데이비스에 이어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되었다.[4]
거대한 미국 연예계에 극소수 밖에 없는 EGOT(에미상(Emmy, TV), 그래미 어워드(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상(Academy-Oscar, 영화), 토니상(Tony, 무대공연)을 모두 수상한 배우,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 여성 배우 중 한명이다.
정식 성명은 오드리 캐슬린 헵번(Audrey Kathleen Hepburn). 세간에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원래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이지만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1939년에 성에 헵번(Hepburn)을 붙이면서 본인도 성을 헵번-러스턴(Hepburn-Ruston)[5] 으로 개명했으며, 1948년 모델과 배우 활동을 시작하며 성에서 '러스턴'을 빼게 됐다.[6]
오드리 헵번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으며,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은퇴 이후에는 유니세프에서 난민 구호활동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 인해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다. 캐서린 헵번과 베티 데이비스에 이어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되었다.[4]
거대한 미국 연예계에 극소수 밖에 없는 EGOT(에미상(Emmy, TV), 그래미 어워드(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상(Academy-Oscar, 영화), 토니상(Tony, 무대공연)을 모두 수상한 배우,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 여성 배우 중 한명이다.
정식 성명은 오드리 캐슬린 헵번(Audrey Kathleen Hepburn). 세간에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원래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이지만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1939년에 성에 헵번(Hepburn)을 붙이면서 본인도 성을 헵번-러스턴(Hepburn-Ruston)[5] 으로 개명했으며, 1948년 모델과 배우 활동을 시작하며 성에서 '러스턴'을 빼게 됐다.[6]
2.1. 시대를 초월한 유행, 아름다움의 화신(化身)
당대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초상 사진은 21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다.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으라면 1위를 다툴 정도[9]로 눈부신 외모를 가졌다. 한국에서도 특유의 아름다움과 패션센스 등으로 인기가 매우 많고 카페나 미용실에만 가도 사진이 걸려있는 곳이 매우 많다. 국내 방송을 보면 종종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실내 장식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유행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헵번 스타일은 단순히, 의상, 화장 등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의 행동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온 커피잔을 들 때 잔 받침을 같이 든다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창가에 앉아 Moon River를 부르는 모습 등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는 극히 어려우면서도 별다를 게 없는 행동이지만, 직접 보면 뭔가 분위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10], 긴 장갑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영화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특히 사랑받은 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이후 오드리 헵번이 대중문화에 워낙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보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알게 모르게 정말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배우다.
이렇듯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콤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90년대에 EBS에서 방송된 세계의 명배우 다큐멘터리에서 생전 오드리 헵번과 절친했던 친구가 밝힌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원래 명칭은 '세기의 여성들 - 오드리 헵번 편'.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다고 한다. 이 초콜릿 사랑에는 그의 자식들이 이야기한 비화가 있다. 헵번은 어린 시절 친가가 있던 영국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확전 조짐을 보이자 네덜란드의 외가로 피신했는데, 이후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 가혹한 지배와 탄압 하에 놓이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까지 빠지고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11] 거의 죽기 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생긴 그윽한 다크서클과 마른 몸매가 그의 미모를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는 상징이 되었다.
3. 생애
3.1. 유년기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1889-1980)[12]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Ella barones van Heemstra, 1900-1984)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여성과 첫 결혼을 했다 이혼한 전력이 있었다. 어머니 엘라 또한 1919년에 영국계 네덜란드 귀족인 구스타프 아돌프 크발레스 판어포드(Hendrik Gustaaf Adolf Quarles van Ufford)와 결혼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거주하며 아들 둘을 낳았으나 1925년에 이혼을 했다. 이 두 이혼남녀는 사랑에 빠져 1926년 9월 24일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조지프는 영국의 '매클레인 왓슨 앤 컴퍼니' 사에서 일하면서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1929년에 딸 오드리를 낳았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 조지프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 엘라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1939년 6월 24일자로 정식으로 이혼한다.
별거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한다.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 조지프의 경우 열렬하게 활동하였고, 어머니도 파시즘에 동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13]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이런 결정에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보다는,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을 고수해 큰 피해 없이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낙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에도 영국 내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아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다.[14] 이때부터는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러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해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이후에도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한다.
이렇게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다. 아른험은 귀족 가문인 외가의 영지가 위치한 곳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15]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진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네덜란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석권해버렸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각료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Niederlande)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영국식 성인 '헵번'을 쓰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을 따라 '에다 판헤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지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외할아버지가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갖은 수난에 시달리게 된다. 친척 일부는 독일에 강제징용당했으며, 큰이모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다. 거기에 각종 자산을 압수, 징발당했고, 영지의 저택에서도 퇴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다. 아직 오드리는 어린 나이여서 적극적인 활동은 무리였으나,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는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들이 격추되고 연합군 승무원들이 불시착하는 일이 잦았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들에게 은신처, 의복, 식량을 제공해주고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영불해협이나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국경으로 인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드리의 외가는 이렇게 피신하는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해오자 오드리의 외가는 점점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는 다리 주변 아른험 시 중심과, 서쪽의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16] 하지만 더 심각한 위기가 마켓 가든 작전 이후에 찾아왔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17]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외가는 이 재난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과 외가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18],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히 버텼다. 오드리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 뒤에도 오드리 헵번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외가가 마켓 가든 작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아른험 주변 영지와 자산들이 쑥대밭이 되면서,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인과 집안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도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후일 〈전쟁과 평화〉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도 처음엔 매우 꺼렸으나 남편인 멜 버러가 간청해서 함께 출연한 것.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19],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별거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한다.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 조지프의 경우 열렬하게 활동하였고, 어머니도 파시즘에 동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13]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이런 결정에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보다는,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을 고수해 큰 피해 없이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낙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에도 영국 내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아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다.[14] 이때부터는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러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해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이후에도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한다.
이렇게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다. 아른험은 귀족 가문인 외가의 영지가 위치한 곳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15]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진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네덜란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석권해버렸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각료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Niederlande)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영국식 성인 '헵번'을 쓰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을 따라 '에다 판헤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지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외할아버지가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갖은 수난에 시달리게 된다. 친척 일부는 독일에 강제징용당했으며, 큰이모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다. 거기에 각종 자산을 압수, 징발당했고, 영지의 저택에서도 퇴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다. 아직 오드리는 어린 나이여서 적극적인 활동은 무리였으나,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는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들이 격추되고 연합군 승무원들이 불시착하는 일이 잦았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들에게 은신처, 의복, 식량을 제공해주고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영불해협이나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국경으로 인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드리의 외가는 이렇게 피신하는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해오자 오드리의 외가는 점점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는 다리 주변 아른험 시 중심과, 서쪽의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16] 하지만 더 심각한 위기가 마켓 가든 작전 이후에 찾아왔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17]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외가는 이 재난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과 외가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18],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히 버텼다. 오드리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 뒤에도 오드리 헵번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외가가 마켓 가든 작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아른험 주변 영지와 자산들이 쑥대밭이 되면서,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인과 집안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도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후일 〈전쟁과 평화〉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도 처음엔 매우 꺼렸으나 남편인 멜 버러가 간청해서 함께 출연한 것.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19],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3.2.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상류층 여성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카프라 감독[20] 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21]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22]라면서 자신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하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혀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23].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하여 매출이 급격히 늘어 큰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 단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영화,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1957년,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24]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헵번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59년에는 파계에서 수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60년에는 서부극인 용서받지 못한 자[25]에서는 인디안족 여인으로 나온다.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26]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다만 헵번은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너무 달라서 이 영화를 찍기 싫어했다고 한다. 원래 이 배역 자체가 마릴린 먼로를 구상하고 만든 캐릭터였다. 원작자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 먼로와 친했는데 먼로의 화려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에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썼었다. 영화 캐스팅도 커포티는 당연히 마릴린 먼로를 원했지만 그 당시 연기적 변화를 원했던 먼로는 콜걸 캐릭터라는 얘기를 듣고 거절을 했고 영화사 측에서도 자주 지각을 하고 스캔들 메이커인 먼로를 감당못해 출연이 불발되어 헵번이 배역에 캐스팅 됐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헵번은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27]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28]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헵번은 평생 20번의 배역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곁에(원제: 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29]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퓨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퓨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카프라 감독[20] 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21]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22]라면서 자신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하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혀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23].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하여 매출이 급격히 늘어 큰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 단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영화,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1957년,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24]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헵번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59년에는 파계에서 수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60년에는 서부극인 용서받지 못한 자[25]에서는 인디안족 여인으로 나온다.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26]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다만 헵번은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너무 달라서 이 영화를 찍기 싫어했다고 한다. 원래 이 배역 자체가 마릴린 먼로를 구상하고 만든 캐릭터였다. 원작자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 먼로와 친했는데 먼로의 화려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에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썼었다. 영화 캐스팅도 커포티는 당연히 마릴린 먼로를 원했지만 그 당시 연기적 변화를 원했던 먼로는 콜걸 캐릭터라는 얘기를 듣고 거절을 했고 영화사 측에서도 자주 지각을 하고 스캔들 메이커인 먼로를 감당못해 출연이 불발되어 헵번이 배역에 캐스팅 됐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헵번은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27]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28]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헵번은 평생 20번의 배역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곁에(원제: 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29]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퓨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퓨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3.3. 사생활
슬프게도 사생활은 타 할리우드 스타들과 비슷하게 암울했다.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로마의 휴일을 찍으면서 스케줄이 바빠지자 헤어졌다. 당시 헵번은 로마의 휴일을 찍는 한편 약혼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자신이 직업과 결혼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을지를 엄청 고민했다고한다.[30] 사브리나 영화 촬영 도중 주연인 윌리엄 홀든과 연애를 했다가 영화 개봉 후 헤어진다.[31] 이후 헵번은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 (Mel Ferrer)[32]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헵번을 구워 삶았다. 결국 1954년 멜 퍼러는 세 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 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봐도 헵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최전성기의 탑 여배우가 한물간데다가 돈도 별로 없고 사회적 평판도 바닥이었으며 사생활도 3번이나 이혼했을 정도로 엉망인 배우랑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33] 등 다른 거장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인 멜 퍼러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러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헵번이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34] 결혼 생활 말년에는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퍼러와 이혼한다. 이후 헵번은 멜 퍼러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러는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5번째로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헵번과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재혼하는데,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 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35] 그러나 전성기 시절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헵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36] 결국, 오드리와 결혼한지 13년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는 도티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결혼 기간 동안 20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거주했고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가족의 초상' 캐스팅 제안도 들어왔으나 부도덕한 역이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구호 활동시기에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했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스포츠카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37]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밥은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밥을 안 해 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3.4. 은퇴 이후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 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38]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이러한 행보를 기리고자, 이후 유니세프에서 이름을 딴 오드리 헵번 인도주의상(Audrey Hepburn Humanitarian Award)을 케이티 페리에게 수여하기도 했다.[39] 또한 유니세프에서 주최한 대니 케이[40] 국제어린이(예술)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된 결정적 계기도 대니 케이가 아닌 오드리 헵번이었다.[41]
이런 모습 덕분에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고 욕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본전도 못건진 채 배로 비난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헵번이 어릴 때 집을 나갔으니 영향을 받을 겨를도 없었으며, 오드리 헵번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위에도 여러번 서술하듯, 네덜란드로 갔던 어렸을 적 독일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식량을 죄다 수탈해가는 바람에 튤립 구근을 캐먹고 벌레도 먹고 쓰레기까지 뒤져먹을 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연합군과 유니세프가 지원해 준 연유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기간 고향 네덜란드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 밝혀졌다.# 이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연합군 병사를 돕는 것이 위험했으나 스릴 넘치는 것이었다. 발각될 경우 전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던 만큼 공포감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3.5. 사망
이렇게 은퇴 이후에도 자선사업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3세.
Time Tested Beauty Tips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재산보다는 사람들이야말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이 사실을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손 끝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는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리라. |
오드리 헵번의 유언이라고 돌아다니는 이 시는 헵번이 좋아했던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로,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Sam_Levenson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서 아들 션 헵번은 오드리 헵번 어린이 기금(Audrey Hepburn Children's Fund)을 설립하여 전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서 아들 션 헵번은 오드리 헵번 어린이 기금(Audrey Hepburn Children's Fund)을 설립하여 전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4.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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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제19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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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1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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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7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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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26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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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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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제12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자인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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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제2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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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제7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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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제1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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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제18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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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22회 토니상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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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47회 골든글로브시상식 평생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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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제45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평생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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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국배우조합협회 평생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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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제65회 아카데미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5. 주요 출연작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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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은 매 역할마다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사브리나>를 찍을 때는 실제로 전문 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웠고 <하오의 연정>을 찍을 때는 첼로 연주를 배워서 직접 첼로를 연주했다. <파계>를 찍을 때는 실제로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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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호리호리한 몸매때문에 아담할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키가 170cm로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장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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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로 사슴을 기른바 있다. 전 남편인 멜 페러가 감독한 영화 그린 맨션 촬영때 만난 사슴인데, 이름은 핍핀이었다고. 간혹 트위터나 웹상에서 사슴과 함께 있는 흑백사진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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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색(cyan)을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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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7일에 방영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헵번의 열렬한 팬이 등장했다. 심지어 이 양반은 스스로 헵번의 피규어까지 만드는 흠좀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팬의 블로그 또한 이 팬은 2015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MBC에서 방송된 능력자들이라는 특집프로그램에도 한국인 중 오드리 헵번 덕후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둘째 아들과의 SNS 인맥을 과시함과 동시에 오드리 헵번의 첫째 아들이 직접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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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3월 8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오드리 헵번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헵번의 둘째 아들로 오드리 헵번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루카 도티가 주관하여 헵번이 출연한 영화의 소품과 의상, 집에서 쓰던 물품 등을 전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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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는 헵번의 모습이 2001년 우표에 담겨 발행된 적이 있는데, 헵번의 아들이 어머니가 담배를 피는 모습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발행 중단을 요청, 중단되었고 판매된 것들은 전량회수되어 소각처리했다. 당연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가장 최근 낙찰가가 한화로 6억 7,000만원 정도였다. 1,400만장을 발행했으며 당시 폐기를 담당한 직원이 30장 가량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는데 몇 장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잊을만 하면 경매에 나와주셔서 그 때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가시는 귀하신 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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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은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영화내내 옷차림이 수차례 바뀌냐(당시 어려운 상황이었던 우리나라에선 멋으로 옷을 여러 개 입는다는 건 매우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옷이 많아 저렇게 그때그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구나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이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으로 가게 된 하나의 계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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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 식문화를 비난하자 헵번은 "개고기? 전쟁 터지면 그보다 더한 것도 먹게 된다. 당신도 그 전쟁 경험 안 해봤냐?"라고 비판을 한 적도 있다.[43] 실제로 오드리 헵번은 어렸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숲에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고 전쟁터의 빈 집에서 남기고 간 소시지, 베이컨, 햄, 치즈,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같은 식재료들까지 닥치는데로 먹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그 식재료도 상하거나 곰팡이들이 생긴 썩은 것들이 많았지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그거라도 먹다가 복통과 설사로 인해 심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원래부터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먹을 게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종전 이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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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전사 건담 UC에서 오드리 번의 가명은 이 배우로부터 따왔다. 버나지가 이름이 뭐냐고 묻자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극장에 걸린 "가출한 공주"(로마의 휴일을 그대로 쓰면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적당히 이름을 바꾼 것. 포스터는 로마의 휴일 그대로다.)에서 배우들 이름을 보다가 "오드리 번"이라고 대답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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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애완동물 대전이 등장하면서 추가된 애완동물 조련사 npc 중 '오드리 번헵'[44]이라는 인물이 있다. 스톰윈드에서 애완동물 대전 입문 퀘스트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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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이 1999년 방영된 MBC 베스트극장 '굿바이, 오드리 헵번"에서 오드리 헵번을 닮은 배우 지망생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라네즈cf에서도 오드리 헵번으로 분장하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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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7일 헵번의 생전 애장품들이 경매에 나왔다. 그 중 '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본이 있었는데 할리우드 대본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인 632,750 파운드(9억 8,000만원)에 낙찰되어 신기록을 세웠다. 이날 경매에서 팔린 헵번의 소장품들 총 판매액은 약 71억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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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브리너와 절친이었다고 한다. 율 브리너의 두번째 부인인 도리스 클레이너와는 죽을때까지 돈독한 사이였다고 하며, 라 파지블에서 멀지 않은 옆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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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둘 다 1929년 생 동갑내기였고,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발레 수업을 받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 내 헵번의 거주지와 안네의 거주지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안네 프랑크 살아 생전에는 안네에 대한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헵번은 종전 이후 안네의 일기가 출판되자 여러모로 자신과 안네가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용을 거의 외우다 싶을 정도로 읽었다고 한다. 또한 안네의 존재를 알게되면서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라 결국 살아남았다는 의식에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아른험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때도 주변에서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안네의 일기가 영화화되었을 때 영화 제작진 측에서는 헵번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죄책감때문에 캐스팅을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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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과 함께 인도주의적인 가치를 설파한 스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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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정으로 팽현숙의 젊은 시절 모습이 헵번의 젊은 시절 모습과 똑닮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 국적의 아버지과 네덜란드 국적의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벨기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사이에서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난민 생활을 하고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다 보니 이들 국가에서 서로 헵번이 자기나라 배우라고 주장하는 촌극이 벌어지곤 한다.
활동은 또 미국에서 했으니 참 다양한 나라에서 생활한 인물인 셈. 물론, 굳이 따지면 헵번의 모국어부터가 영어고 전후에 영국에 정착해서 오랜 기간 거기서 살았으니, 오드리 헵번은 영국인이긴 하다.[2] 50년대 초의 클래식 시대에서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의 과도기적 시기, 그리고 60년대 말의 개방화된 시기가 전성기였는데, 즉슨 영미권의 대중문화가 어마어마한 변혁을 겪던 시기를 관통하던 기간동안 정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대중음악계와 비교를 해보자면 1950년대 초 프랭크 시나트라나 냇 킹 콜 등의 고전 스탠다드 팝 가수가 유행하던 시절 영화계에 등장하였으며, 1964년 비틀즈가 처음 등장하여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킬 때 오드리 헵번의 최전성기 후반부였고,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등으로 장르를 바꾸며 60년대 말 헤비메탈 밴드들이 나와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대중음악 체계가 형성되던 시기 헵번의 전성기가 끝났다. 공교롭게도 헵번이 활동을 줄이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대중문화계는 완전히 현대로 넘어와서 헵번은 클래식 시대와 과도기의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대중문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 중 하나.[3]
헵번과 비슷한 시기에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이스 켈리와 같은 또 다른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들이 활동하긴 했지만 당시의 임팩트와 위상, 그리고 현 세대에서 까지의 인지도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만큼 아이콘으로써의 영향력이 대단 하다는 얘기. 또한 헵번은 그 받기 힘들다던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까지 수여받았다.[4] 남배우 3위는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둘다 할리우드의 국민배우이자 1990년대에 사망했으며,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자선활동과 기부활동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것도 같다.[5]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헵번러스턴'이 된다.[6]
'헵번'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의 외증조할머니 쪽 성이었다. 상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모계 혈통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를 덧붙였다고 한다.[7] 윈스턴 처칠의 그 유명한 노려보는 사진 등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을 촬영한 대가다.[8] 이 사진은 나중에 기욤 뮈소의 작품 중 하나인 <파리의 아파트>의 표지에 나온다.[9] 상대는 보통 엘리자베스 테일러[10]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패셔너블한 LBD (리틀 블랙 드레스) 중 하나로 뽑힌다.[11]
이 시절 너무나도 배고파서 흙을 파헤치고 벌레까지 씹어먹고 그야말로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먹었다고 한다. 쓰레기도 뒤졌고 음식쓰레기라도 발견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으며 먹고 배탈나고 배가 아플 것을 잘 알고도 우선 배고픔부터 떨쳐버리고 싶었다고 진저리나듯이 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 문화권이 뭘 먹던 우리 잣대로 뭐라고 하지 좀 말자, 배고파보면 뭐든지 맛있다, 더불어 어디건 그 맛이라는 게 다르다고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개고기를 두고 한국을 욕하던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기도 했다.[12]
헵번의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도 부유한 영국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13] 아버지 조지프는 영국 파시스트 지도자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와 함께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식사를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평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윈스턴 처칠과 같이 통찰력 있는 인사들은 히틀러의 야심과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적어도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당시까지 꽤 많은 인사들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정책을 정상적인 입지 회복으로 여기고 어느 정도 양해해줬다.[14] 아버지 조지프는 이곳에서 1950년에 30년 연하의 여성과 세 번째 결혼을 하여 말년을 보냈다.[15]
외할아버지는 아른험 시장 재직 이후에도 네덜란드 속령이던 수리남 총독을 2차례(1921~24, 1925~28) 역임하는 등 법률가, 행정가로 두루 인정 받던 명사였다.[16] 일부에서는 이때 오드리 헵번이 부상병 치료를 자원했다가 전투에 휘말렸다는 이야기, 당시 부상병이던 007 시리즈그리고 망작 오! 인천의 감독 테렌스 영을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당장 테렌스 영은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한게 아니라, 영국군 근위 기갑사단 전차병으로 참전해서 강 건너 멀리 남쪽에 있었다.[17] 1944년 9월에 네덜란드 국철은 연합군의 진격에 호응해 독일군의 증원과 보급을 교란하고자 파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합군이 아른험 목전에서 멈추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보복으로 아직 점령 중이던 네덜란드 영내의 식료품 철도수송을 전면 금지했다. 이 때문에 서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는 농촌으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면서 이 지역 인구 450만 명이 이듬해 1945년 봄까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최소 22,000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8] 튤립 구근에는 독성이 있어 먹으면 인체에 해롭다.[19] 이를 의식해 라이프 지에서는 오드리 헵번을 커버 스토리에 올리면서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발레리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쓰기도 했다. 실제로 오드리의 첫 직업은 발레리나였던 것이다. 이는 우아하고 지적인 오드리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으며 빌리 와일더 감독은 《파계》에서 아프리카 로케이션때 틈만 나면 촬영장에서 책을 읽는 오드리를 보며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알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라고 했다.[20] 윌리엄 와일러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거장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무려 3번이나 거머쥔 위대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멋진 인생의 감독으로 유명하며, 이 감독의 페르소나가 바로 제임스 스튜어트이다.[21] 영화의 주요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단 하루라는 것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나온 아이디어.[22] 그레고리 펙은 할리우드에서 드문 진짜 대인배 인격자로 유명했다.[23] 이 당시 로마의 휴일이 프랑스에서는 아직 개봉전이어서 헵번은 무명인지라 지방시 외에는 의상협조에 나선 프랑스 업체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방시도 그녀가 아닌 캐서린 헵번인줄 알고 제안을 수락했다고. 처음에 그녀를 만난 지방시는 크게 실망해서 기성품이나 쓰라고 했었지만 그녀가 옷과 액서사리 등을 고르는 모습과 말하는 모습 등에서 빛남을 느꼈고, 생각이 180도 바뀌어서 이후 그녀의 모든 영화에 의상협찬을 하였다고 한다. 둘은 친구가 되었고, 오드리가 죽기 직전 미국에서 스위스로 가는 걸 도운 것도 지방시였다. 암말기여서 스위스까지의 여행을 버텨내지 못 할 거라는 진단이 나오자 전용기에 의료장비까지 구비해서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도왔다고 한다.[24] 헵번은 노래실력도 괜찮아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 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고 동화 오디오북도 녹음해서 이 오디오북으로 그래미를 받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훗날 명곡의 반열에 든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부르기도 했다.[25]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이 아니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는 여배우들 중 최고참인 릴리안 기쉬가 67세의 나이에 출연한다.[26]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전문으로 유명한 실제 브랜드이며, 영화에서 나온 그자리에서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직접 찾아가보면 영화를 추억하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은편.[27] 다만 줄리 앤드루스와 오드리 헵번은 사적으로는 매우 친했다고 줄리 앤드루스가 말했다. 줄리의 남편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이라 친하기도 했고, 줄리와 오드리는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가까운 곳에 두 집이 위치하여 자주 왕래하였다고 한다.[28] 이런 현상은 오드리 헵번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스타배우들도 겪는 일이다. 특정한 작품을 통해서 확연하게 인지도를 쌓은 배우는 해당 작품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로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져서 배우 자신의 연기능력과는 별개로 대중들이 기존의 특정한 이미지만을 배우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는 장편 영화 시리즈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문에 작품이 완결된 이후로도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인기의 절정에서 작품에서 하차하는 배우들도 많다. 해당 이미지를 지우기위해 기존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다양한 연기도전을 하게되는것은 덤이다.[29] 출세작 로마의 휴일, 그리고 영화배우로써 마지막 영화인 올웨이즈 각본을 쓴 것이 달턴 트럼보(1905~1976)이기도 하다. 다만 트럼보가 각본을 쓴 건 영화 원작인 조라고 불리던 사나이(A Guy Named Joe,1943년작) 각본을 쓴 것이며 올웨이즈는 이걸 리메이크한 것뿐이다. 올웨이스 각본을 쓴 건 제리 벨슨(1938~2001)이며 43년작 조라고 불리던 사나이에서 트럼보와 공동각본을 쓴 프레드릭 H. 브레넌(1901~1962)이 공동 각본 이름으로 올라와 있을 뿐이다.[30] 여담으로 이 약혼자인 제임스 핸슨은 이후 80년대에 기업매수인으로 이름을 날린 유명한 사업가였다. 헵번과 사귈 당시에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면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헨슨이 소속된 가족사업은 당시 기준으로 400만달러 규모의 엄청한 크기를 자랑했다. 헨슨은 1959년에 Geraldine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1960년부터 가족사업에서 독립하여 약 10년간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데에 집중하였고, 결국 80년대에와서는 주식시장을 들었다놨다하는 큰손으로 성장하게된다.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보수주의자로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주요 지지자이자 스폰서로 이름을 날리기도했고, 영국에서는 싱크탱크 Bruges Group에서 안티 유로 캠페인을 주창하는데에 있어서 창립자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4년 사망했다.[31] 영화 촬영 당시 험프리 보가트는 비록 그 자신도 엄청난 바람둥이였지만 유부남인 윌리엄 홀든이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불륜을 저지르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2] 연극 운디네와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같이 출연한 배우이다. 운디네의 남자주인공 및 전쟁과 평화 영화서 주인공격인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역을 맡았다.[33] 오드리 헵번은 생전 인상깊은 영화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꼽았는데, 킴 노박의 이중인격 연기가 특히 뛰어났다며 극찬했다. 히치콕 역시 오드리 헵번을 마음에 들어했으며 오드리를 위해 <판사를 위한 보석금은 없다>라는 영화를 준비했지만 오드리 헵번이 영화에 여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들어간다는 이유를 들어 출연을 고사했다. 히치콕은 해당 영화가 엎어져서 20만 달러의 손실을 겪었고 이후 TV 기술자들과 협업하며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그 유명한 사이코 였다.[34] 퍼러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션 하나밖에 없다.[35] 헵번은 이후로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한다.[36] 오드리와 결혼한 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을 때 파파라치들이 400명이 넘는 여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고 한다.[37] 재규어는 공돌이들이 빠른 차를 만드려고 노력하던 회사라, 거의 모든 모델이 스포츠카였지 승용차나 RV는 거의 없었다. 물론 XJ라는 고급 세단이 있었지만 이건 헵번이 노령기에 접어들어가던 1980년대에나 출시된 차종이다.[38] 1990년대 삼성의 기업 광고에서도 이에 착안하여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였습니다"라는 문구를 쓴 바 있다.[39] 케이티 페리는 2013년 12월에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 미국인으로써는 열 번째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는 대니 케이이고, 두 번째로 선정된 인물이 마틴 루터 킹의 친구이기도 했던 해리 벨라폰테이다. 1927년생이지만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빌보드 연말 차트 1위가 1956년에 신설되었는데 첫번째로 1위를 거머진 인물이 바로 벨라폰테이다. 그 또한 인권활동과 자선활동으로 굉장히 유명하다.[40] 이 분 역시 할리우드의 명배우였으며, 자선활동과 유니세프 최초의 홍보대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등급,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41] 이 대회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열렸는데 폐지년도를 보면 헵번이 사망한 뒤로는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2] 지금의 고타르 담배의 대명사 미국산 말보로 레드와 한국판 말보로 레드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독하다.[43] 다만, 브리지트 바르도는 1934년생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에는 당시 헵번보다 여동생 뻘 되는 어린이였고, 집안도 몹시 부유한 부잣집 가정에서 태어나는 등 헵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았다.[44] 영문명도 똑같은 Audrey Burnhep.[45] 참고로 현기증은 1950년대 당시에는 흥행보증수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히치콕이 만나 기대를 모았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폭망한 흥행 성적을 냈다. 물론 지금은 재평가되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헵번의 안목이 확실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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